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8)
앞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첫 항목인 내려놓기를 교제했다. ‘내려놓기’ 방면에서 첫 번째로 교제한 것은 갖가지 부정적 정서 내려놓기였다. 주요하게는 사람의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교제하고 분석하여 부정적 정서 아래에 감춰져 있는, 올바르지 않고 치우친 사상 관점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맞느냐? (그렇습니다.) 즉, 사람 마음속의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여 여러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내면 깊은 곳의 갖가지 부정적 사상 관점을 해결한다. 물론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폭로하고 분석하여 사람에게 올바른 사상 관점과 인식을 심어 줌으로써 사람의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기도 한다. 또한, 현실 생활 속에서든, 인생길에서든 어떤 일이 닥칠 때마다 잘못되고 치우친 사상 관점 탓에 곤혹스러워지거나 그것에 결박당하는 대신 긍정적이고 올바르고 진리에 부합하는 사상 관점으로 그날그날의 생활과 매일 임하는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 생활 속에서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이 임했을 때 사람이 혈기의 방식으로 대하지 않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안에서 살며 하나님이 가르쳐 준 정확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이성적으로 생활과 인생길에서 직면하거나 체험하는 모든 일을 마주하고 처리할 수 있게 한다. 이러면 사람이 올바른 사상 관점의 인도와 영향하에 생활하게 되는 한편, 그런 긍정적인 사상 관점의 인도와 영향하에서 모든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게 된다. 물론 모든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게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 및 하나님이 마련한 모든 환경에 순종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이 주재하는 네 운명에 순종하면서 임하는 모든 사람, 일, 사물과 환경 속에서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교제하고 분석하는 것이 사람의 부정적 정서이든 아니면 부정적인 사상 관점이든, 전부 피조물이 응당 걸어야 할 길과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인이 걸어야 할 인생길에 관계된다. 물론 지음 받은 인류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도 관계된다.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이 겉보기에는 사람의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고 부정적 정서에 감춰진 사람의 각종 부정적이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해결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본질적으로는 사람을 인도하고, 사람에게 공급하고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여러 환경과 사람, 일, 사물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진정한 사람답게, 정상적인 사람답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이성적인 사람답게 행동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답게 행동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열납하는 사람답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방면의 진리 원칙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처신 방법과 관계된다.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으라는 말이 겉보기에는 그저 일종의 사소한 정서에 관계되거나 사람이 오늘을 사는 일종의 상태에 관계된 것 같지만, 사실상 그러한 정서와 단순한 상태는 사람이 걷는 길과 관련되고 사람의 처신 원칙과 관련된다. 사람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고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 같겠지만, 그것은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이 임했을 때 사람이 가지는 관점 및 입각하는 위치와 입장에 관계되므로 사람의 처신과 관계된다.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 관계된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 관계되기 때문에 그러한 부정적 정서와 부정적 사상 관점은 모두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부단히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할 것이 필요하다. 물론 사람은 반성 과정에서 자기한테 부정적 정서와 부정적이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즉시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긍정적이고 올바르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사상 관점으로 자신의 그런 부정적인 정서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대체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사람이 성품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우리가 교제한 것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의 첫 항목인 ‘내려놓기’의 주요 내용이다. 물론 사람의 다양한 정서 중 일부 구체적이고 지엽적이거나 특수하고 전혀 대표적이지 않은 부정적 정서도 역시 부정적이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에 관계된다. 그런 부정적 정서 혹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미미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하나하나 더 자세하게 교제하지 않겠다.
앞서 교제한 모든 부정적 정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현실 생활 속에 혹은 인생길에 존재하는 문제를 대변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갖가지 관점에 관계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갖가지 부정적인 사상 관점은 큰 방향, 큰 원칙과 관계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도 관계된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이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자, 사람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상 관점에 속하는 것들이다. 나머지 특수하고 대표적이지 않거나 비교적 개인적인 것들, 예를 들어 먹는 것이나 입는 것 또는 사생활 등등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큰 원칙에 관계되지 않는 것들은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의 구분과 관련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우리가 교제하는 화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나는 검은색이 좋아.”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의 자유요, 개인의 안목이고 취향이다. 그것이 원칙과 관계되느냐? (무관합니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것에 관계되지 않으며,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는 더더욱 무관하다. 예를 들어, 눈이 나빠 안경을 쓰는 어떤 사람은 “나는 금테가 좋아.”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금테는 너무 촌스럽잖아. 나는 무테가 좋아.”라고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에 관계되느냐? (관계되지 않습니다.) 이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에 관계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매일 집안일을 하고 청소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 정서가 있어. 항상 귀찮고 사는 것이 힘들어. 밥 먹는 것도 귀찮아. 밥 한 끼 해 먹으려면 한 시간 넘게 걸리잖아. 먹고 난 다음에는 그릇이랑 조리 도구도 씻어야 하고 주방 정리도 해야 하고. 그런 일이 너무 성가셔.” 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산다는 것은 진짜 귀찮은 일이야.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어야 하는데, 여름에는 아무리 얇게 입어도 덥고, 겨울에는 아무리 두껍게 입어도 추워. 이 몸뚱이, 정말 귀찮아 죽겠어!” 머리가 지저분해도 감기 싫어한다. 하지만 그냥 두자니 가려운 데다가 사람이 폐인 같고 꾀죄죄해 보여서 도저히 안 감을 수가 없다. 결국, 감으면서 성질을 낸다. “차라리 대머리면 얼마나 좋아. 머리카락이 있으니까 잘라야 하고 감아야 하고 너무 귀찮아!” 이것이 부정적 정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해결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것이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갖가지 부정적 정서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속하지 않느냐? (그저 육체 생활 속의 습관이자 나쁜 버릇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상생활 속의 잡다한 일들은 여자들의 경우, 특히 성인 여성의 경우에는 스스로 씻고 닦고 치우면서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들은 이런 방면에 약하다. 밥을 하고, 옷을 빨고, 집안일 하는 것을 귀찮아한다. 특히 옷을 빨아야 할 때면 근심이 많다. 빨자니 하기 싫고, 안 빨자니 너무 더러운 데다가 남들이 비웃을 것 같아 물에 대충 헹구고 끝낸다. 일상생활 속의 잡다한 일에 대한 처리 방식과 마음가짐은 성별에 따라 조금 차이가 난다. 여자는 상대적으로 꼼꼼하고 신경을 쓰는 편이다. 위생에 주의하고 체면을 따진다. 남자는 여자에 비해 서투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단, 지나치게 불결하면 좋지 않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쁜 습관을 많이 드러내 남들이 싫어하게 한다면, 그것은 인성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극복할 것은 극복하고 해결할 것은 해결해야 한다. 조금 부지런해져서 자기 생활 범위 안의 물건을 잘 정리해야 한다. 옷과 이불은 깔끔하게 개고, 업무 환경은 하루 이틀이나 이삼일에 한 번씩 청소하고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남들이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 하면 된다. 이토록 간단하다. 곤란해할 것도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 주기는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정도면 된다. 그것이 기준이다. 너무 오래 목욕을 안 하고, 머리를 안 감고, 옷을 안 갈아입어 몸에서 냄새가 나는 통에 사람들이 네게 가까이 가려 하지 않을 정도라면, 그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적당히 관리를 해야 한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거나 사람들이 너와 이야기할 때 코나 입을 막고 거북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대해도 아무렇지 않고 상관없다면 계속 살던 대로 살아라. 네게 과한 요구를 하는 사람은 없다. 네가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만약 네가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다면 개인 생활 환경과 위생을 최대한 잘 관리해라. 다른 사람이 싫어하지 않을 정도면 된다. 다시 말해, 자기 생활에 부담과 스트레스를 초래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이 받는 느낌도 고려해서 타인에게 스트레스와 악영향을 주지 말아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안에 갖춰져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만약 이조차 갖추지 못한다면 네가 어떻게 처신하겠느냐? 그러니 정상 인성으로 응당 해내야 할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구체적으로 안배해 주거나 하라고 명령을 내릴 필요 없이 너 스스로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개인 생활에 관련된 일들은 전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 및 준칙과 관계가 없으므로 사람 인성의 가장 기본적인 양심 및 이성에 기대어 처리하면 된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 지능은 갖추고 있다. 사소한 문제로 호들갑을 떨 것도 없고, 그런 자질구레한 일을 진리를 추구하여 반드시 깨닫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취급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이는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개도 체면이 무엇인지 아는데 네가 모른다면 사람으로서 수준 미달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개를 한 마리 키웠는데, 아주 예쁘게 생긴 녀석이었다. 눈이 크고, 입도 크고, 코도 예뻤다. 한번은 녀석이 먹이를 놓고 제 새끼와 싸우다가 얼굴을 물렸다. 하필 코 중간에 구멍이 나서 예쁜 얼굴을 망쳤다. 나는 얼른 약을 발라 줬다. “어떡하니? 이렇게 예쁜 녀석한테 흉이 남으면 보기가 얼마나 괴롭겠어!” 그러고는 녀석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가 나갈 때 너는 따라오지 마. 남들이 보기에 그 상처가 얼마나 흉하겠니.” 내 말을 듣고 “낑” 소리를 내던 녀석이 잠시 뒤에 멈칫하더니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쳤잖니. 코에 이렇게 큰 상처가 났으니 남들이 보면 놀릴 거야. 너는 일단 쉬어야 해. 우리가 나갈 때 따라오지 말고 상처가 다 나으면 너는 그때 나가자.” 이 말을 들은 녀석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나가겠다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개도 사리 판단을 한다는 말이다. 얼마 지나자 상처에 딱지가 앉고 많이 좋아져서 녀석을 데리고 나갔더니, 한 자매가 녀석을 보고 물었다. “어머, 코는 어쩌다가 그랬니?” 그 말을 들은 녀석은 곧장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가 있는 곳까지 달려가 다시 오지 않았다. 그 자매가 처음에 말을 걸었을 때만 해도 녀석은 얌전했다. 물을 주면 마시고, 도망치지 않았다. 그런데 “코는 어쩌다가 그랬니?”라고 묻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 것이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녀석에게 이렇게 물었다. “코 상처에 대해서 자매가 물어봤을 때 왜 도망쳤니? 혹시 너도 부끄러워?” 나를 쳐다보던 녀석은 부끄러움에 자꾸만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내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서 사람 품속으로 파고들며 쓰다듬어 달라고, 안아 달라고 했다. 나는 녀석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아들내미랑 물어뜯고 싸우면 안 된다. 또 물려서 흉이 지면 얼마나 보기에 안 좋겠니. 사람들이 놀릴 텐데, 그러면 네 체면이 뭐가 되겠어?” 보아라. 다섯 살짜리 개도 부끄러움을 안다. 얼굴에 상처가 났다고 사람을 피할 줄도 알고, 누가 보고 놀릴까 봐 걱정한다. 개도 이 정도 지능이 있는데 사람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사람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의 이성 범위 안에 이러한 것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체면이 무엇이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고 반감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에 대한 기준이 자기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이는 일상생활 중에서 가장 간단한 일이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다면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나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듯이 진리를 교제할 필요가 없다. 물론, 네가 자기 집에서 생활한다면 조금 불결해도 괜찮다. 그렇게 엄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네가 형제자매와 함께 생활한다면 정상 인성 방면의 기준을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더라도, 모종의 엄격한 요구 기준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그 일에 대해 느낌이 있어야 한다. 이는 모두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응당 해내야 하고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상 관점, 또는 각도, 입장에 관계되지 않고, 인생길이나 큰 방향과 목표에는 더더욱 관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는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요구에 근거해 해결하는 것이 좋다. 남들이 그 일 때문에 뒤에서 수군거리거나 네게 반감을 품지만 않게 하면 된다. 개인이 어떠한 생활 습관과 기호를 가지고 있는지, 또는 개인별 성격상의 차이, 또는 원칙에 관계되지 않는 문제를 취사선택하는 것, 이런 것은 사상 관점과 무관하므로 자유롭게 선택해도 되고, 자신의 그런 것들을 그대로 유지해도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와 기본적인 양심 및 이성을 주었으며, 사람이 자기 취미와 기호, 생활 습관, 혹은 자기 성격에 맞는 생활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다. 그 누구에게도 너를 단속하거나 결박하거나 질책할 권리는 없다. 진리 원칙과 하나님 말씀의 요구 사항에 관계되지 않는 문제의 경우, 구체적으로 말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에 관계되지 않는 문제의 경우, 누구나 자기 생활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만약 리더나 팀장, 책임자가 네 개인적 생활 문제를 질책하고 간섭한다면 거부해도 된다. 요컨대, 정상 인성의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 말씀의 요구 사항과 진리 원칙에 관계되지 않으므로, 네가 편안하고 적절하다고 느끼는 한편 다른 사람에게 지장을 주거나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예를 들어, 네가 꾸미기를 좋아하고 깔끔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지장을 줘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은 밤 11시면 자야 하는데 네가 빨래하거나 청소하고 있으면 안 된다. 네가 만약 네 집에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줄 일이 없으니, 밤에 안 자고 새벽 네다섯 시까지 시끄럽게 굴어도 괜찮다. 그것은 네 자유다. 하지만 네가 지금 형제자매와 함께 거주하면서 그런 행동을 하면 타인의 생활 속 휴식과 생활 리듬에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좋지 않다. 그런 행동은 네 권리와 자유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인 것이다. 이를 두고 인간성이 없다고 한다. 네 자유를 위해서, 네 육적인 기호와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남의 생활을 방해하고 남의 휴식 시간을 대가로 삼아 네 육을 만족시키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은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 행태이므로 고칠 필요가 있다. 이는 사람의 처신 원칙에 관계된다. 네 개인적 생활 방식에 무슨 문제가 있다거나 네가 위생에 중시하고 깔끔한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네 처신 원칙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너는 타인이 받는 느낌, 타인의 기분과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 너는 타인의 이익을 해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이익을 온전하게 지키고 있다. 이러한 처신 방식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처신 방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처신 원칙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상 인성의 기호, 취미, 생활 방식, 생활 습관, 자유, 권리 등등은 그 어떤 것이든 전부 사람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 있어야 정상 인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벗어난다면 그것은 정상 인성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범위 안에 있으면 너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만약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범위를 벗어나서도 네 자유를 강조한다면, 너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고 비인간이다. 이는 고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이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무엇을 똑똑히 알아야 하느냐?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범위 내에서 이러한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람의 처신 원칙이다. 네 개인적인 생활 습관, 생활상의 요구, 생활 방식 등등 이런 것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하든 네 자유이며,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구체적 요구 사항도 없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의 첫 항목 ‘내려놓기’ 중 열등감, 증오, 분노, 의기소침, 근심, 염려, 걱정, 억압감 등등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에 관해 교제해야 할 굵직한 방향 문제와 원칙에 관계되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이 정도다.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 원칙과 방향에 관계되지 않는 문제에 관해서도 앞에서 확실하게 교제한 바 있다. 네가 개인의 그러한 문제 방면에서 무엇이 내키지 않고, 달갑지 않고, 여의치 않든, 그것이 진정한 사상 관점에 관계되지 않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에 관계되지 않는 문제라면, 그것은 네 개인적인 문제이니 스스로 양심과 이성의 범위 내에서 조정하고 해결해야 한다. 배는 고픈데 밥하기는 싫은 상황을 예로 들겠다. 너는 고픈 배 때문에 일할 기운이 없지만, 밥을 하자니 짜증이 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거 부정적 정서 아닐까?’ 이는 부정적 정서 같은 것이 아니라 육체가 게을러서 밥을 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이는 패괴된 육체의 문제다. 네 경제적 여건이 괜찮다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서 대신 해 달라고 하면 된다. 그 정도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생활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의무가 없다. 그것은 너 자신의 일이다. 사노라면 먹고, 입고, 씻고, 닦는 것처럼 귀찮은 일은 항상 있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일이다. 사람은 개나 고양이와 다르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면 주인이 먹이와 물을 책임져야 한다. 배고플 때 먹이를 줘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얻어먹을 수 없다. 생활 방면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람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자기가 도맡아야 한다. 이는 부담이 아니다. 그런 일을 잘 배우는 것은 정상 인성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이제껏 자기는 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일부 남자들은 집에서 부모나 다른 가족들이 대신 챙겨 줬다. 가족들이 버릇을 잘못 들여서 밥 지을 줄도 모르고, 빨래할 줄도 모르고, 자기 생활 속의 그러한 일들을 수습할 줄 모른다. 가정 환경 탓이다. 그러다가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살게 되면 무엇이든 자기 스스로 할 줄 알게 된다. 빨래도 할 줄 알게 되고 이불도 깔끔하게 개어 놓는다. 사실, 이러한 일들은 전부 정상 인성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 아니며, 감당 못 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만약 네가 보다 높은 삶의 질을 바란다면 더 신경 써서 하고,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이 그다지 엄격하거나 높지 않다면 편한 대로 해도 된다. 이는 모두 원칙에 관계되지 않는 일이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첫 번째 큰 화제, 갖가지 부정적 정서 내려놓기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첫 번째 화제에 대해서는 대강 이야기가 끝났다. 이어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내려놓아야 할 것으로는 부정적 정서 외에도 사람의 추구, 이상, 바람이 있다. 이것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의 실행 중 ‘내려놓기’의 두 번째 항목이다. 오늘은 이것을 교제하겠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알아들었습니다.) ‘내려놓기’의 구체적인 실행 대상은 조금 전에 말했고, 너희도 받아 적었다. 그러면 자세히 살펴보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의 내용에 관해 너희는 무엇이 떠오르느냐?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교제해 주신 사람의 이상이 떠오릅니다. 한 방면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예로 들면,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스타가 되고 유명인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잘 쓰고 문학적 재능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문서 본분을 이행하고 작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사람 안에 생겨난 이상입니다.) 더 말해 보아라. 또 무엇이 있느냐? (사람이 남보다 뛰어나기를 추구하고 자기 장래와 소망을 추구하며 복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더 생각해 보아라. 또 무엇이 있겠느냐? 여기서 강조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추구, 이상, 바람이다. 사람의 사치스러운 욕망과 장래 운명에 대한 소망 이외에, 사람의 현실 생활과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인 환경 속에서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추구, 이상, 바람에 관계되는 것으로는 무엇이 있느냐? 즉, 인생에서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일이 무엇이 있느냐? (사람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 속박을 받습니다. 또, 사업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충돌할 경우 자기 사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도 내려놓아야 할 것들입니다.) 잘 이야기했다. 그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확이 있고 체험한 것이 있구나. 두 가지 방면 모두 맞는 말이다. 한 가지는 결혼이고, 다른 한 가지는 사업이다. 인생길에는 평생에 관계되는 큰일이 몇 가지 있는데, 이 두 가지 역시 거기에 속한다. 결혼은 누구에게나 큰일이다. 사업 역시 누구에게나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큰일이다. 이 두 가지 외에 또 다른 큰일이 있느냐? (가정, 부모, 자식을 대하는 방면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충돌하면 사람은 비교적 내려놓기를 어려워합니다.) 개요를 열거할 때 그렇게 길게 말해서는 안 된다. 조금 전에 하나는 결혼, 하나는 사업을 언급했다. 그러면 이 화제는 어떻게 말해야 하겠느냐? (가정입니다.) 그렇다. 가정 역시 큰 항목이다. 이는 누구나 관련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누구나 관련된다. 게다가 아주 구체적이고 대표성이 있다. 결혼, 가정, 사업은 모두 큰 화제다. 또한, 모두 사람의 추구, 이상, 바람이라는 주제와 관련되기도 한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에 관계된 화제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너희는 세 가지를 맞혔다. 참으로 훌륭하다. 보아하니 이 화제는 자세히 교제할 필요가 있겠다. 이는 너희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던 화제이며, 너희의 생활 혹은 분량, 체험과 비교적 밀접한 것이다. 또 하나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다.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어째서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라고 이야기하겠느냐? 깊이 생각해 보아라. 취미와 관심사가 우리가 교제하려는 사람의 추구, 이상, 바람에 관계되느냐? (관계됩니다.) 결혼도 관계되느냐? (네.) 가정은 관계되느냐? (관계됩니다.) 사업은 관계되느냐? 사업도 관계된다. 이 네 가지 내용은 모두 사람의 추구, 이상, 바람과 관계가 있다. 즉, 전부 다 사람이 마음속 깊숙이 품고 있는, 그것에 대한 상상과 구체적 요구 혹은 육체적, 감정적으로 얻고 싶은 바와 관계된다. 즉, 각기 다 구체적인 것, 구체적인 추구가 있으며, 사람이 이를 위해 치르는 노력 및 대가와 관련된다. 네 가지 모두 사람 일생의 사상 관점에 관계되고 영향을 주며, 사람의 올바른 추구 목표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에도 영향을 끼친다. 내가 이렇게 개괄적으로 말하면 너희가 잘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 조목조목 교제하고 살펴보면, 너희는 그 안의 문제를 차차 분명히 파악하게 될 것이다. 문제를 파악한 뒤에는 거기에서 사람이 응당 실행하고 준수해야 할 원칙을 찾아내게 된다.
첫 번째로 우선 취미와 관심사를 보겠다. 취미와 관심사, 이는 당연히 사람이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져서 어떠한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일시적으로 무언가를 좋아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것과 관련되지 않는다. 일시적인 것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말하는 취미와 관심사는 진정으로 사람의 정신세계 및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는 일종의 지향이자 추구이며, 더 나아가 사람의 행동이 있고, 이를 위해 대가를 치를 계획이 있고, 더욱이 이러한 취미와 관심사를 충족시키거나 더 가지기 위해, 혹은 자기 취미 및 관심사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기 위해 사람이 하는 구체적 노력과 분투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취미와 관심사란 사람이 이를 위해 목표를 세우고 이상을 가진 것이며, 더 나아가 이를 위해 대가를 치르고, 에너지를 쏟고, 구체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위해 관련 지식을 익히고,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주로 그 취미와 관심사에 관련된 지식을 학습하고, 실천하고, 몸소 경험하는 데에 할애하는 것이다. 그림 그리기를 아주 좋아하는 것이 취미이자 관심사인 사람을 예로 들겠다. 여기서 가리키는 그림 그리기는 인물 하나 혹은 풍경 한 폭을 그리는 것처럼 간단한 수준이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취미와 관심사가 아니고, 소묘, 산수화, 인물화 등 다양한 회화 테크닉을 배우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화와 수묵화까지 배우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배우는 목적은 그저 취미와 관심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라 회화에 대한 자신의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꿈이 생기고, 이상을 가지게 되고, 자기 바람도 생겼고, 심지어 이를 위해 필생의 에너지를 쏟아 회화를 배움으로써 이상적인 화가가 되어 회화를 업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미술 일에 종사하려면 아주 많은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전문 교육 기관에 입학해서 수업을 받고 깊이 연구하고, 각종 회화 관련 지식을 배우고, 현장에 가서 스케치도 해 보고, 그런 다음에는 전문가 혹은 유명한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대회에 나가는 등의 활동이 있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그의 추구, 이상, 바람이 존재한다. 물론, 그 모든 추구, 이상, 바람은 그의 취미와 관심사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한 취미와 관심사가 있었기에 그의 인생에 추구, 이상, 바람이 생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역사 연구를 좋아한다. 고대사, 현대사, 국사, 세계사 모두에 큰 취미를 느낀다. 큰 취미가 생긴 뒤로 점점 자기가 그 분야의 인재라는 생각이 들고, 반드시 해당 분야에 종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 그는 부단히 역사를 공부하고 깊이 연구한다. 그러는 동안 당연히 그의 추구, 이상, 바람이 부지런히 틀을 갖추고 형태가 완성된다. 그는 역사학자가 되고자 한다. 역사학자가 되기 전까지 그의 시간과 에너지 대부분은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중심으로 소비된다. 또 어떤 사람은 경제를 유난히 좋아한다. 숫자와 친하고 경제 방면에 관한 것들을 배우기를 좋아하며, 언젠가는 자기가 금융업계에서 실력자 혹은 성공한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 아무튼 그 역시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근간으로 추구가 생긴 것이고, 자기 취미와 관심사에 관련된 이상과 바람이 생긴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이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몸소 행동하고, 대가를 치르고, 에너지를 쏟는다. 그리고 자기 취미 및 관심사와 관련된 여러 방면의 지식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깊이 파고들고, 수학한다. 또 어떤 사람은 문예, 연기, 춤, 노래를 좋아하고 감독 역할을 좋아한다. 이러한 취미와 관심사가 생긴 후 자기 취미와 관심사로 인한 동기 부여로 그의 이상과 바람도 점차 틀을 갖추고 형태가 완성된다. 그의 이상과 바람이 점차 그의 인생 목표가 되어 갈 때, 그는 마찬가지로 이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바쁘게 일하고, 몸소 행동하며, 자기 인생 목표를 향해 추구한다. 그런가 하면 교육에 종사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교육과 관련된 지식, 예를 들어 심리학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익혀 취미 및 관심사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디자인을, 어떤 사람은 엔지니어링을, 어떤 사람은 과학 기술을, 어떤 사람은 전자를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은 곤충이나 미생물 연구, 그리고 각종 동물의 생활 습성과 생존 법칙 및 그들의 기원에 대한 연구 등등을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매스컴을 좋아해서 그 업계에 종사하며 진행자 혹은 앵커, 기자 등등이 되고 싶어 한다. 사람은 자기만의 갖가지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부단히 공부하고, 파고들고, 점차 이해하게 되며, 그런 뒤에는 자기 추구, 이상, 바람이 마음속에서 계속 뚜렷해지는 동시에 틀을 갖춘다. 당연히 추구, 이상, 바람이 점차 틀을 갖추어 가는 동안 사람은 자기 이상과 바람을 향해 노력하고 전진한다. 사람이 하는 구체적인 일 하나하나가 전부 이를 위해 에너지, 시간, 청춘을 쏟는 일이고, 더 나아가 감정과 심혈을 쏟는 일이다.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가 어떤 업계에 속하든, 어떤 범주에 관계되든, 그것으로 인해 사람에게 추구가 생기고 그것에 맞는 이상과 바람을 갖게 되면, 사람의 인생 목표와 인생의 방향도 확립된다. 사람의 이상과 바람이 인생 목표가 되면, 이 세상에서 장차 걸을 인생길이 대강 확정된다. 왜 확정된다고 말하겠느냐?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이겠느냐? 네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이상과 바람이 확정되고 나면, 그와 동시에 너는 그 방향으로 노력하고 분투하고자 한다. 심지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죽어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과 심리 상태가 생긴다. 그러면 너는 반드시 이를 위해 네 일생의 에너지와 시간을 바치고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네 일생, 운명, 장래, 그리고 너라는 사람의 이후 종착지가 필시 네가 이미 확정한 인생 목표의 영향을 받고 심지어는 거기에 말려들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주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일종의 취미와 관심사 때문에 자신의 추구, 이상, 바람이 확립되고 나면 사람은 절대로 아무것도 안 한 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너는 구체적인 취미와 관심사가 있기에 구체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의 주도하에 자기 이상과 바람을 가지게 된다. 그때부터 네 가슴은 계속 뛰고 발걸음 역시 멈출 줄을 모른다. 너는 반드시 한평생을 네 이상과 바람을 위해 살게 된다. 너는 절대로 간단하게 조금 배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너는 분명 자신이 그러한 특기가 있고 그러한 잠재력과 타고난 자질을 갖추었다는 이유로 자기에게 맞는 위치를 찾거나 벼락출세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비범한 존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며, 절대로 그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필승의 신심을 가지고 네 이상과 바람을 추구할 것이다. 심지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도 달게 치르고, 그 어떤 어려움, 곤란, 위험, 고통도 기꺼이 마주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느냐? 어째서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바탕으로 이상과 바람이 생기고 나면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겠느냐? (그는 자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더 높은 무언가를 추구하고자 하며, 남보다 뛰어나겠다는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위축되지 않고 계속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합니다.) 사람에게는 한 가지 본능적인 것이 있다. 자기 장점이 무엇이고 자기 관심사와 취미가 무엇인지 아예 모르면 자기는 존재감이 없고 자아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또한 자기가 무가치하게 살고 자기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여긴다. 사람이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발견했을 때는 그 취미와 관심사를 자아 가치를 실현하는 징검다리 혹은 발판으로 삼고, 대가를 치러 자기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며,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자 하고, 남의 눈에 띄고자 하며, 남들이 칭찬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사람이 되고자 하고, 비범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번 생에 보람을 일구고, 한 번 사는 세상에서 성공을 이룰 뿐만 아니라 이상과 바람을 모두 실현하여 더 가치 있게 살고자 한다. 시야를 넓혀 주위를 둘러봐도 어수선한 군중 속에 자기처럼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몇 없다. 그리고 원대한 이상과 바람을 가지고 결국에는 부단한 노력으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사업을 이루고, 원하던 명예, 이익, 위신을 얻고, 자기 가치를 드러내고, 자아 가치를 실현한다. 이것이 사람이 추구하는 바이다. 사람은 저마다 취미와 관심사가 다른 까닭에 제각기 다른 추구, 이상, 바람을 가진다. 물론 사람이 추구, 이상, 바람을 갖게 된 후 그 이상과 바람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사람이 이상과 바람을 가지고 이러한 추구가 생기면, 사람은 절대로 평범한 인물로 남을 리가 없다. 속된 말로 한 수 제대로 보여 줘서 자기가 보통이 아님을 다른 사람이 알게 할 것이다. 평범한 인물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번 생은 그냥 이렇게 살아야죠. 소를 방목해도 되고 농사꾼도 좋아요. 평범한 미장이나 청소부도 상관없고. 심지어 택배 기사나 음식 배달부라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이러한 이상을 가진 사람은 없다. “즐거운 택배 기사가 되는 것도 이상 아닌가요?” “그게 어떻게 이상이에요? 택배 회사 사장, 그것도 온 세상에 이름난 사장이 되겠다고 해야 이상과 바람이죠!” 기꺼이 보통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없다. 손톱만큼의 관심사와 취미라도 있으면, 그것이 사람을 사회적 유명인으로, 좀 이름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가능성이 0.01%라도 있으면, 사람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이를 위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른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에서 비롯된 이상과 바람은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느냐? 우리가 폭로하는 것은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폭로하고 분석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가진 모종의 취미와 관심사에서 비롯된 추구와 이상, 바람이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으로 인한 사람의 갖가지 행위와 사람이 걷는 길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위해 걷는 길은 과연 어떠한 길이냐? 누군가의 추구와 이상, 바람은 어떠한 길로 통하느냐?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느냐? 사람은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면서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고통과 여러 가지 육적인 분주함, 피로, 압박감 등등을 견디어 낸다. 그런데 그것 말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떠한 길을 걷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면서 어떠한 길을 걸어야만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느냐? 우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려면 첫 단계로 무엇을 배워야 하느냐? (각종 지식입니다.) 그렇다. 각종 지식을 배우고 갖추어야 한다. 지식이 풍부하고, 광범위하고, 수준과 깊이가 있을수록 사람은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에 더 가까워진다. 지식이 광범위하고, 풍부하고, 수준과 깊이가 있을수록 사람이 베테랑 소리를 듣거나 사회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가 쉽다. 한편으로 사람의 지식이 풍부하고, 수준과 깊이가 있고, 광범위할수록 그것은 그 사람이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그만큼 더 많다는 뜻이다. 이는 육체적 에너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밖에, 사람이 지식이라는 기반을 갖추게 되면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의 실현에 한발 더 가까워진다. 충분한 지식을 갖추는 것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그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 이후에는 사회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람의 이상 및 바람과 관련된 업계라는 타락의 온상 혹은 사람이 갈려 나가는 분쇄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 다양한 세력과 각축전을 벌이고, 투쟁하고, 힘겨루기를 하고, 온갖 시합이며 대회, 연구 토론에 참가해야 한다.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쏟는 한편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사람은 타락의 온상 속에서 자기 지식에 기대어, 더 나아가 사람들 속에서 배우거나 기존에 알고 있던 생존 노하우, 생존 철학, 생존 법칙에 기대어 그 집단에 적응하고 그 사회의 메커니즘과 룰에 적응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점점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이라는 목표에 가까워진다. 갖은 고생을 하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오는 결과는 무엇이냐? 성공한 자는 왕이 되고 실패한 자는 역적이 된다. 종국에는 그 결과로 자기 인생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고, 자기 인생의 목표를 실현하고, 동종 업계에서 자리를 잡는다. 그때가 되면 사람은 보통 중년이나 노년에 접어든 뒤이며 심지어 누군가는 이미 만년에 이르러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가 벗겨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이가 흔들린다. 그 나이까지 살면서 자기 이상과 바람은 실현했을지 모르나 나쁜 짓도 많이 저질렀고 자기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었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는 내내 본심과 다른 말을 밥 먹듯이 하고 도의와 양심에 위배되는 일과 선을 넘는 일도 많이 했다. 더 나아가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도 수없이 저질렀다. 남에 의해 곤경에 빠진 적도 많고 남을 곤경에 빠뜨린 적도 많으며, 남에게 패배한 적도 있고 남을 패배시킨 적도 있다. 살아남아서 자리를 잡았으니 운이 좋았던 셈이고, 인생이 완벽한 것 같고, 자아를 실현한 것 같고, 인생을 보람차게 산 것 같고, 이상과 바람을 위해 일생 동안 분투했으니 삶에 가치와 의의가 넘쳤던 것 같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응당 걸어야 할 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마땅히 있어야 할 좌우명조차 하나 없다. 그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하여 평생 분투했고, 또한 사람들과, 사회와,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평생 싸우느라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마지노선, 원칙을 잃어버렸다. 이상과 바람이 실현되고, 몇 차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단계마다 세운 인생 목표가 소원대로 이루어졌지만, 마음은 편안하지 않고 뿌듯하지도 않다. 사람이 자기 취미와 관심사 때문에 정한 추구와 이상, 바람의 길은 솔직히 말해 결국 명리를 추구하는 길로 통한다. 최종 목표에 도달했을 때 사람은 자아를 실현했고, 존재감이 생겼고, 명예와 이익을 모두 얻었고, 다 가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래와 종착지, 사람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생존의 가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만년에 가까워질수록 자기가 추구하던 모든 것이 그토록 막연하고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그 허망하고 막연한 느낌은 사람에게 허탈함과 공황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은 노년이 되어서야 자기가 추구하던 이상과 바람이 그저 자기 허영심을 채워 주었을 뿐이고, 자신에게 한때의 명예와 이익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며, 단지 잠깐의 위안에 불과할 뿐 그 잠깐의 위안은 삽시간에 일종의 불안과 공황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년으로 접어들수록 사람은 자기 미래를, 훗날을, 더 나아가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의 답을 얻지 못하면, 그 모든 것에 대해 올바른 사상 관점이 없으면, 사람은 공황에 빠지고 불안해진다. 이러한 불안과 공황은 사람이 눈을 감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쭉 이어진다. 사람이 얻어 낸 명예와 이익이 사람에게 주는 기쁨은 마음속에서 금방 자취를 감춘다. 심지어는 사람이 그것을 붙잡으려 하고 남겨 두려 할수록 더 쉽게 사라지며, 기쁨은 쉽게 불안과 공포로 탈바꿈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상과 바람이 어떠한 취미와 관심사에서 비롯되었든 그것은 결국 명리를 추구하는 길로 통하며, 최종적으로 이루는 목표와 사람이 얻는 것 또한 그저 명예와 이익뿐이고, 그 명예와 이익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단지 잠깐의 위안과 육적인 허영심의 일시적 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이 아주 실속 있으며, 덕분에 안심이 되고, 덕분에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위치를 더 잘 찾게 됐다는 느낌이 들고, 자기 인생의 방향을 더 잘 통제하고 자기 인생을 손에 쥐고 자기 운명을 주관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다가 이상과 바람이 실현되면 그제야 문득 깨닫는다. 이 깨달음의 원인은 무엇이냐? 필생의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것이 알고 보니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마음으로 느낄 수도 없는 허망한 것이었다. 그것을 애써 잡으려 하고 붙들어 두려 할수록, 잡을 수도 붙들어 둘 수도 없고, 또 그럴수록 너는 점점 더 낙담하고 허탈해진다. 점점 더 두려워지고 후회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람에게 취미와 관심사가 생겨 이상과 바람이 생겨난다. 이상과 바람은 사람에게 일종의 착각을 불러일으켜서 자기가 본인의 인생과 인생길, 생존 방식과 생존 목표를 통제할 능력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착각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며, 물론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사람은 흔히 본능적으로 자기 육체 혹은 정신세계에 만족감을 주는 것을 추구하며, 그것이 얼마나 아득한 곳에 있든지 간에 자기가 얻을 수 있고 잡을 수 있다는 생각만 들면 사람은 그것을 위해 대가를 치르고, 심지어는 평생의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붓는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취미와 관심사를 인생 목표 추구의 초석이자 일종의 자격, 밑천으로 보고 그것을 위하여 어떤 대가든 치른다. 네가 일단 그것을 위하여 대가를 치르려 하면, 그 길에 들어섰다 하면, 반드시 사탄의 조종을 받고 세상의 풍조와 세상의 룰에 의해 통제되는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어째서 알지 못하느냐? 이와 동시에 틀림없이 자기도 모르게 사회라는 타락의 온상, 사람이 갈려 나가는 분쇄기에 뛰어들게 된다. 그곳에서 네가 어떤 색으로 물들든, 어떻게 갈려 나가든, 네 인성이 어느 정도로 뒤틀리든, 너는 이렇게 자기를 위로할 것이다. ‘내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서, 내 앞날을 위해서 참아야 해!’ 또한 계속해서 자신을 이렇게 타이를 것이다. ‘이 사회에 적응해야 해. 어떤 색으로 물들든 무조건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해.’ 너는 그 모든 환경에 적응하는 동시에 다른 색으로 물든 자신에게 적응하고, 다른 모습의 자신과 다른 인격의 자신을 부단히 받아들인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염치가 없어지고, 점차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사람의 생각, 욕망, 선택을 주도하고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동시에 저마다 정도는 달라도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한다. 물론 아무리 열심히 추구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고생을 해도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최종 결과가 어떻든 사람이 얻는 것은 무엇이냐? 성공한 사람은 명예와 이익을 얻는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비록 명예와 이익을 잃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성공한 사람이 얻은 것과 같은 것으로, 다 사탄과 이 사악한 인류, 그리고 사회 전체의 메커니즘, 사회의 사악한 세력이 사람에게 초래한 여러 손상과 사람에게 주입한 각종 부정적인 사상이다. 왜 사람들이 생강은 여문 것이 맵다느니, 노회하다느니, 노련하다느니, 산전수전 다 겪어 봤다느니 하는 말을 자주 쓰겠느냐? 너는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한편 사회라는 타락의 온상, 분쇄기 속에서 적지 않은 것들을 ‘학습’한다. 육적인 본능 안에 없는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학습’에는 반드시 따옴표가 붙어야 한다. ‘학습’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사회가, 사탄이, 사악한 인류가 네게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갖가지 생각을 잔뜩 주입해서 너를 점점 비양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살게 하고, 점점 몰염치하게 만들고, 정상적인 사람과 바른길을 걷는 사람을 점점 경멸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또 하나 있는 최악의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네가 정상 인성,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을 점점 경멸하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양심을 팔고 도의를 저버린 자들의 비열한 행실을 선망하고 감탄하고, 그들의 비열한 행실과 악질적인 행위가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 혹은 경제적 수익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 맞느냐? (맞습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결과다.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를 추구하는 사이에 사람의 면모가 점점 흉악해지고, 무시무시해지고,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점점 상실되고, 사람의 도덕관과 생존관, 그리고 사람의 행동이 점점 사악해지고, 추해지고, 비열해지고, 야비해지는 것이다.
취미와 관심사가 생기는 것에서 시작해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사람이 걷는 길과 종사하는 모든 활동, 다시 말해, 사람의 전체적 생활 현황은 사회와 사악한 풍조에 휩쓸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사람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를 추구하는 동시에 사탄에게 조종당하고, 유린당하고, 좌지우지되는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당연히 이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사탄에게 더 깊이, 더 구체적으로 패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탄은 네게 일이 닥칠 때마다 자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인간의 존엄성, 인격, 도덕적 마지노선, 양심, 사람됨의 준칙 등 정상 인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이런 긍정적인 것들을 포기하라고 계속해서 주입한다. 사탄은 네가 이러한 것들을 점차 포기하게 하는 동시에 네 양심과 이성, 도덕적 마지노선, 그리고 얼마 없는 염치에 도전한다. 그런 다음 네가 사악한 풍조의 미혹과 유인 속에서, 사악한 풍조의 조종과 유린 속에서 계속 타협하게 하고, 계속되는 타협 과정에서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상 관점을 선택하게 하고,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상 관점 및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을 몸소 체험하고 힘써 실천하게 한다. 너는 몹시 내키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을 수행하며, 한편으로는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발적으로, 영합하는 태도로 이 모든 것을 수행한다. 요컨대,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지극히 수동적이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하자면 적극적으로 사탄의 조종과 패괴에 영합한다. 사람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를 추구하는 동시에 줄곧 사회의 사악한 풍조라는 타락의 온상에서 살아가며, 사악한 풍조에 휩쓸린 채 살아간다. 또한, 사람은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모순되고 복잡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모순되고도 복잡한 현실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이 추구하는 이상과 바람, 인생 목표는 점점 사람에게 가까워지지만, 정작 본인은 갈수록 사람다운 모습을 잃고 양심이 무감각해지며 이성이 사라져 간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 깊이 자기는 이상과 바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이상과 바람이 곧 자기 신앙이고, 마음속에 신앙이 있으면 곧 신념이 있는 것이요, 사람은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는 신념이 있으니 정상적인 사람이고 지금까지의 생존 방식과 생존 법칙에 따라 계속 추구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좋은 효과가 나고 인생의 이상 및 목표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는 한, 이를 위해 어떠한 대가를 치르든 가치가 있으며 무언가를 잃더라도 아깝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은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모순적 심리 상태에서 계속해서 사탄의 조종과 사탄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사탄에게 지배당하고 우롱당한다. 심지어 자기가 이 사회에서, 이 사악한 풍조 속에서 패괴되었음을 뻔히 알면서 그 상황에서도 자기 이상을 실현하고자, 자기 인생 목표에 도달하고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 추구한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내내 포기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잘 버텼다는 사실을 다행스러워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내는 이런 태도와 사람이 걷는 길, 사람에게 일어나는 여러 변화를 통해 볼 때 사람이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어떠한 길이냐? (멸망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이며 그 길을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멸망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정한 이상과 바람과 이어지는 인생 목표, 그 목표 지점에는 사탄이 기다리고 있다. 그 인생 목표로 향하는 길에 내내 사람과 동행하고 함께하는 것은 진리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사탄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사악한 풍조와 온갖 처세 철학입니다.) 그와 함께하는 것은 사탄이다. 사탄의 조종, 사탄의 패괴, 우롱과 거듭되는 유혹이다. 이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요, 멸망의 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상과 바람을 추구할 때 사람은 자기 이상과 바람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바람에 대한 추구를 동력과 기초로 삼아 명예와 이익을 손에 넣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질이고 실체이다. 그 길은 사람이 점점 더 명예와 이익, 세상의 사악한 풍조를 동경하게 한다. 그 길은 사람을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며, 더 타락시키고, 이성과 양심을 더 잃게 하고, 긍정적인 사물에서 멀어지게 할 따름이다. 동시에 사람을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훨씬 실질적인 생활 방식과 생존 목표에서 더 멀어지게 한다. 그 길은 사람의 패괴 성품이 점점 더 깊게 뿌리내리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할 뿐이다. 당연히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기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의 본질을 깨달은 뒤에 우리가 교제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어떻게 내려놓을지를 교제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앞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고 멸망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교제했다. 그렇다면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삶의 방식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생존 방식을 내려놓고 바꿔야 한다. 이는 올바른 생존 방식이 아니며, 올바른 인생길도 아니다. 올바른 것이 아닌 이상 이러한 생존 방식은 내려놓고 바꿔야 하며, 맞는 방식으로 생존하고 생활해야 한다. 맞는 방식으로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 그리고 추구와 이상, 바람을 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재간과 은사, 취미와 관심사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확립시키는 동시에 사람이 추구 목표를 갖게 한다. 이 추구 목표는 맞지 않고, 사람을 돌아오지 못할 길로 이끌며,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해서 결국에는 멸망에 빠뜨린다. 그것이 맞는 추구 목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맞겠느냐? 우선 사람에게 취미와 관심사가 있는 것이 맞는 일인지 살펴보겠다. 즉,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를 부정적인 사물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부정적인 사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죄해서도 안 되고 비판해서도 안 된다. 사람에게 어떤 방면의 취미와 관심사가 있고 특기가 있는 것은 정상 인성의 일부분이며,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춤추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래하기, 그림 그리기, 연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기계, 경제, 공학, 의학, 식물 재배, 항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특정 운동을 좋아하고 또 누군가는 지리 연구나 지질 연구를 좋아하며, 항공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보다 더 사람들에게 생소한 분야의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어느 방면의 취미와 관심사든, 그것은 모두 인성의 일부분이자 정상 인성 생활의 일부분이다. 부정적인 사물로 추하게 묘사되어서도 안 되고, 비판받아서도 안 되며, 금지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즉, 네게 어떠한 관심사와 취미가 있든 모두 정당하다. 모든 취미와 관심사가 정당하므로 그것을 존재하게 두어야 한다면, 그것과 관련된 이상과 바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예를 들어, 음악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치자. “저는 음악가, 지휘자가 되고 싶어요.” 그러고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서 음악만 공부하고 깊이 파고든다. 자기 인생 목표와 인생 방향을 음악가라는 위치로 확정한다. 이것이 맞는 일이냐? (틀렸습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자기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정해진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는 데에 일생을 바치더라도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네게 그 방면의 취미와 관심사가 생긴 뒤에 그것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하고, 일생을 대가로 네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정해진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려 한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길이냐? 장려할 만하겠느냐? (장려할 만한 길이 못 됩니다.) 장려할 만한지 아닌지는 일단 지금 이야기하지 않겠다.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는데, 어떻게 따져 봐야 이 문제가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정한 추구, 이상, 바람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관계가 있는지 살펴봐야 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있는지, 너의 사명 및 본분과 관계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또, 그것이 네가 자기 사명을 더 잘 완수하고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지, 혹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자신감을 더 주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 갖는 너의 권리다. 하지만 그것이 네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면서, 그 길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구원받는 길에 들어서게 해 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게 해 줄 수 있겠느냐? 최종적으로 네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경배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그럴 수 없다. 그럴 수가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자기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더 나아가서는 자기 특기와 은사로 말미암아 정해졌다고 할 수 있는 이상과 바람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있어야 할 것이냐, 없어야 할 것이냐? (부정적인 것이며,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진 이상과 바람의 성질이 어떻게 된 것이냐? 긍정적인 사물이 되었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사물이 되었느냐? 네게 마땅히 있어야 할 권리가 되었느냐, 아니면 네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느냐? (부정적인 것,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습니다.) 네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그 말은 곧 제 권리를 박탈하는 거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네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응당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인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 권리를 박탈하지 않는다. 선택권은 네게 있다. 너는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 성질이 어떠하고 이를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하여 우리는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사람의 이상과 바람은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다. 물론 더 확실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고자 한다면,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한다면, 너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이상과 바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번 더 바꿔 말해서,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고자 한다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여 명예와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을 달성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네.) 모두 확실해졌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고 구원에 이르고 싶다면, 네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길을 포기해야 한다. 즉,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길을 포기해야 하며, 그러한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것을 네 인생 목표로 선택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 추구와 이상, 바람을 전부 실현하지 못하고 다 내려놓았으면 제 취미와 관심사는 어떻게 하나요?”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네게 자신만의 취미와 관심사가 있더라도 그것이 너의 정상적인 추구를 교란하지 않으며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네 인생 목표와 네가 걷는 길에 관련되지만 않는다면, 그 취미와 관심사는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 물론 이렇게 이해해도 된다. 그 취미와 관심사가 네 인성의 일부분이라면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의 외모, 가정, 배경, 생존 환경 등등 여러 방면의 요소는 전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가진 모종의 취미와 관심사 역시 하나님이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은 확실하다. 예컨대 언어에 능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림 그리기, 음악, 소리 구분, 색깔 구분 등등에 능한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특기든 아니면 네 취미와 관심사든 모두 인성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취미와 관심사를 주었겠느냐? 네 인간적인 생활을 더 풍부하면서도 다채롭게 하고, 네가 올바른 인생길을 걷는 데에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도 즐길 거리와 여가 활동이 함께하는 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네 생활이 너무 무미건조하거나 단조롭거나 따분하지 않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예배에서 찬양할 때 피아노 반주나 기타 반주를 해 줄 수 있다. 만약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면 다들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반대로 반주자가 있으면 반주 없이 노래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효과가 나온다. 다들 즐거워하는 동시에 견문이 넓어지고, 경험이 풍부해지고, 생활이 조금 더 다채로워진다. 삶이 더 행복해지는 느낌을 받고, 사람의 기분이 더 유쾌해진다. 이는 정상 인성에도 유익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에도 유익하다. 또 다른 예로 네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고 치자. 때로 형제자매들의 생활이 단조롭다 싶으면 너는 익살맞은 그림을 그린다. 몇몇 사람이 소극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의 표정과 얼굴, 그리고 그들이 하는 소극적인 말을 우스꽝스럽고 익살맞은 만화로 그리고 정리해서 소책자를 만든 다음 모두에게 보여 주고 그 소극적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보고서 “어어, 이거 나 아니야?” 하더니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즐거워진 그는 소극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온다. 이러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크게 힘을 들이지도 않고서 상대를 아주 간단히 소극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한 것이다. 여가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연기에 관해 토론하고, 온갖 소극적인 사람, 교만한 사람, 적그리스도의 갖가지 독선적인 모습 등등을 연기하면서 사람들이 분별력을 키우고 견문을 넓히게 한다면,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이를 왜 활용하지 않느냐? 이러한 취미와 관심사는 사람에게 이롭다. 하지만 네게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이상과 바람이 생긴다면, 그것의 역할은 너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이끄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게 있어 그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네가 취미와 관심사를 생활 속에서 활용하여 네 인성의 견문을 넓히고, 생활을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고, 너에게 재미와 명랑함을 더하고, 한층 더 윤택하고, 해방되고, 자유롭게 산다면, 네 취미와 관심사가 긍정적인 작용을 하여 여러 사람을 돕고 너에게도 도움이 되는 동시에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보탬이 된다. 네 기분이 안 좋을 때나 의기소침할 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한다면, 경쾌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곡을 연주함으로써 기분이 풀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할 수 있게 되고, 소극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원망이 사라지고, 본분을 팽개치지 않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자기 약점과 결함을 발견하여 자기가 너무 나약하고 그 어떤 담금질과 타격도 견디어 내지 못함을 알게 된다. 악기 연주 한 번으로 기분이 풀리면, 이는 곧 삶의 요령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취미와 관심사가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취미와 관심사는 일종의 도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잘 쓰기만 하면 네 기분을 바꾸어 주고, 네가 더 정상적이고 이성적으로 살게 한다. 어느 정도는 네가 진리 실제에 더 빠르게, 혹은 더 잘 진입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본분을 이행할 때 네게 보조 도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물론, 인성이 나쁘고, 악하고, 항상 야심이 있고,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거나 그 자체로 적그리스도인 사람이 취미와 관심사를 가지면 문제가 된다. 그는 취미와 관심사를 밑천으로 삼아 자기가 비범하다고 자부한다. 이는 틀림없이 악을 행하는 그의 기고만장한 기세를 더 키운다. 그러므로 취미와 관심사 자체는 나쁘거나 부정적인 사물이 아니다. 좋은 사람, 정상적인 사람은 그것으로 긍정적인 일을 하고, 나쁜 사람, 악한 사람, 부정적인 사람은 그것으로 못되고 악한 짓을 한다. 그러므로 취미와 관심사는 너를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주제로 돌아가자. 취미와 관심사의 본질을 알았으면, 개인의 취미와 관심사를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 된다. 더욱이 어떠한 취미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배척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취미와 관심사는 정상 인성의 일부분이다. 사람은 그것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네 취미와 관심사가 다른 사람의 생활에 지장을 주거나, 남에게 반감을 유발하거나, 혹은 네가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지키기 위해 남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교란한다면, 이는 부적절한 일이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너의 취미와 관심사는 정당하다. 사람이 올바르게 그것을 대하고, 합리적으로 사용하고 발휘하기를 바란다. 물론, 취미와 관심사를 가장 적절하고 올바르게 사용하고 발휘하게 해야 한다. 즉, 네 취미와 관심사를 썩히지 말고, 네가 하는 일과 네가 이행하는 본분을 위해 효과를 최대치로, 극치까지 발휘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 취미와 관심사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아주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저는 그 방면의 지식이 아직 충분하거나 풍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요. 그 방면의 지식을 더 잘, 더 체계적으로 배워서 본분에 적용했으면 하는데, 그래도 될까요?” 그래도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많이 배우라고 거듭 너희를 격려한다. 지식은 일종의 도구이다. 사람의 사상을 타락시키고 좀먹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은 지식이라면 배우고 깊이 파고들어도 괜찮다. 그것을 훌륭하고 긍정적인 도구로 삼아 본분 이행에 적용하여 봉사하게 하고 효용을 발휘하게 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면 적절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물론 이러한 실행법은 취미와 관심사를 올바르게 대하는 방식인 동시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올바르게 내려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네가 취미와 관심사를 이용해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고, 개인의 야심과 욕망을 채우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올바르게 이용하고 효용을 발휘하게 한다면, 이는 정당하며 정확한 실행법이다. 물론 올바르고 긍정적인 실행법이기도 하며, 또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구체적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취미와 관심사를 어떻게 올바르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내려놓기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우리는 취미와 관심사를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취미와 관심사를 기초와 밑천으로 삼아 정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분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이다. 조금 전에 네 취미와 관심사가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긍정적인 효과를 내게 하라고 교제했다. 이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일종의 적극적 실행 방식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은 취미와 관심사가 생겼다고 해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더 실질적인 내려놓기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잘 활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정해진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즉, 자기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긴 인생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정상적으로 발휘하고 있음을 어떻게 분별해야겠느냐? 만약 한 가지 취미와 관심사가 생긴 뒤에 네가 그것을 사역과 본분 이행에 올바르게 활용하고 네 일상생활에 적용한다면, 네가 추구하는 목표가 자기를 과시하거나 치켜세우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인지도를 높여서 더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고, 칭찬하고, 호의를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물론 네 취미와 관심사로 사람들의 마음속 지위를 얻음으로써 그들이 너를 높이 세우고 따르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면, 너는 취미와 관심사를 긍정적이고, 알맞고, 적절하고, 이성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정상 인성에 부합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진리 원칙에 따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취미와 관심사를 발휘하거나 적용할 때 남에게 탄복하고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한편 특별히 뚜렷한 목적성을 갖고 자기를 과시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뻔뻔스럽게, 강제로 네 말을 듣고 받아들이게 하여 네 취미와 관심사를 과시하려는 허영심을 채운다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고, 종국에는 네 취미와 관심사를 자본으로 삼아 타인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속 지위를 얻고,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을 쌓는다면, 최종적으로 네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명예와 이익이라는 수확을 얻는다면, 이는 취미와 관심사를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정상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행동은 정죄받아 마땅하며, 사람에 의해 분별되고 버려져야 한다. 물론 사람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네가 본분 이행을 기회로 삼아, 혹은 네가 리더나 책임자, 무슨 인재라는 기치를 내세워 다른 사람 앞에서 네게 어떠한 특기와 재주가 있음을 과시하고 네 취미와 관심사가 남보다 낫다고 과시하는 것은 부적절한 행동이다. 이는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발휘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을 쌓고 자기 야심과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이 과정 혹은 이러한 행실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이용해, 사람들이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숭배하는 심리를 이용해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내려놓기가 쉬운 일이냐? 네게 특별한 취미와 관심사가 있을 때,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취미와 관심사는 변함없이 네 인성 안에 존재하면서 네가 걷는 길에는 관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자기한테 어떠한 취미와 관심사가 있는지 늘 과시하려 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거나 인지도를 높여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려 하고, 더 많은 사람의 주의를 끌려고 하면, 그 과정과 그러한 행실은 절대 단순한 행동 방식이 아니다. 그 모든 행동 방식과 태도를 종합해 보면 곧 한 사람이 걷는 길이 된다. 이 길은 무엇이냐? 하나님 집에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고자 열심히 추구하고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를 추구하여 자기 야심과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이렇게 추구한다면 네가 걷는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요, 멸망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당장 돌아서서 이러한 행동 방식을 바로잡고, 이러한 행동 방식과 야심 및 욕망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저는 여전히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지 마라.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네 취미와 관심사를 감추고 최대한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본분 이행에 필요하면 어떻게 하나요?” 드러내야 할 때, 반드시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될 때는 드러내라. 그것은 정상적으로 이용할 때다. 그러나 지금 네가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길을 걷고 있다면 드러내지 마라. 과시하고 싶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를 다지고 그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감찰과 징계를 받아들이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야심과 욕망을 발원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그것을 없애서 절대로 실현되지 않게 해야 한다. 어떠냐? (좋습니다.) 쉽게 할 수 있겠느냐? 쉽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능력이 있는데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무슨 특별한 장기까지 갈 것도 없고, 어떤 사람은 요리만 조금 할 줄 알아도 어디서나 과시하고 싶어 한다. 스스로 ‘레전드 두부 요리사’, ‘면 요리 여왕’ 같은 칭호를 붙이기도 한다. 겨우 이러한 특기에도 과시할 가치가 있느냐? 만약 그에게 특별한 은사가 있다면 대체 얼마나 오만하게 굴겠느냐? 분명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물론, 취미와 관심사 때문에 잘못된 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자기 취미와 관심사 때문에 종종 생각이 갈팡질팡한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가 과거에 정한 이상과 바람을 잊지 않고 되뇐다거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이상과 바람을 계속해서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자기한테 그러한 이상과 바람이 있는데 여태 실현하지 못했다고 속으로 거듭해서 자신에게 말한다. 그것을 위해 구체적인 대가를 치르거나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실행에 옮긴 적이 없지만, 마음에 단단히 뿌리내린 그 이상과 바람을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앞서 교제하고 분석했듯이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세상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고 멸망으로 통하는 길이다. 두 개의 평행선이 그러하듯 진리 추구와 그 길 사이에는 절대 접점이 없다. 당연히 얽힐 일도 절대로 없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며 구원받고 싶다면, 마음속에 품었던 이상과 바람을 철저히 내려놓아야 한다. 남겨 두지 말고, 보물처럼 아끼지도 말고, 버려야 한다. 이상 및 바람을 추구하는 것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두 갈래 길이다. 네게 이상과 바람이 있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고 긴 세월 체험한 것을 통해 각오를 다지고 착실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졌다면 과거에 품었던 이상과 바람을 포기하고, 그것을 너의 속내와 의식에서, 혹은 마음 깊은 곳에서 철저하게 제거해야 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면 네 이상과 바람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동시에 네 발목을 붙잡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기가 힘겹고 어렵게 만들 것이다.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안 바에는 차라리 단호하게 그것을 끊어 내고, 철저히 내려놓고, 다시는 생각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더는 어떠한 환상도 품지 않는 편이 낫다. 네가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저는 아직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는 길에 큰 흥미를 못 느껴요. 제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지, 진리를 추구할 사람이 맞는지도 모르겠고요. 구원받는 길도 제게는 아직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요. 오히려 세상에서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로드맵, 방안과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 그렇다면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길을 포기하고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러 가도 된다. 물론 지금 네가 도대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야 할지, 아니면 진리를 추구해야 할지 확신이 없다면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혀 보기를 권하겠다. 하나님 집에서 한두 해 더 지내다 보면 먹고 마시는 하나님 말씀이 늘어나고 체험하는 환경이 많아지면서 일을 바라보는 각도와 방식이 더욱 성숙해지고 기분과 내적 상태가 점점 나아질 것이다. 이는 틀림없이 네게 대단히 좋은 일이다. 어쩌면 2년 뒤에는 네가 약간의 진리를 깨닫고 이 세상과 인류를 철저히 간파하여 네 이상과 바람을 완전히 내려놓고, 기꺼이 일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끝까지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과거의 이상과 바람을 포기하기로 각오를 다지고 결심한 뒤에 더는 망설이지 않고 착실하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 네게 확신이 없다면 1~2년 뒤에 다시 자기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지 보고 싶다고 해도 하나님 집에서는 강요하거나 “너는 우유부단하고 착실하지 못하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1~2년 뒤에 네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이 많아지고, 네가 들은 설교가 많아지고, 진리를 조금 깨닫고, 인성이 성숙해지고, 사물을 보는 각도와 인생관, 세계관이 변화하면, 그때는 지금보다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는 이방인들이 말하듯이 자기한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기가 걷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만약 네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데에 아무런 흥미가 없는데 그저 부모나 동료가 복음을 전했기에 체면 또는 예의를 생각해서 받아들였고, 하나님 집에서 마지못해 예배에 참석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고 치자. 이와 동시에 교회 형제자매들은 최소한 남을 괴롭히지는 않으니 꽤 괜찮은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하나님 집에는 적어도 이치를 따질 데가 있다고 생각하며, 진리가 권세를 잡은 하나님 집에서는 수모를 받거나 괴롭힘을 당할 일이 없으므로 이방 세계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네 이상과 바람을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고 바꾼 적도 없으며, 오히려 과거에 품고 있던 이상과 바람이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사상과 영혼 안에서 점점 강렬해지고 뚜렷해지는 데다가 그러한 이상과 바람이 점점 뚜렷해질 때 너는 하나님을 믿으며 교제하는 진리와 매일 하는 말과 일, 그리고 생활 방식 등등을 점점 더 무미건조하고 따분하게 느끼며 기분이 못마땅해지니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진리 추구에 전혀 흥미를 못 느끼며, 올바른 인생길을 걷는 것과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가 하는 문제에 조금도 호감을 못 느낀다고 치자. 그러면 이들에게 말하겠다. 당장 네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러 가라! 세상에 네 자리가 있으며, 번잡하고 어수선하며 사악한 시류 속에 네 자리가 남겨져 있다. 너는 분명 소원대로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고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집은 네가 머무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고 네게 이상적인 곳이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도 당연히 네가 원하는 길이 아니고, 네게 필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네 이상과 바람이 점차 형태를 갖추는 중이고, 네가 아직 젊고, 세상에 나가 악착같이 분투할 에너지나 자본이 있을 때 어서 하나님 집을 떠나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러 가라. 하나님 집은 네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훗날 네가 복을 얻을 가망이 안 보이고, 그 어떠한 체험 간증도 말하지 못하고,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때에야, 50, 60살, 70, 80살이 될 때에야 비로소 각성해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마라. 그래 봤자 이미 너무 늦은 뒤다. 너는 하나님 집에 남기를 원하지 않아서 자신을 망친 것이다. 이러한 부류는 자기 속마음과 다르게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을 필요가 없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내 말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네가 지금은 아직 진리 추구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로 각오를 다졌고, 구원받을 수 있든 없든, 죽든 살든 하나님 집을 떠나지 않기로 다짐했다면 바로 이러한 사람이 내가 말한 대상이다. 당연히 여기에 내가 성명을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이다. 오늘 교제한 화제인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전제하에 한 말이다. 또한, 진리를 추구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기도 하다. 그 외에, 진리를 추구해 구원에 이르는 이 추구의 길, 추구 방향, 추구 의지, 추구 결심과 무관한 사람은 오늘 화제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이는 보충적인 성명이다. 이 성명이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 어떤 진리 원칙, 가르침, 공급, 붙들어 줌, 도움이든 모두 이성을 바탕으로, 사람이 원하는 상황에서만 사람에게 이야기해 준다. 만약 네가 듣기 싫다면 들리지 않도록 귀를 막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고, 자리를 떠나도 된다. 전부 다 괜찮다.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를 교제하면서 사람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그 누구도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것이 좋지 않으냐? (좋습니다.) 강제적인 수단을 쓰느냐? (쓰지 않습니다.) 강제적인 수단을 쓰지 않는다. 진리가 사람에게 주는 것은 생명, 영원한 생명이다. 네가 얻기를 원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얻을 수 있다. 네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반항하면 얻을 수 없다. 얻든 얻지 못하든 결과는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할 때 반드시 몇 가지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교제하는 까닭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 마치 마라톤 참가와 같기 때문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선수에게는 아주 대단한 체력이나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인내력과 끈기가 필요하고 신념이 있어야 하며,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물론, 마라톤에 참가하는 과정에는 이런 정신세계의 요소들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 가볍고 원활하게 혹은 바라는 대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짐을 내려놓을 필요도 있다. 마라톤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몇 번째로 도착하느냐가 아니라 참가 과정에서 사람이 드러내는 태도, 사람의 끈기와 인내력, 그리고 참가 과정에서 사람이 이겨 내는 모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여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흡사 마라톤 운동과도 같다. 아주 긴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과정에서 진리 추구와 무관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들은 그저 단순하게 진리와 무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고, 반드시 무언가를 버려야 하며,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려면 버려야 할 것이 많다. 그것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과 다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끌어 준 올바른 인생 목표 및 방향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위배되는 것,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올바른 인생길을 걷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이며, 전부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거나 더 풍부한 물질과 금전이라는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길을 걸으며 의지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지식,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 그리고 온갖 처세 철학, 방식, 수단, 계략이다.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할수록 사람은 점점 진리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끌어 준 올바른 인생길로부터 멀어진다. 사람 마음속의 이상과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공허하다. 그것은 네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인식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주재자에게 순종하는 등의 긍정적인 사물을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이상과 바람을 추구할 때, 너는 진리에 맞는 이런 긍정적인 사물과 가치 있는 것들을 얻지 못한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으로 통하는 모든 인생길의 궁극적인 목표와 본질, 성질은 하나같이 똑같다. 전부 다 진리와는 반대된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다르다. 그것은 네게 올바른 인생길을 이끌어 준다. 크게 말해서 이렇다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갖가지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너의 올바르지 못하고 치우친 사상 관점을 폭로하는 동시에 네게 올바르고 정확한 사상 관점을 알려 주고, 지도해 주고, 공급해 주고, 가르쳐 준다. 물론 어떠한 사상 관점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지도 알려 준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네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떻게 정상 인성 안에서 살며 진리 원칙에 따라 처신해야 할지를 알려 주고, 최소한 양심과 이성의 기준 내에서 인간답게, 사람으로 살라고 알려 준다. 그 밖에 모든 일을 대할 때,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응당 가져야 할 사상 관점과 각도, 입장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이런 올바른 사상 관점과 각도 및 입장은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할, 올바르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준칙과 원칙이기도 하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실제에 도달하거나 진입하면, 사람은 구원받게 된다.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얻으면,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하나님 말씀에 완벽히 부합하게 되고 하나님과 합하게 된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사람이 다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도 다시는 사람을 형벌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는다. 사람이 더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비로소 진정으로, 명분이 바르고 말이 사리에 맞게 피조물의 창조주가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돌아오고,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경배, 순종, 경외를 누린다. 이러면 모든 것이 순리에 맞게 된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하여 만물을 창조했고, 인류는 하나님의 주재하에 만물을 관리하며, 만물은 인류의 관리하에 하나님이 만든 법칙과 규율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앞을 향해 발전하고 이어진다.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누리고, 만물은 인류의 관리하에 질서 정연하게 생존해 간다. 만물은 인류를 위하고, 인류는 만물을 위한다. 이 모든 것이 그토록 조화롭고 질서 정연하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주재에서 비롯되었으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서 비롯되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이것이 바로 사람이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의 궁극적 의의 중 하나다. 보아라. 지금 네가 내려놓는 것은 한때의 이상과 바람이지만, 네가 마지막에 얻는 것은 진리요, 생명이며,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다. 네가 내려놓은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이상과 바람보다 몇천 배, 몇만 배나 귀한지 모르며, 말 그대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 하나 확실하게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 봤자 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게 될 일은 영영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태어나서부터 네 부모는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거짓말하는 법과 자기를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해. 남들한테 괴롭힘을 당하지 마. 누가 괴롭힐 때는 강하게 나가야 하는 거야. 나약하게 굴지 말고 남한테 만만하게 보이지 마. 그리고 지식을 배우고 강해져야 해. 그래야만 이 사회에 발붙일 수 있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해야 해. 여자는 독립적이어야 하고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야.” 너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이러한 교육을 받았다. 얼핏 보면 네게 처신하는 법을 가르친 것 같지만, 사실 네 부모는 내내 열심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목숨이라도 건 사람들처럼 너를 이 세상으로, 이 사악한 시류 속으로 떠밀면서 네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르게 하고, 정의로움과 사악함,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는 법을 모르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네 부모는 너를 이렇게 가르쳤다. “처신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해. 남한테 너무 신사적으로 굴 것 없어. 남한테 너그러운 것은 자기한테는 잔인한 짓이야.” 네가 철이 든 이후부터 부모는 너를 이렇게 교육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너는 항상 이렇게 배웠다. 그들이 네게 가르친 것은 사람이 되는 법이 아니라 귀신이 되는 법이며, 거짓말하는 법, 악을 행하는 법, 멸망하는 법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게 된 다음에야 사람으로 살려면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말은 솔직하고 진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는 용기를 내서 겨우 한 번 진실한 말을 한다. 자기 양심과 도덕의 마지노선을 지켜서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너를 경멸하고, 가족들은 너를 원망하고, 심지어 친구마저 너를 비웃는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너는 타격을 받고 견뎌 내지 못한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는 알 수가 없게 된다. 사람이 되느니 귀신이 되는 편이 차라리 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귀신이 되기로 한다. 이 사회의 사악한 시류를 따르면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네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사람이 한 명도 없지만,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이 네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진정한 사람인지 가르쳐 준다. 진정한 인생이란 무엇인지, 거기에 대한 올바른 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이를 두고 사람답게 처신하는 것이라 한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사람됨의 근거로 삼을 줄 알고, 진리 원칙을 깨닫고 거기에 진입하면 처신할 줄 아는 것이고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됨의 근본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살아갈 자격이 있으며, 죽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마귀처럼 행동하는 자들, 사람의 탈을 쓴 산송장들에게는 살아갈 자격이 없다. 어째서냐?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인류를 위해 예비한 것이고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예비한 것이지 귀신들에게 예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느냐?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들의 덕을 본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이 단계 구원 사역만 아니었어도, 마귀 사탄을 이용하여 봉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 선민이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고 마귀의 본질을 간파하도록 할 필요만 없었어도 하나님은 진작 그들을 멸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누릴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낭비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는 하나님의 기분이 어떻겠느냐? 기분이 좋겠느냐?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 진정한 사람들을 절박하게 구원하려는 것이다. 이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서 이들이 구원에 이르면, 살아남을 자격을 얻고 파멸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진다. 이들의 생존 법칙과 인생관, 이들이 걷는 길에서 이들의 추구,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설령 정확하고 올바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진리에 위배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이들은 멸망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업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생존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자면 인류에게 뒤를 이을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의 조상에게 뒤를 이을 사람이 생긴 것이다. 만물을 관리할 인류가 있으면 하나님은 마음 놓고 안식할 수 있다. 하나님이 관리할 필요가 없어진다. 만물에는 저마다의 법칙과 규율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이 일찍이 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이 또다시 어떤 생각을 하고, 마음을 쓰고, 공사를 벌이지 않아도 만물은 각자의 법칙과 규율 안에서 생존하며, 인류는 그저 유지하고 관리만 하면 된다. 이러한 인류가 있는데 하나님이 마음 쓸 일이 뭐가 있겠느냐? 바쁠 일이 뭐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안식할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할 때가 곧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는 때이다. 물론 인류에게 있어서도 기뻐할 만한 때이다. 인류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는 것을 바탕으로 결국 구원에 이르렀고, 더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게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하나님에게 얻어져서 다시는 죽음을 맛볼 필요가 없어졌다. 즉,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이는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큰 이점이 있는 데다가 하나님의 뜻이 이러함을 알았다면 사람이 품고 있던 사소한 이상과 바람쯤은 좀 내려놓을 만도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각도에서 가늠해 봐도 그러는 것이 적절하다. 이토록 적절하다면 응당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누구나 이론상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려놓을 것이냐? 사실 아주 간단하다. 네가 더는 자기 이상과 바람을 위해 그 무엇도 행동에 옮기지 않고, 어떠한 에너지를 쏟거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 더는 이상과 바람에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을 위해 무엇도 희생하지 않으면 된다. 그 대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개인적인 바람과 이상을 내려놓고, 다시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꿈조차도 그것과 관련된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길을 향해 마음이 차츰차츰 돌아서거나 기울어지고, 매일 일하고 마음을 쓰고 에너지를 쏟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 모두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함이라면, 점진적으로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는 것이다.
오늘 교제한 화제인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를 잘 이해했느냐?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알겠느냐? “어휴,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내려놨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사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세상의 사악한 시류와 이방인들이 걷는 명리 추구의 길을 점차 간파하게 되며, 차츰차츰 내려놓게 된다. 네가 아직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그저 마음속으로 내려놓기를 원할 뿐이라면, 이는 진정으로 내려놓은 것이 아니다. 네가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과 진실로 내려놓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고,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면 이상과 바람 같은 것들을 내려놓기가 수월해진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저는 정말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고 싶어요. 타락의 온상에서 더럽게 물들기도 싫고 분쇄기에 들어가서 갈려 죽기도 싫어요.”라고 말하며 살아남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해 주겠다. 어림도 없다. 그렇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기는 싫으면서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이상과 바람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약간의 은사와 특기가 있는 사람 중에 조용하게 있으려 하고 일생 평범하게 살려는 자가 어디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두각을 나타내고 삶에서 성과를 내기를 원한다. 모두가 머리에 후광을 두른 채 윤택하게 살고 싶어 한다.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고, 구원에 이르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며, 이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화두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화제는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자!
2022년 12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