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1)

최근에는 무척 폭넓은 주제를 교제하고 있는데, 얼마나 기억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교제가 끝나면 어떤 건 조금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마침 비슷한 상황을 체험하고 있어 어느 정도 인상이 남는 것도 있고, 그런 상황을 체험해 보지 않아서 조금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상황이 닥치면 교제했던 내용이 좀 기억이 나느냐? (조금 납니다. 상황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이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신 적 있으시다는 게 생각나고, 관련된 말씀 한두 마디가 떠오릅니다. 그다음 다시 그 말씀들을 찾아서 먹고 마시면 길이 생기는 듯합니다.) 원칙은 파악했느냐? (그 부분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고 아직 원칙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제 상황에 대조할 수 있고, 약간의 인식이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것이 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고 있느냐? 어떤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다고 할 때, 흔히 “이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거나 “이 측면의 진리 원칙을 파악하지 못했다.”라고 말하지 않느냐? 너희도 자주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냐? 진리 측면의 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과 대조하고 인식할 수 있고, 진리 실행의 원칙도 찾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것은 주로 사람이 진리 원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어떤 진리를 교제할 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이 무엇이든, 예를 얼마나 들고, 얼마나 많은 일, 얼마나 많은 내적 상태를 언급하든 그 안에는 한 가지 진리 원칙이 담겨 있는데, 네가 이 측면의 진리 원칙을 깨닫고 파악했다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진리 원칙을 깨달을 수 있고 일이 생겼을 때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두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아무리 많은 예와 내적 상태를 제시하고 아무리 구체적으로 얘기해 줘도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며, 일이 생겼을 때도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도 못하고,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지 못하고 응용할 줄도 모른다. 글귀와 도리는 몇 시간씩 늘어놓으며 이치에 맞게 말할 줄 알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 말씀을 응용할 줄 모르고, 진리 원칙을 응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한 것이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도리를 얘기할 줄 안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진리 원칙은 진리에 관계된 모든 일, 모든 종류의 일에 관한 구체적인 실행 준칙이다. 구체적인 실행 준칙이니 그건 분명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일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제시하는 요구 기준이요, 네가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실행의 길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 원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다. 진리 원칙을 파악했다고 하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너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면 일이 생겼을 때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것이고, 하나님 뜻에 맞게 행하고 하나님 요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면, 즉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하든 진리 원칙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처리하지 못한다. 너는 일을 할 때 근거와 준칙이 없기에, 즉 일정한 기준이 없기에 하나님의 요구에도 이를 수 없다. 한 사람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할 때는 그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된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으면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도리를 얘기할 줄 알아도 소용이 없다. 글귀와 도리만 읊어 대기 좋아하며 실제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않는 자가 바로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다. 하나님 말씀 서적을 몇 권씩 외울 수 있어도 소용이 없다. 바리새인은 성경 구절을 달달 외울 수 있었고,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를 했다. 무슨 일을 하든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지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온갖 영적인 것, 모두가 동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일부 지식, 도리, 글귀, 구호 등을 수집하고 그것을 도처에 전하는 데 열을 올린다. 심지어는 좋은 외적 행위를 갖춰 사람들을 미혹함으로써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다. 하지만 막상 실제적인 문제를 맞닥뜨리면 규례를 지키고 글귀와 도리를 읊어 대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실제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의 내적 상태와 본질은 물론이고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하고 해결해야 하는지 그들은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글귀와 도리만 읊어 댄다. 이런 자를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라 한다. 바리새인이 글귀와 도리만 읊을 줄 알고 그 어떤 실제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늘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틀린 말만 하고 그릇되고 황당한 관점만 내놓는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의 본질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해 능력이 전혀 없다.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듣고 아무리 많은 도리를 얘기할 수 있더라도 그들은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빈곤하고 가련한 주제에 진리를 깨달았다고 착각하고, 영적인 사람을 자처하니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가련하고도 역겹다. 그토록 많은 글귀와 도리를 떠들고, 또 몇몇 규례를 지킬 줄 알지만 막상 구체적인 문제를 만나면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남들 말만 따라 한다. “이런, 여기 무슨 일이 생겼는데 사건의 경과가 이렇게나 복잡하고 특이하고 기이하네요. 하아, 그 사람은 양심도 이성도 없는 데다가 인성도 별로군요. 주제 파악도 못 하고요. 일만 생기면 그렇게 제멋대로 군다니까요.” 네가 그에게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당신은 어떻게 대하고 처리할 건가요? 어떤 원칙에 따라 그 사람을 처리할 건가요? 그런 모습에 담긴 본질은 뭔가요? 그런 사람은 적그리스도인가요, 아니면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건가요? 거짓 리더인가요, 아니면 그냥 인성이 안 좋은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토대가 약해서 인가요?”라고 물으면 “그건 간파하지 못했는데요.”라고 답한다. 그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 어떤 종류의 일이 닥치면 겉에 드러난 현상이나 상태, 구체적으로는 개인의 태도, 표출, 말, 행위만 보고, 이런 것들을 형용하고 표현하거나 간단하고도 가장 평이한 규정만 내릴 수 있을 뿐, 문제의 본질은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 부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해야 할지,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여 그들이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을 대조하도록 해야 할지, 생명 진입에서 어떻게 그들을 도와줘야 할지, 행정 및 인사와 관련해서 그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배치해야 할지 모른다. 그저 이런저런 사람들의 각종 태도나 상태만 얘기할 줄 알 뿐이다. 네가 “그 사람들을 전부 처리했나요?”라고 물어도 “아직이요. 지금 지켜보는 중이에요.”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이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은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설교를 적게 들어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고,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평소에 어떻게 그리 말도, 설교도 잘하겠느냐? 들은 것이 많고 식견이 넓으며, 이론적인 것을 모두 마음에 새겨 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귀와 도리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리더 일꾼을 몇 년 하면서 단련되었다. 즉, 여러 가지 글귀와 도리를 얘기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이, 길게 늘어놓으며 무척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분량이나 실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며, 진리 원칙을 깨달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너희는 분별력을 키워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배 시간에 중복되는 내용도 없이 하루 이틀 연달아 설교하는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 감탄하는 것은 분별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가 얘기하는 내용 중에 어떤 내적 상태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 원칙이 하나라도 있는지 없는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들어도 그의 말에 사람의 현실적인 내적 상태나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내용이 하나도 없고 그저 구호나 글귀, 도리만 가득하다면, 원칙도, 구체적인 해결 방안도, 구체적인 실행의 길도 없고 이틀, 사흘을 얘기해도 공허한 도리만 늘어놓을 뿐이라면 들을 당시에는 도움이 되고 뭔가를 얻은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이 일은 어떻게 해결하지? 아까 그 얘긴 하지 않았던 거 같아.’라고 생각되어 다시 질문하면 또 도리만 잔뜩 늘어놓는다. 사람들이 듣고도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이는 속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속으로 그에게 감탄하고 그를 앙망한다면, 이런 걸 두고 속았다고 한다. 너희는 늘 이렇게 기만당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리더 일꾼인 너희는 늘 이렇게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제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것이 무엇이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조금 이해가 되느냐? (네, 조금 이해가 됩니다.) 진리 원칙이 무엇이냐? (진리 원칙은 구체적으로 일이 닥쳤을 때의 실행 원칙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또한 실행해야 할 몇몇 기준과 길이 있습니다. 진리 원칙을 파악하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생깁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생기면 진리 원칙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관계다. 진리 원칙을 깨달으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생기면 진리 원칙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대부분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내가 교제하는 모든 내용에서 그 안에 담긴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느냐? 만약 깨달을 수 있다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는 것이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다. 반면, 교제를 듣고 몇몇 사안이라든가 교제 중에 언급했던 한 부류의 사람, 일부 사람의 태도와 행동들은 기억하지만 거기에서 교제한 진리 원칙이 대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일이 닥쳤을 때 교제 중 언급한 구체적인 사실에 대조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줄 모른다면,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으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데,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진리 원칙을 알지 못하고, 일이 닥치면 어리둥절하고 그저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나 모습 등만 볼 수 있고 문제의 본질은 간파하지 못해서 실행의 길이나 문제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다. 이는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했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문제들을 천천히 곱씹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되는대로 넘기기만 한다면 진실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

이어서 요즘 계속 교제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얘기해 보자. 지난번 예배 때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 중 네 번째 항목인 ‘사업’에 관해 구체적인 내용을 교제하였다. 사업에 포함된 구체적인 내용에는 사람이 사업에 대해 지녀야 할 올바른 이해, 혹은 하나님이 사업 방면에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실행의 길과 실행 준칙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를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네 가지가 무엇이었느냐? (첫째는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 둘째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 셋째는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것, 넷째는 정치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중 두 가지에 대해 얘기했다. 첫째는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의 세부적인 말 하나하나가 ‘사업 내려놓기’의 구체적인 실행 원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네 가지 구체적인 실행 원칙은 바로 ‘사업 내려놓기’ 측면의 주제에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제시하는 요구 기준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시하는 요구 기준은 당연히 ‘사업 내려놓기’ 측면의 주제와 관련된 진리 원칙이자 이런 일이 닥쳤을 때, 구체적인 실행의 길이다. 즉, 네가 이 범주 내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한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겠지만, 만약 이 범주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원칙과 진리, 하나님의 요구에 위배되는 것이다. 사업이라는 주제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실행 원칙을 교제했다. 첫째는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었다.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구체적인 예도 몇 가지 살펴보고 몇몇 특수 상황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주로 관계되는 문제는 무엇이냐? 바로 사람이 직업 선택이나 일 측면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점인데, 적어도 자선 활동과 관계된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생활이나 생계와 관련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 첫 번째이다. 만약 어떤 자선 기관이 있는데, 네가 그 기관에 지원해 근무하며 재직한다면 이것은 자선 활동으로 볼 수 없다. 이는 일종의 특수 상황이다. 너는 거기 재직하면서 급여를 받겠지만 단지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 일꾼에 불과하다. 기금 조성, 사회 복지에 관계된 일을 한다든가, 유기된 아동이나 동물을 입양한다든가, 수해 지역이나 빈곤 지역 사람들을 구제한다든가, 난민들을 받아들인다든가 하는 등등 그 기관의 주요 업무는 다 너와 관계가 없다. 너는 주요 책임자도 아니고, 이런 자선 사업을 위해 네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별도로 다루어야 한다.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선 기관에서 일하는 것이라면 그 성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다릅니다.) 성질이 다르다. 이런 특수한 상황은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자선 활동은 규모가 크든 작든, 어떤 분야의 일이든 모두 너와 관계가 없다. 그 일은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므로 하지 않아도 진리에 위배되지 않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기로 한 이상 구원받는 것, 진리를 추구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일에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서는 안 된다.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은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겠느냐? 네가 누굴 구제하고 도와주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어느 누구의 운명도 바꾸지 못하고 그 누구의 운명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일은 결국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헛수고일 뿐이다. 예를 들어, 늑대를 데려다 키우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처음에는 한두 마리에서 시작했지만 백 마리, 천 마리가 넘었다. 그는 이 일을 사업으로 생각하며 모아 둔 돈을 몽땅 털어 넣고, 자기 가족들도 모두 그 일에 동원하며, 인생의 후반부에는 그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자신의 에너지와 인생이 전부 그 일을 향해 있었다. 결과적으로 늑대들은 구제되어 보호받았지만 그는 그 일에 막대한 시간과 세월을 낭비했고,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쓸 시간과 에너지가 남지 않았다. 따라서 본분을 이행하고 구원받는 일에 비하면 그 어떤 일도, 설령 많은 이에게 인정받고 사회적으로 칭찬받는 일이라 해도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고,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만약 네가 하나님이 택한 사람,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하나님은 절대 너에게 세상 사람들과 사회의 인정을 받는 자선 사업을 해내라고 부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 네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하나님이 너에게 거는 가장 큰 희망은 무엇이겠느냐? 이 세상이나 사회의 사람들이 중요하거나 의미 있고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구원받아 살아남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마음을 최대한, 최고로 흡족게 하는 일이다. 네가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은 바로 네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 교회 사역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교회 사역과 하나님의 경영 이외의 일은 모두 너와 무관하다. 네가 무얼 하든, 설령 그것이 네가 좋다고 여기고 원하는 일이라 해도 무가치하다. 그것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고 하나님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전해져 후세에 명성이 남든, 당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제아무리 많은 이에게 인정받는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네가 한 일을 인정하고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며, 네가 한 일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뜻도 아니다. 이 세상과 사회의 여론과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사업과 관련해서 무의미한 일을 하느라 자신의 유한한 시간과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반면 너의 에너지와 시간을 하나님이 네게 맡긴 본분에 사용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일에 써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살아야 네 일생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 어떤 이는 천 마리가 넘는 개를 데려다 기르는 바람에 매일 그 개들 위주로 일하고 생활하느라 먹고 자는 시간도 부족하고 심지어는 빨래할 시간도,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하는 일이 자신의 능력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에 그의 삶은 무척이나 딱하고 고달팠다. 이건 미련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구세주가 아니며, 구세주가 되려고도 하지 마라. 세상을 구하고 바꾸려는 생각, 혹은 자신의 힘으로 현재 상황을 바꾸고 이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은 전부 미련하며, 당연히 그런 행동은 더더욱 미련하다. 결국 너는 그것 때문에 된통 애를 먹고 등골이 휘고 말도 못 하게 고통을 겪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는 에너지도, 무언가를 바꿀 만한 능력과 재주도 별로 없다. 얼마 안 되는 너의 에너지와 시간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바치고 써야 한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구원받는 데 그 에너지와 시간을 쓰고 바쳐야 하는 것이다. 이외의 모든 일은 무의미하다. 경제 활동이라는 건 사람의 육적인 생활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단지 육적인 생활과 생존에 필요한 일일 뿐이다. 생활하고 생존하기 위해 너는 반드시 직업에 종사해야 하지만 그 직업은 네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직업이 이 사회에서 저소득 직종에 속하든 고소득 직종에 속하든 그건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므로 고상하고 저속하고를 논하지도, 의미가 있고 없고를 논하지도 못한다. 또한 직업에 의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 하나님이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길을 가고자 한다면 직업을 선택할 때 생계를 유지하는 기준은 바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과도한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해 가면서 의식주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지 마라. 입을 것과 먹을 것만 해결되면 된다. 배를 채울 수 있고, 몸을 가리고 따뜻하게 지낼 수만 있으면, 이런 기본적인 생존 여건만 채워지면 그것을 기반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네 소중한 에너지와 시간을 본분과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일에 바치며, 네 마음을 바쳐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진리에 공을 들여야 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그럭저럭 되는대로 살지 말고 진리 추구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칙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생존과 생활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네가 근사하게 살면서 그 근사함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원치 않고, 이 세상에서 어떤 성취를 이루고 기적을 만든다든가, 인류를 위해 공헌한다든가,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사람들의 취업 문제를 해결해 준다든가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큰 사업을 해 세상에서 이름을 알리고 그것으로 하나님 이름을 영예롭게 하는 것도, 세상을 향해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도 필요 없다. 하나님은 그저 네가 이 세상에서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무슨 기적을 만들어 낼 필요도 없고, 어떤 직종이나 분야에서 베테랑, 유명 인사나 위인이 되고,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네가 어떤 분야에서 획기적인 일을 하거나 성취를 이루는 것도 원치 않고, 나아가 다양한 직종에서 어떤 공헌을 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그저 네가 네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입을 것 먹을 것이 있어서 배를 곯지 않으며, 겨울에도 여름에도 제대로 입을 수 있는 것,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생존 능력을 갖추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하는 바다. 네게 어떤 은사나 특기,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네가 그런 것을 이용해 세상에서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떤 은사나 자질을 갖추었든 그것을 본분 이행,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일,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사용해서 마지막에 구원받기를 바란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 외에 더 요구하는 게 없다. 네가 아주 잘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은 너를 두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네가 평범하게 지내는 사회 저소득층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집은 좀 가난해도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기준에 부합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 및 생존과 관련하여 네가 추구하는 목표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라면, 하루 세끼 먹고 일상에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는 등 입고 먹으며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네가 거기에 만족한다면 하나님도 만족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너더러 무슨 대단한 부자나 유명 인사,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지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종일 밥만 구걸하는 거지는 애처롭기만 하다. 음식도 남은 것만 먹고, 옷차림도 허름해서 기운 옷만 입고, 심지어 마대 조각을 걸치고 다니는 등 삶의 질이 무척이나 형편없다. 하나님은 너에게 거지처럼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육적인 삶에서 하나님은 너에게 그를 영화롭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또 어떤 일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삶이 궁핍하거나 풍족하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서, 하나님이 요구한 그 원칙에서 네가 어떻게 실행했는지,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했는지를 근거로 할 뿐이다. 사업에 관계된 이 두 가지 실행 원칙을 잘 파악하고 이해했느냐? 첫째,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교회에는 아직도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어려운 곳이 있으면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지요. 저는 개인 신분으로 옷과 현금을 기부하고, 재해 지역에 가서 자원봉사도 했어요.” 너희는 이것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말리겠느냐? 간섭하겠느냐? (간섭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다.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불쌍해요. 특히 어린아이가 굶는 걸 보면 정말 가엽죠.” 그래서 그런 사람을 얼른 집에 데려가 맛있는 것도 먹이고, 옷도 주고, 물건도 주고, 또 가끔 보러 가기도 한다. 이런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며,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렇게 처신해야 의로우며 하나님이 기억하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을 말리느냐? 간섭하느냐? (간섭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설교를 해 주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 원칙을 교제해 준 다음, 만약 그가 다 알아듣고 이해했는데도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서 자기 뜻대로 행동하려 한다면 우리는 간섭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져야 하고,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얻고, 하나님에게 어떻게 규정될지 등은 모두 사람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책임질 필요도, 그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다. 만약 도리를 다 알면서도 기어이 자선 활동을 하겠다고 나오는 부류를 만난다면, 우리는 그의 사상 관점을 바로잡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간섭도 하지 않고, 정죄는 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세상을 추구하고 재산 형성, 관직 생활, 사업 경영 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간섭하겠느냐? (간섭하지 않습니다.) 관련된 진리를 그에게 교제해 주되, 교제가 끝나면 선택은 그의 몫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그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우리는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의 책임은 그에게 하나님의 뜻과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해하고 알아들었지만 네가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언제부터 복음 전도를 시작할 건가요?”라고 물을 때, 그가 “나중에 얘기하죠. 물건도 들여야 하고, 업무도 하나 처리해야 하고, 또 프로젝트도 하나 맡아야 하거든요. 완성되면 돈이 좀 될 것 같아서요. 그러니 복음 전도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라고 대답하고, 또 “얼마나 걸릴까요?”라고 물을 때 “2, 3년은 걸려요.”라고 말한다면 그대로 작별을 고해라.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해결하면 된다. 간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걸 두고 참도인 줄 뻔히 알면서도 죄를 짓는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속죄 제물이 없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말리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않는다. 즉, 당장은 어떤 평가나 판단도 내리지 않고 그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둘 것이다. 너희도 이 원칙을 배우도록 해라. 그가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든 관계없다. 어쨌든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며, 이후 어떤 선택을 내리고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할지는 그의 일이고, 그의 자유다. 어느 누구도 간섭할 필요가 없고, 이해관계를 분명히 짚어 주며 그를 압박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으냐? (적절합니다.) 적절하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원칙을 어기지 말고 무리하게 강요하지도 마라. 이것이 사업 내려놓기의 첫 두 가지 원칙이다. 이 두 가지는 상대적으로 이해하기도 깨닫기도 쉽다.

‘사업 내려놓기’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행하라고 요구하는 세 번째 원칙은 무엇이냐?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 조항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 역시 그중 한 가지 원칙이다. 이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마땅히 엄수해야 할 원칙이자 사람이 이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일종의 생존 태도와 수단, 방식이다. 당연히 정확히 말해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일종의 지혜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누구에게나 요원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서 언급하는 사회의 각종 세력은 모든 사람의 주변에 숨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력이자 무형의 존재로, 모든 이의 주변에 숨어 있다. 네가 한 가지 직업을 선택할 때, 그 직업은 사회에서 어느 계층에 속한 것이든 관계없이 모두 관련 직업의 방대한 세력 아래 놓여 있다. 네가 종사하는 직업이 최상위 직업이든 하위 직업이든 그 직업에는 관련된 그룹들이 있다. 이들 관련 그룹들이 만약 사회에서 일정한 연한과 경력, 혹은 일정한 사회적 근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 그룹은 분명 보이지 않는 세력이다. 교사라는 직업을 예로 들면, 이 직업은 상위 직업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위 직업도 아니다. 교사는 농민이나 각종 수공업 등 이런 직업보다는 상위에 있고, 사회적으로 진정한 상위 직업들보다는 다소 낮은 위치에 있다. 이 직업은 네가 종사하는 간단한 일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이 업계를 채우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업계 안에서 사람은 관록이나 경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구분된다. 이 직업의 상부, 즉 이 직업의 인사, 동향, 정책, 규칙, 규정 등을 통제하는 그 상부는 바로 이 직업의 상응하는 세력이 된다. 교사라는 직업을 예로 들어 보자. 교사라는 이 직업을 이끌고 통제하고, 네 밥그릇과 급여를 통제하는 최고의 우두머리가 누구냐? 교사 노조가 있는 나라도 있고, 중국의 경우는 교육국, 교육부가 될 수도 있는데, 이들 기관이 바로 사회에서 이 직업의 상응하는 세력 범위이다. 농부를 예로 들어 보자. 농부의 직속상관은 누구냐? 대(隊)장, 촌(村)장, 향(鄕)장이다. 지금은 또 농업관리위원회가 생겨났는데, 이것이 이 직업의 상응하는 세력 범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들 세력 범위는 생활 속에서 네 사상과 언행, 심지어 네 신앙과 네가 걷는 길에까지 영향력과 통제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네 생계뿐만 아니라 너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 특히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이방인들은 항상 사상 세미나를 열어 사상을 보고하고, 사상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당을 반대하는 요소, 반국가적이고 반인류적인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핀다. 어느 직업에 종사하든, 비교적 전통적인 직업이든 현대적인 직업이든 네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직업 범위 내 상응하는 세력이 존재할 것이다. 어떤 세력은 네 직속상관, 즉 직접적으로 너에게 급여를 주고 생활비를 주는 그 상사이고, 어떤 세력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세력이다. 예를 들어, 네가 직장에서 눈에 띄지 않는 말단 직원이라고 해 보자. 그러면 네 업무 범위 내에는 각양각색의 세력이 존재한다. 사장에게 붙어서 사장 주변만 맴도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세력이다. 또 총재 옆에 붙어서 총재만을 위해 일하는 세력이 있다. 또 총감독에게 붙은 무리들이 있다. 이렇게 각종 세력이 존재한다. 이 세력들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이 세력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이냐? 각자 필요한 것을 취하고, 또 자신의 목적 달성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줄을 서고 아첨하느라 여러 다양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어떤 세력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어떤 세력은 저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세력이 비교적 법을 준수하고 직장 규칙을 잘 지키는가 하면 어떤 세력은 저열하게 행하고 법과 직업 도덕도 잘 지키지 않는다. 각종 세력이 얽힌 환경에서 지낼 때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 어떻게 생존해야 하느냐? 당조직에 접근해야 하느냐, 아니면 사장이나 총재에게 접근해야 하느냐? 주임이나 과장에게 접근해야 하느냐, 아니면 국장이나 공장장에게 접근해야 하느냐? (모두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 종종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또 사람됨의 원칙을 포기한다. 더욱이 사람으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것도 포기한다. 온갖 복잡한 세력 범위 내에서 사람은 어느새 줄을 서고, 대세를 따르고, 각종 세력을 따르는 것을 택한다. 자신을 받아주고 보호해 줄 세력을 찾거나 아니면 자신이 쉽게 받아들이고 흔들 수 있는 세력을 찾아 접근하고 심지어 그들에게 휩쓸린다. 이것이 사람의 본능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존 기술 혹은 수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이 사회, 혹은 다양한 그룹에 적응하는 본능이나 기술이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실행 원칙이냐?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비록 지금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정말 그 상황에 놓이게 되면, 현실 생활에서는 줄 서는 쪽을 택하게 될걸요. 어떤 세력이든 자신한테 도움이 되고 자신을 계속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는 쪽을 택해서 접근하게 된다고요. 게다가 속으로도 사람은 독자적으로 살면 괴롭힘을 당하기 쉬우니까 독자적으로 살아갈 게 아니라 세력에 접근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언제나 독립적이고 고고하게 지낼 게 아니라 고개도 숙일 줄 알고 각종 세력에 접근할 줄도 알아야 해요. 눈치를 봐 가며 아부도 적당히 할 줄 알고, 쇼맨십도 좀 있어야죠. 대세를 따를 줄도 알아야 하고요. 비위도 좀 맞출 줄 알고, 동향도 빨리 읽고 냄새도 잘 맡아야 해요. 상사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성질은 어떻고 성격은 어떤지, 가정 배경이 어떤지, 어떤 말을 해 주면 좋아하는지, 나이는 얼마고 생일은 언제인지, 옷이나 구두는 무슨 브랜드를 선호하고 가방은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는지, 어떤 식당의 어떤 메뉴를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차종은 무엇인지, 컴퓨터나 휴대폰은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고 어떤 어플들을 즐겨 다운받는지, 여가 시간에는 어떤 오락거리를 즐기는지, 어떤 사람들과 교제하는 걸 즐기고 좋아하는 대화 주제는 무엇인지, 이런 걸 일일이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어야죠.” 너는 생존을 위해 자기도 모르게, 또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에게 휩쓸린다. 적당히 물러서서 마음에도 없는 일과 말을 해 가며 상사와 동료들 기분을 맞춰 주고, 본인은 직장에서 여유만만하면서도 직장 내 모든 걸 쥐고 흔드는 상황을 만들 것이다. 이러면 너의 생활과 생존이 보장이 된다. 그렇게 하느라 도덕을 위배하고 사람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또 존엄성을 포기한다 해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이 아무렇지도 않음이 바로 네 타락의 시작이자 네 구제 불능의 징조다. 따라서 사람이 표면적으로 생활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회의 각종 세력에 접근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사람의 이런 행위와 선택, 사람이 선택한 이 길은 사람의 인성과 인격을 비뚤어지게 만든다. 동시에 각종 세력에 접근하고 휩쓸릴 때, 사람은 음으로 양으로 온갖 모략을 사용해 그들에게 영합하고 그들을 만족시키는 법을 끊임없이 배움으로써 자신의 더 나은 생활, 더 우월한 생존 조건을 달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사람은 현재의 이 상황을 유지하고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렇다면 유한한 너의 세월과 시간 안에서 네가 하는 모든 말과 모든 일, 네가 지내는 모든 날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엉망진창이 된다. 무엇을 가리켜 엉망진창이라고 하는 것이냐? 네가 나날이 타락하여 나날이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분히 하나님 앞에 나아올 마음도 들지 않고, 당연히 본분을 이행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너는 본분 이행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수 없고, 진리 추구에도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수 없다. 그러면 너는 구원받을 가망이 없고, 구원의 희망도 없다. 네가 사회의 각종 세력에 뛰어들었고 그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에게 휩쓸리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기 때문에 이런 선택이 너에게 가져온 결과는 바로 현상 유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가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심신이 고통스럽고, 매일매일을 고기 분쇄기 속에서 보내는 심정일지라도 본인의 선택으로 인해 너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야만 한다. 각종 세력이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네가 그들에게 휩쓸렸을 경우에는 그들이 내뱉는 말 한 마디, 그 안에 담긴 동향, 그리고 곧 발생하게 될 일, 사람들 각자의 태도, 사람들이 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 특히 이 세력의 최고층에 있는 네 직속상관이 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들이 모두 네가 가늠해야 할 것들이고, 네가 실시간으로 수집해야 할 정보들이다. 너는 감히 허술하게 대처하거나 소홀히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이 뒤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계획과 타산을 가지고 있는지, 심지어 그들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어떤 전략을 세우고 어떻게 계산기를 두드리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할 작정인지, 사람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고 싶다면 마음속 깊이 이런 국면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그런 것을 연구하고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들과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고, 통화도 하고, 업무적으로도 더 많이 교류하고, 심지어 휴가 기간에도 접근해 그들의 동향을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네 생활이 어떻든, 즐거운지 고통스러운지는 둘째 치고, 설령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진리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해도 시간을 할애해서 차분하게 몸과 마음을 바쳐 제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단지 여가 취미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마음속에 어떤 요구와 바람을 품든, 네가 처한 그런 상황에서라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일은 네 모든 바람 중 가장 마지막 순위를 차지할 뿐이다.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일은 생각할 엄두도 못 내려니와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든, 어느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든 각종 세력에 접근하고 각종 세력에 휩쓸리려 하거나 혹은 이미 각종 세력에 접근하고 휩쓸렸다면, 어떤 이유와 변명을 막론하고 최종적으로 맞이할 결과는 본인의 구원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로 초래되는 가장 직접적인 손해는 바로 네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본분을 이행할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차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정성껏 기도드리는 이 최소한의 일조차 할 수 없다. 네가 처한 환경과 사람, 일이 지나치게 복잡하기 때문에 일단 각종 세력에 휩쓸렸다 하면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쉽게 발을 뺄 수가 없다. 쉽게 발을 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각종 세력의 범위 안에 일단 발을 들였다 하면, 그 안에 뒤엉켜 있는 온갖 일, 그 안에서 발생하는 온갖 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계속해서 온갖 사람과 일에 의해 뒤엉켜서 피하려야 피할 수도 없게 된다는 말이다. 네가 이미 그들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력의 범위 안에서 발생한 모든 일이 다 너와 무관하지 않고, 너와 관련이 있다. 다만 한 가지 상황, 즉 네가 그 안에서 이로움과 폐단, 옳고 그름을 다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방관하는 입장에서 지켜보기만 한다면, 아마 각종 시비나 어떤 말썽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접근한다면,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신경 쓰고 참여한다면, 너는 분명 거기에 얽혀 들어가서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가 될 수밖에 없다. 네가 참여자라는 것은 곧 네가 이 세력 범위 내에서 피해를 입는 대상이라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어느 직장, 어느 그룹 안에서 살아가든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건 큰 문제가 안 돼요. 중요한 건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죠. 만약 조직이나 각종 세력에 접근하지 않고, 사회적으로나 어떤 그룹에서나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안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이냐? (그런 게 아닙니다.) 각종 그룹 안에서 사람들이 세력에 접근하는 목적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큰 나무 그늘, 즉 자기를 지지해 줄 세력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바라는 것이다. 그 밖에도 사람은 각종 세력에 기대 자리에 올라감으로써 이익이나 권세를 꾀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만약 이 직업 범위 안에서 네가 단순히 생계만을 위하고 먹는 것과 입는 것만 있으면 만족한다면, 너는 어떤 세력에도 접근할 필요가 없다. 만약 접근한다면 그건 단순히 생계를 위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데, 그것은 명예 아니면 이익이다. “저는 생계를 해결하는 것 말고도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그러는 건데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돈을 벌어서 하루 세끼가 보장되고 입을 옷이 있으면 된다. 그러면 체면을 세우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겠느냐? 누구의 체면을 세우려는 것이냐? 국가의 체면을 세우려는 것이냐? 조상이나 부모의 체면을 세우려는 것이냐? 아니면 본인의 체면을 세우려는 것이냐? 너희가 볼 때 체면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냐, 아니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체면을 세우려는 것은 혈기가 섞인 성품이다. 무슨 일이든 체면을 세우려는 것은 추상적이고도 공허한 소리이다. 실질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돈을 벌어 오는 것이다.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어. 누가 어디에 줄을 서든, 어느 상사나 관료에게 접근하든 상관없어. 누가 승진하고 누가 강등되고 누구 급여가 오르고 누가 무슨 수단으로 요직에 오르든 상관없어. 나는 밥벌이만 할 수 있으면 돼. 당신들이 뭘 다투든 나랑은 관계없어. 어쨌든 나는 하루 여덟 시간 일하고 벌 만큼 벌어서 가족들이랑 먹고살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 그거면 되지. 내가 바라는 건 이게 다야.’ 자신이 해야 할 본연의 일을 잘 완수해서 당당하게 급여를 받고 보너스를 받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세, 이렇게 직업을 대하는 자세가 옳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부분이 옳으냐? (이런 자세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태도를 근거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건성으로 일하지 않고 본연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세력에 빌붙거나 아첨하지 않고 그저 정상적인 생활만 유지할 수 있으면 된다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부합합니다.)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너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냐? (사탄의 해악을 입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시비에 일단 휘말리게 되면 사는 게 무척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 이행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네가 각종 세력과 엮인다면 최종적으로는 너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그건 너무나 가치 없는 일이다! 첫째, 너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둘째, 정의도 펼칠 수 없다. 셋째, 너는 각종 세력과 어울려 죄를 더하는 것이다. 그러니 세력에 접근하는 것은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설령 네가 각종 세력에 접근하여 급여가 오르거나 스카우트된다고 해도 그들을 따라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겠느냐? 뒤에서 나쁜 짓을 얼마나 저질러야 하겠느냐? 뒤에서 사람들을 얼마나 괴롭혀야 하겠느냐? 이 사회에서, 온갖 그룹이나 업종에 왜 세력이 있겠느냐? 그건 바로 이 사회에 공평과 공의가 없기 때문이다. 각종 세력에 의지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각종 세력에 의지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여기에 공평이 있느냐? (없습니다.) 공평은 없고 오로지 세력에만 기반을 둔다. 세력이 강한 사람들이 결정권을 쥐고, 세력이 없거나 약한 사람들은 결정권이 없다. 법을 제정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네가 세력이 강하면 네가 제정한 법도 공포되고 시행되지만, 세력이 약하면 네가 제안한 법률 규정은 통과되지 못해 국가 법률에 편입될 수 없다. 어떤 그룹에서도 마찬가지다. 세력이 강하면 자신의 이익을 쟁취해서 극대화할 수 있지만, 세력이 없으면 이익을 박탈당하고 침식당할 수도 있다. 각종 세력이 형성되는 목적은 그 세력을 이용해 국면을 통제하고, 나아가 사회의 여론, 법률, 인성과 도덕을 압도하기 위한 것으로, 그들은 법률, 도덕, 인성을 초월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세력이 커질수록 권세가 강해지고, 마음대로 하고 결정권을 잡을 기회가 더 많아진다. 이것이 공평한 것이냐? (아닙니다.) 공평하지 않다. 권력과 세력은 그 사람의 신분을 대표하고 그가 이익을 분배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네가 한 사회 그룹 안에서 생계유지와 먹는 것과 입는 것 정도만 원한다면, 네가 추구하는 바가 이 사회에서의 지위, 명예가 아니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면, 네가 각종 세력에 접근하려는 것은 불필요한 것 같다. 만약 네가 오로지 본분 이행에만 시간을 쏟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걸어서 마지막에는 구원에 이르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각종 세력에 접근하려 한다면, 이 두 가지는 서로 충돌할 것이다. 둘은 서로 보완적일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 일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물과 불처럼 상극이기 때문이다. 각종 세력에 접근한다고 해서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무슨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각종 세력에 접근한다고 해서 네가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보다 분명히 인식할 수 있거나 더 많은 발언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믿어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고 정부로부터 박해받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마을에 살면서도 속으로는 커다란 청사진을 품는다. ‘내가 농촌에서 태어나서 농부로 살면서 천대받긴 해도 곡식 농사, 채소 농사도 짓고, 닭이나 소, 양도 기르고, 그럭저럭 살 만해. 하나님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려면 그래도 여건이 아주 괜찮지. 기본 생존 조건이 갖춰져 있으니까. 그런데 이 사회나 인류 가운데서 생존하고 살아가려면 어째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걸까?’ 뭐가 부족하냐? 뒤에 기댈 곳이 없다. 보아라. 사람이 집을 고를 때는 뒤에 큰 산이 있는 집을 찾는다. 그 산을 기댈 곳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집에 살면 마음이 놓인다. 만약 집 뒤쪽이 벼랑이라면, 속으로 늘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집에서 사는 것이 불안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명망 있고 지위가 있는 사람과 줄이 닿아서 그 집에 들락거리면서 상대의 호감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경우, 마을에서 소외감도 느끼고, 또한 멸시당할 위험과 더 이상 마을에서 살지 못할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늘 촌장에게 접근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으면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는 나라들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한다. “만약 촌장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촌장은 믿지 않더라도 촌장 어머니나 할머니, 부인, 딸이 믿는다면 이건 촌장을 백으로 두는 것 아닌가요? 우리 교회 형제자매가 마을에서 명망이 있거나 촌장과 친척 관계라면 이 마을에서 우리 교회 입지가 튼튼해지지 않겠어요? 자리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면 우리, 하나님 믿는 형제자매들이 이 마을에서 밥 먹고 농사짓는 것도 문제가 될 것 없지 않겠어요? 그뿐만 아니라 큰 붉은 용이나 통일 전선 사업부에서 조사하러 올 때 누군가 우리 대신 막아 줄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언제나 어떤 조직이나 세력에 접근함으로써 본인이 절대 위험한 지경에 놓이지 않고, 안전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박해받지 않기만을 바란다. 이것이 아주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명망 있는 사람과 알고 지내면 자기도 세력을 지닌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생각이야 아주 좋다만 촌장이 너더러 자기한테 접근하라고 하더냐? 촌장이 네가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냐? 촌장이 네가 이용하도록 하겠느냐? 일개 평범한 인간인 네가 조직이나 촌장에게 접근해 복음만 전하면 그만이겠느냐? 네가 촌장에게 접근하려면 그럴싸한 선물을 바치거나 실질적인 일을 좀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어떤 경험이 있느냐? 촌장에게 접근하는 것이 쉬운 일이냐? 촌장네 집 개한테 접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촌장에게 직접 선물을 보내도 소용없다. 촌장의 아내나 어머니, 둘째 고모, 셋째 작은할머니 등 접근하기 쉬운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접근해야 한다. 왜 촌장의 셋째 작은할머니에게 접근해야 하느냐? 촌장과 비교적 사이가 가깝기 때문에 그 작은할머니에게 먼저 접근한다. 널 대신해서 말을 잘 해 줄 수 있는 연장자인 그 작은할머니를 통해 서서히 촌장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우회 전술’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느냐? 네가 직접 촌장에게 선물을 들고 가면 촌장이 묻는다. “누구신지?” “저는 마을 동쪽 이씨 집안 아무개입니다.” “이씨 집 누구? 난 모르겠는데?”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접근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선물을 하겠다면 어떤 선물을 내밀어야 그의 눈에 들어오겠느냐? 골드바나 금괴 같은 것이 네게 있느냐? 그가 해삼을 반기겠느냐? 네가 보낸 해삼이 수입산인지 아닌지부터 따질 것이다. 그런 건 그에게 넘쳐난다. 너는 허리띠 졸라매며 덜 먹고 덜 써서 마련한, 감히 먹어 보지도 못하고 만져 보지도 못한 것을 선물해도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벨트를 선물하는 너에게 그가 묻는다. “이거 국산이지?” “소가죽입니다.” 그럼 그가 말한다. “요새 누가 소가죽 벨트를 차나? 아무도 안 해. 다들 고급 피혁 제품을 쓰지. 유럽 국가 로고가 찍혀 있고 큐빅 박힌 것 말일세. 그런 건 없나?” “어떻게 생긴 건가요?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러면 찾아오지 말게. 거지 취급하고 이 벨트를 주는 건가?” 이런 사람을 네가 가까이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네가 나름 타산을 잘하고 주판알을 잘 튕겼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상대방에게 네 선물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억지로 들이대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한다 한들 네가 들이대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저 밥 한술 얻어먹기 위해, 마을에서 기댈 대상을 찾기 위해 그런 천한 일을 한다. 너희가 보기에 창피하지 않으냐? (창피합니다.) 그런데도 또 촌장의 둘째 작은할머니, 셋째 작은할머니를 찾아가고, 촌장 마누라, 처제를 찾아가 선물을 주고 접근하는 등 별 구질구질한 방식을 다 동원한다. 남들은 말한다. “이런 선물 보내도 소용없어요. 촌장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래도 접근하겠느냐? 선물은 뭘 해도 눈높이에 맞추지 못해서 상대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적어도 네가 너 자신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래도 접근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기댈 대상으로 이런 사람을 찾을 것이냐? 촌장은 어떤 인물이냐? 네가 마음대로 기댈 수 있는 존재더냐? (아닙니다.) 네가 설령 그에게 줄이 닿고 기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들 뭐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가 네 운명을 장악할 수 있느냐, 아니면 네가 구원받게 해 줄 수 있느냐? 아니면 정말 박해나 환경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환경을 허락하고 마련했을 때, 네가 그것을 요행으로 피할 수 있겠느냐? 촌장이 결정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한 커다란 환경에서는 촌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떤 세력도 결정권이 없고 그 어떤 세력도 언급할 가치가 없다. 그러니 네가 이 세상에 있는 한, 거기가 마을이든, 현성이나 도시이든, 아니면 어느 한 나라이든, 나아가 구체적으로는 네가 어느 한 나라에서 어느 업종에 종사하든, 그 안에 존재하는 그 어떤 세력도 너의 운명을 주재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다. 어떤 세력도 네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네 운명의 주재자, 네 운명의 제정자는 더더욱 될 수 없다. 반면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세력에 일단 휩쓸려 들어갔다 하면 재난이 찾아오고 액운이 시작된다. 너는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더 위험하고, 그들에게 휩쓸릴수록 발을 빼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 각종 세력들은 너에게 어떤 유익함도 가져오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휩쓸리는 순간부터 너는 계속해서 유린당하고 짓밟혀서 몸과 마음이 비뚤어지고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 세상에서 공평과 공의의 존재를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진리 추구와 구원이라는 너의 그 가장 아름다운 소망을 망쳐 버린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떤 계층과 환경, 그룹 혹은 업종을 막론하고, 그 안에서 세력을 찾아 기대고 자기의 보호막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극단적 사상 관점이다. 네가 만약 생존만을 위한 것이라면 이런 각종 세력들을 멀리해야 한다. 설령 이 세력들이 네 인성의 정당한 권익을 지켜 주는 것에 불과하다 해도 그것이 네가 그런 세력에 발을 들이는 이유와 구실이 될 수 없다. 사회에서 각종 세력의 생존 상태, 그들의 전진 목표, 그들이 일하는 방향 등이 무엇인지를 막론하고, 어찌 되었든 너는 하나님 믿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일원이나 각종 세력의 주동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들을 멀리하고 피해야 한다. 그들이 일으키는 각종 시비, 그들이 정한 각종 룰을 피해야 하고, 또 그들의 요구대로 해당 직업 혹은 그 세력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해가 되는 여러 가지 말이나 행동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일원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각종 세력이 존재하는 각 직업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요구이다. 즉, 그들을 멀리하고 피해야 하고, 그들의 희생양이나 이용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고, 그들의 앞잡이나 스피커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회에서는 각 업종에 관계된 직속상관도 그렇고, 민간 조직도 그렇고, 일부 부당한 사회단체도 그렇고, 모두 사람이 피해야 할 대상이다. 이런 사람들과 연줄이 닿아서는 안 되고, 이런 사람들과 어떤 관계도 맺어서는 안 된다. 사회의 사채업자를 예로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장사에 자금이 부족한데 정상적인 경로로는 대출을 받을 수가 없다. 하지만 자금을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채를 빌리는 것이다. 이자만 높은 게 아니라 리스크도 큰 것이 사채이건만 어떤 사람들은 큰돈을 벌기 위해, 사업의 부도를 막기 위해 결국 사채를 빌리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사채업자가 사회에서 정당한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부당한 사회 조직으로, 어느 때건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너의 생존이나 현재 상태가 어떤 상황까지 치닫든 그 길은 생각도 하지 말고, 멀리하고 피해야 한다. 네 생활과 생계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사채는 꿈도 꾸지 말고, 그 길로 들어설 생각도 하지 마라. 그 작자들은 당 조직과 별반 다를 바 없지 않으냐? 소위 합법 기구와 지하 조직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너에게 생계를 위한 길을 열어 주고 새로운 기회를 줄 것이라는 착각은 버려라. 그건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일단 그 방법을 선택하고, 그 길로 나아간다면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그 밖에도 당연히 우리가 별로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은, 이른바 모 사회 조직도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어떤 특수한 문제, 손을 쓸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특수한 상황이 닥쳤을 때, 혹은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였을 때라 해도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고 곤경에서 빠져나가고자 비상수단을 이용해서 자신을 보호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런 사람과 거래하거나 엮이면 안 된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것이 기개라는 것이냐? 그것이 크리스천이 갖춰야 할 기개이냐? (크리스천이 갖춰야 할 기개가 아닙니다.) 그럼 그건 무엇이냐? (그들에게 접근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그들에게 접근한다면 그 후로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앞으로 더 큰 위험이 닥쳐옵니다.) 단지 이후에 닥칠 위험을 피하기 위함이냐? 그렇다면 당장의 위험에서 먼저 벗어나면 되지 않느냐? 왜 이런 세력에 접근하면 안 되는 것이냐? 성경에서 시험을 받은 예수가 사탄에게 뭐라고 했느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경배해야 할 존재는 하나님이고, 사람이 유일하게 섬겨야 할 존재도 하나님이다. 그리고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한다면, 네 생명을 앗아 가려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순종해야 합니다.) 마땅히 순종하고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해야 마땅하다. 사람은 마땅히 순종해야 하며,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너를 살게 하려 한다면 누가 네 생명을 앗아 갈 수 있겠느냐? 그 누구도 앗아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에게 어떤 환경, 어떤 위험이 닥치든, 설령 죽음에 직면한다 해도 너를 죽음의 늪에서 벗어나도록 구해 줄 수 있는 세력이 있는데 그것이 정당한 세력이 아닌 사탄에 속한 세력이라면 너는 뭐라고 해야 하느냐?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죽으면 죽었지 너와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겠다!”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내가 너의 세력 덕분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내버려둔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손안에 있으니 나는 어떤 세력에 기대 타협하며 살지 않아.” 이것이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네가 곤경에 빠졌을 때, 누군가 와서 너를 구해 줄 수 있는 일종의 사회 세력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고 해 보자. 이 사회 세력이 너를 성공적으로 구해 주겠지만, 그로 인해 너와 크리스천, 교회, 하나님 집의 명예가 실추되고 하나님 집이 비방받게 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수용하겠느냐, 거절하겠느냐? (거절하겠습니다.)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어떤 세력에 기대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어떤 위험과 고난이 닥치든,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 외에 각종 비상수단을 이용해 위험한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해야 할 책임을 다하고, 사람이 해야 할 노력을 다했다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지배한다. 만약 어떤 불법 사회 조직이 너를 구해 줄 수 있다고 알려 주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여기에 동의하겠느냐?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 살고 싶은 게 아니냐? 곤경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게 아니냐? 네가 아무리 곤경에서 벗어나고 싶고 아무리 살고 싶어도, 사람됨에는 원칙이 있어야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속으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원칙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일과 관련해서, 사람이 생활하면서 관련을 맺는 각종 세력 외에도 사회에 항상 나타나는 각종 세력이 있는데, 이들 역시 멀리해야 한다. 생활에서든 일에서든 그들과는 어떤 관계도 맺지 말고, 접촉하지 않도록 해라. 자신의 생활과 일은 스스로 처리하고 동시에 겉으로 보이는 각종 세력의 강대함에 겁먹지 말아야 한다. 속으로 저들을 거절하고 멀리하는 동시에 그들과의 관계를 지혜롭게 처리하고 그들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너는 단지 밥그릇, 생계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네 목적은 단순하다. 즉, 먹는 것과 입는 것만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그들과 어떤 결과를 두고 다투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설령 그들이 너에게 뭐라고 듣기 거북한 소리를 하더라도, 설령 종교와 신앙을 박해하는 나라, 기독교를 박해하는 나라에서 일부 사람들이 네 신앙을 비꼬고 비아냥거리고 심지어 유언비어를 날조하더라도 너는 참아야 한다. 자신을 보호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늘 기도하고 자주 하나님 앞에 오도록 해야 한다. 그들 세력의 겉으로 보이는 거대함이나 흉악함에 겁먹지 마라. 마음속으로 그들을 분별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멀리해야 한다. 늘 입을 엄히 단속하고 행동에 신중을 기하고,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그들을 지혜롭게 대해야 한다. 이것이 마땅히 갖춰야 할 실행 원칙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당연히 속으로는 그들을 멀리해도 좋고, 거절해도 좋고, 심지어 멸시해도 좋지만 겉으로는 지혜를 발휘해서 그들이 뭔가 낌새를 느끼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 너는 어디까지나 생계유지를 위해 일하면서 그들 사이에서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부당한 행위에 동참할 때는 그들의 죄에 일조하지 않도록 이를 멀리하고 피해야 하고, 동시에 집중 공격을 당하거나 남에게 모해받는 궁지에 몰리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쉬운 일이냐, 어려운 일이냐? 젊고 미숙한 사람들이 이런 복잡한 사회 환경에 막 발을 들였을 때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혹은 자질이 부족하고 적응력이 떨어져서 인간관계에 서툰 사람들도 역시 좀 어려울 수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네가 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네가 맡은 본업만 잘하면 된다는 점이다. 누구의 눈 밖에도 나지 않도록 해라. 신앙도 전혀 없고, 도덕적 마지노선도 없고, 양심도 이성도 전혀 없는 이런 사람들과 진지하게 따지지 마라. 말 한 마디, 일 하나 때문에 그들과 크게 도리를 얘기하지 마라. 그들에게 하나님 믿는 일, 처신, 혹은 양심, 인성 등의 도리를 얘기하지 마라. 그럴 필요가 없다. 좋은 얘기는 지인에게 해라. 짐승만도 못한 그런 인간들과는 사람의 말을 하지 말고, 진리에 관계된 얘기는 더더욱 하지 마라. 그건 어리석은 짓이다. 만약 그들이 거대한 세력이라면, 그들을 대할 때 속으로는 멀리하고 거절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들과 우호적이고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그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성과만 거두면 된다. 이렇게 온갖 복잡한 세력이 얽히고설킨 생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네가 어떤 일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좋은 사람, 정직한 사람이라고 증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네가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롭게 시시각각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너를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기도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한다. 구체적으로 이루려는 성과는 무엇이냐? 악인에게 모해당하지 않고, 온갖 복잡한 세력과 얽히지 않고, 그들에게 동네북 취급을 당하거나 그들의 희생양, 속죄양이 되지 않아야 하고,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너를 비웃을 것이다. “보세요. 저 사람 종교를 믿는 사람이에요.” “그 종교 믿는 사람 있잖아요. 자기 하나님은 이러저러하대요. 또 자기 하나님한테 기도하네요. 자기가 번 돈은 다 하나님이 준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그들에게 하나님 믿는 일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과 교제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는 전혀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 그들이 너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네가 좋다고, 착한 사람이라고 해 주는 것도 필요 없다. 너는 그냥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처리하면 된다. 넌 그저 보통 직원이고 이 업계의 평범한 일원일 뿐이다. 하나님은 네가 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도 원치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그들에게 교제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네가 그들을 멀리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네가 그들의 늪에 빠지지 않고, 어떤 시험에도 빠지지 않고, 더욱이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종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그들이 만든 각종 혼란, 음모, 곤경, 혹은 각종 복잡한 국면에 말려들어가지 않기를 원한다. 너는 언제나 네가 그 직업을 수행하는 목적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승진이나 벼락출세를 위한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기 위한 것도,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을 해서 보스나 상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 목적은 본인의 생계와 밥그릇을 확보하고, 이 세상과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고, 그런 다음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직장에서도 승진이나 연수, 유학 기회를 잡으려 애쓸 필요도 없고, 상사 눈에 들거나 더 직급 높은 상사 눈에 들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그럴 필요가 없다. 만약 네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며 생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너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자기 직업 범위 내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만 있으면 된다. 하나님은 많은 걸 요구하지 않는다. 네가 지켜야 할 원칙은 그저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것이다. 단순한 환경,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기계에 갈아 넣으며 스스로를 망치지 마라. 그것은 미련한 짓이다. 명백히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일하면 얼마든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도 언제나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하고, 자신의 직업이나 생계와 무관한 일에 발을 담그거나 참여하려 한다면 결국 스스로 온갖 복잡한 사람과 일, 사물에 빠져들고, 각종 사회 세력 사이의 복잡한 갈등과 다툼 속에 빠져들 것이다. 그럼 너는 하나님이 네게 마련해 준 환경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건 자업자득이고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너는 늘 일이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예배드리고 본분을 이행할 시간이 없다고만 한다. 이유야 어떻든 네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얼마 못 가 하나님 집에서 도태되고, 구원받을 희망도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네가 걸어가는 길이자 네가 선택한 길이다. 마지막에 네가 거두게 되는 결과는 바로 이런 것이다. 네가 처한 환경에서 하나님이 교제한 원칙대로 실행해서 자신을 잘 보호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다면, 설령 업무와 본분 이행을 병행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구원받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제 조건은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해서 평온한 마음을 갖는 동시에 자기 능력 범위 내에서, 그리고 자신의 유한한 조건하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네 가정 환경이 얼마나 힘들고 개인적인 여건이 얼마나 제한적이든 결국에는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 아래 너는 한발, 한발 진리 추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어쩌면 너는 네 개인적인 추구, 개인적인 노력과 치른 대가 때문에 결국 구원에 이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다. 그에게는 이런 생활이 너무나 지루하고, 세상에서 고립되어 사는 것이 너무 고독하고 외롭게 느껴진다. 각종 시비에 관여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는 것 같아 자신의 가치를 못 찾겠고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원칙을 포기하고 고독과 침묵을 깨뜨리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사회의 각종 세력에 휩쓸려 그들과 사소한 것을 두고 지나치게 따지고, 뒤엉켜 싸우고, 함께 소란을 피우고, 온갖 시비에 말려든다. 이런 삶에서 커다란 보람과 가치, 행복을 느끼며,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선택한 길은 무엇이냐? 바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길이다. 그러면 끝이다. 이 길로 들어섰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듣고 괜찮다고 느끼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해 보니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동안 실행한 다음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사는 건 너무 피곤한 거 아닌가? 남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이나 받고, 친구도 같이 다닐 사람도 없으니까 너무 외롭고 쓸쓸해. 사는 것도 너무 재미없고, 별로 좋지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것 같아.’ 그러면서 원래 생활로 돌아가 버리는데 이런 사람은 도태되고,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고독을 견디고, 하나님 요구대로 사느라 그룹 내에서 조롱당하고 따돌림당하는 고통을 견디는 대신, 각종 세력의 경쟁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세력에 휩쓸려 그들과 얽혀 소란을 피우고, 그들과 다투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택한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설령 그가 이런 설교를 듣고 괜찮게 여긴다 해도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회의 각종 세력에 휩쓸리는 쪽을 택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사람은 결코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네가 만약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길을 택하고, 생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다면, 적어도 너는 그 선택에 기반하여 구원받을 희망이 있고, 기본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의 희망은 존재하는 것이다.

예전에 교회에서 어떤 한 사람이 어디서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백인 한 명을 알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가 의원이었다. 사실 의원이 무슨 대단한 관직도 아니지만, 그 녀석은 해외에서 의원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대단한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본인도 지위가 올라간 기분이었다. 나중에 그 의원 아들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먼저 소개를 했다. “이 사람은 의원 아들이에요.” 내가 물었다. “의원 아들이라고? 아버지가 어떤 의원이지? 너한테 뭘 해 줄 수 있는데?” “아버지가 의원이라니까요!” 내가 말했다. “저 사람 아버지가 의원인 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의원인 것도 아니면서 네가 왜 나대느냐?” 그 녀석은 그렇게 우쭐했다. 의원 아들과 사귀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목에 힘을 주며 길 가다 아는 사람을 만나도 본체만체했다. 상대가 물었다. “왜 아는 체도 안 하는 거죠?” “지금 의원 아들이랑 같이 가고 있잖아요!” 얼마나 가벼운 녀석이냐! 이런 자는 불신파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이런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되느냐? (도태됩니다.) 교회에서 제명되어야 한다. 그런 자는 불신파이자 기회주의자이다. 그는 지위가 높고 세력이 있는 사람만 보면 빌붙는 인간으로, 하나님 집에 세력이 있는 걸 보고 하나님 집에 빌붙었다. 그러나 결국 얼마간 지낸 후 여기서는 돈을 벌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배달 일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위신이 서는 일도 아닌 데다가 나중에는 의원 아들과 사귀면서 자기도 지위가 생겼다는 생각에 배달 일도 그만두었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으냐? 교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일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위와 권력이 있는 사람을 알게 되면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또 자기 가치도 올라가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은 작은 감투를 쓰고 권력이 조금 생기니까 교회에서 자기는 남다른 사람이고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다 불신파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럴 실력이 전혀 안 되면서도 늘 허풍을 떤다. “내가 말이야, 대통령이랑 아는 사이야!” 혹은 “대통령 비서 둘째 이모 아들 친구가 나랑 아는 사이야!” 보아라. 몇 다리를 건너서 아는 사이를 굳이 입에 올리다니 어쩜 그리도 뻔뻔하냐? 그렇게 몇 다리 건너뛰다 보면 남들은 그가 도대체 누구에 대해 말하는지도 모르고 별로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남들은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 자신만 그 일을 가장 크고 중요한 일, 가장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자기가 무슨 부장, 무슨 국장이랑 아는 사이고, 무슨 고위 관료랑 아는 사이라고 떠벌린다. 심지어 이런 사람도 있다. “내가 경찰, 조폭 둘 다 알고 지내지. 양쪽 길을 걷는 것이 평지를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이런 사람도 있다. “현장 처제가 나랑 아는 사이야.” 또 이런 사람도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시장 어머니네 교우야.” 이런 걸 밑천으로 여기며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네가 일을 성사시키는 데 도움이 되느냐? 네가 시장이나 국장, 성장, 심지어 성장 어머니, 아버지라 한들 그런 네 신분이 교회에서 소용이 있느냐? (소용없습니다.) 시장이나 성장은 인류의 일원이 아니냐? 그들이 하나님보다 위대할 수 있느냐? 세력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런 불신파들이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자기가 무슨 경찰국장을 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이런 사람도 있다. “내가 왕년에 인민경찰 출신에 파출소 소장도 했었지.” “내가 전에 주민센터 주임이었잖아. 팔에 붉은 완장도 차고 다녔지.” 그들이 이른바 ‘세력’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일부 불신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이름만 걸어 놓고 믿는 자들, 어리숙한 자들은 그 말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도 몰라서 곧이곧대로 믿고 그들을 우러러볼 수 있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느냐? 그런 자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한눈에 그런 자가 불신파라는 걸 눈치챈다. 세상의 각종 세력, 세상에 속하는 일만 얘기하고 하나님 집에 와서도 그런 걸 자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네가 공직자나 유명인의 사돈의 팔촌과 아는 사이라 해도, 설령 네가 공직자, 유명인이라 해도 하나님 집에서는 한 푼 값어치가 없고, 너의 그 직함과 지위도 전혀 값어치가 없는데 뭘 그렇게 자랑하느냐? 너에게 진리가 있느냐? 원칙을 갖추고 본분을 이행하느냐? 아무것도 아닌데도 자랑할 염치가 남았느냐!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아니냐? 역겹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역겨우냐? 경찰, 조폭을 다 알고 지낸다고 허풍을 떨다니 그런 사람은 바보 아니냐? 얼간이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길까 걱정도 하지 않는다. 경찰, 조폭 둘 다 알고 지낸다니 완전 양아치가 아니냐? 양아치, 늙은 여우는 하나님 집에서 전혀 무가치한 존재요, 불신파에 해당하는 인간이니 마땅히 출교시켜야 한다! 그는 이런 걸 밑천이라고 자랑하는데, 이건 좀 모자란 게 아니냐? 그게 무슨 떳떳한 일이냐? 자랑까지 하다니! 어떤 자는 손목에 커다란 금팔찌를 두르고 술에 취해서 거드름을 피운다. “우리 조상이 모금교위(摸金校尉) 출신이라 대대로 기술이 전해지고 있지. 이 팔찌 보이지? 몇 년 전 한밤중에 어떤 큰 무덤을 뒤져서 빼낸 거라고. 어때? 대단한 거지!” 이 소리를 듣고 누군가 신고하는 바람에 그는 잡혀가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말한다. “지금 차고 있는 그 금팔찌가 이 시대 거요? 그건 문화재라고요!” 멍청하게 그는 스스로를 팔아넘겼다. 사실무근인 일을 함부로 떠벌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경찰을 불러들이고 스스로에게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허풍은 스스로에게 쉽게 화를 불러일으키고 스스로 무덤을 파고, 결국에는 멸망을 자초하게 되는데 당해도 싸다. 말을 할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건 모자란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한 끼에 왕만두 20개를 먹는다고 허풍을 떠는 건 그나마 괜찮다. 무슨 원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남들에게 바보 같다고 무시당할 수는 있겠지만 범법 행위는 아니다.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기라는 이 원칙의 기본은 사람이 사회의 어떤 곳, 어떤 그룹 안에서 생활하든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시대에 사람에게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라고 알려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을 잘 보호하려면 생계유지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사회의 각종 세력을 이용해서 이 사회에 발붙이고 그들의 일원이 되어 그들에게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려고 시도하지 마라. 그건 다 어리석은 발상이고 썩어 빠진 사상이다. 사람의 관념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사람이 어떤 사회 환경이나 어떤 그룹에서 생존하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한다면 사회와 인류로부터 버림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네게 숨결을 주는 한 살아갈 수 있다. 너는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안전과 생계를 보장받고, 자신의 미래와 모든 걸 보장받기 위해 각종 세력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생존 수단은 바로 직업 한 가지를 택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지 어떤 세력에 의지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직업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이 원칙은, 사람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인도와 예정 아래에서 물질, 금전 등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지 사회의 각종 세력이 베풀고 분배해 주는 것으로 네 개인의 생계를 해결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살아가며 매일같이 의지하는 물질적인 것이나 금전은 매일 호흡하는 숨결처럼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며,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은 아무도 앗아 갈 수 없다. 물질적인 것, 자기 몸 이외의 그 어떤 물건도 네 숨결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어느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다.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은 어느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다. 이 사실은 우리가 욥의 체험에서 볼 수 있으며, 너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네게 참된 믿음이 생긴다면, 너는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기라는 원칙을 지킬 기본적인 근거와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가질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네 몸과 마음, 영을 바칠 수 있고,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있다. 너는 이런 인식이 있어야 하고, 이 진리들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것’이라는 말은 하기는 쉽지만, 일이 닥쳤을 때는 너는 스스로 각종 원칙과 여러 가지 현실 상황을 근거로 판단을 해야 한다. 어쨌든,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목표는 그들을 멀리하고 그들로부터 구분되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이런 방식과 실행의 길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한편,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리 추구의 길을 걷고, 최종적으로 구원의 희망을 얻고 네 바람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최종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기라는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자,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길 중 하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기라는 원칙은 이제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방면의 원칙에서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느냐? 일부 특수한 상황의 경우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겠느냐? 어떤 세력에 가입했는데, 그것이 형식적이거나 그저 직업적인 필요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것은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기라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냐? 만약 직업적인 필요나 형식적인 것이라면 이 경우는 괜찮다. 우리가 말하는 세력은 이와는 관계가 없고, 형식적인 조직, 단체와도 관계가 없다. 여기에 관계된 것은 세력이다. 세력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권세, 집단적 역량, 또 이 사회에 횡행하는 힘, 일을 처리하는 힘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실행 원칙을 모두 깨달았으면 이제 다음 원칙을 교제해 보도록 하자.

넷째,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다. 정치는 민감한 주제다. 30년 전에는 특정 지도자나 정책, 정치 시사 등에 관한 얘기를 입에 올리면, 설령 그것이 교회에서 한 얘기라고 해도 많은 사람에게 지탄을 받곤 했다. 정치에 관련된 얘기만 했다 하면 물컵을 들고 나가 버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은 그런 화제를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한 채 이렇게 말했다. “정치를 논하는 건 당과 국가에 반하는 행위요. 당신은 반혁명 분자이니 잡혀가게 될 거요. 형제자매만 아니었다면 제가 신고했을 거요.” 그 시대 사람들은 정치에 무척 민감했다. 지금도 그러하냐? 교회에서 정치를 논하고 들추거나 큰 붉은 용, 사탄을 폭로하거나 정치적으로 보이는 내용을 언급할 경우, 대부분 이런 주제에 대해 아직도 그런 태도를 보이느냐? 지금은 조금 달라졌느냐? (그렇습니다.) 과거에 예배 때 어떤 악마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크리스천을 박해하는 등의 일에 관해 얘기했더니 어떤 사람이 목에 뭐가 걸린 듯 헛기침을 하고는 나가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교제를 들어 보더니 “아, 이제 반혁명적인 얘기는 안 하나 보군.” 하면서 다시 들어왔다. 그런데 네가 계속 교제를 이어 나가자 다시 헛기침을 하며 나가 버렸다. 나는 이자가 왜 계속 기침만 해 댔을까 생각했다. 사탄을 분별하고 사탄의 본질과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정치 얘기냐? (아닙니다.) 일부 어리석은 자들, 즉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소위 ‘영적인 자들’은 이런 주제에 큰 반감을 보인다. 그들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정한 정치 참여인지, 공산당이 말하는 반혁명이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분별하지 못한다. 그는 무지해서 공산당에게 세뇌된 채 자기도 반혁명 분자가 될까 봐 큰 붉은 용을 폭로하는 주제를 감히 말하거나 언급하지 못했다. 큰 붉은 용을 폭로하는 것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냐? 큰 붉은 용을 저버리는 것이 반혁명적이냐?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중국에 있어도 감히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당과 국가에 반하는 정치범이냐?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정치범이란 무엇이냐? 네가 정치에 참여했느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에 참여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정치범이 된 것이냐? (큰 붉은 용이 덮어씌운 것입니다.) 네가 도둑질에 가담했다면 절도범일 것이고, 살인에 가담했다면 살인범일 것이며, 강도에 가담했다면 강도범일 것이다. 이런 죄명들은 무엇을 기초로 성립되느냐? 해당 범행에 가담해서 죄명이 성립되면 그 범죄 행위의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그 범죄는 너와 관계가 없고, 해당 죄명 역시 너와는 무관하다. 사탄과 당을 추종하지 않고, 공산당에 반기를 들고, 큰 붉은 용을 반대하고 증오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정치에 참여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를 반혁명 분자 혹은 정치범으로 정죄할 경우, 그 죄명이 성립되겠느냐? (성립되지 않습니다.) 성립되지 않는다. 그건 황당한 일이다. 직업이 없는 농부가 농사지어서 수확한 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다가 빨간 완장을 찬 사람에게 걸렸다고 해 보자. “거기, 영업 허가증 있소? 위생증은?” “제가 허가증이 어디 있겠습니까? 직업도 없고 취직도 못 한 사람한테 무슨 허가증을 요구합니까?” 직장도 직업도 없는 농부가 물건을 팔았다고 허가증을 요구하다니 황당한 일 아니냐? 큰 붉은 용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너를 가리켜 정치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네가 국가 헌법 조항 제정에 참여한 적이 있느냐? 국가의 어떤 정치 운동을 획책한 적이 있느냐? 네가 어느 관청의 공무원이라도 되느냐? 어느 관청 공무원들의 내부 투쟁과 내홍에 낀 적이 있느냐? 국가 차원의 대회나 회의에 참여한 적이 있느냐? (모두 없습니다.) 정치 참여는 고사하고 알 권리조차 없는 네가 급기야 정치범으로 정죄되다니 이건 근거 없는 죄명 아니겠느냐? 황당한 나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보 같은 이들은 아직도 이렇게 생각한다. ‘이를 어쩌나? 정치범, 반혁명 분자로 정죄되다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정말 큰 수모를 당하게 되는구나!’ 바보 같지 않으냐? 심지어 하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반혁명 분자, 정치범으로 정죄되어 15년, 20년 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 일부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뒤 그 일을 치욕스럽게 생각한다. 동창이나 친구들, 가족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뒤에서 손가락질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너를 버리고 큰 붉은 용이 너를 박해하는데, 그들이 모두 정의로우냐? 모든 인류가 일어나 너를 박해한다면 진리가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것이 되느냐? 진리는 영원히 진리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일어나 반대한다고 해도 진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사탄의 사악한 본질 역시 변하지 않는다. 설령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진리는 진리이며, 이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사실이다. 모든 인류가 일어나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인류는 사악한 인류다. 그 수가 많고 세력이 크다는 이유로 사탄의 사악한 세력이 정의로운 것으로 될 수는 없다. 거짓말을 만 번 반복하면 진리가 된다는 말은 사탄의 궤변이자 사탄의 논리일 뿐,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큰 붉은 용에게 박해와 모욕을 당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냐?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 네가 의를 위해 박해받는다면, 그건 이 세상이 정말 사악하다는 증거이며, 온 세상이 악한 자의 손 아래 놓여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네가 의를 위해 박해받을 때, 아무리 정당한 길을 걷고 아무리 정의로운 일을 해도 일어나 칭찬하는 이 하나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저지르는 부끄러운 짓들은 포장과 조작만 거치면 긍정적 사물로 변모해 세상에 공개된다. 그러니 그들이야말로 사악한 자들이고, 그들의 행위는 모두 더러운 짓거리다.

정치를 멀리하는 일에 대해 계속 교제해 보자. 정치란 무엇이냐? 정치가 무엇인지 알아야 어떻게 정치를 멀리할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정치란 무엇이냐? 가장 기본적인 한 가지는 관직에 오르고 벼슬길을 걷기 좋아하는 것으로, 이는 정치 영역의 한 가지 부분이다. 정치란 곧 관직에 오르고 벼슬길을 걷는 것이다.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기관의 주임이나 과장부터 당 지부 서기, 당위 서기, 나아가 처장, 국장, 부장 등 여러 기관장에 이르기까지, 이런 자리에 오르는 것이 곧 정치다. 정치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세력, 권세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적인 권세의 상징이다. 이것이 정치의 한 부분이다. 정치에 해당하는 것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 국가 정권을 빼앗거나 세우거나 공고히 하기 위한 일종의 투쟁도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인사 투쟁, 권력 투쟁도 모두 정치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투쟁 속 음모, 공공연한 모략, 수법, 그리고 정치 및 권세와 관계된 각종 선거, 운동, 세몰이도 모두 정치에 해당된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치다. 조직이나 당을 가까이하고 진보를 요구하는 것은 작은 인물의 정치 아니겠느냐?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작은 인물, 큰 그림’이라고 한다. 비록 지위는 미천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조직이나 당을 가까이하며 진보를 요구한다. 이를 위해 우선은 청년단에 가입한 후 다시 당에 가입하는 식으로 점차 당에 접근한 뒤, 당의 명령과 지휘, 방침과 정책, 방향을 따른다. 이렇게 당에서 지시한 방향대로 엄격하게 실천함으로써 한 당원의 당성을 충분히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당을 위해 말하거나 일하는 등 당의 이익과 통치, 지위를 수호하고, 인민들 마음속 당의 이미지를 지키는 등 당의 모든 것을 지킨다. 이런 것이 다 정치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조직을 지킨다고 할 때, 그 조직은 곧 당을 말한다. 어느 당파, 어느 당에서 만든 조직이든 참여하는 한, 너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너희는 정치에 참여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안심해도 된다. 너는 정치범이 아니고, 스스로를 정치범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 정치범이라면 최소한 해외로 나가 인권 기구나 단체를 결성하고 인권 활동을 하면서 현 정부의 정책과 통치, 정부가 하는 여러 가지 일에 반기를 드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또한, 해당 조직은 규정, 장정, 헌법을 제정하고 조직의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조항도 갖추어야 한다. 조직 체계와 규율을 갖추고, 지도자 밑에 실무를 담당하는 인원들이 있어 위에서 아래까지 완전한 일련의 조직 체계를 이루어야 비로소 정치 단체라고 칭할 수 있고, 이런 정치 단체에서 일을 해야 정치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너희 중 정치에 참여한 사람이 있느냐? 참여하지 않았다면,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없느냐? 어떤 정당에 가입해서 최소한 의원이나 고문 자리를 맡을 계획을 가진 사람은 없느냐? 그럴 계획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정치에 참여했다는 뜻이 된다. 아직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정치에 참여하려는 의사가 있는 것이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아주 바람직하다. 국민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도 정치 참여로 볼 수 있겠느냐? 국민에게 투표권이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네가 어느 후보자에게 한 표를 행사했다면, 이것을 정치 참여라고 볼 수 있느냐? (아닙니다.) 그건 정치 참여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 나라의 정책과 제도가 그렇다면 국민은 투표할 권리를 가지며, 이는 정치 참여에 해당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바람에 따라 특정 인물을 선택했지만 그들의 정권 투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므로 너는 어떠한 정치 활동과도 관계가 없으며, 단지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 한 표를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행위는 단순히 국민의 권익을 행사한 것일 뿐, 정치 활동도 아니고 정치 행위도 아니다.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교제가 된 것 같구나. 그러니 이제 ‘정치를 멀리하는 것’도 명확해졌을 것이다. 정치를 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먼저 정치를 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 얘기한 다음 왜 정치를 멀리해야 하는지 얘기해 보도록 하자. 방금 정치가 무엇인지에 관해 얘기했다. 정치란 무엇이냐? 우선 권력 투쟁에 참여한다면 이는 정치 참여이다. 우리는 모두 평범한 인물이므로 여기서는 대통령이나 당 주석, 혹은 국가 고위 정치 기구의 어떤 직위 등을 얘기하지 않고, 일반 국민들이 접할 수 있는, 기관의 당 지부 서기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당 지부 서기는 정치인이냐? 한 기관에서 당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 이는 최고 지위의 정치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치를 멀리해야겠느냐? 멀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그런 정치인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이냐? 하지만 직장에서는 그를 피하기 힘들다. 네가 접촉하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 그 일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자네, 왜 나와 가까이하지 않는 건가? 왜 날 피하는 거지? 당 지부 서기인 내가 맘에 들지 않는 건가?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다면, 자네 사상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우리 얘기 좀 하지.” 그는 차나 한잔하자며 너를 부를 것이다. 그러면 그 차가 넘어가겠느냐? 차를 마시러 갈 엄두가 나겠느냐? 당 지부 서기가 얘기나 하자며 너를 불렀다고 하자. “미스터 장,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꽤 됐지요. 5년 됐습니다.” “자네, 사람이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입당 안 했지?” 이럴 때 뭐라고 해야겠느냐? 어떻게 대답해야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겠느냐? (아직은 당원이 될 자격이 안 된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런 게 지혜다. 그 말이 솔직한 대답이냐? (아닙니다.) 사실 그건 얼버무린 것이다. ‘이 늙은 여우, 마귀 같으니라고. 내가 입당하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나를 입당시키고 싶은가 본데, 그깟 당이 뭐라고?’ 속마음은 이렇지만 그 마귀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는 체해야 한다. “에휴, 고참 당원이신 서기님은 우리 젊은 사람들 고충을 모르십니다. 젊은 사람들은 경력도 짧고 업무 성과도 별로 없어서 입당 자격이 안 돼요. 신성한 당에 함부로 가입할 수 있나요? 입당이야 하고 싶지만 그게….” 이렇게 두어 마디만 하면 끝난다. 정말 입당하고 싶은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입당하면 승진시켜 주고 관직을 주는 등 특혜를 주겠다고 해도 마다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관직에 오르고 벼슬길을 걷는 기본 조건은 먼저 조직과 당에 가입한 후 당에 다가가는 것이다. 당을 가까이해야 관직을 맡고 승진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정치를 멀리하려면 먼저 정당을 멀리해야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공산당만 멀리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다. 모든 정당을 멀리해야 한다. 정당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일종의 정치 세력을 의미한다. 해당 정당의 정치 선언, 정치 강령, 정치적 목표를 취지로 하는 하나의 집단을 바로 정당이라고 한다. 그 정당의 취지와 강령이 무엇이든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바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자신의 세력과 힘을 이용해 정치적 경쟁과 정치 범주 속에서 필사적으로 세력과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당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어떤 정당이든 존재하는 목적은 국민들의 이익이 아니라 세력과 권력에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권력을 잡고 자신의 세력을 얻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정치를 멀리하는 첫걸음은 바로 형식상 어떤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는 것이다. “저는 전에 어떤 정당의 당원으로 있었는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경우는 조금 난감하다. 탈당하겠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건 형식상 그들과 관계를 끊는 것이다. 만약 네가 탈당을 원치 않거나 탈당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스스로 잘 생각해서 처리해라. 요컨대, 형식으로든 마음으로든 정치와 관련된 것을 멀리해야 하는 항목 중 우선적인 문제는 바로 정당을 멀리하는 것이다. 정당을 멀리하면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 어떤 정치 세력에도 휘둘리지 않고, 어떤 정치 세력을 위해서도 일하지 않게 된다. 어느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정치를 멀리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구체적인 실행의 길이다. 이 밖에, 어떤 정치 세력을 대하든, 상대가 기관의 당 지부 서기든, 국장이든, 혹은 인사 담당자든, 그들을 대하는 원칙은 바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 지부 서기가 너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해 보자. “미스터 장, 시간 있나? 퇴근 후 같이 식사나 하지. 내일은 주말인데 같이 운동도 하고 말일세.” “어쩌죠? 하필 집에 아이가 아파서요. 어제 열도 좀 나더라고요. 일 때문에 병원에 다녀올 시간이 없어서 주말에는 병원에 데려가야 해요.” 얼마 후, 그는 또 말을 붙인다. “미스터 장, 우리 한동안 얘기도 못 나눴으니 간만에 회포나 좀 풀지.” 그의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너를 후임으로 키우려는 것이다. 눈치를 못 채겠다면 그가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잘 생각해 봐야 하고, 눈치를 챘다면 얼른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아, 어제 저희 어머니가 좀 편찮으셨어요.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이거 원, 가는 날이 장날이네요. 어쩌죠?” 자꾸 거절을 당하면 서기도 생각할 것이다. ‘약속만 잡으려 하면 일이 생기고, 다가갈 때마다 일이 생기는구나. 호의도 못 알아채다니 다른 사람 알아봐야지!’ 그가 누굴 찾으려고 하든 내버려두어라. 어쨌든 너는 그를 멀리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꽤 친근하게 대하다가도 너를 키워서 발탁하려고 할 때마다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거리를 두니, 그로서는 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네 마음은 너무나 확실하다. ‘이런 마귀 같으니라고. 난 당신한테 다가가지 않아!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나님께서는 정치를 멀리하라고 하셨어. 당신은 정치하는 작자이니 난 당신을 멀리할 거야. 나를 관직에 앉히고 내 재능을 이용해서 당신에게 충성하게 만들려고? 어림도 없지! 여기에서 청소하고 쓰레기나 버릴지언정 그런 자리에는 안 가! 급여나 받아서 혼자 먹고살 수만 있으면 됐지 당신들 뒤치다꺼리는 안 한다고!’ 하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서기님, 윗사람들이야 가슴에 천하를 품으신 데다가 할 일도 많으시잖습니까. 인민을 위해 봉사하느라 마음속에는 오직 인민뿐이시고요! 저희 같은 민초들은 생각이 짧아서 제 배 채울 생각만 하지 윗사람들처럼 멀리 보지 못하고, 또 그분들이 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답니다.” 늘 그 앞에서 멍청한 척 능청을 부리며 네 속을 알 수 없게 하고,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던 재능을 절묘한 타이밍에 조금 보여 주면 그는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 녀석 재간은 있군.’ 평소에 자주 잔실수를 해서 ‘이 사람은 아니야.’라는 생각을 심어 주다가도 업무에서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보여 준다면, 이건 매우 지혜로운 처신이다. 이는 마귀 사탄을 가지고 놀면서 그들을 이용해 힘쓰게 하고 그들의 돈을 벌고, 그러면서도 거리를 두고 속으로 그들을 혐오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거리 두기다.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평소 자가용을 타고 여기저기 유명한 식당을 찾아다니는 상사가 너를 찾아온다. “미스터 장, 우리 나가서 식사하세. 뭐 먹을 텐가?” “짜장면도, 옥수수 떡도 못 먹은 지 한참 돼서 그런 거나 좀 먹었으면 합니다. 집에 가서 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서기가 말한다. “뭘 먹는다고? 그런 걸 누가 먹나? 사람이 먹는 거 아니지!” 입맛이 싹 달아난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 친구, 안 되겠군. 요즘 누가 옥수수 떡이나 짜장면을 먹겠어? 이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잘 먹는데!’ 그자들은 관직에 앉아 공금으로 식당을 드나든다. 폼 나고 근사하게 관리 행세를 하느라 산해진미만 찾으면서 한 끼에 천 위안이 넘는 식사를 하곤 한다. 원숭이 골, 고슴도치 가죽 등 온갖 음식을 먹고 다니는데, 이 요괴, 마귀들에게 못 먹을 것이라곤 없다. 너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당신들이 짓는 죄에 일조할 순 없지. 당신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겠어. 인육을 먹고 고혈을 빨아먹는 마귀들아! 집에 가서 짜장면, 옥수수 떡을 먹을지언정 그런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지는 않을 거야. 맨밥에 소금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한테는 다가가지 않을 거고, 당신이랑 어울려서 그 죄에 일조하지도 않겠어. 인육을 먹고 고혈을 빨아먹는 건 사람이 아니라 마귀가 하는 짓이야. 나중에 그 끝이 어떻겠어? 지옥에 떨어져 벌받을 게 뻔하지! 내가 당신 권력 아래서 적당히 지내면서 밥그릇을 지키는 건 생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서지 관직에 오르고 정치를 하려는 게 아니라고. 난 정말이지 당신이 혐오스러워!’ 그래서 상사가 아무리 크게 대접하겠다고 해도 너는 가지 않는다. 주말이 되면 노래방에 가서 아가씨들 불러 놓고 비싼 술 마시자고 연락이 오고, 찻집에 가서 노닥거리고 즐기면서 트랜스젠더 쇼나 구경하자고 연락이 온다. 나가겠느냐? 조직과 당에 다가갈 생각이라면 그런 곳을 모두 따라다녀야 한다. 하지만 지금 너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을 실행해야 하니 정치를 멀리할 것입니다. 그런 일은 모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죄에 일조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날 그들은 모여서 어느 아가씨가 예쁘게 생겨서 최고라느니, 무슨 노래를 잘했다느니, 프랑스의 몇 년 산 술이 괜찮았다느니, 어디가 놀기 좋고 온천물이 어떻다느니 하며 시시덕거릴 것이다. 온통 그런 얘기뿐이다. 부럽냐? 샘이 나느냐? 그럴 때면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요괴 마귀들이 하는 허튼소리를 듣지 마라. 그들을 멀리해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그들의 죄에 일조하지 말고, 지저분한 그들의 생활을 멀리하고 그들과 한데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정치를 멀리하는 데 있다. 진보를 요구하며 조직에 다가가 관직에 오르고 싶어 하는 자들이 그렇게 사는 목적은 사실 정치에 참여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고, 정치권에서 말단 관직이라도 얻어 사람답지도 않은 생활을 해 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들과 정반대로 그 지저분한 생활을 멀리해야 한다. 그런 생활을 멀리하는 목적은 정치적 앞날을 마다하고 그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고,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받는 미래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네가 하는 모든 일은 부질없는 희생이 아니라 의미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이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 위한 일이다. 너는 별종도 아니고, 고립된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이런 죄악의 삶을 멀리하는 최종 목적은 사실 그들 사이에서 떨어져 나와 그들이 말하는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를 멀리하는 두 번째 실행 원칙, ‘거리 두기’이다.

정치인과 거리 두기는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다음으로는 ‘참여하지 않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과장이나 주임, 또는 국장으로 승진할 기회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앞다투어 자기를 과시한다. 실적을 올리고, 상사에게 뇌물을 주고, 뒤에서 손을 쓰고, 연줄을 찾는 등 보스나 상사에게 자기 재능과 능력,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한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이용 가치라고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들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손바닥 지문이 닳도록 아첨을 하면서 보스나 상사가 시키는 일은 자신이 하기 싫어도 무엇이든 다 하는데, 누군가는 돈을 바치고, 누군가는 심지어 몸까지 바쳐 가며 정치 싸움에 뛰어든다. 정치 싸움에서 상사와 관계를 맺는 사람도 있고, 거금이나 비싼 선물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자기 몸을 상사에게 바치는 사람도 있는데, 최종 목적은 상사에게 발탁되고 키워져 정치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그런 방법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멀리해야 한다. 첫째는, 자신의 정치적 앞날 혹은 관직을 위해 뇌물을 바치고 연줄을 찾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자기가 나서서 상사에게 보여 주려고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지 말고, 나아가 비정상적인 수단을 써 가며 자리를 다투지 말고, 남들이 다투더라도 너는 다투지 말아야 한다. 상사가 너를 거론할 때마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는 자격 미달이라 기권하겠습니다.” 네가 자격 미달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양보한다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상사가 말한다. “미스터 장, 이번에는 자네 차례야.” “자격이 아직 안 됩니다. 서기님, 저는 패스하시죠. 능력이 안돼요. 이OO는 어떠세요? 이OO가 안 되면 왕OO가 있잖아요. 그 친구들에게 하라고 하시죠.” “자네 바본가? 그 친구들이 올라가면, 그 혜택들이 다 물 건너가는 거야. 자넨 관사에도 못 들어가고, 보너스도 못 받고, 급여도 안 오른다고.” “그래도 할 수 없죠. 전 지금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으니 걱정 마세요. 정 걱정되신다면 연말에 보너스나 두둑이 챙겨 주시면 되잖아요.” 이렇게 너는 그들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원하는 사람들끼리 싸우게 둔다. 어떤 수단도 쓰지 않고, 어떤 노력,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승진이라는 일에 돈 한 푼 쓰지 않고, 말 한 마디도, 일 하나도 더 하지 않고, 열심히 뛰지도 않는다. 설령 네가 조건이 되고, 인맥도 있고, 적절한 대중적 기반이 있다 해도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내려놓는 것이고, 진정으로 멀리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네가 안타까워서 계속 다그친다. “자네 바보 아닌가? 멍청하긴!” “마음대로 생각해. 어쨌든 난 빠질 거야.” “왜 그러는데?” “지금 벌이로도 충분하고, 자격도 안 돼. 자네들이 다들 나보다 뛰어나잖아. 자네들이 지원해.” 참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냐? (가능합니다.) 당연히 과장, 주임으로 승진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국장이나 성장(省長)으로 승진하는 일이라면 참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냐?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직위가 높을수록, 권력이 클수록 유혹도 그만큼 커진다. 권력이 커질수록 대우가 좋아지고, 네 발언권이 커지고, 육도 그만큼 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아라. 시장에게는 시장 관저가 주어지고, 성장에게는 성장 관저가 주어지고, 대통령에게는 대통령 관저가 주어지고, 밖에서나 집에서 드는 비용도 다 나랏돈으로 충당한다. 그러니 고위층과 접촉할수록 더 큰 시험에 빠지고, 고위층에 접촉할 기회가 많을수록 포기하기가 어려워진다.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너는 말단에서 일하며 고위층의 세계에는 발을 뻗지 않는다. 그 안에는 발 한 쪽도 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멀리하는 것’이다. 네 모든 말과 행동은 정치와 무관하고 모두 정치를 멀리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각축전에서 누가 성공적으로 장관의 자리에 오르거나 커다란 권력을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너는 질투하거나 상심하지 않고, 또 후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너는 또 한 번의 시험에서, 혹은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치를 멀리하라는 원칙을 실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너는 사탄 앞에서 승리했고, 하나님 앞에서 이긴 자가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께 칭찬받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저를 칭찬하셨으니 급여를 올려 주시지 않을까요?” 그건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이긴 자라고 칭찬하고 인정했다는 것은 네가 구원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고 하나님이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정치에 관련된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쉬운 일이냐, 아니냐? 원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달려들고, 그 일을 위해 입을 열고, 그 일로 바삐 뛰어다니더라도 너는 관여하지 않고,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는 진보를 요구하지 않고 관직에 전혀 목표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치를 멀리하기의 세 번째 원칙인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를 멀리하기의 네 번째 원칙은 바로 ‘줄을 서지 않는 것’이다. ‘줄서기’는 정치하는 사람 사이에서 통용되는 말로, 정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바로 이 줄서기이다. 네가 A당 편에 선다든가 아니면 B당 편에 서는 것은 정치에 참여할 때 표명해야 하는 태도다. 일단 정치에 참여하면 반드시 줄을 서야 한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줄서기는 필요가 없고, 혹은 네가 줄을 서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네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그들 사이의 어떤 투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양쪽이 투쟁하는 이유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너는 줄을 서지 않는 것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A에 찬성인지 B에 찬성인지 너에게서는 결론도 답변도 들을 수 없다. 너는 말한다 “저는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기권하겠습니다. 저는 A하고도 사이가 좋고, B하고도 사이가 좋아요. 하지만 어느 쪽에도 다가가지 않습니다. 당신들 중 누가 싸우더라도 저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대체 A쪽이라는 거야, B쪽이라는 거야?’ 그들은 늘 너를 쟁취하려고 하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네가 누구 편에도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급기야 직속상관이 말한다. “이 친구 정말 얍삽하군. 왜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지지하지 않았는가?” “서기님, 전 서기님하고 가까워질 엄두가 안 납니다. 그만한 포부도 없고, 업무 능력도 별로라서 서기님을 실망시켜 드릴까 봐 두렵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저는 그저 돈 몇 푼에 목매는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죠. 줄서기 할 엄두가 안 납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다음번에는 적극 지지하겠습니다.” 사실 너는 그 일을 얼렁뚱땅 넘겼다. 그의 눈 밖에 나지도 않았고, 네 대답을 듣고 그도 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끼리 어떻게 다투고 싸워도 너와 관계가 없다. 너는 아웃사이더다. 왜 그렇겠느냐? 네가 추구하는 바가 벼슬길이나 관직에 오르는 것이 아니고, 벼락출세하고 조상을 빛내는 것도 아니고, 정치에 발을 들이는 것도 아니다. 너는 정치적 앞날을 추구하지 않는다. 네 목적은 관직을 멀리하고 그들과 같은 정치인을 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의도적으로 줄을 서지 않는 것이다. A도 선택하지 않고 B도 선택하지 않는 한편, 누가 어느 편에 서는지도 상관하지 않는다. 누군가 널 설득하려고 하면 너는 그때마다 웃어넘기거나 어리둥절한 체한다. “저는 누가 맞는지 몰라요. 다들 친한 사람들인데 누가 이기든 좋죠.” “이 친구 정말 능구렁이 같군 그래!” “능구렁이라니요? 저는 멍청해요. 당신들이야말로 잘나신 분들이죠!” 너는 그들에게 능청을 떤다.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느냐, 안 되느냐? 바보같이 누가 널 이용하려고 할 때 따르지 마라. 정치는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물이 흐리다. 바닥까지 보이는 투명한 샘물이 아니라 탁한 물이요 진흙탕이다. 너한테 잘해 주는 상사가 있으면 너는 그에게 다가가고, 그 뒤에 줄을 선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이 복인지 화인지 너도 분간을 못 하고, 그의 미래가 어떨지, 철창신세를 질지 아니면 벼락출세를 할지 너도 잘 모른다. 그들은 모두 진흙탕 속에 사는 악어들이다. 크고 작은 악어들 사이에서 너같이 평범한 사람은 그들이 하는 말들이 과연 진짜인지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그들이 누구와 사이가 좋고 누구와 나쁜지, 그들이 매일 하는 일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너는 전혀 분간할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쉽고도 좋은 원칙이 바로 줄을 서지 않는 것이다. 그가 너에게 잘해 주어도 그에게 친절하고, 그가 너에게 잘해 주지 않아도 그에게 친절해야 한다. 단, 그의 뒤에 줄만은 서지 말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저 웃어넘기고, 뭐가 뭔지 모르는 체하고, 뭘 물어도 모른다고, 잘 모르겠다고, 못 봤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대처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원칙을 교회 안에서 적용한다면 적절하겠느냐? (부적절합니다.) 이런 방법은 마귀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만 적용하고,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것은 지혜다. 마귀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바보같이 굴지 말고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누가 너를 잡아끌더라도 그 뒤에 줄을 서면 안 된다. 누가 너에게 반발하고 반감을 품어도 그에게 대항하지 말고 그에게 맞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네가 그에게 반발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것이 지혜다. 어떤 정치 세력과도 힘겨루기를 하지 말고, 어떤 정치 세력도 가까이하지 말고, 어떤 정치 세력과도 결탁하지도 호의를 보이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것이 지혜이고, 이런 것이 줄을 서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제 배웠느냐? (배웠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모르는 체하고, 그냥 멍청한 척해서 그들 눈에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보여야 한다.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만 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해서 그들 맘에 쏙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느 정도로 마음에 들어야 하느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처럼, 그저 듣기만 하고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 사람, 상사의 소식을 알아 내려 하지도 다른 사람의 정보를 캐려고도 하지 않는,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끝까지 그들에게 네 진짜 생각을 들켜서는 안 된다. 진짜 생각이나 의도가 드러나면 그들은 너를 혼내고 괴롭힐 것이다. 그의 뒤에 줄 서지 않으면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거절을 하더라도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느냐? 그의 눈에 너는 친구 아니면 적이다. 만약 네가 적으로 비쳐진다면 너는 그에게 괴롭힘의 대상, 즉 눈엣가시가 되는데, 그러면 그는 너를 괴롭힐 것이다. 따라서 너는 시치미를 뚝 떼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네 능력을 과시하지 마라. 어떤 일에 대해 생각과 관점, 입장과 태도를 드러낸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사탄 마귀 앞에서, 특히 네가 접근한 대상이 정치 단체라면 너는 특히나 조심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과시하지도, 똑똑한 체하지도, 으스대지도 말고, 자신의 가치를 굳이 증명하려 애쓰지도 마라. 몸을 낮춰야 하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생존 환경에서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고 싶다면, 또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에 이르고 싶다면 네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어떠한 정치 세력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고, 그들에게 공격 대상, 혹은 손보고 괴롭혀야 할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다. 네가 늘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따르지도 않고 멀리하면 그는 너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괴롭히려 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그의 눈에 네가 재능과 업무 능력이 뛰어나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다. 만약 네가 후임이 되면 자신의 과거를 폭로하지 않고, 앞으로도 자신의 명성에 해가 되지 않겠다 싶으면, 그는 너를 키워 주려 할 것이다. 그가 너를 키워 주려는 것이 너에게 좋은 일이냐? (아닙니다.) 그가 너를 키워 주려고 눈독을 들이는 건, 악령이 누군가에게 들러붙으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맞습니다.) 그가 너에게 눈독을 들인다면 너에게는 좋을 게 없다. 그러니 눈독 들이기 전에 그의 맘에 드는 일이 없도록 바보처럼 보여야 한다. 이를테면 뭘 해도 썩 잘하지 못하고, 대부분 통과는 하지만 영 시원찮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딱히 잘못된 부분을 꼬집을 수 없어서 자르기도 애매한 정도면 된다. 그러면 성공이다. 네가 일을 너무 잘하고, 무슨 일이든 똑 소리 나게 해서 그의 맘에 쏙 들고 높이 평가받는다면 그건 좋지 않다. 하나는 그가 너를 자신의 정치적 길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하나는 그가 너를 키워 주려 할지도 모른다. 이건 둘 다 너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니 네가 이 사회에서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각종 세력을 피하고 멀리하는 것 말고도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일이 바로 각종 세력 혹은 너의 직속상사와의 관계 및 이와 관련된 일들을 잘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자기를 과시하기 너무 좋아하고, 너무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거나 전혀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한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어떤 일을 밀어낼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상황 말이다. 그러니 이 일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께 자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차분히 하고 너를 인도해 달라고, 네게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상황 파악을 잘 해서 이 복잡한 바닥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평온히 하고 말씀을 먹고 마시고 묵상하기 위한 기본 조건을 갖출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기본 조건을 갖출 수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것이 줄을 서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정치를 멀리하기의 또 다른 원칙은 바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 관점과 태도, 동향에 관련되거나 상사의 뜻과 의도, 상사의 눈길과 생각, 그가 하는 말의 옳고 그름에 관련될 때 입장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 상사가 묻는다. “방금 내가 한 말에 동의하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뭐라고 하셨나요? 제가 가는 귀가 먹어서 못 들었습니다.” 기분이 언짢아진 상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너는 속으로 생각한다. ‘좋았어. 난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너는 모르는 체해야 하고, 늘 입장을 밝히지 말고 “의견이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본인이 총명하다는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손을 번쩍 들어 입장을 밝힌다면 너무나 멍청한 짓이다. 상사에게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말고, 어떤 동료에게 불만이 있거나 상사가 어떤 일을 잘못 처리하는 것을 보더라도 아무 소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상사가 너에게 물어볼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크게 치켜세워야 한다. “참 잘하셨습니다. 저희 같은 조무래기들하고는 차원이 다르시네요. 정말 배려심이 깊으십니다요!” 그리고 칭찬을 들은 상사가 입이 귀에 걸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목적을 달성했으면 더 이상 칭찬하지 않아도 된다. 칭찬도 역겹다. 상사가 위에서 내려온 정책이나 의견, 실시해야 할 업무, 또 어떤 일에 대한 입장을 밝힐 때는 어물쩍 넘기거나 그럴듯한 말로 넘기도록 해라. 그 말을 들으면 상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녀석은 평소에도 어리숙하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구나. 이상할 것도 없지.’ 됐다. 이번에도 보기 좋게 속여 넘겼다. 상사가 뭐라고 해도, 때려 죽여도 입장을 밝혀서는 안 된다. 만약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상사가 입장을 밝히라고 하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대답해라. “어이쿠, 흰쌀밥을 많이 먹었더니 혈당이 올라가서 머리가 띵하네요.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다음에 얘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대충 얼버무리면 된다. 상사가 만약 사람을 시켜 상사와 당 위원회, 국가 정책에 대한 네 생각이 어떤지 떠보려 할 때, 너는 생각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공개적인 입장은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입장은 무엇이냐? 생각이 있더라도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두고 ‘귀신을 속인다’고 한다. ‘묘에 가서 지전 대신 신문지를 태우는 것, 즉 귀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으냐? 근본적인 옳고 그름에 관계된 일 앞에서 비록 입장과 관점이 있더라도 입장을 밝혀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런 일은 하나님 믿는 일이나 진리와 관계된 것이 아닌, 마귀 세상의 일에 속하는 것으로, 하나님 믿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 입장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무엇이든 우리와는 관계가 없고, 우리가 입장이 있더라도 그것은 그저 그들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분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과 실행 원칙은 바로 그들을 멀리하고 거절하는 것이고, 그들의 영향과 통제를 거절하는 것이다. 남들의 입장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 그것은 마귀 세상의 일로, 하나님 믿는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 일은 진리 추구와도 무관하고, 구원받는 일과도 무관하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는 더욱 무관하다. 그러니 너는 어떤 입장도 가질 필요가 없고, 어떤 입장도 밝힐 필요가 없다. 너는 어떤 일도 그저 웃어넘기면 된다. “서기님, 저는 생각하는 차원도 단순하고 사람도 흐리멍덩합니다. 정치를 이렇게 오래 배웠는데도 사상적으로 어떤 정치 혁명도 일으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은 지금 위에서 내려온 정책이나 서기님 생각을 도통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이렇게 대답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바로 귀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도 된다. “서기님 두 눈은 맑고, 민중의 눈도 밝은데, 유독 저만 두 눈이 흐릿해서 아무것도 간파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당원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당성도 없습니다. 이런 일은 제대로 볼 줄 모릅니다. 서기님이 얘기하시죠. 서기님 생각이 우선이죠. 서기님이 결정하시면 저희는 따르겠습니다. 저희는 진행만 하면 됩니다.” 간단하지 않으냐?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대충 얼버무리고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상사가 네 뜻을 알겠느냐? 모른다. 그는 네가 그저 멍청한 줄 안다. ‘현실에만 안주하려 하는군. 그 조건이면 남들은 진작 출세했지. 시장도 됐을 걸세. 성장을 해도 될 재목인데 어째 진보할 생각을 안 하고 종일 어리바리하게 구는지 원. 조직에 다가오지도 않고, 얼간이가 따로 없구만!’ 네 속마음은 어떻겠느냐? ‘내가 당신 눈에야 얼간이지만 하나님 눈에는 순결한 비둘기이니 당신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야. 늙은 마귀 같으니라고. 관직에 앉아서 정치에 참여하니까 자기가 남들보다 높은 줄 아나 본데, 내 눈에 당신은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야!’ 이런 말은 입 밖에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말하면 안 된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걸 명심하고, 집에 가서 개한테나 내뱉으면 그만이다. 이 세상에는 네가 신뢰할 만한 사람도 얼마 없고, 네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도 얼마 없다. 그러니 근본적인 옳고 그름에 관한 일을 마주했을 때는 정치권이나 어떤 사회적 집단 내에서도 입장을 밝히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특히 정치, 권세, 줄서기와 관계된 일이라면 절대 입장을 밝혀서는 안 된다. 입장을 밝히는 것은 자기를 불 위에 올려놓고 굽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 위에 올려놓고 굽는 기분이 어떻겠느냐? 궁금하면 한번 입장을 밝혀 보면 알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있느냐? 그건 네가 속으로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말로 관직을 추구하고 관직에 오르기를 원한다면 너는 단순히 입장을 밝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그것도 상사가 있는 자리에서 그 입장을 표명하면서 위로 올라가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형편없는 인간이다. 너는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정치에 참여하겠다면 하나님 집에서 비비지 말고 썩 물러가거라. 너는 하나님 선민, 하나님 집에 속한 자가 아니라 불신파요, 세상에 속한 자요, 마귀에 속한 자이다. 설령 하나님 집에서 지낸다 해도 너는 공짜 밥을 먹고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온 자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네가 관직에 오르고 벼슬길을 걸을 기회가 많아서 본인의 조건이 뛰어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다가가지 않고, 참여하지 않고, 줄을 서지 않고,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면, 너는 정치를 멀리한 것이 된다. 이 원칙들을 다 기억할 수 있느냐? 쉽게 행할 수 있느냐?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보아라. 대개 정치권에서 늘 자신을 과시하며 나서려는 자, 늘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밝히려고 하며 입장을 표명하려고 안달이 난 자의 목적은 단 하나, 관직에 오르려는 것이다. 좋게 말해서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것이지만, 사실은 관직에 올라 권력을 쥐고 싶고, 관직 덕에 먹고 마시고 즐기고 싶고, 관직을 통해 자신의 각종 목적을 달성하고 자신의 명망을 높이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질도 변변찮고 별 볼 일 없었지만 그래도 관직에 오르고 싶고 정치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본인의 노력으로 아낌없이 대가를 치러 가며 위로 올라가고, 열심히 상사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관리의 주구가 되었고, 결국에는 정치에 참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 관직에 오르고 벼슬길을 걷는 꿈을 실현했다.

정치를 멀리하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섯 가지 원칙을 교제했다. 첫째는 어떤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는 것이다. 알다시피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집권자는 정당이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독재 국가에서 집권자 역시 한 정당이다. 따라서 정치를 멀리하기의 첫째 조건은 어떤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방금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원칙은 무엇이냐?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고, 정치권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원칙은 무엇이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들이 벌이는 그 어떤 활동이나 운동, 그리고 그들의 어떠한 사상 토론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 즉 그들 사이에 끼지 않는 것이다. 네 번째 원칙은 무엇이냐? (줄을 서지 않는 것입니다.) 줄을 서지 않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는 그들끼리 말하라고 하고, 어쨌든 너는 줄을 서지 않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무엇이냐?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무슨 벽창호도 아니고 왜 입장을 밝히지 않는가?” “저는 입장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배움이 짧아서 생각하는 차원도 단순한데 무슨 입장이 있겠습니까? 그저 평범한 민초일 뿐인데요. 이해해 주십쇼.” 언제나 입장이 없다. 입장을 밝혀야 할 때마다 코를 골며 자는 척하면 사람들은 네가 현실에 안주하는 줄 알고 입장을 밝히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면 잘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전부 몇 가지 원칙이냐? (다섯 가지입니다.)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지킬 수 있어야 정치를 멀리할 수 있고, 어떤 정치 세력에도 휩쓸리지 않고, 영향을 받거나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고위층 정치권에서든, 말단 정치권에서든 이 다섯 가지 원칙대로만 실행하면 정치를 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에 관계된 화제이다. 당연히 직업이 없는 상황에서도 실행 원칙은 이와 마찬가지로, 달라지지 않는다. 설령 네가 무직자라고 해도 정치를 멀리하려면 역시 이 원칙대로 실행해야 하는데, 그 원칙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정치를 멀리해야 하느냐? 정치란 무엇이냐? 투쟁이고, 권력 게임이다. 정치는 드러나지 않는 계략이기도 하고 공공연한 계략이기도 하다. 또 무엇이냐? 정치는 각종 세력이 일으킨 운동 또는 활동이기도 하다. 보아라. 너희는 정치가 무엇인지도 확실하게 말을 못 하는데, 큰 붉은 용이 교회 사람들에게 정치에 참여했다고 정죄하는 것은 억설이 아니냐? 어떤 죄도 마음만 먹으면 뒤집어씌울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모함이다. 일부 바보 멍청이들은 큰 붉은 용의 이런 헛소리를 듣고 거기에 얽매여 감히 큰 붉은 용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탄도 분별하지 못한다. 이런 주제가 나오면 옆으로 물러나며 입을 꾹 닫는다. 큰 붉은 용이나 사탄을 분별하는 내용만 교제했다 하면 헛기침을 하거나 뭐가 뭔지 모르는 체한다. 시치미 뗄 게 뭐 있느냐? 그럴 필요 없다. 정치가 뭔지도 모르면서 거기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 정치가 너 같은 멍청이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이더냐? 따라서 정치를 멀리하는 일은 사실 대다수 백성들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원칙적으로 한 가지만 더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자기도 모르게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에 휩쓸렸음에도 모르고, 결국 속죄양이나 희생제물이 되고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원칙들을 교제하는 이유는, 우선 네게 본인의 IQ로는 결코 정치의 본질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또 한 가지는 네가 이 원칙들을 잘 따라서 실행하면 자신을 더욱 잘 보호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혹은 자기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남에게 이용당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네가 이 몇 가지 원칙대로 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원칙들은 너에게 일종의 부적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깨워 주는, 정치와 관련되는 영역에서 네가 지켜야 할 원칙이기도 하다. 네가 이 몇 가지 원칙을 지킨다면 진리가 가져다주는 유익을 누리게 되고, 당연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지만 너는 막연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고, 아무리 보호해도 네 눈에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선택해서 실행하도록 해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실히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이 더욱 실제적인 보호다. 네가 하나님 말씀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이 네게 알려 준 진리 원칙을 지켜서 너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최종 목적은 도달하게 된다. 네가 정치를 멀리한다는 이 원칙을 기반으로 사악한 무리 가운데서 보호받고, 각종 시험에 빠지지 않고, 각종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하여 평온하고 평화롭고 안전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심신을 평온하게 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해야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아주 멍청해서 하나님이 가르쳐 준 원칙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모른다면, 게다가 함부로 나서고 과시하고, 언제나 지혜롭지 못하게 처신해서 늘 정치에서 비롯되고 무리에서 비롯된 각종 시비, 각종 분쟁에 얽매인다면, 늘 각종 올무와 시험에 빠져 매일 이런 일들에 휘말리고 교란받는 것이 일상이라면, 그러니까 이런 시시비비와 혼란스러운 다툼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것이 일상이라면, 네 마음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 올 수 없고, 너는 영원히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에서 깊어지고,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고, 진리 추구의 길을 가서 구원에 이르는 이런 일은 너에게 일어날 가망이 없다. 네가 그런 일에 사로잡힌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과 같다. 이런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없으면 너는 결국 이런 일에 삼켜지고 말 것이다. 네 매일의 일상생활, 네 마음, 네 생명이 이런 시비와 다툼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네 머릿속은 온통 이런 일에서 빠져나올 생각, 그들과 다투고 그들에게 반박해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억울함을 풀 생각으로 가득할 것이다. 결국 네가 그런 일에 얽매일수록, 하루빨리 결백을 인정받고, 공평한 대우와 합리적인 해명을 얻고자 생각할수록 네 마음은 갈수록 어지럽고 복잡해질 것이다. 외부 환경이 복잡하면 그만큼 네 내면도 복잡해지고, 외부 환경이 혼란하면 그만큼 네 내면도 혼란해질 것이다. 그러면 너는 완전히 끝인데, 사탄에게 통제되고 사로잡힌 것이다. 그럼에도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받고 싶어 한다면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너는 완전 폐기되고 구제 불능이 된다. 그때 가서 너는 말할 것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사탄의 정치권은 늪이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건데.” 진작 너에게 말했지만 너는 믿지 않았다. 너는 기어이 그들에게서 합리적인 해명을 바라고, 그들 입에서 공정한 말, 너를 칭찬하고 인정하는 말을 들으려고 했지 하나님이 알려 준 원칙과 준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에게 죽을 때까지 끌려다녀도 당연하다. 마지막에 사탄이 멸망하면 너도 함께 멸망해서 그들의 순장품이 될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누가 사탄을 따르라고 하더냐? 누가 사탄의 입에서 합리적인 해명을 얻어내고자 하라더냐? 누가 너더러 어리석게 살라고 하더냐? 하나님이 지혜를 주었지만 너는 활용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원칙을 주었지만 너는 지키지 않았다. 너는 기어코 네 뜻만 고집하며 자신의 머리, 자신의 재능과 은사에 기대어 그들과 다투려 했는데, 네가 마귀를 이겨 낼 수 있느냐? 게다가 마귀와 싸우는 것은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도 아니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은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지 마귀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네가 마귀와 싸우는 것은 가치도 없고, 하나님도 기념하지 않는다. 네가 그것을 이긴다 해도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알겠느냐? 그러니 정치와 관계된 이 업계, 이 바닥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은 사람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아마 지금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그렇게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고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정치란 무엇인지, 정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치권에서 살고 있는 그 사람들, 혹은 정치적 앞날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들이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는지 등을 너에게 알게 해 준다. 이는 너희가 최소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네가 이 원칙들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너는 그들을 도와줄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상응하는 원칙으로 그들의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할 수 있다. 그럼 정치를 멀리하는 것에 관한 주제는 오늘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에 또 보도록 하자.

2023년 6월 18일

이전: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0)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설정

  • 텍스트 설정
  • 테마

색상

테마

폰트

폰트 사이즈 조정

줄 간격 조정

줄 간격

페이지 너비

목차

검색

  • 페이지 내 검색
  • 도서 내 검색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