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일꾼의 직책(17)
제12조 하나님 사역과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를 방해하고 교란하는 각종 사람, 일, 사물을 제때에 정확하게 발견하고 이를 저지 및 제한하여 상황을 전환시키며, 이와 동시에 진리를 교제하여 하나님의 선민이 그 속에서 분별력을 키우고 공과를 배우도록 한다(5)
교회 생활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각종 사람, 일, 사물
9. 소극성을 퍼뜨린다
오늘은 이어서 리더 일꾼의 직책 제12조, ‘하나님 사역과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를 방해하고 교란하는 각종 사람, 일, 사물을 제때에 정확하게 발견하고 이를 저지 및 제한하여 상황을 전환시키며, 이와 동시에 진리를 교제하여 하나님의 선민이 그 속에서 분별력을 키우고 공과를 배우도록 한다.’를 교제하겠다. 교회 생활에서 발생하는 각종 방해와 교란의 문제에 대해 지난번에는 여덟 번째 항목, ‘관념을 퍼뜨린다’를 교제했다. 오늘은 아홉 번째 항목, ‘소극성을 퍼뜨린다’를 교제하겠다.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도 일상생활에서 종종 들리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소극성을 퍼뜨리는 측면의 행위나 말이 교회 생활에서 등장할 때에도 제한되고 저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 지장을 주고 교란하고 손해를 끼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은 부정적인 사물이며, 교회 생활을 교란하는 다른 행위나 행동 방식, 말과 성질상 같아서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교란이 되고 부정적인 영향을 형성한다. 소극성을 퍼뜨리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이로움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뿐이고,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데 지장을 주기도 한다. 따라서 소극성을 퍼뜨리는 일이 교회에서 발생할 때에도 똑같이 저지하고 제한해야지 내버려두거나 제창해서는 안 된다.
(1)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이란 무엇인가
먼저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분간해야 할지를 살펴보자.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느냐? 사람의 어떤 말과 모습이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이겠느냐? 우선, 사람이 퍼뜨리는 소극성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진리에 반하는 부정적인 것들로, 전부 패괴 성품에서 나온 것들이다. 사람은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기에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다. 그런 어려움으로 인해 소극적인 생각과 소극적인 것들이 드러난다. 이런 것들은 진리를 실행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사람의 진리 실행에 영향과 지장을 주는 사상 관점에 속하며, 100% 소극적인 측면의 것들이다. 이 소극적인 사상 관점들이 듣기에는 아무리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고 이치에 맞아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이해가 아니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적 인식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소극적인 측면의 것들이자 부정적인 사물이다.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의 속셈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자신을 위해 수많은 객관적인 이유를 찾아 사람들의 동정과 이해를 얻어 내는 데 있다. 동시에 이런 소극적인 말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들의 자발성에 각기 다르게 영향을 미치고 타격을 주며, 심지어는 많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게 가로막기도 한다. 이런 결과와 이런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오기에 우리는 더더욱 이 소극적인 것들을 부정적인 사물이라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자 전적으로 진리를 적대시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소극성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채 수시로 소극적이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사람의 진리 추구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틀린 생각이다. 사실 영향이 매우 크다. 사람이 지나치게 소극적이 되면 배반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 무서운 결과는 소극성 때문에 초래된다. 그럼 소극성을 퍼뜨리는 일을 어떻게 분별하고 인식해야겠느냐? 간단하게 말해서,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은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고, 사람의 진리 실행을 가로막는 것이다. 즉, 온화한 수법, 겉보기에 매우 정상적인 것 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쓰러뜨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확실히 사람을 매우 심하게 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은 부정적인 사물에 속하며, 하나님께 정죄받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소극성을 퍼뜨리는 행위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석이다. 그럼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에서 ‘소극성’의 성분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어떤 것이 소극적인 것들이며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교회 생활에 교란과 파괴가 되겠느냐? 소극성에는 무엇이 포함되겠느냐?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가 교제하는 말에 소극적인 성분이 들어 있겠느냐? 만약 사람이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 환경에 대한 그의 인식에 소극적인 성분이 있겠느냐? 그가 자신의 체험적 인식을 나눌 때 거기에 소극적인 성분이 있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나 주위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올바르게 대하며, 구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다면 발생한 일들에 대한 그의 인식과 이해, 체험에 소극적인 성분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절대 있을 리 없다. 이 몇 가지 측면으로 보아 소극성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소극성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소극성에 사람의 불복과 불만, 원망, 분노와 같은 성질의 것들이 담겨 있지 않겠느냐? 심각한 경우 반발심과 반항, 심지어 대항까지 담겨 있는데, 이런 성분이 담겨 있는 말을 퍼뜨리는 것은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모습들로 보아 사람이 소극성을 퍼뜨릴 때 마음속으로 여전히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느냐? 결코 그럴 리 없다. 육을 저버리고 소극성을 해결하려는 뜻이 있겠느냐? 없다. 반발심과 거역, 대적만 있을 뿐이다. 사람의 마음이 이런 것들로 가득 차고 이런 소극적인 것들에 점유되면 하나님에 대해 반발심과 거역, 반항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욱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으며, 심한 경우 하나님을 의심하고 부인하고 배반할 것이다. 이는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니겠느냐? 자주 소극적으로 변하는 사람은 모두 소극성을 퍼뜨릴 수 있는데,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주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날 수 있다.
‘소극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어떤 사람이 소극적이라는 것은 정서가 몹시 침체된 상태에 빠져 기분이 매우 좋지 않고, 정서가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차서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거나 긍정적인 태도가 없는 것이며, 또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협력하거나 구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지도 않으며 정서가 매우 의기소침하다는 것이다. 의기소침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인성의 긍정적인 것을 의미하겠느냐?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겠느냐? 사람이 존엄 있게 살아가는 것, 인성의 존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것들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결심이나 의지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현재 상황과 어려움에 대해 불만을 가득 품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현재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느냐? 사람 마음이 불복으로 점철되어 있고 반항하려 하며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거나 현재 상황을 바꾸고 싶어 하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소극적일 때 현재 상황에 대해 드러내는 일부 내적 상태다. 어쨌든 사람이 소극적일 때 현재 상황이나 하나님의 안배에 대해 갖는 불만은 단순히 오해했다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인식하지 못한다거나 체험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만이 아니다.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질이나 시간의 문제일 수 있는데, 이는 인성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몇몇 객관적인 원인 때문일 수 있지만, 이런 것은 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똑같이 체험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간파하지 못한 일, 혹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체험하지 못하는 일이 닥치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기다릴 뿐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남에게 구하고 교제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와 달리 이런 몇 가지 실행의 길이 없고 이런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기다리거나 구하거나 남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오해하며, 자신에게 닥친 이런 일과 환경이 자기 염원이나 기호,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복과 불만, 반발심과 원망, 반항과 겨룸 등 부정적인 것들이 생겨난다. 이 부정적인 것들이 생겨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면서 자신의 내적 상태와 패괴를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하나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 남에게 구하고 교제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반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고 정확하다고 고집을 부리고, 마음속에 불복과 불만을 품은 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정서 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정서 속에 빠졌을 때, 하루 이틀은 참고 견딜 수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마음속에 관념과 상상, 윤리와 도덕, 문화, 전통, 지식 등 많은 것이 생겨난다. 그는 이런 것들을 이용해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평가하고 따져 보고 이해하는데, 사탄의 굴레에 완전히 빠져서 온갖 불만과 불복의 내적 상태가 생겨난다. 그 후에는 이런 패괴된 내적 상태에서 또 각종 그릇된 사상 관점이 생겨난다. 이 소극적인 것들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통제될 수 없기에 그는 기회를 봐서 이런 것을 쏟아 내고 발산하려 한다. 마음이 소극적인 것들로 가득할 때 그가 “제 안에는 소극적인 것들뿐이에요. 저는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말을 하고 싶은데 참지 못하겠으면 벽을 보고 말하거나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대상을 찾아가 말할 겁니다.”라고 말하겠느냐? 그가 그런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기회를 틈타 들어 줄 사람들을 찾은 다음 그의 이 소극적인 관점이나 말, 정서를 받아들이게 하고, 이를 통해 마음속 불만과 불복, 분노 등 여러 소극적인 정서를 쏟아 낸다. 그는 교회 생활을 할 때가 감정을 쏟아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라고, 교회는 그의 소극성이나 불만과 불복을 쏟아 낼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다. 듣는 사람이 많아서 그의 말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교회 사역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극적인 것을 발산하는 사람은 뒤에서도 참지 못하고 늘 자신의 소극적인 말을 쏟아 낸다. 그는 듣는 사람이 적으면 말할 때 힘이 빠지고, 다들 모여 있으면 더 신이 나서 말한다.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의 정서나 내적 상태 등 여러 측면을 볼 때,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진실을 간파하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의심을 해소하게 하려는 것도, 자신을 인식하고 사람의 패괴 본질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도, 사람의 패역과 패괴라는 문제를 해결해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의 목적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소극성을 퍼뜨림으로써 자신의 정서를 쏟아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상태나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 겨루기 등과 같은 굴레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극성을 퍼뜨리는 행위는 교회 생활에서 반드시 제지되어야 한다.
(2)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의 각종 내적 상태와 모습
① 교체된 것이 불만스러울 때 소극성을 퍼뜨린다
소극적인 정서나 모습은 대체로 이렇다. 이런 것들을 교제하고 나면 사람은 자신과 대조하여 현실 생활 속의 어떤 모습, 어떤 말, 어떤 방식이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인지, 사람이 어떤 일들로 인해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서 소극성을 퍼뜨리게 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일들 때문에 소극적으로 변하겠느냐? 흔히 볼 수 있는 소극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교체되거나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 사람 마음속에 소극성이 생겨납니다.) 교체되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이고, 책망과 훈계를 받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이다. 교체되면 어째서 소극적으로 변하겠느냐? (어떤 사람은 교체되고 나서도 자신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위가 자신을 망쳤다고 생각해서 “높이 오를수록 더 심하게 다쳐요.”라고 말하며 일부 소극적인 관점을 퍼뜨립니다. 그는 교체된 그 일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속으로 불복합니다.) 그의 내면에 불복과 불만이 있는 것, 그것은 소극적인 정서이다. 원망도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생도 겪고 대가도 치르며 줄곧 힘들게 사역했지만 몸을 쓰고도 좋은 소리 못 듣고 교체까지 당했다고 생각해서 “리더 역할은 쉽지 않네요. 리더가 되는 사람은 재수가 없는 사람이고, 결국 다 교체되고 만다고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퍼뜨리는 것이 바로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이다. 그저 불복하고 불만을 품을 뿐 퍼뜨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소극성을 퍼뜨리는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불복과 불만에서 시작해 점차 원망의 정서가 생겨나고 자신의 자질이 부족해서 사역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런 다음 자신의 억지 논리를 펼치기 시작하고 이치를 따질 때 온갖 주장과 관점, 핑계와 이유, 해명과 변명 등이 생겨난다면 이런 말들은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에 속한다. 일부 거짓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아서 교체되어도 속으로 불복하고 불만을 품으며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 속으로는 늘 ‘나를 교체해 버리다니, 누가 리더가 될 수 있나 두고 보겠어.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못 하는 사역은 남들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느 부분에서 불복하느냐? 그는 자신은 자질이 부족하지도 않고 사역도 적잖이 했는데 왜 자신을 교체했느냐고 생각한다. 이것이 거짓 리더의 속마음이다. 그는 자신이 과연 실제적인 사역을 했는지, 실제 문제를 얼마나 해결했는지, 교회 사역이 마비된 것이 사실인지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일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진리 실제가 없다거나 자신이 일을 간파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은 많은 사역을 했으니 거짓 리더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가 속으로 불복하고 불만을 품는 가장 큰 이유다. 그는 늘 생각한다. ‘내가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하면서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잔 게 다 누구를 위해서였는데? 나는 하나님을 믿은 뒤로 집도 버리고 일도 포기한 데다가 체포되어 옥살이할 위험까지 무릅쓰며 본분을 이행했어.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다고! 이제 와서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았다며 나를 교체하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해! 공로는 없지만 나름 고생했고, 고생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처럼 이런 자질을 갖추고 나처럼 대가를 치르며 사역하는데도 기준에 맞지 않고 교체된다면 내가 봤을 때 기준에 맞는 리더는 거의 없을걸!’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 아니겠느냐? 그중 순종하는 뜻이 담긴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진리를 구하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자신을 반성하는 말이 한 마디라도 있느냐? ‘내가 사역하는 것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데, 대체 어느 부분이 부족한 거지? 내가 어떤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았지? 내게 어떤 거짓 리더의 모습이 있지?’ 그가 이렇게 자신을 반성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가 하는 이런 말들은 다 어떤 성질이냐? 원망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자신을 해명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가 자신을 해명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남들의 동정이나 이해를 얻으려는 것 아니겠느냐? 더 많은 사람이 자기 편을 들어 주고 자기 대신 억울함을 호소해 주길 바라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는 누구에게 대항하고 있는 것이냐?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고 대항하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에 원망이 가득하고 반발과 패역이 가득할 뿐 아니라 소극성을 퍼뜨림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그를 이해하고 동정하도록 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그와 마찬가지로 소극성이 생겨나도록 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반발심, 반항, 혹은 대항이 생겨나게 하려고 한다. 그가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의 목적은 바로 더 많은 사람에게 소위 실상을 알려 주어 사람들이 그는 억울하고 그의 행동은 틀리지 않았고 그는 교체되어선 안 되며 그를 교체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그의 편을 들게 해서 그의 체면과 지위, 명성을 되찾는 것이다.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는 교체되고 나면 모두 이렇게 소극성을 퍼뜨려 남들의 동정을 얻으려 하지,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진실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 사실은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는 모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들이 드러나 도태된 후에도 진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 아무도 그들이 무언가를 뉘우치거나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들이 진실로 회개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영원히 자신을 인식할 줄 모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것 같다. 이 사실로 보면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가 교체되는 것은 완전히 적절하고 조금도 억울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자신을 전혀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않고 뉘우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점을 근거로 그들의 적그리스도 성품이 심각하며 그들은 모두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어떤 거짓 리더는 교체되고 나서도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자신을 반성하거나 인식하지도 않으며 순종하는 마음과 태도도 전혀 없다. 도리어 하나님이 그들에게 불공평하다며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원망하고, 온갖 궁리를 다 짜내 갖은 이유와 핑계를 찾아 자신을 위해 해명하고 변명한다. 심지어 “저는 예전부터 리더가 되기 싫었어요. 리더 역할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거든요. 잘해도 상을 못 받고, 잘하지 못하면 교체돼서 평판이 나빠지는 데다가 형제자매에게도 버려지니 체면이 말이 아니죠. 앞으로 어떻게 남들 앞에서 살아갈 수 있겠어요? 이제 교체되고 나니 리더 일꾼 역할이 쉽지 않다는 걸 더욱 확신하게 됐어요. 이건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는 못 듣는 일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리더 일꾼이 되면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진리를 구하려는 뜻이 있느냐? 그는 하나님 집에서 그에게 리더 일꾼을 맡도록 안배한 일에 대해 증오심이 생기고 나서 이런 말로 다른 사람을 미혹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말은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느냐? 많은 사람의 생각과 사상, 및 이 일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이 말에 영향받고 교란당할 것이다. 이게 바로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이 사람에게 가져오는 결과이다. 예를 들어, 네가 리더가 아니라면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할 것이다. ‘그러게 말이야. 나는 절대 리더로 뽑히면 안 돼. 혹시라도 리더로 뽑히면 잽싸게 여러 이유와 핑계를 대며 사양해야지. 나는 자질이 부족해서 사역을 못 한다고 말해야겠어.’ 리더가 된 사람들도 이 말을 들으면 영향을 받아서 속으로 생각한다. ‘정말 끔찍해! 나도 나중에 저 사람 같은 말로를 맞이하는 거 아니야? 저런 말로를 맞이한다면 난 절대 리더를 맡지 않겠어.’ 이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정서와 말이 사람들에게 교란이 되지 않겠느냐? 틀림없이 교란이 된다. 어떤 사람이든, 자질이 좋은 사람이든,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든 이 말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선입견에 사로잡혀 이 말을 받아들일 것이고, 정도는 다르지만 이 말에 영향받을 것이다. 영향받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많은 사람이 리더가 되는 일과 리더가 되었다가 교체되는 일을 올바르게 대하지 못하고, 순종하는 태도가 없으며, 항상 하나님을 오해하고 경계하는 마음을 품은 채 이 일에 부정적인 정서를 갖게 되어서 이 일을 언급하면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특히 두려워한다.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사탄의 시험이나 미혹에 빠진 것 아니겠느냐? 이는 분명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에게 미혹되고 교란당한 것이다.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이 퍼뜨리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인식도 아니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 순종함으로써 생겨난 체험과 경험도 아니라 사람의 패괴 성품이나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듣고 나면 사람은 교란당한다. 사람이 퍼뜨리는 소극성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부정적인 방해 작용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진리를 구하여 피해를 가볍게 입는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저항력도 없어서 설사 이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더라도 저도 모르게 방해를 받고 심한 피해를 본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하나님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교제하고 어떻게 요구하든 사람은 일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반면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이 하는 말은 마음에 새긴 채 긴장을 늦추지 말라며 늘 스스로에게 경고한다. 마치 이런 소극적인 말이 자신의 보호막이나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사람은 경계심과 오해를 내려놓지 못한다. 진리나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진입도 없고 진리 실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소극적인 말에 대해 아무런 분별력이 없고 어떤 저항력도 없어서 결국 이런 소극적인 말에 속박되고 얽매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이는 해를 입은 것 아니겠느냐? 어느 정도로 해를 입은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은 귀담아듣지도 않고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사람이 퍼뜨린 소극적인 말이나 불만과 불복, 원망이 담긴 말은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여겨 마음속에 간직한다. 이런 말들로 자신의 생활을 지도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한다. 이는 사탄의 굴레에 빠진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사탄의 굴레에 빠져 사탄에게 사로잡힌다. 교체되는 것과 같이 아주 간단한 일에서도 이런 부류가 퍼뜨리는 소극적인 말은 사람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치는데, 여기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이런 소극적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리더가 되는 일에 대해 원래부터 상상과 관념이 가득한 데다가 일부 오해와 경계심도 가지고 있다. 설사 그런 오해나 경계심이 사상과 의식 안에서는 그다지 형체를 갖추지 않더라도 이런 소극적인 말을 듣고 나면 그는 더욱더 자신의 경계심과 오해가 옳다고 생각하게 되고, 리더가 된다면 분명 십중팔구는 좋지 않을 것이며 잘못을 저질러 교체되거나 버려지지 않도록 절대 리더 일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더욱 확신할 이유를 갖게 된다. 이는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에게 철저히 미혹되고 영향받은 것 아니겠느냐? 교체된 사람이 퍼뜨리는 소극적인 말과 그들이 품은 불복과 불만의 정서는 사람에게 이토록 큰 영향이나 손해를 끼칠 수 있다. 사람이 퍼뜨리는 소극적인 정서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니, 너희가 보기에 이는 심각하지 않으냐? (심각합니다.) 어떤 면이 심각하냐? 그것은 공교롭게도 하나님에 대한 사람 마음속 깊은 곳의 경계심과 오해에 영합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오해나 의심 같은 내적 상태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 내면의 태도를 반영한다. 따라서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이 퍼뜨리는 이런 말은 마침 사람의 정곡을 찌르고, 사람은 그것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철저히 사탄의 굴레에 빠진 채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나쁜 일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계하고 오해하며 속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뿐 아니라 본분을 소극적으로 대하여 중요한 부탁은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본분을 좀 이행하는 데 만족하게 됩니다. 결국, 사람은 온전케 될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럼 그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은 2천 년 전에 적지 않은 관점을 발표했고 서신도 많이 썼는데, 그 서신에서 황당한 이론을 많이 언급했다. 사람은 분별력이 없어서, 2천 년 동안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주로 바울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고, 예수의 말씀은 한쪽에 제쳐 두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울의 그런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왔을 때, 하나님이 그의 앞에 서 있을 때 그가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자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럴 수 없겠느냐? 바울의 그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이 사람 마음속에 가득 차 각종 이론과 주장을 형성했고, 사람은 그런 것들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품,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판단한다. 이제 사람은 더 이상 평범하고 단순한 패괴된 인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하나님의 적이 되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예정과 택함이 사람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하고 난 뒤 사람이 선택한 길이 바울을 따르는 길이라면 구원받을 그 기회가 여전히 존재하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는 하나님께서 예정하고 택하신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이제 안전해요. 저는 분명 구원받을 수 있어요.” 이 말이 성립하겠느냐?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네가 구원받을 후보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구원받을 수 있을지는 너의 추구가 어떤지, 네가 선택한 길이 옳은지에 달려 있다. 모든 후보자가 최종적으로 택함을 입거나 구원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의 불복과 불만, 원망 등의 정서나 말, 사상 관점을 받아들여서 마음이 이런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고 점유된다면, 이는 단지 조금 인정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런 것들에 기대 살아가려는 것이다. 그럼 사람이 이런 부정적인 것들에 기대 살아간다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변하겠느냐? 대립 관계가 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나 하나님과 패괴된 인류의 관계도 아니고, 하나님과 구원받을 사람의 관계는 더더욱 아니며, 하나님과 사탄,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가 된다. 따라서 사람이 구원받는 일은 물음표가 달리고 미지수가 된다. 교체된 사람이 퍼뜨리는 소극적인 말에는 원망과 오해, 해명과 변명이 가득하다. 심지어 그는 사람을 미혹하거나 구슬리는 말을 하여 그 말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와 경계심을 가지게 만들고, 나아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저버리게 만든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소극성을 퍼뜨릴 때는 제때 제한하거나 저지해야 한다. 그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진리를 구해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의 일이니,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스스로 천천히 소화하고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만약 소극성을 퍼뜨려 다른 사람의 정상적인 진입에 영향을 끼치고 교란한다면 곧장 저지하고 제한해야 한다. 만약 제한하지 못하여 그가 계속 소극성을 퍼뜨려 사람을 미혹하거나 구슬린다면 즉각 제명해야지 그가 계속해서 교회 생활을 교란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②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소극성을 퍼뜨린다
사람이 쉽게 소극성을 퍼뜨리는 또 다른 상황은 바로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 책망하고 훈계하는 말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속에 불복과 불만, 원망을 품으며 심지어 억울해하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억울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 내가 해명하지도, 명확히 말하지도 못하게 하는 거지? 왜 자꾸 나를 책망하는 거야?’ 이런 사람들은 보통 어떤 소극성을 퍼뜨리겠느냐? 마찬가지로 이유를 대면서 해명하고 변명하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분석하지도, 보완하지도, 만회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이치를 따지면서 자신이 무엇으로 인해 잘하지 못했다는 둥, 어떤 이유 때문이었다는 둥, 객관적인 원인이나 객관적인 조건이 어땠다는 둥, 자신은 고의가 아니었다는 둥 이런 이유를 대며 해명하고 변명하여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려 한다. 이런 부류는 자신에 대한 책망과 훈계가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책망받은 일에 대해 분석해 주려 하며, 많은 사람 앞에서 이 일을 명확히 규명하려 하는 데다가 “이렇게 책망하고 훈계하면 감히 본분을 이행하려는 사람도,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어질 거예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실행의 길도 없어질 거라고요.”라는 말을 퍼뜨리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자신이 어떻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는지 교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제를 통해 자신을 위해 해명하고 변명하여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을 대할 때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자칫 실수라도 좀 하면 책망과 훈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소극성을 퍼뜨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설사 책망과 훈계를 받더라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대체 어떤 성질인지, 무엇 때문에 초래된 것인지 반성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일을 분석하지 않고 그저 이치를 따지고 해명하고 변명하기만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책망과 훈계가 없을 때는 그래도 행할 길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책망과 훈계를 받으니 저는 멍해졌어요.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앞길도 잘 보이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분은 조심하고 신중해야 해요. 절대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안 돼요.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마치 피부가 한 겹 벗겨지는 것처럼 아주 고통스러워요. 여러분은 절대 제가 걸은 길을 걷지 마세요. 보세요, 책망을 받은 제 꼴이 어떤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떻게 하든 다 옳지 않다고요!”라고 한다. 이 말이 옳으냐? 듣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으냐?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변명하고 이치를 따지며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변명하고 이치를 따지는 동시에 어떤 정보를 퍼뜨렸느냐?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책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책망과 훈계가 없을 때는 그래도 행할 길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책망과 훈계를 받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왜 그는 책망을 받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냐?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인식하지 않으며, 마음속에 관념이 있어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기 때문에 길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지 않고 오히려 책망과 훈계를 받아서 길이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는 적반하장이 아니냐? 마치 “제가 한 일은 원래 원칙에 부합하는데 당신이 이렇게 저를 책망하는 건 명백히 제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하죠?”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이겠느냐? 그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느냐? (아닙니다.) 그 말은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는 법은 알지만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고 멍해진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는 예전에는 어떻게 했던 것이냐?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는 것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고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원칙대로, 하나님 집의 규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서 책망과 훈계를 받은 것이다. 책망과 훈계의 목적은 사람이 진리를 구해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더 이상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 자신을 인식하려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인식하려는 뜻이 전혀 없고 진리를 구하려는 뜻도 없다. 그 뜻인즉슨 이렇다. “저는 예전에 본분을 꽤 잘 이행했는데 당신이 저를 책망하고 훈계한 이후로 생각이 혼란스러워졌어요. 본분을 이행하는 제 생각이 다 흐트러졌다고요. 저는 이제 생각도 비정상적으로 변했고, 일을 처리할 때 예전처럼 그렇게 패기나 배짱이 있지도 않아요. 예전처럼 그렇게 용감하지도 않고요. 이건 전적으로 책망과 훈계를 받았기 때문이에요. 책망과 훈계를 받고 나서 저는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어요.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줄 거예요. 본분을 이행할 때는 꼭 조심해야 하고, 절대 추태를 보여서도, 잘못을 저질러서도 안 된다고 말이죠. 잘못을 저지르면 책망과 훈계를 받게 되고,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움츠러들고 예전 같은 패기는 사라지고 날카로운 기세도 반으로 꺾이는 데다가 젊은이의 용기나 분발하려는 포부도 없어져서 구질구질하고 소심해져요. 어떻게 해도 틀린 느낌이고 마음속으로도 하나님과 함께함을 느낄 수 없어서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것 같아요. 스스로도 그렇게 생기나 활력이 있다거나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해요. 자신조차 자신을 업신여기죠.” 이런 말이 체험이 있는 사람이 교제하는 속마음이겠느냐? 이런 말이 진실하겠느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하겠느냐? 사실을 왜곡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말은 매우 터무니없습니다.) 그는 말한다. “여러분은 절대 제 전철을 밟지 마세요. 제가 걸은 옛길을 걷지 마시라고요! 제가 지금은 얌전해 보이지만 사실 그때 책망과 훈계를 받고는 겁먹어서 예전처럼 그렇게 해방받거나 자유롭지 않아요.” 이런 말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작용을 일으키겠느냐? (하나님을 더 경계하고 책망과 훈계를 받을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작용을 일으킨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게 말이야. 조심하지 않으면 바로 책망과 훈계를 받아. 정말이지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건 어쩜 이리 어려울까? 매일같이 진리 원칙을 이야기하니 너무 힘들어! 그냥 평온하게 소소한 일상을 보내면 안 되나? 이건 무리한 요구도 아니고 지나친 욕망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왜 그렇게 충족하기가 어려울까? 나는 절대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안 돼. 난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보통 누가 나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말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만약 정말로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면, 그렇게 엄하게 말하고 사실의 진상을 분석한다면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 밤에 악몽을 꾸지 않겠어? 다들 책망과 훈계가 좋다고 하지만 나는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 방금 그 사람도 겁을 먹었잖아?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나도 겁먹을 거야.’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이 하는 말은 이런 작용을 일으키지 않겠느냐? 이런 작용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냐, 아니면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냐?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이런 소극적인 말이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해를 입히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자주 소극성을 퍼뜨리고 죽음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사탄의 종이 아니겠느냐?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고 원칙을 위배하여 책망과 훈계를 받고 나면, 자신이 그토록 고생하며 대가를 치렀는데도 책망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마음속이 불복으로 가득 차고 자신에 대한 폭로나 분석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그를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자신처럼 유용한 인재를, 그토록 많이 고생하고 많은 대가를 치른 사람을 하나님 집에서는 칭찬하기는커녕 책망하고 훈계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불복하다 보니 원망을 품게 되고, 소극성을 퍼뜨리려 한다. “제가 보기엔 하나님을 믿는 게 그 어떤 일보다도 어려워요. 복을 좀 받고 은혜를 좀 누리는 게 정말 쉽지 않다고요. 그토록 많은 대가를 치르고도 한 가지 일을 잘하지 못해서 책망과 훈계를 받다니, 저 같은 사람도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 아닌가요? 그런데 저는 어째서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인식하지 못하겠죠? 하나님의 공의로움은 어째서 이토록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거죠?” 그는 자신이 한 어떤 일이 원칙에 위배되는지, 어떤 패괴 성품을 표출했는지 분석하지도 않고, 전혀 뉘우치거나 순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판단하고 반항하려 한다. 그의 이런 말을 듣고 나면 대다수 사람은 속으로 어느 정도 그를 동정하고,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말이에요. 하나님을 20년이나 믿었는데도 이렇게 책망과 훈계를 받다니, 하나님을 20년 믿은 사람조차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더더욱 희망이 없겠네요.” 이는 중독된 것 아니겠느냐? 소극성을 퍼뜨리는 순간 독이 퍼지는데, 마치 씨앗 하나가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져 사람의 생각 속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람은 저도 모르게 중독되어 하나님에 대해 반발심이나 원망이 생긴다. 책망과 훈계를 받고 나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불복하게 되고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처리한 방식에 불만을 품게 된다. 회개하고 죄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이치를 따지고 해명하고 변명하려 하며, 자신이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얼마나 고생을 겪고 어떤 사역을 했고 어떤 본분을 이행했는데 상을 받기는커녕 책망과 훈계를 받았다고 여기저기 퍼뜨린다. 그는 책망과 훈계를 통해 자신의 패괴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식하지 못할뿐더러 도리어 하나님 집에서 그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 불공평하고 도리에 어긋난다고, 이렇게 그를 대해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그를 대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퍼뜨린다. 그가 이런 소극성을 퍼뜨리는 원인은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다가 자신이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과 교회 사역에 손실을 끼쳤다는 사실은 더더욱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옳게 행동했는데 하나님 집에서 잘못 책망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잘못하면 약점을 잡고, 문제를 하나 포착하면 사정없이 책망하고 훈계할 것이며, 따라서 사람이 책망을 받아 얌전해지고, 자신에게는 공로도 없고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도 없으며,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상을 요구할 용기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 집에서 목적을 이룬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소극성을 퍼뜨리는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이 자기 대신 불공평하다고 외치도록 하는 것, 더 많은 사람에게 ‘진실’을 깨닫도록 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동안 얼마나 많이 고생했고 공로를 얼마나 많이 세웠고 얼마나 대단한 자격을 갖췄으며 자신이 얼마나 경험 많은 신자인지 알도록 하는 것, 이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기 편에 서서 자신과 함께 하나님 집의 규정과 자신에 대한 하나님 집의 책망과 훈계에 대항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사람을 회유하는 성질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가 이렇게 소극성을 퍼뜨리는 목적 또한 사람을 회유하고 미혹하려는 것이고, 개인적인 원한을 표출해 교회 사역을 교란하려는 것이다. 그가 소극성을 퍼뜨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사람에게 어떤 작용을 일으키든, 결국 그 작용이나 결과는 사람을 미혹하고 교란하거나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지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작용인 것이다.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고 나서 퍼뜨리는 소극성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즉, 사람은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속에 불만과 불복을 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가장 먼저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는 일에서 진리를 구하거나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고 분석하여 자신이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신의 행동이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살피지도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 왜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려 하는지, 그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개인적인 원한을 표출한 것인지 아니면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인지 등, 그는 가장 먼저 이런 것들을 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격이나 고생, 헌신을 들어 책망과 훈계에 반항한다. 그렇다 보니 그의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은 전부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이고, 적극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은 없다. 그럼 그는 책망과 훈계를 받고 난 뒤의 느낌과 인식을 교제할 때 분명 소극성을 퍼뜨리고 관념을 퍼뜨릴 것이다. 소극성을 퍼뜨리고 관념을 퍼뜨리는 일에 대해서는 즉시 저지하거나 제한해야지 방임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소극적인 것들은 모든 사람의 생명 진입을 가로막고 교란하고 망치는 작용을 일으키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작용은 일으킬 수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사람이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도록 격려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런 부류가 소극성을 퍼뜨릴 때는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있는 것이니 응당 제한해야 한다.
③ 명예, 지위, 이익에 손상이 갈 때 소극성을 퍼뜨린다
교체되거나 책망과 훈계를 받고 나서 소극성을 퍼뜨리게 되는 것 외에 사람은 또 어떤 상황에서 소극성을 퍼뜨리겠느냐? (이익이 줄어들어 손해 본다고 느낄 때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했는데 병에 걸리거나 집안에 재앙이 닥치면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제가 얻은 게 뭐죠?”라고 말합니다.) 소극적인 사람의 ‘명언’이 바로 “제가 얻은 게 뭐죠?”이다. 또 뭐가 있느냐?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성과가 없는 데다가 자주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는 “왜 하나님께서는 저 사람은 깨우쳐 주시고 저는 깨우쳐 주시지 않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저 사람한테 주신 자질은 저렇게 좋은데 제 자질은 이렇게 형편없을까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점을 반성하지 않고 하나님께 책임을 미루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깨우쳐 주시지도, 인도해 주시지도 않았다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며 왜 다른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고 은총을 베풀면서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지 않냐고, 어째서 자신은 본분을 이행해도 성과가 없냐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너희는 꽤 좋은 예시를 들었다. 또 있느냐? (또 어떤 사람은 본분을 조정한 후 분노로 가득 차서 왜 자신을 조정하냐고 하고, 리더 일꾼이 자신을 겨냥해 못살게 군다고 의심합니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아 교체되고 도태되면 명예와 지위에 손상이 갔다고 생각하고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뒤에서 늘 불평을 늘어놓는다. “저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해 능력이나 자질도 떨어져서 남보다 못해요. 부족하다고 하면 부족한 거겠죠!” 겉보기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잃은 이익을 되찾으려고 불평만 늘어놓고, 남들이 동정할 만한, 남들이 하나님 집을 불공평하다고 느끼게 할 만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는 일단 이익이 줄어들면 내키지 않고 늘 손실을 만회하고 보상을 받으려 한다.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지도 모르게 되어 이렇게 말한다. “원래 하나님을 믿으면 아주 좋고, 교회에서 리더 일꾼이 되면 분명 큰 복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교체되고 도태되어 사람들에게 내쳐질 줄은 상상도 못 했죠. 하나님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전부 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고, 하나님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하나님을 대변하고 정의를 상징한다고 할 수도 없어요!” 이게 다 무슨 말이냐? 말 속에 공격과 판단, 반발심이 담겨 있다. 겉보기에는 리더 한 명이나 교회를 겨냥한 것 같지만, 실제로 마음속으로 겨냥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행정 법령과 규정이다. 이는 순전히 개인적인 원한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는 왜 개인적인 원한을 표출하려는 것이겠느냐? 자신이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고 언짢아서 얻어 내고 보상을 받으려는 것이다. 이런 부류가 퍼뜨리는 소극적인 것은 비록 대다수 사람에게는 별로 큰 위협이 되지 않지만, 이런 추잡한 말은 똥파리나 빈대처럼 사람의 생각을 어느 정도 교란한다. 대다수 사람은 듣고 나면 반감을 가지고 싫어하지만, 일부 그와 같은 부류나 같은 성품과 본질, 기호를 가진 사람은 그와 한통속이 되어 영향받고 교란당하기 마련이다. 이 또한 불가피한 일이다. 심지어 분량이 작거나 분별력이 없는 일부 사람도 이런 소극적인 말에 교란당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영향을 받는다. 이런 사람들은 애초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지 알지 못하고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에 대해 아주 모호하며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도 떨어져서 이런 소극적인 말을 듣고 나면 저도 모르게 받아들이기 쉽고, 영향을 받는다. 이런 말은 일종의 독소로, 쉽게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진다. 사람은 이런 소극적인 말을 받아들이고 나면 하나님 집에서 그에게 본분을 이행하라고 해도 들은 체 만 체하고, 하나님 집에서 그에게 어떤 사역에 협력하라고 해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맡고 싶으면 맡고 맡기 싫으면 맡지 않는다. 늘 여러 이유와 온갖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런 소극적인 말을 듣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일에 조금이나마 진심이었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어느 정도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런 소극적인 말을 듣고 나서는 냉정해져서 형제자매도 냉정한 태도로 대하며 경계하고, 교회에서 그에게 본분을 이행하라고 안배해도 늘 피하고 계속 미루며 아주 수동적으로 변한다. 예전에는 예배 드릴 때 항상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이런 말을 듣고 나서는 예배에도 꾸준히 참석하지 않게 된다. 기분이 좋으면 오고 좋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집에 수틀리는 일이 발생하면 그는 재앙이라도 닥칠까 두려워 예배에 많이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읽고는 기쁨과 감격, 감동에 겨워 헌금도 좀 한다. 그러다 집안이 평안해지면 또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그를 찾아가 교제하며 붙들어 주려 해도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집으로 찾아가면 분명 집에 있으면서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이런 소극적인 말에 영향을 받고 중독되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을 꽤 미더워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도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고, 저 사람들은 형제자매야. 여기는 하나님 집이고, 참 좋다!’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사람들이 퍼뜨린 소극적인 말을 들은 뒤로 변한 것이다. 이는 영향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 그의 생명 진입이 손실을 입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누가 영향을 끼친 것이냐?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이 한 말들이 영향을 끼친 것이다. 사람이 참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도 진리를 깨닫는 정도에 이르지 못하면 이런 부정적인 것들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특히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정세나 형세, 일의 표면적인 현상밖에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소극적인 말에 더 쉽게 영향받는다. 특히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집도 항상 공평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나님 집에서 처리하는 일도 반드시 긍정적인 건 아니고요.” 등과 같은 황당한 이론을 말하는 걸 듣고 나면 그는 경계심이 더 커진다. 진리에 부합하는 한 마디는 사람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지만, 소극적인 말이나 터무니없는 말, 진리에 위배되는 말은 사람 마음속에 너무도 쉽게 뿌리내려서 뽑아내려고 해도 어렵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기는 몹시 어렵지만 황당한 이론을 받아들이기는 무척 쉽다!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명망과 명성, 육적인 누림, 그리고 자신의 재산이나 이익을 유독 중시한다. 그들은 자신의 명예나 지위, 직접적인 이익이 손실을 입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온갖 기회를 빌려 자신의 불만과 불복, 소극적인 정서를 퍼뜨려서 일부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친다. 따라서 이런 부류가 소극성을 퍼뜨릴 때 교회 리더는 우선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 제때 저지하거나 제한해야 한다. 물론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폭로하고 형제자매에게 이런 부류를 어떻게 분별하는지, 그가 왜 이런 소극적이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지, 그의 이런 말을 어떻게 대하고 분별해야 하는지 교제하여 그에게 미혹되거나 큰 해를 입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반드시 이런 부류를 분별하고 분석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멀리하고 내쳐서 더 이상 그들에게 미혹되지 않아야 한다. 이는 교회 리더가 마땅히 해야 하는 사역이다. 물론, 일반 형제자매도 이런 부류를 발견하고 이런 부류의 인성 본질을 분별해 내면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만약 저항력이 부족하거나 그를 붙들어 주고 도와주고 변화시킬 수 있는 분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자신이 그의 소극적인 말이나 불복과 불만이 담긴 말을 막아 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멀리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자신이 굳세고 어느 정도 분량이 있다고 느낀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분별할 수 있고 영향받지 않을 수 있다면, 그가 퍼뜨리는 소극적인 것이 얼마나 심각하든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을 분별할 줄 아는 동시에 그가 소극성을 퍼뜨릴 때 그를 폭로하거나 저지할 수도 있다면 너는 그런 사람을 멀리하거나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분량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런 부류를 대하는 방식이나 원칙은 바로 멀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제가 그를 포용하고 인내하고 그에게 관용을 베풀면 안 되나요?” 그래도 된다. 그것도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중요하거나 가장 좋은 실행은 아니다. 만약 네가 그를 인내하고 포용하고 용인한다면 결국 너 자신이 그에게 미혹되고 끌려가서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공급하고 붙들어 주든 너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혹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도 자주 그의 생각과 말에 좌우될 것이고, 그의 말 한마디만 떠올라도 마음이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지 못할 것이다. 형제자매가 진리에 대한 인식을 교제할 때, 특히 이런 부류 사람의 말을 분별하는 것을 교제할 때도 너는 그의 말에 좌우되고 영향받아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런 부류를 멀리해야 한다. 너의 포용과 인내는 소용이 없고, 그것은 이런 부류를 방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만약 네 포용과 인내가 겉으로 위장하는 행위가 아니라 네게 이런 부류를 마주할 충분한 분량이 있어 그가 뭐라고 말하든 네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그를 분별할 수 있지만 그저 그에게 참고 양보하거나 그를 상대하지 않는 것뿐이라면, 그러나 그가 하는 그 어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말이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는 말도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 본분을 이행하는 네 충성심, 하나님에 대한 네 순종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너는 그를 포용하고 인내해도 된다. 포용과 인내를 실행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그에게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그를 상대하지 말고 그가 마음대로 말하게 두어라. 어차피 그런 사람은 막무가내이고 억지를 부리기에 네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마귀 사탄에 속하기에 그에게 교제한들 소용없다. 따라서 하나님 집에서 그를 제명하고 처리하기 전에 네게 그를 포용하고 인내하며 그에게 해를 입지 않을 수 있는 분량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다. 너희는 대부분의 경우 포용과 인내의 원칙을 취하지 않느냐? 어떤 사람이든 다 참아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수로 조금 미혹될 때가 있다. 나중에 다시 깨닫고는 속으로 하나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며칠 기도를 하고 나면 내적 상태가 되돌아와 다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부류는 좋은 자가 아니고 마귀에 속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비록 그와 정상적으로 교제할 수는 있지만 속으로는 그를 멀리하고 그에게 반감을 가진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소극적인 말이나 관점을 퍼뜨리든 너는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상대도 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말해 봐. 난 당신을 분별할 수 있어.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사귀지 않는다고.’ 너희는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일 처리 원칙을 취하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쉽지는 않다. 진리도 좀 깨달아야 하고 분량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만약 네게 이 정도 분량조차 없다면 너는 굳게 설 수 없으며, 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다.
④ 복받으려는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소극성을 퍼뜨린다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에는 또 다른 측면의 모습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제가 얻은 게 뭐죠?” 이런 부류가 소극성을 퍼뜨릴 때 주로 하는 말이 바로 “제가 얻은 게 뭐죠?”이다. 자신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집이나 하나님에게서 이득을 얻거나 축복을 받으려면 특히나 힘들다고, 사람이 지극히 큰 사랑을 바치고 엄청난 인내심을 가져야지 조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폭로하고 책망하고 연단하며 사람의 패괴를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는 모두 표면적이고 틀에 박힌 말이니 절대 믿어선 안 된다고,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면 크게 손해를 본다고, 언제든 이익이나 이득을 얻어 이상과 염원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되고 교회에서 도태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다수 사람은 이런 소극적인 말을 듣고 나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마음속으로부터 영합하거나 찬성하겠느냐, 아니면 살짝 멸시하면서 그가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사악하고 더럽다고 생각하여 그를 분별하고 폭로하고 제한하며 그가 계속해서 소극성이나 죽음을 퍼뜨리지 못하게 하겠느냐? 대다수 사람은 이런 소극적인 말에 반감을 갖거나 그것을 정죄하겠느냐, 아니면 그것에 미혹되어 소극적으로 변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는 자신의 두 손이 텅 빈 것을 보고 ‘그렇긴 해. 나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잖아. 하나님 집에서는 하루에 세 끼를 먹고 바쁘게 돌아다녔을 뿐 정말이지 다른 건 얻은 게 없어.’라고 생각한다. 너희도 이렇게 생각하느냐? 공감하느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얻은 게 없다니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얻은 게 너무나 많아요! 진리는 또 얼마나 많이 깨달았는데요!” 그러나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얻은 게 아주 많다는 말은 그다지 실제적이지 않은 것 같네요. 은혜를 좀 얻고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좀 얻고 사람됨의 도리를 좀 깨달았을 뿐이죠. 다양한 지역에서 온 형제자매를 많이 접하고 알게 돼서 식견이 많이 넓어진 것도 얻은 거라고 할 수는 있겠네요.” 너희는 어떤 경우이냐? 어떤 경우도 다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다뤄야 한다. 우선,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은혜를 얻으려는 이런 부류는 어찌 된 것인지 말해 보자.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리를 얻는 것을 추구해 구원받으려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복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은혜와 보호, 은총, 깨우침과 빛 비춤이 적으냐?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모두 하나님에게 보호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 보호받는 일은 구체적이지 않으냐? 사실이 있지 않으냐? 사람은 어떤 보호를 받았느냐? (비교적 분명한 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나면 세상의 사악한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아 타락하지도, 그런 사악한 것들을 추구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클럽에 가거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등, 최소한 이런 것들에 물들지는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꽤 보호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꽤 실재적인 측면이라서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고 몸소 느낄 수 있다. 세상의 사악한 흐름에 영향받거나 미혹되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정상 인성 안에 살면서 사람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 이것이 보호받는 한 측면의 실제 사례이자 실증이다. 또 있느냐? (악령에게 교란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한 측면의 실제 사례다. 대다수 사람이 그렇게 느끼지 않겠느냐? 너희는 그 안에 담긴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방인도 악령에게 교란당하지 않잖아요. 이방인 중 악령에게 교란당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 이 말이 옳겠느냐? 너희는 이 말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느냐? (제 동창 중에 악령에게 교란당한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가위에 눌린 동창도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동창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여기저기 다니며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살며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어서 그런 교란을 당한 적도, 그런 고통을 겪은 적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마음이 비교적 안정되고 평안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걱정이 없다. 히스테리에 걸리거나 악령에게 교란당하고 악령이 들릴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또 한 가지 측면은 현실 생활 속에서 이방인은 온종일 관상이나 풍수를 보고 점을 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서양에서는 별자리를 보거나 유명한 보살, 악령, 우상을 숭배하기도 한다. 숭배하지 않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숭배하든 하지 않든 다 어느 정도 그 영향과 제한을 받는다. 예를 들어, 외출할 때 점을 한번 쳐서 어느 방향으로 가면 길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면 불길한지 알아본다. 가게를 열 때 계산대를 어느 위치에 설치하면 돈을 잘 벌고, 어느 위치에 설치하면 돈을 못 버는지, 가게 안에 어떤 물건을 두고 어떤 우상을 숭배해야 재물이 들어오는지, 어떤 물건을 어디에 놓아야 풍수적으로 해롭지 않은지 알아본다. 또 이사할 때는 몇 시에 해야 길하고 나중에 집안이 번창하며 사고가 안 나는지, 몇 시에 이사하면 불길한지 알아본다. 심지어 학생이 진학 시험을 볼 때도 이런 영향을 받아서 시험 당일에 하는 말에는 ‘낙방’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면 안 되고, ‘승진’, ‘합격’ 같은 말만 해야 한다. 한 가정에서는 아이의 진학에서부터 부모의 살림살이, 돈벌이, 이사, 구직, 그리고 자식의 결혼 등 생활의 다양한 방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위 풍수나 운세와 같은 여러 측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럼 이런 영향을 받는 것은 어떤 제한을 받는 것이냐? 악령의 제한을 받는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 악령이 통제한다. 그럼 왜 사람은 이런 것을 숭배하려 하겠느냐? 왜 이런 것들에 영향받겠느냐? 왜 이사라는 간단한 일에서도 사람은 늘 언제 이사하면 길하고 언제 이사하면 불길한지, 무엇을 먼저 옮겨야 길하고 무엇을 옮기지 말아야 길한지 궁리하겠느냐? 왜 늘 이런 것을 고려하겠느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려하지 않으면 악령이 손을 써서 괴롭히고 못살게 굴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모든 인류가 악한 자의 수하에 살고 있다. 악한 자는 누구를 가리키겠느냐? 큰 것은 사탄과 마귀를 가리키고 작은 것은 각 지역의 악령, 각 인종을 통제하는 악령이다. 사람 생활의 모든 측면이 이런 악령의 제한이나 통제를 받는다. 심지어 집을 지으며 마룻대를 올릴 때도 붉은 천을 걸거나 폭죽을 터뜨려 행운을 빌고, 큰돈을 벌고 뜻밖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건설 노동자들은 빨간 옷을 입는다. 이런 일들에도 다 의미와 이치가 담겨 있고 게다가 금기도 있어서, 그런 이치를 조심하거나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주 순탄치 못한 일을 겪는데, 실직하고 부인도 도망가고 집안은 거덜 난 데다가 집 때문에 받은 대출도 갚지 못하는 등 잘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는 딱히 나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닥쳤겠느냐? 어쩔 수 없이 거짓 신이나 악령을 숭배하러 가거나 서둘러 사람을 찾아 풍수를 보면서 운수가 트이길 바란다. 그 뒤로 그의 일은 조금씩 순탄해진다. 그는 예전에는 그런 것들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일이 생기면 정성을 다해 숭배하고, 무슨 일을 하든 먼저 점괘를 보거나 점을 친다. 너희 생각에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면 피곤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는 게 피곤하다!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고, 이런 말이나 규칙에 제한받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 없다. 그가 이런 규칙을 어기면 악령이 바로 손을 써서 그를 교란하고, 그는 악령에게 강제로 제압당해 매일같이 악령을 숭배해야만 순탄히 살아갈 수 있다. 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런 봉건적인 미신이나 악령 역사에 제한받지 않고, 이사하고 싶을 때 이사하고 가고 싶을 때 간다. 금기랄 게 없다. 중국 본토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늘 종교 신앙을 탄압하고 박해해서 한곳에서 살 수 없게 되면 서둘러 이사하니, 날짜나 시간을 따지거나 무엇을 숭배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지켜 준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니 그런 것들에 제한받을 필요가 없다. 언제 무엇을 먹고 싶거나 외출을 하고 싶을 때 날짜를 따지거나 어떤 금기를 범하는지 살필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다. 하나님에게 기도해라.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권세와 주재 아래 살면 하나님이 지켜 주고 인도하며, 크고 작은 악령과 더러운 귀신은 모두 비켜선다. 그것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감히 손을 쓰지 못하니 사람은 보호받는 것 아니겠느냐?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은혜가 크지 않으냐? (큽니다.) 네가 지금 진리를 얻든 얻지 못했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만 하면 너는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 오면 하나님은 이렇게 너를 지켜 주고 네게 이런 은혜를 누리게 했으니 이 얼마나 큰 은혜냐! 네 신변이나 모든 행적은 다 안전을 보장받고 하나님이 모두 책임지고 보호해 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아예 기도도 하지 않고 “아무 일 없이 평안할 수 있게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자.”라고 말할 의식도 없다. 네가 기도할 필요도 없이 마음속에 ‘나는 하나님을 믿어. 모든 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어.’라는 간단한 신념만 있으면 하나님은 행한다. 사람이 이렇게 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데도 얻은 게 적으냐?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유일무이한 주재자이다. 너 자신과 가족의 목숨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모두 이 주재자의 손에 달려 있으니 네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되며 차분한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네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인식하고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든, 이는 네가 마음속에서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점이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있고 진리를 깨닫는다면 악령은 감히 교란하지도, 망치지도, 접근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그런 불필요한 과정은 피하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데, 너는 어째서 하나님을 믿어서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하느냐? 그건 양심이 없는 것 아니냐? 다른 것은 차치하고 이 점만으로도 사람이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너무도 비양심적이라는 것, 양심이 완전히 썩어 빠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대가 없이 진리 생명을 베풀어 주고 무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한다. 비록 사람은 지금 자신의 분량이 작으며 진리를 별로 많이 깨닫지도 못했고 깨달은 것조차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이런 것들, 하나님의 이런 마음과 사랑만 해도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은혜냐!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것을 사람에게 주었고,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것을 얻었다. 네가 몸소 느꼈든 느끼지 못했든, 하나님은 이미 이런 것을 사람에게 주었으니, 사람이 더 할 말이 뭐가 있겠느냐? 사람이 얻을 자격이나 있느냐? 하나님이 택한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에게 선택되고 택함 받았으니 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운 좋은 사람인데도 어째서 자신이 얻은 게 없다고 말하느냐? 네가 가장 행복하고 운 좋은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이 너를 선택하고 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령과 더러운 귀신도 감히 네게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제 가치나 신분이 존귀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행사로 인한 것이다. 사람은 얻은 게 너무도 많다! 이번 생에 사람은 이렇게나 많이 얻었는데, 사람 스스로 이런 것을 받을 자격이 어디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일부 사람들이 진리는 전혀 추구하지 않으면서 늘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서 제가 얻은 게 뭐죠?”라고 한다. 너는 스스로 셀 줄을 모르느냐? 진리를 깨달았는지 아닌지, 악을 얼마나 덜 행했는지는 너 스스로가 마음속으로 알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은혜를 누렸는지는 더더욱 잘 알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런 것에 대해 확실히 안다면 너는 그런 비양심적인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는 제게 먹을 것과 입을 것, 살 곳도 제공해 줬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에 비하면 훨씬 보잘것없지 않으냐? 언급할 가치조차 없지 않으냐?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은 그것이 언급할 가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셀 수 없이 많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것은 너무도 많다! 물질적인 것들에 관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따지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호하려 할 뿐 아니라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구원받을 수 있게 하려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런 마음과 사랑을 누렸으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푼 은혜는 몹시도 많다! 이외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진리로,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대의 사람도 들어 보거나 얻어 본 적 없는 이런 말씀들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몇 번 창조했든 하나님은 이런 사역을 한 적도 없고, 이런 말씀을 한 적도 없다. 인류의 모든 비밀과 사람이 감당할 수 있고 이를 수 있는 것,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은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 이런 비밀이나 진리를 양적으로 가늠할 수 있겠느냐? 가늠할 수 없다. 사람은 몇 번의 생애 동안에도 다 누릴 수 없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사람이 의지해 생존하는 근간이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정말 운 좋게도 살아남아 영원히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나 이런 진리는 영원히 너에게 공급할 수 있다. 영원이란 무슨 뜻이겠느냐? 시간제한이 없고 무한하다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끝이 없고 하나님처럼 영원히 생존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나 이런 진리는 그때까지 존재할 수 있다. ‘그때’라는 것은 사람의 언어로 표현한 일종의 시간적 개념이나 정의이지만, 사실상 무기한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가치가 크지 않겠느냐? 몹시도 크다!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건 네 손실이고 네가 어리석은 것이다. 추구한다면 네게 이런 말씀의 가치는 이 한평생에 그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이런 말씀은 네게 영원히 효과가 있고 영원히 유용할 것이며, 영원히 가치와 의미가 있을 것이고, 영원히 너에게 공급해 줄 것이다. 이런 말씀을 깨닫고 얻으며 이런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면 너는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쉬운 말로 하면 불로장생하여 죽음을 맛볼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자나 깨나 바라는 바가 아니더냐? 시대가 얼마나 흐르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든 너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너는 무엇을 통해 살아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통해 너는 그렇게 계속 살아 있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계속 살아 있으면서 무엇을 하겠느냐? 하나님의 부탁과 인도가 있고, 또한 네 사명도 있을 것이다. 네 사명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냄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 말씀의 가치다. 사람이 이 시대에 듣고 접하고 체험한 이런 진리나 말씀의 가치와 의미는 영원히 존재한다. 왜 영원히 존재하겠느냐?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일종의 신학이나 이론, 구호나 지식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다. 네가 이런 말씀을 얻고 이런 말씀에 따라 살아가거나 생존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네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너를 멸하거나 네 목숨을 앗아가지 않고 너를 계속 살아가게 할 것이다. 이는 큰 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통해 네가 이번 생에 이런 복을 미리 맛보고 다음 생에 이런 복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토록 큰 약속을 주는 것으로 보아 사람은 많은 것을 얻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토록 큰 약속을 주고 모든 이에게 공표하고 네게 알려 주어 네가 아무 대가 없이 취하도록 한다. 너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필요도, 모든 재산을 내놓을 필요도 없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요구와 뜻대로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이런 약속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게 많지 않으냐? 너는 지금 이 약속을 얻는 과정에 있다. 비록 완전히 얻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네가 얻은 게 적으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이 약속으로 보아 사람이 얻은 것은 아주 많다. 사람은 큰 이득을 얻었지 손해를 보지도 않았고, 아무 손실도 없다. 사람은 그저 시간이라는 대가를 좀 치렀고 육적으로 고생을 좀 했을 수도 있으며 개인적인 가정의 즐거움과 개인의 육적인 기호나 욕망을 희생하고 자신의 이상과 지향, 염원 등을 일부 포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얻는 것에 비해 개인의 그런 앞길이나 목표, 이상은 다 언급할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너를 지옥으로 데려갈 뿐이고, 하나님이 그런 것들로 인해 네게 약속을 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사람이 유한한 시간을 좀 쏟고 자신이 원하거나 이를 수 있는 대가를 좀 치르면 결국 진리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창세한 이래 모든 인류가 깨닫지 못한 일부 비밀과 처신 원칙, 그리고 만사 만물의 본질과 근원 등을 깨닫게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얻게 되는데, 그런 대가를 치르는 것이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사람이 억울할 게 뭐가 있느냐? 왜 하나님을 믿었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이는 양심이 완전히 썩어 빠진 것 아니겠느냐? 너는 이토록 많이 얻고도 만족할 줄을 모르니 무엇을 더 얻으려는 것이냐? 대통령이나 억만장자가 되면 만족하겠느냐? 하나님이 만약 네게 그런 것들을 준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얻으려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늘 하나님을 믿었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말하는데 그게 바로 비양심적이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전혀 없으며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인격이 몹시 저속한 것이다. 이런 부류는 하나님이 행한 것과 사람에게 요구한 것,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 등을 조금도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않아도 잔뜩 참았던 울분을 한순간에 터뜨린다. “제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 얻은 게 뭐죠? 저는 육적으로 고생을 아주 많이 했어요. 교회에서 제게 안배한 본분도 다 이행했다고요.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불평한 적 없고,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도 별말 안 했어요. 하나님 집에 그 어떤 요구도 한 적 없고요. 이렇게 큰 사랑과 충성심을 바쳤는데 제가 얻은 게 뭐죠? 만약 제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은 더더욱 얻을 수 없을 거예요!” 이 말은즉슨 이런 뜻이다. “당신들은 저만큼 많이 바치지도, 대가를 많이 치르지도 않았잖아요. 저도 얻지 못했는데 당신들이 뭘 얻을 수 있겠어요? 다들 조심해요. 바보같이 굴지 말라고요!” 이는 양심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비양심적인 사람은 늘 우매하고 완고한 말을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수많은 진리와 순수하고 긍정적인 사물과 가르침을 그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만 한사코 고집한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니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셔야 하고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얻게 해 주셔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나는 화풀이하고 폭발할 거야. 욕도 할 거라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걸 베풀어 주셔야 해. 내가 얻지 못한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하신 거야.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말하고야 말겠어. 이건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이는 인성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인성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은 분명 타당할 리도 없고 더욱이 진리에 부합할 리도 없다. 그건 그에게 살짝 무리한 요구다. 네가 하는 말은 모두 정당한 요구나 정당한 주장이어야지 억지 논리여서는 안 되고, 누구에게 들려주고 누구에게 시비를 가리게 하든 다 타당해야 한다. 그러나 인성이 나쁜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타당하지 않다. 그가 떼를 쓰며 뒹굴고 분노를 표출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왜 저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할까? 하나님 집에서 그에게 잘못한 부분이 있나? 하나님 집에서 하는 일 중에도 원칙에 부합하지 않거나 떳떳하지 못한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저 사람은 평소에 꽤나 고생하며 대가도 치를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오늘 저렇게 크게 화를 내면서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아무것도 얻은 게 없나 봐. 착실한 사람을 화나게 한 거 아니야? 그럼 나도 조심해야겠다. 본분을 이행할 때 예전처럼 그렇게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면 안 되겠어!’ 분별력 없는 일부 바보는 이렇게 영향을 받는다.
자주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이 정말로 관점이나 생각을 말하고 싶어 한다면 우선 그가 말하게, 관점을 드러내게 해라. 다 드러내고 나면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저 사람은 자신이 치른 대가가 자신이 얻은 것과 비례하지 않고 자신이 이득을 얻기는커녕 손해를 봤다고 생각해서 언짢은 거예요. 저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과 흥정하는 거죠. 은혜와 이득을 바라는 거라고요!” 보통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나면 그를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 다들 분별력이 생기면 그에게 이렇게 말해라. “할 말 다 했나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잠자코 있어요. 계속 말하다간 망신당할 거예요. 당신의 사악한 본성이 사람들 앞에 드러났을 때 곧장 억누르지 않으면 사람들을 분노하게 할 거예요. 사람들이 당신을 폭로하고 버리게 되면 후회해도 늦는다고요.” 이렇게 그에게 경고하면 이런 방식으로 그를 제한할 수 있게 된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손해 보는 것 같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대체 뭘 얻고 싶은 거죠? 만약 집안을 일으켜 부유하게 하고 부호가 되거나 고위직에 오르고 싶은 거라면 미안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나타나 사역하시며 사람을 구원하시는 건 사람에게 그런 것들을 주시는 게 아니에요. 그런 것들을 주는 곳으로 가세요. 하나님 집은 세상이 아니니 마귀 사탄을 만족시킬 수는 없어요. 하나님 집이나 형제자매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감히 하나님께 그런 것들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서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게 될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는 너무도 많고, 생명이 되도록 베푸신 진리는 더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당신이 무지몽매해서 그런 거예요.” 다들 이렇게 그를 꾸짖고 책망한다면, 이렇게 실행한다면 어떻겠느냐?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 집에서는 당신에게 빚진 게 없어요.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한 건 다 자원한 거죠.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한 후로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누렸는지 알긴 하나요? 당신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나님께 자신이 얻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돼요. 당신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해야 해요.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이 진리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진리라고 믿는다면 그런 말을 해서도, 불평을 늘어놓아서도 안 돼요. 지금 당신의 태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도,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도 아니에요. 당신은 반란을 일으키고 하나님께 과거의 일을 따지려는 거예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오고 하나님과 마지막으로 계산을 하려는 거라고요! 하나님은 물론이고 하나님 집도 당신에게 빚진 게 없어요. 하나님 집과 계산을 하려거든 서둘러 하나님 집을 떠나세요. 절대 하나님 집을 성가시게 굴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당신을 치실 거예요. 그건 별로 좋은 결과가 아니죠.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진정하여 기도하고 구하며 자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하는 관점에 어떤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하나님께서 걸으라고 요구하신 길을 걷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해요. 하나님께 무리한 요구를 그렇게나 많이 하고 그토록 큰 분노를 품는다면 그건 당신의 추구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당신이 이토록 깊은 원한을 쌓은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고 아주 오래됐어요. 당신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릇된 관점을 품은 채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수도 있죠.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든 당신은 지각하지 못해서 전혀 통회하지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하다 보니 오늘 같은 상황이 초래된 거예요. 어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세요. 지금 회개해도 늦지 않아요. 회개하지 않고 계속 악을 행하며 소극성을 퍼뜨린다면 당신은 마귀나 적그리스도가 될 거예요. 하나님 집에서 당신을 제명하면 앞으로 다시는 구원받을 기회가 없을 거라고요. 하나님 집에서 정죄한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정죄하시거든요. 저희는 당신이 하나님을 이토록 오랫동안 믿으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줄도 아는 걸 봐서 이렇게 경고하고 기회를 한 번 주는 거예요. 당신이 자기 고집만 내세우며 충고를 듣지 않아서 하나님 집에서 당신을 제명하기로 결정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형제자매가 아니게 되죠. 그럼 당신이 구원받을 희망은 아예 사라져요. 그때가 되면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텐데 후회하지 마세요.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사상 관점과 추구 방향을 바로잡는 거예요. 늘 무언가를 얻으려고 더 이상 추구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실 때 당신이 얼마나 반성하고 인식할 수 있는지 살펴보세요. 대조할 수 있거나 확실히 알 수 있는 문제는 해결했나요?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패역을 인식했나요? 해결했나요? 당신이 지금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늘 하나님과 철저하게 계산하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문제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하나님을 믿을 때 늘 속셈이나 장삿속을 품고 있고, 늘 복을 받으려 안달해요. 힘을 들이고 헌신하고 육적으로 고생하여 천국의 복을 얻으려고 하죠. 이는 강도의 논리가 아니겠어요? 당신은 어째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지,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사람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약속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지 않죠?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진심으로 구원받고 싶어 한다면 늘 하나님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실행했는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인지 살펴봐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건 하나님의 요구나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단지 육적으로 좀 고생하고 대가를 좀 치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아요. 당신의 패괴 성품은 해결되지 않았고, 당신이 치르는 대가나 겪는 고생에 다 목적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를 칭찬하시지 않고 그런 대가를 원하시지 않아요. 기어코 하나님과 계산하고 하나님께 이치를 따지고 하나님과 겨루려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를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옥에 가서 징벌받게 하실 거예요. 그건 악을 행한 응보죠. 당신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많이 누렸고,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도 당신을 어느 정도 특별하게 대우해 주셨어요. 당신은 얻어야 할 걸 이미 얻었는데 하나님께 뭘 더 바라는 거죠?” 이런 말을 교제하면 어느 정도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듣고 나서 원망의 정서가 조금 줄어들지 않겠느냐? 이런 말들은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한 말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약 인성과 이성을 갖추고 있다면 알아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인성이 없고 양심과 이성을 상실한 사람만이 이런 말들이 자신을 속이는 형식적인 말이며 믿을 가치가 없다고, 눈에 보이는 은혜나 물질적인 축복만큼 실속 있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런 실속 있는 것들을 보기 전까지는 네가 뭐라고 말하든 소용없다.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앞에서는 반항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뒤에서는 속으로 여전히 반발하며 수시로 소극성을 퍼뜨리려 한다. 게다가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 하고 자신이 겪었던 고생을 세어 보기도 한다. 지금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신이 하나님 집을 어떻게 인내했는지, 그는 마음속으로 늘 이런 것들을 품고 있다. 어떤 일에 직면하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그는 야수의 본성을 드러내고 길길이 날뛰고 추태를 드러내며 소극성을 퍼뜨리려 한다. 그럼 이런 사람도 타일러야겠느냐? 간단하게 타이른 다음 그가 여전히 그 모양이고, 고질병이 도지거나 마귀의 본성이 또 격발하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번에는 제한해야지 회개할 기회를 남겨 주어선 안 된다. 그는 쓸모없고 우매하고 완고한 작자이다. 우매하고 완고한 작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겠느냐? 순수한 도나 긍정적인 사물은 받아들이지 않고 억지 논리나 그릇된 주장, 황당한 이론만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실리를 얻거나 덕을 보고 손해를 보지 않는 관점만 고집한다.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그는 “그런 말은 다 듣기 좋은 말이에요. 듣기 좋은 말은 누가 못 하겠어요? 당신도 손해를 보면 그런 말은 못 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관점을 고집한 채 내려놓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닥치거나 어떤 손실을 입으면 자신은 하나님을 믿었는데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생각하며 또 소극성을 퍼뜨리려 한다. 그래도 그에게 기회를 줘야겠느냐? 주면 안 된다. 그는 본분은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으면서 남을 교란하려 하니 서둘러 저지하고 제한하여 그가 제멋대로 지껄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가 계속 소극성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교란하려 한다면 봐주지 말고 서둘러 그를 정리해서 내보내야 한다. 이게 사랑이 없는 건 아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여러모로 자세하게 설명하며 진리를 교제했는데 아무리 교제해도 그가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그건 무슨 뜻이겠느냐? 그 사람은 겉보기에는 불신파이지만 본질은 마귀이다. 그가 하나님 집에 온 것은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축복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는 이익을 얻으러 온 것이고, 이익을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한동안 믿었는데도 여전히 이익을 얻지 못하면 그의 사탄 성품이 폭발하게 되고,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며 악을 행하고 교란하려 한다. 이게 바로 마귀이다. 그가 그깟 고생을 겪고 헌신하는 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거래하기 위한 것이고 자신이 이익을 얻고 복을 받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일이 닥쳐서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면 항상 “저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요.”라고 말하며 자포자기하고 복수한다. 자주 소극성을 퍼뜨리고 자신의 불만스러운 정서를 쏟아 내기도 한다. 이런 부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이미 교제를 마쳤다. 즉, 원칙대로 처리해야 한다. 만약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며 앞으로 다시는 교란하지 않겠다고 보증한다면 다시 기회를 주어 교회에 남게 해도 되지만, 그가 계속 교회 사역과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망치려 하면 그를 정리해 내보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사역을 보호하고 하나님 선민이 교회 생활을 할 때 교란당하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내린 결정이고 채택한 방법이니 이는 적절하다.
교회 생활에서 또 어떤 사람들이 소극성을 퍼뜨리기 좋아하느냐? 어떤 사람은 본분 이행에 성과가 없고 늘 문제가 생겨도 자신을 반성하지는 않고 항상 하나님이 공의롭지도 않고 공평하지도 않다고, 하나님은 늘 다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면서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며 늘 자신을 깨우쳐 주지 않는다고, 그래서 자신은 본분을 이행해도 늘 성과가 없으며 두각을 나타내어 남들의 우러름을 받는 목적도 항상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품는 동시에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을 질투하고 혐오하고 증오한다. 이런 부류 사람의 인성은 어떻겠느냐? 속 좁지 않겠느냐? 그 밖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마치 학생이 대입 시험을 보는 것처럼 그저 점수가 높은지 낮은지, 석차가 높은지 낮은지만 따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들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이런 내적 상태를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우선, 진리를 이해하는 각도에서 보면 이런 부류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있겠느냐? 영적인 이해력도 없고,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사람들 간에 석차를 매기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늘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본분 이행은 어떻고 자신의 본분 이행은 어떤지 평가한다. 마치 학생이 학교 다니는 것을 평가하는 것처럼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평가한다. 이는 좀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 밖에,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힘을 들이는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느냐? 그는 공부하고 시험 보는 기세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이런 부류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을 구할 줄 알겠느냐? 원칙을 구하겠느냐? 한편으로, 그는 원칙을 구할 줄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진리를 교제해야 하는지,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는지, 이런 일들에 대해 그는 깨닫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는 그저 원칙을 찾아 원칙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만 알 뿐, 원칙이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요구하는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지 등 이런 것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이 사람의 본분 이행이 합당한지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사람의 본분 이행에 대해 요구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그가 이런 기준과 원칙에 따라 판단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형제자매의 교제 속에서 그가 이런 일들을 듣고 이해할 수 있겠느냐? 우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본분 이행에 관한 일을 깨닫지도 못한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한 후로 고민한다. ‘내가 학창 시절에 깨달은 도리가 하나 있어.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많이 읽기만 하면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거지. 그래서 난 하나님을 믿을 때도 그렇게 할 거야.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기도도 많이 할 거라고. 다른 사람들이 잡담하거나 식사할 때도 나는 찬송을 익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울 거야. 내가 이렇게 공을 들이면 하나님께서 애쓰고 노력하는, 부지런한 내 모습을 봐서라도 분명 나를 축복해 주시겠지. 나는 본분 이행에서도 틀림없이 성과를 이룰 거고, 분명 많은 사람 가운데서 높은 점수를 얻어 중시받고 발탁될 수 있을 거야.’ 결국, 그렇게 했는데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내 본분 이행의 성과가 어째서 여전히 남들보다 못하지? 이래서 언제 발탁되고 중용되겠어? 이러면 희망이 없는 거 아닌가? 난 천성적으로 승부욕이 강하고 남에게 뒤지는 걸 싫어해. 학창 시절에도 그랬고 하나님을 믿는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를 앞서가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는 결심이 생겨. 그 사람을 뛰어넘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고!’ 그는 옳은 방식이나 방법을 써서 열심히 공부하는 기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찬송을 많이 익힌다면, 남들과 잡담하지도 않고 외모를 꾸미는 데 신경 쓰지도 않는다면, 적게 자고 적게 누리며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고 육적인 안일을 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고 본분 이행에 틀림없이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황이 늘 그의 생각과 같지 않자 ‘어째서 나는 본분을 이행할 때 여전히 늘 실수하고 남들만큼 잘 이행하지 못할까? 남들은 빨리하고 잘해서 리더가 늘 칭찬하고 높이 평가하는데 나는 이렇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고통을 많이 겪는데도 어째서 여전히 성과를 이루지 못하는 거지?’라며 궁리하다가 드디어 중대한 발견을 한다.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하신 거였어. 하나님을 믿은 지 이렇게 오래돼서야 알게 되다니!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베푸시잖아. 그런데 왜 내게는 은총을 베풀고 싶어 하시지 않을까? 내가 멍청하고 아부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데다가 그다지 똑똑하고 영리하지도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 외모가 너무 평범하고 교육 수준이 낮아서 그런가? 이건 하나님께서 나를 드러내시는 거 아니야?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나 많이 읽었는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는커녕 나를 드러내려 하시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소극적으로 변한다.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 본분을 이행해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도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지 않아.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셨듯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셔. 나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뭐 하러 이렇게 고생해야 하지?’ 생각하면 할수록 소극적으로 변하고, 길이 없어지며, 속상해지고,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진다. 다시 본분을 이행할 때는 형식적으로만 이행하게 된다. 남들이 어떻게 원칙을 교제하든 그는 귀담아듣지 않고 마음속으로 반응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태에 처해 있는데 생명 진입이 있겠느냐? 본분 이행에 충성심이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 얼마 되지도 않았던 노력이나 부지런함도 사라지니 마음속에 무엇이 남겠느냐? ‘한 걸음씩 가면서 생각해 보자. 갈 수 있을 때까지 가 보자고. 하나님께서 언제 나를 드러내시고 도태시키실지, 언제 나를 포기하실지도 모르니, 그날이 와서 내게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시면 그때 그만둘 거야. 나도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아. 비록 지금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태시키시지 않지만 난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걸 알아. 도태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그의 마음속에 생겨난 이런 사상 관점은 남들과 어울릴 때 대화를 하다 보면 이따금 흘러나온다. “다들 제대로 믿으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 반드시 하나님께 축복받을 거예요. 저는 희망이 없어요. 저는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고요. 아무리 열심히 하고 노력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힘을 많이 써도 소용없다고요. 우리는 본분을 이행할 때 힘이 닿는 데까지 해야 해요. 힘을 못 내도 어쩔 수 없죠. 하나님이 억지로 강요하실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서도 할 수 없는 일은 강요하시지 않겠죠!” 이게 무슨 말이냐? 이 말의 뜻은 바로 이렇다. “이게 바로 저예요.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어차피 제 태도는 이럴 거라고요.”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이런 태도나 속셈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는 것이겠느냐? 그에게 이런 내적 상태나 태도가 생겼으니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겠느냐?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사람을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 빠지게 하기 쉽다. 이는 사람을 미혹하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 아니겠느냐? 이 정도로 소극적인 사람은 마귀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마귀는 결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소극성을 퍼뜨리지 않고 그저 간단하게 “여러분은 저보다 나아요. 큰 복을 받았잖아요. 저는 글렀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요. 저는 하나님께 축복받기 글렀어요.”라고 몇 마디 할 뿐이지만, 말이 간단하고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마치 자신을 반성하고 분석하며 자신의 자질이 떨어지고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소극성을 퍼뜨리고 있다. 이 말에는 풍자와 조롱, 반발심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소극적이고 의기소침한 정서도 담겨 있다. 이런 소극적인 말은 비록 많지는 않지만 그 정서는 전염병처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비록 그가 “저는 본분을 이행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어요. 여러분도 위험해요.”라고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전달하는 신호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노력한 그조차 구원받을 희망이 없으면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가 전달하는 이런 신호는 모두에게 이렇게 알리고 있다. “희망은 아주 중요해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희망을 주시지 않고 당신을 축복하시지 않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헛수고예요.” 대다수 사람은 이런 신호를 받아들이고 나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저도 모르게 약해지고,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이 다해야 할 충성심과 바쳐야 할 진심도 크게 줄어든다. 비록 그가 이런 소극성을 퍼뜨릴 때 사람들을 미혹하고 농락하려는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소극적인 정서는 금방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 사람들에게 위기감을 주고 노력이 헛수고가 되기 쉽다고 생각하게 한다. 또한, 사람들이 느낌 속에서 살면서 느낌에 기대 하나님을 추측하게 하고, 표면적인 현상에 의지해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진심을 분석하고 연구하게 한다. 이런 소극적인 정서가 사람에게 전달되면 사람은 저도 모르게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저도 모르게 하나님이 한 말씀을 오해하고 의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다. 동시에 이행하는 본분에 대해서도 진심을 다하지 않고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으며 어떤 충성심도 가지려 하지 않게 된다. 이게 바로 이런 소극적인 말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다. 이런 영향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사람은 이런 말을 듣고 나면 도움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을 인식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하지도 못한다. 이런 긍정적인 성과는 전혀 없고 오히려 더욱 소극적으로 변하고 진리 추구를 포기하고 싶어지며 본분을 이행할 의지도 사라진다. 왜 믿음을 잃겠느냐? (자신은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난 뒤 자신은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모습은 네가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항상 느낌과 기분, 억측에 기대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는지, 네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지, 하나님이 네 본분 이행을 칭찬하는지를 판단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이 억측에 기대 이런 것들을 판단하면 진리를 실행하는 힘이 작아진다. 왜 그렇겠느냐? 사람이 억측에 기대 하나님을 판단하면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정확히 억측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 안에는 간사함과 거래, 사람의 처세 철학, 사탄의 논리 등이 가득하다. 사람이 이런 것들에 기대 하나님을 억측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하나님을 의심하고 멀리하게 되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잃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잃으면 사람은 하나님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분명 속으로 커다란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때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생애는 끝나고, 사람은 철저히 망가질 것이다. 그 밖에도 사람이 하나님을 억측하는 게 옳으냐? 그게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겠느냐? 분명히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억측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추측해서도 안 된다. 그건 그 자체로 잘못됐다. 사람의 관점과 위치가 다 잘못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할 때 억측하고 추측하고 의심하고 불신해서는 안 되고, 사람의 사상 관점이나 처세 철학, 지식과 학문에 기대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럼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우선, 사람은 하나님이 진리임을 믿어야 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뜻, 사랑과 미움, 각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와 마음, 생각 등을 너는 추측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명확한 가르침과 뜻이 있으니, 너는 믿고 구한 다음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이토록 간단하다. 하나님은 네게 하나님이 너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하나님이 대체 너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느낌에 기대 판단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네가 자신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느낌이겠느냐, 아니면 사실이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했느냐?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했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거나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 어떻게 진리를 구해 해결하고 진리 실행의 길을 찾아야 하는지 알려 줬다. 이는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려 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려는 일이 진실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속이지 않았다. 이건 빈말이 아니다. 네가 자신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너의 일시적인 기분이자 특정한 환경이나 배경에서 생겨난 일종의 느낌일 뿐이다. 네 느낌은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마음을 의미하지 않고, 더욱이 하나님의 생각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진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네가 그런 느낌에 기대 살아가고 그런 느낌에 기대 하나님을 억측하며 네 느낌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체한다면 그건 완전히 잘못된 것이고 사탄의 계략에 빠진 것이다. 그럼 이 일에서 사람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느낌에 기대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느낌에 기대선 안 된다면 무엇에 기대야 하나요?” 너의 어떤 것에 기대든 다 소용없다. 사람의 느낌은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너의 그 느낌이 어떻게 생겨났고 대체 어디서 왔는지 누가 알겠느냐? 만약 사탄에게 미혹되어 생겨난 것이라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 아무튼 그 느낌이 어떻게 생겨났든 그것은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느낌이나 직감이 특히 강렬할 때일수록 사람은 더욱 진리를 구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사람의 느낌은 사실이나 진리와는 별문제이다. 느낌이 네게 진리를 공급할 수 있겠느냐? 네게 실행의 길을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만이 네게 실행의 길과 전기(轉機)를 가져다주고 탈출구를 열어 줄 수 있다. 따라서 네가 실행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느낌을 찾는 게 아니다. 네 느낌은 중요하지 않다. 네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네가 느낌에 기댈수록 행할 길이 없어지고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며, 너는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너를 축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그런 느낌을 내려놓고 진리 원칙을 구하며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한 어떤 행동이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지, 자기 뜻대로 한 어떤 행동이 아예 진리 원칙과 무관한지 살펴본다면, 구하는 과정에서 너는 자기 뜻과 상상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약간만 이렇게 진지하게 파고들어도 적지 않은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난 너무 패역하고 제멋대로이고 교만해! 난 구원받을 희망이 없는 게 아니었어. 내 느낌이 정확하지 않은 거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지 않은 거야. 난 늘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도, 인도하시지도 않고 사람을 차별 대우하신다고 원망만 했지 내가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제멋대로 군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어. 이건 내 잘못이야.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 대우하시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 진리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본분 이행 자격을 취소하시지 않았으니 그것만 해도 다행이야. 하나님께서 이미 관용을 베풀어 주셨는데도 나는 스스로 잔뜩 억울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겨루고 하나님께 이치를 따졌어. 예전에는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아. 난 무슨 일을 하든 원칙대로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지 않은 건 하나님의 은총이야. 하나님은 사람의 분량이 작다는 걸 아시는구나!’ 이렇게 구함으로써 사람은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게 되며, 차츰차츰 자신이 처신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어느 정도 원칙을 가지게 됐다고 느낀다. 그때면 양심이 많이 평안해졌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예전에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왜 그런 느낌이나 의식이 점점 더 약해지지? 그런 내적 상태가 어째서 변했을까? 예전에 난 스스로가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소극적으로 반발하고 하나님께 맞섰던 거잖아? 난 너무 패역해!’ 순종하고 나면 너는 저도 모르게 본분 이행 과정에서 일부 원칙을 깨닫고, 더 이상 남들과 비교하지도 않게 되며, 자신이 어떻게 해야 건성으로 대충 하지 않고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지에 중점을 두게 된다. 저도 모르게 자신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고, 더 이상 그런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빠지지도 않게 되며, 본분 이행에 원칙이 생기고,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도 정상화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느낌이 들 때 너는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셨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어.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께 구할 때도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느낄 수 있다고. 드디어 실감했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 대우하시지 않고 다른 사람도, 나도 축복하신다는 걸 말이야. 보아하니 나도 아직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어. 내가 예전에 걸었던 길이 옳지 않았던 거였어.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 데다가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 살면서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잖아. 이제야 그렇게 하는 게 완전히 잘못됐다는 걸 알겠어! 하나님께 대들고 반발하는 내적 상태에 빠져 사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깨우침을 얻지 못하지. 원칙대로 행동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겠어?’ 보아라,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실행법과 자기 생각을 대하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방식은 결국 서로 다른 결과를 불러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느낌에 기대 살아가서는 안 된다. 사람의 느낌은 일시적인 기분인데 사람의 결말과 관련이 있겠느냐? 사실과 관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하나님께 반발하고 대항하고 대드는 그런 정서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에서 철저하게 멀어지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어진다. 이런 내적 상태로 살 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느낌대로 살아가게 된다. 한 가지 사소한 생각에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고민하기도 하고, 남이 무심코 한 말에 이리저리 추측하며 쩔쩔매는가 하면, 심지어 악몽을 꾼 것 가지고도 소극적으로 변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기도 한다. 이렇게 악순환이 일어난 뒤, 사람은 자기는 글렀다고, 구원받을 희망이 사라졌다고, 하나님이 떠나서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렇게 생각할수록, 이렇게 느낄수록 점점 더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든다. 사람에게 이런 느낌이 드는 원인은 결국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하지도 실행하지도 않고, 저 혼자 똑똑한 줄 알고 언제나 자기 고집대로만 한다. 매일 남들과 비교하고 다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질투하고 미워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비웃고 빈정댄다. 또한, 사탄 성품으로 살면서 진리 원칙대로 행하지 않고, 누구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결국에는 온갖 환상과 추측, 판단이 생겨나 자신을 끝없는 불안에 떨게 한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이런 쓰디쓴 결과는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데, 그건 진짜 자업자득이다! 이런 일들이 다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그건 바로 사람이 진리를 구하지 않고,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늘 자기 뜻대로 행동하고, 항상 자기를 내세우고, 남과 비교하며, 언제나 남보다 뛰어나고 싶어 하고, 늘 하나님에게 무리하게 요구하는 등등 이런 행동으로 점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자꾸만 하나님에게 반발하고, 진리를 어기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에는 흑암에 빠지고 소극적 상태에 빠진다. 이때 사람은 자신의 거역과 대적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없고, 더욱이 올바른 마음 자세로 대할 수도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고 추측하기만 한다. 이런 것이 생겨날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너무 깊이 패괴되고, 너무 골칫거리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본인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이라고 규정하고 자기도 모르게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를 혐오하여 버리셨구나. 나를 원하지 않으셔. 내가 너무 패역해서 그런 거고, 자업자득이야. 하나님은 분명 나를 구원하지 않으실 거야.’ 그는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추측한 것을 사실로 규정해 버린다. 누가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소용이 없는데, 그는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를 축복해 주시지도 않고, 구원해 주시지도 않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게 무슨 소용이지?’ 하나님 믿는 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계속해서 믿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어째서 계속 걸어갈 수 없겠느냐?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사람의 소극성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 속으로 반발과 원망이 가득 쌓이며, 하나님과 철저하게 결별하려 할 때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정도로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대신 어떻게 하겠느냐? 사람은 속으로 하나님 믿는 일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수동적으로 도태되기를 기다리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건 그래도 체면이 조금 선다고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기권하고 스스로 끝을 내는 쪽을 택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건 좋지 않다고 정죄하고,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정죄하고, 또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정죄하고, 하나님이 왜 자기를 구원하지 않느냐며 원망한다. ‘난 부지런히 하면서 남들보다 고생도 많이 하고, 대가도 많이 치렀어. 난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했어.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않았어. 이제야 알겠어. 하나님은 나를 좋아하시지 않고, 사람을 차별 대우하셔!’ 그는 감히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하나님에 대한 정죄와 모독으로 탈바꿈시킨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그래도 사람이 하나님 믿는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기 때문에 망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저버렸으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하거나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어처구니없지 않으냐? 사람은 모두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걷는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네가 스스로 막다른 길에 이른 것이고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원치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원치 않는다거나 포기한다거나 구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네가 네 추측에 기대 하나님을 규정한 것이다. 만약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설사 하나님이 너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혐오한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을 것이고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것이며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예전처럼 본분을 이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이를 제한하고 저지할 수 있겠느냐? 이는 모두 자신의 선택과 추구에 달려 있지 않겠느냐? 너 스스로가 믿음이 없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너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지 않고 기어코 그 관계를 망쳐 버리려고 하니, 일단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 회복할 수 있겠느냐? 깨진 거울은 다시 둥글어지기 어렵고, 설사 둥글어지더라도 그 균열은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미 망쳐졌기 때문에 그 관계는 원래대로 회복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환경이 닥치든 사람은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굳게 설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고 싶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본분을 이행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일을 하든 진리 원칙을 깨달아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고 시행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리를 깨달아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알아 가고 이해하고 인식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과 합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뜻대로 행동하고 본분을 이행한다면 너는 영원히 진리를 접할 수 없다. 진리를 접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너는 영원히 하나님이 모든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하나님의 요구, 또는 하나님의 생각을 접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사역하면서 표출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더더욱 접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 사역에 관한 이런 사실들을 접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네 인식은 영원히 사람의 상상과 관념일 것이고, 상상과 관념 속에만 머물 뿐 영원히 하나님의 본질이나 진실한 성품과는 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진실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주 소극적이고 패역한 내적 상태가 생기는데, 만약 진리를 구해 진리 원칙으로 대하고 해결한다면 소극적인 정서는 원망이나 반발심, 반항, 대항, 심지어 모독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자꾸 자신의 잔꾀에 기대고 인위적인 절제, 인위적인 노력, 근면, 자기 극복 등의 행동 방식으로 대한다면 결국 언젠가 그런 인위적인 상상과 판단, 억측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반항, 반발심, 대항, 심지어 모독으로 변할 것이다. 사람이 이런 소극적인 정서에 빠지면 불복과 불만, 하나님에 대한 원망 등의 정서나 생각이 생겨나기 쉽다. 이런 생각이 사람 안에서 오랫동안 쌓여 있는데도 계속 진리를 구하지도, 진리로 해결하지도 않는다면 사람의 불복과 불만, 원망은 반항으로 변할 것이다. 사람은 일부 반역 행위로, 예를 들면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거나 일부러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는 등 부정적인 행위로 자신의 불복과 불만을 표현하여 반항하려는 목적을 이룰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본분 이행을 망치고 교란하는데, 그건 이런 뜻이다. ‘내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거나 본분을 이행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지 않는다면 당신들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만들 거야!’ 그러면서 교란하기 시작하는데, 말로 교란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 행위로 교란하는 사람도 있다. 행위로 교란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저지르겠느냐? 예를 들어, 일부러 다른 사람의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삭제하여 그 사람의 본분 이행 성과에 영향을 끼치거나 고의로 남들이 온라인에서 예배 드리는 것을 교란한다. 이는 마귀 사탄이 사람을 교란하는 행위다. 사람들은 다들 이해하지 못한다. ‘나이도 꽤 많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지? 열 살짜리 어린애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못된 장난을 칠 수 있지?’ 실제로는 삼사십대나 오륙십대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런 각종 행위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귀 사탄이 하는 행위이다. 그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지 않아서 자신이 목적을 이루지 못한 걸 보면 사람들이 많을 때나 예배 드릴 때 소극성을 퍼뜨리고 교란할 것이다. 그가 행위로 불만을 쏟아 내기 시작하면 수습하기 어렵고 걷잡을 수 없게 되는데, 계속 그렇게 가다가는 사태와 성질이 갈수록 심각해질 뿐이다. 그는 행위로 교란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수단과 방식을 사용하고, 공격적이고 판단적인 말로 다른 사람의 본분 이행을 교란한다. 목적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이어서 그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에게 반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찬송을 익히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와 관련된 서적은 하나도 읽지 않는다. 그는 집에서 무엇을 하겠느냐? 소설을 읽고 드라마에 빠져 있고 요리 기술을 익히고 미용법을 배운다…. 예배 드릴 때도 그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이나 자신의 패괴 성품과 패괴 표출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교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교제할 때는 일부러 말을 가로채기도 하고, 말을 끊거나 고의로 화제를 돌리는 등 무너뜨리거나 교란하는 말만 한다. 왜 그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은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포자기하여 자신이 교회에서 제명되거나 출교되기 전에 함께할 사람을 몇 명 찾고, 자신이 복을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복을 받지 못하게 한다. 그는 왜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그가 믿는 하나님이 그가 처음에 상상했던 하나님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그가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공의롭지도 않으며 더욱이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사람에게 진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은 사랑하면서 자신은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제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자신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이게 아직 다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희망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다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물러나도록 하려고 한다. 그는 그래야 만족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목적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도 천국의 복을 받지 못하니 당신들은 꿈도 꾸지 마!’ 이건 뭐 하는 인간이냐? 마귀가 아니냐? 마귀는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막다른 길로 걸어가려는 것이다! 양심이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정말로 큰 악을 행해 드러나고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느끼더라도 그는 다른 사람이 그처럼 되지 않고 하나님을 잘 믿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너무 연약하고 육적인 욕망도 큰 데다가 세상에 미련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된 건 자업자득이에요. 이래도 싸다고요! 여러분은 제게 영향받지 말고 잘 믿으세요. 예배 때 제가 망을 볼게요. 만약 큰 붉은 용의 경찰들이 마을에 들어오면 여러분에게 소식을 알릴게요.”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진리 추구를 교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성이 없는 사람들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만나거나 형제자매가 자신을 무시하고 멀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고 도태시켜서 구원받을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견해나 생각을 가지면 그는 자포자기하고, 거리낌 없이 소극성을 퍼뜨려 교회 생활을 교란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마귀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마귀에 속하는 이런 부류를 대할 때 봐주어야겠느냐? (그래선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예배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도 읽지 않고 진리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당신은 뭐 하러 온 거죠? 교란하러 왔나요? 당신은 자신이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우리도 자신이 구원받을 희망이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리는 노력하죠.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 대우하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마음은 진실하다고, 하나님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는 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처럼 늘 소극적으로 굴며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는다고요. 우리를 교란할 생각은 하지 마요. 방해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요! 당신이 자기 고집만 내세우며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나쁜 마음을 먹고 우리를 교란하려 한다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 우리를 원망하지 마요. 오늘부터 당신은 제명됐어요. 교회에는 당신이라는 사람은 없으니 썩 꺼지라고요!” 이러면 문제가 처리된 것 아니냐? 아주 간단하다. 몇 마디 말로 그를 정리해 내보내니 얼마나 쉬운 일이냐! 왜 이렇게 처리하겠느냐? 이런 부류는 본성 본질이 변할 수 없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고 형제자매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악을 행하고 교란한다. 만약 언젠가 정말로 그가 악을 행하고 교회 사역을 교란해 출교되거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징계한다면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복수하지 않겠느냐?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무슨 일을 저지르거나 어떤 큰 악을 행하기 전에 드러나는 건 좋은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이 그를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이 그를 정리해 내보내기에 딱 알맞다. 다른 사람이 해를 입기 전에 이렇게 처리하는 게 시기적절하고 아주 적합하다. 다들 분별력을 기르고 악인도 처리하니, 그는 부각물 역할로 아주 제격이다.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이 보이는 각종 내적 상태와 모습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지위, 명예, 이익에 대한 그들의 추구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행한 것이 그들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들의 이익에 영향을 미칠 때 그들은 불복과 불만의 정서에 빠진다. 이런 불만과 불복의 정서가 생긴 후부터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유와 핑계, 해명, 변명 등 원망의 생각이 생겨난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진리를 구해 자신을 인식하지도 않는다. 반면 자신의 관념과 상상, 사상 관점, 또는 사람의 혈기로 하나님께 대항한다. 어떻게 대항하겠느냐? 그들의 불복과 불만의 정서를 퍼뜨리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그들의 사상 관점을 분명히 드러내며, 하나님이 그들의 바람과 요구대로 일을 처리하게 함으로써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들의 정서가 진정될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이 수많은 진리를 선포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며 사람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고 사람을 구원하여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이런 진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복받고자 하는 단꿈을 깨 버렸는지 모른다. 그들이 밤낮으로 고대한, 들림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꿈이 그렇게 깨진 것이다. 그들도 기를 쓰고 이 국면을 되돌리고자 하지만, 어쩔 도리 없이 소극성과 원한을 품고 재난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안배한 이 모든 것에 불복한다. 하나님이 행한 것이 그들의 관념과 이익에 부합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에서 정리 사역을 하여 많은 사람을 도태시켰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연합하여 반항하려고 하며, 하나님이 진리임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부정하려 한다. 물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이 사실도 부정하려 한다. 어떤 식으로 부정하겠느냐? 반항하고 반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것이 내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니 난 순종하지 않을 거고, 당신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당신과 겨룰 것이고, 교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 일에 대해 퍼뜨릴 거라고! 나는 생각한 걸 그대로 말할 거야. 어떤 결과가 생길지는 상관없어.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당신은 내 입을 막을 수 없어. 나는 말할 거야. 그렇다고 당신이 뭘 어쩔 수 있겠어?’라는 뜻이다. 그는 기어이 자신의 그런 그릇된 사상 관점을 퍼뜨리려 한다. 이것이 인식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이는 소극성을 퍼뜨리고 사설과 궤변을 퍼뜨리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패괴를 인식하고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행한, 진리에 맞지 않는 부분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폭로하는 것도 아니다. 반면, 자신의 잘못을 애써 해명하고 변명함으로써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그릇된 정설을 만들고, 부정적이고 치우친 관점과 강변과 사설을 퍼뜨리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교회의 하나님 선민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미혹과 교란이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을 소극적인 상태, 혼탁한 상태에 빠지게 한다. 이는 전부 사람이 소극성을 퍼뜨려서 초래되는 부정적인 영향과 교란이다. 따라서 소극성을 퍼뜨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언행은 모두 제한되어야 하지 용인되거나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마땅히 이런 사람들을 대할 적절한 처리 방식과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형제자매는 이런 사람과 그들의 소극적인 말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선민들이 분별력을 갖추고 나면 진리 원칙을 근거로 즉시 그런 사람들을 제명하거나 출교시켜 더 많은 사람이 영향받거나 교란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극성을 퍼뜨리는 것에 관한 여러 방면의 일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3) 소극성을 해결하는 원칙과 길
사람은 사탄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탄의 성품으로 살기에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아주 어렵다. 특히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수시로 소극적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소극적이 될 때가 있다. 누구는 그럴 때가 많고, 누구는 그럴 때가 적으며, 누구는 오랫동안 소극적이고, 누구는 잠깐 소극적이다. 사람의 분량이 다르듯 소극적인 내적 상태도 다르다. 분량이 큰 자는 시련을 마주해야 조금 소극적이 된다. 분량이 작은 자는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에 남이 관념을 좀 퍼뜨리거나 터무니없는 말을 하더라도 분별할 줄 모르고 교란당하거나 영향을 받으며 소극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설사 그게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사소한 일이라도 그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수시로 소극적이 되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모르며 하나님께 기도할 줄 모른다면 아주 곤란해진다. 그러면 형제자매들이 붙들어 주고 도와주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만약 도와줄 사람이 없거나 그가 도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소극적이 될 수 있고, 심각할 경우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 수도 있다. 보아라, 사람이 늘 관념을 갖고 쉽게 소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늘 자신의 관념과 상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골칫거리이다. 하지만 아무리 소극적이 되어도 너는 네게 관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에 부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네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임을 마음속으로 알아야 한다. 만약 네게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관념을 퍼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지켜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조금이라도 있고 자신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임을 인정한다면, 너는 마땅히 진리를 구해 자신의 관념을 해결하고 진리에 순종해야지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것을 지키지 못하고, 기어이 관념을 퍼뜨린다면 너는 이성을 잃은 것이다. 이는 정신에 문제가 있고 귀신이 들린 것으로,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한다. 마귀에게 지배받으면 그렇게 말하고 퍼뜨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악령이 하는 짓이니 어쩔 수 없다. 만약 네게 조금이라도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이 한 가지는 지켜야 한다. 즉, 관념을 퍼뜨리지 말고 형제자매들을 교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소극적이 되었다고 해도 형제자매들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며 가슴에 손을 얹고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이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때때로 소극적이 된다고 할지라도 선을 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네 소극성을 따지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하고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언젠가 진리를 깨달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네게 큰일이 닥친다면, 예를 들어 리더를 맡았는데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아서 교체되고 도태된다면, 너는 구원받을 희망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소극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것도 떨쳐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변해서 마치 정죄되고 저주받은 것처럼 느끼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런 문제는 해결하기 아주 쉽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찾아 교제하고 구하면서 마음속 말을 하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이러한 소극성과 연약함, 그리고 이해가 안 되거나 이겨 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숨김없이 솔직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수 없는 입 밖에 내기 힘든 말들이 있다면 더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정죄받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께 정죄받을 만한 많은 일을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네가 속으로 이 한 가지 일을 신경 쓰겠느냐? 네가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두 알고 있다. 너는 하나님께 솔직하게 마음속 말을 하고 너의 문제와 내적 상태를 있는 그대로 얘기해야 한다. 너의 연약함과 패역, 심지어 너의 원망마저 모두 하나님께 말해도 괜찮다. 그저 화풀이를 하려 해도 괜찮다. 하나님은 이를 정죄하지 않는다. 어째서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분량을 알고 있다. 네가 하나님께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너의 분량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 말하는 것, 이는 한편으로 네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이다. 또 한편으로 이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보여 주는 태도이기도 하다. 최소한 너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닫혀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보여 주는 것이다. 너는 단지 연약하여 이 일을 이겨 낼 충분한 분량이 없을 뿐이다. 너는 반항하려는 뜻이 없으며, 네 태도는 순종하려는 것이지만 네 분량이 너무 작아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뿐이다. 네가 하나님께 완전히 마음을 열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네가 하는 말에 연약함과 원망도 있고 더구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이 많아도 한 가지 옳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창조주 신분을 부인하지 않고, 너와 하나님 사이의 피조물과 창조주 관계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가 가장 이겨 내기 힘들거나 너를 가장 연약하게 만드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속 모든 말을 하나님께 하는 것, 이는 너의 태도를 보여 준다. 누군가는 말한다. “하나님께 기도를 한 번 드렸지만 제 소극적인 상태는 해결되지 않았어요. 여전히 이겨 낼 수가 없다고요.” 걱정할 것 없다. 진지하게 진리를 구하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깨닫든 하나님은 너를 점점 더 강하게 만들 것이고 너는 더 이상 처음처럼 그렇게 연약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에게 아무리 연약함과 소극적인 것이 많더라도, 아무리 원망과 부정적인 정서가 많더라도 모두 하나님께 말해라. 하나님을 너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처럼 대하지 마라. 어느 누구에게 숨기더라도 하나님께는 숨기지 마라. 하나님은 너의 유일한 버팀목이며, 유일한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하고 소극적일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슬기로운 사람이다. 우매하고 완고한 사람만이 큰일이나 중요한 일이 닥칠수록, 하나님께 마음의 소리를 토로해야 하는 상황일수록 더 하나님을 멀리하고 피하며 혼자 속으로 궁리한다. 이리저리 궁리하다 보면 결국 어떻게 되느냐? 이러한 소극성과 원망이 반항으로 바뀌고, 반항은 또 대항과 겨룸으로 바뀐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히 파괴된다. 그러나 이렇게 소극적이고 연약할 때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기를 선택한다면, 진심으로 순종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하나님은 네가 소극적이고 연약할 때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것을 보고는 너를 어떻게 인도하여 네가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줄지 알 것이다. 이런 체험을 하면 너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생길 것이고,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하나님에게 구하고 하나님을 기다리기만 하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활로를 안배해 준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부지중에 상황의 변화를 보게 되고, 더 이상 연약하지 않고 강해질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커질 것이다. 네가 이런 일들을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너의 연약함이 어찌 그리 유치했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사람은 이렇게 유치하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사람은 영원히 유치하고 우매한 상태에서 성숙해질 수 없다. 이런 일들을 겪는 과정에서만 조금씩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직면하고, 원칙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하거나 멀리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점점 더 순종하며, 패역은 점점 더 줄어들고,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며, 하나님께 점점 더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체험하면 생명이 조금씩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완전히 성인의 분량으로 자라게 된다.
소극적인 내적 상태를 어떻게 대하고 해결해야겠느냐? 소극적인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핵심은 이성을 갖는 것이다. 늘 소극적으로 지낸다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기 쉽지 않겠느냐? 소극적이면 불평을 늘어놓거나 자포자기하며, 언행이 조금도 이성적이지 않다. 이는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겠느냐? 만약 자포자기하고 소극적이고 일을 게을리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이 심각하게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면 마치 정신병에 걸린 것 같고 귀신 들린 자와 비슷한데 이성이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 위험하다. 사람이 소극적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이성을 잃기 쉽고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소극성과 불만, 관념을 떠벌리고 퍼뜨리게 된다. 이러면 일부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기가 매우 쉬우며, 그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사람이 소극적일 때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으며 소극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소극성과 관념을 퍼뜨리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이런 사람은 소극적인 상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누구든 소극적이 될 때가 있다. 단지 그 정도와 기간이 다르고 소극적으로 변하는 원인도 서로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소극적이 되지 않고 실패와 좌절이 닥쳐야 소극적으로 변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작은 일 하나 때문에 소극적으로 변하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해서 소극적이 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조금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겨도 소극적이 된다. 이런 사람이 삶을 알겠느냐? 식견이 있겠느냐? 정상인의 마음과 도량이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한, 언제라도 소극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진리를 깨닫고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면 소극적인 상태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소극성도 분량이 자라남에 따라 점차 사라지다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소극적인 정서와 소극적인 상태, 그리고 소극적인 생각과 태도가 점점 늘어나 무겁게 짓누르고, 일단 과부하가 걸리면 일어서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무척 위험하다. 그러므로 소극성을 제때 해결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소극성을 해결하려면 주동적으로 진리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게 되며, 진리를 깨달아 소극성의 본질을 간파하게 되고, 소극적이 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의 관념과 이유를 고수하면서 내려놓지 못한다면 너는 더없이 어리석은 것이다. 너는 그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죽음에 이를 것이다. 어찌 됐든, 소극성을 해결할 때는 수동적이어서는 안 되고 능동적이어야 한다. 소극적이 되어도 일단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소극성이 자연히 기쁨으로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사람의 환상이다. 사람이 진리를 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한, 소극성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설령 잊어버리고 아무 느낌이 없다고 할지라도 소극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적당한 환경이 닥치면 다시 소극적이 될 것이다. 이는 무척 흔한 일이다.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소극적이 되었을 때 얼른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소극적이 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수시로 소극적인 사람은 모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렇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소극성은 마귀처럼 너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너를 계속 소극적이 되게 만들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불복과 불만, 원망의 정서를 품게 만들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과 대립하고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들게 되면 너는 끝에 이른 것이고, 너의 추한 몰골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폭로하고 해부하고 규정하기 시작하며, 너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자 그제야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때 너는 주저앉아 가슴을 치기 시작할 것이다. 너는 그저 하나님의 징벌을 기다려라! 소극성은 사람을 연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판단하고 부정하게 하며, 심지어는 직접 하나님께 대항하고 대들게 한다. 그러므로 소극성을 해결할 때 시기를 놓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되면 그 결과는 무척 심각해진다. 어떤 일, 어떤 말 한마디, 혹은 어떤 사상 관점으로 인해 소극적이 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면, 이는 네가 그 일에 대해 치우친 인식, 관념, 상상을 갖고 있고, 그 일에 있어 너의 관점은 분명 진리에 부합되지 않음을 증명한다. 이때는 진리를 구하고 정확히 직시하여 최대한 일찍, 그리고 최대한 빨리 그 잘못된 관념과 생각을 바로잡아 더 이상 자신이 그러한 관념에 사로잡히거나 오도되어 하나님께 불복하고, 불만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적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소극성을 제때 해결하고 철저하게 해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소극성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바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깨우침을 구하는 것이다. 때로는 너의 사상 관점을 하루아침에 바로잡지 못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자신이 틀리고 자신의 생각이 치우쳤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면 최소한 이러한 그릇된 사상 관점이 본분을 이행하는 너의 충성심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고 기도하는 것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효과를 얻는다. 최소한 이러한 효과를 달성해야 한다. 너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 불복과 불만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없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네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읽으려고 하지 않고 기도도 하려고 하지 않으니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니겠느냐? 너는 “제가 아무리 소극적이라고 해도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았고, 본분을 내팽개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충성을 다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성립하느냐? 너는 수시로 소극적인데, 그 안에는 패괴 성품만이 아니라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하나님께 관념을 품고 하나님을 오해하며, 너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는 것이다.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는 무척 위험한 일이다. 사람이 수시로 소극적이면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충성할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느냐? 소극적으로 변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그 소극성이 저절로 물러가고 사라지겠느냐? 제때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소극성은 계속 커져서 점점 심각해질 것이다. 그것은 점점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뿐, 절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저 나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뿐이다. 그러므로 소극적이 될 때는 한시바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소극적으로 변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니 지체해서는 안 된다!
2021년 6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