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더 이상 나이가 많은 이유로 근심하고 우려하지 않습니다
아내와 저는 1995년에 함께 예수님을 믿었고, 2년 후에는 또다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살아 생전에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정말 기뻤습니다. 그 후 저는 복음을 전하며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고, 아무리 바빠도 본분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제 열정이 몹시 커서, 집에서 믿지 않는 가족들이 반대하며 말려도 괴롭지 않았습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27년이 흘렀고, 저도 이미 예순에 접어들었습니다. 확실히 몸도 예전같지 않고, 기억력도 전보다 많이 떨어졌습니다. 뭔가를 얘기해도 금방 잊어버리고, 가끔은 이것저것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전에 눈 수술을 두 번 했더니, 컴퓨터를 오래 들여다 보면 눈이 아프고 눈물이 났고, 저녁이 되면 시야도 흐릿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끔은 길을 걸을 때도 몸이 저절로 오른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속으로는 가운데로 걷는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모르게 몸이 오른쪽으로 쏠렸습니다. 그러면 저는 반신불수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쉬는 시간을 적당히 안배해서 매일 꾸준히 운동하고 한 형제가 물리 치료도 해 준 덕분에, 얼마 후에는 좋아지긴 했지만, 본분을 이행하기에는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보면 본직 사역을 하면서 다른 본분도 같이 이행했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제 사역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저에게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제가 정말 늙었음을 의식했습니다. 마치 쓸모 없는 폐물이 된 것처럼 힘쓰는 것도 할 수 없었고, 본분 이행할 기회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런 걱정도 되었습니다. ‘눈 상태가 더 심해져서 하나님 말씀도 못 보면 어쩌나? 그런데도 구원받을 기회가 있을까?’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서글펐습니다. 비록 여전히 본분은 이행하고 있지만, 사실 이미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내적 상태에 빠져서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어떤 때는 컴퓨터 앞에서 본분을 이행하다가 잠이 들기 했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비몽사몽한 상태로 보냈습니다. 때로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어째서 하필 복음이 크게 확산될 때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을까요? 제가 몇 십 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보아하니 저는 하나님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힘쓰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저는 생각할수록 소극적으로 변했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의욕이 없었습니다. 어떤 형제자매가 저를 보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예전하고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의 본분을 이행하던 의욕은 다 어디 갔나요?” 저는 체념한 듯 대답했습니다. “이제는 늙었잖아요. 전과 같을수 있나요.” 한동안은 계속해서 소극적인 상태로 지내면서 원인도 찾지 못했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칠 때,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자매 중 일부 연로한 사람들, 다시 말해 60대에서 80, 90대의 사람들도 많은 나이로 인한 고충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많다고 해도 그들의 생각이 그렇게 정확하거나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고 생각과 관점이 진리에 부합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들 연로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충이 있으니 그들은 항상 이렇게 걱정한다. ‘이제 몸도 따라 주지 않고 이행할 수 있는 본분도 한정적이구나. 이 정도 본분만 이행해서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려나? 병에 걸려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을 텐데 돌봐 줄 사람이 없을 때는 홀로 본분을 이행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나이를 먹으니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기억이 안 나고 진리를 깨닫기도 쉽지 않다. 진리를 교제할 때 횡설수설하며 논리적이지 않고 이렇다 할 체험도 없구나. 나이를 먹으니 기운도 없고, 시력도 나빠지고, 체력도 달린다. 다방면으로 고충이 많으니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툭하면 깜빡하고 실수한다. 때로는 흐리멍덩해서 교회나 형제자매에게 폐를 끼치니, 이래서는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고 싶어도 힘들겠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어떻게 이 나이에 하나님을 믿었을까? 왜 남들처럼 20, 30대에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까? 하다못해 40, 50대에 믿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늙어서야 하나님의 사역을 만나게 되었을까? 팔자가 사납다고 하자니 그렇지도 않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역을 만나게 되었으니 팔자가 좋은 편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기억력도, 건강도 좋지 않고, 열의는 큰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예배 시간에 조금만 듣고 있어도 졸리고, 눈을 감고 기도하면 잠들 때도 있다. 하나님 말씀도 입으로만 읽을 뿐, 조금만 읽어도 졸리고 노곤하여 읽어 나갈 수가 없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런 현실적 고충에도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을 수 있을까?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없을 텐데 그렇게 되면 허투루 믿은 게 아닐까? 구원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럼 어쩌지? 걱정이다! …’ … 이런 연로한 사람들은 자기 나이 때문에 깊은 근심과 염려, 걱정에 빠진다. 고충과 좌절, 우여곡절과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나이를 원망하고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며 싫어하기까지 하지만 어떻게 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다. 별수도 없고 나아갈 길도 없다. 진정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냐? 방법이 없겠느냐? (노인도 힘닿는 데까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 노인이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냐? 노인이 설마 늙었다는 이유로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노인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느냐? 그들도 부분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젊은이들도 전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인이 항상 착각하는 한 가지는 자신이 흐리멍덩하고 기억력도 없으니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이 진정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청년은 노인보다 기운이 넘치고 체력도 좋지만 이해하고 깨닫고 인식하는 능력은 사실 노인과 똑같다. 노인도 청년을 거쳐 온 것이 아니더냐? 태어날 때부터 늙은 것도 아니다. 청년 역시 결국은 늙기 마련이다. 노인은 자기가 늙어서 체력이 달리고 건강하지 않으며 기억력이 나쁘다고 청년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차이가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젊었다가 나이가 드는 것은 정상적인 법칙이며, 사람은 누구나 젊은 시기와 연로한 시기가 있습니다. 하나님 눈에는 젊은이도 늙은이도 똑같이 보입니다. 단지 젊은이가 에너지와 체력면에서 나이 든 사람보다 나을 뿐, 이해력과 수용 능력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젊은이들을 편애하거나, 늙은이를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 뜻을 모르고 그분을 오해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건강이 좋지 않고 눈도 말을 안 들어서 젊었을 때처럼 본분을 뚝딱 이행하지 못하니까,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이 왜 저를 이 연령대가 되도록 하셨는지 원망했습니다.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치우친 사상에 교란받은 나머지, 소극적으로 변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늙은이들은 힘이 닿는 만큼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면 된다고 하셨고, 사실 형제자매를 접대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 새신자를 양육하는 일, 설교 원고를 쓰는 일 등, 노인들이 하기에 적합한 본분은 많습니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자 하는 한, 해야 할 본분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준 덕분에, 여전히 온라인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새신자들이 복음을 전하도록 양성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행할 수 있는 본분은 아직도 많습니다. 단지 제가 늘 젊은이들과 비교했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지금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 문제와 어려움은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억력이 안 좋으면 적어 두면 되고, 컴퓨터를 오래 봐서 눈이 불편할 때는 적당히 쉬면서 눈 운동도 하고 온찜질도 하면 눈의 피로를 풀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인식하고 나니, 저는 더 이상 나이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힘 닿는 데까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 후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젊을 때는 본분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의욕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고 몸이 좋지 않아서 본분 이행을 얼마 못 한다고 느끼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하는 걸까?’ 그 순간 전에 보았던 하나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우리는 지금껏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노골적인 이익 관계, 그러니까 복을 받는 자와 복을 베푸는 자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는 피고용인과 고용인의 관계다. 피고용인의 수고는 오직 고용인이 주는 품삯을 받기 위함이다. 이런 이익 관계에는 애정은 없고 거래만 있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없고 베풂과 연민만 있다. 또 이해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참는 것과 기만하는 것만 있으며, 친밀한 관계는 없고 영원히 넘을 수 없는 깊은 골만 있다. 상황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누가 이 흐름을 되돌릴 수 있겠느냐? 또 이런 관계가 위험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확신컨대, 모두가 복을 받는 기쁨에 도취되어 있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처럼 난감하고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은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부록 3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 안에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중에서), 『사람은 다 복을 받고, 상을 얻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이런 생각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다 들어 있지 않느냐? 누구나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이는 사실이다.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항상 말로 내뱉지 않아도, 나아가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속셈과 욕망을 숨겨도, 마음 깊은 곳의 그 욕망, 그 속셈과 동기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사람이 영적인 이론을 얼마나 많이 알고 어떤 체험적 인식이 있든, 어떤 본분을 이행할 수 있든,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든,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복받으려는 속셈은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다. 또 사람은 언제나 이 복받으려는 속셈을 위해 고생을 마다치 않고 바쁘게 뛰어다닌다. 이는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 아니더냐? 복을 받으려는 속셈이 사라진다면 너희는 어떤 기분이겠느냐? 어떤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겠느냐? 마음속에 숨겨진 복받으려는 그런 속셈을 정말로 완전히 없앤다면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되겠느냐? 아마 많은 사람이 소극적이 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의욕이 사라질 것이다. 영혼을 잃어버린 듯 하나님 믿는 일도 무의미하다고 느낄 것이다. 마음을 잃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복받으려는 속셈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생명 성장의 여섯 가지 기준> 중에서) 하나님의 폭로의 말씀을 보니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으며 버리고 헌신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맞바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젊을 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 하고,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은, 사역을 많이 하고 복음을 많이 전해서 선행을 예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20여 년이 지나, 이제는 나이가 많아 건강도 좋지 않고 이행할 수 있는 본분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복을 받을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 복을 받으려는 욕망이 좌절되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른 바 예전의 믿음과 사랑이 모조리 사라지고, 심지어 하나님 믿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끼면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복을 얻기 위한 것이고, 제가 치른 모든 대가는 하나님과 거래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주변에 나이 많은 형제자매들이 얼마든지 있고,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있어. 다들 모두 묵묵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할까? 매일 우려 속에 살면서, 진리가 그렇게 많은데도 구하지 않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는 것 아닌가?’ 사탄은 나이 들어서 건강이 좋지 않은 점, 기억력이 좋지 않은 점, 눈이 잘 안 보이 점 등, 제가 안고 있는 각종 어려움을 이용해 저를 교란했고, 이로써 제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진리를 추구할 기회를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사탄에게 속지 않고 본분을 잘 이행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너희보고 뒤떨어졌다고 한 것도, 자질이 부족하다고 한 것도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너희를 버린다거나 너희에게 희망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며, 너희를 구원하기 싫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오늘날 내가 온 것은 바로 너희를 구원하는 사역, 즉 구원을 이어 가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다. 누구에게나 온전케 될 기회는 있다. 원하고 추구하기만 하면 모두 성과를 얻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네 자질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훌륭하면 훌륭한 대로 그에 맞춰 너에게 요구한다. 네가 무지하고 글을 모르면 그런 조건에 맞춰 요구할 것이며, 네가 글을 알면 그 기준에 맞춰 요구할 것이다. 또 네가 나이가 많으면 나이에 맞게 요구하고, 네가 접대할 수 있다면 그 상황에 맞춰 요구할 것이다. 네가 접대는 할 수 없고,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를 돌보거나 다른 업무적인 사역을 하는 등 한 부분의 역할만 수행할 수 있다고 하면, 또 그 역할에 맞춰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너는 오직 충성하고, 끝까지 순종하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이는 네가 이르러야 할 세 가지로, 최고의 실천이다. 사람에게 최종적으로 이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몇 가지이다. 여기에 이른 사람은 온전케 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우선 진심으로 추구하고 능동적으로 향상하려고 노력해야지, 이 일을 소극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사람의 삶을 정상으로 회복시켜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어 간다> 중에서), 『모든 사람은 자질이 어떻든, 나이가 어떻든,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나 되었든 진리 추구의 길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객관적인 이유를 내세우지 말고 무조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허송세월 보내지 마라. 네가 진리 추구를 인생의 큰일로 삼고 추구하며 노력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얻고 도달한 진리가 네가 바랐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진리를 추구하는 너의 태도와 진심을 보고 적절한 종착지를 준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제부터는 종착지니 결말이니, 훗날이 어떨지, 미래는 어떨지, 재난을 피할 수 있을지, 죽지 않을 수 있을지 등을 중시하지 마라. 이런 것을 생각하지도, 구하지도 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를 중시하여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여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육천 년의 기다림과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께 약간의 위로를 주어 하나님이 네게서 희망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염원이 네게서 실현되게 하여라. 그럼 하나님이 너를 박대하겠느냐?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설령 최종의 결과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피조물로서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개인의 계획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지켜야 할 자세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옳은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중에서)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이 제 마음을 녹이고,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하나님이 오셔서 사역하고 말씀하는 것이 사람을 구하고 온전케 하기 위서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나이와 자질, 교육 수준이 어떤지를 막론하고, 또한 사람의 연령대, 가정 환경이 어떤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온전케 될 기회를 주시며, 어느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자질에 따라 요구하시고, 그 사람에게 적합한 본분을 안배해 주십니다.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본분을 잘 이행함으로써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덕분에 저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실행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훨씬 홀가분했습니다. 이제 저는 나이가 많아서 건강이 좋지 않고 기억력이 감퇴했다는 이유로 우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앞으로 좋은 결말과 종착지가 있을지 없을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최선을 다해 제 앞에 놓인 본분을 잘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진리를 실행해 내는 일에 집중합니다. 제가 이만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