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한 성품을 해결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2025.8.8

중국 리징신(李敬心)

저는 종종 밖에 나가 교회 영상 제작에 쓸 사진과 영상 자료를 촬영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원칙에 따라 촬영한 자료를 열심히 선별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촬영한 자료가 많아졌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촬영하고 집에 돌아오면 몹시 피곤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자료를 선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선별하려면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 하고, 각 자료의 사용 가치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진은 한 장 한 장 선별하고 판단해야 하므로, 저는 너무 피곤하다고 느낀 나머지 자료 선별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료를 선별할 때 대충 훑어봤고, 배경이 너무 난잡하지 않아 미관에 영향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혼자 판단하기 애매한 자료는 그냥 책임자에게 넘겨 선별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제가 원칙을 찾아 판단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머리를 쓰거나 애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촬영을 마치고 자료를 대충 훑어본 뒤 책임자에게 넘긴 적이 있습니다. 책임자는 확인한 후에 제가 제출한 자료의 3분의 1이 기준 미달이라고 했습니다. 화면이 깔끔하지 않거나, 초점이 맞지 않거나, 구도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제출한 자료를 확인하는 건 다른 사람의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절반의 시간이 더 걸린다고 했습니다. 책임자의 말을 들은 저는 너무 창피했고, 마음속으로 큰 가책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 문제에 대해 별다른 인식이 없었고, 화면 요구 수준이 비교적 높은 자료를 촬영할 때면 계속해서 저도 모르게 건성으로 했습니다. 이런 자료는 촬영 각도를 정교하게 조절하고 촬영 방향을 계속 바꿔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건 너무 번거롭다고 느끼면서 얼추 비슷해 보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사역을 하면서 진리를 구하지 않은 탓에 촬영한 자료 중 일부는 원칙에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고, 일부는 초점이 맞지 않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분명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일인데도 재작업을 하고 보충 촬영까지 해야 했습니다. 얼마 후, 제게 엄한 책망과 훈계가 임했습니다. 책임자는 제가 그동안 제멋대로,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 것과 촬영한 자료를 계속 재작업하여 많은 인력과 물자를 낭비한 것을 책망하며, 이런 행동은 촬영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니 스스로 본분을 대하는 태도를 잘 반성하라고 했습니다. 책임자가 돌아간 후, 저는 마음이 몹시 괴롭고 큰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가 스스로 인식하고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는 상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며 기도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제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을 쓰지 않고 진리 원칙도 구하지 않은 채,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하고, 하기 쉬운 대로 한다면, 이것이 어떤 마음가짐이겠느냐? 이것은 건성으로 대하는 것이다. 본분을 대할 때 충성심도, 책임감도, 사명감도 없다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를 수 있겠느냐?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르지 못하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절대로 불가능하다. 본분을 이행할 때마다 마음을 쓰지 않고 온 힘을 다하지 않으려 하며 놀이를 하듯 가볍게 얼렁뚱땅 넘어간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본분을 이행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결국 사람은 네가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서 책임을 다하지 않고 건성으로 임하며 형식적으로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너는 도태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전체 과정을 감찰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느냐? (이 사람은 부탁할 가치도 없고 믿을 가치도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라는 사람이 믿을 가치도 없고 도태시켜야 마땅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간에 그것이 중요한 본분이든 일반적인 본분이든, 그 일을 네게 맡겼는데 네가 온 마음을 다하지 않고, 네 책임도 다하지 않으며, 그 일을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신의 본분과 의무로 여기지도 않고, 항상 건성으로 대한다면 곤란하다. ‘믿을 가치가 없다’는 일곱 글자는 네 본분 이행의 성질을 규정한 것이다. 네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르지 못해 도태됐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너라는 사람의 인품이 나쁘다고 말한 것이다. 네게 한 가지 일을 맡겼는데 네가 이런 태도로 대하고 이런 방식으로 처리한다면, 앞으로 네게 본분 이행을 맡길 수 있겠느냐? 네게 큰일을 맡길 수 있겠느냐? 절대로 불가능하다. 네가 진실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네게 안심할 수 없을 것이고, 항상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곤란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면 본분 이행의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해야 실행할 길이 생긴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폭로하신 것이 바로 제 상태였습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 절반의 에너지만 쓰고,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쓰지 않으며, 건성으로 하고 무책임한 이런 사람은 인품이 좋지 않고, 맡길 가치도, 신뢰할 가치도 없습니다. 오늘날 제가 좋은 기회로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에서 본분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저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높여 주심입니다. 하지만 저는 본분을 할 때 잔꾀를 부리고 요령을 피우며 건성으로 일을 처리했고, 늘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으며 원칙에 따라 일하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선별할 때는 형식적으로 하고, 판단하기 애매한 것에 맞닥뜨려도 원칙을 구해 진지하게 판단하지 않고 바로 책임자에게 넘겨 처리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책임자는 제가 촬영한 자료를 선별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했고, 저에게 그 자료에 있는 문제점까지 지적해 주어야 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들에게 불필요한 부담만 안겨 준 셈입니다. 책임자의 질책에도 저는 약간의 가책만 느꼈을 뿐, 그 후에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요구 수준이 비교적 높은 자료를 촬영할 때도 저는 계속 일을 편하게 하려고만 했으며, 하나님 집의 요구와 원칙에 따라 촬영하지 않았습니다. 매번 얼추 비슷하게만 촬영한 바람에 촬영된 자료 중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았습니다. 책임자가 확인해야 할 작업량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저도 재작업을 해야 했고, 일부 급히 필요한 자료는 재작업으로 인해 진도가 늦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 행동은 전혀 본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이며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제게 이 사역을 맡겼지만, 저는 잔꾀를 부리고 요령을 피우며 건성으로 일을 처리했고, 사역의 성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저는 일을 맡길 가치도, 신뢰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하나님께서 노아가 하나님의 부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교제하신 말씀을 보고 저 자신에 대해 조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그렇게 많은 도(道)를 들은 적이 없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말씀을 많이 선포하지 않았으므로 노아는 분명 많은 진리를 깨닫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또 노아는 현대의 과학이나 지식을 알지도 못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 인류 가운데서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느 누구와도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즉, 그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줄 알았으며,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준행하고 지켜야 할지, 사람의 본래 위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믿음과 순종을 보였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이 몇 가지 단순한 신조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노아는 하나님이 그에게 한 부탁을 완수하기에 충분했다. 그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 그가 지속한 시간은 몇 달도, 몇 년도, 몇십 년도 아니었다. 백 년이 넘어갔다. 이 수치가 놀랍지 않으냐? 노아 외에 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누군가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아가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겠느냐? 왜 노아는 할 수 있었겠느냐?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겠느냐? 누군가는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럼 노아에게는 패괴 성품이 없었겠느냐? 어째서 노아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지금의 사람들은 할 수 없겠느냐? (지금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대하거나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대하지 못하겠느냐?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얼마 듣지도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어떻게 생겨나겠느냐? (인성과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 사람의 인성에 가장 소중한 두 가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첫 번째는 양심이고, 두 번째는 정상 인성의 이성이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는 것, 이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자 한 사람을 평가하는 최소한의 기준,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이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진리를 듣고 깨달았다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의 사람들을 노아와 비교했을 때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이겠느냐? (인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성이 없다면 그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짐승, 마귀입니다.) 짐승, 마귀라는 말이 듣기 거북할지는 몰라도 사실에 부합한다. 좀 우아하게 말하자면 인성이 없다는 것이다. 인성도, 이성도 없는 자는 사람이 아니며, 짐승보다도 못하다. 노아가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노아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는 마음에 깊이 새기고 하나님의 부탁을 인생 최대의 중요한 일로 삼아 행하고 굳게 믿으며 백 년 동안 마음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진정한 사람이고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방주 만드는 일을 노아에게 맡긴 것이다. 노아처럼 그렇게 인성이 있고 이성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에 두 번째를 찾기 힘들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2 노아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였는가(1)> 중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부탁을 대할 때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고, 온 힘을 다해 한결같이 백이십 년을 지킨 끝에 방주를 만들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했습니다. 노아는 양심과 이성, 인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생각해 보면, 저는 자료를 선별할 때 대충 훑어보고 형식적으로 했을 뿐,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할 수 있을지, 자료의 어느 부분이 원칙에 맞지 않는지, 제가 더 발전시켜야 하는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제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분을 성가신 짐으로 여기고, 복잡한 일은 책임자에게 떠넘긴 채 저는 한쪽으로 물러나 편안함만 누렸습니다. 이런 제게 어디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 저는 본분을 할 때 어떻게 하면 힘을 덜 들일까만 생각했고, 하나님 집의 요구와 제 행동이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역을 대하는 태도는 세상 사람이 사장을 위해 일하는 것만도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누렸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지만, 저는 피조물의 책임조차 다하지 못하고 교회 사역에 방해와 교란만 가져왔습니다. 저는 속으로 몹시 후회하며 본분을 건성으로 대하는 태도를 바로잡고 제대로 본분을 하기를 바란다며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본분을 할 때 의식적으로 자주 발생했던 문제들을 피하려고 했고, 자료를 선별할 때도 더 진지하게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책임자는 제게 영상 한 편을 촬영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너무도 기쁜 마음에 이번에는 잘 준비해서 좋은 작품을 촬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술적인 면에서 아직 부족한 점이 있어 자료를 찾아 배우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자발적으로 배우고 훈련했지만, 며칠 후 촬영한 영상이 만족스럽지 않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배우고 연구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번거롭다고 느껴, 그냥 원래의 작품을 조금 수정해서 어느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상을 제작한 후 파트너 형제에게 보여 주자, 형제는 영상 전체가 매끄럽지 않고 연결성이 떨어진다며 추가 촬영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너무 번거롭다고 느껴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촬영 시간이 좀 촉박하니 그냥 이대로 제출하죠. 제 기술은 이 정도밖에 안 돼요.” 형제는 제가 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책임자가 제게 말했습니다. “본분을 건성으로 하고 불량한 성품이 심각하며, 작품도 정교하지 않으니 더는 맡기지 않겠어요!” 비록 짧은 한마디였지만 제 마음은 칼에 찔린 듯 아팠고, 제 몸에는 ‘건성으로 한다’는 딱지가 단단히 붙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의식적으로 건성으로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왜 변화가 없고 본분을 할 때 계속 건성으로 하는 걸까요? 그래서 저는 제가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며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나중에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야 제 문제에 대해 좀 더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경솔하고 오만하며 무책임하게 모든 일을 대하는 것은 패괴 성품에 속한다. 그것은 사람이 흔히 말하는 불량 습성이다. 모든 일에서 “대충 맞는 것 같아.”, “그 정도면 충분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마도’, ‘십중팔구’ 식의 태도이다. 형식적으로 일을 하며, 얼렁뚱땅 넘어가고, 할 수 있는 한 일을 대충 해 나가는 수준에서 만족한다. 일을 진지하게 대하거나 세심하게 할 필요도 없으며 진리 원칙을 구하는 것은 더욱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패괴 성품에 속한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를 교만함이라 해도 옳고, 방종함이라 해도 아주 적합하지만, 가장 알맞게 표현하는 어휘는 ‘불량함’이다. 불량 습성은 대다수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데, 그저 경중 정도가 다를 뿐이다. 모든 일에서 대충 건성으로 하려 하고, 기만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요령을 피우며, 시간을 적게 들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발각되지 않고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책임질 일이 없다면 얼렁뚱땅 넘어가면 돼. 일을 굳이 잘할 필요가 없어. 그러면 너무 번거롭잖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무엇이든 숙달하는 경지까지 배우는 일이 없으며 배우는 일에 전념하거나 고생하거나 대가를 지불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피상적으로만 배워 전문가 행세를 하고 다 배웠다고 생각하고 그걸로 때우려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냐? 이것이 좋은 태도겠느냐? 아니다. 한 마디로 묘사하면 ‘때우는 것’이다. 그러한 불량 습성은 패괴된 인류에게 다 존재한다. 인성에 불량 습성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어물쩍 때우면 된다는 관점과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사람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2)> 중에서) 제가 본분을 할 때 늘 진리를 구하지 않고 원칙이 없으며, 무슨 일을 하든 대충하고 대강했던 것은 바로 제 불량한 성품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본분을 할 때 늘 건성으로 하고 속일 수 있으면 속였으며, 일하는 데 원칙도 없고, 한 번도 마음을 써서 깊이 고민하려고 않았습니다. 최상의 성과를 추구하지 않고, 큰 문제가 생기거나 잘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제 행동은 그저 하나님 집에서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료를 촬영할 때처럼, 제가 좀 더 마음을 쓰고 원칙을 곰곰이 생각했다면 잘할 수 있었지만, 저는 대충 비슷한 것에 만족하고, 원칙을 모른다는 핑계로 판단하기 어려운 자료를 책임자에게 넘겨 확인하게 했습니다. 또 책임자가 제게 영상 한 편을 촬영하라고 했을 때, 저는 작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파트너 형제도 추가 촬영을 제안했지만, 그래도 저는 마음을 쏟거나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수준이면 된다고 생각하며 건성으로 넘어가려 했습니다. 제 불량한 성품이 너무 심각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늘 편한 것만 찾다 보니 촬영한 자료가 기준에 미달하고 사역의 진도도 지체했습니다. 불량한 성품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정말 남과 자신을 모두 해치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또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부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고, 이는 심각한 일이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으며,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은 당연히 완수해야만 한다. 이는 사람이 이행해야 할 가장 큰 책임으로, 목숨만큼 중요한 일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심각한 배반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유다보다 더 비참한 자로, 반드시 저주받게 되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부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최소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높여 줌이자 특별한 은혜로, 가장 영광스러운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심지어 목숨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해야 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큰 문제가 없이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눈에 띄는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도 않았으며,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도 않았다. 본분 이행에도 이렇다 할 큰 잘못이 없고, 원칙적인 문제도 없지만, 몇 년도 안 돼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파로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다. 이는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사람은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므로 문제를 간파할 수 있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줄곧 대충 건성으로 하며 회개하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되니 드러날 때가 된 것이다. 줄곧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가 본분을 계속 이행하고 있었지만 늘 잘못된 태도, 대충 건성으로 넘어가는 태도로 계속 본분을 대했다는 것이다. 공을 들이는 법이 없고, 마음을 다하는 법은 더더욱 없으며 힘을 좀 쓸 때도 그저 과정만 밟았을 뿐, 온 힘을 다하는 법이 없어 과오가 끊임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 그는 계속 회개하지 않았고 대충 건성으로 하는 태도를 바꾼 적이 없다. 즉, 그는 손으로 행하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회개하는 태도를 본 적도,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는 늘 이런 태도와 방식으로 자신의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대했다. 이렇게 완고하고 강퍅한 성품을 시종일관 고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죄스럽다거나 이렇게 대충 건성으로 하는 것이 과오이자 악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죄책감도, 미안함도 느끼지 않으며, 가책받거나 참소받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하든, 그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든,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 그의 마음은 감동받지 못하고 마음가짐의 변화나 전환도 없다. 하나님은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가망이 없다. 아무리 말해도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고, 되돌릴 수도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이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내 집에서 힘쓸 자격도 없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을 할 때 일관되게 대충 건성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책망과 훈계를 하며 관용과 인내를 베풀어도 효과를 볼 수 없고, 진실한 회개를 하게 할 수도 없고, 그가 진실로 변화하게 할 수도 없다.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게 할 수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게 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는 구제 불능인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이를 구제 불능이라고 정할 때, 그 사람을 단단히 잡고 놓지 않겠느냐?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손을 놓을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는 것은 하늘의 경과 땅의 의와 같은 당연한 이치이므로,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해 잘 해내야 합니다. 만약 본분을 가볍게 여기고 소홀히 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며, 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본분을 대할 때 마음을 다해 잘하려 하지 않고 늘 건성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간과 힘을 아낄지만 생각했고, 사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모르는 척 외면했습니다. 결국에는 사역에 방해와 교란을 가져왔고, 힘만 쓰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 시기, 책임자도 제게 본분을 잘하라며 책망하고 일깨워 주었지만, 저는 계속 완고하게 고집을 피우며 패괴 성품에 따라 일했습니다. 제 마음은 너무나 강퍅했습니다! 저는 늘 본분을 가볍게 여기고 무책임한 태도로 대했습니다. 계속 돌이키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하나님께 도태될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파트너 형제가 떠올랐습니다. 그 형제는 본분을 할 때 굉장히 마음을 썼고, 진지하게 원칙을 곰곰이 생각했으며, 촬영한 자료를 늘 반복해서 확인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고 제출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본분은 성과가 좋은 편이었고, 문제나 오류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본분을 할 때마다 늘 재작업을 해야 했고, 문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도무지 신뢰할 수 없고, 인격과 존엄도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지금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본분이 주어져 네가 힘을 들여야 할 때, 이는 네가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네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때이다. 어떤 것도 숨기거나 잔꾀를 쓰거나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여지를 남기거나 요령을 피운다면 절대 그 일을 잘 해낼 수 없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생명 진입은 본분 이행에서부터 시작된다> 중에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다하고 정직한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 태도는 훨씬 더 올바른 것 아니겠느냐? 어떻게 해야 그런 태도를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겠느냐? ‘마음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이 말이 네 실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네가 대충 건성으로 하고 싶을 때,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 마음이 분산되거나 놀고 싶을 때, ‘이렇게 하면 신뢰를 줄 수 있을까? 이렇게 하는 게 마음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일까? 이렇게 하는 게 충성심이 없는 것 아닐까? 하나님의 부탁을 저버리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자신이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본분에 충성심도 없어서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시에 속으로는 이 일이 좀 문제라고 느끼긴 했지만 진지하게 문제로 대하지 않고 얼렁뚱땅 넘겼어. 그리고 이제 와서야 그게 확실히 건성으로 대충 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임을 알겠어. 난 정말 양심도 이성도 없어!”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했다. 그러면 돌이켜야 한다! 과거에는 그릇된 태도로 본분을 이행했다. 본분을 그저 추가적인 일로 생각하며 대충 이행하고,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이렇게 건성으로 본분을 대한다면 하나님께 징계와 채찍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이런 의지를 지니고 있어야 진실로 회개할 수 있다. 양심이 편안해지고,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돌이킨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해야 실행할 길이 생긴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본분을 할 때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하며, 정직한 태도가 있어야만 본분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잔꾀를 부리거나 건성으로 하려는 생각이 들 때면 응당 스스로 반성하고, 본분에 마음을 썼는지, 책임을 다했는지, 자신이 한 일이 하나님께서 신뢰하실 만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주 자신을 반성하면 건성으로 하는 것을 줄일 수 있고, 사역에 가져오는 손실도 줄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남김없이 발휘해야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습니다.

2023년 5월, 저는 한 가지 기술적인 사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본분을 막 접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었고, 형제자매들이 피드백을 준 문제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만 알 뿐 세부 사항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제가 하나하나 직접 해 보아야 했습니다. 때로는 문제가 많아지면 또 건성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의식적으로 제 자신을 배반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한 자매의 장비에 문제가 생겨 제게 원인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 장비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실제로 조작해 보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곰곰이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해한 대로 대충 대답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답을 하고 나니 마음이 어딘가 편치 않았고, 제가 또 건성으로 대처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 제가 본분을 건성으로 해서 사역에 손실을 가져왔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만약 제가 또 건성으로 한다면 실제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그때는 또 재작업을 해야 하며, 자매가 장비를 사용하는 데 영향을 주어 사역을 지체시킬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최선을 다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한 후에 자매에게 답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 후 저는 실제로 조작하여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고, 이렇게 실행하니 마음이 무척 편안했습니다. 그 후로 잘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에 맞닥뜨리면 형제자매들과 구하고 소통하여 확인한 후에 답을 주었습니다. 한동안 이렇게 실행하니 본분을 대하는 제 태도가 바로 잡혔고, 업무 기술도 눈에 띄게 성장했습니다. 비록 지금 저는 제 패괴 성품에 대해 깊이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기꺼이 하나님께 의지하여 저의 불량한 성품을 해결하고, 기준에 맞는 본분을 이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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