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너희는 평소 찬양을 들으면서 자신의 내적 상태나 체험과 결부해 보느냐? 찬양을 들을 때, 네가 체험하고 인식한 말씀이나 내용, 혹은 네가 이를 수 있는 말씀이나 내용과 연관 지어 마음으로 듣고 묵상해 보느냐? (하나님, 가끔은 어떤 일을 겪을 때 찬양을 들으면서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지만, 또 가끔은 대충 형식적으로 듣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형식만 취한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찬양을 들을 때 95% 이상은 대충 형식만 취한다. 그럼 그런 식으로 찬양을 듣는 것이 의미가 있겠느냐? 찬양을 듣는 목적은 무엇이냐? 적어도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이 목적이다. 각종 복잡한 일과 사유로부터 마음을 거두어 하나님 앞에서 평온히 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 나아가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한 단락 한 단락을 자세히 듣고 묵상하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사무적인 일로 바빠 찬양을 들을 시간이 없고, 묵상할 에너지도 없다.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진리를 묵상하는 법이 전혀 없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지도 못한다. 그저 매일 정신없이 본분을 이행할 뿐이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는 고생스럽고 힘들지만 무척 충실한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하면서 공허함을 느끼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무력해지지 않으며, 그 하루는 헛되지 않고 가치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게 매일 흐리멍덩하게 지내니 이것을 가리켜 하루하루 시간만 때운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대로 3년~5년, 혹은 8년~10년이 지난다고 한들 큰 수확이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특수한 일이 생기지 않고, 하나님이 배치한 특수한 환경이 임하지 않으며, 상부에서 직접 너희를 지도하고 이끌어 주면서 예배드리거나 교제해 주지 않는다면,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의 본질을 해부해 주지 않고 일일이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면 너희가 보내는 거의 모든 하루하루는 사실 공허할 것이며, 성장이 무척 느릴 것이고, 생명 진입에서도 이렇다 할 수확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일이 닥쳐도 분별력이 커지지 않고, 진리에 대한 체험이나 인식도 진보를 이루지 못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 또한 이렇다 할 체험과 성장을 이루지 못하니 일이 닥치면 여전히 진리 원칙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을 체험할 때, 여전히 주동적으로 원칙을 구하거나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허송세월을 하는 것이다. 허송세월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허비하고, 헛되이 심혈을 쏟으며, 그동안 걸어온 길은 바울의 길로 규정될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리더 일꾼을 했는데도 생명 진입이 얕고 분량이 미미하며 어떤 진리 원칙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쓰임 받기에 합당치 않으며 한 가지 사역을 독립적으로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리더 일꾼이 쓰임 받기에 합당치 않으니 평범한 형제자매들은 독립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지도, 생명 진입을 이루지도 못한다. 만약 감독하고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릇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리더 일꾼이 사역할 때, 감독하고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치우친 길을 갈 것이고, 독립 왕국을 세울 것이며,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될 것이고, 심지어는 적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자각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지금 너희가 바로 이런 상태이다. 궁핍하고 가련하다. 일이 닥치면 속수무책으로 더 이상 갈 길이 없으며, 실제적인 문제나 실제적인 사역 내용과 관련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된다. 매일 정신없이 바쁘고 몸 또한 무척 힘들며 심리적 스트레스도 크지만 사역 성과는 별 볼 일 없다. 하나님 집에서 사역지침을 통해서 각각의 진리 원칙과 실행의 길을 모두 명확히 알려 주었지만, 너희는 사역을 함에 있어 길이 없고 원칙을 찾지 못하며, 일이 닥치면 멍하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무슨 사역을 하든 엉망이 된다. 이것이 가련한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련한 모습이다.

혹자는 “저는 하나님을 10년 넘게 믿었습니다. 오래된 신자죠.”라고 말하고, 혹자는 “저는 하나님을 20년이나 믿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또 혹자는 “하나님을 20년 동안 믿은 게 뭐 대수입니까? 저는 30년 넘게 믿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은 햇수는 짧지 않다. 심지어 리더 일꾼으로 적잖은 햇수를 보내고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생명 진입은 어떠하냐? 진리 원칙은 얼마나 파악했느냐? 여러 해 동안 리더 일꾼을 하고 사역 경험도 좀 있지만, 각 부류의 사역이나 사람, 일이 닥칠 때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이름을 지킬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킬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지킬 수 있겠느냐? 굳게 설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와 악인이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할 때 너에게는 그들과 싸울 믿음과 힘이 있느냐? 하나님의 선민을 보호하고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지키고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지 않게 지킬 수 있겠느냐? 이런 것을 해낼 수 있느냐? 지금 보건대, 너희는 해내지 못했고 해낼 수도 없다. 매일 정신없이 바쁜데, 무엇 때문에 바쁜 것이냐? 근 몇 년간 가정과 일을 버리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고 적잖이 공을 들였지만, 수확은 크지 않다. 심지어 어떤 리더 일꾼들은 여러 차례 비슷한 사건과 사람, 환경이 임해도 매번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똑같은 과오를 남긴다. 이는 생명이 성장하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얻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여전히 사탄에 의해 흑암 권세 아래에 통제되어 구원받지 못한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교회의 각 시기에 네 주변에서 나타나고 발생하는 각 부류의 사건에 대해 너는 속수무책이다. 특히, 적그리스도나 악인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건이 닥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방임한다. 그나마 좀 나은 이는 얼마간 화를 내면서 교란하는 자들을 책망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니 방법이 없다. 어떤 이는 ‘나는 힘과 마음을 다했어. 하나님께서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라고 하셨잖아. 나는 그렇게 했으니까 성과가 없는 건 내 잘못이 아니야! 사람들이 너무 못돼서 진리를 교제해 줘도 듣지 않는걸.’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마음과 힘을 다했다고 하지만 사역에 성과가 나지 않았다. 네가 교회 사역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못해 악인이 교회에서 권력을 잡게 되었으며, 사탄이 활개 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다. 그런데도 너는 옆에서 방관하면서 어떤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다. 권력을 줘도 처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지도 못하면서 자신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또한 마음과 힘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자가 좋은 청지기이겠느냐? (아닙니다.) 각 부류의 악인과 불신파가 튀어나와 온갖 마귀와 사탄 역할을 하고, 사역지침을 어기며 딴짓을 하고, 거짓말로 하나님 집을 기만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짓을 하여 하나님 집과 교회에 먹칠할 때 너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화만 낼 뿐 나서서 정의를 구현하고 악인을 폭로함으로써 교회 사역을 지키지 않았다. 또 그 악인들이 계속 교회 사역을 교란하거나 하나님 집과 교회에 먹칠하지 못하도록 처분을 내리고 해결하지도 않았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간증이 없다는 의미다. “감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처분을 내렸다가 분노를 사면 그들이 한패가 되어 저를 괴롭히고 파면할 텐데, 그럼 어쩐단 말입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는 무능하고 유약한 것이냐, 아니면 진리가 없어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탄의 교란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냐? 대체 어떤 문제겠느냐?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네 타고난 성품이 유약하고 연약하고 소심하고 겁이 많다고 해도 그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었으면 일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기초로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럼 그 인성의 연약함과 유약함, 나약함을 극복하고 악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가 악인을 처분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태생적으로 인성이 무능하고 소심하며 겁이 많아서겠느냐? 그것은 근본 원인도, 문제의 본질도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께 충성심이 없고, 스스로를 지키며, 자신의 신변 안전과 체면, 지위를 보전하고, 퇴로를 남겨 두려고 하는 것이다. 충성심이 없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스스로를 지키며, 일이 닥치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일이 지나가고 난 후에야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또 어떤 일이 닥치든 늘 이것저것 두려워하며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고 우려하고 고민할 뿐 나서서 교회 사역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믿음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이 없다. 너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며, 네 모든 것과 운명이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한, 사탄은 네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하나님 말씀도 믿지 않는다. 너는 눈으로 본 것에 근거하여 사실을 판단하고, 자신의 좁은 식견으로 사물을 판단하며, 언제나 스스로를 지킨다. 또 너는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사탄과 사악한 세력, 악인을 두려워한다. 이는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이 없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체험이 너무 얕아 이 일들을 간파하지 못해서겠느냐, 아니면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어서겠느냐? 무엇 때문이겠느냐? 이는 사람의 패괴 성품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이는 사람이 너무 간사하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체험했든, 얼마나 많은 사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든 그것이 하나님의 행사임을 믿지 않고,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지 않는데,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의 원인이다. 이 밖에도 또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사람이 스스로를 너무 아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 집의 이익,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어떤 대가나 희생도 치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 하니 사람은 스스로를 아껴도 너무 아낀다! 사람은 죽음이 두렵고, 모욕당하는 것이 두렵고, 악인에게 모함당하는 것이 두렵고, 어떤 곤경이든 빠지는 것이 두려워 극력으로 자신의 육을 보전하며, 어떻게 해서든 어떤 위험한 처지에도 처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너무 간사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너무 아끼고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너는 자신을 내놓으려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저 소망일 뿐이다. 진정으로 나서서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고 사탄과 싸워야 할 때가 되어 위험과 죽음, 각종 어려움과 곤경을 직면하게 되면 원치 않는다. 그 정도의 소망으로는 버티지 못하고, 너는 어떻게 해서든 먼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마지못해 겉으로 보이는 일, 남에게 보고할 수 있는 일을 얼마간 할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로봇의 머리보다 잘 돌아가고 임기응변에 능해서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어떻게 행동하면 불리할지 알며, 융통성을 발휘하고 자유롭게 굴릴 수 있다. 그래서 일이 닥쳤을 때 너의 그 알량한 믿음이 굳게 서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간사한 짓을 하고 암투와 수작을 벌인다. 네 행동은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음을 드러낸다. 너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하나님이 꼭 너를 보호해 주고 네 안전을 지켜 주며 죽지 않게 해 주리란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으며, 오직 스스로에게 기대야만 성공할 가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결국 어떻게 되느냐? 어떤 환경, 어떤 일이 닥치든 그런 방식과 방법, 수단으로 행동하며,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서 증거하지 못한다. 또 어떤 환경이 닥치든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 일꾼이 되지 못하며, 청지기로서 마땅히 보여 주고 행동해야 할 것들을 보여 주지 못하고,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 이는 간증을 잃어버린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이 닥치든, 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대 충성과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배치해 준 환경 속에서 사탄과 싸울 때마다 물러서고 도망치는 길을 선택했으며, 하나님이 이끌어 준 대로, 하나님이 만들어 준 궤도대로 체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싸움에서 네가 마땅히 얻어야 할 진리와 인식, 체험을 얻지 못한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 속에서 매번 그런 방식으로 체험했으며,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 결국 네가 얻은 것 역시 똑같은 도리와 교훈일 뿐 진실한 인식은 별로 없었다. 그저 경험과 교훈을 좀 얻었을 뿐이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앞으로 이런 일이 닥치면 뭘 주의하고 뭘 신경 써야지. 또 어떤 사람들을 조심하고 피하고 경계해야지.’라고 말이다. 그게 다였다. 너는 무엇을 얻었느냐? 경력과 식견을 얻었느냐, 아니면 경험과 교훈을 얻었느냐? 만약 네가 얻은 것이 진리와 무관하다면 그것은 수확이 아니며, 진정으로 네가 얻어야 할 것도 아니다. 그러니 너는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실망시킨 것이다. 하나님이 그 환경을 배치함으로써 네가 얻도록 예정한 것을 너는 얻지 못했으니 분명 하나님을 실망시켰을 것이다. 그 시련 속에서, 혹은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 속에서 너는 하나님이 얻게 하려 한 진리를 얻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커지지 않았으며, 깨달아야 할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스스로를 인식해야 하는 부분에서 인식하지도 못했다. 또 얻어야 할 교훈을 얻지 못했고 지켜야 할 진리 원칙 역시 얻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역시 커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그럼 무엇이 커졌겠느냐? 네가 원래 모르던 도리들을 지금은 알게 되었을 것이고, 이해하지 못했던 부류의 추악한 몰골을 이제는 보았을 것이다. 그 외에 진리와 관계되는 것들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고, 깨닫거나 인식하거나 체험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사역이나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너는 여전히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하니 하나님을 크게 실망시킨 것이다. 적어도 그 환경 속에서 커져야 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과 믿음이 커지지 않았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도 가련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은 제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하시는데 그건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스스로를 인식했고,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을 인식했으며, 나아가 인성을 이해하고 저 스스로를 더 정확하게 알게 됐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을 인식했다고 해서 진실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40~50살쯤 되면 이러한 것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질이 좀 있거나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다 이를 수 있다. 또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이 인성 측면에서 지니고 있는 약점이나 강점, 장단점,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40~50살이 되면 주변에서 자주 교류하는 각 부류 사람의 인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사귀기에 적합하고 어떤 사람들이 사귀기에 적합하지 않은지, 어떤 사람들이 교류하기에 적합하고 어떤 사람들이 교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지, 어떤 사람들을 멀리하고 어떤 사람들을 가까이해야 할지 거의 다 알게 된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이나 멍청이, 바보, 지적 장애인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오래 믿으면서 많은 진리를 듣고 많은 환경을 겪었는데도 인성 측면에서만, 혹은 사람을 분별하거나 간단한 사물을 인식하는 데에서만 약간의 수확이 있을 뿐이라면 이를 진정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진정한 수확이란 과연 무엇이냐? 진정한 수확은 네 분량과 관계가 있다. 네게 수확이 있으면 진보가 있을 것이며, 네 분량도 성장할 것이다. 진정한 수확이 없으면 네 분량은 성장하지 않는다. 그럼 여기에서 수확이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최소한 진리, 구체적으로 말해서 진리 원칙과 관계가 있다. 각 부류의 일과 사람을 처리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이해하여 지키고 실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 처신의 원칙과 기준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확이다. 그 진리 원칙들이 네가 처신할 때 지켜야 할 원칙과 준칙이 되면, 그것은 곧 너의 생명이 된다. 그 부분의 진리가 네 내면에 만들어지면 네 생명이 되고, 네 생명은 성장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런 일과 관련된 진리 원칙을 아직 파악하지 못해 이런 일이 닥칠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면, 이 부분에서 진리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 부분의 진리는 네 생명이 아닐 것이다. 그럼 네 생명은 성장하지 않았을 테니 아무리 말을 잘해 봤자 도리에 불과할 뿐 소용이 없다. 이 일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 (네.) 그럼 너희는 그 기간에 성장했느냐? (그러지 못했습니다.) 너는 사람의 뜻과 머리로 몇몇 경험을 종합했을 뿐이다. ‘앞으로 어떤 말과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지, 어떤 일을 많이 하고 어떤 일은 적게 하며 어떤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지 이제 나는 확실히 알게 됐어.’라고 말이다. 이것이 생명이 성장했다는 표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심각하게 없는 것이다. 그저 규례와 글귀, 구호를 종합했을 뿐이니 진리와는 상관이 없다. 너희가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큰일을 겪은 후에는 ‘이런, 앞으로 이런 일은 이렇게 처리하고 저런 일은 저렇게 처리해야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닥치면 똑같이 실패하고 만다. 스스로에게 화를 내 봤자 방법은 없다. ‘나라는 인간은 어쩜 이 모양인 거야!’라고 화를 내며 늘 스스로가 제구실을 못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도움이 되겠느냐? 네가 제구실을 못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문제가 있는 것도, 더욱이 하나님이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거나 찾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늘 사람의 뜻이 섞여 있는 것이며,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자기가 주도권을 쥐려고 하고, 사람의 말을 들을지언정 하나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건과 환경 속에서 얼마간 경험과 교훈을 종합했다고 해서 네가 성장한 걸로 생각하느냐? 만약 정말 성장했다면, 하나님의 다음번 검증에서 너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킬 것이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제대로 지킬 것이며, 교회의 각 사역을 합리적으로 배치할 것이다. 하나님 집의 사역이 어떤 교란이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이 어떤 비방이나 모욕도 당하지 않으며, 형제자매의 생명 성장에 어떤 해도 가지 않고, 하나님의 제물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는 네가 성장했음을, 또한 쓰임 받기에 합당하며 생명 진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 너희는 아직 부족하다. 너희의 머리는 하나같이 미숙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너무 많고, 너희는 순수하지도 않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진심이 한 조각 있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겠다는 바람도 있지만, 일이 닥치면 자신의 각종 욕망과 바람, 계획을 저버리지 못한다. 하나님 집과 하나님의 사역에 갖가지 어려움이 닥칠 때일수록 너는 더더욱 한쪽으로 비켜서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나서서 사역을 주관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의 사역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네 진심은 어디로 간 것이냐? 그 진심은 어쩌면 그렇게 단 한 번의 타격도 견디지 못할 만큼 나약하단 말이냐?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그 바람은 어디로 갔느냐? 그것은 왜 굳게 서지 못하는 것이냐? 왜 그렇게 일격에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냐?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너에게 실제 분량이 없다는 것이다. 너의 그 보잘것없는 분량으로는 작은 마귀 하나에게 교란당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며, 작은 마귀가 한 번 괴롭히기만 해도 그것을 따르게 될 것이다. 설령 어느 정도 분량이 있다고 해도 네 이익과 관계없는 피상적인 일들을 겪을 때는 그럭저럭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면서 네가 할 수 있고 네 능력 범주 내에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좀 할 수 있겠지만, 정말 굳게 서야 할 때, 교회 사람들이 대거 체포될 때, 악인과 적그리스도가 교란할 때는 어디에 있겠느냐? 무엇을 하겠느냐?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이는 문제를 분명히 설명해 준다. 그렇지 않으냐? 만약 어떤 적그리스도가 본분 이행 기간에 모두를 기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고 제물을 낭비하고 형제자매들을 미혹해 자신을 따르게 하는데도 분별하고 제지하고 보고하기는커녕 적그리스도를 돕고 따라서 일을 처리하며, 적그리스도가 그 모든 일을 통해 이루려는 결과를 실현시킨다면 하나님을 위해 진실로 헌신하겠다는 그 다짐이 무슨 역할을 했겠느냐? 이것이 네 진실한 분량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와 악인, 각 부류의 불신파가 튀어나와 하나님 집의 사역을 교란하고 망쳐 놓을 때, 특히 교회에 먹칠하고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할 때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키기 위해 앞에 나서서 한마디 한 적이 있느냐? 앞에 나서서 제지하고 막은 적이 있느냐? 너는 나서서 제지하지 않은 것은 물론, 적그리스도를 따라 함께 악을 행하고 나쁜 짓을 했으며, 적그리스도의 조력자, 도구 역할을 했다. 심지어 사람들이 편지를 써서 적그리스도의 문제를 보고할 때도 문제를 보류해 둘 뿐 처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겠다는 다짐과 소망은 이 중요한 때 제 역할을 했겠느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그 소위 바람과 다짐이라는 것은 분명 네 진실한 분량이 아니고, 네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얻은 수확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진리도 생명 진입도 아니고 사람이 생명을 갖추었다는 상징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어떤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동경이나 지향일 뿐 진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니 너희는 정신 차리고 자신의 진실한 분량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자기가 그래도 좀 소질이 있다고, 또한 많은 것을 버렸다고, 학업과 직업, 가정, 결혼, 육의 미래 등을 버렸으니 분량이 무척 크다고 생각하지 마라. 심지어 처음 하나님을 믿고 뿌리를 내린 후로 줄곧 리더 일꾼을 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 세월 동안 어느 정도 경험과 교훈을 종합하였고, 얼마간 글귀와 도리를 말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분량이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생명 진입이 있다고, 자신은 하나님 집의 대들보, 기둥이며 하나님이 온전케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틀렸다.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는 아직 그러기엔 이르다! 적그리스도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너희는 딱히 실제 분량이랄 게 없다. 네가 여러 해 동안 리더 일꾼을 하기는 했지만, 쓰임 받을 만한 곳이 없고, 실제적인 사역을 별로 하지도 못한다. 그저 그럭저럭 쓸 뿐이다. 너희는 천리마가 아니다. 너희에게 정말 괴로움과 고생을 참고 견디는 정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껏해야 늙은 황소에 불과할 뿐이다. 너희는 쓰임 받기에 합당치 않다. 어떤 사람들이 리더 일꾼이 된 것은 전적으로 열정과 기초적 지식이 있고 어느 정도 자질을 갖췄기 때문이다. 또한, 개별 교회에서 이상적인 책임자를 찾지 못해 그가 파격적으로 발탁되어 양성받을 대상이 된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각 부류 사람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하나씩 교체되고 도태되었다. 지금까지 따르며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지만, 제대로 된 분별력이 없다. 그저 악을 행하지 않아 살아남았을 뿐이다. 이는 전적으로 상부의 사역지침 덕분이고, 상부에서 직접 지도하고 점검하고 신경을 쓰고 체크하고 감독하고 책망 훈계를 한 덕분이다. 이것을 기초로 몇몇 사역을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는 쓰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너희는 늘 사람을 숭배하고 따르며 치우친 길을 걷고, 잘못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또 수시로 사설과 궤변에 미혹되어 갈 곳을 잃고 방향을 잡지 못하다가 결국 자기가 대체 누구를 믿는 것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실제 분량이다. 너희에게 생명 진입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억울해할 테니, 이렇게 말하겠다. 너희의 체험 범위는 너무나 제한적이며, 책망 훈계나 큰 징계가 임했을 때만 조금 진입할 뿐이다. 하지만 큰 원칙 측면의 일, 특히 적그리스도나 거짓 리더의 미혹과 교란을 직면하는 일에 있어서 너희는 백지와 같고 간증이 전혀 없다. 또 너희는 생명 체험과 생명 진입에서 체험이 너무 얕으며, 하나님을 진실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도 백지와 같다. 이 밖에, 교회의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측면에서도 너희는 진리를 교제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이 역시 백지와 같다. 이 몇 가지 측면에서 너희가 제출한 것은 전부 백지 답안지이다. 그래서 너희는 리더 일꾼으로 쓰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신자로서 많은 사람이 어느 정도의 생명 진입은 이루었다. 다만 그 정도가 너무 미미하여 진리 실제에 이르지 못한다. 검증을 이겨 낼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정말 큰 시련과 시험이 임하거나 직접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큰 형벌과 심판이 임하면 그때 비로소 진실한 분량과 진리 실제가 있는지, 굳게 설 수 있는지, 네가 제출하는 답안지는 무엇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을지 등이 검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진실한 분량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네게 분량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리더 일꾼이 되는 일에 대해 말하자면, 너희는 이렇다 할 실제 분량이 없어서 일이 닥치면 바로 멍해진다. 또 악인과 적그리스도가 교란하면 바로 꼬리를 내리며, 어떤 중요한 사역도 혼자서 완수하지 못한다. 전부 다른 사람이 점검하고 지도하고 협력해야 완수할 수 있다. 즉, 너희는 방향을 잡지 못한다. 너희가 맡은 역할이 주연이든 조연이든 혼자 한 가지 일을 담당하지 못하며, 독립적으로 어떤 한 사역을 완수하지도 못한다. 또 상부에서 방향을 잡아 주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사역을 잘해야 하는데, 너희는 이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마지막에 사역을 체크할 때, 너희가 모든 부분을 빈틈없이 신경 쓰고, 모든 사역을 마음을 다해 훌륭하게 해냈으며, 적절하게 처리하여 전부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원칙을 구하는 것을 기초로 사역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사역을 제대로 해냈다면, 그때는 쓰임 받기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너희가 체험한 모든 일을 통해 볼 때, 너희는 쓰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 쓰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너희가 독립적으로 본연의 사역을 완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만약 상부에서 점검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람들을 곁길로 잘못 이끌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진리 실제나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로 이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민들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도록 하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상부에서 한동안 체크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책임지는 사역 범위에는 늘 많은 오류와 허점이 생길 것이며, 각양각색에 형형색색의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또 상부에서 시정하거나 점검하거나 직접 처리해 주지 않는다면, 어느 수준까지 잘못될지 장담할 수 없고, 언제까지 잘못될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실제 분량이다. 그래서 너희는 쓰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말을 듣기를 원하느냐? 이런 말을 듣고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지는 않느냐? (하나님, 마음이 무척 괴롭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제해 주신 것들은 분명 사실입니다. 저희는 분량도, 진리 실제도 전혀 없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도 분별하지 못하고요.) 내가 좀 짚어 주어야겠구나. 그러지 않으면 너희는 계속 억울하고 원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희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글귀와 도리를 좀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평소 예배 시간에 도리를 말할 때 초안을 작성할 필요가 없고 주눅 들지도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분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분량이 있는데 왜 쓰임 받기에 합당하지 않겠느냐? 왜 진리를 교제하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느냐? 너는 그저 글귀와 도리를 좀 늘어놓아 형제자매들에게 동조를 살 뿐이다. 이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도, 쓰임 받기에 합당한 것도 아니다. 네가 말할 수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글귀와 도리는 결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작은 환경만 배치해도 너는 금세 드러날 것이다. 네 분량이 미미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어떤 일도 간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네가 가련하고 궁핍하며 눈멀고 어리석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천천히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보기에는 내가 한 말이 일리가 있지 않으냐? 이것이 실제 상황 아니냐? 스스로에게 대조해 볼 수 있겠느냐? 대조해 보니 그렇다 해도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선 안 된다.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너는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며 리더 일꾼이 되려고 하니 좌절과 실패를 좀 맞닥뜨렸다고 책임을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 다시 일어나 계속 전진해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 문제가 심각한 부분이 있으면 그 측면의 진리를 갖추는 데 집중해야 한다.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고 쓰러져 있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일이 닥칠 때 글귀와 도리를 늘어놓지 말고, 갖가지 객관적인 이유를 강조하지도 마라. 그런 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너를 검증할 때, “저는 그때 몸이 별로 안 좋았습니다. 저는 젊었고, 주변 환경이 별로 안정적이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그 말을 들어 주겠느냐? 하나님이 “그때 네게 교제해 준 진리를 너는 들었느냐?”라고 물으면 너는 “들었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너에게 내려온 사역지침이 손에 있지 않았느냐?”라고 물으면 너는 “있었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행하지 않았느냐? 왜 그렇게 엉망으로 무너졌느냐? 왜 굳게 서지 못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네가 강조하는 어떤 객관적인 이유도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네 핑계와 이유가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얼마나 많은 도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지, 어떻게 변명하는지를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네 진실한 분량과 생명 성장이다. 언제든, 어떤 급의 리더가 되든, 네 지위가 얼마나 높든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잊지 마라. 네가 아무리 많은 도리를 늘어놓을 수 있어도, 또 그 도리를 아무리 노련하게 늘어놓을 수 있어도, 하나님 집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공을 세웠어도 그것은 전부 실제 분량이 아니고, 생명이 있다는 표지도 아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 원칙을 파악하는 것, 일이 닥쳤을 때 굳게 설 수 있는 것, 독립적으로 사역을 완수할 수 있는 것, 쓰임 받기에 합당한 것, 이런 것이 바로 실제 분량이다. 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지난번 예배 때는 어디까지 교제했느냐? (지난번 예배 때, 하나님께서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내려놓기’라는 화제에 관해 교제해 주셨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바로 ‘후손에 대한 기대 내려놓기’였습니다. 하나님은 두 단계로 나누어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자녀가 미성년자일 때 부모의 태도였고, 또 하나는 자녀가 성년이 된 후 부모의 태도였습니다. 자녀가 미성년자든 성인이든 부모가 보여 주는 태도와 행동은 사실 전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는 늘 자식의 운명을 통제하려 하고, 자식의 생활에 개입하려 합니다. 하지만 자식이 어떤 길을 걸어갈지, 무엇을 추구할지는 부모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식의 운명 역시 부모가 주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는 일을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에 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식이 어떤 시기에 있든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나머지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정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지난번에는 부모가 자식 세대에 거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교제하였다. 물론, 그 기대는 전부 사람의 뜻이고 인위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안배한다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부모의 그런 기대는 인성적인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니 마땅히 내려놓아야 한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아무리 커도, 그 기대가 아무리 당연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진리에 위배되는 한, 사람은 그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 또한 부정적인 사물이며 정당한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부모의 책임에 어긋나고 부모의 책임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또 비현실적이고 인성에 위배되는 기대이자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지난번에 우리는 미성년 자녀에 대한 부모의 비정상적 행동과 태도, 그리고 과격한 행위 때문에 자녀에게 갖가지 부정적인 영향과 압박을 주며, 어린 자녀에게 육체적, 정신적, 심적 학대를 가하게 된다고 교제하였다. 이런 일은 부모의 그런 행동이 부적절하고 부당함을 알려 준다.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마땅히 내려놓아야 하는 사상이자 행동이다. 인성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미성년자에 대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육체적, 정신적 학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위해 그들의 미래와 운명을 계획하고 주재하고 배치하고 결정할 것이 아니라 책임을 다해야 한다. 지난번 시간에, 부모가 미성년 자녀에게 다해야 할 주요 책임 두 가지를 언급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 두 가지를 잘해 낸다면 책임을 다한 것이고, 잘해 내지 못한다면 아이를 어떤 예술가나 인재로 키웠을지라도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든, 그로 인해 머리가 하얗게 세든, 과로로 병에 걸리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심혈을 쏟아붓든, 얼마나 많은 돈을 썼든 책임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 부모가 미성년 자녀에게 다해야 할 책임은 무엇이냐? 두 가지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느냐? 기억하는 사람이 있느냐?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두 가지 측면의 책임에 관해 교제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자식의 육체적 건강을 보살펴 주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식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지도하고 가르치고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간단하냐! 사실, 아이의 육체적 건강을 보살펴 주기는 쉽다. 아이가 어디 부딪히지 않게 하고, 음식을 잘못 먹지 않게 하며, 성장에 지장을 주지 않고, 부모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건강하게 배불리 먹여 주고 잘 쉬게 해 주면 된다. 또 되도록 병에 걸리지 않게 하고, 병에 걸리면 바로 치료해 주면 된다. 부모는 보통 이 기준을 충족하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임무는 쉬운 것이다. 이 기준은 동물도 도달할 수 있으니, 만약 사람이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동물보다 못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동물조차 할 수 있는 일을 사람이 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더없이 가련할 것이다. 이는 자녀의 육체적 건강을 보살피는 측면의 책임이다. 자녀의 심적 건강에 대한 것 또한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키우는 동안 다해야 할 책임이다. 여기에는 자녀가 신체적으로 건강할 경우 사상적, 심적으로도 건강하게 하고, 문제를 생각하는 방향과 방식 등이 모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이 되게 하는 것,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 급진적이거나 치우치거나 적대시하지 않게 하는 것 등이 있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부모의 말을 알아듣고 부모와 간단하고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하며 새로운 사물에 관심을 보일 때, 성경 이야기를 읽어 주어도 되고, 또는 처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 주면서 사람으로 처신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좋은 아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등을 이해하도록 가르쳐 줘도 된다. 이는 자녀를 심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든가,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든가, 높은 사람이 되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 고생하며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든가, 권력이 생겨 위세를 부리며 다른 사람을 부릴 수 있다든가 하는 것들을 입버릇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아이에게 그 부정적인 것들을 주입할 게 아니라 긍정적인 일을 말해 주거나 그 나이대에 이해할 수 있고 긍정적인 교육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말라고, 거짓말하는 아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거짓말하면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과 거짓말에 대한 부모의 태도를 알려 주며, 거짓말하는 아이는 나쁜 아이니 모두가 싫어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 최소한 아이에게 정직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려 주어야 한다. 이 밖에,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을 갖지 않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타인에 대해 관용을 갖고 어떤 일이 닥치든 인내하고 포용하라고, 제멋대로 굴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어야 하며,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고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 만약 악인이나 나쁜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폭력이나 무력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 피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어린 마음에 폭력적 성향의 씨앗과 사상을 심어 주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폭력을 싫어하며, 폭력적인 마음을 가진 아이는 좋은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사람이 폭력적인 성향을 갖고 있으면 훗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이 사회에서 제약받고 법적인 제재를 받는다는 것을, 폭력적 성향을 지닌 사람은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사람이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이 밖에도 아이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이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무슨 일이든 혼자 힘으로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해야지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다양한 측면에서 아이가 그런 긍정적이고 올바른 사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 시작해야 한다. 물론, 부정적인 사물이 생겨나고 닥치는 것을 보면 그런 행동은 좋지 않다고, 그렇게 행동하는 아이는 좋은 아이가 아니라고, 그런 행동은 부모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행동하면 앞으로 사회에서 법적인 제재에 부딪혀 처벌을 받거나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간단히 알려 주어야 한다. 요컨대, 자녀에게 가장 기초적이고 간단한 처신의 원칙과 일 처리 원칙을 알려 주는 것이다. 적어도 자녀가 미성년자일 때, 무엇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 좋은 사람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나쁜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은 사람의 모습이고 어떤 일을 하는 게 악행을 저지르는 나쁜 사람의 모습인지 분별하고 알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이는 가장 기본적으로 알려 주어야 할 것들이다. 이 밖에, 일부 행위는 사람들에게 혐오받는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물건을 점유하거나 훔치거나 몰래 가져다 쓰는 것, 뒤에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는 것,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 등은 모두 나쁜 사람의 모습이며, 부정적인 사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말이다. 아이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무슨 일을 하든 제멋대로 굴어서는 안 된다고, 쉽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식어서는 안 되며 충동적이고 무모하게 행동해서도 안 된다고, 어떤 일을 하든 그 결과를 생각하라고, 만약 나쁜 결과나 최악의 결과가 예상된다면 이익이나 욕망에 판단력을 잃지 말고 손을 떼라고 알려 주어야 한다. 이 밖에도, 나쁜 사람은 보통 어떤 말과 일을 하는지 알려 주어 나쁜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나 판단 기준을 갖게 해야 할 것이다. 너무 쉽게 낯선 사람이 하는 말, 약속을 믿거나 낯선 사람이 주는 물건을 함부로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을 알려 주어야 한다. 이 세상과 이 사회는 더없이 사악하여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에 누구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아이에게 악인과 나쁜 사람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 악인에게 모함당하거나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악인을 경계하고 멀리하게 해야 한다. 이 가장 기본적인 교육에 대해 부모는 자녀가 미성년자일 때 올바른 각도에서 지도하고 이끌어 주어야 한다.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는 동안 아이가 몸 건강하고 튼튼하게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아이가 심적으로도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심적 건강의 표지는 무엇이냐? 올바른 인생관을 갖고 바른길을 걷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을 믿지 않을지라도 성인이 되기 전에 사악한 흐름에 속하는 것들을 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아이에게서 어떤 문제를 발견했다면 부모는 바로 신경을 쓰고, 제때에 고쳐 주며, 정확하게 지도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어릴 때 사악한 흐름 속에서 생겨난 일을 보거나 잘못된 주장, 사상 관점을 듣는다면 분별력이 없어서 그것들을 따르고 모방할 수 있다. 이럴 때 부모는 바로 알아채서 가능한 한 빨리 바로잡아 주고 올바르게 지도해 주어야 한다. 이 또한 부모의 책임이다. 요컨대, 자녀가 사상적인 면에 있어서, 혹은 사람으로 처신하고 남들을 대하고 각 부류의 사람과 일,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긍정적이며 올바른 발전 방향을 갖게 해서 나쁜 방향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방인들은 “생사는 운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사람이 평생 얼마나 누리고 얼마나 고생할지는 전부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사람은 바꿀 수 없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 객관적인 사실을 알려 주는 한편, 사람이 평생 육의 먹고 입는 것을 위해 살아가서도, 더욱이 향락을 위해 살아가서도 안 된다는 것을, 먹고 마시고 노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오직 육적으로 먹고 마시고 노는 것과 향락만 위한다면 그런 사람은 산송장처럼 삶에 아무 의미도 없으며,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가치를 전혀 창출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 사람은 살아갈 자격도, 사람으로 처신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자녀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바른 일을 하는 사람, 좋은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물론, 자녀가 하나님이 택한 대상이며, 성년이 된 후 교회 생활을 하고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자녀가 그런 사람이라면 부모는 마땅히 하나님이 알려 준 원칙대로 미성년 자녀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 아이가 하나님을 믿을지, 하나님이 택한 대상인지 모르겠다고 해도 최소한 미성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다해야 한다. 네가 모르는 것, 밝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어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 최대한 부모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네가 알고 있는 긍정적인 사상과 사물을 자녀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적어도 아이의 심적 성장이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고, 건강하고 깨끗한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부모의 기대와 양성, 또는 압박 속에서 각종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게 해서는 안 된다. 심각한 경우, 어떤 부모는 자녀와 함께 각종 문예 대회, 지식 대결, 기술 경기에 참가하며, 사회의 각종 트렌드를 따라 기자 회견이니 사인회니 세미나니 무슨 대회니 시상식이니 하는 등에 참석하기도 한다. 부모라면 최소한 자녀가 자신과 함께 이런 일을 하지는 말게 해야 한다. 만약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이런 일을 한다면 이는 분명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대놓고 자녀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이끄는 것이며, 자녀의 마음이 좋은 방향으로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이런 부모는 자녀를 어디로 이끌겠느냐? 사악한 흐름 속으로 이끈다. 이는 부모가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이 밖에, 부모는 자녀가 장차 걷게 될 길이나 종사하게 될 직업에 대해 “저 피아니스트를 좀 봐. 저 사람은 네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대. 놀지도 않았고, 친구도 장난감도 없이 매일 피아노만 연습했다지. 부모가 피아노 수업에 데려가고, 선생님들을 찾아 주고, 온갖 피아노 대회에 참가시켰대. 봐 봐, 얼마나 성공했니. 생계 걱정도 없는 데다가 어디를 가든 환영받고 존중받잖아.”라는 말 따위를 주입해서는 안 된다. 이런 교육이 자녀를 심적으로 건강하게 성장시키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어떤 교육이겠느냐? 마귀식 교육이다. 어린 마음에 이런 교육은 일종의 학대이다. 이런 교육은 아이가 명인이나 각종 영광, 명예, 지위, 누림을 동경하게 하고, 어릴 때부터 그런 것들을 지향하고 추구하게 하며, 그것을 위해 초조해하고 속 끓이고 걱정하고 심지어는 온갖 대가를 치르게 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하거나 각종 예체능을 배우느라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게 한다. 무엇보다 소중한 어린 시절의 시간을 지불하고 그것을 얻는 것이다. 미성년 자녀는 사악한 흐름이 숭배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력이 없으며, 당연히 분별력도 없다. 그러니 부모는 미성년 자녀의 보호자로서 그 책임을 다하여 아이가 세상의 사악한 흐름에서 비롯된, 모든 부정적인 사물에서 비롯된 갖가지 관점을 분별하고 막아 내게 하는 한편,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고 가르쳐야 한다. 물론, 사람에게는 각자 자기 생각이 있는 법이다. 나이가 어린 일부 자녀의 경우, 부모가 그런 것들을 추구하지 못하게 해도 마음속으로 추구하려고 한다. 자녀의 생각은 자녀의 생각이고 부모는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부모로서 아이의 생각을 규범화해 주는 한편, 그 생각이 올바르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 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 아이가 부모 말을 들을지 안 들을지, 커서 부모가 가르친 대로 하려고 할지는 그 아이에게 달린 일이니 부모는 간섭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요컨대, 자녀가 미성년자일 때 부모에게는 자녀에게 심적으로 건강하고 합리적이며 긍정적인 사상 관점과 인생 목표를 수립해 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는 부모의 책임이다.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자녀를 잘 가르치지 못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되는대로 살아왔어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했고, 옳고 그름도 분별하지 못했죠. 사실 지금도 어떻게 아이를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칠 줄 몰라도 문제 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알고도 실행하지 않고, 늘 자녀가 출세하도록 가르치며 “우리 세대는 끝났습니다. 저는 제 자식들이 저보다 뛰어났으면 좋겠어요.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말도 있잖아요. 대대로 더 나아야죠. 저는 지금 과장까지 올라왔지만, 제 아이는 나중에 시장이나 성장(省長), 나아가 상류 사회에서 고위 공무원이나 대통령은 돼야죠.”라고 말할까 우려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으니 대화를 하지 마라. 우리가 이야기하는 부모의 책임은 긍정적이고 올바른 것, 진리와 관계된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자녀에게 책임을 다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면 처음부터 배우면 된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성인을 가르치는 것은 어렵겠지만,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도 어렵겠느냐? 자기가 배우면서 가르치고, 배운 것을 바로 써먹으면 쉽지 않겠느냐?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쉽다. 특히 자녀의 심적 건강 측면에서 책임을 다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설령 만점은 받지 못할지라도 가르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어리고 철이 없는 자녀에게 직접 TV나 각종 정보의 원천에서 정보를 얻으라고 하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라고 하며,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라고 하면서 교육하지도, 규범화하지도 않는다면 이는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고,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며, 자신의 책임과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자녀에게 책임을 다할 때는 수동적으로 굴어서는 안 된다. 자녀의 심적 건강에 도움이 되는 지식과 학문, 또는 진리와 관계된 기본 원칙을 처음부터 주동적으로 배워 나가야 한다. 이런 것은 다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을 배우는 것이 헛되지는 않다. 배우는 과정에서, 또 자녀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너 자신도 얼마간 수확이 있을 것이다. 자녀의 심적 건강이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너 또한 성인으로서 긍정적인 사상을 접하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긍정적인 사상이나 각종 처신과 일 처리 원칙, 준칙을 참답게, 진지하게 대하면 부지중에 수확을 얻을 것이니 그것은 절대 헛수고가 아니다. 자녀는 남이 아니니 정과 혈연관계에서 출발하여 마땅히 책임을 다해야 한다. 책임을 다했다면, 자녀의 행동이나 태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너 자신은 수확을 얻었을 것이다. 자녀 교육이 어떤 것인지, 자녀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이미 책임을 다했으니 말이다. 자녀가 나중에 어떤 길을 걸을지, 어떤 사람이 될지, 평생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등은 너와 관계없는 일이다. 아이가 성인이 된 후 겪는 인생과 운명에 대해 네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한쪽에서 지켜보는 것뿐 거기에 개입할 의무나 책임조차 없다.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 몇 가지 일을 제때 규범화하고 가르치고 인도하지 않았다가 아이가 성인이 되어 네가 생각지도 못한 언행이나 사상, 행위를 보인다면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에게 항상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가고 석사, 박사도 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를 찾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거야. 그럼 그 후로는 편하게 살 수 있단다.”라고 가르쳤다고 해 보자. 아이는 네 가르침과 격려 속에서, 그리고 네가 주는 갖가지 압박 속에서 네가 만들어 준 궤도대로 살아가고 추구했으며, 네가 바라는 대로 당시 네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너는 하나님을 믿고 일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올바른 사상 관점을 갖게 되었다. 네가 이제 와서 아이에게 그런 것들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면, 그는 도리어 반박할 것이다. “지금 제가 이렇게 하는 건 당신이 바라던 것 아닌가요? 제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가르치셨잖아요? 또 그렇게 요구하셨고요. 그런데 이제는 왜 또 그러지 말라는 거죠? 제 행동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저는 지금 당신이 원하시던 대로 하고 있고, 누리고 있어요. 그러니 기뻐하고 흡족해하고 자랑스러워하셔야죠!”라고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심정이겠느냐? 울어야겠느냐, 웃어야겠느냐?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할 것입니다.)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아이가 어릴 때 네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즐거운 어린 시절을 선사했더라면, 어떤 압박도 주지 않고,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거나 고위 공무원, 부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명리와 지위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했다면, 많은 돈을 벌고 누리며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면 된다고 했다면, 단순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면 족하다고 했다면 어쩌면 하나님을 믿게 된 부모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 그는 더 즐겁게 살아갈 것이며, 그렇게 큰 삶의 스트레스도, 사회로부터 오는 수많은 압박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명리니 뭐니 하는 건 얻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행복하고 평온하고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부터 부모의 거듭된 충동질과 종용, 그리고 압박 속에서 한결같이 지식을 배우고 재물과 명리를 추구해 왔다면, 결국 명리와 지위를 얻고 누리면서 잘살고 돈도 많이 벌겠지만 삶이 무척 피곤할 것이다. 너를 만날 때마다 피폐한 몰골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집이나 부모 곁에 돌아갈 때만 가식의 가면을 벗고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 문밖으로 나가면 다시 가면을 써야 한다. 너는 그의 피폐하고 딱한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프겠지만, 그를 돌아오게 할 힘이 전혀 없으며, 이미 돌이킬 수도 없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네 가르침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스스로 알고 추구한 것이 아니다. 이는 너의 가르침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자식의 그런 얼굴, 그런 생활 상태를 보면 괴롭지 않겠느냐? (괴로울 것입니다.) 하지만 네게는 힘이 없으니 후회와 괴로움만 남을 뿐이다. 너는 아이가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돌아올 수 없다고, 네게는 돌이킬 힘이 전혀 없다고, 이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네가 아이를 망쳤고 네 잘못된 사상 교육과 인도가 아이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후회만 남을 것이다. 자식이 고생하며 이 사악한 사회에 패괴되고 삶에서 비롯된 각종 압박을 견디는 것을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면서도 아무 방법이 없으니 그저 “집에 자주 들르렴. 맛있는 거 해 주마.”라고 말할 뿐이다. 네가 해 준 밥을 먹는다고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그는 이미 사상이 성숙하고 형태를 갖췄으니 손에 들어온 명예와 지위를 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렇게 곧장 나아갈 뿐 돌아올 수는 없다. 이는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그릇되게 지도하고 잘못된 사상을 주입해 야기한 나쁜 결과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미성년일 때, 부모는 마땅히 책임을 다하여 아이의 심적 건강에 도움을 주고, 아이의 사상과 행위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이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네가 “저는 자녀 교육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책임을 다하는 것도 못하겠느냐? 만약 네가 정말 이 세상과 사회를 꿰뚫어 본다면, 명리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꿰뚫어 보고 세상의 명리를 버릴 수 있다면 자기 자식을 보호해야지 미성년 자녀가 사회에서 비롯된 그런 그릇된 사상을 너무 일찍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갈 때, 사회에서 어떤 부자는 자산이 수백억이고, 어떤 부자는 어떤 슈퍼카를 끌며, 어떤 사람은 얼마나 높은 직위에 올랐고 얼마나 많은 돈이 있고 집에 차가 몇 대나 되는지, 또 어떤 것들을 누리는지 등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지금 중학생이야. 그런데 나중에 대학교에 간 후에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어쩌지? 일자리를 못 구해서 으리으리한 집이나 좋은 차를 못 사면 어떡해? 돈이 없으면 어떻게 남들 위에 설 수 있겠어?’ 이렇게 고민하면서 사회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고 호화로운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한다. 자녀가 이런 일들을 어느 정도 의식했을 때는 이미 사회에서 비롯된 각종 정보와 일, 현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어린 마음에 압박감을 느끼고 고민하며, 자신의 미래를 계산하고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모는 이런 상황에서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이를 위로하고 이끌어 주며, 어떻게 그런 일을 올바로 바라보고 처리해야 하는지 이해하게 해 주어야지 어릴 때부터 그런 일에 매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이런 일에서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떻게 해야 자녀에게 이런 일들을 잘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느냐? 요즘 아이들은 사회의 갖가지 일들을 너무 일찍 알게 되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가수나 배우, 축구 선수, 인플루언서, 부자, 수백억 재벌, 억대 자산가 등이 돈을 얼마나 벌고 뭘 입고 어떤 것을 누리는지, 집에 슈퍼카가 몇 대나 되는지 등을 요즘 아이들은 많이 알고 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이 번잡한 사회 속에서 부모의 책임을 다해 자신의 아이를 지키는 한편, 아이가 심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아이가 이런 일을 알게 될 때, 혹은 건전하지 않은 정보를 듣고 접할 때 부모는 아이가 올바른 사상 관점을 갖도록 지도하고 그런 일에서 바로 빠져나오게 해야 한다. 최소한 아이에게 가장 간단한 이치 하나는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너는 지금 아직 어리잖니. 네 나이 때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는 거야.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 돈을 얼마나 벌지, 뭘 살지 등은 신경 쓸 필요 없단다. 그건 어른이 된 다음의 일이니까.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고, 선생님이 맡긴 일을 잘해 내고, 네 생활 속의 일들을 착실하게 하면 그만이야. 너무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그런 일들은 나중에 사회에 진출해서 접하게 됐을 때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까 말이야. 지금 사회의 그런 일들은 다 어른들 일이야. 너는 미성년자니까 그런 일은 생각하지도, 참여하지도 말아야 해. 지금은 그냥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 말을 잘 듣기만 하렴. 부모는 어른이니까 너보다 아는 게 많잖니. 그러니까 부모 말을 듣고 따라야지. 사회의 그런 일들을 알고 네가 모방하고 좇게 되면 학업과 공부에 도움이 안 돼. 공부에 지장을 주게 되겠지. 네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든, 어떤 일에 종사하든 그건 나중 일이란다. 지금 네 의무는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학업을 마칠 수 없고, 좋은 아이가 될 수 없어. 그러니 다른 일은 생각하지 말렴. 다른 일은 다 너와 관계가 없으니까. 어른이 되면 어떤 일은 자연히 알게 된단다.” 이는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이치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녀에게 “지금 네 의무는 먹고 마시며 노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거야. 공부하지 않는다면 허송세월을 하게 되고, 학업을 망치게 돼. 사회의 그런 먹고 마시며 노는 화려한 것들은 다 어른들의 일이란다. 미성년자는 그런 일을 하면 안 돼.”라고 알려 주어라. 아이가 이런 말을 들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아이가 이런 일을 알아 가거나 부러워할 권리를 박탈하지 않으며, 이와 동시에 아이에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 이런 식의 자녀 교육이 좋지 않으냐? (좋습니다.)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부모는 이렇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능력과 조건, 자질에 따라 최대한도로 미성년 자녀를 교육하고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자녀에게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온 힘을 다해서 말이다. 이는 엄격하지도, 가혹하지도 않은 기준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 사람마다 가정 조건이나 자질이 다르기 때문에 자녀 교육에 책임을 다하는 데는 각자의 방법이 있다. 효과가 좋고 성과가 나는 방향으로 행하되 자녀의 성격이나 나이, 성별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처해라. 어떤 경우는 엄하게, 어떤 경우는 완곡하게, 어떤 경우는 강하게, 어떤 경우는 부드럽게 대할 필요가 있다. 이는 부모가 자녀의 상황에 맞춰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어쨌든, 소기의 성과는 자녀의 심적 건강을 지켜 주고, 자녀가 사상적으로나 행위 기준에서나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인성에 어긋나거나 성장 법칙에 위배되는 일, 아이의 자질이나 연령대에서 할 수 없는 일을 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부모가 이렇게 한다면 책임을 다한 것이다. 쉬운 일 아니겠느냐? 이는 복잡한 일이 아니다.

자식 세대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한 가지는 미성년 자녀에 대한 기대이고 또 한 가지는 성인 자녀에 대한 기대이다. 성인 자녀에 대한 기대에 관해서는 지난 시간에 간단히 교제한 바 있다. 어떤 내용을 교제했느냐? (하나님, 지난번에는 부모가 성인이 된 자녀에게 순조로운 직장 생활을 하고, 행복하고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하며, 사업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를 바란다는 내용에 관해 교제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을 간략하게 교제하였다. 부모가 자녀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면, 성인이 된 자녀는 일이나 사업, 결혼, 가정, 그리고 자신의 독립적인 삶, 나아가 다음 세대에 대한 양육 등을 직면하게 된다. 또 그들은 부모를 떠나 독립하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마주해야 한다. 자녀가 성인이 되었기에 부모도 그들의 신체 건강을 돌봐 주거나 그들의 삶, 일, 결혼, 가정 등에 개입할 책임이 없다. 물론, 정과 가족애에서 출발하여 형식적으로 돌봐 주거나 조언을 해 주거나 인생 선배로서 의견과 도움을 주거나 잠시 필요한 보살핌을 제공해 줄 수도 있다. 요컨대, 자녀가 성인이 되면 부모는 기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내 눈에는 성인 자녀에게 거는 부모의 기대가 쓸데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째서 쓸데없는 것이겠느냐?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든, 어떤 결혼을 하고 어떤 가정을 꾸리고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사업을 하기를 바라든, 자식의 삶이 풍족하든 궁핍하든, 부모의 기대가 과연 무엇이든 그것은 그저 일종의 기대일 뿐, 자녀는 성인으로서 자기 삶은 스스로 꾸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근원적으로 볼 때, 자녀가 어떤 운명을 지닐지, 궁핍할지 부유할지 등은 전부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부모는 그런 일을 돌볼 책임도, 의무도 없으며, 개입할 권리도 없다. 그러므로 부모의 기대 또한 가족으로서 갖는 좋은 바람에 불과할 뿐이다. 그 좋은 바람은 부모의 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식이 가난하고 평생 혼자 살거나 이혼하거나 가정이 파탄 나거나 직업적으로 안 풀리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아무도 그렇게 기대하지는 않으며, 기대를 하려면 반드시 좋은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약 부모의 기대가 자녀의 현재 삶과 충돌한다면, 또는 자녀의 현재 삶이 부모의 기대에 어긋난다면 부모는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제할 문제이다. 부모로서 성인 자녀에게 지녀야 할 태도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축복하고,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밖에 자녀가 어떤 삶을 살지, 어떤 인생과 운명을 맞이할지 등은 그저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어떤 부모도 이 모든 것을 바꿔 놓거나 주관할 수 없다. 비록 네가 낳고 키운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예전에 말했듯이 부모는 자녀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부모는 자녀의 육을 낳아 주고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 주었지만, 자녀가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는 부모가 선사해 주거나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부모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자식이 잘되게 해 주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잘되겠느냐? 자식이 역경이나 불운을 맞이하거나 갖가지 나쁜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서 그런 나쁜 일을 겪지 않겠느냐? 자식에게 어떤 일이 닥치든 그것은 사람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필요와 기대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은 무엇을 알려 주느냐? 자녀가 장성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있고, 독립적인 사상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 독립적인 처신의 원칙과 인생관을 지녀 부모에게 영향받거나 좌우되지 않고, 속박받거나 통제받지 않게 된 이상, 그는 정말 성인이 된 것이다.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부모가 손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을 놓는다’는 말은 자식이 독립적으로 나가서 경험을 쌓게 하고 자신의 인생길을 걷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느냐? ‘한쪽으로 비켜서는 것’이다. 즉, 자녀에게 더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일을 찾아야지. 이런 직업에 종사해야 해. 그렇게 하면 안 돼. 그건 리스크가 너무 커!”라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늘 자녀의 삶이나 일, 결혼, 가정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기 시야 안에 두려 하며, 모르는 일이나 통제 불가능한 일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두려워하고 걱정한다. ‘우리 아들이 그 일을 꼼꼼히 처리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소송에 휘말리는 것 아닐까? 소송을 하게 된다면 나한테 돈도 없는데! 돈도 없이 송사를 치렀다가 아들이 감옥에 가지는 않을까? 나쁜 사람에게 모함을 당해서 8~10년간 수감되는 건 아닐까? 감옥이라도 가게 되면 며느리가 도망가지는 않을까? 손주는 누가 키우지?’라며 생각이 점점 많아진다. ‘우리 딸은 직장 생활이 순조롭지 못해. 항상 괴롭힘을 당하지. 만약 상사가 못되게 굴면 어떡하지? 다른 일자리를 찾아 줘야 하는 것 아닐까? 뒤로 손을 좀 쓰고 인맥을 이용하고 돈이라도 좀 써서 정부 부처의 일자리를 찾아 주어 공무원이 되면 날마다 업무도 수월할 거야. 월급은 많지 않아도 최소한 서러울 일은 없겠지. 어릴 때부터 회초리도 한 번 안 들고 항상 공주처럼 키운 아이가 지금 남한테 괴롭힘을 당하다니, 이를 어째?’ 걱정스러운 마음에 밥도 못 넘기고 잠도 못 자서 입술에는 물집이 생기기까지 한다. 자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걱정하고 마음을 쓰며, 어떤 일이든 개입하고 대신하려 든다. 자녀가 병에 걸리거나 어려움에 부딪히면 부모는 가슴을 졸이며 괴로워한다. “난 네가 잘되길 바랄 뿐인데 어째서 그 모양이니? 나는 네가 잘 풀렸으면 한단다. 하는 일마다 뜻대로 잘 풀려서 출세하길 바라지 재수 없이 사기당하거나 모함당해서 송사에 휘말리는 건 바라지 않아!” 어떤 자녀는 집을 사면서 30년, 50년짜리 대출을 받는데, 부모는 그것을 보며 걱정한다. ‘그 대출은 언제 다 갚지? 그게 바로 하우스푸어 아냐? 우리 세대는 집을 살 때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어. 회사에서 제공하는 공공주택에 살면서 매달 월세나 좀 내면 됐으니까. 정말 편했지. 요즘 젊은 세대는 너무 힘들겠어. 사는 게 쉽지가 않다니까. 집 살 때도 대출을 받아야 하고 말이야. 좋은 집에 살아도 매일 너무 바쁘게 일해야 해서 힘들잖아. 늘 밤새워 가며 야근하고, 제때 먹고 자지도 못하고. 항상 파는 음식만 먹으니 위가 망가지고 몸도 엉망이 되지. 내가 가서 밥이라도 해 주고 청소나 설거지라도 좀 해 줘야겠어. 청소할 시간도 없어서 애들 생활이 엉망이 되잖아. 이 어미는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가정부 역할이라도 해 줘야지. 가정부를 들이려면 돈을 써야 하고, 또 믿을 만한 사람 찾기도 힘들잖아. 내가 무보수로 가정부가 되어 줘야겠어.’ 그렇게 식모가 되어 매일 자식을 위해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때맞춰 밥을 해 놓으며, 각종 식자재를 사 놓는 등 책임을 계속 이어간다. 식모나 하인이 된 부모는 집에 돌아온 자식이 기분이 좋지 않으면 눈치 보며 말을 해야 하고 자식이 기분이 좋으면 덩달아 자기도 좋아한다. 자녀가 좋아하면 자기도 좋아하고 자녀가 걱정하면 자기도 걱정하는 이런 삶이 가치가 있겠느냐? 이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운명을 책임져 주고 싶다고 한들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자녀가 명리와 세상의 향락을 추구하면서 어떤 고생을 하든 그것은 다 그들 스스로가 원한 것이다. 게다가 다 큰 성인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떤 고생을 한들 뭐가 문제겠느냐? 누리는 만큼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면, 자녀가 무엇을 누리고 싶어 하든 부모가 대신 지불해 주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이 잘되길 바란다고 해도 자식이 좋은 것을 누리고 싶다면 그 모든 스트레스와 고통은 자식 스스로 견뎌야지 부모가 그것을 짊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부모가 늘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고 싶어 하고, 자녀가 받는 고통을 대신해 주려고 하며, 기꺼이 그들의 노예가 되려고 한다면 이는 불필요한 것 아니겠느냐? 그럴 필요는 없다. 이는 이미 부모의 의무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주요 원인은, 네가 자녀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하든 그들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도 없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생존하면서 명리를 추구하든, 인생의 바른길을 걷든 누구나 성인으로서 자신의 바람과 이상을 스스로 책임지고 감당해야지 다른 누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설령 부모라고 할지라도, 너를 낳아 주고 길러 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너를 위해 감당해 줄 의무가 없고, 어떤 고통도 분담해 줄 의무가 없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아무것도 바꿔 놓을 수 없기에 자녀를 위해 아무리 많은 일을 할지라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헛일이니 그런 행동 방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비록 부모가 늙고, 이미 자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 해도, 부모가 행한 모든 일이 자녀의 눈에는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해도 부모에게는 부모로서의 존엄성이 있어야 하고 자신만의 추구와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너는 여생의 에너지와 세월을 네가 이행하는 본분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에 쏟아부어야지 자녀를 위해 시간과 세월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네 생명은 자녀에게 속하지 않으며, 자녀의 삶이나 생존을 위해서, 자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모해서도 안 된다. 네 생명은 하나님이 맡긴 본분과 부탁, 그리고 너라는 피조물이 완수해야 할 사명에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네 생명이 지닌 가치이자 의미이다. 만약 네가 자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꺼이 존엄을 내팽개치고 자녀의 노예가 되어 자녀를 걱정하고 무슨 일이든 해 준다면 이는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이며, 하나님께 기억될 수도 없다. 한결같이 이렇게 하면서 이런 생각과 행동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너라는 사람은 더없이 패역하고, 하나님이 준 생명과 세월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만약 네 생명과 세월을 하나님이 준 본분에 쏟지 않고 오직 네 육과 감정을 위해 쏟는다면 너라는 사람은 살아갈 필요가 없으며, 그 삶은 가치가 없으니 너는 살아갈 자격도, 하나님이 준 생명을 누릴 자격도, 하나님이 베풀어 준 모든 것을 누릴 자격도 없다. 하나님이 네게 자녀를 준 것은 자녀를 키우는 과정을 즐기며, 그 가운데서 부모로서 자녀를 키우는 인생 경험과 체험을 얻으라는 것이고, 인생에서 특수하고 평범치 않은 경험을 느끼는 한편 대를 이어 나가라는 것이다. 물론, 부모의 신분으로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네게 정해 놓은,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이자 부모로서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역할이다. 이는 자녀를 키우는 특별한 과정을 체험하는 한편, 후손을 번성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의무를 다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었다면 그들이 출세하든, 평범하고 단순한 일반인이 되든 너와는 무관하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지 네가 결정하는 것도, 네가 선택하는 것도, 나아가 네가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라면 너는 자녀의 삶과 생존에 관여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어떤 생활 습관과 생활 규칙, 생활 태도를 갖고 있든, 어떤 생존 방식과 인생관, 세상에 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든 그것은 그들 자신의 선택이지 너와는 무관하다. 네게는 그것을 바로잡거나 자녀 대신 고통을 받거나 자녀가 매일 행복하게 살도록 지켜 줄 의무가 없다. 그런 것은 다 불필요한 행동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므로 평생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릴지, 어떤 가정과 결혼, 자녀를 갖게 될지, 이 사회와 인생 속에서 어떤 일들을 겪을지 자녀 스스로도 예측하거나 바꿀 수 없으며, 부모는 더더욱 바꿀 능력이 없다. 그러니 자녀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부모가 도와줄 능력이 있다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입장에서 도와주되, 그럴 능력이 없다면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고 피조물의 입장에서 그 일을 대하고, 자녀를 자신과 같은 선상에 있는 피조물로 대하는 것이 좋다. 네가 겪은 고난과 인생을 그들도 겪어야 하고, 네가 미성년 자녀를 양육한 과정을 그들도 겪어야 한다. 또 네가 사회와 사람들 사이에서 겪은 갖가지 우여곡절, 사기와 기만, 감정적 갈등, 인간사의 갈등 등을 그들도 겪어야 한다. 자녀 또한 너처럼 패괴된 인간이며, 이 사악한 흐름에 휩쓸리고, 사탄에게 패괴되었다. 네가 그러하듯 자녀 역시 거기에서 벗어날 힘이 없다. 그러므로 자녀가 어떤 고난도 겪지 않고 세상의 모든 복을 누리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것은 허황된 망상이자 어리석은 생각이다. 매의 날개가 아무리 커도 새끼 매를 평생 지켜 줄 수는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새끼 매가 홀로 날아가야 할 때가 온다. 새끼 매가 홀로 날아갈 때, 그것이 날아올라 향하려는 하늘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자녀가 성인이 된 다음, 부모의 가장 이성적인 태도는 손을 놓아 자녀가 스스로 인생을 체험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인생의 각종 문제를 혼자 직면하고 처리하고 해결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자녀가 도움을 청할 때 네가 능력과 조건이 된다면 당연히 손을 뻗어 필요한 도움을 주어도 된다. 하지만 그 전제는, 네가 자녀에게 어떤 도움을 주든, 금전적인 도움이든 정신적인 도움이든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 어떤 실질적인 문제도 바꿔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녀의 인생길은 그들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 너는 자녀 대신 어떤 일도, 어떤 결과도 책임질 의무가 없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가져야 할 태도이다.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보여야 할 태도에 대해 알았다면, 성인 자녀에게 거는 기대 또한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일부 어리석은 부모들은 인생과 운명을 밝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지 못해 자녀를 대하는 일에서 쉽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예를 들어, 자녀가 독립한 후 특수한 일을 만나거나 고난과 큰 사고가 닥친 경우가 그렇다. 어떤 이는 병으로 고통받고, 어떤 이는 소송에 휘말리며, 어떤 이는 이혼하고, 어떤 이는 사기당한다. 또 어떤 이는 납치당하거나 남에게 해를 입거나 구타당해 죽음에 직면하기도 하며, 심지어 어떤 자녀는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한다. 이렇게 특수하고 큰 사건이 벌어졌을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대다수의 부모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부모의 신분을 지닌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하겠느냐? 이런 일을 전해 듣고 남의 일처럼 행동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하룻밤 새에 머리칼이 하얗게 세고,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낮에는 밥을 넘기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 싸맬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하염없이 울어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눈물마저 말라 버린 채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봐서 자기 자식을 지켜 달라고, 아이에게 은총과 축복을 내려 달라고, 빠져나갈 길을 열어 주어 아이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부모로서 인성적인 연약함과 유약함, 그리고 자녀에 대한 정이 전부 드러난다. 또 무엇이 드러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자식에게 어떤 재앙도 닥치지 않게 해 달라고, 설령 재앙이 닥치더라도 그 아이가 죽지 않고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악인에게 해를 입지 않게 해 달라고, 병세가 심해지지 않고 호전되게 해 달라고 구하고 기도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구하는 것이냐? (하나님, 그의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며, 또 원망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 자식에게 그런 일이 닥친 것에 몹시 불만을 품고, 제 자식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게 해야 했다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불만 속에 원망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 후에는 하나님에게 생각을 바꾸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자기 자식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평안해지게 해 달라고 구한다. 병에 걸렸다면 낫고, 소송에 휘말렸다면 그 상황이 마무리되고, 화를 당했다면 화근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즉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롭게 해 달라고 말이다. 이런 기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패역한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담긴 속내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도 좋지도 않으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네 자식이고 너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일이 닥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다른 사람의 자식과는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을 믿는 너를 봐서라도 하나님은 그를 축복해 줘야 한다고 말이다. 또 만약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주지 않는다면 너는 괴로워하고 울고 소란을 피우며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거라고, 그가 죽는다면 너도 못 산다고 말이다. 이런 의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이다. 개처럼 밥때가 되면 밥을 줘야 하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소란을 피우며 밥그릇을 물고 땅바닥에 부딪혀 소리를 내니 말이 안 통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개는 가끔 야성이 튀어나온다. 며칠 동안 고기를 먹이다가 하루 고기를 주지 않으면, 먹이를 바닥에 엎거나 밥그릇을 문 채 땅바닥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 그 뜻은 고기를 먹고 싶으며, 고기를 먹는 건 당연한 일이고, 고기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도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자녀에게 일이 좀 생겼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요구하며 항의하니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짐승은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사람이 말하는 소위 이치나 인정 같은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짐승이 억지를 부리고 소란을 피우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에게 그렇게 항의한다면 이성이 있겠느냐? 이런 자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만약 짐승이 그런다면 사람은 “이 녀석, 성깔 좀 있네. 항의할 줄도 알고 꽤 똑똑하단 말이야. 아무래도 이 녀석을 얕보면 안 될 것 같아.”라고 말하며 재미있다고, 단순하지 않은 녀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동물이 성깔을 부리면 사람은 그 동물을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에게 항의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높게 평가하겠느냐? “이 녀석, 이런 요구도 할 줄 알고, 대단하네!”라고 하면서 높이 평가하겠느냐? (그러시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이는 패역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사람이 모르겠느냐? “한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온 가족이 복을 받는다.”라고 말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왜 아직도 그렇게 금식 기도를 하고, 뻔뻔스럽게도 네 자식을 지키고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이냐? 또 감히 하나님에게 항의하고 겨루며,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계속 금식하고 기도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금식의 의미는 무엇이냐? 단식이다. 단식의 또 다른 뜻은 생떼를 쓰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생떼를 쓸 때는 발을 구르면서 “아이고, 내 자식이 죽으면 나도 안 살 거야. 살아갈 수가 없다고!”라고 말한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지는 않고 더없이 우아하게 “하나님, 제 아이를 지켜 주시고 그 아이의 병이 낫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당신은 사람을 구하는 최고의 의사이시며,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를 돌보고 지켜 주십시오. 당신의 영은 어디에나 존재하지요. 당신은 공의로운 분,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당신은 사람을 걱정하고 아끼십니다.”라고 말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겠느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럴 때 해야 할 말도 아니다. 네 뜻은, 만약 하나님이 네 자식을 구하거나 지켜 주지 않고 네 소원대로 해 주지 않는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 아니며, 사랑이 없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이는 생떼를 쓰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생떼를 쓰는 사람이 하나님을 크게 높이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생떼를 쓰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며,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하나님에게 감히 이렇게 따지고 항의하며 횡포를 부리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 아이가 뭐가 그리 특별하냐? 하나님이 누구의 운명을 지배하고 주재하든 너와 관계가 없으면 괜찮고, 네 아이의 운명을 주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 하나님이 보기에,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주재 아래 있으며, 누구도 하나님 손의 주재와 안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왜 네 아이만 예외란 말이냐? 하나님의 주재에는 그의 정함과 계획이 있다. 네가 바꾸고 싶다고 그게 되겠느냐? (안 됩니다.) 네가 바꾸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그러니 어리석은 일이나 비이성적인 일을 저지르지 마라. 하나님의 행사에는 다 전생의 인과가 있다.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 대항한다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네 자녀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감정일 뿐 정의도, 긍휼도, 선량함도 아니다. 그저 감정의 작용에 불과하다. 감정은 이기적인 마음을 대변한다. 너의 그 알량한 감정은 공개 석상에 내놓을 수 없고, 너 자신도 그것이 사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일로 하나님을 협박하려고 한다. 혹자는 “제 아이가 병에 걸렸습니다. 그 아이가 죽으면 저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네게 정말 죽을 용기가 있느냐? 그럼 어디 한번 죽어 보아라! 이런 사람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겠느냐? 설마 자식이 죽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냐? 자식이 죽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분이나 지위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다. 네가 믿어서 하나님인 것도, 네가 믿지 않아서 하나님이 아닌 것도 아니다. 설령 전 인류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은 바뀌지 않으며, 하나님의 지위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히 전 인류의 운명과 우주 세계를 주재하는 그분이다. 그러니 네가 믿고 안 믿고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네가 믿는다면 특별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기회를 잃고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네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에 대한 정이 있어 내려놓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에게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 그것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아니면 도덕과 인성에 부합하겠느냐? 어떤 측면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도덕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너는 자녀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비호하는 것이며, 감정에 얽매인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자식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한다. 네가 네 생명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대하고 하나님이 네게 준 생명을 아끼지 않으며 자식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하니 그럼 자식과 함께 죽거라. 그가 병에 걸리면 너도 얼른 그 병에 옮아서 함께 죽거나 밧줄로 목을 매 죽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이 쉽지 않겠느냐? 네가 죽은 후에도 너와 네 자식이 한 부류겠느냐? 여전히 혈연관계가 있겠느냐? 여전히 정이 있겠느냐? 다른 세상으로 돌아가면 달라진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눈으로 일을 바라본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어떤 성질인지를 무엇에 근거해 판단하느냐? 사람의 사상에 근거해 판단한다. 오직 눈으로만 일을 바라보면, 이 물질세계를 꿰뚫어 볼 수 없고 영계를 볼 수도 없다. 사람이 머리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세상에서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사람은 나와 가장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사람이지. 언제라도 내 아이는 나와 가장 가까운 거야. 나도 내 아이를 가장 아낄 거고.’ 이 정도의 경지와 구조에 머물러 있으며, 사상적 경지가 이렇게 ‘광활’하다. 그 말이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유치하지 않으냐? (유치합니다.) 너무도 유치하다! 네 자식이 이번 생은 너와 혈연관계가 있다. 그럼 지난 생은 어땠겠느냐? 그때는 너와 어떤 관계였겠느냐? 그는 죽은 후에 어디로 가겠느냐? 그가 죽고 육의 목숨이 끊어져 영혼이 떠나면 너와는 완전히 안녕을 고할 것이고 너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다른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다른 세계로 돌아갈 때, 너 혼자 울고 그리워하며 심적으로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아이고, 우리 아이가 떠났구나.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의식하겠느냐? 그는 너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며, 티끌만큼도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육을 떠난 그는 그 즉시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제삼자가 된다. 그는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저 노인네들이 누구 때문에 저렇게 우는 걸까? 아, 저 육 때문에 우나 보네. 내가 방금 저 육에서 빠져나왔지. 난 이제 그렇게 무겁지 않고, 병으로 고통스럽지도 않아. 해방된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죽은 후 육에서 나와 다른 세계에 가서 계속 생존하고,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니 너와는 관계가 없어진다. 너는 이곳에서 크게 울고 그리워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인연이 닿으면 그는 너의 직장 동료나 동향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네게서 아주 멀리 떨어질 수도 있다. 같은 세상에 있을지라도 서로 상관이 없는 둘이 될 것이다. 설사 누군가가 특수한 상황에서, 혹은 특수한 방법으로 그의 전생을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그를 바라보는 너와 너를 바라보는 그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가 지난 생에 네 자식이었을지라도 너는 그에게 아무 감정이 없으며, 네가 그리워하는 것은 죽은 그 아이일 뿐이다. 그 역시 너에게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다른 부모와 가정, 성씨가 있고, 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그곳에서 그리워한다.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이냐? 한때 너와 혈연관계가 있던 그 육, 그 이름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네 머릿속에, 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하나의 장면이나 형체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가치는 없다. 그는 다시 태어나 사람이 되든, 아니면 다른 생명체가 되든 너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부모들이 “아이가 죽으면 저도 못 삽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다! 그의 수명이 끝났는데, 네가 무엇 때문에 못 산다는 것이냐? 어찌 그리 무책임한 말을 한단 말이냐? 그의 수명이 다 됐기에 하나님이 그의 목숨을 거둔 것이다. 그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만약 네게 또 다른 임무가 있다면 하나님이 네 목숨을 거두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너는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가게 한 이상 너는 죽을 수 없다. 부모에게든, 자식에게든 혹은 주변의 어떤 가족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든 사람은 감정을 이렇게 생각하고 인식해야 한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 혈연으로 얽혀 있다고 한다면,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다.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어떤 의무도 없고, 무언가 변화시킬 능력도 없다. 그러니 ‘자식이 죽어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낸다면 그 부모도 못 산다’는 부모의 말은 무책임하다. 만약 정말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간다면, 그것은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날이 그만큼이어서 가야 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모는 죽지 않았으니 잘 살아가야 한다. 물론, 인성 측면에서 자식을 그리워하는 것은 정상이다. 하지만 남은 세월을 전부 가 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데 허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일을 대할 때,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명에 책임을 져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혈연관계에 대해 밝히 알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진정한 관계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생명체와 다른 생명체 사이의 관계이다. 그 관계는 육적으로도 혈연으로도 얽혀 있지 않다. 그저 독립된 두 생명체일 뿐이다. 이런 각도에서 생각한다면, 부모 입장에서 자식에게 불행히 병고가 임해도, 혹은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그런 일을 올바로 마주해야지 자식의 불행이나 죽음 때문에 자신에게 남은 생존의 시간을 버려서는 안 되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나 완수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버려서도 안 된다. 이 일은 올바로 마주해야 한다. 네게 올바른 사상 관점이 있고, 이 일을 밝히 알 수 있다면 절망과 비통, 그리움 속에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밝히 알지 못한다면 어떻겠느냐? 그 일은 죽을 때까지 네 남은 생을 옭아맬 것이다. 하지만 네가 밝히 안다면, 그 시간은 무한한 게 아니라 끝이 있을 것이며, 네 남은 생과 내내 함께하지는 않을 것이다. 밝히 알 수 있다면 일부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너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네가 자식과의 혈연관계를 밝히 알지 못한다면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는 너에게 잔인한 일이 될 것이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부모는 없다. 어떤 부모든 자식을 먼저 보낼 때, 혹은 자식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남은 인생의 에너지를 쏟아 그리워하고 걱정하고 고통에 빠질 것이다. 아무도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마음에 새겨지는 상처이자 낙인이다. 육으로 사는 사람은 이런 감정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기에 그로 인해 고통받게 된다. 하지만 네가 자녀와의 감정을 밝히 알 수 있다면, 그것은 한결 옅어질 것이며, 자연히 네 고통도 한결 줄어들 것이다. 전혀 고통스럽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많이 줄어들 것이다. 밝히 알지 못한다면 그 일은 네게 잔인한 것이 되겠지만, 밝히 알게 된다면 그 일은 네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 특수한 체험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네가 인생과 혈육의 정, 인성을 더 깊이 체험하고 이해하게 할 것이며, 또 네 인생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물론, 누구도 이 풍부한 경험을 바라거나 마주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만약 그런 일이 닥친다면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잔인하게 구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네가 기존에 지니고 있던 그 전통적이고 진부하고 잘못된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감정과 혈연관계를 올바로 직면하며, 자녀의 죽음을 똑바로 대해야 한다. 이 일을 밝히 알게 된다면 완전히 내려놓게 될 것이고, 그 일로 손상을 입지 않게 될 것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베풀어 주신 자산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사유 재산인 거죠.” 이 말이 맞느냐? (틀립니다.) 어떤 부모는 이 말을 듣고 “그건 맞는 말입니다. 다른 재산은 전부 자기 것이 아니어도 자식만은 자기 피붙이이니 가장 가까운 존재죠.”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틀립니다.) 어디가 틀렸느냐? 너희의 이치를 말해 보아라. 사람이 자식을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여기는 것이 적절하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적절하지 않으냐? (사유 재산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하는 물건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육적인 관계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결을 주신 거죠. 만약 자식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 부모인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서 있는 위치와 입장이 잘못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조금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 육적인 관계를 제외하면 자식과 부모의 생명은 독립되어 있다. 그들 간에는 종속 관계도, 상하 관계도 없으며, 당연히 소유와 피소유의 관계는 더더욱 없다. 그들 각자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그들 각자의 운명 역시 하나님이 주재한다. 그저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며 자식보다 나이가 많고, 자식은 부모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다. 사람은 이런 관계, 이 표면적인 현상에 근거하여 자녀를 부모의 부속품이나 사유 재산으로 여긴다. 이는 근원적으로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육적으로, 감정적으로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 논법과 입장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부속품도, 사유 재산도 아닌 독립된 개체인 이상,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어떤 기대를 걸든 그것은 생각에만 머무를 뿐 현실이 될 수는 없다. 물론,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현실화하거나 약속을 지키거나 대가를 치르거나 희생해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성인 자녀가 독립적인 삶과 생활 능력을 갖게 되면, 내려놓기를 택해야 한다.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식을 존중하는 것이고, 진정으로 자식에게 책임감을 보이는 것이다. 늘 자녀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통제하거나 자녀의 삶과 생존에 간섭하고 관여하려고 한다면, 이는 무지하고 비이성적이며 유치한 행동 방식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든 그것은 아무것도 바꿔 놓을 수 없고, 현실이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부모라면 그 모든 현실적, 비현실적 기대를 내려놓고 올바른 시선과 입장으로 자녀와의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 올바른 시선과 입장으로 성인 자녀가 행하는 모든 일, 또는 그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을 대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원칙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 적절하지 않으냐? (적절합니다.) 네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이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반면, 이렇게 하지 못하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서 혈육 간의 정이 가장 크고 중요하다고, 그 정은 하늘보다 크다고 여긴다면, 마치 네가 자녀의 운명을 주관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군다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두고 보아라. 분명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성인 자녀에게 이런 기대를 거는 것 외에 세상의 모든 부모가 공통적으로 하는 요구가 있다. 바로 자식들이 부모에게 잘하고 효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특정 민족이나 지역인들은 자녀에게 더 구체적인 요구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외에도 부모가 죽을 때까지 모셔야 하고,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부모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부모가 자식 세대에게 거는 기대 중 마지막 한 가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부모가 자녀를 낳아 키우는 초심 중 하나이자 자녀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철없는 어린아이일 때부터 이런 질문을 한다. “나중에 커서 돈을 벌면 누구한테 쓸 거니? 엄마, 아빠한테 쓸 거야?” “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쓸 거야?” “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한테도?” “네.” 그 아이가 전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야겠느냐? 부모도 부양해야 하고, 조부모도, 외조부모도 부양해야 하고, 고모며 이모 등등까지 다 부양해야 한다. 그 아이의 부담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는 불운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아이는 아직 어려 자기가 대체 어떤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는 한 가지 현실을 보여 준다. 즉,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데는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은 그렇게 순수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는 요구하기 시작하며, 늘 탐색하면서 물어본다. “나중에 크면 엄마, 아빠 모실 거야?” “네.” “할머니, 할아버지도?” “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네.” “누구한테 제일 잘해 줄 거야?” “엄마한테요.” 그럼 아빠는 질투한다. “그럼 아빠는?” “아빠한테 제일 잘해 줄 거예요.” 이제는 또 엄마가 질투한다. “도대체 누구한테 제일 잘해 준다는 거야?” “엄마, 아빠한테요.” 부모는 그제야 만족한다. 아이가 처음 말을 하게 된 순간부터 부모는 아이가 나중에 효도하고 부모에게 잘하게 하려고 애쓴다. 아이가 아직 말도 잘 못하고 철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대답 속에서 약속을 받아 내려고 하고, 아이에게서 미래를 보려고 하며, 자기가 키운 아이가 배은망덕하지 않고 효심 있는 자식이기를, 부모에게 책임감을 갖는 자식이기를 바라고, 나아가 부모의 기대를 충족해 주고 부모를 부양하는 자식이기를 바란다. 이 질문은 자녀가 어릴 때부터 시작되지만, 단순한 질문은 아니다. 이는 100% 자식에 대한 부모 마음 깊은 곳의 요구이자 기대이며, 또한 더없이 실질적인 기대이자 요구이다. 그래서 자식이 사리 분별을 하는 순간부터 자식에게 부모가 아플 때 안부를 묻고 침상 곁에서 돌보며 함께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물 한 잔 따라 주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혹은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고 해도 부모는 최소한 자식이 그 정도의 효심은 갖기를 바란다. 또한, 부모는 아이가 어릴 때 그런 효심을 보기를 바라며, 수시로 그것을 검증한다. 예를 들어, 부모의 몸이 안 좋을 때, 혹은 일 때문에 지쳤을 때 자식이 부모에게 물을 따라 주거나 신발을 가져다주거나 빨래를 해 주거나 간단한 식사를 챙겨 주는지—설령 그것이 계란 볶음밥에 불과할지라도—, 또는 “피곤하세요? 피곤하시면 밥은 제가 할게요.”라고 말하는지 지켜본다. 어떤 부모는 공휴일에 밖에 나갔다가 밥때가 되었을 때 일부러 밥을 하러 집에 들어가지 않고 아이가 커서 철이 들었는지, 부모에게 밥을 차려 줄 줄 아는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 마음을 헤아려 줄 줄 아는지, 부모의 어려움을 분담해 줄 수 있는지, 머리 검은 짐승은 아닌지, 헛되이 키운 것은 아닌지 지켜본다. 부모는 아이가 크는 동안, 심지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이런 것을 테스트하고 알아보며, 동시에 계속 요구한다. “머리 검은 짐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엄마, 아빠가 너를 왜 키웠겠니? 나중에 엄마, 아빠를 모시라고 그런 거야. 너를 그냥 키웠겠어? 그러니 엄마, 아빠한테 불효해서는 안 된다. 엄마, 아빠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는지 이해하고 알아야 해.” 특히 어떤 아이들은 소위 사춘기, 그러니까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는 과도기에 철이 덜 들고 사리 분별이 안 되어 수시로 부모에게 대들고 또 말썽까지 일으키는데, 그럼 부모는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잔소리한다. “네가 어릴 때 너를 키우느라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그런데 이런 인간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구나. 효심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데다가 집안일을 하기를 하나, 엄마, 아빠의 어려움을 분담해 주기를 하나.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지. 불효막심한 것, 너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부모는 자녀가 학업이나 생활 면에서 말을 듣지 않고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 외에도 자녀에게서 미래를 볼 수 없을 때, 또는 자녀가 장차 불효자가 되어 부모를 이해해 주거나 사랑하거나 마음에 두지 않을 것 같을 때 화를 낸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모에게 효도할 줄 모를까 봐 화를 내는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 그런 아이는 기대를 걸 수가 없으며, 머리 검은 짐승, 불효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무척 속상해하며,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대가를 치른 것이 다 헛되었다고,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고,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후회하며,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불안해하고 속상해한다. 하지만 자기가 지난날 쏟아부은 것들을 되돌려받지는 못한다. 되돌려받지 못할수록 더욱 후회하고, 자식에게 효도하라고 요구하고 싶어진다. “부모한테 효도 좀 할래? 철 좀 들라고. 네가 어른이 되면 기대를 걸어도 되겠니?”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자식이 돈을 가져다주고, 부모가 고기나 다른 맛있는 것, 보양식을 먹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식이 가져오는 등 부모를 많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이 아무리 바쁘고 가정에 대한 책임이 아무리 막중해도 마음속으로는 늘 부모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는 ‘아이고, 우리 아이는 기대를 저버리질 않는다니까. 드디어 어른이 되었구나. 아이를 키우느라 쏟아부은 돈과 정력이 헛되지 않았어. 보답받게 되었으니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식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모는 효도니 불효니 하는 말로 판단하고, 자식이 불효자라고, 기대할 수 없다고, 머리 검은 짐승이고 헛키웠다고 결론을 내린다.

어떤 자녀는 부모가 가끔 일 때문에 정신이 없거나 외부에서 일을 처리해야 해서 좀 늦게 돌아올 때, 집에서 혼자 밥을 해 먹고 부모 몫은 남겨놓지 않는다. 젊은이는 나이가 어려 가끔은 생각이 미치지 못했거나 습관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또는 어떤 자는 정말 그런 인성을 지니지 않아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보살펴 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부모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고, 또한 인성 자체가 이기적이라서 혼자만 밥을 해서 먹고 부모 몫은 남겨 놓지 않으며 또 부모를 위해 다시 밥을 해 놓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본 부모는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왜 괴로워하겠느냐? 자식이 효심이 없고 철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싱글맘의 경우, 자식의 그런 모습을 보면 더욱 괴로워하며 울고불고하기 시작한다. “너를 그 나이까지 키우는 게 쉬웠을 것 같니? 나 혼자 엄마, 아빠 역할 다 하면서 너를 지금까지 키웠어. 그런데 엄마가 일하느라 녹초가 돼서 집에 들어왔는데도 엄마 밥조차 챙겨 주지 않는구나. 흰죽 한 그릇이라도, 식은 밥이라도 챙겨 주는 게 성의잖아. 나이가 몇인데 그 정도도 모르는 거야!” 그는 그런 걸 몰랐고 적절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하지만 네가 그에게 그런 기대를 걸지 않았다면 화가 나겠느냐? 이 일을 따지겠느냐? 이 일을 효심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여기겠느냐? 그가 밥을 해 놓지 않았다면 네가 스스로 해 먹으면 된다. 만약 자식이 없다면 그래도 잘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가 효도하지 않는다면 그를 낳지 않았을 것이냐? 그가 정말 평생 너를 생각해 주거나 보살펴 줄 줄 모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올바르게 대할 것이냐, 아니면 이 일을 두고 화내고 괴로워하고 후회하고 맨날 그와 말다툼할 것이냐? 어떻게 해야 옳겠느냐? (올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곱씹어 말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식을 절대 낳지 마세요. 원래 아이를 낳을 때마다 후회가 하나씩 늘어나는 법이잖아요. 아이를 낳는 건 좋을 게 없어요.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렇고요. 다 키워 놓으면 머리 검은 짐승이 된다니까요! 다른 사람한테 기대를 걸 게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잘해 줘야 해요. 아무한테도 기대를 걸 수 없다고요! 다들 자식에게 기대를 걸겠다고 하는데, 어떤 기대를 건단 말입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를 걸면 또 모르겠지만요. 자식한테 백번 잘해 줘도 자식이 부모에게 어떻게 대합니까? 한 번만 잘해 줘도 엄청 체면치레를 한 거고, 할 만큼 했다고 할 수 있죠.” 이 말이 옳으냐? 이는 사회에 존재하는 하나의 주장이자 사상 관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들 자식을 키워서 노후 대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밥 한 끼 제대로 차려 주지도 못하는 자식을 키워서 노후 대비를 한다니요. 기대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는데, 이는 어떤 말이냐? 푸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푸념은 어떻게 생겨났느냐?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치가 너무 높은 것 아니겠느냐? 이는 자식에게 요구 기준이 있는 것이다. 너는 자식에게 성인이 되면 반드시 효도하고 부모 마음을 헤아리며 부모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고, 어떻게 하는 게 효도하는 거라고, 그것이야말로 자식이 해야 할 일이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네가 이런 요구를 하고, 이런 기준을 갖게 되면, 자식이 어떻게 하든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 네 마음은 불만으로 가득 찰 것이며, 원망으로 점철될 것이다. 자식이 어떻게 하든 너는 그를 낳은 것을 후회하고, 밑지는 장사를 한 것 같고 보답받지 못하는 것 같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자녀를 키우는 목적이 잘못되어 초래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은 옳지 않으며, 애당초 자녀를 키우는 목적도 분명 잘못된 것이다. 자녀를 키우는 것은 그 자체로 인류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처음에는 인류의 본능이었고, 그다음에는 인류의 의무이자 책임이었다. 자식은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모셔야 한다든가, 부모가 효도를 받아야만 자식을 낳을 거라든가 하는 생각은 없었다. 이런 목적은 출발점부터 불순하다. 그래서 결국 “아이고, 절대 자식을 낳지 마세요.”라는 그릇된 사상 관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목적이 불순하니 그에게 생겨난 사상 관점도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바로잡아야 하고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내려놓고 어떻게 바로잡아야겠느냐? 어떤 목적이 순수하고 올바른 것이겠느냐? 어떤 사상 관점이 옳은 것이겠느냐? 그러니까 자식과의 관계를 어떻게 수립해야 옳겠느냐? 먼저,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네가 선택하고 원한 것이다. 자식들은 수동적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대를 잇는 임무와 책임,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바를 제외하고 부모 입장에서 주관적인 원인과 출발점은 자식을 낳길 원한 것이다. 네가 자식을 낳기를 원했으니 마땅히 그 아이를 부양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 독립시켜야 한다. 너는 자식을 낳아 기르기를 원했으며, 자식을 키우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것을 얻고 큰 이익을 보았다. 먼저, 너는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시간을 누렸고, 또 자녀를 키우는 과정을 누렸다. 비록 그 과정에 세상의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고 할지라도 네가 자녀 곁에 있어 주고, 자녀가 네 곁에 있어 줌으로써 느끼는 행복이 더 컸을 것이다. 이는 한 인성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너는 이러한 것들을 누렸고, 이미 자녀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 그렇지 않으냐? 자녀는 부모에게 함께하는 시간과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부모가 대가와 시간, 에너지를 지불함으로써 작디작은 생명이 점차 커서 성인이 되는 과정, 사리 분별이 안 되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생명체가 조금씩 말을 하고 언어 구성 능력을 갖추고 각종 지식을 배우며 판별 능력을 갖추고 너와 대화하고 소통하며 평등하게 어떤 일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추는 과정을 지켜보게 했다. 부모에게 있어 이는 어떤 일로도 대신할 수 없고 어떤 역할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과정이다.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이미 이런 것들을 누리고 얻었으며, 이는 부모에게 크나큰 위안과 수확이 되었다. 사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너는 이미 자식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얻었다. 자식이 네게 효도할지 말지, 네가 죽기 전에 자식이 네 기대에 부합할지, 자식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너희 사이에 함께 살아갈 인연이 있는지를 봐야 하며, 이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한편, 자녀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갈지, 생활 여건이 어떨지, 너를 부양할 조건이 될지, 경제적으로 여유로울지, 여윳돈이 있어서 네게 물질적인 누림과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역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이 밖에, 주관적인 면에서 부모인 네가 이번 생에 자녀가 주는 물질과 금전 혹은 감정적 위안을 누릴 수 있을지도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사람이 구한다고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살도록 운명적으로 정해 놓았기에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한 채 평생 부모와 붙어산다. 네가 때려도 그는 떠나지 않는다. 반면, 어떤 자녀는 부모가 함께 살기를 몹시 원하고 떨어지기를 아쉬워하며 늘 그리워하는데도 불구하고 갖가지 이유 때문에 부모와 같은 도시, 심지어 같은 국가에 살지 못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조차 어렵다. 지금은 통신 기술이 발달해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다고는 하나 매일 함께 사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자녀가 어떤 이유로 해외에 나가 일하거나 결혼 때문에 외지에서 살게 되는 등 부모와 멀리 떨어지면, 얼굴 한 번 보기도 쉽지 않고 전화나 영상 통화를 하려고 해도 시간을 봐야 한다. 시차나 각종 불편함 때문에 자주 통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크게 보면 이것들은 무엇과 관계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부모나 자녀 어느 한쪽이 주관적으로 원한다고 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부모는 앞으로 자녀에게 기대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그런데 무엇을 기대하려는 것이냐? 그가 물을 따라서 가져다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냐? 그것을 무슨 기대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물을 따르는 것은 너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일 아니냐? 네가 건강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자조 능력이 있어서 뭐든 혼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냐! 꼭 다른 사람이 시중을 들게 해야겠느냐? 꼭 자녀가 보살펴 주고 함께해 주는 것을 즐기고, 자녀가 밥상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시중을 들어야 행복하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움직일 수 없어서 자식이 정말 밥상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네 시중을 든다면, 그것이 행복하겠느냐? 만약 네게 고르라고 한다면, 건강해서 자녀의 보살핌이 필요 없는 것과 침상에 매인 채 자녀가 옆에서 보살펴 주는 것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 (건강한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건강한 것이 얼마나 좋으냐! 80살, 90살, 또는 100살까지 장수할지라도 자조 능력이 있다면 삶의 질이 좋을 것이다. 늙어서 사고가 느려지고 기억력도 떨어지며 음식도 적게 먹는다고 해도, 뭘 하든 느려지고 그렇게 잘해 내지 못한다고 해도, 외출도 그리 쉽지 않다고 해도 기본적인 생활을 스스로 꾸려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냐! 자녀는 가끔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명절 때 집에 와서 머물다 가면 된다.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해서 무엇 하겠느냐? 늘 자녀에게 기대를 거는데, 그럼 자녀가 꼭 네 노예가 되어야 기분이 좋겠느냐? 그런 생각은 이기적인 것 아니냐? 늘 자녀에게 효도를 요구하고, 자녀가 기대에 부합하기를 바라는데,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냐? 네 부모가 네게 건 기대에는 부합했느냐? 네 부모가 네게서 기대한 바를 얻지 못했다면, 너는 무엇에 근거하여 네 자녀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냐? 이는 억지를 부리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효도를 기대하는 이 일에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지배하고 또한 하나님이 정한 바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성을 지녀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것은 그 자체로 인생의 특수한 일을 체험하는 것이다. 너는 이미 자녀로부터 적잖은 것을 얻었고, 자녀를 키우면서 온갖 시련과 고난, 행복과 즐거움을 겪었다. 이 과정은 네게 인생의 풍부한 경험이요, 당연히 잊을 수 없는 체험으로, 네 인성의 결핍과 무지를 보완해 준다. 너는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이미 네가 얻어야 할 것을 얻었다. 네가 만족할 줄 모르고 자녀가 네 시종이나 노예가 되기를 바라고, 네가 키워 줬으니 평생 너에게 효도하는 것으로 그 빚을 갚기를 바란다면, 죽을 때까지 너를 모시기를 바란다면, 네 육이 집 안에서 썩지 않게 관에 넣어 주고, 네가 죽은 후에는 너를 위해 죽도록 울어 주고, 너를 위해 상복을 입고 3년 동안 애도하는 등 자녀에게 이런 방식으로 빚을 갚으라고 한다면 이는 경우에 어긋나고 인성이 없는 것이다. 보아라, 하나님은 부모를 대하는 일에 관해 가르칠 때, 부모에게 효도하면 된다고 했을 뿐 부모가 죽을 때까지 부양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런 책임과 의무를 준 적이 없고, 그렇게 말한 적도 없다. 하나님은 그저 부모와 자식 관계에 있어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알려 주었을 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은 개괄적이며 범위가 무척 넓다. 지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 능력과 조건 범위 내에서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다. 자녀에 대한 요구는 이 정도로, 무척 단순하다. 그럼 부모로서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겠느냐? 하나님은 “자녀는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부모가 죽을 때까지 모셔야 한다.”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러니 부모로서는 자신의 사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네가 낳아 줬다는 이유로 자식이 언제든 너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가 너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너를 가운데 두지 않으면 너는 늘 “이 머리 검은 짐승 같으니라고. 너는 정말 불효막심한 놈이다. 그 나이까지 키워 줬는데 내 기대에 부합하지를 못하는구나.”라고 욕하면서 자식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데, 항상 이렇게 자녀를 욕하고 자녀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하라고, 곁에서 함께해 달라고, 네가 죽을 때까지 모시면서 어디를 가든 너를 생각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행동이고 비인간적인 생각이자 사상이다. 이런 사상은 정도만 다를 뿐 다양한 국가나 민족에 모두 존재한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문화를 볼 때, 중국인은 효도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효도를 이야기해 왔으며, 그 일을 인성의 일부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왔다. 물론, 그것은 사회에서 하나의 분위기와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만약 자녀가 효도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체면이 구겨질까 봐 걱정하고, 자식이 생각하기에도 그 오명을 감당하기 힘들다. 다양한 요소의 영향으로 인해 부모는 이 전통 사상의 해악에 깊이 물들어 생각도 분별도 없이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할 것을 요구한다. 자녀를 키우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이냐? 네 그 알량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네게 준 책임과 의무를 위해서이다. 이는 인류의 본능이기도 하고, 인류의 책임이기도 하다. 너는 본능과 책임 때문에 자녀를 낳았지 노후를 대비하고 봉양을 받기 위해 자녀를 낳아 기른 게 아니다. 이것이 올바른 관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자녀가 없는 사람은 안 늙겠느냐? 나이가 든 후에는 반드시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 자녀가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늙어 간다. 또 그들 중에는 건강하고 편안한 노년과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자녀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하고 건강한 노년을 맞이하겠느냐? (그것도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노년 건강과 행복, 생활 상태, 물질적인 삶의 질은 사실 자녀의 효도와 큰 관계도,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 네 노년의 생활 상태와 삶의 질, 건강 상태는 모두 하나님이 정한 바와 관계가 있고, 하나님이 네게 배치한 생활 환경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 자녀의 효도 여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네 노년의 생활 현황이 어떻든 자녀에게는 그 책임을 질 의무가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자녀가 부모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든, 부모를 보살피려고 하든, 보살핌이 세심하지 못하든, 아니면 아예 보살피지 않으려 하든 그것은 자녀 된 입장에서 보이는 태도이다. 자녀 입장은 잠시 접어 두고 부모 입장에서만 얘기해 보기로 하자. 부모는 자녀에게 반드시 효도해야 한다고, 반드시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고, 반드시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보여야 할 태도이자 부모가 갖춰야 할 존엄성이다. 물론 더 중요한 부분이 있다. 이는 부모라는 피조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자녀를 대하는 원칙이다. 만약 자녀가 세심하고 효심이 있어 너를 보살펴 주고자 한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녀가 너를 보살피지 않으려 해도 온종일 한탄하며 억울해하거나 씁쓸해하거나 자녀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삶과 생존은 마땅히 자기 능력 범위 안에서 스스로 책임지고 부담해야지 다른 사람, 특히 자녀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함께하지 않고 옆에서 도와주지 않는 이런 삶을 능동적이고 올바르게 마주해야 할 것이다. 설령 자녀와 떨어지더라도 삶에서 발생하는 일을 독립적으로 마주해야 한다. 물론, 자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요구해도 된다. 하지만 자녀가 반드시 네게 효도해야 한다거나 네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는 사상 관점을 기초로 해서는 안 된다. 각자 책임을 다하는 입장에서 상대를 위해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부모와 자식 관계를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물론, 양측 모두 이성을 갖고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존중한다면, 나중에는 더 잘, 화목하게 함께 지낼 수 있을 것이고, 혈육의 정과 서로에 대한 보살핌, 염려, 관심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상호 존중과 이해를 기초로 한다면 이는 꽤 인간적이고 적절한 행동일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녀가 자신의 책임을 올바르게 대하고 이행할 때, 부모인 너도 자녀에게 과하고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너는 자녀의 모든 행동이 무척 자연스럽고 정상적으로 보일 것이며, 매우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뭘 하든 못마땅하고 잘못된 것 같고 키워 준 것에 다 보답하지 못한다는 예전의 그 시선으로 자식을 대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반대로 올바른 태도로 이 모든 일을 마주하여 너와 함께해 주고 네게 효도하는 자녀가 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이며, 네 자식이 그래도 꽤 괜찮다고, 인성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식이 함께해 주지 않고 효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며, 자식을 키운 걸 후회하지 않고, 나아가 자식을 증오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요컨대, 부모는 자신에 대한 자녀의 태도를 올바르게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올바르게 마주한다는 것은 자식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고, 과격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이며, 나아가 자식이 하는 일에 대해 인성에 부합하지 않거나 긍정적이지 않은 평가와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존엄성을 갖추고 살게 된다. 부모는 자신의 능력과 조건에 맞춰,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이 정한 바에 맞춰 하나님이 준 것은 누리고, 하나님이 주지 않았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해야지 비교해서는 안 된다. “누구누구네 집 좀 보십시오. 그 집 아이는 효자라서 한가할 때마다 부모를 모시고 놀러 나가는데, 남부 여행도 했다더라고요.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온다죠. 그게 바로 효도라는 겁니다! 그 집 부모는 자식에게 건 기대에 보답받은 거예요. 자식을 키워서 노후를 대비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런 아들을 키워야 합니다. 저희 집 애는 어떤지 아시나요? 집에 올 때마다 맨손입니다. 아무것도 안 사 오죠. 그뿐인가요? 웬만해선 집에 오지도 않아요. 부르지 않으면 오는 일이 없고, 불러서 집에 오면 뭐 먹고 싶다, 뭐 마시고 싶다 말만 하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죠.”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자식을 부르지 마라. 이런 상황에서 그를 부르는 것은 사서 고생하는 것 아니겠느냐? 자식이 집에 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먹고 마시기만 하는 걸 알면서 왜 부르는 것이냐? 만약 네게 목적이 없다면 그를 부르겠느냐? 그건 너 스스로 비굴하게 굴고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냐? 너는 늘 자식에게 뭔가 기대를 걸면서 그를 키운 게 헛수고가 아니기를, 머리 검은 짐승을 키운 게 아니기를 바란다. 또 언제나 네가 키운 자식이 머리 검은 짐승이 아니라 효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증명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 혼자 잘 살아가면 그만 아니겠느냐? 자녀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사례는 무척 많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진부하고 낡은 관념을 지닌 채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실 효도하는 자식이 있는지, 자식에게 효심이 있는지 등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아무래도 관을 들어 줄 사람이 있어야겠죠. 곁에 자식이 없어서 내가 죽었는데도 아무도 모른다면 시신이 집 안에서 썩어갈 겁니다.” 아무도 모르면 뭐가 어떻단 말이냐? 죽으면 그뿐이며,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육이 죽으면 영혼은 그 즉시 떠나간다. 육이 죽을 때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다 똑같이 죽는 것 아니겠느냐? 설령 관에 들어가 성대하게 장례가 치러지고 땅속에 묻힌다고 해도 그 육 역시 썩어 문드러지지 않겠느냐? 사람은 모두 ‘자식이 곁에 있어서 관에 넣어 주고 수의도 입히고 화장도 해 주고 으리으리하게 장례를 치러 주면 얼마나 멋질까? 죽었는데 아무도 장례를 치러 주지 않고, 임종을 지켜 주는 사람도 없다면 그건 인생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거나 다름이 없지.’라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이런 것들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외진 시골에 사는 많은 사람, 나이가 많고 식견이 별로 없는 사람은 부모가 죽을 때까지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사상 관점이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에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그로 인해 심각한 해를 입게 된다. 그 독소가 네 내면에 줄곧 숨어 있으면 너는 그것에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 그것을 파내서 제거하면 해를 입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잘못된 행동이든 다 그릇된 사상으로 초래된 것이다. 그는 죽은 후에 집 안에서 썩어 갈까 봐 늘 이렇게 생각한다. ‘아들을 낳아야겠어. 아들이 크면 멀리 떠나지 못하게 해야지. 내가 죽을 때 아들이 곁에 없으면 어떡해? 나를 봉양할 사람도,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없으면 인생이 얼마나 한스럽겠냐고! 나를 봉양하고 임종을 지켜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삶이 헛되지 않고, 인생이 완벽해지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주변 이웃들한테는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지.’ 이런 사상은 너무 낡아빠진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부하고 타락한 데다가 육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육은 사실 한 푼 값어치도 없으며, 생로병사를 다 겪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을 때 진리를 얻고 구원받아야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진리를 얻지 못한 채 육이 죽어서 썩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자식이 아무리 효도해 봤자 너는 그것을 누릴 수 없다. 죽은 후에 자식이 관에 넣고 장사 지낸다고 할지라도 그 육이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느냐? 지각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어떤 지각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사는 동안 이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며, 자식이 장례를 치러 주는 것에 관한 요구치가 무척 높다. 이는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하나님을 믿으니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효도하고 봉양하며 돌봐 드리겠지만 두 분이 돌아가신 후에 장례를 치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이 말을 듣고 분노한다. 다른 어떤 얘기를 해도 화내지 않지만, 이 얘기만 했다 하면 펄쩍 뛴다. “지금 뭐라고 했니? 이 불효막심한 것!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야지! 너 같은 건 낳지 말아야 했어. 때려죽일 놈 같으니!” 다른 일에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이 일에서는 분노한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식은 그에게 잘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기어이 장례를 치러 달라는 것이다. 자식은 하나님을 믿기에 이렇게 말한다. “돌아가셔도 저희는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화장을 할 것입니다. 유골함은 적당한 곳을 찾아 안치할 거고요. 대신 살아 계시는 동안 자식 복을 누리게 해 드릴게요. 먹는 것, 입는 것 다 부족하지 않게 하고 구박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현실적이지 않으냐?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건 죽은 후에 장례를 치러 주는 거야. 만약 네가 나를 먹여 살리지 않고 장례를 치러 주지 않겠다면, 가만 안 둬!” 사람이 너무 어리석으면 이렇게 단순한 이치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짐승처럼 말이다. 그러니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부모로서 가장 먼저 자녀가 효도를 할지, 너를 먹여 살리고 장례를 치러 줄지 등의 일에 관해 전통적이고, 진부하고, 낡은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그 일을 올바로 대해야 한다. 만약 자녀에게 정말 효심이 있다면 너는 그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여라. 만약 자녀가 여건이 안 되고 그럴 만한 에너지도 없거나 너에게 효도할 생각이 없어서 훗날 네가 늙었을 때 네 곁에서 보살펴 주지 못하고, 혹은 네가 죽었을 때 장례를 치러 주지도 못한다고 해도 그에게 요구하거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태어나는 때와 죽는 장소,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디에서 죽을지를 모두 정해 놓았다. 설령 자녀가 “돌아가실 때, 제가 반드시 곁을 지킬게요.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런 환경을 배치하지 않는다면, 네가 죽을 때 네 자식은 공교롭게도 네 곁에 없을 것이며,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때를 맞추지 못해 네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다. 네가 숨을 거두고 3~5일이 지나 시신이 썩어 들어가면 그제야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그의 약속이 소용 있겠느냐? 그것은 그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 말은 진작에 알려 주었지만, 너는 믿지 않고 기어코 자식에게 약속을 받아 낸다. 하지만 그의 약속이 무슨 소용 있겠느냐? 그것은 너의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그런 약속을 받아 내면 자식이 지킬 것이라 생각하는데, 정말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가 매일 어디에 있을지, 어떤 일을 할지, 미래에는 또 어떨지 그 자신조차 모른다. 그 약속은 사실 너에 대한 기만이며, 네게 신경 안정제를 준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진실로 여긴다면, 너는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직 밝히 알지 못한 것이다.

자녀와의 인연이 얼마나 될지, 자녀에게서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 — 이방인들은 이를 ‘자녀에게 부양받는다’ 혹은 ‘부양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 자녀가 기대에 부합할지 등은 사실 모두 정해져 있으며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지 네가 일방적으로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자식에게서 뭔가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런데 네게 그럴 운명이 있는지, 네 운명에 그런 것이 있는지는 왜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냐? 너와 자녀 사이의 인연이 얼마나 오래갈지, 이번 생에 네가 종사하는 여러 직업이 자녀와 관계가 있을지, 네 인생의 중요한 사건에 자녀가 관여하도록 하나님이 안배해 놓았는지, 네게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거기 관여하는 사람 중 네 자녀가 있을지 등은 모두 하나님이 정한 바에 달려 있다. 만약 하나님이 정해 놓지 않았다면, 네가 자녀를 성인으로 키운 후에 그를 쫓아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스스로 떠날 것이다. 사람은 이 일을 밝히 알아야 한다.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언제나 사사로운 욕망과 요구를 갖게 될 것이고, 자신의 육적인 누림에 대해 갖가지 규칙을 정하고 각종 사상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죽을 때가 되어서야 네가 평생 어리석은 일을 수도 없이 했고 비현실적인 일을 너무 많이 생각했음을, 그것들은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한 바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면 너무 늦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금 살면서 아직 정신이 혼미하지 않을 때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속히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상과 이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구호로 바꾸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행동하고 실행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조금씩 각종 생각과 사욕을 내려놓되, 네가 부모이니 어떻게 하든 다 옳고 다 괜찮다고, 자녀는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세상에 그런 이치는 없다. 부모만 사람이고 자녀는 사람이 아니냐? 자녀는 네 부속품이나 노예가 아니라 독립적인 피조물이다. 그가 네게 효도할지 말지가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러니 어떤 부모이든, 자녀가 몇 살이든, 그들이 네게 효도할 나이가 되었든 그렇지 않든, 독립할 나이가 되었든 그렇지 않든 부모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자녀를 대하는 올바른 사상 관점을 수립해야지 극단적으로 굴거나 그릇되고 진부하거나 낡은 사상 관점으로 그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상 관점은 사람의 관념과 이익에 부합하고, 육적인 필요와 감정적인 필요에는 부합하겠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네가 그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들은 결국 사람에게 각종 번거로움과 속박을 가져다준다. 그저 너를 갖가지 곤경에 빠뜨리고 자녀에게 혈기를 드러내게 할 뿐이다. 너는 너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이치를 따지다가 마지막에는 서로 증오하고 원망하게 될 것이다.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사이가 되어 반목하다가 원수가 된다. 만약 모두가 진리와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이 일을 마주하기가 아주 쉬울 것이며, 그 가운데서 생겨나는 갖가지 모순과 갈등 역시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전통 관념을 지킨다면, 이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파생되는 갈등이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 전통문화는 원래 사물을 판단하는 준칙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인성과 관련된 것들이 있고, 사람의 감정이나 사욕, 혈기 등 육에서 비롯된 것들도 섞여 있다. 물론, 전통문화에는 가장 실질적인 것이 있는데, 바로 ‘거짓’이다. 자녀의 효도로 부모가 제대로 교육했는지를 입증하고, 자녀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 마찬가지로 자식 역시 부모에 대한 효도로 자신이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민족과 사람들 사이에서 발붙이며 생존의 근간으로 삼는 것 자체가 전통문화에서 가장 거짓되고 본질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물을 판단하는 준칙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식에 대한 그런 요구를 내려놓고, 올바른 사상 관점으로 자녀를 대하고 자신에 대한 자녀의 태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진리를 갖추지 못했고 깨닫지도 못한다면, 적어도 인성의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인성의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겠느냐? 자녀가 이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일터에서, 각 계층에서 살아가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에게는 갖가지 환경 속에서 직면하고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다. 또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이 있으며, 하나님이 정해 준 운명이 있고, 자신만의 생존 방식이 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독립된 개체이든 엄청난 사회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존 문제와 상하 관계, 자녀와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직면해야 하는데, 그로 인한 압박감이 무척 크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면,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지금 이 혼란스럽고 삶의 리듬이 빠르며 경쟁과 피비린내로 점철되어 있는 생활 환경 속에서는 모두가 사는 게 쉽지 않고 무척 어렵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사람이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도 않으면 갈 길이 없다. 그의 유일한 길은 바로 세상을 추구하며 살아남고, 이 세상에 부단히 적응하는 한편, 자신의 미래와 생존을 위해 끝없이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 싸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사실, 그는 하루하루 무척 고통스럽고, 억지로 버티면서 지낸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부모까지 자녀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자녀의 몸과 마음에 가하는 설상가상 격의 학대이자 괴롭힘일 것이다. 부모에게는 부모의 생활 범위와 생활 방식, 생활 환경이 있고, 자녀에게는 자녀의 생활 환경과 생존 공간, 생활 배경이 있다.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지나치게 관여하거나 요구하면서 부모를 위해 이것저것 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난날 자녀에게 들인 공을 보답받고자 한다면,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부모의 행동은 무척 비인도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자녀가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생존하든, 사회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든 부모에게는 그들을 위해 어떤 일도 해 줄 책임이나 의무가 없다. 하지만 부모 또한 자녀의 번잡한 삶에, 혹은 힘든 생활 형편에 어떤 번거로움이나 짐도 더해 줘서는 안 된다. 이는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자녀에게 너무 많이 요구하지도, 자녀를 너무 많이 질책하지도 마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그들과 평등하게 지내며, 입장 바꿔 자녀의 처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부모 또한 자신의 삶을 잘 꾸려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부모는 자녀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존중받는다. 부모인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한다면,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런 일을 생각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자녀에게 효도하라고 요구하고, 자녀가 자신을 모시기를 바라는 것 말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며, 나아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다. 모두 어리석은 자이고 불신파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부모가 너무 바쁜 데다가 이행할 본분이 있고, 사역 때문에 정신이 없다면 더더욱 자녀의 효도에 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늘 “저희 애는 효도를 안 합니다. 기대를 걸 수가 없어요. 저를 부양하지도 않고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호강에 겨운 것이고 너무 한가하고 일이 없어서 일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만약 너희가 이런 부모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에게 가르쳐 주어라. 어떻게 가르쳐 주어야겠느냐? “혼자서는 못 사세요? 지금 밥도 물도 못 넘기는 상태예요? 더 이상은 혼자서 생활할 수 없는 상황이냐고요.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죽어 버리세요!”라고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말이 인도적이냐? (그런 말은 차마 못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냐? 차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나이가 더 많아지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부모가 너를 수도 없이 화나게 했다면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네 부모는 너에게 무척 잘해 주며 상처를 준 적이 없다. 그가 네게 상처를 준 적이 있다면 너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만약 그가 늘 “집에 좀 와. 와서 돈 좀 주라고. 이 머리 검은 짐승아!”라고 너를 부르면서 온종일 욕하고 저주한다면 너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시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죽어 버리세요! 자식이 없으면 못 사세요? 자식 없는 노인들을 좀 보세요. 즐겁게 잘만 살아가잖아요. 매일 혼자서 자기 삶을 꾸려 나가죠. 시간이 나면 외출해서 산책하고 운동도 하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충실한가요? 그런데 부족할 것 하나 없으면서 왜 혼자 살아가지 못하나요? 망신스럽지도 않으세요? 그냥 죽는 게 낫죠! 자식이 꼭 효도를 해야 하는 거예요? 자식은 노예도, 사유 재산도 아니에요. 본인 삶은 스스로 책임지세요. 자식은 그 책임을 질 의무가 없다고요. 먹고 입고 쓸 것 전부 드려서 부족할 게 없는데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 거죠? 계속 그러시면 요양 시설에 보낼 겁니다!” 이런 부모는 이렇게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다 맞춰 줄 수는 없다. 만약 자녀가 옆에서 돌봐 주지 않으면 그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온종일 눈물로 얼굴을 적시며 못 살겠다고 할 것이다. 못 살겠다면 죽으라고 해 봐라. 그는 죽지 않는다. 목숨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의 생존 법칙은 남에게 빌붙어 더 안락하고 나으며 제멋대로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의 행복과 기쁨은 자식의 고통 위에 세워지니, 이는 죽어 마땅한 부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식이 매일 함께해 주고 시중들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며 득의양양해지겠지만, 자녀는 고통스럽고, 또 인내해야 한다. 이런 부모는 죽어 마땅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식 세대에 거는 기대 중 마지막 한 가지 화제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부모가 자녀가 효도하는지, 자녀에 대한 기대가 보답을 받을지, 자녀가 자신을 죽을 때까지 모실 것인지 등을 대하는 일에 관해 분명히 이야기되었느냐? (그렇습니다.) 부모로서 이런 요구를 해서는 안 되며, 이런 사상 관점을 가져서도, 자녀에게 이런 기대를 걸어서도 안 된다. 자녀는 네게 빚지지 않았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너의 책임이다. 잘 키웠는지 아닌지는 또 다른 얘기이며, 자녀는 너에게 조금도 빚을 지지 않았다. 자녀가 네게 잘하고 너를 돌봐 주는 것 또한 책임을 다하는 것에 불과하지 빚을 갚는 것이 아니다. 자녀는 네게 빚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자녀에게는 반드시 네게 효도할 의무도, 네 기대에 부합할 의무도, 네 의지처가 되어 줄 의무도 없다. 이해가 되느냐? (네.) 자녀가 너를 보살펴 주고, 네 의지처가 되어 주고, 용돈을 주는 것 또한 자녀로서 마땅히 다해야 할 책임일 뿐 효도가 아니다. 우리는 일전에 까마귀가 자라면 어미를 먹이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는 비유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동물조차 이 이치를 안다. 동물도 할 수 있는 일인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느냐! 사람은 모든 동물 중 가장 뛰어난 피조물로, 사상과 인성, 감정을 갖춘,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가르치지 않아도 사실 다 알고 있다. 자식의 효도 여부를 대할 때, 큰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너희 사이에 정해 준 인연을 봐야 한다. 즉, 너희가 그렇게 서로 돕는 관계인지, 네가 그 복을 누릴 수 있을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측면에서는 네 자녀가 그런 인성을 갖추었는지를 봐야 한다. 자녀에게 정말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네가 가르치지 않아도 그는 어릴 때부터 알 것이다. 어릴 때부터 알았으니 성인이 되면 더욱 잘 알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돈을 벌어서 엄마, 아빠한테 쓰는 아이가 착한 아이야.’라는 이치를 알았다면, 성인이 되어서는 더욱 잘 알지 않겠느냐? 그것을 따로 가르칠 필요가 있겠느냐? 부모가 그런 사상 교육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에게 반드시 효도하고 끝까지 자신을 모시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네가 낳은 아이는 사람이 아니더냐? 나무더냐, 아니면 조화더냐? 자녀가 모른다면 가르쳐야겠느냐? 그런 일은 개도 안다. 강아지 두 마리가 어미와 함께 있을 때, 다른 개가 어미한테 짖으면 싫어하면서 난간을 사이에 두고 어미를 지키려고 하고, 다른 개가 어미한테 짖지 못하게 한다. 개도 아는데 사람이야 어떻겠느냐! 가르칠 필요는 없다. 책임을 다하는 일은 사람이면 할 수 있으니 부모가 그런 사상을 주입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자녀에게 인성이 없다면, 설령 조건이 갖춰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녀에게 인성이 있고 조건이 갖춰져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니 부모는 자녀의 효도에 대해 요구하거나 지적하거나 질책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전부 쓸데없는 짓이다. 자녀의 효도를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네 복이겠지만, 누리지 못한다고 해도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전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 아니겠느냐.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안녕!

2023년 5월 27일

이전: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8)

다음: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0)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설정

  • 텍스트 설정
  • 테마

색상

테마

폰트

폰트 사이즈 조정

줄 간격 조정

줄 간격

페이지 너비

목차

검색

  • 페이지 내 검색
  • 도서 내 검색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