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암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2025.9.12

중국 징언(婧恩)

2019년 10월 어느 날, 저는 다리가 몹시 아팠습니다. 진통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전에 어떤 자매도 다리가 아팠지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는 괜찮아졌던 일이 떠올라서 저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도 별 큰 병은 아닐 거야. 어쨌거나 수년간 하나님을 믿으며 줄곧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했으니까. 안정된 직장과 결혼을 내려놓았고, 또 큰 붉은 용의 박해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방을 겪으면서도 줄곧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했어. 이렇게 많이 헌신했으니 설령 정말 병에 걸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치료해 주실 거야.’ 당시 저는 걸을 때 절뚝거리긴 했지만 본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2020년 6월에는 왼쪽 다리 통증이 점점 심해져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은 후, 의사가 제 다리 엑스레이 사진을 보더니 말했습니다. “암입니다. 다리 통증은 종양 때문에 생긴 거고요. 입원 치료를 해야 하고, 당분간은 더 걸으면 안 됩니다.” 의사에게서 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고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어째서 암이란 말인가? 지금 하나님 사역은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고 형제자매들은 모두 적극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데, 나는 왜 이 시점에 암에 걸렸나? 본분을 이행할 수 없게 되는 거잖아? 그럼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고 내 분깃도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저희 어머니는 결장암에 걸리셨지만 종양만 제거하고 화학 치료도 받지 않으셨는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발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도 암에 걸렸다가 완치된 형제자매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떠올리며 저 역시 하나님을 믿은 후로 줄곧 본분을 이행했으니,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 후, 저는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고, 골암으로 확진되었습니다. 종양은 이미 8센티미터나 자라 있었습니다. 의사는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할 수도 있고, 폐에서도 어두운 부분이 발견되어 암세포가 전이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면 수술할 필요도 없이, 길어야 3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를 듣자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면, 나는 죽게 되는 게 아닐까?’ 그날 밤, 저는 침대에 누워 밤새 뒤척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며 수년간 적잖이 힘쓰고 뛰어다녔는데, 지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암에 걸렸어.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지 않았구나!’ 생각할수록 마음이 착 가라앉았습니다. 그 후로는 하나님 말씀을 보아도 마음이 평온해지지 않았고, 온종일 근심에 잠겨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암세포가 전이되어 죽게 될까 봐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환경 속에서 제가 공과를 배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그렇게 구하던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유의 머리인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좌 위에서 왕권을 잡고 우주와 만유를 주관하며 온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늘 그를 가까이하고 그의 앞에 와 마음을 평온히 하라. 한순간도 놓치지 말라. 매 순간 배울 공과가 있다. 주변 환경과 사람, 일, 사물은 모두 보좌가 허락한 것이므로 절대로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질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다. 비록 육체가 조금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사탄의 생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질병 속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미 속에서 하나님을 누리며, 질병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계속 구하며 포기하지 마라. 그러면 하나님이 빛을 비추어 깨우쳐 줄 것이다. 욥의 믿음이 어떠했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은 전능한 의사이다! 병 안에서 살면 그저 병뿐이지만 영 안에서 살면 병이 없다. 너에게 한 모금의 숨이라도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은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6편> 중에서)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니, 제 목숨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제가 암에 걸린 데에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고, 제가 마땅히 배워야 할 공과도 있습니다. 한 자매의 체험을 떠올렸습니다. 그 자매는 직장암 말기였고, 의사들은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믿음으로 그 환경을 체험했고, 결국 그녀의 병은 기적처럼 나았습니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지 의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암에 걸렸어도 하나님께서 저를 살게 하시면 설령 암세포가 전이되더라도 죽지 않을 것이고, 만약 제 수명이 다했다면 그 누구도 저를 도울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입니다. 저는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며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의 말씀을 체험하고, 욥처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제 마음은 평온을 되찾았고, 더는 그렇게 근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보름 후 의사는 암세포가 전이되지 않아 수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무척 감격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비록 의사가 제 골반 종양이 너무 커서 수술에 큰 위험이 따른다고 했지만, 그때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살핌 덕분에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열흘 후, 저는 재활 병원으로 옮겨 재활을 시작했습니다. 엉덩이뼈의 통증과 다리 마비 때문에 휠체어에 한 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고, 매일 많은 양의 진통제를 먹어야 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몸도 뒤집지 못하고 밤에는 늘 통증 때문에 깨곤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날이 언제쯤 끝이 날까? 요즘 기도도 하고 하나님 말씀도 먹고 마셨는데, 하나님은 어째서 내 고통을 덜어 주시지 않는 걸까? 조금이라도 덜어 주시면 내가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을 텐데! 지금 뼈의 통증 때문에 죽는 게 나을 지경이야.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낫겠어.’ 하지만 이내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게 아닌가?’ 고통 속에서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매우 연약하고 의기소침합니다. 육의 고통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더는 불평을 하거나 입으로 죄를 짓지 않고, 이 환경 속에서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그때 저는 또 욥의 체험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부리나케 욥의 앞에 이르러 손을 뻗어 그의 살가죽을 치고, 그의 온몸에 악창이 나게 했다. 욥은 살가죽의 통증을 느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기묘함과 거룩함을 찬송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사탄은 더 길길이 날뛰었다. 사람을 해치는 쾌감을 느낀 사탄은 손을 뻗어 악창이 난 욥의 살을 움켜쥐고 곪아 터지게 했다. 그러자 피와 살에 더없는 통증과 아픔을 느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온몸의 피부와 살을 문질렀다. 마치 그렇게 하면 육체의 통증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욥은 하나님이 곁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더 강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또 한 번 무릎 꿇고 엎드렸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고통을 살피시나이다. 당신께서 어이하여 사람의 나약함까지 생각해 주시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탄은 욥이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에 욥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탄은 급하게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다. 순식간에, 욥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살가죽이 뼈에서 벗겨지는 것 같고, 또 뼈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화살이 심장을 뚫는 것 같은 통증에 그는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욥의 인내력은 극한에 몰렸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 통증을 덜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욥은 참고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지도 않았다. 사탄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또다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지만, 이때만큼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그의 앞에, 뒤에, 좌우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가 아파할 때 고통스러워하는 그 모습을 보지 않았으며, 얼굴을 가리고 자신을 숨겼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의미는 고통을 주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때 욥은 눈물을 흘렸다. 몸의 통증은 억지로 참아 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이나이다. 지극히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여리고 무지한데,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생각해 주고 긍휼히 여기시나이까? 당신께서 저를 치시고 오히려 당신이 고통스러워하시나이다. 사람이 무슨 가치가 있어 당신께서 생각해 주고 마음에 두시나이까?’ 욥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지만, 하나님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저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탄이 욥을 박해하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욥은 독창이 곪고, 살과 뼈의 통증으로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규를 삼키고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조금의 원망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며 마지막까지 굳게 서서 증거하여 사탄에게 치욕을 안겼습니다. 욥과 비교하니 저는 정말이지 너무나 부끄러웠고, 제 분량이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검증을 받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육체의 고통이 오래 지속되자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고, 하나님께 제 육체의 고통을 덜어 달라고 요구했으며, 심지어 죽음으로 하나님을 협박하려 했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 이성이 없었습니다! 저도 욥을 본받아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서 증거해야 합니다. 뼈가 아무리 아파도, 육이 아무리 괴로워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육의 고통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매일 형제자매들의 체험 간증을 보고 생명 진입 설교와 교제를 들으니 더는 그렇게 괴롭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날 오후에 상처에서 갑자기 많은 양의 고름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의사가 엑스레이를 찍어 검사한 후, 허벅지뼈의 지지대가 이미 탈락하여 다시 설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술 후에도 저는 고열이 내리지 않고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습니다. 의사는 상처가 심하게 감염되어 생명이 위험하니 지지대를 다시 제거해야 하고, 그 후로도 매주 두세 번씩 상처 세척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매번 MRI를 찍을 때마다 40분가량 누워 있어야 했고, 엉덩이가 송곳으로 찌르는 듯이 아팠습니다. 그 순간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병이 이렇게 심각하니 회복해서 걸을 수 있을지는 고사하고 언제 죽을지 몰라. 하나님께서 나를 징벌하시려는 걸까? 설마 나의 헌신과 수고를 기억하지 않으시나? 그동안 나도 나름대로 수고했다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하지만 죽음을 구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아. 그렇지만 계속 이렇게 아픈 건 정말 견딜 수가 없어. 하나님께서 고통을 조금만 덜어 주시면 좋으련만. 그분은 어째서 나를 긍휼히 여겨 병을 낫게 해 주시지 않는 걸까?’ 나중에는 제가 또 하나님께 따지며 대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몹시 자책했습니다. 저는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요즘 제 병이 갑자기 악화되어 매일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 환경이 임한 데에는 제가 마땅히 구해야 할 진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여전히 어쩔 수 없이 당신께 따지고 들었습니다. 저는 너무 패역합니다! 하나님, 제 문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저를 깨우치고 이끌어 주십시오.” 기도 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저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 나를 믿고, 많은 사람이 그저 나의 능력을 빌어 자기 몸에 있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나를 믿는다. 또 많은 사람이 그저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해 나를 믿고, 많은 사람이 그저 내게서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얻어 내기 위해 나를 믿는다. 많은 사람이 오직 이생을 무사히 보내고 내세에 무탈하기를 바라면서 나를 믿고, 많은 사람이 지옥의 고통을 피하고 천국의 복을 얻기 위해 나를 믿는다. 또 많은 사람이 내세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일시적인 편안함을 위해 나를 믿는다. 내가 사람에게 분노해 원래 사람에게 있던 기쁨과 평안을 거두어 가자 사람은 모두 의심하였다. 내가 천국의 복을 거두고 지옥의 고통을 주자 사람은 분노하였다. 사람이 내게 병을 고쳐 달라고 할 때 내가 외면하고 혐오하자, 사람은 내게서 멀리 떠나 더러운 무당을 찾아갔다. 사람이 내게서 얻어 낸 것을 내가 다 거두어 가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나를 믿는 것은 나의 은혜가 매우 많기 때문이며, 나를 믿으면 이로운 점이 아주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믿음’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구구절절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제 내적 상태와 모습은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것과 똑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단지 의사로 생각하고, 은혜와 축복을 요구하는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본분을 잘 이행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기만 하면, 설령 병고가 닥쳐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고 치료해 주시고, 훗날 큰 재난이 닥칠 때도 살아남아 하나님께 구원받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족의 만류와 큰 붉은 용의 박해가 있어도, 본분을 이행하며 아무리 많은 고생을 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특히 저희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저는 하나님께서 제 병도 고쳐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하지만 치료 과정에서 고통을 겪고, 병세도 악화되고, 죽음에 직면할 가능성까지 생기자 하나님께 따지고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수년간 헌신하고 수고한 것을 보아서라도 저를 치료해 주시고 더는 이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헌신과 수고를 이용해 하나님과 거래하고,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제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의사로 생각하고, 만능 상자처럼 여기며 그분께 온갖 요청과 요구를 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양심과 이성이 어디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진리를 구하여 제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하나님께 혐오받고 도태될 것이 뻔합니다. 저는 이런 태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늘 하나님에게 요구가 있다. 이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이 늘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는 것은 또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의 본성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나는 사람이 어떤 일에 부닥치든, 어떤 일을 대하든 항상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육을 고려하며, 항상 자신을 위해 핑계와 구실을 대면서 전혀 진리를 구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자신의 육을 위해 변호하고 자신의 앞날을 위해 계산한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은혜를 요구하며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다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왜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겠느냐? 이는 사람의 본성이 탐욕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일말의 이성도 없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것이 기도든 교제든 설교든 할 것 없이, 결국 사람이 추구하고 생각하고 동경하는 것은 다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받아 내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기를 바란다. 어떤 이는 “이는 본성의 일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 이 밖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너무 많이 요구하고 지나친 욕망을 너무 많이 품는 것은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모두 스스로를 위해 요구하고 얻어 내려고 하거나 구실과 핑계를 댄다. 전부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많은 일에서 사람의 행동에 조금의 이성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탄의 논리가 이미 사람의 본성이 되었음을 완벽하게 보여 준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냐? 사람이 사탄에 의해 그 지경까지 패괴되고,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혀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왜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고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게 됐지만,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나 수많은 일에 대한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전혀 창조주로 대하지 않았다. 네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고 창조주로 대한다면, 너는 피조물의 입장에 서야 하고 하나님에게 더 이상 요구하거나 사치스러운 욕망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 대신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순종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는 너무나 많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보고, 병에 걸린 후의 제 여러 가지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제 내적 상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수년간 하나님을 믿으며 결혼과 가정, 직장을 내려놓고 나와서 본분을 이행한 것은 은혜와 상을 받기 위해서였고, 본분을 이행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도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리 통증이 막 시작되었을 때 본분을 열심히 이행한 것도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시고 병을 치료해 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병고에 시달려 고통을 참기 어려울 때면, 저는 하나님께 고통을 덜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병세가 다시 심각해져 죽음에 직면할 수도 있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거듭 요구하며 제 연약함을 헤아려 주시고 고통을 없애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바람대로 만족시켜 주시지 않자 저는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께 따지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거나 기도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말하는 충성과 헌신, 수고는 모두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받아, 큰 재난이 닥칠 때 살아남아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은혜시대의 바울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헌신하고 수고하며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유럽의 태반을 다녔지만,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 바울은 복과 면류관을 얻기 위해 버리고 헌신했으며, 그것은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었고, 완전히 하나님의 요구와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걸었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으며 추구하는 관점과 걸어가는 길이 바울과 똑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공의롭고 거룩하십니다. 저는 비록 수년간 하나님을 믿었지만 복을 받으려는 속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진심도, 사랑도 없었고, 성품의 변화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데 어찌 복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내세울 만한 밑천이 아니며, 고생하고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하나님과 거래하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제가 한 사람의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제가 다시 복을 받으려는 속셈을 내려놓고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생명 성품의 변화에 힘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면, 헌신과 수고를 아무리 많이 하고, 다리가 부러져라 뛰어다니고 뼈가 부서져라 고생해도 하나님께서 칭찬하지 않으실 것이며, 최종적으로 저 또한 하나님께 혐오받고 징벌받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 후로 저는 상처가 아무리 아파도 순종하며 하나님을 의지해 이 환경을 체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병세가 다시 악화되었을 때에도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더는 예전처럼 이성 없이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고, 육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했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찬양을 배우고, 체험 간증 영상을 보는 데 힘썼습니다. 한 달 후, 제 몸은 서서히 회복되었습니다. 퇴원할 때, 의사는 화학 치료도 필요 없고 3개월마다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묵상 시간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베드로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하나님께서 사람을 장난감처럼 다룬다고 하신들 사람이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나이까?”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순종과 관련이 있다. 네가 이렇게 체험하면 천천히 진리를 깨닫게 되어 자연히 성과를 이루게 된다. 우선, 너는 하나님과 진리에 순종하는 이런 태도를 지녀야 한다. 우선 하나님이 어떤 눈빛, 태도, 말투로 너를 대하는지, 너를 싫어하는지,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려 하는지는 상관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 베드로가 한 그 말처럼 하기 쉽겠느냐? (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일들을 체험했고 어떤 실제를 갖추었기에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냐?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 그 모든 것이 구원을 위한 것이며 사랑이라고 완전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장난감처럼 다룬다고 하신들”이라고 말했는데, 너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이라고 말했다. 너는 자신을 피조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여기고 있다. 이 둘은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차이가 있다! 노리갯감과 사람은 무엇이 다르냐? 노리갯감은 바로 아무것도 아니며, 가치 없는 싸구려이다. 짐승이라고 해도 되고, 장난감이라고 해도 되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하냐? 사람은 사상과 두뇌를 가지고 있으며 말을 할 줄 알고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정상적인 사람이 하는 일들에 종사할 수 있다. 사람과 노리갯감을 비교하면, 가치와 지위가 다르지 않으냐? … 너를 사람으로 대하면, 너는 어떤 대우를 요구하겠느냐? 너를 존중해야 한다. 너와 상의하면서 말을 해야 하고, 너의 기분을 배려해야 하고, 너에게 충분한 공간과 자유를 주어 너의 존엄과 체면을 지켜 줘야 한다. 이것이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노리갯감’은 어떤 대우를 받느냐?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이리저리 걷어찹니다.) (필요할 때 한 번 쓰고는 불필요해지면 버려 버립니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노리갯감을 대할 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럼 사람을 노리갯감처럼 대한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필요할 때는 가져다 쓰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바로 전혀 존중하지 않으며, 그의 권리를 수호할 필요도 없고, 또한 그에게 어떠한 권리도 주지 않는다. 그는 자주권이 없으며, 선택권 또한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그와 상의할 필요가 없고, 그의 체면 같은 것들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기분이 좋으면 그에게 좀 잘해 주다가 기분이 나쁘면 그를 걷어차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노리갯감을 대하는 태도이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대한다면, 사람은 어떤 느낌을 받겠느냐?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스럽다고 여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진리 실제를 갖추었길래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느냐?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대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대하신다면, 나는 순종해야 해. 하나님께서 나를 노리갯감으로 대하신다 해도 내가 어찌 달갑게 여기지 않겠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는 기꺼이 원할 수 있었는데, 이 ‘기꺼이 원하다’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순종의 진리이다. 사탄에게 넘기는 것, 이는 노리갯감을 대하는 행동 아니냐? 필요 없으면 바로 버리고 너를 사탄에게 넘겨 사탄이 너를 시험하고 농락하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어떤 태도였느냐? 불평했느냐? 하나님을 원망했느냐? 하나님에게 욕을 했느냐? 사탄에게 빌붙었느냐? (아니요.)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불평하지 않고, 이러한 소극적이고 반발하는 태도가 없으면 패괴 성품이 해결된 것 아니냐? 이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으로, 배반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어디에 놓으시든, 제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디에 놓으시든, 저는 여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설령 저를 멸하시어 재가 되더라도, 그래도 저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저는 사탄에게 빌붙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것의 문제이다. 이 정도까지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일정 기간 동안 진리를 갖춰야 한다. 그런 다음 이 일을 간파하고 똑똑히 안 후에 다시 진리를 실행하면 많이 수월해진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얻는 기본적 공과다> 중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묵상하고 난 뒤, 저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베드로의 체험을 본받으라고 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장난감처럼 다룬다고 하신들 사람이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즉 시련과 연단 속에서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기쁨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베드로는 설령 하나님께서 자신을 장난감으로 여기신다 해도 아무런 불평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며 하나님께 거래나 요구 없이 오직 순종만 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의 지배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습니다. 병고가 닥쳤을 때를 떠올려 보니, 저는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한결같이 육의 평안만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요구를 만족시켜 주시지 않았을 때, 육이 고통스럽고 복을 받으려는 욕망이 좌절되자 하나님께 따지고 다투며, 심지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베드로와 비교하면 제게 일말의 인성과 이성이 있습니까?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설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다 합당하며, 그분이 일하시는 이면에 담긴 마음은 제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은혜를 받고 육이 평안한 것이 좋은 일이지만, 사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더더욱 심판과 형벌, 고난과 연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제가 병고를 겪은 것도 비록 제 관념에는 맞지 않았지만 사실상 제 생명에도 유익했고, 제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데에도 더욱 유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저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는 추구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저는 베드로를 본받아 앞으로 암이 어떻게 진행되든, 죽게 되든 아니든, 자신의 피조물의 위치를 지키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 후, 저는 몸이 점차 회복되면서 목발을 짚고 한쪽 다리로 걷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3개월 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니 의사는 제가 잘 회복되었고 암도 재발하지 않아 화학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2023년 3월, 저는 고향에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 재검사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고 매우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런 골암은 99퍼센트가 화학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환자분은 화학 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암도 재발하지 않았네요. 이건 정말 기적입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저는 또다시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리고 엉덩이뼈도 아프지만, 그로 인해 속박받거나 하나님께 더 이상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매우 감사하며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소중히 여깁니다. 복을 받으려는 속셈을 내려놓고 순종하며 본분을 이행하니 마음이 더없이 평안하고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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