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가다듬고 본분을 이행하게 되다

2025.4.14

이탈리아 브리아나(Breanna)

2024년 2월 21일 맑음

오늘 문서 사역 담당자에게서 갑자기 메시지가 왔습니다. “며칠 시간 내서 시나리오 한 편 써 보세요. 대본 본분을 훈련할 수 있을지 한번 보게요.” 이 메시지를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글쓰기가 취미인 제가 교회에서 대본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면 작가가 되겠다는 제 꿈을 이룰 수 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시나리오를 쓸 줄 아는 사람은 보통 교양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인 데다가, 형제자매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대본 본분을 이행할 기회가 왔으니, 반드시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했습니다.

2024년 2월 24일 흐림

밖은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저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 마우스를 움직이며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참 전부터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테스트 원고를 담당자에게 보낸 지 하루가 지났는데, 언제쯤 회신이 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습니다. 담당자가 보낸 음성 메시지였습니다. “테스트 원고 봤는데,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당분간은 원고 선별하는 일부터 훈련하시는 게 좋겠어요.” 이것은 제가 원했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제 관념 속에서 원고 선별은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아서, 대본을 쓰는 것처럼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 수 없을뿐더러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문서 관련 본분이기에, 저는 갈등하고 고민하다 본분을 받아들였습니다.

2024년 3월 6일 맑음

산더미처럼 쌓인 원고들을 보고 있는데도, 담당자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담당자가 정말 나한테 대본을 쓰게 할 생각이 있는 걸까? 내가 오랫동안 문서 본분을 하지 않았으니, 일단 원고 선별부터 시키면서 이참에 진리를 갖추게 하려는 걸까?’ 예전에 대본을 쓰던 즐거웠던 시간도 떠올랐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느라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매일의 삶이 무척 충만했고, 리더의 지도 덕분에 업무적으로도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저는 문제에 관해 리더나 감독님과 자주 소통하며 토론했고, 모두 저를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분한 원고 선별 사역을 이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를 아는 형제자매가 제게 어떤 본분을 이행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비록 문서 본분을 이행하고는 있었지만, 부차적인 일이라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쯤 대본을 쓸 기회가 올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소극적이게 된 저는 손에 쥔 원고도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정도가 깊든 얕든 상관없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실행 방법은 바로 어디서나 하나님 집의 이익을 생각하고, 자신의 사욕과 속셈, 동기, 체면, 지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 집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는 것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이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본분을 이행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마땅히 먼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교회의 사역을 생각해야 하며 그것들을 첫자리에 놓아야 한다. 그다음 네 지위가 안정적인지,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볼지를 생각해야 한다. 두 단계로 나누어 절충하면 좀 쉬운 것 같지 않으냐? 그렇게 한동안 실행하면 너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밖에 너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사욕과 속셈, 동기를 내려놓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 집의 이익, 교회의 이익, 그리고 자신이 당연히 이행해야 할 본분을 첫자리에 놓아야 한다. 그렇게 한동안 체험하다 보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좋고 정정당당하게 사는 것이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비열한 소인배처럼 비굴하고 천하고 야비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광명정대하게 사는 것이라고,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살아 내야 할 모습이자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네 개인의 이익을 채우려던 욕망은 점차 작아질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큰 자책감이 든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며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양심도 없고,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열했습니다. 교회에서 문서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저를 높여 주신 건데, 저는 만족할 줄 모르고 제 체면과 지위만 생각했습니다. 겉보기엔 제 업무 능력을 키워 더 나은 훈련을 받고자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뒤에 숨겨진 속셈은 저의 명예와 지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맡은 본분이 중요한지, 남들에게 주목받는 일인지, 이 본분을 통해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따졌습니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반발심이 생기고 소극적으로 변하는 것도 모자라 그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제가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문서 본분을 이행하지 않아 모르는 원칙이 많고 진리도 명확히 깨닫지 못한 상태라, 정말 대본을 쓰게 했다면 사실 감당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일단 원고 선별부터 훈련하도록 안배되는 것이 적절한데, 그런데도 속으로 반발했으니 정말 너무 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패역했습니다. 더는 저의 이익을 따지지 않고 교회의 안배에 순종하여 지금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 원합니다.’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후련했고, 더 이상 그 일에 교란받거나 얽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차분하게 원고를 볼 수 있었습니다.

2024년 3월 19일 흐림

문서 본분을 이행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원고를 보면서 문제점도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제가 선별한 원고가 영상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무척 기뻤고 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며칠 전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담당자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교회에 대본 작가가 부족하니, 관심 있으면 대본 쓰는 쪽으로 훈련해 보세요.” 저에게도 대본을 쓸 희망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비록 제 자질은 평범했지만, 진리를 더 갖추기만 하면 차츰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저는 매번 팀 학습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원칙도 더 많이 배우고 업무 능력도 향상시킬 수 있을 테니, 어쩌면 나중에 저를 대본 작가로 발탁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팀 학습이 있는 날이라 저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학습이 시작되기 전, 담당자가 제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시간 봐서 참석하고 싶으면 하고, 원치 않으면 안 해도 돼요.” 순간 저는 좀 무안했습니다. ‘왜 나한테 배우라고 하지 않으시지? 대본 쓰는 훈련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보아하니 담당자는 나를 양성할 생각이 없으시나 보네.’ 잠시 후 대본을 쓰는 다른 두 자매에게 갑자기 일이 생기자 담당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오늘 사람이 다 모이지 않았으니 학습은 내일 하죠.” 저는 애써 태연한 척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접속을 끊고 나서 저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제 장밋빛 꿈이 완전히 산산조각 난 것 같았습니다. ‘담당자가 내가 양성할 가치도 없고, 대본을 쓸 자질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째서 팀 학습에 내가 참석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지?’ 그날 저는 하루 종일 우울해서 무슨 일을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본분 이행의 효율도 무척 떨어져서, 평소 같았으면 하루에 십여 편의 원고를 살펴봤겠지만 그날은 고작 몇 편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이해가 안 되는 문제가 있어도 애써 고민할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울고만 싶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도 대본 쓰는 훈련을 해서 제 몫을 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고생하더라도 괜찮은데 왜 저는 늘 발탁되지 못하는 걸까요? 하나님, 당신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2024년 3월 20일 맑음

아침부터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저는 평소처럼 핸드폰을 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처신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분수에 맞게 처신하고,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고,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가 바로 이성을 갖춘 사람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어떤 분야의 업무 기술에 능하고 원칙도 잘 파악할 수 있다면, 마땅히 책임감을 갖고 그 분야를 제대로 점검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아이디어와 영감을 제공하여 다른 사람들이 깨우침을 얻어 이 본분을 더 잘 이행하도록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아이디어를 제공해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찾고 형제자매와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다면 본분을 이행하고, 자신의 위치에 따라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아이디어를 조금 제공할 수 있으나 다른 것들을 제공하고 싶어서 무척 애를 써 보지만 역부족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런 것들을 제공하면, 심기가 불편해져서 듣고 싶어 하지 않으며 마음이 괴롭고 속박받는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이것은 야심이다. 사람의 야심은 어떤 성품의 지배를 받느냐? 교만한 성품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내적 상태는 분명 너희에게 수시로 나타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아서 생명에 진입하지 못하면 이 방면에 변화가 생길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너희 본분 이행의 합격률과 순결도는 매우 낮을 것이고, 성과 또한 별로 좋을 리가 없다. 이것은 바로 본분 이행이 불합격한 것이며, 하나님이 너희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준 특기와 은사는 모두 다르다. 두세 분야에 특기를 가진 사람들도 있고, 한 분야에 특기를 가진 사람들도 있고, 아무런 특기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너희가 이러한 일들을 모두 바르게 대할 수 있으면 이성이 있는 것이다. 이성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고, 분수에 맞게 처신할 수 있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항상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늘 야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늘 지위와 이익을 추구하고,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듯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손을 길게 뻗어 늘 자신의 사치스러운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그는 자신이 은사가 있고 자질이 훌륭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치스러운 욕망을 좀 갖고 있어도 그게 뭐 대단한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이성이 있겠느냐? 항상 사치스러운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다. 만약 네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한다면, 너의 이 소망은 결코 사치스러운 욕망이 아니다. 이는 정상적인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싶다면, 우선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찾아야 한다. 그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해내고, 네 온 힘을 다한다면 그것은 기준에 맞는 것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순결도가 높아지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처신의 원칙>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니, 마치 하나님께서 제 곁에서 저를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위치에서 분수에 맞게 처신하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특기를 발휘하는 것이 처신 원칙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업무를 잘하고 원칙을 파악한다면 그는 책임을 제대로 감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는 못하더라도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제안을 해서 형제자매와 협력해 함께 본분을 완수한다면, 하나님께서 흡족해하실 겁니다. 저 자신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제게 원고 선별을 안배한 것은 한편으로는 사역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의 자질과 분량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야심에 찬 저는 제 자질이 대본을 쓰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했으니, 정말 교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늘 자신을 드러내고, 문학적 재능이 있는 재원이 되어 남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을 생각만 했습니다. 이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고 제 재능을 펼칠 무대가 사라지면, 저는 소극적으로 변해서는 본분을 게을리하며 원고를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문제도 애써 고민하려 하지 않아 원고 선별 일정에 차질을 빚었습니다. 제가 야심을 품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오르지 못할 나무만 쳐다보듯, 자기 본분에 전념하지 않고 늘 주제넘는 본분을 이행할 생각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계속 이렇게 불성실한 모습만 보인다면, 대본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원고 선별 본분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제 이런 상태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도 계속 해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드러나 도태될 것입니다.

2024년 3월 24일 흐림

저는 명예와 지위가 저의 치명적인 급소임을 알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는 적그리스도가 명예와 지위를 추구한다는 것을 폭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제가 본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사랑은 일반인을 뛰어넘는다. 이는 그의 성품 본질 안에 있는 것으로, 한때의 취미도 아니고 한순간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생명 속에, 뼛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그의 본질이라고 한다. 즉, 적그리스도는 무엇을 하든 다른 게 아닌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가장 먼저 고려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 있어 지위와 명예는 그의 생명이자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가장 먼저 이런 것을 고려한다. ‘내 지위는 어떻게 될까? 내 명예는 또 어떻게 될까? 내가 이 일을 하면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 마음속의 내 지위가 올라갈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인데, 이것으로 그에게 적그리스도의 성품과 본질이 있음이 충분히 증명된다. 그래서 그는 문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 지위와 명예는 부가적인 요구 사항이 아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신외지물(身外之物)은 더더욱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성과 뼛속, 핏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태도는 지위와 명예가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떤 것이겠느냐? 명예와 지위는 그에게 있어 매일의 삶과 상태, 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적그리스도에게 있어 지위와 명예는 그의 생명이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든, 어떤 환경에서 생활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추구하는 것과 목표가 무엇이든, 인생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든 모두 좋은 명예와 높은 지위를 갖는 것을 중심에 놓는데, 이 목적은 바뀌지 않는다. 이는 그가 영원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진면목이자 그의 본질이다. 깊은 산 숲속에 데려다 놓아도 그는 명예와 지위에 대한 추구를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 가운데 갖다 놓아도 그가 마음속으로 신경 쓰는 것은 여전히 명예와 지위이다. 적그리스도 부류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믿긴 하지만, 그들은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 사이에 등호 기호를 그려 넣곤 이 두 가지를 대등한 위치에 둔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길을 걸으면서 동시에 명예와 지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곧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며,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 곧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명예와 지위를 얻으면 진리와 생명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어떤 명예와 이익, 지위도 얻지 못하고, 다른 이의 앙망과 우러름, 추종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깊은 실의에 빠져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여길 것이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건 실패한 거 아닌가? 희망이 없는 거 아닌가?’라고 느낀다. 그들은 늘 마음속으로 이런 것을 궁리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집에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교회에서 높은 명망을 얻어 자기가 말하면 사람들이 들어주고 행동하면 받들어 줄지, 어디를 가든 자신을 따를 대상이 있을지, 교회에서 발언권과 명예, 이익, 지위를 갖게 될지 등을 궁리한다. 그들은 속으로 이런 것들을 특별히 중요시한다. 이것이 바로 이 부류 사람들의 추구이다. 그들은 왜 늘 이런 것들을 중시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었는데도 이런 일에 대해 마음속으로 인식이나 분별이 생기지 않은 것이겠느냐?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그들의 관념이나 사상 관점을 바꿔 놓지 못한 것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들 자신에게 있다. 전적으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그들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3)>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적그리스도가 명예와 지위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선천적인 기질로서, 어떤 일을 하든 그는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면서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추종과 우러름을 받을 수 있을지 궁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명예와 지위를 얻지 못하면 마치 목숨이라도 빼앗긴 것처럼 살아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추구가 적그리스도와 같았습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저는 한 여류 시인을 우상시했습니다. 고대에는 재능이 뛰어난 여류 시인이 드물었고, 드물수록 사람들의 칭송을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저도 앞으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게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탄이 주입한 생존 법칙인 “살아서는 걸출한 인물이 되어야 하고 죽어서도 귀신 중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를 지당한 명언으로 삼았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학급 위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방과 후 다른 친구들은 하교해도 전 교실에 남아 각 학생이 숙제를 마무리하는 것을 살펴봐서 결국 선생님이 절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성적은 반에서 최상위권은 아니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선생님 앞에서 늘 자신을 내보이기만 하고, 전 과목을 착실하게 공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름뿐이긴 해도 결국 전 학급 위원이 되었고, 지위가 가져다주는 후광을 마냥 즐겼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지만 보신다는 것을 알았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명예와 지위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제가 이행하는 본분을 사람들이 중요시하는지, 혹은 높이 평가하는지를 신경 쓰다 보니, 눈에 띄지 않는 본분이면 몹시 괴로워하며 그게 무슨 일이든 흥미를 잃었습니다. 이번에 문서 본분을 이행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님께서 저를 높여 주신 것인데도, 저는 원고 선별이 대본을 쓰는 것만큼 비중 있지 않다고 느껴 속으로 이 본분을 무시하며 대본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담당자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담당자가 저를 양성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의중을 읽어내고는 극심한 고통에 빠져 무슨 일을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원고를 선별하는 효율도 떨어져 원고 제출 일정에도 차질을 빚었습니다. 제가 사탄의 사상 관점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원고 선별 역시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파악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떤 원고가 가치 있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마음을 가다듬고 각 원고에 담긴 진리를 잘 묵상할 수 있다면, 얼마동안은 많은 것을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분수도 모르고 이 본분에서 제가 진입해야 할 진리 원칙을 구하며 성장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오해하고 저에게 훈련의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했으니, 저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진리 추구를 중시하지 않는 제가 정말 대본을 쓰게 되어 원하던 대로 체면을 세운다 한들, 제게 진리 실제가 없으니 잘 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대본을 쓰고 싶어 했던 것은 사실 개인적인 이상과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본분 이행을 제 이상 실현의 발판으로 삼았었다는 것을 반성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만약 세상에서라면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네가 어떤 이상을 실현하든 법을 어기거나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다 괜찮다. 추궁할 사람도 없고,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도 아니다. 개인이 무언가를 좋아해서 추구하다가 그걸 얻고 목적을 이루면 성공한 것이고, 그걸 얻지 못하고 실패하더라도 본인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 집에 왔다. 하나님 집은 특별한 곳이다. 네가 품은 이상과 바람이 어떤 것이든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이유가 무엇이냐?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문제에 있어서 네가 추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 자체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네 행동 방식과 네가 걷는 길은 전부 이기주의, 사람의 이익, 사람의 지위, 사람의 명예를 중심에 두고 있다. 전부 그것들이 중심이다. 즉, 사람이 자기 이상의 실현을 추구한 결과 이익을 보는 것이 오직 본인뿐이라는 말이다. 그 사람은 지위, 명예, 체면, 그리고 육적인 이익을 위해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 이것이 정의로우냐?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가진 이상, 생각, 바람을 위해 그가 동원한 온갖 수법과 방식, 방법은 모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들이다. 진리를 기준으로 따져 봤을 때 정의롭지 않거나 정당하지 않은 것은 응당 내려놓아야 한다. 분명 이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또 하나님 선민이 정결함을 얻고 구원받는 곳이다.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바로 이런 곳이다. 그러면 이런 곳에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에 알맞은 일이나 항목이 어느 하나라도 있을 수 있겠느냐?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봉사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또한 단 하나도 없다. 그러니 개인의 이상과 바람은 하나님 집에 존재해야 하느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개인의 이상과 바람은 교회에서 하나님이 하려는 모든 일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상과 바람은 하나같이 교회의 모든 일과 어긋나고,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고,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는 것과 배치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과 배치되고, 하나님 선민이 정결케 되고 구원받는 일과도 배치된다. 사람이 가진 이상이 어떤 것이든 개인적 이상과 바람인 이상 반드시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 이상과 바람인 이상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지장을 주거나 이를 가로막을 것이다. 사람이 정결함을 얻고 구원받도록 두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이 둘 사이는 모순되기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서로 반하는 관계다. 네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한다면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되며,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 사역을 증거하는 일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된다. 또한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되고, 당연히 네가 구원받는 것도 가로막게 된다. 요컨대 사람의 이상은 그게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실제적 성과를 낼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진리를 깨닫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어떻게 하나님을 흡족게 할 것인지,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것인지, 어떻게 제대로 된 피조물이 될 것인지를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고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반대로 이상과 바람이 실현될수록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동시에 사탄과 점점 가까워진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이상을 추구하고 실현할수록 마음이 점점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소원대로 자기 이상이 실현되고, 자기 바람이 실현, 성취됐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갈수록 무시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고, 하나님과 대립하는 길을 갈 수도 있다. 이것이 최종 결과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제 마음속에 감춰져 있던 잘못된 추구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집과 교회를 제 이상을 실현하는 곳으로 여겼고, 교회의 각 본분을 세상의 직업으로 여겼습니다. 문서 사역을 좋아했던 저는 이 본분을 통해 제 가치를 실현할 수 있으며, 문학을 하는 사람은 비교적 교양 있고 생각이 있어서 사람들의 존중과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한 의도와 근원부터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얻기 위한 게 아니라 남보다 출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원고를 선별하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었지만, 맡은 본분에서 원칙을 구하거나 진리를 갖추어 원고를 검토하는 효율을 높이고 문제를 파악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려 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발탁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담당자가 학습 내용이 제 현재 본분과 관련이 없다고 했을 때, 저는 담당자가 저를 양성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여기고는 소극적으로 게으름을 피우며 마음속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이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제가 이기적으로 자기 이상을 추구하면서, 본분을 진척시키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사역을 지체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자질은 평범하고, 문장력도 부족한 편이며, 무엇보다 아직 모르는 진리가 많아 대본 사역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에, 제게 원고 선별을 맡기는 것은 적절한 안배였습니다. 교회는 제게 문서 본분을 훈련시켰지만, 저는 분수도 모르고 하나님을 오해했으니, 정말 너무나도 이성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사람이 가진 이상이 어떤 것이든 개인적 이상과 바람인 이상 반드시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 이상과 바람인 이상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지장을 주거나 이를 가로막을 것이다. 사람이 정결함을 얻고 구원받도록 두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그때 제 마음이 한결 환해졌고, 하나님께서 왜 사람에게 자신의 이상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곳이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정결케 되고 구원받는 곳인데, 저는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매일 어떻게 하면 제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만 궁리하며 무척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남들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도 본분 이행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흔들려 온종일 불안했습니다. 비록 입으로는 감히 하나님을 원망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무척 소원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무언의 대항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 이상을 실현하는 것만 추구하는 것은 이방인의 관점입니다. 만약 이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면 제 성품은 변하지 않을뿐더러, 교회 사역에도 방해와 교란을 야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행동은 선행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쌓는 것이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제 마음속에서 분에 넘치는 욕망을 내려놓고, 지금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4년 4월 2일 맑음

오늘, 저는 한 구절의 하나님 말씀 속에서 명예와 지위를 내려놓는 길을 찾았습니다. 제가 본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본분이 무엇이냐? 피조물의 책임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에 피조물의 본분, 의무, 책임이 명확하게 나와 있다. 그렇지 않으냐? 오늘부터 너는 명실상부한 하나님 집의 일원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라고 너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 너는 오늘부로 인생 계획을 새로 세워야 한다. 예전에 네 인생에 계획해 두었던 이상, 바람, 목표를 더는 추구하지 않거나 내려놓기 시작해야 한다. 신분과 각도를 바꿔 피조물로서 응당 가져야 할 인생 목표와 인생의 방향을 계획해야 한다. 우선, 네 목표와 방향은 지도자가 된다거나 어떠한 업계의 능력자 혹은 선도자가 된다거나 어떤 한 가지 일에 종사하며 업무 기술에 통달한 유명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당장 네가 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고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하라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하나님 집에서 네게 안배한 본분이 무엇인지 물어보아라. 너는 그 본분과 관련해 반드시 알고, 파악하고, 준수해야 할 원칙을 전부 숙지하고 분명히 해야 한다. 기억하지 못하겠으면 종이에 적어 두거나 컴퓨터에 기록해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어 보며 되새기거라.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네가 최우선적으로 가져야 할 인생 목표는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는 네가 응당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인생 목표다. 다음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어떻게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당연히 자기 명예, 지위, 체면, 장래 등등과 관련된 목표와 방향은 전부 포기해야 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제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저는 하나의 피조물로서 마땅히 분수에 맞게 본분을 잘 이행하면서, 저의 이상과 소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교회에서 제게 안배해 주신 본분이 제가 좋아하는 일이든 아니든, 제가 중요하게 여기든 보잘것없게 여기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만 하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지금 원고 선별을 책임지고 있으니, 원칙에 따라 좋은 원고를 선별해 내고, 제가 꿰뚫어 보지 못하는 문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사역이 좋은 성과를 거두도록 해야 합니다.

2024년 4월 3일 맑음

최근 팀에 한 자매가 새로 들어와 대본 쓰는 훈련을 하게 되자, 제 마음이 또다시 흔들렸습니다. ‘담당자께서 대본 작가는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나? 왜 나를 발탁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찾으시는 걸까? 내가 그렇게 부족한가?’ 저는 제가 또 명예와 지위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는, 그 즉시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누가 발탁되든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일로 교란받지 않고 제 본분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후로 저는 좋은 원고 선별법, 원고에 담긴 인식의 실제성 여부 판단법에 관해 원칙을 구하는 데 힘썼고,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은 자매들과 함께 토론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더는 지위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차츰 제 마음은 한결 평온해졌고, 좀 더 본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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