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체포로 드러난 나
2023년 10월 14일 저녁, 한 자매가 저에게 신광교회의 리더가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깜짝 놀라 ‘아! 설마 내 딸은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서둘러 메신저를 열었다가 ‘민징이 체포되었어요….’라는 메시지를...
어렸을 때 저는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네 둘째 삼촌은 불효자야. 네 할아버지를 봉양하지 않잖니. 다 이 아빠랑 네 엄마가 할아버지를 봉양했지. 자식을 키우는 건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란다. 너도 나중에 우리를 끝까지 모셔야 한다!” 저는 자라서 부모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고, 제 딸도 나중에 저의 노후를 끝까지 책임져 주기를 바랐습니다. 딸이 말을 배우자 제가 물었습니다. “나중에 커서 돈 벌면 누구한테 줄 거니?” “나중에 커서 돈 많이 많이 벌어서 아빠 엄마 줄 거예요.” 저는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우리 착한 딸, 엄마가 널 헛키우지 않았구나!” 딸은 무척 총명해서 무엇을 배우든 바로바로 알아들었고, 시험에서는 늘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딸이 이렇게 똑똑하니 장래에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돈이 아무리 없어도 꼭 공부는 시켜야지. 나중에 대학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우리 노후는 문제없을 거야.’
2003년 4월, 저는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25일간 구류되었습니다. 경찰에 또다시 잡히지 않으려고 11월는 집을 떠나 외지에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그때 마음속으로 무척 갈등했습니다. ‘딸이 반년만 있으면 수능을 보는데, 내가 이때 집을 떠나면 딸아이 공부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만약 딸의 대학 시험에 영향을 줘서 앞길을 망치게 되면, 딸이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날 어미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지? 나에겐 딸 하나뿐인데, 만약 딸이 나를 외면하면 나중에 늙어서 누구한테 의지한단 말인가? 하지만 떠나지 않았다가, 만약 또다시 붙잡히기라도 하면 딸에게까지 분명 피해가 갈 테고, 그럼 딸의 앞날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도 형을 선고받을 테고, 그때는 본분을 이행할 수 없게 되겠지.’ 이런저런 생각 끝에 저는 결국 집을 떠났습니다. 경찰이 계속 저를 찾았기 때문에 저는 감히 집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저의 정력과 체력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혈압도 조금 높아졌습니다. 눈도 침침해지고 이명과 난청 증세까지 생겼습니다. 힘든 일을 조금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려 잠시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벌써 늙었나? 늙으면 누가 나를 봉양해 주지?’ 그때 딸이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늙으면 딸에게 의지해야 할 텐데!’ 2021년, 저는 언니 집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딸이 외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모들에게는 무척 효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나한테도 못되게 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딸을 한번 만날 수 있기만을 고대했습니다. 이듬해 8월 말, 제가 외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언니로부터 딸이 며칠간 집에 돌아왔다는 편지를 받고는 그날 밤 언니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딸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씁쓸했지만, 딸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제가 17년 동안 딸을 돌보지 않았으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나중에 딸을 만났을 때, 저는 너무 기뻐서 안아 주고 싶었지만 딸은 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습니다.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잠시 후, 저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널 항상 걱정했단다. 경찰에 잡혀서 너한테까지 피해가 갈까 봐 집에 돌아올 엄두도 못 냈어. 그동안 고생 많았지.” 딸은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고생 안 했어요. 저 이제 성인이에요. 힘들지 않아요!”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리고는 30분도 채 안 되어 자리를 떠났습니다. 제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데, 너를 돌보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네가 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기술이라도 하나 배워 나중에 잘되라고 집에 있던 전 재산 삼천 위안을 꺼내 전자 키보드까지 사 줬잖니. 내가 네게 쏟은 심혈이 얼만데, 이 어미를 외면한단 말이냐? 정말 헛키웠구나!’ 저는 생각했습니다. ‘호적도 중국 공산당 정부에 의해 말소되고, 남편과도 이혼하고, 딸마저 나를 어미로 인정하지 않는구나. 이제 예순이 다 돼서 몸이 해마다 쇠약해지는데, 늙으면 어떡하지? 아프면 누가 돌봐 줄까? 누가 나를 끝까지 모셔 줄까?’ 밤에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딸이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으니 노후를 봉양해 주리라는 기대는 더더욱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여 오는 듯 괴로웠습니다. 그 며칠 동안 저는 정신없이 멍하게 지냈고, 본분을 이행할 마음도 없었으며, 복음을 전하러 가도 그저 시늉만 할 뿐이었습니다.
2023년 정월, 쑨징 자매가 병으로 쓰러졌는데 남편이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자매는 병드니 남편이 돌봐 주는데, 나는 아프면 어떡하지? 딸은 나를 어미로 여기지도 않고. 만약 내가 거동을 못 해서 자매들한테 신세라도 진다면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형제자매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지! 게다가 혼자 사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무도 모를 테고, 혹시 제때 병원에 가지 못해 집에서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저는 노후를 책임져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시름과 걱정에 잠겼습니다. 하루는 말씀을 묵상하던 중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희망을 좀 거는 것, 자식이 커서 효도하고 부모를 모시기를 바라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잘못이라고 할 수 없고 지나치지도 않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무엇이 문제이겠느냐? 그녀는 항상 자식에게 의지해 남은 생을 편안하게 살려고 했고, 늘 자식에게서 무언가를 누릴 수 있길 기대했다. 여기에서는 무엇이 잘못된 관점이겠느냐? 왜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겠느냐? 그녀의 그런 관점은 어디에서 비롯됐겠느냐? 사람은 늘 특정한 삶의 방식과 기준에 과욕을 부리는데, 그것은 바로 아직 하나님이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정했는지, 자신의 운명이 어떤지 알지 못할 때부터 자신의 삶의 기준은 행복해야 한다고, 평생 평안하고 즐거워야 한다고, 큰 부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에게 도움을 받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계획해 놓은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의 길과 목표, 종착지 등 모든 내용을 이미 계획해 놓았다. … 항상 그런 소원과 계획을 품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아등바등하며 받은 이 모든 고통은 무엇에서 비롯되었겠느냐? (그녀의 소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맞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그런 소원을 가지게 되었겠느냐?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녀는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하나님의 주재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2)> 중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것이 바로 제 상태였습니다. 제가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할 때가 마흔이 넘은 나이였는데, 그때는 젊고 건강해서 늙으면 어떡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고 몸이 해마다 약해지니 앞날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만약 병으로 쓰러져 혼자 생활이 불가능하면 돌봐 줄 사람이 없는데 어떡하나?’ 집을 떠난 사이 호적은 말소되었고, 남편과도 이혼했습니다. 원래는 딸이 이모들에게 효도하니 저한테도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저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니 딸이 제 노후를 봉양해 줄 거라는 기대는 더더욱 할 수 없었습니다. 딸에게 기댈 수 없게 되자, 저는 나중에 병들면 돌봐 줄 사람이 없을까 봐,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게 될까 봐 걱정했습니다. 특히 쑨징 자매가 아플 때 남편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말을 들으니, 저 자신이 너무나 외롭고 가련하게 느껴졌습니다. 막막한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저는 입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도 없었습니다. 늘 스스로를 위한 대비책을 세울 궁리만 했고, 심지어 딸을 제 의지처로 삼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 위험했습니다.
그 후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왜 내 노후를 끝까지 책임져 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그렇게 신경을 쓸까?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때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부하고 낡은 관념을 지닌 채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실 효도하고 부양해 주는 자식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죽은 뒤에는 누가 장례를 치러 주고 곡을 해서 체면을 세워 줘야겠죠. 안 그러면 집 안에서 죽었는데 아무도 몰라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다면, 그건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면 뭐가 어떻단 말이냐?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육이 죽으면 영혼은 그 즉시 떠나간다. 육이 죽을 때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다 똑같이 죽는 것 아니겠느냐? 설령 관에 들어가 성대하게 장례가 치러지고 땅속에 묻힌다고 해도 그 육 역시 썩어 문드러지지 않겠느냐? 사람은 모두 ‘자식이 곁에 있어서 관에 넣어 주고 수의도 입히고 화장도 해 주고 으리으리하게 장례를 치러 주면 얼마나 멋질까? 죽었는데 아무도 장례를 치러 주지 않고, 임종을 지켜 주는 사람도 없다면 그건 인생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거나 다름이 없지.’라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이런 것들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외진 시골에 사는 많은 사람, 나이가 많고 식견이 별로 없는 사람은 반드시 부모를 노후에 봉양해 주고 장례를 치러 줘야 한다는 그런 사상 관점이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에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그로 인해 심각한 해를 입게 된다. 그 독소가 네 내면에 줄곧 숨어 있으면 너는 그것에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 그것을 파내고 제거하면 해를 입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잘못된 행동이든 다 그릇된 사상 관점이 주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 집 안에서 썩어 갈까 봐 늘 이렇게 생각한다. ‘아들을 낳아야겠어. 그리고 아들이 크면 멀리 떠나지 못하게 해야지. 만에 하나 내가 죽을 때 아들이 곁에 없으면 어떡해? 노후에 나를 봉양해 줄 사람도,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없으면 인생이 얼마나 한스럽겠냐고! 노후에 봉양해 주고 장례를 치러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삶이 헛되지 않고, 인생이 완벽해질 거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한테 웃음거리가 되지는 말아야지.’ 이런 사상은 너무 낡아빠진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부하고 타락한 데다가 육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육은 사실 한 푼 값어치도 없으며, 생로병사를 다 겪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을 때 진리를 얻고 구원받아야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진리를 얻지 못한 채 육이 죽어서 썩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자식이 아무리 효도해 봤자 너는 그것을 누릴 수 없다. 죽은 후에 자식이 관에 넣고 장사 지낸다고 할지라도 그 육이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느냐? 지각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어떤 지각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사는 동안 이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며, 자식이 장례를 치러 주는 것에 관한 요구치가 무척 높다. 이는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부모로서 먼저 자녀가 효도를 할지, 노후에 봉양해 주고 장례를 치러 줄지 등의 일에 관해 전통적이고, 진부하고, 타락한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그 일을 올바로 대해야 한다. 만약 자녀에게 정말 효심이 있다면 너는 그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자녀가 여건이 안 되고 그럴 만한 정력이 없거나 너에게 효도할 생각이 없어서 훗날 네가 늙었을 때 곁에서 보살펴 주지 못하고, 혹은 네가 죽었을 때 장례를 치러 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에게 요구하거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때가 있고 죽는 장소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디에서 죽을지를 모두 정해 놓았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제 상태를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늙으면 끝까지 노후를 책임져 줄 사람도 없고, 혹시라도 죽어서 집에서 시신이 썩어도 아무도 모를까 봐 늘 걱정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소극적이고 연약해져서 시름과 걱정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실 제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으며, 어디에서 죽을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딸이 저의 임종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걱정과 시름 속에서 살았던 것은 육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고, 육이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꿰뚫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육은 사실 한 푼 값어치도 없으며, 생로병사를 다 겪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육이 죽으면 아무런 지각도 없어집니다. 설령 누군가 임종을 지키고 관에 넣어 장사를 지낸다 한들 썩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자녀가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러 준들 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알기나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는 이 일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실,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했다면 설령 성대하게 장례를 치른다 해도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으며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살아 있을 때 진리를 얻고 구원받아야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오직 진리를 얻고, 사탄의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구원받아 아름다운 종착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또 한 단락의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자녀와의 인연이 얼마나 될지, 자녀에게서 얼마나 보답받을 수 있을지, 자녀가 부양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을지 등은 사실 모두 정해져 있고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지, 사람이 일방적으로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자식에게서 뭔가 이득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런데 네 운명에 그런 것이 있는지는 왜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냐? 너와 자녀 사이의 인연이 얼마나 오래가는지가 핵심이다. 이번 생에 네가 종사하는 모든 일이 자녀와 관계가 있을지, 네게 큰일이 생겼을 때 자녀가 거기에 관여할지 등은 모두 하나님이 정한 바에 달려 있다. 만약 하나님이 정해 놓지 않았다면,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다. 자녀를 성인으로 키우면 네 책임은 끝이 나니, 네 자녀는 때가 되면 자연히 떠날 것이다. 사람은 이 일을 밝히 알아야 한다. 이 일을 밝히 알지 못하면 언제나 사사로운 욕망과 요구를 갖게 될 것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갖가지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죽을 때가 되어서야 네가 평생 어리석은 일을 수도 없이 했음을, 관념과 상상에만 의존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고 무지한 일임을, 그것은 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한 바에도 부합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명확했습니다. 자녀가 효도하는지, 저의 노후를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있는지는 제게 그럴 운명이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딸이 제 노후를 봉양하도록 정해 놓지 않으셨다면 제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설령 딸이 제 노후를 봉양하겠다고 약속한다 해도, 딸은 천리 밖에서 일하고 생활하는데, 제가 늙고 병들어 죽는다 해도 제 곁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저는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저 딸이 저를 외면해서 노후를 기댈 수 없다는 이유로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우롱하는 것이고, 정말 사서 고생하는 격이었습니다. 이웃 마을에 팔십이 넘은 어떤 할머니는 혼자 생활할 수 없는데도 세 아들 중 누구 하나 돌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비참하게 굶어 죽었고, 누구 하나 임종을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반면, 한 나이 든 자매는 딸이 외국에 살면서 돌아오지 않았지만, 지금 남편과 함께 일흔이 넘도록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플 때면 조카가 차를 몰고 병원에 데려다주곤 했습니다. 부부는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모두 하나님의 명정과 안배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지배에 순종하고, 더 이상 노후 문제로 걱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것은 인류의 본능이자 책임이고 의무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되며, 누가 자기를 부양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 자녀를 낳아 키워서도 안 된다. 사람이 자녀를 키우는 목적은 그 자체로 부당하다. 그렇기에 자녀가 효도하지 않을 때, “절대 자식을 키우지 마세요.”라는 그릇된 말을 하는 것이다. 목적이 불순하니 그에게 생겨난 사상 관점도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바로잡고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바로잡고 내려놓아야겠느냐? 어떤 목적이 순수하고 올바른 것이겠느냐? 어떤 사상 관점이 옳은 것이겠느냐? 그러니까 자식과의 관계를 어떻게 수립해야 옳겠느냐? 먼저,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네가 선택하고 원한 것이다. 자식들은 수동적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대를 잇는 책임,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바를 제외하고 부모 입장에서 주관적인 원인과 출발점은 자식을 낳길 원한 것이다. 너는 자식을 낳기를 원했으니 마땅히 그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 독립시켜야 한다. 너는 자식을 키우는 일에서 이미 많은 것을 얻고 큰 유익을 보았다. 먼저, 너는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시간을 누렸고, 또 자녀를 키우는 과정을 누렸다. 비록 그 과정에서 세상의 온갖 쓴맛과 단맛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네가 자녀 곁에 있어 주고, 자녀가 네 곁에 있어 줌으로써 느끼는 행복이 더 컸을 것이다. 이는 인생을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너는 이러한 것들을 누렸고, 이미 자녀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 그렇지 않으냐? 자녀는 부모에게 함께하는 시간과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부모는 대가와 시간, 정력을 지불하여 자녀를 키움으로써 작디작은 생명이 점차 커서 성인이 되는 과정, 사리 분별이 안 되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생명체가 조금씩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언어 구성 능력을 갖추며 각종 지식을 배우고 판별하는 능력을 갖추고 부모와 대화하고 소통하며 평등하게 어떤 일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추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부모에게 있어 이는 가장 행복한 과정으로,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이미 자녀를 통해 아주 많은 것을 누리고 깨달았으며, 이는 부모에게 크나큰 위안과 수확이 되었다. 자식이 네게 효도할지 말지, 네가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걸 수 있을지, 자식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너희 사이에 함께 살아갈 인연이 있는지를 봐야 하며, 이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한편, 자녀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갈지, 생활 여건이 어떨지, 너를 부양할 조건이 될지, 경제적으로 여유로울지, 네게 물질적인 누림과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역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이 밖에, 부모인 네가 자녀가 주는 물질과 금전 혹은 감정적 위안을 누릴 수 있을지도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자녀 입장은 잠시 접어 두고 부모 입장에서만 얘기해 보기로 하자. 부모는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해야 한다고, 반드시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고, 네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보여야 할 태도이자 부모가 갖춰야 할 존엄성이다. 물론 더 중요한 부분은 부모라는 피조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자녀를 대하는 원칙이다. 만약 자녀가 효심이 있어 너를 보살펴 주고자 한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자녀가 너를 보살피지 않으려 해도 온종일 한탄하며 억울해하거나 씁쓸해하거나 자녀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삶과 생존은 마땅히 자기 능력 범위 안에서 스스로 책임지고 부담해야지 다른 사람, 특히 자녀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함께하지 않고 옆에서 도와주지 않는 이런 삶을 능동적이고 올바르게 마주해야 할 것이다. 설령 자녀와 떨어지더라도 삶에서 발생하는 일을 독립적으로 마주해야 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분명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책임과 의무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기로 선택한 것이니, 자녀를 양육하며 아무리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자식을 키워 노후를 대비한다’는 전통 관념의 영향을 받아 딸에게 노후를 끝까지 책임져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제가 딸을 어릴 때부터 키웠으니 딸도 제가 늙으면 봉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이 관점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딸을 양육하는 것은 본래 저의 책임과 의무이자 제가 해야 할 일인데도, 저는 딸을 키우며 치른 대가를 딸에게 노후 봉양을 받기 위한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자 화를 내고 괴로워했으니, 저는 정말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열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비록 모녀 사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피조물이며 평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딸은 저의 노예가 아니며, 제가 딸에게 노후 봉양을 요구하는 것은 이성이 없는 행동입니다. 저는 딸을 키우는 과정에서 이미 제가 얻어야 할 몫을 얻었습니다. 태어나서 아빠, 엄마를 부르고, 성인으로 자라기까지, 딸은 가족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딸을 키우면서 제 생각은 성숙해졌고, 많은 인생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딸을 키우며 얻은 수확입니다. 앞으로 딸이 저를 돌보고 싶어 하지 않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제 능력 범위 안에서 제 삶을 책임져야 하고, 딸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습니다.
나중에 저는 한 단락의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네가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누가 네 마음을 진실로 위로해 줄 수 있겠느냐? 누가 너의 어려움을 진실로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어려움을 진실로 해결해 줄 수 있다. 네가 병에 걸렸을 때 자식이 곁에서 차를 대접하고 물을 따르며 시중을 들면 너는 매우 기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식은 귀찮아하고 시중을 들려 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그때는 정말 외로워질 것이다! 너는 이제 동반자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동반자가 없어진 것이냐? 사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줄곧 너와 함께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자 피난처이며 유일하게 사람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그러니 너에게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닥치든, 어떤 억울한 일과 소극적이고 연약해지게 하는 일이 닥치든 너는 서둘러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에게 위로를 주고 너의 어려움과 각종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너의 외로움은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고 진리를 얻는 기본 조건이 될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고 연약할 때나 어려움과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이끌어 주시고,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며, 시련을 이겨 내도록 도와주십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현기증이 있었습니다. 그 병은 30여 년간 저를 괴롭혔고, 병이 도질 때면 이틀은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설령 딸이 효도한다 해도 그저 물이나 밥을 가져다줄 수 있을 뿐, 제 고통을 해결해 줄 수도, 저를 대신해 아파해 줄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 제 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았고, 저는 더 이상 병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병을 없애 주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 20년째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데, 줄곧 건강했습니다. 2022년 전염병이 심각해서 많은 사람이 감염되었을 때도, 저는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큰 병 없이 지내고, 평소에도 흔한 병들은 민간요법으로 금방 좋아집니다. 저는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보호로 지금까지 왔고, 하나님이 바로 저의 의지처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난 뒤로 더 이상 노후를 끝까지 책임져 줄 사람이 있는지 시름하거나 걱정하지 않게 되었고, 마음이 훨씬 자유로워졌습니다. 저는 복음 전파에 마음을 쏟았고, 복음 사역에서도 점차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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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오량(高亮) 저는 가난한 시골 가정에서 자랐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취직을 했고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을 얻었죠. 그 뒤로도 열심히 돈을 벌었지만 궁핍에서 벗어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제 상황을 잘 아는 매부가 굴착기 운전을...
중국 원놘(溫暖)제 아들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고 키도 잘 크지 않았어요. 집이 학교랑 가까워서 저는 자주 애를 데리고 운동장에 나가 달리기하면서 운동을 시켰는데, 그때 체육 코치님이 아들을 눈여겨보셨죠. 2020년에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중국 쑤신(蘇昕)저희 부모님은 학력이 낮아 힘든 육체노동밖에 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오빠의 공부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셨고, 먹고 것 입을 것 아껴 가며 저희를 학교에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당신을 학교에 보내 주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