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일꾼의 직책(16)
제12조 하나님 사역과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를 방해하고 교란하는 각종 사람, 일, 사물을 적시에 정확하게 발견하고 이를 저지 및 제한하여 상황을 전환시킨다. 이와 동시에 진리를 교제하여 하나님의 선민이 그 속에서 분별력을 키우고 공과를 배우도록 한다.
교회 생활의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방해하고 교란한다
8. 관념을 퍼뜨린다
(1) 관념을 퍼뜨리는 모습
오늘은 이어서 리더 일꾼의 직책 제12조 ‘하나님 사역과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를 방해하고 교란하는 각종 사람, 일, 사물을 적시에 정확하게 발견하고 이를 저지 및 제한하여 상황을 전환시킨다. 이와 동시에 진리를 교제하여 하나님의 선민이 그 속에서 분별력을 키우고 공과를 배우도록 한다.’에 관해 교제하겠다. 교회 생활에서 나타나는 방해하고 교란하는 각종 문제에 관해 총 11가지 문제를 열거했다. 지난번에는 제7조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인다’에 관해 교제하였고, 오늘은 제8조 ‘관념을 퍼뜨린다’에 관해 교제하겠다. 관념을 퍼뜨리는 문제도 교회 생활에서 수시로 발생한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일부 사람들은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그들은 수시로 관념들을 퍼뜨려 교회 생활을 교란한다. 이런 행위는 교회가 반드시 제한하고 교회 생활에서 진리를 교제하여 해결해야 한다. 관념을 퍼뜨리는 것은 글자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듯 적절한 행위가 아니고, 긍정적인 것이 아닌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회 생활에서 마땅히 저지되고 제한되어야 한다.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든, 어떤 저의를 품고 있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관념을 퍼뜨리면 교회 생활에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런 일은 무조건 제한되어야 한다. 어떤 측면으로 봐도 관념을 퍼뜨리는 일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추구하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고, 오직 교란하고 무너뜨리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니 교회 생활을 하면서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 리더이든, 형제자매이든 모두가 이 일을 분별하여 적시에 나서서 저지하고 제한해야지 그가 관념을 퍼뜨려 사람을 미혹하고 교란하도록 계속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떤 말이 관념을 퍼뜨리는 말인지부터 교제해 보자. 이를 분별하고 나면 사람은 무엇이 관념을 퍼뜨리는 것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고, 방치하거나 등한시하지 않고 정확하게 저지하고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①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퍼뜨린다
관념을 퍼뜨리는 것에는 대상이 있다. 가장 먼저 누구를 겨냥해 어떤 관념을 퍼뜨리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사람이 하는 어떤 말과 사람이 퍼뜨리는 어떤 관점이 관념에 해당하는지 알게 된다. 어떤 것이 사람의 관념이고 어떤 행동 방식이 관념을 퍼뜨리는 것인지 알고 나면, 관념을 퍼뜨리는 일을 좀 더 정확하고 사안에 맞게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관념을 퍼뜨리는 것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오해를 퍼뜨리는 것으로 이것이 가장 대표적인 유형이다. 하나님의 신분이나 본질, 성품, 말씀, 사역 및 존재에 관해 사람이 퍼뜨리는 사실과 다른 관점이나 발언은 모두 관념을 퍼뜨리는 것에 속한다. 이는 대략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는 어떤 말이 관념을 퍼뜨리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하나님에 대한 판단과 정죄, 심지어 모독을 퍼뜨리는 것이 모두 관념을 퍼뜨리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에 대한 실제에 어긋나는 인식이나 하나님의 신분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 말과 잘못된 해석을 퍼뜨리는 것은 전부 관념을 퍼뜨리는 것에 속한다. 예를 들어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늘 하나님의 신분과 하나님의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은 진실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속으로 항상 하나님을 의심하고 오해하며 하나님이 안배해 준 삶의 환경이나 본분 이행의 환경 등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오해를 퍼뜨리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생각을 퍼뜨린다. 결국 이런 생각은 피조된 인간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편견이나 오해, 심지어 판단이나 정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경계하게 되어 진실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니 진실한 순종이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과 기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에게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고, 자기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어 무슨 일이든 평안하고 순조롭게 풀리게 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은혜를 구하고 복을 받으며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 위함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가정이나 직장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것이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버리고, 헌신하며, 고생하고 인내하면서 좋은 모습만 보이면 하나님의 축복과 특별한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하나님에게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고, 모든 일에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의 하나님을 믿는 관점이다. 사람은 이 관점이 정당하고 옳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떠나지 않는 것은 모두 이런 관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이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악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으니 분명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실 거야. 일할 때마다 많이 고생했고 대가도 엄청나게 치른 데다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에 따라 일하며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셔야 마땅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마음이 항상 평안하고 기쁘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누리도록 말이지.’ 이것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아니겠느냐? 사람의 관점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득을 봤으니 고생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심리이다. 하지만 진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 원칙은 물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완전히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자 순전히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념과 상상이다. 여기에 깃들어져 있는 것이 거래이든, 요구이든, 아니면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든, 전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고, 사람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에도 미달한다. 특히 이런 거래적 사상 관점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인데도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나님의 행사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 즉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오해가 생겨나고 또한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는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기까지 한다. 사람에게 어떤 관념과 오해가 생기든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그 어떤 일도 사람의 관념이나 뜻대로 하지 않고 그 누구도 사람의 관념이나 뜻대로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 본질에 따라 하나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원칙대로 대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의 일을 할 때 사람의 관념이나 상상, 사람의 기호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 사역에서 사람의 관념에 가장 부합하지 않는 점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마련한 어떤 환경이 전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도 모자라 부정하기까지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이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람의 관념대로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나 뜻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바뀌어야 하는 쪽이 어디냐? 사람이다. 사람이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체험하고 경험하면서 진리를 구해 자신의 관념을 해결해야지, 관념으로 하나님의 행사가 옳은지 판단하면 안 된다. 사람이 끝까지 관념을 포기하지 않고 고수하면 하나님에게 반발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발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이냐? 평소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 진리가 아닌 순전히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을 때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패괴 성품도 전혀 정결케 되지 않고 여전히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사는 삶에 속하니 구원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나 거부감이 생기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은 억지로 하나님의 행사를 받아들여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녹아 들어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여 볼 것이다. 사람이 관념을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고 어느 정도까지 내려놓을 수 있는지는 사람의 자질에 달려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 해당하는지에 달려 있기도 하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교제와 묵상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마주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차츰차츰 인식하고, 그에 따라 더욱 순종하게 되며 믿음도 더 커진다. 반면 어떤 환경에 처하든 진리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지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환경을 판단하며 늘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 이들은 늘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자신이 물질과 금전, 육적인 즐거움의 측면에서 얼마나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에만 골몰하여 이를 토대로 선택하고, 하나님이 안배한 모든 일을 대한다. 이리저리 궁리하다 결국 한다는 선택은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고 도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반발하고 거부하며 도피하다 보니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서 떠나 생명 체험을 잃고 손해를 보게 되며,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만 생기니, 이런 환경에 반항하면 할수록 사람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이런 형국이 되면 하나님에 대해 조금이나마 품었던 믿음은 결국 무너져버리고, 그 순간 사람의 마음에서 우위를 차지한 관념이 몽땅 쏟아져 나온다.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헌신한 나를 하나님이 이렇게 대하실 줄은 생각도 못 했네. 하나님은 불공평하고 사람을 사랑하시지 않아!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큰 복을 내린다고 하셨어. 나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단 말이야.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괴로움과 고생을 참고 견뎠는데 하나님은 어째서 내게 큰 복을 주지 않으시지? 하나님의 축복이 어딨어? 왜 난 느끼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걸까? 왜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는 거야? 어째서 하나님은 말씀만 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시는 거지? 다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 하던데 나는 어째서 못 느끼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번 환경만 봐서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겠어!’ 사람은 관념이 있어서 자신의 관념에 속아 오도되기 쉽다. 설사 하나님이 사람의 성품 변화와 생명 성장을 위해 사람에게 환경을 마련해 주어도 사람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오해한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소한 환경의 시련 한 번만으로도 이렇게 쉽게 드러나 버린다. 이렇게 드러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자기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는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롭지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며,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영원까지 지속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어디에서 이루어졌나요? 저는 왜 볼 수도 없고 느끼지도 못 하는 거죠? 아무개 좀 보세요. 그녀는 하나님을 믿고 나서 저보다 많이 버리거나 헌신하지도 않았고, 저보다 많이 바치지도 않았는데 아이는 명문대에 진학했고 남편도 승진했죠. 집안 사업도 계속 확장되고 있고 그 집 밭에서 나는 곡식도 다른 집보다 많더라고요. 그런데 전 뭘 얻었나요?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 이 말이 바로 이런 부류의 본심이자 좌우명이다. 그들의 머리는 이런 관념,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으로 가득하고, 이런 이익과 거래로 가득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사려 깊은 마음을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이런 식으로 대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나하나 사려 깊게 배치한 환경에서 그들은 반복해서 관념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오해하며, 계속해서 실패하고 넘어진다. 게다가 자신의 관념이 옳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한다. 그들은 이런 관념이 명확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멋대로 평가하고 판단하며 정죄할 수 있는 증거로 삼기 충분하다고 생각되면 관념을 퍼뜨리려 한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관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관념 속에 무엇이 뒤섞여 있느냐? 원망과 불만, 울분이 뒤섞여 있다. 이런 것들이 가득하면 그들은 그것들을 쏟아낼 기회를 찾고, 억울한 사정에 대한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줄 수 있는 무리를 찾아 그것들을 쏟아내서 그들이 ‘당한’ 이른바 불공평한 대우를 호소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퍼뜨리는 관념이 교회 생활에 나타난다. 관념은 이런 식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마음에 울분과 불복, 불만이 가득하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은 물론 판단과 정죄까지 가득하며 끝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가득하게 된다. 그들은 복을 받지 못할까 봐 선뜻 떠나지는 못하고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오해와 불만을 퍼뜨리려 하며,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판단과 정죄, 모독을 퍼뜨리려 한다. 그들이 무엇을 모독하겠느냐? 자기에게 불공평하다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기 행동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며 하나님을 모독한다. 그들은 자기가 봉헌하고 희생했는데 하나님이 은혜와 큰 복을 자기에게 내리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바라는 물질, 금전 등 육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얻지 못했다며 마음속에 원망과 울분이 가득하다. 그들이 관념을 퍼뜨리는 목적은 감정을 쏟아내고 보복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는 한편,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관념을 품어서 그들 역시 하나님을 경계하도록 선동하는 것이다. “저희도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들은 흡족해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관념을 퍼뜨리는 목적이자 그 이면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관념을 퍼뜨리는 부류의 좌우명이 무엇이냐? 그들이 항상 말하는 명언이 무엇이더냐? 그들은 어떤 일들을 겪고 나서 바라던 이득을 얻지 못하면 속으로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되뇐다.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 그렇게 되뇌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 같으면 예배 시간에 남들이 어떤 내용으로 교제하든 귀담아듣지 않고 이 말을 몇 번이고 다시 되뇌고 심지어는 십여 차례 곱씹기까지 한다.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니냐?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그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예전에 하나님을 믿었느냐? 예전 그의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었느냐? 그 믿음에 피조물로서 지녀야 할 순종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만 가득했고, 더 중요한 것은 그는 하나님에게 전혀 순종하지 않으면서 잔뜩 얻어내고 요구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가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나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주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나를 지켜주실 거라 믿어.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육적인 평안을 누리면서 행복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도록 하고 만사가 평안하고 형통하게 해주실 거라 믿어.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천국에 들어가 큰 복을 받으며 현세에 백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게 해주실 거라 믿어!’ 이것이 믿음이겠느냐? 이 ‘믿음’엔 순종이 전혀 없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믿음은 순전히 득을 보려는 사람의 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고 사람에게 사역하면서 언제 사람에게 행복한 삶, 남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했으며, 언제 만사형통과 밝은 미래를 약속했느냐? (그러신 적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의 ‘믿음’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느냐? 더구나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니 그의 믿음이 가치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들이겠느냐? 그에겐 진리 실제가 전혀 없고 하나님에게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이익을 얻으며, 득을 볼 생각만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부류는 머릿속이 관념으로 가득하고 복을 받으려는 속셈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사역을 전혀 체험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의 목적과 의도는 완전히 자신의 육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대단히 괜찮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이른바 믿음이란 것을 유독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이 그토록 소중하고 고상하다면 왜 하나님이 배치한 소소한 환경에서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굳게 서서 증거하지 못하느냐?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이냐? 하나님이 네 믿음을 검증할 때 너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설마 네가 하나님에게 준 오해와 원망, 반발심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겠느냐?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부 사람이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관념을 퍼뜨린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입증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나아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부류가 공개적으로 관념을 퍼뜨려 더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끌어들여 자기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며 모독하게 한다면 이는 자기가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는 자나 하나님의 성도가 아니고, 더 이상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있는 피조물도 아니라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퍼뜨리는 관념은 단순한 생각이나 발언이 아니라 그와 하나님 사이에 생긴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이다. 그는 속으로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처리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를 대하는 것이 올바르고 또 그렇게 실행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런 사람이 교회 생활에서 공개적으로 관념을 퍼뜨린다면 제한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면 그들은 분량이 작고, 기초가 부실하니 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관점을 밝히게 하고, 그들에게 회개할 충분한 시간과 장소를 주어야겠느냐?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저지하고 제한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왜 저지하고 제한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그가 마음껏 이야기하지 못하게 제한하셨다가 그가 믿지 않게 되어서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이는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 아닌가요? 얼마나 아깝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침륜되지 않고 만인이 구원받길 원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린양 한 마리라도 잃어버리면 찾으려 하시는서 힘겹게 되찾은 어린양을 또다시 잃어버리시게 해도 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 옳은 말이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이런 부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복을 받으려고 믿는 것이고, 그의 믿음 안에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불순한 의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는 불순한 의도가 없느냐? 그것이 이유란 말이냐?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라는 이런 부류의 말이 무슨 말이냐? 이 말은 이방인, 사탄, 마귀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없습니다.) 이 말의 저의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어요. 예전에 사력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고 따랐는데 하나님은 결국 저를 축복해 주지 않으시고 이런 환경을 배치해서 저를 난감하게 하고 넘어뜨리시는군요.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는 전혀 일치하지 않아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예전에 저는 너무 어리석었어요.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며 그토록 고생했는데도,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되어 박해당했는데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저희 집 사업도 다른 집보다 변변치 못해서 벌이도 남들보다 적어요. 저희 부모님은 늘 아프시고요. 몇 년간 하나님을 믿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죠. 하나님은 사람을 대단히 축복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하나님이 제게 무슨 축복을 해주셨죠? 하나님의 말씀도 이뤄지지 않았잖아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라는 말 속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에는 온통 하나님에 대한 원망, 불만, 오해뿐이다. 결론적으로는 그가 일방적으로 고생하고 헌신한 다음 하나님이 자기 요구대로 축복해 주지 않고, 그의 관념과 상상대로 보상해 주거나 상을 내려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고는 하나님을 잔뜩 원망하는 상태에서 이런 말을 내뱉은 것이다. 이런 말은 괜히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가 이미 많은 행동과 모습을 보였고, 이미 드러났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그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바로 그가 자기 자신을 전혀 피조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전혀 창조주로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하나님을 돈줄, 화수분으로 생각했고, 고난에서 구제해 줄 보살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보살이나 우상을 믿는 신도로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 때 부처를 믿는 것처럼 채식하고 염불하면서 늘 애걸복걸하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나서 만들어낸 모든 이야기는 전부 그의 관념과 상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는 창조주로부터 비롯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피조물의 모습은 전혀 없고 창조주에 대해 피조물이 지녀야 할 순종도 전혀 없다. 오로지 끊임없이 얻어내고 계산하며 무조건 요구하기만 하다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된다. 이런 관계는 거래 관계에 속하니 결코 유지될 수 없다.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런 사람들이 설령 교회 생활도 하면서 관념을 퍼뜨리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이끌고 어떻게 축복했는지, 그가 무엇을 누렸는지 등에 대해 가끔 교제도 한다고 해도 그들 말의 대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즐거움, 육적인 이익을 얻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로 진리와는 전혀 무관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진리 실제라고는 전혀 없다. 순탄한 환경에서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과 인내를 보이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받는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그들이 누리는 은혜와 복, 물질적인 대우를 거둬가면 그들의 관념이 드러난다. 이렇게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이익을 최고로 중시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만 하면 부끄러워 성을 내고 관념을 퍼뜨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쏟아낸다. 아울러 자기를 동정하도록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를 저지하고 제한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이 교제하는 주제나 사상과 관점은 진리에 대한 순수하고 올바른 이해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게 만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경계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버리게 만들고, 그가 퍼뜨리는 관념을 듣고 사람들도 자기처럼 속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라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경고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이런 부류가 퍼뜨리는 관념이 다른 사람에게 일으키는 교란이다.
②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관념을 퍼뜨린다
이렇게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관념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를 판단하고,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도 판단한다. 그들은 관념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대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 그리고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환경을 관찰하고 연구한다. 하나님의 행사가 자신들의 관념에 부합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공의롭고, 신실하고, 거룩하다며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미한다. 반면 하나님의 행사가 자신들의 관념에 어긋나고, 자신들의 이익에 심각한 손실을 초래하고, 자신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기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부인하고, 심지어 관념을 퍼뜨려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경계하도록 선동한다. 그들은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마시고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도 마세요. 안 그러면 손해를 보고 피해를 봐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진심으로 나를 위해 헌신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크게 축복해 줄 것이다.”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냐? 이 말씀은 100퍼센트 진리이다. 여기에 혈기나 기만은 없다. 거짓말이나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영적인 이론도 아니라 진리이다. 이 진리의 본질은 무엇이냐? 네 헌신이 진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심’이란 무엇이냐? 불순한 의도 없이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돈을 위한 것도, 명성을 위한 것도 아니며, 자신의 속셈이나 욕망, 목적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네 헌신은 강제로 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교사하거나 어르고 달래서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한 것이고, 양심과 이성에서 우러나와서 한 것이다. 이것을 진심이라고 한다. 헌신에 대한 바람에서 보면 진심이란 이런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헌신의 실제 행동에서 볼 때 무엇이 진심의 모습이냐? 바로 거짓과 기만이 없는 것, 요령 피우지 않는 것, 건성으로 하지 않는 것,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온 힘을 다하는 것 등이다. 이런 구체적인 모습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진리 원칙이 모두 진심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는 기준이 있고 원칙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심을 바치고, 얼마 안 되는 저축도 모두 바친다면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만약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면 이것들을 전부 바쳐도 아깝지 않을 거예요!” 막상 바쳤는데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면 그는 이런 고민을 한다. ‘아무래도 내가 바친 게 부족했나 봐. 좀 더 바치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거야.’ 복음을 전하다가 난관에 봉착하면 기도한다. 때로는 끼니도 거르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까지 계속 기도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자를 반드시 크게 축복해 줄 것이라고 하셨어. 아마도 내 진심이 아직 부족한가 봐. 좀 더 기도해야겠어.’ 기도를 통해 믿음이 생기니 조금 고생해도 두렵지 않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도 실제로 성과가 나타난다. 그는 생각한다. ‘이번엔 내게 진심이 생겼으니 어서 집에 가서 형편이 나아졌는지, 아이 병은 호전되었는지, 우리 집 사업은 순조로운지,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지 살펴봐야겠어.’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거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방식, 자신의 관념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진심’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거기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진심’으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끊임없이 검증하고,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할지, 하나님이 한 일은 무엇이고 하지 않은 일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엿본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축복을 내릴지, 자기를 크게 축복할 마음이 하나님에게 있는지 끊임없이 추측하고, 자기가 무엇을 바쳤고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었는지 끊임없이 계산해 본다. 그가 자기만의 ‘진심’으로 하나님의 그 말씀을 끊임없이 검증하고 테스트하고 있는데 이것이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이겠느냐?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내렸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검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처럼 그리 쉽게 실현되지 않으며 본인이 하나님의 그 말씀의 진위를 검증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념이 한층 심해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진리인 것은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확신하게 된다. 마음속에 이런 것들을 숨기고 있으니 그는 하나님을 미심쩍어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에게 늘 관념을 품는다. 이렇게 마음속이 관념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교회 생활을 하고 형제자매를 접할 때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수시로 드러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념을 품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 역시 관념으로 판단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늘 그들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면 그들은 관념을 퍼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려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하나님 사역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으니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조해야 하고, 더 이상 세상에서의 앞날이나 화목한 가정 등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등의 말씀을 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고 나서 또다시 많은 사역을 하면서 3년, 5년, 7년, 8년이 흘렀는데 어떤 사람이 보니까 하나님의 사역이 여전히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고, 하나님의 사역이 곧 끝나리라는 조짐이나 대재앙이 곧 임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피난처로 피신하리라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관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이 어서 끝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아름다운 복을 누리도록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람의 관념이나 상상대로 그 일을 성취하지 않은 것이다. 성미 급한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사역이 막바지에 접어든 게 아니었나? 곧 끝나는 게 아니었어? 곧 대재앙이 임하는 게 아니었나? 어째서 하나님 집은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하려는 거지? 하나님의 사역은 과연 언제 끝나는 걸까? 언제가 끝일까?’ 이들은 진리, 하나님의 요구에는 관심이 없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역이 언제 끝날지, 사람의 결말이 죽음일지 삶일지, 언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복을 누릴지,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은 어떨지 등에만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들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어느 정도 참다가 천지가 변하지 않고, 세상의 나라들도 예전 그대로이면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의 그 말씀들은 언제 이루어지나요? 제가 몇 년을 기다렸는데 왜 여태 이루어지지 않은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이루어지긴 할까요? 하나님 말씀이 “믿을 만한가요?” 이런 사람들은 인내심이 없어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살 기회를 찾고자 한다.
하나님이 행한 사역,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늘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고, 사람의 관념에서 벗어난다. 사람이 아무리 추측해도 제대로 추측하지 못하고, 아무리 헤아려봤자 헤아리지 못하니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역하고 그 사역이 이루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 결국 의심하는 사람이 생긴다.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긴 할까? 도대체 어디 계신 거야? 하나님께서 줄곧 진리를 선포하고 계신데 너무 많이 선포하시는 거 아냐?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신다고 하시지 않았나? 우린 언제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지금까지 이 일이 왜 이루어지지 않고 실현되지 않는 거지? 도대체 몇 년이나 더 있어야 하는 거냐고! 만날 하나님의 날이 눈앞에 왔다고 하시는데, 이 ‘눈앞’이라고 하신 지가 벌써 몇 년째야? 왜 이렇게 멀고 끝도 안 보일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다. 이것이 어떤 문제를 의미하느냐? 어째서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도 전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느냐? 왜 늘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규정하느냐?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일들을 보지 못하느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의 길을 확인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의 그 말씀과 그 모든 행사가 모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겠느냐? 사람은 진리를 얻어 구원받아야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한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겠느냐? 그들이 하는 말, 그들이 퍼뜨리는 관념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그 모든 사역과 말씀의 목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전혀 모르는 불신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 집에서 지내면서 그들이 무엇을 얻었느냐? 하나님이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들이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 힘을 조금 썼다가 복을 받지 못하면 관념을 퍼뜨려 다른 사람을 미혹하고 교란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전 하나님의 사역이 3년, 5년이면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을 줄은 생각도 못 했죠. 이 사역이 언제 끝날까요? 계속해서 간증문을 쓰고, 찬양 영상과 영화를 만들고,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데, 언제쯤 끝날까요?” 그리고 남들에게 이런 질문도 한다.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어떻게 생각하시든 제 생각은 이래요. 전 솔직해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거든요. 속 얘기를 꺼내지 않고 피하고 숨기기만 하는 사람과는 다르죠.” 정말 너무 ‘솔직’해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더 심각한 것은 그가 이런 말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앞으로도 끝나지 않으면 직장에 나가 돈도 벌면서 생활을 꾸려야겠어요. 이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느라 맛있는 것도 못 먹고 좋은 데 놀러도 못 다녔잖아요. 물질적인 생활도 많이 못 누렸고요!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면 지금쯤 호화주택에 살면서 자가용을 끌고 있겠죠. 전 세계를 몇 바퀴나 돌았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삶을 상상해 보면 참 멋지고 행복할 거 같아요. 조금은 공허하겠지만 육적으로 즐거울 거예요. 맛있는 것도 먹고 마시면서 아무 구속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껏 하나님을 믿으면서 너무 고생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했어요! 진리도 좀 얻고 마음도 든든해지긴 했지만 이 진리가 그런 육적인 즐거움을 대신할 수는 없죠! 또,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질 않고, 하나님도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으니 항상 제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으면 평안과 기쁨이 생긴다고들 하는데 평안과 기쁨이 생기면 뭐 해요? 육적으로 즐겁지도 않잖아요!” 이 말이 그의 머릿속을 몇 번이나 스쳐 갔는지, 스스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관념이 성립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되면, 그리고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되면, 그의 발언과 관념이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과 오해를 퍼뜨려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오해하도록 미혹하려 한다. 물론 속내가 음흉한 일부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게 막아서 그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버리게 만들려고 한다. 만약 교회가 해체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할 것이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내가 복을 받을 수 없으니 당신들도 복받는 건 꿈도 꾸지 마. 내가 훼방을 놓겠어. 진리를 얻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을 생각은 다들 접으시지!’ 복받을 가망이 없어 보이면 그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복을 받지 못하니 남들이 복을 못 받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는 관념을 퍼뜨릴 때 한편으로는 자신의 불만을 쏟아내고, 하나님의 사역이 언제나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끌어들여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품고 믿음을 잃게 만들려 한다. 이로써 더 많은 사람이 자기처럼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관념으로 인해 하나님을 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교회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불만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교회 생활의 성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 정상적인 교회 생활과 교회 사역을 교란하지 않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에 영향을 주고 사람들의 정상적인 본분 이행에도 지장을 준다. 따라서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은 반드시 제한해야 한다. 간혹 언급할 뿐이더라도 제한하고 분별해서 그자의 인성이 어떤지, 잠깐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진 건지, 아니면 본성 본질에 문제가 있어서 한결같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의도적으로 관념을 퍼뜨려 더 많은 사람을 미혹해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무너뜨리려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가 가끔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질 뿐이라면 진리를 교제하여 붙들어 주고 도와주면 된다. 만약 만류해도 듣지 않고 계속 관념을 퍼뜨려 교회 생활을 교란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을 소극적이고 연약하게 만들어 정상적인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기까지 한다면 그자는 사탄의 종에 속하니 원칙대로 그를 제명해야 한다. 어째서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느냐? 대답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불신파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인성이 어떻든 이런 사람은 불신파이다. 불신파는 알곡 가운데 가라지와 같으니 솎아내야 한다. 불신파의 모습만 좀 있을 뿐 아직 교회 생활에 교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교우로서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굳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늘 관념을 퍼뜨리는 부류는 항상 불신파의 관점과 말들을 쏟아내려 하며 단지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의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도록 선동하고 미혹하며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복을 받지 못한다면 난 믿지 않겠어. 당신들도 복받을 생각 말고 믿지도 마! 당신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언젠가 결국 복을 받으면 내가 난감해지지 않겠어? 내 마음이 편하겠냐고! 그럴 순 없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당신들에게 훼방을 놓겠어. 당신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배신하게 말이야. 모두 나랑 같이 교회를 떠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이것이 그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신파를 제명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제명해야 한다. 스스로 안 믿겠다는 불신파가 있으면 교회는 그의 하나님 말씀 책을 회수하고 그를 제명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저 교우로서 가끔 도움을 주는 불신파가 있다면 이런 부류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교제하지도 않지만 관념을 퍼뜨리지 않고 교회 생활을 교란하지 않으니, 봉사할 수만 있다면 제명할 필요 없이 교회에 남겨두어야 한다. 하지만 늘 관념을 퍼뜨리는 불신파에게는 사정을 봐주지 말아라. 그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를 퍼뜨려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교회 사역을 방해하며 교란한다. 사탄의 종인 이런 불신파는 관념을 품고는 진리를 구해 해결하기는커녕 관념을 퍼뜨려 하나님 선민을 미혹하려 한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도 모자라 물귀신처럼 같이 죽을 몇 사람을 물색한다. 그가 이런 심보로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데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겠느냐?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제한이나 격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를 정리해서 영원히 제명해야 한다. 절대 봐주지 마라!
교회에는 한결같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해서 사람을 구원하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일련의 일들을 체험하고 나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에게 맞서면서 한다는 말이나 행동은 모두 관념을 퍼뜨리는 것이다. 그들이 퍼뜨리는 관념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한 잘못된 이해나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그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부정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모독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조물이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관점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패괴와 패역을 해부하고 인식하지 않으며,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교제하지도 않는다. 그가 말하는 관념은 이런 긍정적인 인식과는 정반대여서 다른 사람이 들으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진실한 믿음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커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흐려지고 약해지며 심지어 사라질 것이고, 이와 함께 하나님 사역에 대한 이상(異象) 역시 희미해질 것이다. 사람은 그가 퍼뜨리는 관념을 들을수록 마음속이 흐려질 것이고 심지어 자기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조차 분명히 알지 못하게 되며, 하나님의 존재 여부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사람이 그가 퍼뜨리는 관념과 오해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되어 속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기 시작하니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는 것도 모자라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이러면 골치 아프다. 이런 부정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사상과 관점, 그리고 구상과 계획이 생긴다면 사람이 받아들인 정보와 발언은 분명히 정상 인성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고 진리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이는 100퍼센트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이 어떤 속셈과 동기를 가졌든, 그가 유언비어나 황당한 이론을 퍼뜨리는 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교회에 악영향을 일으키는 이상 제한해야 한다. 물론 교회 생활 이외의 다른 측면에서 사람이 알아보고 분별한다면 그 또한 적시에 저지하고 제한해야 한다. 만약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자신의 인식으로 그를 반박하고 폭로해서 형제자매가 그를 분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것은 사탄과의 전쟁이다. 네게 그런 분량이 없다면 그를 분별하고 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네게 분량이 있다면 그를 폭로해야 한다. 너희는 감히 그렇게 하겠느냐?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는 여기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난다. 일부 초신자들은 이런 부류가 퍼뜨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를 들으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라며 경악할 것이다. 기초가 없는 사람이 이런 관념과 황당한 이론을 들으면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지지 않겠느냐? 이런 황당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미혹되어 교회를 떠나지 않겠느냐? 전부 가능한 일이다.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이 “전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라고 한다면 어떤 내적 상태에서 이런 말을 했든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불신파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말을 퍼뜨리든 네가 들으면 도움이 되겠느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연약해졌을 때 이런 말을 들으면 너는 ‘나랑 동병상련인 사람이네. 저 사람이 한 말은 자기의 관념이자 내 마음의 소리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고 ‘이런 대역무도한 자를 봤나! 어떻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지? 그건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잖아? 난 그런 말은 절대 못 해. 그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짓이라고!’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관념을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은 그런 것들이 진작에 그의 마음속에 생겨나 이미 뿌리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초기 상태라 관념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고, 말을 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미혹하거나 교란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입조심하면 제명되는 결과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을 입 밖으로 꺼내어 교회 생활을 교란한다면 가차없이 폭로하고 제명해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으면 관념을 가지기 일쑤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읽고 이해 능력도 있다면 관념이 생겨도 진리를 구해 해결할 것이다. 늘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으로 드러나 도태되는 사람이자,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며,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
관념을 퍼뜨리는 일은 분명 각국, 각지의 교회 생활마다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 진리를 싫어하는 자, 육적인 즐거움에 탐닉하는 자, 불신파, 악인 등의 부류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육신에 대한 관념을 품고 있다. 그들은 마음이 온통 관념으로 뒤덮이고 하나님에 대한 상상과 요구로 가득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수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관념과 취향 심지어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이해할 뿐이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각종 관념과 상상, 무리한 요구로 가득하고 하나님에 대한 각종 오해와 판단 등으로 꽉 차 있다. 따라서 이들이 관념을 퍼뜨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부류가 존재하는 한 관념을 퍼뜨리는 일은 수시로 발생할 것이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행사 하나가 자기 관념이나 바람에 어긋나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기라도 하면 그는 분해서 화를 내고, 자기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이익을 다투려 하며,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역과 힘겨루기를 하려 한다. 이들은 항상 진리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분석하고 연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올바른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검열하며 성육신이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려 한다. 이 검증 과정에서 정확한 답을 찾는 데 난항을 겪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기 어렵고, 이루어지기도 어려워 보이면 그들은 퍼뜨릴 관념이 더욱 많아진다. 그들은 시간과 장소, 환경과 상황을 불문하고 관념을 퍼뜨린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어떤 불만이라도 품으면 자신의 관념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그들의 관념에 어긋나면 재빨리 자신의 관념을 쏟아낸다. 이렇게 쏟아내는 것을 우리는 퍼뜨리는 것으로 규정한다. 어째서 ‘퍼뜨린다’고 하겠느냐? 그들이 쏟아내는 것들이 하나님 선민, 교회 생활, 하나님 집의 사역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저 교란하고 방해하며 망치기만 하기 때문에 이렇게 발언하는 것을 ‘퍼뜨린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관념을 퍼뜨리는 일을 기본적으로 분별하고 나면 사람의 여러 잘못된 관념과 발언을 진리에 따라 해부하고 분별한 다음 하나님 집의 규정대로 처리하고 해결해야 한다. 이런 유형의 문제를 해결할 때 당연히 리더 일꾼에게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동시에 모든 하나님 선민 역시 이런 교제를 듣고 나면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과 그들의 언행을 폭로하고 해부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만약 그를 저지하고 제한할 용기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근거로 그와 교제하고 논쟁해도 된다. 논쟁의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분량이 작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논쟁을 듣고 나서 누구의 말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알게 되어 남들이 퍼뜨리는 관념이나 황당한 이론에 엉겁결에 미혹되지 않게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선민에게도, 교회 생활에도 모두 도움이 된다. 진리에 어긋나는 발언을 발견하면 사람의 관념이든 황당한 이론이든 상관없이 논쟁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그러면 최소한 방관자가 듣고는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이 하는 말이 관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관념의 어떤 부분이 진리에 어긋나는지, 관념의 본질이 무엇인지, 왜 진리에 어긋나고 관념으로 규정되는지, 어째서 제한해야 하는지 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엉겁결에 미혹되거나 농락당하지 않고 이런 것들에 대해 정확한 견해가 생길 것이다. 비록 사람이 퍼뜨리는 관념은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과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망칠 수 있지만 이런 일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최소한 분별력을 키워주어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의 낯짝이 어떤지, 그들이 관념을 퍼뜨릴 때 표출하는 성품은 무엇인지, 그들이 퍼뜨리는 관념이 진리와 어떻게 구별되는지 알게 할 수 있다. 이런 발언에 대해 분별력과 면역력이 생기는 한편, 이런 부류에 대해 분별력이 생겨서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이 불신파이고 진리는 전혀 없이 항상 하나님에게 관념만 품는 사람인지 알게 되며, 그의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적어도 이 정도의 분별력은 생긴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하나님, 사람이 퍼뜨리는 관념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제게 환경을 마련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지는 마라. 사람이 관념을 퍼뜨리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장난이 아니고 미혹되기도 쉽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너는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그것을 방치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하나님이 네게 배치한 모든 환경을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로 대하면서 올바르게 마주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진리를 얻기 위해 지녀야 할 태도이다.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너는 하나님에게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제가 이런 말들과 이 부류를 분별할 수 있도록 저와 함께하시고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세요.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관념이 제 안에 있지는 않은지 인식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나서 이 일을 체험해라. 물론 이는 네가 과연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는지, 분량은 얼마나 되는지 검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관념을 퍼뜨릴 때 네가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아무런 반응이나 생각도 없이 그가 어떤 관념을 쏟아내고 퍼뜨리든 그저 수신기처럼 전부 받아들인다면, 아무런 저항력이 없고, 거부할 능력도 없으며, 더군다나 분별할 능력마저 없다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또 어떤 사람은 남이 쏟아내는 관념을 들으면 속으로는 그 사람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서 그와 교제하고 논쟁하고 싶지만 어떻게 말해야 적절할지, 어떻게 폭로하고 해부해야 할지 모르고, 말로는 그를 당해내지 못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결국 무릎 꿇고 창피를 당하면서 곤경에 처하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그와 논쟁하지 않는 것도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평소에 설교도 많이 듣고 깨달은 것도 적지 않은데 어째서 그에게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할까? 나는 하나님께 관념을 품지 않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왜 황당한 이론을 반박할 땐 분명하게 말하지 못할까?’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의 말이 갈수록 많아지고, 갈수록 터무니없으며, 갈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도 반박하거나 해부하지 못하고 나서서 그를 폭로하지 못하며 더욱이 그를 저지하지도 못하니 조바심이 난다. 그제야 자신의 분량이 너무 작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가 깨달은 진리가 아직 완전하고 정확한 관점으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단편적인 말로서 흩어져 있는 보잘것없는빛이나 생각일 뿐, 결코 진리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관념을 퍼뜨리고 사람을 미혹하는 불신파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를 폭로하고 그의 관점에 반박하고 싶지만 적절하고 강력한 논리가 없어 간신히 이렇게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바람직하니 받아들여야 해요. 하나님께서는 성결하고 완벽하세요. 당신이 말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재하시니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해요. 하나님께 순종하면 손해 볼 일이 없어요.”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피상적인 이론만 펼치는 것이다. 이런 특수한 사건을 체험하고 나면 자신의 분량이 너무 작다는 것을 알고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난 왜 이렇게 무능할까? 평소에 중요한 도리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유창하게 논할 수 있고 예배 때 한 시간 동안 발표하는 건 일도 아닌데 말이야. 설교 원고도 네다섯 페이지 정도는 거뜬하게 쓸 수 있어. 자신 있다고. 그런데 저렇게 관념을 퍼뜨리고 하나님을 판단하며 모독하는 사람 앞에서는 왜 경각심을 잃고 반응하지 못하는 거지? 어째서 강하게 폭로하고 반박하지 못하는 걸까?’ 이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자기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지 않았느냐?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좋은 일입니다.) 마침내 자신의 실제 분량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누군가 관념을 퍼뜨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사람은 자기가 분량이 있고 진리를 깨달아 분별력이 있어서 무슨 일이든 간파할 수 있고 마치 제 손금 보듯 각종 영적인 도리를 논하고 여러 진리를 교제할 수 있는 줄 알 것이다. 그 결과 누군가 관념을 퍼뜨리는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별수없이 지고 만다. 창피한 일이 아니냐? 이것이 자랑스러운 일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그와 논쟁할 적절한 논리는 없지만 부끄럽지 않게 굳게 서서 증거하여 사탄이 철저하게 창피를 당해 실패하게 만들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한 가지 묘수를 알려주겠다. 누군가 한도 끝도 없이 관념을 퍼뜨리는데 많은 사람이 분별하지 못한 채 그에게 영향받는 것을 발견한 경우 네가 그를 말로 당해내지 못한다면 책상을 내리치며 좀 강하게 나가야 한다. “그만! 지금 뭐라고 떠드는 겁니까? 제가 말로는 당신을 못 이겨도 당신이 불신파라는 건 알아요! 잘 보세요! 당신 말 중에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 한 마디라도 있습니까? 몇 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증거하는 말을 한마디라도 한 적이 있나요? 하나님께 불만이 있으면 여기서 교란하지 말고 재주껏 삼층천에 올라가 하나님께 직접 고하세요. 지금 정식으로 당신에게 명합니다. 당장 꺼져요!” 너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혈기겠느냐? (아닙니다.) 이것은 사탄에게 내리는 선고이다. 너는 이렇게 그에게 일러라. “당신 같은 불신파는 꺼져요!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누리다니, 양심도 없는 작자군요. 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 그에게 세 글자로 “꺼져요!”라고 하면 어떠냐? 효과는 있지만 남발해서는 안 된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형제자매에게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지만 불신파나 사탄의 종에게는 이렇게 가차없이 명령을 내려도 된다. “이곳은 하나님 집이자 진정한 형제자매의 집이며,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집이지, 마귀 사탄의 집이 아닙니다. 이곳에 마귀 사탄은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마귀 사탄이니 썩 꺼져요!” 이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 (합당합니다.) 이것이 최선책은 아니다. 단지 너희는 분량이 작고 아직 사탄과 싸울 충분한 분량이 없으니 이 방법을 알려주는 것뿐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너희가 수많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과 진실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만신창이가 되도록 압도적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망신을 당한 그가 결국 모든 사람 앞에서 “저는 앞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군요. 저는 마귀 사탄이니 제 발로 교회에서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너희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으니, 내가 말한 방법대로 늘 관념을 퍼뜨리는 부류에 대응해야 한다.
교회에 나타나는 늘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겠느냐? 관념을 퍼뜨려 사람을 미혹하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관념을 퍼뜨리는 발언에는 주로 몇 가지 측면이 있느냐? 첫 번째 측면은 하나님 말씀을 겨냥하는 것이고, 두 번째 측면은 하나님의 사역을 겨냥하는 것이며, 세 번째 측면은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 몇 가지 측면의 발언은 경미한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상상과 그릇된 이해이고, 심각한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판단과 정죄, 모독이다. 그 밖에 사람이 품는 원망과 불복, 불만 등 소극적이고 반항하는 발언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관념을 퍼뜨리는 말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며 정죄하고 모독하는 성질이 있다. 그로 인해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추측하고 경계하며 오해하고 떠나는 것도 모자라 저버리게 된다. 이를 분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3) 관념 해결의 원칙과 길
관념을 퍼뜨리는 모습에 관한 항목에서 교제해야 할 것이 더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관념을 퍼뜨리는 일은 교회 생활에서 반드시 폭로하고 해부해야 해요. 제한도 해야 하고요.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믿다 보면 여러 가지 관념이 생기기 쉬워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렇다면 관념을 대할 때 사람이 어떤 실행의 길을 가지고 있어야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고, 교회 생활에 교란과 방해를 일으키지 않으며, 남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고, 남들의 생명에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적절할까요?” 사람이 관념을 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 불가피한 일 아니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만 관념을 갖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맞는 말이겠느냐? 반만 맞는 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특수한 일이 일어나면 간혹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는다. 왜냐하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 어느 정도 관념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은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며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도덕과 철학에 부합하거나 전통문화와 인륜, 이론 등에 부합하는 관념이 있을 수도 있다. 겉으로는 이런 생각도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와 충돌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때 품는 수많은 관념은 선천적인 관념이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환경과 여러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갖게 되는 많은 새로운 관념은 후천적인 관념이다. 이 두 가지 관념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직면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관념을 대할 때 해결 방안이나 실행의 길이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려울 것 없어요. 선천적인 관념은 저버리면 됩니다. 신경쓸 필요 없어요. 그런 관념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깨달음에 따라 차츰 해결되고 정리될 거예요. 그리고 후천적으로 생긴 관념은 하나님께 의지해 해결하면 돼요. 우리는 그 관념에 속박받지도 않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 반항하거나 하나님을 정죄하고 모독할 수 있는 관념이 생기지 않은 거예요.” 이런 실행법이나 이렇게 관념을 대하고 처리하는 방식은 어떠냐? 관념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폐해는 없겠느냐? 관념을 대하는 이런 태도를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태도가 사람에게 그 어떤 긍정적인 역할이라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소극적인 방법을 취해서 이런 관념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마음속 가장 은밀한 곳에 담아 두었다가 튀어나오면 억누르고 기도하여 해결한 셈 친다면, 또 언제고 다시 관념이 튀어나와도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그것을 신경쓰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어쨌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셔. 난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의 창조주이시지. 이 점은 변하지 않았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해결법이겠느냐?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겠느냐? 이렇게 실행하면 관념을 근본적으로 완전하게 해결하겠느냐? 그럴 리 없다. 이런 관념들은 크든 작든, 많든 적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한 사람의 생명 진입이나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끼치고 교란을 일으킨다. 특히 사람이 연약해질 때나 극복하기 힘든 환경에 놓일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실행의 길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흡족게 할지 모를 때, 자기가 구원받을 가망이 없어 보일 때 이런 관념들은 사람의 내면에서 불쑥 튀어나와 사람의 생각을 주도하고 사람의 온 마음을 차지하며 심지어 사람의 거취와 길에 대한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네가 개의치 않는 한 관념, 그러니까 지금껏 네게 영향을 미친 적 없고, 너를 넘어뜨린 적도 없어서 네가 늘 주재자로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관념은 네가 실패나 교체, 도태를 한 번 체험하거나, 하나님의 매서운 징계와 채찍질을 한 차례 체험하는 순간, 심지어 스스로 무저갱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네게 속한 것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설사 네가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네 생각을 교란하고 미혹하는 것도 모자라 네 사상과 관점, 하나님에 대한 네 태도와 믿음을 주도할 수도 있다. 이런 관념을 적절한 실행 방식이나 원칙 없이 대하거나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관념들은 수시로 네 생명 진입이나 당장의 선택에 영향을 줄 것이고, 너와 하나님의 관계나 하나님을 대하는 네 태도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생겨난 관점이든지 간에 사람이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관념을 대하고 처리해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가 명확히 교제해야 할 문제이다.
육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유 의지와 자유로운 사상이 있다. 교양의 유무나 자질의 수준, 성별을 막론하고 사람에게 생각이 있으면 관념이 생기기 마련이다. 만약 이런 관념이 패괴 성품을 주도하게 되면 그 관념으로 인해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관념을 퍼뜨리는 자에게만 관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관념을 퍼뜨리고, 뒷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에 대한 온갖 견해와 판단을 퍼뜨릴 뿐이다. 그렇다면 관념을 퍼뜨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설마 관념이 없겠느냐? 마찬가지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단, 의도적으로 관념을 퍼뜨리는 사람의 경우 본성 본질이 선천적으로 진리를 싫어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관념이 옳고 진리에 완전히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념과 진리가 충돌할 경우 진리가 아닌 관념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실패하는 부분이자, 그들을 제한하고 정죄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은 어째서 관념이 생겨도 정죄되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이성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속으로 사람의 관념이 진리에 어긋나고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곧바로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속으로 관념을 포기하고 싶어 한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쪽을 택하는 순간 내면의 관념이 진리로 대체되고 해결되어 그들은 관념을 내려놓고 관념의 영향이나 제한,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관념을 품어도 퍼뜨리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도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하나님의 구원에 순종할 수 있다. 그들은 늘 자신이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마음에 어떤 관념이 있든 그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지키고,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지킨다. 자신의 본분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관념이 계속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은 곤경에 빠지고 망가질 수 있으니 어떻게 관념을 대하고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 교제해야 한다.
대답해 보아라.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관념이 해결하기 쉽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난 후 특수한 환경과 상황에서 생긴 관념이 해결하기 쉽겠느냐? (선천적인 관념이 해결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상상과 관념은 해결하기 쉽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생기는 관념은 해결하기 쉽지 않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주장일 뿐 사실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론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사람이 철학과 논리학에 따라 그렇게 추론해 냈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일부 관념들이 내려놓아지고 해결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도리적으로 통하게 되어 해결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관념은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관념과 관계가 있다. 이 두 가지 측면의 관념 중 이론적으로는 선천적으로 생긴 관념이 해결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기만 하면, 그리고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이 두 가지 측면의 관념 모두 쉽게 해결된다. 예를 들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이 쉽게 해결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결국에는 한쪽으로 치우쳐서 지엽적인 것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을 만나 성경이나 영적 명저, 그리고 성경 해설가의 풀이를 파고들고는 그것을 네게 들이밀며 한바탕 떠든다. 네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순수하고 올바른 도와 진리, 옳은 말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귀담아듣지도 않는다. 이는 그의 이해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거나 말장난하는 것을 즐기고, 이론과 신학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가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내려놓지 못합니다.) 사실상 성품이나 취향으로 보아 이런 부류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가장 처음에 생기는 관념은 사실 단순하고 표면적이어서 쉽게 해결된다.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정상적인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일 경우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를 교제해 주었을 때 알아듣기만 하면 쉽게 관념을 내려놓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부류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이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념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이성을 지녀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에 대해 어떤 관념이 생기든, 그리고 그것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 생긴 관념이든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라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리이시며 영원히 틀리지 않으십니다. 제 생각이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결국 사람의 생각일 뿐이고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진리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어긋난다면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그는 도대체 어디가 틀렸는지는 아직까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실행하겠느냐? 그는 순종하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지 않으며 이 일을 내려놓으면서 언젠가 하나님이 드러낼 거라 믿는다. 누가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으시면 어떡하려고요?”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면 영원히 순종하겠어요. 하나님께서는 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행사도 틀리지 않아요.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행사가 틀린 것은 아니죠. 오히려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이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은 연구하거나 자기에게 생긴 관념 속에서 맴돌아서는 안 돼요. 관념으로 하나님의 트집을 잡아서도, 관념을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유나 핑계로 삼아서도 안 되죠” 그는 관념을 이런 방식으로 대한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실행법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관념이 생기면 관념으로 하나님을 비추어 보거나 연구해서 하나님의 진위,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내려놓은 채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인식하려 노력한다. 온 힘을 다해 인식해도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면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도 순종한다. 그는 “하나님은 틀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시며 진리를 선포하시는 진리의 원천이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우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모시고 자기는 피조물의 자리에 서서 관념을 대하기 때문에 설령 그의 관념이 내려놓아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아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가 그를 지켜주니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가 갖는 관념은 쉽게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일이 일어나고 나서 그가 만약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진리이고 옳으며,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실수하시는 법이 없다는 말은 틀린 말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실수하시는 법이 없다지만 그건 그저 이론적으로 하는 말일 뿐 사실 하나님의 행사 중엔 사람의 뜻이나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일도 있어. 이 일은 그다지 옳은 것 같지 않아. 그다지 옳지 않은 일에는 순종할 필요가 없지. 그런 일은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비록 하나님의 이름과 신분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나한테 생긴 관념 덕분에 식견이 자라고 하나님을 더 이해하게 되었어. 하나님께서도 일을 잘못하시거나 실수하실 때가 있는 거야.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고, 완벽하시며, 거룩하시다고 해도 못 믿겠어. 그 말을 좀 의심하게 될 거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앞으로는 무턱대고 순종하지 말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야겠어. 만약 잘못 순종하면 어떡해? 나만 손해 아냐? 무턱대고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순 없어.’라고 생각하며 이런 태도로 관념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한다면 그가 관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이런 실행법이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와 하나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느냐? 그는 늘 하나님을 연구하고 있지 않으냐? 하나님이 그의 운명의 주재자가 아닌 연구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비록 자신이 창조주의 권세 아래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은 피조물의 본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피조물 본연의 위치에서 창조주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반대편에 서서 창조주를 연구하고 창조주의 행사를 분석하여 이를 참고로 순종하고 받아들일지 여부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태도와 실행법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이겠느냐? 그의 관념이 해결될 수 있겠느냐?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왜곡되어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가 아닌 비정상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시시각각 연구하여 그가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은 받아들이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거나 사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속으로 반발하고 하나님과 대립하니 하나님과의 관계에 간극이 생긴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겉으로 보면,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나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 같지만 일단 관념이 생기면 순종은 감쪽같이 사라져 찾아볼 수 없고 그는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분명한 것은 그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진리의 원천이나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언제 생긴 관념이든 쉽게 내려놓아지 못하고 쉽게 해결하지도 못한다.
지금까지 교제한 내용으로 봤을 때, 너희는 어떤 관념이 해결하기 쉽다고 생각하느냐? 이는 상황을 구분해 봐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경우, 그는 이성적이고, 옳은 사람이라 언제 생긴 관념이든 쉽게 해결한다. 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언제 생긴 관념이든 해결하기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2, 30년 동안 믿었는데도 지금껏 하는 말이라고는 죄다 글귀와 도리, 사람의 관념뿐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말은 한마디도 못 한다. 그가 진리를 하나도 깨닫지 못하는데 관념이 생길 때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장담하기 어렵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관념을 내려놓지 못한다. 사람에게 관념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언제든 여러 관념이 생길 수 있고,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하나님을 얼마나 믿었든, 사람의 마음속에 관념이 일부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것이 설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겠느냐? 해결할 수 있다.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이 몇 가지 원칙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너는 이 원칙대로 실행하여라. 한동안 실행하면 결실을 보게 될 것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관념이 생기면 그것이 어떤 관념이든, 일단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이 옳은지 묵상해 보고 분석해 보아라. 만약 그것이 그릇되고 치우친 생각이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느껴진다면 당장 기도하고 네가 이 문제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도록 깨우치고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구하여라. 그런 다음 예배 시간에 자기의 인식을 이야기하여라. 인식하고 체험하는 동시에 자기 관념의 해결 또한 중시하여라. 만약 이렇게 실행해도 확실한 결실에 이르지 못한다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서 이런 측면의 진리에 관해 교제하여 그에게 도움을 받고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과 체험 속에서 너는 하나님이 그렇게 한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차츰 확인하고, 자신의 관념을 해결하는 문제에 있어 큰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과 사역을 받아들이고 체험함에 따라 결국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성품을 어느 정도 인식하며, 네 관념을 내려놓고 해결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경계하지 않으며, 무리한 요구를 하지도 않게 된다. 이것은 쉽게 해결되는 관념이다. 또 한 측면의 관념은 사람이 인식하거나 해결하기 쉽지 않다. 해결하기 어려운 관념의 경우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분출하지 말고, 퍼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의 관념을 분출해 봤자 사람에게 득 될 것이 없고,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관념을 퍼뜨리는 것의 성질과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너 혼자 분명하게 판단하는 게 좋으니 함부로 떠들지 마라. 네가 만약 “교회에서 말하지 않으니 답답해 견딜 수가 없어요. 이러다 죽겠어요.”라고 말한다면 이런 관념을 퍼뜨려서 하나님의 선민에게 과연 득 될 게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득 되기는커녕 남들이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지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게 만든다면 네가 하나님의 선민에게 해를 끼친 게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이니 역병을 퍼뜨린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약 정말 네게 이성이 있어서 자기가 고통을 감내할지언정 관념을 퍼뜨려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을 안 하려니 답답해 견딜 수 없다면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한다. 만약 문제가 해결되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만약 네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도 관념을 품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오해한다면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저를 징계해 주시고 여러 환경을 통해 저를 드러내 주셔서 제 관념이 틀렸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주세요. 저를 어떻게 징계하시든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옳은 것이다. 네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나면 그렇게 답답하지 않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만약 계속 기도하고 구하여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마음이 환해지면 답답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네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 반발, 패역도 거의 사라지고, 적어도 꼭 분출하겠다는 생각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안 된다면, 문제가 여전히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체험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 그의 도움으로 관념을 해결하여라. 네 관념을 해결할 수 있는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아달라고 해서, 수십 번, 수백 번이고 읽으면 네 관념이 완전히 해결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제가 예배 시간에 형제자매에게 분출하면 관념을 퍼뜨리는 것이니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답답해서 힘들 때 가족에게 말하는 건 괜찮을까요?”라고 말한다. 네 가족이 모두 형제자매일 경우, 네가 이 관념들을 분출하고 나면 그들을 교란하게 될 텐데 이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느냐? (합당하지 않습니다.) 너의 말이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미혹하는 등의 악영향을 미친다면, 절대 말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해결해야 한다. 네가 경건한 마음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기만 하면 관념이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 속에는 모든 진리가 담겨 있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 그저 네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려 하는지,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 말씀 속에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네게 문제가 일어날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만약 한동안 기도하고 나서도 하나님이 네게 아무것도 깨우쳐 주지 않은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말씀해 주지 않은 것 같은데 그 관념이 너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네 생활을 교란하지 않는다면, 또 네 관념이 점차 희미해져서 너와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계는 물론 네 본분 이행에도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이 관념이 거의 해결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관념이 생기면 절대 퍼뜨리거나 함부로 떠들지 말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우선 명심해야 한다. “저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있어요. 입이 제 몸에 붙어 있는 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거예요.”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좋은 말, 옳은 말이라고 해서 꼭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념에 속하는 말, 사탄의 시험에 해당하는 말은 그로 인한 결과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 결과로 볼 때 네게 관념이 생겨 기어이 말해야겠다면, 말해야 속시원하고 기분 좋을 것 같다면 네 행위를 악행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도 널 체크해 둘 것이다. 어째서 체크해 두겠느냐? 긍정적인 실행법이나 실행의 길과 원칙을 그토록 많이 알려주었는데도 다 제쳐두고 남을 곤란하게 하고 해치는 길을 택했으니 너는 일부러 그런 것 아니냐? 그렇다면 네 행위를 악행이라고 하는 것이 지나치겠느냐? (지나치지 않습니다.) 너는 관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교란하고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하나님에게 기도로 구하는 과정에서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택해야 할 방식이다. 그런데 너는 왜 이 방식을 택하지 않느냐? 어째서 남을 해치고 곤란하게 하는 방식을 택하려 하느냐? 이것은 사탄이 하는 짓 아니냐? 악인은 남은 물론 자기에게도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한다. 너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하나님이 증오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설사 하나님이 네 관념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스스로 진리를 구해 네 관념을 해결해야 하며 진리를 실행할 길도 가져야 한다. 만약 관념을 처리하는 네 방식이 관념을 퍼뜨려 의도적으로 남을 미혹하고 해치며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과 정상적인 내적 상태를 교란하는 것이라면 너의 이런 행동은 악행이다. 이런 일이 닥치면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 인성이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남을 미혹하거나 해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원칙을 택해 실행하고 준수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리를 구하며, 문제 해결을 도와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느낌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어떨까요?” 그래도 된다. 너보다 진리를 더 깊이 깨달아 분량이 있는 사람을 택해라. 네 생각에 그가 네 관념에 교란당하거나 영향받아 연약해지지 않을 수 있고 네 문제를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으며,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있어서 어떻게 해결할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면 그 길 또한 적절하다. 만약 네가 평소에도 덜떨어지고 어떤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을 찾은 바람에, 그가 이 일을 듣자마자 격앙되어 여기저기 알리고 교란하려 하며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 한다면 네 행동은 은연중에 교회 생활에 교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런 너의 행위는 악행으로 규정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관념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은 어리석거나 충동적으로 굴지 말고 반드시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절대 관념을 진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사람의 생각은 아무리 옳다 한들 진리가 아니다. 그러면 너는 한결 침착해질 것이고 관념도 악행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관념이 생기는 건 걱정거리가 아니다. 진리를 구하기만 하면 관념은 결국 해결된다. 어떤 사람은 “관념이야말로 해결하기 쉽지 않죠.”라고 한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관념들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 또한 어려울 것 없다. 일부 사람의 마음속이나 머릿속에는 늘 해결되지 않는 관념들이 있다. 이는 사실이지만 관념이 아무리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닫는다면 문제 해결은 어렵지 않다. 여기서 너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겠다. 하나님은 모두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분명히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며, 그 안의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런 걸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런 요구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네 자질이 이를 수 있다면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든 다 좋다. 능력껏 하면 된다. 만약 네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이를 먹으면서, 또 체험이 계속 깊어지고 경험이 쌓이면서 깨닫는 진리도 점점 깊어지고 관념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부 특수한 일에 대해서는 이르지 못하고 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강요하겠느냐?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널 기필코 이해시키려 강제로 주입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중에는 사람이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비밀이 많은데 하나님은 말씀과 사역에서 오직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 다른 일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간혹 언급하더라도 짧게 말할 뿐 결코 길게 말하며 그 일을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지는 않는다. 어째서 이야기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 사역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성품 본질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에겐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하나님 행사의 근원과 목표, 하나님이 각 부류의 사람에게 사역하는 방식과 방법, 그리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과 방법 등이 있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모든 진리를 깨닫고 모든 진리에 진입해야만 구원받다고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도 전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행사하고 말씀하며 사역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본질, 신분 등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이렇게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인식하고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전능하지만 피조된 인간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몹시 미미한 존재이며 하나님과는 천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품거나 상상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너는 오히려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려고만 한다. 이런 것은 통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자질이 훌륭한 사람일 경우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인식하기만 하면 이런 관념과 상상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반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누군가 네게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네 관념만 고집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겠느냐? 네가 죽을 때가 되거나 하나님의 사역이 완전히 끝나는 때가 되더라도 너는 진리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관념과 상상에 의해 죽음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영체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너의 관념과 상상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의 이런 관념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실과 진상을 너에게 알려주겠느냐?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의 머리와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이런 사역은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고, 만유를 뛰어넘는다. 만유에 비하면 사람은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다. 이것이 사실에 가깝고 적당한 비유라고 할 수 있겠다. 설사 하나님이 모든 일을 네게 알려 줄 용의가 있다고 한들 네가 그것을 담아낼 그릇이 되겠느냐? “왜 담아내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많이 말씀하시면 전 많은 것을 깨닫고 얻습니다. 이건 특별한 은혜잖아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헛된 망상이다. 욕심이 과하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네게 알려준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는 매우 평이한, 사람이 이를 수 있는 일이다. 사실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사람이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 끝내 해결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너는 하나님이 네가 이해하길 원하는 것, 네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혹은 네가 받아들일 수 있고 이를 수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받아들일 수 없고 이를 수 없는 것, 네 눈에 보이지 않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알려줘 봤자 소용없고 헛수고일 뿐이니 하나님이 네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을 네가 죽을 때가 되거나 하나님 사역이 끝날 때가 되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엇에 지장을 주겠느냐?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데 지장을 주겠느냐? 네가 피조물이 되는 것에 지장을 주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인식하는 데 지장을 주겠느냐? 만약 네게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는다면 너는 구원 받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을 해결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다. 이는 최후의 관념으로서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도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과 말씀, 하나님께서 배치하신 환경을 저는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맘 편히 눈감을 수 있도록 죽기 전에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대꾸하지 않아도 안심하고 떠나거라. 영계에 가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데에는 그의 기준이 있다. 이 기준은 네 관념을 어느 정도로 해결했는지, 얼마나 내려놓았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지, 네가 진실하게 경외하고 순종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는 의의가 있다. 하나님의 행사를 받아들이기 쉽든지 아니면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관념이 생기기 쉽든지,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신분은 그로 인해 바뀌지 않는다. 그는 영원히 창조주이고 너는 영원히 피조물이다. 네가 어떠한 관념의 제한도 받지 않고 하나님과 여전히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너는 진정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네가 어떠한 관념의 영향과 교란도 받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진실하게 순종할 수 있다면, 네가 깨달은 진리의 깊이와 상관없이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고, 관념의 속박을 받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은 진리이자 길이자 생명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한 것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사실 사람의 분량은 한계가 있다. 사람의 머리에 얼마나 담을 수 있느냐? 하나님을 온전히 측량할 수 있느냐? 허황한 망상일 뿐이다! 하나님 앞에 사람은 영원히 갓난아기임을 잊지 마라. 만약 네가 자신이 똑똑하다는 생각에 늘 잘난 척하면서 무슨 일이든 확실하게 이해하려 하고, ‘이해가 안 되면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어요. 당신이 창조주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 없고요. 당신이 제 관념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제가 당신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당신의 주재를 받아들이며, 순종하게 할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세요!’라고 생각한다면 골치 아프다. 무엇이 골치 아프겠느냐? 하나님은 네게 이런 이치를 따지지 않는다.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방식은 영원히 다음과 같다. 즉, 네가 그를 네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역시 너를 그의 피조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네가 그의 피조물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로 인해 변화가 생긴다.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 그리고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의 신분 또한 변하게 되는데, 네가 여전히 피조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인정하지 않으니 네가 어떤 핑계를 댄들 소용없다. 피조물이 아닌 너는 하나님에게 필요 없는데 네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피조물로 여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너는 피조물로서 다해야 할 책임과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창조주를 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너를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아닌 변절자, 사탄 마귀로 간주한다. 너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어찌 자신을 사탄 마귀로 만들었느냐? 이는 똑똑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이 말에서 사람은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착실하고 진실해야 한다. 네게 관념이 생길 만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진리가 있다고, 하나님께 큰소리치거나 하나님을 규정할 만한 밑천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절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일단 피조물의 신분을 상실하면 네가 멸하게 될 것이니, 이건 정말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어떤 관념이 생겨날 때, 사람은 각기 다른 대처 방식과 해결 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관념을 대하는 실행 방식과 관련하여 너희에게 원칙이 생겼느냐? 이 몇 가지 측면의 원칙이 너희가 피조물이 되도록 지켜 줄 수 있겠느냐? 이 길이 괜찮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정리해 보아라. (만약 상대적으로 해결하기 쉬운 관념이라면 스스로 기도하고 구하며 하나님 말씀에서 이런 관념을 해부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또한, 진리를 깨달은 형제자매를 찾아가 교제하여 이 관념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점을 간파해도 됩니다. 이렇게 하면 관념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결하기 쉽지 않지만 지녀서는 안 되는 관념의 경우,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자기가 피조물이며 단지 자기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하나님의 행사는 분명 옳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깨달았든 그러지 못했든 관념을 퍼뜨려서는 안 되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관념도 서서히 해결될 것입니다. 세 번째 경우는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 관념입니다. 이런 경우 관념의 속박을 받지 않고 퍼뜨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런 관념은 끝까지 해결되지 않지만 이 관념을 지키지 않고 이 관념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고 구원받는 것에 영향을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총 몇 가지 원칙이냐? (세 가지입니다.) 총 세 가지였는데 전부 적어두었다. 그렇지 않으냐?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파악하면 관념은 자연스레 해결된다. 관념에 발목이 잡혀 멈춰 서서는 안 된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전력을 다해 해결하고,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최소한 그것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것 때문에 본분 이행에 차질이 생기거나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지장이 생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최소한 너는 관념을 퍼뜨려서는 안 되고 악행을 저지르거나 방해하고 교란하는 짓을 하거나 사탄의 졸개나 대변인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피상적으로만 해결될 뿐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 관념이 있다면 거들떠보지 마라. 관념 때문에 진리 추구나 생명 진입이 지장을 받으면 안 된다. 이 몇 가지 측면의 원칙을 파악하면 정상적인 상황에서 사람은 보호받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악인이 아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는 사람, 방해하고 교란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상시 관념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날 때 일반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한 가지 최소한의 실행 원칙은 네게 관념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든 조급하게 관념을 품고 하지 말고, 일단 기다리다가 진리를 구하여 해결하고 하나님의 행사는 틀리는 법이 없음을 믿는 것이다. 이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네 본분을 내려놓아선 안 되고 관념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만약 관념이 생겼을 때 ‘대충 하고 치우자. 기분 나쁘니까 잘해 주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큰일이다. 네 태도가 일단 소극적으로 변하고, 대충 건성으로 하는 태도가 되면 골치 아파진다. 이것은 관념이 속에서 농간을 부리는 것이다. 관념이 네 안에서 농간을 부려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었다면 사실 그 순간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이미 변화가 생긴 것이다.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는 관념이 있으면 문제가 심각해지니 반드시 제때 해결해야 한다.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고,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지장을 주지 않는 관념은 큰 문제가 아니다. 만약 네게 생긴 관념이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준다면, 즉 네가 관념 때문에 하나님에게 의구심을 품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데다가 본분을 이행하지 않아도 아무런 결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도 없다면 위험하다. 시험에 빠져 사탄에게 농락당하며 사탄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관념을 대하는 네 태도와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관념이 해결될 수 있든 없든, 어느 정도까지 해결되든 너와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계가 변해서는 안 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환경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행사에는 틀림이 없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런 인식과 이런 측면의 진리는 언제까지나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네게 맡긴 본분을 내려놓거나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면적으로든, 표면적으로든 네가 하나님에게 반발하거나 반항하거나 거역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네게서 보는 것은 순종과 기다림이다. 비록 너는 여전히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너의 패역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네가 거역하지 않고, 반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하나님은 너를 피조물로 여긴다. 반대로 네 마음에 원망과 불복종이 가득하고 보복할 기회를 찾으면서,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하고 내팽개치려 하고 심지어 하나님에게 온갖 원망을 품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불복종하며 불평하는 모습을 표출했다면 그 순간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이미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네가 피조물의 위치에서 떠났으니 피조물에 속하지 않게 되었고 사탄 마귀의 대변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네 상황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만약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너는 교회에서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 특히 관념을 해결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에서 반드시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미움받을 일이나 정죄받을 일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마라. 이것이 원칙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과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해결해야만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본분을 이행할 때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관념은 줄곧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사랑과 순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갖든 이는 절대 간과할 수 없는 큰 문제이다. 관념은 하나의 벽처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무관해진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지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관념이 생겼는데 제때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면 쉽게 소극적으로 변하고, 하나님에게 반발하는 것도 모자라 적대시한다. 그러고도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생명 진입이 제자리걸음만 할 것이다.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길은 험하고 평탄하지 않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할 때가 많고, 자칫 어떤 일에서 관념이 생길지도 모른다. 진리를 구하여 해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여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일단 적그리스도의 길에 들어서면 구원의 기회가 있겠느냐? 쉽지 않을 것이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네가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전에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창조주를 연구하는 법이나 네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검증하고 증명하는 법을 배워서는 안 된다. 이것은 네 의무가 아니고, 네 책임도 아니다. 사람이 매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묵상해야 하는 것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서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방법이지, 하나님이 창조주인지, 하나님인지 증명하는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엇을 했는지, 하나님이 한 일이 옳은지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네가 연구해야 할 것이 아니다.
2021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