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알아 가는 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시대를 끝내는 마지막 사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형벌과 심판으로 나타나며, 온갖 불의를 드러내어 만민을 공개적으로 심판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온전케 한다. 이런 성품이라야 시대를 끝낼 수 있다. 말세가 되었으니 만물은 각기 부류대로 나뉠 것이며, 각각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른 부류로 나뉠 것이다. 이때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를 드러내는 때이다.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겪지 않는다면, 사람의 패역과 불의는 모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의 결말은 오직 형벌과 심판을 통해서만 오롯이 드러나고, 사람은 형벌과 심판을 받아야만 본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은 악한 자는 악한 자끼리, 선한 자는 선한 자끼리 각기 부류대로 나뉠 것이다. 형벌과 심판을 통해 만물의 결말을 드러내어 상선벌악하며, 그리하여 만인이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게 한다. 이런 사역은 모두 공의로운 형벌과 심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이 극도로 패괴되었고 사람의 패역은 너무나 심해서, 오직 형벌과 심판을 위주로 하는, 말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만이 사람을 철저히 변화시키고 온전케 할 수 있으며 악을 드러낼 수 있다. 이로써 모든 불의한 자들을 강하게 징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품은 모두 시대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성품을 나타내고 공개하는 것은 모든 새 시대의 사역을 위한 것이지, 아무 의미 없이 마음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결말을 드러내는 말세에도 여전히 끝없는 긍휼과 자비를 베풀며 사랑해 주고, 공의로운 심판 없이 사랑하기만 하면서 관용을 베풀고 인내하고 죄를 사해 주며,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언제나 용서해 주고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지 않는다면, 전체 경영은 언제 마무리할 수 있겠느냐? 그런 성품으로 언제 사람들을 인류에게 적합한 종착지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마음이 여리고 착해서 사람들을 언제나 사랑하기만 하는 재판관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지르든 사랑해 주고, 그 누구든 아껴 주고 감싸 준다면, 공정한 판결은 언제 할 수 있겠느냐? 말세에는 오직 공의로운 심판만이 인류를 각기 부류대로 나눌 수 있고, 사람을 더 새로운 경지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심판과 형벌의 공의 성품으로 전체 시대를 끝내야 한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사역 이상 3> 중에서

나는 유일한 하나님 자신이고, 유일한 하나님의 본체이다. 나, 곧 이 육신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완벽한 발현이다. 누가 감히 나를 경외하지 않겠고, 누가 눈빛으로 나와 맞서겠으며, 누가 입으로 나를 대적하겠느냐? 그런 자는 반드시 내 저주와 진노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진노가 있으므로 저주함). 또 누가 감히 나에게 불충하고 불효하며, 허튼수작을 부리겠느냐? 그런 자도 반드시 나의 증오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다. 나의 공의와 위엄, 심판은 영원히 세세토록 존속할 것이다. 처음에 나는 자비와 긍휼이었지만, 이는 내 완전한 신성의 성품이 아니다. 공의와 위엄, 심판이야말로 나, 완전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다. 은혜시대에 나는 자비와 긍휼이었다. 그때 내가 자비와 긍휼을 지녔던 것은 완성해야 할 사역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더 이상 자비니 긍휼이니 할 필요가 없어졌다(앞으로도 없을 것임). 오직 공의와 위엄, 심판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정상 인성에 완전한 신성이 더해진 완전한 성품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79편> 중에서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를 벌하며, 나의 공의를 시행하고 나의 심판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말로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사람과 사물로 하여금 형벌을 내리는 내 손맛을 느끼게 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나의 모든 영광과 모든 지혜, 나의 완전함을 보게 하리니, 아무도 감히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모든 것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로써 모든 사람에게 나의 모든 존귀를 보게 하고, 나의 온전한 승리를 직접 보게 할 것이다. 내게는 모든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의 큰 능력과 권병을 볼 수 있다. 감히 범할 자가 아무도 없고, 감히 막을 자가 아무도 없다. 내게는 모든 것이 열려 있거늘 누가 감히 덮어 가리겠느냐? 그런 자는 내가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나는 천박한 자들을 반드시 중형으로 처벌할 것이고, 그러한 인간 말종을 반드시 내 시야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다. 또한 그런 자를 철장(鐵杖)으로 다스리고, 나의 권병으로 인정사정없이 심판할 것이다. 나는 사사로운 감정이 없으며, 위엄 있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가 이 점을 인식하고 깨달아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죽임을 당하거나 파멸되는 일을 피해야 할 것이다. 나의 채찍은 나를 거스르는 모든 이를 친다. 그자가 나의 행정 법령을 알든 모르든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나의 본체는 거스르는 자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자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자는 내가 반드시 칠 것이다. 지금에 와서 나를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원래 양이 아니라 사자이니 누구도 거슬러서는 안 된다. 누군가 나를 거스른다면 사정 봐주는 일 없이 당장 죽일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120편> 중에서

나는 공의롭고, 신실하며,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는 하나님이다!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 내가 곧 드러낼 것이다. 당황하지 말라. 모든 것에는 다 나의 때가 있다. 누가 진심으로 나를 원하는지, 누가 진심으로 나를 원하지 않는지, 내가 하나하나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너희는 잘 먹고, 잘 마시고, 내 앞에서 나를 가까이하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된다. 나의 일은 내가 직접 할 것이다. 속히 일을 이루려 하지 말라. 나의 사역은 단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그 속에는 나의 절차와 지혜가 있다. 그러므로 나의 지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내 손이 하는 일, 즉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를 벌하는 것을 보여 주겠다. 나는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라면 나 역시 진심으로 사랑할 것이며,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면 내 진노가 영원히 그와 함께할 것이다. 이로써 내가 바로 참하나님,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는 하나님임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보이지 말라. 나는 너의 모든 행위를 낱낱이 보고 있다. 너는 사람을 속여도 나를 속이지 못한다. 내가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데도, 나를 속이려 들다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은 내 손안에 있다. 너 자신이 총명하다고, 이해타산에 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에게 알려 주겠다. 사람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결국에는 내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사와 만물은 다 내 손안에 있거늘, 사람 하나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피하지도 숨지도 말고, 속이거나 감추지도 말라. 내 영광의 얼굴과 진노, 심판이 공개되고 드러났건만, 아직도 보지 못한 것이냐? 진심으로 나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나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즉시 심판할 것이다. 나의 긍휼은 한계에 도달해 더는 존재하지 않으니, 더 이상 외식하지도, 함부로 날뛸 생각도 하지 말라.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44편> 중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증오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들에게 관용과 긍휼을 베푸는지,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든, 얼마나 많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든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하나님의 존엄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총애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사랑과 긍휼, 관용을 베풀지만 한 번도 지나치게 사랑한 적은 없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원칙과 범위가 있다. 네가 느낀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크고 깊어도 절대 하나님을 사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긴다면, 피조물과 동등한 한 사람이나 친구, 혹은 숭상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얼굴을 감추고 너를 버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니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해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자주 볼 수 있다. “네가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든,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다면 하나님은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람을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친척이나 친구로 여기거나 단짝 대하듯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네가 느낀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이 얼마나 크든 너는 영원히 하나님을 너의 친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7> 중에서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과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신만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자신만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하나님 자신만의 신분과 지위를 뜻하며, 그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상징한다는 것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의 본질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고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바뀌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고유의 성품은 하나님의 고유의 본질이다. 그가 누구에게 사역하든 간에 그의 본질과 공의로운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원래의 성품이다. 이때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고,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지위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노하는 이유는 그의 본질에 변화가 생기거나 그의 성품에 다른 요소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사람이 공공연히 하나님께 도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하나님이 봤을 때,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자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할 때, 하나님과 겨룰 때, 계속해서 하나님의 노를 시험할 때가 바로 죄악이 범람할 때이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자연스럽게 발현하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적대 세력이 멸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진노이다. 하나님의 존엄과 거룩함이 도전을 받을 때, 정의의 힘이 저지당하고 사람이 정의를 찾아볼 수 없을 때는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낼 때이다. 하나님의 본질 때문에 땅에서 하나님과 겨루고 대적하고 맞서는 세력들은 모두 사악하고 패괴되고 정의롭지 않은 세력이며,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탄에 속하는 세력이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빛이며, 흠이 없이 거룩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패괴되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게 되면 모두 소멸될 것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이 노할 때, 사악한 세력은 저지당하고 사악한 사물은 멸망되지만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이유는 정의롭지 않고 부정적이고 사악한 사물이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거나 교란시키거나 파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정의롭고 긍정적이며 아름답고 선한 사물의 존재를 수호하고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규칙과 법칙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는 근본 원인이다. 하나님의 노는 하나님의 성품이 매우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또 진실하게 나타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 이면에 다른 속셈이나 교활함이나 음모가 없고 패괴된 인류에게 공존하는 욕망, 간사함, 악랄함, 폭력성, 사악함 등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기 전에 이미 모든 일의 본질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았고, 이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와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일에 대한 목표와 태도가 아주 명확하다. 두루뭉술하거나 맹목적이지 않고, 충동적이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으며, 원칙이 없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 또한 하나님 진노의 실제적인 면이다. 인류는 바로 하나님 진노의 이 실제적인 면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인류는 비정상적인 삶으로 추락하게 되고,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선한 모든 사물은 멸해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피조물의 생존 법칙과 규칙이 파괴되고 심지어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진 후,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계속해서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지키고 유지하였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진노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악한 사람과 사물,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은 징벌받고 통제되고 멸망된다.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은 인류를 경영하는 사역에서 그에게 대항하는 자, 사탄의 공범자 그리고 사탄의 종이 된 더러운 귀신과 악령을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끊임없이 치고 멸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해서 앞으로 이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 가운데 가장 정의로운 일이 지금까지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은 무지몽매한 온 인류를 주로 긍휼과 관용으로 대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대부분의 시간과 사건에서 가려져 있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보기 아주 어렵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기도 매우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지막 사역과 절차로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용서했을 때, 즉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풀고 경고했을 때도 사람이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은 반대로 긍휼을 거두고 사람에게 진노만을 발한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의 진노를 표현할 수 있고 사람을 징벌하고 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불로 소돔 성을 멸망시켰다. 이 방식은 하나님이 인류나 물체를 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불을 이용해 인류를 멸한 것은 그 육체뿐 아니라 영, 혼, 육 전부를 멸하여 소돔 성 사람들이 물질세계와 사람이 볼 수 없는 세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진노를 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런 발현은 하나님의 진노 본질의 일면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할 때 더 이상 그 어떤 긍휼과 자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어떤 이유도 하나님이 계속 인내하도록 설득할 수 없고, 다시 긍휼과 관용을 베풀도록 설득할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한시도 지체 없이 그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고, 그가 하려는 일을 하고 또한 깔끔하고 마음에 들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는 방식이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일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걱정하고 사랑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볼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느낄 수 없는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오직 긍휼, 관용, 사랑만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성을 멸하고 인류를 증오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인류를 멸하는 그의 노와 위엄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피조물도 상상할 수 없고, 피조물이 아닌 어떤 것도 간섭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사칭이나 모방은 더욱 불가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하나님 성품을 인류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러한 성품을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만이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공의로운 성품을 갖춘 것은 하나님이 사악함, 암흑, 패역, 인류를 패괴시키고 집어삼키는 사탄의 온갖 악행을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죄악된 행위를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고 또 하나님의 거룩하고 무결한 본질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이든 비피조물이든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긍휼히 여겼던 자일지라도, 설령 하나님이 택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의 원칙을 거슬렀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주저하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 줄 것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우선 너는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 하나님이 인류를 치거나 벌하거나 멸한 것을 포함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어떠한 불순물도 흠도 없고 거룩한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고유 성품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는 인류의 지식, 전통, 철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의 발현으로서 패괴된 인류의 그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다. 사람은 고정 관념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긍휼, 관용은 어떤 흠과 불순물 없이 거룩하다고 여길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에도 불순물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고, 심지어 하나님이 왜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지, 왜 이렇게 크게 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이도 없다. 반대로 어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패괴된 인류의 성질로 오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을 패괴된 인류가 화를 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이 마치 사람의 패괴 성품이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고 패괴된 사람이 기분 나쁜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는 것과 같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을 일종의 감정 표현으로 잘못 생각한다. …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하나님 자신의 참된 본질이지 사람이 만들거나 지어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곧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피조물과 그 어떤 관계도 관련도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으로, 영원히 피조물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피조물의 일원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 고유의 성품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며, 어느 사람을 파악하는 것도 아니다. 사물을 인지하거나 사람을 알아 가는 관점 혹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아 간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체험이나 상상에 따르면 안 된다. 따라서 자신의 체험과 상상을 하나님께 덧붙여서는 절대 안 된다. 너의 경험과 상상력이 아무리 풍부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된 것이다. 더구나 너의 상상은 사실에도, 진리에도 부합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참된 성품과 본질에 전혀 맞지 않는다. 너의 상상력으로는 영원히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 후에 천천히 체험하고 천천히 알아 가는 것이다. 너의 협력과 진리에 대한 갈급함 때문에 언젠가 하나님이 네게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이해하도록 깨우쳐 줄 것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마음을 되돌렸을 때, 그가 베푼 긍휼과 관용이 거짓이었겠느냐?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두 측면의 성품이 전환되어 나타난 것을 보며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분리되지 않고 완전하다. 그가 사람에게 진노하든, 긍휼과 관용을 베풀든 모두 그의 공의로운 성품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나며, 그는 일이 진행되는 상태에 따라 마음과 태도를 바꾼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가 로봇이나 돌부처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음을 인류에게 말해 준다. 그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 자신으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진노할 수도 있고, 그들의 태도 변화에 따라 그들의 과거를 용서할 수도 있으며,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할 수도 있고, 그들의 회개로 그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사람은 규례에 끼워 맞추기를 좋아하고, 규례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정의하기를 좋아하며, 공식(公式)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 가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생각할 줄 모르고 실질적인 견해도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물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며, 그와 동시에 서로 다른 측면의 하나님 본질이 드러난다. 바뀌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인류에게 그의 생명이 확실히 존재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을 진실로 드러냄으로써 인류에게 그의 진노와 긍휼과 자비 그리고 관용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물의 발전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드러날 수 있다. 그에게는 수사자 같은 진노도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긍휼과 관용도 있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은 그 누군가 의심하거나 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누군가 바꾸거나 곡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즉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은 만사와 만물 가운데서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만물의 구석구석에서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고, 모든 순간순간에 생생하게 시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이나 공간에 국한되어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발현되고 나타난다.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려 진노를 거두고 니느웨 성을 멸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오직 긍휼이요 자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진노는 빈말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긍휼을 거두고 크게 진노할 때, 하나님에게 인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악행으로 인해 크게 진노한다. 그의 진노에는 흠이 없다. 또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로 감동받고 사람의 회개로 마음을 돌이킨다. 그의 감동과 돌이킴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용과 긍휼은 어떤 흠도 없이 깨끗하고 순수하고 순결하며 아무 불순물도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의 관용은 곧 관용이고, 긍휼은 곧 긍휼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와 다양한 태도에 따라 진노를 드러내기도 하고 긍휼과 관용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드러냈든 그것은 모두 순결하고 직접적이며 어떤 피조물의 본질과도 다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사역의 원칙, 마음과 생각 혹은 하나님이 내린 어떤 결정이나 하나님의 그 어떤 행동에서도 흠이나 오점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결정한 이상 그렇게 행하며, 그렇게 이룬다. 그 결과는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정확하다. 그 근원에 흠도 오점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어떤 흠도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역시 피조물이 갖추지 못한 것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어떤 연구와 검증(원문: 推敲與體驗)도 통과할 수 있다.

너희는 니느웨 성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서 다른 측면의 본질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인류 중에 이러한 성품을 갖춘 사람이 있더냐? 하나님의 이런 진노를 지닌 사람이 있더냐? 하나님의 이런 긍휼과 관용을 가진 사람이 있더냐? 피조물 중에 크게 진노하여 인류를 멸하기로 결정하거나 인류에게 재앙을 내릴 수 있는 자가 있더냐? 또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고 죄를 사해 줌으로써 인류를 멸하겠다는 결정을 바꿀 자격이 있는 자가 있더냐? 창조주는 자신의 고유한 방식과 원칙으로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도 좌지우지되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의 고유한 성품으로 볼 때 그 어떤 사람도 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없고, 그를 설득하거나 그가 내린 결단을 바꾸지 못한다. 피조물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심판받는다. 그가 진노하든, 긍휼을 베풀든 그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창조주의 본질, 즉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다!

너희는 니느웨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달라진 태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유일무이’라는 단어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중 긍휼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 중 한 측면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이 두 가지 측면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라 정의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한 것으로, 사람의 거스름도, 누구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피조물과 비피조물 모두에게 없는, 하나님만의 고유한 성품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며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인 긍휼도 거룩하며,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 그 어떤 피조물도, 비피조물도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소돔을 멸하거나 니느웨를 구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참된 발현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확실히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는 그가 노할 때 사람에게 그의 거스를 수 없는 면을 드러낸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푼다. 반면 사람이 심히 패괴되고 하나님을 끝없이 적대시하고 대적할 때 하나님은 크게 노한다. 그 노는 어느 정도까지 분출될까? 그 사람의 대적과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분출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노가 사라진다. 즉, 누구든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의 몸과 생각이 외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따르고 순종하길 원하든 간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노는 끝없이 분출된다. 심지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을 때, 하나님이 크게 노할 때, 하나님의 노는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분출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에게는 영원히 더 이상의 긍휼도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의 일면이다. … 그는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과 긍휼을 베풀지만, 악한 것과 죄에 속한 것,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노하며, 그 노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가장 주된 부분이자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고, 나아가 하나님이 시종일관 나타내고 있는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이다. 즉,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한다는 것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사역에는 적정한 선이 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사람이 본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결코 사람에게 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처분을 내릴 때 당시의 환경과 배경 등 실제 상황에 근거하고, 사람의 모든 행동과 본성 본질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억울하게 대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일면이다. 예를 들어, 하와가 뱀에게 유혹되어 선악과를 먹었을 때 당시 여호와는 하와를 질책하며 “먹지 말라고 했거늘 왜 먹었느냐?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뱀의 말이 너를 유혹하는 것임을 알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호와는 하와를 이렇게 질책하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사람의 본능이 어떤 것인지, 사람의 본능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 사람이 자신을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지,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등을 전부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사람에게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 대해 혐오하거나 반감하는 태도를 보일 때, 혹은 그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말을 할 때, 하나님은 사람의 내적 상태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의 내면과 본질을 감찰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늘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께는 신성뿐이야.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셔. 하나님은 사람의 어려움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과 입장을 바꿔 생각하지도 않으시지.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면 하나님은 그를 징벌하실 거야.’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역, 사람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이는 단단히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근거하며, 각각의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준다. 하나님은 공의롭다. 언젠가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깊이 인정하게 될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므로 끝까지 따르기만 하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공의로우신데, 끝까지 따른 사람을 어떻게 뿌리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공의로운 성품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한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나의 요구에는 다 적합한 기준이 있어서 내가 무엇을 요구하든 사람은 다 그것을 충족시켜야 한다. 나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 경력이나 관록을 갖고 있는지 보지 않고, 오직 네가 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인지, 또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인지만 본다. 너에게 진리가 없고 오히려 내 이름을 모욕하며 나의 도에 따라 행하지 않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따르기만 한다면, 그때는 내가 너의 악을 이유로 너를 치고 징벌할 것이다. 그때 네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오늘 내가 한 말을 다 지킨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칭찬할 것이다. 너는 네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르면서 고난을 받고 비바람 속에서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며 환난을 함께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지는 못했다. 너는 날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거나 헌신하면 된다고 생각할 뿐,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또 너는 “어쨌든 저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걸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헌신했는데,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은 꼭 저를 기억하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공의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고, 사람의 뜻이 전혀 없으며, 육적인 것도, 사람처럼 거래하는 것도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와 하나님의 도를 지키지 않는 자는 모두 징벌을 받아야 한다.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는 지금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으니 나중에 제게 축복을 조금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묻겠다. “너는 내가 한 말을 지켰느냐?” 네가 말한 공의는 거래를 전제로 한 것이다. 너는 내가 공의로우니 그 누구도 차별할 리가 없으며,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고 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끝까지 따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나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다.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나에게 완전히 얻어지는 사람이고, 또 나에게 정복된 후 진리를 구해 온전케 되는 사람이다. 너는 몇 가지를 해냈느냐? 끝까지 따랐다면 그 외의 것은 어떠냐? 너는 내 말을 준행했느냐? 너는 내가 내놓은 다섯 가지 요구 가운데 하나만 충족했을 뿐, 그 외의 네 가지는 충족시킬 생각도 하지 않는다. 너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길을 찾아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추구한다. 나의 공의로운 성품은 너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형벌이자 심판이고 공의로운 응징이다. 악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공의로운 징벌이다. 나의 도를 준행하지 않는 사람은 설령 끝까지 나를 따른다고 해도 반드시 징벌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다. 이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 사람을 징벌할 때가 되면 사람은 매우 당혹해할 것이다. 하나님을 따를 때 그의 도를 준행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그동안 고난만 조금 받았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는 않았으니 할 말이 없어. 그냥 형벌을 받자!’라고 할 것이다. 또 마음속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 것이다. ‘아무튼 나는 끝까지 따랐으니 형벌을 받더라도 너무 무거운 형벌은 받지 않겠지. 형벌을 받고 나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받아 주실 거야. 나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아. 그러니 나를 계속 이렇게 대하지는 않으실 거야. 어쨌든 난 멸망당할 사람들과는 다르거든. 멸망당할 사람은 무거운 형벌을 받겠지만 나는 좀 가벼운 형벌을 받을 거야.’ 공의 성품은 네가 말한 것과 다르다. 죄를 순순히 인정한다고 해서 가볍게 처벌하지는 않는다. 공의란 바로 거룩함이자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이다. 더러운 자와 변화되지 않은 자는 모두 하나님이 싫어하는 대상이다. 공의로운 성품은 법률이 아니라 행정 법령, 하나님나라의 행정 법령이다. 이런 행정 법령은 진리와 변화가 없는 모든 자에게 있어 공의로운 징벌이며, 돌이킬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이는 사람이 각기 부류대로 나뉠 때, 상선벌악(賞善罰惡)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인류의 종착지가 드러나는 때이자 구원 사역이 끝나는 때이므로 그 후로는 더 이상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지 않고 악을 행한 모든 사람을 응징할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반드시 완벽하게 인식해야 하며,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해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반드시 진실한 체험과 하나님의 깨우침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관념에 따라 상선벌악한다면,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으며,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상과 축복을 받아야 한다. 악인만 아니면 당연히 모두 상을 받는 것이라야 하나님의 공의인 듯하다. 하지만 이는 사람의 관념 아니겠느냐? 만약 그들이 상을 받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말하겠느냐? 예를 들어 보자.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라고 말하고, 노아에게 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노아가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 방주를 완성한 후에 큰비가 밤낮으로 40일 동안 내려 모든 땅이 홍수에 잠겼고, 하나님은 방주를 탄 노아의 가족 8명을 제외한 그 시대의 사람들을 모두 멸하였다.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나님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얼마나 패괴되었든 하나님이 사람을 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사랑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느냐? 다소 황당하지 않으냐? 하나님은 멸망당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남은 사람과 구원받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베드로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할 수 있었기에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랑했는데, 하나님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고 저주한다.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있지만, 미움도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근거해 하나님을 규정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 즉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진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인식할 때는 반드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질을 근거로 인식해야 한다. 절대 하나님이 행하거나 처리한 일의 표면적 현상을 근거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인류는 사탄에게 너무 깊이 패괴되어 패괴된 인류의 본성 본질을 전혀 모른다. 그리고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 앞에 과연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 공의 성품에 따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욥을 보아라. 그는 의인이라 하나님은 그를 축복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사탄이 여호와와 내기를 하며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9~11)라고 하자,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 1:12)라고 하였다. 사탄은 바로 욥에게 가 그를 공격하고 시험하였고, 욥은 시련이 닥쳐 모든 것을 빼앗겼다.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었고, 온몸에는 종기가 났다. 욥의 시련에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있느냐? 너희는 분명하게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 네가 의인이라도 하나님은 너에게 시련을 주어 네가 하나님을 증거하게 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은 성품이 공의롭고 어느 누구든 공평하게 대한다. 의인은 시련을 이겨 낼 수 있으니 시련을 줄 필요가 없고,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시련을 줄 권리가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의 발로이다. 마지막에 욥은 시련을 겪은 후 여호와를 증거했고, 여호와는 그에게 전보다 훨씬 더 많고, 더 좋은 축복을 곱절로 내렸다. 또한 그의 앞에 나타나 바람 속에서 말씀하여 욥은 마치 서로 마주 보듯 여호와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준 축복이고,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럼 욥이 시련을 다 받은 후 사탄 앞에서 여호와를 증거하고 사탄에게 치욕을 준 것을 여호와가 보고도 욥을 알은체하지 않고 돌아서서 떠나 욥이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느냐? 욥이 시련을 받은 뒤 축복을 받았든 못 받았든, 여호와가 그의 앞에 나타났든 안 나타났든 거기에는 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다. 욥 앞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요, 나타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 피조물인 네가 무슨 근거로 하나님에게 요구하느냐? 사람은 하나님에게 요구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며,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다. 공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 고생한 만큼 분배하는 것,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것,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것은 공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면 이것은 공의일까? 사실 이것 역시 공의이다. 어째서 그것을 공의라고 하겠느냐? 공의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때 하나님이 욥을 멸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패괴되었든 안 되었든, 사람의 패괴가 깊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이 사람을 멸할 때 사람에게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하느냐? 무슨 근거로 사람을 멸하는지 설명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그가 정한 규칙을 사람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다. 패괴된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든 다 합당하고, 다 하나님의 안배다. 하나님이 네가 눈에 거슬려 넌 증거를 다 했으니 쓸모없어졌다며 널 멸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이것 역시 공의다. 지금은 네가 사실상 알기 어렵겠지만, 이치는 이해해야 한다. 너희가 말해 봐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공의입니다.) 사탄을 남겨 둔다면? 뭐라 말하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하는 것은 모두 공의롭다.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당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당신의 아름다운 뜻과 공의가 있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와 행사를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기간에 왜 사탄을 멸하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사탄이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는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패괴시켰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인류를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지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똑똑히 보고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극악무도함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그때 사탄을 멸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줄 것이다. 언제 사탄을 멸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공의롭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관념을 가진 일에 있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태도이다. 베드로는 어떤 일들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운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측량할 수는 없으며, 사람이 측량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버리는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악인들이 받는 징벌 또한 내 공의로운 성품의 증거이자, 나아가 내 진노의 증거가 된다. 재난이 닥칠 때, 나를 대적한 모든 자는 기근에 빠지고 전염병에 걸려 슬피 울 것이며, 오랜 세월 나를 따랐지만 온갖 악을 저지른 자들 역시 죄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 또한 마찬가지로 천만년 이래 보기 드문 재난 속에 떨어져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따르면서 나에게 일편단심 충성한 사람들은 오히려 기쁘게 손뼉 치며 나의 큰 능력을 찬양할 것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한 마음으로 내가 인간 세상에 한 번도 베푼 적 없는 즐거움 속에서 살 것이다. 나는 사람의 선행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의 악행을 극도로 증오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류를 오늘날까지 이끌어 오면서 나와 한마음 한뜻인 사람들을 얻기를 기대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와 한마음 한뜻이 아니었던 자들을 잊지 않고 항상 마음속으로 미워하며 그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그걸 보며 통쾌해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마침내 나의 날이 왔으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마지막 사역은 사람을 징벌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종착지를 안배하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모든 사람이 나의 행사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행한 모든 것이 옳고,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내 성품의 발현임을 보게 할 것이다. 인류를 창조한 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고 대자연이 한 것은 더욱 아니라 만물 가운데 있는 모든 생령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내’가 한 것이다. 나의 존재를 잃어버리면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고 재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누구도 다시는 아름다운 해와 달과 푸르른 세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음산하고 차디찬 암흑의 밤과 저항할 수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인류의 유일한 구원(원문: 救贖)이자 희망이며, 나아가 전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의지처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라도 나를 잃으면 인류는 즉시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오직 멸망의 재앙을 당하고 온갖 유령에게 짓밟힐 것이다. 나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사역을 행했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사람들이 조금의 선행으로 나에게 보답하는 것뿐이다. 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적을지라도 나는 인간 세상에서의 여정을 끝내고 다음 단계에 전개할 사역을 행할 것이다. 내가 사람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바쁘게 일한 결과가 이미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아주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선행이다. 요컨대, 나는 너희가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하길 바란다. 그래야만 나를 만족게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모두 엄습할 재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재난은 내가 일으키며 또 당연히 내가 지배한다. 너희가 내 앞에서 선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재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너는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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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의 공의 성품

하나님은 크게 긍휼 베푸시고 크게 노하시니라

하나님의 성품은 긍휼과 자비요 공의와 위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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