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추가 유언비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최근에 부정적인 유언비어를 들은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너희는 이런 유언비어를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느냐? 두렵지 않았느냐? 궁금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이 유언비어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 않으냐? (알고 싶지 않습니다. 큰 붉은 용이 항상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고,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다 거짓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런 유언비어의 세부 사항에 관심도 없고 그것이 말하는 그 마귀적인 말들을 알아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큰 붉은 용이 각종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패괴시키자 많은 사람이 유언비어를 듣고 미혹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서 참도(道)를 받아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일부 받아들인 사람들도 의심이 들어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게 되었다. 큰 붉은 용의 유언비어를 듣기 전까지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고 아무런 의심도 없으며,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언비어를 듣자마자 바로 의심이 생겨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할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특히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된 사람들 중 일부는 큰 붉은 용의 고문과 위협에 타협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했고, 또 일부는 ‘3서’에 사인했으며, 심지어 강요에 의해 하나님을 욕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적지 않다. 너희도 많은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체포한 후 세뇌하여 정말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게다가 하나님을 배반한 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이용함으로써 교회를 감시하는 한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미행하고 감시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큰 붉은 용은 종교 신앙을 없애고 하나님의 교회를 없애기 위해 하나님 선민들을 탄압하고 체포하는 일을 국가의 중요 업무이자 정치적인 임무로 여겨 매우 깊이 있게, 공을 들여 시행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이 겁을 먹고 하나님을 믿거나 본분을 이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큰 붉은 용이 날조한 유언비어를 듣고 많은 사람이 미혹되었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유언비어에 대해 일찌감치 종합하고 분별하였으니, 여기에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만약 네가 정말 체포되어 큰 붉은 용이 이런 유언비어로 너를 세뇌하며 입장을 밝히고 ‘3서’에 사인하라고 핍박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지금은 너희가 큰 붉은 용이 날조한 유언비어가 전부 거짓이며 사람을 미혹하고 속이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며 믿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고는 있지만, 만약 이런 유언비어들이 네 앞에 놓여 네가 듣고 보게 하며, 심지어 그것을 사실로 여기게 한다면,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사실의 진상을 알고 싶지 않겠느냐? 확인을 하고 싶지 않겠느냐? 큰 붉은 용이 유언비어를 날조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협박하거나 유언비어와 무신론으로 사람들을 세뇌하고 사상 교육을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진리를 교제해 사람들에게 미리 예방 주사를 놔 줘야 하겠느냐? 이는 필요한 사역이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큰 붉은 용은 오랫동안 우리에 대한 유언비어를 날조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 교회와 교회 사역에 대한 유언비어를 날조했는데, 우리는 한 번도 이를 규명한 적이 없고, 나서서 우리의 태도와 관점을 밝힌 적도 없으며,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적절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큰 붉은 용과 종교계의 각종 유언비어를 시종일관 명확히 분별하지 못해 마음속에 항상 물음표를 지니고 있다. 이 물음표는 완전히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닌, 중간 입장에서 이런 일들을 바라보며, 이런 일들이 모두 큰 붉은 용이 날조한 유언비어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그럴 수도 있다’라는 것이 진리를 구하는 관점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유언비어를 확인하고 검증하려는 관점이나 기다리고 관찰하는 관점이다. 내막을 아는 사람이 실상을 밝히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이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결과가 야기되겠느냐? 위험하지 않겠느냐? 이 두 가지 관점 중 어느 관점이 사람을 굳게 서게 할 수 있겠느냐? (두 가지 관점 모두 사람을 굳게 서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마음속에 ‘그럴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아직 참도에 대한 확신이 없으며 마음속에 의심이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유언비어는 그에게 매우 큰 시험일 것입니다. 사람이 참도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진리를 믿지 못하며, 큰 붉은 용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사실 매우 위험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참도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그들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불신파입니다.) 그런 자가 바로 불신파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겠느냐? 분명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유언비어를 들으면 마음속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품고 그 내막을 알고 싶어 하며 유언비어의 진위를 분명히 하고 싶어 하지만, 진리를 구해 해결할 줄 모르기에 결국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너희는 이런 유언비어를 들을 때 진리를 구하였느냐? 진리를 구해 유언비어를 해부하고 분별하였느냐, 아니면 유언비어의 옳고 그름을 일일이 분별하여 진위를 확인하였느냐? 너희는 유언비어를 들으면 그저 마음속으로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순전히 큰 붉은 용이 유언비어를 날조해 비방하는 것이라는 생각만 할 뿐, 진리와 사실에 근거해 반박하지는 않는다. 사실 마음속에 어느 정도 의심이 남아 있음에도 그저 간단하게 이런 도리적인 말로 의심을 풀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굳게 설 수 있겠느냐? 이것이 진리를 구하는 것이겠느냐? 이것이 진리를 깨닫고 얻은 것이겠느냐?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겠느냐?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문제를 진리로 해결함으로써 이런 유언비어를 분별하여 미혹되지 않고, 마음속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으며, 나에 대한 의혹이나 추측, 경계를 완전히 없애고 싶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당신의 설교를 듣고 당신의 양육과 목양을 받아 다들 어느 정도 수확을 거두고 성장했어. 하지만 당신과 실제로 함께 생활해 본 적은 없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실제로 접해 본 적도 없지. 그래서 당신이라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성격과 인품은 어떤지, 또 당신의 생활은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해.’ 즉, 사람들은 이 육신의 인성 각 측면의 모습과 표출, 그리고 그의 생활, 사람과 일을 대하는 태도와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 시종일관 의문과 의혹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의혹이 있는 것은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성육신을 100%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진리를 너무 얕게 깨달아 종교계나 큰 붉은 용의 유언비어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희는 나에 대해 많은 추측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추측의 내용은 결코 긍정적이거나 정당하지 않으며, 분명 부정적이고 어두운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을 하는 것이 너희에게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이런 추측이 짐이나 족쇄겠느냐, 아니면 일종의 격려겠느냐? 말해 보아라. (만약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좋지 않은 추측이 있다면, 이는 좋은 일이 아니라 일종의 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계하게 하며,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부정적인 것들이 너희에게 어떤 영향을 주겠느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이것들은 특정 환경에서 너에게 위험하지 않겠느냐? (위험합니다.) 이런 것들이 짐이고 너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면, 진리로 해결해야겠느냐, 아니면 한쪽에 제쳐 둔 채 신경 쓰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다가 정말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시 생각해야겠느냐? 너희의 태도는 무엇이냐? (저는 유언비어를 들었을 때 정말 내버려둔 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금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이런 문제들에 직면하면 진리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마음속의 이 짐을 내려놓지 못해 특정한 상황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의심하고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입으로는 이런 것들이 유언비어라고 하지만, 만약 이런 유언비어들을 시종일관 진실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올바른 태도로 대하지 않으며 마음속에 항상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지닌다면, 늘 그것에 속박될 것이다. 그럼 그 유언비어들은 너에게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든 폭발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분명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고 너를 산산조각 낼 것이다. 지금 ‘3서’에 사인한 그 사람들이 바로 폭탄을 터뜨려 스스로를 산산조각 낸 것 아니겠느냐? 큰 붉은 용은 그들이 ‘3서’에 사인한 후에도 놓아주지 않고 기어코 하나님 욕을 몇 마디 하게 한 후에야 일을 마무리했다. 그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탄을 따랐다. 또 하나님을 욕한 후에는 복받을 희망이 사라지고 완전히 끝장났으니, 더 이상 그 유언비어의 진위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오랫동안 품었던 걱정, 근심, 두려움이 다 완전히 사라졌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이 구원받을 희망도 사라졌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성육신한 하나님이나 이 흐름을 의심할지라도 하나님을 욕해서야 되겠느냐? (그래서는 안 됩니다.)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을 욕하라고 한대도 왜 큰 붉은 용의 말을 들은 것이냐? 그게 누구든, 참도와 이 흐름은 부인할지라도 하나님을 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을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인성이 악한 데다가 진리를 몹시 증오하고 사탄의 권세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마음속으로 진정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류를 만들었으며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것을, 만물을 주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욕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의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역하는 이 흐름을 의심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욕할 수 있는 부류는 이 흐름과 성육신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부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부류에 속하겠느냐? (마귀에 속합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이 부류는 사탄 마귀의 무리이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도, 하나님의 양도 아니며, 비인류이다.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된 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어서 유언비어를 듣고 의혹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성육신에 대한 의혹을 품고, 위협과 유혹, 가혹한 고문에 압박받아 하나님의 이름과 성령 역사의 흐름을 부인하고, 교회를 부인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님에 대한 배반인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욕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양심과 이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것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네가 사람을 욕하고 공격하고 판단하거나 비방해 봤자 법적으로는 기껏해야 명예 훼손죄나 인신 공격죄로 판결받을 뿐, 심각하다고 할 수 없으며, 죽을죄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욕할 수 있다면 문제의 성질은 달라진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모독이란 무엇이냐? 바로 긍정적인 사물, 진리,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비방하고 매도하고 폄하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이 다 모독에 속한다. 하나님은 거룩하며 지극히 높고 모든 인류를 주재한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분이며 인류 생명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본질과 신분, 지위는 지극히 높으며, 하나님은 완벽하고 아름답고 선하며 거룩하고, 흠잡을 데도 나무랄 데도 없다. 하나님이 거룩하고 완벽하며 지극히 높고,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원천이기 때문에 피조된 인류가 하나님을 폄하하고 공격하고 매도하는 것은 전부 모독에 속한다. ‘모독’이 대체 무엇인지 이제 이해하였느냐? (하나님에 대한 공격, 매도, 폄하는 모두 모독에 속합니다.) ‘모독’이라는 단어를 설명하자면, 긍정적인 사물, 특히 진리나 하나님을 폄하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이것이 모독이다. 그래서 ‘모독’이라는 단어는 사람이 하나님을 폄하하고 매도하고 공격하고 판단하는 것을 형용할 때만 사용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비교적 합당하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매도하고 공격하고 정죄할 때, 만약 그 말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비방에 불과하며, 사실에 부합하면 비방에 해당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고 흑백을 전도하는 것이므로 모독에 속한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하나님에게 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죄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폄하하고 공격하고 판단하고 매도하는 것은 전부 모독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욕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몇 마디 욕하기만 하면 풀려나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이런 상황이라면 하나님께서도 기억하지 않으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욕 몇 마디 한 것뿐이니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보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욕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이미 하나님을 부인했다는 의미이다. 마음속에 증오가 생겨야만 하나님을 욕할 수 있다. 네가 자발적으로 욕했든 아니면 누군가에게 강요받아 욕했든 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증오하는 모습에 속하니, 그런 행위와 행동 방식은 엄연히 모독이다.

어떤 사람들은 각종 유언비어를 시종일관 놓지 못하고, 늘 그런 유언비어가 진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큰 붉은 용의 집권당, 종교계, 이방인이 퍼뜨리는 그런 유언비어, 특히 인터넷에 올라온 유언비어와 주장이 진실인지 늘 확인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이 늘 입장을 밝히지 않고 하나님 집도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그는 그 유언비어들이 진실이라고 완전히 믿어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려 한다. 이는 어떤 문제냐? 그는 대체 무엇에 근거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만약 유언비어의 진실 여부에 근거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사실 하나님 집은 설교와 영화를 통해 많은 유언비어를 매우 분명하게 해부하고 반박했다. 그러니 내가 여기에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어떤 측면의 유언비어를 또 확인하고 싶은 것이냐? 오늘은 이 주제를 툭 터놓고 이야기해 보자. 너희가 확인하고 싶다면 내가 설명해 주겠다. 일부 사람들이 늘 ‘저희에게 숨기고 저희가 알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는 것 아닙니까? 저희는 아무리 해도 당신을 완전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저희는 당신을 따르면서 이렇게 많은 진리를 들었지만, 유언비어의 진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확인하려는 마음과 생각이 있습니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말이다. 만약 확인을 하고 싶다면 과감하게 말해라. 그러면 그 일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며 내가 설명해 주겠다. 이는 별로 숨길 게 없다.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확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큰 붉은 용의 유언비어를 믿지 않기 때문이냐, 아니면 ‘이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자.’라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냐? 그것도 아니면 확인한 후 실망해서 직면할 수 없을까 봐 두렵고, 자신이 굳게 설 수 있을지 모르며, 이러한 결과를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냐? 유언비어의 내용이 무엇이든, 너희가 확인을 원하든 아니든, 이런 유언비어에 대해 내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견해를 이야기할지 듣고 싶든 아니든, 너희의 태도가 무엇이든 나의 태도는 하나이다. 너희가 진리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유언비어를 분별할 수 있을 테지만, 너희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구하지도 않는다면, 나는 너희에게 해 줄 말이 없다. 진리를 선포하면서 한 말이 너무 많아 이런 유언비어를 설명해 줄 필요가 없고, 또한 이는 내가 해야 할 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를 그렇게나 많이 들었으면서 아직도 분별할 줄 모른단 말이냐? 만약 분별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말하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유언비어에 대해서든 나는 해 줄 말이 없다! 나는 어떤 설명도 하고 싶지 않으며,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어떤 해명이나 변호도 하고 싶지 않다. 외부에서 뭐라고 하든 나는 해 줄 말이 없다! 똑똑히 들었느냐? (똑똑히 들었습니다.) 해 줄 말이 없는 것, 이것은 하나의 태도이다. 이 밖에, 이 일에 대해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언제 어떤 때라도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 지위, 성품, 권병과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고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한다는 사실, 하나님이 성육신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진리이자 길이자 생명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희의 의혹을 해결하는 데 이 말들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충분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이야기하겠다. 너희가 듣고 이해했다면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했다면 천천히 묵상해 보아라. 만약 네 마음속에 여전히 의혹이 남아 있고 이런 말로도 그 의혹을 해결할 수 없다면, 나도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어라.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말과 일은 여기까지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느냐? (적절합니다.) 이런 말들이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작용을 할 수 있겠느냐? 각종 복잡한 사물 앞에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거나 사람이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었을 때 이런 말로도 네가 현재 직면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너는 불신파이다. 네가 받아들인 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탄의 거짓말과 사탄이 하는 온갖 마귀적인 말이다. 과거의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들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겼다. 하지만 사탄이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야. 너희가 먹는다고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라고.”라고 하자 즉시 의혹을 품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뱀의 말을 믿었으며, 하나님 말씀이 거짓이라고 의심하였다. 뱀이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고 뱀의 거짓말을 온전히 따르게 되었다.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벌어졌는지는 따로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뱀이 한 말을 믿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 말씀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말씀이 진실이라고 믿지 않았고, 또 더 이상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거짓말로 그들을 속인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들은 뱀의 말이 진실이며 뱀은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하나님의 보살핌을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보호를 잃게 되었으며, 되돌아올 수 없는 길에 오르게 되었다.

너희는 유언비어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으냐? 만약 해결되지 않았다면, 너희 스스로 천천히 소화해 보아라. 유언비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교제하였다. 만약 아직도 각종 유언비어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희 스스로 교제해 해결하여라. 이 일은 그다지 큰일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종종 사람의 마음과 생활을 교란할 수도 있다. 일부 유언비어는 당장 너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너에게는 일종의 방해일 것이다. 마치 사람을 물지는 않지만 역겨운 똥파리처럼 수시로 나타나 한 번씩 교란할 테니 말이다. 특히 네가 연약해졌을 때, 실패와 좌절에 직면했을 때, 혹은 소극적으로 변했을 때, 이런 유언비어와 마귀적인 말이 나타나 너를 교란하고, 네 마음속에서 너를 괴롭히며, 너의 발목을 잡아 조금씩 조금씩 끌어내릴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물러나 믿지 않게 되는 사람도 있다. B조로 보내진 사람들, 일반 교회의 사람들은 무척 위험하다. 그럼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위험하지 않겠느냐? 매우 위험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이겠느냐? 바로 시종일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부류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마음속에 항상 이런 의혹을 품는다. ‘왜 나는 어떤 하나님 말씀이 진리인지 알지 못할까? 다들 진리가 길이요 생명이라고 하는데, 왜 나는 생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나도 하나님 말씀을 적잖이 들었는데, 내 내면의 생명은 변화가 없어. 나는 여전히 나일 뿐, 변하지 않았다고!’ 그들은 시종일관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하며, 이상(異象)에 대해서도 늘 모호해한다. 이런 사람은 위험하다. 이 부류는 유언비어를 들어도 진리를 구해 분별하는 일이 없으며, 그저 피하고 거부할 뿐이다. 만약 피할 수 있으면 화를 면하겠지만, 피하지 못하면 사탄에게 잡혀가게 된다. 말해 보아라, 이 부류가 사탄에게 잡혀가는 것이 우연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시종일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양이겠느냐? 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종일관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늘 “하나님의 날은 언제 오나요? 언제 천국에 들어가죠?”라며 이런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땅히 알아야 하는 일들도 알지 못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냐! 말해 보아라, 내가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상대로 말을 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겠느냐? 영광스럽겠느냐, 아니면 슬프겠느냐? 아니면 분노를 느끼겠느냐? 이런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속에서 열불이 난다. 이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을 믿은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들은 큰 붉은 용에게 잡혀가 세뇌된 후 드러나고 도태된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기에 하나님 집은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큰 붉은 용을 통해 그들을 드러내고 도태시키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것이 사랑이 없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만약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되지 않고 이런 유언비어에 미혹되지 않는다면, 계속 교회에 눌러앉아 있지 않겠느냐? 어떤 상황에서 그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겠느냐? (큰 붉은 용의 유언비어를 통해 물러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유언비어를 듣고 믿으면 물러날 것입니다.) 큰 붉은 용이라는 부각물의 마수를 통해 그들은 완전히 넘어갔고, 믿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어떤 본분도 이행할 수 없고, 어떤 힘도 쓸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그저 머릿수만 채우며, 밥만 축내고 시간만 때우는 존재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련한 모습인데 자신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라고,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말한다. 이는 부끄러운 짓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따르는 자라면 최소한 사람이어야지, 영이 없는 죽은 자나 짐승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양이며, 하나님의 양이어야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다.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면,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는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섞여 들어왔으며, 그 목적은 바로 복을 받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믿어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수 없다. 마귀, 사탄, 더러운 귀신과 악령이 들린 사람들도 이것이 참도임을 알고 복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원하겠느냐? (원하지 않으십니다.) 각종 악령과 더러운 귀신이 동물에 빙의한 후 오랫동안 수련해 요괴가 되고 나면, 늘 사람이 되고자 한다. 더러운 귀신이나 악령, 각종 동물의 정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한 단계 더 높은 존재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런 어리석은 자들도 자신의 수준을 높여 하나님의 선민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원하겠느냐?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교회에 섞여 들어와도 소용이 없으며 정리되어야 한다. 그들을 정리하면 하나님 집과 교회가 깨끗해진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진리이자 길이자 생명임을 인정하며,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힘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어리석은 자들이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느냐? 한참 부족하다. 그들은 모두 영이 없는 죽은 자인데도 늘 복을 받고 싶어 하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며,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 야심과 욕망은 크다만, 자신이 어떤 주제인지 보지도 않고 분수를 모르는구나! 이런 사람들은 도태되어야 마땅하다. 아깝게 생각되느냐? (아깝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정예이지, 사람 수가 많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자 교회 인원수에 대한 요구와 원칙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예이다.”에서 ‘정예’란 하나님나라의 정예병을 가리키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이기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겠느냐? 둘 다 정확하지 않다. 정확히 말해 ‘정예’란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 진정한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 집에서 네가 사람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으며, 너를 사람으로 쓸 수 있고, 누군가가 너를 끌고 당기고 밀지 않아도 사람의 책임을 다하고 사람의 본분과 의무를 이행할 수 있다면, 네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고 공짜 밥을 먹는 사람도, 백수건달도 아니며, 사람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수 있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면, 너는 비로소 기준에 맞는 인류이다! 본연의 일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백수건달이 사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쓸모없는 자이다.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질 수 없는 자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지능이 낮거나 바보거나 지적 장애가 있거나 육체가 마비된 사람들을 표준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이런 사람은 생활 능력, 생존 능력, 자립 능력이 없어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과 보살핌에 의존하며, 자립해서 살 수가 없고, 사람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수 없으며,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리더 일꾼을 하든, 아니면 어떤 업무 기술과 관련된 사역을 하든 너는 자신의 본분에 속하는 사역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생활하고 생존하는 것 외에도 그저 숨 쉬고 먹고 마시고 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만이 피조물,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하나님 집에서 늘 밥을 빌어먹으려고 하고, 어물쩍 대충 넘어가려 하고, 끝까지 대충 버티다가 복을 받으려는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역과 책임도 감당할 수 없으며, 사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사람은 도태시켜야 하며, 아깝지도 않다. 도태된 자들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그를 쓸모없는 놈이라 불러도 좋고, 백수건달이라 불러도 좋으며, 놈팡이라 불러도 좋다. 어쨌든 그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그에게 어떤 일을 맡겨도 그는 혼자 완수하지 못하며, 어떤 임무를 줘도 자기 책임을 짊어지지 못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도 못한다. 이러면 끝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살아갈 자격이 없으니 죽어 마땅하다. 하나님이 그를 살려 두는 것 자체로도 이미 은총을 베푼 것이며, 특별한 은혜인 셈이다.

유언비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너희에게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꺼내서 교제하거나 스스로 진리를 구해 해결하면 되니, 더 이상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괜찮겠느냐? 의견이 있느냐? (없습니다.) 만약 내가 언급하지 않은 다른 문제가 있다면, 너희 스스로 방법을 마련해 해결하여라. 이 일에서 나는 책임을 다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희는 아직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유언비어가 진실인가요, 거짓인가요? 명확한 답을 주세요.”라고 한다면, 내가 명확한 답을 준다고 한들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너희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해 줄 말이 없다. 이는 너희가 분별력을 갖추었는지에 달린 문제이다. 진리를 얻은 사람은 영원히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런 유언비어는 많은 사람을 드러냈다. 몇 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드러났는데, 이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답이다. 이해하였느냐? (이해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내가 하려는 말은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몇 권에 모두 적혀 있고, 모든 설교에도 담겨 있다. 이 말들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하려는 말이다. 충분히 많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렇다면 유언비어에 관해 당신은 어떤 답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며 대답을 강요한다면, 나의 대답은 “없다. 해 줄 말이 없다.”라는 것이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미 모든 설교를 통해 충분히 말했다. 만약 너희가 진리를 구하고자 하고, 이런 말들을 받아들이고 지킬 수 있다면, 너희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이런 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희의 문제는 영원히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나는 책임을 다했으니, 더 이상 나와는 상관이 없다. 똑똑히 이해했느냐? (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첫 번째 실행 ― 내려놓기

하나님과의 간극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내려놓기

1.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 내려놓기 ―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과 상상 내려놓기

6) 하나님은 사역으로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킨다

이어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관해 교제해 보자. 최근 여전히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중 ‘내려놓기’ 측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과의 간극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내려놓기’라는 큰 주제에 관해 다루었다. 이 주제의 첫 번째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 조항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교제했으며, 이 내용은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간의 차이라는 상대적으로 복잡한 문제와 관계가 있다. 여기에는 매우 많은 세부 사항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문제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늘 개념을 혼동해 대체 어느 유형의 문제인지,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확실히 분간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모습들에 대해 사람들은 그것이 대체 인성과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선천적인 조건과 관련된 것인지 확실히 분간하지 못한다. 또한 일부 모습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것이 대체 패괴 성품인지 아니면 인성 문제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들을 모두 확실히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선천적인 조건의 문제와 결점을 패괴 성품으로 여기거나 인성의 결함과 문제를 패괴 성품이라고 여기며, 심지어 때로는 패괴 성품 표출을 오히려 선천적이고 바꿀 수 없는 조건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늘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이라는 세 가지 측면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매우 모호하다고 느끼고 명확하게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그중 일부를 교제하였고, 당연히 몇 가지 사례도 들었지만, 나는 충분히 구체적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오늘은 이 세 가지 측면의 문제를 꺼내 다시 구체적으로 교제해 보겠다. 내가 몇 가지 구체적인 모습과 사례를 이야기할 테니, 너희는 그것이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중 어느 측면에 속하는지 분별해 보아라. 너희가 분별하지 못한다면 함께 이 일을 논의해 보자. 어떠하냐? (좋습니다.) 선천적인 조건 측면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교제했으므로 당연히 좀 더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경계선상에 있거나 인성과 유사한 것들이 있어서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이 과연 선천적인 조건에 속하는지 아니면 인성에 속하는지 그래도 확실히 분간하지 못한다. 내가 몇 가지 모습이나 행위, 행동 방식을 제시할 테니, 너희는 그것이 대체 어느 측면에 속하는지 대답해 보아라. 이렇게 교제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겠느냐? 그것이 어느 측면에 속하는지 알게 되면,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⑥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여러 측면 모습

부지런히 일하는 것과 게으른 것

먼저 첫 번째 모습인 부지런히 일하는 것, 그러니까 사람이 근면한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이는 어느 측면에 속하겠느냐? (그것은 인성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인성의 장점이겠느냐 아니면 결함이겠느냐? (인성의 장점입니다.) 매우 부지런하고 근면한 것, 이는 인성의 장점이다. 깔끔하고 청결하며 위생을 중시하는 것, 이는 어떤 측면의 모습이겠느냐? (인성의 장점입니다.) (그것은 좋은 생활 습관으로, 선천적인 조건에 속합니다.) 이것이 선천적인 조건이냐? 이는 인성의 한 측면의 장점이자 강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방금 누가 선천적인 조건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이는 인성과 관련 있으며, 생활 습관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이것은 인성의 장점이자 강점이기도 하다. 다음 모습은 게으르며 편한 것만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일하지 않을 때는 기분이 무척 좋지만, 일만 한다 하면 기분이 나빠지고, 걱정하고, 성질을 내고, 화를 낸다. 일을 해야 하면 몸이 무겁고 온몸에 힘이 없다고 느껴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먹고 마시고 노는 이야기만 나오면 기운이 넘친다. 게으름은 어떤 측면의 문제겠느냐? (인성이 나쁜 것에 속합니다.) 적어도 이것은 인성의 결함이며, 인성 한 측면의 결점이자 큰 문제이다. 하지만 그래도 인성이 나쁘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만약 그가 늘 다른 사람을 부리고 이용하며, 자신은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한다면,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인성이 나쁜 것입니다.) 일을 좀 시키면 온갖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며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지 겉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방식과 수단 또는 거짓말과 속임수로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자신은 혼자 여유로움을 즐긴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패괴 성품, 사악한 성품입니다.) 단순히 패괴 성품이겠느냐? 남을 이용하고 부리기를 좋아하는 이런 부류는 우선 인성이 좋지 않고 인품이 악랄하다. 게다가 교묘하게 사람을 부리는 수단은 그의 성품이 간사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람을 이용하고 부리기 좋아하는 이런 모습은 그의 인성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의 패괴 성품이 심각하며 간사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아라, 어떤 모습은 그저 인성이 좋지 않거나 인성의 어느 한 측면의 단점에 불과해 패괴 성품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모습은 악랄한 인성을 바탕으로 패괴 성품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러므로 어떤 측면의 모습이든 모두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어떤 모습은 한 측면의 문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측면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허영

허영, 이것은 어느 측면의 문제겠느냐? (인성 측면의 결함입니다.) 맞다. 이는 인성 측면의 결함이다. 만약 단순히 치장하거나 멋 부리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예쁘다, 아름답다, 멋있다, 젊다는 칭찬을 받기를 좋아하는 거라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높이 평가하거나 좋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거라면, 이는 단순히 인성의 문제이다. 인성의 어느 측면 문제겠느냐? 이것은 분명 장점이 아니라 결함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결함일 수 있나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째서 허영이 인성의 결함이라고 하겠느냐? 허영이 결함이라고 한 이상 허영의 모습은 옳지 않은 것이며, 겉으로 보기에도 단정하고, 존엄 있고, 경건하고, 신중하여 반듯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는 겉모습이 단정한 그런 차원이 아니다. 이는 단정한 겉모습을 합리적으로 중시하는 것보다 과하고 심각한 것으로, 자신을 꾸미고 드러내는 것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남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중시하게 하는 것이며, 심지어 약간 뻔뻔하기까지 한 것이다. 즉, 이런 부류는 많은 일에서 외모의 영향과 속박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결함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화장하지 않으면 외출하기 부끄러워하고, 향수를 뿌리지 않으면 사람을 만나기 부끄러워한다. 마음속으로 늘 이런 일들을 중시하며, 늘 지나치게 치장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좋아해 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지나친 허영으로, 결함이 된다. 이 결함은 이미 정상 인성의 요구 기준과 범주를 넘어선 것이다. 지나친 허영, 이것은 인성의 결함이다. 이 측면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겠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

다음 모습은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는 어느 측면의 모습이겠느냐? (이는 인성의 단점으로, 남들 눈에 띄려고 하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패괴 성품이 있겠느냐? (있습니다. 그는 나서기를 좋아해 자신을 과시하고 남들 눈에 띄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나서기를 좋아해서 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슨 문제겠느냐? 지도자의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러겠느냐, 아니면 진리를 깨달았고 부담이 있기 때문에 그러겠느냐? 만약 부담이 있고 사역 능력이 있어서 어떤 사역을 맡을 수 있다면, 이는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이 측면은 인성의 결함이다. 이 부류는 나서기를 좋아해서 어디에 가든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하며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 말도 비교적 거창하고 과장되며 높은 음성으로 하고, 사람이 많을수록 더 발언하려 하며, 항상 무리 속에서 한자리 차지하려고 한다. 나서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인성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인품과는 관련이 없는, 그저 인성의 결함이자 한 측면의 결점, 문제일 뿐이다. 어째서 인성 한 측면의 결점과 문제라고 하겠느냐? 이는 이성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네가 사역을 감당할 수나 있으면서 그렇게 항상 나서려는 것이냐? 왜 항상 나서고 싶어 하는 것이냐? 야심과 욕망에 지배받는 것 아니겠느냐? 지위를 좋아하고, 남들이 치켜세워 주는 것을 좋아하며, 나서고 얼굴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고 남들보다 한 수 위인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이끌기를 좋아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류는 인성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어떤 인성이냐? 이성이 없는 것이다. 이는 인성의 결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인성의 결함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부류는 가끔 남의 눈에 띄려고 하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야심과 욕망에 지배되어 지위와 권력을 좋아하고 자기가 결정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또 패괴 성품과 관련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어떤 패괴 성품이겠느냐? (교만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다. 네가 뭔데 나선단 말이냐? 네가 뭔데 결정하고 다른 사람을 이끌려고 한단 말이냐? “저는 진리를 깨달았고 부담도 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부담이 있더라도 네가 실질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지 봐야 한다. 부담이 있고, 하고 싶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둘 사이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 네가 하고 싶고 좋아한다고 해서 할 수 있고 리더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가 나서기를 좋아하고 지위를 좋아한다고 해서 모두가 반드시 너를 뽑아야겠느냐? 그렇다면 교회 리더를 선출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사역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올바른 사람인지에 근거해야 합니다.) 최소한 올바른 사람이어야 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있어야 하며,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사역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양성 조건에 부합하며, 양성 대상이 된다. 이 몇 가지 조건을 다 갖춰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조건들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는데, 단지 나서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두가 너를 리더로 뽑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네가 늘 나서고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것은 교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교만하여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교만함은 인성 측면에서 보면 이성이 없는 것이고, 진리로 가늠하면 한 측면의 패괴 성품으로, 사탄 성품에 속한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이런 모습은 인성의 결함이자 한 측면의 패괴 성품이므로, 이는 두 가지 측면의 문제이다. 나서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인성이 형편없거나 좋지 않은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는 이성이 없는 구체적인 모습이자 교만한 성품의 한 가지 모습이다. 만약 그저 나서기를 좋아할 뿐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괴롭히지 않으며, 또 악인의 수단으로 이간질하거나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면, 이는 인성의 결함에 불과하다. 하지만 악인과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악행까지 저지른다면, 이 측면의 인성 결함은 한층 더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이니, 어떻게 되겠느냐? 인성이 형편없고, 나쁘며, 악하다는 말 몇 가지로 이런 인성을 규정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그가 표출한 패괴 성품의 모습에는 교만함뿐만 아니라 흉악함도 있다. 물론 더 구체적인 것도 있는데, 이는 그가 표출한 패괴 성품의 정도에 따라 규정된다. 만약 단순히 나서기를 좋아할 뿐 인성이 악한 모습이 없으며,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괴롭히지 않고, 몰래 패거리를 지어 독립 왕국을 세우거나 비정상적인 수단을 씀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 말을 듣게 하지 않는다면, 나서기를 좋아하는 모습은 단지 인성의 결함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악행이 있다면, 이는 더 이상 단순한 인성의 결함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겠느냐? (인성이 형편없고, 나쁘며, 악한 것입니다.) 맞다. 이는 단순한 인성의 결함이 아니라 인성이 악한 것이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성의 결함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또 어느 정도 자질과 사역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너희는 그를 리더로 뽑겠느냐? (뽑습니다.) 왜 그를 뽑겠느냐? (그는 악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저 패괴 성품의 표출일 뿐, 거기에는 악한 성분이 없다. 그는 악인이 아니므로, 리더의 조건만 갖추고 있다면 리더로 뽑을 수 있고 양성할 수 있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성의 이성이 부족한 모습이지만, 그는 사역을 할 수 있고, 사역 능력이 있으며, 영적인 이해력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고, 또 사역하고 책임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 점을 고려하면, 그를 뽑아도 된다. 왜 그를 뽑아도 되겠느냐? 그는 기준에 맞는 인성과 자질을 갖췄기 때문이다. 악인이나 적그리스도가 아니며,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억압하지 않고, 독립 왕국을 세우려 하지 않으면 리더로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나서기를 좋아하는데 그 안에 악한 인성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뽑겠느냐? (뽑지 않습니다.) 아직 리더로 선출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수작을 부리기 시작하고, 뒤에서 패거리를 짓고 투표를 조작하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꼼수를 쓴다면, 심지어 비교적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에 대한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그들의 험담을 하며, 진리와 인성의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아주 많이 저지르고 일부 악행까지 한다면, 너희는 이런 부류를 리더로 뽑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이런 부류를 뽑지 않는 것이냐? (그는 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악인이라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쓰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 집은 악인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선민이 악인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괴롭힘과 억압을 받는 한편, 교회가 뿔뿔이 흩어지고 무질서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네가 하는 것은 더 이상 본분 이행이 아니라 악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되며, 악인에게 통제되어 악인을 따라가는 것이 된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구원받을 희망이 영영 사라진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나서기를 좋아하고, 또 똑같이 교만한 패괴 성품을 지닌 자들이 있을 때, 사람들이 그중 한 명을 리더로 뽑는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인성입니다.) 맞다. 바로 인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교만하고 간사하고 강퍅한 각종 패괴 성품의 표출은 보편적인 것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차이가 나겠느냐? 인성에서 차이가 난다. 겉으로 보기에 어떤 사람은 좀 방탕하지만 어떤 사람은 보수적이고, 어떤 사람은 비교적 흐리멍덩하고 허술하지만 어떤 사람은 영리하고 치밀하며, 또 어떤 사람은 외향적이고 명랑한 편인데 어떤 사람은 내향적인 편이다. 겉으로 보이는 성격 차이에 따라 인성의 본질 또한 분명히 다르다. 어떤 사람은 양심과 도덕의 마지노선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양심과 도덕의 마지노선이 없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악하고 잔인하고 독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통째로 삼켜 버릴 정도이며,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짓이 악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만약 너희가 악인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그야말로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며, 밝은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악인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은 큰 붉은 용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이런 경험이 없느냐? (있습니다.) 악인이 인성적으로 가장 두드러지고 뚜렷하게 보이는 모습은 바로 악하고 독하고 잔인하고 도덕적 마지노선이 없으며, 양심의 기준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겁 없이 함부로 행동하고, 무슨 짓이든 감히 할 수 있으며, 양심의 마지노선이 없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본분을 이행하며 힘을 들일 수 있고 고생을 할 수 있으며 또 베풀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다. 매번 하나님, 하나님의 성육신,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또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대가를 치르며 심혈과 생명으로 인류를 구원한다고 증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말이 없어지고 말하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멸시한다. 하지만 자신을 증거할 때는 할 말이 많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 이는 단지 인성 측면의 결함일 뿐이다. 만약 이 부류가 악을 행하지 않고 양심과 도덕의 마지노선이 있다면,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기본적으로 양심의 마지노선에 따라 일들을 가늠할 수 있다. 그의 양심이 작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이성이 마음에 들어서 상대방과 접촉을 하고 싶어도 그에게는 인성의 양심 마지노선과 염치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제하게 된다. 하지만 악인은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억지로 접촉한다. 만약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온갖 방법으로 그를 괴롭히고 제압하며 못살게 굴 것이다. 하지만 양심의 마지노선이 있는 사람은 양심에 제약을 받아 어떤 과오는 범하지 않으며, 어떤 선을 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염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상대적으로 더 깊이 잘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보통은 선을 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양심의 마지노선이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되면, 너희에게 유익한 점이 매우 많다. 최소한 그는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며, 너를 지체시키거나 망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에게 공급과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악인은 다르다. 그는 단순히 말로만 너를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수단을 동원해 너를 괴롭히고, 억압하고, 짓밟는다. 만약 네가 그에게 굴복하지 않거나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또는 어떤 일에서 그와 논쟁을 벌이면, 그는 너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죄하고, 망신 주고, 제압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된다. 평범한 패괴 인류와 악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인성의 선악과 양심의 작용 여부이다. 악인은 양심이 없기 때문에 염치도 없어서 어떤 나쁜 짓이든 할 수 있다. 평범한 패괴 인류도 인성에 결함과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양심과 이성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수많은 선을 넘는 일들을 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님을 믿지 않을지라도 분명한 악행은 저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간음이나 도둑질 같은 일을 전혀 할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에 있을 때, 음란한 짓을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었겠느냐? 음란한 짓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성 파트너가 많은 것, 나아가 동시에 여러 이성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지각이 없으며 마음에 참소를 받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습니다.) 음녀나 창녀, 치한들은 이렇게 할 수 있다. 너희는 이들과 차이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다. 양심과 이성이 염치를 갖게 하므로 네가 음란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는 ‘그렇게 사는 것은 좋지 않아.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런 부류와 선을 긋고 죽어도 음란한 짓은 하지 않을 거야.’라는 기준이 있다. 만약 그런 장소에 팔려 가면, 어떤 사람들은 “죽어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어요!”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굴욕과 억울함을 참으며 억지로 하기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달가워하지 않으며 기회만 생기면 도망친다. 반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장소에 가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가려 하며, 돈을 벌지 못해도 간다. 음란한 짓을 좋아하기 때문에 돈을 벌든 못 벌든 상관없는 것이다. 이 두 부류는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차이다. 인성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너희가 각 부류 사람의 인성 모습 차이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사람을 볼 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을 가늠할 때는 온전히 그의 패괴 성품에 근거하거나 그가 일시적으로, 혹은 특정 일에서 보이는 모습과 표출에만 근거해서는 안 된다. 그의 인성과 본성 본질에 근거해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가늠해야 할 것이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측면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겠다.

일 처리가 체계적이고 두서가 있으며 우선순위가 분명한 것

계속해서 또 다른 모습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즉, 일 처리가 체계적이고 두서가 있으며 우선순위가 분명한 모습이다. 이런 사람은 사색과 고민을 통해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지 결정할 수 있으며, 일을 무턱대고 하지 않고 계획성 있게 단계적으로 처리한다. 무슨 일을 하든, 심지어 가장 간단한 빨래조차도 단계적으로 해서 색상이 짙은 옷과 옅은 옷을 따로 세탁하며, 세탁량에 따라 물과 세제의 양을 조절하여 낭비하지 않는 등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한 계획이 다 있으며, 그 계획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꼼꼼하다. 이는 어떤 측면의 모습이겠느냐? (인성 한 측면의 장점이자 강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점이 이 부류의 사람이 인성이 좋다는 의미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단지 인성 한 측면의 장점이자 강점일 뿐, 인품과 처신의 원칙에는 이르지 못하며, 패괴 성품과도 관련이 없다. 그저 생활 습관 또는 생활을 대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일 처리에 두서가 있고 계획적이며, 규칙을 파악할 수 있어서 일이 마무리된 후에 사람들이 보고 좋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반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다르다. 무슨 일을 하든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러우며, 두서도 계획도 없이 제멋대로 함부로 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인성에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 측면의 인성 결함은 무엇과 관련이 있겠느냐? (자질이 형편없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질이 형편없는 이 부류를 가리켜 ‘머리가 나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렇게 간단한 일도 이해하지 못하느냐?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이냐?”라고 하면, “저는 머리가 나쁩니다.”라고 대답한다. ‘머리가 나쁘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바로 자질이 없거나 부족한 것으로, 이는 자질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떤 측면으로 귀결되겠느냐? 선천적인 조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쁜 사람인데, 훈련시킬 필요가 있겠느냐? 이런 부류는 무슨 일을 하든 계획과 두서가 없으며, 간단한 일도 한참 동안 해서 중요한 일마저 지체시켜 버린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다. 이방인들은 늘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을 ‘자질이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 누가 공중위생을 지키지 않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거나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질러 다른 사람의 공부나 휴식을 방해하면, “저 사람은 자질이 없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규범을 모르는 것이고 인성이 없는 것이다. 어째서 이것을 자질이 없다고 한단 말이냐? 자질이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느냐? 자질이란 무엇이냐? 일 처리의 효율과 성과를 가리켜 자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 처리에 두서가 없는 것은 자질이 부족한 사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또한 인성 한 측면의 결함이다. 그렇다면 이 결함은 선천적인 것 아니겠느냐? 이런 것이 쉽게 변하겠느냐? 훈련을 통해 변할 수 있겠느냐? 돼지한테 나무에 오르라고 하면 그게 되겠느냐? 그것은 그럴 재목이 아니고, 그런 자질도 없다. 일 처리에 두서가 없는 것은 자질의 문제이다.

일 처리가 용두사미인 것

일 처리가 용두사미인 것은 어떤 측면의 문제겠느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이는 인성 한 측면의 결함이다. 어떤 사람은 처음 일을 하려고 할 때는 계획을 매우 잘 세우며, 떠들썩하게 한다. 사람들을 모으고, 보고를 하고, 임무를 분배하며, 심지어 각오를 다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며, 점검도 감독과 검사도 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감독과 지도를 하지 않으면 일이 흐지부지될 수 있고, 심지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해 사역을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도리는 매우 명백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만, 일을 처리할 때 길이 없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어 특수한 상황이나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다른 사람과 교제하지도 않고, 윗선에 구하거나 문의하지도 않는다. 일을 시작할 때는 자신감 있어 보이고, 뭔가 큰일을 할 것처럼 폼을 잡지만, 하다 보면 의욕을 잃고 도망가 버린다. 마치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것처럼 말이다. 누가 그에게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 일은 어떻게 됐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그 일은 안 됐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서 빨리 보고하지 않아 두세 달 동안 일을 지체시켰는데도 아무런 결과가 없다. 이는 화가 나는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가증스럽다! 이 부류는 일 처리가 용두사미일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하면 할수록 더 엉망이 된다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막 일을 시작할 때는 그래도 두서, 생각, 체계가 좀 있지만, 하다 보면 생각이 모호해져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그 일에서 이루고자 하는 성과는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누가 그에게 “좀 구해 보세요.”라고 권하면, 그는 “구할 필요 없어요. 그냥 이렇게 하죠. 어차피 다들 하고 있으니까요.”라고 한다. 보아라, 일을 시작할 때는 기세가 대단해서 마치 천둥 치는 것 같지만, 하다 보면 소리도 없이 사라져 천둥소리만 요란할 뿐 비는 내리지 않는 것처럼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한다. 만약 네가 물어보고 점검하고 검사하지 않으면, 그는 흐지부지 끝내 버리고 보고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했던 각오는 어디 갔느냐? 잊어버렸다. 처음에 작성한 계획서는 어디 있느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처음에 했던 그 구상들은 어디 갔느냐? 사라졌고,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바로 이런 작자이다! 이 부류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의 의욕만 보면 일을 잘하는 사람 같다. 하지만 사실은 무능한 놈이며, 절대 착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분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그저 나서고 얼굴 드러내는 것만 좋아하고, 고생은 하기 싫어하며,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무슨 일을 하든 시작만 할 뿐 끝을 맺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인성은 어떻겠느냐? (나쁩니다.) 너희는 이런 부류가 한 가지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불가능합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용두사미로 끝내고 엉망진창으로 한다. 늘 이런 식이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처음 시작할 때는 매우 의욕적이어서 음악을 들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흥미를 잃어 일을 내팽개치고 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작자겠느냐? 이런 자는 가증스럽지 않으냐? (가증스럽습니다.) 일을 완수할 자신도 없으면서 함부로 떠맡고 능력 있는 척하며, 허풍을 떨고 큰소리를 친다. 네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모르는 것이냐? 그 일을 해내거나 완수할 수 없다면, 말을 해라. 일을 지체시키지 마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너의 일을 지체시키면서 너를 속이기까지 하니, 인격이 저열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인격이 너무도 저열하다! 이런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 있겠느냐? (맡길 수 없습니다.) 신뢰할 가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부류는 신뢰할 가치가 없다. 그가 너에게 호언장담하면, 믿을 엄두가 나겠느냐?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사기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비록 그가 너의 재물을 사취한 것도 아니고, 너를 성적으로 이용하려고 속인 것도 아니지만, 그의 이러한 처신 방식은 매우 가증스럽고 혐오스럽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혐오스러운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이 부류는 인격이 저열하고, 분수를 지켜 처신하지 않으며, 허풍 떨거나 능력 있는 척하기를 좋아하고, 나서고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한다. 끈기 있게 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제 파악도 못 해 자신의 분량이 얼마인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능력 있는 척하려고 한다. 중요한 일이라면 모두 겁 없이 맡지만, 일을 맡은 후에는 제대로 하지 못해 큰일을 지체시켜 놓고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자기를 드러낼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비열한 소인배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류의 인성은 매우 나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너희가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큰일이나 중요한 일을 맡길 엄두가 나겠느냐?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네가 복음을 전하러 나가야 하는데, 아이가 너무 어려서 돌봐 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어떤 사람을 찾아야겠느냐? 이렇게 일에 책임감이 없고, 한결같지 못하며, 신뢰할 가치가 없는 사람을 찾을 엄두가 나겠느냐?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어째서냐? 자칫하면 그가 아이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어쩌다가 아이를 잃어버렸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저도 모르겠어요. 잠깐 졸았을 뿐인데 아이가 없어졌네요. 그게 제 탓인가요? 아이도 다리가 있으니 혼자서 걸을 수 있잖아요. 제 몸에 묶어 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제 탓이 아니에요!”라며 책임을 회피하기까지 한다! 이는 추악한 무뢰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은 이런 자에게 맡기면 안 된다. 그는 분수를 지키지 않으며 인격과 존엄이 없어서 문제가 발생하면 억지를 부리고 발뺌을 한다. 일 처리가 용두사미 같다는 결점은 인성 한 측면의 결함에 불과하지만, 이 결함은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며, 인격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서고 얼굴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일을 떠맡기 좋아하지만, 책임을 질 용기는 없다. 어려움에 직면하면 재빨리 책임을 회피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 버리며, 너무도 무책임하다. 또한 분수를 무척이나 지키지 않고, 일 처리에 끈기가 없다. 이 지경까지 왔다면 이는 단순히 인성 한 측면의 결함이 아니라, 인격이 너무 저열하고 인성이 나쁜 것이다. 왜 이 부류를 가리켜 인성이 나쁘다고 하겠느냐? 믿을 만하지가 못해서 무슨 일이든 맡길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일을 맡기든 대답은 잘 하지만, 돌아서자마자 자취를 감춰 버린다. 무엇을 하러 갔는지도 알 수 없고, 어쩌면 며칠 후에나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그에게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묻지 않으면 보고도 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어떤 작자겠느냐? 너무도 무책임하다! 이 정도의 일조차 검증을 견뎌 내지 못하고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아이를 맡기고 돌봐 달라고 하면, 언제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넘어져서 다치거나 먹으면 안 되는 것을 먹을 수도 있고, 밖에 나가 놀다가 길을 잃거나 나쁜 사람에게 유괴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일이 다 발생 가능하다. 이는 그가 무책임하고, 인격이 너무 저열하며, 무슨 일을 하든 양심의 마지노선이 없고,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키는 데에만 신경 쓸 뿐 다른 일은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네가 일을 부탁할 때, 그는 거절하면 네 체면을 깎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기 체면도 지키고 허영심도 채우기 위해 수락하지만, 그 후에는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큰소리를 쳐 놓고 일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것, 이는 신뢰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부류가 좋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용두사미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리더로 뽑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 안 되느냐? (그는 하나님 집 사역을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맞다. 그가 말하고 약속하는 것을 보면 제법 능력이 있어 보이며, 사람들은 다들 큰소리치는 사람을 믿기 좋아한다. 하지만 그가 일을 하기 시작하면 예측할 수가 없다. 그는 일을 망쳐 놓고도 네게 알려 주지 않으며, 무슨 문제가 생겨도 설명하지 않는다. 너는 그가 일을 제대로 할 거라고 잔뜩 기대하지만, 결국 그는 일을 망쳐 놓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네가 맡긴 일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일을 처리할 때 분수를 지키지 않고, 오직 자신의 흥미와 기호, 호기심대로 행동한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을 좋아해서 오직 자신을 내세우고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 일을 한다. 이런 사람은 본분을 지키고 책임을 지는 사람도, 착실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이러면 문제가 생긴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순종할 수 있는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까지는 가지도 않았다. 아직 이 수준까지 가지도 않았지만, 인성만 봐도 그는 신뢰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리더로 뽑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인성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은 양성할 가치도 없다. 왜 그렇겠느냐? 인격이 너무 저열해서 기본적인 인격과 존엄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리더로 쓰거나 양성하기에 모두 적합하지 않다.

일 처리가 신중한 것

다음으로는 일 처리가 신중한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이는 어떤 측면의 모습이겠느냐? (인성의 장점입니다.) 일 처리가 신중하고 경솔하지 않으며, 일이 닥쳤을 때 침착하게 대하고 진리를 구할 수 있는 것, 이는 인성의 장점이다. 이 사악한 사회에서, 각종 복잡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갖가지 사람과 일, 사물의 출현은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 설령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며 직면하는 갖가지 일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복잡한 상황이 있으니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본분을 이행하는데 악인의 교란을 맞닥뜨리면 먼저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그 후 진리 원칙대로 대해야 한다. 이는 본분을 대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이다. ‘일 처리가 신중한 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겠느냐? 사람의 이성과 관련이 있다. 네가 꿰뚫어 볼 수 없는 일에 직면했을 때는 신중히 행동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네가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일부 특별한 일의 배후에 있는 본질과 근원을 꿰뚫어 보지 못할 때는 신중히 행동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때는 더 신중히 행동해야 한다. 신중함이란 보수적이거나 소심하게 구는 것이 아니며, 일을 할 용기가 없거나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중함이란 인성 한 측면의 장점이다. 신중함은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겠느냐? 일을 처리할 때 먼저 진리 원칙을 구하고 나서 그 일이나 사역을 하는 구체적인 실행 단계와 길, 그리고 이루려는 성과를 구하는 것이다. 즉, 조심스럽고 신중한 마음으로 중요한 일과 자신의 본분을 대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각종 문제도 무척 신중하게 대한다. 덜렁대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데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 또한 인성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신중함은 인성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중한 태도는 사람을 이롭게 할 뿐, 결코 사람을 속박하거나 결박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일이 닥쳤을 때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며, 어떤 사람과도 접촉하지 못하고, 나뭇잎만 떨어져도 머리를 다칠까 봐 걱정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신중한 것이다. 온종일 자신만의 작은 세계에 갇혀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중함이겠느냐? (아닙니다.) 물건을 사러 갈 때는 속을까 봐 두려워하고, 가게를 차려 장사를 할 때는 손해를 볼까 봐 두려워하며, 집을 살 때는 흉가를 살까 봐 두려워하고, 컴퓨터를 살 때는 바이러스가 있을까 봐 두려워한다.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속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중함은 분명 이런 모습이 아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이 무지하고, 무능하며, 유치해서 혼자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며, 이는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즉, 이 사악한 사회와 복잡한 사람들을 마주할 때 어떠한 대응책도 없어 늘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위축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기를 당할까 봐, 해를 입거나 살해당할까 봐 두려워 누구와도 접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어떤 일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일하러 나갈 때도 임금을 주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고, 심지어 어떤 여성들은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워 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나쁜 사람을 만날까 봐 두려워 외출조차 하지 못하고, 물건을 사면 남에게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지나치게 신중한 것 아니겠느냐? 이를 가리켜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정신병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바로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온종일 이런저런 일들을 걱정하느라 결국에는 아무 일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람을 만나러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하니, 집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정신병자입니다.) 바로 이런 걸 정신병이라고 한다. 이는 정상적이지 않으며, 인간이 아니다. 판단력이 전혀 없고, 어떤 일을 하든 원칙도 마지노선도 없으니, 이런 사람은 짐승이 환생한 존재로 정상 인성이 없으며, 그 지나친 신중함은 진정한 신중함이 아니다. 신중함이란 무엇이겠느냐? 신중함은 바로 일 처리에 기준, 체계, 규칙이 있고,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비교적 엄밀하게 일을 처리하며, 매사에 침착하고, 경솔하게 굴거나 덤벙대지 않고, 충동적이지 않고, 진리 원칙과 지혜로운 방법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중함이며, 이것이야말로 인성의 장점이다.

큰소리치고 허풍 떨기를 좋아하는 것

큰소리치고 허풍 떨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이 또한 사악한 사회의 흐름이다. 많은 사람이 과장된 말, 엉터리로 꾸며 낸 말을 하며, 하는 말이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고, 입만 열었다 하면 다 허풍인데도,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데, 염치가 전혀 없다. 이런 부류는 신뢰할 가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부류에게 인격과 존엄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부류는 인격과 존엄이 없으며, 존중하고 신뢰할 가치도 없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겠느냐?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럼 허풍 떨기 좋아하는 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이는 인성의 결함이지만, 그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 인성이 악한지,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만약 단순히 양아치 기질을 가지고 있고, 가정생활이나 사회 환경에 오랜 영향을 받아 허풍 떨고 큰소리치기를 좋아하며, 말에 책임을 지지 않고,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나쁜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면, 이는 그저 인성의 결함일 뿐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양아치 기질이 너무 심각한 수준일 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허풍 떨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지낼 때 매우 강압적이고 흉악하게 군다면, 큰소리치고 허풍 떠는 목적이 다른 사람을 억압함으로써 자기가 허풍 떨거나 과장한 일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대단하게 만들고 남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더 이상 양아치 기질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인성이 악한 것입니다.) 이는 인성이 악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패괴 성품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어떤 패괴 성품이겠느냐? (흉악함입니다.) 교만함과 흉악함이 있다. 어떤 사람은 허풍 떨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단순히 양아치 기질이 심각한 것으로, 생활 습관과 생활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진실한 말을 하는 것,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것, 실제 사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인생을 논하는 것, 진지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이러한 의식 자체가 없는 것이다. 가정과 학교 어디에서도 이런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사회에 진출한 후에는 더더욱 이런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타고난 양아치 기질이 매우 심각하다. 이런 사람은 건들거리고 진중함이 없으며, 큰소리치고 허풍을 떨기 좋아하고 자신을 과시함으로써 남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싶어 하지만, 마음속에 별다른 야심이나 욕망,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런 모습만 있다면, 이는 단순히 양아치 기질로, 인성 한 측면의 결함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목적을 가지고 허풍을 떠는 것이라면, 자신은 매우 유능하고 재능 있으며 평범한 사람보다 우월하고 특별하다고, 평범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허풍을 떤다면, 이는 더 이상 양아치 기질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어떤 사상에 주도되고 지위욕, 야심, 욕망에 지배되어 허풍 떨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는 허풍 떨기라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해 승복하게 하고, 남들이 그보다 낮고 못하다고 느껴 그를 공경하고 그에게 순종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악함이다. 그가 허풍 떨기를 좋아하는 것은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이다. 즉, ‘네가 가진 것은 나도 가지고 있고,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할 수 있어. 네가 아는 것은 나도 알고, 네가 본 것은 나도 봤지. 나는 너만 못하지 않아!’라는 것이다. 심지어 네가 어떤 음식을 먹어 봤다면, 그는 분명 먹어 보지 않았는데도 먹어 봤다고 말한다. 게다가 너보다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먹어 봤다며, 없는 일로 허풍을 떤다. 허풍을 떠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너를 억누르고 너와 비교하여 자기가 너보다 대단하고 뒤지지 않는다고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야심과 욕망에 지배된 것이다. 그렇다면 야심과 욕망이 지배하는 이런 인성의 모습은 단순한 양아치 기질이겠느냐, 아니면 인성의 악함이겠느냐? (인성의 악함입니다.) 여기에는 패괴 성품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야심과 욕망이 지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패괴 성품이다. 어떤 패괴 성품이겠느냐? (교만함과 흉악함입니다.) 맞다. 교만함과 흉악함, 이 두 가지 패괴 성품이다. 이 외에 약간의 사악함도 있다. 즉, 네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는 마음속에서 꿍꿍이수작을 부리고 있다가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꾸미려 하고, 사악한 마음과 극단적인 생각으로 이런 일들을 대하려는 것이다. 네가 “우리 집 차는 도요타입니다. 일본 차죠.”라고 하면, 그는 “일본 차는 좋지 않아요. 차는 역시 독일 차죠. 제가 예전에 몰던 독일 차는 성능도 성능이거니와 10년 넘도록 고장 한 번 난 적이 없었답니다. 당신 차보다 훨씬 좋았죠!”라면서 기어코 너를 이기려고 한다. 네가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어요.”라고 하면, 그는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답니다. 질투 나죠?”라고 한다. 사실 그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너를 이기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질투하고, 높이 평가하고, 우러러보는 느낌을 즐긴다. 보아라, 누구에게서 정보를 얻든 그의 반응은 모두 사악하고 극단적이다. 그에게는 정상 인성의 사유가 없다. 정상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뭔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에게 그게 있다니 정말 좋겠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과 장점이 있는지 말해 줄래요? 저도 식견 좀 넓히게 해 주세요.”라고 할 것이다.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허풍 떨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상 인성이 없어서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있는데, 왜 나는 없지? 없어도 있다고 해야 해. 당신 것보다 더 좋다고 해야 한다고!’ 만약 네가 그에게 그 물건을 보여 달라고 하면, “안 보여 줄 거예요!”라고 하는데,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일에 직면하든, 어떤 정보를 보거나 받아들이든 그의 반응은 모두 극단적이고, 인성에 부합하지 않으며, 사악하다. 그렇기에 그의 성품에는 약간의 사악함도 섞여 있는 것이다. 그와 정상적으로 대화하고 교제할 때, 너는 그가 다른 생각을 할 만한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아도 그의 머릿속은 이미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미 너를 질투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미워하고, 또 너를 억압하고 싶어 한다. 그의 머릿속은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말해 보아라, 이는 사악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악한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그가 드러내는 대부분의 표정, 말, 행동은 모두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말에 공격성이 있을 수도 있는데, 공격성 외에도 그의 말 중 일부는 진실이 아니거나 허풍일 수 있다. 그의 내면에 사악한 생각이 있기 때문에 사악한 생각에 지배되어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고, 사탄 마귀에게서 나온 말이다. 이런 사람은 인성이 없으며, 인간도 아니다. 허풍 떨고 큰소리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인성의 본질에 따라 규정해야 한다. 즉, 양아치 기질이 있는 건지, 인성이 악한 건지를 살펴봐야 하며, 어느 측면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만약 인성이 악하고, 양아치 기질이 심각하며, 악행을 많이 저지를 수 있다면, 좋은 사람이 아니니 악인으로 규정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큰소리만 좀 치고, 약간의 양아치 기질을 가지고 있을 뿐,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고, 양심과 이성이 좀 있어서 좋은 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면,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니, 자질이 좋다면 책임자나 리더 일꾼으로 뽑을 수 있다. 똑같이 큰소리치고 허풍 떨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인성이 선한지 악한지를 봐야 한다. 만약 양아치 기질만 있다면, 이는 인성의 결함일 뿐 패괴 성품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이런 부류가 속셈과 야심을 갖고 허풍을 떤다면, 이는 인성이 악한 것이며,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인성을 논하자면 이는 인성이 악한 것이고, 패괴 성품과 관련된다면 그것은 교만함과 사악함, 또는 흉악함이니, 인품이 나쁜 것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패괴 성품과도 관련된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부주의한 것

계속해서 부주의한 모습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무슨 일을 하든 부주의한 것, 이는 어떤 측면의 문제겠느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무엇을 보든 대충대충이고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며, 무슨 일을 하든 어설퍼서 섬세한 사역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문서 사역이나 문서 보관 사역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섬세한 작업도 할 수 없는데, 옷을 만들 때 간혹 바지통을 소매에 꿰매기도 하고, 긴 소매를 짧은 소매로 만들기도 하며, 26인치인 허리둘레를 24인치로 만들기도 하는 등, 크게 만들거나 작게 만들어 버린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늘 이렇게 부주의하고, 덤벙대고, 서툴러서 결과적으로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심지어 어느 정도로 부주의하겠느냐? 일 때문에 외출하면서 가져가야 할 물건도 잊어버리고, 소송 때문에 변호사를 만나면서 신분증을 가져가지 않으며, 변호사가 요구한 증거도 가져가지 않는다. 많은 물건을 빠뜨리는데, 때로는 중요한 물건을 어디에 놓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신경 써서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늘 물건을 잃어버리고, 일과 생활이 엉망이 된다. 이런 부류는 사역과 본분을 대할 때 결코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며, 무슨 일을 하든 다 날림으로 한다. 무슨 일을 보든 대충 보고, 무슨 말을 들어도 대충 들으며, 무슨 말을 하더라도 대충 말하고, 무슨 일을 기억해도 대충 기억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역이나 기밀 사역은 할 수 없으며 그런 사역을 하기에 적합하지도 않다. 단순히 그 사람 개인의 생활이나 위생과 관련되어 다른 사람이나 중요한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의 부주의는 그저 인성의 결함일 뿐이며 무슨 문제가 생기면 본인이 책임지면 된다. 하지만 만약 본분이나 중요한 사역, 또는 어떤 사람의 운명과 미래, 사람의 거취 등과 관련된다면, 이런 부류는 이런 일을 처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너무 부주의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는 이런 일을 세심하게 대하지 않고 대충 훑어보기만 하며, 머리를 쓰거나 마음과 노력을 기울여 일을 처리하기 귀찮아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일 처리 스타일과 방식이 시종일관 날림일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잘 잊어버린다. 만약 단순히 개인 생활과 관련이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역이나 기밀과 관련되었다면 일을 망칠 수 있으며, 심지어 큰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급한 일이 생겨 파리에 가야 하는데, 부주의로 로마행 항공권을 사고도 매우 기뻐하며 “오늘 항공권이 너무 싸네!”라고 말했다고 해 보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당연히 싸죠. 파리에 가야 하는데, 어째서 로마행을 샀나요?”라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너무 부주의한 것이다! 이런 부류는 무슨 일이든 얕잡아 보고 건성으로 대충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 눈으로 한 번 대강 쓱 훑어보고는 끝낸다. 이렇게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물론 마음을 쓰기 싫어하고 게으르게 구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쓰기 귀찮아하고, 머리를 쓰거나 공들이기 귀찮아한다. 부주의한 사람은 중요한 사역에 적합하지 않다. 특히 문서 사역, 문서 보관, 기밀 업무 기술과 관련된 사역 등을 하기에 부적합하다. 그렇다면 이 부류가 리더가 되면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항상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전부 큰 틀에서 대강대강 할 뿐, 꼭 뭔가 하나씩 빼먹어서 실질적인 사역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부류는 사역할 때 세부 사항이 없으며 늘 날림으로, 건성으로 한다. 말도 늘 애매모호하게 해서 항상 ‘대략, 아마도, 대체로, 어쩌면’ 같은 말들을 사용하기 좋아한다. 이런 부류는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 행정 사역, 인사 사역, 교회 생활, 복음 사역 등 하나님 집의 많은 사역은 모두 구체적인 세부 사항이 있는데, 부주의한 사람들은 세부적인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머리가 아파지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는 이런 세부적인 사역을 하기 싫어한다. 이런 게으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역을 할 때도 항상 ‘대충 하기만 하면 돼. 어쨌든 사역지침에서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으니까.’라고 생각한다. 항상 ‘대충 그 정도면 된다.’는 태도를 갖고 있는 그가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사람을 볼 때도 대충 본다. 리더 일꾼을 볼 때도 대충 보고, 각 팀의 책임자를 볼 때도 마찬가지로 대충 본다. 누가 “그 책임자는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됐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아마 3년 좀 넘었을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3년이라면 기초도 아직 다져지지 않았을 텐데, 이런 사람이 책임자가 되면 믿을 수 있겠느냐? 그는 이것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항상 ‘대략, 대체로, 아마도, 어쩌면, 그런 것 같다’ 등의 말을 자주 사용하며,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누가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리더를 해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해 본 적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거든요.”라고 대답한다. 보아라, 그는 어떤 일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자세하게 물어보면 그는 자신의 느낌과 인상에 따라 대답하지, “즉시 가서 물어보고 확인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며, 무슨 일이든 그저 대충대충 비슷하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뭐 하러 그렇게 꼼꼼하게 사나요?”라고 한다. 이 말이 옳은 측면도 있고 육적인 생활과 관련된 일은 좀 대충 해도 괜찮기는 하다. 하지만 교회 사역과 관련되었다면 어설프게 해서는 안 된다. 사역을 어설프게 하면 성과에 지장을 준다. 모든 사역은 다 구체적인 배치, 안배, 점검, 독촉이 있기에 좋은 성과가 나는 것이다. 그저 어설프게, 대강대강 한다면, 어떤 사역도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주의한 것은 인성의 결함이며, 이 부류는 중요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고, 특히 리더 일꾼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무슨 일이든 대충 듣고는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교회 설립 사역의 경우,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는 어떻게 교회를 설립해야 하는지, 인원이 몇 명이어야 교회 한 곳을 설립할 수 있는지, 몇 개의 교회가 있어야 소교구를 설립할 수 있는지, 몇 개의 소교구가 있어야 교구를 설립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전부 구체적인 규정이 있다. 또한 일부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들을 구하지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세부 사항을 말해 보라고 하면 “그냥 교회를 세우는 거잖아요. 일정 수의 사람이 모이면 설립하는 거죠.”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립하는 겁니까?”라고 물으면, 알지 못하고 세부 사항도 말하지 못한다. 만약 그가 리더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교회를 어떻게 설립하는지 모르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모르면서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배우지도 않으며 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이 교회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류에게는 “물러나라!”라는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는 리더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그 어떤 사역도 사람을 다루는 사역보다 복잡한 것은 없다. 만약 신중하고 책임지는 마음이 없으며, 사역을 세심하지 않고 어설프게 한다면, 네 자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부주의해서 무슨 일을 하든 대충대충 하고, 전체적인 윤곽이나 형식을 따르는 것만 중시하며, 세부 사항을 중시하지 않고, 또 진지하게 대할 줄도 모른다면, 절대 리더 일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가 되었느냐? (이해가 되었습니다.)

일을 세심하고 진지하게 대하는 것

부주의는 인성의 결함이다. 그렇다면 일을 세심하고 진지하게 대하는 것, 중심과 중점을 파악하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발견하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은 인성의 장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심한 사람은 일 처리 태도가 비교적 올바르고, 일을 매우 세심하고 진지하게 대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 있고, 성급하게 굴지 않는다. 이는 인성의 장점이다. 사람이 이런 인성의 장점을 갖췄다면 풀타임 사역을 담당할 수 있겠지만, 만약 그의 일 처리 속도가 너무 느리고 사역 효율이 낮다면, 성과가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무엇과 관련되겠느냐? 선천적인 조건 중 자질과 관련이 있다. 세심한 사람은 모두 사역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관점은 틀렸다. 어떤 사람은 일을 너무 세심하게 해서 신경이 곤두서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채소를 씻을 때 채소잎의 앞면을 씻은 다음에 뒷면을 씻고, 시든 잎은 모두 제거하고, 벌레 구멍도 전부 도려내며 아주 깨끗하게 한다. 이렇게 세심하게 일하는 것이 인성의 장점이기는 하지만, 원칙 없이 너무 자질구레한 것까지 신경을 쓴다면, 그럴 필요는 없고 비효율적일 것이다. 이는 자질이 부족해서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일을 세심하게 하면서도 원칙, 중심, 중점을 파악하고, 행동이 빠르고 민첩하며, 판단도 빨라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일 처리가 세심하다고 해서 일 처리가 효율적이라는 것은 아니며, 일 처리 성과가 좋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앉아 있을 수 있고, 침착하며, 성급하지 않고, 큰소리치지 않고, 덤벙대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는 기껏해야 인성의 장점에 불과할 뿐, 자질이 좋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일 처리가 매우 세심하고, 진지해 보이며, 서두르거나 허둥대지 않고, 매우 침착하게 행동하지만, 일 처리가 비효율적이고, 일의 경중과 완급을 구분할 줄 모르며, 중요하지 않은 일을 끝도 없이 붙잡고 있어서 보는 사람이 조급해지고 화가 나서 발로 차 버리고 싶을 정도다. 일을 너무 느리게 하는 데다가 효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으니, 정말이지 쓸모없는 놈이다! 정상적인 생존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보다 10배나 20배 더 빠르게 일한다. 그는 너무 느리게 일하며,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규칙과 원칙을 찾지 못하고, 요령도 없고, 효율도 낮다. 한 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온종일 하고, 하루면 끝나는 일을 닷새 동안 하며, 닷새면 끝나는 일을 열흘 내내 해서 보고 있으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어떤 여자는 일 처리를 질질 끈다. 잠시 후에 일하러 나가야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머리를 감는 것도 요령이 없어서 머리카락을 한꺼번에 씻지 않고 한 가닥씩 씻는 바람에 30분이 지나도 다 끝이 나지 않는다. 이는 정신병 아니겠느냐? 머리를 감느라 정작 중요한 일에는 지장을 준 것이다. 그녀는 일이 급할수록 더더욱 조급해하지 않으며, 중요하지 않은 일에 전념하다가 큰일에 지장을 주어도 조급해하거나 속을 태우지 않는다. 네가 재촉하면 또 많은 이유를 대며 “제가 이 중요한 일들을 끝내지 않으면 되겠어요?”라고 한다. 너는 이런 사람을 보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를 발로 차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발로 차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일이 있어도 시킬 필요가 없다. 일을 너무 느리게 하고, 너무 어리석으니 말이다! 너희는 이처럼 느릿느릿 일하는 사람을 보면 조급해지지 않으냐? (조급해집니다.) 그가 “저는 일을 세심하게 합니다!”라고 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세심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다른 사람들도 너보다 그렇게 부주의하지 않으며, 너보다 일을 더 많이, 그리고 잘 한다. 너의 그런 세심함이 성과를 내느냐? 이것이 핵심이다. 일 처리가 세심할 뿐만 아니라 효율과 성과도 좋아야만 그 세심함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일 처리가 세심하기만 할 뿐 결과적으로 성과도 없고 효율도 낮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옷을 매우 세심하게 만들지만, 늘 옷의 치수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고, 사람이 옷을 입었을 때 잘 맞는지도 정확히 보지 못한다. 소매가 긴지 짧은지도 알지 못하고, 품이 큰지 작은지도 알지 못하며, 소맷부리의 표준 폭이 얼마인지도 알지 못하고, 옷깃이 적당한지도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만든 옷은 절대 기준에 맞을 수 없다. 만약 세심하면서도 원칙이 있다면, 이는 정말 인성의 장점일 것이다. 하지만 세심하기만 하고 원칙이 없어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늘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만 관심을 쏟으며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면, 이는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세심함’이라는 말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세심함이 장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의 세심함은 원칙이 없는 쓸데없는 세심함으로, 이는 세심함이 아니라 신경이 곤두서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며, 자질이 부족해서 일 처리 요령과 원칙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세심한 모습이나 일 처리 방식이 인성의 장점이 될 수는 있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에 따라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 만약 자질을 따지지 않는다면, 일 처리 태도가 세심한 것만으로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자질도 있고 일 처리 또한 효율적이며 원칙을 준수할 수 있는데 거기에 세심하기까지 하다면, 이는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인성의 장점이다.

과시하기 좋아하는 것

또 다른 모습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과시하기 좋아하는 것, 이는 어느 측면의 문제겠느냐? (패괴 성품 측면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보자. 타자를 매우 빠르게 치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런 특기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자판을 친다면, 이는 ‘타자 치는 리듬만 들어도 내가 얼마나 타자가 빠른지 알겠지!’라는 의미이다. 어떤 대졸자가 늘 ‘우리가 대학 다닐 때’, ‘대학 교수님’, ‘대학 캠퍼스’와 같은 말을 한다면, 이는 어떤 모습이겠느냐? (과시하는 것입니다.) 과시하는 것이다. 새 차를 산 어떤 사람은 자기 차가 고급 브랜드라는 것을 남들이 모를까 봐 차에서 내린 후에도 떠나지 않고 차 유리창에 손자국이 있는지 차 도장에 긁힌 자국은 없는지 확인한다. 왜 계속 차 앞에서 맴돌겠느냐? 바로 자기가 그 차의 주인임을 남들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 이는 어떤 모습이겠느냐? (과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급 핸드폰을 손에 들고는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분명 핸드폰 배터리가 없는데도 통화하는 척한다. 이는 무엇이겠느냐? (과시하는 것입니다.) 왜 과시하려고 하겠느냐? 허영심 때문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밍크코트를 입고는 따뜻한 실내에 들어가도 벗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안 더운가요?”라고 물어보면, “안 더워요. 밍크코트 입어서 따뜻해요!”라고 대답한다. 남들이 밍크코트를 못 알아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옷을 벗을 때도 굳이 브랜드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 코트는 밍크인 데다가 명품 브랜드예요. 당신은 알지도 못하는 브랜드죠!”라고 거들먹거린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데 뭐 하러 과시하는 것이냐? 이는 헛된 과시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나한테도 “오리털 패딩을 입으셨네요? 밍크코트를 입어 보세요. 따뜻하답니다!”라고 자랑하길래, 나는 “따뜻하지만, 옷이 무겁더군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밍크코트를 입고 내 앞에서 거들먹거렸는데,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렇게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천박하지 않으냐? 인성만 놓고 본다면, 그는 두 가지 측면의 문제가 있다. 하나는 허영심이 특히 강하다는 것이다. 그는 먹고, 입고, 쓰는 이런 외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다 자랑하고 싶어 한다. 과시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고, 자신이 입고 쓰는 것들이 모두 고급품이며 평범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안다고 한들 또 뭐가 달라지겠느냐? 설령 사람들이 알고 나서 그를 우러러보지 않을지라도 그는 마찬가지로 거들먹거리려고 한다. 천박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천박하고 유치하다. 이것이 바로 과시하기 좋아하는 부류의 또 다른 측면의 문제이다. 말해 보아라, 그렇게 과시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냐? 그럴 필요가 있느냐? 쓸데없는 짓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과거 80, 90년대에는 구두 밑창이 닳으면 철판을 덧대서 걸을 때 큰 소리가 났다. 어떤 사람은 새 구두에도 반드시 철판을 덧댄 후에 신었는데, 자기가 구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면 마음속으로 자신감이 들고 즐겁다고 느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야. 매력과 존재감이 있다는 증거니까, 반드시 자신의 장점과 강점,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들을 다 함께 누려야 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함께 누리는 것이겠느냐? 이것은 자랑이다. 이 세상에는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매우 많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모두가 이런 자들을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냐? 아무도 이런 부류를 멸시하지 않으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 이런 부류이며, 모두가 각종 물질, 지위, 재화의 즐거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런 것들을 추앙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부류가 역겹고 경멸스럽게 느껴진다. 왜 그렇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초를 다지기 시작해 조금씩 진리를 깨닫고 사람답게 사는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물질적인 즐거움과 세상의 허황된 것들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그런 외적인 것들에 대한 추구가 적어지고,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이 변하며, 내면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지고, 다른 시각으로 물질적 욕구를 바라보게 되며, 그런 것들이 다 허무하고 내면의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각종 물건들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은 기껏해야 무엇이겠느냐? 기능이나 특기 등을 자랑한다. 예를 들어 보자.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제 목소리가 좋지 않나요?”라며, 자기가 노래를 잘한다는 것을 남들이 모를까 봐 늘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요컨대, 과시하기 좋아하는 것은 인성 한 측면의 결함이며, 인성이 미성숙하고 유치하고 천박한 모습이다. 사람이 약간의 글귀와 도리만 이해할 뿐 아직 진정으로 진리를 얻거나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을 때는 과시하기 좋아하는 결점을 드러내기 쉬우며, 이런 인성의 결함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진리를 얻기 전에 과시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은 그가 살아가는 자본이자 밑천이기 때문이다. 네가 자신감 있게 처신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은 외모, 기질, 특기, 학력, 경력 또는 기술 업무 등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과시하기 좋아하는 결점을 드러내며, 이는 극복하거나 저버리기 쉽지 않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어느 정도 분량이 생겨 이처럼 진리와 무관한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면, 과시하고 자랑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 인성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분량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물론,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며 진리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과거에는 과시하기 좋아했어도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한 후에는 그런 욕망이 약해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측면의 인성 결함이 극복되고 사라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좀 비싼 티셔츠를 입었는데 실수로 약간 더럽혀 예민해졌다고 해 보자. 다른 사람이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요? 빨면 되잖아요?”라고 하자, 그는 “이 옷 200위안짜리예요. 알기나 해요?”라며 굳이 가격을 남들에게 알려 줘야 만족했다.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후 이런 일에 직면한다면, 올바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가격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이때 그의 허영심은 어느 정도 줄어들 것이다. 이는 그의 인성이 비교적 성숙해졌고, 그렇게 천박하고 유치하지는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과시하기 좋아하는 인성 결함을 극복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싫어하고 부유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다음으로는 가난한 사람을 싫어하고 부유한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부자를 보면 아첨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피부도 좋고 잘생겼군요. 당신은 귀한 분이니, 당신이 뱉는 침조차도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값어치가 있습니다!”라고 말이다. 부자, 신분이 높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무척 부드럽게 이야기하지만, 농민을 보면 항상 비웃고 싶어 하고 말 안팎으로 상대를 폄하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대할 때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부자의 요구에는 영합하려 하고, 심지어 기꺼이 그의 노예가 되고자 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대할 때는 전혀 달라서 상대가 어려움에 직면해 도움을 청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신분이 낮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대할 때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대할 때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을 싫어하고 부유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이것이 인성의 결함이냐? 인성의 어떤 문제겠느냐? (인격이 저열한 것입니다.) 이는 인성에서 인격 측면의 문제로, 인격이 저열한 것이다. 부자를 보면 굽실거리는 예스맨이 되지만, 가난한 사람을 보면 상전이 되려는 것처럼 구니, 이는 어떤 작자겠느냐?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원칙이 없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단지 돈이 좀 적고, 생활 여건이 좋지 않을 뿐이다. 그들이 너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느냐? 가난한 사람은 반드시 인성이 나쁘기라도 하다는 말이냐? 부자는 반드시 인성이 좋기라도 하다는 말이냐? 가난한 사람을 싫어하고 부유한 사람을 좋아하는 이런 부류가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가늠하고 바라보겠느냐? 분명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류는 돈이 많은 사람을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며, 가난한 사람은 천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돈으로 사람을 가늠한다. 이런 자가 좋은 사람이겠느냐? 이 부류의 인성은 어떠하겠느냐? (인성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를 보면 얼굴 가득 웃음을 띠지만, 가난한 사람을 보면 바로 표정이 달라지는데, 그 변화가 정말 빠르다! 부자라면 요강을 가져오라고 해도 선뜻 나서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물 한 잔 따라 주는 것조차 싫어한다. 이는 어떤 작자겠느냐? 인격이 저열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류가 리더가 되면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으냐? 어떤 측면에서 리더에 적합하지 않으냐? (그는 사람을 대할 때 원칙이 없으며, 사람을 뽑고 쓸 때도 진리 원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가 리더가 된다면 지위와 돈이 있는 사람을 발탁할 것이며, 만약 발탁된 사람들이 악인이라면 그 교회는 악인이 권세를 잡게 되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이런 부류는 리더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 인격이 저열하고 일 처리에 양심의 기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리더가 되면 교회를 사회처럼 만들 수 있어 그가 이끄는 교회가 사회단체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는 돈과 세력이 있고, 신분과 지위가 높으며, 배경이 있고,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을 팀장이나 책임자로 발탁할 것이다. 반면 인성이 좋고, 자질이 있으며, 진리를 추구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농민, 가난한 사람, 학력이 낮고 듣기 좋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깔아뭉갤 것이다. 이는 사회와 똑같아지는 것 아니겠느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사회에서는 돈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권세를 잡지 않느냐? 신분이 높고 배경이 있는 사람, 권력과 세력이 있는 사람이 사회의 각 계층, 각 영역, 각 단체에서 지위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 집이 사회와 같다면, 그것이 하나님 집이겠느냐?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 집이 아니며,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사회단체이다. 가난한 사람을 싫어하고 부유한 사람을 좋아하는 이런 부류가 리더가 되면 바로 이런 결과가 초래된다. 이런 부류는 지위가 높은 사람을 보면 그들의 앞잡이가 되는데, 앞잡이가 되는 사람이 무슨 원칙이 있겠느냐? 이런 부류가 처신의 마지노선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부류는 처신의 원칙과 마지노선이 없어서 위험한 환경에 처하면 유다가 될 수 있다. 국가가 망하려 할 때 민족 반역자가 될 수 있으며, 만약 이 부류가 지도자라면 매국노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작자들이다! 그러니 이런 부류는 리더로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실질적인 사역을 할 수 없고 형제자매들을 해치며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인성을 갖춘 사람들은 깔아뭉개면서 인성이 악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고 유명한 사람들은 전부 발탁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발탁하는 원칙과 정반대이다. 만약 이런 부류가 하나님 집에서 왕권을 잡게 된다면, 교회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 사역과 하나님 선민은 이런 사람들 손에 망쳐지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결탁하고 서로 이용하며 서로 치켜세워 주는 바람에 진리를 추구하는 형제자매들은 모두 배척당해 구석에 밀려나게 된다. 어쩌면 모두 B조로 보내거나 제명되어 막다른 골목에 몰릴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겠느냐? 그들은 함께할 때는 서로를 형이나 동생이라고 부르고 어깨동무를 하며, 사회에서 자신이 어떤 휘황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는지, 상대를 위해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지 자랑한 후, 상대에게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지 물으며 서로 이용한다. 이것이 사회의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들은 함께할 때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으며, 진리나 개인의 체험적 인식을 교제하지도 않고, 자신에 대한 인식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부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가 사회에서 얼마나 승승장구하는지, 어떤 위신 서는 일을 했는지, 어떤 휘황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는지, 어떤 관료들과 함께 먹고 마셨는지, 어떤 관료에게 아첨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런 것들만 이야기한다.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그들은 서로 지위, 배경, 능력, 수단을 비교하고, 또 서로 결탁하고 이용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관계이다. 만약 네가 평범한 사람이거나 농민이라서 그들을 위해 일을 처리해 줄 수 없다면, 그들은 너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는 결코 그들의 눈에 들지 못해 구석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함께 있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하겠느냐? 어떤 브랜드의 옷이 새로 나왔는지, 어떤 신차가 출시되었는지, 누가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샀는지, 누구네 건물이 경매로 팔렸는지, 누가 산 주식이 떨어졌는지 또는 올랐는지, 누구네 회사가 상장했는지, 누가 정부 공직자에게 아첨했는지, 누가 어떤 폭력 조직과 결탁했는지, 누가 어떤 일을 하느라 뒷돈을 얼마나 쓰고 얼마나 많은 선물을 줬는지, 전부 이런 일뿐이다. 역겹지 않으냐? 만약 그들이 교회에서 맨날 이런 일들만 이야기한다면, 교회 생활과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지 않겠느냐?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을 리더로 뽑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는 투기꾼이다. 교회에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들을 폭로해 정리해야 한다. 하나님 집은 이런 사람을 남겨 두지 않는다. 투기꾼은 하나님 집에서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고 복을 얻으려고만 한다. 그는 결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어떠한 긍정적인 사물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진심이 전혀 없고, 조금도 헌신하려 하지 않으며, 이익만 얻고 싶어 하고,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본분 이행에 전념하고 열심히 사역할 때, 그는 본분을 제쳐 두고 개인적인 일만 하며, 심지어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기까지 한다. 또 늘 인터넷에 접속해 패션, 미용, 헤어, 고급 건강식품 등 자신이 가장 좋아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들을 검색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는 어디를 가든 늘 허풍을 떨며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을 찾는데, 그런 사람을 만나면 바로 의기투합한다. 하지만 진정한 형제자매들과는 어울리지 못해 교회에서는 별종, 비인류이다. 너희는 이런 사람을 발견하면 멀리해야 한다. 또한, 만약 대부분의 사람, 또는 리더가 분별력이 없어서 그를 진정으로 믿는 형제자매라고 생각한다면, 너희가 나서서 그를 폭로하고 정리해 내보내야 한다. 이해가 되느냐? 이 부류를 왜 정리해야겠느냐?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교란을 일으키기 쉽고, 나쁜 분위기를 조성하며, 다른 사람의 본분 이행과 진리 추구에 지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는 교회 분위기를 다 망쳐 놓는다.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지장을 주고, 다른 사람의 발목을 잡으려 하며, 한 푼어치의 일을 하면서 열 푼어치의 임금을 요구한다. 이런 사람을 쓰느니 개를 키우는 것이 낫다. 개를 키우면 집을 지키고 주인에게 충성도 하니 말이다! 개는 뒤에서 꼼수를 부리지 않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만약 교회에 가난한 사람을 싫어하고 부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를 둔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그가 하나님 선민을 도울 수 있겠느냐? 그가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드러났고 모두가 그를 꿰뚫어 봤다면, 정리해 내보내야 한다. 만약 그를 계속 남겨 둔다면, 방해, 교란, 소란만을 일으킬 것이며, 교회에 우환만을 야기할 것이다. 그가 큰 화를 초래한 후에 수습하려면 번거로워진다. 우리는 번거로운 일을 원치 않고, 신경 쓰지 않기를 원한다. 사람이 해야 할 일과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 많은데, 이런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마라.

권력에 아첨하는 것

또 다른 부류로는 권력에 아첨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이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무엇이 좋지 않으냐?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 지위와 이익만 중시한다. 지위가 있는 사람을 보면 끊임없이 아첨하고, 먼저 말을 걸거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밥을 챙겨 주고 빨래와 청소를 해 주는 등 모든 일을 기꺼이 한다. 하지만 만약 네가 지위가 없으면, 그는 너를 보고도 못 본 척할 것이며, 네가 먼저 다가가면 이 부류는 너를 보고 바로 표정이 나빠질 것이다. 이런 사람이 좋겠느냐? 이런 문제는 어느 측면에 속하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인격이 저열하고 인성이 나쁩니다.) 인성이 좋지 않고, 인격이 저열하다. 인성이 어느 정도로 나쁘겠느냐? (인격과 존엄이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권력에 아첨하는 이런 부류가 선량한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겠느냐? 권력에 아첨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인성과 인격은 어떻겠느냐? 같은 사람을 대할 때 전혀 다른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들이 알아차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으며 태연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염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염치가 없는 이런 부류는 악인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악인으로 분류할 수 있겠느냐? 사람을 대할 때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얼굴의 근원을 분석해 보자. 이런 부류는 유독 지위를 좋아하고, 신분과 권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지위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입속의 혀처럼 굴고, 아무 거리낌없이 아부하고 아첨하며,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비위를 맞춘다.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중시하고 발탁하기를 바라는 속셈과 목적이 있든, 어쨌든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진리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겠느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이는 그가 특히 지위를 좋아한다는 증거이다. 그 자신은 능력이 없거나 자격과 조건이 안 돼서, 또는 기회가 없어서 지위를 얻지 못하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고 다가가는 것으로도 지위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없이 뻔뻔하게 상대방에게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이는 매우 저열한 인격이다. 그는 지위가 있는 사람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으며, 그 사람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 악인인지 아닌지도 분별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위와 돈만 있으면, 설령 악인이라도 아첨한다. 이는 너무 원칙이 없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지위가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옳고 좋으며, 어떤 말이든 다 괜찮다는 것이다. 그저 지위가 있는 사람이기만 하면 원칙이라고는 전혀 없이, 비정상적으로 잘해 준다. 그러니 염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개의치 않으며, 다른 사람의 평가도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또 그는 ‘나는 지위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에게 잘해 주고 싶어. 지위가 있는 게 뭐가 나빠? 당신들은 지위가 없으니 내가 잘해 줄 이유도 없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는 원칙과 존엄이 없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이는 인격이 저열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하면서 양심의 지각도 없고, 이성에도 어떠한 판단 기준이 없으며, 마지노선도 없다. 사람이 물러서 지위 있는 자를 만나면 그 즉시 머리를 조아리며 노예가 되고 아랫사람이 되어 버리니, 누구라도 지위만 있으면 그의 상전이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 인격과 존엄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는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낯간지러운 말이라도 서슴없이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많아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위 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 지위 있는 사람이 지위를 잃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는 또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가 어떻게 대하겠느냐? (바로 무시할 것입니다.) 바로 표정이 굳어지며, 예전과 완전히 다른 태도로 대한다. ‘지위를 잃었는데도 내가 잘해 주기를 바라다니, 꿈도 꾸지 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 한 잔만 따라 달라고 해도 무시하고, 도움을 요청해도 무시하며, 그와 이야기하면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어도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저와 이야기할 자격이 있냐고요. 당신이 누군데요?” 이 얼마나 흉악한 성품이냐! 지위 없는 게 죄라도 되느냐? 그 직함을 잃었다고 사람이 바뀌기라도 하느냐? 여전히 같은 사람 아니냐? 어째서 자기와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냐? 어째서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냐? 동물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 도움을 필요로 하면, 사람은 양심상 도와주고 챙겨 주고 보살펴 줘야 한다.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느냐? 하지만 그는 이런 인정미조차 없다. 이러한 모습 외에도 더 심한 사람도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예전에는 당신이 지위가 있었으니까 잘해 준 거지. 이제 지위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내가 당신을 존중하고, 체면을 봐주고, 말할 때도 여지를 두고, 또 예전처럼 시키는 대로 할 거라고 생각해? 어림도 없지! 당신을 짓밟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 이는 어떤 작자냐? 사람이 어려움에 부닥쳤는데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뒤에서 짓밟으려 하고, 괴롭히고 억누를 기회를 엿보다니,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악인입니다.) 악인의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아랫사람처럼 예의 바르고 착실하게 굴며 웃는 얼굴로 마주한다. 말을 할 때도 비위를 잘 맞춰서 지위가 있는 사람이 달에도 감자를 심을 수 있다고 하면 “달에서 키운 감자가 정말 맛있다죠!”라고 한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지위를 잃으면 태도가 180도 변해 그가 하는 어떤 말이 옳을지라도 듣지 않으며, 아무리 참된 인식을 가지고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저 못마땅해하기만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지위가 없으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옳은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야? 진리 실제가 있다고 해도 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 난 지위가 없는 사람을 짓밟는 게 좋아. 짓밟을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이는 어떤 작자냐! 네가 지위가 없으면 너를 못마땅하게 보는데, 아무리 잘해 줘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그와 동등한 입장에서 원칙대로 대해 줘도 너에 대한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이런 부류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인성이 없는 모습은 무엇이냐? 흉악함 아니냐? (그렇습니다.) 권력에 아첨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성품이 극도로 흉악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역겹다. 그런 사람은 너에게 지위가 생기면 너의 결점과 결함을 모두 장점과 강점으로 보고, 네가 지위를 잃으면 너의 강점과 장점을 모두 결점과 결함으로 본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고, 너의 모든 것을 못마땅해하며, 늘 너를 괴롭히고 짓밟고 억누르고 싶어 한다. 이는 흉악한 성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지위가 없는 사람을 마음대로 괴롭힌다. 착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은 죄라고 느끼고, 네가 그를 건드리지 않아도 먼저 트집을 잡아 너를 괴롭히고 짓밟으며, 너를 몹시 멸시할 것이다. 마치 지위가 없는 게 죄이니 살아갈 자격도, 그의 앞에 있을 자격도 없으며, 지위가 없으니 화를 당하고 재수가 없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는 어떤 작자냐? 이런 사람이 교회에 남아 있어야겠느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유달리 권력에 아첨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리더로 뽑을 수 있겠느냐? (뽑을 수 없습니다.) 왜 안 되겠느냐? 그는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도 이렇게 대하는데, 만약 그 자신이 정말 지위를 갖게 된다면 독재를 하고 유아독존식으로 굴지 않겠느냐? 그럼 정말 큰 일이다! 그는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 교회의 행정 법령, 형제자매들의 건의를 전혀 듣지 않으며, 심지어 지위가 없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 모두 억누를 것이다. 그러면 그 교회는 그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권력욕이 극도로 강하며, 일단 뜻을 이루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다. 권력에 아첨하는 이 부류는 특히 흉악하고 인격이 저열하다. 그가 지닌 패괴 성품의 주요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흉악함입니다.) 사악하고 흉악하며, 진리를 싫어한다. 특히 사악한 점은, 같은 사람을 두 가지 얼굴로 대하며, 얼굴을 바꾸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지위가 없는 사람이 자신을 건드리지 않아도 먼저 공격하고 괴롭히고 짓밟는다. 이는 흉악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지위가 있든 없든, 그는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지 못한다. 네가 그에게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합니다.”라고 하면, 그가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사람을 공평하게 대한다니요? 사람은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의 구분이 있습니다. 지위가 있는 사람은 고귀하고, 지위가 없는 사람은 천하죠!”라고 한다. 이것이 그가 사람을 보고 대하는 논리이자 원칙이다. 그는 진리 원칙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자신의 그릇된 논리를 늘어놓는다.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세 논리, 처세 원칙, 관점으로 지위와 권력을 대하며, 또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처세 원칙과 방식으로 이런 일들을 처리하여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대하는 요구와 원칙을 대체한다. 이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에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당신에게 지위가 생기면, 그때는 당신이 바로 내 마음속 대장이야.’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진리는 그의 마음속에서 더 이상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이렇게 무지막지하며 우매하고 완고하다니, 이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성품이다. 인성만 따진다면, 이런 사람은 인격이 저열하며 매우 역겹고 상종할 가치가 없다. 하지만 만약 성품을 따진다면, 이는 단순히 상종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류는 성품이 흉악하고 사악해서 구원받는 대상이 아니며 모두 징벌받아 죽어야 한다. 이는 죽을죄이다. 이런 부류는 무작정 권력에 아첨하며, 똥개처럼 아첨하는 얼굴을 하고 있어 보는 이를 역겹게 한다. 이런 부류가 교회 리더가 되면 위험인물이 된다. 만약 너희가 이런 부류의 사람을 교회 리더로 선출한다면, 재앙을 겪게 될 것이다. 어떤 지역 리더는 어리석어서 사람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이런 부류를 교회 리더 후보자로 지정하는데, 그 결과 형제자매들이 기만당하게 된다. 이렇듯 아부하고 권력에 아첨하는 데 능하며, 겉으로 보기에 매우 열심이고, 리더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은 후보로 선출되기가 쉽다. 이는 일부 리더 일꾼이 아부하고 알랑거리는 사람을 좋아하며, 이 외식하는 사람들이 리더가 되는 순간 교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히 이 부류는 선출되어 지위가 생기는 순간, 바로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교회를 교란하기 시작한다. 그 리더는 자신이 뽑은 사람이 악인임을 깨닫고 후회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교회에 초래한 결과를 만회하지는 못한다. 이는 전부 리더 일꾼이 패괴 성품이 있고 원칙 없이 일을 처리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지위와 권력을 숭상하는 자들은 모두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은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고, 리더 일꾼을 보면 만면에 웃음을 띤다. 어떤 리더는 이러한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한 채, 상대가 만면에 웃음을 띠면 몹시 기뻐하면서 그를 발탁하여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려 한다. 사실 그가 아부하고 만면에 웃음을 띠는 것은 간악한 속셈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 리더는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막상 리더가 되면 그는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을 발탁해 준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리더는 그제야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자신이 사람을 잘못 발탁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만회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만회해야겠느냐? (빨리 그 사람을 폭로하고 교체해야 합니다.) 그는 실질적인 사역을 할 수 없으며, 그저 권력에 아첨하고 아부할 줄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니, 빨리 교체해야 한다. 당시 눈이 멀어 사람을 분별하지 못한 탓에 잘못된 사람을 썼다고 후회하겠지만, 지금이라도 빨리 만회하면 늦지 않는다. 권력에 아첨하는 이 부류에 대해 꿰뚫어 보았느냐?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 부류는 좋은 작자가 아니다.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것

계속해서 선천적인 조건과 관련된 모습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것, 이는 어느 측면의 모습이겠느냐?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기억력이 특히 좋고,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며, 문장과 하나님 말씀 단락을 외우고, 찬양을 외우거나 어떤 사역지침을 특히 뚜렷하고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어느 측면에 속하겠느냐? (선천적인 조건의 자질이 좋은 것입니다.) 이는 선천적인 조건이다. 구체적으로 선천적인 조건의 어느 항목에 속하는가를 본다면, 나는 자질에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단순히 기억력이 좋아 일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해도, 많이, 정확히, 확실히 기억한다고 해도 이는 기껏해야 선천적인 특기, 재주, 능력이라는 범주에 속할 뿐, 자질이 좋은지 여부는 그의 이해 능력을 봐야 한다. 만약 기억력이 특히 좋아서 노래 가사, 지식과 도리, 어떤 업무 기능을 특히 잘, 그리고 빠르고 확실하게 외운다 해도 외운 것이 단순히 규례적인 죽은 내용에 불과하고, 진리 원칙과 관련되지 않으며, 실생활이나 사역에서 활용되거나 시행될 수 없다면, 단순히 기억력이 좋은 것에 불과하다면, 이는 그저 선천적인 조건의 특기와 능력에 속할 뿐, 자질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방금 말했듯이 자질이란 무엇이냐? (일 처리의 효율과 성과입니다.) 만약 기억력이 좋은데 자질도 좋다면, 어떤 측면의 모습과 특징이 있겠느냐? 들은 내용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핵심을 파악하고 원칙을 찾아낼 수 있으며, 실행의 길과 시행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실생활과 사역에서 실제로 활용하여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즉, 네가 기억하는 하나님의 말씀들과 진리 원칙이 이론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시행되어 진리 실제가 됨으로써, 사람들이 사역 성과를 보게 되고, 네 사역 효율도 높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억력은 물론이고 자질도 좋은 것이다. 기억력이 좋다고 해서 자질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해 능력이 있고,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할 줄 알며, 진리 실행 원칙을 찾을 수 있고, 사역을 시행할 때 편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고 빠르며 성과가 있어야 한다. 이래야 자질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자질이 좋다는 것은 일부 도리를 알아서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 원칙을 얼마간 깨닫고 파악한 후, 사역과 본분 이행 과정에 유연하게 활용하여 그것을 네 실생활의 일부로 만들고, 이론에서 실제로 바꾸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성과를 이루며, 사람들이 혜택과 유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있는 것이다. 글귀와 도리를 아는 데만 머무를 뿐 사역을 시행하지 못하고 원칙과 방향을 찾지 못한다면, 즉 그 측면의 진리 원칙이 네게 영원히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고, 너에게는 그것을 실제로 바꿀 방법도, 방식도, 길도 없다면, 그것은 곧 자질이 없는 것이자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네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도, 심지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거의 초능력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의 자질이 좋다는 의미는 될 수 없다. 자질이 좋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자질은 무엇으로 가늠하겠느냐? (사역의 원칙을 이해할 수 있는지, 원칙을 제대로 적용해 성과에 이를 수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즉, 효율과 성과를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역지침을 빨리, 정확하게 외우고, 이론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시행할 때 “이 사역은 어떻게 하나요? 생각과 방안이 있습니까? 단계가 있나요?”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없습니다. 할 줄 몰라요.”라고 대답한다면, 이는 자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한 측면의 특기에 불과하다. 내가 처음 이 주제를 두고 교제할 때 이 측면의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너희는 잊어버린 것 같구나. 이번에 또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것을 자질의 범주에 포함시켰으니 말이다. 너희는 늘 사람의 특기와 재주를 잘못 이해하고, 한 측면의 특기와 재주를 좋은 자질의 범주에 포함시키는데, 이는 틀려도 단단히 틀린 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어 너희가 특기란 무엇인지, 재주와 능력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자질이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이는 사람을 분별하는 것과 자신의 생명 성장에 유익이 될 것이다. 적어도 사람의 교만한 성품을 어느 정도는 억제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노래나 춤에 뛰어나다고 해서 자신의 자질이 매우 훌륭하다고 착각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가늠할 수 있겠느냐? (아니요.) 그렇다면 노래하는 사람은 무엇을 갖춰야 자질이 좋은 것이겠느냐? (이해 능력이 있고, 어떻게 불러야 원칙에 부합하는지 알며, 깨닫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깨닫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보아라, 똑같이 얼마간 음악 이론을 알아도 노래를 할 때의 결과는 다르다. 어떤 사람은 노래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찾는다. 다양한 노래와 멜로디를 듣고, 또 다양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창법을 들으면서 어떤 창법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즐거움을 주는지 스스로 그 속에서 느낌을 찾아 그 느낌대로 모색하고 연습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자기 노래 실력이 좋아졌다는 느낌이 들고, 사람들도 듣고 싶어 하면, 또 천천히 이론과 대조해 보면서 그 실행의 길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는 실행의 길을 더듬어 가며 자신이 노래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으며, 과거 자신의 잘못된 창법을 바꿀 수 있다. 그러고 나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모색한 좋은 것, 옳은 것, 긍정적인 것을 자기 노래에 실천하고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어떻게 노래하는 게 맞고 틀리는지, 어떻게 노래하는 게 좋은 느낌이고 나쁜 느낌인지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이론상으로만 알고 있을 뿐, 이론을 적용해 노래하지 못하고, 또 치우치게 이해한다면,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노래하는 사람 중 일부는 다른 사람이 그가 노래할 때 가성을 사용한다고 하면, 바로 그 말을 받아들이고 1, 2년 정도 연습해서 교정하고, 그다지 능숙하지는 않아도 진성으로 부르게 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분명 남들이 듣기에는 가성으로 노래하고 있는데도 그 자신은 진성으로 부르고 있다고, 진성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듯 분별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질과 깨닫는 능력이 없어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곧 자질과 특기에서 비롯된다. 네가 노래에 능하다면, 이는 너의 특기이자 선천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노래를 잘할 수 있는지, 그 분야나 업계에서 정수, 원칙, 요령을 깨달을 수 있는지는 자질의 문제이다. 만약 네가 정수, 요령, 원칙을 깨달을 수 있다면 가수나 성악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고 빨리 배우며 멜로디, 박자, 음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정도라면, 이는 선천적인 특기이며, 이 측면의 업무 기능에 능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질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제한적이기 때문에 영원히 ‘능하다’는 범주에만 머무를 뿐, 요령을 파악할 수 없으며, 진정한 가수나 성악가는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자질에서 생긴 제약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잠재력이 있고 발전 가능성이 있지만, 자질이 평범하거나 부족한 사람은 잠재력이 없고 발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분야의 특기가 있든, 자질이 부족하면 반드시 자질로 인해 제약이 생긴다. 어떤 측면에서 네가 아무리 뛰어나고 좋아하고 흥미가 많더라도 자질이 부족하기에 발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너는 자신의 자질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노래에 대한 자신감을 잃지는 않겠느냐? 나는 사실에 근거해 말하는 것이다. 자질과 특기의 차이점에 대해 교제하면서 너희의 한 측면 특기를 예로 들기는 했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너희에게 진정한 성악가가 되라고, 노래를 어느 수준 이상 정확하게 부르라고, 어떤 스타일로 부르라고, 노래로 큰 성공을 거두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수준에 도달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고유한 자질과 특기에 맞춰 그것을 잘 발휘하기만 하면 된다. 진실한 감정을 표현하고 진심이 담겨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 중 일부는 자질이 부족하거나 매우 평범해서 별로 발전이 없다고 말했다고 해서 기죽거나 포기하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너희는 기죽을 것이냐? (아닙니다.) 이 일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내가 너희의 일로 예를 들지 않으면, 너희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너희 마음에는 와닿지 않으니, 너희가 제대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모두가 더 명확히 이해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너희가 자질과 특기의 차이점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교제해도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괜찮다면 됐다. 올바르게 대하고, 해야 하는 연습을 해라. 마음을 들여 연습하고 좋은 목표와 방향을 향해 연습하는 것이 그래도 제자리걸음 하는 것보다는 낫고, 발전하지 않고 답보하는 것보다는 낫다. 자질에 한계가 있고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연습해 자신의 제한된 자질 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에 도달해야 한다. 마음과 힘을 다해 본분을 책임지고 본분에 충성을 다하는 태도로 이 본분을 이행하고 이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가져야 할 실행 원칙이다. 자신의 특기가 발전 잠재력이 없다고, 앞으로 남들 앞에 얼굴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해서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포기하면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이 일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진리 원칙이 아니다. 이해하였느냐? (이해했습니다.)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이 세 가지 측면에는 알아야 할 구체적인 내용이 많다. 이런 것들을 교제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많은 측면의 내용을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 뿐,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특기가 조금 있다고 해서 자기는 인격이 고상하다고, 존귀하고 패괴 성품이 없다고, 인성이 좋고 자질도 좋다고 여기는데, 이는 전부 이러한 각 측면의 문제를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야기된 일이다. 이런 문제는 세부 사항과 관련될수록 교제해야 할 내용이 많아지며, 한두 번으로는 다 말할 수 없어서 여러 번 교제해야 한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다음에 보자!

2023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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