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드러나 도태되는 것을 보게 된 후

2025.2.24

중국 이신(伊心)

2023년 2월에 유다가 생기는 바람에 경찰이 집까지 찾아와 신앙에 관해 조사하는 일이 생겼죠. 그때 제가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로 걷지 못하니까 끌려가지는 않았어요. 그 당시에는 아무런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위험한 요소까지 겹치면서 형제자매들이 우리 집에도 오지 못하게 됐죠. 처음에는 이런 상황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이를 계기로 저를 드러내 도태시키려고 하시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더구나 최근 2년간 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드러나 도태되기도 했으니까요. 문서 본분을 맡았던 왕타오(王濤)의 경우,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된 데다 결혼과 청춘을 포기하며 사오십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계속 객지에서 본분을 이행했어요. 근데 결국은 불신파로 드러나서 제명됐죠. 그리고 리리(李俐)의 경우,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돼 사업을 접고 신앙에 몰두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고 아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계속 본분을 이행했죠. 복음 전도에서 정말 많은 고생을 하고 대가를 치르며 사람들을 얻기도 했지만, 결국은 악인으로 드러나 제명됐고요. 어떤 사람은 경찰에 잡혀간 뒤에 유다가 돼 제명되기도 했고요. 제가 알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드러나 도태되는 걸 보면서 하나님의 사역이 정말 각기 부류대로 나누는 시기가 됐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아직 제명된 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환경을 통해 저를 도태시키신다면 그건 저를 버리시는 의미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소극적이 되고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어요.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택하신 건 구원하시기 위한 게 아니었나? 근데 막바지에 이르러 왜 계속 사람들을 드러내 도태시키는 걸까? 이러면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에 몇 명이나 남을까? 설마 이런 게 하나님의 뜻인가?’ 특히 하나님 말씀에서 본분 이행에 관한 내용을 볼 때면 ‘나는 걷지도 못하는데, 본분을 어떻게 이행할 수 있겠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데, 내가 패괴된 걸 잘 아시니까 이런 병을 통해 날 도태시키려고 하시는 거야. 그러니 내가 진리를 추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앞으로 나는 구원에 이를 수도 없고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지도 못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소극적으로 변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기도해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요. 자꾸 소극적이 되어서 울기만 했어요. 저도 이런 상태가 옳지 않다는 걸 알고 계속 소극적인 상태로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기도했죠. ‘하나님, 제 내적 상태가 많이 좋지 못합니다. 당신께서 저를 버리시고 도태시키려고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이 소극적인 상태에서 나올 수 있게 이끌어 주세요.’ 저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나중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최근 몇 년간 교회 사역이 무척 바빴기 때문에 각 팀원이 이동되고 조정되거나 드러나 도태되거나 정리되는 일이 상대적으로 빈번했다. 이렇게 사역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원의 변동이 가장 크고 조정 폭도 크지만 아무리 이동되고 변동되더라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원하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변하지 않고 구원을 추구하려는 소망이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계속해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지금껏 본분 이행을 유지하는 것이다. 좀 더 나은 사람은 계속되는 조정을 거쳐 적합한 위치를 찾게 되고 원칙을 구하며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습득하게 된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으며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다지 좋지 않다. 어떤 사람은 지금은 억지로 본분 이행을 유지하긴 하지만, 사실 내적 상태는 엉망이다. 이미 심하게 의기소침하고 소극적이 되었는데 그저 사람이 아직 떠나지 않았을 뿐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하고 있지만, 사실 마음은 이미 변해서 하나님과 멀어져 하나님을 버렸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찾고 자신만의 삶을 꾸리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 어떤 사람은 계속 부자가 되는 꿈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출세를 추구하며 관직에 나아가는 꿈을 꾼다. 어떤 사람은 자손 번창을 추구하여 결혼과 출산을 위해 떠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다가 체포된 후 몇 년간 박해를 받아 병약해져 본분 이행을 포기하고 요양을 위해 집에 돌아간다. 여러 사람의 상황이 저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제 발로 떠나 제명되고, 어떤 사람은 불신파라서 정리되고, 어떤 사람은 온갖 악행을 일삼다 출교되었다. 이들 뼛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그들의 본질은 무엇이더냐? 너희는 꿰뚫어 보았느냐? … 그들이 하나님을 갓 믿기 시작했을 때 마음속에 열정이 있었고, 가정이나 직장을 내려놓기까지 하면서 늘 봉헌하며 하나님 집을 위해 위험한 사역도 담당할 수 있었다. 어떻게 봐도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자였는데, 어찌하여 지금은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이냐? 하나님이 애초부터 그들을 싫어한 것이냐? 아니면 그들을 이용한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공평하고 평등하게 대하며,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준다. 똑같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공급과 양육, 목양 아래 살았는데 어찌하여 저들은 변화의 폭이 그리 큰 것이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와 마지막 그들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 같다. 하나님이 그들을 실망하게 한 것이냐? 하나님 집, 하나님이 행한 것이 그들을 낙심하게 만든 것이냐? 하나님, 하나님이 한 말씀과 사역이 그들의 존엄을 상하게 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찌 된 일이냐? 누가 이 일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 (하나님, 그들이 하나님을 갓 믿었을 때는 그들 자신의 열정과 선의만으로도 일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날이 갈수록 하나님 집에서 각 사역을 진지하게 대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것을 사람에게 요구하니,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본분도 제멋대로 이행하는 그들은 항상 책망과 훈계를 받게 되고 갈수록 허송세월 보내기 힘들다는 생각에 결국 하나님 집을 떠나게 됩니다. 이 역시 원인의 한 가지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송세월 보내기 힘들어졌다는 말이 실제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허송세월 보내기 힘들어졌다는 말은 허송세월 보내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허송세월 보내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무척 진지하며 이 일을 무척 엄숙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어찌하여 견뎌 내지 못하는 것이냐? (왜냐하면 그들의 본성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받으려고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 집에서 항상 진리만 말하니 진리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그로서는 갈수록 예배하기도, 설교를 듣기도 싫어져 그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례이며, 그런 사람이 꽤 많다. 또 일부 사람은 항상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어떤 본분이든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며 감당하지 못한다. 그의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순종하지 않으며 하나님 집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늘 자기 성질대로 해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제멋대로 굴면서 방해하고 교란만 일으키는 것이다. 아무리 책망하고 훈계해도 회개하지 않으니 쫓겨나고 만다. 이렇게 쫓겨나는 사람들은 성품 자체가 아주 나쁘고 인성도 교만하여 어딜 가나 자기가 결정권을 가지려 하며 안하무인으로 날뛰니 결국 정리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체되거나 도태된 후 어딜 가도 형통하지 못하고, 아무도 자기를 신뢰하거나 상대해 주지 않고,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고, 자기가 결정권을 가질 수도 없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며 입지를 확보할 희망도 보이지 않으니, 복을 받는 것은 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더는 허송세월 보낼 수 없게 되고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서 떠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4)>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길은 평탄하지 않다. 이는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이 사람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사람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그 모든 일의 발생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의의는 사람이 그 속에서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에게 대항하라는 것도, 하나님을 알게 되어 더 큰 힘과 밑천을 갖고 하나님과 겨루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 닥친 모든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진리를 구해 진리를 깨닫고, 그리고 진리를 실행하여 참된 순종에 이르며 하나님께 참된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너희는 알고 있느냐? (네.) 그럼 너희는 어떻게 실행했느냐? 이 일들을 대하는 너희의 실행의 길이 옳으냐? 너희는 순종하는 마음과 진리를 구하는 태도로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대하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어떤 일이 닥치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색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인식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 닥치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대하지 않을 것이며, 진리를 구하지도 않고 대충 넘어가기에 결국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케 할 때,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수많은 일을 배치해 진리를 구하는 훈련을 시킴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깨닫게 하여 사람의 생명이 조금씩 성장하게 한다. 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 진리를 얻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도태되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닥치든 진리를 구할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와 깨우침이 함께하기 때문에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것을 보면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는 않고 소극적으로 변해 원망한다. 그것이 반복되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많아지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부정하게 되며, 그 결과 하나님의 사역에 의해 버림받고 도태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중에서)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됐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마련하시든 하나님은 그 속에서 사람이 공과를 배우고, 진리를 구하여 각 사람과 일을 분별하기를 바라셨어요. 그걸 통해 진정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을 온전케 하시는 거죠.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황 속에서 진리를 구하거나 공과를 배우려고 하지 않고, 되려 소극적으로 변해 하나님을 원망하기만 하다가 결국 도태되는 거더라고요. 전 교회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드러나 도태되는 걸 본 데다, 저 또한 병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드러내 도태시키려고 하시는 거라고 착각하면서 소극적으로 변했던 거예요. 그런 건 진리를 구함으로 해결해야 하지 계속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드러낸 생각을 성찰해 봤죠. ‘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예비하신 건 날 드러내 도태시키려는 거고 일방적으로 날 내치려고 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과연 옳은 관점일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조금 알게 됐어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의로우시죠. 하나님께서 많은 진리를 선포하심으로 필요한 걸 공급해 주시고, 다방면적으로 원칙과 길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또 패괴된 성품에 따라 살고 잘못된 길을 가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도 알려 주셨어요.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예비하셔서 사람을 검증하고 계셨어요. 우리가 정말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면서 굳게 서는지를 보시는 거죠. 물론 그 기간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뭘 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자유를 주셨어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 속에서 진리를 구하고 순종하면서 자아 성찰에 들어가 자신을 알고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면, 그 환경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계기가 되죠. 근데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에 반발심을 갖고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오히려 드러나 도태되는 환경이 되는 거죠. 사람의 마지막 결말은 결국 자기의 선택과 직결되는 거고 자기가 어떤 길을 가는지와 직결되죠. 하나님의 이 말씀처럼요. 『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 중에서) 교회에서 드러나 도태된 사람을 보면 전부 그들의 선택과 관련이 있었어요. 다 본인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탓이었죠. 왕타오의 경우, 다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긴 했지만, 계속 진리를 거부하고 사람이나 일을 파고들고, 리더가 교제를 해도 듣지 않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귀찮다는 듯이 “맨날 하나님의 사역이 끝난다고 하는데, 언제 끝날지도 몰라. 이젠 나도 나가서 돈 좀 벌면서 살고 싶어.”라고 했어요. 리더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의미를 교제해도 오히려 유세를 부렸어요. 대놓고 “절 해임시키세요. 이 본분은 이행 못 하겠습니다.”라고 했죠. 해임된 후에 어떤 형제자매들이 본분을 이행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교제를 해 줘도 오히려 아무리 뭐라고 해도 본분은 이행하지 않을 거라고, 출교시킬 거면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리리의 경우도 버리고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이나 일을 물고 늘어지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게다가 형제자매들을 판단하고 교회 생활을 방해했는데, 형제자매들이 수차례 교제를 나눠도 뉘우치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복음 전파에 효과가 미미했고, 소극적인 것을 퍼트리며 복음 사역에 방해되는 역할만 했어요. 리더가 책망하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리더에 대한 불만을 퍼트리며 형제자매들을 끌어들여 리더에게 편견을 갖게 만들고도 절대 회개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드러나 도태된 건 전부 진리를 계속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자신한테 일어난 일에서 자기반성을 하지 않고 계속 패괴 성품대로 일을 하면서 교회 사역에 훼방을 놓는 일을 했기 때문이었죠. 근데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람을 도태시키고 버리신다고만 생각했으니 그건 하나님을 오해한 거고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볼 수도 있죠. 또 제가 질병 때문에 본분을 이행할 수 없게 되고, 위험한 요소 때문에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없게 되니 그건 하나님께서 저를 드러내 도태시키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또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였죠. 사실 이런 환경은 하나님께서 저를 검증하시는 거죠. 제가 어떤 길을 택하는지 보시는 거였어요. 만약 제가 계속 원망하고 오해로 인해 소극적인 상태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도 안 보고,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려는 마음을 먹는다면, 그 환경은 저한테 도태되는 계기가 되죠. 근데 제가 이 환경 속에서 순종하는 자세로 임하고 제가 표출한 패괴를 반성하면서 인식하고 진리를 구하면서 해결한다면, 이 환경은 제가 온전케 되는 계기가 되죠. 이걸 깨달으니 마음이 많이 밝아졌어요. 지금 이런 환경이 생겨서 본분을 이행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순종하고 진리를 구하면서 제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나는 왜 이런 환경이 생겼을 때, 이렇게 소극적으로 변하는 걸까?’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고 알았어요. 『사람은 다 복을 받고, 상을 얻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이런 생각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다 들어 있지 않느냐? 누구나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이는 사실이다.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항상 말로 내뱉지 않아도, 나아가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속셈과 욕망을 숨겨도, 마음 깊은 곳의 그 욕망, 그 속셈과 동기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사람이 영적인 이론을 얼마나 많이 알고 어떤 체험적 인식이 있든, 어떤 본분을 이행할 수 있든,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든,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복받으려는 속셈은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다. 또 사람은 언제나 이 복받으려는 속셈을 위해 고생을 마다치 않고 바쁘게 뛰어다닌다. 이는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 아니더냐? 복을 받으려는 속셈이 사라진다면 너희는 어떤 기분이겠느냐? 어떤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겠느냐? 마음속에 숨겨진 복받으려는 그런 속셈을 정말로 완전히 없앤다면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되겠느냐? 아마 많은 사람이 소극적이 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의욕이 사라질 것이다. 영혼을 잃어버린 듯 하나님 믿는 일도 무의미하다고 느낄 것이다. 마음을 잃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복받으려는 속셈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본분을 이행하거나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이 가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고, 복받으려는 속셈에 대해 인식이 있고 이미 포기했으며, 지금은 그런 속셈에 지배되거나 속박받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복받으려는 속셈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은 일을 바라볼 때 그저 겉면만 본다. 시련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사람은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긴다.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을 위해 계속 헌신하면 자기에게 변화가 있다고, 더는 열성과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해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고 실제 변화가 조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종착지, 결말과 직접 관계된 일이 닥쳤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겠느냐? 그때 본모습이 낱낱이 드러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생명 성장의 여섯 가지 기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제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직 복받는 게 목적이었음을 알게 됐어요. 전에 별일이 없을 때는 본분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겨 주든 다 했어요. 정말 몸이 아파도 본분은 계속 이행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병이 심해서 아무런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고 형제자매들과 연락도 닿지 못하니까 전 제가 하나님에 의해 도태된 것 같았고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맞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어떤 본분도 이행하기 싫을 만큼 소극적으로 변했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노력하고 싶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저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죠. 보니까 전에 제가 본분에 적극 임했던 건 복을 받기 위함이더라고요. 하나님에게서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받고자 함이었어요. 근데 정작 복을 받을 가망이 안 보이니까 하나님을 믿을 원동력도 사라진 거예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했던 건 없었던 거죠. 예전에 전 제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겨도 제때에 진리를 구하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완전히 드러난 거예요. 복받을 수 있는 희망이 안 보이니까 소극적이 되어서는 진리를 구하지도 않았어요. 그게 무슨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어요? 생각해 보면, 저한테 이런 환경이 생기지 않아서 계속 본분을 이행했다 해도 패괴 성품의 변화가 없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본분을 이행하는 관점이 옳지 못하면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에 의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거더라고요. 그제야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전 정말 양심이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믿은 이유는 그저 복을 얻기 위함이었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저 이제 회개하고 달라지려고 합니다. 앞으로 결말이 어떠하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진리를 잘 추구하겠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면서 제가 드러낸 관점에 대해 좀 더 알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침륜되지 않고 만인이 구원을 얻길 원하시지 않나요?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하시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내 도를 준행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느냐?” 가능한 만큼만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이자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다. 하나님은 거기까지만 한다. 사람은 이 일에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이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고 걱정하시니까 끝까지 책임지셔야 해. 끝까지 따른다면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을 거야.’ 이런 관념이 옳겠느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겠느냐? 은혜시대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관념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말세에는 하나님이 이 모든 진리를 사람에게 알려 주었고 하나님이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원칙도 정확히 말해 주었는데 사람의 마음속에 아직도 이런 관념이 있다면 참으로 터무니없다. 하나님이 이 모든 진리를 너에게 알려 주었는데 결국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실행할지 모르겠다며 이런 대역무도한 말까지 한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항상 ‘하나님께서 이토록 큰 사역을 하시는데 적어도 전 세계 절반 이상의 사람은 얻으셔야지. 사람이 많고 세력이 크고 뛰어난 인물이 많은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걸 증거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신약이든 구약이든 구원을 얻고 온전케 된 사람은 총 몇 명이냐?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냐? (욥과 베드로입니다.) 그 둘뿐이다. 사실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하나님과 창조주를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노아도 하나님의 눈에는 의인이었지만 욥과 베드로에 비하면 한 단계 모자랐다. 물론 하나님은 그때 사역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인류에게 공급하지도, 명확한 말씀을 이토록 많이 하지도, 이렇게 큰 규모의 구원 사역을 하지도 않았다. 얻은 사람은 적었지만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었다. 그럼 이 일에서 창조주의 어떤 성품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도 사람을 많이 얻길 바라지만 사실상 사람들을 얻을 수 없다면,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기간에 이 인류가 하나님에게 얻어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차라리 포기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마음의 소리이고 관점이다. 사람은 이 방면에서 하나님에게 어떤 요구나 관념이 있겠느냐? ‘기왕 저를 구원하기로 하셨으니 반드시 끝까지 책임지셔야 해요. 기왕 제게 복을 약속하셨으니 반드시 주셔서 제가 받게 해 주셔야 해요.’ 사람의 내면에는 ‘반드시’와 요구가 무수히 많다. 이 또한 관념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큰 사역을 하시고 6천 년 경륜에서 결국 두 명밖에 못 얻으신다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럼 헛수고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설사 두 명밖에 얻지 못하더라도 기뻐한다. 사실 하나님의 목적은 겨우 두 명이 아닌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깨닫지 못해 하나님을 오해하고 대적하며 쓸모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하나님은 아예 원하지 않는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안 됩니다. 그럼 사탄이 비웃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웃어 봤자 사탄은 어차피 하나님에게 패배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결국 인류를 얻었고, 인류 가운데 사탄을 저버리고 사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들을 얻었으며, 진정한 피조물을 얻었다. 그럼 하나님에게 얻어지지 않은 사람은 사탄에게 끌려갔겠느냐? 너희가 지금 온전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탄을 따라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원하지 않으셔도 저는 사탄을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사탄이 제게 복을 준다고 해도 저는 원치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에게 얻어지지 못한 사람이 사탄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이 영광을 얻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얻는 사람의 수나 규모에 관념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 몇 사람만을 얻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이런 관념이 생기는 것은 한편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얻으려는 것인지 간파하지 못하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마음속에 이런 관념이 있는 것은 자신의 운명과 앞길에 대해 스스로 위로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얻으신 사람이 너무 적어. 우리를 전부 얻으시면 얼마나 영광스러우시겠어!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정복될 뿐만 아니라 결국 하나님께 온전케 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고 구원하신다는 말도, 하나님의 경영 사역도 물거품이 되지 않을 텐데. 그러면 사탄은 더 부끄러워지고 하나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얻으시지 않겠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창조주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앞길이 걱정되어 자신의 앞길과 창조주의 영광을 연결 짓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는다. 그 밖에 그는 또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지고 사탄을 부끄럽게 했으니 이건 사탄을 이긴 강력한 증거야. 세 마리 토끼를 잡은 거라고.’ 사람은 참으로 계산을 잘한다. 아주 교묘하게 관념이 생겨나지 않았느냐? 사람은 사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심 안에 패역이 담겨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담겨 있지 않겠느냐? 여기에는 ‘기왕 저희를 택하고 인도하셨는데, 저희에게 그토록 많은 공을 들이셨는데, 당신의 생명과 전부, 당신의 말씀과 진리를 저희에게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여러 해 동안 당신을 따르게 하셨는데 결국 저희를 얻지 못하신다면 얼마나 손해입니까.’라는 소리 없는 반항이 담겨 있다. 그는 이런 핑계로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을 얻어야 한다며 하나님을 위협한다. 그를 얻지 않으면 손해 보는 건 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과연 옳겠느냐? 여기에 한편으로는 사람의 요구가 담겨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과 관념도 담겨 있다. 즉, 하나님이 이토록 큰 사역을 하기에 반드시 사람을 얼마만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반드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 무리한 요구, 허영심에서 비롯되었고, 사람의 강퍅하고 흉악한 성품도 그 안에 섞여 있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2)> 중에서) 이 말씀을 통해서 저의 고정 관념에 대해 조금 분별할 수 있게 됐어요. 예전에 전 하나님은 사람을 드러내 도태시키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고 여겼거든요. 그래서 교회 사람들이 한두 명씩 드러나 도태되는 걸 볼 때 이해가 안 됐어요. 저렇게 많은 사람이 다 드러나 도태되면 결국 구원에 이를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싶었거든요. 특히 제가 병 때문에 아무런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게 됐을 때, 저도 하나님에 의해 드러나 도태되는 거라고 하나님을 오해했었죠. 심지어 속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역하시는 게 아닌가? 근데 왜 결국에는 우리를 다 도태시키시지?’라는 생각을 품으면서 따지기도 했죠. 그건 사실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해서 그런 거였어요.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뜻은 바뀌지 않아요. 하나님도 더 많은 사람을 얻기를 바라시죠. 충성을 다해 힘쓰려는 의지만 있어도 쉽게 도태시키지 않으시잖아요. 다만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중히 여기지 않을 뿐이죠. 무슨 일이 생겨도 진리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지 않아서 결국은 힘쓰는 것조차 기준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거죠. 그런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포기하실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고 거룩하시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 사람의 수가 아니라 알짜였어요.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사람은 설령 인원수가 적더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는 참된 피조물이죠.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드러내 도태시키는 게 아니라 하나라도 더 구원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거기에는 저의 욕심이 있더라고요. 왜냐하면, 그럴 경우 제가 도태될 일이 없고, 저의 미래와 종착지도 보장이 되니까요. 그래서 전 제가 하나님에 의해 드러나 도태될 대상이라는 느낌이 들 때, 소극적으로 변했던 거고 진리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어요. 오히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심은 구원하려고 하신 게 아닌가? 근데 왜 우리를 이렇게 다 드러내 도태시키시는 걸까?’라면서 따지곤 했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태시킬 게 아니라 온전하게 구원하셔야 한다는 뜻이었죠. 그건 바울이 했던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는 이 말과 같은 성격이었어요. 그건 하나님께 대드는 거고 흉악한 성품을 드러낸 거죠. 사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마련하시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얻기를 바라셔서 예비하신 거고, 우리가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셔서 마련해 주신 거죠. 물론 이런 환경이 제 관념에 맞지 않고, 제게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기복 신앙을 하려는 제 속셈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어 제가 믿음과 본분 이행 속에 섞인 불순물을 깨닫고 바로잡을 수 있게 됐어요. 이 환경이 저한테는 구원이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고심하시고 진리를 선포해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환경을 예비하시어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온전케 하시죠. 근데 저는 하나님이 주신 환경에 반발하고 불평했어요. 정말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람인 거죠. 제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게 택하신 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잖아요. 감사는 당연한 거고, 설사 복을 얻지 못하고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께 따질 게 아니라 순종해야 하는 게 맞죠.

그 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어요. 『지금부터 열심히 추구해야 하는데, 어떻게 추구해야 하느냐? 어떤 일에서 자주 하나님을 거역하는지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은 몇 번이고 너에게 상황을 마련해서 공과를 배우게 하고, 그 일을 통해 너를 변화시키고 하나님 말씀을 네 안에 만들어서 네가 이 방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네가 그 일에서 사탄의 패괴 성품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 말씀을 네 안에 만들어서 네 생명이 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너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살아 내지 않았다. 너는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구원받을 기회를 하나씩 하나씩 잃어 갔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겠느냐? 오늘부터 네가 반성할 수 있는,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문제에서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진리 실제와 생명으로 삼고,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육을 저버리고, 자신의 기호를 버리고, 진리 원칙에 따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실행의 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 하지만 네가 구원받고 싶다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여 진리와 생명을 얻고 싶다면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진리를 깨달아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이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하며,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을 견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간단한 몇 마디 말을 사람은 실행하고 체험할 줄 모른다. 사람의 자질과 지식수준이 어떻든, 나이가 많든 적든, 하나님을 몇 년을 믿었든 진리를 실행하는 길이 옳고, 목표와 방향이 옳다면, 네가 추구하는 것, 네가 치르는 대가가 모두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틀림없이 진리 실제일 것이고, 생명이 되는 하나님 말씀일 것이다. 우선 목표를 확정하고 그런 다음 차츰 그 길을 따라 실행한다면 마지막에 반드시 수확이 있으리라는 것을 너희는 믿느냐? (믿습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0)> 중에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면서 실행할 길을 찾게 됐어요. 진리를 추구하면서 구원에 이르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에 순종하면서 진리를 구하고 말씀대로 실행해야 하죠. 저도 당장은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없지만, 이번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어요. 몸이 많이 아프긴 하지만 하나님은 제 숨을 거두지 않으셨고, 계속 살려 주셨어요. 그 덕에 저는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게 됐잖아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권리까지 뺏지는 않으셨어요. 근데 전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에 감사할 줄 모르고, 소극적이 되고 오해하고 있었으니 정말 답답한 사람이 따로 없었죠. 제가 할 것은 반성하면서 자신을 인식하고, 알맞은 말씀을 찾아 저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거더라고요. 그게 진짜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죠.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나서 다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됐는데, 복음 설교문 선별을 맡게 됐어요. 정말 다시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어요. 전 본분을 이행하면서 제가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지 성찰하는 일을 중시하게 됐어요. 가끔 효과가 좋을 때면 제가 괜찮아 보여 으쓱해 하다가도 본분에서 효과가 미미하거나 오류가 생기면 소극적으로 변하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제가 드러낸 모습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해결하곤 해요. 한동안 이렇게 실행하니까 정말 알찬 느낌이 들었어요. 이렇게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드려요.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관련 콘텐츠

노인도 힘써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제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을 때가 마흔여섯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이번이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의 마지막 단계이고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구원한 사람들을 다음 시대로 이끄신다는 걸 알게 됐죠. 전 너무 기뻐서 모든 걸 다...

지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중국 이쉰(依蕁)저는 몇 년간 타지에서 본분을 이행하며 교회 사역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었지만 건강상 큰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나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가끔 밤이라도...

차마 돌아보기 힘들었던 지난 일

중국 리이(李毅)2015년 8월에 저희 가족은 신장(新疆)으로 이사했습니다. 이사 가기 전에 저는 중국 공산당이 신장에서 위구르족 폭동 진압이라는 명목으로 아주 삼엄하게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어 환경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막상 신장에...

공적인 일을 이용해 개인적인 분풀이를 하는 행위의 본질

산둥성 저우리 최근 우리 교회에 사람이 늘어나자 관리상 편의를 위해 교회를 두 곳으로 나누고 교회 리더를 뽑아야 했습니다. 리더를 뽑는 원칙에 따라 생각했을 때, 이 본분에 적합해 보이는 한 형제님이 있어 그를 리더로 뽑으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