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가 다시 덮쳤을 때
중국 양이(楊夷)1998년,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재림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말세에 진리를 발표하시고 심판하시는 사역은 사람을 정결케 하시고, 구원하시어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데리고 가기...
저는 스물여덟 살에 알레르기성 천식을 앓게 되었습니다. 병이 도지면 숨을 쉴 수 없고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지럽고 멍했으며, 밤에는 도저히 누울 수가 없어서 무언가에 기댄 채 밤새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늘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고, 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습니다. 한번은 병세가 심해져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는데, 열흘 남짓 입원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링거를 맞고 산소호흡기까지 착용했지만 숨이 막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제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해 큰 병원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가족들이 들것으로 저를 옮겼는데, 큰 병원 건물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제 정말 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열흘간의 응급 치료 끝에 병세가 안정되었습니다. 퇴원 후 저는 집에서 몸을 돌보며 요양했고, 자칫 부주의했다가 병이 재발할까 봐 두려워 매일 조심스럽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말했습니다. “이 병은 의학적 난제에 속합니다. 증상을 조절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완치는 불가능합니다. 응급 약을 늘 곁에 두세요. 제때 응급 처치를 못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젊은 나이에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몹시 비참해졌습니다. 병세가 위중해 사경을 헤맸던 당시의 장면을 떠올리면 저는 소름이 돋습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저는 좋다는 의원과 약을 사방으로 찾아다녔지만, 그것들은 모두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았습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은 제게서 삶에 대한 희망을 앗아갔습니다. 2009년, 어머니께서 제게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마지막 사역이며, 제가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더없는 축복임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추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 주시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거야. 어쩌면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광경까지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저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삶의 희망을 다시 불태웠습니다. 그 후 저는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병세가 전처럼 심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여전히 병이 자주 도지기는 했지만 약을 좀 먹으면 괜찮아졌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본분을 이행할 때 더욱 힘이 났습니다. 한번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한 자매님을 만났는데, 그 자매님은 자기도 하나님을 믿기 전에 저와 같은 병을 앓다가 하나님을 믿은 후 줄곧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자매님을 고쳐 주셨으니 나도 고쳐 주실 거야. 지금은 내가 바치고 헌신하는 게 너무 적어서 아직 자격이 없을 뿐이고, 내가 더 많이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날 박대하지 않으실 거야.’
그 후, 저는 문서 본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문서 본분을 맡게 된 건 하나님의 은혜이자 높여 주심이니 열심히 협력해야 해. 어쩌면 내가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 걸 보시고 하나님께서 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 주실지도 몰라.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니, 내 병을 완전히 고쳐 주실 수도 있지.’ 저는 그런 마음을 품고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바쁘게 일하며 본분을 이행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2017년이 되자, 일부 약은 장기간 복용한 탓에 약효가 떨어졌고 효과가 좋은 약은 너무 비싸서 저는 스테로이드제에 의존해 병세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병으로 인한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줄곧 본분을 이행했으니, 어쩌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내가 바치고 헌신한 것을 보시고 내 병을 고쳐 주실지도 몰라. 그러면 나도 정상인처럼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지.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제가 그런 아름다운 꿈에 젖어 있을 때, 제 병세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오랫동안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한 탓에 부작용이 나타나 몸이 붓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 상태를 본 책임자는 저에게 집에 돌아가 치료를 받으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몹시 소극적으로 변했고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지금 내 병이 이렇게 심각하니, 오늘 살아도 내일의 해를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하물며 앞으로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건 말할 것도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고, 마음속에는 원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지난 몇 년간 저는 본분을 이행하며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적잖이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렀고, 본분 이행에서도 성과를 냈는데, 어째서 저를 지켜 주시지 않았나요? 만약 제가 이대로 죽는다면, 제가 그동안 바치고 헌신한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께서는 이 병을 통해 저를 드러내고 도태시키시려는 건가요? 이런 결과를 맞이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병을 잘 치료하고 몸을 돌볼 걸 그랬어요. 그럼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저는 생각할수록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도 않고 기도도 드리지 않았으며, 매일 살아 있는 송장처럼 멍하니 지냈습니다. 하나님과 아주 멀어진 것 같았고, 마치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마음속으로 덜컥 겁이 난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내적 상태가 잘못됐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어떤 공과를 배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제가 자신의 문제를 알 수 있도록 저를 깨우쳐 이끌어 주십시오.”
하루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 어떤 목적과 야심, 저의도 없는 초심을 지닌 자가 있느냐? 설사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본 사람이 몇몇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최종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있다. 사람은 생명 체험 과정에서 늘 ‘나는 하나님을 위해 가정도 직장도 내려놓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주셨지? 그동안 내가 받은 복이 있는지 한번 계산하고 따져 봐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헌신하고 뛰어다니며 수많은 고난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동안 내가 한 것에 대해 어떤 약속을 해 주실까? 내 선행을 기억해 주실까? 내 결말은 어떤 것일까? 복은 받을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은 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계산하고, 저의와 야심을 품고, 하나님께 장삿속을 들이밀며 뭔가 얻어 내려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며, 하나님을 상대로 계산하고, 자신의 결말을 두고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논쟁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며 하나님께 구두 증거를 구걸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장삿속을 들이밀며, 끊임없이 뭔가를 얻어 내려고만 한다. 심지어 갈수록 심해지고 탐욕스러워진다.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동시에, 또 끊임없이 하나님과 논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시련이 임하거나 특정 환경에 처했을 때 항상 나약해지고 일을 태만히 하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는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사람은 하나님을 화수분이나 만물 상자로 삼고, 자신을 하나님의 가장 큰 채권자로 간주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약속을 얻어 내는 것이 생득적 권리이자 책무라고 생각하고, 반면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며 사람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해야 할 책임이라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깊은 이해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노골적인 이익 관계, 그러니까 복을 받는 자와 복을 베푸는 자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는 피고용인과 고용인의 관계다. 피고용인의 수고는 오직 고용인이 주는 품삯을 받기 위함이다. 이런 이익 관계에는 애정은 없고 거래만 있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없고 베풂과 연민만 있다. 또 이해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참는 것과 기만하는 것만 있으며, 친밀한 관계는 없고 영원히 넘을 수 없는 깊은 골만 있다. 상황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누가 이 흐름을 되돌릴 수 있겠느냐? 또 이런 관계가 위험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확신컨대, 모두가 복을 받는 기쁨에 도취되어 있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처럼 난감하고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은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부록 3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 안에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것은 바로 저의 실제 내적 상태였습니다. 저는 마음이 몹시 찔리고 괴로웠으며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그 몇 년 동안, 겉으로 보면 저는 병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는 것 같았지만, 저의 진짜 목적은 제가 버리고 헌신한 것과 제 사역 성과를 자본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제 병을 고쳐 주시게 하고, 그것들을 제가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 모든 일은 저 자신의 복과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과 거래한 것이었으며, 결코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병은 불치병이었고, 오랜 세월 병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저는 살아갈 용기를 잃었습니다. 제가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울 때 하나님의 복음이 제게 임했고, 저는 하나님께 권병과 능력이 있음을 보고 하나님께 희망을 걸었습니다. 특히 한 자매가 하나님을 믿은 후 병이 나은 것을 보고 나서는 제가 본분을 이행하며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저를 박대하지 않으시고, 제 병을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저를 하나님나라로 이끌어 영생을 누리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제게 어떤 본분을 맡겨도 저는 받아들이고 순종했고, 몸이 아프면 약으로 버틸 뿐 본분에 지장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 병세가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지고 심지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자, 저는 즉시 태도를 바꾸어 하나님께서 제게 공의롭지 않으시다고 여기며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보지도 않고 기도도 드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전에 바치고 헌신한 것까지 후회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에 비추어 본 뒤, 저는 저와 하나님의 관계가 노골적인 이해관계이자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임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수고와 노력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기만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20대였을 때 제 병이 그렇게 심각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만약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진작에 죽었을 것이고, 오늘날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두 번째 생명을 주셔서 지금까지 살게 해 주셨는데, 저는 감사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제가 버리고 헌신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정말 인성이 없었고, 저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저는 바울이 생각났습니다. 그 역시 줄곧 수고하며 사역하고 버리고 헌신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을 받고 면류관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는 패역한 말을 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습니다. 만약 제가 회개하고 변화하지 않은 채 무작정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만 요구한다면, 결국 저 역시 바울처럼 하나님께 버림받고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 점을 깨닫자 저는 더욱 후회스러웠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복을 추구하는 잘못된 길을 걸어온 제 자신이 미웠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난 몇 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당신에 대한 사랑과 보답이 조금도 없었고, 계속 당신을 이용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비인간적입니다! 하나님, 저는 잘못된 속셈을 저버릴 것이고 더 이상 당신과 거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약물과 흡입기 치료를 통해 제 병세는 비교적 잘 조절되었습니다. 2022년 4월, 저는 다시 문서 본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기회를 무척 소중히 여겼고, 그 기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협력하여 본분 이행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2023년 9월이 되었고, 제 천식은 갑자기 심해졌습니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소용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성(省)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겨우 병세가 안정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재발했습니다. 숨을 들이쉴 수만 있고 내쉴 수는 없어서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지럽고 멍했으며, 언제든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집으로 돌아가 요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저는 극도로 비관하고 실망했으며,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며 적잖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렀는데, 어째서 병은 더욱 심해지는 걸까?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내가 기꺼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보시고도 나를 보호해 주시거나 고쳐 주시지 않는 걸까?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을 못 보시는 건가?’ 저는 생각할수록 억울한 마음이 들었고,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대하시는 게 공의롭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눈앞의 병이 낫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희망은 더욱 없으니 앞날이 캄캄하고 아무 희망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한 자매가 제 내적 상태에 맞춰 하나님 말씀을 한 단락 찾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질병 하나를 안배한다면 크고 작음을 떠나 그 목적은 네가 질병의 경과, 인간에 대한 질병의 해악, 인간에게 미치는 질병의 여러 불편과 고충 및 감각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질병 속에서 질병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병 속에서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모색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드러내는 패괴 성품과 하나님을 대하는 옳지 못한 태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함으로써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 너를 구원하고 정결케 하고자 한다. 너의 무엇을 정결케 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여러 사치스러운 욕망과 요구, 더 나아가 생존을 위해, 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여러 계산과 판단 그리고 계획을 정결케 한다. 하나님은 너 스스로 계획하고 판단하며 하나님에 대해 사치스러운 욕망을 품는 것을 금하고 오직 네가 순종하기를, 순종을 실행하고 체험하면서 질병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와 하나님이 네게 준 이런 건강상의 조건에 대한 태도, 그리고 네 개인적 소원을 인식하기를 요구한다. 이런 것들을 인식하면 너는 하나님이 네게 준 질병이라는 환경이나 신체 조건이 네게 무척 유익이 된다는 것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네 성품의 변화, 네 구원, 네 생명 진입에 대단히 커다란 도움이 된다. 그러니 질병에 걸렸을 때 사람은 늘 벗어나려 하지 말고 도망치거나 거부하려고도 하지 마라. … 너는 “이 병이 완치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임을 믿겠지만 완치될 수 없다면 난 하나님께 불만이야. 하나님은 왜 나한테 이런 병을 주셨지? 왜 내 병을 완치될 수 없게 하신 거야? 이 병은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나한테 떨어진 거지? 정말 못마땅하단 말이야! 왜 나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요절해야 하는 거야? 왜 남들은 더 살 수 있는데? 어째서?”라고 말하면 안 된다. 이유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치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배하고 계획한 것이다. 달리 이유는 없는 것이다. 네가 물어야 할 것은 ‘왜’가 아니다. 왜냐고 묻는 것은 패역한 질문이며 피조물이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다. 네가 이유를 묻는다면 너란 사람은 너무나도 패역하고 강퍅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나님이 네 소원을 이뤄 주지 않고, 네 목적을 달성시켜 주지 않을 때면 너는 언짢아하고 마다하며 계속 이유를 묻는다. 그럼 하나님이 네게 물을 것이다. “너는 피조물로서 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느냐? 왜 본분 이행에 충성하지 않았느냐?” 너는 뭐라 답하겠느냐? “이유는 없어요. 원래 제가 이런걸요.”라고 말해서 되겠느냐? (안 됩니다.) 하나님이 네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네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서는 위치가 틀렸고 너무나도 비이성적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 저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병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그 경과를 체험하게 하시려는 것도, 제가 서둘러 병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병에 걸리면 치료받을 수 있지만, 병이 나을지, 생명을 위협할지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예정에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병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제가 어떤 패괴 성품과 잘못된 관점을 드러냈는지 반성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갖춰야 할 이성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병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조금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병세가 심각해져 본분을 이행할 수 없게 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저는 진리를 구하는 대신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제 고생과 헌신을 보시고도 저를 보호해 주지 않으셨다며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않으시다고 여겼습니다. 비록 이전의 체험을 통해 제가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어느 정도 인식했지만, 진정으로 돌이키거나 변화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결함과 부족함을 아시고, 병의 재발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저의 비열한 속셈을 다시금 드러내셨습니다. 그제야 저는 복을 받으려는 제 속셈이 뿌리깊게 박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병의 재발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안의 패괴와 불순물을 정결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않으시다고 원망했으며, 하나님께서 병을 통해 저를 도태시키시려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조금도 알지 못했던 제가 얼마나 빈궁하고 가련하며 눈먼 자였는지 깨달았습니다! 그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저는 그 병을 얻고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깊은 고심이 담겨 있었고, 그것은 저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병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게 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계속해서 잘못된 관점으로 추구하며 하나님의 요구에서 점점 더 멀어져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 점을 깨닫자 저는 마음이 환해졌고, 더 이상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오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공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 고생한 만큼 분배하는 것,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것,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것은 공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면 이것은 공의이겠느냐? 사실 이것 역시 공의이다. 어째서 그것을 공의라고 하겠느냐? 공의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때 하나님이 욥을 멸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패괴되었든 안 되었든, 사람의 패괴가 깊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이 사람을 멸할 때 사람에게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하느냐? 무슨 근거로 사람을 멸하는지 설명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그가 정한 규칙을 사람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다. 패괴된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든 다 합당하고, 다 하나님의 안배다. 하나님이 네가 눈에 거슬려 넌 증거를 다 했으니 쓸모없어졌다며 널 멸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이것 역시 공의다. 지금은 네가 사실상 알기 어렵겠지만, 이치는 이해해야 한다. 너희가 말해 봐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공의입니다.) 사탄을 남겨 둔다면? 뭐라 말하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하는 것은 모두 공의롭다.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당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당신의 아름다운 뜻과 공의가 있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와 행사를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기간에 왜 사탄을 멸하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사탄이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는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패괴시켰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인류를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지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똑똑히 보고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극악무도함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그때 사탄을 멸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줄 것이다. 언제 사탄을 멸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공의롭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관념을 가진 일에 있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태도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제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패괴된 인류가 생각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고 노력하며 헌신했으니, 하나님께서 마땅히 제 병을 고쳐 주시고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관념에 부합하면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다고 여기고, 하나님께서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고 제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않으시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늠할 때 제 자신이 복과 이익을 얻는지 여부에 기반을 두었으니, 조금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았고 너무나 치우쳐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에 얼마나 많이 버리고 헌신했든, 얼마나 많이 고생하고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든, 그것은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지, 병을 고쳐 주시는지는 하나님의 권리이며, 패괴된 인류는 하나님께 이래라저래라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이 갖춰야 할 이성입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한 노력과 헌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제 병을 고쳐 달라고 요구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 억지를 부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 버리고 헌신했으니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지켜 주시고, 병도 고쳐 주셔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않으시다고 여겼는데, 그 모든 것이 저의 관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공의요, 고쳐 주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병세가 얼마나 심각해지든, 심지어 하나님께서 저를 죽게 하시더라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려면 개인의 이익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의 본질은 바로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든 그것은 마땅하며, 모두 공의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셨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오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당신의 아름다운 뜻과 공의가 있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와 행사를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보잘것없는 피조물일 뿐이니,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합당하며, 제 병을 고쳐 주시든 고쳐 주시지 않든,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주시든 주시지 않든 저는 마땅히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성과 이성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점을 깨닫고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전에는 제가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지 못하고 제 관념과 상상으로 가늠했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께서 어떻게 하시든 모두 공의롭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에 병이 낫지 않아 제가 죽게 되더라도 당신은 공의로우신 것이며, 저는 여전히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나중에 저는 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뭔가를 얻어 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욥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던 이유는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 때문이지, 그 자신의 복이나 화 때문이 아니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든 화를 입든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은 변함이 없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사람이 화를 입는 것 역시 하나님의 주재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큰 능력과 권병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한다. 사람에게 수시로 임하는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의 발현이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욥이 일생을 통해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었다. 욥의 이러한 모든 생각과 행실은 하나님의 귀에 들어갔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의 생각과 행실을 중히 여겼으며, 그의 그러한 인식과 마음을 귀하게 여겼다. 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언제 어디서나 그에게 임하는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욥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요구하는 바가 없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안배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직면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할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욥이 생각하는 자신의 책임이었고, 또한 하나님이 원하는 바였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니 저는 마음이 환해졌고, 실행의 길도 생겼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 거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을 받든 화를 당하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 가운데서, 그리고 자신의 체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병을 알았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복을 받든 화를 당하든, 사람은 마땅히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욥은 인성과 이성이 있었기에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항상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도록 자신에게 요구했습니다. 욥은 정직하고 선량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었기에, 결국 시련 속에서 굳게 서서 증거했고, 하나님께 칭찬받았습니다. 저도 욥을 본받아, 병이 낫든 낫지 않든, 앞으로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더 이상 스스로 선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전에는 제가 진리를 깨닫지 못해 제 병이 나을지,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을 수 있을지를 늘 걱정하며 너무나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오늘 저는 제 자신을 당신의 손에 맡기고자 합니다. 복을 받든 화를 당하든 당신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겠습니다.” 관점이 어느 정도 바뀌자, 제 마음은 훨씬 가볍고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후 저는 한방 민간요법으로 몸을 조리했는데, 뜻밖에도 병세가 아주 잘 조절되었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겪고 나서, 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제가 복을 추구하는 자신의 비열한 속셈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병으로 육체는 다소 고통스러웠지만, 그로 인해 저는 저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추구 관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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