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입을 추구하지 않은 후과

2024.8.4

2023년 9월에 저와 협력하던 자매가 경찰에 잡혀갔어요. 그때 전 교회 리더였는데, 형제자매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는 걸 보면 붙들어 줘야 했고, 뒷마무리도 잘 처리해야 했어요. 정말 속이 타더라고요. 일단 쉴 틈도 없이 말씀 책부터 안전한 곳에 옮겼고, 형제자매들의 내적 상태를 해결해 주기 위해 교제를 나누고, 새 신자를 양육하고 붙들어 주는 데에 돌입했죠. 한동안은 새벽에 나가서 늦은 밤이 돼서야 귀가할 정도로 바삐 보냈어요. 물론 정말 몸이 피곤할 때가 있었지만 형제자매들의 내적 상태가 호전되어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게 되고, 책도 무사히 안전한 집에 잘 옮겨 진 걸 보니까 너무 기뻤어요.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도 내가 일 처리를 잘해서 교회 사역에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어. 계속 이렇게 협력하다 보면 분명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본분을 이행하는 데 더 힘이 났어요. 매일 눈 뜨면 예배 모임에 가거나 사역을 시행하기 바빴지만 제가 하는 일이 과연 원칙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 반성하는 경우는 드물었어요. 시간을 내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긴 해도 형제자매들의 내적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데 집중했지 제 상태를 점검하는 일은 거의 없었죠. 간혹 제가 일하는 데에만 신경 쓰고, 진리를 구하면서 자기를 반성하는 시간이 없다는 걸 느끼긴 해도 사역에서 소기의 효과를 보게 될 때면 말씀 보는 시간이 적고,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된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사역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더구나 해야 할 사역이 산더미라는 생각에 계속 일 처리에만 집중했어요.

나중에 새로 뽑힌 자매와 협력하게 됐는데, 자매는 처음이다 보니 업무 파악이 제대로 안 돼 제가 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아졌어요. 사역에 대해 의논할 때도 자매는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그러니 자매가 싫었고 저는 말도 퉁명스럽게 했죠. 자매는 제 눈치를 많이 봤는데 전 자신을 반성하지도 않었어요. 저는 그걸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본분 이행에 지장도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할 일도 많은데 언제 진리를 구하면서 내적 상태를 해결할 겨를이 있겠냐고, 그러다 사역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된다고, 무엇보다 본분의 성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전 계속 사역에만 매달려 있었죠. 어느 날, 두 집사랑 사역에 관해 의논했는데, 두 사람 다 느릿한 성격이라 적극적으로 제안을 내놓지 않았어요. 저는 같이 의논하는데 각자 자기 의견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들어서 한마디 했어요. “형제님, 매번 의논할 때면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게 없네요. 이러면 어떻게 사역을 놓고 의논하겠어요?” 제가 그러자 형제는 고개를 숙이고 난감해 했어요. 한동안 그런 상황이 여러 번 있었는데, 저는 형제에게서 적극적으로 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싫은 티를 냈어요. 형제도 조금 소극적으로 변했고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제가 나이도 있고 반응이 느려서 자매의 템포를 따라갈 수 없네요. 이 본분은 제가 이행하기에는 어렵네요.” 사실 그 형제는 처음 그 본분을 맡게 됐으니까 잘 모르는것도 정상이거든요. 그럼 제가 많이 도와주고 격려해 줘야 하는 게 맞죠. 근데 저는 그런 식으로 말을 해 놓고도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많은 걸 요구한 것도 아니고 본분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행하라고 한 말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는 신경 쓰지 않았죠. 그때도 전 ‘이런 패괴 성품은 한순간에 바뀔 수 없어. 시간이 있을 때 업무상의 문제나 하나 더 해결하는 게 낫겠어. 사역을 안 하면 어디서 효과가 나겠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계속 일에만 치중할 뿐 말씀을 보거나 진리를 구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직면한 일들에서 공과를 배우려고 하지 않다 보니 마음은 늘 허전하기만 했죠. 한번은 조금 잠재적 위협이 있는 집에 하나님의 말씀 책을 보관했었는데, 윗선 리더가 일 처리에 원칙이 없다고 책망하더라고요. 전 너무 억울했고, 계속 이유를 따지면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제가 그렇게 나오니 리더가 그러더라고요. “자매가 발품을 많이 뛴 건 알아요. 근데 자매는 일 처리에 원칙이 없고 늘 자기 뜻과 경력에만 의존하고 있어요. 그건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가 돼요. 그리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순종하면서 찾고 구하려는 자세가 없고 자기 반성도 하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발전이 있겠어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제 모습을 성찰해 봤는데, 그제야 저는 계속 발품 팔면서 사역하는 것에만 치중했을 뿐 생명 진입은 없다는 걸 인지하게 됐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저의 문제를 깨닫고 해결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도했어요.

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죠. 『하나님은 말세에 말씀과 무관한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다. 즉, 계속 말씀하면서 오늘날까지 말씀으로 사람을 이끌고 있다. 물론, 이렇게 말씀하는 동안 말씀으로써 그를 따르는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을 인도한다. 이런 말씀은 구원받기를 원하거나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통해 그가 인류를 구원하는 그 사실을 성취할 것이다. 이런 말씀은 내용으로 보나 양적으로 보나, 어떤 유형의 말씀이든, 어느 부분의 말씀이든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통해 그의 6천 년 경륜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성과를 성취할 것이다. 이런 말씀은 이 인류에게, 현재의 인류에게도 미래의 인류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이고,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목적과 의의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모른 체하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마치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말이다. 여전히 자신이 추구할 것을 추구하고 자신이 할 것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겠어. 하나님께서 동쪽을 가리키시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을 가리키시면 서쪽으로 가는 거야. 하나님이 죽으라면 그분 눈앞에서 죽겠어.’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이런 신념뿐 하나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이 너무 많아. 그냥 단순하게 내가 할 일을 바로 말씀해 주시면 될 것을. 그럼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텐데 말이야.’ 하나님이 얼마나 말씀하든 그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문외한처럼 결국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체험 인식도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좋아하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싶겠느냐? (그러고 싶지 않으실 것입니다.) 결코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가 수없이 얘기했거늘 너는 어찌하여 소경과 귀머거리처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보아하니 오로지 복받을 생각과 아름다운 종착지로 들어갈 생각밖에 없구나. 너는 그저 바울의 목표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나의 도를 준행하려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왜 믿느냐? 너는 구원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고 복을 받겠다는 욕망을 채우러 왔구나. 이런 계산이 있으니 너는 힘쓰는 자가 제격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충성스럽게 힘쓰는 자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모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사람이 이방인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는 것보다는 충성스럽게 힘쓰는 자로 살아남는 것이 훨씬 낫다. 특히 하나님 집 사역에는 힘쓰는 자가 필요하기에 하나님을 위해 힘쓰는 것도 하나의 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왕의 종노릇보다야 훨씬 낫고,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힘쓰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흡족하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심판 사역을 하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고 정결케 하며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힘쓰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역사하면서 이루려는 목표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려는 결과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욕망의 불길에 휩싸여 어리석고 눈멀면 사소한 이익에도 미혹되고 마음을 빼앗긴다. 반면 하나님의 이토록 귀한 생명의 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직시하지도 않으며, 중시하지 않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과연 슬기로우냐, 아니면 어리석으냐?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느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모두 내려놓고 진리 추구에 집중해야만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사람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기초이다> 중에서) 하나님께서 폭포하신 말씀을 보니까, 사람이 외적으로 일하는 것에만 치중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든 하나님 말씀을 경시하는 자세로 대하고,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을 중시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더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에 저를 비춰 보니까 제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저는 교회에서 맡기는 대로 일하고 맡은 바를 잘하면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는 거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 처리에만 급급했지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외면했고, 심지어 말씀을 먹고 마시는 건 본분을 이행할 시간에 지장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죠. 사실 저도 알아요. 하나님께서 말세에 이 많은 말씀을 선포하신 건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진리를 얻어 하나님께 구원받으라는 거잖아요. 근데 저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계속 저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일만 잘 처리하면 된다는 생각에 빠져 추구했거든요. 그래서 동역자와 협력 과정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진리로 사람 내면에 있는 다양한 패괴 성품을 다 폭로하시고 사람이 또 체험할 수 있게 실제적으로 상황을 예비해 주시는 건 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아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결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잖아요. 그건 하나님의 사랑이죠. 만약 하나님께서 그저 사람이 봉사식으로 일만 하기를 바라셨다면 오늘날까지 이렇게 한 걸음씩 사역하실 필요도, 성육신하셔서 진리를 선포하시고 그토록 많은 고난 받으실 필요도 없잖아요. 전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봤으면서도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패괴 성품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어요. 하나님 말씀처럼 저는 정말 문외한이었어요. 이대로 간다면 제가 아무리 많은 사역을 했어도 결국 구원받지는 못하는 거잖아요. 이걸 깨닫고 나서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폭로의 말씀을 보고 나서야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했던 자신의 잘못된 관점이 뭔지 알게 됐습니다. 이젠 정말 회개하고 변화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이 잘못된 관점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 말씀에 노력을 쏟고, 진리 추구와 생명 진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어요. 『현재 많은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내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해.’라고 생각하며 이런 내적 상태로 살고 있다. 이는 복을 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된 것으로, 순전히 하나님이 내리는 상을 받기 위해, 그리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진리가 없으며, 틀림없이 글귀와 도리를 얼마간 이해한 것으로 곳곳에서 뽐낼 것이다. 이런 사람이 걷는 길이 바로 바울의 길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결같이 사역만 한다. 그는 사역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고, 틀림없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얻을 자격이 있고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생하고 전도하며 죽을 수 있는 사람, 목숨조차 돌보지 않는 사람, 또한 하나님이 맡긴 본분을 훌륭히 완수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하나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을 사람이며, 분명 면류관을 얻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상상하고 추구한 것이며, 바울이 걸은 길이다. 바울이 바로 이런 사상에 지배받아 사역하고 하나님을 섬겼다. 이런 사상과 속셈은 사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서는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지식을 갖추고 나면 남들보다 뛰어나고 관직에 나아가고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위를 얻으면 재능과 포부를 크게 펼치며 자신의 가업과 사업을 눈부시게 끌어올릴 수 있다고 여긴다. 이방인들은 모두 이런 길을 가지 않더냐? 이런 사탄의 본성에 지배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바울처럼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 앞에서 충성심을 보여야 해. 그러면 나중에 큰 상과 면류관을 얻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추구하는 것과 틀에 박힌 듯 똑같다. 그것들은 전부 똑같은 본성에 지배되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사탄의 본성을 갖고 있으면, 세상에서 지식을 추구하고 학문을 추구하고 지위를 추구하고 남들보다 뛰어나기를 추구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면류관과 큰 복을 얻기를 추구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분명 이런 길을 걸을 것이다. 아무도 이 사실을 바꿀 수 없으며 이는 자연법칙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가는 길은 베드로의 길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어떻게 베드로의 길을 갈 것인가>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헌신하는 목적이 복을 얻기 위한 것이자 자신의 좋은 결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건 복을 얻기 위한 마음에 지배받고 있는 것이라고 폭로하셨어요. 반성해 보니까 제가 이런 추구 관점을 갖고 있더라고요. 저는 사역을 많이 하고 본분을 많이 이행하고 리더가 맡겨 준 본분에서 소기의 효과를 본다면, 하나님께 칭찬받을 거고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늘 일 처리에 마음을 두고 사역하는 것에만 집중했죠. 생각해 보면 바울은 늘 전도하고 사역하는 것에만 신경 쓰면서 열심히 뛰어다녔고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는 않았고 패괴 성품의 변화는 조금도 없었잖아요. 바울이 행한 건 다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에 불과하고 면류관과 상을 얻기 위한 목적뿐이었어요. 궁극적으로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기까지 했어요. 결국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도태됐는데, 거기 비춰 보니까 제가 바울의 길을 걷고 있는 거였어요. 저는 그저 저만의 상상과 관념에 따라 사역을 많이 하고 저한테 맡겨 준 본분을 잘 이행해서 소기의 효과를 보기만 하면,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분명 좋은 종착지를 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일하는 데에만 치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고,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고도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오직 외적으로 치른 대가와 헌신, 그리고 사역 성과로 하나님의 복을 맞바꾸려고 했죠.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겠어요. 외적으로는 매일 쉬지 않고 사역했으니까 충성스럽게 보였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교회 사역을 위해 일한 것도 아니라 오직 자신의 결말과 종착지를 위한 궁리만 했는데, 그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혐오를 사는 일이죠.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사적인 속셈과 불순물을 품은 채 추구하고 패괴 성품이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 도태될 수밖에 없잖아요.

나중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베드로는 삶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흡족게 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지 못하면 통회했으며, 그 후에 적합한 길을 찾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 위해 힘써 노력했다. 그는 생활 속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려고 했으며, 자신의 옛 성품을 조금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항상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진리에 깊이 들어가려고 했다. …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자 했으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에 순종하고자 했다. 그는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연단과 환난, 궁핍한 생활 역시 받아들였으며,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한 것 아니겠느냐?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 아니겠느냐? 형벌이든 심판이든 환난이든 너는 죽기까지 순종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이 도달해야 하는 경지이자, 사랑 안에 있는 순결한 요소이다. 사람이 이런 경지에 도달한다면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창조주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은 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너는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정죄받을 것이다. 너는 진리가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창조주를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할뿐더러 창조주께 순종하지도 않고 창조주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서도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를 추구했고, 패괴 성품을 드러내면 제때에 반성했고, 사역하면서도 개인의 진입을 중시했다고 하셨어요.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탁에 대한 책임감은 물론, 자신의 생명 진입에 대해서도 긍정적 부담을 가지고 성공의 길을 갔던 거예요. 근데 저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하는 것만 중시하고 진리를 구하는 것은 중시하지 않았고,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도 개의치 않고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변화가 전혀 없었던 거고 실패의 길을 가고 있었어요.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건 당연한 일이자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잖아요. 제 상상처럼 맡은 사역만 하면 다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일어나는 일에서 진리 원칙을 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패괴함과 부족함을 알려고 노력하고, 진리를 구하면서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진리를 일 처리와 처신의 준칙으로 삼아야 하는 거죠. 그렇게 실행해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거였어요. 물론 제 패괴된 성품은 한순간에 뿌리 뽑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전 그것을 제대로 알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스스로를 반성하고 지켜야 할 원칙을 찾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해야 하죠.

그 후에 하나님의 이 말씀도 봤어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본분 이행이 아무리 바빠도, 문제가 닥치면 진리를 구해 해결할 줄 알며, 설교를 듣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구하고 교제한다. 또 매일 마음을 평온히 하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체험 간증 영상을 보면서 얼마간 수확을 얻는다. 이런 자는 본분 이행으로 아무리 바빠도 전혀 생명 성장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생명 진입에 지장을 주지도 않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실행한다. 하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본분 이행으로 바쁘든 바쁘지 않든, 어떤 문제가 닥치든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마음을 평온히 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거나 인식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분 이행으로 바쁘든 한가하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마음을 갖고 진리를 갈망하며 자신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부담을 느낀다면, 사역이 아무리 바빠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다가가고 기도할 것이며, 성령의 깨우침과 빛을 얻을 것이고, 생명이 끊임없이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거나 관심이 없다면, 수확이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어떤 패괴 표출이 있는지 반성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본분을 이행할 때 패괴를 드러냈다면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편, 스스로를 돌아보고 패괴 성품을 인식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이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업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어렵겠느냐? 이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 성장에 관심이 없으며,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생명 성장에 마음을 쓰고자 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를 수시로 묵상하며, 어떻게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되새긴다. 사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곧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한다면, 그렇게 몇 년간 실행한 후 적잖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패괴 표출도 훨씬 줄어들며,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진실한 체험도 많아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여부는 본분 이행으로 바쁜지, 시간이 없는지에 달린 게 아니라 마음으로 진리를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다. 사실, 사람이 가진 시간은 누구나 똑같다. 다만 개개인이 사용하는 곳이 다를 뿐이다.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육적인 누림에 시간을 쓰거나 표면적인 일로 바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이는 생명 성장에 지장을 주는 큰일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실행할 길을 찾게 됐어요. 매일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묵상하고, 하루 동안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냈는지, 어떤 일들을 원칙 없이 처리했는지를 반성해야 했어요. 물론 그 시간이 제한적인 건 없었어요. 얻는 것만 있으면 되더라고요. 본분이 바쁘지 않을 때에는 말씀을 읽는 데에 조금 더 시간을 쏟고, 바쁠 때에는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조금 더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생활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실행하고 체험해야 했어요. 전에는 영 생활이나 말씀으로 자신의 내적 상태를 해결해야 하는 부분을 언급하면 시간이 없다는 말만 했었는데, 사실 본분이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을 볼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일에만 치중했을 뿐이었죠. 따지고 보면 저는 본분상 그렇게 바쁘지 않았을 때에도 말씀 보는 걸 중시하지 않았고 제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고 진리를 구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근데 이제는 본분 이행과 생명 진입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걸 알게 됐어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고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건 모두 생명 진입과 연관되는 거였어요. 해야 할 사역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생명 진입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죠. 그 뒤로 저는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구하면서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사소한 시간들까지 다 활용했거든요. 밥 먹을 때, 길을 갈 때, 빨래를 할 때 이런 시간에도 충분히 제 내적 상태를 돌아볼 수 있고, 말씀을 묵상할 수 있었어요. 제가 추구할 마음이 있고, 찾고 구할 마음만 있으면 시간은 항상 있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계속 같이 협력하는 형제자매들을 싫어하고, 늘 혈기를 드러내는 건 무슨 문제인지 반성해 봤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제 내적 상태에 맞춰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혈기를 드러내는 건 교만한 성품에 지배받고 타인에 대한 요구 기준을 너무 높였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어요. 동역자 형제는 연세도 있으신 데다가 이런 본분을 협력해 본 적이 없어서 반응이 좀 더딘 것도 정상이거든요. 근데 전 항상 제 기준에 맞춰서 요구했고,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말을 했는데, 사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전혀 고민하지 않았고 각 사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대할 줄 몰랐어요. 결국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상처와 구속감만 줄 뿐이었어요. 돌아보니까 전 정말 비이성적이었어요. 이러한 것들을 인식하고 나서야 이 문제를 중시하기 시작했어요. 그 뒤로는 사역에 관해 의논할 때 형제자매들의 반응이 조금 느리더라도 올바른 방식으로 대했어요.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고, 원칙성 문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교제를 해 줬어요. 그리고 저한테 물어보는 것에 대해서는 최대한 차근차근 교제를 해 주면서 함께 진리를 구하며 진입했어요. 그리고 저도 일이 생겼을 때 제가 드러내는 성품을 성찰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옳지 않은 생각이 들거나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저 자신의 패괴 성품으로 대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기도하면서 관련된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한동안 또 본분으로 바쁘게 보내야 했는데, 몇몇 형제자매들이 원칙을 어기면서 일을 한 탓에 진리를 교제해서 해결해야 했어요. 그리고 복음 대상자에게 복음도 전해야 했어요. 그렇게 급하게 협력해야 할 일이 많으니 전 일단 빨리 처리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그 순간, 전에도 항상 일 처리 하는 데만 급급해서 발품도 뛰고, 일도 마무리는 했지만 얻은 건 아무것도 없던 게 생각났어요. 그래서 계속 그렇게 할 게 아니라 원칙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형제자매들의 행동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그에 맞춰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고, 소기의 성과를 보기 위해 어떻게 교제를 해야 할지, 형제자매들이 어떻게 문제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게 할지 고민했어요. 그리고 복음을 전할 대상자에 대해서도 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게 뭔지 고민하고 그에 관련된 진리를 미리 준비했어요. 그렇게 찾고 구하는 과정에 저는 과거에 몰랐던 진리 원칙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걸 얻게 됐고, 본분에서도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보게 됐어요. 이런 체험을 통해서 저는 생명 진입을 중시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하는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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