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추구하는 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2025.11.27

중국 천량(陳亮)

2003년, 저는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더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갓 쉰을 넘겼을 때였고, 몸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는 낮에는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했으며, 밤에는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형제자매들의 내적 상태에 맞춰 하나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조금 바쁘고 고단했지만, 본분을 이행하여 훗날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면 지칠 줄 모르는 힘이 솟았습니다. 십여 년 후, 제 몸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우선 담낭에 문제가 생겨 수술로 절제했고, 그 후에는 척추전방전위증으로 또 수술을 받았습니다. 두 차례의 수술을 겪고 나니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느꼈습니다. 게다가 자궁근종, 위축성 미란성 위염 등 만성 질환까지 겹치면서 저는 완전히 기력을 잃고 맥이 빠졌습니다. 거동도 불편해져서 계단을 오를 때도 몇 번씩 쉬어야 했고, 기억력도 나빠졌습니다. 어떤 부분의 하나님 말씀을 보고 싶어서 막 찾으려던 순간, 무엇을 보려고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건강 상태를 고려해 제게 한 그룹의 예배를 주관하게 했고, 형제자매들에게 어떤 내적 상태가 나타나면 제가 해결을 도왔습니다. 가끔 교회에 섬김 가정이 부족하면 제가 그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서 마음속으로는 꽤 힘이 났습니다.

한번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위장병이 도져 배가 욱신거리며 아파왔습니다. 저는 겨우 몸을 가누며 집에 돌아와 한동안 누워 쉬고 나서야 좀 괜찮아졌습니다. 리더는 제 몸이 안 좋은 것을 보고 집에서 가끔 형제자매 예배를 섬기도록 했습니다. 그런 안배를 듣고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이제는 집에서 섬기는 일밖에 못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몸은 더 안 좋아질 테고, 만약 그때 가서 섬김 본분마저 못 하게 되면 아무 본분도 이행할 수 없게 되겠지. 내게 무슨 구원의 희망이 있겠어!’ 이런 생각이 들자 저는 의욕을 잃었고 마음이 무척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나이도 점점 많아지고 기억력도 나빠져서 하나님 말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는데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어?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더는 추구할 수 없어. 그저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자.’ 때로는 밥 한 끼만 차려도 허리가 아파 펴지도 못하고,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쉬어야 했습니다. 특히 그 무렵에는 위경련까지 일어나 죽을 듯이 아팠고, 이러다 어느 날 쓰러져서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건강하게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부러웠습니다. ‘젊음이 좋구나! 그들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본분이든 다 이행할 수 있으니 구원받을 확률도 더 크겠지. 하지만 내 몸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어. 나중에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겠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 나를 버리실 거야!’ 몇 년 전만 해도 본분을 이행할 때 몸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나이가 일흔둘이 되니 몸은 예전과 너무나 달라졌고, 저는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근심하며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빠져 살았고, 진리에 공을 들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때로는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일이 생겨 패괴가 드러나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고 대충 생각하고 넘겨버렸습니다. 기도마저도 메마른 몇 마디가 전부였고, 마음이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이대로 가다가는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의기소침한 내적 상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구체적인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나이 든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폭로하는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제 모습과 딱 들어맞는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자매 중 일부 연로한 사람들, 다시 말해 60대에서 80, 90대의 사람들도 많은 나이로 인한 고충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많다고 해도 그들의 생각이 그렇게 정확하거나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고 생각과 관점이 진리에 부합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들 연로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충이 있으니 그들은 항상 이렇게 걱정한다. ‘이제 몸도 따라 주지 않고 이행할 수 있는 본분도 한정적이구나. 이 정도 본분만 이행해서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려나? 병에 걸려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을 텐데 돌봐 줄 사람이 없을 때는 홀로 본분을 이행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나이를 먹으니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기억이 안 나고 진리를 깨닫기도 쉽지 않다. 진리를 교제할 때 횡설수설하며 논리적이지 않고 이렇다 할 체험도 없구나. 나이를 먹으니 기운도 없고, 시력도 나빠지고, 체력도 달린다. 다방면으로 고충이 많으니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툭하면 깜빡하고 실수한다. 때로는 흐리멍덩해서 교회나 형제자매에게 폐를 끼치니, 이래서는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고 싶어도 힘들겠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어떻게 이 나이에 하나님을 믿었을까? 왜 남들처럼 20, 30대에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까? 하다못해 40, 50대에 믿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늙어서야 하나님의 사역을 만나게 되었을까? 팔자가 사납다고 하자니 그렇지도 않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역을 만나게 되었으니 팔자가 좋은 편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기억력도, 건강도 좋지 않고, 열의는 큰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예배 시간에 조금만 듣고 있어도 졸리고, 눈을 감고 기도하면 잠들 때도 있다. 하나님 말씀도 입으로만 읽을 뿐, 조금만 읽어도 졸리고 노곤하여 읽어 나갈 수가 없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런 현실적 고충에도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을 수 있을까?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없을 텐데 그렇게 되면 허투루 믿은 게 아닐까? 구원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럼 어쩌지? 걱정이다! 이 나이 먹고 무엇이 중요하겠나. 이왕 하나님을 믿었으면 걱정하거나 근심할 게 무엇이냐. 아들딸 모두 장성하여 내가 돌봐 주거나 보살피지 않아도 된다. 평생 가장 큰 소망은 살아 있는 동안 진리를 추구하고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이행하여 마지막에 구원받는 거다. 하지만 지금 나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을 보면 늙어서 눈도 침침하고 흐리멍덩해. 건강도 나빠졌으며 본분도 이행하지 못한다. 힘닿는 대로 일을 해 보지만 폐만 끼칠 때도 있으니 이래서는 구원받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라고 걱정한다. 생각하다 보니 근심하게 된다. ‘좋은 일은 모두 젊은이들과 관련 있지 연로한 사람과는 무관한 것 같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든 내가 누릴 복은 없는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근심하고 염려한다. 자기를 걱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때문에 속상해한다. … 노인이 설마 늙었다는 이유로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노인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느냐? 그들도 부분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젊은이들도 전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인이 항상 착각하는 한 가지는 자신이 흐리멍덩하고 기억력도 없으니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이 진정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청년은 노인보다 기운이 넘치고 체력도 좋지만 이해하고 깨닫고 인식하는 능력은 사실 노인과 똑같다. 노인도 청년을 거쳐 온 것이 아니더냐? 태어날 때부터 늙은 것도 아니다. 청년 역시 결국은 늙기 마련이다. 노인은 자기가 늙어서 체력이 달리고 건강하지 않으며 기억력이 나쁘다고 청년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차이가 없다. 여기서 차이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이더냐? 노인이든 청년이든 패괴 성품이 같고 여러 사물을 대하는 태도, 관점이 같으며, 여러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 역시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노인은 자기가 늙었으니 젊은이에 비해 지나친 욕망이 적어 침착할 수 있다거나, 자기에게 야심과 욕망이 없다거나 패괴 성품이 적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착각이다. 청년이 지위를 놓고 경쟁한다면, 노인은 지위를 두고 경쟁하지 않겠느냐? 청년이 원칙을 위반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노인은 안 그러겠느냐? (그럽니다.) 청년이 교만하면 노인도 교만하지 않겠느냐? 단지 노인이 교만할 때는 나이가 들어 그렇게 날뛰거나 흥분하지 않을 뿐이다. 청년은 몸과 사고가 유연하기에 교만한 모습이 좀 더 확연한 데 반해 노인은 몸이 굳고 사고도 유연하지 않다 보니 교만한 모습이 그렇게 확연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교만한 본질과 패괴 성품은 똑같다. … 그러니 노인이 할 일이 없는 것도, 본분을 이행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진리를 추구할 수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이다. 네가 현세에서 축적한 여러 그릇된 견해와 황당한 논리 그리고 여러 전통적인 생각과 관념, 우매하고 완고한 것, 보수적인 것, 비이성적인 것, 치우친 것들이 마음속에 너무 많이 쌓여 있다. 청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이것들을 파헤치고 해부하여 인식해야 한다. 너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툭하면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은 네 임무도 아니고 네 책임도 아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것이 바로 저의 내적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나이가 많아 건강이 좋지 않고 자꾸 깜빡깜빡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았습니다. 가끔 섬기는 일밖에 할 수 없으니 앞으로 나이가 들고 몸이 더 쇠약해져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면 구원받을 수 없고, 아무리 추구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렇게 의기소침한 내적 상태에 빠져 살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보거나 진리를 추구할 생각도 없이, 그저 미지근한 태도로 따랐을 뿐입니다. 그제야 그것이 저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노인은 단지 체력과 기력, 반응 속도가 젊은이보다 못할 뿐,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과 패괴 성품은 젊은이와 똑같습니다. 진리를 추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만 하면 똑같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 사회에 더 심하게 물들었고, 내면의 사탄 독소가 젊은이보다 더 심하고 완고하며, 각종 전통 관념과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해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자매가 패괴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 저는 그들을 무시하며 마음속으로 판단하고 깎아내렸는데, 그것이 바로 교만한 성품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반성하고 인식해야 할 부분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내적 상태 속에 살며 진리를 추구하는 데 미온적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아니었겠습니까? 그제야 저는 나이가 적든 많든 진리를 사모하고 추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양육하고 공급하실 때는 젊고 늙음을 가리지 않으시며, 오직 우리가 추구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데 힘쓰려 하는지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노인의 내적 상태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노인들이 마음속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진리 추구에 힘쓰기를 원하시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면서 자포자기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늘 제 많은 나이와 나쁜 기억력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유와 핑계로 삼아 스스로와 타협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손해 보는 것은 저 자신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서야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대로 계속 멍청하게 살아가다 저의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치우친 관념에 묶이면,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노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고, 진리를 추구할 길을 알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고, 자신을 올바르게 대하며,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환경 속에서 공과를 배우고, 진리를 구해 자신을 인식하고 성품 변화에 이르도록 힘써야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깨닫고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예전에는 본분을 이행할 때 매일 지칠 줄 모르는 힘이 솟았는데, 이제 나이가 들고 몸이 나날이 쇠약해지자 마음이 소극적으로 변하고 괴로워지며 더는 노력도 하려 하지 않는 걸까? 이것은 무엇에 지배받는 것일까?’ 그렇게 구하던 중,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다 복을 받고, 상을 얻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이런 생각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다 들어 있지 않느냐? 누구나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이는 사실이다.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항상 말로 내뱉지 않아도, 나아가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속셈과 욕망을 숨겨도, 마음 깊은 곳의 그 욕망, 그 속셈과 동기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사람이 영적인 이론을 얼마나 많이 알고 어떤 체험적 인식이 있든, 어떤 본분을 이행할 수 있든,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든,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복받으려는 속셈은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다. 또 사람은 언제나 이 복받으려는 속셈을 위해 고생을 마다치 않고 바쁘게 뛰어다닌다. 이는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 아니더냐? 복을 받으려는 속셈이 사라진다면 너희는 어떤 기분이겠느냐? 어떤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겠느냐? 마음속에 숨겨진 복받으려는 그런 속셈을 정말로 완전히 없앤다면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되겠느냐? 아마 많은 사람이 소극적이 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의욕이 사라질 것이다. 영혼을 잃어버린 듯 하나님 믿는 일도 무의미하다고 느낄 것이다. 마음을 잃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복받으려는 속셈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거나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스스로 가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고, 복받으려는 속셈에 대해 인식이 있고 이미 포기했으며, 지금은 그런 속셈에 지배되거나 속박받지 않는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복받으려는 속셈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은 일을 바라볼 때 그저 겉면만 본다. 시련이 닥치지 않았을 때는 사람은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긴다.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을 위해 계속 헌신하면 자기에게 변화가 있다고, 더는 열성과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해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고 실제적인 변화가 조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종착지, 결말과 직접 관계된 일이 닥쳤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겠느냐? 그때 본모습이 낱낱이 드러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생명 성장의 여섯 가지 기준>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나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근심과 걱정에 빠져 자포자기했던 이유는, 제가 늙어서 앞으로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구원받을 희망도 없으며 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소극적인 상태로 살며 하나님께 대항했던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버리고 헌신하며 분주히 뛰어다닐 수 있었고, 몸이 아파도 기꺼이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병세가 악화되고 몸이 날마다 쇠약해져서 어쩌면 섬김 본분조차 이행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저는 복 받을 희망이 없다고 느끼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인생을 즐기는 것이 낫다며 매일 드라마나 보면서 시간을 보냈고, 더는 진리에 공을 들이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을 믿는 태도 역시 미온적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어찌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본분을 이행한 것은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기 위함이 아니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이용해 하나님과 거래하여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자 바로 자포자기했는데, 그건 모두 하나님을 믿는 제 속셈과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고통과 시련이 닥쳤을 때 비록 자신의 결말과 종착지에 대해 걱정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를 구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증거하고 만족게 해 드리기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어떠했습니까? 수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제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실행했는지, 저의 본분과 책임을 다했는지를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복 받기만을 추구하다가 병이 심해져 복을 받지 못할 것 같으니 자포자기했습니다. 제게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조금이라도 있었겠습니까? 예전의 버림과 헌신은 모두 복과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거래와 기만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 비열했습니다! 바울을 생각해보면, 그는 온 땅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큰 사역을 이뤘지만, 복과 면류관을 얻으려는 속셈을 가지고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결국 그의 성품은 변하지 않았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대들며 공의로운 면류관을 요구하다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도태되고 징벌을 받았습니다. 저 자신과 비교해보니, 제가 본분을 이행한 목적은 훗날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는 것이었으니,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이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많은 본분을 이행한다 해도 패괴 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혐오감을 일으킬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탄의 괴롭힘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애정 어린 말씀을 이렇게 많이 선포하신 것은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인데, 저는 하나님께 진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저는 정말 양심과 이성이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깨닫고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20여 년간 하나님을 믿었지만 진심으로 당신을 위해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인성이 없는 자입니다. 이렇게 패괴된 저를 당신께서는 내치지 않으시고 여전히 구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잘못된 속셈을 버리고 저의 본분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온전케 되어 마지막에 하나님께 얻어지고,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정결케 되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너희보고 뒤떨어졌다고 한 것도, 자질이 부족하다고 한 것도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너희를 버린다거나 너희에게 희망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며, 너희를 구원하기 싫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오늘날 내가 온 것은 바로 너희를 구원하는 사역, 즉 구원을 이어 가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다. 누구에게나 온전케 될 기회는 있다. 원하고 추구하기만 하면 모두 성과를 얻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네 자질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훌륭하면 훌륭한 대로 그에 맞춰 너에게 요구한다. 네가 무지하고 글을 모르면 그런 조건에 맞춰 요구할 것이며, 네가 글을 알면 그 기준에 맞춰 요구할 것이다. 또 네가 나이가 많으면 나이에 맞게 요구하고, 네가 접대할 수 있다면 그 상황에 맞춰 요구할 것이다. 네가 접대는 할 수 없고,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를 돌보거나 다른 업무적인 사역을 하는 등 한 부분의 역할만 수행할 수 있다고 하면, 또 그 역할에 맞춰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사람의 삶을 정상으로 회복시켜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어 간다> 중에서), 『나는 사람의 종착지를 정할 때, 그의 나이나 관록, 또는 그가 겪은 고난의 양을 보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가련한지에 따라 종착지를 정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에게 진리가 있는지 여부만 볼 뿐,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 너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도 똑같이 징벌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징벌받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징벌받는 것이고, 그들 스스로 저지른 갖가지 악행으로 인해 응보를 맞이하는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너는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서는 획일적인 방식으로 사역하지 않으시고, 억지로 무리한 요구를 하지도 않으시며, 개개인의 실제 상황과 배경에 따라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맞게, 자질이 부족하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 맞게 요구하시기에,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며 원칙대로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만 한다면 모두 구원받을 기회가 있습니다. 동시에 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결말을 정하실 때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버리고 헌신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성품에 변화가 있는지 여부를 보신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비록 제 몸이 예전처럼 건강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교회에서도 제 건강 상태에 따라 제가 할 수 있는 본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제 몸이 점점 더 나빠져서 중요한 본분은 감당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고, 형제자매들의 내적 상태가 좋지 않을 때 하나님 말씀을 찾아 교제하며 붙들어 줄 수도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행할 수 있는 본분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비록 저는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하지만, 정신이 흐릿하지 않고, 귀가 먹지 않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고, 입으로는 말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진리를 추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진리를 구하지 않고 늘 복 받으려는 욕망 속에서 살면서 근심하고 걱정하며, 진리를 추구할 시간을 헛되이 낭비했으니, 정말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형제자매가 일깨워 준 덕분에 저는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복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사람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과 무관하다. 본분은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천직이므로 보수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하고 이유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이라 할 수 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심판받은 후 온전케 되어 누리는 복을 말하고, 화를 입는다는 것은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거친 후에도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해, 즉 온전케 되지 못해 받는 징벌을 말한다. 그러나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사람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너는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해서도 안 되고,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워 본분 이행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제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복을 받는 것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많은 본분을 이행하며, 많은 고생을 한다고 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이었습니다. 저는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므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저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오직 본분을 이행해야만 패괴가 드러날 수 있고, 자신을 알고 패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구원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본분을 이행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생명 성품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저는 여전히 하나님께 도태될 대상일 뿐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보면, 그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 변화에 힘썼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기 위해 본분을 이행했고, 개인적인 속셈이나 불순물이 없었으며, 하나님과 거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시련과 연단을 주시든 죽을 때까지 순종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었기에 결국 하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저는 베드로를 본받아 성품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예배를 섬길 수 있다면 힘닿는 데까지 섬기고, 만약 어느 날 병이 위중해져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며,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많은 진리와 비밀을 깨닫고, 이렇게 많은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누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저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저를 오늘까지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너무나 많이 누렸습니다! 이런 것들을 깨닫고 나니, 저는 더 이상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얽매이거나 속박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번 체험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며, 노인에게든 젊은이에게든 똑같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늘 제 자신이 나이 많고 아픈 곳이 많아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모두 저의 관념과 상상이었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제 몸이 어떻든, 저는 진리를 추구하는 데 더욱 공을 들이고, 착실하게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힘닿는 데까지 저의 본분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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