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농사가 노후 대책이다.”라는 바람이 무너진 후

2025.5.20

중국 왕옌(王艶)

제가 철이 들 때부터 주변의 어른들이 누구누구네는 자식들이 정말 효도 잘해서 복이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어요. 아플 때 그 집 자식들은 곁에서 수발을 들고 세상을 떠날 때는 거창하게 장례까지 치러 줬으니 정말 잘 살다 가는 거라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식 농사가 노후 대책이다.”라는 관점이 제 마음에 뿌리를 내렸어요. 저희도 부모님이 아프실 때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돌봐 드렸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거창하게 장례를 치렀어요. 그때 저는 부모님이 우리를 잘 키우셨다고 생각했어요. 부모가 자식을 낳아 키우는 건 자식한테 부모를 죽을 때까지 모시게 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희 마을에 독거노인 한 분이 계셨는데, 남편과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혼자 외롭게 사셨어요. 나이 들어 몸이 아파도 챙겨 줄 사람이 없고 죽어도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없으니 저는 그분의 일생이 처량하게 느껴졌어요. 결혼하고 저도 아들을 낳았는데, 애가 15살이 됐을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남편의 죽음이 저한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더구나 고달픈 생활과 사람들의 무시, 그리고 일부 부언낭설 때문에 살고 싶지 않은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아들을 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애는 잘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면 나중에 아들이 절 죽을 때까지 모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제가 심장병까지 앓게 됐는데, 일만 하면 너무 아팠어요. 그럴 때면 아들이 잘 돌봐 줬어요. 병이 도지면 절 살뜰하게 보살펴 줘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죠. 그때면 아들 키운 게 헛되지 않다고 느껴졌어요. 나중에 전 지금의 남편과 재혼을 했어요.

그리고 2008년에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고, 1년 후부터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사흘이 멀다 하고 집에 가서 애를 챙겨 줬어요. 애가 좋아하는 요리를 해 주고 집 정리도 해 주고 용돈도 쥐여 주면서 최대한 애의 요구를 들어줬어요. 2012년에 아들이 군 입대를 앞두고 정치 심사가 있었는데, 파출소에서 우리 마을을 대상으로 종교 신앙 조사를 진행했어요. 그래서 저는 객지로 피신했죠. 근데 두 달 뒤에 남편이 복음을 전하다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러니 집에 갈 엄두도, 아들과 연락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어요.

2017년에 자꾸 몸에 기운이 없고 가슴이 답답해서 집에 가서 치료하고 싶었어요. 근데 집은 안전하지가 않아 언니네 집으로 가서 언니보고 아들한테 연락하라고 했어요. 5년 만에 아들을 봤는데, 아들을 만나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어요. 우린 서로 회포를 풀었죠. 아들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라고 하면서 병원은 며느리가 같이 가 줄 거라면서 자기 집에 가자고 했어요. 더구나 절 위해서 집 한 채를 비워 뒀는데, 제가 노후에 살 집이라고 했죠. 그 얘기를 들으니 너무 기쁜 거예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고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한 아들인데, 오히려 제 노후를 생각해 주니 역시나 아들이 노후에 비빌 언덕이라고 생각됐어요. 근데 다음 날 저녁에 퇴근하고 아들이 절 보러 왔는데, 풀이 죽어서 그러는 거예요. “엄마, 집사람이 엄마 인정 못 하겠대요. 지금까지 안 계시다가 갑자기 오시니 못 받아들이겠나 봐요. 저랑 대판 싸웠는데, 자기랑 엄마 사이에 택하래요. 사실 제가 제일 힘들 때 제 곁에 있어 준 사람이 아내니까 아내를 택했어요.” 순간 머리에 날벼락 맞은 느낌이었어요. 저는 여태 아들을 제 목숨줄이라고 생각하며 아들이 제가 죽을 때까지 모실 수 있을까 싶어 고생하면서 키웠어요. 근데 이제 와서 아들이 엄마가 아니라 아내를 택하고는 집에 오지 말라고 하니 아들을 키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거예요. 순간 저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눈물이 났어요.

아들이 간 후에도 계속 언니네 집에서 지냈어요. 정신적 충격까지 더해지니 병은 더 심해졌어요. 남편도 곁에 없는데 이제 아들도 바라볼 수 없게 됐잖아요. 다들 자식 농사가 노후 대책이라고 하는데, 저한테는 가망이 없으니 너무 속상하고 괴로웠어요. 언니네는 온 가족이 모여서 웃음꽃 피우면서 화기애애한데, 저는 하나 있는 아들도 있으나 마나 하니 늙어서는 아파도 곁에서 보살펴 줄 사람도 없고 죽어도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없는 외로운 노인이 되겠구나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실패한 삶을 산 것 같은 게 하나님을 믿는 제가 왜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못한 운명인가 싶었어요. 생각할수록 너무 괴로웠고 온종일 우울하고 뭘 해도 기운이 나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자기가 소송할 게 있으니 돈을 좀 꿔 달라고 했어요. 그동안 제가 잘 챙겨 주지 못한 것도 있으니 아들이 어려울 때 엄마가 도와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한테 돈 좀 챙겨 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들이 나중에 며느리랑 애를 데리고 인사하러 오겠다고 했어요. 설이 지나고 나서 아들이 정말 어린 손녀를 데리고 왔더라고요. 비록 며느리가 아직 절 받아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중에 늙으면 아들이랑 손녀가 곁에서 돌봐 줄 거고, 제가 죽을 때까지 모실 거라는 생각에 너무 기쁘기도 하고 늙어서도 희망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24년 설 며칠 전에 잡혀간 사촌 여동생이 제 정보를 경찰에 넘겼어요. 결국 저는 감시와 체포를 피해 객지로 나가 본분을 이행하게 돼서 설에도 집에 갈 수 없었어요. 더구나 아들이 절 보러 오겠다고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이제 겨우 아들이랑 관계가 좀 회복되고 있는데, 내가 다시 떠나 버렸으니 아들이 화가 나 다시는 날 안 보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또 아들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어요. 앞으로 혼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괴로워서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었어요. 본분은 이행하고 있었지만 집중이 안 됐고 교회 사역을 밀착 관리 할 마음도 없었어요. 그래서 수차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서 나올 수 있게 이끌어 달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생각해 봤어요. 왜 아들을 보지 못하면 이렇게 괴롭고 힘든지, 그 근원이 뭔지를요. 어느 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어요. 『성인 자녀에게 이런 기대를 거는 것 외에 세상의 모든 부모가 공통적으로 하는 요구가 있다. 바로 자식들이 부모에게 잘하고 효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특정 민족이나 지역인들은 자녀에게 더 구체적인 요구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외에도 부모가 죽을 때까지 모셔야 하고,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부모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부모가 자식 세대에게 거는 기대 중 마지막 한 가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부모가 자녀를 낳아 키우는 초심 중 하나이자 자녀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는 요구하기 시작하며, 늘 탐색하면서 물어본다. “나중에 크면 엄마, 아빠 모실 거야?” “네.” “할머니, 할아버지도?” “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네.” “누구한테 제일 잘해 줄 거야?” “엄마한테요.” 그럼 아빠는 질투한다. “그럼 아빠는?” “아빠한테 제일 잘해 줄 거예요.” 이제는 또 엄마가 질투한다. “도대체 누구한테 제일 잘해 준다는 거야?” “엄마, 아빠한테요.” 부모는 그제야 만족한다. 아이가 처음 말을 하게 된 순간부터 부모는 아이가 나중에 효도하고 부모에게 잘하게 하려고 애쓴다. 아이가 아직 말도 잘 못하고 철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대답 속에서 약속을 받아 내려고 하고, 아이에게서 미래를 보려고 하며, 자기가 키운 아이가 배은망덕하지 않고 효심 있는 자식이기를, 부모에게 책임감을 갖는 자식이기를 바라고, 나아가 부모의 기대를 충족해 주고 부모를 부양하는 자식이기를 바란다. 이 질문은 자녀가 어릴 때부터 시작되지만, 단순한 질문은 아니다. 이는 100% 자식에 대한 부모 마음 깊은 곳의 요구이자 기대이며, 또한 더없이 실질적인 기대이자 요구이다. 그래서 자식이 사리 분별을 하는 순간부터 자식에게 부모가 아플 때 안부를 묻고 침상 곁에서 돌보며 함께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물 한 잔 따라 주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혹은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고 해도 부모는 최소한 자식이 그 정도의 효심은 갖기를 바란다. 또한, 부모는 아이가 어릴 때 그런 효심을 보기를 바라며, 수시로 그것을 검증한다. 예를 들어, 부모의 몸이 안 좋을 때, 혹은 일 때문에 지쳤을 때 자식이 부모에게 물을 따라 주거나 신발을 가져다주거나 빨래를 해 주거나 설령 계란 볶음밥에 불과할지라도 간단한 식사를 챙겨 주는지, 또는 “피곤하세요? 피곤하시면 밥은 제가 할게요.”라고 말하는지 지켜본다. 어떤 부모는 공휴일에 밖에 나갔다가 밥때가 되었을 때 일부러 밥을 하러 집에 들어가지 않고 아이가 커서 철이 들었는지, 부모에게 밥을 차려 줄 줄 아는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 마음을 헤아려 줄 줄 아는지, 부모의 어려움을 분담해 줄 수 있는지, 머리 검은 짐승은 아닌지, 헛되이 키운 것은 아닌지 지켜본다. 부모는 아이가 크는 동안, 심지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이런 것을 테스트하고 알아보며, 동시에 계속 요구한다. “머리 검은 짐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엄마, 아빠가 너를 왜 키웠겠니? 나중에 엄마, 아빠를 모시라고 그런 거야. 너를 그냥 키웠겠어? 그러니 엄마, 아빠한테 불효해서는 안 된다. 엄마, 아빠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는지 이해하고 알아야 해.” 특히 어떤 아이들은 소위 사춘기, 그러니까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는 과도기에 철이 덜 들고 사리 분별이 안 되어 수시로 부모에게 대들고 또 말썽까지 일으키는데, 그럼 부모는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잔소리한다. “네가 어릴 때 너를 키우느라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그런데 이런 인간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구나. 효심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데다가 집안일을 하기를 하나, 엄마, 아빠의 어려움을 분담해 주기를 하나.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지. 불효막심한 것, 너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부모는 자녀가 학업이나 생활 면에서 말을 듣지 않고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 외에도 자녀에게서 미래를 볼 수 없을 때, 또는 자녀가 장차 불효자가 되어 부모를 이해해 주거나 사랑하거나 마음에 두지 않을 것 같을 때 화를 낸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모에게 효도할 줄 모를까 봐 화를 내는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 그런 아이는 기대를 걸 수가 없으며, 머리 검은 짐승, 불효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무척 속상해하며,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대가를 치른 것이 다 헛되었다고,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고,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후회하며,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불안해하고 속상해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께서 부모들이 자녀에게 거는 기대가 있는데, 바로 자녀에게 자기가 죽을 때까지 모시라고 요구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근데 일단 자식이 그걸 못 하면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자녀를 키운 보람이 없다고 느낀다고 하셨죠. 제가 그런 상태였어요. 저는 애가 어렸을 때부터 애한테 그런 기대가 있었어요. 나중에 제가 몸이 아플 때 곁에서 수발들고, 제가 늙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 저를 부양하고 챙겨 주다가 제가 죽으면 장례를 치러 주기를 바랐던 거예요. 아들이 다 큰 후에는 제가 공산당의 박해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하는 형편이었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들이 제가 늙은 후에 살 집을 마련해 뒀다고 하니까 아들이 효도를 하는 것 같고 뭔가 믿을 구석이 생긴 것 같아서 너무 기뻤어요. 근데 나중에 아들이 제가 아니라 자기 아내를 택하니까 이제 아들한테 뭘 기댈 수도 없고 아들을 키운 보람이 없다는 생각에 실망하고 상심이 컸어요. 그러다 다시 아들이 손녀를 데리고 절 보러 오니까 뭔가 위로가 됐는데, 다시 또 공산당의 체포 때문에 떨어져 보지 못하게 되니까 이제 아들이 다시는 저를 보지 않을까 봐 걱정했고, 자식 농사가 노후 대책이라는 희망이 없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저는 또 고통 속에 빠져들었고 교회 사역을 밀착 관리 할 마음도 없었어요. 이제 보니까 제가 고통스러웠던 근원은 “자식 농사가 노후 대책이다.”라는 관점에 있더라고요. 그 관점에 지배받다 보니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지 못했던 거죠.

저는 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어요. 『부모가 자식의 효도를 기대하는 이 일에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지배하고 또한 하나님이 정한 바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성을 지녀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것은 그 자체로 인생의 특수한 일을 체험하는 것이다. 너는 이미 자녀로부터 적잖은 것을 얻었고, 자녀를 키우면서 온갖 시련과 고난, 행복과 즐거움을 겪었다. 이 과정은 네게 인생의 풍부한 경험이요, 당연히 잊을 수 없는 체험으로, 네 인성의 결핍과 무지를 보완해 준다. 너는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이미 네가 얻어야 할 것을 얻었다. 네가 만족할 줄 모르고 자녀가 네 시종이나 노예가 되기를 바라고, 네가 키워 줬으니 평생 너에게 효도하는 것으로 그 빚을 갚기를 바란다면, 죽을 때까지 너를 모시기를 바란다면, 네 육이 집 안에서 썩지 않게 관에 넣어 주고, 네가 죽은 후에는 너를 위해 죽도록 울어 주고, 너를 위해 상복을 입고 3년 동안 애도하는 등 자녀에게 이런 방식으로 빚을 갚으라고 한다면 이는 경우에 어긋나고 인성이 없는 것이다. 보아라, 하나님은 부모를 대하는 일에 관해 가르칠 때, 부모에게 효도하면 된다고 했을 뿐 부모가 죽을 때까지 부양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런 책임과 의무를 준 적이 없고, 그렇게 말한 적도 없다. 하나님은 그저 부모와 자식 관계에 있어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알려 주었을 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은 개괄적이며 범위가 무척 넓다. 지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 능력과 조건 범위 내에서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다. 자녀에 대한 요구는 이 정도로, 무척 단순하다. 그럼 부모로서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겠느냐? 하나님은 “자녀는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부모가 죽을 때까지 모셔야 한다.”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러니 부모로서는 자신의 사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네가 낳아 줬다는 이유로 자식이 언제든 너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가 너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너를 가운데 두지 않으면 너는 늘 “이 머리 검은 짐승 같으니라고. 너는 정말 불효막심한 놈이다. 그 나이까지 키워 줬는데 내 기대에 부합하지를 못하는구나.”라고 욕하면서 자식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데, 항상 이렇게 자녀를 욕하고 자녀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하라고, 곁에서 함께해 달라고, 네가 죽을 때까지 모시면서 어디를 가든 너를 생각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행동이고 비인간적인 생각이자 사상이다. 이런 사상은 정도만 다를 뿐 다양한 국가나 민족에 모두 존재한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문화를 볼 때, 중국인은 효도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효도를 이야기해 왔으며, 그 일을 인성의 일부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왔다. 물론, 그것은 사회에서 하나의 분위기와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만약 자녀가 효도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체면이 구겨질까 봐 걱정하고, 자식이 생각하기에도 그 오명을 감당하기 힘들다. 다양한 요소의 영향으로 인해 부모는 이 전통 사상의 해악에 깊이 물들어 생각도 분별도 없이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할 것을 요구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자식 농사가 노후 대책이다.”라는 관점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부모가 자녀를 낳아 키우는 건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거지 자식이랑 거래를 해서는 안 되는 거더라고요. 자신이 그 자식을 낳기로 했으면 그 아이의 생활을 책임지고 챙겨 줄 의무가 있는 거죠. 동물도 새끼를 낳으면 독립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있기 전까지는 살뜰하게 보살피는데, 그건 하나님이 주신 본능이잖아요. 동물이 다 그 법칙을 준수하기에 만물이 계속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죠. 사람도 예외는 아니더라고요. 돌아보면 제가 아들을 키운 과정은 제게 인생의 풍부한 경험이기도 했어요. 애가 옹알옹알 말을 배우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고, 학교에 가고, 제 일손을 도와줄 나이가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전 어머니로서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고, 인성이 많이 성숙해졌어요. 자녀를 낳아 키우는 건 제가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지 절대 은혜가 아니더라고요. 근데 저는 “자식 농사가 노후 대책이다.”라는 전통적 관념 때문에 아들을 키워 준 걸 거래의 빌미로 삼고 있었어요. 제가 키워 줬으니까 나중에 제가 아프거나 늙었을 때 당연히 날 위해 뛰어다니며 수발들어야 하고, 죽은 후에도 거창하게 장례를 치러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아들을 낳아 키운 목적은 제 육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한 거였더라고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실제 상황에 맞춰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라고 하셨지 부모가 임종할 때까지 부양하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저는 “자식 농사가 노후 대책이다.”, “내가 자식을 키우면 자식은 내 노후를 부양해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에 사로잡혀 아들한테 제 모든 생활을 책임져 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그게 막무가내이자 이기적이고 비열한 게 아니고 뭐겠어요? 매번 아들한테 기댈 수 없는 상황이 올 때면 상심하고 실망하면서 삶의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제가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명이 안 좋다고 원망했으며, 제 미래를 위해 걱정하고 근심하느라 본분을 이행할 기분이 나지 않았어요. 보니까 “자식 농사가 노후 대책이다.”라는 전통적 관념이 계속 저를 괴롭히고 저를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옳고 그름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정말 이 사상 관점은 너무 터무니없는 거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사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너는 이미 자식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얻었다. 자식이 네게 효도할지 말지, 네가 죽기 전에 자식이 네 기대에 부합할지, 자식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너희 사이에 함께 살아갈 인연이 있는지를 봐야 하며, 이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한편, 자녀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갈지, 생활 여건이 어떨지, 너를 부양할 조건이 될지, 경제적으로 여유로울지, 여윳돈이 있어서 네게 물질적인 누림과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역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이 밖에, 주관적인 면에서 부모인 네가 이번 생에 자녀가 주는 물질과 금전 혹은 감정적 위안을 누릴 수 있을지도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사람이 구한다고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살도록 운명적으로 정해 놓았기에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한 채 평생 부모와 붙어산다. 네가 때려도 그는 떠나지 않는다. 반면, 어떤 자녀는 부모가 함께 살기를 몹시 원하고 떨어지기를 아쉬워하며 늘 그리워하는데도 불구하고 갖가지 이유 때문에 부모와 같은 도시, 심지어 같은 국가에 살지 못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조차 어렵다. 지금은 통신 기술이 발달해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다고는 하나 매일 함께 사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자녀가 어떤 이유로 해외에 나가 일하거나 결혼 때문에 외지에서 살게 되는 등 부모와 멀리 떨어지면, 얼굴 한 번 보기도 쉽지 않고 전화나 영상 통화를 하려고 해도 시간을 봐야 한다. 시차나 각종 불편함 때문에 자주 통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크게 보면 이것들은 무엇과 관계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부모나 자녀 어느 한쪽이 주관적으로 원한다고 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부모는 앞으로 자녀에게 기대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그런데 무엇을 기대하려는 것이냐? 그가 물을 따라서 가져다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냐? 그것을 무슨 기대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물을 따르는 것은 너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일 아니냐? 네가 건강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자조 능력이 있어서 뭐든 혼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냐! 꼭 다른 사람이 시중을 들게 해야겠느냐? 꼭 자녀가 보살펴 주고 함께해 주는 것을 즐기고, 자녀가 밥상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시중을 들어야 행복하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움직일 수 없어서 자식이 정말 밥상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네 시중을 든다면, 그것이 행복하겠느냐? 만약 네게 고르라고 한다면, 건강해서 자녀의 보살핌이 필요 없는 것과 침상에 매인 채 자녀가 옆에서 보살펴 주는 것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 (건강한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건강한 것이 얼마나 좋으냐! 80살, 90살, 또는 100살까지 장수할지라도 자조 능력이 있다면 삶의 질이 좋을 것이다. 늙어서 사고가 느려지고 기억력도 떨어지며 음식도 적게 먹는다고 해도, 뭘 하든 느려지고 그렇게 잘해 내지 못한다고 해도, 외출도 그리 쉽지 않다고 해도 기본적인 생활을 스스로 꾸려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냐! 자녀는 가끔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명절 때 집에 와서 머물다 가면 된다.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해서 무엇 하겠느냐? 늘 자녀에게 기대를 거는데, 그럼 자녀가 꼭 네 노예가 되어야 기분이 좋겠느냐? 그런 생각은 이기적인 것 아니냐?(<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이 말씀을 보면서 번뜩 정신이 들었어요. 사람이 살면서 자녀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지, 또는 자녀를 통해 물질적 또는 정신적으로 얼마나 위로를 받을 수 있는지는 모두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르는 거지 제가 원한다고 다 실현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 오빠를 보면, 자식이 다섯 명 있는데, 아플 때 곁에서 보살피는 자식은 한 명도 없었어요. 결국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제 남편이 보살펴 줬어요. 그리고 저도 수년간 객지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건강이 계속 안 좋았어요. 심장병도 여러 번 발작했지만 매번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무탈하게 넘어갔어요. 한번은 가슴이 너무 아프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고 어지러워서 움직이지도 못했어요. 그때 저는 죽는 것 같아서 이렇게 기도했거든요. ‘하나님, 제 목숨이 당신 손에 달린 줄 믿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당신의 주재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때 마침 접대 집의 동생분이 외지에서 돌아왔는데, 그가 의사라 혈 자리를 제대로 눌러 줬어요. 그러니까 조금 지나서 괜찮아졌었죠. 보면 하나님은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저를 도와주셨어요. 그건 하나님의 기묘한 보호였죠. 제가 아플 때 아들이 곁에 있다 해도 아픈 건 여전하잖아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 목숨을 거두기로 하셨다면 아들이 곁에 있어도 별수 없는 거잖아요. 제 운명은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거고 제 건강 상태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달린 거죠. 그리고 제 생활적인 건 아들한테 다 기댈 게 아니라 제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거죠. 아들을 떠나 저 혼자 삶의 모든 일을 마주해야 하는 게 맞는 거고, 그게 부모로서 갖춰야 할 이성이죠. 이걸 깨닫게 되니 마음이 많이 환해졌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면서 죽은 후에도 품격이 있고, 장례를 치러 줄 자식이 있기를 추구하는 터무니없는 관점에 대해서도 알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모두 ‘자식이 곁에 있어서 관에 넣어 주고 수의도 입히고 화장도 해 주고 으리으리하게 장례를 치러 주면 얼마나 멋질까? 죽었는데 아무도 장례를 치러 주지 않고, 임종을 지켜 주는 사람도 없다면 그건 인생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거나 다름이 없지.’라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이런 것들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외진 시골에 사는 많은 사람, 나이가 많고 식견이 별로 없는 사람은 부모가 죽을 때까지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사상 관점이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에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그로 인해 심각한 해를 입게 된다. 그 독소가 네 내면에 줄곧 숨어 있으면 너는 그것에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 그것을 파내서 제거하면 해를 입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잘못된 행동이든 다 그릇된 사상으로 초래된 것이다. 그는 죽은 후에 집 안에서 썩어 갈까 봐 늘 이렇게 생각한다. ‘아들을 낳아야겠어. 아들이 크면 멀리 떠나지 못하게 해야지. 내가 죽을 때 아들이 곁에 없으면 어떡해? 나를 봉양할 사람도,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없으면 인생이 얼마나 한스럽겠냐고! 나를 봉양하고 임종을 지켜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삶이 헛되지 않고, 인생이 완벽해지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주변 이웃들한테는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지.’ 이런 사상은 너무 낡아빠진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부하고 타락한 데다가 육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육은 사실 한 푼 값어치도 없으며, 생로병사를 다 겪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을 때 진리를 얻고 구원받아야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진리를 얻지 못한 채 육이 죽어서 썩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자식이 아무리 효도해 봤자 너는 그것을 누릴 수 없다. 죽은 후에 자식이 관에 넣고 장사 지낸다고 할지라도 그 육이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느냐? 지각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어떤 지각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사는 동안 이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며, 자식이 장례를 치러 주는 것에 관한 요구치가 무척 높다. 이는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알려 주셨어요.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떠나면 육에서 생명의 흔적이 사라지고 며칠 만에 부패하기 시작한다고요. 그럼 후손들이 아무리 상복을 입고 장례를 아무리 거창하게 잘 치른다고 해도 그 육은 어떤 지각도 없고,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죽은 후에도 거창하게 장례를 치러 줄 것을 바라는 건 너무 어리석다고요. 근데 저는 그걸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들이 제가 아닌 며느리를 택했을 때, 저는 언젠가 병이 심해져서 죽게 될 텐데, 그때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없으면 제 인생이 너무 완벽하지 못한 것 같고 너무 처참해질 것 같아 걱정하고 있었어요. 보니까 저는 정말 터무니없는 관점을 갖고 있었어요. 사실 하나님께서 말세에 진리를 선포하심으로 그 진리를 사람 안에 심어 주시려고 하시는데, 사람은 오직 진리를 추구해야 삶이 값지고 의미가 있어지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결말을 정하시는 것도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한다고 하셨어요. 오직 진리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아름다운 종착지로 갈 수 있게 되죠. 살아생전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선행을 예비하지 않으면 아무리 죽은 후에 거창한 장례를 치른다고 해도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건 변함이 없잖아요. 하나님을 믿는 제가 생각할 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고 어떻게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며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더라고요. 하나님께 인정받아야만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육은 사실 한 푼 값어치도 없으며, 생로병사를 다 겪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을 때 진리를 얻고 구원받아야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만약 죽은 후에도 품격 있기를 추구하고 그런 것에 기대어 살아간다면, 그건 어리석은 사람이자 불신파와 같더라고요. 아들이 저를 어떻게 대할지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거죠. 앞으로 아들이 제가 죽을 때까지 모시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해야죠. 그게 제가 갖춰야 할 이성이더라고요. 지금은 하나님의 복음이 확장되는 중요한 시기잖아요. 이럴 때 저는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착실하게 제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많이 갖춰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하나님나라 복음 확장에 힘을 보태는 게 맞더라고요. 이걸 깨닫게 되면서 올바른 삶의 목표와 방향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자유와 해방감도 생기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더는 영향받지도 않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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