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을 분별하면서 배운 공과
2022년 6월, 리더의 안배로 저는 문서 본분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역 성과가 계속 좋지 않았던 한 팀이 떠올랐습니다. 문서 담당자 샤오리가 쓴 내적 상태를 보고 알 수 있었는데, 그녀는 명예욕과 지위욕이 강했고, 자기가 뭘 물어볼 때마다...
2023년 5월, 저는 외지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고향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어머니께서 몇 년 전부터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풍에 걸리신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중공의 핍박과 체포 때문에 거의 9년 동안 집에 못 간 바람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들이 분명 나를 찾았을 거야. 그들이 자꾸 어머니를 닥달해서 그 스트레스 때문에 중풍에 걸리신 게 아닐까? 가족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어머니를 핍박하기까지 하는데, 과연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릴까? 남동생 내외는 또 어떻고. 어머니가 중풍에 걸리시면 돈벌이는커녕 아이를 돌봐 주시지도 못하고 오히려 돌봐 드려야 하잖아.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도 있어. 시간이 길어지면 그들이 계속 인내심을 갖고 어머니를 돌봐 드릴 수 있을까? 친지들과 이웃들이 어머니께 가시 돋친 말을 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병고로 괴로우실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 짊어지셔야 할 텐데, 이런 상황들을 이겨 내실 수 있을까?’ 그때 저는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돌봐 드리고 싶었지만, 중공의 핍박과 추적으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낳고 기르시며 학교 공부까지 시켜 주셨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아껴 먹고 아껴 쓰셨고, 심지어 사채까지 빌리는 부담을 안고 저를 대학에 보내 주셨습니다. 지난 9년간 저는 어머니 곁을 지켜 드리지 못했고, 이제 중풍에 걸리셨는데도 집에 돌아가 돌봐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바치셨는데, 저는 딸로서 마땅히 해야 할 효도 한번 제대로 못 했으니 어머니께 너무나 죄송하고 빚진 기분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언젠가 어머니를 만나 마주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눌 날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바람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중풍에 걸려 제대로 말씀도 못 하시는니 마주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생각할수록 괴로웠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는 병으로 고통받는 어머니의 모습이 계속 맴돌았고, 눈물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잠 못 들고 뒤척였습니다. 머릿속은 온통 중풍에 걸리신 어머니의 모습으로 가득했고, 저는 완전히 어머니에 대한 감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 내적 상태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지금은 복음 확장의 중요한 시기이니, 어서 빨리 내적 상태를 바로잡고 본분에 마음을 쏟아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욥의 체험이 떠올랐습니다. 욥은 하룻밤 사이에 온 산의 소와 양을 강도에게 빼앗기고 자녀들도 모두 잃었으며, 자신은 온몸에 악창까지 났습니다. 그렇게 큰 시련과 고통 앞에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어머니께서 중풍에 걸리신 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제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일이 제게 임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이자 검증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욥을 본받아 어떤 일이 있어도 입으로 죄를 지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되며, 본분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배반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차츰 평온해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저는 <어머니가 암에 걸린 후>라는 체험 간증 영상을 보았는데, 그 안에 인용된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 제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중병에 걸리거나 큰 어려움에 봉착한 일을 지나치게 분석하고 연구할 필요는 없다. 네 힘을 들여서는 더더욱 안 된다.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생로병사나 크고 작은 일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네가 성인이라면 네 생각이 성숙했을 테니 이 일을 냉정하고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부모님이 병에 걸리면 날 생각하느라 그런 거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나 돼? 생각이야 했겠지. 자기 자식인데 어떻게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어? 나도 부모님을 생각하는데 어째서 나는 병에 걸리지 않는 거지?’ 병에 걸리는 사람은 모두 자식이 보고 싶어서 걸리는 것이겠느냐?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부모가 큰일을 당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에 그 일을 배치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하나님의 손으로 배치한 것이니 객관적 원인이나 이유를 들이댈 수 없다. 그저 부모가 그 나이가 되면 그 일이 일어나고 그 병에 걸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네가 곁에 있다고 피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운명에 병에 걸리는 일을 안배하지 않았으면 네가 그들 곁에 없어도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인생에 그런 큰일이 일어나도록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네가 그들 곁에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들은 여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보아라. 온 식구가 해마다 같이 있지 않더냐? 부모에게 큰 어려움이 닥치면 가족과 자녀가 모두 부모 곁에 있지 않더냐? 부모가 병에 걸리거나 병세가 악화되는 것이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겠느냐? 그런 게 아니라 그럴 운명이었던 것이다. 단지 자녀로서 부모와의 혈연관계 때문에 남이 들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네가 들으면 괴로운 것일 뿐이다. 이는 정상이다. 하지만 부모가 큰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서 네가 분석하고 연구하며 어떻게 벗어나고 해결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부모도 성인이고 사회에서 이런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만약 그들이 그 일에서 벗어나게끔 환경을 안배한다면 그 일은 조만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들이 겪어야 할 인생의 고비 중 하나라면 얼마 동안 겪어야 할지는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니 피해 갈 수 없다. 네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그 일의 근원과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발상이며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이다.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동기나 친구에게 연락해 부모에게 병원과 최고의 의사를 소개시키고 가장 좋은 병실을 확보하기 위해 분석하고 연구하며 고민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네게 정말 그럴 여력이 있다면 지금 이행해야 할 본분이나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부모에겐 부모의 운명이 있어 때가 되면 죽으리니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부모가 네 운명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너 역시 부모 운명의 주인은 아니다. 그들이 만약 그럴 운명이라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마음 졸이고 방법을 강구한들 별수 있겠느냐? 그래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거두어 네가 편안하게 본분을 이행하게 하겠다면 네가 관여할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과 협상이라도 하겠느냐?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머리를 쥐어짜서 연구하고 분석하며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면서 부모를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생각과 행동이겠느냐? 이는 하나님과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모습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사람이 평생 얼마나 고생하고 어떤 중병에 걸리며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을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것으로 객관적인 요인과 무관하며, 제 어머니가 병에 걸리신 것 역시 어머니의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병을 몇 년이나 앓게 될지, 완치될 수 있을지, 마지막에 후유증이 남을지 등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주재를 알지 못하고 계속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몇 년간 제가 집에 돌아가지 못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들이 어머니를 핍박했고, 그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중풍에 걸리셨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또 어머니가 병드신 후 가족들이 돌보지 않을까, 친지들과 이웃들이 가시 돋친 말을 하며 어머니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 주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중공의 핍박과 체포 때문에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돌봐 드릴 수 없었던 저는 어머니께 빚진 마음으로 살았고, 마음이 온통 어머니의 병환에 사로잡혀 본분을 이행할 때도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어머니의 중풍은 제가 곁에 있는지 없는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곁에 머문다고 해서 어머니가 그 병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집으로 달려가 돌봐 드린다고 해서 병세가 호전되거나 완치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치 외할머니께서 식도암에, 이모께서 간암에 걸리셨을 때와 같았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분들을 치료하려 애쓰셨고, 돈도 많이 쓰고 자주 찾아뵈었지만 결국 두 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이 평생 어떤 병에 걸리고 언제 죽을지는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것이기에, 사람이 어떤 방법을 쓰고 어떻게 돌본다 해도 조금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설령 제가 어머니 곁에 머물며 돌봐 드렸어도 어머니는 똑같이 그 병에 걸리셨을 것입니다. 드러난 사실을 통해, 저는 비록 하나님을 수년간 믿었지만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전히 이방인과 같았고 하나님의 주재를 알지 못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하나님께 돌아가 어머니의 병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싶었습니다. 병세가 호전되든 안 되든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고 원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자 서서히 제 내적 상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때로 어머니의 병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예전처럼 마음이 고통스럽지는 않았고, 본분에도 마음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몇몇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중풍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고, 머릿속은 온통 저를 걱정해 주시고 제 믿음을 지지해 주셨던 어머니의 모습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후 저는 구했습니다. ‘어머니가 중풍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왜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워할까? 어떻게 이 내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는 하나님 말씀 두 단락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그가 부여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란 생명체를 세상에 데려왔다. 그리하여 사람은 부모와 가족이 생겼고 외로움에서 벗어났다. 이 물질 세계를 본 후부터 사람은 필히 하나님이 예정한 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생명체 하나하나를 밑받침해 주어 ‘어른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살아가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부모의 길러 준 은혜라고, 사람의 생명의 본능을 밑거름으로 하여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가 사람의 ‘생명’을 부여했는지,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며, 생명의 본능이 어떻게 기적을 일구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저 음식이 생명 연장의 근본이고, 의지력이 사람의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며, 머릿속의 신념이 사람이 생존하는 밑천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부여한 생명을 이렇게 헛되이 허비하고 있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은 사람 생명의 근원이다> 중에서), 『“부모는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말해 보자. 부모는 너의 채권자가 아니라는 말이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일을 이치에 맞게 분명히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부모가 너를 낳은 것에 대해 살펴보자.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이냐, 아니면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이냐? 누가 누구를 택했느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아니다.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도 아니다. 근원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이 일은 사람이 이해하기 쉬우니 이 주제는 일단 제쳐 두고 이야기하지 않겠다. 네 관점에서 보면 너는 수동적으로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그들에 의해 태어났다. 부모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주관적으로 너를 낳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고 본다면 네가 태어난 일에서 주도권은 부모에게 있다. 그들이 너를 낳기로 했으니 그들에게 주도권이 있다. 너는 그들에게서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태어났다. 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니 부모가 주도권을 가지고 너를 낳기로 선택했다면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고 키울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너를 공부시키든, 먹이고 입히며 돈을 쓰든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이다. 하지만 너는 양육받는 동안 늘 수동적인 입장이다. 네게는 선택권이 없고 그들에게 양육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는 어리고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손에 수동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너는 부모가 키우는 대로 자라난다. 부모가 네게 좋은 것을 먹이면 좋은 것을 먹고, 부모가 네게 제공하는 생활 환경이 고달프고 빈곤하면 너는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양육받는 동안 너는 수동적이고, 부모는 책임을 다한다. 부모가 꽃을 키우는 것과 같다. 화분의 꽃을 키우기로 했으면 비료와 물을 주고 햇빛을 쐬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너를 극진하게 보살피든, 정성껏 보호하든, 결국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키우는 목적이 무엇이든 이것은 그들의 책임이다. 그들이 너를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이렇게 본다면 부모가 네게 하는 것이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부모가 네게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은혜라고 할 수 없다. 화초를 하나 키워도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며 책임을 다하는데 그것도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은혜라 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작은 화초는 밖에서 더 잘 자란다. 땅에 심으면 햇볕을 쬐고 바람과 비를 맞아 더 튼튼하게 자라지만, 집에서 화분에 옮겨 심어 키우면 밖에서 자라는 것만 못하다. 어디서든 못 살겠느냐?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이 살아가도록,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준수하는 법칙을 준수하도록 책임진다. 한 사람으로서 너는 부모가 양육하는 환경에서 생활할 뿐이니 그 환경에서 성장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고, 미시적으로 보면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찌 되었든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자 책임이지 은혜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은혜라고 할 수 없다면 이것은 네가 누려 마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는 네가 누려야 할 하나의 권리이다. 너는 마땅히 양육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미성년일 때는 양육받는 것이 네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받은 것은 단지 너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지 부모의 은혜나 은정이 아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제 생명의 숨결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저를 위해 가정과 부모님을 정해 놓으셨고, 그 후로도 줄곧 저를 보살피고 지켜 주시며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또 형제자매를 보내 복음을 전하게 안배하심으로써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행운을 누리게 해 주셨고, 그때부터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머니께서 저를 키워 주셨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재와 예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해 제가 태어난 날부터 저를 싫어하셨고, 제가 조금만 잘못해도 손찌검을 하셨지만, 어머니는 매번 제 편에 서서 저를 감싸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진학을 반대하셨을 때도 어머니는 제게 계속 공부해야 한다고 고집하시며 빚의 압박 속에서도 사채까지 빌려 저를 대학에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통과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도, 어머니는 매일 밤 자매들을 불러 제게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하며 도와주고 붙들어 주게 하심으로써 제가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셨습니다. 제가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할 때도 어머니는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셨고, 제가 가족의 핍박과 방해를 받지 않도록 집안 환경을 지켜 주셨습니다. 제 성장 과정과 신앙 여정에서 어머니가 해 주신 이 모든 것은 그분의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신 것이며, 저를 낳은 후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그것은 은혜라고 할 수 없으며, 제가 갚아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의 양육과 희생을 줄곧 은혜로 여겼고, 어릴 적부터 ‘모든 선행 중 효가 으뜸이다’,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와 같은 전통 문화의 해악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에, 마땅히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만약 보답하지 않으면 어머니께 죄송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어머니께서 중풍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집에 돌아가 돌봐드릴 수 없어 마음이 온통 어머니께 대한 죄스러운 마음으로 가득했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재앙은 이미 닥쳤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보좌 앞으로 돌아와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뜻입니다. 이처럼 복음 확장의 중요한 시기에 만약 제가 계속 어머니에 대한 감정에 빠져 본분을 소홀히 하고 건성으로 이행한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양심도 없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생명을 주시고, 은혜롭게도 당신의 앞으로 오게 하시어 생명의 말씀을 공급해 주셨으며, 두 번의 교통사고에서도 저를 지켜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가 없었다면 저는 몇 번이나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없었다면 저는 여전히 이방인처럼 허무함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랑은 너무나 큽니다. 제가 가장 감사드려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저는 또 하나님 말씀 한 단락을 보고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실행 원칙을 찾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생활하는 환경과 처한 배경을 볼 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충돌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 너는 형식적으로 부모와 떨어질 필요가 없으며, 형식적인 의미에서 버리고 포기할 필요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 그러하겠느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충돌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러합니다.) 그렇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네 부모가 막지 않고, 그들 역시 믿으면서 네가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는 것을 무척 지지하고 독려해 준다면, 너와 부모는 평범한 의미의 육체적 혈연관계가 아니라 형제자매 관계이다. 그러니 너는 형제자매의 관계로 부모와 함께 지내는 것 외에도 자녀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며, 그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너는 본분 이행이 영향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즉 네 마음이 그들에게 속박받지 않는 상황에서 전화로 관심을 갖고 안부를 물으며, 그들을 도와 어려움을 해결해 주거나 생활 속 문제들을 처리해 줄 수 있고, 그들이 생명 진입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 믿는 것을 부모가 막지 않는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 관계는 지켜야 하고, 너는 네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째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안부를 물으며 그들을 돌봐 주어야겠느냐? 너는 그들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 때문에 너에게는 하나의 책임이 더 있는 것이고, 너는 그들에게 더 많이 안부를 묻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그들이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않고 네 발목을 잡지 않는 상황에서 네가 그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기준이다. 만약 환경적 영향이나 방해로 인해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할 수 없다면, 규례를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배치를 따르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무리하게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하나님이 정죄하겠느냐?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 네게는 부모에게 효도할 책임이 있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그 책임을 다할 수 있겠지만, 감정에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부모 중 한쪽이 몸이 안 좋아 입원했는데,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고 해 보자. 네가 본분 이행으로 정신이 없어서 집에 돌아갈 수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럴 때는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이 일에 관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배치에 따라야 한다.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의 목숨을 거두어 그를 데려가려 한다면, 너도 순종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순종하겠지만, 마음이 무척 괴롭고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 아닙니까?”라고 하는데,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인간미이자 인성으로,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너는 울어도 된다. 하지만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면서 운다면, 또 본분 이행을 할 생각이 없고 돌아가서 부모를 보고자 한다면, 그래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한다면, 너의 그 효도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감정 속에서 살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책임을 다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부탁을 포기했으니,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본분에 지장을 주지 않고,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힘닿는 데까지 부모에게 효도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성의 범위 안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감정에 빠져서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어긋난다. 하나님은 네게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저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면 된다고 요구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는 배경이 있다. 여러 조건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범위에서라면 책임을 다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큰 병에 걸릴지, 죽게 될지 등을 네가 결정하는 것이겠느냐? 그들이 어떻게 살지, 언제 죽을지, 어떤 병으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등이 너와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4)>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탁도, 저의 사명도 아니며, 오직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만이 저의 천직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그것은 천직이요, 거부해서는 안 되는 책임이다. 남들은 본분을 이행하지 않더라도 너는 마땅히 이행하겠다는 그런 의지가 있어야 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에서) 물론 자녀로서 부모에게 효도할 책임은 있지만, 이것은 피조물의 본분이 아니므로 다양한 환경과 배경에 따라 정확한 실행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본분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환경과 조건이 허락된다면, 저는 딸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해 힘닿는 데까지 어머니를 돌봐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중공의 핍박과 체포 때문에 저는 집에 돌아갈 수 없고, 어머니 곁에 머물며 돌봐 드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머니를 한번 뵙거나, 전화로 안부를 여쭐 권리마저 중공에 의해 무정하게 박탈당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본분을 이행하느라 비교적 바빠서 어머니를 돌보러 돌아갈 시간도 없습니다. 만약 제가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돌보느라 교회 사역을 지체한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음이 한결 담담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드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제 어머니의 병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고 제 본분을 지키겠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가 돌봐 드릴 수는 없지만, 어머니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앞으로 어머니께 무슨 일이 닥치든 순종하겠습니다.” 기도 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본분에 마음을 쏟으며 더 이상 어머니의 중풍 일에 얽매이거나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을 마련해 주셔서 제 안에 있던 전통 사상을 분별하게 하시고, 부모님을 어떻게 올바르게 대해야 할지도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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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리더의 안배로 저는 문서 본분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역 성과가 계속 좋지 않았던 한 팀이 떠올랐습니다. 문서 담당자 샤오리가 쓴 내적 상태를 보고 알 수 있었는데, 그녀는 명예욕과 지위욕이 강했고, 자기가 뭘 물어볼 때마다...
그리스 데이지(Daisy)저는 예전에 본분을 이행하면서 마음속에 늘 한 가지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선의를 갖고 본분을 잘 이행하려고만 하면 하나님께서 저의 좋은 마음을 보시고 칭찬하며 기쁘게 받아 주실 것이고, 본분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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