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련에 담긴 의미를 비로소 깨닫다

2025.12.27

중국 루이(路一)

2024년 7월의 어느 날, 저는 파트너 자매들과 함께 글을 심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甄) 자매가 갑자기 몸이 안 좋다며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습니다. 자매는 의자에 앉아서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습니다. 처음에는 날이 덥고 방 안 환기가 잘 안되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자매의 발작 빈도는 점점 잦아졌고 심할 때는 말할 기운조차 없이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을 헐떡였습니다. 혼자서는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었으니 본분 이행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자매가 무슨 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문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어. 이건 꽤나 중요한 본분인데다 자매도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고 성과도 좀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분명 큰 병에 걸리지 않도록 지켜 주실 거야. 이번 일은 아마 자매에게 임한 하나님의 검증일지도 몰라. 공과를 배우고 나면 하나님께서 병을 없애 주실 거야.’ 전 자매는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모든 수치가 정상이지만 서맥과 경미한 심근허혈 증상이 있다면서 심장을 보하고 혈액 순환을 돕는 약을 처방해 주며 푹 쉬라고 했습니다. 검사 결과를 본 우리는 모두 전 자매가 요양만 잘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계속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르며, 하나님을 믿으면 그분의 보살핌과 보호가 따르고 공과를 배우고 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전 자매는 병원에서 돌아와 한동안 요양했음에도 병이 재발했고, 발작 빈도는 점점 잦아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자매는 몸이 좋지 않아 방에서 쉬고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침대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희는 그 소리를 듣고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자매는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못 하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자매의 손발은 차가웠고 사지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온몸을 계속 떨었는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저희는 매우 놀랐습니다. 섬김 본분을 하는 자매가 급히 구심환을 찾아 먹이고 나서야 자매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저희가 조금만 늦게 들어갔더라면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자매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찡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의사는 괜찮다고 했는데, 지금 자매는 누가 봐도 심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심장병이 심해지면 숨이 막혀 언제든 돌연사할 수 있다던데, 이제 겨우 30대인 자매가 어쩌다 이런 중병에 걸렸을까?’ 특히 자매가 힘없는 목소리로 제게 이렇게 말했을 때 더욱 그랬습니다. “지금 몸이 너무 안 좋아요. 심장이 언제든 멎을 것 같아요. 제가 만약 죽거든, 저희 엄마에게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라고 꼭 전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다 공의롭다고요….” 자매는 한마디 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지만, 무척 다급한 어조였습니다. 그런 자매의 모습을 보니 너무 무서웠습니다. 저는 이런 생이별의 순간을 겪어 본 적이 없었기에, 순간 무슨 말로 자매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후, 리더는 자매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가족에게 연락했고, 자매는 집으로 돌아가 요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자매가 아프다는 그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매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야. 본분을 위해 남편에게 핍박받아 집을 떠났고, 지난 몇 년간 교회에서 줄곧 중요한 본분도 맡았고, 본분에서 성과도 좀 있었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아픈 걸까? 하나님은 왜 자매를 보호해 주시지 않은 걸까? 시련이 임했다 해도 이렇게 심각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여러 재앙을 만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전 자매는 달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데 어째서 이런 큰 화를 입은 걸까?’ 당시 제 마음은 복잡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저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가정과 생업을 버리고 10여 년간 본분을 이행했고, 줄곧 중요한 본분을 맡아 왔으며 성과도 좀 있으니, 이렇게 계속 추구하면 마지막에는 분명히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 자매의 일을 겪고 나니 갑자기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는다는 것에 아무런 보장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저도 언젠가 전 자매처럼 갑자기 큰 화를 입거나 심지어 죽음에 직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죽어 버린다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수년간 바치고 헌신한 것들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들이 들자 저는 의기소침해졌고, 본분도 건성으로 했습니다. 매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맡은 일을 끝내는 데만 만족했습니다. 늘 하나님과 저 사이에 마치 벽 하나가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전 자매가 아픈 뒤로 본분을 이행할 힘이 나지 않는 걸까?’

그러다 구하던 중, 저는 <화를 입으면 무조건 나쁜 일일까요?>라는 체험 간증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상에 인용된 하나님 말씀 두 단락이 제 상태에 딱 맞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이에게 병고나 재앙이 임한 것을 보면 바로 자신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 ‘내게 저런 일이 닥치면 어쩌지? 하나님은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 아니신가? 어째서 하나님을 믿는데도 저런 재앙을 마주하는 거야? 나도 저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럼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지? 하나님은 사람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으시잖아. 언제 어디서든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환경을 마련해 고통받게 하시잖아. 이제 보니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 아닌 것 같아!’라고 말이다. 그는 믿지 않으려니 복을 받지 못할까 봐 두렵고, 계속 믿으려니 재앙이 닥칠까 봐 두렵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만을 구할 뿐, 시련과 징계를 달라고 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감히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이루소서. 저는 당신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렇게 기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그는 다른 사람이 시련과 재앙을 마주하는 것을 보고 다짐과 용기가 작아졌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과 형벌, 심판, 주재에 대해 다른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계심까지 생겨났다. 그러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벽이 생기고 틈이 벌어진다. 사람에게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면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그럼 너희는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지 않겠느냐? 이런 내적 상태로 살아가지 않겠느냐? (네, 그럴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진리를 구하지 않고 되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음도 없다면, 길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언젠가 천재(天災)나 인재(人災)가 닥치면 바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중에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믿은 후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약속만을 받아들이고자 준비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시련과 연단, 박탈을 받아들이려고 기다리고 예비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박탈, 저주를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지 않는다. 사람과 하나님의 이런 관계가 정상적이냐? (비정상적입니다.) 어째서 비정상적이라고 하겠느냐? 문제가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에게 진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은 관념과 상상이 너무 많고 늘 하나님을 오해하며,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도 모르기에 문제가 발생하기 아주 쉽다. 특히 사람은 오직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거래하려 하며, 하나님에게 요구하려고만 할 뿐,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다가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닥치면 바로 하나님에게 관념과 오해, 원망을 가질 것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무척 심각하지 않겠느냐? 대부분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길을 가느냐? 몇 년간 설교를 들었고, 또 글귀와 도리를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고는 하나, 사실 진실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입으로는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진리를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의기소침해진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믿는 저의 관점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 받기만을 바랐고, 복을 받으리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자마자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까지 잃었습니다. 처음 전 자매가 아픈 것을 보았을 때 조금 걱정은 됐지만, 우리는 중요한 본분을 하고 있고 자매 역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 하나님께서 분명 자매의 병을 낫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병원 검사에서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을 때, 저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분의 축복과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더욱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자매의 병이 재발하고 심지어 죽음의 문턱까지 가자, 저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매가 왜 이렇게 큰 화를 입은 건지, 하나님은 왜 자매를 보호해 주시지 않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제 자신을 떠올렸습니다. 저 또한 자매처럼 갑자기 어떤 화를 입는 것은 아닌지, 불치병에 걸려 결국 죽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제 앞날과 종착지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생기자 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본분 이행에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과 은혜만 받으려 하고, 욕망이 좌절되자 저도 모르게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의기소침한 감정에 빠져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자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모습은 종교계에서 떡으로 배를 불리려는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는 열정이 넘쳐, 무언가를 버리고 헌신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상관없었지만, 복 받을 희망이 보이지 않자 바로 풀이 죽었습니다. 수년간 하나님을 믿은 것이 결국 복과 은혜를 얻기 위함이었고, 떡으로 배를 불리려는 불신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저는 마음속으로 제 자신이 미워지고 혐오스러웠습니다. 또한 이전에 하나님을 오해했던 것이 죄송스럽고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정말 진리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데 공을 들이고, 서둘러 너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곧 닥칠 시련과 연단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든,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마지막에 욥과 같은 시련이 닥쳐 하나님이 네 모든 재산을 거두어 간다면, 심지어 네 목숨마저 끝내려 한다면, 그때 너는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네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른 태도를 지닐 수 있겠느냐? 이 질문에 답하기가 쉽겠느냐? 이것이 바로 너희 앞에 놓인 큰 난관이다. 이것이 난관이고 문제인 이상,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해결하기가 쉽겠느냐? 너는 이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이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으며 이렇게 많은 진리를 깨달았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모든 지배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면,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설령 네 헌신과 희생, 네가 지불한 대가와 필생의 에너지로 얻어 낸 것이 고작 하나님의 저주 한마디나 박탈이라고 할지라도 원망하지 않고 개인적인 욕망과 요구를 갖지 않는다면, 오직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기만을 구하며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순종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정확한 태도를 갖춘다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해결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이고 사랑이며 위엄이고 진노이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의 공의 성품 속 긍휼과 사랑, 위엄과 진노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일부 사람에게는 긍휼과 사랑만 베풀고, 일부 사람에게는 위엄과 진노만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위엄과 진노는 똑같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고 사람을 보호해 줄 수도 있으며, 동시에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고 저주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모든 것을 거두어 갈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거두어 갈 수도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자,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행하려는 사역이다. 그러므로 만약 네가 ‘나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말이야. 하나님은 내가 괴로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차마 나를 심판하거나 형벌하지도,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거두어 가지도 못하실 거야.’라고 여긴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 아니겠느냐?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기 전까지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사랑을 누리려고만 한 것 아니겠느냐? 너는 하나님에게 심판과 형벌, 그리고 공의와 위엄, 진노의 성품도 있다는 사실을 늘 잊는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고, 하나님이 네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 때는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지만, 하나님이 형벌과 심판을 내리고 위엄과 진노를 드러낼 때는 언짢아하며 ‘이런 하나님은 안 계셨으면 좋겠어. 이런 게 하나님의 행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또 하나님이 나를 겨냥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 이게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었으면 좋겠고, 이런 일들이 다른 사람에게 닥치고 나한테는 닥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착한 사람이고,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 데다가 하나님을 오래 믿으면서 아주 많은 대가를 치렀으니 하나님이 나한테 이렇게 매정하게 대하시면 안 돼. 나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크나큰 은혜와 축복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어. 하나님은 차마 나한테 심판과 형벌을 내리지 못하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는 일방적이고 그릇된 생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너는 스스로를 피조물, 지음 받은 인류 중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릇되게도 너 자신을 지음 받은 인류와 구분하여 피조물 중에서 특별한 계층이나 부류로 여기면서 특수한 타이틀을 붙인 것이 잘못되었다. 이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 아니겠느냐? 비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이런 자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공의로우시며, 어떤 사람이 중요한 본분을 맡았거나 본분에서 특별한 공헌을 했다고 해서 늘 그를 보호하고 축복하여 어떤 화도 겪지 않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께 진심이 아닌 사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만 화를 입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자매는 교회에서 중요한 본분을 이행하고 성과도 좀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자매를 보호하셔서 큰 병이나 화를 겪지 않게 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저의 관념과 상상일 뿐, 진리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로우시기에, 사람에게 복을 주시든 화를 겪게 하시든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로우시며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은 이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이성입니다. 그때 한 자매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자매님은 줄곧 리더로서 여러 중요한 사역을 맡았는데, 나중에 심각한 고혈압 등 질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기까지 했습니다. 자매님은 마음이 좀 연약해지기는 했지만, 진리를 구하고 공과를 배우는 데 힘써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을 겪은 후, 자매님은 자신의 패괴 성품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체험과 인식을 글로 쓰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매에게 병의 고통을 겪게 하신 것은 그 안의 패괴와 불순물을 정결케 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자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자 온전케 하심이고, 또한 하나님 사역의 지혜였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그를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는 재산을 약탈당하고 자녀들을 잃었으며, 자신은 온몸에 독창이 나서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고, 하나님께 죄짓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위해 힘 있는 증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여 그가 그토록 큰 고통을 겪게 하신 것은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일들을 통해 욥이 사탄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힘 있는 증거를 하게 하셨고, 욥의 믿음은 온전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다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화를 입는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공과를 배워 진리를 깨닫고 정결함을 얻게 된다면,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평안하고 순탄한 것만이 좋은 일이고, 재난이나 화를 입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시는 사역은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는 사역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사람을 시련하고 연단하며, 사람의 패괴 성품과 속셈, 불순물을 드러내어 사람이 스스로 반성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여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평안과 순탄함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려고만 했을 뿐, 시련과 화를 겪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는 몇 년을 겪어도 정결케 되고 변화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전 자매가 이렇게 중병에 걸린 배후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고, 자매가 배워야 할 공과도 있을 것입니다. 그건 제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니 사람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연구할 것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며, 맡은 본분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갖추어야 할 이성입니다.

그 후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자매가 아픈 뒤로 내 마음이 계속 의기소침했던 걸까? 그 근원은 무엇일까?’ 그러다 구하던 중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그리고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네 신분과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네가 이행하는 본분이 아무리 중요해도, 네 재능과 기여가 아무리 대단해도, 혹은 네가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하나님의 눈에 너는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다. 네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너는 평범한 피조물이다. 네가 스스로에게 씌운 고귀한 감투와 호칭은 객관적으로 실재하지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네가 언제나 그것을 면류관으로 여기고, 너를 특별한 계층이나 인물이 되게 하는 밑천으로 삼는다면,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견해에 저촉되고 충돌되며, 하나님과 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어떤 결과를 낳겠느냐?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에 반발심이 생기게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눈에 너는 본래 한 명의 피조물일 뿐이지만, 너는 스스로를 피조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너는 언제나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나한테 이렇게 대하시면 안 돼.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나를 대하실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하나님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행사가 네 관념과 심리, 그리고 네 필요에 맞지 않을 때, 너는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배치한 환경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순종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반발하고 반항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예전에 하나님은 나에게 보호와 은총을 베푸셨어. 그런데 왜 지금은 달라진 거지? 못 살겠어!’라고 생각하고, 날뛰며 억지를 부리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네가 집에서 부모에게 억지를 부린다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너를 어찌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너의 그런 행동은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짓이며, 하나님 집에서 그렇게 날뛰며 억지를 부리는 것은 몹시 비양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민들도 눈 뜨고 못 봐줄 텐데, 하나님이 네 그런 모습을 참아 주겠느냐? 네가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겠느냐? 하나님은 네 부모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고 창조주이다. 창조주는 절대 피조물이 그의 앞에서 막무가내로 날뛰고 울며불며 생떼를 쓰는 것을 용인해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고 형벌할 때, 네게 시련을 줄 때, 혹은 하나님이 네가 가진 것을 빼앗아 갈 때, 너를 환난 가운데 떨어뜨릴 때,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태도가 어떤지, 피조물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네가 날뛰고 억지를 부리며 궤변을 늘어놓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깨달았다면 창조주의 모든 행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먼저, 사람은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자신이 피조물의 신분임을 확실히 해야 한다. 너는 스스로가 피조물임을 확실히 할 수 있느냐? 만약 그렇다면,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창조주의 안배에 순종해야 하며, 설령 고통을 좀 받을지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자가 바로 이성을 갖춘 사람이다. 만약 네가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너에게는 직함이 있다고, 머리에 후광이 있다고, 네가 신분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 집에서 대단한 리더, 지휘자, 편집장, 감독이라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가장 비이성적이고 후안무치한 사람이다. 너희가 신분과 지위, 몸값이 있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냐? (피조물입니다.) 그렇다. 평범한 피조물일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격을 논하고 나이를 내세우며 네 공로를 빌미로 거들먹거리거나 영웅담을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들은 하등의 가치가 없으며, 하나님을 역겹게 할 뿐이다. 만약 네가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 채 계속 자신을 과시하고 드러내며 자격을 논한다면, 일을 망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몹시 비이성적이고 극도로 교만한 사람으로 보아 혐오하고 역겨워할 것이며, 한쪽에 치워 둘 것이다. 그럼 너는 곤란해질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중에서), 『적그리스도 부류의 이성은 건전하지 않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아무리 분명하게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바른길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사악한 성품과 본성, 그리고 이 부류의 본성 본질 때문에 그들은 마음속 깊이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도대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해 내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죽어라 붙잡고, 이러한 것들을 진리로,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가장 정의로운 사업으로 여긴다. 그들은 사람이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복은 어떤 것인지 모른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대할 때는 그의 자질이나 은사, 재능, 밑천을 보는 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실행하고 얻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본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로, 적그리스도는 절대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가장 어리석은 면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분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태도는 무엇이냐? 그들은 본분 이행을 하나의 거래로 여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은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 집을 위해 큰 기여를 하며, 하나님 집에서 오래 고생한 사람은 마지막에 복과 면류관을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논리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7)>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복 받는 것을 자신의 추구 목표로 삼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오직 복 받기만을 바라며, 하나님 집에서 중요한 본분을 하고 공헌을 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생각해 보니 저의 추구 관점이 적그리스도와 똑같았습니다. 저 역시 중요한 본분을 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고, 본분에서 성과를 좀 내서 선행을 충분히 예비하고 공로가 클수록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전 자매가 병에 걸려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심지어 생명이 위독한 것을 보았을 때, 저는 하나님을 오해하면서 왜 자매를 보호해 주지 않으시는지 원망했으며, 저도 전 자매처럼 갑자기 큰 병에 걸리거나 무슨 불행한 일을 당해 결국 구원받을 희망조차 없어질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몹시 의기소침해지고 본분 이행에도 힘이 빠졌던 것입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항하는 것이었으니, 정말이지 조금의 이성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피조물일 뿐이며,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는 평등하게 대우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너무 높게 보아 제 자리에 제대로 서지 못했습니다. 늘 제가 중요한 본분을 한다는 것을 밑천 삼아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요구하고, 재난과 화를 겪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했으니, 정말 이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한 것은 진리를 추구하여 생명 성품의 변화에 이르기 위함이 아니라 상과 축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은혜시대의 바울과 그야말로 판박이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데 진심이 없었고, 사역하고 헌신하는 것에는 자신의 사치스러운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고 공로를 드러내며, 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지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본 삼아 하나님께 상과 면류관을 요구했고, 심지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말까지 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지금 제가 가는 길이 바로 바울의 길이었습니다. 하루빨리 바로잡지 않거나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복 받기만을 추구한다면, 저 역시 바울처럼 하나님께 도태되어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본분 이행이 기준에 달하려면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는지, 네가 얼마나 많은 본분을 이행했는지, 하나님 집에 얼마나 많은 공적을 세웠는지,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경험을 가지게 되었는지 등과 상관없다. 하나님이 보는 것은 한 사람이 가는 길, 다시 말해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일 처리 원칙, 방향, 근원, 출발점 등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본다. 그것이 네가 가는 길을 결정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합격한 본분 이행이란 어떤 것인가> 중에서),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께 기여하면 상을 받아야 하고 또 크게 기여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기쁨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의 관점을 보면 그 본질은 거래의 성질을 띤 것이지, 자발적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고 또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 즉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더욱 인정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을 보면 사람에게 사람의 원래 본분을 회복하고 원래 지위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은 피조물이므로 선을 넘어 하나님께 그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바울과 베드로의 종착지는 그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판정되었다. 또 그들이 얼마나 많이 사역했는지,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어떤지가 아니라 그들이 원래 추구한 것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길이 가장 옳은 길이며, 옛 성품을 변화시켜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 성공의 길인 것이다. 성공의 길이란 피조물이 원래의 본분과 모습을 되찾는 길, 즉 회복의 길이며,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행한 모든 사역의 근본 취지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더없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어떤 본분을 하든 높고 낮음이나 귀하고 천함의 구분이 없으며, 구원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어떤 본분을 했는지, 어떤 공헌과 성과가 있었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생명 성품이 변화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교회에서 드러난 적그리스도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 중 상당수는 리더 일꾼이었고, 과거에 본분을 이행하며 많은 것을 버리고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길을 걸었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여 하나님 집 사역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가로막았으며, 아무리 교제해 주어도 회개하지 않아 결국 드러나 도태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눈에 띄지 않는 본분을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 진입에 힘쓰며,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 원칙을 구하여 본분을 점점 더 잘 이행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를 정하시는 것은 사람이 어떤 본분을 했는지,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얻었는지, 생명 성품에 변화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베드로의 길을 가며, 진리를 추구하여 생명 성품의 변화에 이르고, 제 본분을 잘 이행해야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추구해야 할 바입니다.

그 후 저는 또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까?’ 그러다 하나님의 말씀 한 단락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직면하는 기본적인 공과이자 가장 깊은 공과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어느 정도 순종할 수 있는지에 따라 너는 그만큼의 분량과 믿음을 갖고 있으니, 이는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 베드로는 너무도 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고 나서 개인의 요구, 타산, 욕망을 전부 다 내려놓았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갖지 않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놓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저에게 시련을 주셔도, 저를 채찍질하셔도, 저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리셔도, 환경을 일으켜 저를 책망하고 훈계하셔도, 저를 단련하셔도, 저를 사자 굴과 이리 굴에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모두 옳고, 어떻게 하시든 저는 모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모두 진리이니 저는 불평하지 않고 선택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절대적인 순종 아니겠느냐? 때로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모두 진리라고 말하는데, 나는 왜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을 때가 있구나. 하나님도 틀릴 때가 있네. 하지만 어떻게 말하든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니까 순종하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절대적인 순종이겠느냐? … 하나님을 믿을 때는 피조물의 위치에 서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이 네게 모습을 감추든 나타내든,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든 없든, 너는 네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네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실행 측면의 진리도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관념을 계속 고집하면서 “나는 이 일이 진리에 부합하고 내 생각에도 맞는다고 확신이 들면 순종할 거야. 만약 판단이 안 된다면, 하나님의 행사라는 확신이 안 선다면 그럴 때는 일단 기다릴 거야. 하나님의 행사라는 것을 확신한 후에 순종할 거라고.”라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것은 조건적인 순종에 불과할 뿐, 절대적인 순종도, 완전한 순종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성육신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고, 심판과 형벌은 더욱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순종하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없는데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피조물의 본분은 무엇이냐?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것은 근원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피조물의 자리에 서서 창조주인 너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이는 모든 피조물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얻는 기본적 공과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실행의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어떤 화나 시련이 닥치든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어떤 고통과 연단을 받게 하시든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고 사랑할 것인지만을 생각했고, 심지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베드로의 실행은 하나님의 기억하심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 자매가 그렇게 중병에 걸린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부했으며, 제 자신도 화를 입고 더 나아가 죽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순종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저는 <뒤늦은 간증>이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주인공 저우샹밍(周向明)은 처음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할 때 죽음이 두려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깨달으며 마음속으로 후회하고 자책했으며 마귀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한 자신의 연약함을 미워했습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진리로 자신을 무장하는 데 힘썼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에 담긴 의미와 사람에 대한 요구 사항을 깨달았으며, 생사도 초월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여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언젠가 하나님을 위해 증거할 기회가 오기만을 바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훗날 그는 다시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더 이상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에 얽매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찰 앞에서 큰 붉은 용의 사악한 본질을 폭로하여 결국 사탄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가 목숨을 내걸고 하나님께 한 번 순종한 것을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로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 저에게는 아직 하나님의 시련이 닥치지 않았지만, 저는 저우 형제님을 본받아 제 본분을 잘 이행하면서 진리로 스스로 무장하여 분량을 준비해야 합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시련이 제게 닥친다면, 저 역시 저우 형제님처럼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얼마 후, 저희는 전 자매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자매는 집에 돌아간 후의 체험과 이번 병의 고통을 통해 얻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매는 병세가 조금 나아졌고, 지금은 힘이 닿는 데까지 일부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병이 낫든 낫지 않든 하나님을 의지하여 겪어 나가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자매가 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공과를 배운 것을 보고, 저는 어떤 일이 닥치든 그 안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병을 통해 자매를 온전케 하시는 동시에, 저 또한 그 속에서 공과를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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