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을 분별하는 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주된 성품 특징은 단순히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싫어한다는 것이다.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진리를 대하는 태도 중 정도가 비교적 낮은 것일 뿐, 적대시하고 정죄하고 대항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저 흥미를 느끼지 않고 신경을 안 쓰려 하며, “긍정적인 사물이니, 진리니 하는 게 다 뭐야? 그런 걸 얻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런 걸 얻으면 잘살고 능력을 키울 수 있나?”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지, 싫어한다고는 할 수 없다. 싫어한다는 것은 일종의 태도 표명이다. 어떤 태도겠느냐?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듣는 순간 마음속으로 증오하고 반감을 느끼고 거부하며 듣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는 증거를 찾아 진리를 정죄하고 폄하하려고도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한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한 사역을 체험할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역시 지면상으로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말씀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그 말씀들은 다 사람이 옳은 길에 오르고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론에만 머무른다. 이론에 머무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예컨대, 어떤 사람은 책에 나온 이론을 보고 좋다고 생각하지만, 실생활과 대조하고는 이 사악한 흐름, 인류의 패괴, 그리고 전 인류의 각종 필요를 보며 그 말들이 비현실적이고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다고, 사람이 이 사악한 흐름과 사악한 사회에 적응하거나 순응하게 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 말들이 좋기는 하지만 그저 입으로 말하는 데 그친다고,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인류의 바람이나 환상을 만족시켜 주는 데 그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만약 사람이 지위를 좋아하여 고위 공무원이 되고 싶고, 사람들 사이에서 떠받들어지고 숭배받고 싶다면,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를 뽐내고 다른 사람을 짓밟는 등 비정상적인 수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하지만 진리는 딱 그러한 사물을 정죄하며, 사람의 그런 욕망과 야심을 정죄하고 부정한다. 실생활 속에서 사람은 두각을 드러내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요구는 하나님과 진리 앞에서 모두 정죄된다. 그래서 사람의 그런 요구는 하나님 집에서 통하지 않고, 발휘될 여지가 없으며, 실현될 공간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가 포기하겠느냐?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해했어. 이제 보니 진리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잊고 버리게 하고, 관용과 아량을 갖게 하는 거였어. 자기 자신은 없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진리야.’라고 정의한다. 진리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 후 그가 진리에 흥미를 보이겠느냐, 아니면 반감을 보이겠느냐? 그는 진리에도, 하나님에게도 반감을 보인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늘 진리를 얘기하시고, 사람의 욕망과 야심 등 정결치 않은 것들을 드러내셔. 또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시고. 아무래도 하나님이 진리를 교제하시는 목적은 지위와 욕망, 야심에 대한 사람의 추구를 박탈하는 데 있는 것 같아. 처음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시고, 사람의 바람과 꿈을 이뤄 주실 수 있다고, 사람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이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실 줄은 몰랐어. 아무래도 별로인 것 같아. 내 안에 야심과 욕망이 가득한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실까? 여태까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하나님 말씀의 행간을 보면,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과 맞지 않으셔. 나는 이런 실제 하나님과 맞지 않는 것 같고. 그분이 하신 말씀과 사역, 그분의 일 처리 원칙, 그리고 그분의 성품이 나는 왜 마음에 거슬리는 걸까? 정직한 사람이 되고 양심을 갖추는 것, 일이 닥쳤을 때 구하고 순종하며 하나님께 경외심을 갖는 것,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 등 이런 것을 나는 못 해!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지상정도 아니야. 그러니 어떻게 믿겠어?’ 이렇게 생각한 그가 하나님에게 호감을 갖겠느냐, 아니면 거리감을 느끼겠느냐? (거리감을 느낄 것입니다.) 한동안 체험한 적그리스도는 점점 더 자기처럼 야심과 욕망이 있고 포부가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쓰일 곳이 없다고, 포부를 펼칠 수 없다고 여긴다. ‘하나님 집에서는 어떻게 해도 두각을 드러낼 수가 없어. 빛 볼 날이 없다고. 그러면서 나더러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느니,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느니,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다느니 그러잖아. 발탁해서 중용하기는커녕 정죄한다고. 내가 독립 왕국을 세우면 그게 뭐? 사람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면 그게 또 뭐? 나한테는 권력이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력이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어? 선거 때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속임수를 쓰면 그게 뭐? 이방인들은 다 그러지 않나? 하나님 집에서는 왜 안 되는 거야? 그건 몰염치한 행동이라느니 그러는데, 그게 왜 몰염치한 행동이야?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도 있잖아. 그건 정당한 거라고! 하나님 집은 재미없어.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너무 흉악해서 함께 지내기가 힘들단 말이지. 하나님 집 사람들은 그래도 솔직하잖아. 여기에 섞여 있는데 하나님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이 없고 사람을 다스리는 진리가 없다면, 내가 하나님 집에서 대장이고 주인이고 왕일 텐데.’ 그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부단히 갖가지 일을 겪고, 책망과 훈계를 받으며, 여러 본분에서 교체되다가 마지막에 한 가지를 깨닫는다. ‘하나님 집에서는 어떤 일이 닥치든 진리로 판단하고 해결해. 모두 진리를 강조한다고. 하나님도 한결같이 진리를 얘기하시잖아. 나는 여기에서 포부를 펼칠 수 없어!’ 여기까지 체험한 그는 진리, 진리가 권세를 잡는 것,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진리라는 것, 진리를 구하는 것 등을 점점 더 싫어하게 된다. 어느 정도로 싫어하겠느냐? 제일 처음, 자기가 인정한 진리의 도리적인 측면조차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극도의 반감을 보인다. 그래서 그는 예배만 했다 하면 졸고 걱정한다.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서너 시간이야. 언제쯤 끝이 날까? 듣기 싫다!’ 그의 마음을 형용하는 말이 있으니, 바로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진리가 권세를 잡는 한 자기가 빛 볼 날은 영원히 없을 거라고, 언제까지고 제한받고 정죄되며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대상이 될 거라고, 아무리 큰 능력이 있어도 중용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진리와 하나님을 점점 더 혐오하게 된다. 그가 왜 처음에는 혐오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는 처음에도 혐오했다. 다만 그때는 하나님 집의 모든 것이 낯설고 개념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혐오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그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그때도 본성 본질 속에서 진리를 싫어했다. 이 사람들의 본성 본질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천성적으로 불의와 사악한 것, 권세, 사악한 흐름, 권력을 잡는 것, 남을 통제하는 것 등 모든 부정적인 사물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들을 볼 때, 적그리스도 부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존재이다. 이 밖에, 그의 추구를 볼 때, 그는 지위를 추구하고, 두각을 드러내기를 추구하고, 자기한테 후광이 나기를 추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자가 되며 위엄과 권세를 갖는 것, 어디에서 말하고 일하든 위신과 힘을 갖고 남들을 통제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데, 이 또한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6 적그리스도의 인품과 성품 본질에 관한 정리(3)> 중에서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싫어하는 가장 주된 모습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물론 그들의 일상생활이나 일 처리, 특히 본분 이행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모습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진리를 구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구하지 않는다. 이 밖에, 진리를 실행하는 법이 없다. 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실행할 수 있겠느냐? 구해야 깨달을 수 있고, 깨달아야 실행할 수 있다. 그는 구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며, 심지어는 경멸하고 싫어하고 적대시하기에 결코 진리 실행과 연결되지 않는다. 설령 가끔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실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닥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말하면 그는 “뭐가 좋죠? 그렇게 하면 제 생각은 수포가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한다. 상대가 “당신 생각대로 따르면 하나님 집에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우리는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해요.”라고 말하면 그는 “무슨 원칙이요? 제가 이렇게 하는 게 원칙입니다. 제 생각이 바로 원칙이라고요!”라고 말한다. 이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의 가장 주된 모습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큐티 생활을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역으로 정신이 없어 하나님 말씀을 읽을 틈이 나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묵상하거나 찬양을 부른다. 또 며칠간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으면 마음속이 공허해진 것 같아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한 단락 읽음으로써 마음을 충실하게 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는데, 그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많이 멀어진 게 아니다. 반면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 말씀을 하루 안 읽어도 괴로워하지 않고, 열흘 안 읽어도 아무 지각이 없으며, 1년 안 읽어도 마찬가지로 잘 살아간다. 심지어 3년 동안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아도 지각이 없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거나 공허함을 느끼지 않은 채 언제나처럼 편하게 잘 살아간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의 혐오가 얼마나 심각하냐!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하루 읽지 않았다면 바쁘기 때문이고, 열흘 읽지 않았다면 이 역시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한 달 동안 읽지 않았는데 마음속에 아무 느낌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1년 동안 읽지 않았다면 이는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적그리스도 부류의 또 다른 모습은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측면에 대해서는 예전에 교제한 바 있다. 그럼 그는 그리스도가 뭘 했다고 멸시하겠느냐? 그를 괴롭히고 해쳤느냐, 아니면 그의 뜻에 맞지 않는 무슨 일을 했느냐? 그의 어떤 이익에 손해를 끼쳤느냐?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와 사적인 원한이 없으며, 심지어 아예 일면식도 없다. 그럼 그가 왜 멸시하겠느냐? 근본 원인은 진리를 싫어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에 있다. 진리를 싫어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 중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를 멸시하는 것이다.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가 포괄하는 범위는 무척 넓다. 하나님이 지은 만물과 만물의 법칙, 각종 생명체와 그들의 생활 법칙 같은 것이 있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라는 생명체의 각종 생활 법칙이 있다. 일례로, 사람의 삶과 가장 가까운 생로병사를 들 수 있다. 정상인은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가 불편해지고 몸이 약해진다. 눈이 침침해지고 귀도 잘 안 들리며 치아도 헐거워져서 노화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주재하며, 그 누구도 이 자연법칙을 어길 수 없다. 정상인은 누구나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람이 몇 살까지 살든, 몸 상태가 어떻든, 사람의 본분 이행 방식이나 태도, 사람이 서야 할 자리 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그리스도 부류는 불복하며 말한다. “제가 누구입니까? 저는 늙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언제까지고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겁니다. 제가 늙어 보이나요? 당신들이 이 나이가 되면 하지 못할 일도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50살만 돼도 다리를 잘 못 쓰겠지만, 제 다리는 여전히 팔팔하다고요. 저는 담을 뛰어넘고 벽을 타는 훈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이 정해 놓은 정상적인 법칙에 도전하려 하고, 그 법칙들을 깨서 자신은 남들과 다르고 비범한 초인적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 한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도전하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밖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적그리스도는 사악한 흐름과 흑암 권세를 숭배한다. 이는 그가 진리를 적대한다는 사실을 더더욱 실증한다. 적그리스도는 사탄 정권과 전설 속 각종 악령의 능력, 재주, 소행, 그리고 사악한 흐름과 흑암 권세를 엎드려 절할 정도로 숭배하고 탄복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굳게 믿으며, 한 번도 의혹을 품은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 싫어하기는커녕 앙모와 숭배, 부러움으로 가득하며, 심지어 내면 깊이 그런 것들을 바짝 뒤따르고 있다. 이 사악하고 어두운 것들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마음속 깊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 그는 진리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 사악하고 어두운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 중 진리를 좋아하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이런 자는 사악한 세력과 사탄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탄의 것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굳게 믿는다. 반면,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마음속에 반감과 멸시가 가득하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6 적그리스도의 인품과 성품 본질에 관한 정리(3)> 중에서

어째서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겠느냐? ‘적’이란 어떤 의미냐? 적대시하고 증오한다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적대시하고 진리를 적대시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적대시란 무엇이냐? 맞은편에 서서 너를 원수처럼 대하는 것이며, 마치 불구대천의 원한이 가득 찬 것처럼 너와 공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이런 마음가짐으로 대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증오하는 사람이 진리는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진리를 좋아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맞은편에 서 있는 자는 전부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태도는 바로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그는 진리나 하나님 말씀을 듣기만 해도 증오심이 생기며, 누가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기라도 하면 눈에 불길이 일고 핏발이 선다. 마치 복음을 전할 때 마귀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는 느낌처럼 말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대할 때 극도로 싫어하며 반발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심지어 누가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거나 진리를 교제해 주기만 해도 증오심을 품고 상대를 원수처럼 대한다. 그는 다양한 측면의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모두 몹시 싫어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매사에 진리를 구하는 것 등 이 모든 진리에 대해 그가 조금이라도 주관적인 바람을 갖고 동경하거나 좋아하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그런 본성 본질로 인해 그는 이미 진리와 하나님의 맞은편에 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으며, 나아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한다. 예를 들어, 리더 자리에 있는 사람은 형제자매의 서로 다른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고, 형제자매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또한 지위를 주장하지 말고 형제자매들의 질책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올바른 실행법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그는 “형제자매들의 의견을 들으라고요? 그러고도 제가 리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위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위신이 서겠냐고요. 위신이 없는데 어떻게 사역을 하죠?”라고 말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성품을 갖고 있으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올바른 실행법일수록 더더욱 반발심을 갖는다. 그는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진리 실행은 무엇이겠느냐? 음모와 수법, 강압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이지 하나님 말씀과 진리,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방식과 길은 다 사악하며, 적그리스도 부류의 본성 본질을 완전히 대변한다. 그들이 자주 표출하는 속셈과 동기, 사상 관점은 모두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다. 그럼 진리와 하나님의 맞은편에 서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지요.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사람은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니까요.”라고 말하면,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순종하라고? 내가 피조물인 건 맞아. 하지만 순종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지. 먼저 나 개인적으로 반드시 이득을 봐야 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는 없지. 내 이익을 1순위에 둬야 한다고. 상과 큰 복이 준비된 상황에서 순종하라고 한다면 상관없겠지만, 상도 종착지도 없다면 내가 왜 순종해야 하겠어?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순종하지 못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조건적으로 순종한다. 그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대적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는 바보나 정직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똑똑한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의 본질은 무엇이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본질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본질은 그들이 걷는 길을 결정하며, 그들이 걷는 길은 또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조 사람의 마음을 농락한다> 중에서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로 볼 때 그들은 진리를 적대시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진리를 적대시하는 이 본성 본질은 어떻게 표출되느냐? 하나님 말씀을 읽기만 하면 반감이 들고 졸음이 쏟아진다. 하나님 말씀을 읽기만 하면 무시하고 짜증내고 듣기 싫어하는 등 여러 가지 표정과 태도를 보이고 마귀의 얼굴을 드러낸다. 그들은 겉보기에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또한 스스로도 자신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어째서 진리를 교제하고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면 얌전하게 듣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냐? 마치 하나님 말씀이 예리한 날을 품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 말씀이 그들을 찌르기라도 했느냐? 그들을 정죄했느냐? 아니다. 그 말씀들은 대부분 사람에게 공급하는 말씀이다. 사람이 들으면 각성하고 살 길을 얻어서 소생할 수 있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 항상 비정상적인 상태로 변하느냐? 그건 바로 마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네가 신학을 얘기하고 사설과 궤변을 얘기하고 계시록을 얘기해도 그들은 반감을 품지 않는다. 심지어 네가 솔직한 사람이 되고 무골호인이 되는 얘기를 해도, 어떤 영웅 얘기를 해도 반감을 품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 말씀 읽는 것을 들으면 반감을 품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 한다. 만약 차분히 들으라고 권면하기라도 하면 얼굴이 변하며 눈알이 벌게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어째서 하나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냐? 하나님 말씀만 들으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은 어찌된 일이냐? 그건 바로 그 내면의 영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 영은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만 들으면 속으로 분노가 일고, 내면에서 마귀가 야단법석을 피워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관념에 맞지 않는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는데, 관념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무슨 뜻이냐? 분명 그들이 이 말씀들을 정죄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 말씀이 진리요,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의 도(道)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관념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구실이고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관념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에 대해 관념이 없느냐?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진리로 생각하며 받아들이느냐? 아니다. 많든 적든, 크든 작든 누구나 생각과 관념이 있고, 혹은 관점이 하나님 말씀과 충돌을 일으키고 모순을 일으킨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정상적인 이성이 있다. 이 이성은 그의 관념에 맞지 않는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보이는 태도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 이성은 그들에게 일러준다. ‘설령 내 관념에 맞지 않더라도 이건 하나님 말씀이야. 설령 내 관념에 맞지 않아서 듣고 싶지 않고, 내 생각에는 옳지 않고, 내 생각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 말씀들은 진리야. 천천히 받아들이다 보면 언젠가는 인식하고 내 관념을 내려놓게 될 거야.’ 네 이성은 너에게 우선 네 관념을 내려놓으라고, 네 관념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대신할 수 없다고 일러준다. 네 이성은 너에게 순종하는 태도, 정직한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야지, 관념과 자신의 관점을 품고 하나님 말씀에 맞서면 안 된다고 일러준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네 관념에 맞으면 받아들이면서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들을 수 있고, 네 관념에 맞지 않더라도 해결 방법을 구해서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합할 수 있다. 이것이 대다수 이성을 지닌 사람들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말하는 관념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관념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이 관념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히 상반되는, 사탄 성품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들이 관념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죄요, 모독이요, 조소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이런 평이한 인류의 언어는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성과를 내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관념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말의 정확한 뜻이다. 그렇다면 관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 말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냐? 사실 하나님에 대한 정죄요, 부인이요, 모독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5)> 중에서

적그리스도 무리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싫어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포하는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이 사실은 그들 마음속에 무척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류를 폭로하고 심판하는 말씀은 모두 이런 적그리스도, 악인들을 정죄하는 것이고 그들에 대한 정죄와 심판, 저주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속으로 견디기 힘들고 불편해한다. 그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은 다 나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있어. 그럼 나 같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겠네. 즉, 도태되고 버려져야 할 것들이지. 구원받을 희망이 없는데, 그럼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치만 사실상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성육신한 하나님이셔. 그리고 말씀도 정말 많이 하시고 따르는 사람도 이렇게 많은데, 이걸 어떡한담?’ 그는 이 일로 속을 끓이면서 자기가 얻지 못하면 남도 얻지 못하기를 바란다. 남들이 얻는데 자기는 얻지 못하면 그는 속으로 몹시 미워하고 기분이 언짢아한다. 그는 이 성육신이 하나님이 아니기를 바라고,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이 사역이 가짜이기를, 하나님이 한 게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의 마음은 평정을 찾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그는 생각한다. ‘만약 이 사람이 성육신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을 따르는 이 사람들은 다 속은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이 사람들은 언젠가는 흩어져야 해. 이들이 흩어지면 아무도 얻지 못하겠지. 그러면 내가 얻지 못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어?’ 그는 이런 마음이다. 자기가 못 얻으면 남들도 얻지 못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도 얻지 못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하고, 그리스도가 한 사역을 부정하고, 그리스도가 한 모든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정죄받지 않게 되고, 아무것도 못 얻어도 만족스럽고 편안하며, 그 일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본성 본질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관념이 없겠느냐? 관념이 있을 경우에는 해결하느냐?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의 관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그에게 관념이 생기기는 매우 쉽다. “당신이 말씀하실 때 나는 당신을 연구합니다. 당신이 그 말씀을 하게 된 동기가 뭔지, 그 말씀은 어디에서 온 건지를 봅니다. 당신이 어디서 들었거나 배운 겁니까, 아니면 누가 얘기하라고 시킨 겁니까? 누군가 당신에게 보고하고 일러바친 건 아닙니까? 누구를 폭로하는 것입니까?” 그는 이렇게 연구한다. 그렇다면 그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는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속으로 반발하고 있다. 그는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반발하고, 진리를 증오하며, 이러한 본성 본질을 가지고 설교를 듣기 때문에 그가 듣는 것은 이론과 도리를 제외하면 전부 관념이다. 어떤 관념이냐?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시는군. 때로는 우스갯소리도 하는데, 그건 경건하지 않아! 헐후어를 쓸 때도 있는데, 이것도 그다지 엄숙하지가 않고 말이야! 말씀하실 때 언변이 뛰어나지 않고, 수준도 높지 않아! 어떤 때는 말씀에 사용하는 표현을 보면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하던데 대학을 나온 거야 만 거야? 어떤 때는 어떤 대상을 겨냥해서 말씀하시는데, 누굴 두고 하는 말씀이지? 누가 고자질한 게 아닐까? 누가 얘기했을까? 그리스도는 말씀하실 때 왜 맨날 내 얘기만 하시지? 하루 종일 나만 응시하고 지켜보고 계신가? 하루 종일 사람 흠만 찾으시나? 그리스도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실까? 성육신이 말씀하실 때는 하늘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처럼 우레가 치는 것 같은 무게감이 없어. 그가 나타내는 것들은 어쩜 그렇게 사람 같을까? 사람이 맞아. 암만 봐도 사람이야. 성육신에게는 연약함이 있을까, 없을까? 속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실까? 사람과 교류할 때 처세술이 있을까, 없을까?” 이런 관념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머릿속으로 궁리하는 것은 하나같이 진리와 무관한 것들이고, 전부 사탄의 사상과 논리, 처세 철학이다. 그의 내면에는 사악함이 가득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내적 상태와 성품이 가득하다. 그는 하나님을 연구하러 온 것이지 진리를 구하고 얻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의 관념은 언제 어디서나 생겨날 수 있다. 그가 관찰할 때도 관념이 생기고, 연구할 때도 관념이 생기고, 판단하고 정죄할 때도 관념이 형성되는데, 그는 그것들을 한사코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가 성육신에게서 인성의 일면을 볼 때 관념이 생겨나고, 신성의 일면을 볼 때는 호기심과 경이로움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또 관념이 생겨난다. 그리스도,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는 순종도 아니고,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아니다. 그리스도 반대편에 서서 그리스도의 눈빛과 속마음, 행동거지를 관망하고 연구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표정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연구하며, 그리스도가 말씀할 때의 어조와 말투, 어휘 사용, 그리고 말씀이 가리키는 바와 같은 모든 것에 귀를 바짝 세운다.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관망하고 연구할 때, 그의 태도는 진심으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깨달은 뒤 그리스도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진리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이다. 그는 이 사람을 연구하려 한다. 이 사람을 낱낱이 연구해서 알아내려 한다. 연구해서 무엇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냐? 바로 이 사람이 과연 어디가 하나님 같은지 연구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 같으면 받아들이지만, 아무리 연구해도 하나님 같지 않으면 그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심정으로 성육신에 대해 계속 관념을 품은 채 놓지 않고 혹은 복을 받을 희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얼른 기회를 찾아 떠난다.

적그리스도에게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기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의 적그리스도 본질 때문에, 진리를 싫어하는 본질 때문에 그는 관념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때는 하나님 말씀을 받쳐 들고 보면서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다가도 성육신 하나님을 마주했을 때 첫눈에 하나님 같지 않으면 즉시 관념이 생기고 태도가 달라진다. 성육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 말씀만 받쳐 들고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으로 생각한다. 또 막연한 환상과 복받으려는 속셈을 품고 억지로 하나님 집에서 힘이나 좀 들이고 본분이나 좀 이행하면서 하나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을 만난 순간, 그의 머릿속은 온통 관념으로 가득해서, 설령 책망을 받지 않더라도 본분을 이행하려는 열의가 아마 크게 꺾일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과 성육신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한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과 성육신 하나님을 따로 떼어 놓은 채,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으로,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성육신 하나님이 자기 관념에 맞지 않을 때, 자신의 관념에 어긋날 때는 서둘러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강제로 자신의 관념을 억누르고, 자신의 관념을 봉쇄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으로 여겨 받든다. 마치 관념이 해결된 것 같지만, 사실 그의 내면에 도사린 그리스도에 대한 불복과 불평, 경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하는 일에서 계속해서 관념이 생기고, 더 나아가 관념을 한사코 붙잡고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다. 관념이 없을 때는 연구하고 분석하지만, 관념이 있을 때는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도 모자라 관념을 한사코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는 관념이 있어도 해결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자신이 옳다고 여긴다. 이런 자는 사탄에 해당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육신 하나님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에게 관념이 있을 때 드러내는 태도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3)> 중에서

하나님이 많은 말씀과 사역을 했지만 아무리 실제적인 말씀을 하고, 또 아무리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사람이 당장 깨달아야 하는 진리를 얘기해도 적그리스도는 아무 관심이 없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다. 게다가 하나님이 말씀할수록, 구체적으로 사역할수록 그는 속으로 더욱 반감을 품고, 초조해하고, 반발심을 품는다. 심지어 하나님을 정죄하고 모독하고 하나님에게 대들기도 한다. “당신의 전능함이 이 말씀 안에 있습니까? 당신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밖에 모르십니까? 말씀하시지 않으면 전능하지 않으신 겁니까? 당신이 전능하시다면 말씀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통해서, 진리 교제를 통해서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함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고 성품이 변화하게 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하룻밤 사이에 천사가 되고 당신의 사자가 되게 해 주신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전능하신 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적그리스도 본성이 조금씩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드러난다. 게다가 그들이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맞서는 본질도 낱낱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신분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멸시하는 그들의 이런 적그리스도 성품, 적그리스도 본질 역시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 사역이 부단히 진전됨에 따라 조금씩 드러나고 밝혀진다. 적그리스도는 막연함을 추구하고 이적과 기사를 보려 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실제에 맞지 않는 야심, 욕망의 지배를 받아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증오하는 그들의 본성이 빛 속에 드러난다. 반대로 진정으로 실제와 진리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역하고 말씀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본다. 그들이 본 것, 얻은 것, 인식한 것은 공교롭게도 적그리스도는 영원히 인식하지 못하고 얻지도 못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얻으려면 이적과 기사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적과 기사가 없이 그저 하나님 말씀에서만 생명을 얻고 진리를 얻어 성품 변화에 이르고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적그리스도에게 그런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고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들은 끈질기게 속으로 기다리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남다른 능력을 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전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숨은 뜻은 하나님의 전능이 존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욱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논리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정죄하고 하나님의 전능을 정죄한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1)> 중에서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성품 본질에 담긴 공의와 전능에 대해 전혀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고, 인식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하나님의 거룩함과 유일무이함을 믿고, 인정하고, 인식하기란 더더욱 힘들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고, 착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피조물이 되라고 할 때, 그는 마음속으로 의견이 생기고, 일종의 태도와 정서가 생겨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높고 크신 분 아닌가? 최고로 높으신 분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에게 하시는 요구도 당연히 고차원적이고 대범하고 품위가 있어야지. 난 그래도 하나님이 아주 신비하신 줄 알았는데 사람에게 겨우 그만한 요구를 하실 줄은 몰랐네. 그것도 진리라고 할 수 있나? 너무 간단한 요구잖아! 하나님 요구는 좀 더 높아야지. 사람은 초인이나 위인,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요구를 해야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사역일까? 사칭하는 건 아닐까?”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진리에 반감을 품는 동시에 진리를 모독하기까지 한다. 그건 진리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냐? 그는 하나님이 제시한 요구에 콧방귀도 뀌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빈정대고, 조롱하는 태도로 이를 정의하고 대한다. 이를 보면 적그리스도는 성품 본질이 추악해서 진실되고 아름답고 실제적인 사물이나 주장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은 진실되고 실제적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시한 요구는 사람의 필요에 부합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말한 ‘고차원적이고 대범하고 품위가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거짓되고, 허황되고,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패괴시키고, 사람을 미혹한다. 사람을 타락시켜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 하나님의 생명은 신실하고 사랑스럽고 실제적인 것이다. 한동안 하나님 말씀을 겪고 체험한 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만이 가장 사랑스럽고, 하나님 말씀만이 사람을 바꿀 수 있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고, 또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사탄, 적그리스도가 제시하는 ‘고차원적이고 대범하고 품위가 있는 것’에 관한 논조와 주장은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진실, 실제와는 어긋난다. 따라서 적그리스도의 이런 본질을 바탕으로 보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는 것도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폭로한, 사람의 각 방면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 사람의 강퍅함, 교만함, 사람의 간사함, 사악함, 진리를 싫어하는 것, 그리고 흉악한 성품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호된 질책, 적그리스도는 거기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스러움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속으로 하나님이 얘기한 그 말씀들을 싫어하고 반발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심판하고, 형벌하고, 폭로하는 그 말씀들을 볼 때마다 그는 속으로 미워하며 욕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 그를 교만한 사람, 강퍅한 사람이라고 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악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그 사람과 다투고 그 조상을 욕한다. 누군가 그의 패괴 본질을 폭로하고 그를 정죄하면 마치 목숨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그리스도가 이런 본질과 이런 패괴를 드러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집에서, 교회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별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립되고 드러난다. 종종 그의 야심과 욕망은 채워지지 않고, 그는 속으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증오하고, 또 ‘하나님 집은 진리가 다스린다’는 이 말씀을 더욱 증오한다. 네가 만약 이 말씀을 내뱉는다면 그는 너에게 필사적으로 덤빌 것이고, 너를 죽도록 괴롭히고 혼내 주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적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보여 주지 않겠느냐? 너무나 옳은 말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1)> 중에서

책망과 훈계를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전형적인 태도는 바로 죽어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악을 저지르고, 하나님 집 사역과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아무리 큰 손해를 끼쳐도 마음속으로 조금도 후회하거나 죄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을 볼 때, 적그리스도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절대 없다. 그가 하나님의 선민에게 입힌 여러 해악과 교회 사역에 가져다준 피해를 하나님의 선민은 모두 밝히 보았으며, 적그리스도가 악행이 많다는 사실을 보았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또한 끝까지 그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진리를 싫어하고 수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음에도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스럽게 군다. 여기에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집의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진리도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사탄의 종으로,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러 온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오직 명예와 지위뿐이다. 그는 자신이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 책임을 져야 할 테고, 그러면 그의 명예와 지위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대항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폭로하고 해부해도 그는 기를 쓰고 부인한다. 그가 고의로 부정하든,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든 여하튼 이런 모습에서 한 측면으로는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다른 한 측면으로는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명예와 지위, 이익을 몹시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반면, 교회의 사역과 이익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이겠느냐? 무책임하고 경시하는 태도이다. 그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다. 적그리스도가 책임을 미루는 데서 이런 문제들을 보여 주지 않느냐? 책임을 미루는 것은 한 측면으로는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그의 본성 본질을 보여 주고, 또 다른 한 측면으로는 양심과 이성이 없고 인성이 없음을 보여 준다.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이 그의 교란과 악행으로 인해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든 그는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어떤 존재겠느냐? 그가 조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래도 약간의 양심과 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이 정도의 인성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떤 존재겠느냐? 적그리스도 부류 사람의 본질은 바로 마귀이다. 하나님 집의 이익이 그로 인해 아무리 큰 손해를 입어도 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조금의 괴로움과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죄스러운 마음은 더더욱 없다. 이는 결코 정상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런 자가 바로 마귀이다. 마귀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다. 적그리스도는 나쁜 일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든, 교회 사역에 얼마나 큰 손실을 끼쳤든 인정하는 법이 없다. 인정하는 것은 곧 자기가 잘못했다는 의미라고 그는 생각한다. ‘내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영원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 나한테 잘못을 인정하라고 한다면, 그건 내 인격을 모욕하는 것 아니겠어? 설사 그 일이 나와 관련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저지른 건 아니야. 내가 주요 책임자도 아니고. 책임 소재를 묻고 싶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가란 말이야. 어쨌든 나는 그 잘못을 인정할 수 없으니까. 나는 그 책임을 떠맡을 수 없다고!’ 그는 잘못을 인정하면 정죄받을 것이며, 사형을 판결받아 지옥으로, 유황불 못으로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진실로 회개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교제해 주든, 그는 마음속 깊이 언제나 반발하고 힘겨루기를 하며 반항한다. 교체된 후에도 결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전혀 회개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10년 후에 그 일에 관해 언급해도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또 20년이 지나 그 일에 대해 언급해도 여전히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변명하고 변호까지 한다. 더 가증스러운 것은 30년이 지나도 그 일에 관해 말하면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을 위해 변명하고 변호하면서 “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인정할 수 없어요. 그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제가 책임질 필요는 없죠.”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느냐? 30년이 지났는데도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 내린 처분에 반발하는 태도를 갖고 있으며, 그동안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지난 30년을 어떻게 지내 왔겠느냐? 설마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고 자신을 반성하지도 않았겠느냐? 설마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지도 않았겠느냐? 설마 설교 교제를 듣지 않았겠느냐? 설마 생각도, 정상 인성의 사유도 없겠느냐? 그가 지난 30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30년이 지난 일인데도 그는 여전히 마음속에는 원한이 가득 차서 자신이 형제자매들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박하게 대하고 괴롭히며 일부러 애먹이고 자기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변화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의 마음은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적의와 반항, 대항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 그는 다른 사람이 그의 악행을 폭로하고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여 인격을 깎아내렸다고,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며 구하지 않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도 않았다. 또 회개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현재 그는 여전히 불복과 불만의 마음을 갖고 원통한 태도로 하나님께 해명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그 일을 밝혀 달라고, 그 일에서 대체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판가름해 달라고 한다. 심지어는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은 공의롭다는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고,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 잡고 하나님이 권세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부정하기까지 한다. 적그리스도에게 책망과 훈계가 임하면 마지막에 이런 결과가 나온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느냐? 그들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여기에서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3)> 중에서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데,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라고 하는 게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면 소에게 나무에 오르라고 하고 늑대에게 풀을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그것들을 힘들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때때로 늑대가 양 무리에 섞여 들어와 양들과 어울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울리는 척하면서 양을 잡아먹을 기회를 기다리는 것일 뿐 늑대의 본성은 영영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에게 진리를 실행하라고 하는 것은 늑대에게 양을 잡아먹는 본능을 버리고 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육식 동물인 늑대가 양과 여러 동물을 먹는 것은 변하지 않는 본성이다. 만약 누가 “저는 제가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진리를 교제하는 걸 듣기만 하면 속이 끓고 증오심이 생겨요. 누가 저를 책망, 훈계하면 저는 그를 더욱 증오하죠.”라고 말한다면 그는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누가 “무슨 일이 닥치면 당신은 순종하고 진리를 구해야 해요.”라고 하면 그는 “순종은 무슨! 잠자코 있어요!”라고 한다. 이건 대체 뭐 하는 인간이란 말이냐? 성격이 나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조차 못하게 한다. 네가 진리를 교제하자마자 그의 본성이 폭발하고 드러났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라는 말만 하면 그는 듣기 싫어한다. 어느 정도로 듣기 싫어하겠느냐? 그 말을 들으면 갑자기 흥분해서 고상함이고 뭐고 진상이 드러나는 것도 겁내지 않는다. 그 정도로 증오한다. 그럼 그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악인을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라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예비된 것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고 실행하라고 요구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가진,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극도로 적대시하는 사악한 자들은 영원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몇 년 믿든, 설교를 얼마나 듣든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진리를 많이 들으면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모두 사탄에 속하는 부류라서 그들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그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장이 하나님을 배반한 뒤 하나님이 천사장을 구원하려 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다. 그럼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은 그를 반공중으로 내친 뒤 그에게 지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했다. 그가 봉사를 마치고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되어 그를 멸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한마디라도 더 말씀하겠느냐?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 말씀하지 않겠느냐? 한마디로, 소용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라도 더 하는 것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영영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다. 바로 그런 것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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