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에 대한 인식

미국 앨리슨(Allison)

어느 날, 막 교회에 들어온 새 신자가 벌써 두 번이나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알고, 바로 팀장에게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팀장이 즉시 답변을 주지 않더군요. 나중에 그 새 신자가 정상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팀장에게 더 이상 이유를 캐묻지 않았습니다. ‘새 신자가 정상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면 됐지. 지금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쁜데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자면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 거야.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그때 다시 물어보지 뭐.’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래 놓고 그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나중에 한 예배에서 그 새 신자가 예배 중간에 나간 것을 알고 팀장에게 이유를 물었는데, 그때도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끝까지 따져 묻지 않았고, 새 신자를 찾아가 어떤 내적 상태인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얼마 후, 저는 다시 그 새 신자가 연속으로 몇 번이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제야 마음이 급해져 얼른 새 신자에게 연락했지만, 새 신자는 계속 답을 보내지 않더군요. 새 신자가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날까 봐 걱정됐던 저는 얼른 팀장에게 연락해 새 신자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팀장이 하는 말이, 그 신자가 계속 자기를 친구로 추가하지 않아서 자기도 연락할 방도가 없다는 겁니다. 그 순간 약간 후회가 됐습니다. 진작 이 상황을 파악했더라면 어떻게든 손을 썼을 텐데 지금은 이미 늦었다며,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습니다. 저는 새 신자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급히 새 신자와의 대화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제야 제가 새 신자와 몇 마디 안부 인사를 나눈 것 외에 별 대화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새 신자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새 신자를 되돌아오게 할 희망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게 다 저의 무성의함 탓이었지만, 당시에는 진지하게 반성하지는 않고 조금 생각해 보다 제가 좀 소홀했음을 인정하고 넘어갔습니다.

얼마 후, 책임자가 그 새 신자가 왜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났는지 파악하려고 제게 그 신자의 상황을 물었습니다. 저는 긴장했습니다. ‘야단났네. 다 탄로나게 생겼어. 책임자가 사정을 알면, 분명 내가 본분을 대충 이행한다고, 믿음이 안 간다고 할 거야. 게다가 만에 하나 나를 교체하면 어떡하지?’ 예상대로 책임자는 상황을 파악한 뒤 제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일을 형식적으로만 하면서 새 신자의 내적 상태에 관심을 두고 알아보지 않았다면서요. “새 신자가 제 인사에 답하지 않아서 더 깊이 대화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서둘러 변명했습니다. “대화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새 신자에게 아예 무관심했던 거죠.” 책임자는 저를 책망했습니다. 저는 무성의함을 인정하면 책임을 져야 할까 봐 냉큼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그 새 신자는 팀장이 주로 담당을 해서 저는 팀장이 계속 연락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 새 신자의 상황을 그때그때 알아보지 못했지 뭐예요. 그치만 팀장한테 물어는 봤어요. 근데 바로 답변을 안 주시더라고요.” 그러고는 팀장에게 보낸 장문의 메시지를 책임자에게 보여 주며 제가 새 신자에게 무관심했던 게 아님을 증명했죠. 그리고 새 신자에게 나중에 보냈던 메시지도 보여 주었습니다. 새 신자가 예배에 제대로 안 나오는 걸 알고 저는 그 즉시 어떻게든 연락해 보려 했지만, 상대가 응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요. 또 전도한 사람이 연락처를 주지 않아서 새 신자에게 전화 연락을 할 수 없었다며 핑계를 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객관적인 이유를 들어 계속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긴 건 다 사정이 있고 내 잘못이 아니니, 나만 탓하지 말고 최소한 공평하게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책임자는 제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책임을 회피하려는 걸 보며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그 새 신자는 여러 번이나 예배에 참석했어요. 갈망하고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뜻이죠. 그런데 자매님들은 제때 새 신자의 내적 상태와 어려움을 알아보지 못하고, 전화번호가 없어서 연락을 못 했다며 책임 회피까지 하는군요. 이건 좀 어이가 없네요!” 책임자가 제 문제를 뻔히 알고 있는 상태라 아무리 해명해도 책임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걱정되었습니다. ‘책임자가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실제적인 사역을 전혀 안 한다고 하지 않을까? 혹시 나를 교체하는 거 아냐?’ 마음이 심란해서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이켜 보니 이 일에서 저는 정직한 사람도 되지 못했고, 책망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분명 제가 본분을 건성건성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으면서도 간사하게 핑계를 대며 자신을 변호하는가 하면, 전화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다며 전도자를 탓하는 등 스스로가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저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제 모습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매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만, 일단 실제로 환경이 닥치고, 책망 훈계가 닥치면, 여전히 패괴 성품대로 살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저는 자신이 너무 깊이 패괴되어 쉽게 변화하지 못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조금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나중에 이런 하나님 말씀을 봤습니다. 『진리 추구는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다. 네가 진리를 사랑한다면 성령이 역사할 것이다. 네가 마음속으로 진리를 사랑하며, 어떤 핍박과 환난이 임하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인식한다면, 문제를 발견할 경우 주동적으로 진리를 구해 해결한다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다. 그러면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전부 사람이 진리를 사랑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스스로 원하고 기꺼이 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누구의 강요도, 어떤 추가 조건도 없다.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따르면 마지막에 진리와 생명을 얻을 것이요, 진리 실제에 진입할 것이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것이다. … 네가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든, 하나님은 마지막에 진리를 얻었는지 여부를 보고 사람의 결말을 결정한다. 만약 네가 진리를 얻지 못했다면, 어떤 이유와 변명도 성립하지 않는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이치를 따지고 마음대로 해 보아라. 하나님이 너를 신경이나 쓰겠느냐? 하나님이 너 같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변론하고 토론하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상의하겠느냐? 답은 무엇이겠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네 이유가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며, 갖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네가 다양한 환경 속에서, 그리고 네게 임한 모든 일 가운데서 진리를 구하며, 마지막에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를 얻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어떤 환경을 배치하든, 네가 어떤 사람과 일들을 마주하든,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든 너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 그런 일을 마주해야 한다. 이런 것은 바로 네가 진리를 추구하면서 배워야 할 공과이다. 만약 늘 이유를 찾으며 회피하고 도망치고 거부하고 저항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포기할 것이다. 네가 이치를 따지고 억지 부리고 훼방 놓아도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이 너를 상대하지 않으면 너는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 진리를 구하고 실천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책망과 훈계, 실패와 좌절 등 어떤 상황이 닥치든 자기를 반성하고 인식할 수 있고, 능동적으로 진리를 구하여 깨달은 만큼 실천할 수 있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수 있다면, 발전하고 변화할 것입니다. 하지만 책망 훈계가 닥칠 때마다 늘 회피하고, 거부하고, 핑계를 대며 거절하면, 진리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버려질 것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고분고분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능동적으로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규정하고 소극적으로 변하고 대항했습니다. 이 얼마나 몰지각한 행동입니까? 그건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이걸 깨닫자 이제는 소극적인 상태로 살면서 저를 규정하는 대신, 진리를 구해 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졌습니다. ‘왜 나는 평소에 말은 잘하면서 일단 책망 훈계가 닥치면 받아들이지 않고, 소극적으로 변하고 대항할까? 이것은 어떤 성품을 드러낸 것일까?’ 저는 스스로를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답을 구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 큰 붉은 용의 자손임을 인정하며, 자신을 인식할 때 아주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막상 패괴 성품을 드러내 누군가가 폭로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면, 자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여기에서 사람은 철저히 드러난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할 때는 그렇게 그럴듯하게 말하는 사람이 왜 책망과 훈계 앞에서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흔히 있지 않으냐? 이런 일을 분별하기가 쉬우냐, 쉽지 않으냐? 사실 분별하기 쉽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때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회개도, 변화도 없다. 그럼 자신을 인식하는 그 말은 과연 진실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겠느냐? 진실한 인식이겠느냐, 아니면 외식하며 남을 기만하는 것이겠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진실로 자신을 인식했는지를 알려면 그가 말하는 인식만 들어서는 안 된다.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또한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냈든 남들이 책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책망하고 훈계하는 이가 어떤 사람이어도 안 된다. 그 스스로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은 괜찮으며,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 폭로하고 질책하고 책망한다면, 아무리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말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드러낸 패괴 성품 중 어떤 측면에 대해 폭로하든 그는 극도로 반항하고, 한결같이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진정한 순종은 조금도 없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곤란해질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 중에서), 『진리를 싫어하는 주된 모습은 진리를 들으면 반감을 품는 것만이 아니라, 진리를 실행하기 싫어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진리를 실행할 때가 되면 뒤로 물러서고, 진리는 본인과 무관한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서 교제할 때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글귀와 도리, 고상한 이론을 읊어 대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농락하는데, 그럴 때면 얼굴이 환해지고 기분이 한껏 들떠서 거침없이 떠들어 댄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드리고, 찬양을 듣고, 필기를 하는 등 하루 종일 하나님 믿는 일로 바쁘고, 한순간도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는 듯한데, 본분 이행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들은 정말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냐? 이들에게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없느냐? 이들의 실제 내적 상태는 언제 알 수 있느냐?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가 되면 도망치고,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것이냐, 아니면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이냐? 둘 다 아니다. 그것은 본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이는 바로 성품의 문제이다. 속으로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자 긍정적 사물이고, 사람은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성품이 변화되고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도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여섯 가지 방면의 패괴 성품을 알아야 진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니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고,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 실천은 더더욱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를 반성해 보았습니다. 저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셨습니다. 또 본분을 이행하고 예배드릴 때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제게 패괴 성품이 있고, 제가 사탄에게 속하고, 큰 붉은 용의 자손임을 인정했습니다. 겉보기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막상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해 책망 훈계가 닥쳤을 때는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제 패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저는 제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진리를 싫어하는 사탄 성품을 드러내는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양육자는 최소한 책임감과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새 신자들은 아직 참도에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막 태어난 신생아처럼 생명이 약합니다. 그들이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바로 그들의 내적 상태를 알아보고, 어떻게든 양육하고 붙들어 줘야 하죠. 이 원칙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실천할 때가 돼서 고생하며 대가를 치러야 하자 뻔히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그 새 신자와 몇 번 인사한 것 외에는 양육하고 붙잡아 준 적도 없는 데다, 그가 예배에 정상적으로 참석하지 않은 걸 발견하고도 느긋하게 생각하고, 빨리 연락해서 무슨 문제나 어려움이 있는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책임하게 직무를 소홀히 한 탓에 새 신자가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났는데도, 저는 여전히 반성하지 않았죠. 책임자가 제 문제를 지적했을 때는 어떻게든 제 무성의한 태도에 대해 핑계를 대며, 팀장과 전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했습니다. 이게 무슨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입니까? 제가 드러낸 것은 죄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뿐이었습니다!

또 이런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책망과 훈계가 임하면,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누가 너를 책망하는지, 왜 책망하는지 신경 쓰지 말고, 또한 그의 말이 듣기 거북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의 어조나 어휘 선택이 어떤지도 신경 쓰지 말고 전부 받아들여서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잘못했고,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냈는지, 그 일을 할 때 진리 원칙대로 행동했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먼저 보여야 할 태도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이런 태도를 보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언제나 반발심과 반감을 보인다. 이런 태도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하며 겸허히 책망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럼 그는 어떻게 행동하겠느냐? 먼저 온 힘을 다해 설명하고 변명하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자신이 드러낸 패괴 성품에 대해 변호하고 해명하면서 사람들의 이해와 관용을 얻어 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자신을 책망하고 훈계하는 말들을 받아들이지도 않아도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가 어떤 태도로 책망과 훈계를 대하겠느냐? ‘나는 죄짓지 않았어. 잘못한 게 없다고. 설령 잘못이 있다고 해도 거기엔 이유가 있어. 고의가 아니었단 말이야. 내가 책임을 질 필요도 없어. 세상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는 이런 주장과 말을 고집하며 놓지 않는다. 진리를 구하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드러낸 패괴 성품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악행을 저지른 속셈과 목적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다. … 그의 패괴 성품이 어떻게 사실로 드러났든 그는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한사코 반항하고 맞선다.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해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누가 말로 날 이기나 보자. 누가 더 말을 잘하는지 보자고.’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책망과 훈계를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태도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8)>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정상인은 책망 훈계가 닥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순종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변화합니다. 설사 당장은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끊임없이 구하고 반성함으로써 책망 훈계에서 공과를 배우고요.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싫어하고 적대시하기 때문에 책망 훈계가 닥쳐도 자기를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드러내는 것은 전부 대적하고 거부하고 증오하는 태도입니다. 이에 비춰 제 모습을 반성해 봤습니다. 분명 제가 무성의해서 새 신자를 제때 붙들어 주지 않은 탓에 그 새 신자가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난 거였죠. 이 자체가 이미 과오입니다. 양심과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괴로워하고 자책하며 자기 문제를 진지하게 반성했겠죠. 하지만 저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실이 뻔히 드러나 있는데도 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새 신자가 답장을 안 한 탓이라고 했다가 팀장이 무책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전도자 탓까지 해 가며 제 책임을 모조리 떠넘겨 책임자의 이해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드러냄과 책망 훈계가 닥쳤는데도 저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대적하고, 반항하고, 온갖 이유를 대며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제게 어디 인성과 이성이 있었을까요? 저는 강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만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없었죠.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음에도 전혀 성품 변화가 없는 저 자신을 보고 몹시 괴로웠습니다.

뒤이어 이런 말씀을 보고,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저의 문제를 더 깊이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책망과 훈계를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전형적인 태도는 바로 죽어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악을 저지르고, 하나님 집 사역과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아무리 큰 손해를 끼쳐도 마음속으로 조금의 후회도 자책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을 볼 때, 적그리스도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절대 없다. 그가 하나님의 선민에게 입힌 여러 해악과 교회 사역에 가져다준 피해를 하나님의 선민은 모두 밝히 보았으며, 적그리스도가 악행이 많다는 사실을 보았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또한 끝까지 그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진리를 싫어하고 수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음에도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스럽게 군다. 여기에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집의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진리도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사탄의 종으로,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러 온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오직 명예와 지위뿐이다. 그는 자신이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 책임을 져야 할 테고, 그러면 그의 명예와 지위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는 한이 있어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대항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폭로하고 해부해도 그는 기를 쓰고 부인한다. 그가 고의로 부정하든,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든, 여하튼 이런 모습에서 한 측면으로는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다른 한 측면으로는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명예와 지위, 이익에 몹시 연연함을 뜻한다. 반면, 교회의 사역과 이익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이겠느냐? 무책임하고 경시하는 태도이다. 그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다. 적그리스도가 책임을 미루는 데서 이런 문제들을 볼 수 있지 않으냐? 책임을 미루는 것은 한 측면으로는 그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본성 본질을 뜻하고, 또 다른 한 측면으로는 양심과 이성이 없고 인성이 없음을 뜻한다.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이 그의 교란과 악행으로 인해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든, 그는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어떤 존재겠느냐? 그가 조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래도 약간의 양심과 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이 정도의 인성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떤 존재겠느냐? 적그리스도 부류 사람의 본질은 바로 마귀이다. 하나님 집의 이익이 그로 인해 아무리 큰 손해를 입어도 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조금의 괴로움과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죄스러운 마음은 더더욱 없다. 이는 결코 정상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런 자가 바로 마귀이다. 마귀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적그리스도가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 본성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데다 자기 이익을 너무 중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자기 명예와 지위가 위협받고 실추당하면 온 힘을 다해 자기를 변호하고 갖은 핑계를 대며 책임을 회피합니다. 교회 이익과 형제자매의 생명에 피해를 주는 일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뉘우치지 않습니다. 사실이 발각돼도 죽어도 인정하지 않죠. 그걸 인정했다가 책임지게 될까 봐, 명예와 지위가 실추될까 봐 두려우니까요. 적그리스도는 몹시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존재이며, 그 본질이 마귀란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마귀’라는 두 글자를 보고, 마음이 너무 찔렸습니다. 제 모습과 제가 드러낸 성품이 적그리스도와 똑같았으니까요. 분명 제가 잘못해서 교회 사역에 피해를 주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책망 훈계가 닥치자 따지고 변명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 점 말이죠. 어느 새 신자든 복음을 받아들일 때는 그렇게 간단하고 순조롭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가를 치러 양육하고 공급해야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양 일백 마리 중 하나를 잃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실 정도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각별히 아끼시죠. 그런데 저는 제가 양육을 맡은 새 신자를 아무렇게나 대했습니다. 새 신자가 예배에 나오지 않는 것을 알고도 느긋하게 생각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죠. 가끔 어떻게 된 거냐 묻긴 했지만 형식적이었습니다. 팀장의 일을 체크하는 부분에서도 무성의하고 무책임했습니다. 팀장이 몇 번이나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지만, 바로 찾아가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았고, 팀장에게 무슨 문제나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닌지 빨리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새 신자를 대하는 제 태도는 태만하고 무책임했습니다. 애초에 새 신자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뉘우치지도 않고, 만회할 방법도 찾지 않았습니다. 책임자가 제 무성의함과 무책임을 지적했을 때는 제 잘못을 인정했다가 책임지게 될까 봐, 책임자가 제게 안 좋은 인상을 가질까 봐, 교체되고 조정될까 봐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갖은 핑계로 책임을 회피하려 했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저는 교회 사역과 새 신자의 생명에 끼칠 손해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제 이익에 해가 되진 않을지, 제 체면과 지위를 지킬 수 있을지만 따졌습니다.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했습니다. 제 이익만 지키려고 했으니까요. 정말 비인간적이라 하나님이 역겨워하고 혐오하실 만합니다. 저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본분을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여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낳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이 아닌 제 명예와 이익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도 비인간적입니다! 하나님, 저는 회개하길 원합니다.’

나중에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행 길을 찾게 됐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진리를 싫어한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리를 싫어하는 네 내면의 상태를 성찰해야 하며, 네게 진리를 싫어하는 어떤 모습이 있는지, 어떤 행동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인지, 어떤 일이 임했을 때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를 보이는지 살펴야 한다. 수시로 이러한 것들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네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임했을 때 충동적으로 굴어서는 안 된다. 일단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 제멋대로 굴지 말고 먼저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견지하며, 어떤 일이 임하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할 수 있다면, 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일들을 마주할 수 있다면, 네가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냈든, 혹은 예전에 어떤 과오를 저질렀든 상관없이 진리를 구하기만 하면 다 해결할 수 있고, 어떤 시련이 임하든 굳게 설 수 있다. 네 마음가짐이 올바르고,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다. 때때로 약간의 패역과 반발심을 품고, 자신의 이치를 따지며 순종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패역한 상태에서 돌아설 수 있으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왜 패역과 반발심이 생겼는지 반성하며 원인을 찾은 다음 진리를 구해 해결한다면, 이 측면의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실패와 좌절을 몇 번 반복하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게 되면 패괴 성품을 조금씩 벗어 버릴 수 있다. 그때는 진리가 네 안에서 권세를 잡아 네 생명이 될 것이다. 그때 진리를 실행하면 어떤 방해도 없을 것이며,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본 후,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해결하려면 평소에 늘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말이나 행동, 마음가짐, 태도, 관점들 중에 어떤 것들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인지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게 자기 뜻에 맞든 안 맞든 일단 반발하지 말고 침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이치를 따지고 변명하고 싶어진다면,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많이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 하고요. 하나님 말씀에는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거나 진리를 잘 아는 형제자매를 찾아가 구하고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서히 진리를 받아들여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고, 패괴 성품도 조금씩 벗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실행 길을 알고 나니 저도 변화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이번에 새 신자의 상황을 제때 알아보지 않아 과오를 남긴 것을 생각하며, 저는 얼른 자신을 돌이켰습니다. 제가 맡은 새 신자 중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 신자는 없는지 점검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새 신자와 대화를 나누다 그 신자가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세 단계 사역에 관한 진리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리더에게 전도자가 그 새 신자와 더 교제해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리더는 저더러 교제해 주라고 했습니다. 새 신자의 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하는 게 제 책임인 건 알지만, 반발심이 들면서 순종하기보다는 이치를 따지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이건 전도자가 알아듣게 교제하지 못한 탓인데 왜 내가 책임지고 교제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새 신자가 많아서 저도 시간이 부족하니 그냥 전도자에게 교제를 맡기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제 그릇된 내적 상태를 자각했습니다. 사실 리더의 말도 맞는데, 왜 옳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 이것저것 따지며 순종하지 못하나 싶더군요. 그래서 하나님께 제가 순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제 육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새 신자의 생명을 책임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사람마다 이해 능력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자의 교제를 들었을 당시에는 이해하다가도, 나중에는 잘 모르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죠. 이 부분이 바로 양육자가 교제하며 보완해야 할 부분이고, 이것이야말로 조화로운 협력입니다. 양육자로서 문제를 발견하면 바로 해결해야지 일을 골라 해서는 안 되는 법이죠. 쉬운 건 하고, 귀찮은 건 남한테 미루고, 덜 수고스럽고 편안한 것만 탐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조건이나 이유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제게 맡겨진 새 신자라면 그들이 진리를 깨닫고 참도에 뿌리내리도록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죠. 이것이 제 본분이요, 진리를 실천하고 자신을 뉘우치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속이 환해졌습니다. 저는 바로 그 새 신자를 찾아가 그의 문제에 관해 교제했습니다. 이렇게 실천하니 전혀 반발심이 들지 않고,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겉보기에만 그럴듯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과 일,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 사람됨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그릇된 마음가짐과 관점, 패괴 성품이 저도 모르는 새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로 대체되는 것입니다.

저는 체험을 통해 저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강퍅한 사탄 성품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매사에 진리를 구하고 원칙대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서 얻게 된 효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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