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부정적인 정서에서 벗어났나

2025.4.14

미국 데이지(Daisy)

2022년 10월, 저와 셸리(Shelley)는 교회 리더로 선출되었습니다. 막 훈련을 시작한 탓에 익숙하지 않은 사역이 많았던 우리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으면 함께 상의하며 지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사역에도 다소 성과가 있었습니다. 자질이 좋은 편인 셸리는 리더의 질문에 늘 신속히 답변을 내놓았는데 리더도 대부분 그녀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리더는 우선적으로 셸리의 의견을 묻는 경우가 많았고, 저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처럼 한쪽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셸리는 자질이 좋고, 리더도 그녀를 신임하고 있어. 난 한참 동안 말 한 마디를 못 하네. 아마 리더는 내가 그저 그런 수준이라 보조적인 사역만 할 수 있다는 걸 간파했을 거야.’ 저는 의기소침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막 훈련을 시작한 데다 자질도 그저 그런 제가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로하고 넘어갔습니다.

그 후 우리 두 사람은 점점 더 많은 사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리더는 사역을 안배함에 있어서 우리 두 사람을 모두 부르긴 했지만, 난이도가 있는 사역을 진행할 경우에는 셸리를 지목해 그 일을 챙기게 했지, 저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기껏해야 끝에 ‘이 사역은 앞으로 두 사람이 챙기세요.’라고 한 마디 덧붙이는 게 다였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개의치 않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구나. 항상 ‘두 사람’ 중 하나일 뿐, 리더가 보기에 나는 존재감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 내가 셸리보다 자질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하자.’ 이후, 저는 점점 더 수동적으로 사역을 챙기게 되었고, 셸리가 맡은 사역에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셸리가 저와 사역에 대해 의논하려 하면 마지못해 대응했습니다. 모두가 어떤 문제를 놓고 적극적으로 토론할 때면, 저는 마치 저와 상관없는 문제인 양 오후 내내 몇 마디도 채 하지 않았습니다. 저 나름의 의견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맞는 의견인 줄도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틀린 말을 했다가 창피를 당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을 안 하는 편이 나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점점 더 저 스스로를 자질이 부족하고, 아무 역할도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사역을 그렇게 많이 책임지기 싫어져서 그 후로는 양육 사역에 집중하였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양육 팀장이 부족했는데, 저는 로제(Rose) 자매가 생각났습니다. 로제는 과거에 새 신자 양육 사역에서 얼마간 성과를 보였던 자매였습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들은 현재 그녀가 본분에 책임감이 없어 팀장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했습니다. 저는 셸리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려고 했지만, 셸리의 바쁜 모습을 보고 얘기를 나눌 생각을 접었습니다. 그녀가 저를 보고 이 정도 일도 처리를 못 하다니 자질이 너무 부족하다고 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로제는 자질이 좋고 교제를 통해 일부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어. 지금은 남편의 통제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지 못하는 것일 테지. 내가 많이 교제하며 챙기면 사역에 지장을 주지 않을 거야.’ 그래서 저는 로제를 양육 팀장으로 선발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로제는 남편의 통제로 본분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이제 끝이야. 로제를 선발한 건 나니까, 이 일은 나에게 분별력이라고는 없다는 걸 드러내잖아? 혼자 사역을 하자 바로 실수를 저지르다니, 너무 형편없어. 만약 새 신자 양육에 지장을 주게 된다면 나는 교회 사역을 방해한 게 돼.’ 생각할수록 괴로웠습니다. ‘나는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자질이 부족한데 분별력도 없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네. 더는 형제자매들에게 폐를 끼치고 교회 사역에 지장을 주지 말고, 하루빨리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그래서, 저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편지를 리더와 셸리에게 보냈습니다. 얼마 후, 셸리가 저에게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내왔습니다. 『어디에서든, 어떤 사역 환경에서든 사람은 실수할 때가 있고 자신의 자질과 식견, 안목이 부족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이니 너는 정확하게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요컨대, 네가 어떻게 실행하든 너는 정확하고 긍정적으로 그것을 대하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의기소침해하지 말고, 약간의 고충을 좀 만났다고 해서 소극적으로 변하고 억압을 느끼며 부정적 정서에 빠지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괜히 호들갑 떨 것 없다는 말이다. 네가 해야 할 것은 속히 자신을 반성하면서 업무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본인의 마음가짐의 문제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일할 때 어떤 불순물이 섞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어떤 측면의 관념으로 초래된 것인지 다방면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만약 업무 미숙의 문제라면 계속해서 배우면 되고, 다른 사람과 상의해 보거나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에게 자문을 구해 봐도 된다. 잘못된 마음가짐이 뒤섞인 문제여서 진리를 통해 해결할 문제라면 교회 리더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고 교제할 수 있다. 자기 내적 상태를 털어놓고 해결에 도움을 받으면 된다. 관념에 해당되는 문제라면 스스로 성찰하여 해부하고 인식하고 나서 돌이키고 저버리면 된다. 이러면 끝나는 일 아니겠느냐? 앞으로의 날들을 여전히 살아야 하고 내일의 태양은 떠오를 것이고 너는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 네가 이왕 살아 있고 사람인 이상 계속해서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네가 살아 있고 생각이 있다면 계속해서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잘 이행하고 완수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일생에서 변치 않아야 할 목표이다. 언제, 무슨 어려움이 생기고, 무엇에 직면하든, 억압에 빠져선 안 된다. 억압에 빠지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무너져 버린다. 어떤 사람이 늘 억압을 느끼겠느냐? 못난이, 어리석은 자가 자주 억압을 느낀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6)>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무척 따뜻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나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기 마련이고, 또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해 원칙을 위반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며, 본분을 이행하면서 문제가 생겨 사역에 약간의 손해를 입히거나, 책망과 훈계를 받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니, 이에 올바르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실패 가운데 공과를 배워 스스로를 반성하고 회개하며 변화하는 것입니다. 만약 패괴 성품으로 일을 해서 사역에 손해를 입혔다면,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합니다. 만약 업무에 미숙해 사역에 성과가 없다면, 빨리 관련 내용을 학습하거나 사역을 잘 해내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만약 본분에 오류나 실수가 생긴 것을 가지고 스스로가 드러났다고 여겨 소극적이 된 채 스스로를 규정하거나, 더 나아가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고 나약한 모습입니다. 이번 인사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명예와 지위에 대한 제 욕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음을 반성했습니다. 셸리와 협력하는 동안 제가 활약할 기회가 없자, 저 역시 사역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저는 독자적으로 사역을 수행하고 싶어 했습니다. 양육 팀장을 발탁하는 일에 있어서 저는 원칙을 파악하지 못했고 사람을 꿰뚫어 보지도 못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가는 형제자매들이 저를 이렇게 사소한 일도 처리하지 못 하는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냥 저의 생각대로 로제를 선발했습니다. 저는 사람에 대한 분별력이 없고, 사람을 선발하는 일에 있어서도 원칙이 없었습니다. 사실, 하나님 집에서는 일찍이 사람을 뽑아 쓰는 일에 관해 교제해 준 바 있습니다. 후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이 본분에 책임감이 있는지, 자질을 어느 정도 갖췄는지 물어 확인한 후에야 그 사람을 양성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면 서둘러 조사해 파악해야 하고, 그 사람을 꿰뚫어 보지 못하겠으면 진리를 아는 사람을 찾아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이 비교적 정확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체면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저의 의사에 따라 로제를 발탁하였습니다. 이는 자의적이고 사역에 무척이나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이미 사역은 지장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저는 서둘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져 일을 완전히 그르치면 안 됐습니다. 저의 이런 행동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이기적이었습니다!

한 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본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 정상 인성으로 해야 할 일, 성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추구의 근본 취지이자 목표로 삼고 자신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어떤 고통을 겪든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뜻임을 확신하는 순간 어떤 고통도 견뎌 낼 수 있고,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네 심경은 어떻겠느냐? 전과는 달라진다.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되며 즐거움이 생길 것이다. 보아라, 그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을 추구하고, 정상 인성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 그리고 짊어져야 할 사명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이 생기고 즐거움을 느낀다. 아직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를 얻는 데 이르지도 않았는데 사람에게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고 떳떳한 사람이니 어떤 고충이 생겨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떤 사역이든 감당할 수 있다. 이런 자가 바로 훈련을 거친 그리스도의 정예병이니 이겨 내지 못할 고충이 없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어떤 것 같으냐? 강건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탄복스러울 정도로 강건하다. 이런 사람이 억압을 느끼겠느냐?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그는 무엇으로 그 억압적인 정서를 바꾸었느냐? 무슨 이유로 억압의 정서가 그를 옭아매지 않고 그를 찾지도 않겠느냐? (마음속으로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며 본분 이행에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이 본연의 일을 하는 것이다. … 사람이 본연의 일을 하고 바른길을 걸으면 이런 정서가 생기지 않는다. 한때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가끔 억압적인 정서가 생긴다고 해도 일시적인 마음에 불과하다. 사람이 올바른 생활 방식과 생존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곧 이런 부정적 정서를 대신할 테니 억압의 정서에 자주 빠지지는 않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 억압적인 정서는 결코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어도 그 안에 갇히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 추구의 중요성이다. 네가 본연의 일을 하기를 추구하고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감당하며 정상적이고 좋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존 방식을 추구한다면 이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지 않을 것이며 억압의 정서가 너를 찾아오거나 옭아매지도 않을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른과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직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 본분 가운데 어떤 문제들이 있고, 어떻게 해야 사역을 더 잘할 수 있을지 등 매일 본분과 관련된 내용을 생각합니다. 본분에 약간의 오류와 실수가 생겨 실패에 직면했을 때에도 잠깐은 나약하고 의기소침해지지만, 계속해서 부정적인 정서 안에 빠져 있지 않고 능동적으로 진리를 구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저는 지금 일어난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멍청이 같았습니다. 약간의 좌절에도 소극적이 되어 주저앉아 버렸지, 어른이 가져야 할 강인함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또한, 제가 그동안 사역에 너무나 성실하지 못했음이 드러났습니다. 교회 사역을 맡게 된 이후, 파트너 자매가 모든 면에서 저보다 뛰어난 것을 본 저는 저의 자질이 부족하고 신임을 받지 못한다고 느껴 기회를 봐서 저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했습니다. 리더가 저희와 예배를 가질 때면, 저는 항상 눈치를 살폈습니다. 리더의 말투를 보며 저를 신임하는지 아닌지 판단하였습니다. 어떤 사역들에 대해 리더가 저를 지명해 일을 맡기면 저는 리더의 신임을 받는다는 생각에 기뻤고 힘이 나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만약 리더가 파트너 자매에게 책임을 맡기면 저는 리더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명예와 지위에 대한 욕심이 충족되지 않아 괴로워했습니다. 형제자매와 협력할 때, 저는 본분에 집중하는 대신 항상 제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지만 신경 썼습니다. 제가 의견을 말했는데 아무도 말이 없으면 마음이 괴로웠고, 남들이 반대 의견이라도 내면 저는 더욱 소극적이 되어 스스로 자질이 너무 부족하다고 규정짓고는 토론에 참여할 의욕을 잃었습니다. 특히 로제의 일에서, 저는 제대로 파악도 못 했으면서 제멋대로 일을 처리했고, 실수한 후에도 반성하는 대신 부정적인 정서에 빠져 그 자리에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건 제가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항상 명예와 지위를 추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저는 온통 저의 명예와 지위에만 관심을 가지고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우러름을 얻지 못하면 소극적이 되어 괴로워했고, 심지어 교회 사역까지 한편에 제쳐두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없었고, 이런 태도로는 하나님의 혐오를 살 뿐이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지금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에게 억압을 느낄 겨를이 있겠느냐? 그럴 틈이 없다. 그러니 마음 같지 않은 일에 조금 부닥치면 억압을 느끼거나 기분이 가라앉거나 의욕이 없고 의기소침해지는 사람은 뭐가 문제겠느냐? 밥 먹고 할 일이 없는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주변 형제자매들을 보면 다들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쁜데, 저는 줄곧 명예와 지위에 빠진 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소극적이 되고 반발심을 품었습니다. 저는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자신이 맡은 복음 사역 성과가 별로 좋지 않아 모두 어려움 속에 빠져 있다며, 다 같이 힘을 합쳐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던 셸리를 떠올리자, 자책감과 괴로움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배치해 우리가 함께 협력해 교회 사역을 담당하도록 안배하셨는데, 저는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할지는 생각하지 않고, 저의 작은 생각 안에 빠져 소극적이 되어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외쳤으니, 정말 인성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현재 교회 사역에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도 저는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매일 자매와 저를 비교하며 제가 부족하다 싶으면 소극적이 되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더러운 웅덩이처럼 긍정적인 추구가 하나도 없는 탓에 저도 괴로웠고, 교회 사역에도 지장을 주었습니다. 이제 제 문제를 인식했습니다. 비록 저는 자질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제 능력이 되는 한 협조하고 자매와 조화롭게 협력하며, 적어도 저의 태도 문제로 인해 사역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저의 마음을 감찰해 주십시오. 저는 회개하고 싶습니다!’ 그 이후, 본분을 이행하는 저의 태도는 한결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적극적으로 셸리와 사역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두려워했던 난이도가 있는 사역들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참여했습니다. 다른 형제자매들이 본분을 이행하다 어려움을 겪는 것을 발견하면, 큰 도움을 못 주더라도 진리를 아는 사람을 찾아 그와 협력해 해결했습니다. 때로 리더는 어떤 사역을 담당하라고 셸리를 지목하곤 했습니다. 비록 제 이름이 불리지는 않았지만, 셸리가 저를 찾아 소통하려고 하면 저도 참여해 의견을 주었고, 제가 한 일을 리더가 볼지 말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매사에 하나님을 향하고 모든 일을 착실하게 처리하는 것을 훈련했습니다. 진리를 실행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식적으로 저의 속셈을 저버리고 매일 마음을 본분에 두자 마음이 무척 편안했고, 부정적인 정서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저는 한 차례 책망과 훈계를 받고 다시 부정적인 정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리더는 저에게 자료를 한 부 정리하라고 시켰는데, 경험이 부족했던 저는 형제자매와 함께 그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리더는 완성된 초고를 보고 잘 정리했고 세부 내용만 좀 보완하면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문제가 크지 않은 것을 보고 무척 기뻤고 이번 일을 괜찮게 처리한 것 같았습니다. 세부 내용들을 보완하는 거야 내용만 조금 추가하면 될 일이라 여겨 형제자매들과 원칙에 대해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완된 자료를 본 리더는 우리가 새로 추가한 내용이 사소한데 장황하고, 구상이 명확하지 않으며, 수정하기 전보다 내용이 더 나빠졌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신중히 생각해 보았는지, 구체적인 문제를 명확히 파악했는지 묻고는, 그 자료 정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리더의 말을 들은 저는 순간 얼이 빠졌습니다. ‘나도 잘 해내고 싶었어. 그런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자질이 턱없이 부족하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너무 얕아 사무적인 사역은 그럭저럭 하지만 진리의 인식과 관련된 사역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나는 일부러 뒤로 물러나려는 게 아니야.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능력이 부족한 거야.’ 그 이후, 저는 사역에 협력할 때 항상 겁을 먹고 위축되곤 했습니다. 사역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막 지적을 하려고 하면, 마음속에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이렇게 자질이 부족한 네가 어떻게 문제를 알아? 네가 이 사역을 해낼 수 있어? 너는 자질이 부족하고 일을 보는 능력도 없어. 그렇지 않았으면 사역을 이렇게 엉망으로 할 리 없지. 아무래도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렇게 저는 또다시 부정적인 정서에 빠져 본분 이행에도 수동적이었습니다. 매일 저의 앞날과 퇴로를 계산하느라 마음을 평온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서야 저의 내적 상태는 조금 호전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직면하는 일 중에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없이 네 의지를 흔들 수 있고, 네 마음을 차지할 수 있고, 네가 본분을 이행하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그런 일들은 모두 진지하게 대하고 자세히 성찰해야 하며, 진리를 구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체험하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을 마주하면 소극적이 되고, 원망하며 본분을 팽개치고, 좌절을 겪을 때마다 일어서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모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우매하고 완고한 사람으로, 평생 믿어도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이렇듯 우매하고 완고한 사람이 어떻게 끝까지 따를 수 있겠느냐? 똑같은 일이 너에게 열 번 닥쳤는데 네가 열 번 가운데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면, 너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쓸모없는 사람이다. 똑똑한 사람, 진정 자질을 갖추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구하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은 열 번 일에 직면하면 그중 여덟 번은 얼마간의 깨우침과 교훈을 얻고,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 있고, 약간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열 번 일에 직면해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생명에 이로운 것을 얻지 못하고 변화하지 못하며 자신의 추태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완전히 끝장이다. 일이 닥칠 때마다 넘어지고, 넘어질 때마다 누군가가 붙잡아 주고 달래 줘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한다. 일이 닥칠 때마다 넘어지고 타락할 위험에 빠지니 이러면 끝장 아니겠느냐? 이런 쓸모없는 사람에게 구원의 여지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함에 있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는데, 사람의 의지와 뜻, 진리와 정의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 이 부분을 구원한다. 사람에게 뜻이 있다는 것은 마음속에 정의와 아름다운 것, 진리를 갈망하는 부분, 양심적인 부분이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 부분을 구원하고, 이 부분을 통해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킴으로써 진리를 깨닫고 얻게 하며, 사람의 패괴를 정결케 하고 생명 성품이 변화되게 한다. 네게 이런 것들이 없다면 너는 구제 불능이다. … 어떤 이들은 자기 자질이 너무 부족하고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이렇게 규정해 버린다. 자신이 아무리 추구해도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고 그냥 이 정도라고 생각하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결국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아무런 진리도 얻지 못한다. 너 스스로 노력하여 추구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질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하며 자포자기하고, 늘 소극적인 내적 상태 속에서 살다가 결국 깨달아야 하는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실행할 수 있는 진리도 실행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망치는 것이 아니겠느냐? 자기 자질이 수준 미달이라는 말만 내세우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러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떻든 간에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아 조금이나마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대가도 치르지 않은 채 자포자기하고 백기를 들고 투항한다면, 일말의 양심과 이성도 없는 폐물이다. 자질이 높고 낮음을 떠나서 네게 양심과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네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과 사명을 잘 완수해야 한다. 탈주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심각한 일이며,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너무 소극적이고 나약한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을 끝까지 믿을 수도 없고, 진리를 얻어 성품 변화에 도달할 가망성은 더더욱 없다. 진리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진리를 얻어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난 후 저 자신과 대조해 보았습니다. 좌절과 실패가 닥치면 저는 항상 너무나 나약해지고 흐물흐물한 진흙처럼 소극적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생각은 항상 ‘그럼 다른 사람에게 시키자.’, ‘나는 자질이 너무 부족해.’ 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역을 한쪽으로 제쳐두고 다른 사람이 해결하도록 넘겼습니다. 마치 매우 이성적이고 자기 분수를 잘 아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규정짓고 자포자기한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좌절과 실패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그 가운데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일은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정의를 지향하는 부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자질을 갖춘 사람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실패 가운데 경험을 정리해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는 데 능합니다. 구함을 통해 일부 진리를 이해하고 자신에 대해서 인식하며 생명에 성장이 있습니다. 이번에 책망과 훈계가 닥치자, 저는 실패의 원인을 정리해 보지 않고, 오히려 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질이 너무 부족한 탓에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이렇게 문제가 많은 거라며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저는 능력 범위 내에서는 잘 해내고 있고, 성의를 다하고 있으니, 반성할 게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저에게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요? 리더로부터 자료에 세부 내용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은 후, 저는 심사숙고하며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상상대로 쓸모없는 내용을 잔뜩 추가한 탓에, 수정된 자료는 알맹이는 없이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저는 사역을 이행함에 있어 원칙을 구하지 않았고, 어떻게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궁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규례과 단계에 맞춰 일을 수행했습니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건성으로 대충 형식만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빠르게 이 상황을 정리해 바뀌어야 했습니다. 본디 자질도 별로 좋지 않은데 적극적으로 성장하려는 의지조차 없어, 일이 생길 때마다 소극적이 되고 뒤로 물러선다면, 저는 성장하기 어려울 터였습니다.

그 후 왜 저는 좌절과 실패가 닥치면 항상 도망가고 싶어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예와 지위에 대한 제 욕심이 너무 크고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이 잘못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를 해부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사랑은 일반인을 뛰어넘는다. 이는 그의 성품 본질 안에 있는 것으로, 한때의 취미도 아니고 한순간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생명 속에, 뼛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그의 본질이라고 한다. 즉, 적그리스도는 무엇을 하든 다른 게 아닌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가장 먼저 고려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 있어 지위와 명예는 그의 생명이자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가장 먼저 이런 것을 고려한다. ‘내 지위는 어떻게 될까? 내 명예는 또 어떻게 될까? 내가 이 일을 하면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 마음속의 내 지위가 올라갈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인데, 이것으로 그에게 적그리스도의 성품과 본질이 있음이 충분히 증명된다. 그래서 그는 문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 지위와 명예는 부가적인 요구 사항이 아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신외지물(身外之物)은 더더욱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성과 뼛속, 핏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태도는 지위와 명예가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떤 것이겠느냐? 명예와 지위는 그에게 있어 매일의 삶과 상태, 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적그리스도에게 있어 지위와 명예는 그의 생명이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든, 어떤 환경에서 생활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추구하는 것과 목표가 무엇이든, 인생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든 모두 좋은 명예와 높은 지위를 갖는 것을 중심에 놓는데, 이 목적은 바뀌지 않는다. 이는 그가 영원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진면목이자 그의 본질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3)>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적그리스도의 명예와 지위를 사랑하는 마음은 일반인보다 강하며, 명예와 지위는 그가 평생 추구하는 것으로, 어떤 일을 하든 그 출발점이자 목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를 우러러보고 추켜세우면, 그는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의욕이 넘치고, 무슨 일을 하든 기꺼운 마음으로 하지만, 일단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지 않으면 소극적이 되어 태업을 일삼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낍니다. 저의 추구 관점은 적그리스도와 같았습니다. 제 관점이 남들에게 받아들여지면, 저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파트너 자매가 신임을 받고 저는 소외되자, 바로 실망하고 낙담하여 본분을 이행할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러다 실패를 겪고 제가 드러나자, 스스로 자질이 부족해 사역을 할 수 없다고 규정짓고 그 일에서 도피하려 했습니다. 저는 줄곧 제가 책임지고 물러나려 하는 것은 저는 분명 그 사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저의 분수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그것은 명예와 지위를 너무나 사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 본분을 이행하면서는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계속 그 사역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실패를 겪으며 제 모습이 드러날 것이고, 남들도 저를 철저히 꿰뚫어 보게 될 터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체면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더 단순한 본분으로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그동안 어떤 본분을 선택하든, 어디서 공부하고 일할지 선택하든, 저의 첫 번째 판단 기준은 그것들이 저를 빛나게 해줄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제가 대학 입시를 지원할 당시, 한 대학은 전공이 비교적 괜찮았고, 다른 한 대학은 전공이 상대적으로 안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학의 교수님들이 여러 차례 자기네 학교에 지원하라고 요청했고, 저는 그 대학에 가면 더 존중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결국 전공이 상대적으로 안 좋았던 대학을 선택하였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전공과목 교수님이 저를 중시한다 싶으면, 저는 그 전공에 더 힘을 쏟았고, 어느 과목 교수님이 저를 홀대한다 싶으면, 저는 어떻게 해서든 그 과목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어떤 사안을 판단할 때 명예와 지위를 얻을 수 있는지 여부를 근거로 삼았고, 제가 존중을 받고 빛이 날 수 있는 곳으로만 다니려고 했습니다. 반대로, 홀대를 받거나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면 거부하고 도망쳤습니다. 그제야 명예와 지위에 대한 제 욕심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욕심은 이미 저의 뼛속에 새겨져 있어 저는 항상 그것들을 지키려 들었습니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리더를 하게 되면 드러나게 되는 일도 많고, 책망과 훈계도 많이 받게 되겠지만, 진리 원칙을 이해하고, 저의 생명 진입에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을 분명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체면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본분을 포기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의 명예와 지위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큰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표출하는 것은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었습니다! 계속 이렇게 추구해 가다가 결국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업무적으로도 제대로 훈련되지 못하고, 생명 진입에도 성장이 없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쓰레기가 되어 하나님이 혐오하고 도태시키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제야 저는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죽음의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명예와 지위를 내려놓고 진리를 구하여 이런 내적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 후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 실행의 길을 찾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하게는 무엇을 중시해야 하느냐? 사람의 자질이 어떻든, 영적인 이해력이 있든 없든, 또 사람에게 어떤 책망과 훈계가 닥치든, 이러한 것들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현재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너희가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느냐’이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해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반드시 진심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심이 있다면 어떤 모습이어야겠느냐? 바로 일이 닥쳤을 때 잔꾀를 부리거나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거나 다른 사람과 암투를 벌이지 말아야 하며, 또 하나님에게 간사함을 부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만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진심이 없다면, 너는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으면, 네가 진리를 깨달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자질이 훌륭하며, 말을 잘하고, 이해력도 좋으며,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한 말씀을 다 깨달을 수 있어도,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에게 간사함을 부린다면, 이는 사탄의 성품으로, 대단히 위험하다. 네 자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이 없으며, 하나님도 너를 원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너라는 사람은 말을 매우 잘하고, 자질도 상당히 훌륭하며, 똑똑하고, 영적인 이해력도 있지만 딱 한 가지 나쁜 점이 있는데, 바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큰일이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 못되면, 그 사람은 폐기된다. 마치 겉으로는 잘 유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엔진이 망가진 자동차는 완전히 폐기 처분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너의 외적인 자질이 얼마나 훌륭하든, 아무리 영리하고 말을 잘하고 능력이 있고 문제를 잘 처리하든, 다 소용이 없다. 이는 핵심적인 것이 아니다. 핵심은 무엇을 살펴야 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지를 살필 때는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약속하는지를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행한 것에 진리 실제가 있는지를 보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네 행동이 얼마나 대단하고 심오하며 위대한지 신경 쓰지 않는다. 네가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은 네 일거수일투족에서 진심을 보고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나를 믿는구나. 이 사람은 허풍을 떠는 법이 없는,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 집에 그리 크게 기여하지 못했고 자질도 부족하지만, 언제나 성실히 일하고 진심을 보인다.” 이 진심에는 무엇이 들어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 그리고 진실한 믿음과 사랑이 들어 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꼭 대단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요리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청소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평범한 본분을 이행하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엄청난 공적을 세운 것도 아니며, 남들이 우러르고 감탄하고 부러워할 만한 부분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한 것을 모두 갖추고 살아 내며, 또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또 무엇을 바라겠느냐? 하나님은 그에게 만족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예전에 저는 사람의 자질과 은사 여부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자질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집에서 중용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자질이 부족하고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저의 모습이 드러날 때마다 저는 소극적이 되어 자신을 규정해 버렸고, 원래 할 수 있던 일에서조차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자질이 좋은지 나쁜지, 좋은 말솜씨와 뛰어난 두뇌가 있는지 없는지 따위를 중요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회 사역에 진심인지 아닌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어떤 자질을 주셨는지, 말솜씨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말주변이 좋고, 사역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실제로 일을 할 때 비겁하게 몸을 사리고 책임감 없이 군다면, 자질이 아무리 좋더라도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대상이 됩니다. 비록 자질이 있어 남을 도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대하고 본분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사람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실패를 겪으며 자기 모습이 드러날 때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 실패 가운데 체험을 정리해 생명의 성장을 추구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들입니다. 과거에 은사와 자질이 있어 교회 리더를 맡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중 많은 이들이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편안함을 탐하며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거나, 명예와 이익을 두고 다투며 교회 사역을 방해하는 바람에 결국 도태되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별 볼 일 없고, 은사도 없고, 자질도 평범한 수준이지만, 성실히 본분을 이행하고, 일이 생기면 원칙을 구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며 성장하였고, 교체되거나 도태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한 사람의 자질의 높고 낮음으로 그를 규정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진리를 실행하는지, 모든 사역을 성실하고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수행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이것들을 깨달은 저는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마음을 본분에 두고, 성실하게 사역을 수행할 거야. 어떤 사역이 맡겨지든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할 거야. 힘닿는 만큼 열심히 일하며 나의 사역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 후 저는 매번 실패와 드러남 가운데 공과를 배우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바뀐 마음가짐으로 매번 드러나게 되는 상황을 체험했습니다. 예전에는 실패를 하거나 책망을 받으면 늘 ‘이런, 리더가 나를 꿰뚫어 봤겠구나.’, ‘다들 분명 내 자질이 형편없다고 생각하겠.’, 이런 식으로 생각했고, 이런 생각에 빠지면 유난히 의기소침해졌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내가 드러나게 되었을까? 이번 드러남을 통해 나의 어떤 문제들을 발견하고, 어떤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을까?’ 마음가짐을 바꾸자, 마음속으로 직무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 후 한동안 저는 연이어 책망과 훈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제 일 처리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어떤 때는 제가 일을 할 때 원칙을 잘 파악하지 못해서, 또 어떤 때는 일을 비교적 단편적으로 보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였습니다. 저는 제 문제에 대해 반성하고 인식했습니다. 업무와 관련해서는 사역 효율을 높일 방법을 찾았고,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제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며 어느 방면의 받아들임이 부족한지 살핀 후 진리를 알고 체험이 있는 형제자매를 찾아 구했습니다. 이렇게 고민할 때면 책망과 훈계를 대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지금도 비록 가끔은 의기소침한 기분이 들 때가 있지만, 그 정서에 하염없이 빠져있지는 않습니다. 매일 본분을 이행하는 마음도 그렇게 무겁지 않고, 주어지는 환경을 정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저는 부정적인 정서에 빠져 너무나 힘들고 괴롭게 살았습니다. 만약 하나님 말씀의 인도가 없었다면 저는 부정적인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심지어 현재의 본분도 잃었을 것입니다. 제가 가장 나약할 때 주변 사람들을 통해 저를 일깨워 주시고, 말씀을 통해 저를 인도하셔서 제가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저는 마음을 내려놓고 최선을 다해 저의 본분을 잘 이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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