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미덕이 사람됨의 원칙일까요?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아주 인상 깊은 글을 보았습니다. 공융양리(孔融讓梨)의 이야기였지요. 공융(孔融)은 형과 아우에게 가장 큰 배를 양보하고, 자신은 가장 작은 것을 가져가 부친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삼자경≫에도 기록되었죠. 당시 제 눈에 이 사람의 성품이 얼마나 훌륭해 보였는지 저도 꼭 이런 어린이가 되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저는 맛있는 음식이나 재미난 장난감이 생기면, 공융을 본받자는 생각에 제가 갖고 싶은데도 이것들을 언니와 동생에게 양보했습니다. 한 번도 제가 갖겠다고 다투지도 않았고요. 그 때문에 제 자매들 모두 저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특히 어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저를 칭찬하며 다른 아이들에게도 저를 본받으라고 했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인품이라고 더욱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저는 형제자매와 지내면서 여전히 이런 식으로 행동했습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생활 속에서도 저는 늘 다투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항상 다른 사람에게 우선권을 양보하곤 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고, 모두가 저를 친해지기 쉽고 이기적이지 않으며,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죠. 그래서 저 자신의 이런 행동에 더욱 만족하게 되었고, 스스로 인성이 좋다고 줄곧 자부해 왔습니다. 그러다 어떤 일을 통해 드러나면서 저는 비로소 일을 바라보는 저의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2022년 1월, 복음 사역의 필요로 복음 전도자와 양육자를 많이 찾아야 했습니다. 그 일로 저는 쉴 새 없이 여기저기 다니며 양성할 수 있는 양육자를 찾았습니다. 간혹 양육에 적합한 형제자매가 한 발 먼저 복음 전도자에게 발견되어 데려가 버린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빴지만, 대놓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다들 저더러 이기적이라고, 사람을 놓고 다툰다고 할까 봐서요. 저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양육 집사에게 일부러 메시지를 보내 양육에 적합한 후보자를 복음 전도자가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로 인해 양육 집사는 복음을 전하는 형제자매들에게 편견이 생겨 조화롭게 협력할 수 없게 되었죠. 이 사실을 안 윗선 리더는 제가 한 그 말들이 바로 이간질하는 것이며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것이라고 폭로하며 저를 아주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책망과 훈계를 받고 저는 마음이 너무 괴로웠지만, 저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식도, 반성도 없었습니다.
그 후 저는 라이스(Lyse)라는 자매가 자질과 이해 능력이 매우 뛰어나 양육 사역에 맞춤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리더를 찾아가 이 자매에게 새 신자 양육을 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복음 전도 쪽에서도 급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교회 리더는 라이스를 복음을 전하러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속상한 마음에 당장 리더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형제자매들이 저를 매우 이기적이고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죠. ‘아니야, 가면 안 돼. 그래야 내가 너그럽고 인성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그러고는 불만을 꾹 참고 위선을 떨며 복음 전도든 새 신자 양육이든 모두 교회 사역 아니냐며 라이스에게 잘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또 교회 리더가 제롬(Jerome) 형제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가 자질도 훌륭하고 이해도 순수하다 하더군요. 저는 원래 이 형제를 새 신자 양육자로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교회 리더는 자기가 벌써 그를 복음 전도자로 보냈다는 겁니다. 정말이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 라이스 자매를 복음 전도자로 보냈는데, 어떻게 이번에도 또 그쪽으로 사람을 보낼 수 있어? 우리 양육 사역에도 사람이 많이 부족한데 말이야.’ 그래서 저는 상황을 교회 리더에게 얘기했습니다. 제 얘기를 듣더니 리더가 그러더군요. “기왕 양육 사역에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하니 제롬 형제를 그쪽으로 데려가세요.” 하지만 리더가 이미 그 형제를 복음 전도 쪽에 보낸 상황에서 제가 다시 그를 데려온다면 복음 전도자들이 저를 이기적이라고, 좋은 사람을 제 손아귀에 틀어쥐고 안 놓아 준다고 할까 봐 걱정됐습니다. ‘됐어. 그는 그냥 복음 전도 쪽으로 보내자. 그래야 내가 인성도 좋고, 남을 배려하는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보일 거야.’ 그래서 저는 그룹 대화방에 제롬이 훌륭한 복음 전도자가 될 거라는 메시지와 함께 축하하는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꾸며 낸 모습이었고, 당시의 제 기분은 엉망인 데다 불만투성이였습니다. ‘리더는 좋은 인재가 생기면 어떻게 늘 복음 사역만 생각하는 거지? 우리 쪽의 현실적인 어려움은 신경도 안 쓰잖아.’ 저는 생각할수록 억울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일을 맞닥뜨렸습니다. 리더가 제게 최근에 양성한 인원을 보고해 달라는 거였죠. 인원수를 보니 복음을 전하는 형제자매가 양성한 인원이 우리가 양성한 양육 인원보다 많더군요. 이번에는 정말이지 더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만과 억울함이 한꺼번에 폭발해 버렸죠. ‘그들이 벌써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양성했다니. 저는 라이스와 제롬까지 그들에게 양보했는데,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현재 복음 전도 인원은 양육 인원보다 많았습니다. 앞으로 늘어날 새 신자에 비해 양육 인원이 단출하니까 압박감이 너무 컸습니다. 그리고 리더에 대해서도 그들이 복음 사역만 중시하고, 양육 사역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편견도 생기더군요. 생각을 거듭할수록 괴로워서 한쪽 구석에 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복음 집사가 그룹 대화방에서 교회 리더와 새 신자 상황에 대해 열띤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저 자신이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지고 마음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룹 대화방에서 나가 버리고만 싶었죠. 그날 점심 때 저는 괴로운 나머지 밥도 먹지 않고 혼자 침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답답해서 병이 날 것 같았죠. 옆에 있던 자매가 제 내적 상태를 알고 그러더군요. 제가 할 말이 있는데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굉장히 겸손한 사람인 줄 오해했다고, 그 덕분에 사람들이 대단하게 본 거라고요. 자매의 말에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제야 저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보았지요. 『너희는 대체 어떤 자가 바리새인인 줄 아느냐? 너희 주변에 바리새인이 있느냐? 그들은 왜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것이냐? ‘바리새인’이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 바로 외식한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가식적이고 위장한다. 어떻게 위장하느냐? 훌륭한 사람인 양, 선하고 긍정적인 사람인 양 위장한다. 사실, 그가 훌륭하고 선하고 긍정적인 것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 가식이라고 하면 모든 모습과 드러내는 것이 거짓되고 위장한 것으로,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진실한 면은 어디 있느냐? 드러내지 않고 속에 깊이 감춰둔 것이다. 겉모습은 전부 위장한 것이고 모조리 거짓된 것이다. 이는 사람만 속일 수 있을 뿐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한다. …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그의 경건함과 겸손함은 실은 가짜다. 그의 포용과 인내, 사람을 향한 사랑은 꾸며 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도 거짓된 것이다. 사람은 그를 성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성결함 역시 가짜다. 진정으로 성결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전부 거짓된 것으로, 전부 꾸며 내고 포장한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듯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연기한 것이다. 사람 뒤에서는 전부 건성으로 일을 하는데, 충성심이라고는 전혀 없다. 또한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가정과 직장을 버렸지만 뒤에서는 무엇을 하겠느냐? 교회에서 개인의 사업과 경영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역한다는 기치하에 교회 밥만 먹고 제물을 훔쳐 먹는다…. 이런 자들이 바로 외식하는 현대판 바리새인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생명 성장의 여섯 가지 기준> 중에서),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며, 네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서 도움을 받고 수확을 거둔다면 이는 양쪽 모두에게 이로운 일 아니겠느냐? 만약 전통문화의 사상에 구속되어 살아가면서 너도 위장하고 그도 위장한다면, 너는 점잖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그는 연신 굽실거리면서 서로 꾸민다면, 둘 다 좋은 인물은 아닐 것이다. 온종일 굽실거리고 예의를 차리면서 솔직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좋은 행위’만을 살아 낸다. 겉으로 볼 때는 규범화된 행위 같지만, 그것은 전부 외식하는 행위요, 사람을 기만하고 미혹하는 행위이자 사람을 속이는 행위이다. 그들에게서는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도 들을 수 없다. 만약 그들과 친구가 된다면 마지막에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는 그들의 좋은 행위에서 어떤 이로움도 얻지 못한다. 그저 위장하고 기만하며, 서로 속고 속이는 법을 배울 뿐이다. 결국 너는 네 인격과 존엄성이 심각하게 모욕받았다고 느끼겠지만, 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겉으로 점잖고 예의 바르고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양 행동하면서 남의 흠집을 잡아내지 않고, 사람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으며, 인내하고 포용할 것이다. 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넓은 도량을 보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띨 것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수련해야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느냐! 자신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피곤하지 않겠느냐? 자신에게는 분명 그러한 사랑이 없는데도 크게 사랑하는 척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외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너는 점점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고, 다음 생에 태어나면 우마나 개돼지가 될지언정 사람이 되지는 않겠다고, 사람은 너무 가식적이고 못됐다고 생각할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3)> 중에서) 하나님은 전통 사상에 의지해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오로지 고통과 속박, 외부와의 단절밖에 없음을 폭로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입은 해악도 컸으니까요. 특히 “자신에게는 분명 그러한 사랑이 없는데도 크게 사랑하는 척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외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저는 더욱 부끄러웠죠. 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분명 그렇게 관대하지도 않으면서 아주 관대한 척했고, 교회 사역을 고려하지 않으면서 교회 사역에 매우 신경 쓰는 척했습니다. 새 신자 둘을 복음 전도 쪽에 양보한 후 속으로는 분명 달갑지 않은데도 억지로 웃어 보이며 그들이 복음 전도 쪽으로 갈 수 있어서 기쁘다는 메시지까지 보냈으니까요. 정말 너무도 거짓되고 위선적이었죠! 하나님 말씀은 바리새인이 바로 외식하는 자들로, 늘 자신을 포장한다고 폭로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인성이 좋아 너그럽게 참을 줄 알고 겸손하고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농락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와 밥그릇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들의 본질은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독사와 같은 부류라고 정죄하시며 그들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요.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 보니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의 거짓과 위장이 바리새인들과 똑같았으니까요. 이 몇 번의 인사 배정에서 제가 줄곧 다투지도 빼앗지도 않는 것처럼 행동한 것은 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입으로는 언제나 교회의 이익을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실 속으로는 저 자신의 이미지를 고려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형제자매들이 저를 이기적이고 인성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교회 사역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할까 봐 걱정돼서 어쩔 수 없이 자제했던 것이죠. 겉으로는 제가 도량이 넓어 참고 양보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제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원망도 많았습니다. 교회 리더와 복음 집사에 대해 편견까지 생겼는데, 이런 생각들을 저는 또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꽁꽁 숨겼습니다. 그래야 형제자매들이 여전히 저를 인성도 좋고 교회 사역도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 생각할 테니까요. 제 속셈과 제가 드러낸 것을 반성하자 제 행동이 역겹게 느껴지더군요. 겉으로 드러나는 좋은 행동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농락하여 저 자신의 이미지를 수립했으니, 그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역겹고 혐오스러웠을 것입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고수하는 전통문화와 덕행을 해부하신 하나님의 교제를 몇 번 듣고 나서 저는 자신이 대체 어떤 전통문화 사상의 지배를 받았기에 사는 것이 이렇게 거짓되고 고통스러웠는지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통문화 중에 공융양리(孔融讓梨)의 이야기가 있다. 말해 보아라. 공융처럼 행할 수 없는 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이겠느냐? 예전에 사람은 공융처럼 행할 수 있는 이는 인격이 고결하고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 역사 이야기 속의 공융은 모두가 본받아야 할 본보기겠느냐? 이 인물이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행동, 도덕, 행위가 사람들 마음속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그의 행동을 몹시 추앙하고 거기에 동조하며 마음속으로 그의 덕행에 탄복을 금치 못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0)> 중에서), 『지식인들은 전통문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전통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수많은 사상과 관점을 마음속에 수용해 긍정적인 사물로 대하며, 심지어는 몇몇 유명한 말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이렇게 인생의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전통문화는 유가 학설을 대표로 한다. 유가 학설은 일련의 사상과 이론으로, 주로 전통 도덕 문화를 널리 퍼뜨리며, 역대 통치 계급으로부터 숭배받았다. 공자와 맹자 등은 그들에게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았다. 유가 학설은 처신할 때 인의예지신을 지켜야 한다고, 어떤 일이 닥치든 먼저 마음을 가라앉혀 참고 인내하며 할 말이 있으면 찬찬히 해야 한다고, 싸우거나 다투지 말고 양보하는 법을 배워 모두에게 존중받아야 품격 있게 처신하는 거라고 주장한다. 이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남들 위에 놓으며,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인내하고 양보하고 포용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지식의 ‘역할’이 무척 크지 않으냐! 이 부류는 거짓 군자와 매우 비슷하지 않으냐? 사람이 배운 지식이 많아지면 거짓 군자가 된다. 이 기품 있는 선비들을 한마디로 형용하면 ‘우아한 품격’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들은 신사들의 우아한 품격을 열심히 배우고 따라 한다. 함께 말하고 어떤 일을 상의할 때 그들은 어떤 말투와 방식을 취하겠느냐? 표정은 더없이 온화하고, 말은 우아하고 함축적이며, 모두 자기 관점만을 이야기할 뿐, 다른 이의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상대를 상처 주지 않는데, 솜과 솜이 부딪히는 것처럼 말투가 더없이 온화하며 뜨뜻미지근해서 듣는 사람이 다 역겹고 초조하고 화가 날 정도다. 사실 그들은 아무도 명확한 관점을 말하지 않고, 아무도 상대에게 승복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위장에 매우 능해서 이렇게 작은 일까지 위장하고 포장하며, 아무도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서민들 앞에서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어떤 이미지를 꾸며 내겠느냐? 서민들 눈에 그들은 겸손하고 예의 바른 군자로 보이려 한다. 군자란 남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람, 사람들이 존경하고 숭배하는 대상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일반인보다 높은 식견을 갖고 있고, 일반인보다 사리 분별이 잘된다고 생각하기에 다들 일이 생기면 그들을 찾아가 물어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결과로, 사람들에게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것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1)> 중에서) 하나님 말씀은 단번에 정곡을 찔러 제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저는 왜 거짓된 좋은 행동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 따랐을까요? 알고 보니 ‘공융이 배를 양보하다’와 같은 전통문화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이런 사상에 의지해 살아왔고, 사람들이 저를 착한 아이로 봐 주기를 바라며 제가 좋아했던 수많은 장난감과 간식을 언니와 동생에게 양보했습니다. 다 커서도 저는 여전히 어딜 가나 겸양의 태도를 보이며 도량 넓은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도 마음이 썩 내켰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사람이라야 훌륭한 인품에 예의 바르고 겸손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높은 평가와 존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본심을 억누르며 참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저는 여전히 이러한 전통 사상을 진리로 여기며 지켜 왔습니다. 두 차례나 인원을 제공하는 일에서 저는 무조건 참고 양보했습니다. 양육 사역에 분명 인원이 부족한데도 저는 사심 없이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며 양육에 적합한 형제자매 두 명을 모두 복음 전도 쪽에 보내 주었고, 그렇게 하고 나니 제가 매우 고상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사실 뒤에서는 인원 부족 문제로 소극적이 되어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교회 리더에 대해서도 편견이 생겼고요. 그러다 보니 결국 양육 사역에 차질을 빚었습니다. 저의 이 같은 ‘양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위해 공융과 같은 고상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교회 사역에 지장을 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영락없는 위선자이죠. 제가 정말 교회 사역을 걱정했다면 당연히 양육 사역의 실제 상황에 비추어 인원을 보낼지 말지 따져 보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체면을 지키기 위해 전혀 원칙대로 실행하지 않았고, 양육 사역이 이미 인원 부족 때문에 지장을 받고 있는데도 ‘대범하게’ 사람을 보내 준 것입니다. 저의 이런 행동은 양육 사역에 지장을 주는 것을 대가로 저에 대한 타인의 호평을 산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위선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이 드러낸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너무나 위선적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 한 대목을 보고 매우 감동 받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덕행 측면의 말이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대체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것은 긍정적인 사물조차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그것은 대체 무엇이겠느냐? 단언컨대, 그 덕행의 말은 사람을 미혹하는 사탄의 사설이자 궤변이다. 그것은 본래 사람이 갖추어야 할 진리 실제가 아니며, 정상 인성으로 살아 내야 할 긍정적인 것도 아니다. 그 덕행의 말은 가장하고 위장하고 거짓되고 기만하는 것으로, 인위적인 행동에 속한다. 그것은 결코 사람의 양심과 이성 그리고 정상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통문화 중 덕행과 관련된 다양한 말은 전부 황당하고 그릇된 사설이자 궤변이다. 최근 몇 번의 교제를 통해 사탄이 제창하는 덕행 측면의 말에 오늘은 철저히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것이 긍정적인 사물조차 아니라면, 사람은 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왜 그러한 사상 관점으로 살 수 있느냐? 그 덕행의 말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매우 잘 부합하여 사람이 그것을 보고 탄복하고 동조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이 덕행의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설령 실행할 수 없을지라도 마음속으로 그것을 옹호하고 숭배해 마지않는다. 이렇게 사탄은 갖가지 덕행의 말로 사람을 미혹하고,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통제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각종 덕행의 말을 맹신하고 숭배하며 그 덕행의 말로 자신을 품위 있고 고상하고 선량하게 위장하여 남들의 우러름과 찬양을 얻어 내려는 목적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덕행과 관련된 갖가지 말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덕행 측면에서 일종의 행위나 인품을 드러내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행위나 인품은 몹시 고상해 보여 사람들에게 크게 존경받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마음속으로 매우 동경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생각지 못한 것은 그 덕행의 말은 결코 정상인이 마땅히 지켜야 할 사람됨의 원칙이 아니라 위장해 낸, 각종 외식 행위라는 것이다. 그것은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서 벗어났고, 정상 인성의 바람에 어긋난다. 사탄은 거짓되고 꾸며 낸 덕행의 말로 사람을 미혹하여 사탄을 숭배하고, 외식하는 소위 ‘성인’들을 숭배하게 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정상 인성과 사람됨의 준칙을 평범하고 간단한 것, 심지어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 멸시하고 무시하게 한다. 이는 사탄이 제창하는 덕행의 말이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어떤 덕행의 말이든 그것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처세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아니다. 너희가 생각해 보아라. 그렇지 않더냐? 덕행에 관한 말의 본질은 사람에게 표면적으로 더 품위 있고 고상하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게 아니라 숭배나 찬양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로 볼 때, 그것은 단지 사람에게 좋은 행위로 좋은 덕행을 보이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를 통해 패괴된 인류의 야심과 사치스러운 욕망을 가리고 억제하며, 사람의 사악하고 추한 본성 본질 그리고 드러나는 각종 패괴 성품을 가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외적인 좋은 행위와 행동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끌어올리고자 하고, 사람들 마음속의 그의 이미지와 그에 대한 외부의 평가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몇 가지 면을 볼 때, 덕행의 말은 사람의 표면적인 행동과 행위로 내면의 사상 관점, 속셈과 목적, 그리고 사람의 추악한 몰골과 본성 본질을 가리는 것이다. 이것이 가려지겠느냐? 감추려 할수록 더 드러나지 않겠느냐? 하지만 사탄은 이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는다. 사탄의 목적은 패괴된 인류의 추악한 몰골과 사람의 패괴된 본모습을 가리는 데 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이 덕행 측면의 행위로 스스로를 위장하게 한다. 다시 말해, 덕행 측면의 규례와 행위로 한 사람의 겉모습을 포장하고, 한 사람의 인품, 인격을 끌어올려 다른 사람의 우러름과 찬양을 받게 하려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덕행의 말은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행위와 태도, 도덕 수준으로 그 사람의 높고 낮음과 귀천을 결정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0)>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나서 제가 이제까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전통 사상 가운데 좋은 덕행을 인성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여겼던 것이죠. 덕행을 진리로 착각해서 미덕을 갖춘 사람을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실 덕행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사람됨의 원칙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외식하는 행위로, 그 본질은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수단이자 방식입니다. 사탄은 전통문화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덕행의 기준을 심어 주어 그것을 따르게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좋은 행위로 자신을 위장하여 내면의 패괴된 추태를 감추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뭇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은 점점 더 위선적이고 간사해집니다. 저 자신을 비춰 보면 바로 이렇습니다. 저는 전통 사상이 내세우는 좋은 덕목을 제 행동의 준칙으로 삼았습니다. 겉으로는 다투지도 빼앗지도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는 사람들로부터 인성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려고 스스로 좋은 행동을 하게끔 몰아붙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저에 대해 가진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입으로는 교회 사역을 고려하는 것처럼 말했지요. 저는 정말 너무 간사합니다!
나중에 저는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덕행과 관련된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각종 말과 요구를 해부해야 한다. 어떤 것이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인지, 어떤 것이 네가 줄곧 지켜 온 것인지, 어떤 것이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와 준칙으로 삼은 것인지 해부해야 할 것이다. 그다음 네가 지켜 온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와 대조하여 그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이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와 모순되고 대립되지는 않는지 보아라. 정말 문제를 발견했다면 한시바삐 그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이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어떤 부분이 황당한지를 해부하여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궤변인지 알게 되고 실행의 길이 생길 것이며, 네가 걸어야 할 길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진리를 구하면 잘못을 깨닫고 올바른 길로 되돌아올 수 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5)>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저는 이런 전통문화에 기대어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먼저 이런 것들이 어떻게 잘못되었고, 황당한 점이 무엇이며 진리에 어긋나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 그런 것을 근거로 살아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분별하고 해부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제대로 안 뒤에야 그것을 버리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공융이 배를 양보하다’에서 ‘양보’는 정말 진리 원칙에 부합하나? 이 ‘양보’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상적인 인성의 덕목인가? 범사에 참고 양보하는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일까?’ 생각해 보면 바로 제가 맹목적으로 참고 양보한 탓에 양육 사역에 심각한 인원 부족이 초래된 것이었고, 너그럽고 대범하며 범사에 참고 양보하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저는 위선적인 거짓말까지 무수히 많이 했습니다. 이러한 전통 사상의 영향을 받은 저는 좋은 사람으로 되기는커녕 오히려 위선적이고 간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봐 주어서 기쁘기는커녕 그렇게 하면 할수록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이게 다 전통문화를 숭배하여 빚어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전통문화의 본질을 폭로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마 평생 속은 채로 살았을 것입니다. 저는 진리를 선포하셔서 이런 전통문화를 해부해 주심으로써 저를 소생시켜 주신 하나님께 마음속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곱씹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융양리와 같은 덕행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좋은 행위에 불과하지, 그것이 곧 인성이 훌륭하다는 말은 아니야. 그렇다면 진정으로 훌륭한 인성이란 무엇일까?’ 저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성이 좋다는 것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중용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원칙을 견지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미움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 여기저기 비위를 맞추고 능란한 처세술을 보여 주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것, 이런 것은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럼 어떤 기준이겠느냐? 하나님을 대할 때나 진리를 대할 때 순종할 수 있고, 본분이나 각종 사람과 일을 대할 때 모두 원칙이 있어야 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모두가 눈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기에 모든 사람의 실제 상황을 알고 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속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인성이 좋다고 하면서 다른 이의 험담을 하는 법도 없고, 다른 이의 이익에 손해를 입히지도, 다른 이의 재물을 탐하지도 않는다고 내세운다. 심지어 이해 갈등이 생길 때면 자신이 손해를 보면 봤지 남에게서 이득을 챙기지 않아, 모두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몸을 사리고 농간을 부리며, 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해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급해하는 것을 급해하지 않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본분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버린 적이 없고 심지어는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도 폭로하지 않으며, 어떤 원칙도 없다. 이는 어떤 인성이냐? 이는 인성이 좋은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그가 살아 내는 것과 드러내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그의 내적 상태는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의 명리를 위하는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뛰어넘고,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을 헤아리는 마음을 능가한다면, 이런 사람이 인성을 지닌 사람이겠느냐? 이는 인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얻기가 몹시 힘들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면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 속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진정으로 인성이 훌륭한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며 본분을 이행함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 그리고 진리 원칙을 견지하며 교회 사역을 지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겉으로는 누구의 원망도 사지 않고, 원칙을 안 가리고 무조건 참고 양보하며, 자신이 손해를 볼지언정 남의 덕을 보려 하지 않는 사람은, 겉으로는 품행이 훌륭해 보일지 몰라도 본분을 이행할 때는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느라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도 않고 교회의 사역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인성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지요. 저는 더 이상 전통문화에 따라 살면서 겉치레에 치중하는 가짜 호인이 되기 싫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 한 대목을 보고 그 속에서 실행 길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든 반드시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하고, 절대 남에게 거짓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해서는 안 된다. 그게 자신의 결점이든, 단점이든, 자신에게 있는 문제점이든, 혹은 패괴 성품이든 모두 솔직히 교제하고, 포장하지 마라. 자신의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은 생명 진입의 첫걸음이자 가장 공략하기 힘든 첫 번째 관문이다. 이 관문을 공략한다면 진리에 진입하기 쉬워진다. 그 한 걸음을 내디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네가 마음을 열고 너의 모든 것, 즉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것을 모두 드러내 남들에게, 또 하나님에게 모조리 보여 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숨기거나 가리거나 위장하지 않고, 간사하게 행동하거나 기만하지 않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솔직하고 진실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너는 빛 속에서 살게 되고, 하나님이 감찰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네가 원칙 있고 투명하게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자신의 명예와 체면, 지위를 지키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쓰거나 자신이 잘못한 일을 위해 감추거나 꾸밀 필요가 없다. 이러한 부질없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것을 내려놓는다면 너는 아주 홀가분하게, 속박도 고통도 없이 온전히 빛 속에서 살 수 있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 말씀에서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위장하여 사람들에게 허상을 보여 주지 말고, 정직하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털어놓고 모두와 함께 소통해야 형제자매들도 더 잘 도와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제가 말하지도 않고, 덮어놓고 참고 양보하며 위장해 사람들은 양육 사역에 인원이 부족하지 않은 줄 알았고, 이 사역이 순조롭게 진전되고 있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저도 고통스러웠고, 교회 사역에도 해를 끼쳤죠. 그 후 저는 의식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했습니다. 어려움을 형제자매들과 명확하게 소통했더니, 그 후로는 사람들이 양육 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잇달아 알려 주더군요. 이 일로 저는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이 홀가분하고도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반면 전통문화대로 사는 것은 패괴를 점점 심화시키고, 갈수록 거짓되고 간사해져서 점점 더 고통스럽게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진리를 실행해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진정한 좋은 사람이 되어 진짜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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