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은혜에 얽매이지 않을 거예요
중국 정리(鄭麗)제가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희 5남매를 데리고 어렵게 생활하셨죠. 저희를 가엾게 여기신 숙모가 자주 음식과 필요한 물건을 가져와서 도와주셨는데, 그런 걸 받을 때마다 어머니는 저희를...
저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작은 소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모두 농부이셨고 가정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무척 아껴 주셨고, 제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구해서 제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나중에야 저는 그것이 모두 그분들께서 아껴 먹고 아껴 쓰시며 마련해 주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부모님께서는 제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빚을 내 양식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매일 밤낮없이 일하시다 과로로 병을 얻으신 것을 보고는 일을 그만두시라고 권했습니다. 아버지는 사실 당신도 하고 싶지 않지만, 제가 나중에 제 생활을 꾸려 나가야 하니 돈을 좀 더 모아 주고 싶고, 당신처럼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자 마음이 아프면서도 감사했고, 부모님의 모든 희생을 보며 너무나 죄송하고 빚을 진 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부모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일흔이 넘으신 두 분은 몸이 점점 안 좋아지셨지만, 그런데도 드시는 것, 입으시는 것 모두 아끼셨고, 아파도 병원에 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돈이 많이 들까 봐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할머니께서 몇 년간 모은 돈을 전부 저를 위해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을 들은 저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연세도 많으신 분들이 당신들은 고생하시면서까지 저를 위해 돈을 모으고 계셨던 겁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다고 느낀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꼭 그분들을 잘 보살피고 효도해야지.’
2012년, 어머니께서 제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전해 주셨고, 그 후 저는 예배에 참석하며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2018년 가을, 아버지께서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몹시 고통스럽고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돈을 버신 것이 다 저 때문이었고, 그렇게 밤낮없이 일하시지만 않았더라면 건강이 나빠지지도, 갑작스러운 뇌출혈이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고생만 하시다 내가 키워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도 전에 떠나셨구나. 지금 조부모님은 일흔이 넘으셨는데도 여전히 아껴 먹고 아껴 쓰시며 자손 복은 전혀 누리지도 못하고 계셔. 아버지가 안 계시니 내가 책임을 지고 조부모님을 돌봐드려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게 해야겠다. 그래야 나도 여한이 없을 거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외지로 본분을 이행하러 가시게 되자 저는 집에서 조부모님을 돌봐드렸습니다. 저는 늘 갖은 방법을 동원해 맛있는 음식을 해 드리고 좋은 옷을 사 드렸습니다. 두 분의 몸이 안 좋아 보이면 여기저기서 좋은 의원과 약을 수소문하며 그저 두 분께서 건강하시기만을 바랐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호흡 곤란을 일으키셨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니 의사는 중증 심부전이라며 당장 입원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지금은 위험한 고비로 언제든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더라도 심장 기능은 계속해서 나빠질 것이며, 관리를 잘하면 어쩌면 2년 정도 더 사실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저는 몹시 자책하며 제가 할아버지를 잘 돌봐 드리지 못해 병세가 이렇게 심각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관리를 잘해도 기껏해야 2년 더 사실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이 짧은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앞으로 할아버지를 잘 돌봐 드려서 1, 2년이라도 더 사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얼마간의 치료를 통해 할아버지의 병세는 조금 호전되었고, 저희는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023년 5월, 저는 갑자기 리더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한 사역에 긴급히 협력할 사람이 필요한데 제가 비교적 적합하다며, 집을 떠나 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내용이었습니다. 편지를 보고 저는 마땅히 본분을 선택해야 함을 알았지만, 몸이 편찮으신 조부모님이 생각났고,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결국 본분을 거절하고 말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두 단락의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너희의 충성심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순종은 어디에 있느냐? …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는데 너희는 무엇을 바쳤느냐? 욥은 모든 것을 바쳤는데 너희는 무엇을 바쳤느냐? 많은 사람이 참도를 찾기 위해 헌신하고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렸는데, 너희는 그런 대가를 치렀느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모압의 후손을 구원하는 의의> 중에서),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지금의 충성심과 순종이며, 지금의 사랑과 증거이다. 설령 네가 지금은 무엇을 증거라고 하는지, 무엇을 사랑이라고 하는지 모를지라도 마땅히 너의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한다. 너의 유일하고 보배로운 충성심과 순종을 내 손에 바쳐야 할 것이다. 내가 사탄을 물리친 증거는 사람의 충성심과 순종에 있고, 내가 사람을 완전히 정복한 증거 또한 사람의 충성심과 순종에 있음을 너는 알아야 한다. 나를 믿는 이상 너의 본무는 나를 증거하고, 내게 일편단심으로 충성하며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다음 단계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너는 나를 어떻게 증거할 것이냐? 너는 또 어떻게 내게 충성하고 순종할 것이냐? 너는 네가 하고 있는 기능에서 충성을 다할 것이냐, 아니면 뿌리치고 그만둘 것이냐? 너는 내 모든 안배에 순종할 것이냐(설령 죽거나 멸망할지라도), 아니면 내 형벌을 피하려고 중도에 도망칠 것이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믿음’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하나님의 질책하시는 말씀을 마주하니 마음이 몹시 찔렸습니다. 욥은 시련이 닥쳤을 때 막대한 재산과 모든 자녀를 잃었고, 자신도 온몸에 악창이 났지만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욥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순종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외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 칼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순종이 있었습니다. 욥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을 보니 심히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저도 하나님을 믿은 지 십여 년이 되었고, 하나님 말씀의 많은 양육과 공급을 누렸지만 하나님께 보답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줄만 알았고,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주어도 거절했으니, 제 인성이 너무나 형편없었습니다! 지금 교회 사역에 협력할 사람이 시급히 필요하니, 더 이상 이기적이고 비열하게 감정에 얽매여 살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마땅히 제 본분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한 번 제대로 살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 후 저는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제가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한 지 두 달 만에 교회 리더는 저와 함께 본분을 이행하던 사람이 잡혀 유다가 되어 저를 팔아넘겼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뒤이어 하나님을 믿던 제 친척 몇 명도 경찰에 잡혀갔고, 경찰 열댓 명이 저희 집으로 저와 어머니를 잡으러 들이닥쳐 집에 있는 식량과 돈을 일부 빼앗아갔으며, 저도 경찰의 수배 대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제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할아버지께서 다시 입원하셨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경찰이 저희 집에 들이닥쳐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부모님께서 분명히 놀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 연세에는 편안한 노후를 보내며 기댈 곳이 있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데, 저 때문에 연루되어 이런 고생을 하신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그분들께 너무 죄송했고, 제 내적 상태도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심지어 몰래 집으로 도망쳐 그분들을 돌봐드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런 환경에 닥치니 제가 좀 연약해집니다. 이 옳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저를 이끌고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 후, 저는 의식적으로 이 방면의 하나님 말씀을 찾아 읽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방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 또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말도 있다. 이 얼마나 수준 높고 대범하고 품위 있는 말이냐! 사실, 그들이 말하는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라는 현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물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하나님이 각 생물에게 정해 준 법칙일 뿐이다. 사람을 포함한 각종 생물은 모두 이 법칙을 지키고 있다. 생물마다 그 법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모든 생물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을 한층 더 입증하는 것이다. 어떤 생물도 이 법칙을 깨거나 뛰어넘을 수 없다. 생각해 보아라, 사자나 호랑이는 사나운 육식 동물이지만 새끼 때는 성체가 되기 전까지 길러지고 물지 않는다. 이것이 동물의 본능이다. 사납든, 온순하든 모든 동물은 이 본능을 가지고 있다. 각종 생물은 이런 본능과 법칙을 따라야만 번식해 나갈 수 있다. 인류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각종 생물이 이 법칙을 지키지 않거나 이런 법칙과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번식할 수 없을 것이고, 먹이 사슬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 바로 생물계가 이 법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각종 생물은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다. 새끼가 태어나면 성체가 될 때까지 암컷이나 수컷의 보호와 보살핌 속에서 자란다. 각종 생물도 자기 새끼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극진하게 돌보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이 자칭 고등 동물이라고 하면서 이 법칙을 지키지 않고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동물보다 못하다. 그러니 부모가 너를 키우면서 얼마나 보살피고 책임을 졌든 그들은 그저 피조된 인류의 능력 범위 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들의 본능이다. … 각종 생물이나 동물은 이런 본능과 법칙을 가지고 있고, 이를 잘 지키고 제대로 실행한다. 아무도 이를 깨뜨릴 수 없다. 이 외에도 특별한 동물이 있다. 호랑이, 사자와 같은 동물들은 성체가 되면 부모에게서 떨어진다. 심지어는 수컷끼리 경쟁하며 물 땐 물고, 겨룰 땐 겨루며, 싸울 땐 싸우기도 하는데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것이 법칙인 것이다. 그것들은 정에 얽매이거나 인간처럼 정에 빠져 살지 않는다. “은혜에 보답하고 은혜를 갚아야 돼.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지 불효하면 남들이 비난하고 욕하며 뒤에서 험담할 거야.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라는 말은 동물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사람은 이런 말을 하겠느냐? 왜냐하면 사회나 사람들 가운데에 여러 가지 잘못된 사상과 여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잘못된 사상과 여론에 영향을 받고 물들고 부식되고 나면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루게 된다. 결국, 부모를 자신의 채권자로 삼고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모가 죽으면 부모가 기뻐하고 원하는 걸 해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부모의 은혜에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것은 불필요하지 않으냐? 사람이 정에 빠져 살면 정에서 비롯된 여러 생각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패괴된 인간의 사상이 만연한 환경 속에서 살면 사람은 여러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에 휘둘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 다른 생물처럼 단순하지 않고 피곤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역사하고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이 이 모든 사실의 진상을 알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에 이끌려 부모와의 관계를 다루지 않게 된다. 그럼 삶이 홀가분해진다. 삶이 홀가분해진다는 것은 사람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책임과 의무를 알지만 사람이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대하는지에 달렸다. 하나는 정을 택하는 길을 가는 것으로, 정에 따라 처리하고, 사탄이 이끄는 방식과 사상 관점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말씀대로 그런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탄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으로 그런 일을 처리하면 정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고, 언제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이런 상태로는 굴레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늘 “당신이 맞고, 제가 틀렸어요. 당신이 해 주신 게 많고, 저는 해 드린 게 없어요. 당신은 배은망덕하고, 너무했어요.” 등의 말에 얽매여 똑 부러지게 말할 때가 없다.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나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과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이런 일은 단순해진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께서 저를 양육하시고 관심으로 돌봐 주신 것은 그분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제정해 주신 규율과 법칙을 따르는 것이자 사람의 본능이라는 것을요. 마치 하나님께서 지으신 각종 생물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규율과 법칙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잔인한 동물이든 온순한 동물이든 후손을 양육하는 것은 그들의 본능이자 책임과 의무입니다.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양육과 돌봄을 일종의 은혜로 여겼고, 그분들이 저를 위해 희생하고 고생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보답할 길이 없자 늘 죄책감과 자책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저는 그것이 모두 제가 사회와 학교, 가정에서 주입받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선행 중 효가 으뜸이다’, ‘부모가 계실 때는 멀리 나가 놀지 마라’와 같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과, 특히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제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제 사람됨의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 저는 늘 아버지가 평생 고생하셨는데도 살아 계실 때 부양하며 효도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부모님께는 그런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분들을 돌볼 책임을 지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고, 제가 그분들이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게 해 드리지 못했을 때는, 스스로가 매우 불효하다고 느끼며 늘 빚진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사탄이 제게 주입한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들 때문에 저는 늘 부모님과 가족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만 했고, 심지어 부모님과 조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전통 문화가 바로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수단이며, 그것에 의지해 사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게 될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효와 불효를 가늠하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많은 사람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한 측면으로는 객관적인 전체적 환경 때문이다.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 하고, 부모 곁을 지키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원해서 부모를 떠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한 측면의 객관적 원인이다. 다른 측면을 보면, 주관적으로 말해서 네가 밖에 나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부모를 떠나 네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여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서 부모를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에 남아 함께하면서 그들을 돌볼 수 없었던 것이다. 너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책임을 회피하려고 나온 것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인 네가 그들을 떠나 밖에 나와서 본분을 이행해야만 했던 것은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 마음속에는 그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있다.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객관적인 환경이 허락했다면, 그들 곁을 지키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다면 너는 그들 곁에서 항상 그들의 생활을 돌보고 네 책임을 다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환경 때문에 너는 반드시 그들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을 지킬 수 없었다. 네가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성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집을 떠난 것이 그들에게 효도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는 불효이고 인성이 없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키워 줬는데 너는 머리가 커지자마자 나가서 혼자 살지 못해 안달이고, 부모를 보기 싫어하고, 부모한테 어려운 점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으려 하고, 상관할 여건이 돼도 상관하지 않으면서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효이다. 하지만 지금이 이런 상황이냐?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자 자기가 살던 현(縣)을 떠나고, 시(市)를 떠나고, 성(省)을 떠나고, 심지어 나라를 떠났다. 이미 고향을 멀리 떠난 데다가 갖가지 이유로 집에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가끔 고향에서 온 사람을 통해 부모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 전해 들으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안심한다. 사실 너는 불효하는 것이 아니다. 인성을 상실한 수준에 이르러 부모마저 신경 쓰지 않으려 들고 책임을 안 지려는 것이 아니다. 갖가지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이렇게 하기를 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불효가 아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읽고 나니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이전에는 늘 ‘부모가 계실 때는 멀리 나가 놀지 마라’, ‘아들을 키워 노후를 대비한다’와 같은 관점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조부모님께서 저를 키워주셨으니, 그분들이 연로하시면 제가 마땅히 곁에서 돌보며 효도해야 하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불효이고 인성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조부모님 곁에서 돌봐 드리지 못했을 때, 제 양심은 늘 가책을 받아 그분들께 죄송함을 느끼며 빚진 마음과 자책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실, 제가 그분들 곁에서 돌보며 효도하지 못한 것은 효도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고, 책임을 다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었습니다. 객관적인 환경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제 본분이 비교적 바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저를 핍박하고 수배하여 집에 돌아가 가족을 돌볼 방법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효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제가 여건이 되는데도 조부모님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불효이며 인성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묵상을 하다가 두 단락의 하나님 말씀을 보고 마음이 더욱 환해졌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면 부모가 한평생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복을 누릴지도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한다. 네 효도 여부에 따라 무엇이 바뀌지는 않는다. 네가 효도한다고 그들이 고생을 덜 하거나 네가 효도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고생을 더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운명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이 예정해 두었다. 그 모든 것이 그들에 대한 너의 태도에 따라, 너와 그들 사이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에 따라 바뀌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운명이 있다. 그들이 이번 생에 빈곤할지 부유할지, 잘 풀릴지 안 풀릴지, 생활의 질이 어떻고, 물질적인 혜택이 어떻고, 사회적 지위가 어떻고, 생활 현황이 어떨지, 그 모두는 너와 별 관계가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중에서),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생로병사나 크고 작은 일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네가 성인이라면 네 생각이 성숙했을 테니 이 일을 냉정하고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부모님이 병에 걸리면 날 생각하느라 그런 거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나 돼? 생각이야 했겠지. 자기 자식인데 어떻게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어? 나도 부모님을 생각하는데 어째서 나는 병에 걸리지 않는 거지?’ 병에 걸리는 사람은 모두 자식이 보고 싶어서 걸리는 것이겠느냐?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부모가 큰일을 당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에 그 일을 배치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하나님의 손으로 배치한 것이니 객관적 원인이나 이유를 들이댈 수 없다. 그저 부모가 그 나이가 되면 그 일이 일어나고 그 병에 걸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네가 곁에 있다고 피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운명에 병에 걸리는 일을 안배하지 않았으면 네가 그들 곁에 없어도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인생에 그런 큰일이 일어나도록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네가 그들 곁에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들은 여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보아라. 온 식구가 해마다 같이 있지 않더냐? 부모에게 큰 어려움이 닥치면 가족과 자녀가 모두 부모 곁에 있지 않더냐? 부모가 병에 걸리거나 병세가 악화되는 것이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겠느냐? 그런 게 아니라 그럴 운명이었던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일생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사람의 출생과 사망, 병의 유무, 부귀 또는 빈궁, 순탄함 또는 험난함 등 이 모든 것은 어느 누구도 좌우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주재와 정하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요. 사실 생각해 보면, 설령 제가 부모님과 가족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효도한다 해도 그분들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분들은 아프실 때가 되면 아프실 것이고, 돌아가실 때가 되면 돌아가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지셨을 때가 그랬습니다. 제가 차로 십여 분 만에 병원으로 모시고 갔지만 의사도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늘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 저를 위해 돈을 버시느라 고생하셨기 때문이고, 조부모님 몸이 안 좋으신 것도 아껴 드시고 아껴 쓰셔서 영양실조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바로 제가 하나님의 주재와 정하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입으로는 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고 외쳤지만, 막상 현실적인 환경에 닥치니 저는 마치 불신파처럼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시고 생사화복을 결정하신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제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깨닫고 나니 제 마음이 한결 담담해졌고, 조부모님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게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또 두 단락의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했고, 그다음 진리를 실행하고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데 대해 더 높은 요구를 했다. 너는 어떤 것을 지켜야겠느냐? (더 높은 요구를 지켜야 합니다.) 더 높은 요구대로 실행하면 옳겠느냐? 진리에 높고 낮음과 새롭고 오래된 것의 구분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진리를 실행할 때는 무엇에 따라야겠느냐? 무엇을 진리 실행이라고 하느냐?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진리 실행은 서로 다른 시간, 장소, 환경, 배경 조건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규례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 이것을 진리 실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요구를 지키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 본분을 완수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현재 말씀이고 요구겠느냐? 먼저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같지 않고 차이가 있다. 리더 일꾼의 경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니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야지, 부모 곁에서 효도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한 가지 상황이다. 이 밖에 평범한 신자의 경우,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부모 곁에서 효도해도 된다. 열심히 효도해도 뭔가 상은 없고 축복을 얻을 수도 없겠지만, 효도하지 않는다면 인성이 없는 것이다. 사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하나의 책임일 뿐,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리 실행이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자야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어쨌든,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다. 그럼 현재 실행해야 할 진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본분 이행입니다.) 그렇다.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 실행이다.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힘만 쓰는 것에 불과하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4)> 중에서), 『창조주 앞에서 너는 하나의 피조물이다. 네가 이번 생에 해야 할 일은 그저 부모에 대한 책임만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고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책임을 다하더라도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해야지 네 감정 혹은 양심상의 필요에 근거해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단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일 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요. 오직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르며, 진리 원칙에 따라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념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주 예수님의 제자들을 떠올렸습니다.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와 같은 분들은 모두 가정을 버리고 부모, 가족을 떠난 채 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책임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한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이처럼 복되게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저의 사명인 것입니다.
지금도 때때로 조부모님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지만, 더는 제 내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조부모님께는 그분들 각자의 운명이 있으며, 저에게도 저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직 제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며 사는 것만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임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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