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다.’ 가 아들에게 끼친 해

2024.9.25

저는 오남매였는데, 제가 장녀였어요. 아버지는 장기간 사업하신다고 멀리 계셔서 집 안팎의 일은 거의 엄마 혼자 도맡아 하셨죠. 엄마가 고생하시는 걸 보면서 저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다니고는 엄마가 하시던 밭일을 도왔어요. 전 종종 힘들어서 온몸이 쑤시고 아팠는데, 그런 삶은 너무 고달팠어요. 나중에 사촌 동생이 대학에 붙었는데, 온 집안사람들이 기뻐해 주셨어요. 제 부모님들도 출세했다고 늘 칭찬했어요. 그때 전 ‘난 어차피 배운 것도 없으니 이제 뭐 출세할 길은 없지만 앞으로 내 자식만큼은 정말 유능한 인재로 만들어야겠어. 이 힘들고 고된 농사는 절대 대물림하지 않게 만들고, 모든 이웃과 친지들이 부러워하게 만들고, 가문의 영광으로 만들거야.’라고 다짐했어요.

전 결혼해서 남매를 낳게 됐어요. 애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친정 엄마가 하나님을 믿게 됐어요. 가끔은 애들이 친정 엄마랑 같이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엄마한테 글도 가르치더라고요. 근데 전 애들이 공부에만 전념하길 바랐어요. 그래서 그런 걸 볼 때면 엄마한테 한마디 했어요. “엄마, 믿을 거면 혼자 믿어요. 애들까지 데리고 예배드리지 말고요. 애들 공부하는 데 방해되니까요.” 그러다 나중에는 저도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애들의 성적에 정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가끔 예배는 드려도 그저 형식적이었어요. 애들이 공부를 잘할 수 있게 뒷바라지하려고 전 남편이랑 객지에서 고물상을 했어요. 전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는데, 정말 삭신이 쑤실 정도로 힘들었지만 쉬지 않았어요. 딱 이런 생각뿐이었거든요.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은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게 해 줘야지. 나중에 명문대에 들어가서 앞날이 창창해질 수만 있다면 이렇게 좀 힘들면 어때.’

어느 날, 애들 보러 고향에 내려갔는데, 친정 엄마한테 아들 성적이 떨어졌단 얘기를 들었어요. 전 너무 화가 나서 엄청 혼냈죠. “엄마가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니? 고물상 하면 사람들이 다 무시해. 그래도 난 니들 위해서 그 고생을 하는 거야. 근데 공부도 제대로 안 하면, 대체 뭘 하려고 그러니?” 그때 아들이 울면서 그러는 거예요.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그 뒤로는 친정 엄마한테 애들을 맡기는 게 못 미덥고, 애들 성적이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아예 애들 학교 근처에다 집을 빌리곤 작은 장사를 시작했어요. 곁에서 애들을 챙겨 주기도 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챙길 겸 해서요. 그때는 정말 모든 신경이 애들한테만 가 있었어요. 애들이 대학에 붙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고 공부하라고 다그쳤죠. 정말 화장실을 가도 빨리 보라고 재촉했어요. 가끔 애들이 나가서 좀 놀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면 전 또 잔소리를 했어요. “니네 외삼촌 봐라. 명문대를 나오니까 직업도 번번하잖니. 친척이나 이웃들도 다 대단하게 보고 말이야. 니들도 외삼촌을 좀 보고 배워. 지금 고생하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앞으로 잘살 수가 없어.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가끔은 현량자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동기부여를 해 줬어요. 그럴 때마다 애들은 속절없다는 태도로 “엄마, 그만해요. 그 말도 다 외웠어요. 걱정마세요. 대학에 꼭 붙을 거니까요!” 그 당시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밥을 하고 오후에는 애들이 공부를 하나라도 더 하라고 밥을 학교까지 배달해 줬어요. 그리고 애들이 저녁에 집에 와서 자습할 때면 괜히 애들이 농땡이 피울까 봐 밤 12시까지 곁에서 지켰어요. 그리고 먹는 것도 최대한 신경을 많이 썼어요. 붕어탕이 기억력에 좋다고 해서 계속 만들어 먹였고, 특히 학생 뇌 건강에 좋다는 우유나 영양제도 사서 먹이고, 매일 토종 계란은 한 알씩 꼭 먹였어요. 일단 애들한테 좋다고 하면 무조건 샀어요. 어떻게든 머리가 더 좋아져서 좋은 성적을 내길 바랐거든요. 애들도 계속 노력을 하니까 성적도 계속 올랐어요. 딸은 대학에 붙었고 아들은 수능 모의고사에서 거의 탑에 들 정도의 성적을 거뒀죠.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대로만 한다면, 아들이 명문대에 붙는 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는 아들을 더 엄격하게 관리했어요.

근데 수능날이 가까워질수록 애가 정신적으로 너무 긴장하고 압박을 받아서 밤에 잠도 잘 못 자더니 아프기 시작했어요. 기침하고 열이 나는데, 약 먹고 주사를 맞아도 낫지 않았어요. 성적도 계속 떨어졌고요. 그걸 보고 있는데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근데 계속 공부하라고 하면 과부하가 걸릴까 봐 걱정됐어요. 결정적인 순간이 이제 코앞인데, 애 병은 호전될 기미가 안 보이고, 성적은 더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걱정이 됐어요. ‘이래서 앞길이 훤해질 수 있겠어? 이번에 시험을 제대로 못 보면, 지금까지 내가 쏟은 노력도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안 돼. 우리 아들이 앞으로 잘되려면 지금 성적이 잘 나와야 하는 거야. 어떻게든 더 공부를 시켜야 해.’ 그 뒤로는 매일 침대 머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걸 지켜봤어요. 제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 보니까 어이없어 하면서 애가 그러는 거예요. “난 앞으로 자식 낳으면 엄마처럼 교육 안 시킬 거예요. 농구도 하게 하고, 탁구도 하게 하면서 하고 싶은 거 하게 자유를 줄 거예요.” 아들이 그렇게 말하니 저도 마음은 아팠죠. 근데 앞으로 출세하고 편하게 살려면 제가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애 몸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니까 속이 타들어 갔어요.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죠. ‘우리 아들이 수능 전에 회복이 안 되면, 분명 시험에 지장이 갈 거야. 만약 이번에 떨어지면, 모든 게 수포가 되는 거잖아? 그럼 동네에서 웃음거리가 될 거야.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얻는 게 없으면 내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어?’ 아들의 병을 빨리 고쳐 주려고 전 백방으로 의사를 찾아다니고 약을 구했어요. 그래도 애 상태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어요. 전 매일 수심에 가득 차 있었고 한숨만 푹푹 쉬었죠. 머릿속에는 온통 애가 언제면 나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죠. 그렇게 막막한 순간에 ‘난 크리스천이잖아. 그럼 이런 어려움을 하나님께 맡기고 해결해 달라고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우리 아들이 약도 먹고, 주사도 맞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수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이 빨리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어느 날 밤, 산책하러 나갔다가 한 자매를 만났는데, 요즘 어떠냐면서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 고통을 자매한테 털어놨더니 이렇게 교제를 해 줬어요. “우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자식의 공부는 물론, 질병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주관하게 해야죠.”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 말씀도 읽어 줬어요. 『사람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너는 너 자신을 주관할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아무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바쁘게 지낼지라도 사람은 스스로를 주관하지 못한다. 네가 너 자신의 미래를 알고 네 운명을 주관할 수 있다면, 너를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형벌하고 심판하든 그것은 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설사 사람의 육적인 소망을 빼앗는다 해도 그것 역시 사람을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며, 사람을 정결케 하는 것은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이다. 사람의 종착지가 모두 창조주의 손안에 있거늘, 사람이 어찌 스스로를 주관할 수 있겠느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사람의 삶을 정상으로 회복시켜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어 간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죠. 피조물이 평생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야 할지,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리게 될지에 대해서는 다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었어요. 그건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거죠.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명예와 이익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바쁘게 지낼지라도,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자기 운명과 남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죠. 돌아보면, 저는 제가 출세하고 가문의 영광이 되고 남들 머리 위에 앉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 꿈을 모두 자식한테 걸고 애들한테 모든 심혈을 쏟아부었어요. 애들이 충분히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느라 남편하고 죽어라 돈을 벌었어요. 몸이 당장 부서질 것 같아도 자식이 출세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고생하고 힘들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에 계속 일했어요. 저는 애들을 명문대에 보내려고 자유의 시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어요. 아들은 정신적 긴장감 때문에 잠을 못 자도 저한테 말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아파서 기침을 계속하는데도 저는 공부하는 걸 지켰어요. 전 오히려 자식한테 정신적 압박을 더해 줬고 아이를 굉장히 힘들게 만들었어요. 전 아들을 제 수중에 넣고 아이의 운명을 바꿔 보려고 했는데, 그건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동이었어요. 그래서 아들의 미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겠다고, 애가 이번 시험에 붙든 떨어지든 순리대로 따르고 더는 압박을 주지 않겠다고 기도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저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죠. 며칠 안 돼 저희 집 3층에 살던 고3 남학생이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적으로 이상해졌단 얘기를 들었어요. 밤낮없이 부모한테 “당신들이 날 망쳤어. 당신들이 날 망쳤어.”라면서 계속 욕했죠. 그때 저도 덜컥 겁이 났어요. 공부하라고 아들을 몰아붙였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어요. ‘내가 계속 공부하라고 다그쳐서 아들이 그 집 애처럼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었죠. 그래서 혼자 속으로 다시는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 뒤로는 정상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셨고, 공부하라고 다그치지도 않았어요.

결국 아들은 명문대에 들어갔어요. 기뻤죠. 하지만 마음 한 켠이 불안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지식에는 무신론의 관점이 가득 들어 있어 지식을 많이 채울수록 사탄의 독소가 그만큼 주입되는데, 그것 때문에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부인하게 되면서 구원을 잃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됐거든요. 우리 아들이 이제 대학 다니느라 앞으로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사탄의 궤변들을 더 많이 주입받게 될 텐데, 그럼 하나님 앞으로 오기는 더 어려워지잖아요. 그래서 아들한테 예배도 자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보면서 하나님과 너무 멀어지지 말라고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죠. 애가 어려서는 하나님도 믿었고, 외할머니랑 기도도 드리고 예배도 참석하곤 했으니까요. 근데 그땐 제 눈에 공부밖에 없었으니까 애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 생각을 못했거든요. 근데 지금 보면 점점 큰 재앙이 닥치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게 되니까 언제 어떤 재앙 속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두 남매한테 복음을 전해 주어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설에 애들이 집에 올 때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줬어요. 제가 읽어 줄 때면 다 듣는다고 했지만 정작 예배드릴 수 있게 해 주겠다면 거부하는 거예요. 바로 손사례를 치면서 “저 너무 바빠요.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왔는데요.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요. 요즘은 경쟁이 너무 심해서 좋은 데 취직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게 저 이제 석박사 과정을 밟는데, 이거 엄마가 꿈에 그리던 거잖아요? 좀만 있으면 출세해서 잘살 수 있어요. 엄마는 기뻐해 줘야하는데 요즘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발목을 잡는 느낌이 드네요.” 아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마음이 아프고, 할 말이 없었어요. 그 아이가 하는 말들은 매일 제가 주입식으로 했던 말이거든요. 요즘은 애가 논문 쓴다고 새벽 한 시까지 공부하고 이제 20대인데도 대머리가 되게 생겼어요. 애가 그렇게 힘들게 사는 걸 보니까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괴롭더라고요. 그리고 애를 그렇게 만든 제가 너무 미웠어요. 물론 애를 인재로 키우긴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거든요.

그 뒤로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내가 머리를 쥐어짜면서 어린 애들한테 지식과 명예를 추구하게 만들고 애들을 유능한 인재로 키우려고 했는데, 과연 마지막에 애들이 얻는 건 뭘까? 애들한테 참된 행복을 준 걸까?’ 어느날 영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어요. 『가정이 지운 짐을 두 측면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겠다. 한 측면은 부모의 기대이다. 부모 혹은 집안 어른이라면 누구나 자녀에게 저마다 조금씩 다른, 크고 작은 기대를 품고 있다.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처신하기를 바란다. 학교에서 열등생이 아닌 우등생, 수재가 되어 선생님과 동급생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 시험 성적은 늘 80점 이상이기를 바라는데 만약 60점을 받으면 때리고, 60점도 못 받으면 벽을 보고 반성하게 하거나 벌로 오래 세워 두거나 밥을 안 주거나 잠을 안 재우거나 TV를 못 보게 하거나 컴퓨터를 못 쓰게 하거나 사 주기로 했던 좋은 옷과 장난감을 안 사 준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에게 갖가지 기대를 품고, 자녀에게 커다란 희망을 건다. 다들 자녀가 굵직한 인물이 되고 출세 가도를 달려 조상과 가문을 빛내기를 바란다. … 그렇다면 부모의 이러한 바람은 알게 모르게 자녀에게 무엇으로 작용하겠느냐? (압박감입니다.) 압박감이 되고 또 무엇이 되느냐? (짐이 됩니다.) 압박감이 되고 일종의 족쇄가 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으므로 자신들의 기대에 맞추어서 자녀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교육한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이 기대하는 것을 위해 자녀에게 투자를 하거나 그 어떤 대가든 치른다. 자녀가 학교에서 수재이자 뛰어난 학생으로서 시험을 볼 때마다 90점 이상을 받아 1등을 하고, 아무리 못해도 5등 안에는 들기를 바라는 부모를 예로 들겠다. 부모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아이가 그 목표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자기들도 어느 정도 희생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목표를 실현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 복습하고 교과서를 외우면 자기들도 일찍 일어나 함께하고, 더운 날에는 아이에게 부채질을 해 주고 시원한 음료를 준비해 주거나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먹인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에게 콩국, 꽈배기 튀김, 달걀을 준비해 준다. 특히 시험 기간에는 아이에게 긴 꽈배기 하나와 달걀 두 개를 주면서 먹고 100점 받기를 바란다. 만약 네가 “못 먹겠어요. 달걀은 하나만 먹을래요.”라고 하면 “뭘 모르는구나. 달걀을 하나만 먹으면 10점밖에 못 받으니까 하나 더 먹어. 힘내서 이 달걀까지 먹으면 100점 받을 거야.”라고 한다. 아이가 “방금 일어나서 안 들어간단 말이에요.”라고 하면 “안 돼. 꼭 먹어야 해! 착하지, 엄마 말 들어.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먹으렴.”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는 고민하다가 이런다.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는구나. 다 나를 위해서 저러시는 거니까 먹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달걀이지만 사실상 삼키는 것은 무엇이냐? 압박감, 달갑지 않은 마음이다. 음식이 좋고 어머니의 기대가 아주 크니 인성과 양심상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러한 사랑에 반항해야 하고 그러한 방식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특히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특별한 기대를 건다. 자녀가 그들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그들 세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더더욱 바란다. 무용가가 되고 싶었던 부모를 예로 들겠다. 본인 성장기의 시대적 배경 또는 당시의 집안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자기는 결국 무용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는 그 꿈을 네게 투영한다. 기본적으로 네게 학교에서 반드시 상위권을 차지해야 하고 명문대에 붙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거기에 더하여 너를 무용 학원에 등록시켜 학과목 외에 여러 가지 무용을 배우게 한다.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집에서도 열심히 연습해 무용 학원 내의 에이스가 되라고 하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명문대에도 붙고 무용가도 되라고 한다. 네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용가가 되거나 명문대에 들어가 석사,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이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길뿐이다. 그들의 기대는 한편으로는 네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들어간 다음 두각을 나타내어 앞길이 유망하고 찬란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대신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부 혹은 미래의 직업 측면에서 너는 동시에 두 개의 짐을 지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들이 너를 위해서 치른 모든 대가에 보답하며, 훗날에 두각을 나타내어 그들을 호강시켜 줘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젊었을 때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그들의 꿈을 대신 이루어 줘야 한다. 힘들지 않겠느냐? (힘듭니다.) 어느 쪽 짐이든 네게는 벅차다. 어느 쪽 짐이든 모두 너를 숨 막히게 짓누른다. 특히 지금처럼 경쟁이 극도로 치열한 시대에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갖가지 요구는 말 그대로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고 잔인무도하다. 그야말로 생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뭐라고 하느냐?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이방인들이 어떤 표현을 쓰든 간에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똑똑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스라이팅이라 하고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멍에, 짐이라고 합니다.) 짐이라고 한다. 짐이라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것이냐? (아닙니다.) 이는 별도의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따로 하나를 더 짊어진 것이다. 너라는 사람과 일체가 아니다. 그것은 너의 몸, 마음, 영이 갖추고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것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지 너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까 양심에 찔리더라고요. 제가 그런 식으로 자식을 교육 시켰거든요. 전 어려서부터 밭일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는데, 그 이유가 다 어릴 때 공부를 제대로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루지 못한 소원을 자식한테 걸어 뒀고,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들어가고 앞으로 전도유망하고 출세해서 가문의 영광이 되길 바랐죠. 전 그 목표를 실현시키려고 애들이 어릴 때부터 압력을 행사했어요. 애들이 어릴 때는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걸 좋아했는데, 전 그게 애들이 공부하는 데 지장이 간다고 친정 엄마랑 예배를 못 드리게 했고, 놀고 싶어하는 것도 못 놀게 했어요. 애들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혼내면서 잘못된 생각을 주입하고 압박을 줬죠. 아들이 수능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났을 때에도 저는 성적에 지장이 갈까 봐 걱정하고, 매일 농땡이 부릴까 봐 곁에서 지켰어요. 만약 수능에서 떨어지면 모든 게 수포가 될까 봐 걱정했거든요. 아들한테 정신적으로 너무 스트레스를 줬어요. 겉보기에는 자식을 위해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러나 사실 자식이 명문대에 들어가서 남들보다 잘되길 바라는 건 결국 다 제가 돋보이기 위한 거고, 제 꿈과 소원을 이루기 위한 거였죠. 결국 알게 모르게 자식한테 무거운 짐과 압박을 줬는데, 보이지 않는 멍에를 애한테 지웠던 거예요. 물론 아들이 이상적인 대학에 붙어서 제 소원이 이루어졌고, 제 체면도 살렸고, 허영심도 채우게 됐어요. 하지만 아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졌어요. 이제는 신앙 얘기를 하면 그냥 얼버무리면서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저 명예와 이익에 끌려가기 바쁘죠. 명예와 이익을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인간관계를 잘 맺는 일에 목을 매면서 정말 힘들고 괴롭게 살고 있어요. 아들을 그렇게 해친 장본인은 저예요.

그 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예를 들어, 어린 자녀에게 항상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가고 석사, 박사도 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를 찾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거야. 그럼 그 후로는 편하게 살 수 있단다.”라고 가르쳤다고 해 보자. 아이는 네 가르침과 격려 속에서, 그리고 네가 주는 갖가지 압박 속에서 네가 만들어 준 궤도대로 살아가고 추구했으며, 네가 바라는 대로 당시 네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너는 하나님을 믿고 일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올바른 사상 관점을 갖게 되었다. 네가 이제 와서 아이에게 그런 것들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면, 그는 도리어 반박할 것이다. “지금 제가 이렇게 하는 건 당신이 바라던 것 아닌가요? 제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가르치셨잖아요? 또 그렇게 요구하셨고요. 그런데 이제는 왜 또 그러지 말라는 거죠? 제 행동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저는 지금 당신이 원하시던 대로 하고 있고, 누리고 있어요. 그러니 기뻐하고 흡족해하고 자랑스러워하셔야죠!”라고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심정이겠느냐? 울어야겠느냐, 웃어야겠느냐?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할 것입니다.)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아이가 어릴 때 네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즐거운 어린 시절을 선사했더라면, 어떤 압박도 주지 않고,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거나 고위 공무원, 부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명리와 지위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했다면, 많은 돈을 벌고 누리며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면 된다고 했다면, 단순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면 족하다고 했다면 어쩌면 하나님을 믿게 된 부모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 그는 더 즐겁게 살아갈 것이며, 그렇게 큰 삶의 스트레스도, 사회로부터 오는 수많은 압박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명리니 뭐니 하는 건 얻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행복하고 평온하고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부터 부모의 거듭된 충동질과 종용, 그리고 압박 속에서 한결같이 지식을 배우고 재물과 명리를 추구해 왔다면, 결국 명리와 지위를 얻고 누리면서 잘살고 돈도 많이 벌겠지만 삶이 무척 피곤할 것이다. 너를 만날 때마다 피폐한 몰골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집이나 부모 곁에 돌아갈 때만 가식의 가면을 벗고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 문밖으로 나가면 다시 가면을 써야 한다. 너는 그의 피폐하고 딱한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프겠지만, 그를 돌아오게 할 힘이 전혀 없으며, 이미 돌이킬 수도 없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네 가르침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스스로 알고 추구한 것이 아니다. 이는 너의 가르침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자식의 그런 얼굴, 그런 생활 상태를 보면 괴롭지 않겠느냐? (괴로울 것입니다.) 하지만 네게는 힘이 없으니 후회와 괴로움만 남을 뿐이다. 너는 아이가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돌아올 수 없다고, 네게는 돌이킬 힘이 전혀 없다고, 이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네가 아이를 망쳤고 네 잘못된 사상 교육과 인도가 아이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후회만 남을 것이다. 자식이 고생하며 이 사악한 사회에 패괴되고 삶에서 비롯된 각종 압박을 견디는 것을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면서도 아무 방법이 없으니 그저 “집에 자주 들르렴. 맛있는 거 해 주마.”라고 말할 뿐이다. 네가 해 준 밥을 먹는다고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그는 이미 사상이 성숙하고 형태를 갖췄으니 손에 들어온 명예와 지위를 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렇게 곧장 나아갈 뿐 돌아올 수는 없다. 이는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그릇되게 지도하고 잘못된 사상을 주입해 야기한 나쁜 결과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이 말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어요. 근데 볼 때마다 가슴을 아프게 찔렀고, 괴로움과 후회가 밀려와 눈물이 났어요. 어릴적 아들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서 외할머니와 함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배를 좋아했었어요. 그런데 전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 “모든 게 다 쓸모없고, 오직 공부만이 최고다.”, “마음을 쓰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힘을 쓰는 자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라는 사탄의 사상과 관점에 따라 오직 출세하고 가문을 빛내기를 추구했어요. 그리고 그런 사상을 아들한테 주입하면서 아들을 지식의 수렁에 밀어 넣었어요. 결국 제 아들은 명예와 지위를 좇는 길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죠. 특히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니 더 그랬어요. “너는 아이가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돌아올 수 없다고, 네게는 돌이킬 힘이 전혀 없다고, 이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네가 아이를 망쳤고 네 잘못된 사상 교육과 인도가 아이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후회만 남을 것이다.” 하나님은 제 심정을 대변해 주셨어요. 전 아들이 집에 올 때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더 보게 하려 하지만, 아들은 항상 반박하고 사절하기 바빴고, 오히려 제가 자기 발목을 잡는다고 했어요. 그런 말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어요. 특히 아들이 매일 명예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걸 볼 때 더 그랬어요. 젊은 나이에 탈모까지 생기고 매일 고단한 몸으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추가로 계속 교수님의 생각과 취미를 고려하고, 비위를 맞춰 가면서 살았죠. 윗사람들 앞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고, 일을 하나 잘못해 눈밖에 나서 벼슬길을 망칠까 봐 늘 조심스러워하면서 살더라고요. 매일 가면을 쓴 채로 누구보다 힘들게 살아가는 걸 보는데, 그게 다 제가 그렇게 망쳐 놓은 거였죠. 지식을 좇으라고 북돋운 제가 오히려 아들을 해친 거예요. 이제 와서 깨달은 거지만 제가 했던 건 아들을 사랑한 게 아니라 해친 거였어요. 아들을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희생양으로 만든 거예요. 특히 우리 아들 또래의 교회 형제자매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고,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사탄의 독소에 묶이지 않고 누구보다 즐겁고, 자유롭게 사는 모습을 볼 때면 후회가 밀려왔어요. 제가 아들한테 그런 관점을 주입하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는 명예를 추구하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더 잘살겠다고 괴롭고 막막한 삶을 살고 있거든요.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후회되고 제가 미웠어요. 그래서 반성을 해 봤죠. ‘난 왜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 했고,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그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어느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사탄은 명예와 이익을 가지고 사람의 생각을 지배한다. 사람이 명예와 이익에만 사로잡혀 이를 위해 분투하고, 고생하고, 치욕을 참고, 명예와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이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게 만든다. 이렇게 사탄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워 놓았다. 족쇄가 채워진 사람은 족쇄에서 벗어날 능력이나 용기가 없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족쇄를 차고 힘겹게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인류는 명예와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신하며, 갈수록 사악해지고 있다. 이렇게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이 사탄의 명예와 이익에 넘어가 파멸한다. 지금 보니 사탄의 이런 음흉한 속셈이 가증스럽지 않으냐? 오늘은 너희가 아직 사탄의 음흉한 속내를 간파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명예와 이익이 없으면 삶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명예와 이익이 없으면 앞으로 방향과 목표를 찾을 수 없고 칠흑같이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죠. 사탄은 명예와 이익으로 사람을 패괴시키고, 미혹하고, 해치고 있었는데, 오직 명예와 이익만을 좇게 만드는 거였죠. 돌아보면, 제가 어렸을 때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거든요. 그래서 돈 벌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사람들의 무시도 많이 당했죠. 근데 배운 게 많고 명망이 있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다 대접받는 거예요. 그게 너무 부러웠어요. 전 제가 무시를 당하는 건 배운 게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모든 희망을 자식한테 걸었고 제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식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어요. 그리고 그걸 위해 모든 시간과 대가를 투자하면서 누구보다 괴롭고 힘들게 살았고, 아들한테도 고통과 고달픔을 안겨 줬어요. 나중에 아들은 원하는 명예와 이익을 얻었지만, 결국 하나님과는 더 멀어졌고 하나님의 말세 구원을 놓치게 됐어요. 이제는 깨달았죠. 제가 추구했던 명예와 이익은 사탄이 저와 아들에게 채운 무형의 족쇄였어요. 사탄은 명예와 이익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미혹했어요. 오직 그걸 위해 분발하게 하여 진리를 추구할 마음을 갖지 못하게 만들고 계속 사탄에게 끌려가고, 사탄을 위해 기꺼이 고생하게 함으로 한 걸음씩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게 만들어 자기가 삼키려고 하는 거였어요. 그게 사탄의 음험한 마음과 간계였어요. 제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 보니 다 그랬어요. 삼촌의 아들도 대학에 갔지만 부모들은 아들이 택한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백을 이용해 전공을 바꿨어요. 하지만 심한 압박감으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이제는 자기 몸도 못 챙기는 신세가 됐죠. 또 학업 실패로 농약을 먹거나 투신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그런 뼈아픈 교훈들이 저를 정신 들게 해 주고, 경계심을 갖게 해 줬어요. 사실 사람이 사는 동안의 빈부는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죠. 명예와 이익은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 주기는커녕 더 깊은 고통의 심연으로 밀어 넣고 있었어요. 정말 사탄이 주는 해악을 보니 너무 가증스러웠어요. 한편으로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인도해 주신 덕에 전 고통의 근원을 찾게 됐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했을 때의 위험성과 결과에 대해 알게 됐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또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고심도 알게 되니까 더는 사탄에게 우롱당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이제는 명예와 이익의 멍에에서 벗어나 진리를 추구하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기로 다짐했죠.

그 후에 저는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을 보면서 올바른 길을 찾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아이가 어릴 때 네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즐거운 어린 시절을 선사했더라면, 어떤 압박도 주지 않고,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거나 고위 공무원, 부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명리와 지위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했다면, 많은 돈을 벌고 누리며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면 된다고 했다면, 단순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면 족하다고 했다면 어쩌면 하나님을 믿게 된 부모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 그는 더 즐겁게 살아갈 것이며, 그렇게 큰 삶의 스트레스도, 사회로부터 오는 수많은 압박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명리니 뭐니 하는 건 얻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행복하고 평온하고 안정적이었을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올바른 길을 찾았어요. 자식을 교육할 때는 지식을 추구하고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고, 출세를 추구하도록 교육하면 안 되더라구요. 그저 자식들이 평생 즐겁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마음에 어떤 압박도 받지 않고 자유와 해방감을 누리면서 살게 해 줘야 하더라고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됐어요. 저와 제 자식은 하나님 앞에서 다 피조물이고, 우리의 운명도 다 하나님께 달렸죠. 일생을 어떤 운명으로 살 것인지,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지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하심에 달려 있는 거죠.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제가 자식의 운명을 바꿔 줄 수도 없었고요.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이들이 집에 왔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려주는 거더라고요. 나중에 그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고 없고는 하나님께 달린 거죠. 저는 그저 제 본분과 책임을 다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완수하면 되더라고요. 이렇게 제가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바뀌게 된 건 온전히 하나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그저 진리를 잘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제 본분을 잘 이행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요. 그런 삶이 진짜 의미 있고 가치가 있으니까요.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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