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 후
제가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님은 저희 5남매를 키우시기 위해 홀로 두 사람의 몫을 일하셨고, 매일 밤낮없이 바쁘게 지내셨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모두 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팠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어머님께 꼭 효도해서 삶에 걱정이 없도록 해드리겠다고 조용히 맹세했습니다.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 드리고자 하교 후 저는 집안일을 도왔습니다. 어머님은 속상해하시며 저에게 집안일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보이시는데, 제가 조금 도와드리면 조금 편해지시지 않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조금 힘든 건 괜찮아. 나중에 네가 자란 후에 효도해 주면, 내가 복을 누리지 않겠니? 네 사촌 언니를 봐. 어머니를 일찍 여위어 아버지가 혼자 키우셨는데, 결혼 후 그 아버지가 먹고, 입고,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챙겨주니 그게 행복 아니겠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은 사촌 언니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까마귀도 부모의 은혜를 갚는다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나를 키우셨는데 내가 아버지께 효도하지 않으면 그건 짐승만도 못한 것 아니겠니?” 저는 속으로 어른이 되면 사촌 언니처럼 어머니께 효도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 후 저는 변변한 직업도 없고 소득도 없었지만, 최대한 어머니께 약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해드렸고, 종종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 돌봐드렸습니다. 주변 이웃들은 모두 칭찬하며 “저 집 딸이 멀리서 살아도 어머니는 제일 자주 돌보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뿌듯했고, 자녀로서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여기며 이렇게 해야만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99년, 저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간절한 마음을 깨달았고, 복음을 전하는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2003년 말, 저는 복음을 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경찰의 추적과 감시를 피하려고 저는 집을 떠나 일하며 세 들어 살았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경찰이 6개월 동안 마을에서 저를 세 번이나 뒷조사하며, 제가 어디에 세 들어 살고 있는지 물었다고 했습니다. 그 후 저는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전처럼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 돌봐드릴 수 없어 속으로 어머님께 큰 빚을 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아프시고, 며느리의 학대를 받으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가슴이 미어질 듯이 괴로웠습니다. 심지어 애초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체포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집을 떠날 일도 없었을 거야. 그러면 어머니 곁에서 더 많이 돌봐드릴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제 내적 상태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의 책임이자 사명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며 본분 이행한 것을 후회한다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예배드릴 때 저는 제 내적 상태를 리더에게 말했고, 리더는 저에게 하나님 말씀 한 단락을 찾아 주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정’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도 피하지 않고 전 인류의 마음속에 숨겨진 비밀을 드러냈다. 왜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느냐? 그것이 양심의 기준보다 높단 말이냐? 양심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느냐? 감정이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느냐? 하나님의 눈에 감정은 하나님의 원수다. 설마 하나님이 이를 명확히 말씀하지 않았단 말이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이 전 우주를 향해 한 말씀’의 비밀 해석ㆍ제28편>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제가 확실히 감정적으로 살았고, 감정에 눈이 멀어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했음을 인식했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앞으로 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는 것으로 정의로운 일이자 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본분입니다. 예로부터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자 즉시 어망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여기까지 인식하자 저는 믿음이 생겼고,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고자 다짐하며 다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2015년 가을, 한 자매는 저에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저는 가슴이 미어지듯이 괴로웠고, 억지로 눈물을 참았습니다. 속으로 ‘어머니가 왜 이렇게 가신 거지? 내가 어머니 곁에 없어서 어머니가 날 그리워하시고, 걱정하시다가 우울해서 병에 걸리신 것 아냐? 공산당의 핍박만 아니었어도 내가 어머니 곁에서 더 돌봐드리고, 노년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보내시게 할 수 있었을 거고, 그러면 몇 년이라도 더 사실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할수록 괴로웠고, 자매의 집을 나서자,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저를 이렇게 키우셨는데, 저는 어머니가 연로하시고 아프셨을 때 곁에서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했고, 심지어 세상을 떠나실 때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떠올린 저는 목 놓아 통곡했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저는 눈물을 닦고 자전거를 타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가는 길 내내 어머니가 힘들게 저를 키우셨던 장면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치자, 어머니께 큰 빚을 진 것만 같았습니다. 어머니께 효도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고,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이 저를 불효자고,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접대 가정으로 돌아온 저는 괴로운 마음에 밥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접대 가정의 자매가 저를 위로하며 “모든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어요. 한 사람이 언제 태어나고 죽을지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운명에 달려 있으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하나님께 더 많이 기도드리도록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저는 그렇게 힘들거나 괴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본분을 이행할 때면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고, 저는 하나님께 제가 이런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길 바라며 기도드렸습니다. 기도드린 후 하나님의 말씀 한 단락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그가 부여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란 생명체를 세상에 데려왔다. 그리하여 사람은 부모와 가족이 생기면서 외로움에서 벗어났다. 사람은 이 물질적인 세상을 본 후부터 하나님이 정한 것에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생명체 하나하나를 밑받침해 주어 ‘어른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살아가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부모의 길러 준 은혜라고, 사람의 생명의 본능을 밑거름으로 하여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가 자신의 ‘생명’을 부여했는지,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며, 생명의 본능이 어떻게 기적을 일구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은 사람 생명의 근원이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전 깨달았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사람의 생명 또한 하나님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머니께서 저를 키우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 딸이 다섯 살 때 불치병에 걸려 너무 비통하고 제 장기를 딸에게 주고 싶었는데 의사가 “소용없어요. 병은 고쳐도 목숨은 못 구합니다. 죽을병에 걸려서 누구도 살릴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운명으로 정해 놓으셨으며,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제 어머니가 언제 세상을 떠나실지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께서 운명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가 저를 그리워하고 걱정하시다가 우울증으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주재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고생하시며 키우셨는데, 어머니가 나이 들고 아프신데도 제가 곁에서 돌봐드릴 수 없자 어머니께 빚진 기분에 본분을 이행할 때도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사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제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에 하나님께 빚진 기분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계속 어머니께 빚진 기분을 느끼며 심지어 본분 이행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께서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와 관련하여 교제하신 말씀을 보고, 제 생각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너를 낳은 것에 대해 살펴보자.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이냐, 아니면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이냐? 누가 누구를 택했느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아니다.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도 아니다. 근원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이 일은 사람이 이해하기 쉬우니 이 주제는 일단 제쳐 두고 이야기하지 않겠다. 네 관점에서 보면 너는 수동적으로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그들에 의해 태어났다. 부모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주관적으로 너를 낳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고 본다면 네가 태어난 일에서 주도권은 부모에게 있다. 그들이 너를 낳기로 했으니 그들에게 주도권이 있다. 너는 그들에게서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태어났다. 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니 부모가 주도권을 가지고 너를 낳기로 선택했다면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고 키울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너를 공부시키든, 먹이고 입히며 돈을 쓰든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이다. 하지만 너는 양육받는 동안 늘 수동적인 입장이다. 네게는 선택권이 없고 그들에게 양육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는 어리고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손에 수동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너는 부모가 키우는 대로 자라난다. 부모가 네게 좋은 것을 먹이면 좋은 것을 먹고, 부모가 네게 제공하는 생활 환경이 고달프고 빈곤하면 너는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양육받는 동안 너는 수동적이고, 부모는 책임을 다한다. 화분의 꽃을 키우기로 했으면 비료와 물을 주고 햇빛을 쐬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너를 극진하게 보살피든, 정성껏 보호하든, 결국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키우는 목적이 무엇이든 이것은 그들의 책임이다. 그들이 너를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이렇게 본다면 부모가 네게 하는 것이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부모가 네게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은혜라고 할 수 없다. 화초를 하나 키워도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며 책임을 다하는데 그것도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은혜라 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작은 화초는 밖에서 더 잘 자란다. 땅에 심으면 햇볕을 쬐고 바람과 비를 맞아 더 튼튼하게 자라지만, 집에서 화분에 옮겨 심어 키우면 밖에서 자라는 것만 못하다. 어디서든 못 살겠느냐?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이 있다. 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이 살아가도록,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준수하는 법칙을 준수하도록 책임진다. 한 사람으로서 너는 부모가 양육하는 환경에서 생활할 뿐이니 그 환경에서 성장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고, 미시적으로 보면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찌 되었든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자 책임이지 은혜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은혜라고 할 수 없다면 이것은 네가 누려 마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는 네가 누려야 할 하나의 권리이다. 너는 마땅히 양육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미성년일 때는 양육받는 것이 네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받은 것은 단지 너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지 부모의 은혜나 은정이 아니다. …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낳기로 했다면 너를 양육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들이 너를 성인으로 키우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네가 그들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너는 갚을 필요가 없다. 네가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밝혀 준다. 너는 부모의 은혜를 이유로 그들에게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네가 책임을 다할 여건이 된다면 책임을 다하고, 그들에게 의무를 다할 환경이나 객관적인 여건이 안 된다면 깊이 고민하지 말고 부모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전 깨달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온 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입니다. 제가 이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하나님께서 운명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키우시며 얼마나 고생하셨든 그건 어머니의 책임이므로 이를 은혜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가 주도권을 가지고 너를 낳기로 선택했다면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고 키울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너를 공부시키든, 먹이고 입히며 돈을 쓰든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이다.” 하지만 저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일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하셨으며, 덜 먹고 절약하여 저를 학교에 보내셨고, 힘겹게 고생하시며 저를 성인으로 키우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세심한 보호와 보살핌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저도 없었을 것으로 여겨 어머니의 보살핌을 은혜로 삼으며 항상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 순간 저는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리지 않아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스스로 불효자라고 생각했고, 어머니께 빚졌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으며 본분을 이행할 마음도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계속 어머니를 향한 빚진 마음으로 살며 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양심이 없고 인성이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봤었다고 하더라도 어머니의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저를 효녀라고 말하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중국 전통문화의 영향으로 중국인의 전통 관념에는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는 불효자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이런 것을 주입받았으며, 거의 모든 가정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학교와 사회에서도 이렇게 교육한다. 사람의 머릿속에 이런 것이 주입되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불효자야. 사회 여론의 질타를 받을 거고, 양심 없는 사람이 될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 관점이 옳으냐? 하나님이 선포한 그 많은 진리를 사람들은 모두 보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했느냐? 하나님을 믿으며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진리 가운데 그런 내용이 있느냐? 그런 내용은 없다. 하나님은 몇몇 원칙들만 교제했을 뿐이다. 하나님은 말씀에서 어떤 원칙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요구하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이 또한 사람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사람으로, 우리도 마땅히 혐오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 사탄은 그런 전통문화와 도덕관념으로 너의 사상, 생각, 마음과 영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너는 이미 사탄의 그런 것들에 점유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려고 하면 너의 내면에 있는 그런 것들이 작용해 방해함으로써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에 맞서게 한다. 너는 전통문화의 사슬에서 벗어나려 해도 역부족이다. 너는 발버둥 치다 얼마 못 가 타협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전통적 도덕관념이 올바르고 진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거나 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고, 구원받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아직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그 사람들에게 기대 생활해야 출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여론의 질타를 견디지 못해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전통적 도덕관념과 사탄의 권세에 항복할지언정, 하나님께 죄를 지을지언정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냐?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지 않으냐?』(<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알아야 진정으로 돌이킬 수 있다> 중에서), 『이방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 또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말도 있다. 이 얼마나 수준 높고 대범하고 품위 있는 말이냐! 사실, 그들이 말하는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라는 현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물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하나님이 각 생물에게 정해 준 법칙일 뿐이다. 사람을 포함한 각종 생물은 모두 이 법칙을 지키고 있다. 생물마다 그 법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모든 생물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을 한층 더 입증하는 것이다. 어떤 생물도 이 법칙을 깨거나 뛰어넘을 수 없다. …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 바로 생물계가 이 법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각종 생물은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다. 새끼가 태어나면 성체가 될 때까지 암컷이나 수컷의 보호와 보살핌 속에서 자란다. 각종 생물도 자기 새끼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극진하게 돌보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이 자칭 고등 동물이라고 하면서 이 법칙을 지키지 않고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동물보다 못하다. 그러니 부모가 너를 키우면서 얼마나 보살피고 책임을 졌든 그들은 그저 피조된 인류의 능력 범위 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들의 본능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 ‘자녀로 노후 대비’와 같은 사상과 관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효도하지 않는 것은 대역무도한 일로 짐승만도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밖으로 도망 다니느라 집에서 어머니를 돌볼 수 없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어머니께 빚진 기분이 들었으며 다른 사람이 저를 양심 없는 불효녀라고 할 것이 두려워 속으로 너무 고통스러웠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자 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전통문화의 사상에 물들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피조물로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저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었는데, 공산당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며 복음을 전파해서 생긴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정말 시비를 전도했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렇게 수년간 하나님은 항상 절 돌봐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저에게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했으며, 심지어는 본분 이행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말 양심이 없습니다! 이제야 저는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 ‘자녀로 노후 대비’와 같은 사상 관점이 그릇된 것이며, 이는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방식 중 하나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더는 사탄의 사상 관점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싶습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또 보았습니다. 『우선, 많은 사람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한 측면으로는 객관적인 전체적 환경 때문이다.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 하고, 부모 곁을 지키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원해서 부모를 떠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한 측면의 객관적 원인이다. 다른 측면을 보면, 주관적으로 말해서 네가 밖에 나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부모를 떠나 네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여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서 부모를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에 남아 함께하면서 그들을 돌볼 수 없었던 것이다. 너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책임을 회피하려고 나온 것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인 네가 그들을 떠나 밖에 나와서 본분을 이행해야만 했던 것은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 마음속에는 그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있다.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객관적인 환경이 허락했다면, 그들 곁을 지키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다면 너는 그들 곁에서 항상 그들의 생활을 돌보고 네 책임을 다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환경 때문에 너는 반드시 그들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을 지킬 수 없었다. 네가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성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집을 떠난 것이 그들에게 효도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는 불효이고 인성이 없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키워 줬는데 너는 머리가 커지자마자 나가서 혼자 살지 못해 안달이고, 부모를 보기 싫어하고, 부모한테 어려운 점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으려 하고, 상관할 여건이 돼도 상관하지 않으면서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효이다. 하지만 지금이 이런 상황이냐?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자 자기가 살던 현(縣)을 떠나고, 시(市)를 떠나고, 성(省)을 떠나고, 심지어 나라를 떠났다. 이미 고향을 멀리 떠난 데다가 갖가지 이유로 집에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가끔 고향에서 온 사람을 통해 부모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 전해 들으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안심한다. 사실 너는 불효하는 것이 아니다. 인성을 상실한 수준에 이르러 부모마저 신경 쓰지 않으려 들고 책임을 안 지려는 것이 아니다. 갖가지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이렇게 하기를 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불효가 아니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중에서), 『자녀로서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깨달아야 한다. 너는 평생에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 일은 창조주에게서 받은,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이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며 갚는 것은 네 평생의 사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보답하며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여건이 되면 효도하고, 책임을 다하되 여건이 안 되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큰 잘못은 아니다. 단지 양심과 인간의 도의 및 관념에 조금 위배될 뿐 최소한 진리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정죄하지도 않는다. 네가 진리를 깨닫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자녀로서 어떻게 부모를 대해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채권자가 아닙니다. 제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피조물로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허락한다면, 어머니 곁에서 보살펴드리고 효도하며 자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지만,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걸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핍박과 체포로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돌볼 수 없으니 이를 불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며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깨닫자 더는 마음이 통제받지 않게 되었고, 본분에 마음을 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폭로로 저는 자신의 그릇된 관점에 대해 약간의 인식이 생겼고, 어떻게 어머니를 대하는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인지 깨달았으며 더는 어머니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혀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