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통해 순종을 배우다
중국 둥위(童羽)저는 어릴 때부터 체질이 허약하고 약골이어서,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 커다란 소원이었습니다. 2012년 3월, 저는 다행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전에 비해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나는 횟수도...
저는 40대가 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시는 사역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며,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읽고 본분을 이행해야만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아 마지막에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안배해도 마다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혈압이 220mmHg까지 치솟아 수액을 맞으며 혈압을 낮췄지만 본분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몇 년 동안 그렇게 비바람을 무릅쓰고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어 그분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가 저를 드러냈습니다.
때는 2009년 가을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두 다리가 붓고 아파 견디기 힘들더니 이내 붓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과 눈까지 부어올라 얼굴 전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고 두 눈을 뜰 수도 없었습니다. 딸이 저를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는 제게 양쪽 신장이 위축되었으며 요독증으로 발전할 수 있고,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제가 죽을 날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지 몇 개월 만에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고, 비바람이 불든 병이 나든 본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본분을 이행하며 힘들고 고생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의 오해와 비웃음, 모욕까지 견뎠습니다. 설마 이런 헌신으로도 부족했던 것인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싶었습니다. 저는 또 처음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나라 생활에 대한 아름다운 소망으로 가득 찼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큰 병이 닥쳐 언제 생명의 위협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기회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종착지는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습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한 마음에 본분을 이행할 의욕도 사라졌고, 소극적인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런 병이 닥치니 이해할 수가 없고 마음속으로 당신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이런 제 모습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깨우치시고 이끌어 주시어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나중에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게 된 이상 나는 하나님께 속하는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봐 주셔야 해. 내가 먹고 거주하는 걸 신경 써 주셔야 하고, 내 앞길과 운명, 나와 우리 가족의 신변 안전에도 신경 써 주셔야 해. 내가 모든 일이 잘되고 별 탈 없이 평안하게 살도록 해 주셔야 한다고.’ 만약 현실이 자신의 요구나 상상과 다르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게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좋지는 않구나. 그렇게 쉽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이토록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시련도 겪어야 하는 거였어. 왜 하나님은 나를 지켜 주지 않으시지?’ 과연 이런 생각이 옳겠느냐?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하나님에게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지는 않는 것이냐? 하나님은 당연히 좋은 뜻으로 사람에게 이런 일이 닥치도록 하는 것인데, 사람은 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왜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얻어 진리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에게 이런 일이 닥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진리는 구하지 않고 늘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평가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문제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고통 없이 일생을 보내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가정 때문에, 어떤 사람은 직장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결혼 때문에, 어떤 사람은 육적 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누구나 어느 정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왜 사람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한평생 평안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된다. 누구든 다 고통을 받아야 한다. 고통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적극적인 것이든 소극적인 것이든 모든 사람이 육체적 삶이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느낌을 체험하게 한다. 고통은 너에게 다양한 느낌과 이해를 갖게 하는데, 이런 것은 모두 인생의 체험이 된다. 이것이 한 측면인데, 사람의 경력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네가 그 가운데서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이 역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책임이다. 무슨 책임일까? 이는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다. 네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고 견딜 수 있으면 그것은 간증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1)>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전 깨달았습니다. 온갖 환경과 고난이 닥치는 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것은 모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지, 관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시각으로 일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만약 육적인 관점에서 일을 바라보면 고통 속에 살게 되고, 병고가 임한 것을 좋지 않은 일로 여기게 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진리를 구하면 병고 속에서 공과를 배울 수 있으니, 그것이 좋은 일이 됩니다. 병고가 임했을 때의 제 모습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은 지난 몇 년간 줄곧 본분을 이행했고, 이웃과 친척의 비방이나 조롱을 받으면서도, 비바람이 불고 혹한과 폭염이 찾아와도 본분을 멈춘 적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시어 큰 병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살아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런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하나님을 믿게 된 이상 나는 하나님께 속하는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봐 주셔야 해. 내가 먹고 거주하는 걸 신경 써 주셔야 하고, 내 앞길과 운명, 내 신변 안전에도 신경 써 주셔야 해.’라는 말씀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제가 상상했던 대로 저를 지켜 주시지 않자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고, 버리고 헌신한 것을 밑천 삼아 하나님께 이치를 따졌으며, 본분도 건성으로 대충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인성과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 제가 버리고 헌신했던 것도 진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번 환경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으며 복 받기를 추구했던 저의 속셈과 잘못된 관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점을 깨닫자 마음의 고통이 조금 가시는 것을 느꼈고, 순종하며 약을 먹으면서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했습니다. 점차 저의 상태는 호전되었고 병세도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비록 때때로 다리가 붓기도 했지만, 더는 얽매이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2018년 겨울, 저는 갑자기 발에 혹이 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발이 땅을 딛지도 못할 정도로 아팠고, 걸을 때도 딸의 부축을 받아야 했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의사는 통풍이라고 진단했고, 제 크레아티닌 수치가 기존의 200µmol/L대에서 500µmol/L대로 올랐다며 이미 요독증 말기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제가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실상을 숨겼습니다. 처음에 저는 제 병세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지만, 나흘째 되던 날 딸이 갑자기 제 뒷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저는 틀림없이 병세가 악화되었음을 직감했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설마 내가 정말 얼마 살지 못하고 곧 세상을 떠나게 되는 건가?’ 더는 생각할 용기가 나지 않아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의 생사는 당신의 손에 달려 있으니, 당신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며칠이 지나서야 저는 제 병이 이미 말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도 주체할 수 없이 두 손이 떨려 물컵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의사가 오진한 게 아닐까? 내 병이 어떻게 순식간에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수 있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쉽게 죽게 하시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이내 다시 생각했습니다. ‘나는 요독증이고 이미 말기라고 확진을 받았는데, 믿지 않는다고 소용있나? 이건 사실이잖아.’ 저는 인생이 끝났다고 느꼈고, 너무나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었습니다. 얼마 살지 못해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헌신해서 얻은 게 대체 뭐야? 나는 계속 본분을 이행했는데, 어째서 병은 계속 악화되는 거지?” 저는 하나님이 제게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에 잠을 잘 때, 저희와 함께 장사하던 한 아주머니가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저와 같은 병을 앓았는데, 확진을 받고 집에 돌아간 지 열흘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의 죽음도 머지않았고, 이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으니, 저는 이제 곧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저는 20여 일 동안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 아주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졌음을 알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저를 깨우쳐 주시고 빛을 비춰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때 한 편의 하나님 말씀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시련 속에서 믿음이 있어야 한다
1.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사람이 연약해지거나 소극적이 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거나 실행의 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다 정상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믿음이 있어야 하고, 욥처럼 하나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욥이 비록 연약하여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지만, 그는 사람이 태어나서 가지게 된 모든 것은 여호와가 베풀어 준 것이고,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는 이도 여호와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어떤 시련을 겪든 그의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2. 네가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연단을 받든, 결국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사람의 믿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가 그렇게 사역함으로써 온전케 하는 것은 사람의 믿음과 사랑이며, 또한 사람의 의지다. …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니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과 일, 사물을 마련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욥이 그토록 큰 시련을 겪으면서 재산을 빼앗기고 자녀들도 잃었으며, 온몸에 악창까지 났지만, 단 한 번도 원망의 말을 뱉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서 증거했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기에,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일수록 믿음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이 점을 깨닫자 제 마음은 한결 밝아졌습니다.
그 후 저는 또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독증 말기라는 것을 알게 되자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았던 것은 사실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상태에 맞춰 하나님의 말씀 한 단락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왜 죽음의 공포라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죽음을 앞두고 실금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에 벌벌 떠는 사람도 있다. 기절하는 사람,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사람, 심지어 대성통곡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행동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급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당혹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마음속 깊은 곳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제대로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고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모든 것을 계획하거나 통제하려 들고, 자기가 자신의 운명과 생사를 결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마주했을 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사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주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일생의 사명을 완수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마주했다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자,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욥은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했고, 단 한 번도 하나님과 거래하며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했고, 거두어 가셔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 그는 순종할 수 있었고, 죽음을 마주했을 때도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독증 말기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나님께 순종하기는커녕 원망을 쏟아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저는 욥을 본받아 제 목숨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힘닿는 데까지 제 본분을 이행하고, 죽음이 닥치면 담담히 마주하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생기자, 제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졌습니다.
나중에 저는 스스로 반성했습니다. ‘왜 병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원망까지 할 수 있었을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요구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며,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다. 공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 고생한 만큼 분배하는 것,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것,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것은 공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면 이것은 공의일까? 사실 이것 역시 공의이다. 어째서 그것을 공의라고 하겠느냐? 공의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하는 것은 모두 공의롭다.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당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당신의 아름다운 뜻과 공의가 있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와 행사를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기간에 왜 사탄을 멸하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사탄이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는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패괴시켰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인류를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지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똑똑히 보고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극악무도함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그때 사탄을 멸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줄 것이다. 언제 사탄을 멸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공의롭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관념을 가진 일에 있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태도이다. 베드로는 어떤 일들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운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측량할 수는 없으며, 사람이 측량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제가 생각했던 공평하고 합리적인 ‘일한 만큼 받는’ 개념이 아니며, 제가 겉으로 헌신한 만큼 하나님께서 제게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그분의 본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그것은 모두 공의롭고 그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저는 헌신에는 보답이 따라야 하고,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 많이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도 커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며 어느 정도 버리고 헌신했을 때, 마땅히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으시다고 여겼으니, 하나님 공의에 대한 저의 인식은 너무나 터무니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저는 단지 하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안배하시고 어떻게 저를 대하시든 모두 합당하고 공의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복을 주시는 것도 공의요, 복을 주시지 않는 것도 여전히 공의입니다. 만약 제가 저의 관념으로 하나님을 가늠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하나님나라에는 더러운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더러운 사람이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오랫동안 많은 사역을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더럽기 짝이 없다면, 네가 내 나라에 들어가려는 것은 하늘의 이치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나는 사람의 종착지를 정할 때, 그의 나이나 관록, 또는 그가 겪은 고난의 양을 보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가련한지에 따라 종착지를 정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에게 진리가 있는지 여부만 볼 뿐,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너는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종착지를 정하시는 기준은 그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 여부이지, 겉으로 얼마나 버리고 헌신했는지가 아닙니다. 사람은 진리를 얻어야만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진리를 얻지 못하고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가득 찬 채, 버리고 헌신한 것을 이용해 하나님과 거래하고 하나님을 속인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자이며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거래하고 맞바꾸려는 속셈을 품었고, 겉으로 고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속이고 이용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바울이 버리고 헌신했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곳곳을 다니며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고, 유럽의 절반 이상에 복음을 전했으며,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버리고 헌신한 것을 밑천 삼아 하나님께 공의의 면류관을 요구했고, 결국 하나님에 의해 지옥에 던져져 징벌을 받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는 관점도 바울과 같았습니다. 복을 받으려는 욕망이 좌절되자 하나님을 원망했으니,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에는 바울과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중에 형제자매들과 이야기 나눌 때, 한 자매가 저에게 하나님의 말씀 한 단락을 찾아 주었습니다. 『패괴된 인류는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사람의 본성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 자신을 위해서이고,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는 것도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서이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또한 자신이 상을 받기 위해서이다. 결론적으로 전부 자신이 복을 받거나 상을 받고, 천국에 가기 위한 것이다. 세상에서 일을 하는 것은 다 자신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서이다. 복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많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사람에게 사탄 본성이 있음을 가장 잘 입증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다년간 하나님을 믿으며 버리고 헌신한 것은 오직 복을 받고,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시어 평안하고 아무런 병도 재앙도 없이 살게 해 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었고, ‘이익이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탄의 독소에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이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가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좋은 종착지를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저는 버리고 헌신하며 어떤 고난을 겪고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가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요독증에 걸려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죽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도 싫고 기도하기도 싫어졌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이치를 따지며 대들었고,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으시다고 판단했으며, 지난날 제가 포기한 것과 헌신을 들먹이며 하나님께 요구하고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 인성과 이성이 조금도 없었고, 너무나 이기적이고 간사했습니다! 저의 이런 헌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여 성품 변화를 이루고 구원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로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사탄의 독소에 따라 사는 제 모습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었고, 하나님께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다시 접대 본분을 맡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본분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이행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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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둥위(童羽)저는 어릴 때부터 체질이 허약하고 약골이어서,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 커다란 소원이었습니다. 2012년 3월, 저는 다행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전에 비해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나는 횟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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