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을 받음으로 얻은 유익
일본 단이저는 교회에서 두 팀의 복음 사역을 맡고 있어요. 일전에 주변의 어떤 형제자매들이 실제 사역을 안 하고 건성으로 본분해 해임되는 걸 보고 저도 좀 긴장되더라고요. 그래서 전 실제 사역을 하고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안 그럼 저도...
저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꽤 내성적이라 말수가 적고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밖에 나가려다가도 이웃들이 밖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덜컥 겁부터 나서,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여쭤볼 것이 있었는데,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몰라 아버지께 대신 말해 달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다른 집 애들처럼 시원시원하지 못하다며 화를 내셨습니다. 외숙모도 늘 저에게 “입에 자물쇠를 채운 것 같구나. 너 같은 애는 커서도 시원찮을 텐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른들의 그런 평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때로는 억울해서 울기도 했습니다. 왜 나는 말도 잘 못하고 어른들 비위를 맞출 줄 모를까 하는 생각에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말도 잘하고 분위기도 잘 띄우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습니다. 대학 시절,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하나님 말씀을 읽었습니다. 다들 마음을 열고 자신의 체험적 인식을 솔직하게 교제했고, 누구도 비웃지 않았습니다. 저도 눈치 보지 않고 마음을 열고 교제했고,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주 편안하고 해방감이 들었습니다.
2024년 1월, 저는 교회에서 새신자 양육 본분을 맡아 왕루 자매와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자매를 접해 보니 자질도 좋고, 전달력도 좋고, 진리도 잘 깨달은 편이었습니다. 예배 때 새신자들의 내적 상태에 맞춰 교제할 줄 알았고, 새신자들도 교제를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역시 하나님을 오래 믿은 사람은 다르구나! 말하는 것부터가 달라! 그에 비해 나는 새신자들이 질문할 때마다 한참을 생각해야 겨우 교제할 수 있고, 말도 왕루 자매처럼 유창하거나 자세하지 못해. 난 왜 이렇게 형편없을까? 지금 왕루 자매 얘기를 이어서 교제하면 새신자들이 분명 내가 자매보다 못하다는 걸 눈치챌 거야. 그냥 말하지 말자. 괜히 비교돼서 보잘것없어 보일 필요는 없잖아.’ 그 후로 왕루 자매와 함께 예배드릴 때면 혹시라도 말을 잘못해서 자매가 저를 얕잡아볼까 봐 감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새신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을 만났는데, 왕루 자매는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해 간단하게만 언급했습니다. 저는 그 방면의 체험이 있어서 좀 보충하고 싶었지만, 왕루 자매가 바로 앞에 있는데 제가 혹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자매가 저를 보며 고작 그런 수준인데 교제하려고 한다고, 정말 분수를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려던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왕루 자매가 간 뒤에야 교제했습니다. 또 한번은 왕루 자매, 리화 자매와 함께 새신자 예배를 드리는데, 제가 새신자들의 내적 상태에 대해 간단히 물어보자 한 새신자가 자기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공과를 배워야 하는지 교제하며 인도해 주려던 찰나, 생각해 보니 두 자매가 모두 있는 데다, 자질도 좋고 전달력도 좋은 그들과 달리, 저는 말주변이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요점을 제대로 짚지 못하면 두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제가 계속 말을 못 하자 리화 자매가 얼른 이어서 교제했는데, 자매는 새신자들을 처음 만났지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왕루 자매와 리화 자매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협력해서 교제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부러워서 ‘양육 사역은 역시 자매들처럼 자질도 좋고 말솜씨도 좋고 외향적인 사람이 맡아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돌아보니 예배 내내 거의 아무 말도 못 하고 마치 국외자처럼 느껴졌죠. 저 역시 속상하기도 하고,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시원시원하게 교제하지 못할까, 어쩌면 난 이렇게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본분에는 어울리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질이 좋고 전달력이 좋은 형제자매들과 예배드릴 때마다 저는 늘 긴장했습니다. 교제를 잘 못하면 남들이 얕잡아볼까 봐 두려워서 빛 비춤이 있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제가 해야 할 본분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런 내적 상태를 해결하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루는 제 상태와 너무나도 딱 맞는 하나님 말씀 두 단락이 생각나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외모도 뛰어나지 않고, 별로 똑똑하지도 않고, 말주변도 없는 탓에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애는 머리가 나쁘고, 빠릿빠릿하지도 못하고, 말재주도 없어. 다른 집 애는 사람 살살 녹게 말도 참 예쁘게 하던데, 이 애는 어떻게 된 게 종일 입이 댓 발 나와서는 사람을 봐도 한마디도 할 줄 몰라. 잘못을 해도 설명하거나 변명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 기분을 풀어 줄 줄도 몰라. 이 애는 멍청이야.”라고 말한다고 하자. 부모가 이렇게 말하고, 친척과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고, 선생님도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러한 환경으로부터 일정한 압박을 받을 것이다. 그러한 주변 환경을 경험하면서, 그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심리가 생긴다. 어떠한 심리겠느냐? 자기가 못생겼고,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자기를 싫어하고, 공부도 못하고, 둔하고, 숫기가 없어서 사람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누가 뭘 줘도 부끄러워서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말주변이 없을까? 남들은 왜 그렇게 말을 잘하는 거지? 나는 멍청이야!’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자기를 아주 한심하게 여긴다.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늘 속으로 자기한테 묻는다. ‘내가 정말 그렇게 멍청해? 난 정말 환영받지 못하는 거야?’ 부모가 싫어하고, 형제자매도 싫어하고, 선생님과 학교 친구들도 그를 싫어한다. 가족, 친척, 친구들이 틈만 나면 그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덩치 작고 눈이랑 코도 작은 걸 보면 나중에 커서도 별 볼 일 없을 거야.” 그가 거울을 보니 눈이 크지는 않다. 확실히 그렇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반발심, 불만, 거부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점차 자신의 부족함, 결점, 문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쪽으로 바뀐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떨쳐낼 수 없는 정서가 생겨난다. 그러한 정서를 무엇이라 하겠느냐? 열등감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 중에서), 『열등감은 표면적으로 보면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일종의 정서지만, 사실 근원적으로는 이 사회, 이 인류 및 사람의 주변 환경, 그리고 자신에게 존재하는 객관적 원인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사회와 인류에게서 비롯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 전체가 악한 자의 권력 아래 있어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었고, 그 누구도 다음 세대를 진리에 따라,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하지 못하며, 사탄에게서 온 것으로 교육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것으로 다음 세대를 가르치고 인류를 가르친 결과, 사람의 성품과 본질이 패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정서가 생겨나게 되었다. 생겨난 부정적 정서가 일시적인 것이라면 사람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내려 떨쳐낼 수도, 잊으려야 잊을 수도,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도 없게 된다면 반드시 여러 방면에서 사람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사람이 타인과 각종 일이며 사물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며, 사람이 근본적인 옳고 그름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영향을 주고, 사람이 일생에 걸쳐 걷는 길에 영향을 준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인류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다. 또 다른 방면은 사람 자신에게 존재하는 객관적 원인이다. 사람이 자라면서 받은 교육과 가르침, 받아들인 각종 사상 관점, 여러 처신 방식, 그리고 사람의 각종 말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은 닥친 문제를 정확한 각도와 입장에서 처리하고 풀 능력이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나서야 제가 형제자매들과 예배드릴 때 늘 얽매였던 것이 바로 저의 지나친 열등감 때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가족들로부터 말을 못 한다, 어른들 비위도 맞출 줄 모른다, 얘기할 때 우물쭈물한다, 다른 집 애들처럼 말을 시원시원하게 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 왔습니다. 그런 말들의 영향으로 저는 말을 못 하는 저 같은 아이는 다들 싫어하고, 말 잘하고 외향적인 사람이라야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열등감을 느꼈고, 사람 없는 구석에 숨기를 좋아했습니다. 이제는 교회에 와서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저는 여전히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자질이 좋고 전달력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예배드릴 때면, 제가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늘 자신을 부정하고, 간파할 수 있는 문제도 감히 교제하지 못하며 자매님들과 조화롭게 협력하지도 못했습니다. 열등감 속에서 사는 것은 본분 이행에 너무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후 또 하나님 말씀 두 단락을 보고 열등감을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정서가 생기면 너는 무력감을 느낀다. 일이 닥쳐 네 관점을 발표해야 할 때, 하고 싶은 말과 표현하고 싶은 관점을 마음속 깊이 수없이 곱씹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못한다. 다른 사람이 너와 똑같은 관점을 말하면 너는 그저 속으로 네가 남보다 못하지 않다는 게 증명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에 같은 환경이 닥쳤을 때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자. 무턱대고 나서지 말자.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자. 난 안 돼. 난 멍청해. 난 우둔해. 난 바보야. 나를 감출 줄 알아야 해. 듣기만 하고 말하지는 말자.’ 이런 점으로 볼 때, 사람에게 열등감이라는 정서가 생겨나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나면 사람의 자유 의지와 하나님이 부여한 사람의 정당한 권리가 이미 박탈당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박탈당한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 중에서), 『열등감 때문에 감히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하고, 자기가 다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조차 다하지 못한다. 자기 능력과 자질이면 충분히 가능하고, 자기 인성과 경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도 부담하지 못한다. 이러한 열등감은 그의 인성에 온갖 방면으로 영향을 끼치며, 그의 인격에도 영향을 끼치고, 당연히 그의 성격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는 사람들 속에서 자기 관점을 발표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가 자기 입장과 견해를 밝히는 걸 듣기란 어려운 일이다. 무슨 일이 닥치든 선뜻 입을 열지 못하며, 시종일관 움츠러들고 물러나기만 한다. 사람이 얼마 없을 때는 그나마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을 엄두를 내지만, 사람이 많을 때는 어떻게든 구석진 곳으로, 조명이 어두운 곳으로 숨으려 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한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말을 좀 하고 싶고, 자기 관점과 견해를 발표해 자기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그럴 용기조차 없다.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열등감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너를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입 열지 마. 넌 안 돼. 관점을 발표하지 마. 네 생각은 너만 알면 돼. 정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컴퓨터에 기록하고 혼자 소화해. 남이 알게 하지 마. 말 잘못했다가는 망신당한다고!” 그 목소리가 쉼 없이 네게 말한다.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하지 마라, 이 말 하지 마라, 저 말 하지 마라.” 결국 너는 뱉으려던 말을 도로 삼킨다. 하고 싶은 말을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생각했으면서 막상 말할 타이밍이 오면 중도에 포기한다. 말할 엄두를 못 낸다. 민망해서 말을 못 한다.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게 꼭 규정을 어기는 것 같고, 법을 위반하는 것 같다. 언젠가 자발적으로 자기 관점을 발표하게 되면 내심 극도로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한다. 그 극도의 불안감은 점차 사라진다. 하지만 말하고 싶고, 자기 관점을 발표하고 싶고, 정상인이 되고 싶고, 남들과 똑같고 싶다는 생각을, 그러한 마음가짐을, 그러한 계획을 열등감이 차츰차츰 덮어 버린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네가 말수가 적다고, 조용하다고, 낯을 가린다고, 나서기 싫어한다고, 사람 많은 데서는 말하는 걸 쑥스러워해서 얼굴이 빨개진다고, 비교적 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열등감 때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네 마음은 열등감으로 가득하며 네 열등감은 오래된 것이다. 일시적인 기분의 일종이 아니라, 네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네 생각을 단단히 통제하고 있으며, 네 입을 단단히 막고 있다. 이 때문에 네 내면에 어떤 순수한 이해가 있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어떤 관점과 견해가 있든, 너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고려할 뿐, 과감하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못한다. 남들이 인정해 주든, 아니면 지적하고 비판하든, 너는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일 엄두도, 볼 엄두도 못 낸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네 열등감이 네 안에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마. 넌 그럴 능력이 없어. 넌 그럴 자질을, 그럴 실제를 못 갖췄어. 넌 그래서는 안 돼. 그런 일을 하는 건 네가 아니야. 지금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열등감 아래서 사는 너야말로 진정한 너야. 너한테는 진리를 추구할 자격이 없어.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자격도, 남들에게 흉금을 터놓을 자격도 없어. 왜냐하면 넌 안 되니까. 남보다 못하니까.” 이런 열등감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람의 사상을 주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상인이 응당 다해야 할 의무와 응당 있어야 할 정상 인성의 생활을 억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 그리고 방향과 목표를 주도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 중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 집에 온 후 형제자매들이 예배에서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교제하는 것을 보고 저도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새신자를 양육할 때도 제가 깨달은 것을 다 교제해서 새 신자들이 유익을 얻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향적이고, 자질이 좋고, 전달력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저의 열등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습니다. 왕루 자매와 함께 예배드릴 때처럼, 자매가 전달력도 좋고 저보다 진리를 더 명확하게 교제하는 것을 보면 제가 자매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설령 자매의 교제에 부족한 점이 보여 보충하고 싶어도 입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행여나 말을 잘못해서 비웃음이라도 살까 봐 계속 뒤로 물러서기만 했죠. 리화 자매, 왕루 자매와 함께 예배드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배 내내 저는 마치 벙어리나 국외자처럼 마땅히 교제해야 할 것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네 몸에 달린 입인데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새신자 양육을 훈련할 기회를 준 것은 자매들과 협력하여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고 새신자들의 내적 상태와 어려움을 해결해 주라는 것이었는데, 저는 열등감에 얽매여 교제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고 제 본분조차 다하지 못하니, 이러다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점을 깨닫고 나니, 만약 제가 계속 이런 부정적인 정서 속에서 산다면 분명 본분 이행에 영향을 미치고 제 생명 진입에도 큰 손실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열등감 속에서 살려니 너무 답답합니다. 제가 이 부정적인 정서정에서 벗어나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세요.”
그 후 저는 ‘왜 나는 자질 좋은 자매님만 만나면 감히 교제하지 못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루는 한 자매에게 솔직하게 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자매가 하나님 말씀 한 단락을 보내 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에서 어른이 자주 말하는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것은 네가 명예를 중시하고 체면이 서는 삶을 살면서 망신당할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이끄느냐, 아니면 부정적으로 이끄느냐? 너를 진리로 이끌겠느냐? 네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네가 과오를 저지르거나 잘못된 일을 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진리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를 인식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해부하고 진정으로 회개한 다음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 되려 할 때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과 상충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부분이 상충되겠느냐?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은 사람이 화려한 모습을 살아 내는 것을 중시하여 체면이 서는 일을 많이 하라고 하지, 옳지 않은 일, 불명예스러운 일을 해서 자신의 추한 면을 드러내라고 하지 않는다. 망신을 당하거나 존엄하지 않게 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체면과 체통, 명예를 위해 자기를 쓸모없는 사람처럼 말하면 안 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어두운 면이나 떳떳하지 못한 부분을 남에게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체면을 세우고 존엄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존엄은 사람의 체면에 달려 있고, 사람의 체면은 가식과 포장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과 상충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정직한 사람으로 살 때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에 정확히 위배되는 것이다. 네가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체면을 차리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체면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진리 앞에서 사람은 자신을 폭로해야지 위장이나 가식을 떨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진정한 생각과 잘못한 일,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부분 등의 실상을 낱낱이 하나님에게 보이고 형제자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체면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진정한 피조물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구원받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 종종 가정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들에 지배되어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 포장하고 위장하며 생각할 것이다. ‘말하면 안 돼. 아는 사람도 말하면 안 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끝장을 보겠어. 내 체면이 우선이야. 산다는 건 다른 걸 위한 게 아니라 바로 체면을 위한 거지.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해. 사람이 체면을 잃으면 존엄도 잃는 거야. 그래서 사실도 사실대로 말해서는 안 되고 위장하고 포장해야 하는 거야. 안 그러면 체면이나 존엄은 실추되고 삶의 가치도 없어지는 거야. 존중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싸구려가 되는 거야.’ 네가 이렇게 실행한다면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자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해부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이 네게 교육한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을 따르는 것이 분명하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제가 어릴 때부터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와 같은 사탄의 독소에 물들어 허영과 체면을 너무 중시했고,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제 체면이 손상될 만한 일만 생기면 피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주변이 없었던 저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집에 손님이 오면 얼른 숨어 버리곤 했습니다. 지금 왕루 자매와 함께 예배드릴 때도, 자매는 전달력이 좋고 저는 말주변이 없으니, 교제했다가 자칫 자매에게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망신을 당할까 봐 감히 말을 못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어 본분에 충성하라고 요구하시지만, 저는 제 체면을 지키기 위해 문제를 보고도 감히 교제하지 못했고, 제가 할 수 있는 본분조차 다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체면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사탄에게 고통받아 인격과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환경에 놓이면 반드시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자신을 포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며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할 거야!’
그 후, 저는 또 열등감을 해결할 길을 계속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매우 내성적이어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삼사십 대의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성격을 극복하지 못해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솜씨가 없으며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서툴다. 그는 리더가 된 후에도 이런 성격 때문에 사역에서 어느 정도 제약받고 가로막혀 늘 이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뇌하며 심각하게 속박받는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모두 정상 인성의 모습이다. 이런 것들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라면, 하나님은 과오로 보겠느냐? 전부 과오가 아니며, 하나님은 이를 올바르게 대할 것이다. 네게 어떤 문제와 결함, 허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원래부터 갖추고 있는 정상 인성의 조건하에서 네가 어떻게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며, 어떻게 진리 원칙대로 행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지를 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에서는 정상 인성의 자질이나 본능, 성격, 습관 또는 생활 리듬 등 기본적인 조건에 제약받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기본적인 조건들을 극복하는 데 정력과 시간을 쏟아붓지도 말아야 하며, 이를 바꾸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면, 성격이 내향적이고 과묵하며 언변이 좋지 않은 데다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거나 접촉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향적인 사람은 말이 많긴 하지만 그 말이 항상 유용하거나 진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향적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바꾸려고 시도할 필요도 없다. … 네가 원래 어떤 성격이든 그대로 두고, 구원받기 위해 성격을 바꾸려 하지 마라. 그것은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사람의 성격은 객관적 사실로, 너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객관적 원인을 보면,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고자 하는 성과는 네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와 아무 관계가 없고, 네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여부 역시 네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지,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인지도 네가 어떤 성격인지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본분을 이행한다거나 어떤 사역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해서 성격을 바꾸려 하지 마라.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럼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성격을 지녔든, 어떤 선천적 조건을 갖추었든 네가 지키고 실행해야 할 것은 진리 원칙이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지,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판단할 때, 네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자질이나 능력, 재능, 은사, 재주를 타고났는지 등은 보지 않는다. 물론 네가 육체적 본능과 필요를 얼마나 억제했는지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했는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다짐이 있는지를 본다. 결국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데 이르렀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바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말씀ㆍ7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내성적인 성격은 타고난 조건일 뿐, 하나님 보시기에는 문제 될 것이 없으며, 하나님 사역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사람의 자질이나 성격을 바꾸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조건 안에서 진리를 실행하고, 마음과 힘을 다해 자기 본분을 다하며, 옳지 않은 마음이 생길 때 그것을 저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본분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라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비록 제가 내성적이고 말주변은 없지만, 새신자들의 일부 내적 상태와 문제는 해결할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면 새신자들도 알아듣고 유익을 얻을 수 있으니, 성격상의 결함이 제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저로서는, 본분 이행에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저는 이를 올바르게 대하고, 깨달은 만큼 교제하며, 자신을 포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협력하는 자매님들과 서로의 장단점을 배우며 보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제 본분을 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의 부족한 점도 채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깨닫고 나니 중압감도 훨씬 덜했고, 저의 잘못된 내적 상태를 바로잡고 협력하는 자매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본분을 잘 이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교회 리더로 선출되어 리후이 자매와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리후이 자매는 예전에 설교원을 한 적이 있어서 자질도 좋고 사역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자매와 처음 예배를 드릴 때였는데, 한 자매의 내적 상태가 좋지 않아서 리후이 자매가 하나님 말씀을 찾아 그 자매에게 교제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매는 인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침 저도 어떤 일을 막 겪고 그 자매의 내적 상태와 비슷한 상황이라 보충을 좀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입을 떼려니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마음속으로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혹시 교제를 제대로 못하면 리후이 자매가 저를 어떻게 볼까 걱정도 되었죠. ‘에이, 그냥 자매 교제를 듣자. 자매 교제로도 해결 안 되는 문제를 내가 교제한다고 뭐 얼마나 더 낫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의 부담이 없어져서 듣다 보니 조금씩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저는 제 내적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자매의 내적 상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제 본분이므로, 제가 깨달은 것을 최선을 다해 교제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얼른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교제를 잘못해서 자매가 저를 얕잡아보고, 결국 제가 들러리가 될까 봐 두렵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제 육을 저버리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도록 저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세요.” 기도를 마치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나는 새신자인데, 교제에 분명 부족한 점이 있을 거야. 설령 자매님이 비웃더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내가 깨달은 것을 교제해야 해.’ 마침내 저는 용기를 내어 교제했습니다. 뜻밖에도 제 교제를 통해 그 자매는 자기 문제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큰 짐을 내려놓은 듯했고,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편안하고 기뻤습니다. 제가 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렸어요. 그 후로는 말 잘하는 자매님들과 예배드릴 때도 예전처럼 체면에 얽매이지 않고, 제가 깨달은 만큼 교제하게 되었죠. 이렇게 실행하니 정말 좋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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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단이저는 교회에서 두 팀의 복음 사역을 맡고 있어요. 일전에 주변의 어떤 형제자매들이 실제 사역을 안 하고 건성으로 본분해 해임되는 걸 보고 저도 좀 긴장되더라고요. 그래서 전 실제 사역을 하고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안 그럼 저도...
중국 한칭(韓靑)2023년 9월에 저와 협력하던 자매가 경찰에 잡혀갔어요. 그때 전 교회 리더였는데, 형제자매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는 걸 보면 붙들어 줘야 했고, 뒷수습도 잘 해야 했어요. 정말 속이 타더라고요. 쉴 틈도 없이 일단 말씀 책부터...
작년 1월경에 교회 리더가 리신(李欣)이랑 저한테 교회 문서 사역을 책임지게 했어요. 제가 초짜다 보니까 리신이 저한테 준 사역량이 별로 많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어려움이나 무슨 문제가 있으면 리신이 원칙에 결부해서 교제를 해 줬어요. 그러니까 제가...
한국 신뤼(心叡)2016년 어느 날, 느닷없이 투서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예전에 제가 교체한 자매 두 명이 보낸 것이었죠. 제가 그들과 함께 본분을 이행할 때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굴면서 거짓 리더 둘을 발탁하여 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그 거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