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과 체면을 벗어 버리기가 어려워요
일본 헤일리(Hailey)2020년 7월, 책임자가 제게 아이리스(Iris) 자매가 하던 영상 제작 일을 인계받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기뻤습니다. 하지만 새 본분을 맡았으니 이런저런 문제나 어려움이 생길 거라는 것도 인식했고, 모르는 게 있으면 많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이성이 너무나 부족하고,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많고 너무 지나치기까지 하는데, 이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사람은 늘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하나님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경배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의 기호에 따라 무리한 요구를 한다. … 사람의 이성이 너무 부족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온전히 순종하거나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 별도의 요구를 한다.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충성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또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 어떻게 사랑해 달라고, 어떻게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어떻게 보살피고 보호해 달라고,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봐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배려하고 만족게 하고, 어떻게 해야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생기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전에 이 말씀을 볼 때는 저한테 맞춰 보지 않았어요. 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떡으로 배를 불리려는 자들인데, 그런 자들이 덮어놓고 하나님께 은혜와 복을 달라고 요구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고 나서 저는 피조물이니 마땅히 피조물의 자리에 서야 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든 주시지 않든, 순탄한 상황이든 역경이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고,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까지 있으니까 저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별다른 요구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아들이 아프면서 제 진짜 분량과 패괴된 실제 모습을 보게 됐어요.
2015년 9월이었어요. 애가 할머니 집에 다녀왔는데, 어머니는 애가 살이 좀 쪘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보니까 눈꺼풀이 조금 부어 있는 게, 아무리 봐도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애 옷을 벗겨 봤는데, 다리가 퉁퉁 부어 있는 데다가 반들반들하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눌러봤더니 움푹 들어가서는 정상 사람처럼 바로 회복이 안 되는 거예요. 순간 어르신들이 하던 얘기가 생각났어요. ‘남자는 하체, 여자는 얼굴’이라는 말이 있는데, 남자는 다리가 부으면 심한 병에 걸렸다는 의미였거든요. 저는 애가 분명 안 좋은 병에 걸렸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다음 날 바로 애를 데리고 큰 도시 병원에 갔는데, 신증후군 같다고 했어요. 신증후군에 걸리면 단백질이 많이 배설되고 크레아티닌 수치도 많이 올라가 사람이 점점 허약해질 거고 심하면 요독증으로 넘어갈 거라고 했어요. 중의학에서는 ‘신장은 타고난 기운의 근본’이라고 말하는데, 신장에 문제가 생기면 아이의 건강은 큰 문제가 되고, 그게 치료가 안 되면 애는 다른 애들처럼 정상적으로 학교도 못 갈 거고, 나중에 결혼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다 싶었어요. 그러니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애가 겨우 14살이라 아직 살 날도 많은데, 벌써부터 병마에 시달려야 한다니 말이에요. 저 어린 나이에 이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나 싶어 애가 저렇게 아프게 놔둘 게 아니라 집 팔고 땅을 팔아서라도 고쳐 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병원에서 애 진단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계속 기도드렸어요. 기도할 때 전날이 바로 제가 소그룹 예배 모임을 섬기기로 했던 날인 게 기억났어요. 순간 제가 본분을 지체하게 됐다는 생각에 가책이 밀려왔어요. 애 병을 치료한다고 소그룹 예배 모임 섬기는 일에 지장을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죠. 병원에는 아내가 있으니까 전 집으로 돌아가서 소그룹 예배 모임을 섬기면서 출근도 했어요.
그 후에 애 진단 결과가 나왔는데, 신증후군 판정을 받았어요.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어요.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확실해진 거잖아요. 이러면 애는 앞으로 제대로 학교도 못 다니고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데, 저 어린 나이에 이걸 어떻게 감당하나 싶었어요. 생각할수록 눈물이 나더라고요. 한동안은 정말 마음이 무거웠고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인 뒤로 하나님께 육에 관해서 간구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아이가 낫게 해 주시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요. 저는 하나님께 애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시는 사역은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의 사역이자 사람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는 사역인 걸 알고, 그런 기도는 하나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애 병을 생각하면 마음 한쪽 구석에는 하나님께서 저의 ‘순종’을 봐서라도 애가 그 고통을 겪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근데 아무리 바라고 바라도 애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어요. 표면적으로는 제가 본분 이행을 지체한 게 없었지만 마음은 너무나 무거웠어요. 그 고통에서 헤어나려고 최대한 기도를 많이 하면서 찾고 구하고, 말씀을 많이 먹고 마셨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은 뒤 평안만 얻고자 한다. 자식에게 병이 없고, 남편에게 좋은 직업이 있고,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고, 딸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너의 우마가 밭갈이를 잘하고,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너는 오직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라고, 너의 집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바람이 불어도 네 몸에는 불지 않고, 모래가 날려도 네 얼굴은 때리지 않으며, 홍수가 나도 네 집의 곡식은 잠기지 않고, 모든 재난이 너와 무관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처럼 육적인 것만 추구하는 못난 놈에게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짐승 아니겠느냐? 아무 대가도 없이 참도를 네게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추구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데 너무 마음이 찔렸어요. 하나님은 저의 기복 신앙의 관점을 다 들춰내셨어요. 아들이 신증후군이 확실하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저는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 억제를 했지만, 그래도 저의 ‘순종’을 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아이의 병을 거두어 주시길 바랐거든요. 근데 하나님께서 저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시니 괴로워했고, 이 일을 통해 제가 배워야 할 공과가 무엇인지 구하지도 않았어요. 그럼 전 종교인들과 다를 게 없는 거잖아요? 여전히 떡으로 배만 불리려고 추구하는 격이니 하나님 뜻에 부합하지 않죠. 성찰을 통해 이걸 깨달으니까 너무 면목이 없었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 그런 요구를 하는 비이성적인 제가 너무 미웠어요. 그래서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렸어요. ‘하나님, 아이의 병을 당신께 맡기고 당신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겠습니다. 저에게 긍정적 부담을 주시고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본분을 잘 이행하면서 당신을 흡족게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니까 마음이 조금 편해지더라고요.
2016년 3월에 저는 교회 리더를 맡게 됐어요. 몇 개월 후 아이의 병이 재발했는데, 소변 배출이 제대로 안 되면서 온몸이 부어올랐어요. 그걸 보니까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멀쩡했던 애가 병 때문에 그렇게 되니까 이걸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나 싶은 게 걱정됐죠. 한편으로는 ‘내가 맡은 본분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탓인가? 조금 더 노력한다면 애의 병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본분에 더 전념했어요. 그랬는데 놀랍게도 아이의 상태가 조금씩 좋아졌어요. 저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고 본분에 더 신경 썼어요. 교회 사역들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고요. 어느덧 2016년 가을이 됐어요. 근데 애의 병 상태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어요. 매일 소변 배출은 점점 줄고 수분은 거의 몸에 남아 있으니까 몸이 심하게 부어올랐어요.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변했는데, 너무 부어서 눈도 잘 안 보일 정도라 원래 모양을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양쪽 다리도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올라 반들거렸는데, 거의 바닥에 내려오지도 못했어요. 우리가 본분 때문에 외출할 때면 애는 휴대폰을 보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병원에 데려가려고 하면 애는 다 안다는 듯이 “제 병은 나을 수 없으니 병원에 가도 소용없어요. 엄마 아빠는 그냥 볼일 보세요.”라고 했죠. 저는 아들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 저도 모르게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 저는 욥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기 때문에 그분들 정도의 분량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까지 저는 본분을 멈춘 적이 없는데, 애의 병은 왜 낫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호전되지는 않더라도 더 심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제가 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하고 있다는 걸 인지했어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얼른 기도했죠. ‘하나님! 제가 이렇게 불평해서는 안 되는 걸 압니다. 근데 정말 겪어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어떤 공과를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이 일에서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어요. 『공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 고생한 만큼 분배하는 것,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것,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것은 공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면 이것은 공의일까? 사실 이것 역시 공의이다. 어째서 그것을 공의라고 하겠느냐? 공의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때 하나님이 욥을 멸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패괴되었든 안 되었든, 사람의 패괴가 깊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이 사람을 멸할 때 사람에게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하느냐? 무슨 근거로 사람을 멸하는지 설명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그가 정한 규칙을 사람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다. 패괴된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든 다 합당하고, 다 하나님의 안배다. 하나님이 네가 눈에 거슬려 넌 증거를 다 했으니 쓸모없어졌다며 널 멸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이것 역시 공의다. 지금은 네가 사실상 알기 어렵겠지만, 이치는 이해해야 한다. 너희가 말해 봐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공의입니다.) 사탄을 남겨 둔다면? 뭐라 말하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하는 것은 모두 공의롭다.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당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당신의 아름다운 뜻과 공의가 있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와 행사를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기간에 왜 사탄을 멸하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사탄이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는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패괴시켰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인류를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지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똑똑히 보고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극악무도함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그때 사탄을 멸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줄 것이다. 언제 사탄을 멸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공의롭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관념을 가진 일에 있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태도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제가 생각한 것처럼 공평하고 합리적이거나 하나를 둘로 나누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 사람이 본분을 어느 정도 이행하면 하나님께서 응당 은혜를 베푸셔야 하고, 본분에서 대가를 많이 지불하면 하나님께서 더 크게 복을 주셔야 한다는 건 다 세상적인 거래성 관점일 뿐, 전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거죠.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공의로운 성품이 자연히 묻어나는 것이었죠.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한 사람이었어요. 사람의 관념을 기준으로 보면 사탄의 시험을 당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욥에게 그런 일이 임하는 걸 허락하셨어요. 이는 사람의 관념에는 맞지 않지만, 욥의 믿음을 온전케 하는 계기가 됐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든 아니면 거두어 가시든, 드러내시든 온전케 하시든 전부 하나님의 공의로운 본질을 보여 주시는 것이니 사람은 응당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거죠. 자신의 대가와 헌신을 밑천으로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하면 안 되죠. 근데 저는 하나님의 공의를 잘 모르니까 제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헌신을 조금 했을 때, 자식의 병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보고는 그게 하나님의 공의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본분을 이행했어요. 하지만 아들의 병이 재발하고 갈수록 심해졌을 때 저는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 불평했고 하나님께 따지며 대항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정의한 하나님의 공의는 제가 수고하고 지불한 대가에 따른 은혜와 축복을 기준으로 가늠하는 거였어요. 그것은 온통 맞바꾸려는 거래일 뿐이죠. 그건 저의 관념을 기준으로 하나님께 요구하는 거잖아요? 저는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이행한 게 아니었고 피조물이 갖춰야 할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제 본분을 잘 이행해서 당신을 흡족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왜 제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당신을 오해하고 원망할까요? 하나님, 이 일을 통해 저 자신을 알 수 있게 이끌어 주십시오.’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봤어요.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사람은 하나님을 화수분이나 만물 상자로 삼고, 자신을 하나님의 가장 큰 채권자로 간주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약속을 얻어 내는 것이 생득적 권리이자 책무라고 생각하고, 반면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며 사람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해야 할 책임이라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깊은 이해이다. 사람의 본성 본질에서부터 사람의 주관적인 추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과 연결 짓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려고 생각하거나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사람은 늘 하나님에게 요구가 있다. 이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이 늘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는 것은 또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의 본성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나는 사람이 어떤 일에 부닥치든, 어떤 일을 대하든 항상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육을 고려하며, 항상 자신을 위해 핑계와 구실을 대면서 전혀 진리를 구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자신의 육을 위해 변호하고 자신의 앞날을 위해 계산한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은혜를 요구하며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다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왜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겠느냐? 이는 사람의 본성이 탐욕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일말의 이성도 없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것이 기도든 교제든 설교든 할 것 없이, 결국 사람이 추구하고 생각하고 동경하는 것은 다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받아 내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기를 바란다. 어떤 이는 “이는 본성의 일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 이 밖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너무 많이 요구하고 지나친 욕망을 너무 많이 품는 것은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모두 스스로를 위해 요구하고 얻어 내려고 하거나 구실과 핑계를 댄다. 전부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많은 일에서 사람의 행동에 조금의 이성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탄의 논리가 이미 사람의 본성이 되었음을 완벽하게 보여 준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냐? 사람이 사탄에 의해 그 지경까지 패괴되고,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혀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는 너무나 많다> 중에서) 이 말씀을 보는데 너무 마음이 찔렸어요.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게 바로 저였어요. 전 저를 하나님의 채권자로 간주하면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하지 않고 있었어요. 예수님을 믿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은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넘어서니까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뒤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니 사람은 비이성적으로 하나님께 은총과 축복을 토색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지만 제 내면의 복을 바라는 관점은 바뀌지 않았던 거예요. 애가 아프게 됐을 때, 초반에 애 병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서 아이의 상태가 조금 좋아지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보살펴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제가 제 본분을 굳게 지키면 하나님은 저의 희생을 봐서라도 아이의 병 상태가 호전되게 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 속셈에 지배되어 저는 본분에 정말 열정적으로 임했어요. 하지만 아이의 병 상태가 갈수록 심해져 제가 헌신한 것에 비해 원하는 결과를 보지 못하게 되자 저는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마치 제가 본분을 조금 이행하고 대가를 조금 지불하면 공로가 있으니까 하나님과 따질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보니까 제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한 건 복과 이득을 얻기 위한 거였지 순수하게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기 위한 게 아니었어요. 저는 정말 이기적인 본성을 갖고 있었어요. 피조물이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건 더더욱 당연한 건데, 저는 속에 항상 제 속셈과 요구를 품고 있었어요. 저의 행태는 하나님을 속인 거니까 하나님께 절대 인정받을 수 없는 믿음이었어요. 너무 부끄럽고 면목이 없어서 피조물의 자리에 서서 마음가짐을 바로잡고 더는 하나님께 요구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온전히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어요.
2018년 말에 위험 상황이 닥쳐서 집을 떠나야만 했어요. 하필 그 시점에 애가 장기간 스테로이드 약물 복용 때문에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를 앓게 됐어요. 그래서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걸어 다녀야 했어요. 물론 아내가 아이를 챙겨 주고 있고 제가 집에서 크게 도움이 되는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애가 그렇게 아픈 상황에 놓이니까 너무 괴로운 거예요. ‘애가 낫기는커녕 병이 더 생기기만 하는데, 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집을 떠나는 게 맞나?’ 싶은 게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프기만 했어요. 그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아이의 병세가 빨리 억제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랐어요. 그때 전 또다시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자 다시 기도했어요.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이런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게 해 달라고요. 기도한 후에 간단하게 짐을 싸서 집을 나섰죠.
집을 떠나서도 한동안은 계속 애 생각이 나 본분을 이행하는 데 조금은 지장이 갔어요. 그래서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셨는데, 그때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부모는 한 사람의 삶에서 출산과 부양의 책임을 지고,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형식적으로 제공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오직 창조주의 정하심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미래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다. 부모조차 자식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운명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은 독립적이고 각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의 운명을 막을 수도 없고, 자식이 현생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는 데 힘을 보태 줄 수도 없다. 즉,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할지, 이는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 그것이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어떤 운명 속에서 사명을 완수하게 될지도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한 사람이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고, 가족들 역시 그가 현생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완수하게 될지, 어떤 생존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는 완전히 현생의 운명에 달려 있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깨달았어요. 모든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달려 있다는 걸요. 누구든 일생 동안 어떤 고난을 받게 되든 그것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거였어요. 제 아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건 어른이 될 때까지 부양하면서 제 책무를 다하는 거죠. 그 외에 아이가 어떤 고난을 겪을지, 어떤 일생을 살지는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는 거지 제가 어떻게 결정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죠. 돌아보면, 제가 집에서 애를 어느 정도 돌볼 수도 있고 시간에 맞춰 약도 챙겨 주었지만 그래도 애는 대퇴골 무혈성 괴사를 앓게 됐어요. 애가 받을 고난은 제가 보살펴 주고 곁에 있어 준다고 바뀌는 건 아니었어요. 제가 애 곁에 붙어 있어도 그저 함께하며 작은 위로만 해 줄 수 있을 뿐, 애의 병 상태가 더 심해지지 않거나 낫게 해 줄 수는 없는 거죠. 제가 아이를 온전히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맡기는 게 가장 합당한 선택이었어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마음이 놓이면서 본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 아내한테서 아이가 다시 입원했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애 병이 재발하니까 마음이 괴로운 건 여전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온전히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시기를 원한다고 했어요. 제가 해야 하는 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면서 제 본분을 잘 이행하는 거더라고요. 그렇게 기도하고 더 이상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으니까 마음은 오히려 더 든든하고 편했고 본분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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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헤일리(Hailey)2020년 7월, 책임자가 제게 아이리스(Iris) 자매가 하던 영상 제작 일을 인계받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기뻤습니다. 하지만 새 본분을 맡았으니 이런저런 문제나 어려움이 생길 거라는 것도 인식했고, 모르는 게 있으면 많이...
중국 리양 2020년 구정 후 전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혔어요. 구치소에서 신체검사를 받는데 폐에서 그림자가 발견됐죠. 그땐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각하던 시기라 구치소는 절 거부했고 경찰은 어쩔 수 없이 가족에게 저를 데려가라고 했어요....
한국 신춘(心純)2019년 말, 저는 교회에서 영상 사역을 담당했습니다. 영상 사역은 업무 기술이 요구되는 사역인데, 전에 접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압박감이 무척 컸습니다. 잘 모르는 업무적인 일을 대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커다란 돌덩이를...
중국 뤄잉(羅英)2013년 저는 본분 이행에서 원칙을 구하지 않고 교만한 성품으로 일을 처리해서 교회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시켰다는 이유로 거짓 리더로 판정되어 교체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매우 소극적이게 되었고 또 많이 통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