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병을 앓은 후

2025.2.24

중국 양러(楊樂)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이성이 너무나 부족하고,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많고 너무 지나치기까지 하는데, 이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사람은 늘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하나님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경배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의 기호에 따라 무리한 요구를 한다. … 사람의 이성이 너무 부족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온전히 순종하거나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 별도의 요구를 한다.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충성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또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 어떻게 사랑해 달라고, 어떻게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어떻게 보살피고 보호해 달라고,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봐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배려하고 만족게 하고, 어떻게 해야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생기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예전에 저는 이 말씀을 읽어도 저 자신과 대조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저 떡으로 배를 불리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고,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줄곧 요구하고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조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저는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셨고, 제가 피조물로서 마땅히 피조물의 자리에 서야 하며,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든 안 하시든, 순경이든 역경이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식과 뜻이 있었기에 저는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께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아들이 병든 일을 겪고 나서 비로소 저의 실제 분량과 패괴된 실상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2015년 9월, 아들이 제 어머니 댁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어머니께서 아이가 살이 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이의 눈꺼풀이 좀 부어 있는 것을 보고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아들에게 옷을 벗어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다리는 아주 굵게 부어 있었고 번들거리기까지 했습니다. 손으로 누르자 움푹 팬 자국이 보통 사람처럼 바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문득 옛 어른들이 하시던 “남자는 다리가 붓는 것을 두려워하고, 여자는 얼굴이 붓는 것을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남자는 다리가 부으면 심각한 병에 걸렸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분명 무슨 안 좋은 병이 생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저희는 아이를 성(省)에 있는 신장 전문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의사는 아들이 신증후군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며, 그 병에 걸리면 체내 단백질이 심각하게 유실되고 크레아티닌 수치도 기준치를 심각하게 초과하여 몸이 점점 쇠약해지다가 심하면 요독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중의학에서 ‘신장은 선천적인 생명의 근본’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신장에 문제가 생기면 아이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만약 낫지 않으면 아들은 평범한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닐 수도 없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기도 어려울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에 저는 몹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 아들, 이제 겨우 열네 살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계속 병마에 시달려야 한다고?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 아이를 이대로 아프게 둘 순 없어. 집을 팔고 땅을 팔아서라도 아이 병은 고쳐 줘야 해.’ 저는 병원에서 초조하게 아들의 진단 결과를 기다리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기도하다 보니 어제가 제가 소그룹 예배를 접대하는 날이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본분을 그르쳐버렸다는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꼈습니다. 아이 병간호 때문에 소그룹 예배를 접대하는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아내가 병원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으니 괜찮겠다 싶어서 저는 일단 집으로 돌아와 소그룹 예배를 접대하며 일도 병행했습니다.

그 후, 아들의 진단 결과가 나왔는데 신증후군으로 확진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마치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아이가 그 병에 걸릴까 봐 가장 걱정했는데, 결국 현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아이는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도 없고 병원에만 있어야 하는데,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며칠간 제 마음은 무척 무거웠고,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인 후로 한 번도 육적인 일로 하나님께 간구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아이 병을 낫게 해 주시면 정말 좋겠다.’ 저는 하나님께 아이의 병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시는 사역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기 위한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의 사역이며 제가 이렇게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병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제가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제 아이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아이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여전히 바랐습니다. 한동안 회복되기를 바라며 기다렸지만 아이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본분을 그르치지 않았지만, 마음은 무척 무거웠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는 더욱 많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은 뒤 평안만 얻고자 한다. 자식에게 병이 없고, 남편에게 좋은 직업이 있고,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고, 딸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너의 우마가 밭갈이를 잘하고,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너는 오직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라고, 너의 집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바람이 불어도 네 몸에는 불지 않고, 모래가 날려도 네 얼굴은 때리지 않으며, 홍수가 나도 네 집의 곡식은 잠기지 않고, 모든 재난이 너와 무관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처럼 육적인 것만 추구하는 못난 놈에게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짐승 아니겠느냐? 아무 대가도 없이 참도를 네게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추구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저는 마음이 몹시 찔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받으려는 관점을 정곡을 찌르며 드러내셨습니다. 아들이 신증후군으로 확진된 후, 저는 겉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려 애써 자제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제가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제 아이의 병을 없애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면서도 이 일이 제게 임한 데서 어떤 공과를 배워야 할지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종교인들과 무엇이 달랐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떡으로 배를 불리려는 것을 추구하니, 전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반성하니, 저는 속으로 너무나 부끄러웠고, 진리는 추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요구만 하는 제 자신이 미웠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비이성적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의 병을 당신께 맡기고 당신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자 합니다. 부디 제게 부담과 믿음을 더하시어, 본분을 잘 이행하여 당신을 만족게 해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하고 평온해졌습니다.

2016년 3월, 저는 교회 리더의 본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몇 달 후, 아들의 병이 재발하여 소변이 잘 배출되지 않으면서 온몸이 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습니다. 멀쩡하던 아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병이 자꾸만 재발하니 도대체 언제나 나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본분을 부족하게 이행해서 그런가? 내가 좀 더 힘을 내면 아이의 병이 좀 나아질지도 몰라.’ 그래서 저는 더 많은 에너지를 본분 이행에 쏟아부었습니다. 뜻밖에도 아들의 병은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고, 저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무척 감사드렸습니다. 본분도 더욱 정성껏 이행하게 되었고, 여러 사역에서도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2016년 가을이 되었는데, 설마 했던 아들의 병세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매일 배뇨량이 줄어들면서 수분이 거의 체내에 쌓여 몸이 아주 심하게 부었고, 얼굴도 변형되었습니다. 눈은 부어서 실눈처럼 변했고,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다리도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올라 피부가 팽팽하게 번들거렸고, 거의 누운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저희가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할 때, 아이는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병원에 데려가려 하자, 아이는 철이 든 듯 말했습니다. “제 병은 안 나아요. 가도 소용없어요. 엄마 아빠는 가서 할 일 하세요!” 저는 아이 대신 그 고통을 겪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는 욥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닙니다. 그렇게 큰 분량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 저는 한 번도 본분 이행을 멈춘 적이 없는데, 아이의 병은 왜 낫지 않는 겁니까? 당장 낫지 않더라도, 더 심해지지만 않게라도 해주세요.” 그렇게 생각하다가, 제가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않으시다고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몹시 불안해졌습니다. 저는 서둘러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당신을 원망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도저히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공과를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사오니, 부디 이 일에서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기도 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공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 고생한 만큼 분배하는 것,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것,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것은 공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면 이것은 공의일까? 사실 이것 역시 공의이다. 어째서 그것을 공의라고 하겠느냐? 공의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때 하나님이 욥을 멸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패괴되었든 안 되었든, 사람의 패괴가 깊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이 사람을 멸할 때 사람에게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하느냐? 무슨 근거로 사람을 멸하는지 설명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그가 정한 규칙을 사람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다. 패괴된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든 다 합당하고, 다 하나님의 안배다. 하나님이 네가 눈에 거슬려 넌 증거를 다 했으니 쓸모없어졌다며 널 멸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이것 역시 공의다. 지금은 네가 사실상 알기 어렵겠지만, 이치는 이해해야 한다. 너희가 말해 봐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공의입니다.) 사탄을 남겨 둔다면? 뭐라 말하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하는 것은 모두 공의롭다.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당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당신의 아름다운 뜻과 공의가 있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와 행사를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기간에 왜 사탄을 멸하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사탄이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는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패괴시켰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인류를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지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똑똑히 보고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극악무도함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그때 사탄을 멸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줄 것이다. 언제 사탄을 멸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공의롭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관념을 가진 일에 있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태도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제가 이해하던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나 기여한 만큼 대가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본분을 좀 이행하면 하나님께서 마땅히 은혜를 베푸셔야 하고, 본분을 이행하며 대가를 많이 치를수록 하나님께서 더욱 축복하셔야 한다는 것은 모두 세상적인 거래 관점이며, 전혀 진리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바로 공의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그것은 모두 공의 성품의 자연스러운 드러남입니다. 저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고, 하나님 눈에 완전한 사람이었기에, 사람의 관념으로 그가 사탄의 시험에 들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이 그에게 닥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에는 맞지 않지만, 욥의 믿음을 온전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든, 빼앗으시든, 드러내시든, 온전케 하시든 모두 하나님의 공의로운 본질의 드러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의 헌신과 수고를 밑천 삼아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공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며 좀 헌신했을 때 아이의 병이 호전되는 것을 보자 저는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고 여기며 열정적으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병세가 재발하고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을 보자,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이 너무 무겁다고 여기고 하나님께 따지며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공의란 저의 고생과 수고가 은혜와 축복으로 돌아오는지를 가지고 가늠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온통 거래와 맞바꿈뿐이었습니다. 제가 제 관념에 따라 하나님께 요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제가 어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피조물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제 본분을 잘 이행하여 당신을 만족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제 뜻에 맞지 않는 일이 닥치면 당신을 오해하고 원망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부디 이 일에서 제가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나중에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사람은 하나님을 화수분이나 만물 상자로 삼고, 자신을 하나님의 가장 큰 채권자로 간주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약속을 얻어 내는 것이 생득적 권리이자 책무라고 생각하고, 반면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며 사람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해야 할 책임이라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깊은 이해이다. 사람의 본성 본질에서부터 사람의 주관적인 추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과 연결 짓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려고 생각하거나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사람은 늘 하나님에게 요구가 있다. 이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이 늘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는 것은 또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의 본성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나는 사람이 어떤 일에 부닥치든, 어떤 일을 대하든 항상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육을 고려하며, 항상 자신을 위해 핑계와 구실을 대면서 전혀 진리를 구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자신의 육을 위해 변호하고 자신의 앞날을 위해 계산한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은혜를 요구하며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다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왜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겠느냐? 이는 사람의 본성이 탐욕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일말의 이성도 없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것이 기도든 교제든 설교든 할 것 없이, 결국 사람이 추구하고 생각하고 동경하는 것은 다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받아 내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기를 바란다. 어떤 이는 “이는 본성의 일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 이 밖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너무 많이 요구하고 지나친 욕망을 너무 많이 품는 것은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모두 스스로를 위해 요구하고 얻어 내려고 하거나 구실과 핑계를 댄다. 전부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많은 일에서 사람의 행동에 조금의 이성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탄의 논리가 이미 사람의 본성이 되었음을 완벽하게 보여 준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냐? 사람이 사탄에 의해 그 지경까지 패괴되고,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혀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는 너무나 많다> 중에서) 이 말씀을 보고 저는 마음이 몹시 찔렸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그대로, 스스로를 하나님의 채권자로 여기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주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린 후로는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후,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사람은 비이성적으로 은혜와 축복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제 내면의 복 받으려는 관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병든 이 일에서 처음에는 아이의 병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고, 아이의 병세가 좀 호전되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람을 돌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본분을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저의 수고를 보시고 어쩌면 아이의 병을 낫게 해주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속셈의 지배를 받으니 본분을 이행할 때 특별히 힘이 났습니다. 하지만 저의 헌신과 수고가 원하는 결과를 낳지 못하고 아이의 병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저도 모르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마치 제가 본분을 좀 이행하고 대가를 치렀다고 해서 공로를 세우거나 하나님과 흥정할 자격이라도 생긴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한 것은 자신을 위해 복과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었지, 순수하게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본성은 정말이지 너무나 이기적이었습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저는 늘 내면에 속셈과 요구를 품고 있었고, 하는 행동마다 모두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히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하여, 오직 하나님께로 돌이켜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마음가짐을 바로 하고, 더는 하나님께 요구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2018년 연말, 저는 안전상의 문제로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아이는 오랫동안 호르몬 약을 복용한 탓에 대퇴골두 괴사증에 걸려 허리를 펴지 못하고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서야 겨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내가 돌봐주고 있으니 제가 집에 있어도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이의 그런 상황을 마주하니 마음이 여전히 몹시 괴로웠습니다. ‘지금 아이는 옛 병이 낫지도 않았는데 새 병까지 생겼구나. 난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집을 떠나는 게 맞을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저려왔고,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아이의 병세가 빨리 호전되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제가 또다시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제가 피조물의 위치에 굳게 서서 이 환경에 순종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기도 후, 저는 간단히 옷가지를 챙겨 집을 떠났습니다.

한동안 집을 떠나 지내면서, 때때로 아이 생각이 나면 본분에도 다소 교란을 받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부모는 한 사람의 삶에서 출산과 부양의 책임을 지고,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형식적으로 제공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오직 창조주의 예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미래는 일찍이 운명으로 정해져 있고,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으며, 부모조차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운명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은 독립적이고 각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사람의 부모도 한 사람의 일생의 운명을 전혀 막을 수 없고, 한 사람이 현생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는 데 조금도 힘을 보태 줄 수도 없다. 즉,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할지, 이는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 그것이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어떤 운명 속에서 사명을 완수하게 될지도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한 사람이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고, 가족들 역시 그가 현생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완수하게 될지, 어떤 생존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는 완전히 현생의 운명에 달려 있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주재하고 안배하시며, 모든 사람은 일생 동안 겪어야 할 고난이 있고, 아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들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잘 양육하여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아이가 인생에서 어떤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그의 일생이 어떠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제가 결정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집에 있을 때 아이를 좀 돌봐주고, 제때 약을 먹도록 챙겨 줄 수는 있었지만, 아이는 결국 대퇴골두 괴사증에 걸렸습니다. 아이가 어떤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는 제가 보살펴주고 함께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제가 아이 곁에 머문다 해도 그저 함께 있어 주며 작은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뿐, 결코 그의 병세가 심각해지거나 호전되는 것을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아이를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께서 주재하고 안배하시게 하는 것이 가장 적합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좀 홀가분해졌고, 안심하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내에게서 아이가 다시 입원했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이의 병세가 다시 악화된 것을 보니 마음이 여전히 괴로웠지만, 저는 하나님께 아이를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시도록 하겠다고 기도했고, 제가 할 일은 그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며 제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더 이상 요구하지 않으니, 마음이 무척 든든하고 평안해졌고, 본분에 마음을 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관련 콘텐츠

병고를 체험하며 매우 많은 것을 얻다

그리스 바이올렛(Violet)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추구하는 것은 다 나중에 복을 얻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러한 속셈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있는...

은총과 복을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

영국 클라우드 전 2018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재림주를 맞이하게 되니 너무나 가슴이 뛰었죠.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낮에는 일을 하다 보니 저녁엔 많이 피곤해서 본분에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전도만...

팔순 노인이 청력을 잃은 후의 체험

중국 량신(梁欣)2005년, 저는 예순여덟이었습니다. 10월 초 어느 날, 친구가 제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병중에 얻은 수확

중국 허난 장리 2007년은 제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던 해입니다. 당시 남편이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고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두 아이는 아직 어리고 저희 가족의 생활은 곤경에 처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나 막막하고...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