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입으면 무조건 나쁜 일일까요?

2024.8.4

2023년 7월의 어느 날 우리 교회의 왕하오(王浩) 형제님이 예상치 못하게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형제님은 다 버리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따라왔고(8행의 ‘형제님인데’까지 걸리는 것 같아서요) 본분을 이행하는 중에 백혈병을 앓게 됐을 때도 조금의 원망도 하지 않고 한편으로 치료하면서 본분에 최선을 다했던 형제님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나님은 왜 지켜 주지 않으셨을까? 형제님이 이번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면 아름다운 종착지도 없어지는 게 아닐까?’ 전 이런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철렁했어요. 그 일이 있은 후로는 계속 이 의문을 가슴에 품고 있었고 본분을 이행할 때에도 가끔씩 이 일을 떠올리면서 하나님께서 형제님이 죽지 않게 지켜 주시기를 바랐어요. 그렇게 모든 걸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걸 보여 주시길 소망했죠. 하지만 며칠이 지났어도 왕하오 형제님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위험한 상태에 있으며, 심지어 헛소리를 한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거예요. ‘만약 형제님이 죽으면 아름다운 종착지는 아예 얻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오랜 세월 오랫동안 버리고 헌신했는데, 이렇게 죽으면 모두 허사가 되는 게 아닐까? 모든 걸 다 버리고 헌신해도 좋은 종착지를 보장받을 수는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저는 왠지 모르게 슬퍼졌고 자연히 앞으로의 종착지와 결말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생겼어요. ‘나도 집과 직장을 내려놓고 수년간 본분을 이행한 사람인데, 나중에 어떤 화를 입어 죽기라도 한다면 아무런 복도 얻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천근 바위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무거웠고 한 며칠 동안은 본분을 이행하는 데 기운이 나지 않았어요. 원래 사역하는 데에 부족한 게 많아 사역에 관한 원칙을 배우려고 했던 마음도 식어 버렸고 복음 전파 인원을 육성하는 사역도 한쪽에 제쳐 두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치우친 부분을 얼른 바로잡지 못해서 복음 사역에 지장이 생겼어요.

한동안은 계속 한숨을 푹푹 쉬었고 의기소침하기만 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제가 아무리 노력하고 헌신해도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주시지 않을 수 있겠다는 관념이 생겼죠. 겉으로는 계속 본분을 이행했지만 마음 속에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쌓이고 있었어요. 그러니 기도해도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어요. 그러다 얼마 안 돼 왕하오 형제님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 금방 다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얘길 들으니 너무 기쁜 거예요. 그리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고 의기소침했던 정서도 완전히 사라졌어요. 또 형제님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게 되니까 다시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역시 하나님께 진심으로 헌신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따라온다는 생각이 들었죠. 왕하오 형제님을 통해 제가 확인했으니까 앞으로 저도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본분을 이행해도 기운이 나고 마음도 홀가분하더라고요.

그러다 그동안 제 내적 상태가 왜 그렇게 기복이 심했는지 반성해 봤는데, 반성하는 과정에서 전에 봤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다시 보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어려움이 닥친 것을 보면 바로 자신에게 대입해서 생각해 본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 고통이 임한 것, 병고나 환난, 재앙이 임한 것을 보면 바로 ‘저 일이 나한테 닥치면 어쩌지? 하나님을 믿는데도 저런 일이 닥칠 수 있구나. 하나님을 믿는데도 저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였어. 그럼 하나님은 대체 어떤 분이지? 하나님이 저 사람을 인지상정에 어긋나게 대하시는데, 그럼 하나님이 나한테도 저렇게 대하지 않으실까? 이제 보니 하나님은 기댈 만한 분이 아닌 것 같아. 언제 어디서든 사람에게 생각지도 못한 환경을 마련하고,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곤란한 처지에 빠뜨릴 수 있으셔.’라며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 믿지 않으려니 복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렵고, 계속 믿으려니 재앙이 임할까 봐 두렵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때 그저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뿐, 감히 “하나님, 제게 시련을 내려 주시고 저를 징계해 주십시오. 당신의 뜻대로 이루소서.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렇게 기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얼마간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 의지와 용기는 작아지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 형벌과 심판, 주재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을 갖게 되며, 하나님에 대한 경계심도 생긴다. 그러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벽이 생기고 틈이 벌어진다. 사람에게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면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그럼 너희는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지 않겠느냐? 이런 내적 상태로 살아가지 않겠느냐?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진리를 구하지 않고 되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아직 믿음이 없다면, 길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언젠가 천재(天災)나 인재(人災)가 임하면 바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중에서)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믿은 후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약속만을 받아들이고자 준비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시련과 연단, 박탈을 받아들이려고 기다리고 예비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박탈, 저주를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지 않는다. 사람과 하나님의 이런 관계가 정상적이냐? (비정상적입니다.) 어째서 비정상적이라고 하겠느냐? 문제가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에게 진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은 관념과 상상이 너무 많고 늘 하나님을 오해하며,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도 모르기에 문제가 발생하기 아주 쉽다. 특히 사람은 오직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거래하려 하며, 하나님에게 요구하려고만 할 뿐,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다가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닥치면 바로 하나님에게 관념과 오해, 원망을 가질 것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무척 심각하지 않겠느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길을 걷느냐? 너희가 이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다고, 적잖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할지라도 사실 너희는 여전히 떡으로 배만 불리려고 하나님을 믿는 길을 걷고 있다. 만약 마음속으로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화(禍)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됐다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바쳤든,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상관없이, 정말 욥의 시련이 임하여 하나님이 네 모든 재산을 가져가고 심지어는 네 생명까지 끝내려 할 때,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네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른 태도를 지닐 수 있겠느냐? 이 질문에 답하기가 쉽겠느냐? 이것이 바로 너희 앞에 놓인 큰 난관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중에서) 딱 제 상태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어요. 왕하오 형제님이 다 버리고 오랫동안 하나님께 헌신하고, 본분 이행에 책임감도 넘쳤는데, 큰 화를 당하고 죽을 가능성까지 보일 때 저는 곧바로 제 생각부터 했었죠. ‘나도 그동안 많이 헌신했는데 어느 날엔가 왕하오 형제처럼 하나님을 믿고도 복은커녕 화를 입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했었거든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다 버리고 헌신하는 사람에게 왜 상이 아니라 무자비한 화가 임하게 하시냐는 원망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헌신하던 열정이 전보다 확 식었고, 본분에 존재하는 부족함과 치우친 부분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려는 마음이 없어졌고, 인재 육성 사역도 외면한 채로 마음은 하나님께 대항하고 맞서고 있었어요. 저는 교회 형제가 화를 입은 일로 하나님께 원망했던 건 제가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복과 은혜를 받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다 버리고 헌신한 사람이 은혜와 축복이 아닌 화를 입는 모습을 보게 됐을 때 저는 곧바로 본분을 이행하려는 마음이 사라졌고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경계하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었어요. 보니까 전 떡으로 배를 불리려고 하는 기복 신앙의 종교인과 다를 게 없었어요. 진리를 추구하거나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서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는 게 아니었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도 없었어요. 기꺼이 제 모든 걸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기지 못했던 거예요. 왕하오 형제님에게 닥친 그 상황을 통해 복을 받고자 했던 제 마음과 잘못된 추구 관점이 다 드러난 거예요.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언젠가 정말 화를 입거나 사망이 다가 올 때 저는 분명 불평할 거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죄짓는 행동을 하겠더라고요. 만약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면 정말 천벌 받게 되는 거잖아요. 이런 걸 생각하니까 두렵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진리를 구해 제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너는 스스로가 남들과 다르다고, 하나님이 네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었다고, 하나님이 다른 누구를 내쳐도 너를 내치지 않고 다른 누구를 버려도 너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그런 생각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겠느냐? 그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억측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가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심지어 저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이 정말 임했을 때,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관념을 갖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저 은혜를 구하고 떡으로 배만 불리려 할 뿐, 하나님에게는 진노와 위엄도 있으며,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이고 사랑이며 위엄이고 진노이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의 공의 성품 속 긍휼과 사랑, 위엄과 진노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일부 사람에게는 긍휼과 사랑만 베풀고, 일부 사람에게는 위엄과 진노만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위엄과 진노는 똑같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고 사람을 보호해 줄 수도 있으며, 동시에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고 저주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이 준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빼앗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행하려는 바이다. 그러므로 만약 네가 ‘나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말이야. 하나님은 내가 괴로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차마 나를 심판하거나 형벌하지도,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빼앗아 가지도 못하실 거야.’라고 여긴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 아니겠느냐?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기 전까지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사랑을 누리려고만 한 것 아니겠느냐? 너는 늘 하나님에게 위엄과 진노도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고, 하나님이 네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 때는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지만, 하나님이 형벌과 심판을 내리고 위엄과 진노를 드러낼 때는 언짢아하며 ‘이런 하나님은 안 계셨으면 좋겠어. 이런 게 하나님의 행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또 하나님이 나를 겨냥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 이게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었으면 좋겠고,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닥치면 좋겠어. 나는 착한 사람이고,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 데다가 하나님을 오래 믿으면서 아주 많은 대가를 치렀으니 하나님이 나한테 이렇게 매정하게 대하시면 안 돼. 나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크나큰 은혜와 축복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어. 하나님은 차마 나한테 심판과 형벌을 내리지 못하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는 일방적이고 그릇된 생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너는 스스로를 피조물, 지음 받은 인류 중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릇되게도 너 자신을 지음 받은 인류와 구분하여 피조물 중에서 특별한 계층이나 부류로 여기면서 특수한 타이틀을 붙인 것이 잘못되었다. 이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 아니겠느냐? 비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이런 자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중에서) 저를 반성해 보니까 저는 이런 관념을 갖고 있더라고요. 하나님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기꺼이 버리고 헌신하는 사람한테는 당연히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야 하고,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셔야 하고, 악한 자와 적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불신파, 악마에게는 준엄한 심판과 저주를 내리시고, 강력한 벌을 내리셔야 한다는 관념 말이에요. 그래서 왕하오 형제님이 화를 당하고 목숨이 위태롭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시다는 관념을 갖게 됐어요. 왕하오 형제님은 여러 해 동안 다 버리고 하나님께 헌신했고, 지금까지 교회에서 중요한 본분을 맡아 왔고, 게다가 책임감도 넘치는 사람이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 화가 임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정말 저는 너무 교만하고 비이성적인 사람이더라고요.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한 자였지만 그런 욥에게도 하나님은 사탄의 괴롭힘을 허락하셨죠. 그래서 모든 재산을 잃고, 몸에는 악성 종기가 났지만, 욥은 화를 입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지켰죠.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하나님은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니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했죠. 비록 욥에게 닥친 건 화였지만 하나님은 그 화를 통해 욥의 믿음과 순종을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를 나타내셨어요. 사실 왕하오 형제님이 입은 화는 형제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시험이기도 했어요. 형제님이 사망의 위협을 받게 됐을 때, 형제의 부모님들은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에서 이뤄졌다면서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하심에 순종했어요. 그 후 아무런 의식이 없던 왕하오 형제님은 20여 일 만에 기적처럼 깨어났죠. 그때 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제 상상과 다르단 걸 보게 됐어요. 제 상상처럼 진실로 믿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화나 고통이 임하지 않게 무조건 지켜 주시는 게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화나 시련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을 온전케 하셨고, 또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권병과 하나님의 주재를 체험하고 알게 하셨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은혜와 복이었어요. 근데 전 소경이라 하나님의 역사를 몰라보고 그저 하나님은 왕 형제님이 화를 입게 해서는 안 된다고, 화를 입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시다고 원망했어요. 정말 너무 교만하고 무지했어요. 계속 그렇게 이해했던 저에게 만약 화가 임한다면 저는 분명 하나님을 원망할 거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대적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을 거예요. 그제야 저는 심각성을 느끼게 됐죠. 시급히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했어요.

나중에 영 생활 시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어요.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로 대하지 않기에 하나님 말씀 중 인류에게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라고 요구한 항목도 당연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대하지 않는다. … 그럼 그들은 또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다하겠느냐? 이와 관련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장부가 하나씩 있을 것이고, 그 장부 안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마음속 장부에 어떻게 계산해 놓겠느냐? 그들은 아주 자세히, 정확하게, 제대로, 열심히 계산한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장부가 아니다. 본분을 이행하기로 결정할 때, 그들은 먼저 이렇게 계산한다. ‘지금 내가 본분을 이행하려면 가정에서 가족들과 누리는 즐거움을 버려야 해. 속세에서의 앞날과 일자리도 버려야 하고. 내가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고 본분을 이행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말세에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들은 모두 큰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어. 그렇게 말씀하신 이상,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행하고 이루실 거야. 이 밖에도 하나님은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약속을 하셨어!’ 하나님 말씀을 연구한 뒤, 그는 그 말씀 중 말세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것들을 적잖이 분석하는데, 거기에 자신의 개인적인 상상과 그 말씀에 대한 분석, 연구를 통해 생긴 관념이 더해져 본분 이행에 깊은 흥미와 충동을 느낀다. 그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하겠노라고, 이 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겠노라고, 모든 육적인 즐거움과 앞날을 내려놓겠노라고 철석같이 맹세하고 다짐한다. 이렇게 기도했고 말만 봐서는 다 옳은 것 같지만, 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오직 그와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그의 다짐과 기도한 말을 들으면 불순물이 없는 것 같고, 오직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본분을 다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려는 생각뿐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해야 본분 이행을 통해 복을 받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에게 자기가 치른 대가를 보여 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자기가 치른 대가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하나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의 행동을 기억하고 마지막에 그가 원하는 앞날과 복을 줄지 계산하고 있다. … 그럼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은 무엇이겠느냐? 거래와 교환을 하는 것이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전제 조건은 ‘본분을 이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인류에게 예비된 모든 복과 이점들을 다 얻어야 한다고.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 거야.’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속셈과 야심, 욕망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하는데, 얼마간 진심이 있는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이제 막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열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진실한 믿음과 충심이 없다. 그저 그 정도의 열정이 있을 뿐, 진심을 이야기할 것은 못 된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본분 이행 태도를 통해 볼 때, 그의 내면은 거래 심리로 점철되어 있으며,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고 면류관을 얻고 상을 받는 등 이점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7)>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적그리스가 모든 일을 복받는 일과 연관 짓고 자신의 미래와 운명과 연관 짓는다고 폭로하셨는데 딱 제가 그랬어요. 제가 하나님을 믿고 조금 버리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이 말세에 사람을 구원하셔서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끄신다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앞으로 받을 복을 위해 선행을 예비하려고 헀던 거예요. 그러나 남편이 저의 신앙생활을 반대하면서 저는 신앙과 가정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는데, 저는 가정을 택하면 편하게 살 수는 있지만 육적인 누림은 잠시 뿐이고, 진실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얻게 되고 그 복은 영원한 것이니 지금 놓치면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고민 끝에 저는 꿋꿋하게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이행하기로 선택했어요. 특히 최근 몇 년간 심각한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재앙 속에서 죽어 가는 걸 보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와 대적하는 자들도 언제 대재앙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경험했잖아요. 근데 저는 매일 본분 이행하느라 바삐 보냈는데, 전염병이 그렇게 심각한데도 감염되지 않았었죠.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니 본분을 이행하는 데 더 기운이 났어요. 그래서 육이 힘들어도 계속 버텼어요. 전 그렇게 하면 그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 거니까 앞으로 분명 복을 얻게 될 거라고 믿었거든요. 근데 제 관념과 맟지 않게 왕 형제님이 뜻밖에 사고를 당했을 때, 저의 진짜 속마음이 드러난 거예요. 저는 형제님이 하나님을 위해 다 버리고 헌신했으니까 하나님은 형제가 화를 당하게 두시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설령 화가 닥쳐도 무사할 수 있게 지켜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진실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은 보호와 축복을 받는 다는 걸 볼 수 있고, 또 지금까지 헌신해 온 저도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어요. 근데 한참 지나도 왕하오 형제님이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니까 전 하나님에 대해 실망했던 거예요. 하나님을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왕하오 편에 서서 불공평함을 호소했고, 심지어 그동안 버리고 헌신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본분도 이행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보니까 제가 버리고 헌신했던 것은 피조물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얻어 내기 위한 거였어요. 당시 바울은 오직 면류관과 상을 위해 버리고 헌신했다는 게 생각났어요. 나중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는 말을 했죠. 지금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하는 관점은 바울과 다를 게 없었어요.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해서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헌신한 대가로 하나님께 축복을 얻어 내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어요. 온통 이익과 거래뿐이었어요. 그러한 대가와 헌신은 하나님에 대한 진심과 충성심이 없는 거고 오히려 하나님을 기망하고 이용하는 거잖아요. 전 정말 간사하고 사악한 존재였어요. 갈수록 큰 재앙이 닥치는데, 진리를 제대로 추구하지 않고 제 잘못된 추구를 바로잡지 않고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제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겠더라고요. 그럼 결국은 대재난 속에서 징벌받는 일밖에 없잖아요.

그 후에 저는 어떻게 실행해야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했다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종종 되새겨 봤어요. 어느 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는데, 크게 격려됐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은 가장 정당한 일이다. 이는 인류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정의로운 일이다.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창조주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권세하에 살고, 하나님의 모든 공급과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므로 마땅히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행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고상한 일이다. 세상의 어떤 일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없으며, 지음 받은 사람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없다. 땅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창조주께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상의 조류를 좇지 않고, 하나님의 인솔과 인도에 순종하며, 오로지 창조주의 말씀을 듣고, 창조주가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말씀대로 살아갈 뿐이다. 이는 가장 진실되고 힘 있는 증거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훌륭한 증거다. 한 피조물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창조주를 만족게 할 수 있는 것은 인류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항간에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져야 할 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어떤 일을 맡기든, 피조물은 마땅히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인류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자 영광스러운 일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기념할 만한 일로, 긍정적인 사물이다. …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 왔으면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는 지극히 올바른 일이며, 사람이 다해야 할 책임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이런 전제하에 인류 가운데서 더 큰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한층 더 깊은 사역을 했다. 그것은 어떤 사역이겠느냐? 바로 인류에게 진리를 공급하여 인류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더는 사탄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완전히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본분을 이행하게 하여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성과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7)> 중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과 책임에 대해 깨닫게 됐어요. 온 인류가 세상의 시류를 좇아 누리는 이 시대에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를 얻고 하나님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받고 지난 날 알지 못했던 진리를 많이 알게 된 건 하나님의 은혜이고 저에게는 행운이잖아요. 제가 창조주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건 자식이 부모에게 자신의 책임을 다 하는 것처럼 당연한 거잖아요. 제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제 책임을 다하는 건 하나님께 칭찬받을 일이자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거죠. 과거 노아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방주를 만든 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임과 같은 거죠. 근데 전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했어요. 오직 복을 받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서 조금 버리고 헌신한 것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면서 좋은 종착지와 천국의 상을 바랐잖아요. 그런 대가와 헌신에는 온통 이익과 거래가 가득한데, 이는 하나님의 염증을 사고 정죄받을 일이죠. 그러니 그런 형태로 마지막까지 믿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을 수 없죠. 이걸 깨닫게 됐을 때 저는 후회하고 자책하게 됐고, 이렇게 추구하는 저 자신을 증오하게 됐어요. 전 그저 피조물이니까 헌신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건 당연한 거고, 이는 제 책임인 거잖아요. 근데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축복과 상을 요구하겠어요? 그 뒤로 저는 진리를 잘 추구하고 본분 이행에서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데 집중하면서 복을 받든 화를 입든 다 하나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따르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제 본분을 이행하기로 했어요. 그게 삶의 근본이자 가치니까요. 이걸 알게 된 뒤로 저는 더 이상 제 결말과 종착지를 위해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마음도 훨씬 홀가분하고 자유로워 졌어요.

예전에는 자꾸 화를 입거나 환난이나 시련을 당할까 봐 걱정했거든요. 전 그게 안 좋은 거라고 여겼으니까요. 근데 이제는 알게 됐어요. 화가 임할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을 갖추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심과 증거를 굳게 지킨다면 그건 사람이 온전케 되는 것이자 전화위복이 되는 거였어요. 욥이 시련과 환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지킨 것처럼요. 욥은 그로 인해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잖아요. 물질적으로 곱절이나 되는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행운까지 누렸잖아요. 겉으로 봤을 때, 그 당시 욥이 당한 건 큰 화고, 무자비한 강탈이었지만, 사실 그건 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어요. 근데 욥의 아내는 그렇지 못했어요. 욥이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을 부인하고 버리라고 함으로 수치의 표가 되었어요. 이런 일을 통해서 똑같이 화를 당하는 일을 겪어도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한테는 온전케 되는 기회가 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복받기만을 바라는 사람한테는 드러나고 정죄받고 도태되는 계기가 되는 거였어요. 복 받기를 바라는 속셈에 지배를 받은 사람들도 겉으로 보면 정말 다 버리고 헌신하고, 하나님 집에서 중요한 사역을 맡고 있지만, 정작 중공에 잡혀서 목숨이나 자기 이익에 위협과 박해가 가해질 때에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는 유다로 전락하여 구원받을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리죠. 근데 어떤 형제자매들은 마찬가지로 중공에 잡혀서 고문을 당하지만, 굳건하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지켜 죽어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유다가 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정말 간증이 있는 거고, 그게 바로 전화위복인 거죠. 이걸 깨달은 후에 지금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제 미래와 종착지에 관련되는 문제가 생길 때 저는 의식적으로 복받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하심에 순종하려고 노력해요. 왕하오 형제님이 당한 화가 저한테는 제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이기도 했어요. 또 제가 시련 속에서 실패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미리 그에 관한 진리를 갖출 수 있는 기회가 됐죠. 정말 하나님의 구원은 너무 실제적이에요. 이제는 지금까지 제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가졌던 속셈과 불순물에 대해 조금 알게 됐고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얻는 건 많은 은혜를 받는 것보다 가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진리 추구를 중시하는 거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거죠. 종국에 복을 받고 못 받고는 그저 하나님의 지배에 따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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