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올바르게 대하는 법을 알게 되다

2025.9.17

중국 쑤신(蘇昕)

저희 부모님은 학력이 낮아 힘든 육체노동밖에 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오빠의 공부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셨고, 먹고 것 입을 것 아껴 가며 저희를 학교에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당신을 학교에 보내 주지 않아서 평생 가정주부로 살 수밖에 없었다고 늘 말씀하시며, 저희더러 당신처럼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저희를 대학에 보내야 하고, 그래야 나중에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셨습니다. 오빠가 명문 고등학교에 합격한 후, 부모님은 빠듯한 형편에도 남들에게 부탁해서 오빠에게 각종 학습 자료와 보약을 구해다 주셨습니다. 반면 저는 몇 점 차이로 고등학교에 떨어졌는데, 부모님은 7천 위안이 넘는 돈을 써서 자비로 저를 고등학교에 보내셨습니다. 졸업 후 저는 기술을 하나 배워 작은 가게를 열었습니다. 주변에 똑같은 가게들이 하나 둘 생기는 것을 보며 큰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시장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고, 부모님께서 왜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저희를 공부시키려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건 바로 저희가 사회에서 더 잘 자리잡게 해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아이가 생기면 엄마 역할에 충실하고, 돈도 열심히 벌어 아이를 잘 키우고 제대로 공부시켜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혼 후 딸이 생기자 저는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내 딸을 출발선에서 뒤처지게 할 수는 없어! 내가 낳았으니 엄마로서 책임을 다해서 잘 키워야지. 최대한 앞길을 닦아 주고 미래를 계획해 줘야 나중에 좋은 직장을 얻고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지. 딸을 위해 미리 준비해 주지 않으면 그건 엄마로서 무책임한 거야.’ 그래서 저는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이야기도 들려주고, 고시도 읊어 주고, 글자도 가르치고, 어린이 영어 교육 방송도 틀어 주었습니다. 딸은 말이 빨라 아주 어릴 때부터 혼자서 동화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똑똑한 딸을 보며 잘 키우겠다는 자신감이 더욱 솟아났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출세하면 엄마인 저도 체면이 설 테니까요.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 저는 조기 교육이 아이의 지능 개발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곳을 알아본 끝에 딸을 영재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품위 있고 아름다운 몸매를 갖게 해 주려고, 딸이 다섯 살 때부터는 무용을 배우게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딸을 가장 좋은 학교에 보내서 경력도 풍부하고 수업의 퀄리티가 좋은 담임 선생님을 찾아 주었습니다. 딸의 학비를 대기 위해 저는 죽어라 돈을 벌었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바빴고, 식사도 제때 하지 못해 하루에 한 끼만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는 바로 숙제를 하라고 재촉했고, 숙제가 끝나면 제가 다시 검사해서 한 문제라도 틀리면 벌로 열 문제를 더 풀게 했습니다. 때로는 딸을 데리고 길을 걷다가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을 보면, 저는 딸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쓰레기나 줍게 될 텐데, 너도 그러고 싶니?” 그러면 딸은 고개를 젓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딸이 음악을 무척 좋아해서 어떤 노래든 두 번만 들으면 따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아직 목소리가 다듬어지지 않아서 성악을 배우기에는 좀 이르니, 먼저 악기를 배우게 해서 악보 보는 법을 익히게 하자. 나중에 음악 쪽으로 발전하기도 쉬울 거야.’ 그래서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고쟁(古箏) 학원에 등록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호기심이 생겨 딸도 고쟁 배우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고쟁 앞에 앉아 여러 가지 주법을 연습하고 따분한 음표들을 연주하더니 배우지 않으려 했습니다. 딸은 자주 입을 삐죽 내밀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연습하기 싫어요. 좀 놀고 싶어요.” 그러면 저는 딸을 달래서 연습하게 했고, 딸은 눈물을 머금고 계속 연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속상해하는 딸의 모습을 보니 제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특히 딸의 열 개나 되는 가녀린 손가락에 온통 거스러미가 생긴 것을 볼 때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도 딸이 마음껏 자유롭게 놀게 해 주고 싶었지만, 이 사회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혹독합니다. 좋은 학력이나 특별한 재능이 없으면 어떻게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모든 아이들이 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저 역시 딸이 태만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남 밑에서 천대받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고생하고 노력해야 했습니다. 저는 반드시 딸을 잘 살피고 책임을 져야 했고, 딸이 엄마인 저의 고심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나중에는 딸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사회는 경쟁이 아주 치열해. 네가 학력이 낮고 특별한 재주도 없으면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하찮은 사람밖에 될 수 없어. 엄마가 너한테 고쟁을 배우게 하는 것도 나중에 네가 직업을 선택할 때 길을 하나 더 가지도록 하려는 거야. 지금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크면 알게 될 거야.” 딸은 체념한 듯 말했습니다. “엄마, 잔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저는 제 선택이란 걸 전혀 할 수가 없어요. 뭐든 엄마 말만 들으면 되는 거잖아요.”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며 저도 가끔 스스로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묻곤 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자매도 저더러 자녀에게 강요하지 말고 부모로서의 책임만 다하면 된다고, 아이가 장래에 출세할지, 좋은 직업을 가질지는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예정에 달려 있으니,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교제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사회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데. 좋은 학력이나 특기가 없으면 정말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가 없어! 딸은 재능도 있는데, 내가 잘 키워 주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 엄마가 무책임했다고 원망하지 않겠어?’ 저는 자매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속 제 계획대로 딸을 키웠습니다.

제가 고쟁을 배우는 딸아이를 영어 학원, 작문 학원 등에도 보내는 바람에, 주말과 방학만 되면 딸은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일 발바닥에 불 난 듯 이 학원 저 학원 옮겨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죠. 딸은 아래층에서 노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간절한 시선을 보내며 부러워했습니다. “엄마, 저도 친구들처럼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일요일은 쉬라고 있는 날 아니에요? 그런데 저는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바빠요. 언제쯤 이렇게 힘들지 않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엄마도 네가 많이 힘들고, 편하게 놀고 싶어 하는 거 알아. 하지만 네가 놀 때 다른 아이들은 다 노력하고 있어. 그럼 넌 뒤처지기 쉽단다. 나중에 좋은 미래를 맞이하려면 지금은 노력해야 해. 넌 아직 어려서 이 사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몰라. 크면 다 알게 될 거야.” 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딸의 공부를 독려했습니다. 딸도 열심히 해 주었습니다. 딸이 쓴 작문이 지역 신문에 실렸고, 고쟁도 잘 배워서 자주 무대에 올라 공연도 하고 대회에도 참가했으며, 무용 공연에도 자주 참가했습니다. 딸이 잘되는 모습을 보니 무척 대견했고, 더더욱 제 노력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죠. ‘딸이 장래에 좋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면, 엄마인 나도 책임을 다한 거지.’

나중에 딸이 중학교에 가자, 저는 실력 좋고 진학률이 높은 담임 선생님을 찾아 주었습니다. 공부에 지장이 될까 봐, 딸이 학교에서 사귀는 친구들까지 제가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공부 못하는 친구와 어울려 공부에 영향을 받을까 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딸은 제게 자주 불평했습니다. “저는 엄마가 새장 속에 가둬 둔 새 같아요. 자유가 하나도 없어요. 매일 쳇바퀴 돌듯 학교, 집, 학원만 왔다 갔다 하잖아요. 오로지 공부밖에 없어요. 엄마, 그거 아세요? 저는 자유롭고 싶어요. 차라리 우리 집 어항 속 물고기가 낫겠어요. 걔들은 저렇게 큰 어항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이라도 치잖아요. 저는 그럴 공간조차 없다고요.” 딸의 불평을 들을 때마다 저 역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회의 경쟁이 치열한데 제가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입이 닳도록 딸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마가 너한테 자유를 안 주는 게 아니야. 네가 지금 노력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니? 넌 아직 사회에 나가보지 않아서 사회의 혹독한 경쟁을 실감하지 못하는 거야. 엄마는 경험자야. 다 너 잘되라고 이러는 거야.” 아이는 제 말을 들을 때마다 늘 침묵했습니다. 딸은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기 방에 틀어박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딸이 사춘기라 반항심이 생겼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딸이 중학교 3학년이 되던 어느 날, 딸과 몇 마디 나누다가 결국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딸이 가끔 휴대폰을 보는 것을 보고 제가 말했습니다. “지금 수업도 빡빡하고, 곧 시험인데 휴대폰 좀 적당히 봐라!” 딸이 말했습니다. “쉴 때 잠깐 보는 거예요.” 제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거 봐서 뭐에 쓰니, 공부에 방해만 되잖아!” 딸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갑자기 울면서 제게 소리쳤습니다. “저는 왜 항상 엄마 말만 들어야 해요?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저한테 자유를 준 적이 있었냐고요? 전부 엄마가 제 모든 걸 주무르고 조종했잖아요. 학교도 엄마가 골라 주고, 초등학교, 중학교 담임 선생님도 엄마가 찾아 주고, 무용, 고쟁, 작문, 영어, 온갖 학원들도 다 엄마가 시켜서 다닌 거잖아요. 저는 모든 걸 엄마 말대로 해야 했어요. 제 기분은 생각해 봤어요? 정말 저를 사랑하긴 하세요? 엄마를 보고 싶지 않아요!” 그날 밤 딸은 집을 나갔습니다. 저는 그 순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저 애를 위해 한 모든 것이 다 저 잘되라고 한 거잖아? 저 아이는 어째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저는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몹시 걱정되어, 서둘러 딸의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해 딸의 행방을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고 했습니다. 제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애가 어디로 간 걸까? 혹시 극단적인 생각이라도 한 건 아닐까?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살지?’ 저는 무력하게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아이가 저한테 화가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됩니다. 하나님, 제 마음이 평온을 찾도록 지켜 주십시오. 이런 환경이 닥친 데에는 당신의 허락이 있음을 알지만, 제가 어떤 공과를 배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사나흘 뒤, 딸에게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고, 특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저라며 연락이 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 비수가 깊이 꽂히는 듯했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줄곧 제가 책임감 있고 자격 있는 엄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딸이 태어난 순간부터 딸의 모든 것을 계획해 주었고, 딸이 순탄하게 자라나 나중에 좋은 직장을 갖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딸을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결과는 딸이 저를 멀리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엄마로서 저는 너무나 크게 실패했습니다. 저는 자주 혼자 몰래 울었고, 가장 무력할 때는 하나님께 마음속의 고통과 답답함을 털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인생의 여섯 관문에 대해 교제하신 하나님의 가장 최근 말씀을 보고 제 마음속 의문이 단번에 풀렸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부모는 한 사람의 삶에서 출산과 부양의 책임을 지고,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형식적으로 제공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오직 창조주의 예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미래는 일찍이 운명으로 정해져 있고,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으며, 부모조차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운명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은 독립적이고 각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사람의 부모도 한 사람의 일생의 운명을 전혀 막을 수 없고, 한 사람이 현생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는 데 조금도 힘을 보태 줄 수도 없다. 즉,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할지, 이는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 그것이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어떤 운명 속에서 사명을 완수하게 될지도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한 사람이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고, 가족들 역시 그가 현생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완수하게 될지, 어떤 생존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는 완전히 현생의 운명에 달려 있다. 즉, 창조주의 뜻으로 정해진 모든 사람의 사명은 그 어떤 객관적인 조건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각자 특정 성장 환경에서 성숙해지고, 인생 여정을 한 걸음씩 밟아 가며, 창조주가 정해 놓은 운명을 조금씩 실현하게 된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인생에서의 역할을 짊어지고, 창조주의 예정과 주재에 따라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한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한 사람이 어떤 사회 환경에서 어떤 일이나 사업을 하게 될지는 모두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이는 부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은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전공을 선택하고, 졸업 후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인생 여정에서 첫발을 순조롭게 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기술을 가졌어도 자신의 사업은 고사하고 자기에게 맞는 일이나 자신이 속할 곳 하나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순탄치 않아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경우다. 성공과는 연이 없는 운명인 것처럼, 힘들게 공부했지만 대학교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희망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 경우, 앞으로의 운명은 순탄할지 험난할지 알 수 없는 변수로 가득 차 있음을 처음으로 실감하고, 인생에 대해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품게 된다.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도 책을 써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자무식인데도 창업을 해 돈을 벌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능력, 지능,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 앞에서 사람은 나이, 우열, 귀천을 구분할 수 없는 동등한 존재이다. 사람이 평생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얼마나 많은 부를 가질지는 부모에 의해 좌우되거나 재능, 노력, 욕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는 창조주가 정한 운명에 달려 있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았습니다. 부모의 책임은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이고, 자녀의 장래 운명이 어떠할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 가난할지 부유할지는 부모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되는 것이고,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주재를 알지 못했기에,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자리 잡으려면 반드시 학력이나 기술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고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딸을 제대로 키워 내지 못하면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잘못된 관점을 고수했기 때문에, 딸이 아주 어릴 때부터 미래를 계획해서 좋은 유치원을 골라 주고, 각종 기능 학원에 등록시켰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밖에서 놀 때 딸은 여러 학원을 바쁘게 오가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족쇄를 차고, 매일 제가 세운 계획에 따라 로봇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떠밀려 가느라 마땅히 누려야 할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저 역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며 돈을 버느라 오랫동안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해 위장병까지 얻었습니다. 제가 고생한 것은 둘째 치고, 결국 딸이 집을 나가게 만들었으니, 이 모든 것은 제가 하나님의 주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로만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을 뿐,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사람과 일을 대하거나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와 딸 모두 심신이 피폐하고 고통스러워졌습니다. 저는 이렇게 딸을 교육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아이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 한 번도 반성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학창 시절 제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범대학에 진학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 대입 시험에 실패하여 아무 데도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기술을 하나 배워 의류 공장을 차릴 생각이었지만, 의류 업계가 불경기라 미용실로 업종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게를 확장하려던 참에는 또 여러 가지 이유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발 한 발 걸어오면서, 어느 것 하나 제 계획대로 된 것이 없었습니다. 저 자신의 운명조차 바꿀 수 없는데, 어떻게 딸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딸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습니다.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가질지, 좋은 삶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제가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고, 두루두루 잘 키우고 교육한다 해도 아이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재와 정하심을 알지 못한 채, 저 스스로 딸을 키우고 교육해서 딸의 운명을 바꾸려 했으니, 저는 정말이지 너무나 가련하고 어리석었습니다. 제가 딸을 위해 한 모든 일은 겉보기에는 잘못이 없어 보이고, 딸의 장래를 위한 계획하고 타산한 것이었지만, 사실 이미 부모의 책임을 넘어선 것이었고, 그건 바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매일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 어떤 사람이나 일을 맞닥뜨릴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예상할 수 있느냐? 사람은 이 모든 일의 발생을 예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도 통제할 수 없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일은 살면서 흔히 볼 수 있고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런 ‘삶 속의 사소한 일’들의 발생과 발전 양상 혹은 법칙은 인류에게 어떤 일이든 우연히 발생하지 않으며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과 필연성은 사람의 뜻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모든 사건의 발생은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경고를 전달한다. 또한 인류는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동시에, 자신의 손안에 운명을 쥐고자 하는 인류의 헛된 야심과 욕망에 반격을 날리고 있다. 인류에게 가해진 이런 반격은 여러 차례 거칠게 뺨을 때려대듯, 대체 누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주관하는지 돌아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인류는 또한 야심과 욕망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깨지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예비된 운명에 순응하고, 현실과 하늘의 뜻,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게 된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사람에게 슬픔이 생기는 것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명예와 이익을 좇기 때문도, 안개 속에서 운명에 맞서며 힘겹게 나아가기 때문도 아니다. 창조주의 존재와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수렁 속에서 나오는 대신, 차라리 잘못을 깨닫지 않고 독하고 완강하게, 수렁 가운데서 계속 발버둥 치길 원하며 고집스럽게 창조주의 주재에 반항하고 조금도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고서야 포기하고 방향을 돌린다. 이것이 사람의 진정한 슬픔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을 선택한 자는 현명하고, 벗어나려는 자는 우매하고 완고하다고 하는 것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저는 스스로를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딸을 키웠던 순간들을 돌이켜 보니, 저는 늘 딸의 미래를 계획해 주고 그 계획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딸이 장래에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 형제자매들이 아이의 미래는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라 부모가 좌우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고 교제해 주었지만, 저는 여전히 제 관점을 고수하며 딸이 장래에 성공할지 여부는 노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고 운명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며, 모두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말을 신봉하며 자꾸만 창조주의 예정과 주재에 맞서 싸웁니다. 저 역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외부인들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노력으로 딸의 운명을 바꾸려 했습니다. 이런 제가 어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습니까? 제 관점은 불신파와 똑같았으니, 정말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주재하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제 사욕을 위해 완고하게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나려 하고, 딸의 미래를 바꾸려 했습니다. 그 결과 저와 딸에게 많은 고통과 상처를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명정에 대항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점을 깨닫고 나니,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주재에 대항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딸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앞으로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기꺼이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습니다.

얼마 후, 집에 돌아온 딸이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야윈 딸의 모습에 저는 슬퍼하며 물었습니다. “또 나갈 거니?” 딸은 목이 메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했습니다. “밖이 얼마나 힘든데, 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거니?” 딸은 울면서 자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딸의 대답에 살점을 도려내는 듯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건 다 내가 강요한 일이 아닌가? 내가 자유와 즐거움을 모두 빼앗아 버렸으니, 아이가 밖에서 고생할지언정 집에 돌아오기 싫어하는구나. 이런 내가 어떻게 자격 있는 엄마라고 할 수 있겠어?’ 저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어 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딸도 무척 서럽게 울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는 좋은 엄마가 아니야. 널 그렇게 닦달하는 게 아닌데, 집에서 일말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았어. 내가 너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었구나…. 집에 돌아오렴. 엄마가 다시는 이것저것 배우라고 닦달하지 않을게!” 딸이 돌아온 후, 저는 예전처럼 딸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하지 않고, 순리대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딸의 의식주와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점차 딸의 말수가 많아지고 성격도 많이 밝아졌으며, 집안에도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하루는 딸이 말했습니다. “엄마가 변했어요. 예전처럼 저한테 공부하라고 닦달하지 않으시네요.” 제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었던 건 다 하나님 말씀의 이끄심 덕분이야. 엄마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내 책임은 너를 건강하게 키우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단다. 네가 나중에 학업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안배하신 일이야. 예전에 널 그렇게 닦달한 건 엄마 잘못이야. 너와 나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지. 걱정 마라, 엄마가 앞으로 다시는 널 닦달하지 않을게.” 저와 딸은 함께 울었습니다. 나중에 딸은 대학교에 갔고, 시험을 볼 때마다 늘 과에서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딸은 거의 매일 밤 제게 전화를 걸어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었고, 저희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이 정말 좋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제가 딸에게 가졌던 기대가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라면 모두 자식에게 어느 정도 기대를 건다. 이 기대는 크든 작든, 가깝든 멀든 모두 자식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 살아가는 것, 또는 부모를 대하는 것에 대해 갖는 일종의 태도이자 구체적인 요구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요구들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전통 관념에서 보면, 부모의 명령은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걸 어기면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서도 아주 크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 그럼 후손에 대한 부모의 이런 구체적인 기대들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당연한 것인지 아닌지, 어떤 것들이 합리적이고 어떤 것들이 불합리한지, 어떤 것들이 정당하고 어떤 것들이 강제적이고 부당한지, 이러한 것들을 사람이 깨달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사람은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와 관점으로 부모의 기대를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여기에도 사람이 깨닫고 지켜야 하는 진리 원칙이 있다. 이런 일들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 부모는 자주 이런 부담을 갖는다. 그는 자식과 후손에게 기대를 품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일 뿐 아니라 당연히 부모가 더욱 갖춰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의 후손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다면 그것은 후손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고 부모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자신은 책임을 다하는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후손에 대한 기대를 다루는 일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식에게 이런저런 요구가 생긴다. 다양한 시기, 다양한 상황에서 부모는 자녀 각자에게 서로 다른 요구를 가진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이런 생각과 부담을 가지고 있다 보니 옳든 그르든 이런 성문화되지 않은 규정에 따라 부모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은 이런 행동들을 일종의 의무와 책임으로 여겨 자식에게 요구하는 동시에 자식에게 그것을 달성하도록 강요하기도 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8)> 중에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아무리 커도, 그 기대가 아무리 당연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진리에 위배되는 한, 사람은 그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 또한 부정적인 사물이며 정당한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부모의 책임에 어긋나고 부모의 책임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또 비현실적이고 인성에 위배되는 기대이자 요구라고 할 수 있다. … 미성년 자녀에 대한 부모의 비정상적 행동과 태도, 그리고 과격한 행위 때문에 자녀에게 갖가지 부정적인 영향과 압박을 주며, 어린 자녀에게 육체적, 정신적, 심적 학대를 가하게 된다. 이런 일은 부모의 그런 행동이 부적절하고 부당함을 알려 준다.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마땅히 내려놓아야 하는 사상이자 행동이다. 인성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미성년자에 대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육체적, 정신적 학대이기 때문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일부 부당한 기대와 요구를 자녀에게 마땅히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로 여기고, 자녀에게 강제로 이루게 하는 것은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망가뜨리는 일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서 저희가 장래에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대가를 치르시는 것을 보며, 저는 마음 깊이 두 분께 감탄했고, 두 분이 매우 훌륭한 부모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두 분처럼 책임감 있는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딸이 태어난 후, 저는 딸이 어려서 앞으로 마주할 사회 경쟁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혹독할지 모르니, 경험자인 내가 딸의 미래를 계획해 주고 앞길을 닦아 주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조금 힘들고 고단하더라도 먹을 것 쓸 것 아끼고 힘 닿는 대로 딸을 키우고 교육해야 하고, 딸을 다재다능하게 만들어 장래에 좋은 미래를 갖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엄마로서의 제 책임과 의무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이렇게 제 계획에 따라 딸을 키우고 교육하며, 각종 학원에 등록시켰습니다. 심지어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딸이 친구들과 교제하는 것까지 제가 나서서 일일이 간섭했습니다. 저는 자주 인생 선배로서 딸을 교육했고, 딸이 자유가 없고 힘들다고 불평해도, 달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면서 눈앞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이것이 딸을 위한 것이고, 딸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제게 교제해 주어도 되돌아보지 않고, 딸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딸이 아직 어리다는 점과 그 나이에 무엇이 필요한지는 생각하지 않고, 제 바람을 딸에게 강요했습니다. 그 어린 마음과 정신에 무거운 압박과 속박,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니, 이런 제가 어찌 엄마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완전히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부당한 요구였습니다. 저는 이런 제 바람들을 모두 엄마의 책임이라고 여기며 기어이 딸이 집을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말하던 이른바 ‘책임’이라는 것은 저와 딸에게 상처만 안겨 주었을 뿐입니다.

하루는 함께 동역하는 자매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자매님은 딸을 키우는 것이 엄마의 책임이라고 계속 생각해 왔지만, 딸이 좋아하는 것은 못 하게 하고 자매님의 기대에 따라 딸에게 요구하고 있어요. 그 이면에도 자매님의 패괴 성품이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부모의 이런 기대들은 무엇에 근거하겠느냐? 모두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사회와 세상에서 비롯되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모두 자식이 이 세상과 사회에 적응하고 세상과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자식이 사회에서 자리 잡아 안정적인 직업, 가정, 그리고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모는 후손에게 여러 가지 주관적인 기대가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컴퓨터 공학자가 꽤 유행하다 보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중에 제 아들도 컴퓨터 공학자 시킬 거예요. 그 일을 하면 돈도 많이 벌고, 하루 종일 컴퓨터를 갖고 다니면서 컴퓨터 공학을 다룰 테니 부모도 체면이 서잖아요!” 아이가 모든 사물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잘못된 것입니다.) 부모는 완전히 어른의 시선으로, 그리고 세상사에 대한 견해, 관점, 기호에 따라 자식에게 기대를 거는 것인데, 이는 주관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듣기 좋게 말하면 주관적인 것이지만 사실은 무엇이겠느냐? 이 주관적인 것을 또 다른 방면에서 해석하면 무엇이겠느냐? 이기적인 것 아니겠느냐? 강요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어떤 일, 어떤 직업을 좋아하고, 사회에서 자리 잡는 것, 체면이 서는 것, 관직에 오르는 것, 돈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면,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길을 걷도록 한다면 앞으로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며 그런 일에 종사하는 것을 자식이 좋아하겠느냐? 자식에게 어울리겠느냐? 그의 운명은 무엇이겠느냐?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는 무엇이겠느냐? 너는 알고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은 상관없습니다. 부모인 제가 좋아하면 그만이죠. 제가 좋아하니까 자식에게 이런 기대를 거는 거예요.” 이는 너무나 이기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무도 이기적이다! 듣기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자주적이지만 사실은 무엇이겠느냐?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는 자식의 자질과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의 운명과 일생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는지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기호, 타산, 그리고 계획을 자식에게 강요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강요하지 않으면 아이는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해요. 이해할 때가 되면 너무 늦어 버리죠.” 정말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늦어 버린다면 그건 그의 운명이지 부모의 책임이 아니다. 네가 이해한 것을 자식에게 강요한다면 네가 이해했다고 해서 자식도 일찍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인생의 길을 선택할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사람의 일생이 어떨지 등 이런 일들을 자식이 언제 이해할지는 부모의 교육과 관련 없다. 그에게는 자기의 길이 있고 자기의 리듬과 규칙이 있다. … 너는 자식이 나중에 받을 그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그가 미리 이 중압감을 견디게 하고, 세상 물정을 모를 때부터 중압감을 견디게 하는 것인데, 이는 자식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 아니겠느냐? 이게 자식을 위한 것이겠느냐?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더 낫다. 이해하지 못하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편안하고 즐겁게,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 수 있다. 그가 일찍 이해하게 된다면 네 생각에는 그게 복이겠느냐 화이겠느냐? (화입니다.) 이는 화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8)>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갖는 부당한 기대는 이 사악한 흐름과 사회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모든 것은 사탄에게서 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배우지 못하고 특별한 재능이 없어 사회에서 자기 노력에 기대어 애를 쓰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과 달리, 학력이 높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별다른 고생 없이 머리 좀 쓰고 말 몇 마디만으로도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게 다 쓸모없고, 오직 공부만이 최고다.’,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 ‘마음을 쓰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힘을 쓰는 자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와 같은 사탄의 철학에 미혹되고 우롱당해, 지식과 기술이 있어야만 운명을 바꾸고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 선배의 경험을 내세워 혼자만의 생각대로 어린 딸의 계획을 정하고, 지식과 예능을 배우도록 강요했습니다. 그것들이 딸이 좋아하는 것인지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딸을 인재로 키워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게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사탄은 바로 이런 철학들을 이용해 사람을 미혹합니다. 그로 인해 저는 오직 지식만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잘못 생각했고, 제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딸을 키워 딸의 운명을 바꿔 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한 일들은 정말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딸의 장래를 어떻게 정해 놓으셨으면 그대로 되는 것이고,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수단과 그 음험한 속셈에 대해 조금도 분별이 없었고, 일방적으로 제 뜻에 따라 딸이 제 말을 듣게 했습니다. 그 결과 딸은 어린 나이에 많은 압박과 고통을 감당해야 했고, 천진난만해야 할 어린 시절이 저의 이기심 때문에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이게 바로 아이를 망친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겉으로는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제 기호와 바람을 아이에게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사욕과 소망을 위한 것이었고, 제 체면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나 이기적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 말씀의 인도가 없었다면, 딸이 결국 저에게 속박되고 억압받아 어떻게 되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깨닫고 나니, 저는 저의 패괴 본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이끄심에 마음속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의 본질을 해부해 보면, 부모의 기대는 이기적이고 인성에 위배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부모의 책임과도 관련이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강압적으로 여러 가지 기대를 품는 것, 강제로 다양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소위 책임이란 무엇이겠느냐? 부모가 최소한 다해야 하는 책임은 너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나쁜 사람이 되지 말고 선량해야 한다고 교육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너를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의 책임이다. 그 밖에 너의 나이, 네가 견딜 수 있는 정도, 너의 자질과 취미에 근거해 너에게 적합한 어떤 지식과 재주 등을 익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보다 더 훌륭한 부모는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이 우주에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식에게 알게 하며, 그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인도하고, 성경 이야기도 좀 들려준다. 그가 어른이 된 후 세상의 흐름을 좇고 각종 복잡한 인사 관계에 빠져 이 세상, 이 사회의 갖가지 흐름에 짓밟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길 바란다. 부모가 다해야 하는 책임은 부모의 기대와는 관련이 없다. 부모가 다해야 하는 책임은 바로 부모라는 역할을 맡아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그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고 그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또한, 자식의 육적인 생활 방면에서 그의 의식주를 제때 살피는 것, 또는 그가 아플 때 신속히 보살펴 주는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8)>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실행의 길을 가리켜 주었고, 저는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정당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각 연령대에 맞는 정상적인 필요에 따라 정당하게 양육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부모가 아이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떻게 정상인의 생각을 갖춰야 하는지 가르치고, 선량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아이의 몸을 잘 돌보아 건강하게 성인으로 자라게 하고, 잘못된 사상이나 스트레스, 부담을 아이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기회가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어떻게 사역으로 사람을 이끌고 구원하시는지 이야기해 주고, 자녀와 함께 하나님을 믿으며 그들에게 긍정적인 인도와 도움을 주는 것도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입니다. 이제 딸은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언니는 저더러 딸이 전공을 살려 직업을 찾도록 설득하라고 했지만, 저는 딸이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딸에게 제안할 수는 있지만 본인이 어떻게 선택할지는 딸의 자유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 생각을 딸에게 말했습니다. 딸은 “저는 지금 이 직업이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엄마는 네 선택을 존중할게.” 저와 딸의 대화는 매우 편안했고, 어떤 강요나 압박도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 정말로 해방감을 준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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