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보살핌과 돌봄을 어떻게 대하는가

2025.6.9

2019년, 18살이었던 무시는 복음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중공에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2022년 4월에 만기 출소했습니다. 기차역에서 나온 무시는 길가에 초췌하게 서서 초조하게 출구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무척 감격스러웠습니다. 3년 만에 다시 만나는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무시는 아버지의 류머티즘이 더 심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좀 나아졌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아버지에게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버지의 등은 이미 약간 굽어 있었고, 얼굴에는 수심과 노쇠함이 역력했습니다. 무시는 순간 슬픈 감정이 밀려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버지를 등진 채 눈물을 훔쳤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난 몇 년 아버지가 자신을 계속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해 아버지는 공안국에서 보낸 체포통지서를 받고서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18살 아이가 붙잡혀 수감되었으니 경찰이 어떻게 괴롭히고 대할지도 알 수 없어, 아버지는 온종일 걱정하느라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몇 년 전 차를 운전하며 중노동을 해 지병을 얻었고, 다리의 류머티즘은 점점 심해져서 평소 힘든 일은 할 수 없었고, 심하게 아플 때는 다리를 절뚝이며 걸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혼자 집에서 세상을 떠나도 아무도 모를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무시는 언제나 강인했던 아버지가 눈가가 빨개져서 약간 울컥하시는 목소리로 지난 몇 년간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듯 괴로웠고,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무시는 11살 때를 떠올렸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경찰에 쫓겨 도망치셨고, 아버지가 홀로 어머니 역할까지 하시며 자신을 돌보고 길러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택배 일뿐만 아니라 밭의 농사일까지 하셨고, 하루 종일 힘들게 고생한 후 쉬지도 못한 채 어린 그녀를 돌봐야 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본분을 이행하러 집을 떠났던 수년 동안 경찰은 걸핏하면 집에 찾아와 그녀와 어머니의 행방을 캐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를 전부 혼자 대응하셨고, 친척과 이웃의 냉대와 조롱을 견뎌내면서 늘 아내와 딸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매일 마주한 것은 차디찬 집밖에 없었고, 병으로 고생할 때 곁에서 말 걸어주거나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무시는 아버지께 더욱 빚진 마음이 들었고, 마음속으로 자책했습니다. 자신은 이렇게 다 컸는데도 아버지의 생활 부담을 덜어드리기는커녕 오히려 걱정과 염려만 끼쳤으니 불효녀가 아닙니까? 무시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까 아버지를 잘 모시고 덜 고생시켜 드려야지.’ 그 후로 무시는 직장에 나가 돈을 벌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생활을 세심히 돌봐드렸습니다.

어느 덧 반 년이 흘렀지만, 경찰이 여전히 무시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어서 무시는 교회 생활을 하거나 본분을 이행할 수 없어 마음이 공허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리더가 무시에게 외지에 나가 본분을 이행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무시는 드디어 형제자매들과 함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본분을 다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척 흥분되었습니다. 무시는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아버지는 갑자기 날카롭고 초조해하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엄마랑 너가 번번이 집을 떠나니, 나더러 어떻게 견디라는 게냐?” 아버지의 격앙된 모습을 보자 무시는 마음이 괴롭고 아버지께 크게 빚진 마음이 들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집을 떠나게 된다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힘들게 키워놨더니, 효심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실까?’ 무시는 또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생각해 차마 더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년여의 감옥 생활 동안 만약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가 없었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아는 무시는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양심이 없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무시는 몹시 갈등했고, 결국 본분 이행의 기회를 포기했습니다. 선택을 내린 그 순간, 무시는 깊이 자책했고, 서둘러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구하던 중에 무시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부모가 중병에 걸리거나 큰 어려움에 봉착한 일을 지나치게 분석하고 연구할 필요는 없다. 네 힘을 들여서는 더더욱 안 된다.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생로병사나 크고 작은 일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네가 성인이라면 네 생각이 성숙했을 테니 이 일을 냉정하고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부모님이 병에 걸리면 날 생각하느라 그런 거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나 돼? 생각이야 했겠지. 자기 자식인데 어떻게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어? 나도 부모님을 생각하는데 어째서 나는 병에 걸리지 않는 거지?’ 병에 걸리는 사람은 모두 자식이 보고 싶어서 걸리는 것이겠느냐?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부모가 큰일을 당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에 그 일을 배치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하나님의 손으로 배치한 것이니 객관적 원인이나 이유를 들이댈 수 없다. 그저 부모가 그 나이가 되면 그 일이 일어나고 그 병에 걸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네가 곁에 있다고 피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운명에 병에 걸리는 일을 안배하지 않았으면 네가 그들 곁에 없어도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인생에 그런 큰일이 일어나도록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네가 그들 곁에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들은 여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 부모도 성인이고 사회에서 이런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만약 그들이 그 일에서 벗어나게끔 환경을 안배한다면 그 일은 조만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들이 겪어야 할 인생의 고비 중 하나라면 얼마 동안 겪어야 할지는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니 피해 갈 수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네가 어떻게 행동하든, 혹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획하든 그런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피조물이든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지, 진실로 믿는지 하는 점이다. 어떤 부모는 그런 복과 운명이 있어서 자손이 번창하고 천륜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재이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복이다. 반면 어떤 부모는 그런 운명이 없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안배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옆에서 지켜 주고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는 그런 복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배치로, 사람이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 실제란 무엇인가> 중에서) 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저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버지가 이토록 오랫동안 홀로 집에서 지내시면서 아플 때도 곁에서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생각만 하면 가책을 느끼고 빚진 기분이 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편하게 지내시도록 돌봐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니 모든 사람이 일생 동안 어떤 고난을 받을지, 어떤 병에 걸리고 어떤 재난을 당할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고,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시는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아버지의 류머티즘이 심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걱정했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아버지의 병세가 심해졌는데 돌봐주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생활하실까 걱정했지만, 감옥에 갇힌 그녀는 돌봐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은 오직 하나님께 더 많이 기도드리고 아버지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뿐이었습니다. 만기 출소한 후에야 당시 아버지의 병세가 심각했고, 곁에 세심히 돌봐줄 사람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류머티즘이 나중에 점차 나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이 어떠한지, 평안한지 아닌지는 모두 하나님의 정하심과 주재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아버지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야말로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를 깨닫자 무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더는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시는 외지에 나가 본분을 이행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하루 종일 고생하신 후 지친 모습을 보고, 고혈압까지 있어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하신 것을 생각하자 속으로 또다시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날 돌보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어. 한동안은 집에서 아버지를 더 돌봐드릴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본분을 이행할 수 없게 되니까 마음속에서 또 책망을 받았습니다. 무시는 늘 기도할 때 이 일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진리를 실행할 의지를 더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 후, 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해 올바른 실행의 길을 얻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옳고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런데 왜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사람은 원칙 없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대하는 방법은 진리와 관계가 있다. 만약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네게도 잘한다면 너는 효도하겠느냐? (효도할 것입니다.) 어떻게 효도하겠느냐? 형제자매와 다르게 대한다면,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며, 부모가 나이가 들면 곁에서 돌봐 주면서 본분을 이행하러 가지 않는다면, 이러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럴 때는 상황을 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집 근처에서 본분을 이행하여 부모를 돌볼 수 있고 부모도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자식의 책임을 다해 부모의 일손을 도와주면 된다. 부모가 병에 걸리면 돌봐 주고, 부모에게 힘든 일이 있다면 위로해 주어라. 또 경제적인 여건이 된다면 적당히 영양 보조 식품을 사 주어라. 하지만 네가 본분으로 바쁜데 부모를 돌봐 줄 사람이 없다면, 또 부모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는 어떻게 선택해야겠느냐? 네가 실행해야 할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책임이나 의무에 불과한 이상, 네 의무가 본분과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본분을 위주로 하고, 본분을 일 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의무가 꼭 본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분 이행을 선택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지만,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진리 실행이 아니다. 만약 조건이 된다면 그 책임과 의무를 이행해도 되겠지만, 당장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저는 본분을 이행하러 가야 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겁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만, 진리 실행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본분을 위주로 하고 본분을 지켜야 한다. …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 중 어떤 것이 진리겠느냐? 당연히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단순히 의무를 다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부탁이 있는데 그것은 네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 책임은 진정한 책임으로, 창조주 앞에서 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창조주의 요구이자 인생의 큰일이기도 하다. 반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그저 자식의 책임이자 의무일 뿐, 절대 하나님의 부탁이 아니고, 나아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오직 본분을 이행하는 것만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진리이고, 천직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 실제란 무엇인가> 중에서) 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이며, 사람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이지만, 이는 정상 인성이 해야 하는 것일 뿐, 진리 실행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충돌하지 않는 경우에는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아버지와 많이 대화하며 걱정을 덜어드리고 어려움을 해결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로서 해야 할 책임입니다. 하지만 본분을 이행해야 해서 곁에서 아버지를 보살펴 드릴 수 없는 경우에는 아버지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는 본분을 다해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자신이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시는 또 2년 6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고통스럽고 무력할 때 만난 한 자매를 떠올렸습니다. 함께 서로 돕고 붙들어 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할 기회가 있었는데, 하나님 말씀의 깨우침과 인도로 조금씩 걸어올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봐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느꼈습니다. 만약 육의 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본분을 내팽개친다면 너무나 큰 패역입니다. 이를 깨달은 무시는 자신의 걱정과 염려를 하나님께 기도로 고백하고 맡겼습니다. 그녀는 집안일을 모두 마친 뒤 영양제와 약품, 그리고 아버지의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들까지 구매했습니다. 그 후, 무시는 아버지와 충분히 소통한 후 외지로 본분을 이행하러 갔습니다.

그 후, 무시는 부모님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 형제자매들의 체험과 간증을 듣고,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어머니의 역할까지 하면서 자신을 돌봐주고, 자신에게 많은 희생을 하신 것을 떠올리며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곁에서 보살펴드리지 못할 때마다 자신이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버지께 빚진 마음이 들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지금 외지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내적 상태가 영향을 받고, 제약을 받고 있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고 싶었습니다. 구하고 묵상하던 중 그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방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 또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말도 있다. 이 얼마나 수준 높고 대범하고 품위 있는 말이냐! 사실, 그들이 말하는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라는 현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물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하나님이 각 생물에게 정해 준 법칙일 뿐이다. 사람을 포함한 각종 생물은 모두 이 법칙을 지키고 있다. 생물마다 그 법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모든 생물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을 한층 더 입증하는 것이다. 어떤 생물도 이 법칙을 깨거나 뛰어넘을 수 없다. 생각해 보아라, 사자나 호랑이는 사나운 육식 동물이지만 새끼 때는 성체가 되기 전까지 길러지고 물지 않는다. 이것이 동물의 본능이다. 사납든, 온순하든 모든 동물은 이 본능을 가지고 있다. 각종 생물은 이런 본능과 법칙을 따라야만 번식해 나갈 수 있다. 인류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각종 생물이 이 법칙을 지키지 않거나 이런 법칙과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번식할 수 없을 것이고, 먹이 사슬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 바로 생물계가 이 법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각종 생물은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다. 새끼가 태어나면 성체가 될 때까지 암컷이나 수컷의 보호와 보살핌 속에서 자란다. 각종 생물도 자기 새끼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극진하게 돌보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이 자칭 고등 동물이라고 하면서 이 법칙을 지키지 않고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동물보다 못하다. 그러니 부모가 너를 키우면서 얼마나 보살피고 책임을 졌든 그들은 그저 피조된 인류의 능력 범위 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들의 본능이다. … 이 외에도 특별한 동물이 있다. 호랑이, 사자와 같은 동물들은 성체가 되면 부모에게서 떨어진다. 심지어는 수컷끼리 경쟁하며 물 땐 물고, 겨룰 땐 겨루며, 싸울 땐 싸우기도 하는데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것이 법칙인 것이다. 그것들은 정에 얽매이거나 인간처럼 정에 빠져 살지 않는다. “은혜에 보답하고 은혜를 갚아야 돼.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지 불효하면 남들이 비난하고 욕하며 뒤에서 험담할 거야.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라는 말은 동물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사람은 이런 말을 하겠느냐? 왜냐하면 사회나 사람들 가운데에 여러 가지 잘못된 사상과 여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잘못된 사상과 여론에 영향을 받고 물들고 부식되고 나면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루게 된다. 결국, 부모를 자신의 채권자로 삼고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모가 죽으면 부모가 기뻐하고 원하는 걸 해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부모의 은혜에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것은 불필요하지 않으냐? 사람이 정에 빠져 살면 정에서 비롯된 여러 생각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패괴된 인간의 사상이 만연한 환경 속에서 살면 사람은 여러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에 휘둘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 다른 생물처럼 단순하지 않고 피곤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역사하고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이 이 모든 사실의 진상을 알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에 이끌려 부모와의 관계를 다루지 않게 된다. 그럼 삶이 홀가분해진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이 확 트였습니다. 원래 모든 생물은 다음 세대를 세심히 돌보고 책임을 다해 양육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만물에 정하신 규칙이자 법칙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에 부여한 본능입니다. 흉폭한 호랑이와 사자도 새끼가 다 자라지 않아 독립적인 생존 능력이 없을 때에는 새끼를 세심히 보살피고 돌보며 먹이를 구해다 주고, 최선을 다해 새끼에게 안전하고 편안한 성장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만약 그들이 이러한 생존 법칙을 지키지 않고, 갓 태어난 새끼도 돌보고 양육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고, 전체 생태계는 새로운 생명이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없을 때 부모는 정성을 다해 양육하고 세심하게 돌봅니다. 그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해도 그들은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것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만물에게 정하신 생존 법칙을 따른 것일 뿐, 결코 은혜가 아닙니다. 무시는 또 어려서부터 학교, 가정에서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사상과 관점을 주입당했습니다. 그 의미는 ‘동물도 자라서 부모에게 보답하는데, 사람이라면 더더욱 부모에게 효도하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인성이 없고, 인간미조차 없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무시는 줄곧 자신을 길러주신 아버지의 책임과 의무를 자신에 대한 은혜로 생각했고 아버지를 자신의 채권자로 여겼습니다. 아버지가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다는 생각만 하면 양심에 가책과 참소를 받아서 자신에게 양심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본분 이행이 피조물로서 완수해야 할 직책임을 잘 알면서도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과 관점에 얽매이고 속박당해 본분 이행과 진리 추구의 기회를 포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것입니다! 무시는 일을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이 없었던 것이 정말 너무 불쌍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완전히 분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시는 자신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만약 하나님의 정하심과 주재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 인간 세상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며, 평안히 자랄 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이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던 것도 하나님께서 주재하고 안배하신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고, 누구에게도 빚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무시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난 몇 년간 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전통사상에 속박당해 늘 아버지가 마땅히 져야 했던 책임을 은혜로 생각하고 아버지를 돌봐드리지 못해 양심에 가책과 참소를 받았습니다. 또한 본분을 내팽개치고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당신을 거역하고 싶지 않고,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이어서 무시는 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선, 많은 사람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한 측면으로는 객관적인 전체적 환경 때문이다.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 하고, 부모 곁을 지키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원해서 부모를 떠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한 측면의 객관적 원인이다. 다른 측면을 보면, 주관적으로 말해서 네가 밖에 나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부모를 떠나 네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여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서 부모를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에 남아 함께하면서 그들을 돌볼 수 없었던 것이다. 너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책임을 회피하려고 나온 것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인 네가 그들을 떠나 밖에 나와서 본분을 이행해야만 했던 것은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 마음속에는 그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있다.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객관적인 환경이 허락했다면, 그들 곁을 지키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다면 너는 그들 곁에서 항상 그들의 생활을 돌보고 네 책임을 다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환경 때문에 너는 반드시 그들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을 지킬 수 없었다. 네가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성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집을 떠난 것이 그들에게 효도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는 불효이고 인성이 없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키워 줬는데 너는 머리가 커지자마자 나가서 혼자 살지 못해 안달이고, 부모를 보기 싫어하고, 부모한테 어려운 점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으려 하고, 상관할 여건이 돼도 상관하지 않으면서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효이다. 하지만 지금이 이런 상황이냐?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자 자기가 살던 현(縣)을 떠나고, 시(市)를 떠나고, 성(省)을 떠나고, 심지어 나라를 떠났다. 이미 고향을 멀리 떠난 데다가 갖가지 이유로 집에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가끔 고향에서 온 사람을 통해 부모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 전해 들으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안심한다. 사실 너는 불효하는 것이 아니다. 인성을 상실한 수준에 이르러 부모마저 신경 쓰지 않으려 들고 책임을 안 지려는 것이 아니다. 갖가지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이렇게 하기를 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불효가 아니다. … 그래서 종합해 보자면, 사람이 자식으로서 다할 책임에 대해서는 사람의 양심 속에 지각이 있다. 그 지각으로 인해 사람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걱정을 하든 아니면 그들 곁에서 함께하길 선택하든 간에 결론적으로 사람은 객관적 환경의 영향으로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등등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믿는 삶 속에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과 관련된 화제가 나왔을 때 사람은 이렇듯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더는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시는 자신이 집에서 아버지를 돌보지 못하는 것이 불효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가 무책임하게 아버지 곁에서 돌봐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중공의 핍박과 체포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은 피조물로서 마땅히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무시는 역대의 성도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기 위해 부모와 가정을 버리고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사역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복음은 세계 각지에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버리고 헌신한 것은 선하고 의로운 행동이자 가장 정의로운 사업입니다. 지금은 하나님나라 복음이 확장되는 중요한 시기이고,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갈망하는 많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은 복음 확장 사역에 더욱 힘을 보태야 합니다. 이를 깨달은 무시는 마음이 훨씬 가볍고 홀가분해졌고, 더 이상 아버지께 빚진 마음으로 살지 않고 본분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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