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부모님의 길러주신 은혜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저는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경작으로 생계를 유지하셨습니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부모님은 건강이 안 좋으셨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양쪽 다리가 다 아프셔서 심할 때는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나가셨습니다. 그때 부모님은 늘 저와 누나에게 이렇게 잔소리하셨습니다. “나중에 커서 효도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아. 우리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했듯이 너희도 나중에 커서 그렇게만 하면 된다.” 그때 전 어려서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이를 길러 노후를 대비한다는 사상이 서서히 제 머릿속에서 생겨났습니다. 부모님이 우리 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지를 보면서 저는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 ‘크면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고, 좋은 삶을 살게 해 드려야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직장 생활을 하며 돈을 벌었고, 부모님께 옷도 사드리고, 병을 치료하시라고 치료 기기도 한 대 사드렸습니다.
2009년, 저희 가족은 모두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고, 저는 곧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게 됐습니다. 한 번은 부모님께서 예배드리러 가시다가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셨습니다. 경찰은 아버지를 심문하면서 제 행방을 캐물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체포와 박해를 피하고자 저는 집을 떠나 타지에서 본분을 이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몇 년간은 부모님이 크게 걱정되지 않았습니다. 두 분 모두 하나님을 믿고,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이행하셨기 때문에 저는 비교적 마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2017년은 저에게 아주 특별하고 잊지 못할 해였습니다. 한 동역자 회의에서 한 자매로부터 아버지의 고질병이 재발해서 그 병으로 인해 침대에 누운 채로 마비되시고, 말도 못 하게 되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저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속으로 ‘내가 집을 떠날 땐 아버지가 괜찮으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신 걸까? 아버지가 마비되셨다는데, 어머니 혼자 감당하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 마비된 아버지를 돌보고, 약과 물을 챙겨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체포와 박해 앞에서 저는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앞으로 와서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마비되셨다는 소식에 제 마음이 너무 약해졌습니다. 부디 제가 이 모든 것에 직면할 수 있게 믿음과 힘을 주세요. 지금은 중국 공산당의 체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가정의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온전히 맡기오니 제 마음을 보살펴주시어 제가 이런 환경에서 굳게 설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 후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습니다. 저녁이 되어 침대에 눕자 머릿속은 온통 아버지가 마비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 거동을 못 하시는 장면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시절, 한 해 겨울방학에 집에 돌아오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날은 눈이 내렸습니다. 저는 짐가방을 메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산길을 걸었고 몇 리를 더 걷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춥고 배고파 정말 움직일 수 없어서 무리에서 낙오되었습니다. 저희 마을의 친구들이 먼저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께 알렸고 아버지는 저를 데리러 오셔서 저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떠오르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스스로 생활하실 수 없고, 그다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언젠가 정말 돌아가신다면 어머니 혼자 어떻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시겠습니까? 친척이나 이웃들은 더더욱 비웃을 것이고, 분명 저더러 불효자라고 말하고, 아버지가 마비되었는데도 보러 오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저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비난을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정말 위험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돌보러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돌아갔다가 체포되어 아버지도 돌봐드리지 못하고 어머니께 더 큰 부담만 안겨드릴지 걱정되어 그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 후 편지로 집의 상황을 물었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어머니로부터 답장을 받았는데, 이미 반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는 속으로 정말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기르시려고 많은 심혈을 기울이시며 대가를 치르셨는데 아버지가 늙으시고 마비되셨을 때 저는 일말의 효도도 다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가시는 임종도 지키지 못하다니. 다들 자식을 길러 노후를 대비한다는데 나는 아들의 책임도 다하지 못했구나. 난 정말 불효자야!’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아버지가 마비로 침대에 누워 혼자 생활하지도 못하시고 어머니가 매일 아버지를 보살피시면서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신 것도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도 정말 많이 고생하셨는데, 이제 어머니는 혼자가 되셨으니 더는 어머니를 고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돌아가서 어머니를 돌봐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속으로 정말 고민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마음이 전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옳고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런데 왜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사람은 원칙 없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대하는 방법은 진리와 관계가 있다. 만약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네게도 잘한다면 너는 효도하겠느냐? (효도할 것입니다.) 어떻게 효도하겠느냐? 형제자매와 다르게 대한다면,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며, 부모가 나이가 들면 곁에서 돌봐 주면서 본분을 이행하러 가지 않는다면, 이러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럴 때는 상황을 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집 근처에서 본분을 이행하여 부모를 돌볼 수 있고 부모도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자식의 책임을 다해 부모의 일손을 도와주면 된다. 부모가 병에 걸리면 돌봐 주고, 부모에게 힘든 일이 있다면 위로해 주어라. 또 경제적인 여건이 된다면 적당히 영양 보조 식품을 사 주어라. 하지만 네가 본분으로 바쁜데 부모를 돌봐 줄 사람이 없다면, 또 부모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는 어떻게 선택해야겠느냐? 네가 실행해야 할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책임이나 의무에 불과한 이상, 네 의무가 본분과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본분을 위주로 하고, 본분을 일 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의무가 꼭 본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분 이행을 선택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지만,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진리 실행이 아니다. 만약 조건이 된다면 그 책임과 의무를 이행해도 되겠지만, 당장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저는 본분을 이행하러 가야 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겁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만, 진리 실행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본분을 위주로 하고 본분을 지켜야 한다. 만약 지금 네가 본분이 없고 외지에서 사역을 하지도 않으며 부모 곁에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부모를 돌봐 주며 최선을 다해 부모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고 덜 고생을 하게 해도 되지만, 그것도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봐야 한다. 만약 부모가 인성이 좋지 않고, 늘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가로막고,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네가 실행해야 하는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그들을 저버려야 합니다.) 이럴 때는 저버려야 한다. 너는 의무를 다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네게는 그들에게 효도할 어떤 의무도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한 가족이고 너의 부모겠지만,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너희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그들은 사탄을 신봉하고 마왕을 받들며 사탄의 길을 걷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고, 한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적이나 원수로 여기니 네게는 그들을 돌봐 줄 의무가 없다. 그들을 철저히 저버려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 중 어떤 것이 진리겠느냐? 당연히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단순히 의무를 다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부탁이 있는데 그것은 네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 책임은 진정한 책임으로, 창조주 앞에서 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창조주의 요구이자 인생의 큰일이기도 하다. 반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그저 자식의 책임이자 의무일 뿐, 절대 하나님의 부탁이 아니고, 나아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오직 본분을 이행하는 것만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진리이고, 천직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사람에게 효도하는 것으로, 본분 이행에도, 진리 실행에도 속하지 않는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 실제란 무엇인가> 중에서), 『네가 어떻게 행동하든, 혹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획하든 그런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피조물이든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지, 진실로 믿는지 하는 점이다. 어떤 부모는 그런 복과 운명이 있어서 자손이 번창하고 천륜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재이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복이다. 반면 어떤 부모는 그런 운명이 없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안배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옆에서 지켜 주고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는 그런 복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배치로, 사람이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찌 됐든 결론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은 최소한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환경이 허락하고 여건이 된다면 효도해도 된다. 환경이 허락하지 않고 여건도 되지 않는다면 무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뭐라고 하겠느냐? (순종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한다. 이 순종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순종의 근거는 무엇이냐?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 실제란 무엇인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자 의무에 불과하며 긍정적인 사물에 속하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신 바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일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충돌할 때는 자신의 형편에 따라 실행해야 합니다. 상황이 허락하고 본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부모님을 돌보며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기도 바쁘다면 피조물의 본분 이행을 우선순위로 두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 입장에서 보면 어떤 부모는 자손이 많아 가족과 함께하는 단란한 복을 누리지만, 어떤 부모는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주지 않으시어 그런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이끄심으로 제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제가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는 힘이 닿는 한 부모님을 보살펴 드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 공산당의 핍박과 체포로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고, 게다가 저도 해야 하는 본분이 있으니 그러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합니다. 제 이기심으로 본분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 후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어머니가 예배드리던 중 자매 셋과 함께 체포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경찰이 심문할 때 어머니는 사탄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자매 두 명의 이름을 얘기했습니다. 풀려난 후 어머니는 깊이 후회하며 오랫동안 침체된 상태로 지내셨습니다. 그 후 어머니는 실수로 위층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셨습니다. 편지를 보는 제 마음은 이미 집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머릿속은 온통 어머니가 넘어지신 장면과, 아파하시는 모습뿐이었습니다. 마음이 정말 착잡했습니다. 또 3개월이 흘렀고,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허리가 다 나았다면서 이번에 넘어진 덕분에 정신을 차렸고, 진리를 구하고 스스로 반성하기 시작했다면서 그릇된 내적 상태에서 빠져나왔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 하나님을 향한 오해 속에 살았을 것이라며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를 보고 저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환경에는 하나님의 애쓰신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말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각의 필요와 부족함에 따라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2022년 10월 말, 어머니가 형제자매를 접대하여 같이 예배를 드리다가 갑자기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찰이 복음 집사의 휴대전화와 하나님 말씀 서적이 담긴 메모리 카드를 찾아냈는데, 어머니는 먼저 나서서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시며 복음 집사를 보호하셨습니다. 제 마음은 어머니가 자랑스럽고 기뻤습니다. 2023년 7월 중순이 되었을 때, 누나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어머니가 담낭 낭종 진단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수술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병세가 안정되어 수술은 하지 않았다고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 마음이 굉장히 착잡했습니다. ‘어머니가 정말 수술이라도 받으셨더라면, 집에는 돌봐 줄 사람도 없고, 누나도 멀리 시집간 데다가 누나도 본분이 있어 집에 가서 어머니를 보살피지 못할 텐데. 이제 어머니는 연세도 많으신데, 언젠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누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 드리지? 나도, 누나도 어머니 곁에 없으니 돌봐 줄 사람도 없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곁에 없었는데,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실 때 내가 곁에 없다면 나는 정말 불효자가 될 거야.’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고, 내적 상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루는 묵상하다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말해 보자.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라는 말이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일을 이치에 맞게 분명히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부모가 너를 낳은 것에 대해 살펴보자.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이냐, 아니면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이냐? 누가 누구를 택했느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아니다.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도 아니다. 근원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이 일은 사람이 이해하기 쉬우니 이 주제는 일단 제쳐 두고 이야기하지 않겠다. 네 관점에서 보면 너는 수동적으로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그들에 의해 태어났다. 부모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주관적으로 너를 낳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고 본다면 네가 태어난 일에서 주도권은 부모에게 있다. 그들이 너를 낳기로 했으니 그들에게 주도권이 있다. 너는 그들에게서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태어났다. 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니 부모가 주도권을 가지고 너를 낳기로 선택했다면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고 키울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너를 공부시키든, 먹이고 입히며 돈을 쓰든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이다. 하지만 너는 양육받는 동안 늘 수동적인 입장이다. 네게는 선택권이 없고 그들에게 양육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는 어리고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손에 수동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너는 부모가 키우는 대로 자라난다. 부모가 네게 좋은 것을 먹이면 좋은 것을 먹고, 부모가 네게 제공하는 생활 환경이 고달프고 빈곤하면 너는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양육받는 동안 너는 수동적이고, 부모는 책임을 다한다. … 어찌 되었든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자 책임이지 은혜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은혜라고 할 수 없다면 이것은 네가 누려 마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는 네가 누려야 할 하나의 권리이다. 너는 마땅히 양육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미성년일 때는 양육받는 것이 네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받은 것은 단지 너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지 부모의 은혜나 은정이 아니다. 모든 생물이 새끼를 낳아 기르고 번식하며 후대를 양육하는 것은 하나의 책임이다. 예를 들어 새, 소, 양 심지어 호랑이도 새끼를 낳은 후에는 키워야 한다. 후대를 키우지 않는 생물은 없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드물다. 이는 생물이 생존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생물의 본능이다. 그것을 은혜로 귀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그저 창조주가 동물과 인간에게 정해 준 법칙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결코 은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네게 책임을 다하고 심혈을 쏟고 돈을 썼다고 해서 너더러 갚으라고 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그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책임이고 의무라면 아무런 대가가 없어야 한다. 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단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이니 대가가 없어야 하고 거래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니 너는 갚을 생각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거나 부모와의 관계를 다룰 필요가 없다. 만약 갚을 생각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고 부모에게 보답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다룬다면 이는 오히려 비인도적인 태도인 동시에 육의 정에 제약을 받고 발목 잡히기 쉬우며, 육의 정이라는 올무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심지어는 방향을 잃어버릴 것이다.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너는 부모의 기대에 일일이 부응할 의무도 없거니와 그들의 기대를 떠안을 의무도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 말씀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매우 명확히 교제해 주셨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은 조물주가 인류에게 정해주신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모든 생물이 자손을 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본능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 것은 그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은혜라고 할 수 없으며 자식의 보답도 필요치 않습니다. 과거 저는 부모님이 저를 낳으시고 장성하게 기르시기까지 쉽지 않으셨고, 많이 고생하셨으니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께 보답하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길러주신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마비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아버지의 곁에서 보살펴드리지 못했고, 아버지를 부양하며 임종을 지키지 못해서 아버지에게 빚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속에 큰 짐을 짊어진 듯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저는 또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제가 아버지께 효도를 다 하지 못했으니 더 이상 어머니께 빚지면 안 되고, 어머니께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시도록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넘어져서 다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돌아가서 돌봐드릴 수 없자 스스로 불효라고 여기며 어머니께 면목이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기르신 것은 부모님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것으로 은혜라고 할 수 없으니 저는 갚아드릴 필요가 없으며, 부모님이 저의 채권자도 아닙니다. 저는 부모님이 자녀를 길러주신 것을 은혜로 생각하며 보답하려고 했는데, 이는 완전히 틀린 것으로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관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너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관련한 진리로 폭로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이런 그릇된 관점에 묶여 통제받았을 것입니다. 제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제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니 제가 마땅히 감사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기억하기로 2007년, 제가 하나님을 믿은 지 막 몇 개월이 되었을 때 한 번은 제가 타고 있던 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사람과 차량이 함께 산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그 사고로 사망자도 있었고, 중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계속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저는 단지 근육이 좀 다친 정도였고, 사고자 중 가장 경미한 부상이었습니다. 더 기묘한 것은 그 교통사고에서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고, 당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걸로 저는 하나님의 기묘한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그 교통사고에서 저는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몇 년간 체험하면서 저는 하나님만이 저의 유일한 구원임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다른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을힘을 다해 돈과 명예를 좇았을 것이며 누가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만 의미 있는 삶인 줄은 더더욱 모르며, 사탄에게 고통받아도 몰랐을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 빚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부모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양심이 없고, 대역죄인이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또 떠올랐습니다. 『중국 전통문화의 영향으로 중국인의 전통 관념에는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는 불효자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이런 것을 주입받았으며, 거의 모든 가정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학교와 사회에서도 이렇게 교육한다. 사람의 머릿속에 이런 것이 주입되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불효자야. 사회 여론의 질타를 받을 거고, 양심 없는 사람이 될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 관점이 옳으냐? 하나님이 선포한 그 많은 진리를 사람들은 모두 보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했느냐? 하나님을 믿으며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진리 가운데 그런 내용이 있느냐? 그런 내용은 없다. 하나님은 몇몇 원칙들만 교제했을 뿐이다. 하나님은 말씀에서 어떤 원칙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요구하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이 또한 사람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사람으로, 우리도 마땅히 혐오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 사탄은 그런 전통문화와 도덕관념으로 너의 사상, 생각, 마음과 영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너는 이미 사탄의 그런 것들에 점유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려고 하면 너의 내면에 있는 그런 것들이 작용해 방해함으로써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에 맞서게 한다. 너는 전통문화의 사슬에서 벗어나려 해도 역부족이다. 너는 발버둥 치다 얼마 못 가 타협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전통적 도덕관념이 올바르고 진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거나 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고, 구원받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아직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그 사람들에게 기대 생활해야 출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여론의 질타를 견디지 못해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전통적 도덕관념과 사탄의 권세에 항복할지언정, 하나님께 죄를 지을지언정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냐?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 일을 여전히 간파하지 못하고 진리를 정말 모른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속적인 관계를 타파하지 못하는데, 그에게는 그런 용기와 믿음도 없고, 그런 의지는 더더욱 없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알아야 진정으로 돌이킬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은 전통문화의 본질을 폭로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사탄에게 주입되어 ‘효는 모든 선행의 으뜸이다.’, ‘자식을 길러 노후를 대비한다’는 전통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사람의 양심과 비양심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키워주셨으니 자녀로서 마땅히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고, 부모님이 연로하신 후엔 효를 다하여 부양하고 임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것들을 해야만 양심과 인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걸 하지 못하면 불효자고,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의 모욕과 배척까지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상과 관점이 제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하나님을 믿은 후, 중국 공산당의 핍박과 체포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자 저는 큰 자책감을 느꼈고, 스스로 불효자라고 생각하며 부모님의 길러주신 은혜에 빚졌다고 생각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불효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어머니께서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또 걱정이 밀려와 어머니가 언젠가 정말 떠나시면 ‘불효자’라는 딱지를 평생 떼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저를 단단히 묶어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인생의 정도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마음을 가라앉힌 채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전통문화의 이런 그릇된 사상에 너무 깊이 고통 받는 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은혜시대를 돌이켜보면, 주님의 복음을 곳곳에 전파하기 위해 정말 많은 사람이 부모와 친지를 뒤로한 채 주님의 복음을 널리 알렸습니다. 심지어 순교자의 길을 걸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의 선택은 주님의 뜻에 정확히 부합하며, 선한 행실과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지금 저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게다가 제가 이 시기에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는 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일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사람의 의무에 불과합니다. 상황이 된다면 할 수 있지만, 상황이 안 된다면 본분 이행에 방점을 두어야 합니다.
곧이어 저는 또 하나님 말씀을 봤습니다. 『네가 만약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대신 집에서 부모 곁을 지킨다면 부모가 병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생사나 빈부의 문제가 네게 달려 있느냐? (그 역시 아닙니다.) 부모가 어떤 병에 걸리든 너를 키우느라 고생해서, 네가 보고 싶어서 걸리는 것이 아니다. 특히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크고 중한 병에 걸리는 것도 너 때문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니 너와 상관없다. 네가 아무리 효도해 봤자 기껏해야 그들의 육적인 고통이나 부담을 조금 덜어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 어떤 병에 걸릴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너와 상관있겠느냐?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 네가 배은망덕하지 않고 효자라고 해서 온종일 부모 곁을 지키며 돌본다면 그들이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겠느냐? 결국 걸릴 병은 걸리고, 죽을 사람은 죽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냐?』(<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네가 부모를 하나님 손에 맡긴다면 그들에게 최고로 효도하는 것이다. 너는 그들의 생활에 온갖 난관에 부딪치기를 바라지 않고 그들이 잘살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너는 마음속으로 분명 그들이 평안하도록 하나님이 지켜 주기를 바랄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본분을 이행하고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면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사람은 인성으로 그 정도에만 이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그토록 많은 진리를 들었으면 최소한의 인식과 이해는 있다는 것이다. 바로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하며, 사람은 하나님 손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지킴이 자녀의 걱정과 효도, 자녀가 곁에 있어 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이 부모를 보살펴 주고 지켜 준다면 네 마음이 푹 놓이지 않겠느냐?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네가 걱정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너무 작은 것이다. 만약 네가 정말로 그들이 걱정되고 마음에 걸린다면 자주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그들을 하나님 손에 맡겨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매일을 주재하며 그들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주재하는데, 네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냐? 너는 너 자신도 주재하지 못하고 네 코가 석 자이다. 네가 무슨 수로 부모를 매일 행복하게 해 주겠느냐? 너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에게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결국에는 구원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해라. 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걸으라고 해라. 조금 낫고 인성이 조금 있는 부모라면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할지는 하나님의 안배가 있을 것이니 사람은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종합해 보자면, 사람이 자식으로서 다할 책임에 대해서는 사람의 양심 속에 지각이 있다. 그 지각으로 인해 사람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걱정을 하든 아니면 그들 곁에서 함께하길 선택하든 간에 결론적으로 사람은 객관적 환경의 영향으로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등등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믿는 삶 속에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과 관련된 화제가 나왔을 때 사람은 이렇듯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더는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한 측면으로는, 너는 마음 깊이 네가 불효하는 것이 아니고 책임을 다하기가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른 측면으로는, 부모가 하나님 손안에 있는데 네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냐? 사람이 무슨 걱정을 하든 전부 쓸데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물 흐르듯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따라 마지막까지 살아가고 길을 끝까지 걸어간다. 조금도 빗나가는 법이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중에서) 하나님 말씀에서 전 깨달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일평생 언제 병에 걸리시고 어떤 병에 걸리실지, 혹은 어떤 재앙을 당하게 될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며 운명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는 자녀가 곁에서 돌보는 것과는 관계없습니다. 자녀가 매일 옆에서 부모의 곁을 지킨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부모님 삶의 부담만 조금 덜어줄 수 있을 뿐이며 그래도 부모님은 걸릴 병에는 걸리고, 수명이 다해 돌아가실 때가 되면 돌아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조물주가 운명으로 정하신 사람의 숙명입니다. 어머니가 어떤 병에 걸릴지, 생사가 어떻게 될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운명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매일 어머니 곁을 지킨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생사는 하나님께서 일찍이 운명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 이번 생에 언제까지 사실지, 평생 어떤 고통을 받으시고, 어떤 환경을 겪으실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재하시고 정해놓으셨으며, 제가 아무리 걱정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어머니도 하나님을 믿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상황에 따라 어머니에게 적합한 환경을 마련하시어 체험하시게 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넘어져서 다치신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애쓰심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어머니를 걱정하며 속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어머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 믿음이 정말 작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의 관념으로만 판단했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재에 실제적인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이제 저는 집을 떠난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어머님도 혼자 집에서 힘이 닿는 한 본분을 이행하시며 잘 살고 계십니다. 제 걱정과 우려가 정말 기우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은 저의 채권자가 아니고 부모님께서 저를 길러주신 것은 부모님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것이니 저는 이를 은혜로 삼으며 보답해서는 안 됩니다. 제 일생에는 제가 완수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제 마음속의 죄책감이 사라졌고 영혼도 많이 자유로워졌고, 본분에도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