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에는 나이가 없다
최근 몇 년은 혈압도 높고 몸도 좋지 않아서 그냥 집에서 쉬면서 힘닿는 대로 본분을 조금 이행하고 있었어요. 2022년 7월 양육 사역 책임자는 제가 예전에 새 신자 양육을 했었다는 걸 알고 다시 그 본분을 맡겨 줬어요. 다시 그 본분을 맡게 되니까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이 본분을 잘 완수하겠다고 다짐했죠. 보니까 책임자 두 사람 다 30살 정도에 자질도 좋고 원칙에 대한 이해도 빠르더라고요. 그리고 신신(辛欣) 자매의 경우는 젊은데다 생기가 넘치고 이해력도 좋으니까 얼마나 기쁘던지요. 60대인 제가 이렇게 젊은 형제자매들이랑 본분을 이행하니까 마음이 젊어지는 느낌도 들었어요. 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새 신자들과 예배를 드렸고, 막 저절로 흥이나 노래를 불렀고 본분 이행에 대한 열정이 넘쳤어요. 본분을 조금 하다 보니까 원칙을 파악하는 데서나 생명 진입에서나 조금씩 발전이 보이니까 그 본분이 너무 마음에 들고 좋은 거예요.
기쁜 건 기쁜 건데 문제는 고민이 하나 있었어요. 혈압이 높은 편이고 몸도 편치 않으니까 본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쑤시는 게 당장 누워서 쉬고 싶은 거예요. 근데 신신 자매네는 예배를 마치고 와서도 본분에서 생긴 오류나 문제점을 계속 정리하고 다음 날 사역을 미리 잘 배정하는 거예요. 저도 젊은 자매들처럼 조금 더 하고 싶었지만, 저녁만 먹고 나면 너무 졸려서 일찍이 잘 수밖에 없었어요. 한번은 3일 정도 밤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몸이 힘들어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없었어요. 결국 신신 자매가 저 대신 예배에 갔었죠. 속상하더라고요. 그냥 본분도 제대로 못 해서 남의 손을 빌려야 하니까 이 본분에서 손을 뗄 날도 멀지 않았겠구나 싶었어요. 또 가끔은 책임자가 새 신자 양육에 관한 원칙과 실행의 길을 교제해 주면 자매들은 바로 알아듣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알듯이 바로 본분에 적용했어요. 근데 저는 한참 생각해야 하고 가끔은 책임자한테 다시 교제해 달라고 해야 했었죠. 그때는 제가 나이가 많고 몸도 안 좋고, 이해하는 것도 느리고 기억력도 떨어지는데, 어느 날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이 길에서도 종점에 이르는 게 아닌지, 구원받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하고 밤에 잠도 제대로 안 오더라고요. 뭔가 저도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생기면서 본분에 집중이 잘 안됐고, 본분에서의 효과도 신신 자매에 비해 확연히 떨어졌어요. 저는 나이가 든 제가 너무 싫었고 이제 늙어서 쓸모없다고 단정 지었어요. 그러니 이 본분에서 손을 놓으라고 할까 봐 걱정하고 젊은 자매들이 부러웠어요. ‘내가 20년만 젊어서 저렇게 팔팔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끝까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망도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자연스레 제 종착지를 위해 근심하고 염려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 날 리더가 제 거처에 찾아와 예배드리고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자매님 연세도 있으시고 혈압도 높으셔서 본분을 관리 사무로 바꿔 드릴게요. 이제 나가 다니지 않으셔도 돼요.”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난 새 신자 양육이 너무 좋은데, 한 번도 포기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고민할 시간도 안 주고 이렇게 바꿔 버리는구나. 이제 나이도 점점 많아지는데, 앞으로 새 신자 양육 본분을 할 가능성은 더 없겠구나.’ 뭔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마음의 열정이 확 식어 버렸어요. 형제자매들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교제를 해 주어도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계속 앉아는 있었지만, 몸에 기운이 다 빠졌죠.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계속 뒤척였어요. ‘젊은 형제자매들은 젊고 생기 넘치고 진리를 깨닫고 원칙에 진입하는 것도 빠르니까 양성 가치가 있지, 역시 젊어야 미래도 창창하구나. 나같이 늙은 사람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어도 몸도 안 따라 주고 이해력도 떨어지고 양성 가치가 없긴 하지. 하나님은 나 같은 늙은이는 좋아하시지 않을 거야. 앞으로 좋은 종착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20년만 젊어서 하나님께 모든 걸 위해 온전히 헌신할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수록 더 괴롭고,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한 게 힘들더라고요. 단순 본분이 조금 바뀐 건데 저는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어요.
다음날 양육자들의 예배가 있었는데, 마침 책임자 자오량(趙亮)이 제가 있는 곳을 지나갔습니다. 형제가 예배에 가는 걸 보니 저는 너무 속상했어요. “내가 본분만 바뀌지 않았어도 저들 예배에 같이 참여했을 텐데, 이제는 그럴 기회도 없겠네. 내가 나이 많고 몸도 아픈 걸 누굴 탓하겠어.”라는 생각이 드니까 뭔가 더 허전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어요.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는데, 뭔가 이제는 신앙에서는 희망이라는 게 없는 것 같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가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럴수록 더 괴롭고 저절로 막 눈물이 났어요. 그래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본분에서 조정됐지만, 마음에서는 받아들이고 순종하기 힘듭니다. 이게 당신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고 당신이 싫어하시는 태도임을 압니다. 하나님! 제가 저 자신을 알고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나중에 제가 내적 상태가 많이 안 좋으니 자오량이 알고 하나님의 이 말씀을 읽어 주더라고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분이 조정될 때는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새로운 본분에서 한동안 훈련받고 성과를 내고 나서 스스로 그 본분에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또 자기 기호대로 본분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 문제는 해결된 것 아니겠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어떤 본분을 안배할 때,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의 기호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사역상의 필요와 성과를 낼 수 있을지에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 집에서 개인의 기호에 맞춰 본분을 안배해야 하겠느냐? 개인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것을 전제로 사람을 써야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쓰는 원칙에 부합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 집의 사역 필요와 본분 이행의 성과에 근거하는 것이다. 네게도 나름의 기호와 취미가 있고, 본분을 이행하고 싶다는 바람이 좀 있겠지만, 네 바람과 취미, 기호가 하나님 집의 사역보다 우선해야 하겠느냐? 만약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서 “저는 이 사역을 하겠습니다. 이 사역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살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 본분도 이행하고 싶지 않을 거고요. 이 사역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뭘 하든 의욕을 느끼지 못하고, 최선을 다하지도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본분 이행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개인적인 바람과 취미,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 사역에 영향을 끼치고 지장을 주는 것을 불사하는 이런 행동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일은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어떤 이는 “나를 희생하고 대의를 이루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이 말이 진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어떤 말이냐? (사탄의 궤변입니다.) 이것은 억설이자 사람을 미혹하는 말, 위장하는 말이다. “나를 희생하고 대의를 이루라”라는 말을 본분 이행에 적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어째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네 뜻을 하나님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모독이다! ‘나’를 희생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온전케 되고 축복받으려는 너의 속셈은 바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무언가를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실행하고 육을 저버리라고 요구한다. 네가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네 속셈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네 말은 진리에 완전히 어긋난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네게서 본분 이행의 권리를 빼앗아 가지 않았다. 다만 네가 그 본분에 어울리지 않기에 본분을 조정하여 네게 어울리는 본분을 다시 안배해 주었을 뿐이다. 이는 무척 정상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일이니 올바른 태도로 대해야 한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2조 복받을 희망이나 지위가 없으면 물러나려 한다> 중에서) 이 말씀을 읽고 자오량 형제가 이렇게 교제해 주었어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조정하는 건 개인의 본분 이행과 구원받을 기회를 빼앗는 게 아니라 교회 사역의 사정에 따라서 적합하게 배정하는 겁니다. 자매님은 연세가 있으신 데다 혈압까지 높은데, 자전거 타고 계속 예배드리러 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시게요? 본인한테도 이롭진 않잖아요. 지금은 관리 사무가 조금 더 적합한 거예요. 우선 순종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이면서 공과를 배우시죠.” 형제의 교제를 들으니 부끄러웠어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가 전혀 없었잖아요. 제가 양육 본분을 좋아하고 본분에 대한 열정이 젊은 사람 못지않은 건 맞지만 그래도 60대에 몸도 안 좋고, 에너지나 기억력이나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도 젊은 사람보다 못한 게 사실이잖아요. 근데 계속 저한테 양육을 맡긴다면 새 신자 양육 사역의 효과에 영향이 갈 수도 있고요. 더구나 교회에서는 사역의 효과와 제 몸 상태를 고려해서 적합한 본분을 맡겨 준 건데, 당연히 지성적으로 먼저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하죠.
나중에 본분이 바뀌는 일이 생겼을 때 저는 왜 순종이 안 됐는지, 왜 그렇게 다운되었는지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찾고 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죠. 『형제자매 중 일부 연로한 사람들, 다시 말해 60대에서 80, 90대의 사람들도 많은 나이로 인한 고충을 가지고 있다. 굳이 나이가 많다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그들의 생각이 그렇게 정확하거나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고 생각과 관점이 진리에 부합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들 연로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충이 있으니 그들은 항상 이렇게 걱정한다. ‘이제 몸도 따라 주지 않고 이행할 수 있는 본분도 한정적이구나. 이 정도 본분만 이행해서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려나? 병에 걸려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을 텐데 돌봐 줄 사람이 없을 때는 홀로 본분을 이행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나이를 먹으니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기억이 안 나고 진리를 깨닫기도 쉽지 않다. 진리를 교제할 때 횡설수설하며 논리적이지 않고 이렇다 할 체험도 없구나. 나이를 먹으니 기운도 없고 시력도 나빠지고 체력도 달린다. 다방면으로 고충이 많으니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툭하면 깜빡하고 실수한다. 때로는 흐리멍덩해서 교회나 형제자매에게 폐를 끼치니, 이래서는 구원받고 싶어도,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도 힘들겠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어떻게 이 나이에 하나님을 믿었을까? 왜 남들처럼 20, 30대 아니면 하다못해 40, 50대에 믿지 못했을까? 어째서 이렇게 늙어서야 하나님의 사역을 따르게 되었을까? 팔자가 사납다고 하자니 그렇지도 않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역을 따르게 되었으니 팔자가 좋은 편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단지 원치 않게 나이를 많이 먹어 기억력도, 건강도 좋지 않고, 열의는 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걱정인 것이다. 예배 시간에 조금만 듣고 있어도 졸리고, 눈을 감고 기도하면 잠들 때도 있다. 하나님 말씀도 입으로만 읽을 뿐, 조금만 읽어도 졸리고 노곤하여 읽어 나갈 수가 없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런 현실적 고충에도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을 수 있을까?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없을 텐데 그렇게 되면 허투루 믿은 게 아닐까? 구원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럼 어쩌지? 걱정이다! 이 나이 먹고 무엇이 중요하겠나. 이왕 하나님을 믿었으면 걱정하거나 근심할 게 무엇이냐. 아들딸 모두 장성하여 내가 돌봐 주거나 보살피지 않아도 된다. 평생 가장 큰 소망은 살아 있는 동안 진리를 추구하고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이행하여 마지막에 구원받는 거다. 하지만 지금 나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을 보면 늙어서 눈도 침침하고 흐리멍덩해. 건강도 나빠졌으며 본분도 이행하지 못한다. 힘닿는 대로 일을 해 보지만 폐만 끼칠 때도 있으니 이래서는 구원받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라고 걱정한다. 생각하다 보니 근심하게 된다. ‘좋은 일은 모두 젊은이들과 관련 있지 연로한 사람과는 무관한 것 같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든 내가 누릴 복은 없는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근심하고 염려한다. 자기를 걱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때문에 속상해한다. 울자니 딱히 울 일도 아니고, 울지 않으려 하나 약간 마음이 쓰리고 아프니 어쩌면 좋겠느냐? 특히 일부 연로한 사람은 풀타임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지만 병을 앓고 있다. 혈압이나 혈당이 높거나 위장병이 있어 체력도 달리니 근심한다. 젊은이들이 잘 먹고 마시며 잘 뛰고 달리는 것을 보면 부러울 따름이니 이런 젊은이들을 볼수록 근심만 깊어진다. ‘본분을 잘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고도 싶은데 어쩌면 이렇게도 어렵기만 할까? 정말 늙으면 쓸모가 없어지는구나! 설마 하나님에게 노인은 필요 없는 걸까? 나이를 먹으면 정말 쓸모없어지는 걸까? 구원받지 못하는 걸까?’ 어떻게 생각해도 괴롭고 즐겁지 않다. 이렇게 좋은 시기와 기회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지만 젊은이들처럼 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연로한 사람들은 자기 나이 때문에 깊은 근심과 염려, 걱정에 빠진다. 고충과 좌절, 우여곡절과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나이를 원망하고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며 싫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별수도 없고 선택의 여지도 없다. 진정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냐? 방법이 없겠느냐? (노인도 힘닿는 데까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 노인이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냐? 노인이 설마 늙었다는 이유로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노인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느냐? 그들도 부분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젊은이들도 전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인이 항상 착각하는 한 가지는 자신이 흐리멍덩하고 기억력도 없으니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청년은 노인보다 기운이 넘치고 체력도 좋지만 이해하고 깨닫고 인식하는 능력은 사실 노인과 똑같다. 노인도 청년을 거쳐 온 것이 아니더냐? 태어날 때부터 늙은 것도 아니다. 청년 역시 결국은 늙기 마련이다. 노인은 자기가 늙어서 체력이 달리고 건강하지 않으며 기억력이 나쁘다고 청년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차이가 없다. 여기서 차이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이더냐? 노인이든 청년이든 패괴 성품이 같고 여러 사물을 대하는 태도, 관점이 같으며, 여러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 역시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노인은 자기가 늙었으니 젊은이에 비해 지나친 욕망이 적어 침착할 수 있다거나, 자기에게 야심과 욕망이 없다거나 패괴 성품이 적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착각이다. 청년이 지위를 놓고 경쟁한다면, 노인은 지위를 두고 경쟁하지 않겠느냐? 청년이 원칙을 위반하고 독단적으로 일 처리한다면, 노인은 안 그러겠느냐? (그럽니다.) 청년이 교만하면 노인도 교만하지 않겠느냐? 단지 노인이 교만할 때는 나이가 들어 그렇게 날뛰거나 흥분하지 않을 뿐이다. 청년은 몸과 사고가 유연하기에 교만한 모습이 좀 더 확연한 데 반해 노인은 몸이 굳고 사고도 유연하지 않다 보니 교만한 모습이 그렇게 확연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교만한 본질과 패괴 성품은 똑같다. 노인이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나 되었든 몇 년간 본분을 이행했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패괴 성품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하나님은 저처럼 나이 든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를 짚어 주셨죠. 노인도 하나님께 온 시간을 바쳐 헌신하고 싶어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질 않으니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맡아서 하면 되는데, 이행한 본분이 많지 않으면 하나님께 기억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이제 자기는 나이도 많고 눈도 흐리고 진리도 잘 깨닫지 못하니 미래와 종착지를 위해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거라고요. 하나님이 폭로하신 사람의 상태가 바로 저였어요. 젊은 형제자매들은 자질도 좋고 활기차고, 새로운 것도 빨리 습득이 되는데, 저는 나이가 많으니까 마음은 앞서지만, 몸이나 기억력이 다 젊은 사람에 비해 많이 뒤처졌어요. 똑같이 하루 동안 본분을 이행하지만 젊은 사람은 혈기 왕성하니까 저녁에 들어와서도 그날 사역하면서 드러났던 문제점이나 오류, 실행의 길을 정리하였는데, 저는 힘들어서 일찍이 자야 했거든요. 또 가끔은 몸이 안 좋아서 다른 사람이 저 대신 새 신자 양육에 가야 하기도 했고, 책임자가 원칙이나 방향성에 대해서 똑같이 교제를 해 줘도 젊은 사람은 바로 이해하고 본분에 활용하는데, 저는 한참 생각하고 고민해야 조금 이해가 됐거든요. 젊은 형제자매랑 비교하면 씁쓸했죠. 나이 들어서 본분도 많이 이행하지 못한다고 원망하고, 진리를 추구해도 많이 깨닫지도 못하니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실 거라면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자기도 모르게 종착지에 대한 근심과 염려에 빠져 살고 있었어요. 근데 말씀 보고 깨달았어요. 젊고 늙고는 체력과 기억력의 차이가 있을 뿐, 젊거나 나이 들거나 패괴된 성품을 가진 건 매한가지였어요. 젊은 사람이 교만하면 나이 든 사람도 교만하고, 젊은 사람이 이기적이라면 나이 든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상황을 주시면 마찬가지로 패역의 성품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 이득이 조금 손해 볼 것 같으면 다 자기 몸을 먼저 챙기면서 이기적이고 비열한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건 다를 게 없었어요.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사탄에 의해 심하게 패괴된 건 마찬가지니 다 자주 자신을 반성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구하면서 패괴된 성품을 해결해야 하죠. 근데 저는 계속 나이와 본분의 양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기준의 잣대로 적용하면서 하나님은 노인을 기뻐하지 않으실 거고, 노인은 구원받을 가망도 적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치우친 관점이었어요. 당장 제가 해야 할 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힘닿는 대로 본분을 이행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거더라고요. 그래야 하나님 뜻에 맞는 거였어요. 이걸 깨달으니까 마음이 좀 환해졌어요.
어느 날 아침 영 생활을 하면서 이 말씀을 보게 됐는데, 너무 좋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진리 앞에서 노인이 특수한 집단이더냐? 아니다. 진리 앞에서 나이를 묻지 않고, 패괴 성품 역시 나이를 묻지 않는다. 패괴된 정도도, 진리를 추구할 자격의 유무도, 구원받는 여부도, 구원받을 가능성도 나이를 묻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년간 진리를 교제했지만 연령대에 따라 여러 진리를 교제한 적도, 청년이나 노인만 단독으로 진리를 교제하거나 패괴 성품을 폭로한 적도 없다. 또 노인은 나이가 많고 사고가 경직되어 새로운 사물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패괴 성품이 줄어들어 변화하게 된다는 식으로 말한 적도 없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할 때든 나이로 구분 짓고 노인을 배척한 적이 없었다. 노인은 교회에서나 하나님 집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집단이 아니고 모든 연령대의 사람과 똑같다. 그들이 별다른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남보다 오래 산 것뿐이다. 그저 남보다 이 세상에 몇 년 일찍 왔고, 남보다 머리가 좀 더 희고 몸의 노화가 조금 먼저 왔을 뿐이다. 특별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말씀을 보고 깨달았어요. 하나님 집에서 노인들은 특별한 무리가 아니었어요. 단지 나이가 조금 많고 몸이 조금 노화되고 병치레가 조금 있을 뿐이고, 젊은 사람보다 활력이나 생기가 조금 부족할 뿐이지 진리 앞에서는 나이의 구분이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말세에 말씀을 선포하시고 심판 사역을 하실 때, 노인과 젊은 사람을 구분하시지는 않으셨죠. 나이가 많든 적든 사탄에 의해 깊이 패괴된 건 매한가지라 모두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상태죠.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나이에 따르는 게 아니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지에 달린 것도 아니고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는지에 달린 것이죠. 그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따라 정해지는 거였어요. 이방인의 세계에서는 노인들이 일하러 가면 순발력이 떨어지고 체력도 안 되고 어떤 혁신을 이뤄낼 수 없다고 판단하니까 대접을 받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사장들도 나이 든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을 반기는 거고요. 근데 제가 그런 세상 사람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있었어요. 하나님 집에서도 젊은 형제자매들이 본분에 공헌이 크니까 구원받을 가망이 클 테고, 노인들은 별 볼 것 없는 본분을 맡아서 별로 공헌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 하나님도 노인들을 기뻐하지 않으실 거라고, 구원받을 가망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다 제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모르고 그저 제 생각과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가늠해서 그런 거였어요. 그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잖아요! 또 저는 하나님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으니 하나님은 진리로 각 사람의 소행을 판단하신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아는 자매의 경우가 그랬죠. 젊고 머리도 좋아서 리더의 본분을 맡았지만 항상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했고, 심지어 의견을 제시한 형제자매들을 괴롭히고 억압했어요. 결국은 악인으로 드러나 출교 됐거든요. 하지만 다른 자매는 나이도 더 많고 학력도 더 낮고 자질도 일반적이었지만 자기가 맡은 본분을 굳게 지키고,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을 바치고 본분에 충성을 다 했거든요. 그런 사람은 몸이 조금 좋지 않고 기억력이 조금 떨어지는 노인이라도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이행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는 것을 중시하고 성품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인정받고 구원받을 기회도 얻게 되죠. 게다가 인간의 삶의 법칙은 다 젊음에서 늙음으로 가는 거고, 그것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거니까 전 마땅히 순종하고 지금 나이에서 힘닿는 대로 본분을 이행하면 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사실 제 마음의 자세가 바르고 진리를 구하는 것에 더 신경 쓴다면 하나님의 깨우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건 다를 게 없잖아요? 자신의 패괴함과 부족함을 알게 되는 것도 달라질 게 없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달라질 게 없잖아요? 하나님은 제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않으셨고, 노인이라고 차별하시지도 않으셨어요. 근데 전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노인을 기뻐하지 않으실 거라고 오해하면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반항만 했어요. 정말 이성이라고는 전혀 없었어요. 이런 걸 깨닫게 되니까 후회가 밀려왔고, 더는 하나님께 거역하고 하나님을 오해할 게 아니라 제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고 지금 맡은 본분에 잘 협력하면서 교회 사역에 지장을 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또 생각해 봤어요. 본분 이행은 복을 받고 화를 입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왜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본분으로 옮겨졌을 때는 저도 모르게 종착지를 위해 근심하고 있는지, 과연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말이죠. 그러다 예배 시간에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줬는데, 그 말씀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패괴된 인류는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사람의 본성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 자신을 위해서이고,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는 것도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서이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또한 자신이 상을 받기 위해서이다. 결론적으로 전부 자신이 복을 받거나 상을 받고, 천국에 가기 위한 것이다. 세상에서 일을 하는 것은 다 자신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서이다. 복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많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사람에게 사탄 본성이 있음을 가장 잘 입증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이행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앞날이나 복받는 것, 좋은 종착지, 나아가 면류관에 마음속 깊이 한껏 기대를 품고, 큰 믿음을 갖는다. 또 그는 이런 속셈과 포부를 갖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한다. 그러니 그가 이행하는 그 본분에 하나님이 바라는 진심과 참된 믿음, 충심이 있겠느냐? 이때, 그 사람에게선 참된 충심이나 믿음, 진심을 찾아볼 수 없다. 본분을 이행하기 전까지 그는 거래하겠다는 생각뿐이었으며, 이익에 이끌리고 야심과 욕망으로 점철된 상황에서 본분 이행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은 무엇이겠느냐? 거래와 교환을 하는 것이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전제 조건은 ‘본분을 이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인류에게 예비된 모든 복과 이점들을 다 얻어야 한다고.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 거야.’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속셈과 야심, 욕망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하는데, 얼마간 진심이 있는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이제 막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열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진실한 믿음과 충심이 없다. 그저 그 정도의 열정이 있을 뿐, 진심을 이야기할 것은 못 된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본분 이행 태도를 통해 볼 때, 그의 내면은 거래 심리로 점철되어 있으며,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고 면류관을 얻고 상을 받는 등 이점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7)> 중에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말씀을 보니 제가 드러낸 모습은 적그리스도와 같은 거였어요.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목적이 모두 복을 얻고 천국에 가기 위함이었거든요.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사탄의 독소에 따라 살았거든요. 그땐 자기 이득부터 챙겨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제가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아무리 고생하고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해도 다 했어요.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은 뒤에는 하나님께 헌신하며 본분을 하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큰 복은 돈과 물질로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저는 가정과 직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본분에 임했던 거예요. 리더가 양육 본분을 맡겨 주었을 때, 저는 양육 본분은 말씀도 많이 볼 수 있고, 진리 교제를 나눌 기회도 많으니까 그만큼 진리를 얻고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그 본분을 잘 이행해서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고 생각했죠. 근데 본분을 대하는 제 자세는 적그리스도와 다를 게 없었어요. 오직 복을 받기 위한 거였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시는 것이었죠. 비록 제가 본분에 대한 열정은 넘쳤지만 몸도 안 좋고 나이도 있으니까 정신력이나 체력이나 기억력이 다 부족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거든요. 근데 계속 양육을 맡게 된다면 지장을 주게 되고 양육의 효과에도 영향이 가게 되잖아요. 정말 이성적이고 자신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라면 복을 받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본분에 협력할 수 있게 하는 게 교회 사역에 이로운 거잖아요. 근데 전 복을 얻는 데에만 마음이 가 있고 본분 이행의 기회를 이용해 복을 얻겠다는 욕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본분이 바뀔 때는 그 복을 받을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했던 거예요. 그게 어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겠어요? 저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탄의 독소에 꽁꽁 묶여 있었어요. 그러니까 모든 일에서 이익과 복을 얻을 수 있을지부터 생각했고 개인의 이익을 진리보다 크게 생각했던 거고, 교회 사역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정말 이익만을 추구했어요. 제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지금까지 많은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받으면서 진리를 조금 깨닫게 됐고, 피조물로서의 본분도 이행할 수 있게 된 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잖아요. 근데 저는 감사하거나 그 은총에 보답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조금만 제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했거든요. 어찌나 이성이 없었는지 말이죠. 하나님께서 제때에 이렇게 드러내 주셨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저는 계속 거래적 속셈을 품고 본분을 이행했을 거예요. 그러면 진리를 얻지도 못하고 구원받을 수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염증만 사고 도태됐을 거예요. 이런 걸 깨달으니까 죄책감이 밀려오고 후회됐어요. 그래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당신을 따르면서 순종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당신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전 정말 양심이 없습니다. 저는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복을 얻어 낼 수 있는 본전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당신이 미워하는 짓만 골라 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회개하오니 제가 당신의 말씀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영 생활할 때 이 말씀을 보면서 실행의 길을 찾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노인은 살면서 진리와 생명 진입을 더욱 추구하고 형제자매와 조화롭게 협력하여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분량이 자랄 수 있다. 절대 나이만 앞세워 거드름을 피우지 마라. 청년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거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으면 너도 마찬가지이다. 청년에게 있는 관념이나 패역은 노인에게도 있다. 청년이 적그리스도 성품을 드러낼 수 있으면 노인 역시 드러낼 수 있으며 청년에게 있는 야심과 욕망은 노인에게도 있다.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청년은 방해하고 교란할 수 있고 제명될 수 있다. 노인 역시 방해하고 교란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제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힘닿는 데까지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 말고도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척 많다. 네가 멍청하거나 치매가 있어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 이상 네가 해야 할 일은 많다. 청년처럼 진리를 추구하고 구할 수도 있다. 또한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네가 걸어야 할 길이다. 자신이 나이가 많고 병치레가 잦으며, 육신이 노화되었다 하여 늘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해서는 안 된다.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네가 할 일이 아니다. 이는 이성적이지 못한 태도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맡겨 주든 하나님의 뜻은 제가 그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고 진리로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본분 이행을 통해 원칙대로 일 처리하는 훈련을 하면서 구원에 이르는 길에 들어서기를 바라시는 것이죠.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이행하는 것 외에, 시간 날 때면 제가 드러냈던 패괴 성품이 뭐가 있었는지 반성해 보고, 체험 간증문도 좀 쓰고, 새 신자를 양육하는 형제자매들을 만나면 새 신자들이 어떤 관념이 있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제가 아는 것만큼 교제하기도 해요. 이렇게 했더니 마음이 훨씬 편하고 평안해졌어요.
이번 경험을 통해 제가 가장 많이 느낀 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진리로 모든 걸 가늠하시죠. 하나님은 나이를 보시거나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지를 보시는 게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길로 가는지를 보셨어요.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면서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를 기회가 주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은 노인이라고 조금도 차별하시는 게 없으셨어요. 제가 하나님을 오해했던 걸 생각할 때면 하나님께 너무 죄스러운 마음이 들고 눈물이 나요. 이 나이에 창조주를 맞이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자체가 엄청난 축복이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복을 받고 못 받고를 떠나서 제 결말이 어떠할지 상관없이 진리를 잘 추구하고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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