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임성이 좋은 것이 좋은 인성의 기준인가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제가 철들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화도 거의 안 내고 말썽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나서 형제자매들과 만날 때도 붙임성이 좋고 포용하고 인내할 줄도 알며 사랑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한동안 나이가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컴퓨터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귀찮아 하지 않고 몇 번이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때로 그들이 더디게 익히는 모습을 보면 조바심이 들긴 했지만, 저는 형제자매들이 저를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할까 두려워서 짜증내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형제자매들은 저에게 인성이 좋다고 자주 말했으며, 리더는 특별히 제가 새 신자를 양육하도록 안배했으며, 이 본분은 반드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잘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저는 속으로 흐뭇했고, 붙임성이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을 좋은 인성의 태도라고 더욱 굳게 믿었습니다.
이후 저는 리밍(李明) 형제와 함께 협력해서 교회 리더를 맡았습니다. 형제와 한동안 함께 지내면서 저는 리밍 형제가 일을 할 때 자기 뜻대로 하기를 좋아하고, 성격도 다소 욱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는 쉽게 혈기를 드러내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일을 할 때 투명하지 않고, 거짓말과 속임수를 좋아하며, 일을 처리할 때 원칙도 없고 교회 사역을 수호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그는 자주 휴대폰으로 형제자매들과 연락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면 경찰에게 쉽게 발각되고 교회에 피해를 가져올 것을 알아서 여러 번 그를 제지하고 싶었지만, 매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습니다. 그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면, 제가 겉보기엔 점잖아 보이면서 말하거나 일할 땐 인정사정없어서 함께 지내기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고민한 끝에 저는 절충안을 생각해 그에게 단순히 휴대폰으로 형제자매들과 연락한 적이 있는지 한마디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폭로하거나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이가 틀어져 저를 나쁘게 볼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후, 저는 리밍 형제의 문제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형제자매들이 그의 아내가 예배 중에 늘 글귀와 도리를 말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떻게 고통을 겪고 대가를 치렀는지 자주 이야기해 우러름과 존경을 받도록 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알아보고 확인한 결과, 그의 아내는 리더로서 적합하지 않아 교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상황을 리밍 형제에게 알려 줬을 때, 그는 형제자매들의 평가가 사실과 다르다며 버럭 화를 냈고, 이렇게 하는 건 아내에게 불공평하다면서 왜 문제를 보고한 사람은 조사하지 않고 아내만 조사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리밍 형제의 태도가 이렇게까지 나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저는 그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 때 혈기로 대하기보단, 먼저 마음을 평온히 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습니다. 리밍 형제의 방해로 그의 아내가 가진 문제는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리밍 형제는 예배 중에 형제자매들을 훈계하며 한 자매를 울리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리밍 형제의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은 모두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그의 아내를 평가했고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자신의 이익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혈기를 부리며 형제자매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정말 인성이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윗선 리더에게 그의 문제를 보고하고 싶었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뒤에서 고자질하고 뒤통수 치는 건 아닐까? 게다가 내가 윗선 리더에게 보고하면 윗선 리더는 분명 리밍 형제를 찾아가서 교제할 텐데, 그때 돼서 리밍 형제가 본인의 문제를 내가 보고했다는 걸 알게 되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뒤에서 나쁜 말이나 하는 인성이 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저는 결국 윗선 리더에게 보고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계속 답답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이후 다른 형제자매들이 리밍 형제의 문제를 보고한 덕분에 그는 그제서야 교체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윗선 리더는 저를 폭로했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형제님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지 않군요. 리밍 형제님의 문제를 알았을 때 왜 폭로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나요? 이렇게 중요한 일을 보고하지 않다니, 정말 교회 사역을 지키는 사람이 맞나요?” 리더의 책망과 깨우침으로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인성이 좋다는 것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중용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원칙을 견지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미움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 여기저기 비위를 맞추고 능란한 처세술을 보여 주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것, 이런 것은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럼 어떤 기준이겠느냐? 하나님을 대할 때나 진리를 대할 때 순종할 수 있고, 본분이나 각종 사람과 일을 대할 때 모두 원칙이 있어야 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모두가 눈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기에 모든 사람의 실제 상황을 알고 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속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인성이 좋다고 하면서 다른 이의 험담을 하는 법도 없고, 다른 이의 이익에 손해를 입히지도, 다른 이의 재물을 탐하지도 않는다고 내세운다. 심지어 이해 갈등이 생길 때면 자신이 손해를 보면 봤지 남에게서 이득을 챙기지 않아, 모두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몸을 사리고 농간을 부리며, 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해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급해하는 것을 급해하지 않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본분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버린 적이 없고 심지어는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도 폭로하지 않으며, 어떤 원칙도 없다. 이는 어떤 인성이냐? 이는 인성이 좋은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그가 살아 내는 것과 드러내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그의 내적 상태는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의 명리를 위하는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뛰어넘고,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을 헤아리는 마음을 능가한다면, 이런 사람이 인성을 지닌 사람이겠느냐? 이는 인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면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성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성격이 온화한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지와 같은 겉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고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본분 이행에 책임감이 있는지,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 원칙을 따라 대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전부터 저는 늘 스스로 인성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겉으로 따뜻하고 착해 보이며 성격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리밍 형제가 휴대폰으로 형제자매들과 연락해 교회에 안전상의 위험을 초래했을 때도 저는 그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지적하면 우리 사이의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저 빙빙 돌려 말하며 경고할 뿐이었고, 그가 시인하지 않을 때에도 폭로하거나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나중에 정말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가 경고하지 않은 건 아니다’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면 제 좋은 이미지를 깨지 않으면서도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지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은 온통 자신의 이익, 지위와 이미지에 있었고, 교회 사역과 형제자매들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이기적이고 간사했습니다! 리밍 형제가 그의 아내 문제에서 감정에 치우쳐 형제자매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그의 문제를 즉시 보고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가 저를 보고 뒤통수 친다고 말할까 두려워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리밍 형제가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도록 방치하여 교회 사역에 영향을 끼치고 형제자매들에게 타격과 상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제게 어디 인성이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한 마디 한 마디 심판하고 폭로하시는 말씀을 보면서 저 자신의 행실을 다시 비교해 보니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줄곧 인성이 바른 사람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드러난 사실을 통해 저 자신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겉으로 저는 사람들에게 선하지만 이면에는 비열한 속셈을 감추고 있었고, 오로지 개인 이익의 득실만 고려하고 교회 사역은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가짜로 착한 사람, 과하게 착한 사람, 더 나아가 착한 척하는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내세우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가까이하기 쉬운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등 좋은 행위의 이면에 숨겨진 본질은 바로 두 글자, ‘위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좋은 행위’들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며,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사람의 속셈과 간계에서 나왔으며, 위장과 포장, 그리고 기만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이 ‘좋은 행위’들을 고수하는 목적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은 절대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고, 본심에 어긋나게 살지도 않는다. 본심에 어긋나게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이겠느냐? 사람의 본모습은 스스로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솔직하고 무던하고 온유하고 선량하고 어질지 않다. 사람은 양심과 이성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떤 목적이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살아간다. 사람의 본모습은 어떠하냐? 흐리멍덩하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주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무엇이 죄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과거의 인류는 그렇지 않았더냐?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한 이후에야 사람은 죄에 관해 어느 정도 개념이 생겼다. 하지만 옳고 그름이나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관해서는 여전히 개념이 없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사람이 자신의 언행과 관련된 정확한 원칙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정상 인성에 갖추어야 할 행동과 좋은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 수 있겠느냐? 진실로 좋은 행위는 무엇을 토대로 생겨나는지, 어떤 도를 지켜야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수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사람이 알겠느냐? 알지 못한다. 사람은 사탄 본성과 사람의 본능 때문에 위장을 통해 자신을 포장할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체면과 존엄성을 갖추고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기만책이 생겨났다. 이런 속임수, 남을 기만하는 수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생겨난 후, 사람은 이 기만책의 범위 안에서 선택적으로 그중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를 고수한다. 어떤 사람은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을 선택하며, 어떤 사람은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몇 가지를 모두 선택한다. 그러나 이런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을 나는 한 가지 단어로 규정한다.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자갈이다. 자갈이란 무엇이냐? 강에서 오랜 세월 강물에 씻기고 마모되어 모서리가 사라지고 반들반들해진 돌멩이다. 자갈은 발로 밟아도 배기지 않으나, 자칫 방심하면 미끄러져 넘어질 수 있다. 이 돌멩이들은 겉모양이 무척 예쁘지만, 막상 집에 가져가면 아무 쓸모가 없다. 버리자니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갖고 있지도 못하는, 이런 것이 바로 자갈이다. 내가 볼 때, 표면적으로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들은 온화하고 자신을 잘 꾸미지만,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실제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이 바로 자갈이다. 네가 그에게 진리와 원칙에 대해 교제하면, 그는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네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네가 그에게 처신할 때는 원칙이 있어야 하며, 본분을 이행할 때는 원칙을 구해야지, 자기 뜻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그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저는 그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고자 할 뿐입니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동조를 얻으면 그만이죠.”라고 말한다. 그는 좋은 행위에만 집중할 뿐, 진리에는 집중하지 않는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전통문화에서 ‘붙임성이 좋다’거나 ‘싹싹하다’는 이러한 좋은 행위의 본질은 가식이며, 이런 좋은 행위를 쫓는 것은 자신을 포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고, 이로써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우러름과 칭찬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이 안에는 음모가 숨어 있으며 일종의 사기입니다. 오랫동안 좋은 행위를 추구해 오면서도 왜 내면은 이기적이고 간사한지 저 역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러한 좋은 행위의 이면에는 사악한 속셈과 목적이 숨어 있고, 이는 사람들에게 우러름과 칭찬을 얻고 그들 사이에서 좋은 지위와 이미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전통문화의 영향과 교육을 받아왔고, 이런 좋은 행위들에 유난히 신경 써 왔습니다. 이렇게 하면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찬양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늘 그랬듯 붙임성이 좋고 싹싹한 사람의 모습을 쫓았고,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좋은 지위와 이미지를 갖고자 했습니다. 특히 리밍 형제와 협력할 때 저는 그가 여러 번 원칙을 어기고 휴대폰으로 형제자매들과 연락하는 것을 보았지만, 형제자매들의 안전과 교회의 이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를 폭로하고 제지해야 했지만 그가 제게 나쁜 이미지를 갖게 될까 봐 보고도 못 본 척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리밍 형제가 그의 아내를 감싸고 형제자매들을 억누르고 괴롭히는 걸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단순한 패괴 표출이 아니고, 인성이 악해 리더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즉시 상급에 보고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저는 제 지위와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또 한 번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저의 좋은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배신하고 교회의 이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붙임성이 좋고 싹싹한 행동들이 제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저를 점점 이기적이고 간사해지게 만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좋은 행위들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대신하며, 겉으로 가식을 내세워 비열한 속셈을 감추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진리 실제가 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오해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우러름과 칭찬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는 결국 선을 가장한 바리새인의 길을 걷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추구하면 하나님께 정죄 받고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저는 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체면과 허영을 지키려 한다면, 패괴 성품을 드러내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생명 진입도, 진실한 체험 간증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척 위험하지 않겠느냐? 네가 언제나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조금의 체험 간증도 없다면 자연스럽게 드러나 도태될 것이다. 체험 간증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분명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어떤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자는 폐물 아니겠느냐? 사람이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언제나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신파이고 악인이다. 언제나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과오를 범한다면, 네 결말은 정해진 것이다. 네 모든 과오와 네가 걸어온 그릇된 길, 그리고 결코 회개하지 않는 태도가 합쳐져 셀 수 없는 악행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너의 결말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 징벌받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것이 작은 일이겠느냐? 징벌이 닥치지 않았을 때는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느끼지 못한다. 언젠가 정말 재난이 닥쳐 죽음이 다가오면 그땐 후회해도 늦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어도 변화가 없다면, 마지막 결과는 도태되고 버림받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처신해야 비로소 진정한 토대가 생긴다. 만약 처신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지 않고 좋은 행위를 꾸미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그렇게 해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좋은 도리와 행위는 사람의 패괴 성품을 바꿔 놓을 수 없고, 사람의 본질 또한 바꿔 놓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만이 사람의 패괴 성품과 사상, 관점을 바꿔 놓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다. … 사람의 언행은 무엇을 근거로 삼아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럼 사람의 언행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이냐?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진실한 말, 솔직한 말을 하여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게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적어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기만하거나 미혹하거나 조롱하거나 놀리거나 비방하거나 비웃거나 속박하거나 남의 단점을 까발리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고 인성의 미덕이다. … 이 외에, 특수한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들추고 책망 훈계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가 진리를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가져야 성과가 날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하면 사람에게 큰 유익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도움 아니겠느냐?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느냐?』(<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저의 마음을 찔렀고 두려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만약 일이 닥칠 때마다 매번 개인의 이익을 지키고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면, 과오는 점점 더 많아질 것이고 결국 잘못이 쌓여서 하나님께 완전히 드러나 도태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교회의 사역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저는 원칙대로 교회 사역을 수호하지 못했고, 소위 좋은 사람의 모습만을 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우러름과 칭찬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 눈에 저는 악을 저지른 사람에 불과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결과를 보니 저는 두려웠고, 빨리 제 잘못된 추구를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른 실행의 길을 제시해 주었고, 말하거나 일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만 비로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말하는 방식이나 목소리 크기, 단어 사용이 완곡한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말해야 형제자매들의 생명에 도움이 될지를 고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옳은 사람이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랑으로 도와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해 사역에 손실을 가져왔다면, 진리를 교제하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교제 후에도 상대방에게 진정한 변화가 없다면, 훈계와 책망으로 문제의 본질을 폭로할 수 있습니다. 설령 말이 엄하거나 겉보기에 인정사정없더라도, 사람들에게 진정한 도움과 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적그리스도나 악인이어서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즉시 나서서 폭로하고 저지하거나 상급에 보고 해서 교회 사역을 수호하고, 형제자매들이 방해받고 미혹되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인성을 가진 태도이자 진정한 선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저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저는 누군가 원칙을 위반한 것을 보고 상급에 보고하는 것은 뒤에서 고자질하고 뒤통수 치는 것으로 정의롭지 않은 수법이라고 여겼는데, 이는 저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 사역을 수호하는 선하고 의로운 행동이었습니다. 리밍 형제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서 교회 사역에 영향을 미쳤고, 형제자매들이 속박을 받고 상처를 입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이는 원칙적인 문제에 속했으며 교회의 사역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상급 리더에게 보고하거나 심지어 고발해야 했습니다. 이는 뒤통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사역을 수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을 깨달으니 제 내면에 쌓였던 근심이 사라졌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한번은 누군가 어떤 형제가 본분을 이행할 때 항상 꾀를 부리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피하려 한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 차례 지적하고 도와주며 훈계와 책망을 했지만, 그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원칙에 따라 그를 교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의 문제를 철저히 해부하여 그가 반성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남의 문제를 파헤치는 것은 사람에게 밉보이는 일이니, 차라리 파트너가 교제하도록 하고, 나는 나서지 말아야겠다. 괜히 나쁜 인상을 남길 필요는 없지.’ 이때, 저는 문득 다시저 자신의 이미지와 지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정도가 깊든 얕든 상관없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실행 방법은 바로 어디서나 하나님 집의 이익을 생각하고, 자신의 사욕과 속셈, 동기, 체면, 지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 집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는 것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제게 실행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일이 닥쳤을 때 개인의 사욕과 체면은 내려놓고, 교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떳떳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이해하고 나니, 제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형제의 태도를 하나하나 해부해 낼 힘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실행한 후에 제 마음은 편안해졌고, 진리를 실행해야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게 전통문화가 주장하는 ‘붙임성이 좋다’거나 ‘싹싹하다’ 하는 것들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지 깨닫게 해 주었고, 또한 전통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과 자유를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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