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 는 옳은 관점일까요?

2025.5.20

2017년 초, 저는 이웃인 리란으로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전도받았습니다. 한동안 알아본 끝에, 저는 하나님의 사역을 사실로 인정했고, 일부 진리도 깨달았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말세에 성육신으로 오셔서 사역하시는 것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이고, 사람은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이것은 돈이나 물질로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알았기에 저는 진심으로 리란에게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남편의 핍박 때문에 예배드릴 때 눈치도 많이 보고, 내적 상태도 소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리란이 사랑과 인내로 매번 도와주고 붙잡아 준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서서히 진리를 일부 깨닫고 믿음이 생기면서, 저는 더이상 남편 눈치를 보지 않고 정상적으로 예배드리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소 본분을 이행할 때도, 역시 리란이 아이도 대신 돌봐주고 집안 일도 처리해 주었습니다. 저는 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남편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리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어. 리란은 내 은인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란을 잊으면 안 돼. 나중에 꼭 기회를 찾아서 보답해야지.’

2021년 10월 어느 날, 리더가 저에게 그랬습니다. “리란이 예배 때 자기 집 얘기만 늘어놓아서, 형제자매들이 차분히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데 방해가 돼요. 여러 번 지적하고 교제했는데도, 입으로는 받아들겠다고 하면서 다음번 예배 때는 역시 마찬가지예요. 자매한테 불신파 모습이 심각한 편이라, 교회에서 지금 자매에 대한 형제자매들의 평가를 수집하는 중이에요. 두 분은 집이 가까워서 최근 몇 년 꽤 자주 접촉했으니, 자매에 대한 평가를 좀 써 주세요.” 리더의 말에 저는 속으로 움찔했습니다. 서로 집이 가까워서 저희 집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리란의 상황이라면 확실히 제가 잘 알았습니다. 같이 하나님 말씀을 보며 내적 상태를 교제하면서 보니까, 리란은 하나님 말씀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툭하면 남편이 자기를 아끼지 않는다느니, 아들이 말을 안 듣다느니 하면서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늘어놓곤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진리를 구해 공과를 배우라고 교제했습니다. 하지만 리란은 받아들이지 않고 다음에 만나도 어김없이 그런 얘기를 해서 제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게다가 본분을 이행할 때도 결코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사무 사역을 할 때도 항상 뭔가를 빠뜨렸습니다. 리란이 본분 이행하는 모습을 두고 여러 번 지적하고 폭로했지만, 말로는 받아들이겠다고 해도 나중에는 그대로였습니다. 지금도 리란은 형제자매들이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교란하고, 여러 번 지적하고 도와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데다, 일관되게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것을 볼 때, 리란은 확실히 교회에 남겨 두기에 부적절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리란의 모습을 얘기해 버리면, 리란은 불신파가 되어 정리되어야 합니다. 무척 괴로웠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하나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상당 부분 리란이 복음을 전해 준 덕분입니다. 제가 소극적이고 연약해졌을 때도 리란은 계속 저를 도와주고 붙잡아 주었습니다. 제가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할 때도, 리란이 늘 아이를 대신 돌봐주고 집안 일을 처리해 주었습니다.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고 했어. 더군다나 리란이 나를 그렇게 많이 도와주었는데, 내가 리란의 불신파적인 모습을 얘기한다면, 그러고도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저는 리더에게 최근 1,2년은 같이 예배드린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며 에둘러 말했습니다. 그리고 리란을 감쌌습니다. “리란은 열정적이에요. 가족들이 핍박하지만, 본인은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니까요.” 리더가 말했습니다. “어떤 자매가 리란을 두 번 접하고는, 교회 생활을 교란한다며 리란에게 분별이 생겼어요. 상식적으로 자매님이 리란을 더 잘 아실 텐데, 설마 리란에 대해 전혀 분별이 없는 건가요?” 저는 거짓말이 탄로나자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리란이 잘해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평가서를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리더가 간 후, 저는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은 것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하루는 예배에서 돌아온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리란이 예배 때 자기 집 얘기를 꺼내더니 멈추지 않았어요. 방해가 돼서 예배도 제대로 못 했어요. 형제자매들이 자꾸 교제하고 폭로해도 고쳐지지 않아요. 다들 같이 예배드리고 싶지 않다고 보고했어요.” 딸아이 말에 리란이 아직도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속으로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리란의 모습을 보고했더라면 리란이 좀 더 빨리 교회에서 제명되었겠지. 그랬으면 형제자매들도 교란을 덜 받았을 텐데. 그치만 리더에게 보고했다가, 리란이 알기라도 하면 나보고 은혜도 모르는 양심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럼 앞으로 리란을 어떻게 보냐고.’ 이렇게 생각하니 속으로 무척 갈등이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리란의 평가를 제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얼마 후, 정리 사역을 하는 자매가 저희와 함께 예배드리는 자리에서, 갑자기 저에게 리란에 대해 파악하고 있느냐며 물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왜 갑자기 나에게 리란의 상황을 묻는 거지? 뭐라고 하면 좋을까? 안다고 하면 리란의 태도를 자세히 물어보겠지. 만약 사실대로 얘기하면 리란은 높은 확률로 제명될 거야. 그렇다고 모른다고 하자니, 지난번 이미 한 번 거짓말을 했는데, 이번에도 또 거짓말을 하는 건, 눈 깜짝 하지 않고 속임수를 쓰는 거잖아?’ 당시 갈등이 심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오늘 자매가 이렇게 물어보는 데는 당신의 허락이 있습니다. 제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하나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고 교회의 증거를 수호한다고 말하는데, 누가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했느냐?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네가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는 사람이냐? 너는 하나님을 위해 공의를 실행할 수 있느냐? 나를 위해 일어나 말할 수 있느냐? 진리를 확고부동하게 실행할 수 있느냐? 사탄의 모든 행위에 용감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느냐? 나의 진리를 위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탄을 폭로할 수 있느냐? 내 마음이 너에게서 만족을 얻도록 할 수 있느냐? 결정적인 순간에 네 마음을 내놓았느냐? 너는 내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냐? 스스로 많이 자문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13편> 중에서) 하나님의 질문 하나하나가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당신의 부담을 헤아리고 교회 이익을 지키기를 바라시기에 누군가 교회 생활을 교란하는 것을 보면 즉시 폭로하고 보고해야 합니다. 저는 리란과 자주 접하므로 그녀의 행동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일관되게 진리를 거부하고, 예배 때 자기 집 얘기만 해서 사람들이 차분히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못하게 교란했습니다. 여러 번 교제하고 지적해도 회개하지 않고, 심각하게 교회 생활을 교란했습니다. 저는 마땅히 진리를 실행하고 교회 생활을 지켜야 합니다. 제가 파악한 상황을 사실대로 얘기해서 리란을 즉시 교회에서 정리하고, 형제자매들이 안정된 환경에서 교회 생활을 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 부담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리란의 일관된 모습을 사실대로 자매에게 얘기했습니다. 자매는 일일이 받아 적었습니다. 얘기하고 나니까 마음이 평온하고 편안했습니다. 얼마 후 리란은 교회에서 제명되었고, 형제자매들은 더 이상 예배 시간에 교란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뒤로도 리란에게 여전히 죄스러웠습니다. 나중에 한 자매에게 그 말을 했더니, 자매는 이렇게 교제해 주었습니다. “늘 리란에게 미안해하는 것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사상 관점의 영향이 커요.” 자매가 하나님 말씀을 두 단락 찾아 주었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은 중국 전통문화 중에서 사람의 덕행을 평가하는 매우 전형적인 기준이다.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 덕행이 어떤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바로 그가 남에게 은혜를 입고 도움을 받은 후 보답하는지,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인지를 보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문화나 인류의 전통문화에서, 사람은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는 것을 덕행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여긴다. 은혜에 보답할 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배은망덕한 사람인 것이다. 그는 양심이 없는 사람, 사귈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며, 사람들에게 멸시와 혐오, 버림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이 은혜에 보답할 줄 안다면, 즉 남에게 은혜를 입거나 도움을 받은 후에 그것을 잊지 않고 힘닿는 데까지 자기 방식으로 상대에게 보답한다면, 양심과 인성을 갖춘 사람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이에게 이득을 얻고 도움을 받은 후 은혜에 보답하지 않거나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감사의 뜻을 표한 후 더는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면, 은혜를 베푼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느냐? ‘이 사람은 도와줄 가치가 없구나. 좋은 작자는 아닌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정말이지 양심도 인성도 없는 사람이야. 사귈 가치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가 앞으로 그런 부류의 사람을 또 만나면 도와주겠느냐? 적어도 도와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생각과 관점, 도덕 준칙에 영향을 받았다. 설령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이 악인이나 나쁜 사람일지라도, 자신에게 악행이나 나쁜 짓을 시킬지라도 양심과 이성에 등 돌리면서까지 맹목적으로 순종하며 보은의 목적을 이루었으며, 이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수도 없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이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도덕 준칙에 영향을 받고 속박되며 통제되고 결박되어 무턱대고 그릇된 보은의 관점을 견지하고, 나아가 악인의 조력자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너희는 나의 이 교제를 통해 이러한 일들에 관해 분명히 알고, 이런 행동을 어리석은 충성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행동은 선을 넘는 처신으로, 어떤 분별도 없이 맹목적으로 보은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여론의 질책이나 사람들의 정죄가 두려워 억지로 자신의 일생을 바쳐 보은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는 것은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어리석은 행동이다. 전통문화 중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은 사람의 생각을 속박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삶에 불필요한 번뇌와 짐을 안겨 주며, 사람의 가정에 고통과 부담의 무게를 더한다. 숱한 사람이 은혜를 갚기 위해 크나큰 대가를 치렀다. 그들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을 사회적인 책임, 자신의 본분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평생 은혜를 갚는다. 그러면서 그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 이런 행동이 어리석고 황당하지 않으냐? 이는 사람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어떻게 말하든,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덕행에 관한 말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기는 해도 진리 원칙에는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과는 완전히 어긋난다. 이는 그릇된 관점이자 행동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리란의 태도를 얘기하지 않으려고 질질 끌었던 이유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사상 관점의 구속과 속박 때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항상 은혜를 반드시 갚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으면 어떻게든 갚으려 했고, 은혜를 잊으면 남들이 뒤에서 배은망덕하다고 손가락질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은혜에 반드시 보답한다는 것이 사람됨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저는 세상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잘해 주면 배로 보답했기 때문에, 이웃들은 모두 저와 어울리려 했고, 그럴수록 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양심 있고 인성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믿은 후에도 저는 이런 전통 사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리란은 저에게 하나님 말세 사역을 전해 주고, 제가 연약하고 소극적일 때도 도와주고 붙잡아 주고, 아이도 대신 돌봐주고, 집안 일도 처리해 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리란에게 무척 고마워하며, 제가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모두 리란의 교제와 도움 덕분이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평소 리란과 만나면서 저는 이미 리란이 언제나 이러쿵 저러쿵 남 얘기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공과를 배우는 법도 없고, 본분에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같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도 리란이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늘어놓는 바람에, 방해를 받아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불신파라는 뜻이고, 원칙에 따라 충분히 제명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즉시 리더에게 리란의 태도를 얘기해서 리란을 교회에서 제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리란이 저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리란에게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저는 리란의 태도를 얘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리란을 감싸고 용인하면서 교회에 남겨두려 했습니다. 이것이 불신파를 감싼 것이 아닙니까? 저는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선민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이자, 형제자매들이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리란이 교란하는 바람에 형제자매들은 차분히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수 없었는데도, 저는 소위 은혜를 갚기 위해 리란을 폭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양심 있고 이성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정말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혐오를 자아냈습니다! 저는 이 점을 깨닫고 크게 뉘우치며 자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상 관점에 너무 단단히 얽매여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고 선악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당신께 회개합니다.’

그런 다음 또다시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전통문화의 관점은 반드시 분별해야 한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의 골자는 ‘은혜’에 있다. 여기에서 ‘은혜’를 어떻게 봐야겠느냐? 이는 어떤 측면의 은혜겠느냐? 어떤 성질의 은혜겠느냐?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 이런 문제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절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에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사람의 관념에서 ‘은혜’란 무엇이냐? 작은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네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누군가가 너를 도와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피죽도 못 먹고 힘들어하고 있을 때 네게 밥 한 그릇을 주는 것, 갈증으로 죽을 것 같을 때 물 한 병을 주는 것,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번 부축해 주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은혜에 속한다. 한편, 큰 은혜는 네가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누군가가 너를 구해 주는 것이다. 이는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속한다. 네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너를 도와 죽음에서 구해 준다면, 이는 목숨을 구해 준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람이 생각하는 ‘은혜’이다. 이런 은혜는 물질적이고 사소한 은혜의 범주를 넘어선, 크나큰 은혜에 속한다. 이는 금전이나 물질로 가늠할 수 없는 것으로, 감사의 말 몇 마디로는 상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럼 이런 식의 판단이 정말 정확하겠느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왜 정확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냐? (사람은 전통문화에 근거해 이 일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대답은 도리이고 이론이다.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의 본질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묵상해 보아라. 얼마 전, 인터넷상에 다음과 같은 동영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사람이 지갑을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옆에 있던 강아지 한 마리가 보고는 지갑을 물고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 사람은 강아지가 자기 지갑을 물고 있는 것을 보고 강아지가 훔쳤다고 생각해서 흠씬 두들겨 패 주었다. 이 일이 황당하지 않으냐? 그 사람의 품격은 개보다 못하다! 그 강아지가 한 일은 사람의 도덕적 기준에 완전히 부합한다. 다만 사람은 말을 할 줄 알아 “지갑이 떨어졌어요!”라고 외칠 수 있었겠지만, 강아지는 사람의 말을 할 줄 모르니 조용히 지갑을 물고 따라갔을 따름이다. 개조차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좋은 행위를 실행할 수 있다. 그럼 사람은 어떠하냐? 사람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있다. 사람은 처음부터 이러한 것들을 갖고 태어났으니 이런 일들을 더더욱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 한, 노력하거나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이 아주 간단히 이런 책임과 의무를 해내고 타인에게 도움과 이로움이 되는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일의 성질을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은혜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은혜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없는데, 보답을 논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는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때로는 하나님이 사탄을 봉사하게 하여 사람을 도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하나님에게 감사해야지, 사탄에게 은혜를 보답해서는 안 된다. 이는 원칙적인 문제이다. 악인이 은혜를 베푸는 시험이 닥치면 먼저 마음속으로 네게 이로움과 도움을 준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다른 길은 없는지 분명히 한 후, 융통성 있게 처리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구하려는 것이면 어떤 사람을 통해 봉사하게 하든 너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은혜를 완전히 사람에게 돌리거나 심지어 보은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다른 이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저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사람의 은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사람이 소극적이고 연약해지거나, 혹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형제자매들끼리 진리를 교제하며 서로 도와주고 붙잡아 주는 것은, 모든 하나님 선민들의 책임이자, 선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남편에게 핍박받는 저에게 리란이 진리를 교제하며 도와준 것은, 리란의 책임이지 은혜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저는 또한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리란의 전도 덕분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정하신 일이므로, 마땅히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시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 제가 남편의 핍박으로 넘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한 사람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 말씀의 양육과 공급이 이룬 성과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그분께 감사드리기는커녕, 사람에게 감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배은망덕한 것이고 하나님을 크게 거역한 것입니다!

저는 구하는 중에 또 다른 하나님 말씀을 보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상황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때 너를 도와주고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으며, 네 인생이나 중요한 일에서 영향을 주었지만, 그의 인성이나 그가 걷는 길은 네가 추구하고 걸어가는 길과 맞지 않는다고 해 보자. 너와 그는 공통 관심사가 없으며, 너는 마음속으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 그는 너와 취미도, 추구하는 바도 다르며, 인생의 길과 세계관, 인생관이 다르다고, 너희 둘은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가 지난날 네게 준 도움을 너는 어떻게 대하고 처리해야겠느냐? 이는 현실적인 상황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이런 상황 또한 처리하기 쉽다. 힘닿는 데까지 그에게 물질적인 보답을 한 후, 두 사람의 길이 다르니 함께하지 않고 같이 걷지도 않는 것이다. 친구조차 될 수 없다면 그 후로는 교류할 방법이 없다. 교류할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멀리해야 한다. 그 사람이 과거에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고 해도, 그는 사회에서 남을 속이고 남의 물건을 빼앗으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너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니, 네게는 그를 멀리할 이유가 충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너무 비양심적인 행동 아닐까요?”라고 하는데, 이는 양심이 없는 게 아니다. 만약 그가 생활상의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를 도와주어도 되지만, 속박되거나 그를 따라 악을 행하고 양심에 어긋난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가 너를 도와준 적이 있다고 해서, 또는 네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서 평생 그의 우마가 될 필요도 없다. 네게는 그런 의무가 없고, 그에게도 그럴 자격이 없다. 너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 올바른 사람, 너와 맞는 사람과 함께하고 교류하며 나아가 친구로 사귈 권리가 있다. 그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이는 너의 권리이다. 물론, 너는 네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교제하거나 친구가 되는 것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들을 위해 어떤 책임이나 의무를 다할 필요는 없다. 이 또한 네 권리이다. 네가 그런 사람들을 저버리기로 한 이상, 그와 교류하거나 그에게 어떤 책임, 의무를 다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또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처신할 때는 반드시 선을 지켜야 하며, 서로 다른 사람들을 서로 다른 태도로 대해야 한다. 악인과 어울리면서 물이 들어서는 안 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어떤 은혜나 정, 또는 사회적인 여론 등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입장과 원칙이 생긴다. 이는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7)> 중에서) 말씀을 읽고 나니 마음이 훨씬 밝아졌습니다. 사람됨에는 입장과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전에 자기를 도와준 적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이 올바른 길인 경우, 진리 원칙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포용하고 인내하며 진리 교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 길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인 경우, 고발하고 폭로해야 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멀리하고 내쳐야 합니다. 리란이 전에 저를 도와주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생활이 곤란한 것이라면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리란은 지금 교회 생활을 교란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리란과 같이 휩쓸릴 것이 아니라, 리란을 폭로해서 교회 이익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옳고 그름을 구분하고 원칙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폭로 덕분에 저는 잘못된 관점을 제때 바로잡고, 더 이상 ‘은혜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상 관점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아야 그분 뜻에 합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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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저는 교회의 사역 하나를 담당하고 있었고, 당시 팀장은 자오팅 자매였습니다. 다같이 사역에 관해 토론할 때면 자오팅 자매는 늘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착상태에 머무는 바람에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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