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7)
그동안 주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화제를 교제했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할지에 대해서 이전에 우리가 정리한 실행 원칙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무엇이었느냐? (첫째는 내려놓기, 둘째는 몰입하기였습니다.) 첫째는 내려놓기, 둘째는 몰입하기다. 아직 ‘내려놓기’라는 화제를 다 교제하지 않았다. ‘내려놓기’의 첫 번째 내용은 무엇이냐?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방면에서는 주요하게 무엇을 교제했느냐? 주로 사람에게 어떠한 부정적 정서가 있는지, 다시 말해 일상생활과 인생길에서 자주 사람과 함께하는 부정적 정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을지를 교제하고 폭로했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는 사람에게서 일종의 정서로 드러나는데, 사실상 이런 정서는 사람의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으로 인해 유발된 것이다. 사람의 각종 생각과 관점이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유발하면 사람이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고 나타낸다. 그러면 지금까지 교제한 부정적 정서의 문제에서, 사람의 각종 태도에서, 사람이 고수하는 각종 생각과 관점에서 너희는 무슨 문제를 발견했느냐? 다시 말해, 사람의 갖가지 부정적 정서라는 표면적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사상 저변의 본질적인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누군가가 부정적 정서를 드러낼 때 깊이 파 보고 자세히 분석해 보면 부정적 정서 안에 사람, 일, 사물에 대한 각종 올바르지 않은 견해, 관점, 태도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의 부정적 정서에서 그 사람이 여러 부류의 사람, 일, 사물을 처리하는 방법과 해결하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부정적 정서를 분석한 몇 차례의 교제를 통해 볼 때, 사람의 갖가지 부정적 정서 아래에 여러 종류의 잘못되고,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편집적이고,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생각과 관점이 숨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갖가지 부정적 정서 아래에 여러 종류의 잘못되고,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편집적이고,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생각과 관점이 숨겨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명확히 알아들었느냐? (명확히 알아들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교제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가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일시적이거나 장기적인 부정적 정서에 개의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정서 아래에 숨겨져 있는 각종 생각과 관점을 분석하면 사람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느냐? 사람의 갖가지 부정적 정서 아래에는 여러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이 숨겨져 있다. 그 말인즉슨, 어떤 사람이 부정적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그저 일종의 정서이며, 그는 정서를 분출할 수도, 의기소침한 말을 할 수도, 죽음에 속하는 것들을 퍼뜨릴 수도, 어느 정도 부정적인 작용을 하거나 상대적으로 과격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들은 이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정서의 표출과 사람의 과격한 행동 뒤에는 사실 각양각색의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이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동안 교제한 것은 부정적 정서지만, 사실상 사람의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폭로하고 해부함으로써 사람의 다양한 부정적 생각과 관점을 분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생각과 관점을 폭로해야 하느냐? 이러한 부정적 생각과 관점이 단지 사람의 정서에만 영향을 미치느냐? 단지 그것이 사람에게 부정적 정서를 생기게 하기 때문이겠느냐? 아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과 관점은 사람의 정서와 추구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지만, 사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정서 혹은 표면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부정적 정서를 분석하는 간단하고도 편리한 방식으로 사람의 갖가지 부정적이고 안 좋고 부당한 생각과 관점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관점, 부정적 정서를 폭로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 생활에서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각도며 입장과 관계되고, 사람의 생존 목표며 방향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람의 인생관에 관계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 부정적 정서를 위와 같이 폭로했다. 좌우간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교제하는 주목적은 사람의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생각과 관점을 폭로, 분석, 해결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을 폭로해서 사람의 사상 안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올바르지 않은 견해, 태도, 관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한다. 그리하여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이 사람에게 일으키는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고, 나아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간파하게 한 다음, 올바른 방법을 구하여 그것을 내려놓고 완전히 버릴 수 있게 한다. 최종적으로는 올바른 생각과 관점으로 생활이나 인생에서 임하는 각종 사람, 일, 사물을 마주 보거나 대하고, 처리하고, 해결하게 한다. 요컨대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결실이 무엇이냐?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에게 존재하는 갖가지 부정적 생각을 명확히 인식하고 간파하게 하고, 그런 다음에는 생활과 인생길에서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부단히 바꾸고 바로잡게 하며, 진리에 부합하는 올바른 생각과 관점을 구하고 받아들이거나 거기에 순종하게 하고, 그리하여 올바른 생각과 관점으로 생활하고 처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목적이다. 너희 생각에 이것이 맞느냐? (맞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사람의 부정적 정서를 폭로하지만, 사실은 여러 가지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을 폭로함으로써 갖가지 사람, 일, 사물이 임했을 때 사람이 올바른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서 마주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하고, 최종적으로는 진리 원칙에 따라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으라고 교제하는 것도 결국에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대주제로 귀결되니, 주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 사이에는 별 관계가 없잖아. 부정적 정서는 사람의 일시적 기분 또는 일시적 사상, 일시적 생각일 뿐이야.’ 만약 일시적인 생각이나 잠시 드는 기분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교제하는 부정적 정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교제하는 부정적 정서는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적 문제, 본질적 문제와 관계되며, 사람이 삶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올바른 관점, 입장, 원칙과 관계되고, 또한 사람의 인생관 및 생존 방식과 관계된다. 이것을 교제하는 최종 목적은 삶에서 갖가지 일이 임했을 때 사람이 천연적인 방식과 혈기의 방식으로 처리하거나 패괴 성품에 따라 처리하지 않게 하고, 물론 이 사회가 사람에게 주입한 각종 사탄 철학으로도 처리하지 않게 하며, 그 대신 올바른 방식으로, 사람이 최소한 갖춰야 할 양심과 이성으로 생활에서 임하는 문제를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하에 하나님 말씀에 따라, 진리에 따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각종 원칙에 따라 생활과 생존이라는 범주 안에서 관련되고 접촉하는 각종 사람, 일, 사물을 대하게 하는 것이다.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교제하고 분석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부정적 정서를 교제하시고 분석하시는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부정적 정서 안의 각종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분별하고 바로잡으며, 그럼으로써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고 양심과 이성에 따라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삶에서 임하는 각종 사람, 일, 사물을 올바르게 대하고 처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생관이 점차 바뀌고, 진리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며, 정상 인성으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교제하고 분석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각종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을 교제하고 폭로하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문제에 부닥쳤을 때 사람이 늘 잘못된 입장과 각도에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으로 그러한 일들을 마주하고, 처리하고, 해결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이 상당 부분 부정적 생각에 구애되고, 결박당하고, 통제당하게 되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사람에게 알려 준 원칙과 방식에 근거해 생활 속의 각종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 물론 사람에게 각종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올바른 생각과 관점이 생기고 올바른 각도와 입장이 생기면, 어떠한 사람, 일, 사물이 임했을 때 올바른 각도 또는 최소한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범위 내에서 그것을 처리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럼으로써 사람이 혈기의 방식이나 패괴 성품으로 각종 문제를 처리해 불필요한 트러블을 초래하거나 원치 않았던 결과를 맞이하는 것을 막아 준다. 예를 들어, 앞날, 병고, 가족, 결혼, 감정, 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자기 재능,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 등 여러 문제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듣고 배운 것 또는 영향받은 것, 물든 것, 그리고 자기가 정리한 경험 혹은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를 대한다. 사람마다 각기 대하는 방식이 다르고, 저마다 일을 대할 때 중점을 두는 태도가 따로 있다. 물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사물을 대하는 저마다의 방식에도 공통점은 있다. 바로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생각과 관점 혹은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편집적인 생각과 관점이 이를 주도하고 지배하며, 최종 목적이 하나같이 자기 명리와 이익이라는 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생각과 관점은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하고 가르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탄이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퍼뜨리고, 제창하고, 영향을 준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의 인도하에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과 관점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확보한다. 사람은 어떻게든 사회와 인간 세상에서 온 갖가지 생각과 관점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 이익의 최대화를 도모해 이익을 얻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고, 양심과 이성을 저버려 얻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정적 정서와 부정적 생각과 관점의 인도하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 결과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용하고, 속이고, 모해하고, 싸우는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갖가지 부정적 생각과 관점의 인도 혹은 결박과 이익의 유혹하에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각종 부정적 생각의 인도하에, 이익의 유혹하에, 사람은 절대 진정으로 진리를 얻거나 하나님의 요구대로 진리를 실행하는 실제에 진입할 수 없으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한다는 원칙에 이르기 아주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는 동시에 사실상 사람에게 갖가지 부정적 생각과 관점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존재하는 각종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만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을 수 있다. 물론, 사람이 온갖 부정적 생각과 관점을 내려놓는 동시에 사람의 갖가지 부정적 정서도 기본적으로 해결된다. 우리가 앞에서 교제했던 의기소침한 정서를 예로 들겠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사람에게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것이 자기 팔자가 안 좋다는 생각이라면, 팔자가 안 좋다는 생각과 관점을 갖게 될 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다. 게다가 주관적 의식 속에서 점점 더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느낀다. 무슨 일에 부닥쳐 사소한 난관과 곤란만 있어도 ‘어휴, 팔자가 안 좋아.’라고 생각하며 책임을 좋지 않은 팔자 탓으로 돌린다. 그 결과 자포자기와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 속에서 살게 된다. 만약 사람이 삶에 임하는 각종 난관을 올바르게 마주할 수 있다면, 혹은 갖가지 부정적 생각과 관점이 생겼을 때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마주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사람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보고,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주재를 믿는다면, 사람은 삶에 임하는 뜻대로 안 되고, 순조롭지 않고, 평탄하지 못하고, 곤란한 일들을 올바르게 대하거나 이러한 난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팔자가 나쁘다는 생각과 관점이 바뀌지 않겠느냐? 생각과 관점이 바뀌는 동시에 사람에게 이러한 문제를 마주하는 올바른 입장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올바른 입장에서 마주하면 사람의 의기소침한 정서가 점차 개선된다. 심각한 수준에서 중간 수준이 되고, 중간 수준에서 차츰차츰 가벼운 수준으로 넘어가고, 가벼운 수준이었다가 점점 사라져 사람에게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면 사람의 의기소침한 정서가 없어지는 것이다. 없어지는 이유가 무엇이냐? ‘나는 팔자가 안 좋다’는 그의 오랜 생각과 관점이 바뀌고 바로잡혀 더는 운명을 의기소침하게 대하지 않고, 적극적이며 낙관적인 태도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방식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운명의 본질이라는 각도에서 문제를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과 똑같은 문제가 다시 임했을 때 그는 더는 팔자가 나쁘다는 생각과 관점으로 자기 운명을 대하지 않고, 더는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 채로 자기에게 임한 문제에 맞서고 대항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모른 체하거나 바로 대응하지 않고 시간을 두는 방식으로 대할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진리 추구가 점점 깊어지고 그의 분량이 점점 커지면서, 그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각도와 입장이 점점 올바르게 되면서, 의기소침한 정서가 그에게서 사라질 뿐만 아니라 그는 더 적극적이고 낙관적이 된다. 그리고 그가 사람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간파하고 명확히 인식하고, 이러한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고 대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는 마음가짐 또는 실제를 가지게 되면, 그는 의기소침한 정서를 철저하게 내려놓게 된다. 부정적인 정서를 내려놓는 과정은 바로 이러하다. 이는 사람의 생활과 관계된 중요한 화제다. 아무튼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내려져 있으면, 혹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면, 그것은 결코 단순한 부정적 정서가 아니다. 이 일 또는 어떠한 일에 대한 너의 그릇된 생각과 관점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은 부정적 정서의 근원을 분석하는 것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일은 네 부정적 정서 속에 숨겨진 치명적 유해 요소를 분석하는 것이다. 숨겨진 그것은 오랜 세월 네 내면 깊숙한 곳에 단단히 뿌리내려져 있었던 부정적 생각과 관점이고 일을 대하는 잘못되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이다. 그릇되고 터무니없고 부정적인 것을 이야기하자면, 이 생각과 관점은 진리에 결코 부합하지 않으며 분명 진리와 서로 적대적일 것이다. 이때 네가 할 일은 단순히 그것을 생각하고, 분석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네게 끼치는 해악과 통제, 결박, 그리고 너의 진리 추구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철저히 간파해야 한다. 그러니 네가 해야 할 일은 갖가지 부정적 생각과 관점을 폭로하고, 분석하고,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 말씀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이 교제한 진리 원칙에 근거해 그것을 분별하고 간파할 수 있어야 하고, 네 잘못되고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을 진리로 대체해 줄곧 너를 얽매 왔던 부정적 정서를 철저히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는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지금껏 제게 어떤 부정적 정서가 있었는지 발견하지 못했어요.”라고 한다. 조급할 필요 없다. 언젠가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환경이 임하면, 혹은 네가 적당한 나이가 되고 네게 인생의 특수하고 중요한 관문이 임하면, 그러한 부정적 정서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것이다. 일부러 찾고 파헤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부정적 정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많든 적든 간에 제각기 다른 정도로 존재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컴퓨터처럼 어떤 일을 생각과 관점과 무관하게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서 마치 일종의 그릇과 같이 긍정적인 것도 받아들일 수 있고 부정적인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 불행한 점은, 사람이 긍정적인 생각과 관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기 전에 진작 사탄으로부터, 사회로부터, 패괴된 인류로부터 각종 잘못되고 그릇된 생각과 관점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릇된 생각과 관점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가득 채웠고, 사람의 일상생활과 사람이 걷는 인생길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방해한다. 그래서 각종 부정적 생각과 관점이 사람의 생활과 함께하고 사람의 생존과 함께하며, 그와 동시에 갖가지 부정적 정서도 사람의 생활과 함께하고 사람의 생존 길에 함께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게는 약간의 일시적인 부정적 정서만 있는 게 아니라 아주 많은 부정적 정서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네게는 한 가지 부정적 생각과 관점만 있는 게 아니라 아주 많은 부정적 생각과 관점이 있다. 지금은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적당한 환경과 적절한 시기가 갖춰지지 않았고, 네가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드러내도록 유도하거나 네가 부정적 정서를 발산하고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그 사건’의 도화선이 갖춰지지 않았을 뿐이며, 혹은 그러한 환경과 시기가 아직 임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몇 가지 중에 하나가 네게 임하면 그것이 마치 도화선처럼 작용해 네 부정적 정서와 부정적 생각과 관점을 폭발시킬 수 있다. 그러면 너는 자기도 모르게 네 부정적 정서와 부정적 생각과 관점의 영향을 받고, 통제당하고, 결박당한다. 심지어 그것은 네 앞을 가로막고 네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이는 시간 문제다. 우리가 교제한 갖가지 부정적 정서는 사람의 생활과 생존 길에 관계되는 문제이며, 모든 사람이 생활이나 생존에서 직면하는 현실적 문제로, 공허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 문제는 사람이 응당 지켜야 할 원칙, 그리고 가져야 할 생존관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자세히 파헤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앞서 우리는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를 교제한 바 있다. ‘억압’이라는 문제를 몇 번 교제했느냐? (두 번 교제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무엇을 교제했느냐? (첫 번째로 교제하신 것은 사람에게는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많기에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교제하신 것은 사람이 자기 특기를 발휘하지 못하면 흔히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 속에서 살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를 교제했다. 그렇다면 그 두 가지를 놓고 볼 때, 그러한 억압감의 이면에도 사람이 생활을 대하는 일부 생각과 관점이 숨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첫째는 사람이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어 억압감을 느끼는 것인데, 이는 어떠한 생각과 관점이냐? 항상 제멋대로 하려 들고, 무책임하게 굴고,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고, 기분이나 느낌이나 흥미를 따르고, 책임을 질 줄 모른다. 이것은 사람이 생활을 대하는 일종의 태도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의 생존 방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와 생존 방식이 긍정적이냐? (아닙니다.) 긍정적이지 않다. 사람은 항상 자기 뜻대로만 살아가려 하고, 무슨 일을 하든 제멋대로 하려 하고, 기분, 흥미, 기호를 따르는데, 이것은 올바른 생존 방식이 아니다. 이는 부정적인 것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생존 방식과 태도로 인해 생겨난 부정적 정서는 당연히 더더욱 해결해야 한다. 또 하나는 자기 특기를 발휘하지 못해서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경우다. 자기 특기를 발휘하지 못해서, 우쭐거리지 못해서, 자기 가치를 드러내지 못해서, 존재감을 뽐내지 못해서, 자기 기호대로 되지 않아서 기분이 좋지 못하고 실망과 억압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생존 방식, 생존 관점이 과연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옳지 않은 것은 바꿔야 한다.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하며, 옳고, 진리에 부합하고, 정상 인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대체해야 한다. 앞서 이렇게 억압이라는 정서가 생기는 원인 두 가지를 교제했다. 그렇다면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해서, 자기 특기를 발휘하지 못해서 억압감이 생기는 경우 외에도 억압이라는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이 하나 더 있는데, 무엇인지 생각해 낼 수 있겠느냐? 자기 생존 관점과 관련된 일 중에서 어떤 것이 억압감을 느끼게 하느냐? 모르겠느냐? 다른 하나는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지 못해 억압감을 느끼고 그러한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것이다. 너희가 보기에 그러한 억압감의 문제가 존재하는 게 맞느냐? 이것이 사람의 현실적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위에서 말한, 뭐든 자기 뜻대로 하려는 부류의 사람은 비교적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생활을 대하는 태도가 내키는 대로여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기 혼자 잘났고, 단체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생존 방식은 모든 사람이 자기 하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도, 조화롭게 협력하지도 못한다. 그런가 하면 억압감을 느끼는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언제나 솜씨를 보이려 하고 자기를 과시하려고 한다. 오로지 자기만 돋보여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생존 공간을 주지 않는다. 그는 사소한 특기만 있어도, 약간의 재능만 있어도 그걸 발휘하고 싶어 한다. 환경이 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특기에 가치가 있든 없든, 하나님 집에서 쓸모가 있든 없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냐? 이는 모두 사람의 생존 방식과 관계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 생활 방식, 생존 방식은 다 틀렸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지 못해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긴 경우는 어떠하냐?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어떤 시기이든, 무슨 일에 종사하든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겠다는 목표를 중심이자 준칙으로 삼고, 만약 실현하지 못하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억압감을 느끼고 괴로워하는데, 이것 역시 인간의 생존 방식 중 하나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또한 한 부류 사람의 생존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존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로 어떠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자기한테 이상과 바람이 있기만 하면 어디에서든, 무슨 일을 하든,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그의 생존 방식이자 목표이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든, 다른 사람이 얼마나 큰 희생을 하든, 자기 이상과 바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값을 치르고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든, 그는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추구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남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는 한이 있어도, 남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전혀 서슴지 않는다. 만약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억압감을 느낀다. 이러한 생각과 관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이 옳지 않으냐? (지나치게 이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이기적’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입니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진리에 근거해 해결해야 한다.
이처럼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지 못해서 생기는 억압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우선 사람에게는 어떠한 이상과 바람이 있는지 보자. 여기서부터 교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사람에게 어떠한 이상과 바람이 있는지부터 교제하면 이해하기도 쉽고 맥락도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면 우선 사람에게 어떠한 이상과 바람이 있는지 살펴보자. 사람의 이상과 바람에는 실제적인 것도 있고 실제적이지 않은 것도 있다. 어떤 사람의 이상은 이상주의자의 이상이고 또 어떤 사람의 이상은 현실주의자의 이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상주의자의 이상을 먼저 교제하는 것이 좋겠느냐, 아니면 현실주의자의 이상을 먼저 교제하는 것이 좋겠느냐? (조금 더 현실적인 것이 좋겠습니다.) 조금 더 현실적인 것이 좋겠으면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은 교제할 필요가 없는 것이냐? 만약 교제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그것을 스스로 의식할 수 있겠느냐? (의식하지 못합니다.) 교제하지 않을 경우 의식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교제해야만 한다. 현실주의자의 이상은 교제하지 않아도 사람이 스스로 느끼는 경우가 꽤 많으며, 모든 사람의 생각과 의식 속에 조금씩은 내포되어 있다. 어떤 이상과 바람은 실현 여부와 관계없이 어려서부터 커서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상은 연령대에 따라서 변한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가 가진 식견, 견문, 경험이 늘면서 사람의 이상과 바람이 계속 변하고 점점 더 현실적이 되며, 현실 생활과 밀착되고, 구체적이 된다. 예컨대, 어렸을 때 가수가 되기를 꿈꿨다가 커서 자기가 음치라는 것을 깨닫고, 가수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싶어서 영화배우가 되기로 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몇 년 후, 거울을 보니 아무래도 자기는 외모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키는 꽤 크지만,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표정이 모두 부자연스럽다. 영화배우가 되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으니 영화배우를 지도하는 감독이 되기로 한다. 스무 살쯤 대학 전공을 결정할 때 그의 이상은 감독이 되는 것으로 바뀐다. 대학에서 전공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은 뒤에 현실 생활로 눈을 돌렸더니 감독이 되려면 명망과 경력이 있어야 하고 자금으로 쓸 돈도 있어야 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갖춰야 할 조건이 많다. 하지만 자기는 그런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고, 감독을 맡아 달라며 자기를 모셔 가려는 사람도 없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차선책을 택한다. 영화판에서 구르며 스크립터나 조감독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한테는 제작자 역할이 맞는 것 같아. 바쁘게 일하는 것도 좋고 자금을 끌어오는 것도 재미있어. 나는 말솜씨도 좋고 얼굴도 봐줄 만해서 사람들한테 불쾌감을 주지는 않잖아. 대화로 인심도 잘 얻는 편이니까 제작자가 돼도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보다시피 이상이 점차 바뀌었다. 무엇 때문에 바뀌었느냐? 처음에는 본인의 생각이 점점 성숙해지고,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점 정확해지고, 객관적이 되고, 실제적이 되면서 바뀌었다. 그 이후에는 현실 생활 속에서 현실의 생활 환경에 근거해, 생활상의 필요와 압박으로 인해, 현실 생활 환경에 의해 예전의 이상이 조금씩 바뀌었다. 감독이 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제작자를 택하게 된 것이다. 제작자가 됐으면 이상을 실현한 것이냐? 자기도 잘 모른다. 아무튼 한번 시작했으니 10년 넘게 같은 일을 하고, 심지어 은퇴할 때까지 쭉 그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까지, 우선 현실주의자의 이상에 대해 개괄적으로 이야기했다.
방금 우리는 사람의 이상이 이상주의자의 이상과 현실주의자의 이상, 이렇게 두 종류로 나뉜다고 이야기했다. 일단 이상주의자의 이상에 대해 말하겠다. 현실주의자의 이상은 분별이 쉬울 테지만, 이상주의자의 이상은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고, 현실 생활과 비교적 동떨어져 있으며, 사람의 생존에 직결되는, 먹고사는 실제적인 일과도 거리가 비교적 멀다. 또, 구체적인 구상은 있어도 구체적인 지향점은 없다. 이러한 이상과 바람은 일종의 환상이며, 비교적 공허하고, 인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은 상당히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어떤 것들은 정신 분열의 결과로 생겨난 이상과 바람이다. 이상주의자의 이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이상주의라는 말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는 공상이자 환상이며, 현실 생활에서 먹고사는 실제적인 일과 무관하다. 예를 들자면, 시인이 되고 시선(詩仙)이 되어 세상을 방랑하거나 검객 혹은 협객이 되어 마찬가지로 세상을 방랑한다든지, 결혼하지도 아이를 낳지도 않고, 생활 속 잡다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로 고뇌하지 않고, 평생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오가면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고 싶어 하고, 현실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주의자의 이상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도 이런 생각을 하느냐? (안 합니다.) 예전 중국의 어느 유명한 시인은 걸핏하면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시를 썼다. 그런 사람은 이상주의자이냐 현실주의자이냐?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들이 제창하는 사상이 바로 이상주의자의 환상이요, 공상이다. 이상주의자는 항상 유유자적하고, 언제나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 인간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류가 얼마나 평화로운지,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화목하게 지내는지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과 동떨어져 있으며, 이러한 현실적 문제와 괴리되어 있다. 그 상태로 혼자서 실제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선경(仙境) 또는 공간을 상상해 내고, 자기는 그 공간 안에 존재하는 생물이며 그곳에서 생활한다고 상상한다. 이것이 바로 이상주의자의 이상 아니겠느냐? 옛날 시 중에 “바람 타고 돌아가고 싶으나”라는 구절이 있다. 그 시의 제목이 무엇이냐? (<수조가두>입니다.) 원문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읽어 보아라. (“바람 타고 돌아가고 싶으나 옥으로 쌓아 올린 누각 높은 곳은 추위를 견디기 어려울까 두렵네. 일어나 춤추니 맑은 그림자 나를 따르네. 어찌 인간 세상에 있는 것만 하랴.”) “일어나 춤추니 맑은 그림자 나를 따르네. 어찌 인간 세상에 있는 것만 하랴.”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한 이상주의자의 억압감과 울분의 정서 아니겠느냐? 그러한 억압감 속에서 써낸 시가 아니겠느냐? 이것의 핵심이 무엇이냐? 어느 구절에 그가 당시에 처했던 환경과 배경이 드러나 있느냐? “높은 곳은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라는 구절이 아니냐? (맞습니다.) 관료 사회가 어둡고, 사악하고, 더러운 곳임을 폭로하는 구절이다. 그는 마치 신선처럼 그러한 환경을, 그러한 장소를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면 관직을 받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느냐? 그러면서도 환경을 바꾸고 싶어 한다는 말이냐? 그는 환경에 불만이 있다. 이상적인 생활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억압감을 느낀다. 이것이 이상주의자의 이상이다. 이상주의자의 이상은 대부분 공상에 가까우며 비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 않다. 현실 생활과 동떨어져 있어 흡사 자기만 물질세계 밖의 또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 혼자만 하나의 독립된, 자아의 공간에 살며 몽상에 빠져 현실과 괴리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 살면서 고대 사람과 같이 옷을 입으려 하고, 고대 사람과 같이 머리 모양을 꾸미려 하고, 고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한다. ‘아아, 이렇게 살면 정말 좋겠다! 신선처럼 유유자적하잖아. 육적인 번뇌도 안 느끼고, 현실 생활 속의 갖가지 어려움도 안 느끼고. 압박도, 착취도, 번뇌도 없는 생활 환경이야. 사람과 사람이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 돕고 화목하게 지내지. 이 얼마나 아름답고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상적 생활 환경인가!’ 이방인 중 일부는 이러한 것들을 추구한다. 보아라, 어떤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짓거나 이와 비슷한 공연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상주의자가 몽상하는 또 다른 세계를 더욱더 동경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공연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점점 더 기분이 가라앉고, 이상적 세계를 향한 동경심과 미련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런 노래를 오랫동안 부른 누군가는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인간 세상의 온정을 느낄 수도 없다고, 아무래도 역시 자기 이상 속 상상의 공간이 최고라고 느낀다. 그래서 세상이 싫어지고, 인간 세상에서 생활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자기만의 방법으로 이상적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결연히 결심한 뒤 누군가는 음독을 하고, 누군가는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누군가는 스타킹으로 목을 매고, 누군가는 출가해 수행한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았어도 그렇게 극단적인 수법과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극단적인 방식으로 어려움을 해결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 자기 이상 속 목적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것이 이방인 중 일부 이상주의자와 그들이 가진 문제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 교회에는 이와 비슷한 이상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 분명히 있다. 너희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니 내가 알려 주겠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있을 때 이방인 중의 이상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평화롭고, 화목하고, 평온하고, 모두가 평등한 이상적 사회를 동경했다. 예를 들면, 일부 시인 혹은 작가의 문장력으로 탄생한 무릉도원 같은 곳 말이다. 물론, 그보다 많은 것은 사람의 이상 세계에 존재하는 공간 혹은 생활 방식 및 생활 환경이다. 그들은 이러한 필요와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자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신앙을 찾는다. 찾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꽤 괜찮은 길이고 좋은 신앙적 선택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이상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는 이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정, 배려, 보살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과 보호를 체험하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 이상을 가지고 하나님 집에 온다. 본분을 이행하든 이행하지 않든, 아무튼 그들의 이상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종일관 이상을 가지고 있고, 품고 있다. 그들의 이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음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 와서 이곳이 사람에게 온정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이기를, 온정과 행복, 그리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이기를 바란다. 또,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툼, 시기, 차별이 없기를, 사람과 사람이 서로 괴롭히거나 속이거나 모해하거나 배척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상주의자들이 이상으로 삼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마치 기계가 다른 기계를 대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생기도 없고 그 어떤 생각도 없기를 바란다. 만나면 기계적으로 미소 짓고, 굽신대며 예의를 차리고, 우호를 표시하고, 그 어떤 적의도 없음을 표하길 바란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큰 사랑이 있고, 서로 배려하고, 보살피고, 돕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더 나아가 서로 감싸고, 서로 비호하는 등이 바로 이상주의자가 이상으로 삼고 몽상하는 것들이다. 예컨대, 이상주의자 부류가 하나님 집에 왔을 때 품고 있는 이상과 바람은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들의 존중과 보살핌, 그리고 세심한 배려와 우대를 받는 것이다. 존중 외에 존칭도 듣고 싶어 한다. 형제를 만나면 모모 할아버지, 모모 큰아버지, 모모 아저씨로 불리고, 자매를 만나면 모모 할머니, 모모 이모, 모모 자매님으로 불리기를 바라는데, 결론적으로 항상 호칭이 붙기를 희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겉보기에 대단히 잘 어우러지고, 화목하고, 예의를 차리고, 겉으로든 마음속으로든 사람에게 악의가 없고, 좋지 않은 것 또는 사악한 것이 없고, 누군가가 잘못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모두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기를 희망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깊은 배려와 포용을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 특히 약자들이, 성실하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비교적 쉽게 괴롭힘 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 집에 와서는 더욱더 세심한 관심과 우대,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 집에 와서는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 좋기를 바란다. 다들 하나님을 믿으니 한 가족이자 친형제자매로, 누가 누구를 괴롭히는 현상이 있어서는 안 되고, 사람을 괴롭히거나 모해하는 현상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투거나 화낼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온화하게 대처해야 하며, 타인에게 지대한 인내와 도움을 베풀고, 모든 부분에서 타인을 편안하게 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장 좋고 선량한 면을 남들에게 보여 줘야 하며, 악하고 좋지 않은 면은 자기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마치 기계가 기계를 대하듯 서로를 대해야 하고, 타인에 대해 좋지 않은 견해 또는 생각을 갖거나 더 나아가 좋지 않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좋은 사람은 일생이 평안하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타인에게 선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 집이고 진정한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의 이상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 집에서는 원칙을 이야기하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돕고 붙들어 줄 것을 이야기하고, 진리 원칙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하라고 하고, 심지어는 ‘사려 깊지 못한’ 요구들을 제기한다. 바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분별하고 각각 다르게 대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고 사역지침이나 원칙을 어기는 사람이 보이면 나서서 폭로하고 책망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켜야 하고, 정에 휘둘려 두둔하거나 감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 집에서는 각급 리더를 두고 한 측면으로는 그들에게 일상적인 교회 사역을 잘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한 측면으로는 각 사역 항목을 엄격하게 감독, 관리, 체크하게 하고, 이와 동시에 여러 부류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교회 생활을 수시로 알아보고, 파악하고,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또, 그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와 동향이 어떤지 관찰하면서 수시로 합리적이고 적절하게 조정을 진행하도록 한다. 물론 리더 일꾼들에게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이나 원칙을 어겨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엄하게 책망 훈계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사안이 가벼우면 경고를 주고, 심각하면 적절한 처분을 내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 어떤 사람들은 정리되고, 출교되고, 제명된다.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 집에 와서 각종 본분을 이행하고 여러 사역에 종사하다 보면 거의 다들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온 형벌과 심판을 듣고, 보고, 체험하게 되며, 각급 리더의 책망 훈계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에게 임하는 각 방면의 환경과 여러 가지 일들은 이상주의자의 이상 속 하나님 집, 교회와 완전히 다르다. 더 나아가 그들의 예상을 아주 크게 벗어나서 그들은 그것 때문에 마음속으로 커다란 압박감을 느낀다. 한편으로 그들은 교회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현상, 혹은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과 원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이상 때문에, 또한 긍정적인 사물, 교회, 하나님 집에 대한 그들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이해 때문에 마음 깊숙한 곳에 억압감이라는 정서가 생긴다. 그들은 잘못된 그들의 생각과 관점을 제때 바로잡지도 못하고 그들의 이상에 존재하는 문제를 제때 간파하거나 확실히 인식하지도 못하는 관계로, 억압감이 생기고 나면 뒤이어 수많은 관념이 따라서 생겨난다. 또 그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관념을 진리로 해결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러한 관념이 그들의 사상 혹은 마음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들의 억압감을 내면에서 점점 더 크게 키우며 갈수록 심각해지게 만든다. 실제로 하나님, 하나님 집, 교회, 하나님을 믿는 사람, 크리스천은 이상주의자가 자기 이상 속에서 상상하는 선경이라든지, 천당이라든지, 무릉도원 등등과 거리가 멀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주의자의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억압감이 쌓인다. 게다가 그것을 떨쳐 버릴 방법도 없다. 교회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 없느냐?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휴, 하나님 집에서 왜 항상 심판과 형벌 받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하나님 믿는 사람한테 왜 책망과 훈계가 임하는 거야? 아니,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사람을 출교시켜? 사랑이라고는 전혀 없네! ‘지상의 천당’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야? 교회에 어떻게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있어? 어떻게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억누르고 괴롭히는 현상이 벌어져? 교회에서, 하나님 집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폭로하고 해부할 수가 있어? 어떻게 의견 충돌이 일어나? 어떻게 서로 질투하고 다툴 수가 있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하나님 집에 왔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고 서로 도울 줄 알아야 하는 거잖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자기 상상에 따라 하나님 집을 바라보는 사람이 참 많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러한 상상과 말이 객관적이겠느냐?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이 객관적이지 않으냐? (인류는 너무 깊이 패괴되었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모두 패괴 성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함께 지내다 보면 반드시 패괴 표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질투와 분쟁, 사람을 괴롭히거나 억압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상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 생활과 교회의 사역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서 진리 원칙에 근거해 사람을 책망하고 훈계하거나 조정하고 교체하고, 악인과 불신파를 제명하거나 출교시키는데 이것은 원칙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패괴 성품에 따라 일을 처리할 경우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할 수 있기에 교회에서 책망, 훈계, 교체, 정리와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비현실적이라서 이들의 생각을 이상주의자의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같이 현실적이지 않고 공허하며 상상한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으냐? 지금까지도 이들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모른다. “하나님 믿으면 좋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좋은 일 하고 좋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맞는 말이냐? (틀렸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맞는 말이냐? (틀렸습니다.) 선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선한 마음이 네가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냐? 네게 선한 마음이 있느냐?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람의 처신 원칙이냐? 이는 그저 구호이고 도리이다. 그것은 공허한 것이다. 자기 이익과 관계가 없을 때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며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선한 마음을 가지겠어. 남을 괴롭히지도, 곤경에 빠뜨리지도, 속이지도 않고, 남에게서 이득을 챙기지도 않을 거야.’ 그러나 네 이익, 지위, 체면이 걸려 있을 때도 ‘선한 마음을 갖는다’는 말이 네게 구속력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 네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빈말일 뿐,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네 패괴 성품의 본질을 폭로할 수 있고, 네가 그러한 일을 하는 본질과 진상을 폭로하고 분석할 수 있으며, 네가 그러한 일을 하는 본질과 네가 드러내는 성품의 본질을 정의 내리고 정죄할 수 있다. 그런 다음 네게 적절한 길과 원칙을 제시하여 자신의 생존 방식을 바꾸고, 자신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바꾸도록 한다. 이러면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생존 방식을 바꾸게 되며, 패괴 성품이 해결된다. 선한 마음을 가지라고 권한다고 해서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진리만이 너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다. 진리가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함에 있어 사람에게 구호, 도리 혹은 각종 제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처신 원칙과 준칙, 그리고 방향을 제시한다. 사람의 패괴 성품을 원칙, 준칙, 방향으로 대신하고 대체한다. 사람이 처신하는 원칙, 준칙, 방향이 바뀌고 올바르게 되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각종 치우친 생각과 잘못된 사상도 자연스레 바뀐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으면 사상도 따라서 바뀐다. 이는 선한 마음을 갖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의 근원에, 성품에, 본질에 모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면 사람이 드러내고 살아 내는 것이 모두 긍정적인 것이다. 사람이 처신하는 방향, 방식, 출발점이 다 바뀌고, 말하거나 행동할 때 항상 하나님 말씀을 근거와 준칙으로 삼고, 정상 인성으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선한 마음을 갖는다’는 단순한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 쓸모가 있겠느냐? 그 말은 그저 빈말이고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이상주의자는 하나님 집에, 교회에 온 뒤에도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해 마음속으로 억압감을 느낀다. 관료 집단이나 사회에 깊이 발 담근 일부 이상주의자들이 자기 이상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원하는 바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종종 낙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관리가 되고 황제가 됐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안하무인으로 굴기도 한다.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렸도다.”라는 시구에서처럼 말이다. 다음 구절은 무엇이냐? (“온 세상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도다.”입니다.) 보아라,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 정상 인성의 이성이 있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다.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은 언제나 큰소리를 친다. 큰소리를 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어떤 일을 하든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 현실인지 모르며, 항상 감정적이다. 이들은 하나님 집에 와서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 의의가 대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진리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의 가치는 더더욱 깨닫지 못한다. 그들이 줄곧 추구하는 것은 이상주의자의 이상이다. 그들은 언젠가 하나님 집이 자기 이상 속의 기대처럼 되기를 꿈꾼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깍듯이 대하고, 조화롭게 공존하고, 그저 좋게 좋게 지내고, 서로 보살피고, 아끼고, 돕고, 고맙다고 인사하기를 꿈꾸는 것이다. 또한 서로 좋은 말, 축복의 말을 해 주고, 듣기 싫은 말이나 상처를 주는 말 또는 사람의 패괴 본질을 폭로하는 말은 일절 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견 충돌이 없고, 서로 폭로하거나 책망하지 않기를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하나님을 믿는 의의를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의 요구가 도대체 무엇이고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언젠가 하나님 집에서 그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대우를 누릴 수 있기를 더욱 바란다.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자기 이상을 실현할 여지가 없고 기회도 없다고 느낀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억압감을 느끼는 동시에 수시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한다. “하나님 믿는 거 재미없고 공허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처님 믿는 사람들처럼 서로 돕고, 아끼고, 존중하지 않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진리며 원칙을 늘 얘기하는 데다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함께 지내면서도 항상 분별력을 얘기하고, 늘 폭로하고 질책해. 심지어는 책망과 훈계도 자주 임하지. 이런 생활은 내가 원하던 게 아니야.” 자기가 품은 이상이 있고 천당에 갈 한 가닥 희망이 있기에 버티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이상주의자들은 언제든지 교회를 떠나 다른 길을 찾을 사람들이다. 말해 보아라. 이러한 부류가 하나님 집의 사람이냐? 그들이 하나님 집에 머무는 것이 적절하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출가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불당에 가도 되고 도관에 가도 될 것이다. 그들은 사회에서는 억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히려 하나님 집에서는 억압감을 심하게 느낀다. 이상을 실현할 기회가 없고 자기 이상을 실현할 여지가 없다고 느낀다. 그러니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연기가 자욱하고 향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어울린다. 그곳은 조용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를 가르치지도 않는다. 너의 갖가지 그릇되고 터무없는 생각과 관점을 폭로하지도 않고 네 패괴 성품을 폭로하거나 책망하지도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고 서로 존중한다. 하루에 말을 몇 마디 하지도 않으며 그 어떤 의견 충돌도 발생하지 않는다. 너를 감독하는 사람도 없고 단속하는 사람도 없다. 거기서 자급자족하며 살면 낯선 사람은 일 년에 몇 명 보지도 못할 테고 생활상의 문제로 근심할 필요도 없다. 육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작은 그릇이나 바리때를 하나 들고 거리로 나가서 시주를 받고 먹을 것을 구하면 그만이요,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그곳에는 인간 세상의 번뇌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그저 좋게 좋게 지내고, 누구도 타인과 언쟁을 벌이지 않고, 불만이 있어도 마음속에만 담아 둔다. 생활이 아주 편안하니, 그야말로 극락세계라고 하겠다. 그곳은 이상주의자에게 이상적인 곳이고, 그곳이야말로 이상주의자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곳이다. 이상주의자는 자기가 상상하는 곳에서 살아야지 교회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그의 입장에서 교회는 일이 너무 많은 곳이다.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려야 하고, 각종 원칙을 배워야 하고, 항상 진리를 교제하며,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한 인식을 교제해야 한다. 패괴 성품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서 원칙을 어긴 사람에게는 책망과 훈계가 임한다. 심지어 항상 책망과 훈계가 임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큰 억압감을 느끼며, 즐겁지 못하다. 교회는 그에게 이상적인 환경이 아니다. 그는 여기서 세월을 흘려보내거나 청춘을 낭비하느니 하루빨리 자기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고 항상 억압감을 느끼며 불편하고 불행하고 기분 나쁘게 지낼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이상주의자의 이상이 대표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이러한 부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아무리 많은 진리를 교제해도 귀 기울이지 않고 종일 터무니없는 생각만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비현실적이고 막연해 정상 인성과 거리가 한참 멀다. 종일 그런 생각만 하니 정상인과 소통이 안 된다. 정상인은 그들의 세계에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어떠한 생각과 관점이 있든 결론적으로 그들의 이상은 매우 공허하다. 이상이 매우 공허함으로 그들의 생각과 관점도 당연히 매우 공허하다. 그런 것은 분석할 가치도, 깊이 파헤칠 가치도 없다. 기왕 공허하니 앞으로도 계속 공허하게 내버려 두도록 하자.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가도 되고, 하나님 집에서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 집에 머무르길 원할 경우 본분을 이행하든 힘을 쓰든 그저 교란하거나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줄 것이다. 요컨대 형제자매에게, 하나님 집에, 교회에 우호적이기만 하다면 그러한 부류를 굳이 처리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먼저 떠나겠다고 하는 경우는 예외다. 그러면 우리는 쌍수를 들고 반길 것이다. 어떠하냐? (좋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기로 하겠다.
이상주의자의 이상은 비교적 공허하나, 현실주의자의 이상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더 현실적이고 사람의 생활과 밀접하며 사람의 현실적 환경과 밀착해 있다. 당연히 사람의 생활 혹은 생존 속 문제와 더 구체적으로 연관되며, 사람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는 문제와 연관된다. 사람이 자리를 잡는 일은 그 사람이 배운 손재주, 기술, 수완, 그 사람이 받은 각종 교육, 그리고 그 사람의 은사, 재간, 특기와 연관이 있다. 현실주의자의 이상은 이러한 것들에 관계된다. 현실주의자의 이상이 더 나은 생활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의 정신적 만족을 위한 것이든,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상은 사람의 현실 생활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지도자로서의 재능이 약간 있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한다. 연설과 언어 표현에 능하거나 사람을 평가하고 쓰는 데에 능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을 다루는 데에 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 부류의 사람들은 한자리하거나 지도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인사 업무를 맡고 싶어 한다. 자기가 그 방면에 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은 집단 내에서 지도자나 조직자가 되어 업무와 인사를 주관하고 싶어 하며, 더 나아가 한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싶어 한다. 이 부류의 이상은 주로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들이 사회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하나님 집에 와서는 자기가 종교 단체에 왔다고, 색다른 종교 단체에 왔다고 여긴다. 교회에 온 이후에도 그들의 이상은 변함이 없다. 그들은 생존 환경 혹은 생존 배경이 변했다고 해서 이상을 바꾸지 않는다. 그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갖고 하나님 집에 온다. 그들이 되고 싶은 것은 하나님 집의 각급 리더 일꾼이다. 예를 들면, 교회 리더나 어떠한 급의 책임자, 또는 팀장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의 이상은 이러하다. 그러나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는 리더 일꾼을 뽑는 원칙과 규정이 있고, 그들과 같은 부류는 리더 일꾼의 조건을 갖추지 못해 어쩌다가 어떤 급의 리더 선출에 참가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다. 소원대로 리더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리더가 되지 못할수록, 자기가 하고 싶은 이상 속의 일을 할 수가 없을수록,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상이 점점 더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점점 더 리더가 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극력 온갖 시도를 한다.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혹은 상급 리더 앞에서 극력 자신을 드러낸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출중해 보이게 하고, 자기 특기를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본심과 다르게 형제자매의 비위를 맞추고,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서 리더 일꾼에게 요구하는 것에 맞춰 어떠한 일을 하거나 어떠한 말을 하며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보여 준다. 그러나 한동안 노력한 뒤에도 리더가 되려는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면, 어떤 이들은 실망하고, 낙담하고, 자아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에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에, 이전부터 있던 억압의 부정적 정서가 오히려 더 심해진다. 쭉 한자리하고 싶었고 지도자가 되고 싶었던 이상은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 이미 마음속에 싹튼 것인데, 이를 실현하지 못해 가슴 밑바닥에 항상 무형의 억압감이 존재했다. 하나님 집에 와서도 여전히 그런 이상을 실현할 수가 없자 억압감이 가슴 속에서 나날이 커지고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는 자신이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해 불평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낙담하고 억압감을 느낀다. 이상이 줄곧 실현되지 않아 그들은 속으로 무척 억울해한다. 재능을 발휘할 곳이 없기에 인생이나 앞으로의 길에 대해 낙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에서 항상 억압감을 느낀 채로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심지어 온갖 노력과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리더가 되지 못하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정서를 분출하고, 갖가지 방식으로 자기 억압감을 발산하거나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한자리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채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 일부는 소원대로 교회에서 리더가 된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 집의 안배에 따라 리더로서의 본분을 이행할 수 없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집과 형제자매의 요구 및 감독하에 리더 역할을 하게 된다. 자기 이상이 실현됐는데도, 자기가 이상 속에서 하기를 원했던 일을 실행에 옮기면서도, 그들은 계속 억압감을 느낀다. 그것은 그들이 개인적 이상의 실현을 바탕으로 리더를 하고, 형식상 혹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집에서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 같아도 그들의 이상은 그 정도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포부, 이상, 소망, 시야는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그런 그들의 손발과 생각, 그리고 그들의 계획과 타산이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과 하나님의 요구에 얽매이고 통제를 받는 까닭에 그들은 리더가 된 이후에도 계속 억압감을 느낀다. 그들에게 이러한 문제가 생긴 원인이 무엇이냐? 리더가 되어서도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 하고 이상 속에서 다짐한 것을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집에서, 교회에서 리더로 활동하면서는 그들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할 수 없어 그들은 마음이 복잡하고 갈등이 심하다. 이러한 갈등, 자기 이상,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탓에, 그들은 종종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해방받지 못하고 억압감을 느낀다. 이러한 이들이 한 부류를 이룬다. 하나님 집의 이러한 이상주의자 중에는 자기 이상을 위해 분투하지만 여전히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이상을 위해 분투하여 이상을 실현했으나 여전히 억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에 속하든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도 여전히 자기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기 이상을 계속 추구하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글을 쓰는 데에 재능이 있고 언어 표현력과 문학적 소질이 있다. 그들은 문학적 소질을 이용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동시에 자신의 문학적 소질을 과시해 자기 재간과 가치를, 자기가 하나님 집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들의 이상은 훌륭하며 합격점에 이른 작가나 문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 와서 문서 방면의 본분을 이행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기 재능을 보여 줄 곳을 찾았다고 느끼며, 자기 특기와 재능을 한껏 발휘해 작가나 문인이 되겠다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비록 본분을 이행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자기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행하는 본분 중 80퍼센트에서 90퍼센트는 자기 이상에 기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원동력은 이상을 추구하고 간절히 바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본분 이행에 불순물이 많아 진리 원칙이나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기가 무척 어렵다. 그들은 단순히 본분을 잘 이행하려고 하나님 집에 온 것이 아니라 본분 이행을 기회로 삼아 자기 재주를 펼치기를 원하고, 재주를 펼쳐 자기 이상을 실현하고 자기 가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합격한 본분 이행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그들의 이상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는 사람의 선호와 각종 사람, 일, 사물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관점이라는 불순물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 방면의 업무 기술을 잘 알고, 특정 방면에 재능이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 기술을 잘 아는 사람이 있다. 그는 컴퓨터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한다. 안경을 쓰고, 전문가다운 옷을 입고,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보기 힘든, 혹은 아주 독특한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서나 자리에 앉으면 전문적으로 컴퓨터를 켜고, 전문적으로 인터넷 사이트의 갖가지 정보를 살펴보며, 전문적으로 컴퓨터상의 각종 문제를 처리한다. 하여간 그들은 전문가의 시각, 전문가의 말과 행동을, 전문가의 풍모를 보일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이를 표방한다. 스스로 전문가가 되고자, 컴퓨터 공학 업계 내의 인사가 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 하나님 집에 와서 마침내 컴퓨터 기술 방면의 일을 하게 되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게 된다. 그들은 쉼 없이 기술을 배우고 업무 수준을 높인다. 그런 다음 열심히 이런저런 문제를 발견하고 열심히 해결한다. 목적은 업계의 현황을 따라잡는 것이고, 현재 해당 업계에서 제창하고 발표하는 각종 새로운 정보를 따라잡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는 특정 방면의 업무 기술에 아주 큰 흥미를 느끼며 잘 이해해 전문적이라고, 숙련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상은 전문가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중용해 주고, 우러러보고, 자신에게 의지하기를 바란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현재 이 시기에, 대부분 자기 특기를 발휘하고 있고 자기 이상을 실현했다. 그러나 자기 이상을 실현하는 동시에, 자기가 하는 일이 도대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것인지 그들이 생각해 보았겠느냐? 잘 모르지 않겠느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종사하는 일은 특수한 일이며, 복잡하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고작 그들이 알고 있는 약간의 업무 기술로는 그 사역에 대한 하나님 집의 요구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이상을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든 적든 제약과 통제를 받는다. 그들은 가슴속에 이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련한 각종 진리와 본분 이행에 관계된 각 방면의 원칙 앞에서도 어느 정도 억압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람들이 한 부류를 이룬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전도하면서 우두머리 양이 되기를, 일인자가 되기를 추구한다. 어느 교회에서든 우두머리 양이 되려 하고, 특출난 사람이 되려 하고,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 한다. 현재의 본분을 이행하고 현재의 일에 종사하면서도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기 이상 또는 자기가 계획하고 구상한 목표인데, 이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나 진리와는 무관한 목표다. 그 목표나 이상이 폭로되고 그것의 성질이 규정되거나 일정한 방해를 받으면, 자기 이상을 실현할 수 없고 자기 가치를 드러낼 수 없다는 느낌을 받으면, 그들은 심한 억압과 불만을 느낀다. 많은 사람이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와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긍정적인 평가와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대가를 치렀는데 곧바로 보상받지 못하면 그들은 가치 없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억압을 느낀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러한 부류 중 일부는 언제나 제대로 된 교과서적 전도인이자 포교자가 되고 싶어 한다. 모모 유명 인사가 이름난 포교인이고 전도인이라는 이야기라도 나오면 대단히 부러워한다. 자기도 언젠가는 그런 인물이 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오래도록 칭송받고, 하나님께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항상 자기 이상 속의 방식으로 전도하려고 하며, 자기 이상을 목표이자 원동력으로 삼고 전도인이 되고자 한다. 그들의 이상은 하나님 집에서 명성을 얻거나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집에는 어떤 일에 대해서든 엄격한 요구가 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그 일을 하는 원칙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이상 속의 포교인이 될 수 없어서, 항상 감독과 통제를 받아서, 리더 일꾼이 사역에 대해 체크하고 물어봐서 억압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업무에 숙달됐다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 집에 와서도 자기 이상을 추구한다. 이러한 부류 가운데 배우들을 예로 들어 보자. 그들 중 일부는 자기가 연기를 조금 잘하고 연기 테크닉을 약간 배웠답시고 이상적인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자기도 언젠가 이방인 세계의 대배우들처럼 유명인이 되고, 스타가 되고, 은막의 왕이나 여왕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늘 그 방면의 패괴 성품과 패괴 표출을 폭로한다. 게다가 하나님 집에는 연기라는 사역에 대한 구체적 요구와 원칙이 존재한다. 배우가 되어도 여전히 숭배받거나 팬을 거느리는 스타가 되지 못해 그들은 심한 억압을 느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집은 정말 사람을 성가시게 해. 매사 제약이 많잖아. 연예인 좀 따라 하면 뭐가 어때서? 조금 특별하게 꾸미고, 약간 개성 있고 나름의 기준이 있는 옷을 입는 게 문제 될 일이야?” 하나님 집에는 배우의 복장에 대한 요구가 있고, 구체적인 연기에 대한 요구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 집의 요구는 자기가 추구하는, 유명인이나 스타가 되려는 이상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도무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몹시 불쾌하게 여긴다. ‘이상 좀 실현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하나님 집에서는 왜 이렇게 뭐든 가로막히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 때, 혹은 마음속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그들은 억압을 느낀다. 억압을 느끼는 배경에는 자기 이상이 정당하며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는 그들의 생각이 있다. 게다가 그들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며, 자기들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억압의 정서가 생기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감독들은 영화를 몇 편 찍고 나면 자기도 경험이 꽤 쌓였고, 감독한 영화가 어디에 내놓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가 됐고, 화면이나 편집이며 배우의 연기 등 여러 방면이 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부의 지도를 거쳐서 마침내 합격점에 이른 영화가 예정된 시기에 상영된다. 이는 제대로 된 감독이 되겠다는 그들의 이상이 타당한 것으로, 정당한 추구로, 응당 추구해야 할 것으로 더욱 인정받은 것 같다고 여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감독이 되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원칙에 맞지 않는 그들의 생각, 관점, 행동 방식은 인정받지 못하며, 수시로 부정되고 번복된다. 더 나아가 늘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 이 또한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억압의 정서가 생겨나게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감독으로 일 좀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이방인 세계 감독들은 얼마나 폼이 나는지 봐. 차 가져다주고 물 따라 주는 사람은 물론이고 발 씻겨 주는 사람까지 있잖아. 하나님 집 감독은 별 지위도 없어, 폼도 안 나 우러러보고 숭배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수시로 책망 훈계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뭘 해도 틀렸다고 하니 정말 억압적이야! 내 나름의 생각과 관점이 있고 업무 능력도 있는데 왜 항상 책망받는 거야? 이상을 추구하는 게 잘못이야? 이상을 추구하는 게 정당하지 않은 일이야? 자기 이상을 실현하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야? 정말 억압적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억압감을 떨칠 수 없다. 또, 일부 가수들은 이런 말을 한다. “다른 건 바라지 않아. 난 하나님 집에서 그저 제대로 된 가수가 되고 싶을 뿐이야. 노래를 잘하고, 내 스타일이 생기고, 누구나 좋아할 가수가 될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 그러나 하나님 집에서는 찬양에 대해서도 늘 갖가지 요구와 원칙이 제시된다. 이러한 가수들은 하나님 집의 요구를 자꾸 어기는 탓에 수시로 책망 훈계를 받는다. 책망받지 않을 때면 그들은 자기 이상이 꽤 순조롭게 실현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다가도 책망이 임하고 약간의 좌절을 겪게 되면 그간의 노력과 성과를 부정당한 것 같다는 생각,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가슴속 깊은 곳에 억압감이 자리 잡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휴, 이상을 실현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야! 이 넓은 세상에 내가 있을 곳 하나가 없다니! 하나님 집에서도 마찬가지야. 개인적인 사업 좀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거야? 내가 하고 싶은 일 좀 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 나한테 청신호를 켜 주는 사람은 없고 번번이 벽에만 부딪쳐. 게다가 번번이 책망 훈계도 받아. 너무 힘들다. 정말 억압적이야! 이방인 세계에서는 다들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기 바쁘니까 그 사이에서 무슨 사업을 하려면 방해를 많이 받아서 억압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지만, 왜 이상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도 억압을 느껴야 하는 거야?” 하나님 집에서 갖가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주 벽에 부딪치고, 부정당하고, 책망 훈계를 받고, 인정받지 못한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다운된다. 이번 생은 끝장인 것 같은 기분이다. 이상을 실현할 가망이 없는 것 같다. 하나님 집에 오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이상과 포부를 품고 있어. 내게는 바람이 있어. 하나님 집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거야. 제대로 된 감독, 배우, 문서 사역자가 될 수 있겠지. 물론 제대로 된 무용수, 가수, 음악인이 될 수도 있을 거고.’ 자기 재능을 펼칠 수 없고 자기 이상을 이룰 수 없었을 때, 하나님 집에는 자기 무대가 있을 테고 자기 이상과 포부, 꿈이 실현될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하나님 집의 무대가 대단히 크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자기 발밑의 무대가 왜 점점 좁아지나 싶고, 자기 세상이 왜 자꾸 작아지나 싶다. 자기 이상을 실현할 가능성이 갈수록 막연해지는 것 같고 갈수록 가망이 없는 것 같고, 그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사람은 자기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자기 이상과 바람이 과연 올바른지 의심하지 않고, 자기 이상과 바람을 그대로 품은 채 본분을 이행한다. 그리하여 이상과 바람, 그리고 현실적 본분 사이에 놓인 사람은 줄곧 억압의 정서와 함께하게 된다. 억압의 정서를 가지고 있거나 억압의 정서를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은 이상과 바람, 그리고 본분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억압의 정서를 가진 채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한다. 어쨌든 계속 자기 자신을 다스리면서 꿈과 이상을 좇는 한편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모순적인 심리 상태로 본분을 이행한다고 할 수 있다. 심한 억압을 느끼고 아주 떨떠름해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고자, 자기 가치를 드러내고자, 자기 이상과 바람을 좇고자 어쩔 수 없이 본분을 이행한다. 정확히 무엇을 위해서인지, 무엇을 얻고 싶은지, 무슨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인지, 어떤 목적을 좇고 실현하기 위해서인지 자기도 알지 못한다. 그게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앞길이 갈수록 흐릿해지는 것 같다. 이런 상태에서는 억압의 정서를 내려놓거나 해결할 방도가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지금부터는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 그리고 본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해야 하는지를 교제하겠다. 우선 이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앞에서 말한 사람들의 이상을 생각할 때,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자기 이상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성질의 행동이냐? 어째서 적절하지 않으냐? (본분을 이행하면서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은 자기 과시인 동시에 개인적인 사업을 하는 행동입니다.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는 자세가 결코 아닙니다.)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려는 것이 과연 정당한 행동인지 말해 보겠느냐?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인권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사람에게 알려 준 길을 따라 추구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바람과 이상만 추구한다면, 육이 좋아하는 것들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탄이 주입한 것들입니다.) 만약 세상에서라면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네가 어떤 이상을 실현하든 법을 어기거나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다 괜찮다. 추궁할 사람도 없고,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도 아니다. 개인이 무언가를 좋아해서 추구하다가 그걸 얻고 목적을 이루면 성공한 것이고, 그걸 얻지 못하고 실패하더라도 본인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 집에 왔다. 하나님 집은 특별한 곳이다. 네가 품은 이상과 바람이 어떤 것이든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이유가 무엇이냐?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문제에 있어서 네가 추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 자체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네 행동 방식과 네가 걷는 길은 전부 이기주의, 사람의 이익, 사람의 지위, 사람의 명예를 중심에 두고 있다. 전부 그것들이 중심이다. 즉, 사람이 자기 이상의 실현을 추구한 결과 이익을 보는 것이 오직 본인뿐이라는 말이다. 그 사람은 지위, 명예, 체면, 그리고 육적인 이익을 위해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 이것이 정의로우냐?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가진 이상, 생각, 바람을 위해 그가 동원한 온갖 수법과 방식, 방법은 모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들이다. 진리를 기준으로 따져 봤을 때 정의롭지 않거나 정당하지 않은 것은 응당 내려놓아야 한다. 분명 이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내려놓아야 한다. 이기주의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사람이 걷는 길의 본질을 통해 본 것인데,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려는 것은 긍정적인 행동이 아니며, 부정되었다. 이것이 한 방면이고, 또 다른 방면도 있다. 하나님 집이든 교회든 뭐라고 부르든 간에 여기가 어떤 장소냐? 어떤 곳이냐? 교회며 하나님 집의 본질이 무엇이냐? 일단 이론적으로 볼 때 세상이나 사회가 아니다. 사회의 그 어떤 사람의 단체, 사람의 조직도 아니다. 세상이나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냐? 무엇으로 인해 출현하고 존재하는 것이냐? 하나님,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역,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 교회가 생기고 하나님 집이 생겼다. 그렇다면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이 개인의 재능을 발휘하고 개인의 이상과 포부며 바람을 실현하는 곳이겠느냐? (아닙니다.) 명백히 아니다.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있기에, 하나님의 사역이 있기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재능을 발휘하고 개인의 이상과 포부며 바람을 실현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의 육적인 생활과 육적인 장래, 명리, 지위, 명예 등등을 중심에 두고 사역하는 곳도 아니다. 또한 사람의 육적인 명예, 지위, 향락, 장래로 인해 생겨나 존재하는 곳도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어떤 곳이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 사역이 있기에 생겨났으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있기에, 하나님의 사역이 있기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곳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지위, 명예, 장래 혹은 그 어떤 이익과도 관계가 없다. 그러면 교회 혹은 하나님 집에서 하는 모든 일과 그 모든 일의 중심이 되는 원칙이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가르침이어야 한다. 크게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역이 중심이라 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확장하고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널리 전하는 것이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 외에 또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함으로써 정결함을 얻고 구원받는 곳입니다.) 핵심을 잘 짚었다.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곳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구원받는 곳이라는 점이다. 기억했느냐? (기억했습니다.) 읽어 보아라.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선민이 정결함을 얻고 구원받는 곳입니다.)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또 하나님 선민이 정결함을 얻고 구원받는 곳이다.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바로 이런 곳이다. 그러면 이런 곳에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에 알맞은 일이나 항목이 어느 하나라도 있을 수 있겠느냐?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봉사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또한 단 하나도 없다. 그러니 개인의 이상과 바람은 하나님 집에 존재해야 하느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개인의 이상과 바람은 교회에서 하나님이 하려는 모든 일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상과 바람은 하나같이 교회의 모든 일과 어긋나고,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고,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는 것과 배치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과 배치되고, 하나님 선민이 정결케 되고 구원받는 일과도 배치된다. 사람이 가진 이상이 어떤 것이든 개인적 이상과 바람인 이상 반드시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 이상과 바람인 이상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지장을 주거나 이를 가로막을 것이다. 사람이 정결함을 얻고 구원받도록 두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이 둘 사이는 모순되기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서로 반하는 관계다. 네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한다면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되며,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 사역을 증거하는 일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된다. 또한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되고, 당연히 네가 구원받는 것도 가로막게 된다. 요컨대 사람의 이상은 그게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실제적 성과를 낼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진리를 깨닫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어떻게 하나님을 흡족게 할 것인지,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것인지, 어떻게 제대로 된 피조물이 될 것인지를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고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반대로 이상과 바람이 실현될수록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동시에 사탄과 점점 가까워진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이상을 추구하고 실현할수록 마음이 점점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소원대로 자기 이상이 실현되고, 자기 바람이 실현, 성취됐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갈수록 무시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고, 하나님과 대립하는 길을 갈 수도 있다. 이것이 최종 결과다.
하나님 집 혹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았다면 다음으로는 하나님 집의 구성원으로서 사람이 어떠한 태도와 입장으로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고 생존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이상을 추구하지 말고 자기 바람을 실현하지 말라는 거네요.” 나는 너희의 이상 추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피조물로서 하나님 집에서 어떤 입장에 서야 하는지, 본분을 어떻게 이행하는 것이 적절한지 너에게 알려 주는 것뿐이다. 만약 네가 기어코 자기 이상을 실현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나는 거리낌 없이 나가라고 말할 것이다. 교회는 네가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 집이 아닌 곳에서는 네가 이상 속에서 하고 싶었던 일을 뭐든 해도 되고 네 이상과 포부를 추구해도 된다. 하나님 집을 떠나기만 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 간섭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교회, 하나님 집은 네가 자기 이상을 추구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가 이곳에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네가 하나님 집, 교회에 하루라도 있는 이상, 네 이상을 실현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며, 네 이상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제 이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며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길 원합니다.”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괜찮다. 너는 하나님 집에서 착실하고 성실하게 네가 응당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약 이번 생을 헛되이 살지 않기 위해 자기 이상을 추구하겠다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라면 본분을 포기하고 하나님 집에서 나가거나 이런 선언문을 쓰면 된다. “저는 자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를 나가 제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겠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저 하나 받아 줄 곳이 없을 리는 만무하죠. 이만 작별을 고합니다.” 이러면 당당하게 나갈 수 있다. 가서 네 이상을 추구해라. 하지만 네가 만약 “제 이상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로 구원받기를 추구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말이 통하는 셈이다. 네가 안정된 마음으로 하나님 집에 머물면서 하나님 집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우선 제대로 된 피조물이 되고 분수에 만족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집의 명실상부한 피조물이 된다. 피조물은 네 형식상의 신분이요, 호칭이다. 이 호칭에는 구체적인 모습과 본질이 따라야 한다. 네게 호칭을 주고 그걸로 끝인 것이 아니다. 네가 하나의 피조물이라면 피조물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피조물인 이상 피조물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본분이 무엇이냐? 피조물의 책임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에 피조물의 본분, 의무, 책임이 명확하게 나와 있다. 그렇지 않으냐? 오늘부터 너는 명실상부한 하나님 집의 일원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라고 너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 너는 오늘부로 인생 계획을 새로 세워야 한다. 예전에 네 인생에 계획해 두었던 이상, 바람, 목표를 더는 추구하지 않거나 내려놓기 시작해야 한다. 신분과 각도를 바꿔 피조물로서 응당 가져야 할 인생 목표와 인생의 방향을 계획해야 한다. 우선, 네 목표와 방향은 지도자가 된다거나 어떠한 업계의 능력자 혹은 선도자가 된다거나 어떤 한 가지 일에 종사하며 업무 기술에 통달한 유명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당장 네가 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고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하라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하나님 집에서 네게 안배한 본분이 무엇인지 물어보아라. 너는 그 본분과 관련해 반드시 알고, 파악하고, 준수해야 할 원칙을 전부 숙지하고 분명히 해야 한다. 기억하지 못하겠으면 종이에 적어 두거나 컴퓨터에 기록해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어 보며 되새기거라.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네가 최우선적으로 가져야 할 인생 목표는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는 네가 응당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인생 목표다. 다음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어떻게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당연히 자기 명예, 지위, 체면, 장래 등등과 관련된 목표와 방향은 전부 포기해야 한다. “왜 포기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명리나 지위 같은 것을 추구한다면 네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되고, 하나님 집 또는 교회의 어떠한 사역을 교란하게 된다. 심지어는 교회의 어떠한 사역을 파괴하고, 하나님 말씀을 널리 알리는 일과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지장을 초래하며, 더 나아가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 지장을 준다고도 할 수 있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 네가 어떤 목표를 세우든, 경험을 어떻게 총정리하든 다 괜찮다. 다만 네 이상을 추구하지 말고, 네 이상을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의 그 어떤 원칙 혹은 이행 방식 안에 끼워 넣지만 않으면 된다. 본분을 잘 이행하고, 본분 이행에 합격하고, 제대로 된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에서 원칙과 더 정확한 실행 길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 네 개인적인 생각과 개인의 출로를 정리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실행 원칙의 중심은 결국 어떻게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될 것인지,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할 것인지이다. 모든 것의 중심은 진리를 깨닫고,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궁극적으로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 또는 생활 속에서 갖가지 부류의 사람, 일, 사물을 대할 때 준수해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네가 하나님 집의 원칙과 요구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너는 당연히 그러한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네 이상을 추구한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지 않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결국에는 점점 교만해지고, 이기적이 되고, 건방져지고, 흉악해지고, 탐욕스러워진다. 또 어떻게 되느냐? 점점 부풀어 올라 안하무인격이 된다. 반대로 자기 이상과 바람 실현하기를 포기하고 여러 진리를 깨닫고자 하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각 방면의 하나님 말씀과 진리 준칙을 깨닫고자 하면, 사람이 나날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되고, 다양한 일을 하거나 환경을 체험할 때 과거처럼 막연하고 곤혹스럽지 않게 된다. 더 나아가 과거처럼 수시로 갖가지 부정적 정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거나 갖가지 부정적 정서와 생각에 구애되고 결박되어 결국에는 그것에 통제당하고 휩싸이는 일이 없게 된다.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를 추구한다면 사람은 결국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올바로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기 위한 원칙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사람의 생로병사가 어떻게 된 일인지, 증오 및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당연히 주변에 임하는 갖가지 사람과 일, 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된다. 갖가지 사람과 일, 사물이 임했을 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마음이 곤혹스러움으로 가득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국에는 갖가지 부정적 정서와 부정적 사상 관점이 마음속에 번져 나가며 점점 커져서 자신을 통제하고 결박하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그 밖에 부정적 정서 혹은 부정적 생각과 관점의 주도하에 과격한 행동을 하거나 남을 다치게 하고 자기도 다치는 일을 저질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사람의 정당한 추구를 방해하는 한편 사람에게 응당 있어야 할 양심과 이성을 해친다. 그러므로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일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는지, 육과 세상 그리고 육적인 이익에 속하는 명예, 위신, 체면, 지위, 금전 등등 여러 방면 중 어느 것을 갈망하고 필요로 하며, 간파하지 못하고, 항상 그것에 결박되고 유혹당하고, 더 나아가 그것에 푹 빠지거나 그것을 깊이 숭배하여 조금만 경계를 늦추면 언제 어디서든 그것에 사로잡힐 수 있는지 분석하는 일이다. 그런 것들이 바로 너의 이상이다. 그 이상을 실현하는 날이 곧 너의 마지막 날이요, 너의 이상이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너희는 이 일을 어떻게 보느냐? (사람은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일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육과 세상에 속하는 명예, 위신, 체면, 지위, 금전 등등을 꿰뚫어 봐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자칫 그것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것에 사로잡힌다. 그렇지 않으냐? 그래서 육에 속하는 것들은 매우 위험하다. 네가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언제나 그것에게 영향을 받거나 심지어는 그것에 사로잡힐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지금 너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해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육에 속하는 것들을 분석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파헤쳐서 분별해 낸 후 그것을 포기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는 자기 몸과 마음 그리고 에너지를 평범한 피조물이 되는 데에 쏟아붓고, 현재의 자기 본분과 사역에 쏟아부어야 한다. 자기를 특별한 인물, 독보적인 인물, 또는 특별한 재능과 재간을 가진 인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너는 보잘것없는 존재다. 어느 정도로 보잘것없느냐? 모든 피조물 중, 하나님이 만든 만물 중 하나일 뿐이고 지극히 평범한 개체에 불과하다. 얼마나 평범하냐? 너는 하나님이 만든 그 모든 풀, 나무, 산, 물, 심지어는 땅바닥의 모래 한 알만큼이나 평범하다. 칭찬할 부분도 없고 누가 우러를 만한 부분도 없다. 그냥 평범하다. 그 외에, 만약 네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우상, 큰 인물, 유명인, 위인의 형상이 자리하고 있거나 네가 부러워하는 것들이 있다면 응당 제거하고 포기해야 한다. 또한, 그것의 본성 본질을 간파하고 평범한 피조물이 되는 길로 돌아와야 한다. 평범한 피조물로서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은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다음으로는 진리 추구라는 주제로 돌아가서 진리에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바깥세상의 소식, 정보, 사건, 그리고 유명인 명단 같은 것은 되도록 접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욕망을 다시 불태우도록 너를 꼬드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안 보는 것이 최고다. 너는 지금 네게 이로울 것이 없는, 부정적인 것에 속하는 사람과 일, 사물을 멀리해야 한다. 그것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번잡하고 어수선한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네게 위협이 되거나 너를 유혹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땅히 멀리해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보낸 40년처럼 말이다. 그래도 잘 살지 않았느냐? 언어 능력은 떨어졌지만, 결국 모세는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 그것은 모세의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었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너는 우선 의식의 저변에서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너는 이러한 계획과 의지를 갖추어야 하고 이러한 의향이 있어야 한다. 자기 이상을 끝없이 돌이켜 보거나 자기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지 여부에 계속 신경을 쓰고 그것만 궁리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이상과 바람을 철저하게 끊어 내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자 평범한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평범한 피조물 중의 하나가 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것은 좋은 일이다. 네가 육에 속하는 자기 이상과 바람을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네가 아무런 신분도 지위도 가치도 없는 평범한 피조물이 되기로 했다는 것은 그때부터 네게 하나님의 권세 아래, 창조주의 권세 아래로 돌아와 완전히 복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주재에 따를 의향 및 의지가 생겼다는 의미다. 순종할 의향을 갖고,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포기하고 버리고자 하고, 하나님을 네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이 네 운명을 주재하게 하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고, 이러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네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 네가 지녀야 할 인생관이다. 맞지 않느냐? 이것이 진리가 아니냐? (맞습니다.) 모든 생활 목표와 자기 인생의 방향은 무엇을 중심으로 해야 하느냐?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그리고 무엇이 있느냐? (평범한 피조물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 있느냐?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또한 개중 하나다. 또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진리에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더 구체적이다. 그렇지 않으냐? 모든 생활 목표와 인생의 방향은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해야 하며 진리에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과거에 네가 막연한 이상을 추구하는 데에 들이던 열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해 네게 진리 방면에서 발전이 있는지 보아라. 정말로 네게 진리 방면에 발전이 있으면 네게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사람의 생각과 관점이나 원칙에 관련된 갖가지 사람과 일, 사물이 임했을 때 속수무책이 되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곤혹스러워지거나, 막막해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이 이끌어 주고, 마음이 차분하고 편안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길인지 알 수 있다. 이래야 올바른 인생길을 걷는 것이다. 생명 성장이 아주 느린 사람들이 많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항상 자기 이상과 명예, 지위, 자기가 상상하는 인생 목표를 추구하고, 거기다가 복을 받으려 하고, 육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착실하게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참된 생명 진입이 없으며, 늘 참된 체험 간증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본분을 얼마나 오래 이행했든 진리 및 생명 진입 방면에서 발전이 거의 없고 수확도 미미하다. 만약 네가 정말로 몸과 마음을 본분 이행에 다 바치고, 모든 에너지를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쓰고, 진리에 공을 들였다면 너희 분량이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고, 지금 같은 내적 상태와 양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이 평소에 일부 잡무, 업무, 수중의 일거리에만 집중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본질은 사실 자기 바람을 이루고 욕망을 채우는 한편 자기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이란 무엇이냐? 일하면서 항상 자아를 찾고, 일정한 성적과 수확을 거두고 남의 인정을 받는 동시에 자기 꿈과 추구 목표를 실현해 자기 가치를 드러내고, 그런 다음 뿌듯해하려는 것이다. 사실상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는 것이고, 일을 하는 것으로써 자기 생활을 알차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오랜 세월 바삐 보냈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든 진리와는 무관하다. 그 사람은 여전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추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본업과 관련된 원칙 방면에서도 진입과 인식이 전혀 없다. 그래서 삶이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항상 책망받는 거지? 우리가 얼마나 공들였는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데, 왜 책망받는 거야?’ 네가 원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항상 원칙을 알지도 파악하지도 못하고 원칙 방면에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는 진리에,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지 않고 그저 단순하게 규례만 지키며 네 상상대로 일을 처리했다. 너는 늘 네 이상의 세계에 살고 네 관념의 세계에 산다. 네가 하는 일은 모두 진리와 무관하다. 너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네 사업을 한다. 그래서 너는 항상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알지 못한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힘만 쓰는 것으로 규정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억울해한다. 억울한 이유가 무엇이냐? 자기가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것은 약간의 고생에 불과할 뿐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도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그저 힘을 들여 일하는 것이다. 그저 힘을 들여 일하는 것이 합격한 본분 이행이냐? 그러면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냐? (아닙니다.) 둘 사이에는 거리와 차이가 있다.
억압감 방면의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에 관해서는 오늘 우선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일부 사람들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지 못해 억압을 느끼는 문제에 대해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무엇을 이해했느냐? 한번 정리해 보자. 우선 이상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하겠다. 여기서 분석하는 이상은 부정적인 것이지 정당하거나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상이란 무엇이냐? ‘이상’을 가장 적절한 말로 정의해 보아라.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서 벗어나 사람이 스스로 상상해 낸,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공상이며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네가 말한 것은 이상주의자의 이상이다. 보편적으로 이상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정의할 수 있겠느냐? 정의하기가 쉽지 않으냐? 사람이 자기 지위, 명예, 장래를 위해 수립한 추구 목표가 무엇이냐? (자기 지위, 명예, 장래를 위해 수립한 추구 목표가 바로 이상입니다.) 이 정의가 맞느냐? (맞습니다.) 사람이 자기 지위, 명예, 장래, 그리고 이익을 위해 수립한 추구 목표가 바로 이상이고 바람이다. 이것이 이방인들이 말하는 ‘이상’의 광범위한 정의가 아니냐? 우리는 그것의 본질에 근거해 정의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이상은 어느 방면에 속하든, 위대하든, 미천하든, 아니면 평범하든, 전부 사람이 한 방면의 이익을 위해 수립한 추구 목표다. 이 목표가 바로 사람의 이상 혹은 바람이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예시로 삼아 교제하고 분석했던 그 사람들의 이상 아니겠느냐? 사람이 자기 지위, 명예, 장래, 이익 등등을 위해 수립한 추구 목표가 바로 이상과 바람이다.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도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수시로 억압을 느낀다. 그들이 억압을 느끼는 것을 보며 생각해 보아라. 너도 그러한 내적 상태를 가지고 그러한 양상으로 살고 있지는 않느냐? 수시로 그러한 양상과 정서가 생겨나지는 않느냐? 만약 그러한 정서가 있다면 무엇 때문이냐? 지위, 명예, 장래, 그리고 네 이익 때문이다. 진리와 긍정적인 것이 자꾸만 네가 수립한 이상과 네 추구 목표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저지해서 너는 답답하고 울적하다. 그로 인해 억압의 정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상 문제다. 사람의 이상을 분석한 다음에는 무엇을 교제했느냐? 교회 혹은 하나님 집은 사람이 이상을 실현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교제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져야 할 올바른 추구 목표와 어떻게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될지,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지를 교제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교제한 주요 목적은 사람의 이상과 본분을 어떻게 선택하고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정당하지 않은 사람의 이상은 마땅히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반대로 사람의 본분은 마땅히 이번 생에 그것을 위해 일생을 내놓거나 바쳐야 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본분은 긍정적인 것인 반면 사람의 이상은 긍정적이거나 사람이 가져야 할 것이 아니며, 포기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가져야 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어 피조물이 응당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과 본분이 충돌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자기 이상을 내려놓고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 이상을 포기하고 본분을 지켜야 한다. 때를 막론하고, 사람이 몇 살까지 살든, 사람이 응당 해야 하고 추구해야 할 것들의 중심에는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진리에 순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해야 삶에 가치와 의의가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 시간에 보도록 하자!
2022년 12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