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6)

지난번에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서 ‘내려놓기’의 실행 원칙에 대해 교제하였다. ‘내려놓기’의 첫 번째 항목은 바로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교제했다. 지난번에 억압이라는 측면의 부정적 정서에 대해 교제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억압 측면의 부정적 정서에 대해 우리는 어떤 내용을 교제하였느냐? 무엇 때문에 사람에게 억압이 일어나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본분을 제멋대로 이행하고, 교회의 규정과 제도를 준수하려 하지 않으며 단속받으려 하지도 않는다고 교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아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늘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반성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니 억압이라는 정서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 지난번에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상황 중 하나에 대해서 교제하였는데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사람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 사람이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일, 사람이 억압이라는 정서 속에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주로 교제한 다음, 억압이라는 정서를 해결하는 길에 대해 교제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정적 정서를 나타내는 모습을 폭로한 것이든,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이든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 내려놓기에 대한 몇 차례의 교제를 통해 너희가 얻은 결론이 있느냐? 부정적 정서 내려놓기 측면에서 주로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겨냥하느냐? 교제를 다 듣고 나서 묵상해 보았느냐? (하나님, 저는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을 겨냥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하나의 측면이다.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을 겨냥한 것이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이 여러 사람, 일, 사물에 대해 지니는 여러 가지 생각과 관점에 연관되며, 주로 사람이 정상 인성의 생활과 생존 측면에서 직면하는 여러 문제를 겨냥한 것이다. 예컨대, 어떻게 다른 사람과 지내고 어떻게 원한을 풀며 결혼과 가정, 일, 앞날, 질병, 노화, 죽음, 그리고 일상다반사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등 다방면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것들에 연관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상 인성의 생활과 생존 측면에 연관되는 여러 가지 큰 문제와 원칙성에 연관되는 문제를 사람이 정확한 생각과 관점 그리고 올바른 태도로 대한다면 이런 인성은 상대적으로 정상이다. 여기서 정상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이성을 지니고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정상적인 시각과 입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정확한 생각과 관점을 갖춘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야 수월하게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진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정상적인 관점과 시각, 입장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야만 어느 정도의 결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 그리고 지니고 있는 생각과 관점, 태도 등 다방면이 부정적이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극단적이고 고집스러우며 순수하지 않다면, 결론적으로 부정적이고 그릇되며 의기소침한 것에 속한다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지금 너희는 도리상 쉽지 않다고 가벼이 말하겠지만 사실 너희는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지금 교제하는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와 관련하여 만약 삶에서, 그리고 인생의 길에서 여러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견해가 모두 잘못되고 부정적인 시각과 입장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늘 부정적 정서 속에 살아간다면 그가 순수하게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늘 부정적 정서의 생각과 관점의 지배와 통제, 영향을 받는다면 모든 일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 입장, 그리고 직면한 일에 대해 생기는 여러 가지 견해가 모두 부정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먼저 사실과 객관적 규칙에 위배되고, 사람이 순응해야 할 자연법칙에 위배되고, 하나님의 주재라는 사실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지닌 부정적 생각과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읽는다면 하나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이거나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가 예를 들어 이 일을 설명해 보거라. 너희가 알아들었는지 보겠다. 결혼, 혈육 간의 정, 자녀 등 사람의 삶과 생존에서 직면하는 일이나 병, 앞날, 운명, 인생이 순조로울지 여부, 자신의 가치, 지위, 이익 등의 큰일에서 사례를 찾아보거라. (저는 지난번에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근심, 염려, 걱정 등의 부정적 정서 속에 살면서 죽음을 무척 두려워하고, 본분 이행과 자신의 정상적인 생활에도 영향을 받아 이 객관적 규칙에 순응할 수 없게 된다고 하나님께서 교제하신 게 생각났습니다. 사실 사람의 생사존망이나 사람이 언제 병에 걸려 얼마나 고생할지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에 사람은 올바르고 적극적인 태도로 그런 환경을 마주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치료가 필요하면 치료를 받고 이행해야 할 본분은 이행해야 합니다. 병에 빠져 있지 않고 적극적인 생활 상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부정적 정서 속에 살면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못하고 사람의 생사를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믿지 못한 채 질병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염려하면서 갈수록 두렵고 불안해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신다는 진리가 내면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무척 좋은 사례를 들었구나. 이것은 생사존망의 큰일을 대할 때 사람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연관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주제를 너희는 다들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이것은 생사에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가 정상 인성 범위에 연관되겠느냐? (연관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직면해야 할 큰 문제이다. 설령 네가 아직 젊고 몸이 아주 건장할지라도, 그리고 아직 생사의 문제에 직면하거나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런 문제에 부닥치게 될 터이니, 모든 사람이 직면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마주할 때 당장 그 상황에 처했든 아니면 아직 멀었든 결론적으로 이것은 정상인으로서 인생에서 부닥치게 되는 가장 큰 사건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이 큰일에 대하여 사람은 이 일이 임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인위적인 방법을 취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하겠느냐? 이것이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약 부정적 정서 속에 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예전에 교제한 바 있다. 만약 사람이 부정적 정서의 생각이나 사상과 관점에 의지해 살아간다면 사람의 행동과 모습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정상 인성의 사고에 부합하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정상 인성의 사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정상 인성의 사고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진리에는 더더욱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객관적 사실과 객관적 법칙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주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 내려놓기를 교제함으로써 결국 어떤 성과에 도달하겠느냐? 이 ‘내려놓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정상 인성의 사고와 이성을 갖출 수 있으며, 정상 인성의 이성에 갖춰져야 할 생각과 견해 혹은 관점을 갖추었다 할 수 있겠느냐? 이 ‘내려놓기’의 구체적 실행 절차나 실행 방법은 무엇이냐? 우선 직면한 일에 대한 네 관점이 정확한지, 부정적 정서를 품고 있지는 않는지 인식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첫걸음이다. 예컨대 방금 우리가 들었던 병이나 죽음을 대하는 사례의 경우, 먼저 이 일에 대한 네 관점이 무엇인지, 네 관점에 부정적 정서를 품고 있지는 않는지를 해부하는 것이다. 즉, 이 측면의 일에 대해 네가 근심, 염려, 걱정을 품고 있는지, 너의 근심, 염려, 걱정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고 뒤이어 해부하면 자신이 이 측면의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설령 병에 걸렸거나 죽음에 직면했다고 해도 그 속에 빠지면 안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병이나 죽음 때문에 쓰러지거나 이 일에 압도되어서도 안 되며,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그로 인해 자신의 정상적인 삶과 정상적인 본분 이행이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투병 중에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재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필요시에는 치료를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마주하고 경험하며 체험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일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람은 그저 할 수 있는 바를 다한 후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의 생사존망을 하나님이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설령 사람이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의 마지막 결과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 않으며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병에 걸리면 먼저 자기 마음속에 어떤 부정적 정서가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마음속에는 어떤 관점이 있으며 부정적 정서의 통제나 속박을 받고 있지는 않는지, 이런 부정적 정서는 어떻게 생긴 것인지 살펴보고 네가 병으로 인해 무엇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내려놓지 못하는지 등을 해부해야 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 것이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살펴본 후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해야 한다. 먼저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자기에게 있는지 파헤쳐 보고 해부하고,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없는지 해부하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진리에 부합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아 차근차근 진리를 구하여 해결해야 한다. 또 이런 부정적인 것들에 시달리거나 영향 혹은 구속을 받아 네 정상적인 삶과 일,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거나 네 삶의 규칙을 방해하지 않도록, 물론 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는 더욱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컨대, 최종적으로 이성적이고 올바르게, 객관적이며 정확하게 네가 직면한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 문제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려놓기의 과정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다. 너희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거라. (먼저 자신이 직면한 일을 꿰뚫어 보고 이 과정에서 자기에게 부정적 정서가 없는지 해부한 다음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 진리를 구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런 부정적 정서에 시달리거나 삶,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고, 또한 자신이 직면한 일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서 비롯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인식이 있어야만 사람이 순종할 수 있으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실행이 가능할 것입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일반적으로 사람이 부정적 정서 속에 살다가 병에 걸리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네게 부정적 정서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먼저 무척 두려워하며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병이지? 치료를 못 하면 엄청나게 고생하지 않을까? 결국 죽는 거 아닐까? 앞으로 본분은 이행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걱정하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몸조리에 신경 쓰면서 본분 이행에는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가를 덜 치르면 병세가 좋아질 거라 생각하는 것이죠. 이것은 모두 부정적 정서입니다.) 부정적 정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파헤칠 수 있다. 한 측면으로는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너 자신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병에 걸리면 너는 생각할 것이다. ‘아,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을까? 다른 사람한테서 옮은 거 아냐? 아니면 피곤해서? 이러다 더 피곤해지면 병세가 심각해지는 거 아냐? 더 고통스러워지지 않을까?’ 이것이 한 측면이다. 생각하는 것을 네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측면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면 너는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 사람은 생각이 생기면 행동도 그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 사람의 행동, 모습, 행동 방식은 모두 사람의 여러 가지 생각에 지배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것이고 그런 생각에 지배되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의 태도나 행동 방식이 다소 바뀌게 된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일찍 일어나 본분 이행을 시작했다면 지금은 일어날 때까지 고심한다. ‘이 병이 피곤해서 생긴 것 아닐까? 좀 더 자는 게 좋겠어. 그동안 너무 힘들게 고생했어. 이제 병세가 심해지지 않도록 몸조리 좀 해야겠어.’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지배되어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진다. 먹을 때도 고민한다. ‘내가 병에 걸린 건 아마 영양 결핍과 관련이 있을 거야. 예전에는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었지만 이젠 가려 먹어야 해. 달걀이나 고기를 좀 많이 먹어야겠어. 그래야 영양도 괜찮아지고 몸이 건강해져서 병 때문에 고생을 안 하지.’ 본분을 이행할 때도 그는 어떻게 몸조리해야 할지 골몰한다. 예전에는 한두 시간 연속으로 사역해도 기껏해야 허리 스트레칭을 하거나 잠깐 일어나서 몸을 풀어 주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예 30분 몸을 풀어 주는 것으로 정해 놓고 몸이 힘들지 않게 한다. 예배 시간에 교제할 때는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 ‘몸조리하는 법을 배워야 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누가 질문을 하면 언제라도 답해 주었지만 이제는 말수를 줄이면서 체력을 아낀다. 누구든 질문이 길어지면 그는 “이제 좀 쉬어야겠어요.”라고 말한다. 예전과 달리 자기 몸을 무척이나 아끼는 저 변화된 모습을 보아라. 평소에 신경 써서 영양제를 먹고 정기적으로 과일도 챙겨 먹으면서 운동한다. 그는 ‘예전에는 너무 무식했어. 몸 챙길 줄도 모르고 먹고 싶을 때마다 폭식했어. 지금은 몸이 성치 않으니 몸조리에 소홀하면 안 돼. 병이 악화해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면 복을 받을 수 없잖아? 앞으로 몸조리에 신경 좀 써야겠어. 몸에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나게 할 순 없어.’라고 생각한다. 그가 몸조리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 본분 이행에는 온 힘을 쏟지 않으며 심지어 예전에 본분을 이행하며 치렀던 대가를 달가워하지 않으며 후회한다. 이것은 부정적 정서의 영향으로 생긴 생각과 행동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과 행동은 부정적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의 부정적 정서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갈수록 커지게 하고 갈수록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게 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충성심 없이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럼 그가 일을 처리할 때 진리를 구하고 진리 원칙대로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런 부정적 정서에 지배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진리는 한쪽에 제쳐 둔 채 진리를 사랑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부정적 정서가 야기한 생각대로 행하고 실행할 것이다. 그럼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이런 생각이 정상 인성으로 가져야 할 생각이겠느냐? (아닙니다.) 정상 인성으로 가져야 할 생각이 아니라면 너희 생각에는 어디가 틀렸느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병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받아야 할 고통이 얼마나 되는지도 하나님의 정하신 바와 안배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부정적 정서 속에 살면 잔꾀를 부리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에 지배되어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육체를 아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토록 육체를 아끼는 것이 올바른 것이더냐? 사람이 늘 육체를 돌보면서 토실토실 건강하게 몸을 관리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한 사람의 삶의 가치는 무엇이겠느냐? 그저 육적으로 놀고먹기 위함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너희가 말해 보거라.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면서 최소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맞다. 한 사람이 평생 병과 죽음을 모면하려 하거나 몸을 잘 보살펴서 병에 걸리지 않고 장수하려는 생각밖에 없다면, 이것이 사람이 살면서 가져야 할 가치이겠느냐?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면서 가져야 할 가치가 아니다. 그럼 사람이 살면서 가져야 할 가치는 무엇이겠느냐? 방금 누가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구체적인 부분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평소 너희가 기도하거나 뜻을 세울 때 가졌던 소망을 말해 보거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정해 놓은 역할 가운데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자신의 사명과 책임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 있느냐? 한편으로는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힘이 닿는 것,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다. 최소한 양심에 참소가 없고, 본인의 양심에 떳떳하며,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정도까지는 되어야 한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태어난 가정, 교육 수준, 자질을 떠나 사람의 생존에서 알아야 할 도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사람이 걸어야 할 길, 사람이 살아야 할 삶, 의미 있는 삶 등 인생의 참된 가치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한 번 사는 삶을 헛되이 살아서는 안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네가 사는 동안 너는 네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대단한 사명과 본분,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최소한 한 가지는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에는 복음 전파 사역에 온 힘을 기울이며 평생을 쏟아붓고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많은 사람을 얻은 사람이 있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고 가치 있다고 위안을 느낀다. 그가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거나 생을 마감할 때 그가 한 이 모든 일과 걸었던 길을 돌이켜 보면서 마음에 위로받고 참소가 없으며 아쉬움도 없다. 그리고 교회 리더를 맡거나 한 측면의 사역을 담당할 때 여력을 남기지 않고 자기 역량의 최대치를 발휘하며 온 힘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해야 할 사역에 모든 심혈을 기울이며 대가를 치르는데 많은 사람이 연약하고 부정적일 때 그의 양육과 인도, 도움과 붙듦 덕분에 강건해지고 일어서며,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증거하게 된다. 이 외에도 그가 리더를 맡는 동안 여러 중요한 사역을 완수하여 많은 악인을 제명하고 적지 않은 하나님의 선민을 보호하며 일부 막대한 손실을 만회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리더를 맡은 기간에 이룬 것이다. 자신이 걸었던 길과 그동안 감당했던 사역, 치렀던 대가를 돌이켜 보면 아쉬움도, 참소도 없으니,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고, 가치 있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마음이 편안하고 위안을 느낀다. 이러면 얼마나 좋으냐! 이것이 성과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위안을 느끼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추구하여 얻게 되는 효과이자 수확이다. 우리는 사람에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저 사람이 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하기 좋아하는 일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얘기해 보자. 자신의 위치를 찾은 후 자기 본연의 위치에 제대로 서서 그 본연의 위치를 지키면서 모든 심혈을 기울이고 대가를 치르며 온 힘을 다해 자기가 해야 할 일, 완수해야 할 일을 잘해 낸다면,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얘기할 때 스스로 마음에 참소나 아쉬움 없이 상대적으로 만족감을 느끼고, 위안과 수확이 있으니 값진 삶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목표가 큰 것이냐? 크고 작음을 떠나 참된 것인지 대답해 보거라. (참됩니다.) 구체적이지 않으냐? 충분히 구체적이고 참되며 실제적이다. 네 삶이 값지고 마지막에 이런 수확을 얻기 위해 네 육체가 피로하여 병에 걸리거나 몸이 병들더라도 약간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 의미 있지 않겠느냐? (의미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육적으로 즐기려는 것도 그저 놀고먹는 것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삶의 가치가 아니며 올바른 길도 아니다. 사람의 삶의 가치,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은 가치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이고, 한 가지 혹은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업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올바른 길, 올바른 일이라 한다. 네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하나의 가치 있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의미 있고 값진 삶을 살고 진리를 추구하고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 가치 있지 않겠느냐? 네가 만약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을 추구하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기를 원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의미 있고 값진 삶을 살기 원한다면 너는 온 힘을 기울이고 대가를 치르며 시간과 세월을 들이는 것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 기간에 병이 들어도 대수가 아니다. 그것이 너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평생 온종일 빈둥거리며 토실토실 건강하게 관리한 몸으로 장수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둘을 비교하면 어떤 삶이 가치 있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 마음에 위안이 되고 아쉬움이 남지 않겠느냐? (의미 있는 삶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 내면 마음속에 수확과 위안이 있다. 토실토실 살만 찌워 죽을 때가 되어서도 혈색이 좋은 사람은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지 않았으니 죽을 때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헛된 삶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 글자로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 헛된 삶이다! ‘헛된 삶’이란 무슨 의미겠느냐? (인생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헛된 삶, 허비한 인생, 이 두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이냐? (삶의 끝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얻어야 하느냐? (진리를 얻거나 삶에서 의미 있고 값진 일을 하며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하지 못하면, 평생 육적인 것을 위해 살면 헛된 삶이었다고, 인생을 허비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죽을 때가 되면 한평생 자기가 한 게 무엇인지 고민해 본다. ‘아, 매일 그저 놀고먹을 생각만 하며 몸은 잘 관리해서 병 한 번 걸리지 않은 평안한 삶이었어.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네.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까 천국에 갈까? 하나님께서 내 결말을 어떻게 안배하셨을까? 훗날 종착지는 어디일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하다. 육의 안일만 즐기면서 한평생 별생각 없이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불안해하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만회해 보려 고심하지 않겠느냐? 그때야 만회하려 고심한들 소용 있겠느냐? (이미 늦었습니다.) 걷고 싶어도 걸을 수 없고 말할 기운도 없다. 대가를 치르고 수고도 하고 싶지만 체력이 받쳐 주지 않는다. 밖에 나가 복음을 전하자니 몸이 따라 주지 않고, 더군다나 깨달은 진리도 없다. 진리를 교제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으니 만회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이다. 찬양을 듣자니 듣다가 잠이 들어 버리고 설교를 듣자니 듣다가 졸기만 하고 기운이 딸려 계속 들을 수가 없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디에 힘을 쏟았는지 생각해 보고는 그 나이에 올바른 일을 하려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아 역부족이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배워지지 않고 반응도 무디기만 하다. 많은 진리가 이해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싶어도 다들 바빠 그와 교제할 시간이 없다. 무슨 일을 하든 원칙이나 방법이 없다.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고민할수록 불안해지고 후회되며 아쉬움만 남는데, 결국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수가 없다. 만회할 방법이 없이 삶이 끝나는 것이다. 이러면 후회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무 늦어서 시간이 없다. 죽음을 마주할 때 육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게 되면 돌아서서 진리를 추구하며 본분을 잘 이행하고 무슨 일이라도 좀 해 보고 싶겠지만 어느 측면에서도 할 수가 없고 역부족이다. 그렇게 삶은 그냥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아쉬움과 후회, 불안만 안고 가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면 그 마지막 결과는 어떻겠느냐? 아쉬움과 후회, 불안을 안고 떠날 수밖에 없다. 평생을 헛되이 산 것이다! 육적으로는 조금도 고생하지 않고 안락만 실컷 누렸다. 바람과 햇빛에 노출되지 않고 그 어떤 위험과 대가도 감수하지 않았다. 병치레는커녕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으며 건강을 잘 관리했다. 단지 아무런 본분도 이행하지 않고, 그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죽을 때가 되어서야 아쉬움을 느낀 것이 애석할 뿐이다. 아쉬워해 봐야 어쩌겠느냐? 이것이 바로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값지고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먼저, 삶과 인생의 길에서 직면하는 여러 대소사에 대해 올바른 인생관과 생각, 관점을 가져야 하고, 정확한 시각과 입장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아야지, 극단적이거나 과격한 생각과 관점으로 인생 혹은 생활에서 직면하는 여러 문제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런 일을 바라보아서도 안 되며 이런 부정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생각과 관점은 내려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사람의 여러 부정적 생각을 해부하고 폭로하며 인식한 다음 네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를 바꾸거나 고쳐서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고 정확하고 긍정적인 생각과 관점, 그리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정확한 시각과 입장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진리를 추구할 때 갖추어야 할 양심과 이성을 갖추게 된다. 물론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정확한 관점과 시각, 입장을 갖추었다면 이는 정상 인성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상 인성을 갖추고, 정확한 생각과 관점을 갖춘다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고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하나의 목적지까지 가는 것과 같다. 만약 그가 걷는 길과 방향만 옳다면 걷는 속도가 어떻든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걷는 길이 그가 가려는 목적지와 반대라면 속도가 어떻든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질 뿐이다. 남원북철이라는 성어가 있지 않으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구원받고자 하면서도 명예와 이익 그리고 지위를 추구하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그의 결말은 어떻겠느냐? 징벌받을 것이 분명하다. 암에 걸린 사람을 예로 들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하나님에게 죽지 않고 몇 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한다. 그는 근심과 염려, 걱정 등의 부정적 정서를 품고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몇 년이 흘러도 죽지 않고 그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는 죽지 않음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며 자신은 운이 좋다고, 하나님은 정말로 선하고 너무나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노력과 계속된 요구로,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그가 죽지 않고 바라던 대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사랑과 긍휼에 감사한다.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그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찬미를 드린다. 찬양을 부를 땐 항상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 무척 선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생사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살리셨습니다.’ 매일 본분을 이행할 때도 그는 항상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남보다 먼저 수고하고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 그리고 모든 일을 남보다 더 잘해 낸다. 그 결과 그는 몇 년을 더 살게 되고, 마음속으로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병세가 심해져 의사에게서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최후의 통지를 받게 된다. 그가 죽음에 직면하였는데, 정말 죽게 된 것이다. 그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그가 가장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그가 가장 보고 싶지도, 느끼고 싶지도 않은 그날이 결국 도래한 것이다. 그는 순식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기분이 바닥에 떨어진다. 다시는 본분을 이행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말이 없어지며 하나님을 찬미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시는 하나님이 하는 말씀이나 공급하는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랑이며 공의이자, 긍휼이며 자비임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다. 여기에 후회까지 한다. ‘그동안 맛있는 음식 좀 많이 먹고 시간 될 때 놀러나 다닐걸. 이젠 기회가 없어.’ 머릿속은 원망과 탄식으로 가득하고 마음속은 고통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증오 그리고 부인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아쉬움을 품고 세상을 떠난다. 그가 떠나기 전에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었겠느냐?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겠느냐?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이 결과는 어떻게 초래된 것이겠느냐? 애초에 그가 생사를 바라보는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되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그 후로도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따르고 순응하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추구해 나갔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잘못된 길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돌진하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다. 믿음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고, 그의 인생은 그렇게 끝을 맺은 것이다. 그가 진리를 얻었겠느냐? 하나님은 그를 얻었겠느냐? (아닙니다.) 결국 그가 죽을 때 죽음에 대해 지녔던 관점과 태도가 바뀌었느냐?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안과 기쁨, 평안을 품고 죽었느냐, 아니면 아쉬움과 달갑지 않은 마음, 원망을 품고 죽었느냐? (달갑지 않은 마음과 원망을 품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는 진리를 얻지 못했고, 하나님도 그를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했다. 그가 죽기 전에 열심히 뛰어다녔고 많이 헌신하지도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남들처럼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했는데, 겉으로는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다. 병과 죽음을 겪으면서 그 역시 하나님에게 기도하였고 심지어 예전 못지않게 본분 이행을 포기하지 않고 사역하였다. 다만 사람이 알고 꿰뚫어 봐야 할 것은 그가 품고 있는 생각과 관점이 늘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수고와 대가를 치렀는지를 떠나 그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품고 추구했다. 항상 그런 잘못된 생각과 관점에 지배되어 부정적 정서를 품고 본분을 이행했는데, 그런 본분 이행으로 자신의 죽지 않는 결말을 맞바꾸어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 한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진리를 깨닫거나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이와 정반대이다. 자신의 뜻과 요구대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염원 중에서 추구하는 바를 얻고자 했고, 자신의 운명, 나아가 생사를 스스로 지배하고 안배하고자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결말을 맞은 것이다. 진리를 얻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마저 부인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었다. 죽음이 임박해서도 그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가장 가련하고 슬픈 부분이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서도 사람이 일생동안 살면서 모든 일이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 아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창조주가 너를 살게 한다면 네가 죽을병에 걸려도 죽지 않을 것이며, 창조주가 너를 죽게 한다면 네가 설령 젊고 건강하며 건장하더라도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임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 아래 있다는 것을, 이것이 하나님의 권병으로, 아무도 이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토록 간단한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으니 가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며 설교를 듣고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생사를 포함한 사람의 운명은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그는 계속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도 자기가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며, 살아 있다고 해도 죽는 게 무서워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생존하는 것도 아니다. 이토록 단순한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고, 죽음이 임박해서도 꿰뚫어 보지 못했으며, 사람의 생사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창조주가 정해 놓은 것이라는 점도 알지 못했다. 슬프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비록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사소한 듯 보여도 그런 부정적 정서는 한 사람이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사람이나 일을 어떤 태도로 바라볼 것인가와 연관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만약 정상 인성의 삶과 생존에서 직면하는 다방면의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이 사람의 부정적 정서는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또한 이 사람의 양심과 이성은 상대적으로 정상적이며 그가 진리를 추구하여 실제에 진입하는 데 어려움이나 장애가 적어 수월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한 사람의 마음이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로 가득하다면, 그러니까 삶과 생존에 존재하는 문제를 대하면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하다면 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장애물과 어려움이 비교적 많을 것이다. 그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와 의욕이 그리 크지 않고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어려움과 장애가 클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 힘들다는 말이다. 그의 패괴 성품의 심각성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맬 것이다. 어떤 사람은 증오에, 어떤 사람은 분노에,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고통에, 어떤 사람은 그 외 다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만 든다. 즉, 매사에 있어서 그의 상태는 기본적으로 부정적 정서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이런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여 부정적 정서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일정한 의지나 근성이 없다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란 설상가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진리 추구라는 실제에 진입하기 전에 정상 인성에 연관되는 다방면의 문제에 대해 사람은 기본적이고 올바른 생각과 관점, 그리고 입장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진리를 얻고 받아들여 차츰차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본격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기에 앞서 네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를 먼저 해결하고 이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 단계를 거치고,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관점 그리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이 정확해지면 진리를 추구하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 수월해질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한 측면의 원인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교제하였다. 이어서 오늘은 억압의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다른 측면의 원인에 대해 교제하겠다. 즉, 사람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지 못해 자주 억압의 부정적 정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측면의 원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사람이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제멋대로 하면서 빈둥거리며 본연의 일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아 억압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번에 교제할 내용은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은사와 특기, 전문 기술 능력을 갖추었거나 특수 기술 업무 등에 능통하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은사나 특기, 업무적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늘 답답해하고,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것이 편하거나 기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고 느낀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사회에서 무엇이라 일컫느냐? 전문가, 기술자, 특수 인재로 불리는데, 한 마디로 인재로 불리는 것이다. 인재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 이마가 넓고 눈빛에 생기가 있으며, 안경을 끼고 고개가 뻣뻣하다. 걸음걸이가 빠르고 결단력 있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한다. 가장 큰 특징은 어디든 노트북과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는 점이다. 한눈에 전문가나 기술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일정한 업무 능력을 갖추었거나 특정 기술에 대해 능통하며, 전문 교육과 지도를 받은 적이 있고 전문적인 학습과 훈련을 거친 사람이다. 혹은 어떤 사람은 전문적인 지도나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천부적 능력이나 자질을 타고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을 전문가, 기술자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늘 노트북을 끼고 교회에 온다. 어디에서 사역하든 그들은 전문가, 기술자로 비치고 또 아무개 인재, 심지어는 자기 성 뒤에 ‘선생님’ 등이 붙은 호칭으로 불리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이런 대우와 호칭을 즐긴다. 하지만 교회는 특수한 곳이며 특수한 일을 하는 장소이다. 사회의 여느 단체나 조직, 기구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이곳은 무엇을 얘기하느냐? 진리, 원칙, 규정, 사역지침을 얘기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의 증거를 얘기한다. 물론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에게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에 순종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와 이곳에서 알려 준 원칙 등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명문 규정을 제창하고 사람이 실행하고 준수해야 할 때면 교회에 온 그런 인재들은 어느 정도 서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배운 기술이든, 능통한 특정 측면의 지식이든 교회에서는 쓸모가 없어 중용되지 못하거나 중시받지 못하고 홀대받을 때가 많다. 물론 그들 역시 하는 일 없는 것 같고 자신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아, 이것이야말로 산 밖에 난 범 꼴이구나! 왕년에 모 공기업, 모 외국 기업에 있을 때는 어마어마했는데! 가방 한번 내 손으로 들어 본 적 없고, 매일 스케줄 짜 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걱정할 일이 하나 없었지. 난 고급 인재이고 기술의 달인이라서 회사에서는 거물이었다고. 거물이 뭐겠어?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지. 수주가 안 되면 전 직원이 길바닥에 나앉고 회사도 도산 위기에 빠질 수 있어서 회사에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야. 그때는 정말 어마어마해서 존재감 넘치게 살았는데!’ 지금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그리면서 생각한다. ‘내 능력이라면 하나님 집에서는 더더욱 귀하게 쓰일 곳이 있을 텐데 어떻게 무용지물이 될 수 있지? 교회 리더, 형제자매가 어째서 나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걸까? 내가 남들한테 처지는 데가 어딨다고? 외모라면 풍채 좋지, 기질이라면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지, 명성이나 위신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술 수준은 일류인데 왜 다들 날 거들떠도 안 보는 거야? 왜 아무도 내 말이나 제안에 동조해 주지 않는 거지? 어째서 난 하나님 집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걸까? 설마 나 같은 인재가 하나님 집에 필요하지 않은 건가? 어떻게 하나님 집에서 내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지?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서 내가 배운 기술도 필요할 텐데. 내 특기는 하나님 집에서 중시되어야 해! 난 전문가이니, 팀장이나 책임자를 맡아서 다른 사람을 이끄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어떻게 맨날 들러리만 서는 거야?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설마 내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이렇게 대우하는 건가?’ 그는 속으로 거듭 자문해 보지만 항상 원인을 찾아내지 못해 억압에 빠져 버린다.

예전에 합창단이 무대에 올라 합창하려 할 때 헤어스타일을 어떻게 할지 물은 적이 있었다. “자매는 머리를 뒤로 묶어도 되고 귀나 어깨 정도의 단발도 괜찮다. 물론 올림머리나 당고 머리도 상관없다. 형제는 상고머리나 가르마 머리 모두 괜찮다. 단, 장식이나 스타일링을 하지 말고, 깨끗하고 단정하며 자연스러워 보이면 된다. 한 마디로 남들이 보기에 단정하고 점잖은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갖추면 된다. 중요한 것은 노래를 잘 불러 프로그램을 제대로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이 정도면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남녀의 헤어스타일에 대해 분명히 알려 주었다. 사람이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는 원칙은 무엇이더냐? 형제는 가르마를 타거나 상고머리를, 자매는 단발, 장발 모두 상관없지만 장발이면 뒤로 묶고, 단발이면 너무 짧지 않도록 하는 게 하나의 원칙이다. 다른 원칙은 깔끔하라는 것이다. 단정하고 점잖으며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게 한눈에 보여야 한다. 우리가 사회의 명사나 유명인이 되고자 무슨 화려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니 그저 단정하고 점잖아 보이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깔끔하고, 단정하고 점잖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느냐? 이 두 원칙을 이해하거나 실행하기가 쉽지 않으냐? (쉽습니다.) 한 번만 들어도 명확히 알 수 있으니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다. 실행하기가 아주 수월하다. 십여 일이 지나 그들이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영상 속에는 자매들이 서너 줄로 서 있었는데, 첫째 줄은 모두 스타일링한 헤어스타일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과 스타일로 저마다 다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각각 다른 스타일의 머리 모양은 괴상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떤 20대 자매는 30, 40대처럼 보이기도 했고, 할머니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헤어스타일이 저마다 달랐다. 영상을 보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가 헤어스타일을 여러 가지로 만들어 봤습니다. 마음껏 골라 주세요. 어떤 스타일을 고르시든 저희는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아느냐? 역겨웠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화도 조금 났다. 그들과 나누었던 몇 가지 원칙을 돌이켜 보니 마지막에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말문이 막혔다. ‘아, 이들은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했던 말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그들에게 알려 준 원칙은 사람이라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토록 간단한 일은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서 사람이 능히 해낼 수 있을 텐데, 왜 그런 영상을 보내온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내가 불명확하게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고, 가지각색의 헤어스타일을 하라고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뭘 좀 할 수 있고, 알고, 손재주나 기술을 좀 습득하게 되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안하무인이 되어 한번 뽐내 보겠다며 교만함이 끝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네 말을 알아들었다 할지라도 수긍하지도, 실행하지도 않고 네 말을 마음에 두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네가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원칙을 물어볼 때 사실은 진작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 스스로 마음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질문은 그저 형식만 갖추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사람을 놀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다 놀리고 나면 네가 뭐라고 하든 결국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고, 조금도 네 말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뜻이 정말 강하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당신이 우리를 무시하시지만 우리는 기술 전문가라고요. 사회에서 우리가 만난 사람은 모두 유명 인사였고, 우리에게 이런 손재주와 기술이 있으니 어딜 가든 잘살 수 있고 사람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었어요. 유독 하나님 집에 와서는 봉사자가 되고 항상 무시당하지요. 우린 서민이 아니라 기술을 가진 인재예요. 하나님 집에서 존중받아 마땅하다고요. 이런 식으로 우릴 썩히시면 안 되죠. 우리가 하나님 집에서 특기를 발휘하게끔 지지해 주시고 뒷받침해 주셔야 해요.’ 이는 막무가내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정상 인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내가 보니 ‘아, 이들은 이치로 깨우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원칙을 알려 줄 때 거듭 물었다. “알아들었느냐? 기억했느냐?” 그 자리에서는 잘 대답하더니 뒤돌아서니 마음이 바뀐 것이다. 말은 그럴듯하다. “저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고 본분을 이행하러 왔습니다.” 그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냐? 너는 육을 만족시키고 자기 체면을 세우려는 것이다. 너는 본분을 이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사업을 하러 온 것이다. 바꿔 말하면, 네가 하나님 집에 온 것은 파괴하러 온 것이다. 하나님 집의 각 측면의 사역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은 네가 정하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네 말이 진리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너희가 말하는 것은 도리다. 만약 도리가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릇된 논리일 뿐이다. 너희가 내 말을 진리로 인정하면서 어째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너희에게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냐? 내 앞에서는 그럴싸하게 말하면서 뒤에서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패괴된 인간은 능력이나 특기, 아이디어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교만하게 굴면서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이는 너무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너희가 만약 자기가 한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내가 심사하게 하느냐? 내가 너희의 결점을 지적하고 너희의 잘못을 폭로하면 너희는 어찌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냐? 너희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진리를 교제해 줄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진리와 원칙, 성도의 품위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해야 사람에게 유익한지 나는 알고 있다. 너희는 알고 있느냐? 이 몇 가지 중 너희는 한 가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내 말대로 하지 않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작문에 능해 언어를 구사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타고난다. 물론 문학 수준도 상당해 사물을 묘사할 때 일정한 수법과 표현 방식을 활용할 줄 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곧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한 측면의 지식으로서 사람의 은사나 특기의 하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네가 작문과 언어 표현에 능하고 문장력이 상대적으로 좋은 한 측면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들에 능하다고 ‘나는 하나님 집의 문장가이니 문서 관련 사역을 담당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문서 사역을 담당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 집에 필요하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네 장기나 업무 능력뿐만은 아니다. 네 업무 능력과 장기는 네가 담당하는 그 사역에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네 업무 능력과 그 수준이 어떻든 너는 하나님 집에서 요구하는 원칙에 따라 하나님 집에서 달성하려는 효과와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이 효과와 목표에 대해 하나님 집에서는 요구 기준과 관련 원칙이 있다. 너만의 입맛이나 취향에 따라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대본을 쓸 때 화려한 문장을 추구하고 스토리를 매우 구체적으로 전개하며 문장력도 괜찮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효과에 도달하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에 이런 대본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화려한 글을 쓸 수 있다고 자부하며 흡족해하고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대본은 반드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효과에 도달하도록 써야 하며 이것이 근본 취지라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모른다. 하나님 집에서 대본을 쓸 때 주인공이 읽는 하나님 말씀과, 그가 하나님의 역사에 인도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한 후의 진정한 인식이 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면, 이 대본은 효과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 집의 이런 측면의 요구가 사람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집의 사역이다. 그런데 이들 대본을 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뜻은 이렇다. “제가 쓴 글은 이미 완벽해요. 무척 구체적이죠. 저한테 그런 내용을 추가하라고 하시는데, 제 뜻에는 맞지 않습니다. 불쾌하네요.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는 마지못해 그런 내용들을 추가하지만 그들의 정서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너무 억압감을 느껴요. 항상 책망하고 흠잡는 사람이 있어요. 어쩔 수 없죠. 낮은 처마 아래서 머리를 숙일 수밖에요. 제가 결정할 수 있어 쓰고 싶은 대로 맘껏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남의 말을 들어야 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되니 억압감을 많이 느껴요!”라고 말한다. 이런 마음가짐이 옳은 것이냐? 이건 어떤 성품이냐?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이다. 그리고 합창단에서 메이크업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의 헤어스타일을 좋아하는데, 그들이 만든 헤어스타일은 결국 거부당했다. 어째서겠느냐? 하나님 집에서는 마귀의 헤어스타일이 아닌 단정한 정상인의 헤어스타일을 원하기 때문이다. 네가 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은 이방 세계에 가서 선보이거라. 그들은 그러한 인재를 필요로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필요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을 위해 무상으로 해 주겠다고 하지만 무상이라 해도 필요 없고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기에 역겹다. 하나님 집에서 필요한 것은 단정하고 올발라 정직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네가 고상할 필요도, 왕궁의 귀족이나 공주, 아가씨, 도련님, 어르신 같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민이라 신분이나 지위가 없고, 가치도 없다. 그저 지극히 정상적인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좋다. 고귀하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으며 평범한 옷을 입고 평범하게 꾸미며 가식을 떨지도 않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누리고 야심과 욕망이 없이 그저 일반인의 삶을 사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삶이다. 분명 평범한 사람인데 늘 고귀한 척하려 하니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항상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고 뽐내 보려 한다.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네가 뽐내려는 그 재주가 가치 있는 것이냐? 만약 정말 가치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가치가 하나도 없고 오히려 교란과 파괴만 된다면 그것은 귀신의 재주, 하찮은 재주를 뽐내는 것일 뿐이다. 이런 재주를 뽐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는 있느냐? 모르면 절대 뽐내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것, 습득한 기술, 선천적 장기나 천부적으로 타고난 특별한 재능은 고귀하다고 볼 수 없으며 넌 그저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전 몇 개 국어에 능통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통역을 하고 통역 사역을 잘하면 된다. 그러면 넌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사전 한 권을 통째로 외울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전 한 권을 다 외워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은 “전 속독을 할 수 있어요. 하나님 말씀을 하루에 백 쪽씩 읽을 수 있는데 제 실력이 대단하지 않나요?”라고 말한다. 네가 하루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을 백 쪽 읽어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어떤 측면의 진리를 깨달았느냐? 실행할 수 있느냐? “저는 신동이에요. 다섯 살 때부터 노래하고 작사를 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쓸모가 있겠느냐? 이방인은 너를 치켜세울지 몰라도 하나님 집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당장 네게 하나님을 찬미하는 가사를 써 보라고 한다면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다면, 이는 네가 진리를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사만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 사람이 어떤 은사나 기술, 특기를 가지고 있든, 사실 그것은 도구에 불과하다. 긍정적인 사물에 쓰여 긍정적인 역할을 발휘한다면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사물에 사용되지 못하고 긍정적인 역할도 발휘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니 그것을 배워 봤자 소용없다. 그저 네게 짐만 될 뿐이다. 네가 만약 네 전문 기술이나 특기를 본분 이행에 활용해서 진리 원칙에 따라 하나님 집의 사역을 잘 이행한다면 네 전문 기술이나 특기는 올바른 곳에 사용되었으니 실로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것의 존재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조금도 본분에 사용할 수 없다면 너의 그 전문 기술이나 특기는 일말의 가치도 없다. 내가 보기에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어날 때부터 입심이 좋은 달변가들이 있다. 이들은 언어 표현력이 출중하고 두뇌 회전이 빠른데, 이는 특기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강연이나 홍보, 협상을 하거나 판사나 변호사 등을 한다. 이런 분야에서 일하면 그도 능력을 발휘할 데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네게 그런 특기가 있다 해도 네가 아무런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가장 기초적인 이상 측면의 진리조차 깨닫지 못해 복음을 전하지도, 하나님을 증거하지도 못한다면 너의 그 은사와 특기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네가 만약 네 은사에만 기대어 살면서 어디서든 네 특기를 뽐내며 큰소리치고 글귀와 도리만 이야기하면 오히려 남에게 반감만 사게 된다. 그것은 네가 한 모든 말이 남들이 역겨워하고, 네가 밝힌 생각과 관점이 사람들의 혐오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너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네가 자신을 드러낼수록 네가 자신을 표현하고자 할수록 남들은 더 역겨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불결한 그 입 좀 닫지 그래요! 당신이 말하는 건 다 도리예요. 그걸 누가 몰라요? 몇 년이나 얘기했죠? 당신은 바리새인이랑 다를 바 없어요. 공리공론이나 떠들면서 교회를 오염시키니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보아라, 모두에게 공분까지 사서 반감만 일으킨다. 그러니 너는 진리에 더 공을 들이고, 진리 깨닫기를 더욱 구하는 것이 좋은데, 이것이 진정한 실력이다. 내가 이렇게 말할수록 이들 ‘실력 있는’ 자, ‘인재’는 억압을 느낄 것이며,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젠 글렀어, 당최 길이 보이질 않네. 여태껏 난 인재였고 어디서든 남보다 잘나서 중용되었는데 말이야. ‘금이라면 언젠가는 빛을 발한다’는 말이 있잖아? 하나님 집에서는 안 통할 줄이야! 억압도 이런 억압이 없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은 일인데 어째서 이런 탁월한 인재, 이런 고급 인재가 하나님 집에 와서 억압감을 느끼는 것이냐?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억압을 느껴 우울해지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늘 책망받으니 너무 억압을 느낍니다. 이젠 많이 고분고분해져서 교회 리더가 말하든, 팀장이 말하든 저는 항상 ‘네’, ‘괜찮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얼핏 순종하고, 말에 따르는 법을 배운 것처럼 보이지만 원칙을 모르고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억압을 느끼면서 자기를 위해 분통을 터뜨리고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교육 수준을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학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석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학원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대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무 전공입니다.”, 어떤 사람은 “경영 전공입니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프로그래머로, 기술자다. 모두 끝에 ‘자’ 자나 어떤 칭호가 붙어 있다. 이들이 하나님 집에 오니 아무도 그들을 그렇게 불러 주지 않고 중시하지 않으니 속으로 항상 억압을 느끼면서 자아를 찾지 못한다. 교회에는 여러 인재가 다 있다. 음악 인재, 안무 인재, 영상 인재, 기술 인재, 비즈니스 인재, 경제 인재, 심지어는 정치인도 있다. 이들은 형제자매 가운데서 늘 말한다. “제가 어엿한 공기업의 사장이고, 어엿한 외국 기업의 고위 간부이고 CEO인데 두려워할 사람이 누구며, 누구에게 복종한 적 있겠습니까? 저는 경영 능력을 타고 났기에 어디서든 관리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관리할 재목입니다. 남이 저를 관리하기보다는 제가 다른 사람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집 말단이라도 팀장이나 책임자를 맡아야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들이 아무런 진리 실제도 없고 어떤 사역도 할 수 없는 데다가 특히 교만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결국 그중 어떤 사람은 육체노동을 하도록 보낼 수밖에 없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항상 불복하고 뽐내고 싶은 마음에 제멋대로 굴다가 잘못을 너무 많이 저질러 모두의 공분 속에 정리되기도 한다. 이들이 억압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마지막에 그들은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하나님 집은 우리 같은 인재가 머물 곳이 못 됩니다. 우리는 천리마인데 하나님 집에는 백락이 없거든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배움이 얕아요. 특히 각급 리더들은 진리를 깨닫긴 했지만 우리가 천리마인 것도 모르더군요. 우리가 백락을 찾아 나서야죠 뭐.” 결국 이런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하나님 집은 너무 작아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네요. 우리는 모두 거물들인데 하나님을 믿는 저들은 모두 농민, 노점상, 소상공인 등 사회 하층의 서민들이에요. 고급 인재가 없죠. 교회는 작지만 세상은 넓으니 우리의 거처가 없을 리 없어요. 천리마인 우리는 언젠가 각자의 백락을 찾게 될 겁니다!” 이들이 자신의 백락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가 축복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그들이 백락을 찾는 그날, 우리와 작별할 때, 우리는 그들을 떠나 보내면서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곳을 찾아 다시는 억압의 정서를 품지 않기를, 그들이 우리보다 잘 지낼 수 있기를, 좋은 사람으로 일생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면 억압의 정서를 품은 그들의 마음이 약간 편하지 않겠느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뻐근하며 마음이 무겁고 몸이 불편해 자유롭지 않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겠느냐?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다시는 억압을 느끼지 않으면서 행복하고 홀가분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 집에서 일부러 이들 인재들을 힘들게 한 것이냐? (아닙니다.)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 집의 여러 원칙과 사역지침, 그리고 각 사역에 대한 요구가 이들에게 억압적 정서를 야기했느냐? 어째서 이들 인재들이 하나님 집에서 억압적 정서에 빠진 것이냐? 하나님 집의 잘못이더냐? 아니면 하나님 집에서 고의로 이들을 힘들게 한 것이냐? (전부 아닙니다.) 이치상으로 그것이 결코 아니란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세상에서 배운 전문적 특기나 개인의 취향을 하나님 집의 원칙과 요구에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집의 원칙과 요구에 그런 것을 강요하면 하나님 집에서 용납하겠느냐?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 집에서 용납하지 않아서 억압을 느낀 사람이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느냐? (각 본분을 이행하기 전에 먼저 그 본분에 대한 하나님 집의 요구와 원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후 자신이 습득한 전문적 특기를 합리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 원칙이 옳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 집에 와서 늘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고 뽐내고 싶어 한다면 이 출발점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지 않으냐? 그 이유를 확실히 말해 보거라. (그의 목적은 자신을 드러내어 체면을 세우려는 것으로, 자기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 하나님 집의 사역에 유익할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취향대로 하고자 하면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거나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매사에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사탄의 성품에 속합니다. 그는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증거할까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자기만 증거하고자 하니 이 자체가 옳지 않은 길입니다.) 그 출발점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디가 옳지 않으냐? 이 질문에 너희는 반박을 하지 못한다. 너희가 무척 억압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다들 자기 특기를 뽐내고 싶어 하는 것이겠구나? 이방인 가운데 본때를 보여 준다는 의미로 할머니가 립스틱을 바른다는 말이 있지 않더냐? 뽐내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뽐낸다는 것은 나서서 자기를 드러내어 사람들 속에서 명망과 지위를 얻음으로써 남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뽐내는 기회를 통해 남들에게 ‘내 실력이 대단하다.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니 날 우습게 보지 마라. 나는 인재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최소한 이런 의미는 갖고 있다. 그럼 늘 뽐내고 싶은 생각만 한다면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그는 자기 사업을 하고 자기 지위를 경영하며 사람들 가운데서 발판을 다지고 위신을 세우려는 것이다. 이토록 단순하다. 그는 본분 이행이나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구하여 하나님 집의 요구나 원칙대로 일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자기의 인지도와 가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일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책임자나 리더로 선출하도록 일하는 것이다. 그가 리더로 선출되면 지위가 생기지 않겠느냐? 체면이 서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그가 추구하는 것이다. 이토록 단순한 출발점인데, 그저 지위를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을 가지고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지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지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은사나 특기가 있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떻게 실행해야 억압을 느끼지 않겠느냐? 억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쉽겠느냐? (쉽습니다.) 그럼 자기의 특기를 발휘하지 못해 생기는 억압의 부정적 정서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겠느냐? 먼저 사람이 배우고 습득한 기술 업무나 특정 재능, 특기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이 생명이더냐? (아닙니다.) 그것의 성격을 긍정적인 사물로 규정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격을 긍정적인 사물로 규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사회나 세상이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의식주나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불과하다. 그럼 하나님 집에서는 어떻게 보겠느냐? 네가 습득한 기술 업무는 하나의 지식에 불과하다. 하나의 간단하고 순수한 지식일 뿐, 한 사람의 귀천을 나타내지 않는다. 한 사람이 하나의 특기나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하여 남보다 고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귀천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느냐? 그 사람의 인성, 추구하는 바, 그가 걷는 길을 보는 것이다. 전문 기술이나 특기는 너란 사람이 어떤 분야의 기술이나 지식을 배웠는지, 파악한 지식이 깊은지 얕은지,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는지만 나타낼 뿐이다. 이 기술 업무나 특기는 높고 낮음, 많고 적음, 깊고 얕음, 그 분야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지 피상적인지로만 논할 수 있다. 그것으로 한 사람의 인성 품위와 추구하는 바 혹은 걷는 길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의 지식이나 도구일 뿐이다. 이런 지식과 도구는 네가 관련 사역에 임하거나 하나의 사역을 능히 감당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네게 철밥통이나 생계 보장을 제공하는 데 그칠 뿐이다. 네가 가진 기술 업무나 특기를 사회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어쨌든 하나님 집에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절대 한 사람이 어떤 특수한 기술을 가졌다 해서 그를 특별히 중시하거나 파격적으로 발탁하지도, 나아가서는 그에게 책망과 훈계 혹은 형벌 심판을 면해 주지도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기술 업무나 특기를 가졌든 그의 패괴 성품은 여전히 존재하니 그는 여전히 패괴된 인간이다. 사람의 은사나 특기, 기술 업무와 사람의 패괴 성품은 별개의 일이다. 서로 관련성이 없으며 사람의 인성이나 인품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은 자질이 좋고, 지능이 높고, 이해력이 좋아 어떤 분야의 기술 업무를 배우면 깊이 있게 배우고, 그 업무와 연관된 일을 하면 기여도나 성과가 크다. 사회에서라면 그에게 큰 경제적 수익이 돌아갔을 것이고, 해당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와 경력, 위상을 누릴 것이다. 그게 끝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 사람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삶과 생존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를 보여 주지는 않는다. 전문기술과 특기는 순전히 지식 영역의 것으로, 사람의 생각과 관점이나 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과는 아무런 관련이나 연관성이 없는 것이다. 물론 어떤 지식에서 제창하는 사상은 사설과 오류로,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긍정적인 사물을 인식하는 데에 있어 오도하기도 하지만 이는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순전히 지식과 기술 업무이다. 그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이나 정상 인성에 그 어떤 긍정적이거나 적극적인 보조와 교정 역할도 하지 않으며, 사람의 패괴 성품에 그 어떤 구속력이나 제약을 갖지도 않는다. 이것이 그것의 성질이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 외 어떤 예술이든, 아니면 과학, 생물, 화학 공업, 설계, 건축, 비즈니스, 심지어 수공업에 이르기까지 업계를 불문하고 전문 지식의 성질은 모두 이렇다. 이것이 그것의 본질이다. 내가 한 말이 맞지 않느냐? (맞습니다.) 어떤 업계에 종사하든, 어떤 전문 기술을 배웠든, 혹은 어떤 특기를 타고났든, 이것이 너란 사람의 귀천을 나타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회에서 기업 경제에 종사하는 사람 특히 엘리트들의 인품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배운 업무와 지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고 소득 역시 매우 높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말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게 평가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이 일을 평가하는 원칙과 기준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견해이고, 이는 사람의 지식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관점은 하나님 집에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회에서는 어부거나 노점상이거나 수공업자여서 사회적 지위가 낮아 아무도 존중해 주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의 선민은 모두가 평등하다. 진리 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귀천의 구분이 없다.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해서, 고귀한 직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너를 존귀하게 보지는 않으며, 사회에서 보잘것없는 직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너를 미천하게 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집에서는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는 네 신분, 가치, 지위의 높고 낮음이 네 업무 능력, 기술 수준 그리고 네가 가진 특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는 군대에서 군단장, 장군, 원수를 역임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나는 “너는 비켜서거라.”라고 말한다. 왜 비켜서라고 하겠느냐? 네게 있는 사탄의 성품이 너무 심해 보기만 해도 역겹기 때문이다. 먼저 한동안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아서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낸 후 다시 오면 모두들 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사회에서 사람이 보기에 귀해 보이는 일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 집에서 너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또 네가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해서 너를 낮게 보지도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 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과 원칙은 모두 진리 준칙을 근거로 한다. 그렇다면 이 진리 준칙은 무엇이더냐? 세부 항목은 이렇다. 첫째, 양심과 이성, 선한 마음씨와 정의감의 유무 등 한 사람의 인성 품위에 따라 사람을 바라본다. 둘째, 진리를 사랑하는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진리를 추구하는지, 긍정적인 사물과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하거나 늘 개인 경영을 하는지 등을 바탕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그러니 네가 어떤 기술 업무나 특기를 갖추었든 갖추지 않았든, 하나님 집에서는 너를 공평하게 대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예전에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 원칙과 기준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변해야 할 것은 자신의 특기를 살리지 못한다고 억압을 느끼는 사람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고, 하나님 집에 공평과 공의가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기술 업무나 특기에 대한 네 부정확한 관점과 견해를 당장 내려놓기를 바란다. 은사나 특기를 조금 가졌다고 남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 마라. 네가 비록 남들이 갖추지 못한 전문 기술이나 특기를 갖추었지만 네 인성과 패괴 성품은 남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 눈에는 너 역시 특별한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네가 “저는 고위 간부였습니다.”라고 해도, “저는 사업을 크게 했었습니다.”라고 해도, 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네가 “저는 영웅이었습니다.”라고 한들, 네가 영웅이든, 유명인이든 다 소용없다. 하나님 편에서 너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이것이 전문 기술이나 특기에 대해 사람이 알아야 할 한 측면의 진리이자 원칙이다. 다른 측면으로 이런 전문 기술이나 특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는 사람이 알아야 하는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다. 먼저 너는 생각과 의식 면에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네가 어떤 전문 기술이나 특기를 갖추고 있든, 하나님 집에 온 것은 일을 하거나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거나 월급을 받거나 밥벌이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너는 본분을 이행하러 이곳에 온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 너의 유일한 신분은 형제자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기에 넌 피조물일 뿐 네게 두 번째 신분이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피조물은 동물이나 식물이 아니며 마귀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며, 사람이라면 자기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 집에 오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며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관점이다. 네가 “저는 사람입니다. 정상 인성과 양심, 이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저는 제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이론적으로 사람이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생각과 관점이다. 다음은 그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가이다. 네 말대로 해야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 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하겠느냐? 원칙과 이론적으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하고, 하나님이 진리이며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이론적으로 가져야 할 관점이다. 사실 네가 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너 개인이나 네 가정을 위한 것도, 네 삶이나 개인적 경영 혹은 사업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네 사적인 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너는 이 관점을 깨닫고 가져야 한다. 이 관점을 가지고 나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것이니 그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 하나님 집에서 요구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알려 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해야 하지, 주저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므로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자기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도, 자기의 인생이나 삶을 위한 것도, 자기의 가정이나 사업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을 위한 것이다. 어떤 업무에 관련되든, 작게는 문장 부호나 형식 하나에서부터 크게는 세부 사역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역이든 모두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되는 범주에 있다. 그러니 네게 이성이 있다면 우선 ‘나는 이 사역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일까? 하나님 집에서 제시하는 원칙은 무엇일까?’라고 자문해야 한다. 그다음 관련된 원칙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모든 규정과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해 나가야 한다. 원칙에 부합하고 그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네가 하는 모든 것은 적절할 것이고, 하나님은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규정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깨달았다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골몰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비이성적인 일을 해야 하겠느냐? 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자신을 저버려야 합니다.) 저버리고 내려놓고 본분과 하나님 집의 요구 및 원칙을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 네가 만약 기분이 좋지 않아 여가 시간에 네 흥미와 취미를 충족시킨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네가 깨달아야 할 한 가지 측면, 즉 네 본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행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한 측면은 사람의 전문 특기나 기술 측면에 연관되는 문제이다. 전문 기술, 특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그러니까 만약 하나님 집에 네가 잘하는 것이나 습득한 전문 특기나 기술을 제공할 필요가 있을 때 너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겠느냐? 네 본분 이행 과정에서 그 역할이 최대한 발휘되어 가치가 발현되도록 남김없이 제공해야 한다. 그것을 썩혀서는 안 된다. 네가 활용할 수 있고, 할 줄 알며, 능통하기 때문에 그것이 발휘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발휘하는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얼마나 필요한지, 어느 정도로 필요한지에 따라 절제적으로 알맞게 발휘하는 것이다. 네가 습득한 기술 업무나 특기를 네 본분에 활용하여 그것의 역할을 발휘시킴으로써 네 본분이 더 좋은 효과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네가 전문 기술과 특기를 배운 것이 헛된 일이 아니지 않겠느냐?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기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여하고 싶지 않으냐? (그러고 싶습니다.) 이는 좋은 일이다. 하나님 집에서 쓸모가 없는 기술이나 특기는 하나님 집에서 필요로 하지 않고, 제창하지도 않는다. 이런 쪽의 기술과 특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멋대로 발휘하지 마라. 너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포기하고 애초에 배우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네가 기꺼이 포기한다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튀어나와 교란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약간의 지식에 불과하다.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잘못과 파문이 얼마나 크겠느냐? 네가 애초에 안 배운 것으로 여기고 없는 것으로 여기면 될 일이 아니더냐? 너는 정확하게 이 일을 대해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 네게 요구하지 않으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기의 흥미를 위해, 모두에게 네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굳이 뽐내지 마라. 이는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아니며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알려 주겠다. 기억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죄까지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 성질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심각하겠느냐? 그것의 성질은 방해이고 교란이다! 하나님 집에서 내가 그 일을 금한다고, 그 일을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하는 것을 금한다고 거듭 알려 주었는데도 네가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내려놓지 않고 고수한다면 이것이 교란이 아니겠느냐? 고의가 아니겠느냐? 하나님 집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고의로 그렇게 한다면 이것은 자기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만든 영상, 프로그램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네 죄는 클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이나 개인적으로 습득한 전문 기술을 만약 네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고 귀히 여긴다면 집에서 사적으로 하는 것은 괜찮다. 다만 공개적으로 알리지 마라.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은 반드시 내놓을 수 있을 만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거나 하나님 집에 먹칠을 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네게 식견이 있는지 없는지, 네 전문 기술의 수준이 어떤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너희에게 요구하는 각 사역의 원칙과 요구 기준, 그리고 단계별로 너희의 사역을 지도하는 방향과 목표는 모두 근거가 있다. 이는 모두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이지 방해, 교란, 먹칠,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너희 개인의 자질, 식견, 경력, 품격이 뒤처지거나 미치지 못한다면 너희가 따로 교제해 보고 깨달은 사람,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 많이 알려 주고 돕게 하거라. 대항하지도 말고 너희에게 못하게 한다고 해서 부정적 정서에 빠지지도 마라. 너희의 그 알량한 재주로는 턱도 없다. 어째서 너희더러 턱도 없다고 하겠느냐? 너희의 생각과 관점이 너무나도 치우치기 때문이다. 너희는 품격, 식견, 견해, 경력 면에서 너무 뒤떨어질 뿐 아니라 낡아 빠진 종교 관념도 가지고 있다. 너희의 종교 관념은 너무 많고 너무 깊다. 심지어 이십 대 청년들의 생각과 관념마저 매우 낙후되어 있다. 너희는 현대인이고 현대 기술 업무를 배우고 어느 정도 전문 지식을 가졌지만 너희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 입장과 품고 있는 생각이 다 매우 뒤처져 있다. 그러니 너희가 전문 기술을 얼마나 배웠든, 너희의 생각은 뒤처져 있는 것이다. 너는 이 문제와 실상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 도태시키고 없애고 사용하지 말라고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말에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이 내면의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면 최소한 네가 갖춰야 할 이성은 말을 듣는 이성을 갖추고 우선 하나님 집의 요구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반항하지 말고 우선 순종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문 기술에 대해 취해야 할 정확한 태도를 교제했는데, 또 무엇을 깨달아야 하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분야의 기술 업무와 특기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해 실패하고, 그럼으로써 결국 교회 사역에 방해와 손실을 초래해 책망과 훈계를 받게 된다면 이럴 때 넌 어떻게 해야겠느냐? 어려울 게 없다. 즉시 돌이키고 회개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네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줄 것이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기에 누구나 실수할 때가 있고 흐리멍덩할 때가 있다. 하지만 실수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걱정되는 것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인데, 한 번 했던 실수를 몇 번이고 계속 반복하면서 반성하지는 않는 것이다. 네 잘못을 알면 고치면 된다. 그게 뭐가 어렵겠느냐? 다들 실수한 적이 있기에 누구도 남을 비웃으면 안 된다. 실수를 해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교훈을 얻고 돌이킨다면 발전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만약 업무에 미숙하여 문제가 생겼다면 다시 배움을 통해 업무를 숙달시켜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실수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얼마나 간단한 일이냐! 자신의 업무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 늘 실수해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고 해도 억압을 느낄 필요는 없다. 억압을 느낄 게 뭐 있겠느냐? 어찌 그리 연약한 것이냐? 어디에서든, 어떤 사역 환경에서든 사람은 실수할 때가 있고 자신의 자질과 식견, 안목이 부족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이니 너는 정확하게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요컨대, 네가 어떻게 실행하든 너는 정확하고 긍정적으로 그것을 대하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우울해하지 말고, 약간의 고충을 좀 만났다고 해서 소극적으로 변하고 억압을 느끼며 부정적 정서에 빠지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괜히 호들갑 떨 것 없다는 말이다. 네가 해야 할 것은 속히 자신을 반성하면서 업무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본인의 마음가짐의 문제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일할 때 어떤 불순물이 섞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어떤 측면의 관념으로 초래된 것인지 다방면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만약 업무 미숙의 문제라면 계속해서 배우면 되고, 다른 사람과 상의해 보거나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에게 자문을 구해 봐도 된다. 잘못된 마음가짐이 뒤섞인 문제여서 진리를 통해 해결할 문제라면 교회 리더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고 교제할 수 있다. 자기 내적 상태를 털어놓고 해결에 도움을 받으면 된다. 관념에 해당되는 문제라면 스스로 성찰하여 해부하고 인식하고 나서 돌이키고 저버리면 된다. 이러면 끝나는 일 아니겠느냐? 앞으로의 날들을 여전히 살아야 하고 내일의 태양은 떠오를 것이고 너는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 네가 이왕 살아 있고 사람인 이상 계속해서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네가 살아 있고 생각이 있다면 계속해서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잘 이행하고 완수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일생에서 변치 않아야 할 목표이다. 언제, 무슨 어려움이 생기고, 무엇에 직면하든, 억압에 빠져선 안 된다. 억압에 빠지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무너져 버린다. 어떤 사람이 늘 억압을 느끼겠느냐? 못난이, 어리석은 자가 자주 억압을 느낀다. 네게 마음이나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억압을 느끼느냐? 단지 지금 네 기술 업무나 특기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뿐이다. 제대로 발휘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네가 하나님 집에서 요구하는 대로 하고, 네가 습득한 기술 업무를 활용하여 하나님 집의 요구 기준에 도달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제대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네가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절도(節度), 기준, 원칙을 가지고 목표 있게 발휘하라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발휘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외의 본분과 무관한 일, 개인적인 사생활에 하나님 집에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본분 이행이라는 일에 대해 하나님 집에는 엄격한 규정과 요구 기준이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 업무 기술과 특기를 대하는 일에 있어 네 손과 발이 묶인 것이 아니며 생각에 통제를 받는 것도 아니다. 네 생각, 네 손과 발, 네 마음은 자유다. 단지 네게 부정적 정서가 생겼을 때 네가 위축, 의기소침, 거부, 저항을 선택한 것뿐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긍정적으로 마주하고, 하나님 집의 원칙과 규정 그리고 요구에 귀 기울이고 준수한다면 갈 길이 없는 것도,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너는 쓸모없는 사람도, 못난이나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자유 의지 그리고 정상적인 사고와 정상 인성을 주었다. 그러므로 네게는 이행해야 할 본분이 있고, 너는 네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게다가 너는 업무 기술과 특기를 갖추고 있어 하나님 집에서 너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특정 측면의 업무 기술이나 특기와 연관된 하나님 집 사역에서 네가 발휘해야 할 특기를 발휘한다면 본인의 위치를 찾은 것이고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한 것이다. 네가 본인의 위치에 굳건히 서서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역을 잘 완수한다면 너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닌 유용한 사람이다. 네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네게 생각이 있으며 사역도 잘 감당할 수 있다면 네게 어떤 고충이 있든 너는 억압을 느끼거나 위축되어서는 안 되고, 거부하거나 도피해서도 안 된다. 지금 당장 네가 해야 할 일은 부정적 정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투덜이처럼 하나님 집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것도, 형제자매가 너를 무시한다 불평하는 것도, 하나님 집에서 너를 중용하지 않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하나님 집에서는 네게 기회를 주었고 이행해야 할 본분을 네게 주었지만 네가 그 기회를 잘 잡지 못한 것이다. 너는 여전히 자신의 선택과 요구가 있었고,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네게 알려 준 사역 원칙을 새겨듣지 않았다. 너는 자신의 뜻이 너무 강하다. 그러니 네가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빠진다면 다른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 집이 네게 잘못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 집이 너를 받아주지 않은 것은 더더욱 아니며 너 스스로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너는 자기가 습득한 기술 업무와 특기를 정확하게 대하지도 활용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성적으로 이 일을 대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부정적 정서로 저항한 것이다. 이는 너의 잘못이다. 네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고 억압에서 벗어난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사역과 해야 할 사역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만약 이런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태도로 네 본분을 마주한다면 너는 앞길이 어둡지 않고 밝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도 네 눈을 가리거나 네 발목을 잡지 않는다. 그저 너 스스로 나아가려 하지 않을 뿐이다. 네 취향과 욕망 그리고 계획이 네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네가 이런 것들을 한쪽에 두고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집의 사역 환경에 적응하고, 형제자매가 너를 돕고 붙들어 주는 것에 적응하며, 하나님 집에서 본분 이행과 사역 방식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취향과 욕망,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한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는다면 자연스럽게 억압이라는 정서에서 점차 빠져나올 것이다. 또 하나 네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네가 얼마나 수준 높은 업무 기술이나 특기를 가지고 있든 그것이 네 생명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네 생명이 자랐다거나 네가 구원받았음을 의미하지도 않는 것이다. 네가 만약 자기 업무 기술이나 특기를 가지고 하나님 집에서 정상적으로, 고분고분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한다면 너는 하나님 집에서 훌륭한 사람이자, 진정으로 하나님 집의 일원이다. 하지만 네가 늘 본분을 이행한다는 명분으로, 본분 이행과 하나님 집에서 네게 준 기회를 이용해 네 취향과 야심, 욕망에 기대어 자기 특기를 최대한 발휘해 자기 사업을 하거나 개인 경영을 하다 실패하게 되면, 너는 억압을 느낄 것이다. 이 억압은 누가 초래한 것이냐? 너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너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늘 개인의 경영을 하는데, 이는 하나님 집에서 통하지 않는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시종일관 진리, 즉 하나님의 요구와 말씀만 얘기한다. 그 외에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러니 어떤 업무나 사역에서든 하나님 집에서 사람에게 하는 요구나 제시하는 특별한 사역지침은 누군가를 겨냥한 것도, 이를 통해 누구를 억누르거나 누군가의 사기나 콧대를 꺾으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 사역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을 증거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여기 앉아 있는 너희 모두가 속히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알겠느냐? 오늘 이야기한 사례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내 말이 옳다고 생각된다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고 여전히 억압을 느낀다면 계속 억압을 느끼거라. 이런 부류의 사람이 어디까지 억압을 느낄 수 있는지,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를 품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돌이키지도 않는 상태로 하나님 집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자.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억압을 내려놓지 못하면 생기는 폐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그들이 기회만 생기면 튀어나와 일을 저지르려 한다는 것인데, 자기가 결정권을 잡고 하나님 집의 모든 요구와 규정 그리고 원칙을 내팽개치고 함부로 굴면서 최대한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일을 저지르면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경하면 하나님 집에 경제적 손실을 입힐 것이고, 심하면 교회의 사역을 교란할 것이다. 만약 리더나 책임자가 책임을 지지 않고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집의 복음 확장 사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인데,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에 해당된다. 만약 이런 사람에게 이런 일이 벌어져 이런 결과가 발생한다면 이들의 마지막 날이 도래한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미리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일찌감치 억압을 내려놓고 이제껏 기술 업무와 특기를 높이 평가하고 중시하던 자신의 태도와 견해를 고치는 것이 낫다. 관점을 바꾸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그것을 애지중지하지 마라. 그것을 애지중지하지 말라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 집에서 전혀 중시되지 않기 때문도, 그런 것들에 대한 나의 규정이나 좋지 않은 시선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전문 기술이나 특기의 본질이 도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리나 생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 모든 기술 업무나 특기도 사라질 것이나, 사람이 얻은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얼마나 수준 높고, 위대하며, 대체 불가의 업무 기술이나 특별한 특기를 갖추었든, 인류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며 나아가 사람의 작은 생각과 관점마저도 바꿀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작은 생각과 관점마저도 바꿀 수 없으니 하물며 사람의 패괴 성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더더욱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나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인류의 현재와 훗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없으며, 나아가 사람의 운명도 결정할 수 없다. 사실이 바로 이러하다. 못 믿겠다면 두고 보거라. 내 말을 믿지 않고 계속 지식과 기술 업무, 특기 같은 것들을 애지중지하겠다면 끝까지 애지중지해서 누구를 망치게 될지, 네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한번 두고 보거라. 어떤 사람은 컴퓨터 기술에 능통하여 그 능력이 일반인보다 월등하다. 업계에서는 조예가 깊은 걸출한 인물로 통하고 어딜 가도 늘 거드름을 피우며 “저는 컴퓨터 인재입니다. 컴퓨터 엔지니어죠!”라는 말을 한다. 네가 늘 그렇게 거드름을 피우면 얼마나 멀리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너는 그 타이틀을 버리고 자신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너는 평범한 사람이다. 기술 업무와 특기가 사람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머릿속 생각과 사고에만 제한되는 것으로, 기껏해야 사람의 뇌세포 속에 가득 차고 사람의 기억에 인상이나 흔적을 남길 뿐, 사람의 생명 성품이나 앞으로 사람이 걷게 될 길에는 아무런 긍정적 영향이나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네가 습득한 업무 기술이나 특기를 붙들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고 귀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얻은 후 기고만장하게 우월감에 젖어 스스로 존귀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너를 어리석다고 한다. 그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들을 내려놓는 시도를 해 보기를, 이른바 기술자,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기술 영역과 전문 영역에서 벗어나 말이나 일을 착실하게 하는 법, 사람이나 일을 착실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더 이상 허무맹랑한 생각을 갖거나 뜬구름을 잡으려 하지 마라. 발을 땅에 딛고 착실하게 일을 하며 처신해야 한다. 정직하거나 솔직하게 말하는 법, 실제적인 말을 하는 법, 사람과 일에 대해 정확한 생각과 관점, 시선과 입장을 갖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이다. 다시 말해, 여러 해 동안 네 마음속에 있었고, 너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한 업무 기술이나 특기를 내려놓고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대로 처신하고 말하는 법,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법, 본분을 잘 이행하는 법 등의 가장 근본적인 것들을 배우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걷는 길과 사람의 생존, 사람의 미래와 관련이 있다. 이렇게 사람이 걷는 길, 사람의 미래와 관련이 있는 것은 네 운명을 바꾸고, 네 운명을 결정하며 너를 구원할 수 있다. 반면 업무 기술, 특기는 네 운명이나 미래를 바꿀 수 없고, 그 무엇도 결정할 수 없다. 네가 만약 이런 기술이나 특기를 가지고 사회에서 일한다면 그것은 그저 네가 먹고살 수 있게 해 주고 혹은 삶의 질을 조금 높여 줄 뿐이다. 하지만 알려 주겠다. 하나님 집에 오면 그것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네가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그러니 어찌 되었든 너는 우선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견해를 가지고, 스스로 특수한 인재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 집에서 남보다 우월하거나 특별히 비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적어도 내 눈에 너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 네가 약간의 특수 재주를 가졌고 남들이 갖지 못한 약간의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했다는 것 말고는 너는 남들과 다를 바 없다. 네 언행, 생각과 관점은 사탄의 독소로 충만하고, 치우치고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으로 가득하니 너는 고치고 돌이켜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런데도 네가 여전히 득의양양, 자기만족, 자아도취 등의 상태에 빠져 있다면 너는 무척 어리석고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설령 네가 어느 정도 업무 기술과 특기를 갖춰서 하나님 집에 기여했을지라도 계속해서 그것들을 애지중지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 어떤 업무 기술과 특기도 네 평생의 힘을 쏟거나 나아가 네 장래와 아름다운 종착지를 걸고 애지중지하거나 고수하거나 두둔하거나 지키거나 심지어 그것을 위해 죽거나 살 가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네가 그것의 존재로 인해 다방면의 생각과 정서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고, 그것으로 인해 억압을 느끼거나 그것이 없어졌다고, 혹은 중용되지 못했다고 해서 억압을 느낄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는 어리석고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한 벌의 옷처럼 언제든 입고 벗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필요하면 입고 필요 없으면 언제든 벗어 버리거나 내버리면 된다.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 게 정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가 모든 지식과 기술, 특기를 바라볼 때 가져야 할 태도이자 관점이다. 너는 그것을 생명으로 간주하면서 애지중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말고 거기에 목매달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너는 그것을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 물론 네가 그것으로 인해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빠져 본분 이행과 진리 추구라는 일생의 중요한 일에 영향을 주어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기에 언제든 가져와 쓰다가 언제든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그 어떤 미련이나 감정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 집에서 네가 습득한 업무 기술이나 특기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을 찬성하든, 네게 포기하라고 하든, 혹은 정죄하거나 비판하든 너는 그 어떤 자신의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하고, 정확한 입장과 시선을 가지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대하고 마주해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 그것을 사용한다면 네게 부족한 부분은 배우고 탐구하면 되고, 하나님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너는 아무런 염려나 고민 없이 주저하지 말고 그것을 내려놓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토록 간단하다. 하나님 집에서 네 업무 기술이나 특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너 한 사람을 겨냥한 것도, 네게서 본분을 이행할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도 아니다. 네가 그런 이유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의 패역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 집이 절 무시해요. 제 특기랑 제가 습득한 지식을 무시합니다. 절 인재로 대우해 주지 않으니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래요!”라고 말한다면 너 스스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기로 택한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네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아니고 너의 본분 이행 권리를 박탈한 것도 아니다. 네가 만약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구원받을 기회를 포기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네가 자기 업무 기술과 특기 그리고 존엄성을 지키려 본분 이행과 구원받을 희망을 포기한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것이 이성적이냐 아니면 비이성적이냐? (비이성적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으냐 아니면 현명하냐? (어리석습니다.) 그럼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길이 보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길이 보일 것이다. 그럼 여전히 억압을 느끼겠느냐? (억압을 느끼지 않습니다.) 억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억압적 정서를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본분을 대하는 태도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억압을 느끼는 사람은 영원히 즐겁지 않을 것이고, 평안이나 기쁨도, 본분 이행을 통한 즐거움이나 위안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난다면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행복과 위안,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런 다음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런 사람의 앞날은 밝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늘 억압을 느끼면서도 진리를 구해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냥 계속해서 억압을 느끼거라.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네가 늘 억압을 느끼면 앞날은 칠흑처럼 어두컴컴하여 암담하기만 할 것이다. 길이 보이지 않아 매일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갈 것이니 너무나도 어리석다! 사실 대단할 것 없는 사소한 일인데 사람이 헤어 나오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며 돌이키지도 못한다. 돌이킨다면 사람의 마음가짐과 소망은 달라질 것이고 추구하는 바도 달라질 것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자. 다들 억압의 부정적 정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바란다!

2022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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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을 것을: (직역) 써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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