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강퍅한 성품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사람에게 강퍅한 성품이 있으면 내면은 어떤 내적 상태이냐? 주로 완고하고 독선적이다.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늘 자기 말만 옳고, 자기 뜻만 고집하고, 자기가 맞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강퍅한 태도이다. 한 가지만 옳다고 단정 짓고, 누가 말해도 듣지 않는다. 소 열 마리로도 끌고 올 수 없을 정도인데 옳든 그르든 꼭 그렇게 하려 한다. 어찌 보면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죽은 돼지는 끓는 물을 겁내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다. 바로 어떻게 하는 게 옳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죽으면 죽었지 진리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일종의 ‘강퍅함’이라는 성품이다.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 강퍅한 성품을 드러낼 수 있느냐? 강퍅할 때가 많으냐? (많습니다.) 너무나 많다! 강퍅함이 네 성품이 돼 버린 이상, 일상의 매 순간에 드러난다. 사람은 강퍅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올 수 없고, 강퍅하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강퍅하기 때문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다.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다면 이 방면의 성품이 변화에 이를 수 있겠느냐? 매우 어려울 것이다. 현재 너희는 강퍅함이라는 이 방면의 성품에 변화가 있느냐? 어느 정도로 변화되었느냐? 예를 들어, 예전에는 소 열 마리로도 끌고 올 수 없을 만큼 강퍅했는데, 지금은 좀 변화되었다고 하자. 일이 생길 때 마음에 약간의 양심 지각이 생기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일에서 난 진리를 실행해야 해. 하나님께서 강퍅한 성품을 폭로하셨어. 난 그것을 들었고 인식했으니 변화해야지. 전에 비슷한 일이 몇 번 닥쳤는데, 그때마다 육을 따르느라 실패했어. 그게 마음에 계속 걸려. 이번에는 반드시 진리를 실행해 내야겠어.’ 이런 의지가 있으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고, 그러면 어느 정도 변화한 것이다. 한동안 이렇게 실행하면 더 많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더 큰 변화를 가져와서 패역하고 강퍅한 성품을 점차 덜 드러내게 된다. 이것이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겠느냐? 패역한 성품이 갈수록 적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점점 많아지는 게 보이면, 이것이 곧 진정한 변화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변화해야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강퍅함이 전혀 없고 순종만 할 때 성공이다. 그것은 서서히 이루어진다. 성품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장시간 체험해야, 심지어 평생 체험해야 이루어진다. 간혹 큰 고통이 많이 따르기도 하는데, 마치 죽었다 살아나는 것과 같아 독을 제거하기 위해 뼈를 깎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로울 수도 있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여섯 가지 방면의 패괴 성품을 알아야 진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중에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과 간사함을 드러내고 외식할 때, 마음 깊은 곳에 의식이 있느냐? (의식이 있습니다.) 이 의식이 있을 때, 사람은 어찌 하느냐? 자제하느냐? 조심하느냐? 자신을 반성하느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교만한 성품을 드러낸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지 않고, 누군가 지적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데, 이는 무슨 성품이냐? (강퍅한 성품입니다.) 맞다. 이것이 강퍅함이다. 이런 강퍅한 성품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나타나든, 어떤 상황에서 이런 태도를 드러내든 상관없이 이런 사람이 바로 성품이 강퍅한 사람이다. 사람이 아무리 교활하고 위장을 해도, 이런 강퍅한 성품은 쉽게 드러난다. 이는 사람이 진공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며, 네가 사람들 앞에 있든 아니면 뒤에 있든,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감찰하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늘 제멋대로이고, 방탕하며, 단속을 받지 않으며 이런 생각이 생기고 이런 패괴 표출이 있으면, 이를 감지했음에도 돌이키지 않고, 이를 인식했을 때에도 회개하지 않으며, 솔직하게 털어놓고 교제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이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강퍅함이다. 강퍅함의 특징을 통해 볼 때, ‘강(剛)’은 완고하고, 돌이키지 않으며, 부드럽지 않다는 의미이고, ‘퍅(愎)’은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통증을 느끼기 때문에 차마 건드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다 딱딱한 물건을 접촉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통 사람은 다들 강퍅한 성품의 사람과 접촉하기 싫어한다. 부드러운 것은 질감부터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사람은 다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데, 강퍅함은 이것들과는 완전 정반대이다. 강퍅함은 사람의 태도로 드러난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우매함과 고집스러움이다. 여기에 있는 성품은 무엇이냐? 바로 강퍅한 성품이다. 일이 닥쳤을 때 비록 의식이 있거나 또는 이것이 좋지 않고 옳지 않은 태도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지라도 강퍅한 성품에 지배받아 ‘다른 사람이 발견한들 어쩌겠어? 난 원래 이래!’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무슨 태도이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이것을 좋지 않은 것,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사탄에게서 나온 것, 사탄 성품의 표출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보든, 하나님이 아무리 혐오해도 그가 느끼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이 문제의 심각성이다. 강퍅한 성품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이는 사탄의 성품으로, 사람이 쉽게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회개하기는 더 어렵게 한다. 사탄의 성품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로, 하나님이 모두 증오하는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 없는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성품을 아는 것은 성품 변화의 기초이다> 중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모든 사람의 성품 본질 안에 존재하는 한 가지, 강퍅함이다. 이 모습 역시 무척 구체적이고 분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이 주로 드러내는 두 가지 패괴 성품이다. 이 구체적인 모습과 관점, 태도 등은 사람의 패괴 성품 안에 진리를 싫어하는 성분이 있음을 실제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성품 안에 강퍅한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했든, 하나님의 사역 과정에서 사람의 어떤 패괴 성품이 드러났든, 사람은 시종일관 받아들이지 않고 반항한다. 물론 눈에 띄게 반항하거나 경시하는 태도로 거부하는 것 외에도 한 가지 모습이 더 있다.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 자신과 무관한 양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당신은 당신 좋을 대로 말하시라. 나와는 무관하다. 당신이 어떻게 심판하고 드러내든 나와는 상관없다. 나는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강퍅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강퍅한 모습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갈 거야. 자유롭고 즐겁게 살아갈 거라고. 설령 나한테 당신이 말한 교만함이나 간사함,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 사악함, 흉악함 등등의 모습이 있다고 한들, 그게 뭐? 나는 성찰하거나 인식하지 않을 거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야. 내가 이렇게 믿는데 당신이 나를 어쩔 수 있겠어?’라는 것이 바로 강퍅한 태도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경 쓰거나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일깨워 주든 경고해 주든 권면해 주든, 어떤 방식으로 말하든,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목적이 무엇이든 사람은 일절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일컬어 강퍅하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거들떠보지 않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심과 애쓰는 마음은 더더욱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든 사람은 협력하려는 의지가 없고 진리에 공을 들이려 하지도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심판하고 드러낸 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인정할지라도 마음속으로 후회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결국, 수많은 도를 들어도 “어쨌든 나는 진심으로 믿었어. 어쨌든 내 인성은 나쁘지 않지. 어쨌든 나는 일부러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어쨌든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버리고 고생하고 기꺼이 대가를 치렀어. 그러니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거야.”라고 한다. 이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는 바울의 말과 같지 않으냐? 바로 이러한 태도이다. 이런 태도의 이면에 숨겨진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강퍅함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 중에서

만약 한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또한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도 갖추었지만, 잘못한 일에서만큼은 반성할 줄도 뉘우칠 줄도 모르고, 예전 일은 지나갔으니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면, 이것은 무슨 성품이냐? 어떤 행위냐? 이런 행위의 본질은 무엇이냐? (강퍅함입니다.) 강퍅함이고, 완고하게 외곬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옛날에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뭐라고 말했느냐?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라고 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악한 길에서 떠났다. 이것이 바로 회개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회개한다는 것, 이것은 사람에게 크나큰 기회다. 어떤 기회이냐?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기회다. 본분을 이행하든 구원받기를 추구하든, 진실된 회개가 없이는 계속해 나아가기가 힘들 것이다. 각 단계마다 하나님이 네게 징계하고 책벌하든, 혹은 일깨우고 권면하든, 너와 하나님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는데도 네가 뉘우치지 않고 계속해서 본인 생각을 견지하고 본인 관점과 태도를 고수한다면, 비록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너와 하나님 사이에 발생한 충돌, 하나님에 대한 너의 오해와 원망, 패역이 해결되지 않고, 네가 마음을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도태시킬 것이다. 네가 맡은 본분을 내려놓지 않은 채 여전히 본분을 지키고 있고, 하나님의 부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충성심이 있어 사람이 볼 때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한 가지, 너와 하나님과의 의견 충돌이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네가 진리로 해결하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한 결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날로 깊어지고, 언제나 하나님이 틀리고 너는 억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뉘우치지 않은 것이다. 너의 패역과 관념,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줄곧 자리 잡고 있어 이로 인해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없고, 계속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대립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사람,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냐?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이 뉘우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하나의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는 무엇이냐? 바로 창조주가 어떻게 하든 모두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네가 이 점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창조주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라는 이 말이 너에게는 빈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래도 네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너에게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3)>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계속 과오에 속박받는다.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 짓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리 없어. 진작부터 나를 싫어하고 계실 테니, 내가 진리를 아무리 추구해도 소용없을 거야.’ 이것은 어떤 태도냐? 하나님을 추측하고 오해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는 짓을 저지르기 전부터도 너는 하나님에 대해 오만불손한 태도, 거만하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다. 사람은 일시적인 어리석음 혹은 충동 때문에 사탄 성품을 드러내는데, 누가 이를 징계하거나 제지해 주지 않으면 과오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과오로 인한 결과가 생겨난 뒤에도 여전히 회개할 생각은 않고 속으로 괴로워한다. 미래의 결말과 종착지 때문에 늘 마음이 무겁고,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다. ‘난 이제 끝이야. 가망이 없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포기하는 수밖에. 언젠가 하나님이 나를 원하시지 않고, 뼛속까지 나를 혐오하게 되면 죽기밖에 더하겠어? 그저 하나님 지배에 맡기자.’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 지배에 맡기겠다느니, 하나님 안배와 주재에 순종하겠다느니 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그는 내면이 어떤 상태냐? 저항하고 강퍅하게 굴면서 회개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해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권면하고 위로하는 그 말씀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야. 난 끝났어. 이미 흠집이 나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 진작부터 하나님은 나를 원하지 않으셨어. 내가 아무리 죄를 자백하고, 기도를 드리고, 눈물로 뉘우쳐도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만 한다. 그가 속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판단하고 넘겨짚는 태도는 무엇이냐?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태도가 맞느냐? 분명 아니다. 이런 태도는 한 가지 성품을 의미하는데, 바로 강퍅함이다. 무척이나 강퍅하다. 이 자는 겉보기에 아주 독선적이고 누구 말도 듣지 않고, 어떤 도리든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데, 사실은 성품이 강퍅해서 그렇다. 강퍅함은 하나님이 보기에 순종이냐, 아니면 거역이냐? 분명히 거역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무척이나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그 정도 잘못도 하나님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는구나. 내 결말은 다 사라져 버렸어.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규정하셨으니, 난 바울이나 마찬가지야.’ 하나님이 너더러 바울이라고 했느냐? 하나님은 그런 적이 없는데 네가 스스로를 바울이라고 하다니,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너는 네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고 징벌받아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결말은 누가 규정했느냐? 틀림없이 너 스스로 규정했다. 하나님은 사역이 끝나면 너는 지옥에 떨어질 대상이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단 하루라도 하나님이 너를 버린다고 말하지 않는 한, 너에게는 진리를 추구할 기회와 권리가 있다. 그러니 너는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구원을 받아들이는 태도요, 진정으로 회개하는 태도다. 너는 언제나 자신의 관념과 상상, 오해를 내려놓지 못하고, 이미 그런 것들로 가득 차고 그런 것들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런 다음 건성으로 대충 임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가짐,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마음가짐, 그럭저럭 때우려는 마음가짐, 어영부영한 마음가짐으로 본분을 이행했다. 그런 네가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가련한 사람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가련함은 어떻게 해서 초래된 것이냐? 바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는 일이 생기면 진리를 구할 생각은 않고, 계속 연구하고 추측하면서 하나님 말씀에서 일의 내막을 알아보려 한다. 하나님 말씀 중에 자신에게 닥친 일을 설명하는 내용은 어느 말씀인지, 하나님 태도는 무엇인지, 하나님이 정한 결론은 무엇인지, 자신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이런 것들을 참고로 해서 그 일의 결과가 어떤지를 확정한다. 이런 방법이 진리를 구하는 것이냐? 결코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정죄하고 저주하는 말씀을 억지로 자신에게 갖다 붙여서 소극적인 상태로 지낸다. 외적으로는 이것이 연약해 보이고, 나약하고 소극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일종의 대항이다. 대항의 배후에 숨은 성품은 무엇이냐? 바로 강퍅함이다. 하나님이 볼 때 이런 강퍅함은 일종의 패역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추구해야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를 해결할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을 포기하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늘 강퍅하여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부류 사람의 구체적인 내적 상태는 어떠하냐? (늘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고, 문제가 닥쳐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어떤 일을 대해도 대충대충 합니다. 그저 악을 행하지 않고,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며 진리를 향해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고의로 건성으로 대충 한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그렇게 했고, 진리를 깨닫고 난 후에도 돌이키지 않으며,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일관되게 그렇게 하며 전혀 변화가 없다. 누가 질책해도 듣지 않고, 책망 훈계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완고하게 끝까지 고수한다.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강퍅함이다. 사람은 모두 ‘강퍅’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이고 폄하하는 의미이며, 별로 좋은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만약 ‘강퍅’이라는 이 단어와 연관되고 대조되면, 결말이 어떻겠느냐? (하나님께서 혐오하셔서 버리고, 한쪽에 내버려 두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고 포기하려는 자는 바로 이런 강퍅한 사람이다. 잘못을 분명히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그는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핑계와 이유를 대면서 자신을 위해 변명하고 궤변을 늘어놓는데, 이는 또 다른 방식으로 더 교활하게 남의 이목을 속이려는 것이다. 잘못을 반복하려 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 이런 사람은 매우 골치 아픈 자로, 구원받기 어렵다. 바로 하나님이 포기하려는 대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왜 이런 사람을 포기하려 하겠느냐? (그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양심이 이미 지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가 불가하니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그런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겉으로는 마치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지 않고 그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실제 원인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고 반항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보고 순종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라고 하는데, 무슨 이익이 있어? 내가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지? 나는 이익을 얻어야 하지, 이익을 얻지 못하면 안 해.’ 이는 어떤 사람이냐? 바로 이익만을 도모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이익만을 도모하는 사람이다. 이익만을 도모하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만약 네가 이익만 도모하는 사람과 진리를 교제하며 그에게 자신을 인식하고 잘못을 인정하라고 하면,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겠느냐? “제가 잘못을 인정하면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나요? 당신은 저에게 이 일을 잘못했음을 인정하라고, 자백하고 회개하라고 하는데, 그럼 어떤 복을 얻을 수 있나요? 저의 명예와 이익이 손상되고 손해를 입으면, 누가 보상해 주나요?” 이것이 바로 그의 마음가짐이다. 그는 단지 이익만을 추구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막막함을 느낀다. 또 그는 전혀 믿지 않으며 눈으로 보는 것을 주로 믿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이익만 도모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탄 철학에 따라 사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본성 본질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과 진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괜찮지만 이익은 반드시 얻어야 하고 절대 손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이익이 손상되지 않는 상황이라야 비로소 진리 실행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이야기할 수 있다.’ 만약 이익이 손상된다면 그에게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고 해도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에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통받고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는 더더욱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이익만을 위해, 그저 복과 이익을 얻기 위해 살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대가를 치를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집에 빌붙어 불사의 결말을 얻고자 한다. 이런 사람은 전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할 리 있겠느냐? 하나님은 분명 그를 혐오하여 버리고 도태시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지 않는 것이냐? 그 자신이 포기한 것이다. 그 자신이 진리를 향해 노력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또 뭘 어떻게 그를 구원하겠느냐? 그저 그를 포기하고 한쪽에 내버려 둬 그 스스로 반성하도록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유일한 길은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인식하고, 회개하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내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다. 진리를 실행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구원받아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것이며, 사람이 나타내고 살아 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 추구의 길을 걷지 않으면 따로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런 사람이 진리가 그를 구원할 수 있음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이 말한 이 모든 말씀이 그를 변화시키고 그를 진정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이야기하자면, 그는 하나님이 진리임을 전혀 믿지 않고, 진리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한다는 이 사실 또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측면으로 분석해 봐도 이런 사람은 마음이 너무 강퍅하여 한사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구제 불능이고 구제할 방법이 없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중에서

그럼 강퍅한 성품이 쉽게 변화하겠느냐? 길이 있겠느냐?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어떻게 바꿔야겠느냐? 자신의 강퍅한 태도에서 생겨난 상태, 마음가짐을 해부하고 인식하며, 자신의 어떤 행동과 말, 자신이 고수한 어떤 관점과 속셈,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과 생각이 강퍅한 성품에 지배되었는지 보아야 한다. 네가 드러낸 모습과 상태에서 시작해 성찰하고 해결한 뒤 바로잡되, 조금이라도 성찰했다면 한시바삐 바로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기호와 기분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제멋대로인 행동이다. 이런 성품에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질이 얼마간 들어 있다. 만약 네가 자신이 이런 사람이고 이런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도 반성하거나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은 채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강퍅하다고 한다. 네가 설교를 듣고 문득 ‘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나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지. 그게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구나. 그런 게 진리를 싫어하는 거라면 이 부분의 성품을 해결해 봐야겠다.’라고 깨닫는다면,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먼저, 자신의 우월감과 제멋대로인 태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태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봐야 할 것이다. 네가 육을 버리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네가 정말 그 패괴된 행위를 해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태도이다. 너는 의식적으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버리며,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과 강퍅한 성품을 해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부분의 패괴 성품이 다 해결되면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은 흡족해질 것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 중에서

강퍅함은 패괴 성품에 속하는 문제로 본성 안에 존재하며,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에게 강퍅한 성품이 있으면 보통 이치를 따지거나 궤변을 늘어놓기를 좋아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때로는 마음속으로 자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허영과 체면을 위해 자기 뜻을 고수하며, 끝까지 우겨 댄다. 이 강퍅한 성품을 인식했다고 할지라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강퍅함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사람의 교만함과 간사함, 흉악함,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 등의 성품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에게 교만함과 간사함, 흉악함,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나 육을 저버리기는 싫을 때,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나 늘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고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 강퍅함의 문제를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강퍅함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정상인의 이성을 지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양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어떻게 들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폭로한 문제 중 어떤 것들이 너와 관련 있는지 듣고 생각해야 한다. 너와 관련 있는 문제를 발견했다면 받아들여야지, 그것은 다른 사람의 문제, 모두의 문제, 인류의 문제이고 너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여긴다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 가운데서 하나님이 밝힌 패괴 상태나 치우친 관점이 너에게는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드러내는 교만한 성품의 모습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생각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교만한 모습이 없을까? 나는 패괴된 인류니까 분명 나한테도 그런 모습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어떤 부분에서 교만한 모습을 보이는지 반성해야 해. 사람들은 나를 보고 교만하다고, 늘 현실을 모르고 높은 자리에서 떠든다고, 남을 억압하는 말을 한다고 하지. 정말 나한테 그런 성품이 있는 걸까?’ 반성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 말씀의 폭로가 100% 정확하며, 너 자신은 교만한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가 100% 정확하고, 네 실제 상황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부합하며, 돌아보면 볼수록 정확하게 느껴진다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패괴 성품의 본질을 분별하며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진실로 후회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야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또 패괴 성품을 해결할 때는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폭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똑똑한 사람이고, 하나님 말씀이 폭로한 것들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안다면, 혹은 절반이라도 옳다고 인정할 수 있다면, 한시바삐 받아들여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폭로한 말씀이 전부 정확한 사실의 진상이며, 조금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진실로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고, 자신에게 갖가지 패괴 성품이 존재하며 자신은 확실히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사실을, 일말의 이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이 심각하게 패괴되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자 할 것이다. 그러면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을 부정하고 증오하게 되며, 여태까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나는 왜 하나님 말씀을 읽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내 이런 태도는 교만함 아닐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교만한 걸까?’ 이렇게 수시로 반성하면 얼마 후 자신이 정말 무척 교만하며, 하나님 말씀을 진리이자 사실이라고 완전히 시인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자신에게는 조금의 이성도 없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로, 반성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인식하고 아주 조금씩 깊이를 더할 뿐이다. 단기간 내에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기도하고 자신을 많이 반성해야 조금씩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은 모두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반성한 다음에야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밝히 알고, 자신이 정말 깊이 패괴되었으며 진리 실제가 전혀 없다고 여기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며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면 조금씩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마침내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자질은 좀 낫지만,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거야. 나는 늘 뽐냈어. 말할 때는 남들을 뛰어넘고자 했고, 모두가 내 뜻대로 따라 줬으면 했지. 정말 비이성적이었어. 또 교만하고 독선적이었던 거야! 나는 반성을 통해 내 교만한 성품에 대해 알게 됐어. 이건 하나님의 깨우침이자 은총이야.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해!’라고 말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해야 이성적이고 순종적인 언행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남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다른 이를 속박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자질과 은사, 특기를 올바로 대할 수 있을지 등등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교만한 성품은 낙숫물이 댓돌을 뚫듯 조금씩 조금씩 해결된다. 그 후, 너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함께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할 때, 다른 이의 관점을 올바르게 대하며 열심히 잘 들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의 관점이 옳다고 생각한 순간, 깨달을 것이다. ‘이제 보니 내 자질이 가장 훌륭한 건 아니었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장점이 있었어. 나보다 전혀 못하지 않잖아. 여태까지 나는 항상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질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아도취이고 견문이 좁은 거였어.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무 비이성적이고 염치없는 거야! 교만한 성품이 내 눈을 가리고 내 귀를 막았구나. 남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내가 훌륭하고 옳다고 생각했어. 나는 사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지 않아!’ 그 후로 너는 자신의 부족한 점과 보잘것없는 분량을 진실로 깨닫고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다음부터 남들과 교제할 때는 상대의 관점에 귀 기울이며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너무 많구나. 내 자질이나 이해 능력은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이었어.’라고 깨닫게 된다. 이는 어느 정도 자기 객관화가 된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체험하고 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반성하면 자기 자신을 진실로 인식하게 된다. 또 인식이 점점 깊어져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간파하게 되고, 빈궁하고 가련하며 추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그때면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패괴 성품을 증오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을 저버리기도 쉽다.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의 패괴 표출을 반성해야 한다. 특히 다양한 환경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낸 후 수시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면 자신의 패괴된 본질을 간파하기가 쉽고, 마음속으로 패괴와 육체, 사탄을 증오하게 되며,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공을 들이게 된다. 그러면 교만한 성품은 점점 줄어들 것이며, 너는 조금씩 그것을 벗어 버리고 점차 이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워질 것이다. 남들의 눈에 너는 예전보다 착실하고 신중하며 객관적으로 말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또 다른 이의 말을 귀담아듣고, 다른 이에게 말할 시간을 주며, 다른 이의 말이 옳을 경우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밖에도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게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며, 누구와도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이성과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이 부분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 중에서

강퍅함이라는 성품을 예로 들어 보자. 처음에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을 때,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에게 강퍅한 측면의 성품이 있는지도 몰랐다. 너는 진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진리는 어쩜 사람의 상처만 들추어 낼까?’ 진리를 다 듣고 난 뒤에는 하나님 말씀이 다 맞다고 생각했지만 1, 2년이 다 되도록 한 마디도 제대로 새겨듣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면 이것이 강퍅함이 아니냐? 2, 3년이 지났지만 전혀 못 받아들이고, 내면의 상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비록 본분도 차질 없이 이행하고, 고생도 꽤 했지만 강퍅한 내적 상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거나 10분의 1도 줄어들지 않았다면 이 방면에서 너는 성품이 변화했겠느냐?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한 것이냐? 그 이유가 무엇이든 무턱대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한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고 그렇게 사역을 많이 했건만 네 성품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간증을 전혀 얘기하지 못할까? 생명 성품에도 전혀 변화가 없고 말이야.’ 그때 너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정말 패역하고 강퍅하구나! 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야.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도 않은 거야! 이걸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거라 할 수 있겠어? 몇 년씩 하나님을 믿고도 아직까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마음이 하나님과 가깝지도 않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도 않았고, 잘못을 저질러도 아무런 가책도 못 느끼고, 회개하려는 마음도 없었어. 이런 게 강퍅함 아닌가? 난 패역한 자식이 아닌가?’ 마음이 괴로웠다. 괴롭다는 건 무슨 의미냐? 회개하고 싶다는 뜻이다. 너는 자신의 강퍅함을 의식하고, 자신의 패역을 의식했다. 이때부터 성품은 변화되기 시작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의 의식에는 변화하고자 하는 생각과 바람이 조금씩 생겨난다. 더 이상 하나님과 대치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고, 더는 강퍅하게 굴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생활로 가져와 실행하고, 진리 원칙으로 여겨 실행하고자 한다. 이런 의식이 생긴다. 이렇게 의식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의식이 생긴다고 바로 달라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몇 년의 시간을 체험해야 한다. 이 의식이 마음속에서 점차 선명해지고, 강렬한 요구로 바뀌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안 돼. 세월을 낭비할 순 없어.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 일을 해야 해. 전에는 본연의 일은 하지 않고 먹고 입는 것만 생각하고, 명예와 이익만 추구하다 결국 아무런 진리도 얻지 못했어. 후회스러워. 회개해야겠어!’ 이러면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 진리 실행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그건 성품 변화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몇 년을 믿었든 관계없이, 자신이 흐리멍덩하고 늘 허송세월을 보내느라 몇 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여전히 텅 비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진다. 그래서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하는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때에야 하나님이 한 권면의 말씀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양심과 이성이 너무나 없는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뉘우치는 마음이 들면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살아가고 싶어진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할 순 없어.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많은 말씀은 구구절절 사람에게 좋은 말씀이고 사람에게 바른길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야.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정말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하신 분이야!’ 이것이 바로 변화의 시작이다. 이런 깨달음이 생긴 것은 좋은 일이다! 만약 네가 이런 것도 모를 만큼 무감각하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이제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관건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을 인식했고, 나아가 진리를 실행해 내고 진리를 자신의 실제로 바꿔야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너희가 볼 때 마음속에 이런 인식과 생각이 자리 잡으려면 몇 년을 체험해야 하느냐? 영리한 사람, 이해력이 있는 사람, 간절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1~2년이면 바로잡고 진입하기 시작할 것이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 무감각하고 우둔하고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흐리멍덩하게 3~5년이 그냥 흘러가고, 별 수확이 없어도 의식하지 못한다. 열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흐리멍덩하게 10년이 또 흘러도 여전히 확실한 수확이 없고, 여전히 체험 간증을 얘기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돌려 보내지거나 도태되면 그제서야 깨닫기 시작한다. ‘역시나 진리 실제가 전혀 없구나. 나는 정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때 깨닫는다면 좀 늦은 것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멍하니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날이 오기만을 기대하지만 진리는 조금도 추구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10여 년이 지나도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하고, 간증도 전혀 얘기하지 못한다. 그러다 호된 책망과 훈계, 경고를 받고 나서야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 것이냐! 책망과 훈계, 징벌이 없으면 되겠느냐? 엄한 징계가 없으면 되겠느냐? 어떻게 해야 사람이 지각하고 반응하게 만들 수 있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관을 봐야만 눈물을 흘린다. 기어이 못된 짓을 하고, 숱한 악행을 저지르고 나서야 이렇게 의식한다. ‘하나님 믿는 내 삶은 이제 끝인가? 하나님이 나를 원하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내가 정죄된 건 아닐까?’ 그러면서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소극적일 때는 그 긴 세월을 헛되이 믿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원통해하고, 한술 더 떠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다가 깨닫는 순간 이렇게 의식한다. ‘이건 스스로를 망치는 거잖아? 다시 일어서자. 내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떤 일 때문에 내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까? 내 어떤 점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어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뿐이겠어. 깨달은 진리도 실행하지 않았어. 이건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후회도 되고 두렵기도 하다.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분명 징벌받게 될 거야. 안 돼, 얼른 회개해야겠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서는 안 돼.’ 그 순간 강퍅한 정도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느냐? 마치 마음이 바늘에 찔리듯 지각이 조금 생긴 것이다. 지각이 생기는 순간, 너는 마음이 움직이고 진리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관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이냐?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으면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 순종하지 못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련이 닥쳤을 때 굳게 서지 못한다. 리더가 된다면 거짓 리더가 되지 않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네게 지위가 생겨서 다른 사람들이 너를 높이 받드는데, 그걸 이겨 낼 수 있겠느냐? 너에게 상황을 마련하고, 시험이 닥치게 하면 이겨 낼 수 있겠느냐? 너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너무 잘 파악하고 있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나는 이 모든 걸 이겨 낼 수 없어. 난 폐물이고 아무것도 못 해.” 이것이 어떤 생각이냐? 진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진리가 필요할 때, 네가 가장 무기력할 때 너는 진리에 의지하고 싶어진다. 그 어떤 사람에게 의지해서도 안 되고 진리에 의지해야만 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책망과 훈계, 시련, 시험을 이겨 낼 수 있고,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 느낄 것이다. 네가 진리에 의지할수록 진리가 좋고 유용하고, 너에게는 가장 크게 도움이 되고, 네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때 너는 비로소 진리를 갈망하기 시작하게 된다. 사람이 이 정도가 되면 패괴 성품이 조금씩 줄어들고 변화하지 않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해서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 바뀌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성품도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하나의 더딘 과정이다. 초반의 작은 변화는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게 될 때, 본질적인 변화가 생기고, 사람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처음에 진리를 갈망해서 진리를 얻고자 갈망하는 마음,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에서부터, 일이 닥쳤을 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진리를 실행해서 하나님 뜻을 충족게 하기까지, 나아가 자기 뜻대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속셈, 자신의 교만과 패역, 강퍅함, 배반의 마음을 극복하기까지, 이런 과정을 이겨 내게 된다. 그러면 진리는 조금씩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겠느냐? 진리가 네 생명이 되면 교만과 패역, 강퍅함, 배반의 성품은 네 내면에서 더 이상 네 생명이 아니고, 너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네 처신을 인도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었다면, 이것이 변화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뒤로는 점점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의 과정이며, 이런 효과는 기나긴 시간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여섯 가지 방면의 패괴 성품을 알아야 진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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