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 소식을 듣고

2025.6.9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저를 무척 아껴 주셨고, 저와 남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고된 일을 하러 다니셨습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저는 속으로 이다음에 크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시작한 뒤로는 제가 번 돈을 모두 부쳐 드렸습니다. 부모님이 조금이라도 잘 살게 해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고, 부모님께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버지는 큰 붉은 용의 박해가 두려워 나중에는 믿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는 줄곧 제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지지해 주셨고, 아이도 돌봐주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저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다는 생각에 부모님을 뵈러 갈 때마다 최대한 일을 도와 드리면서 효도를 다하려 했고, 그렇게 하면 제 마음도 한결 놓였습니다. 2022년 6월, 저는 복음을 전하다가 경찰의 체포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과 아이를 만나러 집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속으로 걱정도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연세도 많고 몸도 안 좋으신데, 혹시 병이라도 나면 돌볼 사람이 없는데 어떡하지?’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통해, 사람의 일생은 모두 하나님께서 안배해 놓으셨고, 부모님 운명 또한 하나님 손에 주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을 하나님께 맡긴 채, 내적 상태에 큰 영향 없이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11월 말, 한 자매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여 응급치료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편지에는 어떤 병인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어떤 병인지도 모르고, 지금 상태가 어떤지도 알 수 없으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뵈러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여전히 저를 뒤쫓고 있었고, 당시 여러 교회에서 신도들이 잡혀가는 바람에 수습 사역으로 매우 바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면 교회 사역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속으로 갈등이 심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어머니의 병을 그분께 맡겼습니다. 2023년 5월 중순, 집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지난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고, 아버지께서도 천식 발작으로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한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빨리 떠나시고, 이제 나는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니 몹시 고통스럽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아프셨을 때도 찾아가서 돌봐 드리지 못하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가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니, 두 분 마음이 얼마나 서글펐을까? 딸인 나한테 무척 실망하셨을 거야. 친척들도 틀림없이 나를 은혜도 모르는 불효자라고 하겠지. 그때 전 굉장히 연약해졌고,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머릿속에는 온통 부모님의 모습만 떠올랐습니다. 부모님의 미소, 저에게 잘해주셨던 것들, 함께 생활했던 장면들이 마치 영화처럼 하나씩 뇌리를 스쳤습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낳고 힘들게 키우신 일, 고된 일을 하며 저를 공부시킨 일, 제가 본분을 이행하러 떠났을 때 어머니께서 제 아이를 돌봐주셨던 일들까지도 떠올랐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위해 흘리신 구슬땀을 생각하니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그때는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이런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내가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일해서 돈을 벌었다면, 부모님 생활에도 도움을 드리고 병이 났을 때 치료비도 보태 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두 분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지도 않았을 거야.’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부모님 곁에서 돌봐드리지 못하고 딸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제가 죄인처럼 느껴지고 부모님께 너무 죄스러웠습니다! 며칠 동안 의기소침한 내적 상태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자책과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본분을 이행하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심한 방해를 받아 맡은 복음 사역을 책임감 있게 점검하지 못했고, 사역도 어느 정도 지장을 받았습니다. 고통 속에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제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시고, 제 마음이 교란되지 않도록 지켜 주세요. 기도드린 후, 제 마음은 조금 평안해졌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부모의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해 교제하신 말씀이 떠올라서, 그 말씀을 찾아 읽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또한 올바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일로 생긴 뜻밖의 충격이 네 본분 이행과 걸어가는 길에 타격이나 지장을 주고 영향을 미치는 것을 사전에 해결할 수 있겠느냐? 먼저 죽음이 대체 무엇인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것은 인간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육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생명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세계에서 제명되어 사라지면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형태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너와 그의 관계가 제거되고 사라지며 종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또 다른 형태로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는데, 그 다른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다시 인간 세상으로 올 수 있는지, 너와 만날 수 있는지, 너와 어떤 육적인 관계나 감정적인 갈등이 생길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은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니 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결론적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의 사명이 끝났고 매듭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의 평생의 사명이 끝나면 너와 그의 관계도 그렇게 끝나게 된다. 그가 후에 다시 태어나는지, 아니면 다른 세계에서 처벌이나 규제, 어떤 처분이나 안배를 받을지는 너와 관계가 있겠느냐? 네가 결정할 수 있겠느냐? 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네가 결정할 수도 없으며,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너와 그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즉, 그와 함께 지냈던 10년, 20년 혹은 30, 40년의 인연이 그렇게 끝났고, 그 후에는 그는 그, 너는 너, 너희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말이다. 설사 너희가 모두 하나님을 믿더라도 그는 그대로 본분을 이행하고 너는 너대로 본분을 이행하며 서로 다른 공간과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너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사명을 그가 일찍 완수했을 뿐이다. 그럼 너에 대한 그의 책임은 어떻게 되느냐? 네가 그에게서 독립한 그날부터 책임은 이미 끝났으니 너는 그와 관련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단지 감정적인 면에서 상실감이 생기고 그리운 가족이 한 명 줄어 다시는 볼 수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수도 없게 된 것일 뿐, 그의 앞날과 미래는 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와는 어떤 혈연관계나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관계도 아닌 것이다. 사실이 바로 이렇다. 부모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네가 듣는, 그들에 관한 마지막 소식이자 네가 보고 듣는, 그들이 인생에서 경험하는 생로병사의 마지막 관문이다. 그뿐이다. 그들의 죽음이 네 무언가를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고 네게 무언가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죽는 것이고, 사람으로서의 이번 여정을 마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이 사고사인지, 자연사인지 아니면 병사인지 등 이런 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다. 결국,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나 세력도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오직 그들의 육적 생명의 종료를 의미할 뿐이다. 네가 만약 부모를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며 또는 정 때문에 부모에게 죄스럽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럴 필요도 없다. 사람은 죽었으니 네가 아무리 생각해 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네가 만약 ‘오랜 세월 부모님은 내가 보고 싶지 않으셨을까? 이렇게 오랫동안 부모님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줄곧 부모님 곁에서 며칠이라도 모시고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어. 너무 괴롭고 죄스러워.’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는 너와 무관한 일이다. 왜 관계가 없겠느냐?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든, 부모와 함께하든 그것은 하나님이 네게 준 의무나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로 인해 얼마나 복을 누리든, 얼마나 고생하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너와 추호도 관련이 없다. 네가 곁에서 함께한다고 해서 그들의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네가 부모와 떨어져 있어서 늘 곁을 지켜 주지 못한다고 해서 수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으로, 너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니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 죄책감을 갖지 말고 올바르게 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네가 만약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대신 집에서 부모 곁을 지킨다면 부모가 병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생사나 빈부의 문제가 네게 달려 있느냐? (그 역시 아닙니다.) 부모가 어떤 병에 걸리든 너를 키우느라 고생해서, 네가 보고 싶어서 걸리는 것이 아니다. 특히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크고 중한 병에 걸리는 것도 너 때문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니 너와 상관없다. 네가 아무리 효도해 봤자 기껏해야 그들의 육적인 고통이나 부담을 조금 덜어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 어떤 병에 걸릴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너와 상관있겠느냐?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 네가 배은망덕하지 않고 효자라고 해서 온종일 부모 곁을 지키며 돌본다면 그들이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겠느냐? 결국 걸릴 병은 걸리고, 죽을 사람은 죽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냐?(<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각자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는지,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시고 정하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시고,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시는지도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속에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일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제가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부모님 곁에서 보살펴 드렸더라면, 두 분이 편찮으셨을 때 치료를 도와드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마 몇 년은 더 사시고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관점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었고, 불신파의 관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부모님이 병에 걸리셨을 때도 저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뵈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건강을 잘 챙기시라는 위로의 말을 몇 마디 건네고 당시 가지고 있던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약을 사 드리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병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고, 저 역시 부모님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하나님 말씀을 보니 더욱 와닿았습니다. “부모가 어떤 병에 걸리든 너를 키우느라 고생해서, 네가 보고 싶어서 걸리는 것이 아니다. 특히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크고 중한 병에 걸리는 것도 너 때문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니 너와 상관없다.” 저는 그제야 부모님의 죽음이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은 이번 생에 수명이 다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세상을 떠나셨고, 이는 부모님의 운명입니다. 예전에 아버지가 위독해서 병원으로 실려가 구조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곧 세상을 떠나실 줄 알았지만, 결국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일년 내내 곁에서 부모님을 돌보지만, 부모님은 병에 걸려 때가 되면 돌아가시고, 돈으로도 그분들을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시므로, 설령 제가 부모님 곁을 지키며 돌봤다고 해도, 부모님이 병에 걸리는 일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제가 아무리 돈을 들여 치료해 드렸어도 부모님 생명은 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부모님 두 분 모두 이미 예순이 넘으셨고, 특히 아버지는 수년 동안 천식을 앓으며 매일 약에 의지해 겨우 버티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매우 고통스러워하셨는데, 이제는 돌아가셔서 더 이상 병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으니, 어쩌면 아버지께는 이것이 하나의 해방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도 조금 견딜 만하고, 내적 상태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본분을 이행하러 나갔을 때, 버스를 타고 가면서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의 노부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다시 부모님이 떠올랐고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셔서 이제 저와는 다른 세상에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내적 상태가 갑자기 침체되었습니다. 특히 설이 되면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고,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지 못한 자신을 불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속으로 이것이 마음에 걸려서 부모님께 죄스럽기만 했습니다. 제 상태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것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까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죄책감과 자책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부디 제가 저 자신의 상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 후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봤습니다. 『부모의 기대를 대하는 측면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과 내려놓아야 할 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네.) 여기서 사람의 짐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부모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하고, 부모를 호강시켜 줘야 하고, 부모가 하는 일은 모두 너를 위한 것이고, 부모 말을 따라야 효도하는 것이다. 또한, 어른이 되면 부모를 위해 일해야 하는데,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며, 그들 곁을 지켜야 하고, 그들을 상심하게 하거나 실망하게 해서도 안 되고, 그들을 저버려서는 안 되고, 힘닿는 데까지 그들의 고생을 줄여 주고, 더 나아가 아예 고생을 안 하게 해 줘야 한다. 만약 이걸 해내지 못하면 배은망덕한 것이고 불효자이며, 천벌을 받고 버림을 받아 마땅하며,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네 짐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짐이라면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여 이를 올바르게 마주해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이러한 짐과 잘못된 사상 관점을 내려놓을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게 다른 선택지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육체의 어떤 짐이든 그것을 내려놓는 일의 시작은 올바른 사상 관점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네 안의 잘못된 사상 관점이 점차 무너지고, 분별되고, 간파당한 뒤에 차츰차츰 버려진다. 그러한 잘못된 사상 관점이 무너지고, 분별되고, 그런 다음 네가 그것을 내려놓고 버리는 과정에서 그러한 일들에 대한 네 태도와 행동 방식이 서서히 바뀐다. 사람의 양심 혹은 감정에서 비롯된 생각들이 점차 흐릿해지며, 더는 네 생각 깊은 곳에서 너를 괴롭히거나 결박하지 못하고, 네 생활을 좌우하지도, 네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도, 네 본분 이행을 교란하지도 못한다. 예컨대, 네가 올바른 사상 관점과 이 측면의 진리를 받아들이면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저 눈물만 조금 흘린다. 키워 준 은혜에 그간 보답하지 못했고, 부모를 너무 고생시켰고, 그들에게 조금도 갚은 것이 없고, 그들을 호강시켜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정상적인 인성의 감정적 필요에 따른 정상적인 표출이 있을 뿐이다. 잠깐 울고 나서 그들을 조금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곧 자연스러워지고 정상이 된다. 너는 금방 정상적인 생활과 본분 이행에 몰입하고, 그 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네가 이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끝도 없이 울게 된다. 너는 부모가 가엾다고, 평생 힘들게 살면서 너 같은 불효자를 키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아플 때 병상 곁에서 시중들어 주지 못했고, 그들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고 곡해 주지 못했다고, 그들을 저버렸고, 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고, 그들을 호강시켜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너는 오래도록 이런 죄책감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찌릿찌릿 아프게 된다. 관련된 환경이나 사람과 일, 사물을 만날 때마다 감정이 표출된다. 이런 죄책감은 너의 여생 내내 계속될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진리와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여 네 생명으로 삼은 적이 없고, 낡은 사상 관점이 줄곧 네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며 네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네 여생은 부모의 사망으로 인해 쭉 고통스러울 것이다. 계속되는 고통은 네게 약간의 육적인 괴로움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네 생활,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 네가 교회 사역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네 심금을 건드리는 사람 혹은 일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너는 더 많은 일에 대해 낙심하고, 의기소침해지고, 수동적으로 되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지고, 모든 일에 대한 열정과 동력을 잃는 등의 문제를 겪을 수도 있다. 이러다 보면 간단한 일상생활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와 네가 걷는 인생길에도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러면 아주 위험하다. 이러한 위험으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결과는, 네가 피조물로서의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네가 본분 이행을 도중에 중단하거나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에 반항하는 정서나 태도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일은 분명히 점점 더 악화될 것이고 그에 따라 네 기분, 정서, 심리 상태가 나쁜 방향으로 변해 갈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고통과 자책 속에 살았던 것은, ‘효는 모든 선행의 으뜸이다’,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와 같은, 사탄이 퍼뜨린 전통적인 사상과 관점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부모님을 봉양하고 임종을 지켜야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고, 그러지 못하면 양심도 인성도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마음이 죄책감으로 가득차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께서 저를 힘들게 키우시고, 저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셨는데 저는 부모님이 편안한 노후를 보내도록 해 드리지 못하고, 편찮으셨을 때도 돌봐 드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실 때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늘 스스로 불효자라 여기며, 자식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저를 비난하고 싫어할 것 같았고, 저도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효는 모든 선행의 으뜸이다’,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와 같은 사상과 관점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면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일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양심과 인성이 있는지를 가늠하실 때는, 그 사람이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를 근거로 하십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며, 가장 양심과 인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본분을 포기한다면, 비록 부모를 잘 돌보고,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칭찬을 듣는다 해도, 그런 사람은 오로지 육의 정만을 위해 사는 것이며,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인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역대의 성도들을 떠올려 보면, 그들은 가정과 직업을 내려놓고 주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고향과 가족을 떠났습니다. 사람들 눈에 그들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아서 인정머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했고, 양심과 인성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이 한 일은 하나님께 기념되었습니다. 저 또한 하나님을 믿고 올바른 길을 걸으며, 중공의 박해를 받아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부모님을 돌보지 못했던 것이지, 그것이 제가 불효하거나 양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이 저를 어떻게 보고 이방인들이 저를 뭐라고 욕하든, 제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잘못된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부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신 것 때문에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과 자책감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역했으며, 본분을 대할 때도 충성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제가 어찌 인성과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제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또한 저를 보살피고 보호해 주시고,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하나님을 원망했으니, 정말 시비를 가릴 줄 모르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부모님이 돌아가신 고통 속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께 회개하고 싶습니다.’

그 후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봤습니다. 『부모가 너를 낳은 것에 대해 살펴보자.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이냐, 아니면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이냐? 누가 누구를 택했느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아니다.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도 아니다. 근원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이 일은 사람이 이해하기 쉬우니 이 주제는 일단 제쳐 두고 이야기하지 않겠다. 네 관점에서 보면 너는 수동적으로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그들에 의해 태어났다. 부모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주관적으로 너를 낳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고 본다면 네가 태어난 일에서 주도권은 부모에게 있다. 그들이 너를 낳기로 했으니 그들에게 주도권이 있다. 너는 그들에게서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태어났다. 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니 부모가 주도권을 가지고 너를 낳기로 선택했다면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고 키울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너를 공부시키든, 먹이고 입히며 돈을 쓰든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이다. 하지만 너는 양육받는 동안 늘 수동적인 입장이다. 네게는 선택권이 없고 그들에게 양육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는 어리고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손에 수동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너는 부모가 키우는 대로 자라난다. 부모가 네게 좋은 것을 먹이면 좋은 것을 먹고, 부모가 네게 제공하는 생활 환경이 고달프고 빈곤하면 너는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양육받는 동안 너는 수동적이고, 부모는 책임을 다한다. 화분의 꽃을 키우기로 했으면 비료와 물을 주고 햇빛을 쐬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너를 극진하게 보살피든, 정성껏 보호하든, 결국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키우는 목적이 무엇이든 이것은 그들의 책임이다. 그들이 너를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이렇게 본다면 부모가 네게 하는 것이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부모가 네게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은혜라고 할 수 없다. 화초를 하나 키워도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며 책임을 다하는데 그것도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은혜라 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작은 화초는 밖에서 더 잘 자란다. 땅에 심으면 햇볕을 쬐고 바람과 비를 맞아 더 튼튼하게 자라지만, 집에서 화분에 옮겨 심어 키우면 밖에서 자라는 것만 못하다. 어디서든 못 살겠느냐?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이 있다. 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이 살아가도록,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준수하는 법칙을 준수하도록 책임진다. 한 사람으로서 너는 부모가 양육하는 환경에서 생활할 뿐이니 그 환경에서 성장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고, 미시적으로 보면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찌 되었든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자 책임이지 은혜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은혜라고 할 수 없다면 이것은 네가 누려 마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는 네가 누려야 할 하나의 권리이다. 너는 마땅히 양육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미성년일 때는 양육받는 것이 네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받은 것은 단지 너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지 부모의 은혜나 은정이 아니다. 모든 생물이 새끼를 낳아 기르고 번식하며 후대를 양육하는 것은 하나의 책임이다. 예를 들어 새, 소, 양 심지어 호랑이도 새끼를 낳은 후에는 키워야 한다. 후대를 키우지 않는 생물은 없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드물다. 이는 생물이 생존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생물의 본능이다. 그것을 은혜로 귀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그저 창조주가 동물과 인간에게 정해 준 법칙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결코 은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네게 책임을 다하고 심혈을 쏟고 돈을 썼다고 해서 너더러 갚으라고 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그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책임이고 의무라면 아무런 대가가 없어야 한다. 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낳고 길러 주신 것은 그분들의 책임과 의무였을 뿐, 은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부모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돌봐주신 것을 은혜로 여겼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위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르시고, 저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그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편찮으셨을 때 가서 돌봐드리지 못하고, 돌아가셨을 때도 마지막 모습을 뵙지 못하자, 부모님께 너무나 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는 부양해서 성인으로 키우는 것은 부모가 해야 할 일이며, 부모의 책임입니다. 마치 사람이 꽃을 기르면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이것은 무슨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모든 사랑과 희생 역시 하나님의 주재와 예정에서 비롯되었고,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부모님께 빚을 진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갚거나 벌충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봤습니다.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라는 것은 부모가 너를 여태껏 키워 주었으니 부모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부모에게 보답하지 못하고 보답할 기회나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너는 늘 괴롭고 죄책감을 느끼며, 심지어 누가 부모 곁에서 그들을 돌보거나 효도하는 모습을 보면 괴로워한다. 하나님이 네 부모로 하여금 너를 성인이 되기까지 키우도록 정한 것은 네가 평생 부모에게 보답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네게는 평생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고 가야 할 길이 있다. 네게는 너의 삶이 있으니 평생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에 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는 안 된다. 이는 단지 네 인생길에서 네 삶에 딸려 오는 일, 인성과 감정의 관계에서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하지만 너와 부모 간 어떤 인연이 있는지, 네 남은 인생에서 부모와 함께 살 것인지, 아니면 함께할 인연이 없어 떨어져서 살 것인지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달려 있다. 만약 하나님이 너와 부모를 평생 멀리 떨어져 있게 배치하고 안배하여 늘 함께 생활할 수가 없다면 너는 그 책임을 그저 마음에 품게 될 것이다. 만약 네 인생에서 하나님이 너와 부모를 가까이 살게 안배해서 부모의 곁을 지키게 한다면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고 효도하는 것도 네가 해야 할 일이기에 그다지 지탄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네가 부모와 떨어져 있어서 효도할 기회가 없고 여건이 안 된다면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네가 효도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를 볼 면목이 없을 일도 아니다. 단지 여건이 따라 주지 못할 뿐이다. 자녀로서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깨달아야 한다. 너는 평생에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 일은 창조주에게서 받은,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이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며 갚는 것은 네 평생의 사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보답하며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여건이 되면 효도하고, 책임을 다하되 여건이 안 되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큰 잘못은 아니다. 단지 양심과 인간의 도의 및 관념에 조금 위배될 뿐 최소한 진리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정죄하지도 않는다. 네가 진리를 깨닫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측면의 진리를 깨달으면 너희 마음이 편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은 저의 채권자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저를 말세에 태어나도록 정하신 것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은혜를 갚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완수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바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은 자신의 형편에 따라, 본분을 지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자식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약 본분을 위해 외지로 나가 부모님 곁에서 돌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스스로 자책하거나 빚졌다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본분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 더 깨달았습니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우리의 온몸과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의 주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부탁과 인류의 정의로운 사업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부탁을 위해 순교한 사람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준 하나님을 마주할 면목이 없을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부록 2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 중에서) 하나님은 사람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제 생명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제가 오늘날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덕분입니다. 오늘 제가 피조물로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나니, 부모님의 죽음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가끔 부모님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마음이 더 이상 이런 일에 얽매이지 않고, 본분 이행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끌어주신 덕분에 저는 부모님의 죽음을 어떻게 올바르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부모님을 대하는 올바른 실행 원칙도 깨달아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관련 콘텐츠

아버지의 보살핌과 돌봄을 어떻게 대하는가

2019년, 18살이었던 무시는 복음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중공에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2022년 4월에 만기 출소했습니다. 기차역에서 나온 무시는 길가에 초췌하게 서서 초조하게 출구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무척...

아버지가 교회에서 출교된 후

프랑스 이사벨라(Isabella)몇 년 전 타지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갑작스레 아버지가 악인으로 규정되어 출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일관되게 관념을 퍼뜨리고 부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서 본분을 이행하려는 다른 사람들의 열의를 떨어뜨리는...

본분 이행과 부모에 대한 효도가 충돌할 때

중국 산시 무청(慕誠)지난 몇 년 간 저는 계속 객지에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물론 가끔 어머니 생각이 났지만 바쁘게 본분도 이행해야 하는 데다가 어머니도 아직 젊으시고 아프신 데도 없어서 본분을 이행하는 데 큰 걱정거리나 구속받을 게 없었습니다....

부모 부양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인가?

2022년 9월 말에 교도소에서 나온 밍후이(明慧) 자매는 남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갑니다. 밍후이 자매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이유로 두 번이나 경찰에 잡혀 박해를 받았는데, 이번이 두 번째였고 징역 3년 3개월을 복역했습니다. 밍후이 자매는 계속...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