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복받을 속셈과 사치스러운 욕망을 해결하는 방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많은 이가 평안과 이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이익이 없으면 믿지 않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입을 비쭉거리니, 너의 말이 어찌 너의 실제 분량을 대표하겠느냐? 아이의 질병, 가족의 입원, 농작물의 수확 감소, 가족의 핍박 등 평소에 벌어지는 피할 수 없는 가정의 변고, 즉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을 너는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부분 하나님을 원망하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너를 속였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너를 조롱했다고 원망한다. 너희 모두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느냐? 이런 일들이 너희 가운데서 드물게 발생한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온종일 이런 일들에 빠져 살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을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너희의 실제 분량은 너무나 작아서 그야말로 병아리만큼도 되지 않는다. 사업이 손해를 봐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도 원망하고, 심지어 집에 있는 병아리가 죽거나 외양간의 소가 병들어도 원망하고, 아들이 장가를 가는데 집에 돈이 없어도 원망한다. 접대하며 본분을 이행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도 원망한다. 너의 뱃속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어 때로는 그것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도 않으며, 기약 없이 부정적인 상태로 지낸다. 지금 닥친 이런 일들은 너의 미래나 운명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일어났을 일들이다. 그러나 너는 이 일들의 책임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고는 하나님이 너를 도태시켰다고 우긴다. 너의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정말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느냐? 오늘날 나를 따르는 너희에게 욥과 같은 시련을 준다면 단 한 명도 굳게 서지 못하고 다 넘어질 것이다. 너희와 욥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오늘날 내가 너희의 재산 중 반을 빼앗는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것이다. 내가 너희의 자녀를 거둬 간다면 길거리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욕할 것이고, 얼마 안 되는 네 생계의 길을 막아 버리면 하나님과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왜 그렇게 많은 말로 엄포를 놓았느냐며 너희는 무슨 일이든 저지를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너희는 참된 깨달음이 없고, 참된 분량 또한 전혀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받는 시련이 큰 것이다. 아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데 진정한 깨달음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의 천 분의 일도 안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깨닫고 이해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말고, 자신이 얼마나 참되게 실행할 수 있는지, 자신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실행으로 자신의 의지를 실현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너는 자신의 분량과 실행을 참답게 대해야지,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네가 진리와 생명을 얻을 수 있을지 여부는 결국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실행 3> 중에서
현재 많은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내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해.’라고 생각하며 이런 내적 상태로 살고 있다. 이는 복을 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된 것으로, 순전히 하나님이 내리는 상을 받기 위해, 그리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진리가 없으며, 틀림없이 글귀와 도리를 얼마간 이해한 것으로 곳곳에서 뽐낼 것이다. 이런 사람이 걷는 길이 바로 바울의 길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결같이 사역만 한다. 그는 사역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고, 틀림없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얻을 자격이 있고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생하고 전도하며 죽을 수 있는 사람, 목숨조차 돌보지 않는 사람, 또한 하나님이 맡긴 본분을 훌륭히 완수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하나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을 사람이며, 분명 면류관을 얻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상상하고 추구한 것이며, 바울이 걸은 길이다. 바울이 바로 이런 사상에 지배받아 사역하고 하나님을 섬겼다. 이런 사상과 속셈은 사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서는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지식을 갖추고 나면 남들보다 뛰어나고 관직에 나아가고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위를 얻으면 재능과 포부를 크게 펼치며 자신의 가업과 사업을 눈부시게 끌어올릴 수 있다고 여긴다. 이방인들은 모두 이런 길을 가지 않더냐? 이런 사탄의 본성에 지배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바울처럼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 앞에서 충성심을 보여야 해. 그러면 나중에 큰 상과 면류관을 얻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추구하는 것과 틀에 박힌 듯 똑같다. 그것들은 전부 똑같은 본성에 지배되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사탄의 본성을 갖고 있으면, 세상에서 지식을 추구하고 학문을 추구하고 지위를 추구하고 남들보다 뛰어나기를 추구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면류관과 큰 복을 얻기를 추구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분명 이런 길을 걸을 것이다. 아무도 이 사실을 바꿀 수 없으며 이는 자연법칙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어떻게 베드로의 길을 갈 것인가> 중에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지만 오로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재난을 피할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을 언급하면 그들은 입을 다물고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지루한 문제를 이해한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이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영에 관한 메시지를 들어도 건성으로 대할 뿐 보배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으며 더욱이 생명의 일부로 여겨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은 아주 간단하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복을 받는 것이다. 그 외에 그들의 목표와 전혀 무관한 일은 귀찮아하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 복을 받는 것이 가장 정당한 목적이며, 또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가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현재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의 상태가 이렇다. 그들의 목적과 속마음은 얼핏 들으면 아주 정당한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으며, 청춘을 바치고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심지어 오랫동안 외지에 나가 동분서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의 취미도 인생관도 바꾸고, 심지어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까지 바꾸지만,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바꾸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꿈을 경영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으며, 그 길이 얼마나 멀든, 얼마나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있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죽음까지 불사한다. 어떤 힘이 그들을 그토록 끊임없이 바치게 하는 것이겠느냐? 그들의 양심이겠느냐? 그들의 위대하고 고상한 인격이겠느냐? 사악한 세력과 끝까지 맞서겠다는 결심이겠느냐?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그들의 믿음이겠느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려는 충성심이겠느냐? 아니면 단 한 번도 사적으로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는 그들의 희생정신이겠느냐?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심혈을 쏟아붓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니, 그야말로 대단한 기적이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바쳤는지는 차치하자. 그들의 행위만 해도 자세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그토록 많은 대가를 치를 수 있다니, 거기에 사람과 밀접한 이익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겠느냐?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우리는 지금껏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노골적인 이익 관계, 그러니까 복을 받는 자와 복을 베푸는 자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는 피고용인과 고용인의 관계다. 피고용인의 수고는 오직 고용인이 주는 품삯을 받기 위함이다. 이런 이익 관계에는 애정은 없고 거래만 있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없고 베풂과 연민만 있다. 또 이해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참는 것과 기만하는 것만 있으며, 친밀한 관계는 없고 영원히 넘을 수 없는 깊은 골만 있다. 상황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누가 이 흐름을 되돌릴 수 있겠느냐? 또 이런 관계가 위험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확신컨대, 모두가 복을 받는 기쁨에 도취되어 있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처럼 난감하고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은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류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자기 경영을 하면서 하나님의 경영을 등한시한다는 사실이고, 가장 크게 실패한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꿈꾸는 종착지를 구상하고, 어떻게 해야 가장 큰 복과 가장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령 모든 사람이 비참하고 가증스럽고 가련한 자신의 모습을 알았다 해도, 자신의 꿈과 소망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스스로를 위해 계산하지 않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느냐?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그의 경영을 완성하는 데 긴밀하게 협력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 몸과 마음을 쏟아붓는 사람이다. 날마다 하나님께 두 손을 내밀며 구걸하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얼마간 헌신하고 빚을 받아 내려는 사람은 더더욱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얼마간 바친 뒤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기대 살아가려는 사람을 증오하고,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늘에 올라가 복받는 일에만 관심 있는 냉혈 인간을 증오한다.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기회를 틈타 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은 더더욱 증오한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경영 사역을 통해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사역하는 틈을 타 복을 받을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은 채 자기 앞날과 운명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 반감을 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경영 사역 밖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기억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으며, 더욱이 좋아하지도 않는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부록 3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 안에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중에서
너희의 추구에는 개인의 관념, 기대와 미래에 대한 것이 너무나 많다. 현재 이렇게 사역하는 이유는 바로 지위에 대한 너희의 마음과 사치스러운 욕망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그러한 기대와 지위, 관념은 모두 전형적인 사탄 성품을 대변한다. 사람의 마음에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탄의 독소가 사람의 사상을 좀먹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종일관 사탄의 그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하여 죄 속에서 살면서도 죄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사람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맞게 마련해 주셔야 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하는 거야. 어떤 사람보다도 지위가 높고 앞날이 밝아야 해.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축복을 주셔야 해.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잖아.’라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생존의 토대가 된 사상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좀먹어 사람을 간사하고 나약하며 비열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은 끈기도,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탐욕스럽고 거만하게 변했다. 자신을 초월하려는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이 흑암 권세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용기는 더더욱 없다. 사람의 사상과 삶은 썩어 문드러졌고, 이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 관점 또한 추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관점에 대해 말하자면 그야말로 듣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사람은 모두 나약하고 무능하며 비열하고 연약하다. 흑암 권세에 대해 어떤 증오심도 느끼지 못하고, 광명과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쫓아낸다. 현재 너희의 사상과 관점도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을 믿는 이상 복을 받아야 하고,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아야 하며, 믿지 않는 사람보다 높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관점이 너희 내면에 자리 잡은 건 1~2년의 일이 아니라, 이미 꽤 오래되었다. 너희는 장삿속이 아주 발달했다.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지위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한 채 계속 바득바득 ‘추궁’하고 있다. 게다가 매일같이 관찰하며, 언젠가 지위도, 명예도 모두 잃게 되지 않을까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은 안락을 탐하는 마음을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 … 네가 이렇게 추구할수록 얻는 것이 없다. 지위에 대한 욕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큰 책망을 받고, 더 큰 연단을 겪게 된다. 그런 사람은 너무나도 무가치하다! 많은 책망과 심판을 받아야만 철저하게 내려놓을 수 있다. 너희가 이런 식으로 추구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생명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변화할 수 없고,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너는 자신의 변화와 진입을 추구하기보다는, 언제나 사치스러운 욕망이나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가까이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중시하고 있다. 그런 것들이 너를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너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네가 추구하는 목표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이 기회에 세상으로 돌아가 한바탕 크게 하고 싶은 일을 벌이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헛되이 시간만 보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굳이 너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가 있겠느냐? 아름다운 세상에서 무엇인들 누릴 수 없겠느냐? 재물과 미인, 지위, 허영, 가정, 자녀 등등 이 모든 세상의 산물이 전부 네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것들이 아니더냐? 무엇 하러 여기에서 편히 쉴 곳을 찾아 헤매느냐? 인자도 머리 둘 곳이 없거늘, 네게 어찌 안락한 곳이 있겠느냐? 아무렴 그가 네게 안락하고 좋은 쉼터를 마련해 주겠느냐?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오늘날 네가 내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심판과 진리의 가르침뿐이다. 너는 내게서 안락을 얻을 수 없고, 오매불망 바라는 안락한 거처도 얻을 수 없다. 나는 네게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지 않는다. 네가 진심으로 추구한다면 나는 네게 모든 생명의 도를 줄 것이고,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누리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진심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게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갈 것이다.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안락을 탐하는 개돼지 같은 자들에게 줄 생각이 없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너는 왜 부각물이 되기 싫어하느냐?> 중에서
너희는 종착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매우 진지하게 대하고, 개개인 모두가 종착지에 관한 일에 특별히 민감하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해서라도 좋은 종착지를 얻고 싶어 한다. 나는 너희의 간절한 마음을 알고 있으니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다. 너희는 그저 자신의 육체가 재난에 빠지지 않고, 더욱이 자신이 이후에 영원한 징벌에 떨어지지 않으며, 좀 더 자유롭게, 좀 더 안락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종착지를 언급하면 특히 관심을 기울이며, 자칫 부주의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 그에 따르는 보응을 받게 될까 봐 매우 두려워한다. 게다가 너희는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서라면 굽실거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능구렁이 같던 자들도 종착지를 위해 갑자기 매우 성실해지고 온순해지는데, 그 성실한 모습은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어찌 됐든, 너희의 마음은 다 ‘정직’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망이든, 기만이든, 충성심이든 너희 마음속 비밀을 하나도 숨김없이 내게 털어놓았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너희는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적인 것들을 내게 솔직하게 ‘고백’했고, 당연히 나 역시 그러한 것들을 피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익숙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최후의 종착지를 위해서라면 불바다라도 뛰어들려고 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머리카락 한 올 바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너무 교조주의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너무 충성심 없이 대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간단히 설명을 하겠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진리와 생명, 사람됨의 원칙이 아니고, 내가 심혈을 기울인 사역은 더더욱 아니며, 너희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재물, 지위, 가정, 혼인 등등)이다. 너희는 내가 하는 말과 사역에 대해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두 글자로 너희의 믿음을 개괄하겠다. 그것은 바로 ‘건성’이다. 너희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달성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충성하고 상대적으로 진지하게 대한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지극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데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너희 가운데 실패한 사람이 많지 않으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데 성공한 것은 그 자신의 행한 바 때문이고,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 역시 사람의 행위로 초래된 것이지, 결코 다른 요인의 영향 때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일보다 더 어렵고 힘든 그 어떤 일도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해낼 것이고, 매우 진지하게 대할 것이며, 심지어 그 어떤 오차도 원치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너희 개개인이 자신의 생활을 위해 부단히 기울이는 노력이다. 심지어 너희는 자신의 혈육 중 누구도 속이지 않으면서 나의 육신을 속이는 짓도 해낼 수 있다. 이것이 너희의 일관된 행위이자 처세 원칙이다. 너희는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서, 아름답고 이상적인 종착지를 위해서 여전히 거짓된 모습으로 나를 속이고 있지 않느냐? 나는 너희의 충성심이 일시적인 것이고, 성실함도 일시적인 것임을 알고 있다. 너희의 의지와 대가도 잠깐 반짝이다 사라지는 것 아니더냐? 너희는 오로지 마지막 한 번의 노력으로 있는 힘을 다해 아름다운 종착지를 쟁취할 생각만 한다. 너희의 목적은 교환하는 것일 뿐, 진리에 부응하는 것도, 더욱이 나의 대가에 보답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머리를 써서 얻으려고만 할 뿐 노력으로 밀어붙일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본심 아니더냐? 스스로를 위장하지 마라. 더욱이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식음을 잊고 밤잠을 설칠 정도로 머리를 쥐어짜지도 마라. 결국 너희의 결말은 정해진 것 아니겠느냐? 너희는 솔직하고 당당하게 각자의 본분을 잘 이행하되, 어떠한 대가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너희가 말했듯이, 그날이 되면 하나님은 그를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그 누구도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신념은 간직할 만하며 또한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내가 너희에 대해 안심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너희에 대해 영원히 안심할 수 없고, 너희를 영원히 싫어할 것이다. 너희가 양심에 따라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나의 사역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나의 복음 사역을 위해 평생의 정력을 바친다면, 내 마음이 항상 너희로 인해 기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내가 너희에 대해 완전히 안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저 내가 바라는 것들 가운데 초라한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애석할 따름이다. 그러니 너희가 무슨 낯으로 나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느냐?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종착지에 관하여> 중에서
어떤 사람은 리더 직무에서 교체된 다음, 상부에서 앞으로는 더는 그를 양성하거나 쓰지 않겠다는 말에 무척 괴로워하며 통곡하기 시작한다. 마치 도태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이냐? 다시 너를 양성하거나 쓰지 않는 것이 네가 도태되었다는 뜻이냐? 네가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냐? 명예와 이익, 지위가 정녕 너에게는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이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잃었을 때 스스로를 반성하고 진정으로 뉘우쳐야 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슬퍼하고 통곡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속으로 자신이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아서 하나님 집에서 교체된 것임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 집에서 앞으로 다시는 너를 발탁하거나 쓰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끄러워해야 하고, 하나님에게 죄스럽고 미안하게 생각해야 하고, 자신이 하나님에게 쓰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나마 조금은 이성적인 것이다. 하지만 너는 하나님 집에서 더 이상 너를 양성하거나 쓰지 않겠다는 말에 소극적이 되고 괴로워한다. 이것은 네가 추구하는 것이 명예와 이익, 지위라는 뜻이고,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너는 복받으려는 마음이 그토록 강하고, 지위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면서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 않으니 교체되어 마땅하다. 너는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반성해야 하고,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지위와 명예, 이익을 추구하는 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될 것이고, 만약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면 하나님이 내리는 징벌도 받을 것이다. 너희도 이런 문제가 있지 않으냐? 지금 너희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한다면 너희는 괴롭겠느냐? (괴롭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부 리더가 자기를 두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하자, 자신이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게 분명하고, 복받을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괴로웠지만 그래도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은 그래도 조금은 이성적이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말에 소극적이 되어 본분도 이행하지 않으려 했다. ‘나보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하는데 그럼 복받을 희망도 사라진 것 아닌가? 앞으로 내가 복받을 일은 없겠구나. 그럼 더 믿을 필요가 있을까? 나한테 봉사하라고 해도 안 될 걸. 누가 당신한테 공짜로 힘을 써 준대?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아나!’ 이런 자가 양심과 이성이 있느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많이 받고도 갚을 줄 모르고, 약간 봉사하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자는 끝이다. 끝까지 봉사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에게 참된 믿음도 없다. 바로 불신파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진심이 있고 참된 믿음이 있다면, 너에 대한 어떤 평가도 네가 더욱 참되고 정확하게 자신을 인식하도록 해 줄 뿐이니 너는 그것을 바르게 대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일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설령 복을 받을 수 없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끝까지 봉사하려고 해야 한다. 원망 없이 기꺼이 그렇게 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 지배에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복을 받고 화를 입는 일은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렸고,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는 것으로, 사람이 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사람이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 있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나님 요구에 따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하나님은 각자가 행한 바에 따라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그만한 진심이 있고, 자신이 다해야 할 본분에 최대한 힘을 바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고 심지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하나님 손에서 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건 너무나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만약 네가 스스로가 충분히 잘하지 못한 것 같고 힘은 많이 썼지만 원칙대로 일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하나님께 죄송스러운데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고 은총을 베풀어 준다면 그것은 특별한 은혜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고자 한다면 그건 어느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다. 너는 네가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판단해서 너란 사람은 진심이 있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은총을 베풀고 축복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한 이 모든 일은 틀릴 리 없고, 너는 하나님의 공의를 찬미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 모두 옳으니, 설령 네가 하나님이 한 일에 관념이 있어도, 하나님이 한 일이 사람의 뜻에 부합하지 않고 네 뜻에 맞지 않아도 너는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어째서 이렇게 해야 하느냐? 너희는 그 이유를 모른다. 그렇지 않으냐? 그건 사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데, 그는 하나님이고 너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에게 어떻게 해 달라고, 너를 어떻게 대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에게 요구할 자격이 있다. 복과 은총, 상, 면류관 등,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내려 주고 누구에게 내려 줄지는 하나님이 결정한다. 왜 그런 것이냐? 그건 모두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이지, 인류와 하나님이 똑같이 나눠 가지는 공동 재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약속한 사람에게 내려 준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더라도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너는 피조물이 아니란 말이냐?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이냐? 하나님이 여전히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분, 지위, 본질과 사람의 신분, 지위, 본질, 이 둘 사이에는 영원히 등호가 성립될 수 없고, 영원히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고,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다. 사람이 이 일을 알 수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다. 그것 말고 선택할 수 있는 제2의 길은 없다. 네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패역이고, 네가 따지고 반항한다면 그것은 대역무도이다. 너는 멸해져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사람은 그런 태도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피조물이 갖춰야 할 태도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2조 복받을 희망이나 지위가 없으면 물러나려 한다> 중에서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는 법이 없고, 시종일관 자신의 본분, 명예, 이익, 지위를 복받을 희망이나 훗날의 종착지와 긴밀하게 연관 짓는다. 마치 그의 명예와 지위를 잃게 되면 복받거나 상받을 희망이 사라지고, 자기 목숨을 앗아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조심해야겠어. 경솔하게 굴면 안 돼! 하나님 집, 형제자매들, 리더 일꾼,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믿을 수 없어. 모두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사람한테 가장 믿음직하고 신뢰할 만한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야. 스스로를 위해 계산하지 않는다면, 누가 남을 생각해 주겠어? 또 누가 남의 앞날을 생각해 주겠어? 남이 훗날 복을 받을지 말지를 누가 생각해 주겠어? 그러니까 난 스스로를 위해 세심하게 계획하고 계산해야지. 실수해서도 조금이라도 경솔히 굴어선 안 돼. 그러다가 이용당하면 어떡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집의 리더 일꾼을 경계하고, 다른 사람이 그를 분별하고 간파해서 교체할까 봐, 복받으려는 꿈을 망쳐 놓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는 명예와 지위를 반드시 지켜야 복받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복받는 일을 하늘보다도, 목숨보다도 크게 생각하고, 진리 추구나 성품 변화, 구원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본분을 잘 이행하거나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 구원을 받는 일을 다 사소한 일, 언급할 가치도 없는 하찮은 일로 생각하고, 복받는 일만 평생에 영원히 잊지 못할 일로 여긴다. 어떤 큰일이나 작은 일이 닥치든 복받는 것과 연관 짓고 조심하고 신중하며 자신을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둔다. 그래서 본분이 조정될 때, 만약 직급이 올라가면 적그리스도는 자신에게도 복받을 희망이 있다고 여긴다. 만약 직급이 내려가면, 팀장에서 부팀장이 되거나 부팀장에서 보통 멤버가 되면,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고 복받을 희망이 묘연하다고 예감한다. 이런 관점은 어떠하냐? 올바른 관점이냐? 절대 아니다. 이런 관점은 너무나 황당하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사람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는지, 충성을 다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2조 복받을 희망이나 지위가 없으면 물러나려 한다> 중에서
복받기를 추구 목표로 삼은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이는 진리를 완전히 위배한 것이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복받는 것이 정당한 추구 목표가 아니라면 정당한 추구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여 하나님의 모든 배치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추구 목표이다. 예를 들어, 너는 책망과 훈계가 닥쳤을 때 관념과 오해를 가지며 순종하지 못한다고 하자. 어째서 순종하지 못하겠느냐? 네 종착지나 복받으려는 꿈이 도전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고 괴로워하며, 본분을 내팽개치고 이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네 추구에 문제가 있어서이다.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서둘러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급선무이다. 너는 “나는 본분을 내팽개칠 수 없어.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복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아야 해.”라고 말해야 한다. 복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걸으면 한결 홀가분해지는데 소극적인 상태에 빠질 리 있겠느냐? 설령 가끔 소극적인 상태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그 일에 속박받지는 않을 것이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기도하고 싸우면서 네 목표를 복받는 것과 종착지를 추구하는 것에서 진리 추구로 바꿀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진리 추구는 피조물의 본분이야. 오늘 나는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으니 가장 큰 수확을 얻은 거야. 이건 무엇보다 큰 복이야. 하나님께서 나를 원치 않으신다고 해도, 좋은 종착지가 없고 복받을 희망이 사라진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거야. 이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무슨 이유든 내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는 데 지장을 줄 수는 없어. 이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내 원칙이라고.’ 이러면 육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그런데도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면 어떻게 하죠?”라고 말하는데, 그럼 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소극적인 상태에 몇 번을 빠지든 계속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데 신경 쓰고, 진리에 공을 들이면 소극적인 상태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면 언젠가 너는 복받으려는 욕망이 사라지고 종착지나 결말에 속박받지 않으며, 이렇게 사는 것이 한결 홀가분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온종일 복과 종착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피곤하게 살았을 것이다. 매일 복을 받기 위해 말하고 사역하며 머리를 쥐어짰는데, 그렇게 해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가장 좋은 시간을 의미 없는 일에 낭비했으니 결국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하고 어떤 체험 간증도 말하지 못해 웃음거리가 되고, 철저히 창피를 당하고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이겠느냐? 복받으려는 속셈이 너무 강하며, 종착지와 결말이 네 마음을 점령하여 너를 강하게 얽매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앞날과 운명의 결박에서 빠져나오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생명 진입이 점점 깊어져서 성품 변화가 생길 때 완전히 내려놓게 된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실행해야 생명 진입이 있다> 중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추구하는 것은 다 나중에 복을 얻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러한 속셈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있는 패괴된 것들은 반드시 시련과 연단으로 해결받아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정결케 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패괴 표출이 있다면 반드시 그 부분에서 연단을 받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안배이다. 하나님은 환경을 마련해 네가 그 환경 속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자신의 패괴를 알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놓고 말하면 몇 년간의 연단과 어느 정도의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사람은 생각과 마음속에서 패괴된 육체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탄 본성에 통제되는 부분이 있고, 자신의 욕망과 요구가 있다면 그 부분에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 오직 고난 속에서만이 공과를 배울 수 있다. 즉, 진리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수많은 진리는 다 고난과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다. 편안하고 순탄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은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인해 고난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이상 하나님의 형벌도 누려야 한다. 이런 것들을 모두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깨우쳐 준 것을 체험할 수 있고,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고 심판한 것도 체험할 수 있다면, 너는 전면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심판 사역도 하고 형벌 사역도 했으며 말씀으로 너를 책망한 적도 있지만, 너를 깨우쳐 주었고 빛을 비추어 주었으며, 네가 소극적이 되어 연약해졌을 때도 너를 염려하였다. 하나님은 이 모든 사역을 통해 너에게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고난받는 것,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 또는 육체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로우며 편안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가져야 할 목적이 아니다. 네가 이렇게 믿고 있다면 너의 관점은 바르지 않은 것이며, 너는 절대로 온전케 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기묘함과 난측함에 대해 알아야 한다. 또한 이런 인식을 통해 네 마음속에 있는 개인적인 요구와 소망, 관념을 없애야 한다. 이런 것을 없애야만 하나님이 요구한 조건을 갖출 수 있고, 이것을 통해서만 생명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이 요구한 성품으로 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격 없는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통해 그의 행사와 영광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옳은 관점이자 네가 추구하는 목표여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관점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실제 행사를 보고, 하나님이 우주 전체에서 행하는 기묘한 행사와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실제적인 사역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실제 체험을 통해 그가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 사람에 대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하기 위함이다. 네 안의 불결하고 불의한 것을 벗어 버리고 너의 옳지 못한 속셈을 버리며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참된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를 믿지 않는다면 그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이왕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흐리멍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받을 수 있겠다 싶으면 바로 열의가 생겨나고, 연단받는 것을 보면 바로 열의가 사라지는 이들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으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고, 수많은 종교 관념을 버리지 못하며, 개인적인 이익을 놓지 않고, 육적인 복이 내리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너의 육과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한다면, 이는 전부 관점이 바르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육적인 이익만 추구할 뿐,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종교 신앙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이는 전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겠다는 마음과 자기를 버리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이 두 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고, 성품이 변화될 수도 없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사람의 본분은 사람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과 무관하다. 본분은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천직이므로 보수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하고 이유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이라 할 수 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심판받은 후 온전케 되어 누리는 복을 말하고, 화를 입는다는 것은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거친 후에도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해, 즉 온전케 되지 못해 받는 징벌을 말한다. 그러나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사람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너는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해서도 안 되고,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워 본분 이행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한마디 하겠다.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이고,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패역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피조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고, 선택의 여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과 소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옳은 추구 방식이다. 네가 추구하는 것이 진리이고 실행하는 것이 진리이며 얻은 것이 성품의 변화라면, 너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네가 추구하는 것이 육적인 복이고, 실행하는 것이 자신의 관념 속 진리이며, 성품에 어떤 변화도 없고 육신의 하나님께 전혀 순종하지 않은 채 여전히 막연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면, 네가 추구하는 것은 반드시 너를 지옥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것은 네가 실패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온전케 될지, 도태될지는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종착지와 운명은 둘 다 너희에게 매우 중요하며, 또한 너희와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다. 너희는 경솔하게 일을 하면 종착지가 없어지고 자신의 운명을 망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종착지를 위해 바친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다면 그런 노력은 허상과 기만일 뿐 진심이 아니며, 만약 그렇다면 종착지를 위해 노력을 바친 자는 결국 마지막 실패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너희는 생각해 보았느냐? 하나님을 믿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모두 기만 때문이다. 말했듯이, 나는 사람이 나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아부하거나 열성적으로 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정직한 사람이 나의 진리와 기대를 마주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이 나의 마음을 극진히 보살피고 나아가 나를 위해 전부를 바치는 것을 더 좋아하며, 그렇게 해야 나의 마음이 위로받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 너희에게는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얼마나 있느냐? 내가 기뻐하는 것들은 또 얼마나 있느냐? 설마 너희가 종착지를 위해 행한 온갖 추태를 발견한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냐?
나는 적극적으로 발전하려고 하는 그 누구의 마음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며 충성을 다하려는 의욕은 더더욱 꺾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너희 개개인의 부족한 부분과 내면 깊은 곳의 더러운 영혼을 일깨워 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그저 너희가 진심을 바쳐 나의 말과 마주하길 바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람이 나를 기만하는 것을 제일 혐오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나의 마지막 단계 사역에서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또한 모두 일편단심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치길 바랄 뿐이다. 물론 나는 또 너희 모두가 좋은 종착지를 갖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에게도 바라는 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최선의 선택을 하여 너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충성심이자 마지막 충성심을 나에게 바치는 것이다. 유일한 충성심도 없는 자라면 틀림없이 사탄이 아끼는 자일 테니, 나도 더 이상 남겨 두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 그의 부모가 돌보도록 하겠다. 내가 하는 사역은 모두 너희에게 큰 도움이 된다. 내가 너희에게서 얻고 싶은 것은 정직하게 발전하려는 마음이지만 지금까지 나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여전히 빈손이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아라. 어느 날 내가 여전히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면 너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겠느냐? 계속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겠느냐? 내 마음이 계속 이렇게 평온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무진 애를 써서 농사를 지었으나 낟알 한 알 거두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느냐?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느냐? 희망을 가득 품었지만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지게 된 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 격노한 자가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느냐? 적대시되고 기만당한 자의 불타는 복수심을 아느냐? 너희가 사람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태도로 사람에게 보응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너희 모두가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길 바란다. 다만 속임수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너희에게 실망할 것이다. 이러한 실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그렇게 되면 너희는 스스로를 우롱한 것 아니겠느냐? 종착지를 생각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종착지를 망치는 자는 가장 구제 불능이다. 그런 자가 곤경에 처해 허둥댄들 그 누가 가엾이 여기겠느냐? 어쨌든 나는 너희를 축복하여 모두에게 적합하고 아름다운 종착지가 있기를 바라며, 더욱이 너희 모두가 재난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종착지에 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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