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0)

우리가 교제한 각 방면의 주제는 모두 일상생활의 실제 내용과 관련된다. 그 내용을 듣고 진리는 공허한 것이 아니고 구호도, 일종의 이론도 아니며 지식은 더더욱 아님을 느끼지 않았느냐? 진리는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우리의 현실 생활과 관계가 있습니다.) 진리는 현실 생활과 관계가 있고, 현실 생활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과 관계가 있다. 진리는 인성 생활의 모든 측면과 관련되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온갖 문제와 관련되며, 나아가 사람의 추구 목표 및 사람이 걸어가는 길과 관련된다. 그 어떤 진리도 공허하지 않고, 있으나 마나 한 건 더더욱 아니다. 모두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일부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될 때, 만약 우리가 교제한 진리 원칙을 근거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해결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된다면 너는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만약 일상생활에서 진리와 관련된 이런 문제에 대해 여전히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던 사상 관점을 고집하고, 본인 인성의 각도에서 그 일들을 바라본다면, 또 그 일들을 바라보는 원칙과 근거가 진리와 관계가 없다면 분명히 너는 진리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다. 우리가 어떤 방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그와 관련된 주제는 모두 각 방면의 일에 대한 사람의 잘못된 사상 관점과 관념 상상을 바로잡고 되돌려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올바른 사상 관점을 지니게 해 준다. 또한, 현실 생활에서 발생하는 그런 일을 언제나 올바른 각도와 입장에 서서 바라보고, 그런 다음 진리를 준칙으로 그것들을 해결하고 처리할 수 있게 한다. 설교를 듣는 이유는 도리와 지식을 갖추기 위한 것도, 견문과 식견을 넓히기 위한 것도 아닌, 진리를 깨닫기 위한 것이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목적은 사람이 사상적, 정신적으로 혹은 인성 면에서 충실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현실 생활과 괴리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일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다. 만약 오랫동안 설교를 들어서 도리와 지식이 좀 늘고, 정신세계도 충실해지고, 사상의 차원도 조금 높아졌지만,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만났을 때 여전히 올바른 각도에서 그런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고, 또한 꾸준히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진리 원칙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지 못하고, 처신하지 못하고,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분명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진리 실제에 진입한 사람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아직도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네가 아직 구원받는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현재 너희의 실제 분량, 너희의 상태에 근거했을 때, 너희는 어느 방면에서 진리 실제에 진입했다고 느끼느냐? 어느 방면에서 구원받을 희망이 생겼느냐? 어느 방면에서 아직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고 구원받는 기준에 한참 이르지 못했느냐? 이런 것을 판단할 줄 아느냐? (적그리스도나 악인이 교회 사역을 교란하여 하나님 집 이익에 손해를 입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정의감도 없고 하나님께 진실한 충성심도 없어서 나서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 근본적인 옳고 그름과 관련된 문제에서 별로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저는 구원받는 기준에 전혀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현실의 문제다. 다들 더 얘기해 보아라.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버리는 것과 관계된 문제를 통해 자신의 분량을 인식한 것 말고, 또 다른 방면은 없느냐?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일 중에서 본인이 실제에 진입하지 못해서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지 못했다고 느낀 일, 비록 도리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진리를 잘 몰라서 길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마음에 합하고 원칙을 지킬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꽤 오래 본분을 이행하면서 저는 제가 가정도 직장도 버리고, 부모와 가족에 대한 정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실제 상황에 놓이니까 제 안에 아직도 정이 남아 있어서 곁에서 부모님을 보살피며 효도하고 싶고, 그러지 못하면 속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최근에 부모는 내 채권자가 아니라고 하신 교제를 듣고 나서야 제가 이 방면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누가 얘기해 보겠느냐? 너희는 일상생활에서 어려운 점이 없느냐? 아니면 딴 세상에 살고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냐? 본분을 이행할 때 어려운 점이 없느냐? 건성으로 대충 임하는 경우는 없느냐? (있습니다.) 육적인 안일함을 탐한 적은 없었느냐? 명예와 지위를 위해서 사역한 적은 없었느냐? 늘 자기 앞날과 훗날을 걱정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 졸이고 조바심을 내지 않았느냐?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처리했느냐? 진리로 해결할 수 있었느냐? 발탁되었을 때 자신에게 여지를 남겨 둔다든가, 해임되었을 때 앞날과 종착지를 걱정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원망하며, 관록을 내세운 그런 문제는 없었느냐?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처리하고 해결하느냐? 사욕에 따라 행하느냐, 아니면 진리 원칙을 지키며 육과 패괴 성품을 버리고 진리를 실행하느냐? (하나님, 그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육적인 기호나 패괴 성품에 따라 행하면 안 된다는 점을 도리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양심적으로 자각하고 죄책감을 느끼면 행위 면에서 달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을 바라보는 제 관점에 변화가 생겨서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가끔 개인적인 욕심이 앞설 때가 있는데, 그럴 때가 너무 어렵습니다. 용을 써서 실행하려 해도 여의치 않습니다. 이때는 패괴 성품을 따르게 되어 표면적인 좋은 행위조차 보이지 못합니다.) 이것은 어떤 상황이냐? 마지막에 진리를 실행하여 굳게 섰느냐, 아니면 실패했느냐? (실패했습니다.) 나중에 반성하고 통회했느냐? 그런 일이 또다시 생겼을 때 조금 개선할 수 있었느냐? (실패하고 난 뒤에는 양심상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저에게 대조해 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그런 상황을 만나자 또다시 패괴 성품을 드러냈습니다. 이쪽 방면에서는 크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상태에 놓여 있지 않느냐? 너희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똑같은 일이 생겼을 때 사람이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양심의 작용으로 행위가 조금 개선되거나 혹은 당시 배경과 내적 상태에 따라, 기분에 따라 상대적으로 고상한 행위를 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비열한 행위를 하기도 한다. 이 밖의 실행은 진리와 관계가 없다. 이것은 무슨 문제이냐? 이것이 한 사람의 분량을 의미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건 어떤 분량이냐? 어린 분량이냐, 아니면 연약함이냐, 인성의 결함이냐, 아니면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모습이냐? 그건 어떤 것이냐? (어린 분량입니다.) 분량이 어리면 진리를 실행할 수 없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량이 작은 것이다. 어느 정도로 작으냐? 네가 이 일에서 아직도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진리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네 생명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는 아직도 문자나 도리, 말에만 머물 뿐, 네 내면에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네 생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깨달은 소위 그런 진리는 일종의 도리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너는 이 도리를 네 실제로 바꾸지 못해서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진리에 따라 그 일을 처리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탄의 패괴 성품에 따라, 양심이 움직이는 대로 하고 처리했다. 그러니 적어도 그 일에서 네가 진리도 없고, 생명도 얻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생명을 얻지 못했으니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으니 그 일에서 전혀 구원받지 못한 채 여전히 사탄의 권력 아래 살아가고 있다. 양심의 작용으로 실행해 낸 것이 좋은 행위이든, 아니면 일종의 모습이든, 모두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상 인성의 모습에 불과하다. 그런 모습에 양심이 섞여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좋은 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양심의 작용조차 주도하지 못하고 패괴 성품이 주도한다면, 그런 건 좋은 행위가 아니라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어떤 일에서 진리가 실제가 되고, 생명을 얻었느냐? 또 어떤 일에서 아직 너희 생명이 될 진리를 얻지 못하고, 진리가 실제가 되지 못했느냐? 다시 말해, 어떤 일에서 하나님 말씀을 살아 내고, 또 하나님 말씀을 준칙으로 삼고 있으며, 어떤 일에서는 그러지 못했느냐? 얼마나 되는지 세어 보아라. 만약 그걸 다 세어 봤는데 불행하게도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한 일,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살아 낸 일은 하나도 없고, 모든 일이 혈기나 관념, 육적인 기호와 욕망에 따라, 혹은 패괴 성품에 따라 한 것이라면, 최후의 결과가 어떻겠느냐? 좋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오늘날까지 오면서 여러 해 동안 설교도 듣고, 가정도 직장도 버리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렀는데, 만약 이런 결과를 맞이한다면 기뻐하고 축하할 만한 일이냐, 아니면 슬프고 우려되는 일이냐? (슬프고 우려되는 일입니다.) 진리를 실제로 만들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만들지 못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사탄의 패괴 성품에 완전히 통제되어 살아가는, 구원받을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자신을 성찰할 때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생각해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 ‘열일곱 살 때부터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 지금은 마흔일곱이구나. 긴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몇 번 잡혀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 산속 동굴에서도 살고 초막에서도 살았고, 며칠씩 굶은 적도 있고, 잠을 못 잔 적도 많았어.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 사역을 하기 위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고생도 많이 하고, 열심히 뛰어다녔지. 난 구원받을 희망이 너무나 크고, 이미 구원받는 길로 접어들었어. 난 정말 행운아구나!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건 다 하나님 은총이야! 생각해 보면 난 세상에서 정말 보잘것없고,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어. 한 번도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하나님이 높여 주시고, 거름 더미에서 궁핍하게 사는 나를 발탁해서 구원받는 길에 들어서게 하시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행운을 누리게 해 주셨어. 하나님은 나를 높여 주셨고, 나를 사랑하셔! 지금은 또 진리를 이렇게 많이 깨닫고 사역도 오랫동안 해 왔으니 앞으로 상을 받는 건 기정사실이야. 그걸 누가 빼앗아 가겠어?’ 스스로를 성찰할 때 이런 생각만 한다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말해 보아라. 너희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만큼 고생도 많이 하고, 많이 뛰어다니고, 사역도 많이 했는데, 왜 지금 어떤 사람들은 믿다가 B팀으로 분류되었느냐? 어째서 수많은 리더 일꾼이 지금 제물을 갚아야 하고, 채무를 안고 있느냐? 어찌 된 일이냐? 이미 구원받지 않았더냐? 이미 진리를 갖추고 생명을 얻지 않았더냐? 어떤 사람들은 본인이 하나님 집의 기둥이자 대들보, 하나님 집에서 흔치 않은 인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느냐? 만약 오랜 세월 고생하고 대가를 치러 생명과 진리 실제를 얻었다면,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본분에 충성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런 사람들이 직위가 해제되고 B팀으로 분류되었겠느냐? 채무를 떠안거나 중대한 과실이 기록됐겠느냐? 그런 문제들이 발생했겠느냐? 이건 무척 난처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어떤 문제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이 고생하고 대가를 많이 치른 것은 구원받거나 진리 실제에 진입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 아니고, 한 사람에게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는 표징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고, 무엇이 진리 실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냐?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진리 원칙이 있고, 진리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매사에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하자.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독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못 하는데, 바로 진리 원칙을 견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항상 자기 이익을 고려하고, 자신을 위한 퇴로를 생각하고, 자신을 보전하느라 진리 원칙을 견지하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도 너에게는 도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너란 사람의 값어치를 떠나, 네 삶이 가치 있고 없고를 떠나 최소한 분명한 한 가지는 바로 너에게 생명이 없다는 점이다. 생명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어도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쌍하고, 이런 일이 가장 서글프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모든 일을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네가 이행하는 중요한 본분에서, 그리고 일상생활 가운데 원칙과 관련되는 큰일에서는 모두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최소한 이 기준에 도달해야 너에게서 구원의 희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너희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충족하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서글프고도 우려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처음 3년은 매일 복받는 일이나 아름다운 종착지를 떠올리며 늘 싱글벙글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 고생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많이 헌금하는 등 이런 외적인 좋은 행위는 하나님을 믿으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3~5년이 지난 후에는 비록 도리를 일부 이해했지만, 진리 원칙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삼고 준칙으로 삼아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관념 상상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좋은 행위와 양심, 좋은 인성에 기대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이 가는 길이 어떤 길이냐? 바울이 걸어간 길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지금 이런 상태에 처해 있지는 않느냐? 이런 상태에 처해 있을 때가 많다면,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듣는다고 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어느 방면의 설교를 듣든, 네가 진리를 깨닫기 위한 것이 아니라, 또 일상생활에서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네 정신세계와 인성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설교는 들으나 마나요, 별로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안 들으면 안 되죠. 설교를 안 들으면 하나님을 믿을 때도 기운이 없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기운이 안 생기고, 동력도 없습니다. 사나흘에 한 번은 들어야 하나님을 믿는 일에 기운도 좀 생기고, 속으로 어느 정도 충족감도 들고 풍부해졌다고 느끼죠. 그러면 본분을 이행하다 어려움을 만나거나 소극적이 될 때 동력이 생기고, 대부분의 경우 소극적이 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이 이런 성과를 얻기 위한 것이냐? 몇 년씩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아무리 책망하고, 징계하고, 채찍질해도 떠나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성과는 설교를 듣는 것과 일정 부분 관계가 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단지 너희가 매번 설교를 듣고 난 뒤 마음속에서 곧 꺼지려던 불이 되살아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뿐이 아니다. 기운이 생기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기운이 생기는 것은 그것으로 악을 행하고, 진리 원칙을 어기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뚜렷한 목표와 방향성을 가지고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원칙을 향해 노력하고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설교를 들으면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느냐? 매번 설교를 듣고 나면 마음속에 불이 지펴진 것 같고, 충전이 되고 바람이 넣어진 것 같다. 기운도 충분해지고, 앞으로 어느 방면에 힘을 내야 할지도 알겠고, 언제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소극적이 되지 않고, 좀처럼 연약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이런 모습이 구원에 이르는 조건은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조건이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려 하고, 설교를 들으려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가장 중요한 것인데, 네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그 어떤 크고 작은 일이든, 특히 본분 이행과 관련된 일, 하나님 집의 중요한 사역과 관련된 일은 모두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하거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너희에게 싫은 기색 없이 계속 진리를 교제하고 여러 가지 일의 원칙을 설명해 주는 목적은 능력이 안되는 일을 억지로 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너희에게 기운만 불어넣고 끝내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더 정확히 이해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원칙과 근거가 무엇인지,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일이 닥쳤을 때는 사람의 패괴 성품과 사상 관점, 사람의 지식을 따라 처리할 것이 아니라 진리 원칙이 그것들을 대신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 역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가장 주된 방식이다. 즉, 네가 만나는 모든 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와 원칙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일에서 왕권을 잡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처리하고 해결해야지 사람의 머리나 기호에 의지해서도 안 되고, 사람의 입맛이나 야심, 욕망에 근거해 대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설교하고 진리를 교제하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사람 내면에 만들어 줌으로써 진리가 실제가 되는 생명을 사람이 갖추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표징이다. 어떤 일을 만나든 진리 원칙과 하나님 말씀에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이고 슬기로운 사람이다. 항상 외적인 행위와 형식, 도리와 구호에만 노력을 쏟는 사람들은 모두 미련한 사람이고, 구원받고자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일을 너희는 전혀, 혹은 거의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 원칙을 실행하는 것과 관련된 일에서 마음이 거의 텅 비었다. 너희는 이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을 만날 때마다, 특히 어떤 큰일을 만나고 적그리스도나 악인이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을 만날 때마다 늘 수동적이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사심과 감정에 따라 그 일을 대하고, 나서서 교회 사역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에는 실패로 귀결되거나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이런 일들을 추궁하지 않으면 어물쩍 넘어가게 되고, 책임을 추궁하면 네가 본분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본분이 조정된다. 심한 경우 B팀으로 분류되고, 심지어 제명되는 사람도 있다. 너희가 바라던 결과가 이런 것이냐? (아닙니다.) 어느 날 정말 본분에서 물러나거나 본분 이행이 정지당하고, 좀 더 심하게는 보통 교회나 B팀으로 가게 된다면 너희는 반성하겠느냐?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게 오늘 같은 이런 결과를 위한 것이었나? 나는 직장도, 앞날도, 가정도 내려놓았어. 그렇게 많은 것을 버렸는데 설마 B팀으로 분류되고 제명당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겠지? 내가 하나님과 맞서려고 하나님을 믿었나? 그게 내가 하나님을 믿은 목적은 아니잖아.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었을까? 잘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건 접어 두고, 최소한 생명을 얻고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 최소한 어떤 방면의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내 생명이 되었는지 느낄 수 있고, 진리에 따라 살아갈 수 있고, 진리로 사탄을 물리치고 내 패괴 성품을 물리칠 수 있으며, 내 육을 저버리고 내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어. 일이 닥쳤을 때 절대적으로 진리 원칙을 견지하고, 패괴 성품에 기대서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어떠한 어려움과 방해도 없이 매우 순조롭게, 자연스럽게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할 수 있을 거야. 이 방면의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이미 내 안에 만들어져서 내 생명이 되고, 내 인성의 한 부분이 된 것을 확실히 느껴. 이것은 즐거운 일이자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야.’ 너희는 평소에 이런 느낌을 받느냐? 하나님을 믿는 동안 받은 고통과 치른 대가를 생각하면서 속으로 아주 만족하고,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고 느끼고,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 말이다. 너희는 이런 느낌을 받고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느냐? 만약 그런 게 없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금부터 열심히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추구해야 하는데, 어떻게 추구해야 하느냐? 어떤 일에서 자주 하나님을 거역하는지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은 몇 번이고 너에게 상황을 마련해서 공과를 배우게 하고, 그 일을 통해 너를 변화시키고 하나님 말씀을 네 안에 만들어서 네가 이 방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네가 그 일에서 사탄의 패괴 성품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 말씀을 네 안에 만들어서 네 생명이 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너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살아 내지 않았다. 너는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구원받을 기회를 하나씩 하나씩 잃어 갔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겠느냐? 오늘부터 네가 반성할 수 있는,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문제에서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진리 실제와 생명으로 삼고,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육을 저버리고, 자신의 기호를 버리고, 진리 원칙에 따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실행의 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앞으로 열심히 추구할 생각만 하고 구체적인 실행 길이 없다면 다 헛일이다. 반면 네게 구체적인 실행 길이 있고, 또한 이렇게 육을 저버리고 다시 시작하기를 원한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다. 만약 네가 이렇게 실행하는 대신 여전히 낡은 길을 걷고, 낡은 생각에 따라 살아가고, 패괴 성품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다. 네가 기꺼이 봉사자가 되겠다는데 더 무슨 말을 하겠느냐? 구원받는 일이 너와 관계가 없고, 너도 여기에 관심이 없다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만약 네가 정말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 첫걸음은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여러 가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념, 행동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이 일상생활에서 너에게 마련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감찰과 검증,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일을 만났을 때 차츰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고, 차츰 하나님 말씀이 네가 일상생활에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준칙이 되도록, 네 생명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모습이고,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모습이다. 듣기에는 아주 쉽고, 그 절차도 장황하지 않고 매우 간단하지만 막상 실행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의 내면에는 옹졸함, 부정한 방법, 이기심과 비열함, 패괴 성품, 각종 수법 등 패괴된 것이 너무나 많은 데다 어떤 사람들은 지식이 있고, 또 사회에서 배운 처세 철학, 음모와 수단 및 인성적인 결함과 문제 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먹고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 너무 불량한 사람,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 경솔하고 충동적인 사람 등 많은 문제들이 있고, 인성상의 많은 결함과 문제를 모두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구원받고 싶다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여 진리와 생명을 얻고 싶다면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진리를 깨달아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이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하며,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을 견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간단한 몇 마디 말을 사람은 실행하고 체험할 줄 모른다. 사람의 자질과 지식수준이 어떻든, 나이가 많든 적든, 하나님을 몇 년을 믿었든 진리를 실행하는 길이 옳고, 목표와 방향이 옳다면, 네가 추구하는 것, 네가 치르는 대가가 모두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틀림없이 진리 실제일 것이고, 생명이 되는 하나님 말씀일 것이다. 우선 목표를 확정하고 그런 다음 차츰 그 길을 따라 실행한다면 마지막에 반드시 수확이 있으리라는 것을 너희는 믿느냐? (믿습니다.)

이번 단계에서 교제하는 주제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로, 지난번 예배 때는 가정에서 비롯되는 부담을 내려놓는 일에 관해 교제했다. 가정에서 비롯되는 부담이라는 이 주제에 관해 먼저 부모에게서 비롯되는 기대를 교제하고, 그런 다음 후대에 대한 부모의 기대에 관해 교제했다. 이런 건 모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에서는 총 네 가지를 열거했다. 첫 번째는 취미와 관심사, 두 번째는 결혼, 세 번째는 가정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교제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무엇이냐? (사업입니다.) 네 번째는 사업이다. 이제 이 사업을 교제할 차례다. 너희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전에 이 주제를 생각해 본 사람이 있다면 먼저 얘기해 보아라. (전에는 한 사람의 사업 성공 여부는 그 사람의 처신 성공 여부를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 사람에게 사업욕이 없거나 그의 사업이 엉망으로 운영된다면, 그것은 그의 처신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사업 내려놓기 방면에 관련된 문제에서 마땅히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사업에 대한 사람 내면의 야심과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도 한 가지 견해이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에서 사업이라고 하면 너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내려놓는 것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업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번거로움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전에는 세상에서 사업이 성공해 이름이 좀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사업을 추구하며 잘나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뒤로도 하나님 집에서 잘나가고 싶고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싶었는데, 이 문제가 제 생명 진입에 심각한 방해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이해하는 사업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추구이자 사람이 걸어가는 길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 중 사업을 교제할 때, 사람의 추구 방면에 관련된 내용은 잠시 접어 두고, 주로 ‘사업’의 문자적 의미에 대해 얘기해 보자. ‘사업’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바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사하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직업 혹은 노동을 말한다. 이 방면의 주제는 우리가 교제하려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 중에서 ‘사업’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내용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동시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업에 종사하고 사회에서 직업을 선택하는 범위와 원칙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이 부분은 많든 적든 일부 사람들의 추구 내용과도 관련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종사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도 관련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각종 일과 사업을 대할 때 마땅히 갖춰야 할 사상 관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업에 관련된 화제는 매우 광범위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분류해 볼 것이다. 분류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직업에 종사하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직업에 종사하거나 직업을 대할 때 하나님은 이들에게 어떤 사상 관점을 지닐 것을 요구하는지를 사람에게 이해시키고자 한다. 이로써 사람이 관념과 소망 속에 담긴, 사업에 대한 추구와 바람을 내려놓고, 동시에 세상에서 종사하는 직업, 혹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사업에 대한 그릇된 관점도 바로잡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사업의 내용에 관해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기로 하자. 첫 번째로 사람이 이해해야 할 문제는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각종 사회 세력을 멀리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내용을 기준으로 사업 내려놓기에 관한 문제들을 교제해 보겠다. 너희가 볼 때 이 네 가지 내용이 너희가 교제한 내용과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없습니다.) 너희가 교제한 것은 무엇이냐? (개인의 추구입니다.) 너희가 교제한 것은 진리 원칙과 관계가 없는, 개인의 작은 추구에 불과하다. 우리가 교제하는 이 네 가지는 모두 사업이라는 주제 안에 담긴 여러 원칙과 관련된다. 이 여러 원칙을 이해하면,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업과 관련된 방면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이제 사업 내려놓기에 관한 네 가지 원칙을 하나하나 교제해 보자.

첫 번째,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문자적인 의미는 이해하기가 쉽다. 자선 활동이라는 일에 대해 다들 어느 정도 개념은 있지 않으냐? 이를테면 복지원이나 보호소 등 사회의 이런저런 자선 기구들은 모두 자선 사업과 관계된 기관, 명칭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종사하는 사업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첫 번째 요구가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무슨 뜻이냐? 바로 자선을 베푸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고, 자선 활동과 관계된 업종에 종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이 쉽게 이해되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너는 육 안에서 살고 있으며, 가정이 있고 자기 생활이 있다. 자신을 돌보고 가족을 부양할 생활비가 필요하기에 너는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첫 번째 요구는 자선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자선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육의 생계를 위해 자선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즉, 그 일은 네가 종사해야 하는 직업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직업도 아니며,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본분은 더더욱 아니다. 자선 활동 같은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관계가 없다.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만약 네가 자선 활동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일을 완벽하게 잘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심지어 형제자매들에게 인정받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 과거에 네가 자선 활동을 많이 한 대단한 선인이었다고 해도,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선한 일을 많이 해서 그만큼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다고 해도, 심지어 아무리 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너를 기억하고 궁극적으로 축복해 주는 일은 없으며, 너를 파격적으로 구원하고 아름다운 종착지를 주는 일도 없다. 즉,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선을 베푸는 일에는 무엇이 포함되느냐? 사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확실히 일종의 자선 사업이라고 생각할 만한 일이 한두 가지쯤은 있다. 유기견을 입양하는 일이 그런 예다. 일부 국가들은 애완동물에 대한 관리가 별로 엄격하지 않거나 경제적 여건이 썩 좋지 않아서 길에서나 다른 장소에서 유기견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유기견이 무슨 뜻이냐? 사람들이 더 이상 키우지 못하거나 키우기 싫어서 개를 버리거나 혹은 다른 사정으로 개를 잃어버리면 그런 개들이 길가에 돌아다닌다. 그러면 너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이런 동물들을 입양해야 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야. 이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짊어져야 할 일종의 책임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그래서 유기견이나 길고양이를 보면 집으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한다. 먹을 것, 쓸 것을 아껴서 사료도 사 주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급여, 생활비까지 거기에 보탠다. 나중에는 데려다 키우는 개, 고양이가 점점 많아져서 집을 빌려야 할 정도다. 이렇게 해서 생활비는 더욱 모자라고, 급여로도 지출을 감당할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빚까지 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그는 그것이 도의적으로 거절하거나 미뤄서는 안 될 책임이니 선한 일로 여기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것을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돈과 에너지, 시간을 들여 유기견이나 길고양이를 데려다 키우면서 자선 사업을 한다. 그러면서 마음이 편하고, 성취감도 있고, 스스로도 잘한 것처럼 생각한다. 심지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야.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을 키우는 일이고, 덕을 쌓는 일이니 하나님도 분명 기억하실 거야.’ 이런 생각은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지 않았다. 이것은 네 의무도 아니고, 네 책임도 아니다. 만약 길고양이나 유기견을 마주치면 네가 좋아해서 한두 마리 입양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길고양이나 유기견을 입양하는 일을 일종의 자선 사업으로 생각해서 하는 것이라면, 자선 활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이것은 치우친 인식, 치우친 이해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생존 능력이 좀 있다고 생각해서 손에 약간의 여윳돈만 생기면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 그 사람들에게 옷과 음식, 생필품, 심지어 돈까지 나눠 주고, 그 일을 자신이 다해야 할 일종의 의무로 생각하는가 하면,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을 집에 데려와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 거기다 돈까지 쥐어 주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겠다고 약속한다. 그 후 그들에게 음식과 거처를 제공한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입양하지 않는 고아들을 보면, 또 자기한테 여윳돈이 좀 있으면 그 고아들을 돕는다. 복지 시설, 고아원 등을 열어서 고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인 뒤에는 그들에게 음식과 거처를 제공하고, 학교도 보내 주고, 심지어 어른이 될 때까지 부양하는데, 자기만 그 일을 계속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들은 이것이 덕을 쌓고 복을 받는 일이자 하나님이 기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동안 가난한 지역에서 신앙을 가진 복음 대상을 보면 도와주고 베풀어 주고 싶어 한다. 복음 전파는 복음 전파일 뿐, 자선을 베풀거나 남을 도와주는 일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양들이 구원의 기회를 얻도록 하나님 집으로 데려오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제대로 먹고 입으며 정상인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느 각도, 어느 방면에서 얘기하든, 애완동물이나 동물을 구제하든, 가난한 사람이나 생활이 기본적인 수준에도 못 미치는 사람을 돕든, 자선 활동이라는 그 일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하도록 요구하는 본분과 책임, 의무가 아니다. 그 일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사람에게 좋은 마음이 있어서 그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간혹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났을 때 네가 능력이 된다면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일을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네가 능력이 있고 여건이 된다면 어쩌다 그런 일을 할 수는 있지만, 그건 단지 네 개인을 대변하는 것일 뿐 하나님 집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요구를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했다는 뜻도 아니고,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그건 단지 네 개인의 행위를 뜻할 뿐이다. 이따금씩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뿐이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일종의 사업으로 생각해서 양로원, 복지원, 고아원, 동물 보호소를 차린다면, 심지어 자연재해가 닥쳤을 때 네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형제자매, 혹은 민간에서 돈을 걷어 재해 지역이나 이재민들에게 기부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떠냐?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어떤 지역에 지진이나 수재, 혹은 어떤 천재나 인재가 발생하면 교회에 와서 형제자매들에게 돈을 기부해 달라고 요구한다. 더 심한 경우, 제물을 가져다 재해 지역이나 이재민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의무이자 사회의 한 민간단체로서 교회가 마땅히 다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일을 하나의 정의로운 사업으로 여기며 해 나가고, 형제자매들에게 기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헌금을 기부해서 재해 지역을 도울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떠냐? (부적절합니다.) 그뿐이냐? 그 일의 성질에 관해 얘기해 보아라. (제물은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하고, 복음 확장 사역에 사용하는 것이지 이재민을 구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재민을 구제하는 일은 진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해도 그것이 진리를 실행한 것도 아니고, 성품이 변화했다는 증거는 더더욱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든 사람이 같은 별에서 살고 있으니까 지구상에 사는 사람은 한가족이라고 생각한다. 한쪽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사방에서 도와줘서 재해 지역 사람들이 인간의 온정, 교회가 보내는 도움의 손길과 온정을 충분히 느끼도록 하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이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하나님을 증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을 견지하고 하나님 말씀과 사역지침대로 실행하라고 하면 의욕을 잃고 동력을 상실해서 그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다가도, 제물을 써서 빈곤하고 낙후된 국가의 사람들을 도와주고, 본분을 이행할 설비를 사 주고, 충분히 입고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라고 하면 무척 적극적으로 나서고, 서둘러 앞장서고, 그런 일을 더 많이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가 이토록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이냐? 대단한 선인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선인이라고 하면 무척 고상하게 느껴지고 그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위해 자기 힘을 바치고 자신의 빛과 열을 발휘할 수 있어서 무척 영광이라고 생각되어 더욱더 흥분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무척이나 이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무척이나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배후에는 어떤 목적이 있느냐?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이냐? 하나님에게 이런 영광이 필요하겠느냐? 하나님에게 이런 증거가 필요하겠느냐? 네가 돈을 꺼내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 이름이 치욕을 당하는 것이냐? 하나님에게 영광이 없어지느냐? 네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얻는단 말이냐? 네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만족하느냐?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그건 어찌 된 일이냐? 그 사람들은 어째서 그렇게 하길 원하느냐? 그가 그렇게 하는 목적은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수혜자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통이 크고, 관대하고, 돈이 많다고 칭찬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늘 영웅 심리를 품고, 늘 구세주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자신은 구하지 않는 것이냐?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느냐? 다른 사람을 구할 능력은 있으면서 왜 자신을 구할 능력은 없느냐? 네가 그렇게 통이 크다면 어째서 자신을 팔아 그 돈을 그 사람들에게 주고, 그 돈으로 그 사람들을 구제하지 않느냐? 어째서 제물을 쓰는 것이냐? 능력이 있다면 네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거나, 아니면 하루에 한 끼만 먹어서 아낀 돈을 그 사람들에게 줘서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힐 것이지 어째서 하나님의 제물을 함부로 사용하느냐? 이것은 하나님 집 제물로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집 제물로 인심을 써 다른 사람들 입에서 ‘대단한 선인’이라는 칭호를 들음으로써 자기가 남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그런 허영심을 채우다니, 뻔뻔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뻔뻔하다면 그런 짓을 해야 하느냐?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확장하는 일의 성질은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는 양을 찾는 것이고, 그 사람들을 찾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경륜에 협력하는 것이지 자선을 베푸는 것도 아니고, 빈곤 지역에 가서 구제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행동은 복음 전파를 내세워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입고, 현대식 기기를 사용함으로써 현대식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런 건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전파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고,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에게 구원받도록 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사역의 필요로 직장과 가정을 포기하고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소수 사람에게 하나님 집에서 생활비를 지급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구제도 아니고, 자선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은 복지원을 세우는 것도, 보호소를 세우는 것도 아니고, 이런 혜택이나 금전으로 사람들을 매수하고 그들이 하나님 집에서 꼽사리 끼어서 먹고 마시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집은 기생충, 거지를 먹여 살리는 곳도 아니고, 부랑아나 고아를 받아 주는 곳도 아니며, 밥 못 먹는 사람을 구제해 주는 곳도 아니다. 그가 밥을 못 먹는 것은 자신이 게으르고 능력이 없는 탓이니 그래도 싸다. 그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얻으려는 것이지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멸시당하는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받아 주고 구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전파에는 복음 전파 원칙과 기준이 있고, 복음 대상자에 대한 요구 기준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지를 찾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네가 복음 전파 사역을 자선 사업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혹은 네가 복음 전파 방면의 본분을 이행하고, 그 사역에 종사할 때 그것을 자선 사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더더욱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방향 자체가 틀렸고, 출발점 자체도 틀렸다. 만약 누군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거나 일을 처리하는 방향이 그렇다면, 얼른 관점을 수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껏 가난한 사람, 혹은 사회 밑바닥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 적이 없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최소한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데 하나님이 너를 긍휼히 여기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야. 세상에서 멸시당하는 사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 억압받는 사람, 이 사회에서 소외된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어 하나님 집으로 들여보내 주시지.’라고 착각하지 마라. 틀렸다! 그건 네 관념이고 상상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 적도 없고, 그렇게 한 적도 없다. 그건 너의 일방적인 바람, 인의적인 좋은 생각에 불과하지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 보아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하나님 집에 들어온 사람 중에 사회 어느 계층 사람을 막론하고 밥을 굶었다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서 하나님 집으로 데려온 사람이 있더냐? 한 명도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선택한 그 사람들은 사회 어느 계층 출신이든 관계없이 설령 농민이라 해도 밥을 굶는 자도 없고, 거지도 없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너를 선택했다면, 네가 하나님 선민이라면 하나님은 네가 밥을 굶거나 구걸할 만큼 가난하게 두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네가 충분히 입고 먹도록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일종의 관념을 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 믿는 사람은 대부분 사회 밑바닥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고, 심지어 죄다 거지에다 구걸하는 사람들이야.’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심지어 내가 전에는 거지였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마대 자루를 걸치거나 개 쫓는 막대기를 들고 다닌 적이 있었느냐? 내가 전에 거지였다고 하는데 어째서 나는 모르는 일이냐? 당사자인 나도 모른다면 그건 완전 헛소리다! 하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거지였다는 말이냐? 하나님이 의지할 곳 없고, 밥을 굶었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이 세상, 이 인류가 하나님을 저버려서 하나님이 몸을 둘 곳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데도 인류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접대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패괴된 인류의 추태를 가리키며,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인간 세상에 와서 받은 고통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거지를 좋아하시는데, 우리가 거지보다 훨씬 나으니까 우리 지위가 하나님 눈에는 더 높아 보이겠군.’ 그래서 그는 거지를 도우려고 한다. 이것은 완전히 사람의 치우친 이해이고,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일 뿐, 하나님의 본질, 성품, 또 하나님의 긍휼, 자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에서 사업을 얘기할 때 사람에게 자선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왜 늘 동물을 학대하지 말고 잘 대해 주라고 하십니까? 그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집에서도 개와 고양이를 기르고, 개와 고양이를 학대하지 못하게 하는데요.” 너희가 보기에 이것이 자선 활동과 차이가 없느냐? 이것이 같은 일이냐? (아닙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이냐? (동물들을 학대하지 않는 것은 정상 인성의 구현입니다.) 정상 인성의 구현이라면, 정상 인성이 지녀야 할 실행법과 모습은 어떤 것이냐? (자신이 기르는 동물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동물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방법이다.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이냐? 이것은 진리와 관련된다. 내가 너희에게 얘기해 볼 테니 이것이 진리와 관련되는지 잘 들어 보아라. 하나님이 만든 동물을 아끼는 것은 정상 인성의 구현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동물에 대해 책임을 다하고 잘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동물을 기르는 이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애완동물은 사람이 길러야 하고 보살펴야 하는 것으로, 야생 동물과는 다르다. 야생 동물은 너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다. 네가 고의적으로 그것들의 생존 환경을 파괴한다든가 잡아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야생 동물을 최대로 존중하고, 최고로 아끼는 것이다. 사람이 집에서 기를 수 있는 가금과 가축, 또는 애완동물의 경우, 네가 기르고 있으니 당연히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니까 네 여건에 맞게 네가 시간이 있으면 많이 챙겨 주고, 바빠서 시간이 없으면 따뜻하고 배불리 지낼 수 있게 해 주면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껴 주는 것이다. 아껴 준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나님이 만든 생명을 존중하고, 하나님이 만든 생물을 아끼는 것이다. 그것들을 아껴 주고 지켜 주는 것, 이것은 자선이 아니라 바르게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원칙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건 자선 활동이 아니다. 자선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자선은 책임을 다하는 것도 아니고, 생명을 아끼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과 에너지의 범위를 초월해서 그 일을 일종의 사업으로 생각해 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과 무관하다. 만약 자신이 기르는 애완동물을 대할 때 최소한의 사랑도 없거나 책임도 다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인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적어도 그 사람은 인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강아지나 고양이는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네가 그것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를 떠나, 그것들을 좋아하고 말고를 떠나 최소한 책임지고 보살펴야 한다. 제때 먹이를 주고, 학대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네 경제적 여건에 맞춰서 먹일 수 있는 만큼 먹이고,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면 그만이다. 그것들은 생존하기 위한 조건이 그리 까다롭지 않다. 네가 학대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이만한 사랑도 없는 사람이라면 인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 수 있다. 학대란 무엇이냐? 이유 없이 때리고 욕하는 것이다. 밥을 줘야 할 때 주지 않고, 산책시켜야 할 때 시키지 않고, 아플 때도 돌봐 주지 않고, 기분이 나쁘다고 화풀이하고, 때리고, 욕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동물을 대하는 것이 바로 학대다. 네가 학대하지 않고 책임만 다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책임을 다할 만큼의 사랑도 없다면 차라리 기르지 말고 당장 놓아주든가,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보내서 살길을 마련해 주도록 하여라. 어떤 사람은 개를 기르면서 학대하지 않는다는 기본조차 지키지 못한다. 그는 화풀이를 목적으로 개를 기르는데, 기분이 안 좋거나 언짢아서 감정을 발산해야 할 때 감정 쓰레기통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을 때리고 욕했다가는 후환이 생기거나 책임을 지게 될까 봐 감히 하지 못한다. 집에 애완동물로 기르는 개가 있으니 화가 나면 그 개한테 푸는 것이다. 어쨌든 개는 아무것도 모르고 반항도 못 할 테니 말이다. 이게 바로 인성이 없는 사람이다. 개나 고양이를 기르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기르지 말고, 기르겠다면 책임을 다해야 한다. 동물들도 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고, 감정적으로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 동물들도 목이 마르면 물이 필요하고, 배고프면 먹을 게 필요하다. 또 가까이에서 어루만져 줄 사람이 필요하다. 네가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너 상대해 줄 시간 없으니까 저리 가!”라고 하는 식으로 애완동물을 대하는 건 좋지 않다. 여기에 양심과 이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람들이 “도대체 고양이, 강아지 목욕을 얼마나 안 시켰길래 이렇게 더러워요!”라고 얘기하면 그는 “흥, 이것들을 씻겨 주다니, 나는 씻겨 줄 사람이 없는데. 난 며칠 못 씻어도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는다고요!”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인성 있고, 인정 있는 사람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냐? (아닙니다.) 주인 기분이 좋든 나쁘든 그 앞에서 얼쩡거리면서 가까워지려고 하는 고양이, 강아지를 그는 한 발로 걷어찬다. “저리 가, 귀찮게시리! 꼭 빚쟁이같이 올 때마다 좋을 일이 없단 말이야. 밥 달라는 거 아니면 물 달라는 거잖아. 너랑 놀아 줄 정신이 어딨어!” 그만한 사랑도 없다면 아예 키우지 말고 당장 풀어 줘라. 고양이, 강아지가 너 때문에 고생하니 말이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어서 애완동물을 키울 자격이 없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키우면 물과 먹이는 네 보살핌에 기대야 한다는 이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데, 너는 왜 동물들과 아웅다웅하느냐? 네가 “난 씻겨 줄 사람도 없는데, 누가 날 씻겨 주나?”라고 말하는데 누가 너를 씻겨 주겠느냐? 넌 사람이니 당연히 알아서 씻고,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 고양이, 개는 네가 기르고 있기 때문에 네가 돌봐야 한다. 네가 기르고 있는 한 너에게는 그것들을 돌볼 의무가 있다. 이 의무조차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동물을 기를 자격이 없는 것인데, 굳이 아웅다웅할 필요가 있느냐? 너는 또한 “나는 널 돌보는데, 나는 누가 돌봐 주나? 너는 기분이 안 좋으면 나더러 어루만져 달라고 하는데,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누구한테 위로받지?”라고 하는데, 넌 사람이 아니냐? 사람은 스스로 조절하고 조정해야 하지만, 고양이나 개는 얼마나 단순하냐! 그것들은 스스로 조절할 줄 모르니까 사람이 어루만져 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물을 대하는 일과 자선 활동의 차이에 관한 내용이다. 동물을 대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며, 학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만물을 대할 때는 그것의 자연법칙을 따르고, 하나님이 만든 법칙에 따라 하나님이 만든 각종 생물을 올바르게 대하고, 각종 생물과 정당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생존 환경을 파괴하지 말고, 그들의 생존 환경을 훼손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존중하고 아끼는 원칙이다. 그런데 생명을 존중하고 아끼는 원칙이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이 만든 만물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하나의 원칙이지만,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 자선 활동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묻는다. “사업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자선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건 왜 그런가요? 자선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시면 사회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생물은 어떡하나요? 누가 도와주나요?” 누가 도와주는지가 너와 상관있느냐? (상관없습니다.) 너는 인류 중 하나가 아니냐? 너와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없습니다. 그건 사람의 사명이 아닙니다.) 그렇다. 그건 네 사명도 아니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도 아니다. 네 사명은 무엇이냐?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진리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하나님이 시킨 일을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멀리하는 것이다. 자선 활동에 관계된 일은 누가 하느냐? 누가 하든 네가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 어쨌든 너는 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자선 활동을 국가가 하든, 아니면 여러 민간단체가 하든, 그것은 우리가 관심 가질 화제가 아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준칙으로, 실행 목표와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고,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물론, 이따금 남을 돕는 일은 사업이 아니라 가끔 하는 행위로, 하나님이 그것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는다. 네가 전에 거지에게 100위안을 적선하거나, 집에 갈 차비가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또는 집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등 어쩌다 이런 일을 했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일을 여러 번 했다고 해서 하나님 눈에 이런 일이 기억할 만한 일이겠느냐?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일의 성질을 하나님은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하나님은 기억도 정죄도 하지 않으며, 성질을 규정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이냐?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건 개인의 행위일 뿐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네가 개인적으로 하기 원해서 일시적으로 크게 선심을 쓰거나 일시적으로 양심이 발현되어 좋은 일을 했거나 혹은 일시적인 열정과 충동으로 좋은 일을 한 것일 뿐 나중에 후회가 있든 없든, 보답이 있든 없든 그 일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이를 기억하지도 않고, 정죄하지도 않는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네가 이런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과정에서 형벌과 심판을 면하게 해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고, 네가 전에 좋은 일,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파격적으로 네가 구원받은 사람이 되게 해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네가 한 그런 좋은 일들은 진리와 무관하다. 그것은 그저 너 개인의 좋은 행위를 뜻하고,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스르지 않고, 또 어느 누구의 이익도 침범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했다고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요구에 어긋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과도 관계가 없을뿐더러 더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과도 관계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정죄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개인의 좋은 행위를 뜻할 뿐이다. 비록 이런 좋은 행위는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사회에서 인정받겠지만, 하나님 눈에는 모두 진리와 무관한 일이기에 하나님은 기억도 정죄도 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에게는 따질 만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가능한 상황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네가 한 사람을 구한 경우, 금전적인 도움이든, 물질적인 도움이든, 감정적인 도움이든 악인이 목적을 달성하게 하고, 그가 더 많은 죄를 저질러 사회나 인류에게 위협이 되고 일정한 손실을 초래하는 경우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얘기가 달라진다. 만약 일반적인 자선 활동이라면 하나님의 관점은 기억도 정죄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네가 벌이는 자선 사업을 하나님이 지지하고 격려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네가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 금전을 구원받는 것이나 진리 실행, 본분 이행과 전혀 무관한 일에 쓰지 않기를 바란다. 네가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네 시간과 에너지, 네 생명은 자선 사업에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선 사업을 해서 너 개인의 인격적인 매력을 자랑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어떤 사람들이 공장을 열고, 학교를 세우고,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도록 하고, 이런 방식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게 목적이다. 네가 이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반드시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기에 평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붓고 소모하게 된다. 그 때문에 너는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별로 없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고, 나아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할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진리와 무관하고 교회 사역과 무관한 사람과 일, 사물을 위해 네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데, 이것은 미련한 방법이다. 이 미련한 방법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어떤 사람들이 늘 자신의 좋은 마음, 자신의 유한한 능력에 기대어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고, 자신의 노력과 선한 마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건 미련한 짓이다. 미련한 짓이라면 하지 마라. 물론, 하지 말라고 하는 전제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네가 “저는 구원받는 일에 관심이 없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저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마음대로 하여라.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이 네 이상이고 네가 추구하는 사람됨이라면, 네 생각에 자선 활동이 너의 사람됨의 가치를 구현하고 네 인생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면 해도 좋다. 네가 얼마나 큰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든, 그걸 마음껏 발휘하여라. 너를 제한할 사람은 없다. 우리가 여기서 교제하는, 자선 활동을 하지 말라는 사항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고자 한다면 자선 활동을 하고자 하는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아야지 그것을 일생의 이상과 바람으로 삼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 집에서 가난한 형제자매들의 가정생활을 돌보는 상황이 있는데, 이런 건 전제가 있는 경우다. 그 전제는 다들 알고 있을 텐데, 이는 자선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생활 방면에 관한 하나님 집의 내부 사역지침으로, 자선 활동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 집에서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자선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하나님 집에서는 학교를 세우거나, 공장을 열거나, 기업을 운영하지 않는다. 교회 사역의 정상적 운영을 위해 수입원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누군가 공장이나 학교, 기업을 세우거나 어떤 상업 활동에 참여한다면, 이는 모두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행위이므로 제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영위하기 위한 수입원은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알고 있느냐? 형제자매들의 헌금, 제물을 가지고 정상적으로 사역을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에게 바치는 형제자매들의 헌금, 그것이 바로 제물이다. 제물의 용도는 무엇이냐? 교회 사역의 정상적인 운영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 정상적인 운영에는 지출 항목들이 있고, 각 지출 항목들은 원칙에 따라 집행되어야지 원칙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 사역이 경제 문제와 관련되는 경우 일부 리더 일꾼이 제물을 낭비해서 큰 손실을 초래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그 일을 엄중히 처벌한다. 왜 엄중히 처벌하겠느냐? 어째서 제물을 낭비하는 사람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이냐? (하나님의 제물은 형제자매가 하나님께 바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누리실 수 있습니다. 이런 제물은 또한 하나님 집 사역의 정상적인 운영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리더 일꾼이 제물을 낭비하면 하나님 집 사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 집에서 엄중히 처벌해야 합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엄중히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냐? (마땅합니다.) 왜 마땅하냐? 왜 엄중히 처벌해야 하느냐? (제물을 낭비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행위에 해당합니다. 사람이 제물을 대하는 태도는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제물을 낭비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말한 것도 한 가지 측면이다. 제물을 낭비하는 사람을 왜 엄중히 처벌해야 하는지, 오늘은 이 일에 관해 교제해 보기로 하자.

왜 제물을 낭비한 사람은 엄중히 처벌해야 하느냐? 우선 제물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얘기해 보자. 그건 형제자매들이 바친 것이다. 성경의 규정에 따르면 사람은 소득의 10분의 1을 바쳐야 한다. 물론 지금 그 이상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부자들은 10분의 1 이상을 바친다. 그 외 가난한 형제자매들은 10분의 1을 바치는데, 그 돈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먹을 것, 쓸 것을 아껴서 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농촌이나 시골에는 양식을 팔아 얻은 소득의 10분의 1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고, 달걀을 팔거나 양이나 닭을 판 돈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이들이 먹을 것, 쓸 것을 아껴서 10분의 1, 혹은 그 이상을 바친다. 그 돈은 이렇게 온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형제자매들은 왜 바치려 하느냐? 하나님 집에서 요구한 것이냐? 바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냐? 성경의 규정을 따르느라 그런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원하려고, 하나님 집의 사역 규모가 커서 돈이 없으면 안 되니까 많이 바쳐야 한다는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형제자매들은 왜 바치려 하느냐? 바보라서 그런 것이냐? 아니면 돈이 많아서 그런 것이냐? 번 돈이 남아돌아서, 다 쓰지 못해서 바친 것이냐? 그 돈은 누구에게 바친 것이냐?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왜 바치려 하느냐? 다른 것은 차치하고, 많은 사람이 바치는 최소한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과 사역을 통해 무상으로 사람에게 생명과 진리를 공급하고, 사람을 이끌기 때문에 사람은 당연히 자기 소득의 10분의 1을 바쳐야 한다. 이것이 제물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해서 양식과 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내려 주었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예비해 주었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누릴 때는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의 10분의 1을 제단에 바치는 것이 마땅하며, 이는 하나님이 사람의 수확을 누리도록 하나님께 보답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사람이 피조물로서 마땅히 갖추고 바쳐야 할 마음이다. 이것 말고도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크게 사역하시는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제 일부를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집의 사역에 대한 지지와 후원을 표시한다. 그 헌금의 출처와 액수를 떠나 그중에는 먹을 것 쓸 것을 아껴서 헌금을 바친 사람이 적지 않다. 어쨌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 없이 교회와 사람의 그런 조직이나 단체만 존재한다면, 사람의 봉헌은 아무런 가치도 의의도 없다. 하나님 사역과 하나님 말씀이 없다면 이 헌금은 달리 쓸 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이 사역이 진행되는 이상, 이 헌금과 제물은 무척 중요하다. 무척 중요한 이유는 이 헌금이 교회 사역에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순한 생각을 품는 자들이 착복하거나 강점하거나 유용하거나 심지어 낭비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매우 중요하다면 한 푼이라도 제대로 쓰여야지 낭비되거나 무책임하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헌금과 제물을 낭비하고, 유용하고, 강점하고, 착복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특별하게 처리하고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 이 헌금과 제물은 하나님 사역에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형제자매가 그 돈과 제물을 바친 목적을 고려해서라도 헌금은 가장 중요한 곳에 쓰여야 한다. 단 한 푼이라도 원칙에 맞게 사용해서 성과를 낼 수 있어야지 낭비되어서도, 악인에 의해 강점되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그 밖에 헌금은 많고 적고를 떠나 형제자매들이 바친 것이다. 그 돈의 출처는 교회가 상업 활동에 종사하거나 기업을 운영하거나 공장을 돌리는 등 사회에서 벌어들인 것도 아니고, 어떤 물건을 생산해 수익이 발생한 것도 아니다. 그 돈은 교회의 수익이나 수입이 아니라 사람이 바친 것이다. 헌금은 간단하게 말해 형제자매가 하나님께 바친 것이고, 하나님께 바친 돈은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돈은 무슨 일에 쓰이느냐? 어떤 이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돈, 제물은 하나님이 누리시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누리느냐? 하나님이 얼마나 누릴 수 있느냐? 그것은 제한적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성육신한 동안에는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사는 것, 삼시 세끼가 모두 평범하고, 누리는 것에 한계가 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정상이다. 형제자매의 헌금, 제물은 주로 교회 사역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지 몇몇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채우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제물은 개인에게 소모하라고 주는 것도 아니고, 개인에게 사용하라고 주는 것도 아니다. 재무 관리를 담당한 사람이 그 돈을 사용하는 우선권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리더를 하는 사람이 그 돈을 지배할 특권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어느 사람이 헌금을 사용하든 하나님 집에서 규정한 원칙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렇다면 이 원칙을 어긴 사람의 성질은 어떤 것이냐? 행정 법령을 거스른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행정 법령을 거슬렀다고 하는 것이냐? 사람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은 하나님이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교회 사역에 사용함으로써 교회 사역의 정상적 운영을 유지하고 보호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물을 사용하는 원칙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악인은 제물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제물을 물 쓰듯 낭비하거나 함부로 베푸는 등 서슴없이 원칙을 어기며 제물을 사용한다. 이는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너에게 그렇게 사용하라고 했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그렇게 사용할 권리를 부여했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그렇게 사용하라고 분부했느냐?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그런 식으로 사용하고, 그런 식으로 물 쓰듯 낭비하는 것이냐? 그건 원칙을 거스른 것이다! 이 원칙은 일반적인 원칙이 아니라 행정 법령과 관련된다. 이 헌금은 기업을 운영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이기 때문에 단 한 푼을 쓰더라도 엄밀하게 통제되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 물 쓰듯 낭비해서는 안 된다. 낭비된 한 푼 한 푼은 하나님 집의 사역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 집에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제물을 낭비하는 것은 제물에 대한 낭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가 헌금할 때의 사랑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것이다. 따라서 제물을 낭비하는 사람은 반드시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 가벼운 경우에는 경고하는 동시에 제물을 배상하도록 하고, 심한 경우에는 제물 배상은 물론이고 제명하거나 출교해야 한다. 제물을 낭비한 사람을 엄중히 처벌하는 데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교회는 모든 사회단체들과 달리 어느 국가, 어느 사회 환경에서도 고립되어 있고, 세상과 인류에게 버림받는다. 교회는 어떤 국가의 지지와 보호도 받지 못할뿐더러 어느 국가의 도움과 복지도 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서방 국가에서 교회로 등록되면, 교회에 기부금을 내는 사람은 개인 소득세가 면제되거나 기부 물품의 경우 가격을 할인받거나 일부 세금을 면제받을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는 그 어떤 국가나 사회 제도에서도 아무런 복지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교인들이 많지 않거나 지속적으로 운영되지 않을 경우 국가에서는 도와주지 않고 자멸하게 둘 것이다. 교회가 소득을 창출하지 않아서 국가에 어떤 세금도 내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존재 여부는 국가 입장에서 중요하지 않다. 교회가 그 어떤 사회 제도하에서도 이런 생존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 너희가 보기에 수월한 것 같으냐? (쉽지 않습니다.) 이토록 쉽지 않다. 사회에 버림받고 인류에게 버림받아 그 어떤 사회 제도로부터도 인정과 동정을 받지 못하고, 지지는 더더욱 꿈도 꿀 수 없다. 교회가 이런 생존 상황에 처해 있는데, 사람이 제물을 낭비하거나 생각 없이 대한다면, 한 푼이라도 허투루 대하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10만 위안을 쓰는 것도 알림음 하나로 끝이고, 100만 위안을 쓰는 것도 숫자에 불과할 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속으로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면 네가 보기에 이런 자가 인성을 갖춘 사람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저주할 만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상 몇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제물을 물 쓰듯 낭비하고, 심지어 제물에 대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점유하려 하거나, 감히 점유는 못 할지라도 낭비하는 사람은 모두 엄중히 처벌해야지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 (옳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앞으로 제물을 사용할 권한을 가질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만약 너희가 스스로 절제하지 못해서 제물을 낭비하여 교회로부터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면 불평과 원망이 생기겠느냐? (아닙니다.) 원망이 없다면 됐다. 그것은 자업자득이다!

제물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너희는 미워하느냐? 분개하느냐? 너는 그를 감독하고 제지할 수 있느냐? 이는 또 한 단계가 높아진 것으로, 너를 검증할 때가 되었다. 네 주변에 제물을 낭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는 2천 위안이면 살 수 있는 기기를 굳이 2만 위안짜리로 사려고 한다. 자기 주머니가 아닌 하나님 집에서 나가는 돈이니까 가장 좋은 제품, 프리미엄 제품, 최첨단 제품, 최신 유행 제품, 제일 비싼 제품을 사려는 것이다. 너는 그를 제지할 수 있겠느냐? 제지하지 못하겠으면 경고할 수 있겠느냐? 윗선에 보고할 수 있겠느냐? 네가 만약 제물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서명을 거부할 수 있겠느냐?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너희도 엄중히 처벌받아야 한다. 너희 역시 제물을 낭비한 셈이고, 악인과 한 패거리, 같은 무리이므로 모두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제물을 낭비하고 무책임하게 대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겠느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내가 볼 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사탄과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말한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제물, 하나님의 증거와 관련된 일은 모두 나랑은 상관없어. 그들이 제물을 낭비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이건 어떤 인간이냐? 일부 리더와 책임자들은 교회에서 구매 신청한 물건이 무엇이든 죄다 서명하는데, 에누리도, 자세한 심사도, 점검도 하지 않는다. 구매 신청한 물품이 비싸든 싸든, 실용적인 것이든 아니든, 살 필요가 있든 없든 주문서에 무조건 서명하는 것이다. 그 주문서가 무엇이냐? 서명만 하는 것이냐?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바로 네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다. 네가 하나님 제물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다. 네가 펜을 휘갈겨 서명할 때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경시한 죄증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경시하는 사람을 왜 엄중히 처벌하지 않겠느냐? 반드시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하나님은 네게 진리와 생명을 공급하고 모든 것을 공급해 주는데, 그런 태도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대하는 너는 어떤 인간이냐! 명세서에 적힌 이름 하나하나는 네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경시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대한 죄증이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어떤 물자를 구입하든, 액수가 얼마든 주문 확인서도 제대로 심사하지 않고 펜을 휘갈겨 서명하고, 10만, 20만 위안도 겁 없이 가볍게 서명한다면 언젠가는 네 서명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서명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심사도 하지 않고 가볍게 서명함으로 함부로 제물을 낭비하는 그런 행동을 했으니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다. 결과를 감당하는 게 겁나지 않다면 서명하도록 해라. 네 서명은 네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대하는 네 태도가 그런데,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는데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기를 바라느냐?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관용을 베풀어 네 숨통을 끊지 않고 너를 지금까지 살려 두었다. 그러니 네가 해야 할 것은 계속 같은 방식과 태도로 하나님을 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하고, 태도를 바꿔서 하나님께 맞서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계속 같은 방식과 태도로 하나님을 대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네가 잘 알 것이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믿어 봤자 헛수고인데, 또 무엇을 믿으려고 하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과 부탁을 가벼이 대한다면, 너는 어떤 인간이란 말이냐! 하나님 집에서 리더를 맡고 책임자를 맡으며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한 사람들이 있다. 나와 오랫동안 교류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결국 나는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그들은 개만도 못하다. 하는 짓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나아가 혐오스럽다. 나는 개 키우는 것도 좋아하고 개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아해서 오랫동안 개를 길렀는데, 내가 기른 개들은 모두 착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개들은 고의로 사람에게 맞서지 않았다. 개는 네가 조금만 잘해 줘도 너에게 최선을 다한다. 네가 진심으로 잘해 주기만 하면 설령 마당에 신문 한 장, 신발 한 켤레만 놓아두어도 거기 엎드려서 지켜 줄 것이다. 네가 필요 없어서 버린 물건도 주인이 잃어버린 물건인 줄 알고 너 대신 지키느라 함부로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중에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사람이라는 건 개만도 못하구나!’ 개가 집을 지킬 때는 재주와 능력으로 목숨 걸고 너 대신 집을 지킨다. 사람은 목숨은 고사하고 마음도 쓰지 않는다. 교회 사역을 지키기 위한 말 한마디도 못 하는 그는 집을 지키는 개보다도 못하다! 이것이 내가 도출한 사람과 개의 차이점이다. 제물을 낭비하는 그 부류는 집 지키는 개만도 못하다. 네가 보기에 그런 사람은 엄중히 처벌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신임하고 사람에게 사역과 본분을 부탁하는 것은 사람을 높이고 존중해 준 것이지 사람이 그 사역을 할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자질과 인성이 훌륭하고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서도 아니다. 하지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교회 사역을 맡을 능력이 된다고, 자기가 수고하고 헌신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 밑천에만 기대고 있느냐? 하나님이 높여 주어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인데도 사람은 호의도 모르고 사리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신임, 하나님의 높여 줌을 저버렸다. 하나님의 신임, 하나님의 높여 줌을 가볍게 대한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사람은 사리 분별을 못 하고, 하나님이 준 기회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보살펴 준 것도 모른 채 하나님을 만만하게 여기고, 하나님은 관대하고 뭘 볼 줄 모르고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물을 거리낌 없이 낭비하며 하나님의 신임을 저버린다. 최소한의 인격과 양심도 없으면서 뭘 계속 믿으려는 것이냐? 그만 믿고 가서 사탄이나 섬겨라. 하나님이 너의 경배 따위는 필요치 않다. 너는 자격이 없다!

‘사업 내려놓기’ 방면의 첫 번째 주제는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은 거의 교제가 되지 않았느냐? 너희는 이 안에 담긴 진리 원칙을 이해했느냐? 여기에는 어떤 원칙이 있느냐?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사명도 아니고, 진리를 실행하고 구원받고자 하는 일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행위를 뜻할 뿐입니다.)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은 진리 추구와 관계가 없다. 자선 사업에 종사하면 그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네가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자선 활동을 하는 것도, 자선 사업을 벌이는 것도 진리 실행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덕을 쌓고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선행을 즐겨 베푸는 것도 아니며, 자선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자선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일이 자선 활동을 하거나 자선 사업에 종사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혹은 자선 활동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은 모두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네가 어떤 자선 활동을 하든, 자선 활동과 관계된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은 단지 너 개인을 대변할 뿐이다. 가끔씩 그런 행위를 하든, 아니면 그런 사업에 종사하든 모두 네 개인의 좋은 행위를 뜻할 뿐이다. 이 행위가 어떤 종교와 관계가 있거나 어떤 사회적 행위, 도덕 준칙과 관계가 있을 수는 있지만, 절대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는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과도, 하나님의 요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화제를 다시 되돌려 보자. 왜 자선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에게는 긍휼과 자비가 있고, 인류를 불쌍히 여기는데, 왜 인류가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자선 활동을 해도 하나님께 기억되지 못하느냐? 이는 문제가 아니냐? 사람에게 자선 활동을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는 건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하나님이 인류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과 서로 모순되느냐? (모순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모순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는 원칙이 있고,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고 진실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파는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는 원칙이 있고, 대상이 있다. 또 무엇이 있는지 더 얘기해 보아라.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일과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 일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일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느냐? 그 어떤 자선 사업을 하더라도 시간과 에너지, 심지어 금전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어떤 자선 사업을 한다고 할 때 입만 놀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말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여기고 종사한다면 반드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고, 심지어 돈도 많이 들어가야 한다. 일단 시간과 에너지와 돈이 들어가면 네가 자선 활동에 발목이 잡히고 얽매이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고도 진리를 추구할 에너지가 남아 있겠느냐? 본분을 이행할 에너지가 남아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는 동안 사업을 하려고 할 때, 어떤 사업에 종사하든 그 일에 전적으로 종사한다면 반드시 평생의 에너지와 생명을 거기에 쏟아붓고 희생해야 하고, 가정과 감정, 육적인 즐거움과 시간도 모두 대가로 치러야 한다. 마찬가지로 네가 정말 자선 활동을 사업으로 여기고 종사한다면 거기에 네 모든 에너지와 시간이 얽혀 있을 것이다. 사람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에 자선 활동이라는 일에 얽매이게 된다면, 자선 활동과 하나님 믿는 일을 둘 다 똑같이 균형적으로 병행하려 하고, 또한 두 가지 일을 모두 잘하려 해도 그건 쉽지 않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병행하려고 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포기해야 할 경우 너는 어떻게 선택할 것이냐?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해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럼 하나님을 믿는 일과 자선 활동이라는 두 가지 일이 네 생활에 동시에 나타난다면 너는 어떻게 선택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대부분이 하나님 믿는 일을 선택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모두 이런 선택을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선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정상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은 많은 생물을 구하고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얻는 수확은 무엇이냐? 허영심이 채워지는 것인데, 이것이 참된 수확이고, 거두어야 할 수확이냐? 네 이상이 실현되고 네 가치가 구현된 것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네 인생에서 가야 할 길이냐? (아닙니다.) 결국, 얻는 것이 무엇이냐? (공허함입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허영심이 채워지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사회에서 휘장을 받고 영예를 얻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네 에너지와 시간을 모두 쏟아부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영예와 좋은 명성, 광채는 모두 공허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일생 동안 깨달아야 할 진리, 가야 할 인생길은 네가 자선 활동을 했다고 해서 깨닫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일은 다르다.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를 추구한다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을 때 좋은 수확, 긍정적인 수확을 거둘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어떤 관점과 각도에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어떠한 사람됨이 가장 올바른지, 어떻게 처신해야 창조주가 기억하는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바른길을 가는 것인지 등 사람이 가장 잘 깨달아야 할 이런 것들을 네가 알고 깨닫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른길이고 진정한 수확이다. 네 생명 안에는 이방인이 배우지 못한 것들이 많아지는데, 그런 것들은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들이다. 하나님에게서 오고 진리에서 비롯된 그런 것들이 네 생명이 되면 너는 그때부터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이 된다. 그러면 네 삶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고, 사람됨도 더는 막막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것이 더욱 크고 가치 있는 수확이 아니겠느냐? 네가 자선 사업을 통해 허영심을 채우는 일보다 더 가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와 관련되고 사람이 가야 할 길과 관련되는 이런 수확을 통해 너는 새 생명을 얻게 된다. 이 새 생명은 인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당연히 이 새 생명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영원한 것이기도 하다. 이 새 생명은 네가 자신의 시간, 에너지, 청춘을 바치고 대가와 희생을 치른 뒤 얻은 것이다. 이는 가치가 있는 일 아니냐?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네가 자선 활동을 한다면 어떤 수확을 거두겠느냐?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다. 그까짓 영예와 휘장은 수확이 아니다. 네가 좋은 사람, 대단한 선인이라고 사람들이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을 수확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모두 일시적인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 금세 사라진다. 그런 것을 만질 수 없고 더는 느낄 수 없을 때, 너는 후회할 것이다. ‘나는 평생 뭘 했지? 고양이, 강아지 몇 마리 키우고, 고아 몇 명 입양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으며 잘 살게 도와줬어. 그런데 나는? 평생 뭘 위해 살았지? 설마 그들을 위해 살았단 말인가? 그것이 내 사명일까? 그것이 하늘이 내게 부여한 책임이었나? 그것이 하늘이 내게 부여한 의무였던 걸까? 아니겠지. 그렇다면 사람은 평생 뭘 위해 살까? 사람은 어디서 왔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이런 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아직 모르는구나.’ 따라서 네가 그 지경까지 갔을 때, 그런 영예는 수확이 아니라 몸 이외의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자선 활동을 하지 않을 때나 지금까지 자선 활동을 하면서 광채와 영예를 얻을 때나 똑같기 때문이다. 또한, 네 내면의 생명도 변화하지 않았고, 깨닫지 못한 일은 여전히 모르고, 여전히 막막하고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더 막막하고 곤혹스럽고 나아가 더욱 불안하다. 그 지경에 이르면 후회해도 늦었다. 일생이 지나가고 가장 좋은 시간도 더 이상 없다. 너는 길을 잘못 택했다. 그래서 네가 아직 자선 사업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거나 자선 사업이라는 일에 이제 막 뛰어들었을 때,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받고 싶다면 그런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물론 그 일에 종사하는 모든 활동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길로 들어선다면, 설령 끝에 가서 네가 얻은 것, 거둔 수확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많거나 확실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마지막에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무리 적다 해도 종교계에서 평생 주를 믿은 사람들보다는 얻은 것이 많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업을 선택할 때는 먼저 자선 활동을 하려는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아야 하고, 또 하나는 사상 면에서 자신의 관념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에서 자선 사업에 종사하는 그 사람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정말 사심 없고, 위대하고, 고상하고, 자기의 존재를 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그 사람들이 남을 도와줄 때 그 모습이 얼마나 고상하고 사심 없어 보이는지 몰라요. 우리는 왜 사심 없이 살지 못할까요? 우리는 왜 그러지 못할까요?”라고 말하는데, 첫째로 너는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둘째는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지 않았는데 그들에게 나름의 사명과 추구하는 바가 있다면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든, 그것이 명예와 이익이든 아니면 자신의 이상이나 바람을 실현하는 것이든 너는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 네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네가 뭘 추구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하는 문제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택해서 네가 하나님 집에 오게 된 이상 너는 교회의 한 구성원이고, 지금은 본분 이행 대열의 한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너는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어떻게 구원받는 길로 들어서서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또 너의 추구와 네가 다방면에서 치른 대가를 통해 하나님 말씀이 네 내면에서 생명이 되도록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처음 네가 하나님을 믿었을 당시의 내적 상태를 뒤돌아본다면, 너는 내면의 생명이 변화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패괴 성품이 생명인 사람이 아니고, 처음의 그 교만하고 무지하고 건방지고 어리석고 안하무인이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새 생명이 된 사람일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지, 생활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일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뜻에 합하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보내고, 매사를 처리할 때 정확한 목표와 방향이 있고, 자기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다면, 그런 것을 속으로 거울 보듯 훤히 안다면 하루하루가 막막하고 고달프고 의기소침한 것이 아니라 빛으로 충만하고, 목표와 방향이 생기고, 동시에 마음에 동력이 생길 것이다. 너는 자신이 변화했다고, 자신이 새 생명이 생기고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삼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좋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그럼 ‘사업 내려놓기’라는 주제의 첫 번째 원칙인 자선 활동 하지 않기는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자.

‘사업 내려놓기’라는 주제의 두 번째 원칙은 무엇이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노동이나 일에 종사해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하루 세끼 식사와 생활비를 보장받고, 수입원을 확보한다. 그러므로 저소득층이든, 소득 수준이 조금 높은 계층이든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가지 일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한다. 생계유지를 위한 것이라면 매우 간단하다. 살 집이 있고, 하루 세끼 밥 먹고, 가끔 고기가 먹고 싶을 때 사 먹고, 매일 정상적으로 일해서 수입을 얻고, 헐벗고 굶주리지만 않으면 된다. 이것이 삶에 대한 사람의 기본적인 요건이다. 기본적인 요건이 충족되고 기본 생활 수준에 이르기는 쉽지 않으냐? 자신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종사하는 사업의 성질이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것, 생계를 위한 것이라면 어떤 사업에 종사하든 합법적이기만 하면 대체로 인성 기준에 부합한다. 어째서 인성 기준에 부합한다고 하겠느냐? 네가 그 직업에 종사하게 되는 출발점과 초심, 목적 중에 무엇 하나 생계와 무관한 일이나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가족들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요건이다. 기본적 요건이 채워진 다음에 사람이 누리는 것은 기본적인 삶의 질이다. 사람은 기본적인 삶의 질을 충족시킬 수 있으면 정상적인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정상적인 생존을 유지할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인성의 범위 내에서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자기 생활은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가 감당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이 갖춰야 할 태도다. 네가 여기에 도달하면 그것으로 됐고, 그것으로 적절하다. 하지만 네가 만족을 모른다면, 정상인은 일주일에 한두 번 고기를 먹으면 되는데, 너는 매끼 고기를 고집하고, 또 넉넉하게 먹으려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루에 고기 100그램이면 정상적인 신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데도 기어이 반 근, 한 근을 먹는 바람에 결국 영양 과잉으로 병을 얻게 된다. 지방간, 고혈압, 고지혈 같은 병은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입니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건 어찌 된 일이냐? 음식 조절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 아니냐? 너무 게걸스러운 탓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게걸스러움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식탐이 너무 커서 그런 것 아니냐? 지나친 식탐과 게걸스러움이 정상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정상 인성의 필요를 뛰어넘는다. 정상 인성의 필요를 뛰어넘고 싶다면 일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보통 사람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들여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야근을 하든, 일을 여러 개 하든 수입을 더 늘려서 하루 세끼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면, 이것은 정상 인성의 범위를 뛰어넘은 것이 아니냐? 정상 인성 범위를 뛰어넘은 것은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으냐? (첫째는 병에 걸리기 쉽고, 둘째는 자신의 식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더 많은 대가를 치르며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써야 할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써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는 데 지장이 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어서 배고픔과 추위에서 벗어나고 정상 인성의 기본 생활이 충족되면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돈은 신체의 정상적인 필요에 따라 영양분을 충족할 만큼 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게 바로 정상 인성에 필요한 생활이다. 항상 육의 즐거움만 탐하고 식탐을 채우느라 육의 건강이나 바른길을 가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언제나 좋은 것만 먹고 누리려 하고, 좋은 생활 환경과 삶의 질만 바란다면,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고 명품을 걸치고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호화 주택에 살며 고급 차를 타는 이런 생활을 추구한다면 네가 어떤 직업에 종사해야 하느냐? 만약 보통으로 일해서 기본적인 의식 문제가 해결되는 정도라면 너의 그 욕망들이 채워지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불가능하다. 가령 네가 장사를 한다고 해 보자. 작은 장사는 진열대 하나만 놓으면 식구들이 먹고살 걱정은 없다. 아주 잘살지도, 그렇다고 못살지도 않는 수준이다. 3, 4일에 한 번 고기도 먹을 수 있고, 식구들이 옷도 그럴싸하게 입고 다닐 수 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하나님을 믿으며 예배드리고 본분도 이행하고, 또 에너지가 남아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본적으로 생활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네가 그 직업에 종사하는 동시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만족할 줄 모르고 이런 생각을 한다. ‘장사가 좀 될 것 같군. 진열대 하나면 한 달에 이만큼 벌어서 식구들이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는데, 진열대 두 개면 두 배로 벌어서 먹고사는 건 물론이고 돈도 좀 모을 수 있겠어. 그럼 평소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고, 여행도 가고, 사치품도 좀 사고, 또 보통 사람들이 못 먹는 것도 좀 먹을 수 있고, 보통 사람들이 누리기 힘든 것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러니 진열대를 하나 더 놓자!’ 진열대를 하나 더 늘려서 좀 더 여유가 생기고 단맛을 좀 보자 이런 생각이 든다. ‘보니까 이쪽 시장이 그래도 작지 않단 말이지. 진열대 하나 더 늘려서 장사를 좀 더 크게 해도 되겠어. 다른 물건들도 좀 가져와서 사업을 좀 더 키우면 손에 쥐는 돈 말고도 차도 사고 집도 넓힐 수 있겠군. 식구들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 여행도 갈 수 있고 말이야!’ 생각할수록 황홀해진다. 생각 끝에 진열대를 하나 더 늘리기로 한다. 사업이 커질수록 돈도 많이 벌고 누리는 것도 더 많아진다. 하지만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에서 보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점점 줄어들다가 급기야 반년에 한 번 나가게 된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사업이 더 커져서 돈을 더 벌면 하나님 집 사역도 지원하고 헌금도 많이 해야지.’ 본인은 자가용을 굴리고, 아내와 자식도 금과 다이아몬드로 치장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하고 해외 여행도 다녀오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돈이 좋긴 좋구나! 돈 버는 게 이렇게 쉬운 줄 진작 알았더라면. 왜 진작 못 벌었을까? 돈이 최고야! 돈만 있으면 살기도 너무 편하고 너무 좋아! 맛있는 거 먹는 것도 보통 재미가 아니고 말이야. 이렇게 명품 걸치고 있으면 기분도 끝내주고, 어딜 가든 다들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어딜 가든 존중받고 우러름을 받으니 느낌부터 다르다니까.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가는군.’ 이렇게 육도 만족스럽고 허영심도 채워졌지만 하나님 말씀 책에는 점점 먼지만 쌓인다. 들여다보지 않은 지 한참이고, 하나님께 기도할 말도 점점 줄어든다. 예배 장소가 바뀌어서 지금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지도 모르고, 어쩌다 교회에 얼굴도장 찍는 일도 이제는 없어졌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것은 구원받는 일과 점점 멀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가까워지는 것이냐?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점점 좋아지고, 잘 먹어서 몸도 점점 살이 오르고, 때깔도 점점 좋아진다. 원래는 8년이고 10년이고 한 번도 안 하던 건강 검진을 지금은 돈이 많으니까 6개월에 한 번씩 하면서 혈압, 혈당, 혈중 지질도 체크한다. ‘건강은 잘 챙겨야지. ‘다 있어도 병은 없어야 하고, 아무것도 없어도 돈은 있어야 한다.’라는 말도 있잖아.’ 사상 관점이 변하지 않았느냐? 이제는 서민이 아닌 부자가 되었으니 그는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귀한 신분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육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생활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전에 건강 검진을 못 받을 때는 이런 생각이었다.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이야 아무렴 어때. 건강 검진이 다 뭐야? 큰 병에 걸려도 돈이 없으니 그냥 버텨야지. 정 못 버티면 다 늙은 몸이니 죽어도 그만이지. 죽는 게 대수야?’ 지금은 다르다. ‘사람이 살면서 병이 있으면 안 되지. 내가 아프면 벌어 놓은 돈은 누구한테 쓰나? 그러면 누리지도 못할 텐데, 인생은 정말 짧구나!’ 이렇게 달라졌다. 그렇지 않으냐? 금전과 육적인 생활, 즐거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만큼 하나님을 믿는 일,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받는 일을 대하는 태도도 갈수록 냉담해진다.

사람이 일단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어도 만족을 모르는 길로 들어서면 더 높은 삶의 질,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시험에 빠져들었다는 위험 신호이고, 골치 아픈 일이고, 좋지 않은 징조다. 한번 돈맛을 보고 돈 쓰는 재미를 경험한 사람은 언젠간 돈이 없어서 가난에 시달릴 것이 걱정되어 지금처럼 돈 있는 생활, 부자의 지위와 신분을 특히 애지중지하게 된다. 이방인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지 않더냐? ‘쓴맛 뒤에 오는 단맛은 쉽지만, 단맛 뒤에 오는 쓴맛은 쉽지 않다.’라고 말이다. 즉, 네가 아무것도 없다면 네게 내려놓으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기에 바로 내려놓을 수 있다. 미련을 가질 만한 게 없어서 금전과 물질적인 것이 너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것들을 소유하고 나면 내려놓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네가 빈털터리라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해야 할 때 미련없이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부자라면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집이 200만 위안에다 차는 50만 위안이고, 고정 자산에다 은행 예금도 있고, 주식이며, 펀드며, 어디 투자한 것도 있고, 이것저것 합하면 천만 위안쯤 되는데, 집을 떠나게 되면 이걸 어떻게 가져가야 한담?’ 너는 이런 물질적인 것들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이걸 다 내려놓고, 지금 이 집과 가정을 떠나면 앞으로 이만한 집에서 살 수 있을까? 토담집이나 초가에서 살게 되면 견딜 수 있을까? 외양간에서 살게 되면 그 악취를 견딜 수 있을까? 지금처럼 매일 온수로 씻다가 일 년 내내 온수 목욕도 한 번 못 하는 곳으로 가면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괴로워질 것이다. 돈이 있으면 물건 살 때도 돈 펑펑 쓰면서 사고 싶은 대로 맘껏 살 수 있고, 돈에 얽매이지 않고 아주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걸 다 내려놓으면 앞으로 물건 살 때 주머니 사정 생각하느라 선뜻 돈을 못 쓸 텐데 어떡하겠느냐? 뜨끈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싶어도 어느 집이 더 싸니까 남은 돈으로 몇 번은 더 먹을 수 있겠다고 계산해 가며 알뜰하게 살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데 견딜 수 있겠느냐? 원래는 두어 번 세탁해서 변형된 옷은 입으면 별로 맵시가 나지 않아서 곧잘 버리고 새로 샀는데, 이제는 티셔츠 한 벌도 몇 번씩 빨아 가며 입고 또 입고, 옷깃이 해어져도 버리기 아까워서 기워 입어야 한다. 네가 이런 걸 견딜 수 있겠느냐? 어디 가든 척 보면 가난뱅이티가 나서 남들이 상대해 주지 않고, 물건 살 때 가격을 물어봐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텐데 이걸 견딜 수 있겠느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지만 네가 금전과 물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것을 내려놓을 필요도 없고, 이 관문을 통과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모든 걸 내려놓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부터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했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것을 사업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벼락출세하거나 부자가 되어 잘살기 위한 발판이나 매개로 생각하지 마라. 어떤 일,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단지 그것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그 정도에서 그치고, 돈을 더 벌려고 하지 마라. 한 달에 2천 위안으로 세끼 식사와 의식주가 보장된다면 그 정도에서 멈춰야지 일의 범위를 더 확대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필요하다면 임시로 추가 근무를 한다든가, 단기 알바를 하는 것은 괜찮다. 생계유지를 위해서라면 그래도 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바는 이것이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합리적이고 합법적이기만 하면, 또 네 능력만 허락한다면, 지식과 관계된 직업이든, 업무 기술에 관계된 직업이든,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든 관계없이 그 직업으로 네 생계만 유지할 수 있으면 된다. 자신의 육적인 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을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는 발판으로 삼아서 스스로를 시험에 빠뜨리고 늪에 빠뜨린다거나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만약 네가 한 달에 2천 위안을 벌어서 개인 생활이나 가정생활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일을 유지하면서 그 나머지 시간에는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너의 사명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와 의의다. 하지만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것은 단지 정상 인성의 육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네가 종사하는 직업을 통해 벼락출세해서 승승장구하거나 무슨 성과를 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종사하는 직업이 연구 분야와 관련이 있다면 거기에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겠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실행 원칙은 그대로다. 만일 네 능력에 따라 네가 종사하는 직업에 승진 기회가 생긴다면 많은 수입이 뒤따르게 될 텐데, 이 상당한 수입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범위를 벗어난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느냐? (거절해야 합니다.) 네가 지켜야 할 원칙은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충고했듯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해결되는 범위를 넘어선다면, 분명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해결되는 범위를 넘어서는 에너지와 시간, 대가를 치러서 그만큼의 경제적 수입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말단 직원인 네가 버는 돈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할 수 있지만, 업무 실적이 좋아서 사장이 너를 업무 관리자나 다른 관리직으로 승진시키고 싶어 한다고 하자. 그러면 수입도 몇 배로 늘어나게 되는데 이 수입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냐? 수입이 높아지면 네가 바쳐야 할 노동력도 그만큼 늘어난다. 노동력을 바치는 데는 에너지와 시간이 요구되지 않느냐? 이렇게 되면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을 네가 벌어들이는 돈과 맞바꾸는 셈이다. 너는 돈을 더 벌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돈을 더 많이 버는 동안 너는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게 되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고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이것은 뻔한 사실이다. 네 에너지와 시간을 돈 버는 데 사용하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데서 오는 수확은 없어진다. 네가 승진한 다음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빼앗기는 바람에 시간이 없어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믿으며 예배드릴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도 하나님이 너에게 은총을 베풀거나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만 따로 예배를 드리게 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만 따로 예배를 드리게 해 주거나 특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도 그 일 때문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확을 얻고 진리를 얻고 싶다면 너 스스로가 시간과 에너지를 확보해야 한다. 이건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정상 생활을 유지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네 수입으로 충분히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고, 육의 생존과 생명 활동을 유지해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데도 네가 만족을 모르고 더 벌려고만 한다면, 그 돈이 네 에너지와 시간을 빼앗아 갈 것이다. 빼앗긴 시간과 에너지는 무엇을 위한 것이냐? 육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육적인 삶의 질이 향상되면 하나님을 믿어서 얻는 바가 줄어든다. 본분을 이행할 시간이 사라지고, 그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 무엇에 빼앗기겠느냐? 육적인 좋은 생활, 육적인 즐거움에 빼앗기는 것이다. 가치가 있느냐? (가치가 없습니다.) 네가 셈을 할 줄 안다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잘 먹어서 식욕도 채워지고, 잘 입어서 번지르르하고 여유가 넘치고, 명품과 사치품도 늘어나는 등 육이 호강하는 대신, 일은 더 힘들고 어려워져서 그만큼 시간과 에너지를 일에 빼앗긴다. 하나님을 믿는 일 역시 예배에 나가 설교를 들을 시간도 없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시간은 더욱 없다. 아직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진리가 있어도 이를 구하고 묵상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육의 생활은 나아지는 반면 영적 생명은 자라지 않고 시들시들해진다. 이것이 득이냐, 아니면 실이냐? (실입니다.) 실이 너무나 크다! 이 부분을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슬기로운 사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무엇을 얻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의미가 있는지, 득실을 따져 봐야 한다. 승진해서 돈을 더 벌 기회를 만나 육이 더 나은 생활, 더 나은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 원하고, 진리를 추구할 의지가 있다면 그런 기회는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너 지금 일한 지 10년이 다 됐잖아. 보통 입사해서 3~5년이면 급여도 오르고 승진하는데, 넌 대우가 그대로야. 왜 좀 더 잘하지 않는 거야? 실적을 더 올리지 그래? 누구누구는 입사 3년 만에 차도 굴리고, 집도 방 하나 거실 하나짜리에서 방 세 개 거실 두 개로 바꿨다고. 갓 입사했을 때는 땡전 한 푼 없는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골드 미스 다 됐지 뭐야. 온몸을 명품으로 도배하고, 고급 호텔 들락거리고, 호화 주택에 차도 좋은 거 끌고 다니잖아.” 남들이 잘사는 걸 보면 너도 안달이 나지 않겠느냐? 기분이 좀 그렇지 않겠느냐? 이런 시험을 이겨 낼 수 있겠느냐? 그래도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느냐? 원칙을 견지할 수 있겠느냐? 네가 정말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기 원한다면, 진리 방면에서 수확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한다면, 네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한다면 너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승진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런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해야지. 내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건 그저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육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육의 즐거움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벼락출세를 바라는 건 더더욱 아니야. 나는 승진도 바라지 않고, 높은 연봉도 바라지 않아. 삶의 유한한 시간을 진리를 추구하는 데 쓸 거야.’ 이런 의지가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안달이 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누가 승진해서 급여가 올라도, 누가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명품을 걸치고 다녀도, 삶의 질이 너보다 높고 너보다 근사해 보여도 너는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나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추구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런 장소, 그런 환경에서 만약 진리가 생명이 되지 못하고, 약간의 의지와 참된 깨달음이 없다면 사람은 항상 동요되고 연약해져서 오래가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날이 언제면 끝이 날까? 하나님의 날은 오지도 않네. 회사에서 언제까지 시다바리 역할만 해야 하는 거지? 남들은 다 나보다 잘 버는데 나는 왜 겨우 먹고사는 정도냐고. 하나님은 나보고 돈 많이 벌라는 말씀도 안 해 주시네.’ 누가 너한테 돈 많이 벌지 말라고 하더냐? 능력이 있으면 많이 벌어도 된다. 네가 돈 많이 버는 길을 선택하고, 부자들의 생활, 사치스러운 생활을 선택하겠다면, 그래도 좋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마지막에 진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이 네 안에서 생명이 되지 못한다면 후회는 네 몫이다. 너는 자신의 행위와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너 대신 대가를 지불해 줄 사람도 없고, 너 대신 책임져 줄 사람도 없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구원받는 길,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기로 선택한 이상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이왕 선택했으면 그것을 일종의 규례나 계명으로 여겨 지킬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견지하는 바와 선택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에 네가 얻는 것은 진리와 생명이지 규례가 아니다. 자신이 견지하는 바와 선택 때문에 무척 난처하고, 괴롭고, 주변 사람들을 대하기가 힘들다면 견지하지 마라. 굳이 자신을 힘들게 할 필요가 있느냐? 네가 속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바라는 게 있으면 그것을 추구하면 된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교제하는 것은 단지 너에게 하나의 원칙을 알려 줄 뿐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건 모두 명예와 이익, 또 육의 즐거움과 관계가 있다. 돈을 많이 벌려는 목적은 특정 액수에 도달해서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 육을 더 호강시키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명단에 오른 부자가 되기 위함이다. 이렇게 명예와 이익, 지위를 모두 손에 넣는다면 그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그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치르는 대가는 죄다 육의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한낱 꿈처럼 마지막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네가 오늘 만두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매일 먹으면 아무래도 좀 물려서 먹지 않게 되지만, 음식을 좀 바꿔서 찐빵도 먹고, 밥도 먹고, 부침개도 먹는 식으로 조절하면 육은 더 건강해진다. 하지만 매일 진수성찬을 먹으면 육은 오히려 망가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 이 길이 옳으냐? (옳습니다.) 어째서 옳으냐? 사람이 평생을 사는 가치가 먹고 입는 것에 있느냐? (아닙니다.) 만약 평생을 사는 가치가 먹고 입는 것이나 육의 즐거움에 있지 않다면 사람이 종사하는 직업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해야지 그 범위를 넘어서면 안 되는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게 하기 위한 목적은 무엇이냐? 육의 정상적인 생존을 위해서다. 생존의 목적은 무엇이냐? 육을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니고, 인생의 과정을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니며, 사람이 평생 겪는 그런 일을 누리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일을 해야 가장 가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 추구의 길을 가야 하고, 또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너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피조물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가치 있겠느냐? 모든 피조물에게는 창조주가 맡긴 사명,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평생의 운명을 정해 주었고, 사람은 그 평생의 운명대로 행해야 한다. 네가 잘 완수했다면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보고할 때 하나님은 흡족해하며 답할 것이다. 네 일생은 수확이 있는 값진 삶이고,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네 생명이 되게 한,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네가 한평생 먹고 입는 것과 향락만을 위해 치열하게 대가를 치르며 살았다면, 끝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너에게 부여한 평생의 임무와 네 사명을 얼마나 완수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이것저것 헤아려 보니 평생 먹고 입는 것과 즐거움을 위해 에너지와 시간을 쓰기 바빴고 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고 끝까지 해내지 못했으며 충성을 다하지도 못했다.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은 조금이나마 있었지만 대가도 별로 치르지 않았고 별다른 수확도 거두지 못했다. 최종 검증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지 않았고, 네가 여전히 사탄이며, 일을 바라보고 처리할 때도 네가 사람의 관념과 상상, 사탄의 패괴 성품을 따르고 하나님에게는 완전히 적대적이어서 하나님과 합하는 부분이 없다면 너는 버려질 것이고, 하나님도 너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닐 것이니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니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것이 합법적이라면 그건 모두 하나님이 안배하고 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네가 종사하는 사업에서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을 하나님이 지지하고 격려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고, 너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또한, 네가 종사하는 직업을 통해 너를 세상으로 내보내고 사탄에게 넘겨서 멋대로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도록 하는 일은 결코 없다. 단지 네가 종사하는 직업을 통해 입고 먹는 최소한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일 뿐이다. 그 밖에도 하나님 말씀에는 네 본분이 무엇인지, 네 사명이 무엇인지, 네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살아 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등 내용이 있는데, 하나님은 이런 것을 다 너에게 알려 주었다. 이것은 네가 평생 살아 내야 할 가치이자 걸어야 할 길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후 네가 깨달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네가 일주일에 3일을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는데도 남은 며칠을 더 일하려고 한다면 본분을 이행하기는 어렵다. 네 협력이 필요한 본분이 있으면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하고 있어서요. 지금 직장에 있어요.” 너를 찾을 때마다 너는 항상 시간이 없다. 언제 시간이 나겠느냐? 저녁 여덟 시가 지나면 너는 졸리고 지치고 피곤할 것이며 할 생각은 있어도 기력이 달릴 것이다. 일주일에 6일을 일만 하니 전화 연락을 할 때마다 너는 시간이 없다고 한다. 유일하게 시간이 나는 일요일에는 가족과 자식도 챙겨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또 너도 나름대로 충전과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휴가를 가거나 여가도 즐겨야 하고, 돈도 써야 하고 쇼핑도 해야 한다. 동료들과 친목을 도모하거나 사장 또는 상사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어떤 식의 믿음이냐? 이런 사람은 완벽하게 불신파이다. 교회에 이름만 올리는 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관계가 없고, 교회 소속도 아니다. 고작해야 교우에 불과하다. 하나님 집에서 바깥일을 할 사람이 필요할 때 도와주겠다고 대답은 하겠지만 단지 거절하지 않을 뿐이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언제 와서 할지는 알 수 없다. 막상 온다 하더라도 시간과 마음과 힘을 다 쏟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모든 게 미지수다. 그러다 언제 또 일이 바빠지거나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보름이고 한 달이고 자취를 감춰 연락이 닿지 않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건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 이름만 올리는 것이니 그에게서 하나님 말씀 서적을 회수하고 그를 제명해야 한다. 또 이렇게 말해 줘야 한다. “정 일을 내려놓지 못해서 예배드리고 본분 이행할 시간이 없다면 하나님 집에서도 강요하지 않을 테니 여기서 그만 끝냅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할 수 있고 높은 수준의 삶의 질에 대한 요구를 포기할 수 있을 때, 시간을 더 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 때 정식으로 교회 사람으로 다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약 그게 안 돼서 남는 시간에만 얼굴을 비추고, 일을 거들고, 형제자매들과 관계를 다지거나 겨우 연락한다면 그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다고 볼 수 없고, 정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부르느냐? (교우입니다.) 교우, 교회의 좋은 벗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교우라고 하는 것이다. 교우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직 관찰 단계에 있고, 정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므로 교회 재적에 포함시키지 않고, 본분 이행 인원으로 치지 않는다. 기껏해야 관찰이 필요한 정도이지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가정 환경이나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서 반드시 일주일에 며칠은 일해야 생계나 자녀 양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 우리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일하다 남는 시간에라도 와서 본분을 이행한다면 그럴 때는 정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집 사람으로 치는데, 이는 그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그 기본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어려움이 있는 사람에게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 가족은 부양해 줄 사람이 없어서 굶주릴 수밖에 없다. 그에게 일을 못 하게 하면 누가 그 가족을 먹여 살리겠느냐? 네가 먹여 살릴 것이냐? 따라서 교회 리더와 책임자, 혹은 그들과 관계된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가족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일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자격은 없다. 이런 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인데, 그러지 말고 살길은 열어 주어야 한다. 사람은 저 혼자 다른 세상에 사는 것도 아니고, 기계도 아니다. 생존해야 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전에도 얘기했지만, 네게 자식과 가정이 있는 이상 너는 가정의 중심 혹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리고 먹고 입는 최소한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원칙하에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정말 이런 형편에 놓여 있어서 부득이 가정에 대한 책임부터 다한 후 자기 시간을 조정해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 집에서는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이를 허락하고 인정해 준다. 이것이 원칙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제 막 하나님을 믿어서 아직 뿌리내리지 않은 사람에게 반드시 직업을 버려야 한다고, 반드시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고, 반드시 이혼해야 한다고, 자녀를 신경 쓰면 안 된다고, 부모를 버려야 한다고 요구할 자격은 없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은 진리 원칙이다. 이 원칙에는 여러 가지 상황, 여러 가지 조건이 담겨 있으므로 다양한 상황과 조건을 근거로 진리 원칙에 따라 요구하고 가늠해야 정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라는 사안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할 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만약 네가 이것을 간파하지 못하면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구원받을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마지막의 이 시간은 특별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 방면으로는 교회의 사역 사무가 바쁘고 번잡하기도 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하나님나라 복음이 확산되고 있는 이 시기에 더 많은 사람이 와서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고, 자신의 힘을 보태고, 자신의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하나님 집의 여러 사역에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 줘야 한다. 따라서 네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자신의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별도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하나님 집에 와 본분을 이행하고 여러 가지 사역에 협력한다면, 이는 하나님 입장에서 바라 마지않는 일이면서 아주 귀한 일이자 하나님께 기억될 만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에게도 이렇게 대가를 치르고 헌신할 만한 일이다. 네가 육의 즐거움을 버린 대신,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하나님 말씀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돈이나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귀중한 보물을 네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서, 또 자신의 노력과 추구를 통해 얻는 일은 너에게 특별한 은혜요, 행운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면 이것은 귀중한 보물이고, 이 보물은 사람이 모든 걸 바쳐서 바꿀 가치가 있다. 그러니 네가 종사하는 직업을 통해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고, 이런 여건하에서 네가 노력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 진리를 추구하는 이 길을 선택한다면 이는 좋은 일이고 축하할 만한 일이다. 너는 이 일로 낙담하고 막막함을 느낄 게 아니라 네 선택이 옳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너는 승진할 기회, 급여를 늘리고 소득을 높일 기회, 육적으로 더 나은 삶을 누릴 기회, 혹은 부유한 삶을 누릴 기회를 잃어버린 대신, 구원받을 기회를 잡았다. 그런 것을 잃고, 그런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은 네 선택이 네 구원에 희망과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뜻이므로 너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네가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서 추가로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물질을 누린다면, 육은 만족을 얻겠지만 그것은 자신이 구원받을 희망을 자기 손으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네 입장에서 틀림없이 좋은 일이 아니다. 너는 이것 때문에 속이 끓고 조바심이 나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나 생활 태도, 육적인 삶의 질에 대한 요구를 조절하고 육의 생활에 대한 자신의 비현실적인 욕심과 계산, 계획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하나님 집의 여러 사역에 네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붓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 사역이 끝나고 하나님이 각 부류 사람의 사역과 분량을 검증할 때 그중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대업을 이룰 때, 하나님나라 복음이 전 우주로 확산될 때, 그 기쁨의 광경이 펼쳐질 때 거기에 네 수고와 노력, 대가도 한몫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얻을 때, 하나님 사역이 전 우주로 확산될 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이룬 대업을 축하할 때, 이런 기쁜 일이 펼쳐질 때 너는 이 기쁨의 당사자이고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일원인 것이다. 너는 모든 사람이 기뻐 날뛸 때 이를 갈며 슬피 울고 가슴 치며 슬퍼하는 그런 사람, 징벌받고 하나님께 철저히 혐오받고 내쳐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물론, 좀 더 좋은 건 하나님이 대업을 이룰 때 네게도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너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다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원칙을 어기지 않으며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너는 발탁될 기회, 급여가 인상되거나 돈을 벌 기회,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기회 등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높은 급여, 육의 즐거움, 물질적 우대, 우월한 생활 환경, 사장의 인정과 승진, 발탁 등 네가 당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 직업에 종사하는 것에 대한 요구 기준이자 사람이 지켜야 할 실행 원칙은 바로 이 한 마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라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여 생명을 얻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이다. 사람은 육의 욕망과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 진리를 포기하고 바른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사업 측면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두 번째 원칙이다.

오늘은 ‘사업 내려놓기’라는 주제에 관해 두 가지 원칙을 얘기했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잘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원칙을 잘 알았으면 이제부터는 이런 원칙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국,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고,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어기는 사람이다. 이렇게 간단하다. 원칙을 지킨다면 진리를 얻을 것이고,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진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진리를 얻으면 구원받을 희망이 생기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구원받을 희망을 잃어버릴 것이다. 사실이 바로 이렇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기로 하자. 안녕!

2023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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