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시는 제 팔자가 나쁘다고 원망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가난한 편이라 기초 생활도 보장이 안 됐습니다. 엄마가 이웃집에서 식량을 꿔서 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잦았고, 저는 천을 덧대어 기운 옷이나 바지를 입곤 했죠. 가난한 집 자식이라고 늘 남들에게 괴롭힘과 차별을 당했고, 그럴 때면 팔자가 안 좋아서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금 억울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죠. ‘지금은 좀 고생스럽지만 장래에 대학 나오고 좋은 직업을 얻으면 팔자도 바뀌고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종종 밤새워 공부했고, 시험 성적도 언제나 상위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제 팔자를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중등학교에 다닐 때, 저는 1600도 고도 근시 판정을 받았습니다. 거기다 백내장, 약시, 난시도 있어서 도저히 스스로 생활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학교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당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 생은 끝이고, 제 팔자는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듯 보였습니다. 속으로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하며 제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줄곧 의기소침한 정서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나서 저는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진리 교제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리더가 속으로 정말 부러웠습니다. ‘언젠가 나도 리더나 집사가 돼서 형제자매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우러름을 받으면 얼마나 멋있을까!’ 그렇게 되기 위해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공을 들이고, 교회에서 안배해 주는 사역도 무엇이든 받아들였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도 잘 참았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리더나 집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요.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저는 아무것에도 당선되지 않았습니다. 저와 함께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한 자매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 리더가 되었는데 말이죠. 자매가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자매는 하나님 집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교회에서 리더를 맡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우러름을 받는데, 난 아무리 노력해도 리더가 안 되는 걸 보면 팔자가 안 좋은가 봐.’ 가끔 제가 건의를 했는데 채택되지 않을 때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난 리더도 못 하는데, 팀에서 이렇게 따르면 되지 뭐. 세상에서든 하나님 집에서든 고생할 팔자인가 봐. 빛을 볼 날이 없네.’ 이런 생각 때문에 저는 서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전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제가 문서 방면에 특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된 리더가 저에게 문서에 관한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더군요. 속으로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드디어 내게도 빛을 볼 날이 왔구나 싶었죠. 저는 일하는 시간을 늘린 결과 본분 이행에서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발탁되었는데, 저는 너무 기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의욕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경추 질환이 점점 심해져서 본분을 정상적으로 이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현지 교회로 돌아와서 힘닿는 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밖에 없었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경추 질환은 완전히 뿌리 뽑기도 힘들고, 피곤하면 재발할 수도 있어. 내가 이런 병이 있다는 건 숙명적으로 다시는 중요한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앞으로 빛 볼 날이 없다는 거야. 난 팔자가 안 좋아서 뭘 해도 안 풀리고 정말 재수가 없어. 찬물을 마셔도 체한다니까!’ 그때부터 저는 본분 이행을 소극적으로 대하고 게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가망이 없다며 스스로를 규정했고요. 나중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스스로를 돌아봤습니다. ‘나는 왜 늘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사는 걸까?’ 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제 내적 상태를 조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중 어떤 부류의 사람은 항상 자기 팔자를 탓해서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농촌 혹은 빈곤 지역에서 살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그의 집에는 간단한 가구만 몇 개 있을 뿐, 귀중한 물건은 없다. 옷도 한두 벌이 전부이고, 낡아 빠졌더라도 입어야 한다. 평소에 맛있는 것도 잘 챙겨 먹지 못하고, 고기를 먹으려면 명절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예 헐벗고 굶주릴 때도 있다. 큰 그릇에 고기를 잔뜩 담아 놓고 먹는 것이 꿈이지만, 이루기가 어렵다. 과일 한 번 먹기도 힘들다. 그는 이러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대도시에 살면서 능력 있는 부모를 뒀고,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고, 입고 싶은 옷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누리고 싶은 모든 것을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고, 식견도 있는 사람들과 자기는 다르다고 느낀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남들은 팔자가 얼마나 좋아. 그런데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이지?’ 그는 항상 두각을 나타내려 하고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는데 바꾼다고 무엇이 얼마나 바뀌겠으며, 좋아진다고 한들 얼마나 좋아질 수가 있겠느냐?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해서는 뭘 하든 벽에 부딪히고 어디를 가든 꼭 괴롭히는 사람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재수 없다고 여긴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왜 항상 저열한 인간을 만나는 거야? 어려서 팔자가 사나웠던 건 그렇다 쳐도, 커서까지 팔자가 이렇게 안 좋다니. 나를 드러내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 기회가 없는 건 그렇다 쳐. 그냥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잘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도 못 이룬단 말이야? 잘 사는 게 나한테는 왜 이렇게 아득한 일인 거지? 상류층의 삶을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 최소한 도시 사람처럼 살기라도 하고 싶어.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고 2등, 3등 시민 취급을 당하지 않으면서. 적어도 누가 나를 부를 때 ‘어이, 이 자식아, 거기 너, 이리 와!’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 이름을 부르고 존칭을 붙여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그런 존칭 하나도 못 듣지. 무슨 팔자가 이 모양이람?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생해야 해?’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고생스러웠지만,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는 참도임을 알아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예전에 했던 고생은 다 가치 있는 것이었어. 모든 게 하나님의 지배이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야. 하나님의 행사는 너무나 좋았어. 그런 고생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거야.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운명도 바뀌겠지. 그리고 교회에서는 형제자매들과 평등하게 생활할 수 있어. 나를 ‘형제’ 혹은 ‘자매’라고 불러 주니 나한테도 존칭이 생긴 거야. 사람들한테 존중받는 기분이 들어.’ 운명이 바뀐 것 같고, 예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은 것 같고, 더는 팔자 사나운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하나님을 믿게 된 그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기로 다짐한다. 괴롭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매사에 다른 사람들보다 고생하고, 많은 사람의 지지와 높은 평가를 얻고자 노력한다. 나중에는 리더나 책임자, 또는 팀장으로 뽑힐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러면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 것 아니냐고, 그러면 운명을 바꾼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그는 실의에 빠진다. ‘나는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형제자매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어. 그런데 리더, 책임자, 팀장을 뽑을 때마다 왜 내 차례는 안 오는 거지? 생긴 게 너무 평범한 탓일까? 아니면 사람들 눈에 띌 만큼 비범한 일을 못 해서 그런가? 선거가 있을 때마다 한 줄기 희망을 품은 채 팀장으로 뽑혀도 좋겠다고 생각해. 난 하나님께 보답하고 싶어서 가슴이 뜨거운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실망하게 돼. 번번이 나와는 인연이 안 닿아. 왜 이렇지? 정말로 나는 한평생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건가? 어린 시절, 젊은 시절, 중년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쭉 이렇게 평범했어. 아무것도 이룬 게 없지. 야심이 없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야. 자질이 떨어지느냐, 그것도 아니야. 노력을 덜 한 것도 아니고 고생을 견디지 못한 것도 아니야. 나한테는 의지가 있고 목표가 있어. 더 나아가 야심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걸까? 결국은 내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운이 나쁘기 때문이야.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배하신 거야.’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고 느낀다. 평소에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떠한 건의 사항이나 관점을 내놓는 족족 반박당하고, 아무도 듣지 않고 안중에 두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의기소침해져서 이렇게 생각한다. ‘아, 다 내 팔자가 나쁜 탓이야! 어느 그룹에 가든 꼭 저열한 인간이 내 발목을 잡고, 날 짓누르려 들어. 어느 그룹에 가든 존중받지 못하고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해. 결국, 한마디로 말해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거지!’ 어떤 일이 임하든 그는 항상 자기 팔자 탓으로 돌리며,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점에 집중하고, 더 깊이 인식하고 납득하려 한다. 이러다 보면 그의 정서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진다. 본분을 이행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휴! 팔자가 이 모양인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어?’ 예배 시간에 다른 형제자매들은 모두 교제하는데 자기는 아무리 궁리해 봐도 별로 인식이 없으면 또 같은 생각을 한다. ‘어휴! 팔자가 이 모양인데 무슨 인식이 있겠어!’ 남이 자기보다 말을 잘하고, 교제하는 인식도 분명하며 빛 비춤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의 정서는 더 의기소침해진다. 남이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본분 이행에 성과를 내 형제자매들의 지지를 받고 발탁되는 것을 보면 그는 내심 씁쓸해진다. 남이 리더 일꾼이 된 것을 보면 그의 정서는 더욱더 의기소침해진다. 심지어는 남이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는 것만 봐도 자기는 그 사람만 못하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진다.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이 임하든, 어떤 환경이 임하든, 그는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로 대응한다. 남이 멋진 옷을 입은 것만 봐도, 남의 머리 모양이 보기 좋기만 해도, 그는 속상해하고 질투와 부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에는 언제나처럼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다. 그가 스스로 도출해 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어휴! 다 팔자를 잘못 타고난 탓 아니겠어? 내 얼굴이 지금보다 조금만 낫고, 남들처럼 번듯하고, 키가 크고, 몸매가 좋고, 옷도 잘 입고, 돈도 많고, 좋은 부모님이 있었다면 지금 같지는 않았을걸? 그랬으면 남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부러워하고, 질투하지 않았겠어? 결국은 내가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거야. 누구를 원망하겠어. 팔자가 나쁘면 엎어져도 코가 깨지고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법이야.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걸 어쩌겠어.’ 마찬가지로 그는 책망 훈계가 임하거나 형제자매의 지적, 비판, 건의를 받을 때도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로 대응한다. 요컨대, 자기한테 벌어진 일이든 아니면 주변의 일이든, 모든 일에 의기소침한 정서로부터 나온 갖가지 부정적 사상 관점과 태도, 입장으로 대응하는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제 내적 상태를 드러냈습니다. 전에는 떵떵거리고 살면서 모두에게 둘러싸여 우러름을 받는 것이 좋은 팔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사회 밑바닥 삶을 살면서 남들에게 차별과 멸시를 당하는 사람은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했고요.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먹는 것, 입는 것도 보장받지 못하고, 남들에게 존중도 못 받고, 그저 받은 것이라고는 차별과 비하밖에 없었던 저는 늘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했죠. 그런 상황에서 그저 열심히 공부해서 제 운명을 바꾸고,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학창 시절, 1600도 고도 근시 판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와야 했죠. 제 바람이 더는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척이나 낙담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뒤에는 평범한 신자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리더 일꾼이 되는 길을 추구했습니다. 지위를 얻으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우러름을 받을 수 있고, 지위와 명망을 얻는 것이 좋은 팔자라고 생각했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추구했지만 저는 몇 년이 지나도록 리더 일꾼이 되지 못했고, 저와 같이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자매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돼 리더가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더욱더 제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했죠. 가끔 형제자매들에게 건의를 해도 채택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우러름과 존중을 받지 못하자, 저는 다시는 관점을 발표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구석에 가둔 채 안 좋은 제 팔자를 속으로 원망했습니다. 나중에는 문서 본분에 발탁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경추 질환으로 본분 이행에 심하게 지장이 생겨 현재 교회로 와서 힘닿는 대로 본분을 이행하는 수밖에 없었죠. 제가 재수 없는 것은 결국 팔자가 안 좋아서 그렇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빛을 볼 날은 없을 테고, 더 이상 발탁되고 중용되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우러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 때문에 억압된 정서로 생활하면서, 본분도 진지하고 세심하게 이행하지 않고 대충 넘기면서 하루하루 보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늘 지위를 추구하며 남들에게 둘러싸여 우러름을 받고 싶어 했고, 그런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안 좋은 제 팔자를 원망하고, 본분 이행에도 기운이 빠지고, 예배 교제 때도 적극적으로 관점을 피력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환경을 만나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도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은 탓에 생명 진입이 정체되었습니다. 이런 제 소극적인 상태는 하나님께 소리 없이 대항하는 것이잖아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말끝마다 매일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하시는 것이라고 했지만, 제 뜻에 어긋나는 일이 닥치면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도 믿지 않았던 것이죠. 이런 제 관점은 불신파의 관점이 아닌가요?
그 후, 저는 계속해서 구했습니다. ‘왜 나는 늘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할까? 내 이런 관점은 대체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봤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한 운명이 대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사람의 육적 안목이나 무속인의 안목으로 보고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한 사람이 일생 동안 부귀영화를 얼마나 누렸고, 고생을 얼마나 했으며, 명리와 장래를 추구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는지 아니었는지에 근거해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이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 물론, 이는 많은 사람이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가늠하더냐? 세인들이 무엇으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하더냐? 주요한 근거는 그 사람의 일생이 순조로웠는지, 부귀영화를 누렸는지, 상류층의 삶을 살았는지, 평생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얼마나 즐겼는지, 그리고 수명이 얼마나 길었는지, 어떤 직업에 종사했는지, 힘들게 살았는지 아니면 편안하게 살았는지 등등이다. 이러한 것들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한다. 너희도 이렇게 가늠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너희 다수는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임하거나, 고난의 날들이 임하거나, 혹은 상류층의 삶을 누리지 못하면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일생의 운명이 어떨지는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에 정했으므로 바꿀 수 없다. 팔자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도 다르고, 환경에 따라서, 사람의 자아 감각, 추구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러므로 ‘팔자’는 좋고 나쁨과 관계가 없다. 너는 아주 힘들게 살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무슨 대단한 걸 바라지 않아.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다면 만족해. 살면서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인들이 자주 하는 말도 있잖아. 비바람을 겪지 않고 어떻게 무지개를 보겠느냐고, 고생하는 것도 값진 일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 정도가 무슨 고생이야? 이건 팔자가 나쁜 게 아니야. 하늘이 내게 약간의 고통과 고난을 주고 단련시키는 건 나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야. 나는 팔자가 좋은 거라고!’ 그런가 하면 고생은 나쁜 일이고 팔자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고생 없이, 생활이 안락하기만 해야 팔자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두고 개인마다 관점이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팔자’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 팔자가 좋다, 혹은 팔자가 나쁘다는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말은 없다. 너는 하나님을 믿으니 곧 팔자가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른길을 걷지 않아 징벌을 받고, 드러나고, 도태됐을 때는 대체 팔자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드러나고 도태될 일도 없다. 이방인들과 종교계에서는 사람을 드러내거나 분별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제명되거나 도태된다는 말도 없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그 사람은 팔자가 좋은 것이겠지만, 마지막에 징벌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다시 팔자가 안 좋아진 것이냐? 한순간 팔자가 좋았다가, 또 한순간 팔자가 나빴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쪽인 것이냐? 팔자는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논할 수 없는 일이다. 전부 하나님이 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안배는 모두 훌륭하다. 다만, 사람마다 운명의 궤적이라든지 처한 환경이 다르고, 각자에게 임하는 사람과 일이 다르며, 한평생 경험하는 인생의 궤적이 다른 것이다. 저마다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생활 환경과 성장 배경을 안배했다. 한평생 겪는 일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이른 바 좋은 팔자나 나쁜 팔자는 없다. 하나님이 모두 다 안배해 두었으며, 전부 하나님의 행사다. 하나님의 행사라는 관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훌륭하고 옳다. 다만, 개인의 취향, 느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안락한 생활, 명리, 명망, 세상에서의 성공, 개인적 영달을 선택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가져야 좋은 팔자라고 생각한다. 평생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면서 언제까지나 사회 밑바닥에 머문다면 팔자가 좋지 못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이방인 혹은 세인들이 세상을 추구하는 각도에서, 세상에서의 생존을 추구하는 각도에서 논한 것이다. 그래서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이 생겼다.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운명에 대한 인간의 편협한 인식과 깊이 없는 감성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또한 사람이 육적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마나 누렸는지, 명예와 이익을 얼마나 얻었는지 등등을 논지의 출발점으로 삼는 탓에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안배하고 주재한다는 점에 입각해서 이야기하자면,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존재할 수가 없다. 맞지 않느냐? (맞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라는 각도에서 사람의 운명을 논한다면 하나님의 행사는 전부 훌륭하고 개개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전생과 현생의 인과가 있고, 하나님의 정함과 주재,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안배가 있기에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면 이러한 방면에서 볼 때, 사람은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멋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정곡을 찌르듯 제가 생각하는 ‘좋은 팔자, 안 좋은 팔자’라는 관점이 그릇되고 터무니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람은 일생이 순조롭고 형통한가, 부귀영화를 누리는가, 세상에서 명예와 이익을 둘 다 손에 넣는가 등을 근거로 자기 운명의 좋고 나쁨을 가늠합니다. 개인의 기호와 느낌을 근거로 판단하는 것은 이방인의 관점이며,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좋은 팔자, 나쁜 팔자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배하시는 한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의 전생, 현생과 관계가 있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운명으로 정하고 안배하시죠. 생각해 보니 일을 바라보는 제 관점은 이방인과 같았습니다. 부귀영화, 출세, 부와 명예를 추구하면서 남들에게 둘러싸여 우러름을 받는 것이 좋은 팔자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온 저는 사회 밑바닥에서 가난하게 생활했고, 남들로부터 우러름과 존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건 안 좋은 팔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보니 그건 틀린 관점, 사탄에게서 온 관점이고, 운명에 대한 이방인들의 협소한 인식이었습니다. 명예와 이익, 그리고 막대한 자산을 가진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남들에게 둘러싸여 우러름을 받는 것이 팔자가 꽤나 좋아 보이지만, 마음이 공허하고 고통스러워서 삶에서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마약을 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권세를 믿고 멋대로 날뛰며 불법 행위를 일삼다가 결국 쇠고랑을 차고 지위도 명예도 다 잃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사람이 팔자가 좋은 걸까요? 팔자가 좋고 나쁨은 사람이 인생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느냐, 고생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일생이 가난한가 부유한가는 모두 하나님께서 운명으로 정하고 안배하신 것이죠.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에 맞게 한 사람의 생존 궤적을 정하셨고, 하나님이 안배하신 것은 모두 훌륭합니다. 하나님에게는 팔자가 좋고 나쁘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시 저 자신을 생각해 봤습니다. 비록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살면서 우여곡절과 좌절을 겪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런 체험은 고생을 견디려는 제 의지를 단련시켜 주었기에 제 인생에서 값진 보물입니다. 또한, 저는 명예욕과 지위욕이 지나쳐서, 만약 제 바람이 실현되어 대학에 진학하고 부와 명예를 둘 다 손에 넣었다면, 분명 사악한 시류에 휘말렸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제가 창조주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였을까요? 그리고 제가 리더에 선출되지 못한 것 역시 하나님이 정하신 일입니다. 비록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력도 있고, 형제자매들이 안고 있는 문제도 볼 줄 알지만, 사역 능력이 부족해서 일이 많아지면 해치우지 못합니다. 리더가 되면 그와 관련된 사역이 많고,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교회 사역에 피해를 줄 수가 있는데 말이죠. 지금 이행하는 본분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저 자신과 교회 사역에 모두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이 제게 상황을 마련해 주신 이면에는 하나님의 고심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 저는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안고 살아가며 떵떵거리는 생활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제 바람대로 되지 않고, 욕망이 채워지지 않자 팔자가 안 좋다고 원망하며 의기소침한 정서로 지내면서 하나님께 대항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이방인의 그릇된 관점을 신봉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 것이었죠! 이 점을 인식하고 나니 조금 겁이 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당신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교만하고 비이성적이었습니다! 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바로잡고 당신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다시는 당신께 대항하지 않겠습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부정적 정서에 빠져 있는 위험과 결과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더라도, 포기하고 헌신하며 하나님을 따를 수 있더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집에서 자유롭게,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본분을 이행할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럴 수가 없겠느냐?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사상 관점이 그에게 극단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극단적 정서가 그의 사유 판단과 사유 방식, 그리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극단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각도, 치우친 각도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듯 극단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각도에서 문제를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탓에 반복적으로 소극적인 정서의 작용과 영향 아래서 생활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그 결과 어떻게 생활하든 지쳐 보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한다. 어떠한 생활 방식을 선택하든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오래 믿었으면서도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여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에 집중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것은 더욱 어림도 없다.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결론은 항상 자기 팔자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극심하게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겼고, 사람 자체가 의욕을 잃었고, 무기력해졌고, 산송장 꼴이 되어 활기라고는 없어졌고, 적극적이거나 낙관적인 태도가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본분을 위해,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기가 마땅히 바쳐야 할 충성심을 바치겠다는 의지나 끈기는 더더욱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러기는커녕 무성의한 태도로 마지못해 살아간다. 무지몽매하고 흐리멍덩하게, 심지어는 지각없이 허송세월을 보낸다. 언제까지 그렇게 대충 살아갈 수 있을지 자기도 모른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이렇게 자신을 타이른다. ‘어휴, 되는대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냥 이렇게 살자! 언젠가 버티지 못할 때 교회에서 날 출교시키고 도태시키겠다면 그냥 도태시키라지 뭐. 팔자가 이런 걸 어쩌겠어!’ 보아라. 말하는 것조차 이토록 무기력하다.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는 단순한 기분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사상, 마음, 추구하는 바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제때에, 최대한 빨리 의기소침한 정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것이 네 일생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네 일생을 망치고, 너를 죽음으로 끌고 간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진리를 얻어 구원받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멸망에 빠진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의기소침은 간단하고 일시적인 패역이 아니요, 일시적으로 드러내는 패괴 성품도 아니며, 일종의 패괴된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소리 없는 반항이고, 하나님이 안배한 운명에 불만을 품고 행하는 소리 없는 반항이다. 일종의 간단한 부정적 정서라고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초래하는 결과는 패괴 성품보다 더 심각하다. 그러한 정서 속에서는 네가 응당 이행해야 할 본분과 네 생활, 네 인생을 적극적이고 올바른 태도로 마주할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네가 의기소침함으로 인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늘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여기는 이런 그릇되고 극단적인 사상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하고, 자기가 마주한 사람이나 일을 대한다면, 일종의 소극적이고 억압적인 부정적 정서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본분을 이행할 때도 어리석고, 불성실하고, 정성을 들이지 않고, 향상심도 없는 등 이런 의기소침한 정서에 사로잡히게 되고, 갈수록 타락할 수밖에 없고, 결국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런 사상 관점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는 정말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도 깨달았죠. 저는 늘 좋은 팔자, 안 좋은 팔자라는 관점을 근거로 일을 바라봤습니다. 눈에 문제가 생겨 학교를 그만두는 바람에 부와 명예를 둘 다 얻으려는 바람이 완전히 사라지고, 부자가 되어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삶을 살 수 없게 되자 고통에 몸부림치며 삶의 희망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한 뒤에도 여전히 높은 지위를 추구했습니다. 발탁되지 않고 리더로 선출되지 않자 제 결점을 반성하거나 제 주제를 인식하지는 않고 계속해서 팔자가 안 좋다고 원망하며 소극적이고 타락한 상태로 지냈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으려 했죠. 경추 질환이 생긴 뒤로 저는 다시는 빛을 볼 날이 없을 거라며 본분 이행을 소극적으로 대하고, 게을리하고, 자포자기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좋은 팔자, 안 좋은 팔자’라는 사상 관점에 단단히 얽매여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도 순종하지 못하고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했죠. 언제나 팔자가 안 좋다고 말하는 이방인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들은 돈도 힘도 없이 사회 맨 밑바닥에서 생활하며 남들에게 우러름과 존중도 못 받고, 늘 괴롭힘을 당합니다. 체면을 세우기 위해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을 바꿔 보려고 온갖 궁리를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목숨을 버릴 생각마저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10년을 힘들게 공부했는데도 부와 명예를 얻지 못하자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심한 스트레스로 정신이 이상해지기도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에 따라 살면 자신은 물론 마주한 사람과 일, 사물을 정상적으로 대할 수 없고, 줄곧 고통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상 관점은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이용해 사람을 미혹하고 해칩니다. 그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고 타락하게 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다가 결국 하나님께 도태되고 말죠. 이 부분을 인식하고 나서 깨달음이 조금 생겼습니다. 저는 다시는 ‘좋은 팔자, 안 좋은 팔자’라는 사상 관점으로 일을 바라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다가는 정말 저 자신을 망치고 말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어떤 환경을 마련하시든 거기에는 당신의 고심이 있으니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저의 패괴를 해결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마음으로 본분을 이행하겠습니다.”
구하는 중에 또 하나님의 말씀을 봤습니다. 『사람은 어떤 태도로 운명을 대해야 하느냐? 창조주의 안배에 순응하고, 창조주가 이 모든 것을 안배한 목적이 무엇이며 그 의의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열심히 구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일생에서 네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피조물의 본분, 책임, 의무를 다하며, 네 삶을 더욱 유의미하고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창조주가 기쁘게 받아들이고 기억하게 해야 한다. 물론 네가 구하고 노력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좋다. 요컨대, 지음 받은 인류가 운명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함부로 평론하고 정의하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게 아니며, 반항하고, 선택하고, 바꾸려 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구하고, 모색하고, 순응한 다음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배치한 생활 환경과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네게 가르쳐 준 처신 방식을 구하고, 하나님이 네게 걸으라고 한 길을 구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네게 안배한 운명을 경험한다면 마지막에 너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주가 네게 안배한 운명을 경험한다면 네가 맛볼 것은 슬픔, 근심, 눈물, 고통, 좌절, 실패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기쁨, 평안, 위안을 체험하고 창조주가 베풀어 주는 진리상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체험하리라는 점이다. 또한, 인생길에서 네가 막막함을 느낄 때, 네가 좌절과 실패를 마주했을 때, 선택을 마주했을 때, 창조주의 인도를 체험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유의미한가에 대한 인식과 경험, 이해를 얻는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체험하는 과정에서 고난을 겪을 때도 있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운명을 대할 때는 반항하거나 바꾸려고 할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창조주가 정하신 운명에 순응하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사람과 일, 사물에서 공과를 배워 진리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진정으로 편안하고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리더를 하지 못한 것에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습니다. 사역 능력을 갖추지 못한 저는 힘닿는 대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평범하게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 제 위치에 가장 어울렸죠. 지금은 교회에서 제게 양육에 관한 본분을 안배했는데, 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 방면에 관한 말씀을 많이 읽고 복음 전파 원칙과 사람을 분별하는 원칙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제 패괴 성품도 조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마련하신 환경에 순종할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실제적인 수확이자 가장 귀중한 보물입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일생은 하나님이 안배하고 정하십니다. 거기에 순종하며 여러 환경에서 진리를 추구하여 얻고, 성품이 변화해서 하나님께 구원받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좋은 운명을 가진 것입니다. 그 뒤로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고, 현재의 본분에 충성을 다하는 한편 좌절과 실패를 만났을 때는 스스로를 많이 반성하고 공과를 배웠습니다. 이렇게 실행하니 평안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근, 리더가 우리에게 인재를 제공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발탁될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이야. 하나님나라 복음 확장에도 한몫할 수 있고 말이야. 내가 발탁되고 형제자매들이 그걸 알면 분명 날 부러워하고 우러러볼 거야.’ 그런데 리더가 저는 질병 때문에 당분간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삼가는 게 좋겠다고 했죠. 속으로 조금 의기소침해지고 원망스러웠습니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다들 건강해서 발탁되어 훈련 기회도 더 많이 얻는데, 나는 집에 남아서 얼굴을 내밀거나 돋보일 기회도 없네. 정말 팔자도 사나워라!’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제가 또 잘못된 내적 상태에 빠져 살고 있음을 의식하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위를 예정해 준 적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와 길, 생명을 공급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 평범한 피조물이 되라는 것이지 지위 있고 명망 있고 만인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각도에서 보든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다. 네가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지위를 추구하든 그 길은 여전히 잘못된 것이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든 네가 지위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네게 주지 않으면 너는 쟁취할 수 없다. 만약 네가 끝끝내 쟁취하려 든다면, 그 결과는 오직 한 가지, 드러나 도태되는 죽음의 길뿐이다. 알겠느냐?』(<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3)> 중에서), 『하나님 집에서는 수많은 적그리스도와 악인을 도태시켰다. 일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적그리스도가 실패한 말로를 보고는 적그리스도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또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또한, 평범하게 따르는 사람이 되어 오로지 진리 추구와 본분 제대로 이행하는 것에만 매진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설령 하나님이 그를 봉사자나 미천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 눈에 비천하게 보이는 사람, 보잘것없는 따르는 자일지라도 마지막에 하나님에게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런 사람이 바로 훌륭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원래 보잘것없는 피조물이라 아무런 신분과 지위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성을 갖춘 사람이 되어 착실하게 자신의 본래 자리를 지키고, 진리를 얻고 생명 성품이 변화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입니다. 명예와 지위만 추구한다면, 결국 하나님께 도태되고 말죠. 생각해 보니 전에 제가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며 팔자가 좋다고 생각했던 사람 중에도 도태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례로 저와 협력했던 자오쉐(趙雪)는 은사가 있고 말주변도 좋아서 나중에 발탁되어 중용되었죠. 하지만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명예와 지위만 추구해서 사역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교란했고, 교체되어도 회개하지 않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탓에 출교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실패는 제게 경각심을 주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명예와 지위만을 추구하다가는 하나님께 드러나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제가 건강 문제로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속으로 원망을 품은 것은 역시 명예욕과 지위욕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하면 멋있고 체면도 서고, 이렇게 사는 것이 팔자가 좋은 줄 아는 거죠. 저는 아직도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고 있고, 제가 가는 길은 하나님께 맞서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제가 피조물로서 밖에 나가든 집 안에 있든 관계없이 자기 본분을 잘 이행하고,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서 착실히 제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저는 이번 체험을 통해 제 그릇된 관점을 조금 인식했고, 또 늘 제 팔자가 안 좋다고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계속 그렇게 하면 구원받는 기회를 놓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내려놓고, 순종하고,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