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의 정서에서 벗어나다

2024.8.25

작년 1월경에 교회 리더가 리신(李欣)이랑 저한테 교회 문서 사역을 책임지게 했어요. 제가 초짜다 보니까 리신이 저한테 준 사역량이 별로 많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어려움이나 무슨 문제가 있으면 리신이 원칙에 결부해서 교제를 해 줬어요. 그러니까 제가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었고, 업무적으로 크게 압박감을 느끼는 것도 없었어요. 그러다 3월 달에 제가 교회 리더로 뽑혔는데,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어요. 리더의 본분은 교회의 전반적인 사역을 다 책임져야 하고 다양한 문제들도 다 해결해야 하니까 심리적으로 부담이 컸어요. 초반에는 윗선 리더한테서 사역을 잘 시행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편지가 자주 왔어요. 예를 들면 양육 사역, 복음 사역 출교와 제명 관련 사역, 문서 사역, 육성 사역 등 사역 별로 어떻게 계획하고 안배했는지, 어떤 문제와 오류가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등등을 상세하게 답장해야 했어요. 맡은 사역이 많다 보니까 한 가지를 시행하고 나면 바로 다른 사역을 시행해야 했는데, 정말 매일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어요. 그렇게 한동안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까 잠시 좀 쉬고 싶더라고요. 체험 간증 영상도 좀 보고, 찬송도 들으면서 여유 시간을 좀 갖고 싶었어요. 근데 서둘러 시행해야 하는 사역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본분을 맡으면 정말 자유라는 게 전혀 없다는 생각에 너무 서운한 감정이 들었어요. 한번은 제명할 대상들의 자료가 잘 수집되지 않아 교회 인원 정리 사역에 별 진전이 없었어요. 그걸 윗선 리더가 알게 되면서 제가 너무 책임감이 없다고 책망 받았죠. 그때는 정말 해명을 하고 싶었어요. 근데 리더의 책망이 틀린 게 아니니까 받아들야지 어쩌겠어요. 그 후 저는 증거 수집을 위해 교회들에 평가서를 요청했는데, 정말 관련된 자료들을 다 정리하는 데 몇 주가 걸렸어요. 그 일을 마무리하기 바쁘게 바로 또 다른 사역을 체크하고 시행해야 했어요. 정말 그때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정신없이 보냈고 계속 긴장 상태에 있었는데, 심신이 너무 지치더라고요.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매일 이렇게 바쁘게 보내니까 억압감이 너무 크네. 언제면 제대로 좀 쉴 수 있을까?’ 그러면서 전에 문서 사역을 할 때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때는 사역량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곁에 일을 같이 분담해 줄 수 있는 리신 자매까지 있어서 크게 압박감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때가 너무 그리운 거예요. 리더라는 본분을 맡은 뒤로는 매일 바쁘게 보내니까 억압감을 느끼게 돼 리더 본분을 내려놓고 싶더라고요. 근데 그렇게 하면 또 너무 비이성적인 것 같고 형제자매들도 분명 제가 고난을 감내할 분량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하릴없이 계속 협력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나중에 교회에 중국 공산당의 체포 상황이 닥치면서 뒷수습해야 할 일들이 생겼어요. 저는 동역자 자매랑 그 일로 정신이 없다 보니까 제가 맡은 양육 사역은 아예 신경도 못 썼어요. 물론 속으로는 시간을 내서 양육자들의 상황도 체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뒷수습하는 일이 시급하고, 양육 사역의 성과도 하루 아침에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몰려 있으니까 그것부터 마무리하고 다시 양육 사역을 체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윗선 리더한테서 권고의 편지를 받았는데, 뒷수습한다고 다른 사역을 지체시키면 안 된다면서 양육 사역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거부감이 드는 거예요. ‘안 그래도 맡은 사역이 많은데, 이렇게나 많은 요구 사항까지 만들면 내가 이걸 어떻게 소화하지? 아니 왜 내 어려움은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거야? 내가 무슨 몸이 두 개도 아니고 한꺼번에 이 많은 사역을 어떻게 잘 할 수 있겠어?’ 이런 생각에 조금 짜증 나고 답답했죠. 심지어 리더의 편지를 보고 싶지도 않은 거예요. 그렇다고 그 사역들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새 신자들이 제때에 양육을 받지 못해서 떠나간다면 책망받는 건 둘째 치고, 그건 과오를 남기는 거고, 잘못하면 해임도 될 수 있는 건데, 이건 문제지요. 그래서 저는 양육 사역의 진도랑 새 신자의 문제점을 파악해 봤어요. 하지만 적극적이지 않다보니까 사역을 체크할 때도 그저 형식적으로 대충하고 넘어갔는데, 리더한테 보고하기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편이었어요. 그때는 정말 겉으로 보기엔 매일 바쁘게 보냈지만 사실은 많은 사역에 속절없이 끌려다니기만 했어요. 그래서 사역을 시행해도 뭐 하나 빠지거나 부족해서 다시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저는 매일 의기소침하고 지친 상태로 지내야 했고, 사역 효과도 점점 떨어졌어요. 동역자 자매가 저보고 책임감이 부족하다고 하니까 너무 서운하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많은 사역을 맡고 있고,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역하는데, 이런 나한테 책임감이 없고 내가 마음을 쏟지 않는다고? 이건 요구 기준이 너무 높은 게 아닌가?’ 생각할수록 너무 억울해서 도저히 이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괴로워할 바에는 차라리 인책 사임하고 가벼운 본분을 택하는 게 낫겠다 싶었죠. 그러면 지금처럼 그렇게 억압감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심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변했어요. 저녁에 저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죠. ‘하나님, 너무 괴롭습니다. 더는 못 버틸 것 같습니다. 어떤 공과를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문제를 깨달을 수 있게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세요.’

기도하고 나서 이 말씀을 봤어요.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느냐? 바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는 것은 일과 삶에 대한 요구이다. 그러나 법률, 혹은 생활 환경, 혹은 특정 집단의 규칙, 제도, 규정, 규율 등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자기의 바람이나 상상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 깊이 억압을 느낀다. 이런 억압은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억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사람의 성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여러 원인과 객관적 환경 및 조건의 제약으로 인해 사람이 자신의 성격대로 할 수 없고 자유롭게 방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본분을 늘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고 몸을 사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교회 사역을 서둘러야 할 때가 있는데, 그는 제멋대로만 하려 하고, 요즘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기분이 좋지 않고 의욕이 없다고 생각되면 수고하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교회 사역을 하려 하지는 않는다. 너무나도 나태하고 안일을 탐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 의욕이 없어 축 늘어져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리더에게 책망을 받거나 형제자매로부터 게으르다는 평판은 받고 싶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너무나도 원하지 않고, 달갑지 않으며, 내키지 않아 한다. 그리고 억울해하고 서운해하며 분해하면서 사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성격대로 하고 싶지만, 하나님 집의 요구와 규정을 감히 뿌리치거나 어기지도 못한다. 그렇게 억압이라는 정서가 차차 생기는 것이다. 이런 억압의 정서가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겉모습이 퇴폐적이고 무기력해 보이게 된다. 로봇처럼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어찌 되었든 매일 하라면 하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손발을 멈추지 않고 하면서 본분을 이행하는 환경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마음은 억압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피곤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고 깨달았어요. 제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억압을 느끼고 괴로워했던 이유는 그 어떤 단속도 받지 않고 뭐든 제멋대로 하려 하는 마음 때문이더라고요. 일단 제 뜻에 맞지 않는 상황이 생기고 제 성질대로 못하게 되고 계속 제약받게 될 때, 저에게 억압의 정서가 생겼던 거예요. 생각해 보니 처음 문서 사역을 맡게 됐을 때는, 저에 대한 리더의 요구가 그렇게 높지 않았고, 업무에 관한 내용도 리신 자매가 잘 알려 줬고, 어려움이 생겨도 리신 자매가 제때에 교제하면서 도와줬어요. 게다가 사역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압박감도 느끼지 않았고요. 그러니 저는 그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었죠. 근데 리더라는 본분을 맡은 뒤로는 책임진 사역이 많아지면서 교회의 다양한 사역들을 다 신경 쓰고 관심을 가져야 하고, 모든 문제들은 실제로 참여해 해결해야 했어요. 거기다 교회에 체포될 상황까지 닥쳐 뒷수습해야 하는 일까지 생기니 더 바빠졌어요. 저는 조금이라도 압박감을 덜어 내고자 양육 사역은 일단 후순위에 놓으려 했는데 윗선 리더는 양육 사역에 대한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제 계획은 다 깨졌고 저는 육적으로 더 고생해야 하니까 순종이 안 됐어요. 근데 또 남들한테 고난도 이겨 내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는 게 겁이 났고 새 신자 양육을 못한 책임을 물을까 봐 더 겁이 나서 마지못해 순종했어요. 하지만 심적으로는 억압을 느끼고 무슨 일을 하든 계속 정신을 딴 데 팔았어요. 그리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그저 형식적으로 대충 때우기만 했는데, 결국은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말았죠. 협력하는 자매가 저한테 한마디 하면 저는 더 이치를 따지면서 억지 부리고, 심지어 인책 사임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까지 먹었는데, 정말 막무가내였어요. 그러다 저도 그게 심각한 문제라는 걸 느끼게 되면서 더는 그렇게 강퍅하게굴지 않았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어요. 『사회에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망나니, 멍청이, 얼간이, 깡패, 건달, 무뢰한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기술을 배우거나 역량을 키우려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직장이나 생계를 도모할 직업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이 사회에서 망나니, 무뢰한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교회로 섞여 들어와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고 복을 받으려 하는데, 기회주의자에 속한다. 이런 기회주의자는 본분을 전혀 기꺼이 이행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억압을 느낀다. 그리고 늘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런 삶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는 고통이라면 조금도 받고 싶지 않아 하며, 그저 놀고먹기만 하려 한다. 이런 사람은 사는 것조차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부정적 정서에 얽매여 있다. 그들은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지치고 곤혹스러워하며 본연의 일이나 중요한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본업이나 본분, 의무나 책임으로 여겨 그것을 잘해서 결실을 맺겠다거나 그것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건성으로 임하면서 본분 이행을 빌어 생계를 유지하려 한다. 압박감이나 통제가 조금이라도 생기거나 그에게 조금이라도 엄격히 대하여 약간의 책임을 지우면 그는 마음이 불편해지고 억압을 느낀다. 또한 그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면서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고 괴로워한다. 그들이 삶이 피곤하다고 느끼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성이 불건전한 사람으로, 하루 종일 비현실적인 생각에 빠진 채 뜬구름만 잡으며 꿈속에 살면서 기상천외한 생각만 하니 그들의 억압은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다. 진리에 흥미가 없는 그들은 불신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집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안식처를 찾도록 할 수밖에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이 말씀을 보면서 많이 느끼게 됐어요.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말씀을 보니까 계속 억압을 느끼는 근원은 사람이 자꾸 육을 방종하려 하고, 그 어떤 단속과 고통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었어요. 일단 육체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억압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하죠. 그런 자들은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잘 이행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자꾸 여유롭게 지내려고 해요. 진짜 진리를 추구하고 본무에 충실한 사람은 본분을 자신의 책임과 의무로 여기기 때문에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육적인 고생과 압박감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잖아요. 왜냐하면 본분을 잘 이행해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그에게는 긍정적인 추구관이 있기 때문에 억압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축복을 주시죠. 제가 리더 본분을 맡게 된 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근데 제가 맡은 사역은 신경을 많이 써야 하고 윗선 리더가 계속 체크하고 관리 감독까지 하니 제가 안일함을 탐할 기회가 줄어들게 된 거예요. 저는 이 본분을 이행하는 게 너무 힘들고 억압감을 크게 느끼다 보니까 매일 압박감이 없는 가벼운 본분만 이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사실 세상의 깡패, 건달, 망나니, 무뢰한 같은 사람들을 보면 매일 반듯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남을 등쳐 먹고, 일은 조금만 하고 농땡이만 부리죠. 그런 삶은 인격도 존엄성도 없는 거고 어디 가든 인정받지 못해요. 이는 가장 천박한 사람이죠. 근데 저도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취적이지 못하고 계속 육적 안락을 추구할 뿐 고생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건 실질적으로 하나님 집에서 놈팽이처럼 사는 거나 다름 없는 거죠. 리더가 되면 조금 힘들기는 해도 매일 접하는 사람과 일, 사물이 많아서 훈련받을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거잖아요. 교회의 인원 정리 사역 같은 경우에는 사람을 분별하는 측면의 진리를 많이 갖출 수 있고, 양육 사역의 경우는 새 신자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이면 이상(異象)에 관한 진리로 많이 양육하고 붙들어 줘야 하고요. 또 다른 사역도 시행하려면 그에 관한 진리 원칙을 다 알아야 하는데, 이런 건 한 가지 단순한 본분만 이행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거죠. 하나님께서 저한테 이렇게 진리를 얻을 기회를 주셨는데 그걸 소중히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리더 본분을 맡으면 너무 바쁘고 힘들고 제 마음대로 하면서 살지 못하고, 윗선 리더가 계속 제 사역에 대해 관리 감독하니 심적으로 반항심이 생기고, 사역을 시행할 때에는 건성으로 하고 사역 진도도 질질 끌었어요. 근데 전 반성하기보다는 억압의 정서를 품은 채 본분을 내팽개쳤으니 정말 너무 양심적이지도 못하고 이성적이지도 못했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진리에 흥미가 없는 그들은 불신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집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안식처를 찾도록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을 보니 마음이 찔리고 괴로웠어요. 꼭 하나님께서 얼굴을 맞대고 저를 폭로하시는 것 같았어요. 하나님은 이 부류 사람을 불신파로 정하시고, 미워하고 증오하신다고 하셨죠. 제가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를 계속 바로잡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 도태될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이걸 깨닫고 좀 두려웠어요.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죠. ‘하나님, 더는 이렇게 허송세월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저는 정상적인 인성을 갖추고 이성적이고 본무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 자신을 깊이 알 수 있게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찾고 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그렇다면 사람의 이런 억압은 어찌하여 생기는 것이냐? 분명 육적인 피로로 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느냐? 만약 사람이 늘 육의 안일과 쾌락만을 찾고 추구하며 고생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육이 조금이라도 괴롭거나 남보다 더 고생하거나 혹은 평소보다 피로할 때 그는 억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억압을 야기하는 원인의 하나이다. 만약 사람이 육적인 고생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해서 육의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를 추구한다면, 육적인 고생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설령 때로 분주하고 피곤하여 지치더라도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진다. 괜찮아지면 계속 분주히 보낸다. 그의 마음은 본분과 사역에 있으니 육적으로 조금 피곤하더라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에 문제가 생겨 늘 육의 안일만 추구하고자 한다면, 육적으로 조금 억울하거나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부정적 정서가 생겨난다. … 그는 이런 일로 자주 억압을 느끼고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도, 리더의 감독을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잘못을 저질러도 남들이 책망과 훈계를 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어떤 단속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인데,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걸까? 삶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해. 이런 규정, 저런 제도 같은 걸 따질 게 아냐. 열심히 지켜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할 거야. 당신들은 잠자코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 제멋대로이고 방탕하고 단속받지 않는다. 그 어떤 사역 환경에서도 그 어떤 단속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의 규정, 원칙을 지키려 하지 않고, 처신하면서 지켜야 할 원칙 역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양심과 이성으로 해야 할 최소한의 것도 지키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즐거울 수만 있으면, 자기에게 득이 되거나 편한 일이면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런 단속을 받는 것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되고 자유와 해방 속에서 자신의 육체와 욕망, 자신의 이상과 소원,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방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뒷일이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 하나님을 믿으면 이행해야 하는 본분 혹은 지키고 살아 내야 하는 진리 실제, 걸어야 하는 인생의 길 역시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사회에서나 사람들 속에서 항상 제멋대로 하려 하지만, 어딜 가든 바라는 대로 이루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인권을 중시하고 사람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며 하나님 집에서 인성과 인내, 관용을 중시하니 하나님 집에 오면 육체와 욕망을 마음껏 방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도 행정과 규정이 있기에 그는 여전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이런 억압의 부정적 정서는 하나님 집에 오고 나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사는 것은 그 어떤 책임이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진정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어떤 무리 속에 있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최종 목적은 자아를 찾고 자기만족을 실현하는 것이다. 처신의 취지도 이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자기만족이 그들 평생의 소원이자 추구 목표인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전에는 저에게 억압의 정서가 생긴 것은 리더로서 이행해야 할 본분이 너무 바쁘고 압박감과 어려움이 커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말씀을 보니까 그건 다 제가 추구하는 관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더라고요. 저는 본분을 이행할 때 항상 제멋대로 하고 싶어 했는데, 압박감과 어려움이 좀 생겨서 육이 만족을 얻지 못하면 억압의 정서 속에서 살았던 거예요. 그건 온전히 사탄이 주입한 “짧은 인생 즐겁게 살자.”, “오늘만 생각하고 즐기자.” 등의 독소에 영향을 받은 거였죠. 그래서 전 사람은 스스로에게 잘 대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중학교 졸업 고사 전에 학교에서 복습하라고 며칠 방학을 했어요. 그때 친구들은 시간이 부족하니까 죽도록 노력해 보자고 했는데 전 그렇게 빠듯하게 보내고 싶지 않더라고요. 저에게는 성적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제가 덜 힘든 게 더 중요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친한 친구들과 놀러 다녔는데, 시험 전의 긴장감이 전혀 없었어요. 사회에서 취직할 때도 제가 육적으로 좋아하는 곳을 골랐어요. 회사 규정이 직원에 대해 정말 엄격하면 저는 왠지 억압과 구속을 받는 것 같아서 아예 사직서를 내기도 했어요.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속 편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 추구 관점을 하나님을 믿는 데에도 적용하고 있었어요. 본분도 아무런 압박이 없는 가벼운 것만 하려고 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바쁘거나 압박감이 생기면 억압적 정서부터 생기고 심적으로 반발심이 생기면서 건성으로 임하며 형식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곤 했죠. 정말 인간성이라고는 없었어요. 저는 중국 공산당 당국이 하나님 선민들을 체포하는 데에 혈안이 돼 있는 걸 알아요. 윗선 리더는 새 신자들의 작은 분량을 고려해서 그들이 최대한 빨리 참도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하려면 신속히 붙들어 주고 양육해야 한다는 생각에 양육 사역에 대해 계속 체크하고 감독했던 거예요. 그건 온전히 새 신자들의 생명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거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모습이고 리더의 본무이기도 하잖아요. 근데 전 육체가 좀 더 고생해야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반항하고 불평하면서 양육 사역을 소홀히 했어요. 그래서 새 신자들이 제때에 양육받지 못해서 생명이 손해를 보게 됐죠. 진리를 사랑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부탁을 대하는 자세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고,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아무리 큰 어려움이나 압박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마주하면서 모든 사역을 참답게 시행하는 거예요. 그에 비해 저는 리더라는 본분을 맡았지만 사역에 대해 완전 무책임했고, 그저 형식적으로 사역을 시행했어요. 저처럼 본분을 대하는 사람은 정말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제 스스로 제 인격와 존엄성을 짓밟은 격이죠. 이러고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 사역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될 거고, 하나님께 정죄받고 도태될 게 분명했어요. 사실 이런 일로 제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까지 잘못된 추구 관점으로 살아온 걸 몰랐을 거고 제가 추구하는 게 매우 폼 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죠.

그 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면서 실행의 길을 찾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며 기꺼이 본분을 이행한다. 그들은 한 가지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자질을 바탕으로 하나님 집의 규정에 따라 사역을 제대로 해낸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는 게 좀 어려워서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나 정상인, 좋은 사람이 되어 구원받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고 하나님이 징계하도록 해야 한다.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 그것을 등지고 내려놓아 제멋대로인 성질과 사리사욕을 조금씩 줄여야 할 것이다. 또 중요한 일과 시기, 사역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네게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를 구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깨우침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더 좋은 결실을 볼 수 있다. 네게 정말 의지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간구한다면 하나님은 행사할 것이며 네 내적 상태와 사상을 바꿔 줄 것이다. 성령이 약간 역사하여 네게 감동과 깨우침을 주면, 네 마음은 달라질 것이며 네 내적 상태도 변화할 것이다. 네게 변화가 생기면 이렇게 사니 억압받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것이며, 억압적인 내적 상태와 정서가 다소 바뀌고 해소되어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즐겁다고, 이렇게 살고 처신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규칙을 지키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이것이 바로 정상인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진리에 기대 살고 본분을 잘 이행하면 마음이 놓이고 평안하고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본연의 일을 하는 사람을 기뻐하셨어요. 그런 사람은 본분에서 어떤 어려움이나 압박감이 생기든 성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고 도망가지 않고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 집의 원칙과 요구에 따라 일하는 사람이죠. 또한 해내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추구와 치른 대가로 인해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요. 그런 사람의 삶이 진짜 가치 있는 삶인 거예요. 그런 모습에 비해 제가 본분을 이행하는 모습을 보면 자그마한 어려움이나 압박감이 생기면 저는 바로 억압의 정서에 빠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지도 않고 본분에서 도망가려고만 했는데,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예전에 한 가지 본분을 맡았을 때는 요구 기준이 높지 않았는데, 그 때는 제가 분량이 작고 막 훈련을 받기 시작하는 시기였기 때문이죠. 근데 이제는 리더라는 중요한 짐을 짊어지게 됐으니까 자연히 요구 기준도 높아지게 되는 거고요. 일반 가정에서도 자식이 충분히 일을 할 수 있고 가사를 돌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부모의 요구 기준이 높아지잖아요. 만약 고생을 두려워하면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인간성이 결여된 거라 부모도 분명 좋아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셔서 제게 중요한 본분을 맡겨 주시고 제 어깨에 더 많은 짐을 더해 주셨는데, 여기엔 제가 진리를 더 많이 알고 생명이 빨리 자라나 성인만큼 자신의 책임을 짊어지고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었어요. 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됐을 때 마음이 자유로워졌고 더는 하나님의 고심과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어요. 비록 사역 항목이 많아서 압박감이 좀 크게 느껴지긴 해도 본분을 대하는 저 자신의 태도를 바로잡고 진리 원칙을 알려고 노력하고 잘 모르는 부분은 동역자 자매나 윗선 리더한테 문의하여 조금씩 제 부족한 부분을 채워 가면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맞추도록 노력해야겠더라고요.

9월부터 중국 당국의 체포 활동이 더 심해짐에 따라 우리는 숨어서 사역을 해야 했어요. 2선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우린 매일 형제자매들의 다양한 질문이나 제안을 받게 됐고 윗선 리더에게서 급선무로 해야 할 사역이 뭔지도 통지 받았어요. 주변 환경의 제약으로 인해 다양한 사역을 시행하고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지만, 매일 그런 일 때문에 신경 쓰고 걱정하느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어요. 윗선 리더도 수시로 연락을 해 사역 진도를 체크했죠. 그러니까 또다시 불쾌감이 생기는 거예요. 속으로 ‘사역에 대한 감사가 너무 구체적이고 빈번한 거 아니야? 2선으로 물러나서 사역하면 한숨 돌릴 줄 알았는데 사역량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기만 했네. 육적으로 좀 편하게 쉴 틈도 없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면 진짜 억압감을 많이 느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금방 제 내적 상태가 옳지 못하다는 걸 느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 마음을 지켜 달라고 부르짖었어요. 그러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너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이런 일을 반드시 감당해야 하며 원망도, 저항도, 나아가 도피나 거부도 하지 말아야 한다. … 사회에서든, 하나님 집에서든 모두가 똑같다. 이것은 네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자 한 명의 성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중임이고 감당해야 할 일이니 피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항상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벗어나려 한다면 억압적인 정서가 찾아와 너를 계속 옭아맬 것이다. 반면, 네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 네 삶과 인생의 일부로 여긴다면 이 문제들은 네게 부정적 정서가 생겨나는 이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정말 책임감 넘치는 사람이 된다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란 걸 느꼈어요. 저처럼 계속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억압적 정서에서 벗어날 수 없겠더라고요. 리더가 사역에 대해 관리 감독하는 것도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함인데 저는 패괴 성품이 있다 보니 계속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게 되었어요. 다행히 리더의 관리 감독이 있었기에 더 이상 제멋대로 하지 못했죠. 그게 제가 본분을 잘 이행하는 데는 도움이 됐어요. 더 이상 예전처럼 억압의 정서에 빠져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저는 제 태도를 바로잡고 리더의 관리 감독을 올바르게 대하기로 했어요. 제가 그렇게 생각하자 내적 상태도 조금씩 좋아졌어요. 그리고 모든 사역에 제대로 협력하게 됐고 제가 생각할 수 있고, 제가 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협조할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제가 못하는 건 신속하게 리더한테 자문을 구하면서 해결책을 강구했죠. 비록 아직도 사역을 하는 데 어려움이나 압박감이 크기는 하지만 이제는 억압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됐어요. 제가 억압적 정서에서 나오게 되고 성인만큼 저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건 다 하나님 말씀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이죠. 하나님께 너무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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