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일꾼의 직책(15)

제12조 하나님 사역과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를 방해하고 교란하는 각종 사람, 일, 사물을 적시에 정확하게 발견하고 이를 저지 및 제한하여 상황을 전환시킨다. 이와 동시에 진리를 교제하여 하나님의 선민이 그 속에서 분별력을 키우고 공과를 배우도록 한다.

교회 생활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과 일

지난 예배 시간에는 리더 일꾼의 직책 제12조 ‘하나님 사역과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를 방해하고 교란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과 일을 적시에 정확하게 발견해서 저지하고 제한하여 상황을 전환시킨다. 동시에 진리를 교제하여 하나님 선민이 그를 통해 분별력을 키우고 공과를 배우도록 한다’에 대해 교제했다. 이 항목에서는 주로 교회 생활 측면의 각종 문제에 관해 교제하였고, 이 문제는 총 11개 항목으로 나뉜다. 한 번 읽어 보아라. (‘1. 진리를 교제할 때 자주 주제에서 벗어난다. 2. 글귀와 도리를 말하여 사람을 미혹하고, 우러름을 받으려 한다. 3. 가정사를 떠들고 연줄을 대고 사적인 일을 처리한다. 4. 편을 가른다. 5. 지위를 다툰다. 6.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7. 서로 공격하고 말싸움을 벌인다. 8. 관념을 퍼뜨린다. 9. 소극성을 퍼뜨린다. 10.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11. 선거를 조작하고 방해한다.’입니다.) 지난번에는 제5조 ‘지위를 다툰다’와 제6조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에 관해 교제하였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앞의 네 가지 항목과 마찬가지로 교회 생활과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에 교란과 방해를 일으킨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그 성질과 교회 생활에 끼치는 피해, 그리고 사람의 생명 진입 측면에 미치는 영향으로 볼 때 둘 다 하나님의 사역과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를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과 일이다.

7.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인다

오늘은 제7조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인다’에 관해 교제하겠다. 이는 교회 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모두가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개인적인 체험을 교제하거나 실제 문제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종종 관점의 차이나 시비와 다툼으로 인해 토론이나 논쟁이 일어나곤 한다. 관점에 차이가 있거나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교회 생활에 교란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면 이것을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정상적인 교제에 해당한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제7조와 관련이 있는 문제가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안과 성질이 비교적 심각하여 방해와 교란을 일으켜야만 제7조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제 어떤 문제의 성질이 이 항목에 해당하는지 교제해 보자.

먼저, 서로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 이는 분명 정상적으로 진리를 교제하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교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견해와 빛이 생긴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진리에서 진리 원칙을 구하고 교제하며 탐구하고 실행의 길을 구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서로 옳고 그름을 놓고 다투고 논쟁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모습이다. 이런 문제가 교회 생활에서 수시로 일어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서로 공격하는 것은 겉보기에도 결코 진리를 구하는 것, 성령의 인도 아래 진리를 교제하는 것,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혈기로 인해 판단과 정죄는 물론 욕설까지 담아 말하는 것으로 사실상 사탄의 패괴 성품을 표출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서로 공격할 때는 날 선 말이든 완곡한 말이든 늘 그 안에 혈기와 악의, 원한이 담겨 있다. 거기에는 사랑이 없고 포용이나 인내, 양보도 없으며, 당연히 조화로운 협력은 더더욱 없다.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를 공격한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한 가지 일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갑이 을에게 “어떤 사람은 인성이 나쁘고 성품도 교만해서 사소한 일을 할 때도 자기를 드러내려 하더군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요. 하나님 말씀처럼 짐승같이 야만적이고 인성이 없죠.”라고 하면 을은 듣고 나서 ‘지금 내 얘기하고 있는 거 아냐? 하나님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나를 폭로하다니! 내 얘기를 하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당신이 나한테 못되게 군다면 나도 똑같이 대해 주겠어!’라고 생각해 이렇게 말한다. “겉으로는 무척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 내면은 누구보다 음험한 사람도 있던데요. 심지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음녀나 창녀처럼 부적절한 남녀 관계까지 맺고 있더라고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굉장히 역겨워하시고 싫어하시죠. 겉으로만 경건하면 뭐 해요? 그건 위선이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게 위선적인 사람이잖아요. 위선적인 사람은 모두 바리새인이에요!” 갑이 듣고는 ‘지금 나한테 받아치는 거야? 좋아. 나한테 못되게 굴었으니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주고받다가 둘이 다투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건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서로 공격하고 다투고 있습니다.) 게다가 약점을 잡아 ‘근거’를 찾으려 하고 하나님 말씀까지 근거로 인용한다. 이것은 서로 공격하는 동시에 설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교제가 교회 생활에서 보일 때가 있지 않으냐? 이것이 정상적인 교제이냐? 정상 인성으로 교제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이런 식의 교제가 교회 생활에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지 않겠느냐? 어떤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겠느냐? (정상적인 교회 생활이 교란당하고, 사람이 시비에 빠져 하나님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고 교제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교회 생활에서 이렇게 다투고 시비를 따지며 인신공격하는데 성령이 역사하겠느냐?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이런 교제는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놓는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기억하느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사람이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만 하나님이 축복하고 성령이 역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방금 논쟁한 두 사람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했느냐? 서로 공격하고, 다투는 것도 모자라 판단하고 정죄했다. 겉으로는 욕설을 하거나 특정인을 지칭하지도 않았지만 발언의 출발점이 진리를 교제하거나 구하는 것이 아니었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으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모든 말을 무책임하게 했고, 공격성과 악의를 가지고 했다. 사실과 부합하거나 근거가 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요구대로 일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취향이나 바람에 따라 자기가 적대시하고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인신공격하고 판단하며 정죄했다. 이는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된 모습이 아니라 혈기나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하는 말과 모습이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도 없다. 이런 게 서로 공격하는 모습이다.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 간에 사소한 일이나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인해 이익상 충돌이 생겨서 분쟁이나 갈등이 자주 생긴다. 또 성격이나 의사, 취향이 맞지 않아 다른 사람과 자주 다투기도 하고 사회적 지위나 교육 수준의 격차, 혹은 인성과 본성 측면의 차이, 심지어 대화나 일 처리 방식과 방법의 차이 등으로 인해 사람 간에 여러 가지 충돌과 불화가 생긴다. 만약 하나님 말씀으로 해결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서로 양해하고 포용하지도 못하며, 서로 붙들어 주고 도와주지 못하면서 속으로 선입견과 원망을 품고 패괴 성품 속에서 혈기로 상대방을 대한다면 서로 공격하고 판단하게 되기 쉽다. 조금은 양심적이고 이성적이어서 논쟁이 일어나면 인내하며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사랑으로 상대방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일부 있는가 하면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포용심과 인내심, 인성과 이성조차 갖추지 못해서 항상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나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 온갖 선입견과 의심, 오해를 품는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품게 되고 다양하게 의심하고, 판단하며, 정죄한다. 교회에 자주 일어나는 이런 현상은 항상 사람 간의 정상적인 관계나 형제자매의 화목한 교제에 영향을 주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하는 데 지장을 준다. 사람들 간에 함께 지내면서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 일이 교회 생활에서 수시로 발생한다면 정상적인 교회 생활에 영향을 주고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교란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무너뜨릴 것이다. 예를 들어 예배 시간에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예배는 교란당하고 교회 생활은 결실을 이루지 못하며 예배에 참여한 사람 역시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해 예배한 보람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게 되니 이런 일은 이미 교회 생활의 정상적인 질서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1)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몇 가지 모습

j 서로 허물을 들춘다

어떤 사람은 늘 예배 시간에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한담하기를 좋아해서 형제자매만 보면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에 관한 한담을 한바탕 늘어놓아 형제자매를 난감하게 만든다. 이럴 때 나서서 그의 말을 끊는 사람이 있는데 그 결과는 어떻겠느냐? 계속 말을 끊으면 그는 불쾌해할 것이고, 그가 불쾌해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계속 내 말을 끊어서 입을 막겠다 이거지? 좋아, 당신 어디 말만 해 봐. 나도 끊어줄 테니까!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면 내가 다른 말씀을 가지고 끼어들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에 대해 교제하면 나는 사람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하겠어. 또 교만한 성품을 인식하는 것을 교제하면 나는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를 규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할 거야.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야 말겠어!’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만약 자기 말을 끊는 데 동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나서서 공격할 것이다. 또한 그는 마음속에 분노와 원한이 있어서 예배 시간에 자주 상대방의 허물을 들춘다. 상대방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 사업을 하면서 어떻게 사기를 쳤는지, 사람을 상대하면서 얼마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지 등, 그 사람이 말할 차례만 되면 이런 이야기를 하려 한다. 상대방도 처음에는 참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렇게 생각한다. ‘난 늘 당신에게 도움을 주고 관용을 베풀며 참았는데 당신은 내게 눈곱만큼의 관용도 베풀지 않는군. 당신이 나한테 이러니 나도 본때를 보여 주겠어! 우리가 같은 동네에서 이렇게 오래 함께 지냈는데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딨어? 당신이 날 공격하니 나도 공격할 수밖에. 자꾸 내 허물을 들추는데, 당신도 허물이 만만치 않다고.’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어렸을 때 남의 물건을 훔친 적이 있잖아요. 그런 좀도둑질이 훨씬 부끄러운 일이죠! 제가 그런 일을 한 건 어쨌든 사업 때문이었어요. 먹고 살려고요. 세상에 실수 한 번 안 하는 사람이 어딨나요? 당신이 한 짓은 어떻고요? 좀도둑이나 도적이 하는 짓이잖아요!” 서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어떤 공격 방식이냐? 서로 허물을 들추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심지어 속으로 이런 생각까지 한다. ‘자꾸 내 허물을 들추는 통에 내 허물과 창피한 과거를 모두가 알게 됐으니 앞으로 다른 사람들이 날 우러러보지 않을 거야.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당신이 옛날에 몇 명이랑 사귀었는지, 함께 지내던 이성이 몇 명이었는지 다 알고 있어. 이 약점들을 내가 쥐고 있으니 한 번만 더 내 결점을 들춰서 신경을 건드렸다간 당신이 했던 추잡한 짓을 모조리 까발려 주겠어!’ 서로 허물을 들추는 것은 서로의 사정을 알고 상대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나타나는 문제이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두 사람 간의 갈등이나 응어리 때문에 예배 시간에 이런 케케묵은 지난 일을 들먹이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서로 허물을 들추고 공격하며 정죄하면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시간을 침해하여 정상적인 교회 생활에 지장을 준다면 이런 예배에 결실이 있겠느냐? 사람들이 예배할 마음이 생기겠느냐? 일부 형제자매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두 사람 정말 짜증나네. 지나간 일을 뭐 하러 이야기해! 하나님을 믿으면 그런 일은 다 내려놓아야지.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딨어? 다들 지금 하나님 앞에 와 있잖아? 이건 하나님 말씀으로 해결하면 되는 문제야. 허물을 들추는 건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아니고, 장점으로 단점을 보완하는 것도 아냐. 서로 공격하는 것이고 사탄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 둘은 서로 공격하면서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무너뜨렸다. 누가 저지해도 소용없고, 누가 진리를 교제해도 듣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두 분, 서로 허물을 들추는 짓은 그만 하세요. 사실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요. 그냥 잠깐 말이 안 통하는 거 아닌가요? 깊은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두 분이 솔직하게 털어놓고서 각자 선입견, 분노, 원한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서 진리를 구하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겁니다.”라고 타일러도 두 사람은 논쟁을 멈추지 않는다. 그중 한 사람이 말한다. “저 사람이 먼저 예의를 갖춰서 사과하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 놓으면 저도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그가 계속 이런 식으로 물고 늘어진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저한테는 진리를 실행하라고 하시는데 왜 저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나요? 저한테는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 왜 저 사람은 먼저 내려놓지 않나요?” 이건 억지를 부리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타일러도 소용없고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듣지 않는다. 만나기만 하면 논쟁하고 상대방의 허물을 들춰 공격한다. 손찌검만 안 했을 뿐 상대방에게 하는 모든 행동에 원한이 서려 있고, 상대방에게 하는 모든 말에 공격하고 저주하는 뜻이 담겨 있다. 교회 생활 중에 만나기만 하면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두 사람이 있다면 이런 교회 생활에 결실이 있겠느냐? 사람이 긍정적인 수확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이 ‘저 두 사람은 예배 때마다 싸우는데 누가 타일러도 듣질 않으니 어쩌면 좋지?’라며 근심한다. 그 두 사람이 있는 한 예배 시간이 평온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교란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회 리더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지 이런 사람이 계속 교회 생활을 교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재차 만류하고 교제하며 긍정적으로 인도해도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하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용서하기는커녕 계속 서로를 공격하며 교회 생활을 교란하려 한다면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 주어야 한다. “두 분의 이런 사이가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교회 생활과 모든 형제자매가 심각하게 교란당하고 있습니다. 말은 안 해도 두 분의 행동에 분노하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두 분의 태도와 모습을 감안해서 교회는 원칙대로 두 분의 교회 생활을 중지시키고 두 분이 반성하도록 격리하겠습니다. 두 분이 화목하게 지내면서 정상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정상적인 관계가 되면 그때 다시 교회 생활에 복귀하십시오.” 그들이 동의하든 말든 교회는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게 하여 그 둘에게 도움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악인의 교란으로부터 더 많은 형제자매를 보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 두 사람은 특별히 악을 행한 것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보면 악인도 아니에요. 단지 인성 측면에 작은 흠이 있어서 제멋대로 굴고 행패를 부리고 질투심이 많고 분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것뿐인데 어찌 둘을 격리하시나요?” 그들의 인성이 어떻든 교회 생활에 교란을 일으킨다면 교회 리더는 나서서 이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해야 한다. 만약 두 사람이 악인으로 분별된다면 단순히 격리만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제명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공격하며 시비 가리기를 좋아할 뿐,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별다른 나쁜 짓도 저지르지 않아서 악인이라고 할 수 없으니 제명할 필요가 없다면 그들의 교회 생활을 중지하고 반성하도록 그들을 격리하여라.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렇게 처리하는 목적은 교회 생활의 정상적인 질서와 교회 사역의 정상적인 진전을 보장하는 데 있다.

② 서로 폭로하고 공격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도 이해 능력이 없으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과 인식을 교제할 줄 모르고 그저 사람을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사람을 비춰볼 줄만 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교제할 때마다 개인적인 속셈을 품고는 다른 사람을 폭로하고 공격할 기회만 노려 결국 교회를 평안하지 못하게 만든다. 만약 폭로 당한 사람이 일이 닥쳤을 때 올바르게 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인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아무런 논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에 관해 남들이 교제하고 폭로하는 것을 들었을 때 속으로 불복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도 말씀에 대한 체험과 인식을 나누지 않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면서 왜 나만 공격하고 겨냥하는 거야? 내가 눈에 거슬려? 내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건 진작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어? 나한텐 패괴 성품이 있고 당신에겐 패괴 성품이 없다는 거야? 항상 나한테만 간사하다고 하는데 당신도 꿍꿍이속은 만만치 않잖아!’ 그도 한두 번은 가슴 가득한 분노와 불복을 참을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 원한이 쌓이고 쌓이면 폭발해 버린다. 그가 한 번 폭발하면 아주 난리가 난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아주 정직하고 솔직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척하지만 사실 내면은 교활하기 그지없어서 늘 남을 음해할 궁리만 해요. 그와 대화해 봐도 아무도 그의 생각이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요. 그야말로 간사한 사람이죠. 이런 사람을 만나면 대화하거나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라 자칫 방심하면 속아 넘어가 이용당하거든요. 이런 사람은 누구보다 악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고 역겨워하시는 사람이니 무저갱과 유황불 못에 빠뜨려야 합니다!” 상대방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나한테 받아치는 거야? 자기는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은 말도 못 하게 해? 받아친다면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하나님 말씀을 더 찾아서 당신을 폭로해 주겠어. 그러고도 할 말이 있을지 두고 보자고!’ 그 말을 들은 그는 더 성질을 부린다. ‘지금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건가? 날 물고 늘어지겠다는 거야? 내가 눈에 거슬리고 나한테 패괴 성품이 있다 이거지? 좋아. 그렇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적그리스도라서 지위를 좋아하고 남들한테 추앙받는 것을 즐기며 남을 훈계하기를 좋아하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폭로하고 정죄하니 남들이 그에겐 패괴 성품이 없는 줄 알더군요. 그는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하면서 자기가 성결한 줄 알지만 사실은 더러운 귀신에 불과하지 않나요? 사탄이나 악령일 뿐이지 않냐고요. 적그리스도가 누굽니까? 적그리스도는 바로 사탄이죠!” 몇 차례나 맞붙었느냐? 승부가 났느냐? (나지 않았습니다.) 이 중에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들은 모두 무슨 말이냐? (판단이고 정죄입니다.) 이것이 바로 판단이다. 실제 상황에 근거하지도 않고,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게 함부로 떠들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한다. 상대방을 적그리스도라고 할 만한 사실적 근거가 있느냐? 그의 어떤 모습이 적그리스도의 악행이냐? 그의 패괴 성품이 적그리스도의 본질에 해당하느냐? 하나님 선민이 네 폭로를 듣고 객관적이고 진실하다고 생각하겠느냐? 이 두 사람이 하는 말들에 선의와 호의가 있느냐? (없습니다.) 상대방이 최대한 빨리 스스로를 인식하여 가능한 한 빨리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자기 분풀이를 하고 상대방을 공격해 보복하기 위해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게 제멋대로 상대방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상대방의 표출과 본질을 근거로 정확하게 평가하거나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사람을 공격하고 보복하여 자기 분풀이를 할 뿐 결코 진리를 교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문제가 심각하다. 늘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교만한 성품이 있다며 공격하고 정죄하는 태도는 음험하고 악랄한 것이지 절대 선의의 폭로가 아니다. 따라서 서로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만약 사랑으로 도우려는 태도로 상대방을 폭로한다면 상대방도 느낄 수 있고 올바르게 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상대방의 교만한 성품을 약점으로 잡아 정죄하고 공격한다면 이는 순전히 사람을 공격하고 괴롭히려는 것이다. 교만한 성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너는 어찌 한 사람한테만 그러느냐? 어째서 한 사람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느냐? 늘 상대방의 교만한 성품을 폭로하는 목적이 그가 교만한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러는 것이냐? 상대방이 눈에 거슬리니 기회를 틈타 그를 공격하고 보복하고 괴롭히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적그리스도요, 사탄, 마귀요, 간사하고 음험한 자라는 그의 말이 사실이겠느냐? 사실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상대방을 돕는 것도, 진리를 교제하는 것도 아닌 자기 분풀이를 하고, 상대방에게 보복하는 것이다. 그는 괴롭힘을 당했으니 되갚아 주려는 것이다. 어떻게 되갚겠느냐? 상대방을 폭로하고 사탄, 마귀이며, 악령이자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며 최대한 큰 낙인을 찍고 되도록 큰 죄를 뒤집어씌운다. 이는 멋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아니냐? 두 사람이 서로 이런 말을 하는 속셈과 목적, 의도는 상대방이 자기를 인식하고 스스로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며, 상대방이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 원칙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공격하고 못살게 굴고 폭로하여 자기 분풀이를 하고 상대방에게 보복하려는 목적이다. 이것이 바로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런 식의 공격은 서로 허물을 들추는 식의 공격보다는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상대방이 패괴 성품을 지닌 사탄, 마귀라고 말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제법 영적인 것 같지만 그 성질은 똑같다. 모두 정상 인성 속에서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무책임하고 제멋대로 자기 취향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저주하고 인신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성질의 대화는 교회 생활에도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 또한 교란하고 망쳐버린다.

이렇게 서로 패괴 성품을 폭로하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노발대발하며 호되게 꾸짖을 필요가 있겠느냐? 찬물을 끼얹어 조용히 시키고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식하여 상대방에게 사과하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배할 때마다 꼭 한 번씩 싸우고 예배가 끝나고 나서도 다음에 어떻게 싸울지 준비한다. 집에서는 하나님 말씀이나 근거를 찾는 것도 모자라 시나리오까지 짜본다. 상대방의 어떤 측면을 어떻게 공격할지, 어떻게 판단하고 정죄할지, 어떤 말투나 어떤 하나님 말씀으로 공격하고 정죄해야 가장 설득력이 있을지 생각해 놓는 것이다. 또 각종 영적인 용어들을 찾아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그를 정죄하고 공격해서 그가 꼼짝 못 하게 만들고, 다음 대결에서 그를 쓰러뜨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려 한다. 이런 모습은 모두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쉽겠느냐? 만약 많은 사람이 만류하고 도와주며 진리를 교제해 주는데도 그들이 계속 회개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다투고 욕하며 누가 말려도 듣지 않고 누가 진리를 교제하며 책망하고 훈계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어려울 것 없다. 그들을 정리해야 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간단하지 않으냐? 그들에게 계속 교제해 줄 필요가 있겠느냐? 사랑으로 도와줄 필요가 있겠느냐? 대답해 보아라. 이런 사람을 사랑으로 포용하고 인내해 주는 게 합당하겠느냐?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 합당하지 않으냐?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교제해 주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렇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예배에 설전을 벌이러 온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그저 설전을 벌이는 것만 좋아하는데, 이것이 정상 인성의 표출이나 모습이더냐?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할 이성이더냐? (아닙니다.) 그에게는 정상 인성의 이성이 없다. 이런 사람은 예배할 때 분수를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 속에서 진리를 깨달고 얻어 자신의 패괴 성품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한다. 흠을 찾으려 다른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하나님 말씀 중에서 다른 사람의 문제를 찾으려고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교제하는 기회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폭로하고 공격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깎아내리며, 정죄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비켜선다.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냐?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들이 유독 잘하고 몰두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 말씀이 폭로하는 각종 문제, 내적 상태,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문제를 찾아낼수록 자신의 책임이 막중하고 자신이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이런 문제를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그냥 놓아주지 않는다. 이런 자들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부류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부류가 교회에서 말하지 않고 교란하지 않는다면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가 계속 이렇게 행동한다면, 늘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판단하며 정죄한다면 교회는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 그를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남에게 폭로 당하고는 같은 방식이나 수단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사람의 경우, 사안이 심각해서 교회 생활에 방해와 교란을 일으켰다면 봐주지 말고 마찬가지로 정리해서 하나님 선민과 격리해야 한다.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모습 중 교회 생활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성질에 해당하는 모습에는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서로 허물을 들추는 것은 분명히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측면의 모습이다. 서로 패괴 성품을 폭로하여 자기 분풀이를 하고 상대방에게 보복하는 것 또한 분명히 교회 생활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모습이다. 이 두 가지 측면 외에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자기를 해부하는 척하면서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폭로하고 해부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 역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의 일종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문제가 아닌 상대방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은근히 비꼬는 말이든, 완곡하게 에둘러 하는 말이든 전부 공격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가 공격에 해당하느냐? 그것은 말을 하는 속셈과 목적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보복하거나 자기 분풀이를 하기 위한 것은 공격에 해당한다. 이것이 한 가지 경우이다. 그 밖에 사실이나 실상과는 다르게 문제의 표면적인 현상을 부풀려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그러면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전혀 살피지 않고 무책임하게 멋대로 결론을 내리는 것 역시 자기 분풀이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는 것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공격에 해당한다. 또 무엇이 있느냐? (터무니없이 다른 사람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터무니없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도 당연히 여기에 해당한다. 공격에 해당하는 경우가 몇 가지이냐? (세 가지입니다.) 그 몇 가지가 각각 무엇인지 정리해 보아라. (첫 번째는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 두 번째는 사실이나 실상과는 다르게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사실과 부합하는지는 전혀 모른 채 무책임하게 멋대로 규정하는 것, 세 번째는 터무니없이 다른 사람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 각 항목의 성질은 모두 인신공격에 해당한다. 어떤 경우가 인신공격이고 어떤 경우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느냐? 공격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어떤 행동과 말이 공격이 되느냐? 만약 그의 말에 유도하는 성질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오도하고 날조하는 성질도 조금 있어서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람을 미혹하고 오도한다면, 또 그의 속셈과 목적이 그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며 믿고, 그의 말이 모두 진리에 부합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하려는 것이라면, 아울러 그가 상대방에게 보복하여 상대방이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가 되게 하고 싶어서 ‘당신의 그런 행태를 보고 있자니 약점을 들추지 않을 수가 없네. 기고만장한 기세를 눌러주지 않을 수가 없다고. 어디 계속 과시하고 뽐내 보시지! 내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 기어코 당신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당신도 소극적일 수 있고 연약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야겠어!’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만약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말은 공격이다. 만약 그가 사실과 실상을 확실하게 밝히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한동안 체험하며 이 일에 대해 정확한 견해를 가지게 되고 문제의 본질을 발견하여 어떤 이해 방식이 순수하고 올바른 것인지 많은 사람이 인식하고 알 수 있도록 교제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의 목적이 이 일에 대한 더 많은 사람의 치우치거나 단편적인 견해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라면 이것이 공격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고 더군다나 사사로이 보복하려는 속셈도 없다. 단지 실제 진상을 확실하게 밝히고 사랑으로 상대방을 깨닫게 해서 앞으로는 그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하고 싶을 뿐이다. 상대방이 받아들이든 말든 그는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으니 이런 모습과 행동 방식은 공격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경우, 말과 단어에서, 그리고 대화 방식이나 말투 및 대화의 태도에서 그의 속셈과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다. 만약 그가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분명 말에 날이 서 있을 것이고, 사람들이 그의 말투나 어조, 단어, 태도에서 그의 속셈과 목적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가 상대방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고 더욱이 공격하지도 않는다면 그의 말은 분명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보이는 모습에 부합할 것이다. 또한 말하는 태도나 말투, 단어가 분명 이성적일 것이고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인신공격이고, 무엇이 인신공격이 아닌지를 구분하는 원칙에 관해 교제하고 나니 분별할 수 있겠느냐? 만약 아직도 분별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문제의 본질을 간파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아무리 듣기 좋게 교제한다 해도 그가 만약 원칙에 따라 실행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물고 늘어지면서 온 힘을 다해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겉으로는 사람을 분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의 속셈과 목적은 사람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인신공격에 해당한다. 사람 간에 발생하는 그 정도의 일은 간단명료해서, 예배 한 번만으로 진리를 전부 교제할 수 있다면 예배 때마다 수다스럽게 떠들면서 형제자매의 시간을 빼앗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다. 늘 다른 사람을 물고 늘어진다면 공격이 되고 교란이 된다. 한 가지 일을 붙잡고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아무도 자신의 속셈과 목적을 내려놓지 않고 아무도 자기를 인식하지 않으며, 아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과 실상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물고 늘어지는 것은 어떤 성질이냐? 그것이 바로 공격이다. 약점이나 꼬투리, 트집을 잡고 한 가지 일을 한도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지면서 얼굴이 붉히며 다툰다. 만약 정상 인성 속에서 교제하면서 상대방을 붙들어 주고 도와주며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면 사람 간의 관계는 점점 좋아질 것이다. 반면 서로 공격하고 논쟁하며 서로 물고 늘어지면서 자기 논리를 펼치려 한다면, 우위를 차지하려고만 하고 굽히기 싫어하며 타협하지도 않고 개인의 원한도 내려놓지 않는다면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갈수록 긴장되고 악화될 것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는 없어지고 만나기만 하면 눈에 핏발이 서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개들이 싸울 때 사나운 개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눈에 왜 핏발이 서겠느냐? 그 속에 증오가 가득하기 때문이 아니냐? 사람 간에 서로 공격하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교제하는데 서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으로 상호 보완하고 서로 붙들어 준다면 관계가 나쁠 수 있겠느냐? 분명 점점 정상화될 것이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으로 말하고 한담하며 교제한다면 논쟁이 일어나더라도 사람 간의 관계는 정상적일 것이고 마주치기만 해도 화를 내거나 다툼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만나지 않을 때조차 상대방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마음속에 증오가 생기고 이유 없이 화가 치민다면 이는 정상 인성의 이성과 양심이 있는 모습이 아니다. 사람 간에 서로 공격하는 것은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환경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란이 있는 일이 생겼을 때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원칙에 따라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생활에서 사람 간에 서로 허물을 들추고 판단하며 심지어 서로 공격하고 정죄하는 상황이 늘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에, 그리고 사람이 늘 비이성적인 내적 상태에 놓여 패괴 성품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은 진리를 좀 깨달아도 실행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논쟁과 여러 가지 공격이 일어나기 쉽다. 만약 이런 여러 가지 공격이 가끔 일어난다면 교회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일시적일 것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서로 공격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교회 생활에 심각한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도 심각한 영향과 방해를 일으킨다.

③ 설전을 벌인다

교회에는 또 하나의 부류가 있다. 해명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부류이다. 예를 들면 잘못을 하나 저지르거나 말실수를 한마디 한 경우 남들이 자기를 안 좋게 볼까 봐,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타격이 있을까 봐 걱정한 나머지 예배 시간에 그 일을 해명하고 설명한다. 설명하는 목적이 남들이 자기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무척 공을 들이고 대단히 신경쓰면서 온종일 이렇게 고민한다. ‘이 일을 어떻게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상대방에게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내게 갖게 된 안 좋은 인식을 반박할 수 있을까? 오늘 예배가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예배 시간이 되면 그는 이야기한다. “저는 지난번에 누군가를 해치거나 폭로하려고 그런 일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좋은 뜻에서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했던 건데 결과적으로는 저를 오해한 분들이 절 저격해서는 제가 욕심과 야심이 있다고, 제 인성이 나쁘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설마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이겠어요? 전 그런 짓을 한 적도 없고 그런 말을 한 적도 없어요. 제가 아무개에 관해 뒷담화를 한 것도 일부러 그 사람을 못살게 굴려고 한 게 아니에요.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비판도 하면 안 되나요?” 그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해명하고 변명하면서 상대방의 문제도 많이 폭로하는 목적은 바로 변명하는 것이다. 자신은 패괴 성품을 표출하지 않았고, 인성이 나쁘지 않으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구나 악의가 아닌 선의로 그런 것인데 자신의 선의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고 그로 인해 정죄된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이 말의 저의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는 무고한 반면 자기를 그릇되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악인이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을 상대방은 이렇게 이해한다. ‘그 말인즉슨 당신에겐 패괴 성품이 없다는 거네? 결국 자기 자신을 미화하고 싶은 거 아니야? 이건 자기를 인식하지 않고 진리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잖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나한테 총부리를 겨누지? 난 당신을 못살게 굴거나 공격할 생각이 없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 바 아니라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서 그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일에 부딪치거나 조금만 서럽고 고통스러워도 언짢아해요. 곧장 해명하고 설명하려고 하죠. 게다가 늘 결백한 척하고 자기를 미화하고 뽐내려고만 해요. 당신은 그런 사람도 아닌데 왜 스스로 미화하려 하고, 자기가 완벽하다고 하죠? 그리고 저는 진리를 교제하고 있을 뿐이지 누구를 겨냥하지도 않았고 누구를 공격하거나 앙갚음할 생각도 없어요. 그러니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 두 사람이 진리를 교제하고 있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한 사람은 “저는 교회 사역을 위해 그런 일을 한 거예요.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요.”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늘이 다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니 본인이 조금 착하고 유능하고 언변이 좋고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감찰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꼭꼭 숨는다고 하나님께서 못 보실 거라 착각하지 말라고요. 형제자매도 다 볼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못 보실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감찰하신다는 걸 모르나요?”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이 무엇에 관해 논쟁하고 있느냐? 한쪽은 스스로 해명하며 결백한 척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나쁜 인상을 갖지 않게 하려 애쓰고, 다른 한쪽은 물고 늘어지면서 그가 스스로를 미화하지 못하게 하는 데다가 훈계하는 식으로 그를 폭로하고 정죄하려 한다. 겉으로 보면 이 두 사람은 직접적으로 서로를 욕하거나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폭로하지는 않았지만 양쪽 다 목적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을 오해하지 않고 자신의 결백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의 결백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를 정죄하여 그가 시인하게 만들려 한다. 이런 대화가 정상적으로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양심과 이성에 따라 하는 대화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성질의 대화에 해당하느냐? 이런 대화는 공격에 해당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해명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고, 자기를 인식하여 실행해야 할 원칙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교제하고 있느냐?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명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각과 관점 및 속셈과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려 하고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결백을 인정하게 하려 하고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폭로와 정죄를 부정하려 한다. 상대방의 말이 사실이나 진리에 부합하든 말든,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싫으면 상대방의 말이 틀렸다며 바로잡으려 한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그의 결백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계속 그를 폭로하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정죄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한 사람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은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니 이렇게 두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게 된다. 이런 대화의 성질은 서로 공격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런 공격은 어떤 성질의 공격이냐? 서로 부정하고 원망하며, 정죄하는 대화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식의 대화는 교회 생활에서도 나타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대화는 모두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왜 설전을 벌이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서로 시비와 잘잘못을 따지면서 아무도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않고 누구 하나 얻는 것이 없이 그저 한결같이 이 일만 물고 늘어지니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따지고 우열을 가리기 위해 입이 닳도록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쉼 없이 논쟁하지만 결국 결판을 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계속 싸우려 한다. 결국 어떤 수확이 있었느냐? 진리를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느냐? 회개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었느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자기를 더 인식할 수 있었느냐? 그런 수확은 전혀 없었다. 이런 무의미한 논쟁과 시비, 잘잘못을 따지는 대화가 바로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 설전을 벌이는 것은 한마디로 무의미한 대화이다. 전부 쓸데없는 이야기뿐이라 사람에게 도움이나 유익이 되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내뱉는 말이 모두 다른 사람을 해치는 말로서 죄다 사람의 뜻, 혈기, 사람의 머릿속 생각에서 나온 것이며, 당연히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모든 말이 전부 자신의 이익과 체면, 명성을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나 보탬을 주기 위한 것도, 스스로 한 측면의 진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것도 아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이 폭로하는 것이 자신에게 있는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인지, 자신이 거기에 해당하는지, 자신의 인식이 맞는지 탐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런 무의미한 해명과 변명은 아무리 듣기 좋고, 진지하며, 경건해도 전부 설전을 벌이는 것이고 서로 공격하며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해칠 뿐 아니라, 사람 간의 정상적인 관계에 지장을 주고, 자신의 생명 성장에도 차질을 빚는다. 어쨌든 어떤 변명이나 속셈, 어떤 태도나 말투, 혹은 어떤 수단과 방법이 되었든 사람이 제멋대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런 말과 방식 등은 모두 설전을 벌이는 것으로 남을 공격하는 범주에 속한다. 이 범주가 크지 않으냐? (무척 큽니다.) 그렇다면 이 범주를 줄이거나 마음속에서 남을 공격하는 이런 방식을 없앨 수 있겠느냐? 실제로 가능하다. 사람이 사리에 밝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신의 속셈과 욕망을 제어할 수 있고 남을 판단하거나 공격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의 속셈과 목적이 개인적으로 분풀이를 하거나 보복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라면, 단지 진리를 깨닫지 못했거나 깨달은 진리가 너무 얄팍해서 약간 우매하고 무지하거나 제멋대로 굴다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해를 끼친 것이라면, 사람의 도움과 붙들어 줌, 교제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난 뒤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나 견해도 좀 더 정확해지며, 다른 사람이 표출하는 패괴 성품이나 잘못된 행동 방식도 올바로 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이나 판단이 점점 줄어든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늘 패괴 성품 속에 살아간다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보이거나 누가 자기에게 미움을 사거나 피해를 주는 경우 기회를 틈타 보복하려 한다. 그가 늘 이런 속셈을 가진 채 진리는 전혀 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하지도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남을 공격할 수 있다. 이는 해결하기 쉽지 않다. 무의식적인 공격은 해결하기 쉽지만 의식적이고 속셈이 있는 공격은 해결하기 쉽지 않다. 무의식적이고 일시적인 공격이나 판단의 경우, 진리를 교제하여 붙들어 주고 도와주면 사람은 진리를 깨달은 후 돌아설 수 있다. 하지만 늘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고 개인적인 분풀이를 하며,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무너뜨리려는 속셈을 가지고 남을 공격하는 사람은 남들도 다 감지하고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행동은 교회 생활에 방해와 교란을 일으킨다. 이는 완전히 의도적인 방해와 교란이므로 이런 공격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으면 바뀌기 쉽지 않다.

남을 공격하고 정죄하는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이제 알겠느냐?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하면 증오심이 점점 사그라들 것이다. 남을 공격할 수 있는 사람에는 주로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거침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부류다.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보이면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속셈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는 그런 성품이라서 자기도 모르게 남을 공격하는 것일 뿐 책망하고 훈계하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악인이 아니고 정리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악인은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 생활에 항상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는 데다가 늘 남을 공격하고 판단하며 못살게 굴고 앙갚음하면서 진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자는 악인에 해당하고 이런 악인이야말로 교회에서 해결하고 정리해야 할 부류이다. 어째서 그들을 해결하고 정리해야겠느냐? 그들의 본성 본질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남을 공격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속셈을 품은 고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인성은 악랄해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누구도 거론할 수 없다. 누군가 만약 실수로 그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친다면 그는 기회를 틈타 보복할 궁리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부류는 남을 공격할 수 있으니 교회가 해결하고 정리해야 한다.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사람들은 어느 쪽이든, 먼저 공격했든 반격했든 상관없이 남을 공격한다는 것만으로도 모두 속내가 음험하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남을 괴롭히려 하는 악인에 속한다. 이런 부류는 교회 생활에 심각한 교란과 방해를 일으킨다. 그들은 교회에서 악인의 한 부류이니, 사안이 경미할 경우 격리하여 반성하게 하고 사안이 심각할 경우 제명하고 출교시켜라. 이것이 리더 일꾼이 이런 일을 처리할 때 알아야 할 원칙이다.

교제를 통해 너희는 무엇이 남을 공격하는 것인지를 깨닫고 분별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내가 무엇이 공격인지 정의하고 나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공격하는 범위가 이렇게 넓으면 앞으로 누가 감히 말을 하겠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입만 열면 남을 공격하는 게 되잖아. 이거 야단났네! 앞으론 밥이나 먹고 물이나 마셔야지 말은 하지 말아야겠어. 함부로 말하다가 남을 공격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입을 다무는 거야. 얼마나 좋아. 훨씬 평안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이게 옳은 생각이냐? 입을 다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남을 공격하는 문제의 본질은 사람 마음의 문제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기인하는 문제이지 입의 문제가 아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생각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되고,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말에도 원칙과 분별이 조금 생길 테니 남을 공격하는 것도 일부 해결될 것이다. 물론 교회 생활에서 사람 간에 서로 공격하지 않고 설전을 벌이지 않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려면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과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평온하게 있어야 한다. 그러면 누가 무의식적으로 네게 상처 주는 말을 해도 네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평온하여 따지지 않고 상대방과 논쟁하려 하지 않게 되며 해명이나 변명 따위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게 된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네게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네게 여전히 그런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에 감사한다. 이것은 너 자신을 인식할 좋은 기회이고, 하나님의 은혜이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네게 해를 끼친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되고, 무의식적으로 네 흠을 언급하거나 네 허물을 들춘 사람에게 반감이나 증오를 품어서도 안 되며, 무심코 그를 피하거나 여러 방식으로 그에게 보복해서도 안 된다. 이는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나면 누가 무의식적으로 네게 해를 끼쳐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고 포용하고 인내할 수 있다. 만약 누가 의도적으로 네게 해를 끼치면 어떻게 하겠느냐? 혈기로 그와 논쟁하겠느냐? 아니면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구하겠느냐? 어떤 방식으로 대하겠느냐? 물론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떤 방식을 취해 진입해야 옳은지 잘 알 것이다.

사람의 힘이나 자제력과 인내로는 교회 생활에서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네 인성이 아무리 좋고 네가 아무리 다정하고 착하며 도량이 넓어도, 네 존엄, 인격 등을 훼손하는 사람이나 일을 맞닥뜨리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네 마음속에 하나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만약 혈기로 대한다면 아주 간단하다. 그가 너를 욕하면 너도 그를 욕하고, 그가 널 공격하면 너도 그를 공격하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되갚아서 네 존엄과 인격, 체면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취할 만한 것인지, 너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지, 하나님이 기뻐하는지 것인지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람은 늘 이 문제의 본질을 분명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을 한다. ‘그가 내게 무례하게 구는데 내가 그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나? 그는 나한테 사랑이 없는데 내가 왜 그를 사랑으로 대해야 해? 그는 나한테 인내심을 갖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데 왜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인내하고 그를 도와야 하지?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랬어. 나라고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뭔데?’ 처음엔 다 이런 생각뿐이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행동하면 네 마음이 편하겠느냐, 아니면 괴롭고 불안하겠느냐? 네가 정말 이런 선택을 한다면 어떤 수확이 있겠느냐? 무엇을 얻겠느냐? 실제로 이렇게 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체험했다. 물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불안하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긴 하다.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분량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불안은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증오가, 모욕당했을 때 존엄과 인격이 받는 위협이, 그리고 도발하는 말을 듣고 나서 받는 상처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와 증오, 불복과 울분 등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이냐? 너는 곧바로 어떻게 말로 그를 책망할지, 어떻게 해야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으로 상대를 무너뜨려서 네가 존엄과 인격이 있는 사람이고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줄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불안하거나 증오가 생길 때, 네가 마음에 품는 생각은 그를 인내하고 포용하며 올바르게 대하는 등의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질투, 반감, 혐오, 증오, 원한, 정죄 등 모든 부정적인 것이다. 심지어 너는 속으로 수없이 저주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밥 먹고 잠 잘 때조차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보복할지 생각하며, 상대방이 자기를 공격하고 정죄하면 어떤 방식으로 그를 책망하고, 그 상황에 대처할지 상상하기도 한다. 너는 어떤 방식을 취해야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네 분노와 증오를 풀며, 상대방이 네게 복종하고 너를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는 너를 건들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을지 온종일 고민한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본때를 보여줘서 상대방에게 네 대단함을 알게 할지도 늘 고민한다. 이런 생각이 들 때, 그리고 상상했던 장면이 네 머릿속에 자꾸 떠오를 때 네게 어떤 교란이 일어나고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설전을 벌이고 서로 공격하는 분위기에 휩쓸리는 순간 어떤 결과를 야기하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있기가 쉽겠느냐? 생명 진입에 차질을 빚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일 처리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만약 네가 올바른 길을 선택한다면 누가 네 이미지와 체면을 깎아내리는 말로 네 인격과 존엄을 모욕해도 너는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말로도 상대와 논쟁하지 않을 것이고 의도적으로 해명하고 반박하며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증오심을 품지도 않을 것이다. 포용의 본질과 의의가 무엇이냐? 너는 “그가 하는 말 중 일부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아요.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다들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랬고요. 지금은 진리를 깨달아서 시비를 가리고 철학을 따지는 이방인의 길은 가지 않습니다. 포용을 택해서 사랑으로 대하죠. 저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그의 말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제가 의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죠.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서 하나님께 가져가 환경을 배치해 제 패괴 성품을 드러내달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이런 패괴 성품의 본질을 인식해서 이 문제들을 손보고 해결할 기회를 얻고 차근차근 문제들을 극복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도록 말이죠. 누가 제게 상처 주는 말을 했는지, 그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별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용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차분하게 앉아서 교제하면 된다. 반면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악인이라면 그를 상대하지 마라. 그가 충분히 모습을 드러내면. 모든 형제자매가 그를 분명하게 분별하고, 너도 그를 완전히 분별하게 될 것이며 리더 일꾼이 그를 제명하여 처리할 것이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그를 해결하는 날이다. 물론 너도 속으로 기뻐서 껑충껑충 뛸 것이다. 하지만 너는 결코 악인과 설전을 벌이거나 그 어떤 논쟁이나 변명을 하는 길을 택해서는 안 되고 무슨 일이 닥치든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을 택해야 한다. 네게 해를 끼친 사람을 대하든, 네게 해가 되지 않고 득이 되는 사람을 대하든 실행의 원칙은 똑같다. 이런 길을 택할 때 네 마음에 증오가 있겠느냐? 다소 불쾌할 수도 있다. 존엄이 훼손되고도 괴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괴롭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기만이다. 하지만 네가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인내하고 그 고생을 견뎌낼 수 있다면, 네가 이런 길을 택한다면 너는 다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나아갈 것이다. 어째서 떳떳하겠느냐? 왜냐하면 너는 자신이 혈기로 말하지 않았고, 사리사욕을 위해 남들과 얼굴을 붉히면서 다투지 않았으며 진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택한 길이 하나님이 가리키고 하나님이 요구한 길이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무척 평안한 것이다. 이런 평안이 있을 때 사람 간의 증오나 개인적 원한이 너를 교란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네가 정말 내려놓고 기꺼이 긍정적인 길을 택하고자 하면 네 마음이 평온하고 평안하니, 분노나 증오, 그리고 증오로 인해 생긴 복수심이나 계략 등 혈기에 속하는 것들은 너를 교란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택한 길이 네게 평안과 평온한 마음을 주면 혈기에 속하는 것들은 너를 교란하거나 흔들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이 너를 교란하지 못하는데 네가 어떤 방식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상대방과 설전을 벌일지 생각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간혹 사람의 분량이 작기 때문에, 혹은 일부 특수한 배경 때문에 사람의 혈기나 충동, 원망이 일어나겠지만 진리를 실행하려는 사람의 결심, 의지, 바람이 있기에 사람의 마음은 이런 것들에게 방해받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이런 것들이 너를 교란하거나 흔들지 못하게 되면 네 마음에 혈기가 치밀어 올라서 ‘저 사람은 계속 날 못살게 구네. 언젠가 나도 왜 나만 가지고 못살게 구냐고, 왜 늘 나를 무시하고 모욕하냐고 한마디해야겠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더라도 너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건 옳지 않고 그렇게 행동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 너는 재빨리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이런 내적 상태를 바로잡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생각과 견해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그에 따라 일부 긍정적인 것들이 네 안에서 솟아난다. 예를 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하나님이 네게 준 깨우침과 빛 비춤이 네가 사람을 분별하고 일을 간파하게 하여 너도 모르게 더 많은 진리 실제를 깨닫고 그 속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네 저항력, 즉 증오나 사람의 사리사욕, 사람의 혈기에 대항하는 ‘항체’가 점점 강력해지고, 네 분량이 점점 커져서 혈기에 속하는 것들은 너를 통제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간혹 네게 잘못된 견해나 생각, 충동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이런 것들은 금방 사라질 것이고 네 저항력과 분량에 의해 배제되고 제거될 것이다. 이때 긍정적인 것, 진리 실제, 하나님의 말씀이 네 안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런 긍정적인 것이 주도하게 되면 너는 외부의 사람과 일에 영향받지 않을 것이고 네 분량은 커질 것이며 네 내적 상태는 점점 정상화될 것이다. 더이상 패괴 성품에 따라 살면서 악순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니 이러면 사람의 분량은 끊임없이 커질 것이다.

교회나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만약 인신공격을 받아 존엄이나 인격이 훼손되었는데도 포용과 인내를 택하고 올바른 실행의 길을 택한다면 이는 사람에게 유익이 있다. 이런 유익은 아마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너는 체험할 때 너도 모르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린 길이 광명의 길이요, 진실로 존재하는 길이며 사람에게 진리와 유익을 주는 가장 의미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있을 때, 특히 교회 생활 중일 때 온갖 시험과 유혹을 이겨낼 것이다. 누가 악의적으로 너를 공격하고 해치거나, 네게 보복하여 분풀이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때도 너는 진리 원칙에 따라 대처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증오하기 때문에 일이 닥쳐도 혈기로 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지만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사람의 인내에 원칙이 생겨서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지지대가 된다.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시비를 가리거나 남을 공격하는 것을 좋아하며 혈기 속에 살아가고자 한다면 공격받았을 때 다른 사람과 설전을 벌이며 서로 공격하기를 좋아할 테니 이는 누구에게도 도움이나 보탬이 되지 않고 피해만 줄 것이다. 누구든 서로 공격하며 설전을 벌이고 나면 기진맥진하고 지칠대로 지치며 양쪽 모두 피해만 볼 뿐 그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한다. 끝내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하며 증오만 남고 보복할 기회만 엿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인 끝에 사람이 걷게 되는 말로다.

방금 교제한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인다는 주제와 관련하여 너희는 분별의 원칙을 깨달았느냐? 어떤 경우가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것인지 구분할 수 있겠느냐?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일은 사람들 사이에 자주 일어나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서로 공격하는 것은 주로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있는 일부 문제들에 대해 인신공격하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것도 모자라 욕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보복하고, 되받아치고, 자기 분풀이를 하는 데 있다. 결론적으로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것은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조화롭게 협력하는 모습도 아닌 혈기나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앙갚음하고 남을 공격하는 모습이다.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목적은 결코 진리를 확실하게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깨닫고자 논쟁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패괴 성품과 야심, 사리사욕, 육적인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서로 공격하는 것은 분명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남을 도와주거나 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사탄이 사람을 괴롭히고 농락하며 우롱하는 하나의 수단과 방식이다. 사람이 패괴 성품 속에서 살아가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택하지 않으면 이런 속박이나 시험에 걸려들거나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분위기에 휘말리기 쉽다. 말 한마디, 단어 하나, 혹은 눈짓 한 번 때문에 얼굴을 붉히도록 논쟁하는 것도 모자라 쉴 새 없이 떠들고 주야장천 이 일 때문에 누가 더 잘났는지 따지고 필사적으로 싸운다. 만나기만 하면 끝도 없이 다투고 심지어는 컴퓨터 채팅방에서까지 서로 공격하고 욕하며 정죄하는 사람도 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증오냐! 예배할 때 욕한 것으로는 성에 안 차고 분이 안 풀리며, 목적도 이루지 못했으니 집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서 계속 욕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짓거리냐? 이런 걸 고취하고, 장려할 가치가 있느냐?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이 무슨 ‘겁을 상실한 짓’이냐? 이것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는 무법자나 하는 짓으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한 결과이다. 물론 이런 행위나 행동 방식은 사람의 생명 진입에 막대한 교란과 피해를 야기하고 동시에 교회 생활에도 교란과 방해를 일으킨다. 그러니 리더 일꾼은 이런 일에 직면할 경우, 두 사람이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면서 끝을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당장 정리해 버려야 한다. 관용을 베풀어선 안 되고 방치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다른 형제자매들을 보호하고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지켜서 모든 예배가 성과를 이루게 해야지 이런 사람이 형제자매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는 시간을 침해하여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교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예배 시간에 현장에서 그들이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것이 보이면 그 즉시 저지하고 적시에 해결해야 한다. 제한할 수 없으면 즉각적으로 예배에서 그들을 폭로하고 해부하여 그들을 정리해 버려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이지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며 자기 분풀이를 하는 곳이 아니다. 누구든 항상 교회 생활을 교란하여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지장을 준다면 정리해 버려야 한다. 교회는 이런 사람을 환영하지 않으며 마귀의 교란과 악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들을 모두 정리해 버리면 문제가 해결된다.

교회에서 만약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사람을 발견한 경우 어떤 핑계나 이유를 대든, 그들이 논쟁을 벌이는 초점이 무엇이든,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이든 아니든 교회 생활에 방해와 교란을 일으킨다면 인정사정없이 즉시 처단해야 한다. 만약 그들을 저지하지도 못하고 제한하지도 못한다면 그들을 정리해 버려야 한다. 이것이 리더 일꾼이 이런 일에 직면했을 때 해야 할 사역이다. 관용을 베풀어 일을 키우거나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주요 원칙이 아니다. 마치 공정한 재판관처럼 그들의 잘잘못을 판단하라는 것도 아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누가 이치에 맞고 누가 이치에 맞지 않는지 보고 명확히 시비를 가린 후에 똑같이 처벌하거나 잘못한 사람은 벌하고 무고한 사람은 보상해 주는 것은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이 일을 처리할 때 너더러 법률로 평가하라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역 원칙대로 평가하고 처리하라는 것이다. 서로 공격하는 양측이 교회 생활에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면 교회 리더 일꾼은 책임지고 저지하고 제한하거나 격리하고 제명해야지 양측이 사건의 경위, 각자의 핑계나 이유, 남을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속셈이나 목적,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하소연하는 것을 귀담아들어서는 안 된다. 너더러 자초지종을 파악하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 생활에 초래된 방해와 교란을 없애며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을 처리하라는 것이다. 만약 리더 일꾼이 여기에서 적당히 수습하고 중용의 길을 걸으면서 서로 공격한 양측에게 회유책을 쓴다면, 그들이 교회 생활을 제멋대로 방해하고 교란해도 관여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으며 그들을 아예 방치하고 매번 단지 권면하고 타이르는 것으로 끝낸다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이런 리더 일꾼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일단 교회에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문제가 일어나 교회 생활을 심각하게 교란하고 무너뜨림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분노와 반감을 일으킨다면 리더 일꾼은 즉시 결단을 내려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과 교회 정화 원칙에 따라 양측을 격리하거나 제명해야지 마치 공정한 재판관처럼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거나 시비를 가려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늘어놓는 구질구질하고 장황한 쓸데없는 말을 귀담아듣거나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누가 맞고 누가 틀린지 따져서도 안 된다. 시비와 잘잘못을 가린 다음 더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의 시비와 잘잘못에 관해 토론하고 교제하게 한다면, 그래서 반감과 혐오를 품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는 데 차질을 빚게 되니 이는 더더욱 리더 일꾼의 책임 방기이다. 이런 실행 원칙은 옳지 않다. 만약 언젠가 제한을 당한 양측이 회개하여서 더이상 예배 시간을 침해하면서까지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지 않게 되면 그때는 그들에 대한 격리를 풀어주어도 된다. 만약 악인이라서 제명했는데 누가 그들이 착하게 변했다고 한다면 실제로 그들에게 회개한 모습이 있는지 살펴 봐야 하고 많은 사람의 의견도 수렴해 봐야 한다. 설사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더라도 면밀히 주시하고 그들의 발언 시간을 엄격히 제한해야 하며 그들이 보이는 모습에 따라 상응하는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는 모두 교회 리더 일꾼이 깨닫고 신경써야 할 원칙이다. 물론 이 일은 주관적인 추측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이 서로 공격하는 것이 반드시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는 성질이어야 한다. 잠깐 상대에게 상처 주는 발언을 했고, 상대가 한 마디 맞받아쳤다고 해서 말을 못 하게 하고 격리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처리하면 원칙에 크게 어긋난다! 리더 일꾼은 반드시 원칙을 제대로 파악해서 많은 사람이 리더가 원칙에 부합하게 행동한다고 인정하게 해야지 제멋대로 굴거나 터무니없이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런 측면의 사역에 관해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이 무엇이 공격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리더 일꾼 또한 이 사역을 할 때 파악해야 할 원칙과 다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④ 제멋대로 남을 정죄한다

서로 공격하는 것에는 또 하나의 모습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영적인 용어를 좀 안다고 항상 영적인 용어를 써가며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마귀니, 사탄이니,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느니,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느니, 바리새인이니 하는 말을 써가며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공격성을 띤 성질이 아니겠느냐? 예전에 어떤 사람이 형제자매와 왕래할 때 누군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자 욕을 하고 싶었지만 이런 고민을 하였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남을 욕하면 체면이 서지 않고. 성도의 품위에 맞지 않아 보일 거야. 욕하거나 더러운 말을 입에 담아선 안 돼. 그런데 욕을 안 하면 마음이 편치 않고 분도 풀리지 않는단 말이지. 늘 욕하고 싶은데 뭐라고 욕하면 좋으려나?’ 그래서 그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다. 자기에게 미움을 사거나, 자기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 혹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악마귀!”, “당신이 바로 악마귀군요!”, “아무개가 바로 악마귀입니다!”라며 욕했다. 마귀 앞에 ‘악’자가 붙은 이 말은 듣도 보도 못하던 말이다. 너무 신선하지 않으냐? 그가 함부로 형제자매에게 악마귀라고 욕하는데 누가 그런 욕을 듣고 유쾌하겠느냐? 예를 들면 그가 다른 사람에게 물을 따라 달라고 했는데 형제자매가 마침 바빠서 직접 따라 마시라고 하면 그가 “이런 악마귀를 봤나!”라며 욕한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직 식사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그는 화를 낸다. “당신들은 악마귀입니다. 하나같이 게을러요. 제가 본분을 이행하러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밥도 제대로 안 되어 있다니요!” 그와 함께 지내는 사람은 모두 그에게 악마귀라고 욕을 먹을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악인입니다.) 어디가 악하냐? 그에게 미움을 사거나 그의 뜻에 어긋나는 사람은 모두 악마귀이다. 자기가 아니라 남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근거가 있느냐? 근거가 없다. 그저 분을 풀 수 있고 기분을 풀 수 있는 단어를 찾아 내키는 대로 욕을 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말 남을 욕하면 사람들이 자기 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지 않다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 보고 마귀라고 하면 욕이 아니니, 남들이 듣기에도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면 그의 개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면서도 사람들이 딱히 문제삼을 수 없다. 이자는 몹시 교활하고도 악해서 가장 악랄하고 반박할 수 없는 말로 보복하고 정죄하는데도 사람들은 그가 남을 욕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 말이 불합리하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많은 사람이 그를 피하겠느냐 아니면 가까이하겠느냐? (피합니다.) 왜 피하겠느냐? 상대할 수 없으면 피해야 한다. 그것이 현명한 사람이다.

교회마다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며,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면 특정 리더 일꾼에게 편견을 품은 일부 사람들은 보복하기 위해 뒤에서 그를 비판하고, 진리를 교제한다는 명분 하에 리더 일꾼을 폭로하고 해부하는데 이런 행동의 의도와 목적은 옳지 않다. 만약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증거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자신의 진실한 체험을 교제해야 한다. 자기에 대한 해부와 인식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하면 더 나은 결실을 보고 하나님의 선민도 동조할 것이다. 만약 타격을 주고 앙갚음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폭로하고, 공격하며, 헐뜯는 것이라면 이런 행동의 의도가 옳지 않다. 이는 명분은 물론, 이치에도 맞지 않으며 하나님을 혐오하게 만들고 형제자매에게 도움도 주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의 의도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괴롭히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악인이 악행을 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선민은 악인을 분별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뜻대로 다른 사람에게 타격을 주고, 폭로하며 헐뜯는다면 이런 사람은 사랑으로 도와주고 교제하며 해부하거나 책망하고 훈계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여러 번 가르쳐도 고치지 않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항상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남에게 누명을 씌우며 남을 괴롭히는 악인은 철저하게 폭로해서 모두가 분별하게 하고 제재를 가하거나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 이것은 필요한 조치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교회 생활과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쉽게 다른 사람을 미혹하여 교회에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악인은 늘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정죄하는데 이는 완전히 자기를 드러내어 남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게 하려는 목적이다. 이런 악인은 항상 예배 시간에 진리를 교제하는 기회를 틈타 다른 사람을 에둘러 폭로하고, 해부하고, 억압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교회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이를 합리화한다. 이런 명분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사람이니 모두 확실한 악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정죄하는 모든 사람은 전부 극악무도한 사람이다. 그리고 악인을 폭로하고 해부하여 하나님 집 사역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다. 악인은 종종 교활하게 악행을 저지른다. 그들은 모두 도리를 얘기하며 자기를 위해 궤변을 늘어놓아 사람을 미혹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능하다. 만약 하나님의 선민이 분별력이 없어서 악인을 제지하지 못한다면 교회 생활과 교회 사역이 교란당해 뒤죽박죽되고 심지어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악인이 문제를 교제하고 해부하는 데에는 항상 속셈과 목적이 있고 겨냥하는 바가 있다. 자기를 해부하고 인식하거나, 솔직하게 털어놓아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빌려서 다른 사람을 폭로하고, 해부하며, 공격하는 것이다. 그들은 늘 자신에 대한 인식을 교제하는 것을 빌미로 다른 사람을 해부하고 정죄하며,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를 교제하는 것을 빌미로 다른 사람을 폭로하고 헐뜯으며 희화화한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교회 사역에 부담을 가지고 있는 사람, 늘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에게 큰 반감과 원한을 품고 있다. 그들은 온갖 이유와 핑계를 대며 그런 사람들의 적극성에 타격을 주고 그런 사람들이 교회 사역을 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들은 속으로 그런 사람들을 질투하고 증오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일어나 사역하면 그들의 명예와 이익, 지위에 위협이 될까 봐 걱정한다. 그래서 지체 없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런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그런 사람들을 억압하고 제재하며, 그것도 모자라 꼬투리를 잡아 누명을 씌우고, 모함하고, 사실을 왜곡하여 정죄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증오하는 것이 그들의 성품이라는 것이 완전히 드러난다. 그들은 특히나 진리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비교적 솔직하고, 비교적 단정하고 반듯한 사람을 증오한다.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마음가짐이 그렇다. 어째서 그들이 유독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단정하고 반듯한 사람을 겨냥해 폭로하고, 헐뜯으며, 억압하고 배척하겠느냐? 이는 분명 좋은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무너뜨리고 짓밟으려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자신들이 교회를 통제하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물어보겠다. 진리를 교제할 때 그들은 왜 자기를 폭로하거나 해부하지는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겨냥하고 폭로하느냐? 설마 그들에게 패괴 표출이나 패괴 성품이 없다는 말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기어이 다른 사람을 겨냥해 폭로하고 해부하느냐? 도대체 달성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이는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교회를 교란한 악인의 악행을 폭로한다면 이는 마땅한 행동이지만 이런 부류는 굳이 진리를 교제한다는 명분으로 좋은 사람을 폭로하고 괴롭힌다. 그들의 속셈과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좋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났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사실상 그렇다. 하나님은 악인을 구원하지 않으니 악인이 하나님을 증오하고 좋은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악인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구원받지 못하면서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무슨 문제이냐? 만약 그가 진리에 대해 인식이 있고, 자기에 대해 인식이 있다면 솔직하게 교제할 수 있겠지만 그는 늘 다른 사람을 겨냥하고, 도발한다. 늘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가상의 적으로 삼으려고만 한다. 이것이 바로 악인의 특징이다. 이런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진짜 마귀 사탄이고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이니 마땅히 제재받아야 한다. 만약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면 제때 처리해 교회에서 출교시켜야 한다. 좋은 사람에게 타격을 주고, 배척하는 모든 사람은 암적인 존재이다. 왜 암적인 존재라고 하겠느냐? 그는 교회에서 쉽게 불필요한 분쟁, 의견 충돌을 일으켜 사태를 점점 심각하게 만든다. 그는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사람을 겨냥하며 늘 다른 사람,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화살을 겨눈다. 그러면 교회 생활을 쉽게 교란하고,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 말씀을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며 진리를 교제하는 데에 지장을 준다. 이들 악인은 언제나 교회 생활을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진리를 교제한다는 명분 아래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그들은 말에 항상 적의를 품고, 도발적인 언사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정죄한다.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교회 생활을 방해하고 교란할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어 하나님 앞에서 차분하게 있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특히 그들이 남들을 서슴없이 정죄하고, 타격을 주고, 상처를 주는 발언도 다른 사람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키니 이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혀 흉흉하게 만들고 사람 간의 관계에 긴장감과 적대감을 형성하고, 사람들을 다툼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교회 생활에 지장을 주고 교회에 다툼을 일으킬 뿐 아니라 심지어 교회의 모든 사역과 복음 확장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리더 일꾼은 반드시 이런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이들을 제재하고 처리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늘 남들을 공격하고 정죄하는 악인을 형제자매가 엄격하게 제재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함부로 남들에게 타격을 주고 남들을 정죄하는 행동을 교회 리더가 제때 폭로하고 저지해야 하고, 만약 여러 번 타일러도 고치지 않으면 그를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 예배드릴 때는 반드시 악인이 교회 생활을 교란하는 것을 방지하고, 더불어 어리석은 자의 말이 교회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제한해야 한다. 만약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발견하면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 절대 악인이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함부로 악행을 저지르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민이 정상적으로 예배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교제하여 모두 정상적으로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선민이 진리를 깨달아 실제에 진입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너희는 교회에서 이런 부류의 악인을 본 적이 있느냐? 그는 늘 속으로 좋은 사람을 질투하고 겨냥한다. 오늘은 이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일은 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고, 누구한테든 잔득 흠을 잡고 이러쿵저러쿵 비평하고, 그것도 따박따박 근거를 대면서 말을 잘한다. 그러다 결국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 암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교회는 교란받아 사람의 마음이 흐트러지는데 많은 사람이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지며 예배드려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도움도 받지 못한다. 심지어 예배드리기 싫어하는 사람까지 생긴다. 이런 악인이 암적인 존재가 아니겠느냐? 만약 제명할 정도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그를 격리하거나 제재하는 조치라도 취해야 한다. 예를 들면 예배 시간에 그를 구석 자리에 앉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기어이 기회를 잡아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발언을 하려 하면 제재해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제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가 폭발하고 반항하려 하면 그때는 제때 그를 정리하여라. 그러니까 그가 제재받는 것이 싫어서 “무슨 근거로 제 말을 막으시죠? 무슨 근거로 당신들은 죄다 5분씩 말하면서 저만 1분으로 제한하시나요?”라면서 늘 이런 질문을 할 때가 바로 반항하려는 때라는 것이다. 그가 반항하려 할 때가 불복할 때가 아니냐? 말썽을 피우려는 것이고, 소란을 피우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교회 생활을 교란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본색을 드러내려는 것이며 그를 처리할 때가 된 것이니 서둘러 그를 정리해야 한다. 이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많은 사람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온갖 악인과 악령, 더러운 귀신들 그리고 ‘특별한 인재’들이 다 튀어나와 교란하려 드는데 제재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어떤 ‘특별한 인재’는 입만 열면 남들을 헐뜯고 공격한다. 네가 안경을 써도 공격하고, 머리숱이 적어도 공격한다. 네가 예배 시간에 자신의 체험 간증을 얘기해도, 네가 본분을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게 이행해도 공격하고 판단한다. 네게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에게 믿음을 가져도 공격하고, 네가 연약해도, 네 집에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 내도 공격한다. 이런 공격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남들이 무엇을 하든 그의 마음에 들지 않고, 그의 눈에 거슬리고, 생트집을 잡으려 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고, 남들이 어떻게 하든 틀렸다는 의미이다. 네가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대로 진리를 교제하고 문제를 처리해도 그는 꼬투리를 찾고 트집을 잡으려 한다. 네가 어떻게 하든 틀렸다는 것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니 누구든 그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교회에 나타나면 하나가 되었든, 둘이 되었든 바로바로 처리하여라.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교회 생활에 미치는 해악이 대단히 크고,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니 그 결과가 지극히 심각하기 때문이다.

(2) 항상 남을 공격하는 부류의 인성 특징

오늘은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측면을 교제했다. 너희는 이런 몇 가지 측면 중 여러 부류의 사람이 지닌 모습의 성질을 파악하였느냐? 먼저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부류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들에게 정상 인성의 이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성이 없는 모습이 무엇이냐? 사람과 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나 원칙이 무엇이냐? 그들이 어떤 방식과 태도를 취해 여러 사람과 일을 대하느냐? 예를 들어, 시비 가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과 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중 하나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시비 가리기를 좋아하는 것이란, 어떤 일이든 시비와 옳고 그름을 확실히 판단하려 하고, 상황을 분명히 해 두거나 누구의 잘잘못인지 제대로 가리지 않으면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매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시비를 가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그것이 진리 실행과 관계가 있겠느냐? (관계없습니다.) 어째서 관계가 없다고 하겠느냐? 시비를 가리는 것은 진리 원칙을 견지하는 것도, 진리 원칙에 관해 토론하고 교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누구의 잘잘못인지, 누구 말에 일리가 있고 누구 말에는 일리가 없는지, 누구의 이유가 충분하고 누구의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지, 누가 말하는 도리가 더 깊은지 등등을 따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줄 때, 사람은 늘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이러저러한 이유와 원인을 댄다. 하나님이 너와 그런 것들을 논하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그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물어보겠느냐? 하나님이 너의 원인이나 이유를 물어보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묻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시련을 주었을 때 네가 순종하는 태도를 취했는지, 아니면 반항하는 태도를 취했는지 물어볼 뿐이다. 하나님은 네가 과연 진리를 깨달았는지, 순종했는지만 물어본다. 하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을 물어본다. 하나님은 네게 순종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네 이유가 충분한지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그러한 것들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네가 순종했는지를 볼 뿐이다. 네가 살아온 환경이나 그 당시에 네가 처한 상황이 어땠는지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은 네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네가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는지 감찰할 뿐이다. 하나님은 너와 시비를 따지지 않으며, 네 이유가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네가 진실로 순종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하나님은 네게 그 한마디만 물어볼 뿐이다. 이것이 진리 원칙이 아니냐? 시비를 가리고 설전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부류에게 진리 원칙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진리 원칙이 없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진리 원칙에 대해 집중했겠느냐? 추구했겠느냐? 구해 보았겠느냐? 그들은 집중하지도 추구하지도 구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진리 원칙이 아예 없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의 관념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시비와 옳고 그름, 핑계와 이유, 궤변과 논쟁뿐이며, 그러고 나서는 서로 공격하고 판단하고 정죄한다. 이런 부류는 시비를 논하기 좋아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좋아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이런 부류는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판단하고 대적하니, 결국 징벌받는 결말을 맞이할 뿐이다.

시비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부류가 진리를 구하더냐? 이런 사람과 일, 사물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구하며,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실행해야 하는 진리 원칙을 구하더냐? 그러지 않았다. 일이 생기면 그들은 ‘그 일이 어떻고, 그 사람이 어떤지’ 연구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흔히 말하는 딴지 걸기가 아니겠느냐? 사람의 이유를 따지고, 일이 발생한 경위를 따지는 등, 그런 일은 확실히 얘기하려고 하면서, 이런 복잡한 일이 발전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단계에서 진리를 구하여 깨닫고 깨우침을 얻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체험이나 실행법도 없다. 그는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그 일은 분명 저를 겨냥하고 저를 모욕한 것이잖아요. 제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멍청한 줄 아세요? 왜 저를 모욕하려 하시죠? 저는 당신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저를 겨냥하시나요? 그러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오랫동안 참았는데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저를 만만하게 보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이 일을 물고 늘어지면서 계속해서 자기 논리를 펼치고 이 일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이 논리란 것은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그가 사람과 일에서 걸고넘어지니 남들이 질려서 듣기 싫어하는데도 그는 지치지 않고 끝까지 따지고 든다.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딴지를 거는 것, 즉 진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부류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딴지 걸기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딴지를 거는 사람이 진리를 좋아하겠느냐?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가 진리를 깨닫겠느냐? 하나님이 말하는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 그가 알겠느냐? 딴지를 거는 표면적인 현상으로 볼 때 그가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진리인지 알고 있느냐?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숭배하는 이념이 무엇이냐? 바로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 옳고, 당당하게 남들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일을 한 사람이 합리적인 사람이고, 윤리도덕이나 전통문화에 부합하는 행동을 해서 많은 사람의 동조를 받으면 그것이 이치라는 것이다. 이 이치가 그에게는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가 대놓고 딴지를 걸면서 물고 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치에 맞으니 자신에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이 너무 골치 아프지 않으냐? “저는 교회 사역을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았고, 남들에게서 잇속을 차리지도 않았습니다. 남의 물건을 빼앗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악인이 아니에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이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자 진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냐? 딴지를 거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은 자기 몸이 반듯하니 그림자가 기울어도 걱정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올곧고 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이 닥치면 논쟁하고 토론하기 좋아하고, 반드시 자기 논리를 피력하려 한다. 그들은 자신의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공개적으로 다뤄지면서 많은 사람이 동조하면 자기가 진리를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의 ‘진리’가 무엇이겠느냐?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냐? 너희가 볼 때 이런 부류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늘 딴지를 걸어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늘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맨날 나만 가지고 그래요? 나한테 그러면 안 되죠!”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당신이 날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지. 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나도 복수하겠어. 당신에게 되갚아 주겠다고. 이건 정당방위고 합법적인 거야. 이게 바로 진리 원칙이지. 그러니 당신의 행동은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고, 내 행동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니까 나는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고 그 일과 그 사람을 거론해야겠어!’ 그는 딴지를 거는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데 틀려도 한참 틀리지 않았느냐?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으로 방향부터 잘못되었다. 딴지를 거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이것이 이런 부류의 인성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측면의 문제인 딴지 걸기이다. 인성 측면의 문제는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본성과 관계가 있지 않느냐?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공명정대, 정정당당, 넓은 아량, 떳떳함 등 자기가 알고 있는 이런 단어들이 사람됨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리 원칙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관점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부류는 비정상적인 인성을 지니고 있다. 그 첫째는 시비 가리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는 딴지를 거는 것이다. 셋째가 무엇이냐?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맞는 말은 한마디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생각을 한다. ‘설사 당신의 말이 맞는다고 해도 내 체면을 생각해서 체면 깎이지 않게 완곡하게 말해야 해. 만약 예리한 말이라서 내 체면을 구길 수 있다면 나한테 따로 말해 줘야지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줘서 체면을 구기고 물러날 여지도 주지 않으면 안 돼. 더군다나 당신 말이 틀렸다면 되갚아 주겠어!’ 더 심각한 것은 그가 반항하는 것이다. “당신 말이 아무리 맞는다고 해도 난 받아들일 수 없어! 당신이 누굴 비난하든 상관없는데 날 저격하는 것만큼은 안 돼. 당신 말이 맞는다고 해도 안 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겨냥하고, 자기를 폭로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 말씀을 싫어하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직면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나님과 논쟁할 수 없을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면전에서 자기 문제나 자신의 내적 상태를 지적하거나, 무심코 그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이 일부러 자기를 겨냥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는 되갚아서 설전을 벌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는 진리를 눈곱만큼도 안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런 부류의 인성 본질인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설전을 벌이는 내용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설전을 벌이든, 이런 부류의 인성은 자명하다. 그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설사 설교를 알아듣는다고 해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서로 공격하고 계속해서 설전을 벌이거나 늘 남을 공격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에 해당하겠느냐? 먼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들이 진리를 깨달으면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들이 문제를 발견하면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자신들에게 관념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지며 개인적인 견해가 있을 때, 그들이 이것들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진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이렇게 ‘할 수 없는’ 것들을 볼 때, 남을 공격하고 남들과 설전을 벌이기 좋아하는 부류는 좋은 인간이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 그들이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진리와 관련된 일에 대해 어떤 편견이나 잘못된 견해를 갖든 본인이 옳다고 여기고 전혀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설령 진리를 분명하게 교제해 주는 사람이 있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실행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아울러 이런 부류에게는 더 가증스러운 모습이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글귀와 도리를 조금 이해하고 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거창한 도리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공격, 판단, 정죄하며, 그것도 모자라 속박하고 통제한다. 만약 그가 너를 판단하고 정죄하려 했는데 제압하지 못하면 그는 어떻게든 공허한 이론으로 속박하려 할 것이다. 네가 만약 계속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비열하고 악랄한 수법으로 네가 자신을 인정하고 연약해지며 소극적으로 변할 때까지 너를 공격할 것이다. 혹은 네가 자신에게 탄복하거나 자신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는 흡족해할 것이다. 그러니 이런 부류의 행위와 모습 및 진리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면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냐? 전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이것이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인성은 어떠냐? 이들 중 다수가 모두 악인이며 보수적으로 말해도 90% 이상이 악인이다. 악인은 범사에 시비 가리기를 좋아하며 분명하게 가려지지 않으면 끝장을 볼 것이니, 늘 이런 형국일 것이다. 또한, 악인은 일이 일어나면 사람과 일을 걸고넘어지며 딴지를 건다. 항상 자기 논리만 펼쳐서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동조하고 자기를 옹호하며 자신이 옳다고 말하기를 바라고, 자신의 말이 틀렸다고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일이 일어나면 항상 사람을 속박하고 통제할 기회만 찾으려 한다.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통제하느냐? 모든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본인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본인은 문제가 있고 흠이 있으니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가 사람들을 쓰러뜨려서 자기 혼자 우뚝 서고자 하는 것은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을 통제해서 달성하려는 목적은 모든 사람을 정죄하고 공격해 쓰러뜨려서 사람들이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들을 소극적이고 연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대해 믿음을 잃고 하나님에게 믿음을 잃어버려 갈 길을 잃으면 그가 기뻐하고 흡족해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런 부류 중 악인이 많지 않겠느냐? 네가 보기에 어떤 부류가 사람들 속에서 남을 공격하기 좋아하는 것 같으냐? 면전에서 공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뒤에서 공격하고, 각종 방식으로 공격한다면 이런 부류가 바로 악인이다. 이런 부류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교제하지도 않는다. 항상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내세운다. 무슨 일을 하든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으며 행실이 곧고 바르다며 늘 자기가 성인군자, 당당하고 떳떳한 사나이라고 내세우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진리나 하나님 말씀을 전혀 증거하지 않고 그저 딴지를 걸며 자기만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속셈과 목적은 자기가 모르는 게 없는 훌륭한 사람이란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교회에 나타나는 늘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펼치는 부류는 자발적으로 남을 공격하는 쪽이든 공격을 받는 쪽이든 교회 생활에 방해와 교란을 일으킨다면 많은 사람이 나서서 그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을 제한해야 한다. 그들에게 제멋대로 나쁜 짓을 일삼을 시간적 여유를 주지 말아야 하고, 그들 멋대로 개인적인 은혜나 원한, 일시적인 화 때문에 분풀이나 보복 행위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교회 리더 역시 책임지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 이런 부류가 교회 생활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제한해서 많은 사람이 교란당하지 않게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일 때는 적시에 저지하고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저지하고 제한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들이 계속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여 다른 사람을 교란하고 계속해서 교회 생활을 무너뜨린다면, 이런 부류를 제명하고 출교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리더의 직책이다.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부류의 행위와 모습에 관해 많은 교제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인성에 관해 방금 간단하게 해부하고 교제하였다. 이는 너희가 이런 부류에 대해 좀 더 분별력을 갖는 데 도움이 된다. 그들이 말하고 행동할 때 많은 사람이 그들을 적시에 파악하고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이런 부류의 본질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인식할수록 그들을 더욱 빨리 분별할 것이고, 그러면 이런 부류가 너희에게 일으키는 교란도 갈수록 적어질 것이다. 서로 공격하고 설전을 벌이는 부류가 교회 생활과 하나님 선민에 미치는 위협과 피해를 많은 사람이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들은 절대 스스로를 반성하고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적시에 처리하거나 제명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교회 생활에 지속적으로 방해와 교란을 일으킬 것이니 이런 부류를 처리하고 제명하는 것은 교회 리더가 등한시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역이다.

2021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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