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진정한 본분 이행이다
최근 저는 새 신자들의 체험 간증 영상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지 이삼 년 남짓한 그들이 체험 간증을 얘기하는 걸 보면서 저는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난 왜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건지 반성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이런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체험하고 본 것들은 역대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너희가 그들의 말보다 더 훌륭하게 나를 증거할 수 있겠느냐? 지금 내가 너희에게 베푸는 것들은 모세보다 많고 다윗을 뛰어넘는다. 또한 나는 너희의 증거가 모세를 뛰어넘고 너희의 말이 다윗보다 훌륭하기를 바란다. 내가 너희에게 백배를 주었으니 너희도 나에게 백배로 갚아야 한다. 인류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는 이는 나이며, 내 생명을 받아들이고 나를 증거해야 하는 존재는 너희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준 본분이자, 너희가 마땅히 나를 위해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모든 영광을 주었고, 이스라엘 선민들도 얻지 못한 생명을 주었으니, 너희는 마땅히 나를 증거해야 하며, 나를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쳐야 한다. 내게서 영광을 받는 자는 나를 증거해야 하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는 내가 일찍이 정해 놓은 것이다. 나의 영광을 받는 것은 너희의 복이며, 나의 영광을 증거하는 것은 너희의 본분이다. 너희가 그저 복 때문에 나를 믿는다면 나의 사역은 별 의미가 없어지며, 너희 역시 너희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 너희는 나의 진리와 길과 생명뿐 아니라 요한보다도 더 큰 이상(異象)과 계시를 받았다. 너희는 더 많은 비밀을 깨달았고, 나의 본모습도 보았다. 너희는 나의 심판을 더 많이 받았고, 나의 공의 성품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너희는 말세에 태어났지만 예전 것과 지난 것들을 깨닫고, 오늘날 내가 친히 행한 것까지 체험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에 대한 내 요구는 과하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었고, 너희도 내게서 매우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역대 성도들을 향해 나를 증거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바람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믿음’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다 보고 나니 큰 감동과 함께 자책감도 느껴졌습니다. 제가 복되게도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누렸다는 점은 감동적이었지만,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으며 너무도 많은 은혜를 누렸는데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책감이 느껴진 것입니다. 말세에 하나님께서 수많은 진리를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의 패괴를 겨냥해 우리를 심판하며 폭로하셨고, 우리를 일깨워 주시고 격려하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잘 이해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이번엔 각 방면의 진리를 상세하게 교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할까 봐 사례와 비유를 들며 세세하게 분석하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대가와 심혈을 들이신 목적은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정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벌써 30년간 사역해 오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하시며 많은 진리를 선포하신 하나님이 바라시는 건 우리의 증거를 보는 것입니다. 그 깊이가 얕더라도 실제적이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사역을 체험해 얻은 수확과 인식을 글로 적어 하나님을 증거하길 바라십니다. 그건 하나님 사역의 결실이자, 하나님이 들이신 대가와 심혈이기 때문입니다. 이 간증들은 하나님께 가장 큰 위안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지만, 저는 제가 어느 방면의 진리를 깨닫고 어떤 진리 실제에 진입했는지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도리로만 알았지 진지하게 묵상하고 실행하며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증거하고 각종 간증문을 쓰라는 얘기만 나오면 덜컥 겁을 먹고 불안해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노력을 기울이거나 대가를 치른 적이 드물었습니다.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어 왔음에도 간증문 한 편 쓰지 못해 증거가 없는 자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괴로웠습니다.
한번은 어떤 자매가 제게 체험 간증문 쓰기 훈련을 하지 않겠느냐고 묻길래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조금 쓰다가 이내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사역을 많이 맡은 것도 아닌데 항상 바빠서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은 하루, 또 하루 뒤로 미뤄져만 갔습니다. 그 후로 저는 글쓰기 계획도 세워 봤지만 글 쓸 시간이 돼도 여전히 본분 때문에 바빠 마음을 평온히 하고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육 수준이 낮고 자질이 떨어져 글을 못 쓴다.’, ‘바빠 시간이 없다.’ 등 온갖 핑곗거리를 찾았습니다. 심지어 글을 쓰는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건 매일 이행해야 할 본분을 잘 이행하는 거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본분을 잘 이행 못 하면 책망과 훈계를 받게 될 것이고 심각할 경우 교체될 수도 있지만, 글은 안 쓴다고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런 생각에 저는 간증문 쓰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제 본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계속 강퍅하고 패역한 내적 상태로 살며 체험 간증문을 쓰는 일에서 수동적으로 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서야 제 관점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지금 왜 나를 믿어야 하는지 진정으로 알고 있느냐? 너는 내가 사역하는 목적과 의미를 진정으로 알고 있느냐? 너는 진정 너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너는 진정 나의 증거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네가 나를 믿기만 할 뿐, 네게서 나의 영광을 볼 수 없고 나의 증거를 볼 수 없다면, 너는 내가 일찍이 도태시킨 대상일 것이다. 더구나 뭐든 다 알고 있다는 자들은 내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고, 내 집에서는 걸림돌에 불과하다. 또한 내 사역에서 걸러 내야 할 가라지로서 아무 쓸모도 존재감도 없는, 오래전부터 내게 혐오받은 자다. 나를 전혀 증거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항상 나의 분노가 따를 것이고, 나의 채찍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그들을 악한 자의 손에 넘겼으므로 그들에게는 나의 축복이 조금도 없다. 형벌받는 날이 오면 그들은 어리석은 여자보다 더 중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지금 나는 내가 맡은 범위의 사역만을 하고 있는데, 모든 밀을 단으로 묶고 가라지도 그 속에 넣어 함께 묶고 있다. 이것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사역이다. 내가 키질을 할 때 그 가라지들을 모두 걸러 낼 것이다. 그다음 알곡은 곳간에 넣고, 걸러진 가라지는 불 속에 넣어 재로 만들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사역은 모든 사람을 단으로 묶는 것, 즉 철저히 정복하는 것뿐이다. 그 후에 키질을 시작해 모든 이의 결말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 어떻게 나를 만족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나를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지금의 충성심과 순종이며, 지금의 사랑과 증거이다. 설령 네가 지금은 무엇을 증거라고 하는지, 무엇을 사랑이라고 하는지 모를지라도 마땅히 너의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한다. 너의 유일하고 보배로운 충성심과 순종을 내 손에 바쳐야 할 것이다. 내가 사탄을 물리친 증거는 사람의 충성심과 순종에 있고, 내가 사람을 완전히 정복한 증거 또한 사람의 충성심과 순종에 있음을 너는 알아야 한다. 나를 믿는 이상 너의 본무는 나를 증거하고, 내게 일편단심으로 충성하며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믿음’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응당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사람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대상입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하나님의 노여움이 느껴졌습니다. “네가 나를 믿기만 할 뿐, 네게서 나의 영광을 볼 수 없고 나의 증거를 볼 수 없다면, 너는 내가 일찍이 도태시킨 대상일 것이다. 더구나 뭐든 다 알고 있다는 자들은 내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고, 내 집에서는 걸림돌에 불과하다. 또한 내 사역에서 걸러 내야 할 가라지다.” “나를 전혀 증거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항상 나의 분노가 따를 것이고, 나의 채찍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그들을 악한 자의 손에 넘겼으므로 그들에게는 나의 축복이 조금도 없다. 형벌받는 날이 오면 그들은 어리석은 여자보다 더 중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저는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셨습니다. 그 많은 설교 교제를 들으며 책망과 훈계, 실패와 넘어짐을 겪고,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 채찍질과 징계를 맛보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체험과 인식이 좀 생겨도 그걸 공들여 글로 쓰려 하지 않았고, 매일 외적인 일로 바쁘게 지낼 뿐 진리를 구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진리 면에서 구하고 깊이 진입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평소 체험에서 인식과 빛이 좀 생겨도 명확히 알 때까지 묵상에 공을 들이며 진정으로 깨닫고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인식과 빛은 사라졌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은 그렇게 묻혀 버렸습니다. 예전에 새 신자 양육을 훈련할 때가 또 생각났습니다. 당시 저는 하나님 사역을 증거하는 것과 관련된 진리조차 제대로 교제하지 못했고, 제가 얘기하는 인식들은 수준이 비교적 얕고 핵심을 찌르지 못했습니다. 그 후론 복음을 전하는 훈련을 하였는데, 종교 관념과 적그리스도의 그릇된 논리에 대해서도 저는 중요한 핵심을 포착해 명확히 해부하며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방면의 진리든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아 명확히 교제하지 못했습니다. 예배 시간, 생명 진입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교제를 할 때도 대부분 격려하는 내용의 겉치레식 말이나 공허한 도리를 얘기했습니다. 조금 인식한 게 있어도 그 깊이가 얕아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를 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방면의 진리든 저는 도리만 알고 있을 뿐 진리 실제가 없었죠. 하나님을 오랜 기간 믿었는데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그저 힘쓰며 일만 할 뿐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아 진리의 깨우침과 생명 성품 변화의 증거에 이르지 못한 저 자신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자를 보고 ‘눈엣가시’, ‘걸림돌’, ‘걸러 내야 할 가라지’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났습니다. 그런 자에게선 하나님의 분노가 떠나지 않습니다. 뭔가 명치가 아파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었지만 두 손은 텅 비어 있는 저 자신이 폐물이자 수치의 낙인이 찍힌 자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무척 증오하고 용인하지 않으시며, 끊임없이 노여워하십니다. 이런 자는 겉으론 본분을 이행하고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성품 변화의 증거가 없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 부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고 제 관념은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맡긴 사역을 잘 해내고, 악을 행하지 않으며, 본분에서 큰 실수가 없고, 심각한 과오가 없으면 교체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보험이라도 들어 놓은 것처럼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고 말이죠. 이제 와서 보니 이런 생각은 저의 관념이자 일방적인 바람일 뿐, 하나님의 요구와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절대 수고로이 본분을 이행하고, 규례를 지키며, 명백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어도 시종일관 증거가 없다면 결국에는 도태될 게 분명했습니다. 문득 이런 하나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나중에 네가 오늘 본 모든 것을 증거할 수 없다면 너는 피조물의 기능을 잃은 것이다. 그러면 너라는 사람은 존재할 의미가 조금도 없고, 사람이 될 자격도 없다. 심지어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너희에게 수많은 사역을 했지만 네가 지금 배운 것도, 얻은 것도 전혀 없는 연고로, 나의 사역을 확장해야 할 때 어리둥절해하며 말문을 못 열고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면, 너는 역사의 죄인 아니겠느냐? 그때가 되면 심히 후회하지 않겠느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니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고, 한편으론 조급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더는 이러고 있지 말고 간증문을 쓰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제대로 마음먹고 글을 쓰려고 하자 여러 방해와 어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제 체험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한 바가 없어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급한 사역이 생기면 저는 바삐 일을 처리하러 갔고, 일 처리가 끝난 후엔 핑곗거리를 찾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체험 간증문 한 편 쓰는 데 반나절이면 되지만, 난 조용한 환경과 충분한 시간이 없으면 안 돼. 난 자질이 너무 떨어져 글을 못 쓰나 봐.’ 그렇게 또 저는 글 쓰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저는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어째서 난 간증문 쓰는 일에서 이렇게 수동적일까? 입으로는 글을 쓰겠다고 했으면서 왜 얼마 지나지 않아 무관심해지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저 자신에 대한 인식을 조금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 성품을 어떻게 인식하고 분별해야겠느냐? 사탄이 하기 좋아하는 일,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수단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영원히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사악한 것을 좋아한다. 또 늘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교만한 본성이다. 그래서 사탄은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며, 하나님과 맞선다. 사탄은 모든 부정적인 사물과 사악한 사물의 상징이자 근원이다. 이 점을 간파할 수 있다면 사탄 성품을 분별할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사탄 성품이 있으며, 사람은 누구나 사탄 성품에 속박되고 얽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단순하게 마음을 여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고 질투하지만, 막상 그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힘들어한다. 죽어도 정직한 말을 하거나 정직한 일을 하지 못한다. 이것이 일종의 사탄 성품 아니겠느냐? 말은 듣기 좋게 하지만 실행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몹시 힘들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내적 상태는 바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관심이 없고, 심지어 반감을 갖거나 혐오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류를 좇는 것에 열광하며,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것을 거들떠보지 않으며 냉담하게 대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구한 이 기준이나 원칙을 자주 경시하곤 한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에 반감을 갖고 있으며, 언제나 마음속에 반발하고 대항하고 경시하는 감정을 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자의 주된 특징이다.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진리를 교제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 등은 다 긍정적인 사물에 속한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긍정적인 사물에 반감을 품고 신경 쓰지 않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가장 증오스러운 점은 그들이 긍정적인 사람, 예를 들어 정직한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키는 사람에게 경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늘 그들을 공격하고 배척하려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단점과 패괴 표출을 발견하면 그것을 빌미 삼아 문제를 확대하며, 시종일관 깎아내린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그들은 왜 긍정적인 사람들을 이토록 적대시하겠느냐? 어째서 악인, 불신파, 적그리스도에게는 큰 호감을 보이고 영합하며 늘 한통속이 되어 허송세월하겠느냐? 그들은 부정적인 사물, 사악한 사물에 대해 언급하면 신이 나서 희희낙락하지만,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항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다른 이가 진리를 교제하거나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들을 때면 마음속에 싫증과 불만을 품고 원망을 표출한다.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아니겠느냐? 패괴 성품을 드러낸 것 아니겠느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은사와 재능을 발휘하고 자기 기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기운이 넘친다. 그러나 그에게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요구하면, 마음이 차갑게 식고 열정도 사라진다. 스스로를 뽐낼 수 없으면 힘이 생기지 않고 기운이 빠지는 것이다. 스스로를 뽐낼 때는 왜 힘이 생기겠느냐? 진리를 실행할 때는 왜 힘이 생기지 않겠느냐?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사람은 모두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며 허영을 좇는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얻고 상을 받기 위해서는 기운이 넘친다. 그런데 왜 진리를 실행하고 육을 저버릴 때는 힘이 없어지고 기운이 빠지는 것이겠느냐?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이는 사람의 마음에 불순물이 있으며, 오로지 복을 받기 위해, 솔직히 말하자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추구할 만한 복과 이익이 없다면 힘이 없어지고 기운이 빠지며 어떤 열정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전부 진리를 싫어하는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이러한 성품에 지배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로 치우치며 잘못된 길을 택하게 된다. 또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포기하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채 명리와 지위를 좇아 사탄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이 행하는 이 모든 일은 사탄을 위해 힘쓰는 것이며, 사탄을 섬기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예전에 저는 간증문 쓰는 일에 노력을 쏟지 않았습니다. 자책감이 들긴 했지만 큰 문제인 것 같진 않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폭로로 그제야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사탄 성품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려면 체험과 인식이 있어야 하고, 또 그걸 공들여 되새겨 봐야 합니다. 마음을 평온히 한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구하며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글을 쓰라는 얘기만 나오면 제 속에서는 거부감과 반발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과 관련해 하나님께서 많은 말씀을 교제해 주셨고, 형제자매들도 체험 간증문 쓰는 훈련을 하고 있는데, 저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온갖 핑계를 찾아 피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강퍅했습니다! 진리와 관련된 일에는 반발심과 반감을 품으며 노력을 들이려 하지 않았으면서 외적인 일 얘기만 나오면, 진리 본질과 관련 없는 사역을 하라고만 하면, 제 모든 기운을 아낌없이 쏟으려 했습니다. 그 일들은 제가 잘하는 일이고, 손에 익은 일이라 형제자매들에게 사역 성과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훈계와 책망, 혹은 교체되는 일을 피할 수 있고, 체면과 지위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저의 이런 모습은 확실히 진리를 싫어하는 것으로, 사탄 성품이었습니다. 사실, 간증문을 쓰는 과정은 바로 진리를 구하는 과정입니다. 진리를 구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서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법입니다. 저는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모든 걸 버리고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했고, 꽤 많은 글귀와 도리도 얘기할 수 있지만, 속으로는 진리에 흥미가 없고 진리를 갈망하거나 귀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며, 하나님께도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은 채 사탄 성품에 따라 살며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반성하자 그제야 제 문제의 심각성이 보였습니다.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었으면서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태도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고, 여전히 진리를 싫어하며, 성품 역시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부류였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믿으며 아무리 힘을 써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패괴 성품도 해결하지 못해 끝까지 믿어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을 터였습니다. 그때, 저는 두려워져 하나님께 기도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싫어합니다. 그저 본분을 이행하면서 힘만 쓰기 좋아하고 수고로이 사역하는 것만 좋아합니다. 이제야 제 믿음이 너무 초라한 걸 알겠습니다. 더는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께로 돌아서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애쓰고 싶습니다.’
그 후, 교육 수준이 낮고 자질이 떨어진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제 문제를 겨냥해 한 자매가 하나님 말씀을 보내왔습니다. 제게 참 도움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하면서 모두 어느 정도 수확을 거뒀으며, 진실한 체험이 생겼으니 하나님을 위해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증거할 때에는 주로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지, 어떤 시련으로 사람을 연단하고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지, 너희가 체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내고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결국 어떻게 정복되었는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얼마나 갖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이 말해야 한다. 너희는 이 부분에 대해 말할 때 공허한 이론을 말하지 말고 사실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말하며, 마음속 말을 솔직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체험하면 된다. 심오하고 공허한 이론으로 자신을 뽐내려 하지 마라. 그러면 너무 교만하고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현실적인 체험에 바탕을 둔 실제적인 말, 마음에 있는 말을 많이 해야 한다. 이는 사람에게 가장 크게 도움이 되고 사람들 보기에도 가장 적절하다. 지난날, 너희는 하나님을 가장 심하게 대적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정복되었다. 이 점을 영원히 잊어선 안 된다. 이 방면의 일을 많이 묵상하고 생각해서 이해한다면 어떻게 증거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뻔뻔스럽고 비이성적인 일을 저지르기 쉬운데, 그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참된 체험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한다. 흐리멍덩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추구해야 성품이 변화될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다 읽고 진정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과 사역을 증거하고,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체험했는지, 자신이 어떤 패괴를 드러내었는지, 하나님 말씀의 폭로로 자신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게 됐으며, 그 후 또 어떻게 실행하고 진입했는지 등을 교제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고 하나님의 사역과 사랑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있어 뛰어난 말주변이나 심오한 이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마음속 말을 하면 됩니다. 이를 깨닫자 마음이 한결 밝아졌습니다. 사실, 체험 간증문 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육 수준이나 글솜씨와 상관없이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려 하는지, 진리를 구하며 자신의 패괴 표출과 문제점을 해결하는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했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자신을 해부하고 인식하여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됐는지,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있는지 등이 중요한 거죠. 이 몇 가지 방면의 실제를 갖추고 쓴 글은 좋은 글로, 교육 수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이런 실제적인 체험과 인식을 일상적인 말로 쓰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체험하고 인식한 것을 그대로 글로 쓰고 자신의 진심을 쓰고 자신의 참된 인식과 느낌을 써서 남들에게 도움이 되면, 이것이 글입니다. 예전에 저는 줄곧 교육 수준이 낮고 자질이 떨어진다는 등의 내적 상태 안에서 살며, 늘 이걸 핑계로 글 쓰는 훈련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글을 쓰려면 반드시 높은 수준의 지식과 자질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런 관점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이런 내적 상태로 살지 말고,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며 실행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고, 제가 체험하고 얻은 것을 글로 써서 하나님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게 저의 본분이었습니다.
한번은 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 진리를 추구하고 간증문을 쓰는 일에 있어 더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리더 일꾼이 생겨난 연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크게 보면 하나님 사역의 필요에 의해서, 작게 보면 교회 사역과 하나님 선민들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다. … 리더 일꾼이 일반 하나님 선민들과 다른 점은 그저 그들이 이행하는 본분의 특수성에 있다. 이 특수성은 특히 ‘리더십’ 역할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 몇 명이 있든 상관없이 그 교회 리더가 바로 이끄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리더는 무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그는 그 교회에 있는 모든 하나님 선민을 이끈다. 그는 교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그 리더가 잘못된 길을 가면, 그 교회의 모든 이가 리더를 따라 잘못된 길을 가게 된다. 이는 교회 전체의 하나님 선민에게 무척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바울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자신이 세운 많은 교회와 하나님 선민들을 이끌었는데, 바울이 엇나가자 그가 이끌던 교회와 하나님 선민들 역시 따라서 엇나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리더가 길을 엇나갈 경우, 스스로가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이끄는 교회와 하나님의 선민들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 만약 리더가 올바른 사람이고, 올바른 길을 가며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한편으로는 그가 이끄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며 추구할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그 개인의 생명 체험과 성장 또한 다른 이들의 눈에 들어올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영향도 줄 것이다. 그럼 리더로서 가야 할 올바른 길이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진입하도록 이끌며,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옳지 않은 길이란 무엇이겠느냐? 지위와 명예, 이익을 추구하며 언제나 자신을 과시하고 증거하며, 한 번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선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사람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그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네가 사람들을 네 앞으로 데려왔다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이 아닌 패괴된 인간 앞으로, 사탄 앞으로 인도한 것이다. 사람들을 진리 앞으로 인도해야 비로소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것이다. 리더 일꾼이 걷는 길은, 그것이 올바른 길이든 잘못된 길이든 하나님 선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조 사람의 마음을 농락한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저는 제 직책과 본분에 대해 더 명확히 알게 됐고, 제 어깨에 짊어진 책임이 막중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리더 일꾼이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길을 가는지는 비단 자신뿐 아니라 그들이 이끄는 형제자매에게도 영향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리더 일꾼이 진리를 추구하는 올바른 사람이라면, 진리에 있어 끊임없이 성장합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자신이 어떤 잘못된 관점들을 갖고 있었는지, 또는 어떤 패괴 성품에 따라 살았는지 반성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문제의 본질을 인식한 후 실행 원칙을 찾아 진입합니다. 리더 일꾼이 옳은 길을 걷고 있으면,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에도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그는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중시하고, 그가 이끄는 사람들 역시 이 방향을 향해 진입하게 됩니다. 만약 리더 일꾼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은 채 매일 명예와 지위를 위해 바쁘게 사역하며, 진리 추구에 무관심하고 진리를 교제해 문제 해결도 하지 못한다면, 본분을 이행할 때 그저 외적인 일로 바쁘거나 혹은 글귀와 도리를 말하며 자신을 높이고 드러낼 뿐 진리를 교제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결실을 조금도 낼 수 없다면, 그렇게 걷는 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다른 사람들 역시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렇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바른길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힘만 쓰며 사역하는 길, 하나님을 대적한 바울의 길로 이끌게 됩니다. 이건 사람을 구원하려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제게 리더 훈련을 할 기회를 주신 건 그저 외적인 일만 바쁘게 하거나 수고로이 힘을 쓰라는 뜻도,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저는 리더로서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을 이끌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본분을 이행하는 가운데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고, 점차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제 본분입니다. 그 순간, 저는 진리를 추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방면의 진리든 깨달은 수준이 얕고 진리 실제가 없었던 저는 그저 체험하며 인식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음가짐이 바르고 바른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후 한동안 자신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여 어떤 문제들을 해결했을까? 어떤 패괴 성품들을 해결했을까?’ 그제야 제가 많은 문제를 모호하게만 알고 있지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아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실행 원칙을 찾지 못했음을,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본 결실이 없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후, 저는 비교적 깊은 인식을 얻게 된 체험을 찾아 글 쓰는 훈련을 했습니다. 글을 쓰는 한편 구하며 묵상했고, 또 시간이 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글을 다 쓰고 나니까 정말 충실감이 느껴지고 너무 평안해졌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자 저도 모르는 사이 제 내적 상태와 문제의 본질을 더 명확히 보게 되었고, 진리에 대한 인식도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이 되었습니다. 실행의 길도 전보다 더 명확히 보였습니다. 체험 간증문을 쓰는 일은 자신의 내적 상태를 파악하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척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생명 진입의 길이자 진리를 구하고 깨닫는 가장 좋은 방식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많은 형제자매, 그리고 리더 일꾼도 간증문 쓰는 걸 중요하게 여기거나 여기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는 얘길 듣게 되었습니다. 사역이 바빠 글 쓸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내 내적 상태와 똑같잖아. 나 역시 줄곧 그런 잘못된 관점을 지켜 왔고, 글을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한 핑계가 무척 많았지. 내가 그런 내적 상태를 어떻게 해결했고, 그런 관점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관한 글을 쓴다면 형제자매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부담이 생겨난 저는 이와 관련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비록 제 인식이 얕고 단편적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글을 쓰는 것이 제 본분이라 생각하며 인식한 내용을 글로 쓰는 훈련을 했습니다. 평소 형제자매들을 만나 얘기할 때도 이 주제에 관해 교제했고, 다른 일이 없을 때면 혼자 이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침 영 생활 시간에도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셨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 문제를 더 명확히 꿰뚫어 보게 되었고, 그때 다시 펜을 들자 글이 쉽게 써 내려가졌습니다. 개요를 정리한 후, 각 개요마다 제 인식에 근거해 표현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체험한 바를 그대로 글로 옮기니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묵상하며 글을 쓰다 보니 문제를 더 분명히 꿰뚫어 볼 수 있었고 관련 진리에 대해서도 더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진리 추구에 공을 들일수록, 글 쓰는 법을 훈련하며 글쓰기를 통해 진리를 구하여 문제를 해결할수록, 하나님의 더 많은 깨우침과 인도를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진정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수록 부담을 갖게 되고, 부담을 가질수록 체험은 더욱 풍성해진다.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 하나님은 이 부담을 너에게 더해 주며, 너에게 맡겨 준 일에서 너를 깨우쳐 줄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이 부담을 더해 줄 때,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면 이 방면의 진리를 중요시하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형제자매들의 생명 상태에 부담을 갖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네게 준 부담이다. 그러면 네가 평소에 기도할 때 늘 이 부담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 네게 더해지면, 하나님이 하려는 것이 바로 네가 원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담을 너의 부담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말씀을 먹고 마셔도 이런 부분을 중심에 둘 것이다. 너는 속으로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형제자매들이 자유를 얻고 영 안에서 누리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너는 교제할 때도 이러한 문제 해결에 역점을 둘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도 주로 이 방면의 말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부담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하나님의 요구를 알게 된다. 그러면 실행의 길이 더 잘 보인다. 이는 너의 부담으로 생긴 성령의 깨우침이자 빛 비춤이며, 너를 위한 하나님의 인도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느냐? 만약 네게 부담이 없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에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반면, 부담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길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너는 응당 하나님께 더 많은 부담을 달라고, 더 큰 부탁을 맡겨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으로 실행 길이 더 있게 되고,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찾아내고, 나아가 성령의 감동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온전케 되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이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생명 진입과 교회에 존재하는 문제점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 있고,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실행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게 더 빨라집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책임감과 또 갈망하고 구하는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얻어 진리에 대한 인식에 점점 더 깊이가 생기고, 사람과 일에 대해서도 더 명확하고 철저하게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진리에 대한 인식도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이 됩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려고 애쓰지 않고 글 쓰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빛 비춤을 얻었다 해도 감각적 인식일 뿐 그 깊이가 얕습니다. 늘 어렴풋하고 모호하게 느껴질 텐데, 그건 진정 깨달아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속 인식과 터득한 바를 글로 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문제를 철저히 곱씹고 이해해야 감각적 인식은 더 정확하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인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수확입니다. 간증문을 쓰는 과정은 일을 꿰뚫어 보는 과정이자 진리를 깨닫는 과정,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입니다. 글을 많이 쓸수록 얻는 것도 많아집니다.
현재 저는 간증문을 쓰는 일에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즐겁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제 패괴 성품을 더 명확히 보게 되고, 일을 보는 제 관점과 생각 역시 하나님 말씀을 인식함에 따라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척 실제적인 수확으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예전에 저는 간증문을 쓰는 건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라 여기며 무척 어렵게 생각했습니다. 무척 패역하고 강퍅하게도 차라리 외적인 일로 바쁘려 했지 간증문은 쓰기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글 쓰는 일은 제가 맡은 사역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건 매우 잘못되고 엉터리 같은 관점이었습니다. 글 쓰는 일은 사역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고, 오히려 제가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게 하여 맡은 본분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내게 해 줍니다. 지금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제 내적 상태를 되새겨 보려 합니다. 제가 꿰뚫어 보지 못하고 해결 못 하는 문제에 대해 열심히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저도 모르는 사이 생명 진입에 책임감을 갖게 되었고, 저에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하는 내적 상태가 많다는 생각에 점차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이건 모두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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