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행동에 대한 반성
한동안 제가 본분을 이행할 때 늘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는 제 부주의 때문이었고, 어떤 문제는 원칙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조금 걱정했습니다. 리더나 파트너 자매가 저를 책망하며 제가 본분을 대충 이행한다고 말하지...
2022년 2월의 어느 날, 교회 리더가 저에게 우쥔 형제에 대한 평가서를 써 달라고 했을 때 저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요즘 교회가 정리 사역을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우쥔 형제에 대한 평가를 수집하는 건 그를 제명하려는 건가?’ 그 순간, 문득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2019년, 우쥔 형제는 문서 본분을 이행했고 저는 교회 문서 사역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파트너 형제와 사소한 일로 늘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예배 때면 저희에게 누가 옳은지 가려 달라고 했고, 저희는 그에게 일에 대해 집요하게 따지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공과를 배워야 한다고 교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후로도 여전했습니다. 그 기간에는 예배 때마다 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정상적으로 예배와 교제를 할 수가 없었고, 교회 생활과 교회 사역은 큰 교란을 받았습니다. 우쥔 형제는 진리를 구하지 않고 늘 시시비비를 가렸으며, 다른 사람의 지적과 도움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본분에서 교체되었습니다. 2021년이 되어 저는 몇몇 교회의 복음 사역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쥔 형제는 교회의 복음 전도자였는데, 복음 집사인 리청 형제를 몹시 감쌌습니다. 리청 형제는 실질적인 사역을 하지 않았고, 리더가 형제자매들에게 그에 대한 평가를 알아보자 우쥔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 리청 형제에 대해 안 좋게 말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그 후 리더가 원칙에 따라 리청 형제를 교체하자, 우쥔 형제는 이 일에 극도로 불만을 품고 반발심으로 고집을 부리며 버텼습니다. 복음 사역을 논의할 때면 그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몇 번은 예배 때 사람들이 다 모이지 않은 틈을 타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리더가 제 파트너인 형제하고만 사역을 논의하고 저는 찾지도 않으니, 저는 이미 교체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저는 그에게 이것은 일을 논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공과를 배우고 자신을 반성하는 데 집중하라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쥔 형제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변명하며 따지기까지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쥔 형제는 교체되었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별다른 인식이 없이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고 말썽을 피웠으며, 심지어 리더가 사역을 할 줄 모른다고 판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모습이 적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회상하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일이 닥쳤을 때 가치 없는 문제에 끝까지 매달리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큰 문제다. 명철한 사고를 가진 사람은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지만 황당한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한다. 그는 항상 남들이 그를 괴롭히고 의도적으로 골탕 먹이려 한다는 생각에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겠느냐? 그는 진리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친 일에서 가치 없는 문제에 끝까지 매달려 평판을 회복하고 체면을 다시 세우려 하며, 사람의 방법으로 이런 일을 대하려고 한다. 이것이 사람의 생명 진입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네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실행하면 영영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네가 도무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늘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고 하나님이 네게 배치해 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을 항상 진리가 아닌 사람의 방법으로 대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볼 때 너는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네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너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항상 가치 없는 문제를 파고들어 끝까지 매달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이렇게 보이는 것이다. …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외부의 사무적인 일을 하든 아니면 하나님 집 각 방면의 사역이나 업무와 관련된 본분을 이행하든, 항상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용기도 없고 하나님에게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그런 자는 불신파이며 믿지 않는 사람과 아무 차이가 없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과 일에 대해 집요하게 따지며 시시비비를 가리고 늘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도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며, 그 본질은 바로 불신파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에 비추어 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쥔 형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내가 그의 행적을 사실대로 쓰면 그는 출교될 가능성이 높아.’ 그에 대한 평가서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그가 과거에 저를 도와주었던 장면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은 지 2, 3년쯤 되었을 때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집안에 어려움까지 겹치자 저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 말씀을 보지도, 찬양을 부르지도 않았고,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 넘게 완전히 어둠 속에서 살았고, 심지어는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우쥔 형제는 제 상황을 알게 된 후 여러 차례 저를 찾아와 교제하며 붙들어 주었고, 매번 아주 늦게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무척 감동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저는 천천히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소극적이고 가장 고통스러울 때 저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우쥔 형제였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자, 제 마음속에 그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커졌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가 나를 도와주고 붙들어 준 것은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주기 위함이었는데, 이번에 내가 그에 대한 평가서를 쓰는 것은 그의 제명 여부와 관련되어 있어. 만약 우쥔 형제가 정말 제명되고 그가 나도 자신을 폭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나를 배은망덕하다고 할 텐데, 그럼 내가 무슨 낯으로 그를 보겠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는 양심을 속이고 이렇게 썼습니다. ‘최근에 우쥔 형제와 접촉한 적이 없고, 함께 예배를 두 번 드렸을 뿐이라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며칠 뒤, 저는 또 교회 리더에게서 우쥔 형제의 행적에 대해 써 달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리더가 계속해서 내게 우쥔 형제에 대한 평가서를 쓰라고 하는데, 내가 만약 그의 행적을 다 써내고 다른 형제자매들이 제공한 자료까지 더해진다면, 그가 불신파로 규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 교회에서 사람을 정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일관된 행적을 근거로 하는 것이니, 좋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도, 악한 사람을 봐주지도 않을 거야. 나는 교회의 정리 사역에 협력해서 그의 행적을 써 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를 감싸고 비호하는 게 된다고.’ 하지만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우쥔 형제가 정말 제명된다면, 나중에 무슨 낯으로 그를 보겠어?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내게 양심도 없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정말 배은망덕하다고 손가락질받게 될 텐데, 누가 감히 나와 함께 일하고 어울리려 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는 기회를 봐서 먼저 우쥔 형제와 교제해 보고 그 다음에 평가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단하게 몇 마디만 썼을 뿐 제 관점을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편지를 보낸 후, 저는 마음이 다소 불안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 이익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를 지키려는 것은 아닐지 우려되었습니다. 하지만 별일 아니고, 원칙을 크게 어기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의 의도는 형제자매를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순하게 생각했고,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리더가 일이 있어 제가 머무는 접대 가정에 왔다가 저를 보자마자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형제님, 우쥔 형제에 대한 평가서를 써 달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끄시는 거예요? 우리, 정직한 사람이 되어서 있는 그대로 상세히 쓸 수는 없는 건가요? 형제님 때문에 일이 너무 지체되잖아요.” 그런 질책을 받으니 저는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평가서를 한 달 넘게 끌었고,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비로소 제가 사실대로 평가서를 쓸 수 없는 이 문제의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제 상태에 딱 맞는 두 단락의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은 중국 전통문화 중에서 사람의 덕행을 평가하는 매우 전형적인 기준이다.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 덕행이 어떤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바로 그가 남에게 은혜를 입고 도움을 받은 후 보답하는지,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인지를 보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문화나 인류의 전통문화에서, 사람은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는 것을 덕행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여긴다. 은혜에 보답할 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배은망덕한 사람인 것이다. 그는 양심이 없는 사람, 사귈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며, 사람들에게 멸시와 혐오, 버림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이 은혜에 보답할 줄 안다면, 즉 남에게 은혜를 입거나 도움을 받은 후에 그것을 잊지 않고 힘닿는 데까지 자기 방식으로 상대에게 보답한다면, 양심과 인성을 갖춘 사람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이에게 이득을 얻고 도움을 받은 후 은혜에 보답하지 않거나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감사의 뜻을 표한 후 더는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면, 은혜를 베푼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느냐? ‘이 사람은 도와줄 가치가 없구나. 좋은 작자는 아닌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정말이지 양심도 인성도 없는 사람이야. 사귈 가치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가 앞으로 그런 부류의 사람을 또 만나면 도와주겠느냐? 적어도 도와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혹자는 난관에 부딪힐 때나 위험에 처할 때, 악인이 큰 도움을 주어 곤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악인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위해 뭐라도 해서 감사를 표하려고 한다. 그러나 악인이 그를 끌어들이고 이용해서 나쁜 일을 저지르고자 하는 상황에서 그 일을 거절하지 못하면 위험해진다. 이런 일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악인 친구를 도와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 친구로서 도리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나쁜 일을 저지르자니 양심과 이성에 어긋나는 것 같아 진퇴양난에 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문화 중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사상에 영향을 받아 속박되고 결박되고 통제된 것이다. 이 전통문화의 말들은 많은 경우에 사람의 양심을 대신하고, 또 정상적인 판단을 대신한다. 물론 사람의 정상적인 사유와 올바른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통문화의 관점이 그릇되었기에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그릇된 선택을 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생각과 관점, 도덕 준칙에 영향을 받았다. 설령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이 악인이나 나쁜 사람일지라도, 자신에게 악행이나 나쁜 짓을 시킬지라도 양심과 이성에 등 돌리면서까지 맹목적으로 순종하며 보은의 목적을 이루었으며, 이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수도 없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이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도덕 준칙에 영향을 받고 속박되며 통제되고 결박되어 무턱대고 그릇된 보은의 관점을 견지하고, 나아가 악인의 조력자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너희는 나의 이 교제를 통해 이러한 일들에 관해 분명히 알고, 이런 행동을 어리석은 충성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행동은 선을 넘는 처신으로, 어떤 분별도 없이 맹목적으로 보은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여론의 질책이나 사람들의 정죄가 두려워 억지로 자신의 일생을 바쳐 보은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는 것은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어리석은 행동이다. 전통문화 중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은 사람의 생각을 속박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삶에 불필요한 번뇌와 짐을 안겨 주며, 사람의 가정에 고통과 부담의 무게를 더한다. 숱한 사람이 은혜를 갚기 위해 크나큰 대가를 치렀다. 그들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을 사회적인 책임, 자신의 본분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평생 은혜를 갚는다. 그러면서 그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 이런 행동이 어리석고 황당하지 않으냐? 이는 사람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어떻게 말하든,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에 관한 말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기는 해도 진리 원칙에는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과는 완전히 어긋난다. 이는 그릇된 관점이자 행동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깨달았습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중국 전통 문화에서 사람의 품행이 좋은지 나쁜지를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이며, 바로 이러한 전통 문화 교육이 사람의 사상 관점을 왜곡시킨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은혜나 도움을 받은 뒤에 은혜에 보답할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양심 있고 인성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져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은망덕하고, 양심도 인성도 없는 사람으로 규정되고, 그 뒤로는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멸시를 받거나 심지어 버림받고 고립되기까지 합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철이 들면서부터 “은혜에 보답하라”,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와 같은 사상의 교육과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은혜와 도움을 받기만 하면 어떻게 그 사람에게 보답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고, 당장 보답할 능력이 없으면 나중에라도 기회를 찾아 갚아야 했습니다. 저는 오직 그렇게 해야만 양심 있고 인성 있으며, 인품이 고상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줄곧 이 덕행의 가르침을 처세의 준칙으로 삼고, 그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도록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스스로를 규범화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 매형이 저를 산골에서 도시 근교로 이사시켜 주고, 제가 가정을 이루는 것까지 도와주었을 때, 저는 그를 큰 은인으로 여겼고 그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않았습니다. 명절 때마다 저는 선물을 사서 그를 찾아뵈었고, 그래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래야만 양심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저는 여전히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이 덕행 기준에 따라 처신하고 일을 처리했습니다. 제가 가장 소극적이고 연약했을 때 우쥔 형제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교제하고 도와주고 붙들어 주자, 저는 그를 저의 은인으로 여겼습니다. 평가서를 써서 그를 폭로했다가 배은망덕하고 양심 없다는 나쁜 평판을 얻게 될까 두려워, 저는 그의 행적을 사실대로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거짓말을 하고 간사를 부리며, “최근에 우쥔 형제와 접촉한 적이 없고, 함께 예배를 두 번 드렸을 뿐이라 잘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핑계로 사실을 숨겼습니다. 리더가 다시 저에게 평가서를 쓰라고 했을 때도 저는 그저 중요하지 않은 내용 몇 가지만 간단히 썼을 뿐, 명확한 관점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우쥔 형제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과 일에 대해 집요하게 따지기 좋아하며, 교회 생활과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니, 마땅히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계속 미루고 양심을 속이며 행동했으니, 저는 정말 너무나 패역했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이런 전통 문화에 따라 살면 원칙을 어기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게 되어 하나님께 반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서둘러 진리를 구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구하는 중에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와 같은 도덕적 행위에 관한 말은 사람이 이 사회, 이 인류 가운데서 다해야 할 책임이 과연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는다. 그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속박하고 강요할 뿐, 사람이 원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사람에게 닥친 일이 어떤 상황, 어떤 배경에서 벌어진 것인지도 상관하지 않는다. 고대 중국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무척 많았다. 예를 들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된 거지를 어떤 집안에서 거두어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무예나 각종 지식을 가르쳐 준 다음 그가 성인이 되면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악행, 살인 등 그가 원치 않는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가 입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그가 그들 덕에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가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전통문화에 물들어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가 악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며 살수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 악을 행하고 남을 죽이는 짓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을 본다면, 주인의 지시대로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보은의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특히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중국 전통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사람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사상에 물들고 지배된다. 그가 일하는 방식과 방법, 그리고 의도와 출발점은 분명 이런 것들에 통제될 것이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이 집안에서 나를 구해 줬으니 나는 이 집안에 은혜를 입은 거야. 은혜에 보답해야지, 배은망덕하게 굴어서는 안 돼. 내 목숨은 저들이 구해 준 거니까 저들을 위해 바쳐야 해. 저들이 뭘 시키든 해야 한다고. 설령 그게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온 힘을 다해 보답해야 해. 이렇게 큰 은혜에 보답하지 않으면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겠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집안사람들이 살인이나 나쁜 일을 시킬 때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다. 그럼 그의 이런 행위와 행동,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 태도는 전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생각과 관점에 지배된 것 아니겠느냐? 그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의 준칙을 이행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사례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원칙이 없습니다.) 사실, 보은하는 사람에게도 원칙이 있다. 그의 원칙은 바로 은혜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보답해야 하며, 보답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정죄당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라는 말이 있는데, 하물며 이는 물 한 방울의 은혜가 아니라 목숨을 구해 준 은혜이니 더더욱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보은의 원칙이 무엇인지, 보은의 마지노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목숨을 그 집안사람들이 구해 주었으니, 마땅히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그들이 무엇을 시키든, 심지어 그것이 악을 행하고 남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그런 보은은 원칙과 선을 잃어버리고 악인의 앞잡이가 되는 행위로, 스스로를 망치는 짓이다. 그의 그런 보은 방식이 옳으냐? 당연히 옳지 않다. 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 집안사람들이 그를 구해 주고 살려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보은을 할 때도 원칙과 선이 있어야 하며, 적정선을 지켜야 한다. 그들이 목숨을 구해 줬다고 해도, 네가 사는 것은 악을 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악을 행하고 남을 죽이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사명이 될 수 없다. 또한, 은혜를 갚기 위해 살아서도 안 된다. 그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을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로 잘못 해석했는데, 이는 틀려도 단단히 틀린 것이다. 이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의 준칙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에 영향을 받아 오도된 것이냐, 아니면 올바른 실행의 원칙과 길을 얻었느냐? 말할 것도 없이 오도된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전통 문화의 도덕 기준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는 족족 주저 없이 보답하려 들면, 그렇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다가 원칙과 마지노선을 잃기 쉽고, 때로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고 악을 행하며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게 되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에 비추어 보며 저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리더가 저에게 우쥔 형제의 행적에 대해 써 달라고 했을 때, 저는 그가 일관되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 사역을 교란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에게 배은망덕하고 양심 없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계속 미루며 그를 폭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한 달 넘게 시간을 끌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불신파와 악인을 정리하는 것은 교회를 정결케 하고 형제자매들에게 좋은 환경과 질서를 만들어 주어 형제자매들이 정상적으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의 이익을 무시하고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도 고려하지 않은 채, 오히려 우쥔 형제를 교회에 남겨 두려고 했습니다. 제가 한 행동의 성질은 사실상 불신파를 감싸고 비호하며, 불신파가 교회에서 교란하고 방해하도록 방임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모든 소행은 이미 교회의 정리 사역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저는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람됨의 원칙과 마지노선을 잃었으니, 이것이 바로 맹목적으로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거지가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여 은혜를 갚으려는 것과 그 성질이 똑같으니,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사탄이 전통 문화 속에서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덕행의 가르침을 이용해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너무나 음험하고 사악합니다!
그 후 저는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이 관점이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다할 수 있는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 사람의 본능으로 이루고 해내야 하는 것, 남에게 이로움과 도움이 되는 간단한 일은 결코 무슨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때, 적당한 장소에서 마침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이는 정상적인 현상이자, 인류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다해야 할 책임이다. 이는 그저 하나의 책임이자 의무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이러한 본능을 주었다. 이 본능은 무엇이냐?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다. …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이 또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바이고,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해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남을 돕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로, 사람의 본능 범위 안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은혜의 차원까지 끌어올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사람의 도움을 은혜로 여기며 늘 입에 달고 다니고 끝없이 보답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심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멸시까지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사회적으로 여론의 질책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을 염려할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일을 밝히 알지 못하고 늘 여기에 통제된다. 이는 진리 원칙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와 네 파트너가 함께 사막에 갔다고 해 보자. 네 물통에는 물이 있고 그의 물통에는 물이 없다면, 너는 분명 네 물을 그에게 나눠 줄 것이다. 그가 갈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둘이서 물을 나눠 마시면 물이 더 빨리 동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너는 네 물을 그에게 나눠 줄 것이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네가 물을 마실 때, 그가 한쪽에서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 있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차마 보고 있기 힘든 마음은 무엇의 작용으로 생겨난 것이겠느냐? 사람의 양심에서 생겨난 것이다. 설령 네가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네 양심은 그 상황을 보고 있기 힘들게 하고, 마음이 불편하게 한다. 이는 모두 인성의 본능에서 생겨난 것 아니겠느냐? 사람의 양심과 이성으로 결정된 것 아니겠느냐? 만약 상대가 “당신은 그런 상황에서도 제게 물을 나눠 줬으니, 제 은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 역시 틀리지 않겠느냐? 이는 은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상황을 바꾸어서 그에게도 인성과 양심, 이성이 있다면 그 역시 네게 물을 나누어 줬을 것이다. 똑같은 것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책임이자 관계이다. 이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나 책임, 의무는 모두 사람의 양심, 인성,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준 본능에서 비롯되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것들은 부모가 가르칠 필요도, 사회적으로 주입할 필요도 없으며, 사람이 스스로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타이를 필요는 더더욱 없다. 사람에게 양심이나 이성이 없는 경우, 혹은 정상인의 지능을 갖추지 못한 지적 장애인이나 바보의 경우, 혹은 자질이 너무 떨어지고 어리석은 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이런 경우에는 교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교육이 필요치 않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것들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는 행위나 행동을 무한대로 확대 해석해 은혜라고 여긴다면, 이는 부적절하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하나님이 너를 구하려는 것이면 어떤 사람을 통해 봉사하게 하든 너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은혜를 완전히 사람에게 돌리거나 심지어 보은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다른 이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돕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주신 일종의 본능으로,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고랄 것도 없는 일이니, 결코 은혜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우쥔 형제가 제가 연약할 때 저를 돕고 붙들어 준 것 역시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는 교회 리더였고, 연약한 형제자매를 돕고 붙들어 주는 것은 그의 본분이자 직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교회 리더가 아니더라도,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형제자매가 소극적이고 연약한 것을 보고 교제하며 도와줄 것입니다. 더욱이, 제 상태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게서 이룬 효과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고 하나님께 보답해야지, 늘 우쥔 형제의 은혜를 생각하며 어떻게 그에게 보답할지를 궁리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제 저에게 우쥔 형제에 대한 평가서를 쓰라고 하셨으니, 저는 마땅히 진리를 실행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어 사실대로 써야 합니다. 교회는 원칙에 따라 가늠하고 규정할 것이며, 설령 마지막에 그가 제명된다고 해도 그것 역시 그가 시종일관 사람과 일에 대해 집요하게 따지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 데서 비롯된 악한 결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쥔 형제의 행적을 쓸 때 저는 정직한 사람이 되지 못했고, 건성으로 대하며 거짓말하고 속여서 정리 사역을 지체시켰습니다. 저의 행위와 태도가 당신께 반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께로 돌아서서 우쥔 형제의 행적을 사실대로 쓰겠습니다. 제 마음을 감찰하여 주시옵소서.” 그 후 저는 바로 평가서를 써서 교회 리더에게 제출했습니다. 나중에, 우쥔 형제는 불신파로 규정되어 교회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저는 마음속으로 죄책감과 자책을 느꼈고, 제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 정리 사역을 지체시켰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저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긍정적인 일이 아니며, 아무리 잘 지켜도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진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마땅히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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