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자녀에게 노후를 의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2026.1.15

2001년,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2020년에는 뇌경색과 심장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마침 치료비가 필요한 당시에, 아들이 5천 위안을 보내 주자 저는 ‘언제든 믿을 건 아들뿐이구나. 늙으면 아들에게 의지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에 아들은 가정을 꾸렸습니다. 아들은 결혼할 때 집과 차를 모두 스스로 장만했습니다. 그 후 며느리는 천 위안이 넘는 금반지를 사주며 말했습니다. “저희는 어머님께 다른 건 바라는 거 없고요, 다만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돌봐주셨으면 해요.” 저에게 잘하는 아들 부부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아들 부부와 잘 지내자. 나중에 늙으면 저 아이들에게 노후를 맡겨야지. 최근에는 몸이 일 년이 다르게 안 좋아지는데, 지금 움직일 수 있을 때 아이를 봐 줘야 내가 늙었을 때 저 아이들도 나를 돌봐 줄 거야.’ 이런 생각에 저는 며느리에게 “그래, 너희 아이 생기면 내가 봐 주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저는 안전상 우려가 있어서, 중공의 체포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해야 했습니다.

2024년 4월 어느 날,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돌아와서 며느리를 돌봐 달라는 가족들의 요청에 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을 간부가 호구 조사를 나왔고, 중공이 제 사진을 갖고 지난 몇 년간 줄곧 저를 찾고 있다는 생각에 저는 감히 집에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떠났습니다. 교회로 돌아온 후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아들은 타지에서 일하느라 며느리를 돌볼 시간이 없는데, 시어머니인 내가 돌봐 주지 않으면 며느리 친정 식구들이 뭐라고 하겠어? 지금 며느리 몸은 괜찮은지 모르겠네.’ 이런 생각에 저는 늘 자식에게 빚진 기분이었습니다. 마음고생을 한 탓에 앓고 있던 뇌경색이 재발했고, 걱정은 더 커졌습니다. ‘나는 해마다 나이가 들고 몸도 점점 안 좋아지는데, 나중에는 아들 며느리가 돌봐 줘야 하지 않겠어? 며느리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나는 돌봐 주지 않았는데, 훗날 내가 늙고 병들어 돌아가면 아이들이 나를 받아주고 노후를 책임져 줄까?’ 이런 생각 때문에 저는 내적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 아이가 태어날 날은 다가오는데, 며느리를 돌보러 돌아갈 수 없으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습니다. 당시 저는 새 신자를 양육하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본분을 이행하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늘 이 일에 교란받아 사역을 제때 점검하지도 못하고 새 신자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일부 새 신자들은 문제가 제때 해결되지 않아서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스스로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저는 해결하거나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렇게도 생각했습니다. ‘성과가 없으면 없는 거지. 차라리 교체되면 아들네한테 가서 손주를 봐 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릇된 상태에 빠져 본분을 이행하니 성령의 인도도 없었고, 저 자신도 소극적으로 변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자꾸만 집으로 돌아가 며느리와 손주를 돌보고 싶습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나중에 늙어서 아무도 돌봐 주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이런 상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부디 저를 깨우치고 이끌어 주시어 제가 진리를 깨닫고 제 문제를 인식하게 해 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후,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자녀는 무엇을 위해 부모에게 효도하느냐? 부모는 또 무엇을 위해 자녀를 사랑하느냐? 사람의 본심은 어디에 있느냐? 모두 자신의 타산과 욕심을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으냐? 진정 하나님의 경륜에 있느냐? 하나님의 사역에 있느냐? 피조물의 본분 이행에 있느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 사이에는 진실한 사랑과 관심이 없으며, 다들 자신의 속셈을 품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폭로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며느리의 임신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은 순수하게 며느리를 돌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간 몸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나중에 아들에게 노후를 맡겨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금 움직일 수 있을 때 아이를 돌봐 주면 나중에 아들도 저를 봉양할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본분과 안전 우려 때문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웠고, 본분에 대한 책임감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제 육적인 이익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저는 진리를 구해 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과 하나님의 주재를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며 받아들이지도 순종하지도 못할 때,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여러 난관에 부딪히거나 여러 난관이 정상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때 사람에게 갖은 걱정과 염려, 근심이 무의식적으로 생겨난다. 내일은 어떨지, 모레는 어떨지, 미래는 어떨지 모르니, 다양한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게 되는 배경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고 꿰뚫어 보지 못하며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사실을 직접 목격한다 해도 인식하지 못하고 믿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도, 사람의 일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불신하게 되고, 그 후에는 원망이 생겨 불순종하게 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것이 바로 저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 몸이 건강할 때는 본분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몸에 여기저기 문제가 생기고, 뇌경색 진단을 받고 심장도 안 좋아지자, 저도 모르게 근심과 걱정 속에 살면서 이런 염려를 했습니다. ‘난 몸도 안 좋은데 나중에 아무도 돌봐 주지 않으면 어쩌지? 지금 아들 며느리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돌아가서 돌봐 주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늙어서 돌봄이 필요할 때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만 하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본분에 대한 부담도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싶지 않고, 며느리를 돌보러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평소 저는 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했지만, 막상 일이 닥치니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못하고 사람에게만 의지하려 했습니다. 제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이런 것들을 걱정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의 앞으로의 삶이 어떠할지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안배해 놓으셨으니, 저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며 정상적으로 체험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 한 단락을 보았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이미 자녀를 통해 아주 많은 것을 누리고 깨달았으며, 이는 부모에게 크나큰 위안과 수확이 되었다. 자식이 네게 효도할지 말지, 네가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걸 수 있을지, 자식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너희 사이에 함께 살아갈 인연이 있는지를 봐야 하며, 이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한편, 자녀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갈지, 생활 여건이 어떨지, 너를 부양할 조건이 될지, 경제적으로 여유로울지, 네게 물질적인 누림과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역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이 밖에, 부모인 네가 자녀가 주는 물질과 금전 혹은 감정적 위안을 누릴 수 있을지도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사람이 구한다고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살도록 운명적으로 정해 놓았기에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한 채 평생 부모와 붙어산다. 부모가 때려도 그는 떠나지 않는다. 반면, 어떤 자녀는 부모가 함께 살기를 몹시 원하고 떨어지기를 아쉬워하며 떨어진 후 늘 그리워하는데도 불구하고 갖가지 이유 때문에, 예를 들어 자녀가 해외에 나가 일하거나 결혼해서 외지에서 사는 등의 이유 때문에 부모와 아주 멀리 떨어져 얼굴 한 번 보기도 쉽지 않고 전화나 영상 통화를 하려고 해도 시간을 봐야 한다. 시차나 각종 불편함 때문에 자주 통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특수한 상황은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부모나 자녀 어느 한쪽이 주관적으로 원한다고 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렸다는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부모라면 누구나 늙어서 자녀의 보살핌을 받기를 바라지만, 그 일은 정말 사람이 스스로 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와 정하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나이 든 자매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자매님은 자녀들이 결혼한 후에도 줄곧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느라 손주를 봐 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이 예순이 넘자 딸이 자진해서 노모를 봉양했고, 자매님은 딸의 집에서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줄곧 아들네를 위해 품을 팔아 돈을 벌고 손주도 돌봐 주었지만, 결국 며느리에게 쫓겨났습니다. 또 2020년에 제가 병이 나서 돈이 필요했을 때 아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침 아들이 5천 위안을 보내 준 일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깨닫고 나니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고,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셨는데도 병이 닥치자 스스로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방법을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 퇴로부터 찾으며, 늘 아들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이런 제가 어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봉양받지 못하도록 정해 놓으셨다면, 아무리 관계를 유지하려 애써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제가 자녀의 봉양을 받도록 정해 놓으셨다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지배하고 안배하실 것입니다. 만약 언젠가 제가 정말 몸이 안 좋아 본분을 이행할 수 없게 된다면, 저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여 체험할 것이고, 그 안에는 제가 마땅히 배워야 할 공과와 제가 얻어야 할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후, 저는 더 이상 며느리를 돌봐 주지 못하는 일로 걱정하지 않았고, 마음을 내려놓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사탄이 전통문화를 이용해 사람을 패괴시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제 안의 그릇된 관점을 어느 정도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중국의 전통문화를 볼 때, 중국인은 효도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효도를 이야기해 왔으며, 그 일을 인성의 일부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왔다. 물론, 그것은 사회에서 하나의 분위기와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자녀가 효도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질타와 질책을 마주해야 하고, 부모는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식이 생각하기에도 그 오명을 감당하기 힘들다. 다양한 요소의 영향으로 인해 부모는 이 전통 사상의 해악에 깊이 물들어 생각도 분별도 없이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할 것을 요구한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이냐? 노후에 봉양해 주고 장례를 치러 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네게 준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인류의 본능이기도 하고, 인류의 책임이기도 하다. 너는 본능과 책임 때문에 자녀를 낳아 길렀지 노후를 대비하고 봉양을 받기 위해 자녀를 낳아 기른 게 아니다. 이것이 올바른 관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은 나이가 든 후에는 반드시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 자녀가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늙어 간다. 또 그들 중에는 건강하고 편안한 노년과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자녀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하고 건강한 노년을 맞이하겠느냐? (그것도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노년 건강과 행복, 생활 상태, 삶의 질, 몸 상태는 사실 자녀의 효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한 바와 관계가 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배치한 생활 환경과 관계가 있다. 부모의 노년의 생활 현황이 어떻든 자녀에게는 그 책임을 질 의무가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저는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자신의 노후를 위함이 아니며, 누구에게나 자신의 사명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탄에 패괴된 후, 사탄이 주입한 “늙으면 기댈 곳이 있어야 한다.”, “늙으면 봉양받아야 한다.”, “자녀로 노후를 대비한다.”는 식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여, 늙어서 자녀의 보살핌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나이가 들고 몸에 여러 가지 병이 생기자, 저는 아들 며느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장차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전 우려 때문에 임신한 며느리를 돌보러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본분을 이행할 마음조차 사라져 새 신자의 문제를 줄곧 해결하지 못했고, 새 신자들의 생명 진입을 지체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심지어 본분이 조정되어 집에 돌아가 며느리를 돌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그토록 많은 진리의 공급을 누렸으면서도,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께 보답하기는커녕, 아들 며느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본분을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일이 닥치자 온통 자신의 퇴로만 생각하고, 본분에 대한 충성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니, 인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저는 “늙으면 기댈 곳이 있어야 한다.”, “늙으면 봉양받아야 한다.”, “자녀로 노후를 대비한다.”는 식의 관점이 사람을 통제하는 사탄의 수단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관점에 따라 살았기에 저는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본분에 대한 책임감도 없어 하마터면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잃을 뻔했습니다. 만약 제가 계속 이 관점을 고수한다면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 스스로를 망치고 말 것입니다. 또 지난 몇 년간 병으로 고통받았던 경험도 생각났습니다. 2018년, 저는 경추 질환으로 신경이 압박되어 팔을 제대로 펴지 못했습니다. 섬김 가정의 자매님이 약을 사다 주었고, 그 후 제 팔은 마침내 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2020년에 뇌경색을 앓았을 때, 의사들은 제 병이 고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나이 든 자매님이 뇌경색 치료약 네 통을 가져다주었고, 그 약을 먹고 제 몸은 의외로 서서히 좋아졌습니다. 지난 몇 년간 병이 났을 때 단 한 번도 아들에게 의지해서 고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일, 사물을 배치하시어 제 병이 하나하나 치료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보호하심 덕분입니다. 저는 “늙으면 기댈 곳이 있어야 한다.”, “늙으면 의지할 데가 있어야 한다.”와 같은 사탄의 황당한 이론을 내려놓고, 자신을 하나님께 맡긴 채 남은 시간 동안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 한 단락을 보았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해야 한다고, 반드시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고, 네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보여야 할 태도이자 부모가 갖춰야 할 존엄성이다. 물론 더 중요한 부분은 부모라는 피조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자녀를 대하는 원칙이다. 만약 자녀가 효심이 있어 너를 보살펴 주고자 한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자녀가 너를 보살피지 않으려 해도 온종일 한탄하며 억울해하거나 씁쓸해하거나 자녀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삶과 생존은 마땅히 자기 능력 범위 안에서 스스로 책임지고 부담해야지 다른 사람, 특히 자녀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함께하지 않고 옆에서 도와주지 않는 이런 삶을 능동적이고 올바르게 마주해야 할 것이다. 설령 자녀와 떨어지더라도 삶에서 발생하는 일을 독립적으로 마주해야 한다. 물론, 자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 있다면 요구해도 된다. 하지만 자녀가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거나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고 기대하는 잘못된 사상 관점을 기초로 해서는 안 된다. 책임을 다하는 입장에서 부모를 위해, 혹은 자녀를 위해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부모와 자식 관계를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물론, 양측 모두 이성을 갖고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존중한다면, 나중에는 더 잘, 화목하게 함께 지낼 수 있을 것이고, 혈육의 정과 서로에 대한 보살핌, 염려, 관심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상호 존중과 이해를 기초로 한다면 이는 꽤 인간적이고 적절한 행동일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부모는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해야 한다고, 반드시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고, 네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보여야 할 태도이자 부모가 갖춰야 할 존엄성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제 마음에 무척 와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보살핌과 이해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거래적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사명이 있기에 부모된 자는 자녀에게 자신을 봉양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노인들도 존엄성 있게 살아야 하며 늘 자녀의 보살핌에 의지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비록 아들을 키웠지만, 이제 아들은 장성하여 독립했으니 저와는 크게 상관없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 가야 할 인생길이 있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독립적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늘 아들이 제 노후를 책임져 주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인생을 홀로 겪어 낼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런 제게 어찌 존엄성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써 제 관점은 어느 정도 바로잡혔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며느리가 출산했으니 돌아와서 돌봐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지금 본분이 이렇게 바쁜데, 정말 돌아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교회 사역에 지장을 줄 거야. 게다가 중공이 계속 나를 잡으려 하니 돌아가면 안전 우려가 생기기 쉬워. 하지만 돌아가지 않았다가 아들 며느리가 나와 인연을 끊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나중에는 그 아이들에게 의지해서 노후를 보내야 하는데… 정 안 되면 그냥 돌아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저는 여전히 제가 아들에게 노후를 의지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제 문제에 맞춰 진리를 구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위해 지불하는 대가는 네가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수십 년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이 세상에 몇 번이나 왔는지, 네가 몇 번이나 환생했는지 모른다. 이 일은 누가 주관하느냐? 바로 하나님이 주관하며, 너는 이 일들을 알 도리가 없다. …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이냐! “내가 60세인데, 하나님은 60년 동안 나를 보살피고 지켜 주시며 60년 동안 인도해 주셨습니다. 만약 내가 늙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면, 하나님이 그래도 여전히 보살펴 주실까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바보 같은 말 아니냐?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사람을 보살피고 지키는 것은 한 번의 생애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약 단지 한 번의 생애와 한평생에 국한된 일이라면, 하나님이 전능하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울인 공과 치른 대가는 단지 사람이 이번 생애에 무엇을 하는지를 안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인지 알 수조차 없는 생애를 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환생한 모든 영혼을 끝까지 책임진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해 일하고, 그의 생명을 대가로 일하며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모든 사람의 일생을 안배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들이는 이런 정성과 하나님이 치르는 이런 대가,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이 모든 진리와 생명에도 불구하고, 만약 마지막 이 시간에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여 창조주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여러 번 환생했고 여러 시대를 살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는 것 아니냐? 하나님이 치른 모든 대가에 죄송한 마음이 들지 않겠느냐? 그러면 사람은 너무 양심이 없으니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하나님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기 때문이다. …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 사랑, 긍휼은 태도일 뿐만 아니라 사실이기도 하다. 무슨 사실이냐? 바로 하나님이 네 내면에 하나님 말씀을 더하여 네가 내면에서 깨우침 받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하고,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보게 하고, 네 마음을 밝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얻게 된다. 하나님은 너에게 실제적으로 매우 많은 사역을 하여 네가 진리를 얻게 한다. 네가 진리를 얻고 가장 귀중한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할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과 협력하기를 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기뻐하고 만족해한다. 또한 하나님의 태도가 생기고, 하나님은 태도가 생기는 동시에 일을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정하고 축복한다. 하나님이 “나는 너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이는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축복이다.”라고 하면, 너는 진리와 생명을 얻게 된다. 네가 창조주를 알게 되고 창조주의 인정을 받는데 네 마음이 여전히 공허하겠느냐? 공허함이 사라진다. 너는 충실함과 즐거움을 느낀다. 이는 가치 있는 삶 아니냐? 이것이 바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무척 감동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주관하시니, 하나님만이 저의 의지처이십니다.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이행한 지난 몇 년간 하나님께서 줄곧 저를 이끌어 주시고 보호해 주셨으며, 저 또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적잖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시는데 무엇을 더 염려하겠습니까? 만약 하나님 사역의 중요한 시기에 제가 여전히 가정과 육적인 것을 위해 살고, 아들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지 않아 마지막에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저는 남은 생애 제 능력을 다해 본분을 잘 이행하고 싶을 뿐입니다. 설령 나중에 아들이 저를 봉양하지 않더라도 걱정하거나 염려할 것 없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체험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 저는 매일 바쁘게 본분을 이행하면서 마음이 무척 가볍고, 해방감을 느낍니다.

이번 체험을 통해 제가 가장 깊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만이 저의 의지처이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를 선포하시어 저희에게 올바른 인생길을 가리켜 주시고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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