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6)

지난 번 예배에서는 진리 추구 방면에 관계된 내용으로, ‘하나님과의 거리 내려놓기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 내려놓기’고는 큰 주제에 대해 교제했다. 이 큰 주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얘기했는데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과 인성, 패괴 성품에 관련된 주제였고, 여기에서 자질 측면에 관한 문제를 언급했다. 지난 번에 자질 측면에 관한 문제를 조금 교제하고 사람의 관념들을 일부 해결했는데 교제를 듣고 나서 자질이란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를 알게 되었느냐? 자질이 도대체 무엇이냐? 자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한 사람의 자질이 좋은지, 보통인지, 아니면 부족한지는 어떻게 판단하느냐? 어떤 측면들을 근거로 판단하느냐?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구하고 묵상해 보았느냐? (묵상해 보았습니다. 지난번 예배 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는 그가 하는 일의 효율과 효과를 보고 판단한다고 교제하셨습니다. 전에는 이쪽 방면에 대해 그다지 잘 인식하지는 못하다 보니 특기와 자질을 혼동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학업 성적이 아주 뛰어나거나 몇 개 국어에 능통하면 자질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교제를 듣고 비로소 어떤 것이 진정으로 훌륭한 자질이고 어떤 것이 단지 특기에 불과한 것인지 분명히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겉으로는 무척 영리해 보이지만 본분 효율이 낮고 끝까지 진리원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질이 비교적 부족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의 효율과 효과로 사람의 자질을 판단한다는 것은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런 것이고, 한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방법에는 그가 하는 일의 효율과 효과 이외에도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 더 있다. 첫 번째는 한 사람의 학습 능력을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해 능력, 세 번째는 받아들이는 능력, 네 번째는 수용 능력, 다섯 번째는 인지 능력, 여섯 번째는 판단력, 일곱 번째는 변별 능력, 여덟 번째는 대처 능력이다. 아홉 번째는 의사 결정 능력, 즉 집행 능력이고, 열 번째는 감상 능력, 열한 번째는 혁신 능력이다. 다 숙지하였느냐? (숙지했습니다.) 전부 몇 가지이냐? (열한 가지입니다.) 한 번 읽어 보아라. (첫 번째는 학습 능력, 두 번째는 이해 능력, 세 번째는 받아들이는 능력, 네 번째는 수용 능력, 다섯 번째는 인지 능력, 여섯 번째는 판단력, 일곱 번째는 변별 능력, 여덟 번째는 대처 능력, 아홉 번째는 의사 결정 능력, 열 번째는 감상 능력, 열한 번째는 혁신 능력입니다.) 한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는, 포괄적으로 봤을 때 그가 하는 일의 효율과 효과라는 두 가지 방면으로 판단하고, 그가 하는 일의 효율과 효과가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이 열한 가지 기준에 따라 종합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한 사람의 자질이 과연 어떤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물론, 한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를 보려면 우선은 각 방면의 능력이 어떤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그런 다음 그가 하는 일의 효율과 효과를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가 각 방면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는 분명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일할 것이다. 한 사람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일한다면, 이 열한 가지 기준에 따라 판단했을 때 각 방면의 능력 역시 훌륭할 것이다. 이 열한 가지 능력은 어느 것도 그것 하나만으로는 한 사람의 자질이 좋은지 나쁜지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니,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물론, 열한 가지 능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 변별, 그리고 대처, 의사 결정과 같은 능력들이다. 이것은 사람이 한 분야의 이론을 이해한 후 일을 처리하는 능력에 관계되며, 나머지는 모두 받아들이고 학습하는 측면, 즉 사람의 두뇌 차원에 관계된 능력이다. 이제부터는 이 열한 가지 능력에 대해 하나씩 교제해 보기로 하자.

첫 번째는 학습 능력이다. 학습 능력은 단순히 한 분야의 지식을 배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언어나 한 분야의 기술 업무를 배우거나 혹은 한 분야의 새로운 사물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경우도 모두 학습 능력의 범주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한 가지 기술 업무를 배우는 경우,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반년만 배우면 기본적으로 업무를 파악해서 해당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네가 반년을 배워서 업무를 파악하여,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학습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네가 배우는 기간이 일반인의 두 배라면, 그러니까 반년을 배워도 파악하지 못해서 반년을 더 배워야 한다면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학습 능력과 관련해서 만약 일반적인 기한 내에 그 기술 업무나 지식을 파악할 수 있다면 자질이 보통이거나 좋은 편이다. 하지만 만약 그 기한을 넘겨서, 다른 사람들의 두 배, 심지어 세 배의 시간을 들여야 그 분야의 기술 업무나 지식을 배울 수 있다면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보통 사람보다 두세 배의 시간을 더 들이고도 익히지 못할 정도로 학습 능력이 없을 경우, 그 자질이 어떻겠느냐? 학습 능력이 없으면 정상인 자질의 일반적인 기준에 미달하여, 자질이 부족하다 못해 없다고 할 수 있다. 자질이 없다는 것은 어떤 범주로 귀결되겠느냐? 아무런 학습 능력이 없는 저능아, 백치인 것이다. 이것이 학습 능력 방면에 관한 내용이다.

두 번째는 이해 능력이다. 이해 능력은, 하나의 사물을 보거나 혹은 주변에서 늘 접하는 사물을 대할 때 사람이 그 안에 담긴 원칙이나 요령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네가 한 가지 업무 기술을 배울 경우, 이론적인 수업도 듣고 실무적인 시범도 보고 난 후, 정상적인 시간 내에 그 안에 담긴 요령과 원칙을 알아 낼 수 있다면, 너는 자질이 좋고 이해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셈이다. 그런데 만약 네가 금방 이해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다시 한번 교제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여러 번 알려주어도 거기에 담긴 요령과 원칙이 과연 무엇인지 모른다면, 이해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너 스스로 실제 업무를 통해 서서히 모색해 보면서 조금 알게 될 수도 있지만 단지 그 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체험하든, 그게 3년이든 5년이든,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범위에 머문다면, 일을 처리할 때 규례나 규정, 제도를 하나하나 지키느라, 그 안에 담긴 원칙을 이해해서 그것을 실제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이는 이해 능력이 부족한 것이며, 이런 사람은 자질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교회 사역을 수행하는 어떤 사람에게 네가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었는데 그는 교제를 듣고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 내용에 대해 아무런 의혹도 품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에 담긴 원칙도 깨닫지 못한다. 특히 현실 생활이나 본분 이행 과정에서 각종 문제나 일부 특수한 상황에 부딪힐 경우, 어떻게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어떻게 원칙에 따라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진리에 대한 교제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해서 언제나 예를 들어 달라거나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요청한다. 네가 예를 들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면 그제서야 겨우 조금 이해한다. 그러나 만약 좀 더 깊이 들어가서 교제하면 또 알아듣지 못하고, 예를 하나 더 들어 달라고 한다. 그가 자꾸만 예를 들어 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현실 생활에서 비슷한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면, 이를 통해 행동 방식과 규례를 하나 기억해 두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바로 이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현실 생활과 본분에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 네가 어떻게 교제하든, 구체적인 사례를 얼마나 소개하고 얼마나 많은 원칙을 분명히 설명하든, 나아가 특수한 상황의 처리 원칙까지 얘기한다 한들, 그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네가 하는 말을 이론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 생활에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일의 효율과 효과도 떨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의 이해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가 하는 일의 효율과 효과도 틀림없이 떨어질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이 어떤 원칙에 관련되는지 모르고 현실 생활에서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또 한 부류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교제가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엉망으로 듣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 집의 교제를 듣고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왜 이해가 안 갈까요? 원칙도 교제하고, 예도 들고, 특수한 상황도 들어 주었는데, 왜 듣고 있으면 이렇게 혼란스러울까요? 도대체 무슨 소린가요? 어떤 부류를 처리하라는 거죠? 거짓 리더를 처리하라는 건가요, 아니면 적그리스도를 처리하라는 건가요? 그렇다면 우리 교회 리더가 적그리스도인가요? 사람이 좀 악해 보이던데, 그가 보이는 모습은 도대체 패괴 성품인가요, 아니면 인성이 좋지 않은 건가요? 그는 도대체 거짓 리더인가요, 적그리스도인가요? 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는 네가 교제한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고 들을수록 혼란스럽기만 하다. 맞춰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네가 얘기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다. 이것이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다같이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교제를 나누는 자리라고 가정해 보자. 네가 자기 인식을 교제하면 상대도 자기가 이해한 바를 얘기하고, 네가 질문을 던지면 상대도 질문을 던진다. 전부 그 주제에 관한 질문이다. 자질이 없는 사람은 이런 토론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다들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난 왜 못 알아듣겠지?’ 그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저마다 제기하는 정당한 질문과 그런 질문들을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까닭을 파악하지 못한다. 방관자보다도 못하다. 자질이 있는 사람은 설령 옆에서 지켜보더라도 누가 맞고 틀렸는지, 누가 제시한 질문의 취지가 무엇인지, 깊이 있는 질문인지 아닌지, 그 질문의 해답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들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일을 교제해 주면, 그는 다 듣고도 분별할 줄 모른다. 상대가 한 말이 진짜인지, 객관적인지 모르고 그 일의 배경과 본질이 무엇인지도 간파하지 못하는 등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 그런 질문이 나와야 하고 왜 그 주제가 논의되어야 하는지, 그 주제에 관계된 원칙이 왜 자꾸만 강조되는지, 누구의 질문이 그 원칙과 관계가 있고 누구의 질문이 관계가 없는지, 이런 것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 채 듣기만 하다가 졸기나 할 뿐이다. 그는 자신을 방관자로 생각하기에 머릿속이 흐리멍덩하다. 다른 사람은 진리 원칙을 교제하면 할수록 분명하고 뚜렷해지는데, 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스럽고 생각이 흐리멍덩해진다. 이것이 바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는 자질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니냐? 이런 부류 역시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자질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저능아입니다.) 저능아, 백치, 바보가 바로 자질이 가장 떨어지는 부류이다. 이것이 두 번째 측면인 이해 능력에 관한 내용이다.

세 번째는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은 이해 능력과 비슷하지만, 이해 능력보다 한층 더 깊은 차원의 능력이다. 받아들이는 능력과 이해 능력의 차이가 무엇이냐? 받아들이는 능력은 사물의 원리와 원칙, 요점과 요령을 이해하고 파악한 다음, 현실 생활에서 어떻게 시행하는지, 현실 생활의 각종 문제에 어떻게 대입하는지에 좀 더 무게를 둔다. 바로 이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물의 원리와 원칙을 이해하고 나면 속으로 실행의 길과 정확한 범위, 방향과 목표가 생기고, 그 원리와 원칙을 적용하는 방법과 일부 특수한 상황에 관계된 실행 원칙도 알게 된다. 만약 한 사람이 진리 원칙에 대한 교제를 듣고서 일부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런 다음 현실 생활에서 일부 실제적인 문제를 진리로 해결할 수 있다면, 즉 원칙을 듣자마자 전에 겪었던 그 일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깨닫고, 다시 일이 일어나도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서 대해야 하는지 알아 마음속에 실행의 길이 생긴다면, 그가 받아들인 원칙과 원리가 마치 길을 밝혀 주는 등불처럼 생활이나 사역에서 생기는 여러 방면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바로 알려주고, 실행의 길과 방향, 원칙을 갖게 해 준다면, 이 사람은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훌륭한 자질을 보여주는 한 가지 모습이다. 사람이 진리 원칙에 대한 교제를 듣고 나서 현실 생활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흔한 일이나 본인이 겪어 본 일의 경우에는 어떻게 실행하고 처리하는지 알고 있지만, 일부 특수하고 복잡한 상황이나 돌발적인 상황, 혹은 겪어 보지 못한 흔치 않은 문제와 현상의 경우 진리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라 정확한 답이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구하고 자문해야 어떻게 처리하고 해결하는지 안다면, 그러지 않고서는 설령 진리 원칙을 듣는다 해도 그 일이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이는 받아들이는 능력이 보통 수준인 것이고, 이런 부류는 자질도 보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사역을 수행한 지 십 년, 이십 년이 되어서 사역 경험도 좀 있는 데다 하나님 집에서 진리 원칙을 명확하게 교제한 뒤로는 흔히 접하는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또 검증도 받았지만, 일부 복잡하고 특수하며 흔치 않은 문제, 사역 경험이 없는 문제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자문을 통해 명확한 답을 얻고 나서야 처리하기 시작한다. 만약 어떤 일에 변화가 생겨서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상황이 더 복잡해지면 그는 당황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모르고, 더욱이 어떻게 실행하고 처리해야 원칙에 부합하는지는 더욱 모른다.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상상이나 자신의 야심과 욕망에 따라 처리하든, 아니면 내팽개치고 신경쓰지 않든, 그가 어떻게 처리하든 관계없이 이런 상황이 생기면 그는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서 처리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것은 그의 자질이 너무나 평범하다는 뜻이다. 만약 일반적인 상황은 처리할 수 있지만 특수한 상황은 처리할 줄 모르는 경우라면, 이것은 자질이 보통이라는 뜻이다. 만약 몇몇 특수한 상황이 생길 경우 당황해서 일반적인 상황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조차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받아들이는 능력도 부족하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차이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교제하든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도리와 규례만 이해하고, 구호나 조금 외칠 수 있을 뿐, 그 다음으로 사역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하고 시행해야 할지 모른다. 교제를 들은 다음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가 교제를 아주 잘 이해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막상 구체적인 사역을 수행할 때가 되면 당황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고,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 여전히 구체적인 사역을 수행할 줄 모르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일을 원칙 없이 대하고 처리한다. 그는 ‘설교를 들을 때 이미 진리 원칙을 이해했는데, 왜 현실 환경에서는 적용하지 못할까? 내가 이해하고 늘 얘기하던 것이 왜 쓸모가 없어질까?’라는 생각에 곤혹스러워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도리만 얘기하고 규례만 지킬 뿐, 막상 일이 닥치면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가 얘기할 줄 아는 도리는 전혀 쓸모가 없다. 그는 규례도 지키지 못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어려움을 만나면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누군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면서 그릇된 말을 늘어놓아도 그는 그것이 어떤 성질인지 분별할 줄도 모르고, 어떤 일이 교란과 방해에 해당하는지, 그것이 어떤 성질인지 모른다. 그렇다 보니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더더욱 모른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악인을 분별할 수 있지 않으세요? 어째서 악인을 처리하는 일에 원칙도 없나요?”라고 물으면 그가 대꾸한다. “그런 도리야 저도 알죠. 그런데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적용해야 할지, 어떤 사람에게 적용해야 적합한지 모르겠어요.” 이는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원칙을 들었을 당시에는 글자 하나하나 정리도 잘하고, 기억도 아주 정확하다. 심지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유창하게 암기할 수도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실 생활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실행의 길은 전혀 없이 그저 구호만 외치고, 도리만 얘기하고, 규례만 지킨다는 점이다. 현실 생활에서든 본분 이행에서든 어떤 일이 닥치든, 그는 진리를 구해 원칙대로 실행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 말씀은 자주 읽지만 말씀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 원칙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이 닥치면 그것을 분별하고 해결할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관련 말씀을 찾아 주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는 오로지 무엇에만 집중하느냐? 이 일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예가 있는지 없는지만 찾아본다. 그는 사례가 없으면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의 본성 본질을 폭로하는 말씀에서 그것을 설명하는 예가 없으면 그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내적 상태에 비추어 분별하지도 못한다. 누군가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를 바탕으로 진리를 교제하면서 분별하고 해부해야, 그가 알아듣는 것이다. 이렇게 교제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늘 불평을 늘어놓는다. ‘왜 구체적인 예가 없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맞춰 보냐고. 이 말씀은 너무 어려워서 아무리 봐도 맞춰지지가 않아!’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니,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현실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깨달은 것은 그저 간단한 도리와 규례에 불과하며, 그 도리와 규례는 현실 생활에서 아무 소용도 없고, 일이 닥쳤을 때 실행의 길도 없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질이 부족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질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 바로 자질이 없는 부류이다. 즉 어느 측면의 원칙을 듣더라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왜 이런 예를 드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왜 사람에게 그런 모습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며, 그럴 능력도 없다. 설령 그에게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더라도 그는 마치 어린 아이가 옛날이야기나 우스갯소리를 듣는 것처럼 흥미롭고 재미있어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해했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해했다고 대답하고 그 사람이 얼마나 웃겼는지, 어떻게 다른 사람을 꾸짖었는지 흉내 내기까지 한다. 네가 만약 그에게 “여기에 관련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을 아시겠어요?” 하고 물으면 그는 “네? 원칙도 있었나요? 몰랐어요.”라고 대답한다. 이런 사람에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는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매일 기계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혹은 몇 편 먹고 마시고, 또 정해진 시간에 찬양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지만 책을 덮고 찬양을 끄고 나면, 먹고 마신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은 단지 영적인 단어 몇 개나 죽은 글귀 몇 마디뿐이다. 사람들이 늘 얘기하듯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순종합니다.”라는 말이나,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셔야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막상 일이 닥쳐 고통을 받으면 그때는 정을 견딘다느니, 육을 견딘다느니 하는, 영적인 체하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됨의 원칙, 생활의 원칙, 사역의 원칙 등 각 방면의 진리 원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의 마음에는 이런 것이 없고 담아 두지도 못한다. 어째서 담아 두지 못하느냐? 그의 자질로 볼 때, 그는 이런 진리 원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럴 능력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마음에 뿌리내릴 수 없다.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있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그 사람이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사람이 내면에 자질을 전혀 갖추지 않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 말씀의 정확한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설령 그를 천당에 데려다 놓고 셋째 하늘에 데려야 놓는다 한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는 여전히 본질도 그대로이고, 자질도 그대로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반면 자질이 훌륭하면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더 많고, 더 깊고, 더 높다. 자질이 보통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자질이 훌륭한 사람보다는 많이 부족해서 단지 일반적인 범위에 머물뿐 그보다 높을 수는 없다. 자질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형편없는 부류는 바로 자질이 없는 부류이다. 이 부류는 그 자질로 볼 때, 받아들이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현실 생활과 본분이행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을 십년, 이십 년을 믿고 심지어 늙을 때까지 믿어도, 그가 입으로 내뱉는 하나님 믿는 도리나 영적인 단어는 여전히 하나님을 처음 믿었을 때 깨달았던 낡은 것들뿐이다. 하나님을 몇 년을 믿든 발전이 없다. 왜 발전이 없느냐?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몇 년을 믿어도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 죽은 글귀들뿐이다. 하나님을 몇 년을 믿든 그의 학습 능력, 이해 능력, 받아들이는 능력 등 각 방면의 능력은 자라지 않는다.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냐? 자질이 너무 부족한 사람이다. 자질이 부족하고 각 방면의 능력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이런 부류는 나이가 사오십, 혹은 육칠십이 되어도 자립 능력이 부족하다. 그의 생존 능력, 자립 능력을 보면 그의 자질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이런 부류가 바로 저능아, 백치, 바보이며, 그들은 자립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왜 자립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겠느냐? 바로 학습 능력과 이해 능력이 부족하고 받아들이는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살면서 얻은 경험과 상식, 규칙, 요령은 무척 제한적이며, 육칠십이 되어도 여전히 그 모양이다. 자질이 훌륭한 사람은 서른 남짓한 나이에도 삶과 인생길에서 마주하는 온갖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체득한 바가 있고, 식견이 있고 체험이 있으며, 그 체험을 통해 자신이 여러 가지 문제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삶을 살고 자신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자질이 부족한 부류는 모든 방면의 능력이 부족하므로 나이가 몇이 되든 생존 능력이 여전히 부족하다. 어느 정도로 부족하겠느냐? 독자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보시다시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몸도 건강한데 어째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다고 하십니까?” 우리가 말하는 생존 능력은 먹고 자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때가 되어도 밥을 먹을 줄 모른다면 그것은 정상인이 아니라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질을 논할 것도 없다. 우리가 사람의 자질을 평가하는 범위는 주로 겉보기에 정상적인 사람들, 그러니까 장애인과 지적 장애인, 정신병자, 또는 자립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의식주에서도 아무 규칙이나 원칙, 요령을 못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나이가 몇이든 생활에서의 의식주와 같은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원칙에 맞고 인성에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느 계절에 어떤 옷을 입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도 모르고 그저 남들만 따라할 뿐이다. 추운 날씨에 너무 얇게 입어서 감기가 들어도 그 이유를 모르고, 음식을 먹을 때 위생을 소홀히 해서 병이 나도 그 이유를 모른다. 그는 이런 일에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다. 저능하지 않으냐? 독자적인 생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나이가 몇이든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모른 채 그냥 되는대로 살아간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경험이 없지만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아이를 어떻게 돌보고 먹이는지에 대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어떤 여자는 아이를 둘셋이나 낳아도 경험이 없다. 아이를 어떻게 키웠느냐고 물어보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몰라요. 얼떨결에 지나갔어요. 그냥 아이가 배고파하면 먹여서, 배만 불리면 되죠.” 아이가 그 여자 손에 키워지면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만약 여자의 그 생존 능력을 따른다면 살아 남는 아이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활하거나 생존하면서 부딪히는 각종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은 생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시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나면 그는 넋이 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저 당황하고, 긴장하고, 겁내고, 원망할 뿐이다. “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생기는 거야? 어떡한담?” 걱정하느라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다. 삼십대에도 그랬는데, 육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같은 분량이라 일이 닥쳤는데 별 수가 없으면 울음을 터뜨린다. 누군가 말한다. “뭘 울고 그래요? 무슨 큰 일도 아니고, 흔해 빠진 일이잖아요. 사안이 심각한지, 시급한지 구분할 줄만 알면 돼요.” 만약 누군가 이런 일을 처리할 줄 몰라서 그 일로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며, 그냥 다 끝내버리려고 죽을 생각까지 한다면 너무 못난 것이 아니냐? 그는 이런 원망까지 한다. “왜 하필 다른 사람이 아닌 저한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너한테 생겼으면 네가 처리하고, 만약 잘 처리하지 못하겠으면 주변에 그런 일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도록 해라. 확실히 물어보면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무 일 없을 때는 말도 잘하고, 도리도 차근차근 잘 얘기하더니 일이 닥치니까 당황해서 넋이 나가고, 훌쩍이고, 머릿속이 하얘지고, 생각이 뒤죽박죽이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짧아서 경험이 없다면 일이 닥쳤을 때 긴장하고 겁내는 것도 정상이다. 하지만 삼사십이 넘으면 세상사도 많이 겪고 경험도 쌓여서 성숙하고 노련해지니, 일 처리도 갈수록 듬직해지고 노하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젊은 사람들이 보면 속으로 감탄하면서 의지할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질이 없고 생존 능력이 없어 이런 자립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또한 주변에 만약 그를 단속해 줄 어른이 없고 경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어떤 일이든 엉망으로 처리한다. 그러면 이런 부류는 자질이 굉장히 떨이지게 된다. 일부는 자질이 어느 정도로 부족하겠느냐? 예를 들면 한 가정의 주부가 집안 식구 몇 명이서 한 끼에 밥을 얼마나 먹고 반찬을 얼마나 먹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삼십 년 밥을 하고도 매끼 밥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도 모르고, 음식이 익었는지조차 확실히 모를 때도 있다. 그 정도로 자질이 부족하다. 이 사람에게는 생각이란 게 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야말로 닭대가리이다! 이런 부류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고, 무슨 일을 하든 길이 없어 잘못을 저지르기 십상이다. 일이 닥쳤을 때 단속하는 사람이 없으면 일을 뒤죽박죽 엉망으로 해 놓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백치이고 저능아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이런 부류는 진리 원칙을 아무리 교제해 주어도 도리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이 원칙들을 현실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 즉 그가 깨달은 도리는 그의 현실 생활에 그 어떤 목표나 방향, 길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런 자가 바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가장 부족한 사람이다. 세 번째 기준인 받아들이는 능력에 대한 교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네 번째는 무엇이냐? 수용 능력이다. 수용 능력은 이해 능력, 받아들이는 능력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수용 능력은 새로운 사물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부정적인 사물인지, 그것이 생활과 일, 생존에 어떤 도움이나 피해를 주는지를 분별하는지와 관계되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활용하는지와 관계된다. 자질이 좋은 사람이라면 새로운 사물이 나타났을 때 무척 민감하고 예민해서 관련된 정보를 빨리 수용한 다음,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혹은 어떤 해악을 끼치거나 어떤 폐해를 초래하는지를 변별해 낼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실생활 속 어떤 측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익을 준다면, 그 장점을 곧장 활용할 수 있다. 그것이 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 인한 해악과 폐해를 피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사물을 어느 정도 수용하지만, 부정적이거나 사람에게 유해하거나 폐해를 초래하는 새로운 사물을 빨리 간파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수용 능력이 있는 것이다. 수용 능력은 바로 이런 점에서 이해 능력이나 받아들이는 능력과 구별된다. 수용 능력은 주로 한 사람이 새로운 사물에 대해 가지는 민감도와 변별 능력을 가리킨다. 새로운 사물을 빨리 변별하고, 그 장점과 유익을 빨리 수용해서 실생활에 적용함으로써 그것이 삶이나 사역에 도움이 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새로운 사물에 의해 대체된 낡은 사물을 내려놓거나 도태시킬 수 있다면, 그런 자가 바로 수용 능력이 있는 사람이자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그다음은 자질이 보통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이미 낡은 사물을 대체한 새로운 사물, 새로운 주장이나 기술을 아주 느리게 수용한다. 이 ‘느리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어떤 것이 이미 널리 퍼져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그런 주장이 널리 퍼진 상황이 되어야 비로소 새로운 사물을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새로운 사물에 대한 지각이 없고, 그것이 긍정적 사물인지 부정적 사물인지 분별할 줄 모른다. 설령 긍정적인 새로운 사물이 나타나더라도 속으로 반발하고 무시한다. 그는 언제나 자기만의 관념과 태도를 가지고 있고, 언제나 세계의 흐름과 같은 편에 선다. 새로운 사물에 대해서는 폐쇄적이며, 수용하지 않고 거부한다. 다만 그 새로운 사물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좋은 점을 체험하고 깨달은 다음 그로부터 유익을 얻고 나면 그제서야 수용하고 활용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자질이 보통인 경우다. 그는 새로운 사물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몹시 수동적으로 수용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물에 대해 별로 민감하지 않으며, 무감각하고, 진부하고, 폐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물에 대해 여전히 관념과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멸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 측면의 원인은 자질과 수용 능력이 보통이라서 무척 무감각하고, 새로운 사물이 눈앞에 나타나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며,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 자체가 무척 고리타분하고, 무감각하고 우둔하기 짝이 없다. 이 두 가지 측면의 원인으로 인해 그는 새로운 사물을 느리게 수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물을 활용하면서 그것의 좋은 점과 편리한 점이 무엇인지, 사람에게 어떤 영향과 어떤 유익을 주는지 얘기하면, 그는 그런 사실을 직접 목격하고, 또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마음속으로 수용하고 활용한다. 이것은 어떤 자질이냐? 이것이 바로 수용 능력이 보통인 것이다. 수용 능력이 보통이면 자질도 보통이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거나 어떤 분야의 업무와 관련된 사역을 수행할 때, 일부 형제자매들은 앞장서서 새로운 방식이나 업무 기술을 시도하고 적용해 보면서 그 업무 기술을 적용하면 본분을 이행할 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고 효율도 향상되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다. 그래서 서둘러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권장하면서 형제자매들이 배우고 활용하게 한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잘 찾으며, 새로운 사물을 재빨리 간파하고 파악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잘 포착해서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완전히 수용하고 현실 사역에 활용하는 한편, 새로운 사물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어떤 측면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정리하고 조정한다. 이렇게 한동안 탐색하면서 교회 사역에서 해당 분야의 기술 업무나 정보 중 어떤 부분은 활용이 가능하고 어떤 부분은 활용이 불가능한지를 차츰 파악하게 된다. 그런 다음 사역을 하면서 원칙과 하나님 집의 요구에 따라 차츰차츰 그것을 개선해 나간다. 개선할수록 점차 나아지고 결국에는 성과가 나온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훌륭한 모습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여전히 기존 방법을 고수하여 일대일이나 이 대 일로 전하거나, 아예 여러 사람이 함께 전한다. 그는 무감각하고 우둔해서 선진적인 방식을 수용하는 속도가 더디다. 비록 입으로는 선진적인 방식이 괜찮아 보이고 실행 가능하다고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고민한다. 적용했다가 성과가 안 좋을까 봐 선뜻 시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 저희가 실제로 해 봤는데, 그렇게 실행했더니 성과가 아주 좋더군요.”라며 권해도 그는 여전히 시도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기존 방법을 고집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떤 사람들이 직접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보니 매달 얻는 사람도 많아지고 효율도 향상되었다고 하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시도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여전히 소심하게 시도할 뿐 기존 방안과 전략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사물을 수용하는 속도가 너무 더디고, 자질이 보통인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수용 능력은 더욱 부족하다. 그는 새로운 사물을 간파하거나 판단하지 못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며 속으로 반발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새로운 사물을 수용하면 안 되고 새로운 정보나 기술도 수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보기에도 무척 폐쇄적이지 않으냐? 일부 교파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TV도 보지 않고 컴퓨터도 쓰지 않는 등 그 어떤 전자 제품도 사용하지 않는다. 밖에 나가서도 현대적인 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조차 타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타고 다니겠느냐? 흙먼지가 날리는 우마차를 타고 다닌다. 누가 “왜 자전거나 자동차를 타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이 만든 것이잖아요. 우리가 그런 걸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수용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수용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많은 사물을 잘못된 방식으로 대한다. 그는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자기 관점을 고집하고 새로운 사물에 무조건 반발한다. 반발하는 것 자체가 바로 사상과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조금 보수적으로 말하자면 자질이 너무나 평범한 것이고, 만약 끝까지 새로운 사물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질이 부족한 것이자 앞뒤가 꽉 막힌 것이다. 그는 하나님 사역이 고정불변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면 끝까지 그 말씀만 하고 하나님이 무슨 사역을 하면 끝까지 그 사역만 할 것이라고 믿고, 이 인류와 이 시대가 자신이 처음 보고 겪은 그대로 영원히 변하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이삼십 년 전에 사람들이 옷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관념 중 하나가 면은 순수한 천연 소재이고 각종 면제품은 다 좋다는 것이었다. 솜저고리, 티셔츠, 속옷 할 것 없이 면으로 만들면 무조건 화학 섬유보다 좋다는 인식이 있었고, 그도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삼십 년 뒤 방직업이 발달하면서 면직물과 유사한 직물이 많이 등장했고 각종 화학 섬유로 만든 옷도 많아졌다. 많은 섬유 제품이 면 소재보다 우수해서 통기성도 좋고, 열도 빠르게 방출하고, 흡습성도 좋다. 또 아무리 빨아도 변형과 수축, 변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입었을 때도 무척 쾌적하고 가벼우며, 피부에 아무 자극도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인공적인 화학 섬유를 여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옷은 면 제품만 좋다고 생각한다. 목화는 땅에서 자란 것, 하나님이 창조한 것, 자연에서 온 것이지만 화학 섬유는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 비록 목화는 하나님이 예비한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이지만, 지금은 토양도 오염되었고 목화에서 생장하는 담배벌레 문제도 세대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져서 일반 농약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목화가 자라더라도 특수한 소독 처리를 해야 입었을 때 몸이 가렵지 않은데, 처리를 거칠 경우 옷의 원가가 상승해서 가격이 매우 높아지고,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화학 섬유로 만든 의류보다도 못하다. 알다시피 지금 화학 섬유로 만든 옷은 전문 운동 선수들도 누구나 좋아하고, 반응도 괜찮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듣고도 수용하지 않고 여전히 면 소재 제품이 좋다고 굳게 믿는다. 우매하고 고지식한 사람들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매하고 고지식한 것은 인성 측면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의 자질 측면은 어떠냐? (자질이 좋지 않습니다.) 눈앞에 어떤 새로운 사물이 나타났을 때, 어떤 태도로 그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지가 그것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를 결정하며, 이는 자질에 달려 있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사물을 옳다고 생각해서 대세를 따라 수동적으로 수용한다면 이런 사람은 기껏해야 보통 자질에 해당한다. 만약 새로운 사물이 옳은지 그른지, 사람에게 유익이 있는지 없는지, 과거에 옳다고 여겼던 낡은 사물과 비교했을 때 그 장점과 폐해가 무엇인지 변별할 줄 모르고, 새로운 사물과 낡은 사물 사이의 차이점을 어떻게 분별하고 구분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새로운 사물에 대한 수용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즉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처음 새로운 사물이 등장했을 때부터 그는 아무런 예민함을 보이지 않는다. 이 사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도 아무런 수용 능력이 없고, 끝에 가서 설령 억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역시 다른 사람의 도움과 권유 덕분이다. 그것도 상대가 이 새로운 사물의 우월성과 장점을 낡은 사물과 비교해 가며, 두 사물의 명확한 차이와 새로운 사물이 낡은 사물보다 확실히 나은 점을 직접 보여 주어야 겨우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다른 수많은 새로운 사물들이 어디가 좋은지 간파하지 못하고, 여전히 낡은 사물을 지켜야 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억지로, 수동적으로 새로운 사물을 수용할 뿐이다. 이런 자가 바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자질이 보통인 사람은 조금만 귀띔해 주면 바로 알아듣고 자신이 치우치고 뒤떨어졌음을 알아차린다. 이것이 보통 자질이다. 하지만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반복해서 귀띔하고 일깨워 주어야 한다. 모두가 함께 권유하고, 나아가 그 새로운 사물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후, 그것이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는 명백한 사실과 사례를 보여주면 마지못해 수용하고 사용하지만, 뒤에서는 여전히 낡은 사물을 선택한다. 이런 자가 바로 자질이 아주 부족한 사람이다. 자질이 부족하면 새로운 사물의 등장이 사람에게 일으키는 긍정적인 작용이 무엇인지 끝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의 차이점도 찾지 못하며, 새로운 사물의 우월성과 앞선 부분이 무엇이고 낡은 사물의 폐해와 뒤떨어지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끝내 찾거나 발견하지 못한 채, 끝까지 자신의 낡은 사상과 관점을 고집한다. 따라서 그는 수용 능력이 아주 부족하다. 수용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질이 부족하고,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리 말해도 문제의 본질과 근원을 도무지 간파하지 못한다. 자질이 가장 부족한 사람들은 수용 능력을 논할 처지도 못 된다. 즉 어떤 새로운 사물을 접할 경우, 그가 주관적으로 배우길 원하고 받아들이려 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사물에 대해 감흥 자체가 없다. 실생활 속에서든 본분 이행 과정에서든, 어떤 새로운 사물이 등장하더라도, 어떤 사물이 발전하고 어떤 사물이 개선되더라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그가 이런 일을 모르는 이유가 뉴스나 신문을 보지 않기 때문이겠느냐? 아니다. 그의 자질에 수용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수용 기관이 없는 것처럼 그 어떤 새로운 사물의 등장에도 무감각하고 우둔하며 지각이 없다. 도시에 살아도 마치 외딴 산촌에 사는 것처럼 인간 생활에 등장하는 그 어떤 크고 작은 일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러니 생활 범위 안에서는 의식주가 어떤 새로운 사물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마치 동물과도 같다. 그의 생각의 범위에 담긴 것은 그의 생활권에 포함된 좁은 범위의 것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 나가던 시기에 이미 알고 있던 것들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외부의 어떤 일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냐? 저능아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이런 일은 국가의 중대사나 세계의 주요 이슈가 아닌 생활 속 잡다한 일에 불과하다. 그는 아주 작은 새로운 사물이 등장해도 알지 못하고 전혀 수용하지 못한다. 이 수용이라는 말은 하나의 새로운 사물이 등장함으로써 그의 사상과 관점이 달라지고 생활 방식, 생활의 상식 등 그 생활이 변모하며 생활하면서 문제를 처리하는 능력이 조금 나아지고 발전하는 것을 가리킨다. 아무런 수용 능력이 없는 사람은 끝까지 정해진 틀에 맞춰 원시적인 생활 상태를 유지한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다들 시금치두부탕이 철분과 칼슘을 보충할 수 있는 좋은 음식이라고 했고, 그 역시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렇게 알고 먹어 왔다. 그런데 나중에 시금치에는 옥살산이 들어 있어서 두부와 같이 장기간 섭취하면 결석이 생기기 쉽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누가 알려주자 그는 ‘옥살산이 뭐지? 시금치에 옥살산이 있는 걸 누가 봤다 그래? 난 지금까지 먹고도 아무 일 없었어. 계속 먹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자는 새로운 사물, 새로운 관점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수용 능력이 있는 사람은 시금치에 옥살산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어떻게 옥살산을 제거할지 고민하고, 직접 알아보면서 시금치를 끓는 물에 데치면 옥살산이 제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용 능력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정보를 들으면 문의를 통해 그 정보가 사실인지, 사람에게 유익이 있는지를 변별한 다음 수용할지 거부할지 결정한다. 그는 관련된 세부 내용을 묻고 파악한 다음 그 정보를 실제 생활에 적용함으로써 그 폐해나 해악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수용 능력이 전혀 없는 머저리는 어떤 새로운 정보를 들어도 관심도 없고 알아보지도 않는다. 그저 곧바로 거부하며 낡은 것만 고집할 뿐이다. 이는 결국 사람의 자질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새로운 사물을 마주해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원칙을 파악해야 할지도 모르고, 새로운 사물을 거부했을 때 자신의 생활이나 일에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도 고려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새로운 사물과 정보에 대해 끝까지 의심하는 태도를 취하고 감히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생활 속에서 아무리 많은 문제를 만나도 독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능력이 없다. 그는 어떤 일이든 조상들로부터 받아들인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변함없이 끝까지 고집한다. 누가 그것이 옳지 않다고 지적해도 듣지 않는 것은 물론 박박 우기며 따지고 든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이렇게 해 왔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세대도, 저희 부모님 세대도 다들 이렇게 했어요. 이렇게 전해 내려왔다고요!” 전해 내려온 것이 반드시 옳으냐? 이 문제를 고려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가 자질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정상인의 자질을 갖추었다면 그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할 것이고, 새로운 사물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때도 어느 정도 수용할 것이다. 그에게 이런 모습이 없다면 그것은 수용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독자적인 생존 능력이 없으며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런 소리만 한다. “우리 아버지 때도 그랬고, 우리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때도 그랬으니 우리 세대도 그렇게 해야지요.”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늙다리에 벽창호가 틀림없다! 그 어떤 새로운 사물에 대해서도 아무런 수용 능력이 없는 자가 바로 자질이 매우 부족한 사람이다. 새로운 사물의 앞선 점을 아무리 얘기해줘도 그는 수용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는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능력이 없다. 겉보기에는 의식주를 모두 스스로 해결하는 것 같지만 그 방식이 영 시원찮다. 그는 시대의 발전에 따라, 그리고 인간이 파악한 각종 상식과 지식의 증가에 맞춰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꿀 줄 모른다. 이런 자가 바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비록 추위와 배고픔도 겪지 않았고 큰 병에 걸린 적도 없지만, 생존 관점과 생활 방식을 볼 때 이런 부류는 되는대로 살아가며, 저능아, 백치, 바보에 해당한다. 저능아나 백치로 불리는 사람은 듣기 불편하겠지만, 불편해도 사실은 사실이다. 그만큼 자질이 형편없는 것이다. 나야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고 싶지만, 너는 그만한 자질도 갖추지 못하고 어느 측면의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어떤 일도 올바르고 정확하며 정상 인성이 갖는 사고에 부합하는 사상과 관점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질이 없는 것 아니냐? 너에게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라. 자질이 없는 부류는 지적 장애인과 한끗 차이밖에 없다. 지적 장애인은 자립 능력도 없어서 온전히 타인의 도움에 의지한다. 식사 때도 부모가 한 입씩 떠먹여 주어야 하고, 자기가 배불리 먹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자질이 부족한 부류는 바로 저능아이자 백치이며, 지적 장애인과 겨우 한끗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정도로 자질이 부족하다. 이런 사람은 불쌍하지 않으냐?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지지 않느냐? 자질이 부족한 부류는 학습 능력과 이해 능력이 없고, 받아들이는 능력도 없으며, 수용 능력이 없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느 측면의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아무리 설명하고 예를 들어도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못 알아듣는다면, 이것이 저능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그는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다. 아무리 명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편해한다. 그는 정상 인성처럼 사유하지 못하고, 황당한 논리를 늘어놓으며 반박하려 들기도 한다. 이런 부류에게는 설명할 도리가 없으니 그냥 ‘기가 막힌다!’고 한마디만 해 주어라. 그의 자질이 이 정도로 형편없으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느냐? 이런 부류는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고, 아무리 일깨워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소한 일 하나도 한참을 이해시켜야 하고 조금만 심오한 얘기를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제일 쉬운 말로 길게 설명해 주어야 겨우 이해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을 이해하더라도 비슷한 일이 닥치면 또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저능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이들 저능한 부류는 그래도 자기가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누굴 바보로 아세요? 제게 10위안과 10달러를 주면 둘 중에 어느 것을 고르나 보세요. 분명 위안화 대신 달러를 고르겠죠. 달러 가치가 더 높다는 것쯤은 저도 안다고요.”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를 바보라고 할 것이다. 왜 이런 자를 바보라고 하겠느냐?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일로써 자기가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리 없고, 이런 저급한 방법으로 자신이 바보가 아님을 입증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는 자질이 너무 부족해서 어떠한 사람이나 일, 사물에 대해서도 판단 기준이 없고 판단할 줄 모르기 때문에 늘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똑똑한 사람은 사람들 틈에서 3~5년 부대끼다 보면 어느 무리에나 늘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고 자기를 능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언제나 자신은 자질과 능력, 지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는 늘 자신의 부족한 점과 남보다 못한 부분, 문제점을 발견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본다. 이런 자가 바로 똑똑하고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반면 자질이 없는 사람은 한 집단에서 생활하면서 언제나 남들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긴다. 그는 어떤 글자를 쓸 줄 모르고 타이핑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면 자질이 부족하다며 싫어하고, 자신이 할 줄 아는 하찮은 일을 가지고 자기 자질이 훌륭하다고 굳게 믿는다. 또 어떤 사람은 위생에 신경쓰지 않거나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을 보면 자질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좀 깔끔하고 고상한 척할 줄 알거나 지식이나 특기가 조금 있는 자신은 자질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똑똑하냐, 바보 같으냐? 이런 사람은 바보다.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 보아라. “내가 어쩌다 또 일을 잘못 처리했을까? 나도 참 바보구나!” 늘 자신을 바보라고 하거나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고, 자신이 바보임을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 돈 달라고 한다고 제가 주겠냐고요!”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바보이다. 바보 같은 것을 속된 말로 나사가 빠졌다고 한다.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다니, 바보 아니냐? 나사가 빠진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흠이나 결함이 있거나 어떤 일을 허술하게 하는 사람을 보면 ‘어쩜 저리 바보 같을까?’라며 뒤에서 비웃는다. 누군가 꼼수를 부리거나 이득을 챙기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것을 보면 똑똑하고 자질이 좋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은 어떤 사람의 자질이 뛰어난지 형편없는지, 어떤 사람이 똑똑한지 바보인지를 여러 측면의 능력을 바탕으로 판단한다. 바보는 잔꾀가 많은 사람, 손해 보지 않고 이득을 챙길 줄 아는 사람, 약삭빠르게 굴 줄 아는 사람은 다 똑똑한 사람, 자질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모두 바보이다. 잔꾀가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부류는 바보 같은 자들이다. 조금 전에 가장 바보 같은 모습을 소개했다. “10달러와 10위안을 주면 제가 어떤 걸 고르겠어요? 위안화를 고를 리가 없죠. 제가 달러가 더 가치 있다는 것도 모르겠냐고요! 고기와 두부를 주면 제가 뭘 먹겠어요? 제가 바보라서 고기는 놔두고 두부만 먹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고기가 맛있다는 것쯤은 저도 알아요!”라고 하는 이런 부류는 사실 바보이다. 만약 정말 남들에게 바보로 보이고 싶지 않다면, 절대 그런 예를 들면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바보는 늘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들었지! 똑똑하지 않아? 내가 바보라고? 당신이 바보겠지!’ 가장 바보 같은 부류는 늘 바보처럼 행동한다. 수용 능력에 대한 교제는 여기에서 마치겠다.

다섯 번째는 인지 능력이다. 인지 능력이란 무엇이냐? 인지 능력은 주로 한 사람이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정도에 초점을 맞춘다. 한 사람의 사물에 대한 인지 능력을 판단하려면 그가 사물을 인식하는 정도와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보면 된다. 그 시간이 짧고 인식하는 정도가 충분히 깊어서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면, 그것이 바로 인지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정상적인 범위에 속한다면, 그가 이 사물 자체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 안에 담긴 전후 관계와 문제의 근원과 본질을 간파하여 속으로 그 사물에 대해 인식한다면, 더 바람직하게는 그 사물에 대해 정의와 결론까지 내릴 수 있다면, 이는 자질이 좋은 것이다. 즉 네가 정상인으로서 정상 인성의 사고를 지녔다면, 네가 남자든 여자든, 갓 성년이 되었든 이미 중년이나 노년에 접어들었든, 사물 자체의 본질을 인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정상 범위에 속한다면 네 자질은 좋은 편이다. 만약 사물을 인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정상인의 서너 배를 넘어선다면, 즉 자질이 좋은 사람은 사흘이면 되는데 너는 열흘, 심지어 한 달이 걸린다면, 일의 전후 관계가 확실히 파악되고 그 일이 일어난 후 초래된 피해와 안 좋은 결과가 드러나야 비로소 그 일의 심각성과 근원, 본질을 의식한다면, 너는 기껏해야 보통 자질을 갖춘 셈이다. 다시 말해, 만약 그 일이 아직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안 좋은 결과가 이미 계속 나타날 때, 그 과정에서 비로소 서서히 그 일의 근원과 본질에 대해 인지하고 정의와 결론을 내린다면, 네 자질은 보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안 좋은 결과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난 뒤에야 갑자기 크게 깨달아 그 일의 성질이 무엇인지 인식한다면 네 자질은 너무 부족한 것이다. 만약 그 일이 이미 안 좋은 결과를 초래했는데도 여전히 그 일의 문제점과 문제의 근원을 모르고, 여전히 그 일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면 너는 자질이 없는 것이다. 인지 능력은 이렇게 네 등급으로 나뉜다. 우선은 자질이 좋은 부류이다. 어떤 일이 생기자마자 몇 시간 내에 얼른 결론을 내려야 하는 긴급한 상황에서는 즉시 판단하지 못하거나, 처리 방안, 해결 방안을 내지 못한다면, 심지어 손실을 제한할 방안을 마련해 사태가 심각해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안 좋은 결과가 생길 것이다. 만약 네가 이 시간 안에 그 일의 근원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또한 결단력 있게 곧장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정확하게 결정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그런 다음 합리적인 처리 방안을 내놓을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만약 네가 단지 그 일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만 할 뿐 문제가 무엇이고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 일을 처리하는 데 정상적으로 걸리는 시간 내에 어떤 결론이나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처리 방안도 내놓지 못한다면, 단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면서 일의 향후 추이를 관망하고, 향후 추이를 통해 그 일의 본질을 변별하여 별로 올바르지 않은 판단을 내린 다음 계속 기다리고 관망한다면, 일의 추이가 막바지에 이르기 전에 아마 간신히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거나 겨우 해결 방안을 낼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제때 처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네 자질은 매우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 일이 막바지에 이르러 이미 결과가 나타나고, 문제의 본질이 이미 완전히 수면 위로 떠오른 뒤에야 그 일이 좋지 않다는 사실과 그 이면에 도사린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심지어 근원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그 일의 최종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직면한다면, 이런 자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보이는 또 한 가지 모습은, 그런 일이 또 발생하더라도 여전히 같은 태도, 같은 처리 방식과 속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즉 그런 일이 닥칠 때마다 늘 그런 식으로 처리하고 그 정도 속도와 효율밖에 내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기든 그 본질을 분별할 줄 모르고, 그로 인해 세상사에 대한 어떤 견해나 관점이 바뀌지도 않는다. 이런 자가 바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는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능력이 없다. 즉 생존관도, 인생관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자질이 없는 부류의 모습은, 어떤 일이 이미 발생했고 심지어 결과가 이미 나타났는데도 마치 꿈이라도 꾸듯 여전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없고 인지 능력이 없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인지 능력은 주로 각종 사람과 일의 본질,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인지 능력이다. 다시 말해 어떤 부류의 모습과 표출, 인성을 보고서 그 부류가 직면한 문제를 알 수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살면서 그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한 목격하고 있는 일의 본질이 무엇이고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지 능력이라고 하면 주로 사람, 일, 사물의 본질과 문제의 근원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간파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인지 능력에 대해 너희는 또 무엇을 이해했느냐? 지식을 인식하고 학습하는 능력으로 이해한 사람은 없느냐? (없습니다.) 인지 능력이라는 것은 주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능력에 관계된다. 만약 네가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이 매우 낮고 인식하는 깊이도 얕다면, 혹은 사람, 일, 사물의 본질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면 너의 인지 능력은 매우 형편없거나 심지어 전혀 없는 것이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확실히 옳지 않은 말이나 그릇된 관점을 얼마나 얘기하든, 옳지 않은 일을 얼마나 하든, 혹은 뚜렷한 패괴를 얼마나 표출하든, 문제의 본질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 옳은 사람인지 아닌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의 인품이 어떤지, 그 부류의 본질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른다면, 너는 인지 능력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 어떤 일을 만나든 아무런 평가 기준이 없고, 일이 끝난 후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며, 더욱이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처리 원칙과 실행의 길도 없다면, 그것이 바로 인지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인지 능력은 주로 사람, 일,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 내용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여섯 번째는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의 맞고 틀림과 옳고 그름을 판정하고, 그 일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판단하고, 판단을 통해 적절한 대처 방식, 처리 방식을 확정하는 능력을 말한다. 통상적으로 사람이 어떤 일을 만났을 때는 전에 본 적이나 겪어본 적이 있든 없든,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일이든 부정적인 일이든, 어떤 태도로 그 일을 대해야 하느냐? 거부해야 하느냐, 아니면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느냐? 만약 그 일을 이해하고 나서 자신의 입장을 갖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정확한 관점을 갖는다면, 그것은 판단력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어떤 말을 했을 때, 네가 생각 끝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가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는지, 왜 그렇게 말하고 왜 그런 표현과 말투를 사용하고 왜 그런 눈빛을 보이는지를 확신할 수 있고, 그가 이면에 숨긴 의도, 목적, 동기를 눈치챌 수 있다고 해보자. 이후 그 숨겨진 의도와 동기를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이, 어쨌든 현장에서 일어난 그 일과 관련하여 그 이면에 도사린 몇 가지 문제를 알고,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목적을 이루려 하는지, 그 말로 어떤 작용을 일으키려 하는지, 그 안에 숨겨진 수단과 음모, 계략이 무엇인지 등을 알 수 있다면, 일부 단서를 알아 낼 수 있고 그 안에 있는 문제들이 보통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고, 심지어 경각심을 가진다면, 이는 너에게 판단력이 있다는 증거이다. 판단력이 있다는 것은 자질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가 하는 말이 아무리 듣기 좋고 도리상 아무리 진리에 부합하더라도, 그의 태도가 아무리 단정해 보이거나 그의 목적이 아무리 깊이 숨어 있더라도, 그가 드러내는 표출과 현상, 혹은 그가 하는 말을 통해 거기에 있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자질이 좋고 판단력이 있다는 증거이다. 가령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든지 간에 네가 그 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일의 본질과 문제의 근원을 간파할 수 있다면, 그것은 판단력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적그리스도나 악인이 방해하고 교란할 때, 네가 그들 중 주모자와 따르는 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자와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자, 그 일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 일이 계속 진행될 경우 생길 부정적인 결과 등 일의 기본적인 상황을 파악해서 일 전체를 판단할 수 있다면, 또한 설령 당시의 네 판단과 일이 진행되어 생긴 결과 사이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더라도 최소한 그 일에 대해 관점과 태도, 정확한 처리 원칙을 가진다면, 그것은 네가 그 일에 대해 판단력이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해 너에게는 어떤 일의 주모자나 총책이 누구인지, 그 일이 앞으로 어느 정도로 진행될지, 어떤 태도와 원칙으로 그 일을 대하여 그 일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저지해야 하는지 판단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너에게 판단할 능력이 있고, 네가 판단하는 논리와 방식이 정확하고, 판단 근거가 최소한 인성에 부합하고, 좀더 바람직하게는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면, 그것은 너에게 판단력이 있다는 뜻이다. 설령 사물 자체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지라도, 너의 판단이 근거가 있고, 사물 자체의 발전 규칙에 부합하며, 유사하거나 같은 문제의 근원과 본질에 부합하고, 더 나아가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면, 이 역시 너에게 판단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판단력이 있다는 것은 문제를 깊이 생각할 줄 안다는 뜻이다. 만약 네 판단이 사물 자체의 근원이나 본질과 같은 각각의 측면에 부합한다면, 그것은 네가 자질이 좋은 사람임을 뜻한다.

어떤 사람, 어떤 일을 만나든 사람은 올바른 사고 방식을 가진 상황에서만, 그리고 어떤 일의 맞고 틀림과 옳고 그름, 혹은 어떤 일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비로소 후속 처리 방안과 해결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만약 문제를 깊이 생각할 줄 모른다면, 구체적으로 말해 문제를 판단할 줄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문제를 처리할 수도 없다. 즉 문제를 처리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누구든 문제를 처리할 때는 일의 맞고 틀림을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처리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나 실행의 길은 근거 없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어떤 교회의 교회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대부분 소극적이고 냉담하며, 예배에 참석하지도, 본분을 이행하지도 않으려 한다고 보고한다면, 너는 그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느냐?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라면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동원해서 처리하고 해결해야 한다. 문제 해결에 앞서 해당 문제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에게서 문제가 나타났는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것들을 우선 판단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해야만 판단을 내릴 수 있고, 판단을 해야 비로소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어 문제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타당하고 적합한 처리 방식과 해결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어느 교회의 교회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판단하겠느냐? (저는 먼저 그 문제가 교회 리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 리더가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서 하나님을 몇 년 믿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떤 문제가 닥쳐도 처리할 줄 모르며, 어떻게 하나님 선민들을 이끌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교제하게 해야 할지도 모를 경우, 교회 안에 이런 거짓 리더가 있으면 결코 교회 생활이 잘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한 가지 측면의 판단이다. 일반적으로 간단한 문제는 한 가지 측면의 판단만 정확해도 문제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복잡한 문제들은 만약 파악한 정보가 전면적이지 않을 경우, 한 가지 측면의 판단만으로는 문제의 근원을 파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 두 번째, 세 번째 측면의 판단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판단하고 나면 아마 그 중에 가장 정확한 판단이 하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생각할 수 있는 측면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는 그 교회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자질이 부족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하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교회 생활의 성과가 좋지 않은 경우입니다.) 그것이 현실적인 상황에 부합하느냐? 그것이 두 번째 판단이다. 또 다른 판단이 있느냐? (교회에 교란하는 악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 번째 판단이다. 이 세 가지 판단 중 비교적 실제 상황에 부합하며 실제적인 것은 어느 것이고, 비교적 공허한 것은 어느 것이냐? (두 번째 판단이 다소 공허한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적합한 사람이 리더가 되어 사역을 책임지면 교회 생활의 성과는 좋아집니다. 형제자매들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깨달아 분명 본분도 열심히 이행하게 됩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판단이 비교적 실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판단은 공허한 도리에 불과하다. 첫 번째, 세 번째 판단이 실제 상황에 부합하고 정확하다. 이 두 가지 판단은 논리적 사고로 내린 판단이기도 하고, 실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을 근거로 내린 판단이기도 하다.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에 착안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고가 올바르고 논리에 맞다는 뜻이다. 반면 실제 상황에 착안하지 못해서 실생활과 괴리된 판단을 내린다면, 그것은 사고가 논리적이지 못해서 문제가 생겨도 실제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뜻이다. 한 가지 상황은 아마 교회 리더가 사역할 줄 모르고, 자신의 생명 진입에도 길이 없는 경우일 것이다. 이런 경우 교회를 이끌고 형제자매를 이끌 때는 더욱 길이 없어서 교회 생활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교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래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욕도 있다. 단지 교회 생활이 별 효과가 없을 뿐이다. 예배 시간에는 늘 기계적으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은 다음 리더와 집사가 간단한 인식이나 도리만 좀 설교할 뿐이며, 참된 체험적 인식을 얘기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게다가 교회 리더는 자질이 부족하고 체험이 깊지 않아서 진리를 교제해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른다. 그러니 교회 생활이 무미건조하고 즐겁지도 않고, 여러 번 예배해도 아무 수확이 없다. 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예배할 바에는 차라리 혼자 집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게 낫겠다면서 더 이상 예배에 나오지 않으려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지 1, 2년이 지나면 진리를 조금 깨달아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지만, 일부 교회 리더는 누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합하고 어떤 사역을 하기에 적합한지 모른다. 그는 사람을 합리적으로 안배하고 사용할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도록 자신의 체험을 이용해 붙잡아주고 도와줄 줄도 모른다. 이로 인해 소극적으로 변해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생긴다. 사실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고, 단지 붙들어줌과 도움이 필요할 뿐이다. 만약 교회 리더와 집사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사람들을 붙잡아주고 도와준다면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려는 사람들도 갈수록 많아지고, 다들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만 교회 리더와 집사가 사역할 줄 모르는 탓에 교회 생활의 성과가 좋지 않고 몇몇 문제들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의욕을 잃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 선민들의 본분 이행에 영향을 준다. 교회 생활 성과가 좋지 않은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교회 리더와 집사가 교회 사역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있다. 다른 한 가지 원인은 교회에서 적그리스도나 악인이 권세를 잡고 교란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종종 벌어지는 상황이다. 교회 리더가 사역을 할 줄 모르는 데다 교회에서 권세를 잡은 적그리스도나 악인이 항상 자기들끼리 결탁해서 독립 왕국을 세우려 하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억압하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하려는 형제자매들이 억압과 괴롭힘을 받아 배제되고,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서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진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이런 사람들은 적그리스도 무리와 함께 예배하면 기쁨이 없다. 적그리스도는 늘 권세를 잡아 자신을 내세우려 하기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진리를 많이 깨닫고 자신의 체험을 공유하려 하면 억압하며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교회 생활은 흩어진 모래알처럼 산만해지고 기쁨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그나마 있던 약간의 열정과 사랑도 잃고 본분도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 교회 생활의 성과가 좋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다 있을 수 있다. 이는 너희가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판단해 낸 결론이 실제 상황과 관련이 있다면, 설령 부분적으로만 관계가 있거나 생길 수도 있는 문제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판단력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최소한 판단해 낸 이 결론과 견해가 도리나 공허한 것,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상황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판단력이 있다는 뜻이다. 만약 네가 판단한 모든 일들이 사물 발전의 정상적인 규칙에 하나도 부합하지도 않고, 실생활 속 그 어떤 일이 진행되어 생긴 결과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면, 모두 네가 상상해 낸 것이자 공허한 것으로 현실적이지 않고 진실하지 않으며, 실제 상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판단력이 없거나 혹은 판단에 늘 실수가 따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방금 너희가 말한 두 번째 판단, 즉 교회 생활 성과가 좋지 않은 것은 해당 교회 사람들이 자질이 부족하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 판단은 무엇에 속하느냐? (판단 실수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판단 실수이다. 만약 이런 사물에 자주 생기는 몇몇 상황, 즉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큰 몇 가지 상황을 간파하지 못하고, 한 가지 상황만을 판단해 내거나 있을 수 있는 상황과 발생할 가능성이 없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슨 뜻이냐? 판단력이 보통이라는 뜻이다. 판단력이 보통인 사람은 한 가지 일에 대해 생각은 조금 있지만 확신하지 못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만약 한 사람의 판단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실상에 부합하기도 하고 부합하지 않기도 하지만 부정확한 상황이 상대적으로 많다면, 그것은 판단력이 부족한 것이다. 판단해 낸 결론이 모두 공허하고 일의 진행 법칙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흔히 볼 수 있거나 흔히 발생하는 현상에는 더욱 부합하지 않고, 사실에 전혀 가깝지 않다면, 그가 내린 판단은 허황된 상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물의 발전 규칙이나 인성 본질 자체와 전혀 관계가 없고, 실생활의 배경이나 주위 환경과도 동떨어져 있다. 즉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실생활에서 그런 일은 영영 발생할 수 없으며, 그가 하는 말은 결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판단력이 없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판단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할 때는 주로 각 부류의 사람이나 일에 대한 그의 판단이 정확한지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울고 있는데 그렇게 억울하고 슬퍼 보일 수가 없다고 하자. 그는 이따금씩 기도를 하고 하나님 말씀을 볼 뿐 누가 말을 걸든 상대도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왜 그러는지 판단해 보라고 하면 너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 집 생각이 나서 그럴 겁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편찮으셨었거든요. 집에 가고 싶은 거죠.” 이 판단이 정확한 것이냐? 누군가는 말한다. “아마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서 그럴 거예요. 사람은 대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울잖아요.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속으면 울기 마련이죠.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항상 울고 다른 사람과 얘기하거나 만나지도 않으려고 해요. 이것이 소극적인 모습이죠.” 또 이렇게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전에는 늘 밖에서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했는데 요즘 계속 실내에서 본분을 이행하다 보니 익숙하지도 않고 답답해서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은 없느냐? 누군가는 말한다. “아마 어제 고기를 못 먹은 게 억울해서 우는 거겠죠.”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제 그가 제게찾아와 말을 걸었는데, 저는 그가 그냥 지나가는 줄 알고 힐끗 보기만 하고 대답을 안 했어요. 그래서 화가 난 게 아닐까요? 그것 때문에 우는 게 아닐까요?” 어떻게 판단해야 실제 상황에 부합하겠느냐? 이것이 판단하기 쉬우냐? (조금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상황을 보면 앞서 얘기한 몇 가지 이유처럼 집이 그립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거나 기분이 울적하고 답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은 이런 내적 상태가 있으면 누구나 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기를 못 먹었거나 말을 걸었는데 무시당한 것과 같은 사소한 일로 울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이유로 우느냐? 억울하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그립거나, 죄스러워서 운다. 그렇다면 너는 그에게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왜 우세요? 억울하고 마음이 아파서 우세요, 아니면 스스로를 돌아보니 하나님께 너무 죄스러워서 우세요?” 그와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면 알 수 있다. 어쨌든 제대로 못 먹거나 고기를 못 먹었다고 울지는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상대해 주지 않거나 무시했다고 울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 상황에서는 조금 고생한 것 가지고 울지도 않고, 간혹 기분이 썩 좋지 않다고 울지도 않는다. 사람을 울게 만드는 것은 보통 그 몇 가지 상황이다. 그 몇 가지 통상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그가 우는 이유를 판단해 보면, 또 이 사람이 평소에 보이는 일관적인 모습에 비추어 보면, 슬픈 일을 겪지 않거나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으면 그는 대체로 울지 않고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오로지 아주 마음 아픈 일이나 그의 영혼을 크게 건드리는 일을 언급하는 경우 혹은 실수하거나 큰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느낄 경우에만 운다. 이런 배경을 근거로 판단하면 대개는 그가 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한 가지 경우는 가족이 큰 병에 걸리거나 죽었을 때, 혹은 자기가 큰 병에 걸려 고통스러울 때 우는 것이다. 혹은 실수하거나 과오를 저질러 하나님에게 죄스럽고 너무나 바로잡고 싶지만 자신이 아직 연약해서 극복하지 못할 경우, 이런 복잡한 심정이 뒤얽히면 운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모두 실제 상황에 비교적 부합한다. 그의 일관적인 모습, 그리고 성격적 특징을 근거로 판단하면 그가 지금 우는 근원을 알아낼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상대적으로 정확한 판단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의 분량과 당장 그에게 발생한 문제들을 파악하면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인성 자체가 안고 있는 결함을 파악하고 사람이 자주 드러내는 패괴와 약점을 파악하면 기본적으로 범위를 고정할 수 있으니, 그 범위 안에서 그에게 그 문제가 생긴 근원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도록 해라.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정확하다.

이제 판단력 측면에서 자질이 좋은 사람, 보통인 사람, 부족한 사람의 모습은 전부 교제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 밖에도 자질이 가장 떨어지는 부류가 더 있다. 이 부류는 어떤 일이 발생해도, 혹은 누군가의 어떤 행동을 보고도 판단할 줄 모른다. 왜 그렇겠느냐? 자질이 매우 떨어지고 판단력이 없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소극적인 말을 하면 그는 무엇을 근거로 그 소극적인 말의 본질과 성질을 판단해야 하는지 모르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문제를 깊이 생각할 줄 모르고 판단할 줄 모르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한 것을 보아도 그 행동의 성질이 무엇인지, 그 행동의 본질로 보아 그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등도 판단할 줄 모른다. 본인이 처신했던 경험을 근거로 판단할 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는 더더욱 판단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판단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판단할 줄 모르는 근원이 무엇이냐? 이런 부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할 줄 모른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볼 때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근거로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르고, 그런 다음 무슨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도 모르며, 결론을 내린 후 이런 사람과 일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머릿속이 텅 비거나 뒤죽박죽이 된다. 이것이 바로 판단력이 없는 것이다. 판단력이 없는 사람의 주된 문제는 바로 아무런 원칙도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처신의 경험조차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각 부류 사람들을 접할 때 어울릴 가치가 있는 부류와 없는 부류를 분별하지도 못한다. 어떤 사람들이 비교적 선량하고 장점도 있어서 그로부터 장점을 취하고 자신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도움과 유익이 되는 부류인지, 어떤 사람들이 인내심을 발휘하며 간신히 함께 지낼 수 있는 부류인지, 어떤 사람들이 인성이 너무 악해서 어울리면 말썽과 시비에 휘말리기 쉬우니 멀리해야 하는 부류인지, 그는 하나도 모른다. 요컨대 판단력이 없는 이런 부류는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사람, 어떤 일도 판단할 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도 방법과 나름의 원칙이 있다. 그는 말한다. “저는 아무하고나 즐겁게 일하고 얘기할 수 있고, 누구에게도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상대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진심으로 믿든 믿지 않든, 진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다 잘 어울릴 수 있고,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습니다. 악인을 보면 피하고, 착실한 사람을 보면 못살게 굴죠.” 그는 이런 마귀 같은 논리를 펼친다. 그는 어느 부류와 교류해야 하고 어느 부류를 멀리해야 하는지 모르고, 어느 부류와는 영원히 교류하거나 사귀지 말아야 하는지도 전혀 분별하지 못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생각하고 천편일률적으로 대한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외부인이나 적으로 생각하고, 아무리 좋은 사람도 자기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면 무조건 경계하는 태도로 대한다. 그는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않고 경계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런 사람은 자질이 좋으냐 아니면 부족하냐? (부족합니다.) 그는 자질이 부족한데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 그는 속이 좁은 인간이다. 자질이 없는 사람과 지적 장애인의 차이는 무엇이냐? 자질이 없는 사람은 바로 저능아, 백치이며, 이런 부류는 자신이 먹고 입는 것과 체면을 지키거나, 이득을 챙기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잘한 속셈 말고는 아무런 자질이 없다. 하지만 지적 장애인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이득을 챙기려는 자잘한 속셈조차 없다. 즉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저능아, 백치 부류는 약간의 자잘한 속셈 말고는 아무런 생존 능력도 없고 아무런 자질과 판단력도 없다. 그러니 누구를 대하든 아무런 원칙도 없고 그저 느낌을 따를 뿐이다. 그는 네가 그에게 잘해 주지 않는다고 느끼면 너를 피하고, 속으로 반발하고, 미워하고, 거부한다. 네가 그에게 아무리 호의를 가져도, 그를 어떻게 도와줘도 그는 자기 눈에 명확히 보이지 않으면 네가 그에게 우호적이고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사람과 일, 사물의 맞고 틀림과 옳고 그름, 긍정과 부정을 판별하지 못하고, 판단할 줄 모른다. 그저 자잘한 속셈만 품은 채 이득을 챙기면 기뻐하며, 이득을 챙기지 못하면 손해를 봤고 남들에게 괴롭힘과 비웃음을 당했다고 느낀다. 그리고 다음에는 남들이 이득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른 사람이 자기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남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네가 볼 때 속에 이런 자잘한 속셈밖에 없는 것이 자질이 있는 것이냐? 지적 장애보다는 조금 낫지만 능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즉 각각의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없는 백치, 저능아에 불과하다. 이런 자는 자질이 없는 사람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런 부류는 지적 장애인과 비교해서 그저 자잘한 속셈이나 더 있을 뿐이고, 지적 장애인은 그런 자잘한 속셈마저 없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저더러 판단력이 없다고 하시는데, 달러와 황금을 한데 두고 제가 아나 모르나 확인해 보십시오. 저는 구별할 수 있다고요. 황금은 노란색이고 달러는 종이가 아닙니까! 백금과 은을 한데 놓고 제가 판단할 수 있는지 보세요. 백금의 흰색은 은과 다르죠. 저도 구별할 줄 안다고요!” 참 바보 같지 않으냐? 그것도 보통 바보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좀 구분할 줄 안다면서 잘난 체하고 자기가 바보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려 하니 말이다. 자기가 했던 그 많은 바보 같은 일, 자질 없는 일은 왜 얘기하지 않고 인식하지 않는 것이냐? 그건 바로 자질이 없어서, 자질이 심하게 부족해서 그런 일을 변별하거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적 장애인이 할 수 없는 일 한두 가지를 가지고 자신은 지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자신은 생각이 있고 자질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참 바보 같지 않으냐? 이는 그가 바보 같다는 더욱 확실한 증거이다. 자질이 없는 사람의 모습도 전부 교제했다. 사람에게 판단력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주된 근거가 무엇이냐? 그 사람이 정상 인성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정상 인성의 사고가 없으면 어떤 일도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정상 인성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사물을 판단할 때 오차는 생길 수 있지만, 최소한 판단력이 있고 정상 인성의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판단이라는 것은 추측이나 가설, 가정도 아니고 무슨 추론도 아니다. 그것은 한 가지 일에 대해 각 측면에서 깊이 생각해서 얻은 다양한 결론과 견해이다. 이를 가리켜 판단력이라고 한다.

판단력에 대한 교제를 마쳤으니 이제 변별력에 대하여 얘기해 보자. 변별력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주로 사람과 사물의 긍정과 부정,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을 변별하는 능력을 말하며, 사람과 사물을 규정하거나 분류하여 직면한 사람과 사물을 유형별로 구분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변별의 본래 취지와 목적은 바로 사람을 각기 부류대로 나누고 긍정적 사물과 부정적 사물을 각기 부류대로 나누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분류라는 것은 날짐승은 날짐승으로, 동물은 동물로, 식물은 식물로 분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별력은 그런 것을 변별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각종 사람과 사물의 속성을 변별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너는 각 부류 사람들의 모습과 표출, 그리고 본질을 구분할 수 있느냐? 네가 만나는 각종 사람과 사물의 속성을 정의할 수 있느냐? 불신파를 변별하는 경우, 너는 그가 불신파임을 명확히 식별할 수 있게 해 주는 표출이 어떤 것들인지 변별할 수 있느냐? 만약 불신파에게 어떤 특성과 특징이 있는지, 그가 어떤 인성을 드러내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어떤 사상과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안다면, 너는 당연히 불신파를 변별할 수 있어야 한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은 각종 사람과 사물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긍정적 사물인지 부정적 사물인지, 긍정적 인물인지 부정적 인물인지, 정의로운 것에 속하는지 사악한 것에 속하는지, 옳은 것에 속하는지 그릇된 것에 속하는지를 변별해 낼 수 있다. 그는 각종 사람과 사물의 속성을 정의할 수 있고, 그것이 인성이나 진리에 부합하는지 변별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자질이 보통인 사람은 각종 사람과 사물의 속성이 명백한 경우에는 변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어디에 계신가요? 저는 왜 확신할 수 없죠?” 그는 하나님을 명백하게 부정하는 이런 말은 어느 정도 분별할 줄 알고, 그 사람이 불신파이고 부정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변별할 수 있다. 명백한 악, 명백하게 부정적이고 정의롭지 않고 사악한 사물은 변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싸한 것이나 사람들이 흔히 들어보지 못한 중간 지대, 회색 지대에 있는 일부 사물은 구분하지 못하고, 구별해서 대하지도 못한다. 그는 명백한 악인에 대해서는 변별력이 있다. 그 사람이 악인임을 알고, 그 사람이 리더가 되고 지위가 생기면 곧 적그리스도가 되어 독립 왕국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인품은 부족하지만 아직 악을 행하지 않았다면, 그가 악인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는지, 어떤 악행들을 저지를 수 있는지 변별하지 못하고, 그의 속성을 정의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보통 자질이다. 어떤 사람들은 음란한 짓을 하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세속을 따르거나, 시비를 가리기 좋아하거나, 자주 사람을 억압하고 괴롭히거나 살인, 방화를 저지르는 등 비교적 명백한 행위를 한다. 그는 이런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사람들이라고 얘기하고, 구분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항상 베풀고, 돕고, 인내하며 사람들과 무난히 어울리는 등 겉으로는 훌륭하게 행동하지만 자주 진리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는 구분하지 못한다. 명확한 꼬리표가 붙은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는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고, 정의로운지 사악한지, 긍정적 사물인지 부정적 사물인지 분별할 수 있다. 이런 표면적인 일은 구분할 줄 알지만, 비교적 원칙성이 강하고 진리와 관계된 사람과 사물은 구분하지 못하며 어떤 것이 분명히 진리에 맞고 어떤 것이 진리에 위배되는 것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보통 자질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입은 옷의 원단이 비교적 좋아서 마치 세상의 고위층 인물이나 화이트칼라 귀족처럼 품위 있고 고급스러워 보인다. 그는 이를 보고 “저 옷은 이방인이 좋아하는 옷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좋아해서는 안 되죠. 저건 긍정적인 사물이 아닙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틀렸다. 그 옷은 관능적이거나 요염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품위 있고, 단정하고, 점잖아 보여서 사람을 고귀해 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사람을 고귀하고 품위 있어 보이게 하면서도 현재 유행하는 옷을 부정적인 사물로 간주하며 그것을 사악하다고 한다. 이것은 변별할 줄 모르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변별력은 어떠냐? 기껏해야 보통이다. 이것이 바로 보통 자질이다. 명백한 이방인은 구분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그는 하나님을 믿은 뒤 일부 도리를 깨달아 변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특수한 사람과 사물은 변별할 수 없고, 구분할 수 없다. 명백한 악인이 방해하고 교란하는 경우,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는 경우, 공개적으로 원칙을 위배하는 경우 등, 이런 사람이나 일은 그나마 변별해 낼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특수하고, 기이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부 사람과 사물은 변별할 줄 모른다. 다른 사람이 교제하거나 일러 주어야, 또는 사람들이 명백한 일을 저질러야 비로소 변별해 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변별할 줄 모른다. 이런 것이 보통의 변별력에 속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 어떤 사람과 사물도 변별할 줄 모르고, 그 속성을 정의할 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부류 사람들의 속성이 과연 무엇인지, 진정으로 믿는 사람에 속하는지 아니면 불신파에 속하는지, 이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양성할 만한 대상인지 판단해야 하더라도 그는 전혀 모르고 구분해 내지 못한다. 설령 그 사람들이 많은 모습이나 명백한 문제를 드러내도 그는 변별해 내지 못하고, 그 속성을 정의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변별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흔히 볼 수 있고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과 사물이 나타나도 그 사람이 과연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악인인지, 그 일이 정의로운 일에 속하는지 아니면 사악한 일에 속하는지 확실히 말하지 못한다. 그런 것을 어떻게 구분하고 분간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분류할 줄도 모른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사람들과 교제해도 변별할 줄 몰라서 결국 남에게 확실히 정해 달라고 한다. “당신이 그를 뭐라고 정의하든 그게 맞아요. 당신이 정의롭다고 하면 정의로운 사람이고, 사악하다고 하면 사악한 사람이죠.” 어쨌든 그 스스로는 정의도, 결론도 내릴 줄 모른다. 무슨 일이든 결론을 내린다는 얘기만 하면 그는 당황하고 할 말을 잃는다. 이것이 변별력이 없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가장 간단한 표면적인 현상을 두고 그것의 성질과 속성이 어떤지 한번 변별해 보라고 해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재주가 하나 있다. 그는 누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너에게 시시콜콜 알려줄 수 있다. 네가 “이 사람은 진정으로 믿는 사람인가요? 열심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인가요?”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쨌든 그는 믿은 지 10년이 넘었고, 가정과 일을 버릴 수도 있어요. 자기 아이가 서너 살 때 형제자매에게 맡기고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했죠.” 그는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며 직접 결론을 내지 않고 네가 결정하게 한다. 네가 다시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인가요?”라고 물으면 그는 “어쨌든 그는 교회 리더를 맡은 뒤로는 계속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어요.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인지 얘기하자면, 아무튼 한번은 형제자매가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때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죄스럽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더군요.”라고 대꾸한다. “그럼 나중에 회개는 했나요?” “아무튼 당시 태도는 아주 좋았어요.” 그는 너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주면서 자기에게 뭔가 있음을 네가 알아주기를 바란다. 자기는 무엇이든 다 알고 사람도 볼 줄 아니까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그는 사람도 분별할 줄 모르고 결론도 내릴 줄 모른다. 네 앞에서 그저 현상과 정보만 잔뜩 늘어놓은 다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변별하게 하고, 네가 결론을 내려 그 사람의 속성을 정의하게 만든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편이네요. 하나님도 열심히 믿는 걸 보니 진정으로 믿는 사람인데, 다만 자질이 부족해서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어요.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만 언제나 실행 원칙을 찾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할 줄 모르는군요.” 네가 이렇게 말하면 그는 대답한다. “제가 볼 때 그는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얘기만 하면 울죠. 늘 똑같은 태도예요.” 보아라. 자기는 변별력도 없으면서 이때다 하고 묻어가려 하니 골치 아프지 않으냐? 변별력이 없는 사람의 가장 흔한 모습은 바로 현상과 정보, 난제, 일의 경과를 잔뜩 늘어놓거나, 자기가 본 그 일의 광경을 모조리 얘기한 다음, 네가 정의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네가 정의를 내리면 자기도 그게 좋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인 후에도 네가 왜 그렇게 정의하는지, 네가 내린 결론의 근거와 원칙이 무엇인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는 이런 것들을 하나도 모르고, 교제하고 공부해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변별력이 없는 것이고, 자질이 없는 모습이다. 그는 또한 종종 사실을 왜곡하고 착각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어떤 문제를 논하든 문제의 근원과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표면적인 현상을 근거로 결론을 내린다. 예를 들어 그는 적그리스도가 악을 행한 것을 과오라고 하면서 적그리스도가 그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고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정직한 사람이 거짓말을 한 마디 하면 간사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을 보면 악인으로 규정한다. 이것이 바로 변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자주 저지르는 잘못이다. 누구에게나 변별력은 생활에서 각종 사람과 사물을 마주할 때 마땅히 갖추어야 할 한 측면의 자질이다. 변별력은 각종 사람과 사물의 본질을 변별하는 것은 물론, 그 속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정확하게 규정할수록 변별력이 뛰어난 것이다. 만약 네가 내린 규정이 별로 정확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이나 근원과 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네 변별력이 보통이라는 뜻이다. 사람과 사물의 속성을 규정할 줄 모르고 간파할 수도 없다면, 그것은 너에게 변별력이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너는 어떤 사람의 태도와 표출은 얼마든지 얘기할 줄 알면서 정작 그의 본질은 간파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쉽게 소극적으로 변한다거나 어떤 특기가 있다는 얘기만 할 줄 알고, 그에게 발생한 많은 일만 얘기할 줄 알 뿐, 정작 그 사람의 인품, 자질, 그리고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모르고, 이런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도 간파하지 못해서, 결국 이런 부류의 사람과 사물에 대해 어떤 정의도 내리지 못한다. 또한 이런 일이 주변에서 아무리 많이 발생해도, 아무리 많이 보고 들어도, 너는 이런 부류의 사람과 사물의 속성이 과연 무엇인지, 옳은지 그른지, 정의로운지 사악한지, 긍정적 사물인지 부정적 사물인지,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에 해당하는 모습인지 인품이 악랄한 모습인지 등을 하나도 모르고 분별할 줄 모른다. 또한 아무리 많은 진리를 듣고 아무리 많은 체험 간증을 들어도 각종 사람과 사물을 변별하고 구분할 줄 모르고, 속으로 각종 사람과 사물에 대해 아무런 정의도 내리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변별력이 없는 것이고, 자질 없는 모습 중 하나이다.

변별력이 없는 사람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교만하고 독선적일 경우 가장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 무엇이냐? 다른 사람이 어떤 모습을 약간 드러내면 그것을 빌미로 꼬리표를 붙이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사람들이 조금만 제멋대로 굴어도 그것을 보고 악인 같다고, 마귀라고 한다. 이것은 대단한 잘못 아니냐? 사람이 조금 제멋대로 구는 것은 가정 형편이나 성장 환경으로 인해 좋지 않은 생활 습관이 형성되었거나 나쁜 습관, 나쁜 버릇이 길러진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 인품이 비록 선량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한 것도 아니라면 그 사람을 악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변별력이 없는 사람은 한두 마디 말이나 한두 가지 행동을 가지고 맹목적으로 정의를 내린다. “이 사람은 성격이 유별나고, 괴팍하고, 제멋대로군요. 악인이네요.” 이것은 정의를 잘못 내린 것이다. 진정한 악인은 듣기 좋은 말을 하며 사람을 구슬릴 줄 안다. 잔꾀를 부리고, 감추거나 속이며 다른 사람을 가지고 놀 줄 안다. 어떤 악인은 베풀 줄도 알고, 남을 도울 줄도 알고, 인내할 줄도 안다. 그러면 변별력이 없는 사람은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죠.”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변별력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리더를 선출할 때 그에게 투표까지 한다. 이것은 무엇이나 다름없느냐? 악인을 선출해서 악행을 도운 것이다. 어떤 악인은 자신의 악을 행위로 표현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며 마음속에 담아 둔다. 그가 하는 행동은 모두 목적성을 띄고, 그의 저의는 모두 은폐되어 있다. 네가 볼 수 있는 그의 행동은 사실 모두 그의 본뜻이 아니며, 그의 진정한 저의와 목적, 그의 사악함은 모두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 변별력이 없어서 그를 분별할 줄 모르면 그런 사람을 좋은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어떤 사람들은 성격이 솔직하다. 사람들과 사귈 때 잔꾀를 부리지 않고, 말도 직설적으로 한다. 성격이나 성질은 조금 까칠해도 인성에는 사실 큰 문제가 없고, 단지 가끔씩 무뚝뚝한 말투로 얘기할 뿐이다. 하지만 그가 드러내는 것은 그의 마음속 생각으로, 그의 속에 있는 생각이 고스란히 겉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종종 그가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고 사교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그가 말하는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는 상당히 무뚝뚝하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늘 남에게 상처를 주며, 그러다 보면 다들 상처를 받아서 아무도 그에게 호감을 갖지 않는다. 일부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악하다고 하는데, 사실 그는 악하지 않다. 너는 그를 악하다고 하고, 그가 사람들을 혼내고 괴롭힌 사실을 내세우지만, 그가 누구를 괴롭히고 누구를 억압하였느냐? 누구를 해치고 누구를 속였느냐? 만약 정말 그 사람이 악인이라는 것을 입증할 사실적 근거가 있다면, 그가 단지 말로만 남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내면에 악이 있고 정말 사람들을 해치는 인간이라면, 그를 악인으로 규정해도 된다. 만약 남에게 상처를 주려는 저의가 없다면, 그는 악인이 아니라 그저 성격이 솔직하고 말투가 무뚝뚝한 것이고, 그것은 천성이다. 말을 무뚝뚝하게 하는 것은 기껏해야 인성의 흠이나 결함에 불과하다. 그는 말하는 방식에 신경 써가며 사람들과 대등하게 얘기할 줄 모르고, 포용과 타협, 인내와 양보도 모르며, 다른 사람의 기분을 배려할 줄도 모른다. 그는 이런 것을 모르고 인성 안에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분별할 줄 몰라서 이런 부류의 사람을 악인으로 간주한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행동할 때 그래도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록 말투는 조금 무뚝뚝하지만 남을 해한 적도 없고 남을 해하려는 마음도 없다. 다만 말할 때 요령이 없고 장소를 가리지 않을 뿐이다. 인성의 몇 가지 결함이나 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악인으로 오해하지만 그가 악을 행한 사실은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판단 실수이고, 이런 사람을 정확히 변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악인은 겉으로는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베풀고, 도와주며, 말할 때도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보살피고, 양보하는 데다가 심지어 포용하고, 사랑하는 등 말과 행동은 매우 훌륭하지만 특수한 상황이나 특수한 일, 자신의 이익이 걸린 일에서는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곤경에 빠뜨리고 뒤에서 몰래 해를 입힐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 설령 자기 이익과 관계가 없더라도, 또는 손쉬운 일이더라도 그는 지키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아주 훌륭하게 살고, 인성에 어떤 흠이나 결함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바로 전형적인 악인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사람을 분별하지 못해서 그의 잔꾀와 처세 철학, 음모와 계략에 넘어간다. 누가 이런 사람이 악을 행한 사실과 본성 본질을 폭로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집에서 양성하고 중용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부류를 분별할 줄 모른다. 그가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느냐는 둘째 치고, 그의 자질만 가지고 얘기하자면, 이렇게 명백한 악인도 그는 좋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설사 악을 행한 사실이 있어도 이 악인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변별력이 없는 사람은 지적 장애인, 백치일 뿐만 아니라 머저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악인은 전에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고, 각종 수단으로 사람들을 희롱했다. 그는 그것을 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이 악이라는 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또한, 악인이 가진 명백한 모습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 집의 이익을 결코, 단 한 번도 지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령 말 한 마디면 되는 일이거나 손쉬운 일이더라도 지키지 않는다. 더군다나 자신의 신변 안전, 혹은 지위나 명예와 관계된 일이라면 더더욱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처럼 명백한 악인도 간파하지 못하는데, 네가 볼 때 이런 사람들에게 자질이 있겠느냐? 악인은 악한 본질을 가지고 있고, 누구든 억압할 수 있다. 자신의 지위나 이익과 관련이 있다면 그는 누구든지 억압한다. 분별이 없는 사람은 이런 것을 꿰뚫어보지 못한다. 분별이 없는 사람은 머저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악인이 자신을 억압할지 안 할지조차 모른다. 네가 볼 때 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로 멍청한 것이냐? 멍청하기 짝이 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아무런 변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심지어 어떤 악인들이 교체된 뒤에도 그 악인이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은사가 있고 말을 잘한다는 이유로, 또 수완이 있고 겉보기에 버리고 헌신하고 고생도 견딜 줄 안다는 이유로, 직접 나서서 그를 변호하고 두둔하며 그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들은 이 악인이 얼마나 많은 악을 행했는지는 얘기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딴마음을 품지 않았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큰 붉은 용에게 잡혀서 고문당하고 수감된 적도 있고, 아무개 형제자매를 도운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만 보고 그 사람의 악행은 보지 않으며, 그 사람이 악을 얼마나 많이 행했는지는 얘기하지 않는다. 너무 멍청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람은 구제할 방법도 없고 약도 없다. 변별력이 없는 사람은 자질이 없는 부류이고, 아무런 능력도 없다. 즉 이런 부류는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 혹은 어떤 사람이 긍정적 인물인지 부정적 인물인지 전혀 모르고 변별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행위와 태도, 패괴 표출, 그리고 그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사실을 통해서도 그의 본질과 본성을 명확히 보지 못하고, 그의 속성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그가 교회에 있는 한 그를 형제자매로 대하고, 진정 사랑으로 대하는 등 어느 누구에게도 분별이 없고 원칙대로 대할 줄 모른다. 이런 사람은 변별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각종 일에 대해 그것이 정의로운지 사악한지, 사람에 대한 영향이 긍정적인 부정적인지, 옳은 일로 여겨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그릇된 일로 여겨 분별하고,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지,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고 변별할 줄 모른다. 예를 들어 설명해 주면 그런 일이 좋은 일이 아니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다음에 또 그런 일을 만나면 여전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원칙을 적용하지 못해서 또다시 예를 들어 주어야 이해한다. 즉, 일일이 얘기해 주고 어린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식으로 가르쳐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변별력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것이 정의로운지 사악한지, 옳은지 그른지, 긍정적인 사물인지 부정적인 사물인지, 과연 진리에 부합하는지,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는지, 하나님 믿는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는 하나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변별력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변별력이 좋은지 나쁜지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느냐? 그것은 각종 사물의 속성에 대해 내리는 정의가 정확한지에 달려 있다. 정의가 정확하면 변별력이 있는 것이다. 만약 각종 사물의 속성에 대한 정의의 정확도가 50% 이상이면 변별력이 보통이거나 보통 이상이고, 50% 미만이면 변별력이 부족한 것이다. 정확도가 1%도 되지 않으면 변별력이 없는 것이고, 자질이 없는 사람이다. 변별력이 있고 없고는 이렇게 구분한다. 이 부분은 더 이상 예를 들지 않겠다. 이야깃거리를 남겨둘 테니 너희끼리 교제하도록 해라.

이어서 제8조, 대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대처 능력은 하나의 일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에 관한 것으로, 이미 발생한 일이든 돌발적인 일이든, 혹은 그 일의 각 방면의 요소에 변화가 생겼든, 그 일에 대응하는 방식이 바로 한 사람의 대처 능력이다. 그렇다면 대처 능력은 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네가 한 가지 일을 변별하고, 판단하며, 대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나 일이 너에게 닥쳤을 때, 그 부류의 사람과 일은 어떤 성질이냐?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그런 일을 어떻게 직시하고 처리해야 하느냐? 그런 일이 갑작스레 닥쳤을 때 어떤 공과를 배워야 하느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무엇이냐? 만약 이런 일이 교회 사역에 손해를 입힌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원칙에 부합하고, 손해로 초래된 결과를 만회해서 그것이 다시는 교회 사역에 해를 끼치지 않게 하며, 좋지 않은 영향이 계속 확산되지 않게 막을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이나 일에 직면했을 때, 네가 파악한 분별의 원칙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 원칙을 바탕으로 그 일의 본질과 근원, 그리고 그것을 처리하는 원칙과 방안을 정확하게 판단해 낼 수 있다면, 너는 대처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갑자기 네게 발생하면, 그것의 옳고 그름을 어떻게 판단할지,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 계속 전개될 경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 일이 어떤 일에 관계될지, 발생한 근원은 어디인지, 그 본질은 무엇인지 등을 너는 모두 판단할 줄 알아야 하고, 판단을 통해 규정하고 나면 얼른 처리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주동자는 누구이고 가담자는 누구인지, 주요 책임자는 누구인지, 누가 핵심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이 책임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와 같은 문제들을 전부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문제를 처리할 때는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고, 인사도 다시 안배하고 조정해야 한다. 그래야 잘못을 제때 바로잡을 수 있고,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여 일이 올바르고 좋은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사태를 되돌릴 수 있다. 요컨대, 그 일에 관계된 여러 가지 요소를 모두 고려하여 올바른 대응 방식, 올바르고 정확한 처리 원칙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대처 능력이며, 그런 사람이 바로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물론 이 대응 방식과 처리 원칙은 사정을 잘 아는 사람과 접촉하고 교제하거나, 혹은 다 함께 협력하고 상의해서 얻은 결론이자 정의일 수도 있다. 사실의 경과를 파악하고 나서, 그런 일을 잘 아는 형제자매에게 조언을 구해 최종적으로 정의와 결론을 내리고 해결 방안을 정해 문제를 잘 처리하며, 인사를 다 조정하고, 이 일이 초래한 손실도 복구한다면, 그리고 교회 사역이 더 이상 나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잘 조정한다면, 이를 두고 대처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면 자질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질이 좋다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 일이 닥쳤을 때 그가 즉시 결단을 내려서, 당장 그 일을 아주 완벽하고 알맞게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은 많은 일의 본질과 경위, 혹은 그 일과 관계된 모든 면을 다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을 지닌 유한한 존재로, 인성의 범위 안에서 일을 처리하며, 그럴 때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영이 일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곳을 전방위적으로 감찰하며,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일, 모든 문제의 본질과 근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일의 이면에 숨겨진 것을 꿰뚫어 보지 못해서 기만당하고 속기 쉽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은 일의 이면에 숨겨진 진상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이면에 숨겨진 일의 실상을 파악한 후, 즉시 문제를 처리하고 오류를 해결할 수 있다면, 직접적인 책임자와 사역 담당자를 적절하게 조정하여 사역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이는 너에게 대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돌발적인 사건이 터졌을 때, 원칙에 따라 각종 사람과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자질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대처 능력이 그저 그런 사람은 일상적이고 흔한 상황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규칙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있지만, 성과가 평범해서 획기적이지도 않고, 이렇다 할 진전을 거두지도 못한다. 그리고 특수 상황이나 돌발 사건에 놓이면 쩔쩔매며 처리할 줄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할 경우, 정상적인 상황에서 매달 몇 사람씩 얻는다면 이것은 보통 자질이고, 복음 전파 성과도 보통에 해당하니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 교회에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사건이 갑작스레 발생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복음 사역도 중단되고 전도를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사역지침을 기다려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는 복음 전도 사역의 원칙을 구할 줄 모른다.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서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 사역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항상 얘기한다. 고작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복음 사역을 중단하다니, 이것이 본분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냐? 어림없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이냐? 역시 아니다. 그는 적그리스도나 거짓 리더가 함부로 악행을 저지르며 방해하고 교란하면 당황하기만 할 뿐,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물어볼 줄도 모르고,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 원칙과 실행의 길을 찾을 줄은 더더욱 모른다. 그에게는 대처 능력이라는 것이 없다. 어떤 교회 리더는 적그리스도가 황당한 이론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을 보고도 진리를 교제하여 그 이론에 반박할 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무턱대고 기도만 한다. ‘하나님, 사탄을 속박해 주시고, 그가 황당한 이론을 퍼뜨려 사람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그 입을 막아 주옵소서. 무지하고 우매한 그 사람들을 구원해 주셔서, 그들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그들을 되돌려 주옵소서!’ 기도만 할 줄 알지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은 모르지 않느냐? 사람이 협력하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척 많은데, 먼저 그 적그리스도의 정체가 무엇이고, 어떤 특징이 있으며, 무엇으로 사람을 미혹했는지, 미혹된 사람 중에 자질이 좋아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 서둘러 그 사람들을 되돌려야 한다. 우선은 이렇게 사역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모르고, 이런 사역도 할 줄 모르면서, 그저 당황해서 발만 동동 구른다. 어떤 멍청이들은 조바심에 울기까지 한다. 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운다고 미혹된 사람들을 되돌릴 수 있느냐? 우는 것은 사역을 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부담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무능한 모습이다. 자질이 있는 사람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선은 침착한 자세로 기도하며 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한 다음 교제를 거쳐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린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일이 닥치면 쩔쩔매기만 할 뿐, 기도하며 구하거나 진리를 깨달은 몇 사람을 찾아가 교제할 생각은 안 하고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한다. 이것이 일을 가장 그르치는 행동이다. 네가 방법이 없어도 다른 사람은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어째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느냐? 똑똑한 사람은 기다리는 동안에도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것은 적극적인 일이지 소극적인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거나 하나님이 직접 일해서 국면을 바꾸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에도 되돌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되돌리는 것이다. 멍청이나 악령 들린 사람,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저 눈치 없이 밥이나 축내는 불신파처럼 되돌릴 수 없는 사람은 신경쓸 필요 없다. 그보다는 속아넘어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서둘러 사람을 안배해서 진리를 교제하고 분별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처리 방안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대응 조치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런 대응 조치도 없이 그저 질질 짜고 원망하는 것밖에 모른다. 이것이 바로 대처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래도 정상적으로 사역할 수 있겠지만, 특수한 상황에 놓이면 눈이 휘둥그레지고 쩔쩔맨다. 이런 사람의 대처 능력은 기껏해야 그저 그런 수준이다. 만약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처리할 줄 모른다면 이런 사람은 대처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게 한 교회에 가서 교회 리더 선거를 치르라고 하면, 그는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지, 어떻게 사람들을 소집해서 선거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고, 선거의 기본 절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더구나 교회에는 패괴 성품이 심각한 악질, 불량배, 건달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기회를 틈타 선거를 교란하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은 더더욱 처리하지 못한다. 그는 아예 굴복하고 백기 투항한 다음, 결국에는 형제자매들에게 이런 말밖에 하지 못한다. “알아서들 뽑으세요. 뽑힌 사람이 되는 거죠.” 그는 대체 어떤 인간이냐?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대처 능력이 없는 것이다. 대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사역 능력도 별로 없다. 정상적인 상황이든 특수한 상황이든, 일이 닥치면 바로 무력하게 위축되는가 하면, 쩔쩔매며 훌쩍인다. 그는 일이 생기기 전에는 글귀와 도리도 좀 얘기할 줄 알지만, 막상 일이 닥쳐서 문제를 처리하라고 하면 처리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과 이렇게 상의만 할 것이다. “건성으로 하지 마시고, 제대로 이행해 보세요!” 이래서야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건성으로 임하는 문제를 겨냥해서 교제해야 한다. 만약 상대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진리를 교제해 주고, 뻔히 알면서 고의로 잘못을 저질렀다면 해부하고 책망해야 한다. 다른 문제 때문이라면 그 문제를 근거로 교제하고, 발생한 문제가 어떤 측면인가에 따라 적합한 방법을 정해 그대로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너는 대처 능력이 없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든 대응할 방법이나 방식이 없고, 처리 원칙도 없다면 대처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대처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대처 능력이 가장 좋은 사람은 특수한 일이나 돌발 상황이 닥쳐도 제때 판단하고 변별할 수 있고, 그런 다음 상대적으로 적절한 처리 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 대처 능력이 그저 그런 사람은 평범한 일, 일상적인 일이 닥쳤을 때는 처리할 수 있어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사역하며 유지하고 관리하거나 사람을 조정하고 교체할 수 있다. 이런 사역은 그래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처리할 줄 모르고, 원칙을 알려주어도 적용할 줄 모른다. 본인에게 처리할 권한이 주어져도 처리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대처 능력이 그저 그런 경우다.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설령 일상적인 일이라 해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그저 도리나 얘기하고 규례나 지킬 뿐 궁극적인 문제의 근원은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그는 한 적그리스도의 교란과 미혹에도 복음 전도를 포기할 수 있고, 한 거짓 리더의 헛소리에도 복음 사역을 중단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이냐? 어림없다. 이런 사람은 대처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어떤 일에 직면하든 처리할 줄 모른다.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나면 그는 허둥대며 얼른 소화기를 찾지만, 소화기를 가져와도 사용할 줄 몰라서 설명서를 찾으려 한다. 결과적으로 불은 더 크게 번진다. 그가 소화기를 사용할 줄 몰라서 일을 그르친 것이다. 이것도 대처 능력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화재와 같은 긴급한 일에도 대응할 줄 모른다면 대처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밥을 먹다가 음식이 목에 걸리는 바람에 숨을 쉬지 못해 눈이 뒤집혔다. 그러자 그는 당황해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할지, 아이에게 물을 먹여도 될지도 몰랐다. 마음이 타들어가 땀이 줄줄 흐르고 얼굴은 시뻘게지는데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잠시 후 아이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숨이 돌아왔다. 그렇게 긴 시간을 다급해하는 동안 그에게는 아무런 대응 방법도 없었다. 아이가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무 능력도 없고, 아무것도 못한다. 그가 깨달은 그깟 도리는 그저 규례와 구호에 지나지 않아서 일반적인 상황이든 특수한 상황이든, 그는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한다. 그러니 대처 능력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이런 사람은 특히나 속 빈 강정이라 무능력하다. 무슨 일이 닥쳐도 대처할 줄 모르고 처리할 줄 모르며, 그 일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는 글귀와 도리를 얘기하고 구호만 외칠 줄 알면 된다고, 그러면 밑천이 있는 충실한 삶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일이 닥쳤을 때 그가 아는 그 도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렇게 그는 그것이 자질이 떨어지는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본인 자질이 그 정도까지 떨어져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나 자질이 떨어지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멍청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멍청한 사람은 생각이 짧다. 생각이 짧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아무리 많은 도리를 깨닫고 아무리 많은 규례를 지킨다 한들, 막상 일이 닥쳤을 때는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규례나 도리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어째서 이 도리와 규례가 통하지 않는 거지?’ 머리를 쥐어짜 봤자 소용없고, 아무리 고민해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적그리스도 사건을 처리할 때,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된 사람들을 구하고,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는 바람에 소극적으로 변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붙잡아주는 일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다. 그가 맨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이냐? 대규모 예배를 열어 적그리스도에게 어떤 모습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적그리스도인지, 적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성품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다른지, 과연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분별하고 적그리스도 성품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분별하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이런 내용을 죄다 교제하고 나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된 사람 중 일부는 일찌감치 교회를 떠나고, 일부 소극적이고 연약한 사람들도 예배에 나오지 않는다. 그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을 놓쳐서,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 것이다! 요컨대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은 대처 능력이 전혀 없다는 커다란 결함을 가지고 있다. 너는 그가 평소에 얼마나 말을 잘하고, 얼마나 글귀와 도리, 신학에 관한 얘기를 잘하는가를 볼 것이 아니라, 사실과 마주했을 때 문제를 처리하는 능력이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특히 돌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에게 판단력과 변별 능력이 있는지,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할 방안이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그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고, 깊이 생각할 줄 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변별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고, 일이 닥치면 당황스럽고 초조해하면서 거창한 도리를 얘기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문제, 허물이 있든, 그가 이론만 잔뜩 내세워 설명하고 대응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만 교제해 줄 뿐 끝까지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아무런 대처 능력이 없는 것이다.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없는 것은 곧 대처 능력이 없는 것이고, 대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 자질이 없다. 속된 말로 바보, 백치, 저능아이며, 아무리 많은 도리를 얘기할 줄 알아도 소용이 없고 쓸모가 없다. 제8조 대처 능력에 대한 교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이번에는 아홉 번째, 의사 결정 능력을 살펴보자. 의사 결정 능력은 사람의 자질을 검증하는 성격이 강하며 평범한 사람들은 갖추지 못한 능력이다. 진정으로 의사 결정 능력이라는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의사 결정 계층에 속하는 부류이다. 그렇다면 의사 결정 능력이란 주로 무엇을 가리키느냐? 사람과 사물이 나타났을 때, 최종적으로 어떤 방식, 어떤 실행의 길과 해결 방안으로 이들 문제나 사람을 처리하는지가 바로 의사 결정 능력이다. 그런 처리 능력을 갖춘 사람은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것이고, 처리 능력이 없는 사람은 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의사 결정 능력은 무엇에 관계되느냐? 사람의 받아들이는 능력과 판단력, 변별력, 대처 능력에 관계되며, 이런 것들을 통틀어 의사 결정 능력이라고 한다.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은 문제의 본질도 판단할 수 있고, 문제의 속성도 변별할 수 있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각종 문제를 처리하는 원칙과 방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능력을 두루 갖추어야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모두가 수많은 현상과 사실, 현재의 요소, 환경, 조건 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동안,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요소와 조건을 두루두루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과연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떤 방식과 방향을 채택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최선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 각각 어느 수준에 이를지 마지노선을 정한 다음, 자신이 깨달은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문제를 처리한다. 이 능력을 갖춘 사람이 바로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바로 자질이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어느 분야의 업무 기술에 직면하든, 아니면 어느 측면의 문제를 처리하든, 발견한 문제가 한 갈래이든 여러 갈래이든, 간단하든 복잡하든, 그는 여러 방면에서 드러나는 각종 정보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판단하고, 문제의 근원을 분석하고, 최종적으로 이들 문제와 현재의 조건을 바탕으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한다. 그 결정은 주로 현재의 조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을 근거로 선택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안이다. 문제를 이렇게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질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리더를 맡기에 적합하고, 의사 결정팀에서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합하다. 자질이 안 좋거나 보통인 사람은 각종 문제를 직면했을 때 표면적인 현상에만 매달리고 피상적인 말만 하면서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설령 알아보고 파악한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은 현재 상황이 아무리 복잡해도, 지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무리 큰 어려움과 저항에 부딪혀도, 언제나 원칙대로 타당하게 처리할 수 있으며, 그것도 상대적으로 적절하고 알맞게 처리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의사 결정 능력이 보통인 사람은 일반적인 상황이나 교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몇몇 일들은 그나마 처리할 수 있지만, 특수한 사람과 사물을 만나면 당황해서 어떻게 대면하고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한참을 생각해도 결론을 내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은 문제의 핵심에 초점을 맞춰 진리 원칙을 구할 줄 알지만, 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 사람은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차이점이다. 만약 구함을 통해 어떻게 처리할지 알게 된다면, 이는 보통 자질에 해당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답을 구함으로써 진리 원칙을 조금 깨닫더라도 당장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처리할 때가 되면 처리할 줄 몰라 답답해한다. ‘방금 내가 깨달은 진리 원칙이 왜 안 통하지? 어디가 문제지?’ 그는 또 머리가 멍해지고 결국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 것이고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자질이 가장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 할지 알려주면 그대로 따르지만, 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의사 결정권자가 그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권한을 위임하고 부탁하거나 분부하면서 어떻게 할지 알려주면 그는 그렇게밖에 할 줄 모른다.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하는지, 그 일로 어떤 성과를 내야 하는지, 만약 그 상황과 다른 돌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하나도 몰라서, 물어봐야 하고 다른 사람이 같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로봇처럼 남에게 조종당하고 지시를 받을 뿐, 스스로 처리하는 능력이 없다. 자질이 없는 이런 부류는 의사 결정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의사 결정에 관계된 능력과도 아예 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의사 결정 능력은 높음, 중간, 낮음이라는 세 단계로만 구분하면 된다. 높음, 중간, 낮음은 곧 좋음, 보통, 부족함의 차이와도 같다. 자질이 없는 사람이 무슨 의사 결정 능력을 논하겠느냐? 그는 무슨 일을 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을이 찾아와 날씨가 서늘해지면 무엇을 입는 것이 적당하고, 겨울에 날씨가 추워지면 무엇을 입는 것이 적당한지와 같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른다. 그런데도 교회 사역에 관계된 큰일을 그에게 결정하라고 한다면, 장난하자는 것이 아니겠느냐? 자질 없는 사람에게 의사 결정 능력은 말할 나위가 못 된다. 의사 결정 능력은 주로 리더 일꾼이나 책임자급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능력이며, 의사 결정 능력이 좋은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 능력은 또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바로 네가 결정한 그 일의 결과가 어떤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지, 아니면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거나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지를 반드시 명확히 해야 한다. 네가 결정을 내릴 줄 알고 제때 결단을 내려 바로 결재를 하는 것이 곧 의사 결정 능력이 있음을 뜻하지는 않으며, 네가 결정한 그 방안, 목표와 방향이 옳은지도 확인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이룬 성과가 긍정적이라면 너는 정말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것이다. 반면 그것이 이룬 성과가 부정적이라면,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고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망가뜨린다면, 그것은 의사 결정 능력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지도자급 인물, 큰 인물은 모두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지도자급 인물은 뛰어난 자질과 비교적 좋은 의사 결정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관점은 정확하지 않으며, 크게 잘못됐다. 네 결정이 옳은가는 네가 결정을 내리는 원칙과 목표, 방향이 무엇인지에 달렸다. 만약 그 목표와 방향이 인류에게 유익이 되고, 사람의 처신과 진리 실행, 구원받음, 성품 변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일에 긍정적으로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된다면, 너는 의사 결정 능력이 정말 뛰어난 것이다. 반면 네가 함부로 결정을 내린 탓에 사람들이 고생하고 크게 피해를 입고, 치우친 길을 가고, 하나님에게서 떠나 방향을 읽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며, 의사 결정 능력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의사 결정 능력에 대한 교제는 여기서 마치겠다.

다음은 감상 능력이다. 너희는 감상 능력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 역시 잘 다루지 않는 주제이다. 감상 능력은 하나의 사람이나 사물을 대할 때, 네가 볼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정보로부터 그 안에 담긴 장점과 강점, 그리고 배울 만한 점을 감별하고 감상하여 그것을 자기 생활에 적용하고 자신의 처신과 일 처리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만약 네가 감상할 줄 몰라서 그것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거기에 담긴 핵심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한다면, 너는 감상 능력이 없는 것이다. 반면 네가 감상할 줄 알아서 어떤 일에서 유용한 것을 배우고, 아울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고, 네 인간적인 생활과 인생의 길을 선택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너에게 어느 정도 감상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감상 능력이 뛰어날수록 네 자질이 좋다는 뜻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그림 한 점을 감상한다고 했을 때, 네가 비록 미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 그림의 구도와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볼 줄 알고, 더군다나 그 관점이 올바르고 인간적이라면, 네가 거기에서 인간적인 면과 관련된 구체적인 요소를 볼 줄 알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네 생활과 일에 적용할 수 있다면, 그런 모습은 너에게 감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상 능력의 범주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교적 구체적인 것을 가리킨다. 추상적인 것에는 색깔, 예술품 등이 포함되는데, 이런 것들은 인간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고, 인간의 정상적 사유, 그리고 사람의 생활에 존재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으며, 생활과 밀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감상 능력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비교적 생활과 밀접한 일부 비유나 인간적인 것들을 볼 줄 알고, 분별할 줄 알고, 응용할 줄도 안다면, 그것의 강점과 병폐를 다 볼 수 있고, 나름의 사상과 관점이 있고, 그것이 인성에 도움이 되는 측면을 깨달을 수 있다면, 만약 편집적이거나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 있어도 분별해 낼 수 있다면 이런 것을 두고 감상 능력이 있다고 한다. 만약 네가 볼 줄 모른다면, 구체적인 사물을 보고 이론적으로 그 안에 담긴 장점과 병폐를 분별할 수만 있을 뿐, 일상 생활에서 그것이 과연 인성의 어느 방면에 관계가 되는지 볼 줄 모른다면, 그것은 감상 능력이 보통인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의 작품을 볼 때 아무리 봐도 그 작품이 표현하는 것과 작가의 의도를 모른다면, 인성에 관계된 것이든 아니든, 그 내면에 담긴 본질적인 것을 도무지 볼 줄 모르고 그 핵심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감상 능력이 없는 것이다. 감상 능력이 없으면 어떤 일에도 관점이 없어서 사회 흐름이나 사람들이 숭배하는 부정적인 것들에 미혹되기 쉽다. 즉 원래부터 부정적인 사물을 너는 오히려 긍정적인 사물로 받아들이고, 결국 그것에 의해 해를 입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네 안에서 오랜 기간 머물며 깊이 뿌리내린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가로막고 방해할 것이다. 감상 능력에 대한 예를 더 들어 보자. 영상 작품 한 편을 위해 세 시간 분량을 촬영했는데, 편집을 마치고 나니 러닝 타임이 2시간 40분이었다. 이것이 영화의 통상적인 상영 길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영화를 제작한 사람에게 감상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감상 능력이 없다는 것은 한 편의 영상 작품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떤 장면이 비교적 좋은지 골라내지 못하고, 어떤 장면은 보류해야 하고, 어떤 장면은 버려야 하는지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주된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장면이 주된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취사 선택할 수 없다. 즉 어떤 장면의 내용이나 스토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지, 주제와 거의 관련이 없으니 빼 버려도 되는지, 어떤 장면의 내용이나 스토리가 주제와 가장 관련이 있어서 보류해야 하는지 그는 하나도 모른다. 감상 능력이 없기 때문에 편집할 때 ‘마음이 약해져서’ 이것도 자르면 안 되고 저것도 자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큰 노력을 들이고도 확실한 문제가 있거나 잘못 촬영된 장면만 겨우 잘라 낼 뿐, 주제와 크게 관련이 없는 내용들도 모두 남겨 놓는다. 이것이 바로 감상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영상 작품의 정의도 명확히 알지 못하고, 영상 작품의 구체적인 형식, 표현 수법과 각 장면 사이의 관계도 모르고, 어떤 장면이 진정한 영상 작품의 장면인지도 전혀 모른다. 이것이 바로 감상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를 촬영할 때는 자신만만했다가 편집할 때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고, 심사를 받을 때는 극도로 가슴을 졸였다가 심사가 끝나면 여유가 생긴다. 상부의 지도를 통해 어떤 장면들이 필요가 없는지 알게 되어 과감하게 잘라 내면 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어느 정도로 잘라 냈느냐? 러닝 타임을1시간 40분까지 줄였다. 촬영한 사람은 속으로 무척 괴로워했다. ‘이건 우리의 노고를 헛되게 만드는 거잖아? 반년 동안 고생고생해서 그 많은 장면들을 찍었는데 결국 당신이 사정없이 이것도 자르고 저것도 자르라고 하면 그게 무슨 영화야?’ 내가 말하건대 이렇게 많이 잘라 내는 것이 옳다. 이것이 바로 영화이다. 네가 만든 것은 영화가 아니라 기껏해야 드라마에 불과하다. 감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진리에 관계된 일은 둘째 치고, 어떤 일에 내포된사상과 관점 가운데 어떤 것들이 정상 인성의 필요와 정상 인성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어떤 것들이 비교적 실제적이고 긍정적인지, 어떤 것들이 공허하고 상상에 지나지 않는지, 어떤 것들이 사람의 생활과 더 밀접한지, 어떤 것들이 실생활과 괴리된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것인지 감별할 줄 모른다. 한 편의 영상 작품에 대해, 어떤 장면이 주제에 보조적인 작용을 하는 것인지, 주제를 직접 다루며 주제를 직접 표현하는 것인지, 주제의 중심축 안에서 표현해야 하는 것인지, 어떤 것들이 지엽적이고 불필요한 것인지 구별할 줄 모른다. 그는 이런 것들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편집할 때가 되면 늘 ‘마음이 약해져서’ 차마 잘라 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감상 능력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런 장면들을 촬영하고 난 뒤, 해당 작품이 표현하려는 생각과 전달하려는 방향성을 깊이 생각해 보고, 어떤 장면이 필요가 없고 어떤 장면이 관련성이 부족한지, 어떤 장면이 단지 특수한 상황을 대비해서 예비로 준비한 예비용일 뿐 전혀 사용할 계획이 없는지 안다면, 속으로 이런 사안들을 모두 고려하고 처리 방안과 해결할 길을 마련한다면, 이것이 바로 감상 능력이 있는 것이다. 반면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고, 문제를 고려하고 바라보는 관점과 방식에도 근거가 없고, 궁극적으로 올바른 결론도 얻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감상 능력이 없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 심지어 업계나 관련 분야 사람들 중 일부도 감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감상 능력은 단순히 어떤 작품이나 예술적인 것, 혹은 정신적인 양식, 인성의 철학적 이치를 얼마나 간파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더 나아가 정확하게 간파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실에 부합하고 인성의 필요에 부합해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한 것, 혹은 받아들인 것이 긍정적인 사물에 부합하고 모든 사물의 규칙에 부합해야 한다. 그것은 공허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아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진리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 만약 네가 그 안에서 표현하려는 사상과 관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사상과 관점이 과연 올바른지,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는지, 순수하고 올바르며 진리에 부합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면, 이 몇 가지 측면을 네가 모두 갖추었다면, 너는 감상 능력이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감상 능력이 좋은 사람은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만약 이 몇 가지 측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하거나 일반적인 수준만 충족한다면 네 감상 능력은 보통이다. 인성의 필요에 관계된 사상과 관점, 받아들이는 능력 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를 들어 영상 작품, 문예 작품, 미술 작품 등에 대해서라면 추상적인 것이든 구체적인 것이든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면, 인성 안에 이런 것을 감별하고 감상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감상 능력이 없는 것이며, 이런 사람은 자질이 없는 사람이다. 한 장면에서 어떤 인물이 특정 색깔, 조명, 환경 속에서 보여주는 기질이나 심리 상태, 그리고 그의 전반적인 정신적 면모를 보고 그 장면이 사람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감상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감상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알아내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조명이 어떻고 색깔이 어떻든 결국 같은 사람 아닌가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정신적인 면모를 볼 수 있고, 저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감상 능력이 없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얘기하든, 그는 말로는 안다고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여전히 모른다. 이 영역은 그에게 영원히 낯선 영역이다. 감상 능력이 없는 사람은 무슨 사역을 하고 어떤 문예 작품을 보든 자신의 사상과 관점을 표현하지 못하며, 특히 함의와 주제를 전달해야 하거나 정신적 방향성이 요구되는 사역이나 작품을 제대로 해내거나 만들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 만약 네가 감상 능력을 갖추었고, 나아가 진리를 깨달았다면, 하나님 집의 영상, 문예, 미술 등 감상 능력과 관련된 사역들을 제대로 해내고 감당할 수 있으며, 이 방면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만약 감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너는 자질이 부족한 것이고 이 방면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는 이렇게 오랫동안 진리를 들었고 진리 원칙도 깨달았으니, 이 방면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안 된다. 진리를 일부 깨달았다 해도 감상 능력의 도움이 없으면, 복음 전도 사역이나 교회 양육 사역은 할 수 있겠지만, 감상 능력과 관계된 사역은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 이런 사역을 하도록 잘못 선출되었다면, 이제 보니 자신은 이 방면에서 잠재력도 없고 천성적으로 감상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저는 이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제 인성은 감상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얼른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물론 감상 능력의 유무를 떠나, 감상 능력은 한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비록 그것이 주요 기준은 아니지만 일부 특수한 사역에서는 사람의 감상 능력이 반드시 요구되기도 한다. 감상 능력에 관한 교제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다. 창의력은 다음에 교제하도록 하자.

이렇게 교제하니 속으로 좀 분명해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한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려면 그가 하는 일의 효율과 효과를 보라’라고 모호하게만 얘기한다면, 너희도 이 도리만 얘기할 수 있을 뿐 자질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지는 잘 모를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좀더 구체적으로 교제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너희가 이 방면을 잘 알게 되면 자신의 자질을 정확히 판단하고 확실히 인식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너희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 바로 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자질이 좋은지, 보통인지, 부족한지, 아니면 아예 자질이 없는지, 어떤 그룹에 속하는지를 확실히 정한 다음 위치를 제대로 찾으면 그것은 너희가 착실히 행동하고 처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면 한편으로 자신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일과 관련하여, 자신의 교만한 성품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다음에 또 보자!

2023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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