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해결하는 방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주로 진리에도, 긍정적인 사물에도 관심이 없고 게다가 반감까지 가진다는 말이다.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고 또 긍정적인 사물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반발하거나 반감을 품고, 무성의하게 얼버무리며 건성으로 대하는 태도와 내적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은 누구에게나 다 있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란 걸 알아도 좋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최소한 현재로서는 못 받아들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 내면의 성품은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어떤 진리든 다 깨달았습니다. 다만 실행을 못 할 뿐이죠.” 이는 그가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고,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어떤 진리도 실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다. “제가 사업으로 돈을 이렇게 많이 번 것은 하나님의 주재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진정으로 축복해 주셨고 제게 참 잘해 주셨습니다. 많이 베풀어 주셔서 우리 가족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셨죠.” 그 사람은 하나님이 축복해 준 것을 보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재했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축복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아예 이렇게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인식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이 실패해서 형편이 어려워지고 생활이 힘들어졌다. 왜 그렇게 되었겠느냐? 그가 편안함을 탐하며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 이행할지 고민하지도 않고, 언제나 돈만 추구하려 하며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린 탓에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앗아 간 것이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해 주고 그토록 많이 베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려 하지 않고 가정을 벗어나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소심해서 늘 잡혀갈까 걱정하고 돈과 본인이 누리는 것들을 잃어버릴까 걱정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정말로 앗아 가 버렸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이 앗아 가고 징계를 내린 것임을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은 저를 한 번 축복해 주실 수도 있고, 두 번 축복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니 당신의 축복도 인류와 함께합니다.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어찌 되었든 당신의 축복과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앗아 가신다 해도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그렇게 힘차지 않았다. 입으로는 순종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 후에 가만 생각해 보니 영 언짢았다. ‘예전에는 그렇게 잘 지냈는데, 하나님이 왜 앗아 가셨을까? 집에서 지내면서 본분을 이행해도 똑같잖아! 내가 뭔 지장을 줬다고!’ 지난날만 그리며 하나님에게 원망과 불만을 느끼니 우울하기만 했다. 그의 마음에 여전히 하나님이 있겠느냐? 그의 마음에 돈과 안일함, 편한 생활이 가득 차 있지만 하나님의 자리는 전혀 없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의 하나님이 아니다. 비록 ‘주신 이도 하나님,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알지만, ‘주신 이도 하나님’이라는 말은 좋아하고,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라는 말은 싫어하는 걸 보면, 그가 진리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이든 진리로 여기고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 거둘 때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런 주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항하고 불만을 품는다.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나온다. “하나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본분을 이행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없고 저희 집안 형편도 너무 어려운데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겠습니까? 그럴 기분도 아닙니다!” 이건 어떤 성품이냐? 비록 속으로 이미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느꼈지만, 하나님이 앗아 갔을 때 그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어째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느냐? 돈을 내려놓지 못하고 편안한 생활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소란을 피우며 하나님에게 손 내밀어 억지로 달라고도, 사람의 힘으로 원래 재산을 되찾아 오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해 이미 낙담하고 풀이 죽어서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게 너무 맘에 들지 않고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도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런 게 일종의 성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탄이 바로 이런 성품이며,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부인한다. 이런 성품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이다. 만약 이 정도로 진리를 싫어한다면 사람이 어느 지경까지 갈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은 물론, 끝까지 완고하게 대항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완전히 끝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여섯 가지 방면의 패괴 성품을 알아야 진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중에서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내적 상태는 바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관심이 없고, 심지어 반감을 갖거나 혐오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류를 좇는 것에 열광하며,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것을 거들떠보지 않으며 냉담하게 대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구한 이 기준이나 원칙을 자주 경시하곤 한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에 반감을 갖고 있으며, 언제나 마음속에 반발하고 대항하고 경시하는 감정을 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자의 주된 특징이다.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진리를 교제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 등은 다 긍정적인 사물에 속한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긍정적인 사물에 반감을 품고 신경 쓰지 않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가장 증오스러운 점은 그들이 긍정적인 사람, 예를 들어 정직한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키는 사람에게 경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늘 그들을 공격하고 배척하려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단점과 패괴 표출을 발견하면 그것을 빌미 삼아 문제를 확대하며, 시종일관 깎아내린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그들은 왜 긍정적인 사람들을 이토록 적대시하겠느냐? 어째서 악인, 불신파, 적그리스도에게는 큰 호감을 보이고 영합하며 늘 한통속이 되어 허송세월하겠느냐? 그들은 부정적인 사물, 사악한 사물에 대해 언급하면 신이 나서 희희낙락하지만,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항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다른 이가 진리를 교제하거나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들을 때면 마음속에 싫증과 불만을 품고 원망을 표출한다.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아니겠느냐? 패괴 성품을 드러낸 것 아니겠느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은사와 재능을 발휘하고 자기 기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기운이 넘친다. 그러나 그에게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요구하면, 마음이 차갑게 식고 열정도 사라진다. 스스로를 뽐낼 수 없으면 힘이 생기지 않고 기운이 빠지는 것이다. 스스로를 뽐낼 때는 왜 힘이 생기겠느냐? 진리를 실행할 때는 왜 힘이 생기지 않겠느냐?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사람은 모두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며 허영을 좇는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얻고 상을 받기 위해서는 기운이 넘친다. 그런데 왜 진리를 실행하고 육을 저버릴 때는 힘이 없어지고 기운이 빠지는 것이겠느냐?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이는 사람의 마음에 불순물이 있으며, 오로지 복을 받기 위해, 솔직히 말하자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추구할 만한 복과 이익이 없다면 힘이 없어지고 기운이 빠지며 어떤 열정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전부 진리를 싫어하는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이러한 성품에 지배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로 치우치며 잘못된 길을 택하게 된다. 또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포기하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채 명리와 지위를 좇아 사탄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이 행하는 이 모든 일은 사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며, 사탄을 섬기는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은 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바로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이런 성품에 의해 나타나는 일종의 내적 상태이다. 책망받을 때는 속으로 무척 반발한다. ‘듣기 싫어! 듣기 싫다고!’ 혹은 ‘왜 다른 사람은 책망하지 않으면서 나한테만 그러는 거지?’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무릇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 것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해 때론 반감을 품고, 때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때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거나 하찮게 생각하거나 대충 무성의하게 넘기고, 또는 아주 무책임한 태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주된 모습은 진리를 들으면 반감을 품는 것만이 아니라 진리를 실행하기 싫어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진리를 실행할 때가 되면 뒤로 물러서고, 진리는 본인과 무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서 교제할 때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글귀와 도리, 고상한 이론을 읊어 대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농락하기 좋아하는데, 그럴 때면 얼굴이 환해지고 기분이 한껏 들떠서 거침없이 떠들어 댄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드리고, 찬양을 듣고, 필기를 하는 등 하루 종일 하나님 믿는 일로 바쁜데, 한순간도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는 듯하다. 본분 이행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들은 정말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냐? 이들에게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없느냐? 이들의 실제 내적 상태는 언제 알 수 있느냐?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가 되면 도망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은 알아듣지 못해서이냐, 아니면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이냐? 둘 다 아니다. 그것은 본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이는 바로 성품의 문제이다. 속으로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자 긍정적인 사물이고, 사람은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성품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을 충족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너희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보았느냐? (불신파입니다.) 불신파가 진리를 싫어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할 수가 없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은 어떤 경우에 볼 수 있었느냐? 아마 그는 네가 진리를 교제할 때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도 않고, 본인의 어려운 점이나 문제에 관련되어도 올바르게 대하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부분에서 이를 알 수 있느냐? (설교는 자주 듣는데, 듣고 나서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점입니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은 분명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진리를 조금 실행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있느냐, 없느냐?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런 성품이 있으며, 단지 정도만 다를 뿐이다. 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너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실행한다고 바로 생명 성품이 변화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반드시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해야 생명 성품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한 번 진리를 실행했다고 해서 패괴 성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네가 이 측면에서 진리를 실행했지만, 그렇다고 꼭 다른 측면에서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배경과 원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패괴 성품이 존재한다는 점이고,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그러니 성품이 변화되면 진리를 실행하는 일에서의 모든 어려움, 핑계, 이유와 같은 문제가 다 해결되고, 패역, 결함, 나쁜 버릇 등도 다 해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진리 실행에 늘 어려움이 따르고, 언제나 이유와 핑계가 끊이지 않는다. 범사에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먼저 성품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여섯 가지 방면의 패괴 성품을 알아야 진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중에서

어떤 사람이 예배 때 자신의 내적 상태를 어느 정도 교제하면서도 문제의 본질, 개인적인 속셈과 생각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누군가 그에게 속셈과 목적이 있다고 폭로하자 그는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지만, 상대가 더 깊이 폭로하고 해부하자 견디지 못해서 자리를 뜨고 말았다. 왜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 일부 리더 일꾼들은 어떤 설교를 가장 듣기 싫어하느냐? (적그리스도와 거짓 리더를 분별하는 것에 관한 설교입니다.) 그렇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계속 적그리스도, 거짓 리더만 분별하고, 바리새인 얘기만 하시는구나. 이런 얘기는 왜 한번 시작하시면 끝이 없을까? 머리가 터질 것 같군.’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는 핑계를 대며 가 버린다. 이렇게 ‘가 버린다’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빠져나간다고 하고, 자리를 피한다고 한다. 왜 자리를 피하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사실이면 한번 들어 보면 된다. 들으면 너에게 유익이 된다. 엄한 말, 받아들이기 힘든 말은 우선 적어 둔 다음, 자주 곱씹어 보고, 천천히 소화하고, 천천히 변하면 되는데, 피할 일이 뭐가 있느냐? 그는 사람을 심판하는 말이 너무 엄하고 듣기 거북해서 반발심이 들고 반감이 생겼다. ‘내가 적그리스도, 거짓 리더도 아닌데, 왜 계속 나에 대해서만 얘기하시고, 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얘기하시지 않지? 악인을 분별하는 방면에 관한 얘기나 좀 하시지, 나에 대해서 얘기하시지 말고!’ 그는 회피하고 반감을 품었다. 이것은 무슨 성품이냐?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항상 자신을 위해 이치를 따지고 해명하는데, 거기에 패괴 성품의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리더 일꾼에게 이런 내적 상태가 있으면, 보통의 형제자매들에게는 이런 내적 상태가 있겠느냐, 없겠느냐?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다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글귀와 도리의 것을 얘기하기 좋아하는데, 모두가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개인의 문제, 실제 어려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입을 닫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결혼에 얽매여서 본분도 이행하지 않으려 하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는 결혼이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자 짐이 되어 버렸다. 예배 시간에 다 같이 이 측면의 내적 상태를 교제하는데, 그 내용이 본인 상황과 일치하니 자기를 가리키는 말처럼 느껴져 말했다. “당신들이 진리를 교제하는 것은 좋은데요, 왜 저에 대해 얘기하세요? 당신들은 문제가 없습니까? 왜 저만 가지고 그러세요?” 이건 어떤 성품이냐? 예배 시간에 진리를 교제할 때는 실제 문제와 결부시키고 해부해서 사람들에게 인식한 것을 얘기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성품이냐? 명확히 분별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은 모두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에 속하는데,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패괴 성품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느냐?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여섯 가지 방면의 패괴 성품을 알아야 진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허영과 체면, 명예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남을 돕고,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며, 어떤 대가든 기꺼이 치를 수 있다. 하지만 막상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진리를 지키고, 정의를 지켜야 할 때가 되면, 그의 선의는 모두 사라져 조금도 보이지 않고,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 조금도 실행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자신의 존엄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든 치르고 어떤 고통을 받아도 되지만, 실제 사역을 하고 실질적인 일을 해야 할 때, 교회 사역을 지키고 긍정적인 것을 지켜야 할 때, 하나님 선민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공급해야 할 때는 ‘어떤 대가든 치르고 어떤 고통을 받아도 된다’는 기백이 왜 사라지느냐?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사실, 그런 자의 내면에는 하나의 성품이 있는데,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왜 진리를 싫어한다고 말하겠느냐?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 진리를 실행하는 일, 하나님 선민을 보호하는 일, 사탄의 간계를 깨부수는 일, 교회 사역을 지키는 일과 관련되기만 하면, 회피하고 물러서서 올바른 일은 조금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영웅적 기개와 고통도 마다치 않는 정신은 어디 간 것이냐? 모두 어디에 쓴 것이냐? 이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기적이고 비열하게 자신을 보전할 게 아니라 교회 사역을 지켜야 한다고 사람들이 꾸짖어도, 그런 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난 그런 일 안 해. 그런 일은 나와 상관없어. 그렇게 해서 내가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되는데?’ 그런 자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기 좋아하지 하나님이 맡긴 사역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 사역에 그가 필요할 때 회피하기만 한다. 이는 마음속으로 긍정적인 것을 싫어하고, 진리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다. 오직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 실제를 갖춘 사람만이 하나님 집의 사역과 하나님의 선민이 필요로 할 때 선뜻 나설 수 있다. 또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일어나 하나님을 증거하고 진리를 교제하며 하나님의 선민을 바른길로 인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지는 태도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모습이다. 만약 너희가 이런 태도 없이 그저 건성으로 넘어가면서 ‘내 본분 범위 안에 있는 일이면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나한테 물어봤을 때 기분이 좋으면 대답해 주고 기분이 안 좋으면 대답해 주지 않을 거야. 이게 바로 내 태도야.’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패괴 성품이 아니냐? 오직 자신의 지위와 명예, 체면만 지키고, 자신의 이익과 관련 있는 것들만 지키는데, 이것이 정의로운 일을 지키는 것이겠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겠느냐? 이런 작은 이기심의 이면에는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있다. 너희 대다수는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 집의 이익과 관련된 일이 닥치면 “못 봤어.”, “몰라.”, “못 들었다고.”라는 말로 얼버무린다. 네가 정말 모르는 것이든,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든,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패괴 성품을 드러낸다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내가 보기에는 흐리멍덩하게 믿는 사람이거나 불신파로, 절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너희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을 일종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성품은 어쩌다 잠깐 나타나는 행동과는 관계가 없다. 어쩌다 잠깐 나타나는 행동으로는 성품의 문제를 규정할 수 없다. 사람에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든 항상 드러나기 마련이고, 심지어 한결같이 드러난다. 언제든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기만 하면 드러난다. 그러므로 가끔 일시적으로 하는 행동을 가지고 함부로 성품의 문제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성품이란 무엇이냐? 성품은 속셈, 동기, 사람의 사상 관점과 관계가 있다. 너는 그것이 너를 지배하고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성품은 또 은밀하게 감춰진 채 표면적인 현상에 가려져 있다. 요컨대, 내면에 그런 성품이 있으면 그것이 너를 방해하고 통제하고 지배하여 네가 여러 가지 행동을 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성품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이런 성품이 자주 사람에게 어떤 행동과 사상 관점, 태도를 유발하겠느냐?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겉으로 드러났을 때 주된 특징은 긍정적인 것과 진리에 무관심하고, 진리 실행과 관련된 것에 무관심하고 기운이 빠지며, 진리에 공을 들이려 하지도 않으면서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사람들에게 익숙한 건강 상식으로는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고, 싱겁게 먹고 육류를 적게 먹어야 한다. 특히 튀김 음식을 되도록 삼가야 한다. 이것은 건강 관리를 위한 올바른 안내이다. 무엇을 많이 먹고 무엇을 적게 먹어야 하는지 누구나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론적인 수용이냐, 아니면 사실적인 수용이냐? (이론적인 수용입니다.) 이론적인 수용이란 어떤 태도이냐? 기본적인 인정이다. 네 판단력으로 분별할 때 이것이 올바르고 훌륭한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게 논증이 있느냐? 논거가 있느냐? 너는 체험이나 어떤 논거와 근거로써 이 말의 옳고 그름을 증명하지 않았고, 더욱이 실패 선례에서 어떤 교훈을 얻지도 않은 채 그저 이 관점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인 수용이다. 이론적인 수용이든 실제적인 수용이든, 우선 ‘채소를 많이 먹고 육류를 적게 먹어야 한다’는 말이 옳고 긍정적인 것임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의 성품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일상생활에서 이 말을 어떻게 대하고 적용하는지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말을 대하는 태도, 즉 이론적으로, 도리상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그것을 현실 생활에서 적용해 실제로 삼았는지 알 수 있다. 네가 이 말을 그저 도리상으로만 받아들였을 뿐, 일상에서 하는 행동은 이 말에 완전히 위배되거나 이 말을 적용하는 실제적인 측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치자. 그러면 네가 이 말을 좋아하는 것이냐, 싫어하는 것이냐? 예를 들어, 네가 식사하다가 채소를 보자 ‘채소는 사람의 건강에 이롭지만 맛이 없어. 역시 고기가 맛있지. 먼저 고기를 먹자.’라고 생각하고 채소는 안 먹고 고기만 먹는다면, 이는 어떤 성품을 드러낸 것이냐? 옳은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긍정적인 것을 싫어하며, 육적인 취향만을 따라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이렇게 먹을 것을 탐하고 즐기려 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것을 싫어하고 거부감을 느끼며 반감을 갖는다. 이것은 일종의 성품이다. 어떤 사람이 그 말이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고, 그러면서 또 남에게는 그렇게 말하다 보니 그 말이 그에게서 하나의 이론이 되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됐다. 그는 채소를 많이 먹어야 좋고 고기를 많이 먹으면 안 좋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속으로는 ‘어쨌든 난 손해를 보지 않았어. 그래도 고기를 먹는 게 이득이고, 건강에 안 좋은 것 같지도 않아.’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런 탐욕과 욕망 때문에 그가 잘못된 생활 방식을 택하고 계속해서 올바른 상식과 생활 방식을 어긴 것이다. 이득을 탐내고 육적인 누림을 탐하는 그런 패괴 성품이 있으면, 그가 올바른 말과 긍정적인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쉽지 않다. 그러면 그의 생활 방식이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패괴 성품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겉으로는 이런 행동과 태도로 나타나지만, 사실 한 가지 성품에 지배된 것이다. 어떤 성품이겠느냐?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이런 성품은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누구나 자신이 진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은 지 몇 해가 되도록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면 진리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충분히 증명된다. 사람은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 그렇게 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현실 생활에 가져와 실행하고 적용해 진리를 깨닫고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 요구에 도달하기 아주 어렵다. 그러므로 대부분 사람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보든, 자신의 관점과 태도가 올바르고 다른 사람의 말은 자신이 말한 것보다 좋지도 옳지도 않다고 여기며, 자기 의견을 고집하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이다. 설령 다른 사람의 말이 옳고 진리에 부합할지라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겉으로만 들을 뿐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 막상 실행할 때가 되면 여전히 자기 뜻대로 행동하며, 늘 자기 말이 옳고 이치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이 네 이런 태도를 보고 어떻게 말씀하겠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너라는 사람은 강퍅하구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 의견을 고집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너는 지독한 고집불통이니 곤란하다. 누가 의견을 내든 너는 소극적이고 반발하는 태도로 대하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언제나 반발하고 차단하고 거부한다. 그러니 너라는 사람은 너무도 터무니없이 그릇된 자이며, 너무나 다루기 어렵구나!” 왜 다루기 어렵겠느냐? 네가 나타내는 것은 행동 방식이나 행위상의 잘못이 아니라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다루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겠느냐? 너라는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한다. 진리를 증오한다고 정의 내려지면 하나님은 너를 곤란하다고 본다. 하나님은 너를 혐오하여 버리고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은 성품이 안 좋고 고집스러우며 강퍅하고 교만해! 저 사람하고는 함께 지내기가 힘들어.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법도 없거든.” 기껏해야 이런 평가를 내리는 데 그친다. 그런데 이 평가가 네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겠느냐? 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네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네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는 동시에 사람의 모든 언행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즉 너라는 사람은 패괴 성품이 좀 있다거나 말을 좀 안 듣는 수준이 아니라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느냐? (심각합니다.) 그러면 곤란해진다. 곤란해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진리를 증오하는 네 패괴 성품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그저 네가 진리를 증오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 끝이겠느냐? 그렇게 간단한 것이겠느냐? 진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더냐? 진리는 누구를 대표하더냐?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진리를 증오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을 적대시한다고 보실 것입니다.) 이는 심각한 문제 아니겠느냐?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이다. 어째서 하나님을 증오한다고 하겠느냐? 그가 하나님을 욕했느냐? 하나님 앞에서 반대했느냐? 뒤에서 판단이나 정죄하는 말을 했느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왜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증오하는 거라고 하겠느냐? 이는 문제를 너무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진리를 증오했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그 결과는 끔찍하다. 즉,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데, 그런 성품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지 않겠느냐? 진리와 관련된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의 선택과 관련된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패괴 성품으로 살아간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게 된다. 그 패괴 성품은 곧 하나님을 증오하고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네게 이런 성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너는 의문을 품고 분석하고 해부한 뒤에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진리도 아니고 반드시 맞는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라며 하나님 말씀을 의심할 것이다.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이 드러난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다. 네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여전히 네 하나님이겠느냐? 그럴 리 없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생각하겠느냐? 연구의 대상이자 의심과 정죄의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정죄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겠느냐? 교만한 성품이 어느 정도까지 팽창되어 초래된 일이다. 비단 사탄의 성품을 드러낸 것만이 아니라 사탄의 몰골까지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경에 다다르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심하게 거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떻게 되겠느냐? 적대 관계가 되어 사람이 하나님을 대립적인 존재로 여기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진리에 순종하지도 못하면 하나님은 네 하나님이 아니다. 네가 진리를 거절하고 배척하면 너는 이미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네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며 너를 원수로 여기지 않았는데,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립적인 존재로 여겼다. 너는 하나님이 네 진리이자 길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하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서둘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예를 들어, 본분을 이행하다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문제와 어려움에 맞닥뜨린다면, 혼자서 아무렇게나 궁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고 그 일이 어떤 진리와 관계된 것인지 알 수 없다면, 너는 한 가지 원칙, 즉 우선 순종하고 개인적인 뜻과 생각을 품지 않은 채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하나님이 어떻게 계획하고 어떻게 하려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기다려야지 맹목적으로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누군가 건의를 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말해 준다면 먼저 받아들여 모두에게 교제하게 한 후 그 길이 옳은지,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진리에 부합한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게 실행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게 실행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다. 진리를 구할 때는 여러 측면으로 구해야 한다. 누가 말하든 일단 들어 보고 진지하게 대해야지,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상대를 냉대해서는 안 된다. 이는 네 본분 범위 안에 포함되는 일이니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태도이자 올바른 내적 상태이다. 네 내적 상태가 올바르다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실행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대신하는 것이며, 이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실행한다면 어떤 성과를 얻을 수 있겠느냐? (성령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것은 한 측면의 성과이다. 때로 어떤 일은 아주 간단해 네 머리로 해결이 가능하다. 타인이 낸 의견을 네가 이해한 후에 고치고 원칙대로 하면 된다. 이는 사람이 보기에 작은 일이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큰일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가 그렇게 실행하면 하나님은 너라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네 마음을 보게 되는 동시에 네 성품도 보게 되는데, 이것이 큰일이다. 다시 말해, 네가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이행하거나 일을 할 때 살아 내고 드러내는 것이 모두 사람이 갖추어야 할 진리 실제라는 것이다. 네가 각각의 일을 할 때의 태도와 마음, 내적 상태 등은 하나님 앞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감찰한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다> 중에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은 주로 어디서 나타나느냐? 긍정적인 사물을 봤을 때, 그는 진리로 가늠하지 않고 무엇으로 가늠하느냐? 그는 사탄의 논리로 가늠하여 그 일이 멋지게 행해졌는지, 형식은 어땠는지, 기세는 어땠는지를 본다. 그는 사탄이 사람을 가늠하는 방식, 즉 이방인이 사람을 가늠하는 방식과 원칙으로 모든 것을 가늠한다. 그는 일을 할 때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무슨 일을 하든 출발점은 모두 자신의 상상과 관점이고, 진리는 한쪽 구석에 내버려둔 채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처세술과 지식으로 가늠한다. 무슨 일을 하든 다 이렇게 한다. 그는 사람의 관점과 사탄의 논리로 가늠하는데, 이리저리 가늠해 봐도 그의 눈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만 못하고, 그 자신이 가장 훌륭하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있겠느냐? 여전히 진리 원칙이 있겠느냐? 없다. 그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보지 못하고, 진리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임을 보지 못하며, 진리가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성육신한 하나님을 깔보고,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옷차림, 언행에 늘 관념을 갖게 된다. 접촉한 시간이 길어지면 그는 ‘당신은 제가 상상한 것만큼 그렇게 존귀하고, 위엄 있고, 깊이가 있지 않으시네요. 기품이 저만 못해요. 제가 이곳에 딱 서면, 어떻게 봐도 큰 인물 같은 기품이잖아요? 당신의 말씀에 진리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모습은 아니에요. 당신은 늘 진리와 실제에 진입하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어째서 비밀을 밝혀 주시지는 않으세요? 어째서 셋째 하늘의 언어로 조금 말씀하시지 않으세요?’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무슨 논리이고 무슨 관점이냐? (사탄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는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일들을 내가 어떻게 대하겠느냐? (이런 사람을 혐오하고,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틀렸다. 완전 반대이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에게 접근해 정상적으로 교제할 것이다. 공급할 수 있으면 공급하고, 도울 수 있으면 도울 것이다. 만약 그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고집불통이라면, 나는 그와 정상적으로 함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그와 상의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보기에 이렇게 하면 될까요? 이 몇 가지 방식 중 당신이 보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하죠. 적합한 게 하나도 없으면, 당신이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할수록, 나는 더 그와 이런 식으로 함께할 것이다. 나는 누구와 함께하든 잘난 척하지 않는다. 만약 높고 낮은 의자 두 개가 있다면, 높은 의자에 그가 앉게 하고 나는 낮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고 그와 말을 할 것이다. 결국에는 그를 부끄럽게 하여 그가 조금씩 깨닫고 자신이 진리가 없어서 빈곤하고 가련하며 무감각하고 우둔하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이런 방식은 어떠하냐? (좋습니다.) 그럼 내가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좋겠느냐? 사실 이것도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가 하나님 믿는 일에 진심과 인성이 좀 있다면, 구제할 수 있으니 그를 상대하는 것도 괜찮다. 결국 언젠가 그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스스로 낮은 의자를 선택해 앉을 것이며 거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을 것이다. 늘 어리석은 말을 하고 어리석은 일을 하는 빈곤하고 가련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추한 모습이다. 긍정적인 사물을 보면 마음속으로 깔보고 멸시하며, 다른 사람이 정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며, 늘 진리를 실행하지만 간혹 지혜가 부족한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업신여긴다. 이런 사람을 무능하고 못났다고 생각하고, 역시 자기가 영리하고 따질 줄 알며, 권모술수에 능하고, 수완도 있고, 은사도 있고, 하기도 잘하고, 말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완전히 정반대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싫어하는 대상이다. 이는 바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의 성품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성품을 아는 것은 성품 변화의 기초이다> 중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부족한 자질과 어리석음을 혐오하지 않고,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는 것도 혐오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가장 혐오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싫어한다면 이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은 영원히 너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해진 일이다. 네가 진리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대할 때 너는 경시하며 냉담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일 것이고, 심지어는 반감을 갖거나 저항하거나 거부할 것이다. 네게 이런 모습이 있으면 하나님은 너를 몹시 싫어할 것이며, 너는 구제 불능일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정말 진리를 사랑하지만 자질이 좀 부족하고 견식이 부족하며 어리석다면, 늘 잘못을 저지르지만 고의로 악을 행하지는 않고 그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진리 교제를 듣고자 하며 진리를 갈망한다면,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간절한 마음과 갈망하는 태도로 대하며 하나님 말씀을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가끔 어리석은 일을 저질러도 하나님은 너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진리를 갈망하는 네 마음을 좋아하며, 진리에 대한 네 간절한 태도를 좋아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를 긍휼히 여겨 언제나 은혜를 베푼다. 하나님은 네 부족한 자질과 어리석음을 보지 않으며, 네 과오 역시 보지 않는다. 네가 간절한 마음, 갈망하는 태도로 진리를 대하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진심이 있다. 그 진심과 그런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늘 너를 긍휼히 여길 것이며, 성령은 네게 역사할 것이다. 그러면 네게는 구원받을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반면, 네 마음이 강퍅하고 방종하며 진리를 싫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마음에 담는 법이 없으며 마음 깊이 반발하고 멸시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혐오와 반감, 끝없는 노로 대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가지 특징은 무엇이냐? 널리 긍휼을 베푸는 것과 크게 노하는 것이다. ‘널리 긍휼을 베푼다’에서 ‘널리’란 하나님의 긍휼 안에 관용과 인내, 포용, 지극한 사랑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널리’의 의미이다. 사람이 우매하고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만 어리석고 자질이 부족하다면 하나님은 너를 ‘널리 긍휼을 베푸는’ 태도로 대할 것이다. 긍휼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인내와 포용이 포함된다. 네 어리석음을 인내하고 포용하며, 네게 충분한 믿음과 포용을 베풀어 줌으로써 너를 붙들어 주고 공급해 주며 도와주어 네가 조금씩 진리를 깨닫고 성장하게 한다. 이는 무엇을 기초로 이뤄지겠느냐? 진리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기초로 이뤄진다. 이는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반감을 갖고 있다면, 심지어 진리를 증오하며 한 번도 진리를 중요하게 여긴 적이 없다면, 언제나 자신의 공을 말하고, 자기가 어떻게 사역했는지, 얼마나 경험이 많은지, 어떤 것들을 체험했는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중시하고 또 어떤 큰일을 맡겼는지 등을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밑천과 공로, 능력을 말하면서 스스로를 뽐내지만 진리를 교제하거나 하나님을 증거하는 법이 없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후의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교제하는 법도 없다면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설교를 듣습니까?”라고 묻는데,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진리를 사랑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형식만 취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 집에서 그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진리를 대하는 이런 태도에 관해 하나님은 어떻게 그 성질을 정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한다고 할 것이다. 그의 성품에는 가장 치명적인 것, 교만함이나 간사함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근거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노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노할 때, 때로 그 사람을 질책하거나 징계하고 징벌한다. 만약 사람이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인내하고 기다리고 살펴볼 것이며, 환경이나 다른 어떤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잠시 그러한 불신파를 이용하여 봉사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당한 환경이 갖춰지고 때가 무르익으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들은 봉사할 자격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노이다. 하나님은 왜 크게 노하겠느냐? 이는 하나님이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을 몹시 증오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크게 노한다는 것은 진리를 싫어하는 이런 부류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가 정해졌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디로 보내겠느냐? 사탄의 진영으로 보낸다. 하나님은 그들을 싫어하고 그런 사람에게 노하기 때문에 그들을 문전박대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 집의 문에 들어서지 못하게 할 것이고, 그들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노하는 한 가지 모습이다. 이 밖에,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 더러운 귀신, 악령, 불신파와 동일시하며, 때가 되면 그들을 도태시킬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처리 방식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노이다. 도태된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구원을 또 누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에서

진리를 싫어하고, 언제나 진리를 폄하하고 멸시한다면, 이런 본성을 가진 너는 변화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변화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태도가 바뀌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행한 일이 하나님의 태도를 바꿔 놓는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태도가 바뀔 정도는 아니고 하나님이 마음속 깊이 너라는 사람의 본질을 계속 싫어한다면 너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 만약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반발하는 내적 상태가 있다면 무척 위험할 것이다. 수시로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고, 또 수시로 이런 내적 상태에 빠진다면, 혹은 네가 아예 이런 사람이라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진다. 진리를 싫어하는 내적 상태가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난다면, 이는 분량이 작은 것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의 패괴 성품 자체에 그런 본질이 있어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는 걸 피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적 상태가 본질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한때의 기분 때문에 내적 상태가 생겨 진리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지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본질이 야기한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내적 상태는 바로잡을 수 있다. 어떻게 바로잡아야겠느냐? 얼른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그 측면의 진리를 구함으로써 진리를 인정하고 진리와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되면 그 내적 상태는 해결된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되게 내버려두면 위험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저는 자질이 부족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니 추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필요도 없겠죠. 하나님은 왜 저한테 이런 자질을 주신 걸까요?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으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했으니,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이자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나타난 데는 배경이 있으니 이런 내적 상태가 생겨난 배경과 근원을 해결해야 한다. 근원을 해결하면 너의 그 내적 상태도 사라진다. 어떤 내적 상태는 병증과 같다. 예를 들어 기침이라고 하면, 감기나 폐렴 때문에 나타났을 테니 감기나 폐렴을 치료하면 기침도 나아진다. 병의 근원을 해결하면 병증도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싫어하는 내적 상태 중 일부는 병증이 아니라 암과 같다. 병의 근원이 안쪽에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병세도 발견되지 않지만, 일단 발병하는 순간 치명적이며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런 사람은 늘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이방인처럼 언제나 진리를 폄하한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폄하하고 거부하고 반박한다. 그게 어떤 진리일지라도, 예컨대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정하는 것,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일할 때 대충 건성으로 하지 않는 것,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등 어떤 측면의 진리일지라도 그는 받아들이거나 인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으며, 심지어는 반박하고 폄하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으로, 하나의 본질이다. 이런 본질이 사람에게 어떤 결말을 초래하겠느냐? 하나님에게 혐오받고 내쳐지며 도태된 후 파멸하는, 더없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에서

말세에 성육신 하나님이 왔는데, 실제의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진리이고 생명이다. 이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리스도가 진리와 생명을 가지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러 왔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실제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느냐? 어떻게 해야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지극히 많은 진리를 선포하였으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마음껏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라! 하나님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하나님 말씀은 매우 풍성하니 황금과 보물이 곳곳에 가득하다. 아름다운 가나안 땅의 풍성함을 누리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넘치고, 어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도 모두 진리와 빛이 있으며 전부 보배이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수심에 잠기며, 잔치에 참석했어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불쌍한 모습을 드러낸다. 진리를 구할 줄 아는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지만, 진리를 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게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모든 일에서 진리를 구하여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줄 알며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실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진리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진리는 무엇을 하는 데 쓰는 것이냐? 사람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데 쓰는 것이겠느냐?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대체 사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느냐? 진리는 사람의 패괴 성품과 죄짓는 본성을 해결하여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여 늘 진리가 심오하고 추상적이라고, 진리는 비밀이라고 생각할 뿐,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10년, 20년 믿어도 대체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데, 이런 사람이 진리를 얻었겠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가련하지 않으냐? 너무나 가련하다. 마치 “잔치에 참석해도 굶주림에 허덕이네.”라는 찬양처럼 말이다. 진리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진리를 싫어한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리를 싫어하는 네 내면의 상태를 성찰해야 하며, 네게 진리를 싫어하는 어떤 모습이 있는지, 어떤 행동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인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를 보이는지 살펴야 한다. 수시로 이러한 것들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당신은 자기 뜻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는데, 그러면 안 돼요.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해요.”라고 질책했을 때, 네가 “제가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거는 안 되고, 당신이 그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거는 된다고요?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게 어때서요? 제 마음은 하나님께서 아십니다!”라며 화를 내며 반박한다면, 이는 무슨 태도이냐?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냐? (아닙니다.) 일이 닥쳤을 때, 우선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춰야 하는데, 그런 태도가 없다면 이는 보배를 받아들일 그릇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네가 진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 헛된 것이 된다! 진리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니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데 실패한 것이다. 진리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진리가 너의 실제가 되고 너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얻은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그런 말씀들을 하였느냐?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진리를 선포하였느냐? 바로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패괴가 정결함을 얻게 하기 위해, 사람이 진리를 얻어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했겠느냐? 성경과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이겠느냐? 진리 대학을 세워 사람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이겠느냐? 다 아니다. 인류를 완전히 구원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결국에는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는 이해했느냐? 하나님을 믿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진리를 얻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너희가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지,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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